금시조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몇 가지 문제를 거론하면서 답글을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애/취/유는 절대로 순전히 내세만의 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삼세양중인과설이 모순이라 하는 것은 너무 단선적인 지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여인에 대해서 일으킨 애착은 내일 모레 글피 ... 의 괴로움의 인이 됩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일 12연기에서 이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이야기 하려면 미얀마 사야도의 말대로 지구를 덮고도 남을 종이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괴로움의 종류를 모두 적자면 이 또한 지구를 덮고도 남을 종이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가장 강도가 높은 것으로 줄여서 말할 때 부처님께서는 생노병사라 말씀하셨고 이것을 우리는 四苦라고 합니다. 이것을 더 줄이면 절집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저 생사문제입니다. 갈애는 바로 이 생사를 존재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입니다. 12연기에서는 이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취유생노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취/유에 대한 현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괴로움에 대해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이 설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대도 왜 12연기에서 이런 것을 다 다루어야합니까? 꼭 연기를 가지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설명해야한다고 한다면 근-경-식-촉-수-애의 육지연기 등의 연기를 들 수 있겠고 대념처경(D22)의 멸성제의 관찰을 들고 싶습니다. 12연기만을 절대화해서 이 하나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다 담으려는 것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불교의 진리는 4성제이고 사성제는 연기를 바탕합니다. 그런 것이지 12연기만을 가지고 모든 교학을 다 담으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초기경의 도처(아마 수백 군데)에서 부처님은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ponobbhavikaa)으로 정의하고 계십니다. 갈애가 있는 한 반드시 다시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불교에서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디 갈애가 재생을 가져오는 것이기만 합니까? 지금의 갈애는 바로 다음 순간에도 내일에도 모레에도 ... 괴로움이라는 과보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갈애를 재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엉터리입니까? 이렇게 말해버리면 참으로 곤란하고 정말 부처님 가르침을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는 것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가장 중요한 요점만을 들어서 정의하신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갈애를 가져서 내일 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입니까? 아니면 갈애를 가져서 내생에 지옥에 태어나거나 아귀에 태어나거나 하면서 거듭거듭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입니까? 생사대사가 더 심각한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지요. 부처님이 갈애는 재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정의하신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중요한 술어를 정의하신 것은 깊고 심심미묘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초기경의 주석가들은 부처님이 하신 이러한 여러 정의들을 하나도 다치지 않고 모두 다 포섭해서 12연기를 설명해야합니다.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다른 각지에 대한 부처님의 정의가 해손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으로 지고지난한 문제죠. 그래서 붓다고사 스님도 청정도론에서 그 고충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세에서의 애취유와 그 과보를 강조하다보면 생 노사에 대한 부처님의 정의가 훼손되어버립니다. 생은 어떤 경우에도 한생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12연기의 생에 대한 저의 답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하여 정착된 것이 상좌부 불교의 삼세양중인과설입니다. 물론 현세 안에서 벌어지는 애취유와 그 과보의 역동적인 관계는 다른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12연기만이 이런 현세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다 담아내야한다는 생각이야 말로 너무 단선적인 생각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법우님은 <무명에 조건지워진 애 취 는 과+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런지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법우님이 초기불교 특히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인(hetu)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초기불교에서 특히 초기불교를 설명하는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 因(hetu)은 항상 괴로움 등의 원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탐진치 불탐부진불치의 여섯을 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무명과 행과 갈애와 취착과 유(업형성)는 생노사의 괴로움과 식명색육입촉수라는 과보를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이들은 결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탐진치불탐부진불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인이라 합니다. 그리고 식명생육입촉수와 생노사는 이러한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과보입니다.
물론 우리의 일상적인 어법으로는 갈애는 느낌에서 생긴 것이니 느낌은 원인이고 갈애는 결과가 아닌가할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hetu(인)-phala(vipaaka, 과, 이숙)의 관계로는 절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느낌과 갈애의 관계는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라고 청정도론은 설명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 원인의 조건이 아닙니다. 아마 금시조님은 이러한 술어의 정의에 혼란이 많으신듯합니다. 일단 술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시면 청정도론의 연기에 대한 깊은 설명이 많이 눈에 들어오실 겁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 삼세양중인과를 무작정 비판하는 것은 아주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취/유의 관계도 인과의 관계로만 절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어법으로보면 갈애가 원인이 되어 취라는 결과가 있고 취라는 원인 때문에 유라는 결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사유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청정도론에서는 애연취에서 애와 취의 관계를 함께 생긴 조건, 서로 지탱하는 조건, 의지하는 조건, 서로 관련된 조건, 등의 7가지 가능한 상호관계로 설명합니다. 법우님은 <무명에 조건지워진 애 취 는 과+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런지요?>라고 관심을 보이셨는데 이참에 꼭 청정도론을 읽어보시고 12지 각각의 상호관계에 대한 청정도론의 심도깊은 분석을 음미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런 것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청정도론 등 아비담마 논서를 읽어보면 과거에도 무명/행과 애/취/유는 있었고 현재에도 무명/행과 애/취/유는 있다고 당연히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원인을 말할 때는 무명과 행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무명과 행을 원인으로 말하고 현재에는 애/취/유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현재의 원인으로는 애/취/유를 들고 있다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로므로 삼세 어디에도 무명/행과 애/취/유는 원인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12연기에서는 과거의 원인으로 말할 때는 무명/행을 드러내어 밝히고 현재의 원인을 말할 때는 애/취/유를 강조하여 밝힌다는 것입니다. 12연기에 대한 삼세양중인과의 설명은 법우님이 생각하시듯 그렇게 단순무식?한 것이 아니라고 거듭 적고 싶습니다.
사성제에서 보면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법우님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들고 나올 것입니다. 어째서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뿐인가? 무명도 있고 업도 있고 취착도 있고 성냄도 있고 견해도 있고 ... 괴로움의 원인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가? 그런데도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단세포적인 발상이다라고요. 이렇게 되면 부처님은 참으로 편협한 분이 되고 맙니다. ...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애는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이고 무명이나 업 등은 잠재적인 원인이라고요. 그래서 주석서는 대표적으로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와 무명, 혹은 갈애와 사견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무명/행과 애/취/유는 원인이지 결과나 원인과 결과(과보, 이숙)의 혼합이 될 수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설명입니까?
삼세양중인과는 무명행애취유의 원인과 식명색육입촉수 생노사의 결과의 역동적인 흐름을 삼세로 연장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삼세만 이야기하면 윤회의 전과정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이처럼 다섯 가지 인과 다섯 가지 과(상좌부에서는 생노사우비고뇌를 식명색육입촉수의 흐름과 동일시하여 식명색육입촉의 다섯 가지를 과의 흐름으로 설명합니다)가 반복하면서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현재에서 미래로 이렇게 역동적 관계로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삼세양중인과는 절대로 법우님이 오해하는 그러한 밋밋하고 편협한 가르침이 아니라고 간곡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유식에서도 결국은 2세1중인과로 결국은 현재와 미래의 인과 과의 흐름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2세1중은 결국은 삼세양중과 같아져버립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법을 심도 깊게 사유한 모든 불교의 흐름은 연기를 인과의 흐름으로(그것이 삼세양중이든 이세일중이든)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은 생안에서 전개되는 엄청나게 다양한 인과의 흐름은 구지 12연기가 아니라도 다른 각지의 연기나 다른 가르침으로 충분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너무 12연기를 절대화하여 이 하나만으로 불교의 모든 것을 담으려하고 현실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버리려는 것도 저는 너무 무리한 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기불교에는 다양한 가르침이 체계화 되고 정형화 되어 있습니다. 초기경들에는 12연기보다는 오히려 5온의 가르침이 더 많이 나타나고 다른 법체계도 많이 나타납니다.
부디 청정도론 17장을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이것을 읽어보시고 더 깊은 질문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저도 더 깊이 사유해보면서 같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우님이 청정도론 17장의 연기의 해설을 읽고 대략이라도 감을 잡으시면 법우님은 삼세양중인과가 얼마나 <심심미묘하고 역동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는지 경탄을 하실 것입니다. 상좌부의 삼세양중인과설은 북방 설일체유부 등의 분위설을 바탕한 삼세양중인과설과는 다른 측면이 많습니다. 물론 12연기를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법우님의 자유입니다. 12연기에 대해서 금시조님 정도의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은 반드시 청정도론 17장을 읽으셔야한다고 봅니다. 상좌부의 정설을 두고 고뇌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너무 쉽게 삼세양중인과를 <어느 한가지 틀>이라고 예단하시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소위 말하는 공연기의 측면도 청정도론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청정도론은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의 측면에서 다양하고 심도깊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래 염념상속님의 질문에 올린 답글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느 누구보다도 12연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감히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합니다. 삼세양중인과는 너무 편협한 연기의 해석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치고 저는 청정도론의 12연기의 심오하고 역동적인 이해를 조금이라도 접했거나 이해한 사람을 아직 한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연기를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잘못 됬어. 소승이야. 편협해. 이런 단언적인 주장은 말은 쉽지만 왜 잘못되었는지 소승인지 편협한지 근거를 대지 못합니다. 설혹 한두 가지 근거를 댄다하더라도 그것은 즉시에 경전과 위배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이제 까지 제가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근거 없이 주장하는 절대주의나 교조주의를 가장 꺼립니다. 그러므로 상좌부의 논서나 주석서만으로 초기불교를 봐야한다는 주장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유랍시고 늘어놓는 근거 없고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더욱더 꺼리고 그런 주장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을 아주 경계합니다. 절대로 금시조님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니 절대 오해 마십시오. 저는 오히려 금시조님의 연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뻐하고 환희심을 냅니다. 단지 바라는 것은 이러한 지속적인 관심이 계시면 마음을 열고 유장한 마음으로 청정도론 17장의 연기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청정도론 17장은 아주 어렵습니다. 청정도론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에 속합니다. 그리고 연기 혹은 조건은 아비담마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고 아비담마의 모든 조직과 구조를 이해해야 제대로 접근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로므로 이를 이해하실려면 아비담마 길라잡이나 다른 아비담마 논서부터 접해야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그냥 한번 청정도론 17장을 읽어보시는 것만으로도 연기에 대한 상좌부의 정설을 대략적으로나마 짚어보실 수는 있습니다.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도대체 이게 삼세양중인과의 설명인가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삼세양중인과의 설명의 깊이가 이렇게 깊고 다양한가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디 몇 년이 걸리더라도 상좌부의 12연기설, 구체적으로 청정도론의 연기의 가르침을 꼭 알아보리라. 그래서 철저하게 비판해보리라는 마음으로 청정도론 17장을 읽어보실 것을 진심으로 권합니다.
그리고 12연기는 너무나도 광대한 주제입니다. 12연기를 가지고 사실 질문하고 답글을 단다는 자체가 무모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잘못이라거나 편협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사람은 증거자료를 대야하기 때문에 말이 엄청 길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길게 답하면 산만해져서 전체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러면 또 질문하는 사람은 그 가운데 하나를 잡아서 이상하다고 제기를 합니다. 그러면 답하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자료를 대야하기 때문에 또 말이 길어집니다. 그리고 질문자의 이해가 전혀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지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질문자의 질문자체를 센 어조로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질문자는 감정이 상합니다. 비판하려면 또 증거자료를 대야하고 논리를 세워야하고 그러면 또 말이 엄청 길어지게 됩니다. 또 이렇게 진행하다가 질문자가 나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라고 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이러한 말을 적는 저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절대로 법우님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글이란게 적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상대를 바판하는 쪽으로 가게 되니 참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법우님을 비판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답글을 적으면서 느끼는 것은, 혹시 이러한 답글이 금시조님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지하게 12연기를 사유하시려는데 자칫 제가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싶어서 말이 아주 조심스럽다는 것입니다. 법우님의 사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현대적인 사유를 하시는 틈틈이 전통적인 해석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추구해주십시오라고 다시 한 번 적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기에는 12연기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든 연기의 가르침을 12연기만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서 청법자에 따라서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연기를 설하셨음을 우리는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12연기는 삼세양중인과로 윤회의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한 것이고 주석서는 이것을 역동적으로 설명해내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맥에 따라서 6지 7지 8지 9지 10지 등등으로 다양하게 연기를 설하신 것은 또 그 문맥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12연기만으로 세상의 모든 연기를 다 설명해야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생각이라고 보입니다.
적다보니 말이 길어지고 산만하게 된 듯합니다.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질문에 답글을 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 읽어주시고 섭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
반갑습니다. 그리고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몇 가지 문제를 거론하면서 답글을 적어보겠습니다.
먼저 애/취/유는 절대로 순전히 내세만의 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도 상식적인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삼세양중인과설이 모순이라 하는 것은 너무 단선적인 지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여인에 대해서 일으킨 애착은 내일 모레 글피 ... 의 괴로움의 인이 됩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일 12연기에서 이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이야기 하려면 미얀마 사야도의 말대로 지구를 덮고도 남을 종이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괴로움의 종류를 모두 적자면 이 또한 지구를 덮고도 남을 종이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괴로움을 가장 강도가 높은 것으로 줄여서 말할 때 부처님께서는 생노병사라 말씀하셨고 이것을 우리는 四苦라고 합니다. 이것을 더 줄이면 절집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저 생사문제입니다. 갈애는 바로 이 생사를 존재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입니다. 12연기에서는 이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취유생노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취/유에 대한 현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괴로움에 대해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이 설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대도 왜 12연기에서 이런 것을 다 다루어야합니까? 꼭 연기를 가지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설명해야한다고 한다면 근-경-식-촉-수-애의 육지연기 등의 연기를 들 수 있겠고 대념처경(D22)의 멸성제의 관찰을 들고 싶습니다. 12연기만을 절대화해서 이 하나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다 담으려는 것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불교의 진리는 4성제이고 사성제는 연기를 바탕합니다. 그런 것이지 12연기만을 가지고 모든 교학을 다 담으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초기경의 도처(아마 수백 군데)에서 부처님은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것(ponobbhavikaa)으로 정의하고 계십니다. 갈애가 있는 한 반드시 다시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불교에서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디 갈애가 재생을 가져오는 것이기만 합니까? 지금의 갈애는 바로 다음 순간에도 내일에도 모레에도 ... 괴로움이라는 과보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갈애를 재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엉터리입니까? 이렇게 말해버리면 참으로 곤란하고 정말 부처님 가르침을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는 것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가장 중요한 요점만을 들어서 정의하신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갈애를 가져서 내일 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입니까? 아니면 갈애를 가져서 내생에 지옥에 태어나거나 아귀에 태어나거나 하면서 거듭거듭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것이 더 심각한 것입니까? 생사대사가 더 심각한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지요. 부처님이 갈애는 재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정의하신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중요한 술어를 정의하신 것은 깊고 심심미묘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초기경의 주석가들은 부처님이 하신 이러한 여러 정의들을 하나도 다치지 않고 모두 다 포섭해서 12연기를 설명해야합니다.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다른 각지에 대한 부처님의 정의가 해손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으로 지고지난한 문제죠. 그래서 붓다고사 스님도 청정도론에서 그 고충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세에서의 애취유와 그 과보를 강조하다보면 생 노사에 대한 부처님의 정의가 훼손되어버립니다. 생은 어떤 경우에도 한생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12연기의 생에 대한 저의 답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하여 정착된 것이 상좌부 불교의 삼세양중인과설입니다. 물론 현세 안에서 벌어지는 애취유와 그 과보의 역동적인 관계는 다른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12연기만이 이런 현세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다 담아내야한다는 생각이야 말로 너무 단선적인 생각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법우님은 <무명에 조건지워진 애 취 는 과+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런지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법우님이 초기불교 특히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인(hetu)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초기불교에서 특히 초기불교를 설명하는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 因(hetu)은 항상 괴로움 등의 원인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탐진치 불탐부진불치의 여섯을 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무명과 행과 갈애와 취착과 유(업형성)는 생노사의 괴로움과 식명색육입촉수라는 과보를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이들은 결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탐진치불탐부진불치와 같습니다. 그래서 인이라 합니다. 그리고 식명생육입촉수와 생노사는 이러한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과보입니다.
물론 우리의 일상적인 어법으로는 갈애는 느낌에서 생긴 것이니 느낌은 원인이고 갈애는 결과가 아닌가할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hetu(인)-phala(vipaaka, 과, 이숙)의 관계로는 절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느낌과 갈애의 관계는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이라고 청정도론은 설명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인 원인의 조건이 아닙니다. 아마 금시조님은 이러한 술어의 정의에 혼란이 많으신듯합니다. 일단 술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시면 청정도론의 연기에 대한 깊은 설명이 많이 눈에 들어오실 겁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 삼세양중인과를 무작정 비판하는 것은 아주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취/유의 관계도 인과의 관계로만 절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어법으로보면 갈애가 원인이 되어 취라는 결과가 있고 취라는 원인 때문에 유라는 결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사유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청정도론에서는 애연취에서 애와 취의 관계를 함께 생긴 조건, 서로 지탱하는 조건, 의지하는 조건, 서로 관련된 조건, 등의 7가지 가능한 상호관계로 설명합니다. 법우님은 <무명에 조건지워진 애 취 는 과+인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런지요?>라고 관심을 보이셨는데 이참에 꼭 청정도론을 읽어보시고 12지 각각의 상호관계에 대한 청정도론의 심도깊은 분석을 음미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런 것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청정도론 등 아비담마 논서를 읽어보면 과거에도 무명/행과 애/취/유는 있었고 현재에도 무명/행과 애/취/유는 있다고 당연히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원인을 말할 때는 무명과 행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무명과 행을 원인으로 말하고 현재에는 애/취/유가 두드러지기 때문에 현재의 원인으로는 애/취/유를 들고 있다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그로므로 삼세 어디에도 무명/행과 애/취/유는 원인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12연기에서는 과거의 원인으로 말할 때는 무명/행을 드러내어 밝히고 현재의 원인을 말할 때는 애/취/유를 강조하여 밝힌다는 것입니다. 12연기에 대한 삼세양중인과의 설명은 법우님이 생각하시듯 그렇게 단순무식?한 것이 아니라고 거듭 적고 싶습니다.
사성제에서 보면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법우님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들고 나올 것입니다. 어째서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뿐인가? 무명도 있고 업도 있고 취착도 있고 성냄도 있고 견해도 있고 ... 괴로움의 원인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가? 그런데도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단세포적인 발상이다라고요. 이렇게 되면 부처님은 참으로 편협한 분이 되고 맙니다. ...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애는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이고 무명이나 업 등은 잠재적인 원인이라고요. 그래서 주석서는 대표적으로 괴로움의 원인을 갈애와 무명, 혹은 갈애와 사견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무명/행과 애/취/유는 원인이지 결과나 원인과 결과(과보, 이숙)의 혼합이 될 수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설명입니까?
삼세양중인과는 무명행애취유의 원인과 식명색육입촉수 생노사의 결과의 역동적인 흐름을 삼세로 연장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삼세만 이야기하면 윤회의 전과정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이처럼 다섯 가지 인과 다섯 가지 과(상좌부에서는 생노사우비고뇌를 식명색육입촉수의 흐름과 동일시하여 식명색육입촉의 다섯 가지를 과의 흐름으로 설명합니다)가 반복하면서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현재에서 미래로 이렇게 역동적 관계로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삼세양중인과는 절대로 법우님이 오해하는 그러한 밋밋하고 편협한 가르침이 아니라고 간곡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유식에서도 결국은 2세1중인과로 결국은 현재와 미래의 인과 과의 흐름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2세1중은 결국은 삼세양중과 같아져버립니다. 과거가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법을 심도 깊게 사유한 모든 불교의 흐름은 연기를 인과의 흐름으로(그것이 삼세양중이든 이세일중이든)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은 생안에서 전개되는 엄청나게 다양한 인과의 흐름은 구지 12연기가 아니라도 다른 각지의 연기나 다른 가르침으로 충분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너무 12연기를 절대화하여 이 하나만으로 불교의 모든 것을 담으려하고 현실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버리려는 것도 저는 너무 무리한 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기불교에는 다양한 가르침이 체계화 되고 정형화 되어 있습니다. 초기경들에는 12연기보다는 오히려 5온의 가르침이 더 많이 나타나고 다른 법체계도 많이 나타납니다.
부디 청정도론 17장을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이것을 읽어보시고 더 깊은 질문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저도 더 깊이 사유해보면서 같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우님이 청정도론 17장의 연기의 해설을 읽고 대략이라도 감을 잡으시면 법우님은 삼세양중인과가 얼마나 <심심미묘하고 역동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는지 경탄을 하실 것입니다. 상좌부의 삼세양중인과설은 북방 설일체유부 등의 분위설을 바탕한 삼세양중인과설과는 다른 측면이 많습니다. 물론 12연기를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법우님의 자유입니다. 12연기에 대해서 금시조님 정도의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은 반드시 청정도론 17장을 읽으셔야한다고 봅니다. 상좌부의 정설을 두고 고뇌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너무 쉽게 삼세양중인과를 <어느 한가지 틀>이라고 예단하시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소위 말하는 공연기의 측면도 청정도론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청정도론은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의 측면에서 다양하고 심도깊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래 염념상속님의 질문에 올린 답글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어느 누구보다도 12연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감히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합니다. 삼세양중인과는 너무 편협한 연기의 해석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치고 저는 청정도론의 12연기의 심오하고 역동적인 이해를 조금이라도 접했거나 이해한 사람을 아직 한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연기를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잘못 됬어. 소승이야. 편협해. 이런 단언적인 주장은 말은 쉽지만 왜 잘못되었는지 소승인지 편협한지 근거를 대지 못합니다. 설혹 한두 가지 근거를 댄다하더라도 그것은 즉시에 경전과 위배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이제 까지 제가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근거 없이 주장하는 절대주의나 교조주의를 가장 꺼립니다. 그러므로 상좌부의 논서나 주석서만으로 초기불교를 봐야한다는 주장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유랍시고 늘어놓는 근거 없고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더욱더 꺼리고 그런 주장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을 아주 경계합니다. 절대로 금시조님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니 절대 오해 마십시오. 저는 오히려 금시조님의 연기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뻐하고 환희심을 냅니다. 단지 바라는 것은 이러한 지속적인 관심이 계시면 마음을 열고 유장한 마음으로 청정도론 17장의 연기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청정도론 17장은 아주 어렵습니다. 청정도론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에 속합니다. 그리고 연기 혹은 조건은 아비담마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고 아비담마의 모든 조직과 구조를 이해해야 제대로 접근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로므로 이를 이해하실려면 아비담마 길라잡이나 다른 아비담마 논서부터 접해야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그냥 한번 청정도론 17장을 읽어보시는 것만으로도 연기에 대한 상좌부의 정설을 대략적으로나마 짚어보실 수는 있습니다.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도대체 이게 삼세양중인과의 설명인가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삼세양중인과의 설명의 깊이가 이렇게 깊고 다양한가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디 몇 년이 걸리더라도 상좌부의 12연기설, 구체적으로 청정도론의 연기의 가르침을 꼭 알아보리라. 그래서 철저하게 비판해보리라는 마음으로 청정도론 17장을 읽어보실 것을 진심으로 권합니다.
그리고 12연기는 너무나도 광대한 주제입니다. 12연기를 가지고 사실 질문하고 답글을 단다는 자체가 무모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잘못이라거나 편협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 사람은 증거자료를 대야하기 때문에 말이 엄청 길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길게 답하면 산만해져서 전체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러면 또 질문하는 사람은 그 가운데 하나를 잡아서 이상하다고 제기를 합니다. 그러면 답하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충분한 증거자료를 대야하기 때문에 또 말이 길어집니다. 그리고 질문자의 이해가 전혀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지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질문자의 질문자체를 센 어조로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질문자는 감정이 상합니다. 비판하려면 또 증거자료를 대야하고 논리를 세워야하고 그러면 또 말이 엄청 길어지게 됩니다. 또 이렇게 진행하다가 질문자가 나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라고 해버리면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이러한 말을 적는 저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절대로 법우님이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글이란게 적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상대를 바판하는 쪽으로 가게 되니 참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법우님을 비판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답글을 적으면서 느끼는 것은, 혹시 이러한 답글이 금시조님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지하게 12연기를 사유하시려는데 자칫 제가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싶어서 말이 아주 조심스럽다는 것입니다. 법우님의 사유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현대적인 사유를 하시는 틈틈이 전통적인 해석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추구해주십시오라고 다시 한 번 적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기에는 12연기만이 있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든 연기의 가르침을 12연기만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서 청법자에 따라서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연기를 설하셨음을 우리는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12연기는 삼세양중인과로 윤회의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설한 것이고 주석서는 이것을 역동적으로 설명해내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맥에 따라서 6지 7지 8지 9지 10지 등등으로 다양하게 연기를 설하신 것은 또 그 문맥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12연기만으로 세상의 모든 연기를 다 설명해야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생각이라고 보입니다.
적다보니 말이 길어지고 산만하게 된 듯합니다.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질문에 답글을 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 읽어주시고 섭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
출처 : 초기불전연구원
글쓴이 : 초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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