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특상과 삼법인
후박나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삼특상과 삼법인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둘은 같은 의미가 아니며 만들어지는 의도도 전혀 다른 사상들입니다. 이제 삼법인과 삼특상에 대한 설명을 하면 서 먼저 [초기불전]의 설명을 인용하고 이어서 저의 설명을 붙여 가겠습니다.
---------------------
엄밀히 말하면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삼법인이라 불러야하고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는 삼특상(三特相)이라 구분해 불러야합니다. 삼특상은 “세 가지 특징”이란 의미이며 빠알리어 ti-lakkhana의 역어입니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 anicca), 고(苦. dukkha), 무아(無我. anatta)를 설하셨는데 특히 이는 대부분 ‘오온’의 무상.고.무아의 문맥에서 나타납니다. 이를 아비담마와 주석서에서는 삼특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삼법인은 설일체유부로 대표되는 북방불교에 나타나며 법인이라는 말은 산스끄리뜨 dharma-mudra의 번역어인데 삼법인은 설일체유부의 율장과 〈아비달마법온족론〉과 같은 설일체유부 논장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술어이며 이것이 반야부의 〈대지도론〉 등에서도 채용되었고 후대의 많은 중국 주석가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용어는 초기경이나 상좌부 아비담마나 주석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삼법인과 삼특상의 출처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먼저 삼특상은 위에서도 밝혔지만 오온으로 대표되는 유위법의 세 가지 보편적 특징[共相]을 밝힌 것입니다. 삼특상이 중요한 이유는 일체유위법이 무상이고 고고 무아임을 철견할 때 해탈열반은 실현된다고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하게 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위법의 무상을 꿰뚫어 실현한 해탈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고를 꿰뚫은 해탈을 무원(無願)해탈이라 하고, 무아를 꿰뚫은 해탈을 공해탈이라 부릅니다. 이런 무상해탈, 무원해탈, 공해탈은 많은 한역경전에도 나타납니다. 삼특상은 수행에 관한 강한 메시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위법(제행)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하는 삼특상에서는 당연히 무위법인 열반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북방의 설일체유부에서는 삼법인에 열반을 포함시키는데 여기서 법은 유위무위를 모두 포함한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제행개고’ 보다는 열반을 포함시켜 법의 도장(직인)을 만들어 부처님 가르침과 외도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했습니다. 삼법인은 삼특상이 전하고자 하는 수행에 관한 강한 메시지보다는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정리한 것이라 보입니다. ‘불교는 무상을 가르친다. 불교는 무아를 가르친다. 불교는 열반을 가르친다’는 의미로 법의 도장이라 이름 지었고, 이런 무상.무아.열반의 도장이 찍힌 것은 불교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장이란 직인인데 관공서에서 직인이 찍히지 않은 문서는 효능이 없지요.
[초기불전]
------------------------------------------------------
이처럼 삼특상과 삼법인은 출처가 다르고 사용하는 의도가 다른 사상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삽법인과 삼특상을 혼용하는 것은 불교를 어렵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근본이유가 됩니다. 이 두 용어의 차이점을 좀 더 명확히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삼특상(三特相)의 원형이 되고 있는 경전의 원형을 인용해 봅니다.
[세존] "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쌍윳따니까야에 등장하는 이 경전을 차례로 정리한것이 무상(無常. anicca), 고(苦. dukkha), 무아(無我. anatta)라고 아비담마에서 삼특상이란 이름으로 정리한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아래 인용한 법구경 277.278.279번 경문 처럼 이들이 이미 삼특상의 형태가 경전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Sabbe saṅkhārā anicc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277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Sabbe saṅkhārā dukkh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278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Sabbe dhammā anattā'ti yadā paññāya passati 279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그러므로 삼특상의 법문은 이미 붓다가 정리해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쌍윳따 니까야 전체를 살펴본 결과 무상, 고, 무아의 특징을 갖는 삼특상의 대상들은 5온과 6처와 18계와 6계로 나타납니다. 이것들은 모두 유위법으로 정리 되는데 이 유위법이 뜻하는 바를 잘 이해 하는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삼특상의 바른이해를 위해서는 이 3가지 문장이 절대로 순서가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번째 문장에서는 Sabbe saṅkhārā 대신에 Sabbe dhammā가 사용되었는데 이점을 지적하며 왈풀라 라훌라 스님은 일부 불교학자와 서양인들이 오해하는 무아사상에 대한 반박하고 있습니다.(붓다의 가르침) 삼특상의 순서를 잘 파악하지 못하면 2번째 문장 一切苦 Sabbe saṅkhārā dukkhā 를 오해하게 됩니다. 저는 많은 불교 학자들이 일체개고에 대해서 오해 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남방 아비담마의 견해를 따르는 각묵스님은 [고성제와 일체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학자들이나 남방학자들 가운데는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고성제와 일체개고의 고의 내용은 일체 유위법을 뜻한다. 그러므로 물질도 고라는 것이다. ...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질이 어떻게 고냐, 그리고 감각접촉이나 집중, 마음챙김, 정진, 자애, 연민 등등의 여러 심리현상들도 그 자체는 고와 관계없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어법에서 고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사실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통찰지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주석서인가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요, 물질이 고라고 통찰하는 것은 아라한의 경지나 가서야 가능한 것이라고 한 듯합니다. ]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틱낫한 스님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의 물질도 고라는 보는 것은 고를 실체시한 결과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는 불교 역사에 있어서 꾸준히 고를 실체시 해왔다고 비판하고 삼고론도 그러한 시도로 나온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는 삼고라 불리어지는 고고성(두카 두카따),괴고성(위빠린나마 두카따), 행고성(상카라 두카따)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가 없다.1) 이것은 후대에 주석가들이 고를 실체화 하여 만들어낸 사상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무상하니까 고이고 고이니까 무아라는 설명은 논리적이지 못한 논법이라고 말합니다.2) 그러므로 고를 무상과 무아의 사상과 같은 수준으로 놓는 것은 잘못이다 라고 반박합니다.3)
저는 틱낫한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설일체유부에서 왜 삼특상 대신에 삼법인으로 불교를 설명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삼특상 보다는 삽법인으로 불교를 설명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저는 불교사전에서 삼법인을 설명하면서 무상,무아,열반을 이야기 하고 더불어 고를 첨가해서 4법으로 부르기도 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 혼란을 틱낫한 스님 에게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삼특상을 설명하는 붓다의 의도와는 너무도 다른 불교의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틱낫한 스님이 고를 빼고 열반을 집어넣어 삼법으로 불교를 설명하자는 논리는 설일체유부등에서 나타난 시행착오라면 각묵스님이 “객관적인 물질도 고다” 라고 보는 것은 그런 시행착오를 내게 만들었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 각묵스님의 인용글에서 “삼법인은 설일체유부의 율장과 〈아비달마법온족론〉과 같은 설일체유부 논장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술어” 라고 했는데 틱낫한 스님은 이미 잡아함경에서 4번 언급 된다고 말합니다.4) 암튼 이렇게 삼특상을 개조해 순서를 무시하며 삼법인도 만들고 사법인도 만드는 까닭에 고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현재 한국불교도 그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체개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미 위에서 인용한 붓다와 라훌라의 대화를 통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5온과 6처와 18계와 6계를 하나하나 거론하며 무상하냐? 고냐? 라고 붓다가 질문할 때 모든 제자들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라훌라도 많은 경전에서 이렇게 또박또박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상한가, 고인가 하고 생각해볼 여지가 없는 상식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학자들이 왜 일체가 고인가를 놓고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대답이 즉시 나올까요?
결론은 5온과 6처와 18계와 6계라고 지칭되는 법들이 모두 나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일테면 시각이 무상한가 영원한가?, 형상이 영원한가 무상한가? 느낌이 영원한가 무상한가? 하는 질문들이 여지없이 나에 대한 지적이며 설명이라는 점입니다. 그 당시의 제자들은 이것이 이미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가 없이 “맞아요, 스승님 “하고 지체 없이 대답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무아에 대한 부분은 약간 둘러가지요. 무상하고, 고통이고 변화 하는 법에서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라고요. 이것은 결국 삼특상 법문을 하시는 목적이 무아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란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으로는 무아라는 사상이 제일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뜻하지요. 붓다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 말이라는 것을 뜻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붓다는 無常과, 苦라는 상식을 동원하여 무아라는 약간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을 이해하게끔 도와 줍니다. 무아를 이해하면 고통이 사라지니까요.
붓다의 질문을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면 무상한 시각이 고통인가 줄거움인가? 라는 물음은 “니 눈이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해서 볼 수 없게 되면 고통스럽겠는가? 즐겁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당연히 고통스럽겠지요. 이처럼 붓다의 질문은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이해하면 제행무상과 제행개고를 설명할 때 달나라에 있는 돌맹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상하므로 그것은 苦다 라는 식의 발상은 안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이 삼특상이 설해지는 자리는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리이면서 무상한 육신의 병듦과 죽음을 목도하는 간절한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병들어 죽어가는 제자를 병문안가서 붓다가 묻는 질문도 바로 이 삼특상에 대한 것입니다. 죽어가면서 자신의 정신과 육체에 집착하지 말고 무아임을 알아 고통을 벗어나라는 가르침이 이 삼특상 법문으로 설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삼특상을 설명할 때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고요.
결론적으로 일체개고는 삼특상이라는 과정안에서 나온 것이기에 삼특상을 설명하는 과정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苦라는 대답은 오온을 나라는 취착하는 중생의 입장에서 응답되어지는 상식적인 것입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라는 것은 나와 내가 애착하고 있는 객관의 사물이 무명중생에게 상식으로 나가오는 느낌입니다. 이것의 뿌리는 오온을 나라고 착각하여 집착하는 오취온고입니다. 이것이 붓다가 말하는 ”나는 언제나 고와 고의 소멸에 관해서만 법을 설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삼특상 중에서 고의 뜻이 불만족스러워 고를 빼고 열반을 집어 불교를 설명하는 의도는 그러므로 옳치 못한 것입니다. 삼법인dharma-mudra은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설일체유부에서 그 시대에 불교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불교를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로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어렵고 관념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삼법인과 삼특상의 차이점과 그 용어들이 말하려하는 각각의 의도를 잘 이해하는 것이 혼란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
(주)
1)the theory of the three kinds of suffering was such an attempt .it is not a teaching of the buddha.-19- 틱낫한스님의 책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2)the argument "impermanent ,therefore suffering , therefore nonself" is illogical. -21-틱낫한스님의 책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3)"To put suffering on the same level as impermanence and nonself is an error.-21- 틱낫한스님의 책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4)we find it nirvana. in several sutras the buddha taught that nirvana, the joy of the completely extinguishing our idears and concepts, rather than suffering, isone of the three dharma seals. this is stated four times in the samyukta agama of the northern transmission.
(저는 틱낫한스님이 4번 나온다고 하는 삼법인을 잡아함경(신수대장경 99번경)에서 열반적정 무상 무아라는 검색어로 찾아보았는데 찾을 수 없었음. 다만 아래와 같이 無常 苦 ․空․ 非我 로 이어지는 문장만 발견.)
001a14║如觀無常。苦․空․非我亦復如是。
001a25║如是正思惟無常。苦․空․非我亦復如是。
315b21║無常․苦․空․非我。作如是知․如是見。得見淸淨
'초기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다시 일체개고(一切皆苦) ? (0) | 2007.08.05 |
---|---|
[스크랩] 삼세양중인과 (0) | 2007.06.04 |
[스크랩] Re:삼세양중인과 (0) | 2007.02.27 |
[스크랩] Re:Re:Re:삼세양중인과 (0) | 2007.02.27 |
[스크랩] Re:Re:Re: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한다. (0) | 2007.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