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기불교

[스크랩] Re:Re:Re:삼세양중인과

금시조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의 소견을 적어보겠습니다. 적고나서 다시 보니 제 글이 무척 길어졌습니다. 이제 일주일쯤 뒤가 되면 몇 달간에 걸친 이 자발적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실상사로 돌아가기 때문에 요즘은 번역과 교정에 여유가 생겼고, 설날이 되다보니 자신도 돌이켜보고 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자판을 두들기다보니 그리 되었다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금시조님의 글을 바탕으로 특히 까페의 여러 법우님들께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에 대한 입장도 부담 없이 밝힐 수 있는 기회라서 그리하고 있습니다. 부담 없이 그냥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째, 구사론을 필두로 한 북방 아비달마 특히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 대해서는 저도 황당함을 느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는 항상 상좌부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달마를 구분하여 표기합니다. 상좌부는 ‘아비담마’(abhidhamma, 빠알리)로 북방 아비담은 ‘아비달마’(abhidhmarma, 산스끄리뜨)로 표기 합니다. 이 둘은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초기경들이지만 니까야와 아함을 구분하여 표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적해주셨듯이 허공을 허공택멸로 무위법에 넣는다는 것은 저로서도 너무 황당합니다. 물론 그 시대상황이나 자기 학파의 이론 전개상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겠지만 초기불교의 법수를 이렇게 해석한다는 것은 저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허공은 추상적 물질로 취급합니다. 추상적 물질은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라 물질의 성질 혹은 물질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두 물질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한정하는 요소(paricchedaka)가 있어야하기에 허공을 한정하는 물질이라고만 제한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적인 물질은 위빳사나의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아 버립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북방아비담마에서 새로 추가시킨 심불상응행법도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상응하지 않은 법이란 그자체가 개념일 뿐이지 법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심불상응행법으로 열 몇 개를 설정하고 있고 유식에서는 스물 몇 개로 늘어납니다. 이러한 태도는 법을 수행의 토대로 보지 않고 관념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부종륜론 술기에 의하면 비씨 1세기나 AD 1세기 경에 상좌부에서 분파했다는 설일체유부 등의 북방아비담마는 근본 상좌부 아비담마와는 아주 다른 법수를 전개하니 저도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제대로 된 연구가 있어야한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상좌부 아비담마의 입장에서는 구사론을 위시한 북방 아비달마에 대해 적지 않은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방 아비달마가 수행의 지침서 역할을 포기해버렸다는 것은 이미 법광이라는 대만 스님이 잘 지적했다고 봅니다. 법광(法光, Dhammajoti) 스님은 대만 스님인데 어릴 때 대만에서 출가하여 구사론 등 아비달마를 대가인 노스님으로부터 섭렵하고 스리랑카로 가서 빠알리어와 상좌부 불교를 오래 공부한 분입니다. 북방의 한역 입아비달마론?을 Entrance into Abhidharma(Supreme Doctrine)로 영역해낸 분입니다. 법광 스님도 이 책에서 몇 번 지적하기를 북방아비달마는 상좌부 아비담마와는 달리 후대로 오면서 아비달마가 수행의 지침서의 역할을 놓아버리고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 치달려버렸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저도 크게 수긍하였습니다. 법광 스님처럼 상좌부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달마를 관심있게 비교해서 관찰하신분이라면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상좌부 아비담마는 절대로 무리한 이론 전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모든 이론은 결국은 수행으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위빳사나 수행을 위한 철저하고 분명한 이론적 토대가 됩니다. 지금까지 상좌부 아비담마는 이 역할을 중시하고 이 역할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고 그들은 자부하고 있고 저도 인정합니다. 미얀마 가서 1년 살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아비담마가 위빳사나고 위빳사나가 아비담마라는 말입니다. 물론 위빳사나 센터에 가서 산 분은 이런말을 듣지 못했을 겁니다만 저는 전통 강원들이 수십군데가 되며 도시의 절반이 절이고 스님들로 구성된 사가잉이라는 곳에서 강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 사야도들로부터 이렇게 들었습니다. 아비담마와 주석서 문헌에서 위빳사나는 법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법을 이해하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의 일곱 단계(칠청정)의 세 번째 단계이고 연기를 이해하는 것은 네 번째 단계입니다. 모든 상좌부의 아비담마는 철저하게 수행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구사론을 위시한 북방아비달마에서도 수행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에게서 5위 75법은 세계를 설명하는 기본 구성요소이지 위빳사나 등의 수행의 토대나 대상으로 강조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는 북방 아비달마도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산스끄리뜨 원어로 살펴본다면 75법도 분명 수행에 대한 원리로 설명이 되고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구사론이 아비달마를 사성제를 설명하는 원리 안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한다고 보아집니다. 그래서 앞으로 시간이 되면 구사론 산스끄리뜨 원전을 꼭 한글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 아비담마는 최근에 특히 아비담마 길라잡이가 소개되고부터 이해되기 시작했고 우리에게는 구사론의 아비달마가 전부였습니다. 물론 구사론을 위시한 아비달마 연구도 전무에 가까웠습니다. 그냥 삼세실유법체항유니 하면서 일본 학자들이 사용한 말을 가져와서 비판만 했지 구체적으로 북방 아비달마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조금의 깊은 연구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최근에 권오민 교수님이 그나마 조금 연구하였지만 그분도 교수라는 소임을 보다보니 깊은 연구는 못한 듯하고 요즘은 아비달마가 그분의 주관심사는 아닌듯하고 더군다나 그분의 제일 큰 단점은 산스끄리뜨 원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비판이 되어버렸는데 ... 저는 한국 불교학자들 가운데서는 그래도 권오민 교수님을 아주 좋아하고 인정합니다. 성격도 저처럼 직선적이어서 학술발표하는 것이 아주 시원시원하였습니다. 북방불교와 아비달마를 전공하고 연구하는 분들 가운데 권 교수님만큼 열정과 문제의식을 가진 분은 드물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말이 길어지니 이만 줄입니다. 아무튼 북방 아비달마의 허공택멸이나 심불상응행법은 반드시 비판받아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이미 북방 아비달마가 수행과 거리가 멀어졌을 뿐 아니라 이를 비판적으로 승계하는 유식이나 화엄까지도 관념적 논의로 치달려버리게 되고 그래서 선종이 나와서 불입문자 교외별전을 외치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12연기에 대한 제대로 된 현대학자들의 해설이 없다는데 저도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저는 많은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특히 요즘은 번역에 관련된 책 말고는 일부러 다른 책은 읽지 않습니다. 번역에 다른 관점이나 견해가 들어갈까봐 조심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연기에 대해서 제대로 된 설명, 설명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사유를 한 사람은 드물다고 봅니다. 개론서나 개설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중심사상인 연기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어서 다룬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구사론을 봐도 성유식론을 봐도 연기에 관한한 청정도론을 따를 것이 없다는 게 저의 소견입니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연기를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자유지만 연기 특히 12연기를 너무 절대화하면 곤란하다고 거듭 적고 싶습니다. 오히려 연기는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를 통해서 이해해야하고 사성제야 말로 불교의 연기관을 순관 역관 혹은 유전문 환멸문으로 멋지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를 팔정도 수행으로 연결짓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잃어버리면 연기는 현실과는 아무 관계없는 절대적 진리가 되어버리는 오류에 빠진다고 봅니다. 불교의 관심은 철저히 현실(고)의 문제이고 그것의 원인(집)을 규명하고 해결(멸)하기 위해서 팔정도(도)를 닦는 고집멸도에 있습니다. 그런 것이지 12연기를 따로 때어내어서 절대화하는 것은 불교적 태도가 아니며 연기가 수행과는 상관없는 저 하늘의 진리가 되어버리고 고담준론이 되어버릴 위험이 많다고 보며, 법우님의 글에서도 자칫 이런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되기도 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법우님의 자유입니다.

수행이든 학문이든 세상 삶이든 결국은 관찰자가 어떤 태도로 관찰하느냐하는 것이 핵심일 것입니다. 어떤 견해 어떤 태도 어떤 입장에서 관찰하고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불교관 종교관 인생관 세계관 수행관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정견을 강조하셨습니다. 팔정도의 처음이 그래서 정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견을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여러 경에서 분명하게 정의하십니다. 초기불교를 생명으로 삼는 자는 이러한 부처님의 분명한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셋째, 식물의 윤회 문제입니다. 저는 사실 인도있을 때 산스끄리뜨 공부에 주력했고 석사과정에서는 베다를 전공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놓은 지 10년이 되어서 문제의식이 가물가물합니다. 초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태동 이전이거나 비슷한 시대의 인도 주류 문화와 사상을 아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고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 힘들었지만 그 판단은 옳았고 번역에도 많은 도임이 된다고 보입니다.

제대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베다와 우빠니샤드에 식물의 윤회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자이나교의 경전들은 그들의 언어인 아르다마가디로 된 앙가들을 자이나학을 전공한 은퇴한 노교수님과 한 3년 읽었는데 식물의 윤회를 말한 곳은 보지 못했던 듯합니다. 물론 제가 과문한 탓일 지도 모릅니다.

초기 자이나 성전인 아야랑가나 수야랑가나 자이나교의 집대성인 따뜨와르타 아디가마숫따 등에 의하면 자이나교는 식물도 생명으로 봅니다. 그들은 식물뿐만 아니라 지수화풍의 물질까지도 생명으로 간주합니다. 오히려 이런 그들의 접근은 서구 자이나학자들이 말하듯이 원시 물활론이나 정령숭배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자이나교는 아리야족들이 인도에 이주하기 이전의 오래된 인도 선주민의 사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게 서구 학자들의 말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이나 전적들은 원시물활론이나 정령사상을 말하는 것이지 식물의 윤회 등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수화풍 등의 물질들이나 식물이 윤회한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의 과문한 탓일 것입니다. 그들은 땅의 성분을 생명 있는 것으로 보기에 먼지 등의 위에나 맨땅에 앉으면 안된다고 하고, 물도 생명이기에 물을 그냥마시면 살생이기에(물에 있는 작은 생물을 먹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은 반드시 끓여 먹어야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물이 생명이 있다면 끓인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살생행윈데 그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타카에는 부처님께서 29번을 나무의 정령으로 윤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오도윤회를 거듭거듭 설하신 상윳타니까야가 더욱 신빙성이 있겠지만 다른 경전에도 이와 상치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런 교리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해야겠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법우님이 적으셨듯이 부처님은 나무의 <정령>으로 윤회한 것이지 나무로 윤회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나무의 정령은 신(목신, rukkha-deva)이거나 저급한 아수라 혹은 아귀 등이지 나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물에 깃든 정령도 초기경이나 주석서에는 드물지 않게 나타납니다. 베다의 이법의 신인 와루나(Varun*a)가 에픽문헌이나 뿌라나 문헌 등에는 물에 깃든 신으로 나타나고, 복수 즉 배나 간 등에 물이 차는 질병을 와루나에 씌인 것이라고 합니다. 불교문헌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물의 정령 혹은 와루나 등은 신이나 정령이지 물자체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식물의 윤회는 저는 초기경에서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아신다면 구체적으로 출처를 밝혀주시면(빠알리 키워드를 알려주시면 제가 찾아보기에 아주 좋습니다) 제 공부와 번역에도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넷째, <하지만 아비담마는 절대 뛰어넘을 수 없으니 무조건 아비담마를 이해한 후에 니까야나 아함은 보면된다가 아니라 초기경전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해석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것이 근본불교의 중흥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좋은 의견입니다. 저는 아비담마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제자라면 전통적인 가장 오래된 옛스님들의 태도는 반드시 섭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섭렵하지 못하고 새롭고 신선한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저야말로 인도 가기전에도 그랬고 인도에서 공부하면서 10년을 누구보다도 아비담마나 주석서를 통해서 초기경을 보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때는 뭐가 씌여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찔합니다. 물론 그런 말을 입에 침을 튀기며 해대면서도 그게 얼마나 공허한 말이었는지 그런 말을 하는 그때도 점점 절감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는 정말 창피하고 무모한 짓이었다고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옛날에 그랬듯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치고 제대로 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초기경을 150년 가까이 연구해온 서구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몇몇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방법론으로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았지만 바로 다른 경론적 증거나 일반론에 의해서 비판받아버립니다. 물론 지금도 옥스퍼드의 곰브리찌 교수님이나 브론코스트 교수님 같은 분은 시도하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도 무리가 많이 따르는 학설이고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물론 초기경을 보는 또다른 방법론으로는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고 영감은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경 한두 군데를 가지고 자기식의 이해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은 좀 있다가 다른 경을 보면 산산히 부서지고 맙니다. 제가 절감한 것이기도 하고 초기불교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초기불교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을 나름대로 훤히? 압니다. 지금 간혹 나도는 말들은 제가 전에 떠들고 다니던 말에서 조금도 더 나아기지 못하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이 어떤 모순을 지니고 있는지도 저는 나름대로 잘 압니다. 제가 그랬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유치한? 발상으로 어떻게 주석서와 아비담마의 고뇌를 따라갑니까. 저는 우습습니다. 새로운 해석은 주석서와 아비담마를 두루 섭렵해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적어도 미얀마 최고의 수행승이요 미얀마 불교사에서 최고의 (아비담마) 학승이셨던 레디 사야도 정도의 안목과 견해가 있어야, 지난세기 최고의 수행승이요 최고의 아비담마 스승이었던 마하시 사야도 정도가 되어야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레디 사야도는 100여년전에 빠라맛타디빠니 띠까라는 아비담맛타 상가하(아비담마 길라잡이)에 대한 새로운 주석서를 써서 800년간 아비담맛타 상가하의 부동의 주석서였던 위바위니 띠까의 잘못이나 애매한 부분을 325군데나 지적하면서 논의를 심화시켰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주옥같은 해설서를 많이 남긴 분입니다.

저는 맹목적적으로 아비담마를 따라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상하다 부분은 반드시 지적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은 제가 접하는 초기경들이 많아지면 질수록 오히려 더 우스운 지적이 되어서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깊이도 없고 체계성도 없고 고뇌도 없어 보이고 더군다나 도구 언어인 빠알리어 산스끄리뜨에 대한 충분한 지식도 없으며 불교를 해탈학으로 보려는 고뇌도 불교를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려는 고뇌도 많아 보이지 않는 현대 한국불교학자들의 안목으로 어떻게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저는 아비담마로 초기불교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를 정확하고 체계적이고 심도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아비담마를 채용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비담마를 모르면 절대로 초기경의 주석서를 제대로 이해 못합니다. 만일 초기 경들을 번역하려고 하는 사람이 이런 주석서문헌과 주석서의 근간이 되는 아비담마를 조금도 이해못한다면 이는 서양철학에 전혀 무지한 사람이 자기가 아는 영어 독해 실력만으로 헤겔이나 칸트의 저술을 한글로 옮기려는 무모함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초불의 대림스님과 저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의 양이 많아지고 접하는 초기경들의 양이 많아질수록 두려운 마음이 큽니다. 초불은 가능한한 개정판을 지속적으로 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기경을 번역하면 할수록 우리가 시간은 걸렸지만 먼저 청정도론과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번역하면서 고생한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인가하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질이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열악한 환경의 미얀마 사가잉에서의 2년 생활을 버텨내며 청정도론을 옮긴 대림 스님의 노고는 칭송받아 마땅하며 제게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고마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인도 10년 공부도 제게 주어진 행운이라 생각했지만 미얀마에서 대림스님이 공부해서 번역한 청정도론을 원문과 대조하며 일대일 대역을 하고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공부하고 옮긴 그 1년이 가장 행복했고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초기불교에 관한한 미국출신인 보디 스님(Bhikkhu Bodhi)을 존경합니다. 미국서 박사과정마치고(심리학 전공이었을 것임) 27살에(서양사람으로서는 완전히 동진출가입니다) 바로 스리랑카로 건너가서 출가하여 지금 70이 되시기까지 일관되고 지속적인 관심으로 초기경을 연구하고 수행하면서 멋진 번역을 해내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실제 스리랑카에서 뵙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아비담마와 주석서문헌도 광범하고 체계적으로 섭렵하신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문제의식을 가지고 초기경을 번역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번역한 상윳따 니까야의 영역은 우리법우님들께도 강력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분은 아비담맛타 상가하를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CMA)로 옮긴 분입니다. 스리랑카 BPS의 회장직을 오래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소책자 불교 교양서를 지속적으로 출간해온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CMA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아비담맛타 상가하를 아비담마 길라잡이로 옮기는 기본 매뉴얼이었으며 그분의 이해와 문제제기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분의 아비담마에 대한 관심과 태도는 미얀마적인 아비담마 접근태도와는 또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적어도 이러한 보디 스님 정도는 되어야 초기경에 대한 현대식의 참신한 해석과 번역을 하는 분이라고 저는 인정할 것입니다. 왜 1600년 전통을 가진 한국불교에는 이런 분이 없는지 안타깝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주석서와 아비담마를 알고 빠알리경을 번역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천지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전통적인 이해도 없으면서 어떻게 빠알리경을 번역합니까? 서양철학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는 자가 영어를 좀 안다고 해서 헤겔의 저술을 번역하고 뷔셀의 저서를 번역하면서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번역이라고 떠든다면 천하가 웃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중학생이 영어 단어 몇 천개 안다고 세익스피어 작품을 번역하려는 치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너무 과격한 말이 계속 나올 듯하여 그만하겠습니다.

다섯째, <불교텍스트가 성서와는 달리 세밀하게 해석이 되지 않고 방치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성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히브류어 라틴어 등 그들의 고대어에 능통하고 여러 가지 판본을 비교연구하고 각 나라의 고대 번역을 연구하고 하면서 그들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기경들도 세밀하게 해석되기 위해서는 도구언어인 빠알리어와 산스끄리뜨와 아르다마가디(자이나)어에 기본이상의 소양이 있어야 하고 한문 등에도 능통해야하고 영어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제대로 된 불교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최소한의 8가지 언어에 대한 기본 소양이 있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학자를 한국에서는 찾아보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소양을 갖추었다 싶은 사람은 가르치고, 조직을 유지하고, 여러 업무를 보고, 법회에 법문하러 다니고, 특히 스님들은 절 확장불사하고, 신도단련하고 하는 등의 일로 차분한 연구와 사유를 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절망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스님들이 이 일에 매진하면 좋은데 이러한 젊은 스님을 전문적이고 지속적으로 양성할 곳이 없습니다. 관심을 가진 스님들도 학부 때는 좀 한다 싶고 대학원 때는 좀하다가도 학위 받고나면 그만 신도단련과 법회와 절집일과 종단소임으로 빠져버립니다. 그게 재미도 있고 존경도 받고 물질적 풍요도 생기고 무엇보다도 힘들지 않으니까 그렇겠죠. 저만 봐도 그렇습니다. 발버둥에 가깝게 뿌리치지 않으면 번역에 몰두하기란 지금 절집안 구조로는 너무 어렵습니다. 오죽했으면 저 같은 사람은 이렇게 도망 나와서? 번역한다고 일종의 발악을 하고 있겠습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디 법우님은 초기불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초기불교에 대한 좋은 연구와 수행을 지속하실 것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하라고 하신다면 자신의 관심으로만 초기불교를 보지 말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견의 측면에서 불교를 접근하시고, 가능하다면, 물론 나름대로 수행을 하시고 계실 것입니다만 위빳사나 수행을 체험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방아비달마와 상좌부 아비담마는 이론전개와 수행에 대한 관심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북방아비달마에 대한 선입관으로 상좌부 주석서와 아비담마를 재단하지 마시라고 적고 싶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초기경은 빠알리 삼장과 한역 아함입니다. 한역 아함은 그것이 한문이기에 일차자료는 될 수 없고 게다가 빠알리 경전과 비교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오고가고있는 아함의 이해와 논의는 제가 볼 때는 한심한 수준이라 여겨집니다.(물론 저의 치기 어린 평가라고 해야겠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역 아함에는 주석서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인도스님들의 주석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중국스님들의 주석서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견해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는 주석서에 복주서까지 진지하고 심도 깊고 방대한 해설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니까야를 이해한 가장 오래된 권위이며 너무도 귀중한 보고입니다. 니까야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 문헌의 요약이면서 지침이 되는 것이 바로 청정도론입니다. 청정도론은 엄밀히 말하면 아비담마 문헌이 아니고 논장의 문헌이 아닙니다. 청정도론은 니까야에 대한 종합적 해설서입니다. 이것은 청정도론의 저자인 붓다고사 스님이 청정도론 서문에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청정도론과 주석서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과연 그 사람이 초기경에 대한 심도깊은 이해나 새로운 이해가 가능할까요? 아니라고 당연히 대답해야합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분명하게 이해해야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100년도 훨씬 전에 PTS의 설립자인 리즈데이빗 교수님 같은 분은 나름대로 이미 주석서에 이해가 깊었습니다. 그분의 디가니까야 영역본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오는 영역본들은 모두 주석서를 철저하게 참조하면서 옮기고 있습니다. 더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세밀한 해석은> 결코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는 수많은 노력을 통해서 원숙하게 익어가는 것일 것입니다. 리즈데이빗 교수님이나 노만 교수님이나 보디 스님이나 서양최초의 스님인 냐나띨로까 스님(청정도론의 최초독일번역자)이나 냐나 몰리 스님(맛지마 니까야와 청정도론을 영역한 분) 정도는 되어야 세밀한 해석과 심도깊은 해석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자면, 수행에 있어서도 이미 구사론에서 정등각자가 되기 위해서는 3아승지겁(아승지, 아상케야는 수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이라는 불가능한 시간을 말합니다. 이것은 수행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수행을 중시하여 유가행파로 불렸던 유식에서도 수행의 완성에는 3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합니다. 초기불교와 상좌부 주석서와 아비담마는 전혀 이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상고무아를 체득하여 염오이욕소멸해탈하여 탐진치가 해소되고 번뇌가 다하면 바로 아라한이 되고 깨달은 자가 된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유식에서는 아라한을 제8지인 부동지의 경지로 말하고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을 제9지에 배대합니다. 그리고 부동지에 이르는데 2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의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상좌부의 가르침대로 하면 금생에서 아라한이 되면 2아승지겁이 해결되어버립니다. 우리 학림의 스님들은 ‘와, 대승의 등각 묘각의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상좌부 불교를 해서 아라한이 되어버리면 2아승지겁이나 더 빠르군요.’라고 농담아닌 농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후대 대승교학에서는 성문종성이 되면 절대로 보살이 못된다고 해버리지만 유가사지론 등의 초기 유식에서는 이렇게 아라한의 경지도 보살 10지 가운데 8지와 9지에 해당하는 수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말이 엄청 길어졌습니다. 아무튼 기본 술어와 논지 전개 방식에 조금 익숙해지면 상좌부 아비담마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과학을 시대정신으로 하는 현대인이 그 어떤 체계보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만난 경험으로 보면 이공계출신들이 훨씬 아비담마에 대한 접근과 이해를 잘하더라는 것입니다. 문과 출신들 특히 철학과 출신들은 처음 접근할 때 상당한 혼란과 거부감을 가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한 1년 이상의 친숙과정이 있어야 합디다.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물론 모든 것은 법우님의 자유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신념체계나 교리체계나 수행체계가 전혀 다른 기독교의 신의 관점에서(아무리 그것이 비교종교적인 측면이라 하더라도) 불교의 열반이나 연기를 말하는 것은 너무나 큰 무리라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연기는 초기경의 어디를 봐도 현실을 말하는 것이지 연기를 절대화시켜버리면 그것은 정말로 위험한 발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어떻게 보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법우님의 문제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불교의 교학체계로 특히 초기불교는 초기불교의 교학체계로 봐야하며 그러한 교학체계는 아비담마와 주석서 체계로 우리에게 단절 없이 전해 내려옵니다. 부디 새로운 관심으로 청정도론과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를 먼저 섭렵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도 절대로 늦지 않을 것입니다.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다보니 이야기가 무척 길어졌습니다. 이제 일주일 후면 몇 달간에 걸친 이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실상사로 돌아가게 되어 번역과 교정에서 풀려나와서 생각나는 대로 한번 자판을 두들겨 봤습니다.

진지하고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훌륭한 분을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정해년에도 늘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이 법우님과 함께 하기를 기원하면서 두서없이 마무리합니다.

각묵 합장
출처 : 초기불전연구원
글쓴이 : 초불 원글보기
메모 :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