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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스크랩] Re:Re:Re: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한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법우님의 입장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고 보입니다. 제가 우정백수 교수님의 글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뭐라고 답글을 달기가 곤란합니다. 법우님의 글을 읽고 제가 느낀 점을 대충 적어보겠습니다.

연기의 정형구는 정형구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고도로 농축된 것이기에 연기의 정형구를 논리적인 순서로만 파악해야 한다는 우정백수 교수님의 주장도 충분히 일리는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기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은 되겠지만 이것이 연기에 대한 이해를 다 포함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무명 행 식 명색 등의 연기 각지 하나하나의 설명으로 들어가고 이들 각지의 상호관계 즉 연기관계를 설명하고 규명해 들어가면 결국은 시간의 문제로, 그것이 선후든 동시든,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 연기는 결국은 현실의 문제 즉 고의 문제, 윤회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통적인 해석에서 보듯이 이것을 무명 행 애 취 유의 因과 식 명색 육입 촉 수 생 노사의 果의 연속으로 본다면 이 경우의 인과의 관계가 동시라고 보는 것은 초기불교적인 시각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해야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배제된 현실의 발생구조란 있을 수 없다고 보며 이를 배제해버리면 결국은 이론만 남겠지요. 물론 그런 이론을 정형화 한 것이 연기의 정형구라고 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귀기울일만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기각지의 순서를 논리적인 순서로‘만’ 파악해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정백수 교수님의 글을 직접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제 식으로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소설이 되고 말 듯하네요.

정형구는 고도로 농축된 것이기에 주석서나 연기각지에 대해서 경에 간단하게 혹은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설명이 없이 경의 정형구를 심도깊이 혹은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는 것이 제가 지금까지 경을 번역하면서 절감한 것입니다. 경의 정형구가 간결하고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사설이나 이설이 끼어들 여지가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 경을 옮기면서 전통적 견해를 무시하고 자신이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관점을 가지고 옮긴다면 무섭고 두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숫따(경)이나 게송으로 압축해서 표현하고 이를 주석의 형태로 설명하는 것이 남북의 아비담마체계이고 대승불교 논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인도 육파철학 자이나교할 것 없이 인도 전통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전통속에서 그 학파의 상세한 주석서적인 설명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남북아비담마와 유식이 공히 시간 - 그것이 선후든 동시든 - 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정설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구사론에서는 찰나 연박 원속을 다른 견해들로 소개하고 있지 이들을 인정하지는 않는다고 봐야합니다. 만일 인정한다면 이것은 분위연기 즉 삼세양중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남북 아비담이 공히 삼세양중인과를 정설로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세양중인과 하면 일단 알레르기 반응부터 먼저 일으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가루다님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랬던 것 같고요. 그러면서 연기를 제대로 설명해보라면 얼버무리고 맙니다.

제가 보기에는 초기경에 나타나는 연기의 가르침을 모두 모아서 함께 사유한다면 결국은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왜? 우리의 준거가 될 수밖에 없는 초기경에 이미 연기각지로서의 식은 한생의 최초에 일어난 알음알이로 설명되고 있으므로 무명과 행을 그 최초의 알음알이가 있도록 한 그 이전의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은 다시 그 다음 생의 최초의 알음알이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명백한 자료가 있기 때문에 삼세양중인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모든 불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저도 연기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고뇌하는 사람이다. 초기경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볼수록 귀결점은 역시 삼세양중인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번에 상윳따 니까야의 연기상응에 나타나는 여러 경들을 번역하면서 더욱 절감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12지연기는 삼세인과로 봐야하고 무명과 행이 빠진 10지연기는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설하는 이세인과로 봐야하고 근-경-식-촉-수-애-취-유의 8지연기나 근경식촉수애까지의 6지연기 등은 현재에서의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의 연기구조를 밝힌 것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석서를 토대로 하면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상윳따 니까야 번역때 해제에서 근거를 가지고 밝혀보려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연기의 가르침은 심오한 가르침이라고 강조하고 계시고 붓다고사 스님도 청정도론에서 연기를 설명하면서 참으로 어렵다고 심정을 토로하고 있으며 청정도론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뇌를 한 전통적 흐름에 있는 대가 스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는 데는 그만한 깊은 관찰과 사유와 고뇌의 결론이 아니겠습니까?

남북아비담마에서 삼세양중인과로 설하는 것을 소승적 견해라고 한마디로 치부하는 것은 무지에서 생긴 용감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법우님께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식전변을 주창하는 유식에서도 왜 2세1중으로 현재와 미래의 관계로 연기를 설명하겠습니까? 그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시간의 문제를 배제해버린 연기의 가르침은 자칫 연기를 관념화하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시간은 남북 아비담마에서 고유성질을 가진 법으로는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고유성질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과현미가 없다거나 뒤죽박죽이라 하는 것은 참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꼭 연대기적인 시간이라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청정도론과 구사론이 공히 작용(kicca)설을 과현미를 구분하는 정설로 설명합니다. 즉 법들이 작용하는 순간이 현재요 이미 작용한 것을 과거라 하고 아직 작용하지 않은 것을 미래라 합니다. 이런 시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법은 현실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탁상위의 고담준론이 되고 말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법의 고유성질을 논할 때는 시간을 배제하고 그 성질을 설명하지만 현실적 전개과정을 설명할 때는 찰나생/찰나멸로 인식과정으로(아비담마 길라잡이 4장) 조건의 구조(24연, 6인-4연-5과로)로 시간의 흐름에서 역동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는 철저히 관념화 되어 부처님이 경계하신 형이상학적 논란, 탁상위의 고담준론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초기불교를 말하는 현대 한국의 몇몇 학자들은 이런 오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연기각지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무시하거나 무지한 채 서양의 철학적 사고방식으로 끼어 맞추려는 시도는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올려주신 상윳따 니까야에 나타난다는 경문의 출처를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경의 이름이나 키워드나 경의 번호나 나타나는 페이지를 올려주시면 제가 다시한번 찾아서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한역 잡아함을 상윳따 니까야로 표기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역경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한문 키워드 몇 개를 올려주시면 특히 한역경의 제목이 좋겠네요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올려주신 경은 초기경에서는 맛지마 니까야 제38번 경(짧은 갈애의 소멸경, M38)에 나타나는 것인듯합니다. 이 38번경은 아주 중요합니다. M38은 알음알이가 윤회의 주체라는 사띠비구를 부처님이 꾸짖으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알음알이가 윤회의 주체가 아니라 존재는 연기구조속에 있다고 설파하고 계십니다.

이 경에서 연기가 윤회를 설명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는 성스러운 제자는 ‘나’라는 어떤 실체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없다고 체득한다고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경에서 사띠라는 비구는 부처님께서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건너가고 윤회한다.’한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연기로 사띠 비구의 삿된 견해를 척파하고 계십니다. 본경은 알음알이라는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과현미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알음알이는 조건생조건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연기구조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처럼 연기는 윤회라는 현실문제를 설명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설하셨지 결코 논리적인 순서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입니다.

어찌 이 경뿐이겠습니까? 상윳따 니까야 연기상응에 정형구만 나열하고 있는 간단한 경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들이 전부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의 설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연기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경인 디가 니까야의 대인연경(D15)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순서로 보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겠지만 그것은 결코 연기를 설하신 부처님의 의도는 아니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올려주신 인용문이 한역경이라면 한역경은 축약번역이기 때문에 한역경만을 가지고 특히 한문의 함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너무 궁글리다 보면 문제가 적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접근 가능한 출처를 밝혀주시면 저도 공부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설령 경의 내용이 올려주신 것과 같다하더라도 이것을 과현미를 부정하는 말로는 도저히 볼 수가 없어 보입니다. 설혹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하나의 경만을 가지고 법우님이 <부처님의 연기법 자체가 시간개념을 부정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주장이라 생각됩니다. 특정 논지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 논지에 적합한 한두개의 경만을 인용한 뒤 그것이 초기경 전체에 두루한 보편적인 것이라고 해버린다면 그것은 큰 오류요 위험한 주장이라고 사료됩니다. 초기경에 관한 논문이나 글을 읽다보면 의외로 이런 오류에 빠지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상윳따 니까야의 연기상응(S12)의 여려 경들이나 연기를 심도 깊게 설명하고 있는 디가 니까야의 대인연경(D15)이나 맛지마 니까야의 M38번 경이나 다른 대부분의 경들에서 연기가 시간을 부정하는 이론으로 설명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큰 무리가 따릅니다.

저는 연기의 정형구를 논리적인 순서로 파악해야한다고 주장했다는 우정백수 교수님의 이론은 위에서 적은 이유 때문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순서가 갑자기 <부처님의 연기법 자체가 시간개념을 부정하는 이론>으로 둔갑해버리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큰 논리적인 비약입니다. 그리고 남북의 아비담마와 유식의 연기이론과 그외 북방 아비달마부파에서 존재한 이론들과도 어긋나는 이론이 되어버리니 참 고약해집니다. 연기가 시간개념을 부정하는 이론은 형이상학적 고담준론은 될지 모르나 현실에서의 고의 문제의 해결과는 아무 상관없어지고 만다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가까이에 맛지마 니까야 한글번역이 있다면 꼭 38번경을 정독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이 경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간답바의 셋이 결합하여 모태에 드는 것이 언급되고 모태에서 성장하고 태어나서 감각기능들이 무르익고 하는 것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출가하여 부처님의 법을 듣고 삼사화합-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의 연기구조를 철견해서 갈애를 소멸하여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를 소멸한다는 것으로 경은 끝맺고 있습니다. 이처럼 연기는 현실의 괴로움과 윤회를 소멸하는 가르침으로 설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 공간도 연기한 오온에서 연생한 현상이니까!!>라고 하셨는데 어느 분의 주장인지 모르겠습니다. 초기경이나 주석서에서 저는 전혀 이런 말은 본적이 없습니다. 물론 저의 과문한 탓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듯합니다.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법이라 생각되며 초기불교를 철저히 자의적으로 해석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연기에 대한 우리의 사유와 논의는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역사는 또 그렇게 전개되어 왔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법우님이 어떻게 연기를 이해하는가는 제가 더 이상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권위 있는 해석을 잘 알지도 못하고 반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불교교학사의 주류에 있는 초기-아비담마/아비달마-유식의 흐름은 대동소이하게 연기에 대한 이해가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후대의 특히 현대 학자들의 다분히 서양철학을 토대로 한 것처럼 보이는 자기식의 이해보다는 전통적인 이해를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초기경들을 종합해서 볼 때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는 후대의 어떤 이해보다 수승하고 분명하다고 판단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게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게 보면되겠지요. ...

대충 저의 두서없는 소견을 적어봤습니다. 적다보니 말이 길어졌네요. 연기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볼 구 있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각묵 합장

출처 : 초기불전연구원
글쓴이 : 초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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