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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관념적이지 않은 불교

관념적이지 않은 불교
 
 
일반적으로 불교는 종교라고 부르는것이 상식이지만 고타마 붓다라는 사람 그분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는 초기불교(5부니까야)를 탐구해보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것이 명백해집니다.초기불교를 근거로 불교가 관념이 아닌 이유 와 종교가 아닌 이유를 적어보겟습니다.  
 
국어사전과 영영사전에서 종교라는 낱말을 찾아보면 각각 이렇게 설명합니다.
 
 
Religion is belief in a god or gods and the activities that are connected with this belief, such as praying or worshipping in a building such as a church or temple.
 
그러나 불교는 신이나 절대자( god or gods)를 믿고 숭배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붓다는 모든 전통,성전의 권위,지식,스승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진리를 행하는 바른태도가 이니라고 설명합니다.
앙굿다라니까야에는 서영학자들이 [자유탐사헌장]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다음과 같은 설법이 잇습니다.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

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스스로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사상 이며(kusala) 교리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상 이며(anavajja) 그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가르침 이고(vinnuppasattha)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면  유익하고 평안해지고(hitaya) 행복하고 안락하게 된다(sukkhaya)는 것을 스스로 알았을 때,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그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도록 하라."

-AN.1.189-

 

붓다는 우리가 어떤 종교나사상을 받아 들이기 위한 객관적이고 기본적인 기준을 제시하였는데  이같은 과학적인 태도는 신이나 절대자를 숭배하는 다른 종교와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신이 인간을 만든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이라는 관념을 만든것이라고 봅니다.그것은 붓다 당시에 나타났던 인간이 생각해 낼수 있는 모든 견해를  62가지로 나누어 놓은것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며  그 사상을 다시 크게 2가지로 나눌수있는데  상견(영원주의)과 단견(허무주의,단멸주의) 입니다.

신이라는 관념은 흰두교의 절대 근원이라는 브라흐마와 같이 상견(영원주의)에 속 하는 관념입니다. 붓다는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관념을 갖게 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SN.2.

 

육근과 육경과 육식이 만날때 (접촉)인간은 어떠한 관념이든 만들어 낼수 있고 어떠한 견해든 가질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세계와 동알한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앙굿따라 니가야에서는

 

"...이 의식이 있는 육척단신의 몸에서 나는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명한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때의 세계(loka)라는 말이 괴로움(dhukka)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피하고 오르지 지금 당장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그는 끊임없이 제시하고 있으며 그래서 붓다는 경전의 수많은 곳에서 "나는 고와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라고 강조하고 잇습니다.

그것이 4성제와 8정도로 대표되는 그의 설법의 요점입니다.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후 처음으로 5 비구에게 설한 가르침(Dhammacakkapavattana Sutta) 에서 다음과 같이 4성제와 8정도를 설합니다.

 
..... 수행자들이여, 이제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니라.(苦聖諦)
태어남이 둑카요, 늙음이 둑카요, 병듦이 둑카요, 죽음이 둑카요, 근심, 슬픔, 괴로움, 걱정, 번뇌가 모두 둑카요,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둑카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 둑카요,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 둑카요, 짧게 말해서 다섯가지 집착한 모임(五蘊)이 둑카이니라.

수행자들이여, 이제 이것이 둑카를 일으키는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니라.(苦集聖諦)
갈애(渴愛)가 뒷받침이 되어서 새로운 탄생이 있게 하고, 유혹과 탐욕에 따라 이곳 저곳에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니, 이 갈애를 이름하여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이요(欲愛),이 갈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요(有愛), 이 갈망으로 다시 죽게 되는 것이다.(無有愛)

수행자들이여, 이제 이것이 둑카를 소멸하는 것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니라.(苦滅聖諦)
참으로 이것은 모든 갈애(갈망과 욕망)로부터 떠난 것이요, 소멸하여 벗어난 것이요, 집착을 버린 것으로서, 바르게 버리면 해탈에 이르고 생노병사의 윤회의 고통을 소멸하게 하는 것이다.

수행자들이여, 이제 이것이 둑카를 소멸하는 것으로 이끄는 도(道)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니라.(苦滅道聖諦)
그것은 참으로 바른 성스러운 여덟가지도(八正聖道)로서, 이름하여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냥(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정신집중(正定)이니라.....SN.5
 
거듭 강조하는 바이지만 붓다의 설법 어느 곳에서든  신이나 절대자( god or gods)를 믿고 숭배하는 것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이라는 관념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믿음을 강조하게 되게 마련인데 붓다는 그러한 믿음을 거부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는 제자들에게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은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이해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가르침을 듣고나서 그것을 믿어야한다.믿고나서 믿는대로 실천해야 한다.라는 이러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한다면 이러한 수행승은 옳치 못한 법을 설하는것이다.
...가르침을 듣고나서 그것을 이해해야한다,이해하고 나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라는 이러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한다면 이러한 수헹승은 바른 가르침을 설하는것이다. SN.4
 
붓다는 믿음의 길이 아닌 이해의 길을 고라는 지금 여기에서 발견되는 사실을 가지고 설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4성제와 8정도 입니다.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dubkham ariyasaccm)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dubkhasamudayam ariyasaccm)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dubkhannirodham ariyasaccm)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으로 이끄는 도(道)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 dubkhannirodhagamini patipada ariyasaccm)  라고 설명되는 사성제의 설명에서 
[둑카, 둑카의 발생, 둑카의 소멸, 둑카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이라고
오직 둑카(괴로움)를 기준으로 법이 설해지는것을 볼수 있을 뿐입니다.
 
불교는 다만 이 괴로움들을 해결하는 것이 삶의 이유이자 수행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열반이란, 해탈이란, 깨달음이란 다만 둑카의 소멸(dubkhannirodham ariyasaccm)이라고 말해 집니다.
그리고 둑카의 소멸즉,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란 (道諦:dubkhannirodhagamini patipada ariyasaccm)  8정도로 한결같이 설명됩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여기에 어디에 위 사전적인 해석처럼 신이라는 관념을 설정하여 종교라 부를 만한 단서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둑카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둑카에 대한 이해는 불교 전체에 대한 이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둑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붓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 수행자 고따마가 출가해서 수행자로 사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대들이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아 이와 같이 대답하면 터무니없이 나를 헐뜯지 않고 가르침을 법답게 설하고 법다운 가르침을 따르는 자로써 결코 비난과 경멸의 여지를 가져오지 않도록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설한 것이다.
세존께서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괴로움을 확실히 알기 위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괴로움을 확실히 알기 위한 것이다." SN.4
 
같은 경전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을 보는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본다" SN.5
 
그렇다면 붓다가 그렇게 강조하는 괴로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같은 경전에서 붓다는 둑카를 고고(苦苦),괴고(壞苦),  행고(行苦)의 3가지로 설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1.dukkha-duhkkha 고고(苦苦)란
생 ·노 ·병 ·사(生老病死)의 4고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所求不得苦)를 말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일반적인 모든 괴로움이지요.

2.viparinama-duhkka 괴고(壞苦)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뜻으로서 우리가 느끼는 모든 행복한 느낌과 수행할때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삼매(4선,9선)를 포함해서 변화하는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줄거움도 변화하므로 괴로움이라는 설명을 하기 위한것 이지요.

경전에서 아주 자주 볼수있는 "무상하기 때문에 둑카다, 그 무상하고 괴로운 것 속에 나와 나의것과 나의자아 라고 할만한 것이 있겠느냐?" 라고 묻는 붓다의 물음에서 둑카는 이 괴고(壞苦)를 말하고 있습니다.

3.samkhara-dukkha 행고(行苦)란
인간을 설명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다발을 나와 나의것과 나의자아라고 착각하여 집착(오취온)하는 괴로움입니다. 이것을 현대어로는 자아의식,에고이즘 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근본 의미입니다. 이것이 무명이지요.
그러므로 괴로움이 무엇인지 진실로 괴로움을 보는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본다고 붓다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괴로움을 보는 방법으로 붓다는 12 연기라는 자세한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12연기의 설명은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로 둑카의 발생(순관)을 보여주고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로는 둑카의 소멸(역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경전에서는 둑카의 소멸하기 위하여 8정도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이 누누히 이어지고 있고 8정도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면 역시 고통이 발생하는 길을 갈수 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결론적으로 괴로움이란 태어남이 둑카요, 늙음이 둑카요, 병듦이 둑카요, 죽음이 둑카요, 근심, 슬픔, 괴로움, 걱정, 번뇌가 모두 둑카요,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둑카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이 둑카요,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 둑카요, 간단히 말해서 다섯가지 집착한 모임(五蘊)이 둑카입니다.
또한 8정도의길이 아닌 삶 즉, 바른 견해,바른 사유,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 생계,바른 정진,바른 마음챙김,바른 삼매를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고를 발생시키는 길이요,바로 둑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고는 그 자체로 성스러운 진리가 됩니다.
 
우리는 붓다처럼 [고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 ]출가 수행자로 살고 부처님 제자로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너도 나도 깨달음, 깨달음 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가지고 진여,참나라는 동의어 반복으로 설명하는 관념적인 불교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붓다가 말하는 열반이란 [고를 확실히 아는것 ]이고 지금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도 바로 [탐진치를 확실히 아는것] 또는 [탐진치를 소멸시키는것]인 것입니다.
불교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 [고의소멸][탐진치의 소멸]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말은 신(GOD)과 같은 관념적인 언어 입니다.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 놓는것은 수행에 장애가 될 확률이 많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다만 열반은 모든 본뇌가  사라진 상태 즉,탐진치의 소멸이라고만 말씁하십니다.
깨달음이 뭐냐? 라고 물으면 깨달아야 안다는 말이 되돌아 옵니다. 진여 불성,여래장,참나,불생불멸한자리 라고 끊임없는 동어 반복이 되게 되어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관념적으로 불교를 접근하는 것이고 이러한 접근은 허무하고 동어 반복적인 말을 되풀이하게 됨으로서 언어는 깨달음에 이르는데 장애요,알음알이 일뿐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교와 선을 분리하고 높고 낮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편협한 사고를 하게 합니다.
 
붓다는 탐진치의 소멸이 그의 가르침의 전부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탐진치를 버리는 것이 현세에 유익하고,시간을 초월하고,와서 보라고 할만한 것이고,열반으로 이끌며,슬기로운자 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SN4
 
관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고를 알기 위해서" " 탐진치의소멸을 위해서" 수행한다면 어떻게 달라 질까요?
더 많이 적을수도 있지만 우선 5가지만 말해 보겟습니다.
 
1.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분명 해집니다.
 
2. 수행의 목적이 분명해 집니다.
 
3.수행의 방법이 확실해 집니다.
 
4. 항상 지금 여기에 살게 됩니다.
 
5. 관념론과 희론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듯 불교는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고와 탐진치를 어떻게 소멸할것인가?
더 나아 가서는 나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할것인가?하는 것을 문제 삼는 사상입니다.
 
이것을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어떠한 세계관을 가져야 하는가?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어떻게 일하며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노력을 할 것인가?
어떻게 알아차리고 살것인가?
어떻게 집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살아갈 것을 이야기하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그리고 이것은 매마른 하나의 이론도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며 그방식은  정신적, 물리적인 고통을 제거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이것이 관념적이지 않은 불교이며 붓다가 우리에게 그분의 연민으로 가르친 핵심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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