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에서는
이번 동안거기간에 금강경을 가지고 공부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로 11월 23일 첫 논강이 시작되었구요
앞으로 저는 그 토론자리에서 느꼈던 점들을 여기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이유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들을 금강경을 배우면서 풀어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차를 마시는 가운데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제1일(11월 23일)
왜 금강경인가 - 금강경과 초기불교
쟁점 1. 번역과 발제의 배경.
쟁점 2. 경의 제목: 벼락경인가 금강경인가
쟁점 3. 상이란 무엇인가
--------------------------------------------------------
이 날은 위와 같은 쟁점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금강경제목을 금강이라기 보다는 벼락경으로 보는것이 더 옳다"(각묵)
"마음,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아뜨만적인 견해로 받아들여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각묵)
"우리의 모든 고통은 어디서 시작 되었는가?
이것을 진리를 깨달은자,부처는 금강경에서 나(我想)라고 하는 실체를 인정하는데서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나가 있으므로 나의 것이 있고 나의 기쁨이 있고 나의 사랑이 있고 나의 죽음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도법)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는 나(영혼)는 끝없는 윤회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나는 단지 나라고 생각되는 我想일뿐이다
나란 없다. 無我다.
초기경전에서는 무아를
"행위는 있으나 행위하는 자는 없다"
라고 표현하고있다.(재연)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우리나라에서 조차 마음이라는 표현을 힌두교의 아뜨만적인 견해로 받아들여 윤회의 실체로 받아들이고 있다.
(각묵)
마음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불교가 아니고 실체를 인정하는 힌두교인이라고 각묵스님은 통열하게 비판합니다.
현실을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무아를 이해 한다는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모스님)
----------------------------
나의 느낌!!!
깨달음의 세계는 말해질 수 있는게 아니다
하여 무아나 空은 깨달은자의 소식쯤으로 덮어둘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실체란 단지 인연이 모여 있는 거짓 모임이다라는 진리도
아직은 그렇게 생각해 볼수도 있다는 생각(산야)일뿐입니다.
저에게 이번 토론은
말잔치에 불과할지도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합니다.
하여 크게 즐거운 자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허심탄회하게 말의 끝까지,생각의 끝까지 가보자는 욕심을 버릴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깨달음의 세계는 말해질 수 있는게 아니다."라는 풍토(선방)에서만 살다보니 논리의 비약이나 우격다짐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대화란 그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금강경을 통해서 다만 正見이란 이런것이다라는 것까지만
을 배울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나란 想에 갖힌 생각이겠지요)
그리고 말로 표현될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리이기에 답답함이 목까지 차 올라 올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답답함으로 온몸에 熱이 올라 올겨울이 춥지 않을거란 엉뚱한 기대를 하면서......
**이날 참가한 대중들은 쌍계사 강주 통광스님과 청화 조실스님 을
증명으로 모시고 진행되었습니다.
기타대중으로는
각묵(論主),현응(사회자),도법(실상사 주지)·재연(화림원),해강(화엄학림 학감)·해월(동화사 강주)·성륜(화림원)·현각(소쩍새 마을 원장),오성,지일(해인사 강사)·혜원(동국대 교수),일진(운문사강사)스님,이주향(수원대교수)신용묵(포항공대),그외 이름을 알수없는 많은분들이 전국각지에서 참석했습니다.1시간 늦은 10 시에 끝났지만 많은 분들이 그날밤에 돌아가시고 10 여분만이 실상사에서 주무시고 가셨습니다.
인원분포는
비구 약30명,비구니 약30명,신도 약40명입니다.
이번 동안거기간에 금강경을 가지고 공부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로 11월 23일 첫 논강이 시작되었구요
앞으로 저는 그 토론자리에서 느꼈던 점들을 여기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이유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들을 금강경을 배우면서 풀어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차를 마시는 가운데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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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11월 23일)
왜 금강경인가 - 금강경과 초기불교
쟁점 1. 번역과 발제의 배경.
쟁점 2. 경의 제목: 벼락경인가 금강경인가
쟁점 3. 상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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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위와 같은 쟁점를 가지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금강경제목을 금강이라기 보다는 벼락경으로 보는것이 더 옳다"(각묵)
"마음,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아뜨만적인 견해로 받아들여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가?" (각묵)
"우리의 모든 고통은 어디서 시작 되었는가?
이것을 진리를 깨달은자,부처는 금강경에서 나(我想)라고 하는 실체를 인정하는데서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나가 있으므로 나의 것이 있고 나의 기쁨이 있고 나의 사랑이 있고 나의 죽음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도법)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는 나(영혼)는 끝없는 윤회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나는 단지 나라고 생각되는 我想일뿐이다
나란 없다. 無我다.
초기경전에서는 무아를
"행위는 있으나 행위하는 자는 없다"
라고 표현하고있다.(재연)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우리나라에서 조차 마음이라는 표현을 힌두교의 아뜨만적인 견해로 받아들여 윤회의 실체로 받아들이고 있다.
(각묵)
마음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불교가 아니고 실체를 인정하는 힌두교인이라고 각묵스님은 통열하게 비판합니다.
현실을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무아를 이해 한다는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모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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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느낌!!!
깨달음의 세계는 말해질 수 있는게 아니다
하여 무아나 空은 깨달은자의 소식쯤으로 덮어둘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실체란 단지 인연이 모여 있는 거짓 모임이다라는 진리도
아직은 그렇게 생각해 볼수도 있다는 생각(산야)일뿐입니다.
저에게 이번 토론은
말잔치에 불과할지도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합니다.
하여 크게 즐거운 자리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허심탄회하게 말의 끝까지,생각의 끝까지 가보자는 욕심을 버릴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깨달음의 세계는 말해질 수 있는게 아니다."라는 풍토(선방)에서만 살다보니 논리의 비약이나 우격다짐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대화란 그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금강경을 통해서 다만 正見이란 이런것이다라는 것까지만
을 배울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나란 想에 갖힌 생각이겠지요)
그리고 말로 표현될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리이기에 답답함이 목까지 차 올라 올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답답함으로 온몸에 熱이 올라 올겨울이 춥지 않을거란 엉뚱한 기대를 하면서......
**이날 참가한 대중들은 쌍계사 강주 통광스님과 청화 조실스님 을
증명으로 모시고 진행되었습니다.
기타대중으로는
각묵(論主),현응(사회자),도법(실상사 주지)·재연(화림원),해강(화엄학림 학감)·해월(동화사 강주)·성륜(화림원)·현각(소쩍새 마을 원장),오성,지일(해인사 강사)·혜원(동국대 교수),일진(운문사강사)스님,이주향(수원대교수)신용묵(포항공대),그외 이름을 알수없는 많은분들이 전국각지에서 참석했습니다.1시간 늦은 10 시에 끝났지만 많은 분들이 그날밤에 돌아가시고 10 여분만이 실상사에서 주무시고 가셨습니다.
인원분포는
비구 약30명,비구니 약30명,신도 약40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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