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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범어

洪武正韻譯訓(1455) 신숙주 서문

 

 

洪武正韻譯訓序 번역

이 글은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의 서문입니다. 문단별로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을 제시하며, 어려운 용어는 괄호 안에 설명을 덧붙입니다.


[제1문단 — 성운학의 어려움과 심약(沈約) 운서의 한계]

聲韻之學。最爲難精。蓋四方風土不同。而氣亦從之。聲生於氣者也。故所謂四聲七音。隨方而異宜。自沈約著譜。雜以南音。有識病之。而歷代未有釐正之者。

성운(聲韻)의 학문은 가장 정밀하기 어렵다. 대개 사방의 풍토(風土)가 같지 않아 기(氣) 또한 그에 따르니, 소리는 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사성(四聲)ㆍ칠음(七音)이 지방에 따라 마땅함이 다르다. 심약(沈約, 중국 남조 시대의 학자로 사성 이론을 정립한 인물)이 운보(韻譜, 운서)를 지은 이래로 남방(南方)의 음이 뒤섞여 들어갔는데, 식견 있는 이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겼으나 역대로 이를 바로잡은 이가 없었다.


[제2문단 — 명 태조의 홍무정운 편찬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洪惟皇明太祖高皇帝。愍其乖舛失倫。命儒臣一以中原雅音。定爲洪武正韻。實是天下萬國所宗。我世宗莊憲大王。留意韻學。窮硏底蘊。創制訓民正音若干字。四方萬物之聲。無不可傳。吾東邦之士。始知四聲七音自無所不具。非特字韻而已也。

삼가 생각건대 명나라 태조 고황제(高皇帝, 주원장)께서 그 어긋나고 문란함을 근심하시어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오로지 중원(中原)의 아음(雅音, 표준음)으로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정하게 하셨으니, 실로 이는 천하 만국이 종주로 삼는 바이다. 우리 세종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는 운학(韻學)에 뜻을 두시어 그 깊은 이치를 궁구하시고, 훈민정음(訓民正音) 몇 글자를 창제하시니, 사방 만물의 소리를 전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 우리 동방의 선비들이 비로소 사성과 칠음이 저절로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다만 자운(字韻, 한자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제3문단 — 홍무정운 번역 사업의 시작과 참여자]

於是。以吾東國世事中華。而語音不通。必賴傳譯。首命譯洪武正韻。令今禮曹參議臣成三問,典農少尹臣曹變安,知金山郡事臣金曾,前行通禮門奉禮郞臣孫壽山及臣叔舟等。稽古證閱。首陽大君臣 諱,桂陽君臣璔。監掌出納。而悉親臨課定。叶以七音。調以四聲。諧之以淸濁。縱衡經緯。始正罔缺。

이에 우리 동국(東國)이 대대로 중화(中華)를 섬겨왔으나 말소리가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通譯)에 의지해야 했으므로, 먼저 《홍무정운》을 번역하도록 명하시어, 예조참의(禮曹參議) 신 성삼문(成三問), 전농소윤(典農少尹) 신 조변안(曹變安), 지금산군사(知金山郡事) 신 김증(金曾), 전행통례문봉례랑(前行通禮門奉禮郞) 신 손수산(孫壽山) 및 신 숙주(叔舟) 등으로 하여금 옛것을 상고하고 대조하여 검토하게 하시고, 수양대군(首陽大君, 훗날의 세조) 신 휘(諱, 이름을 직접 쓰지 않고 이렇게 표기함)와 계양군(桂陽君) 신 증(璔)이 출납(出納)을 감독하여 관장하되, 모두 친히 임하시어 과제를 정하셨다. 칠음(七音)에 맞추고 사성(四聲)으로 조율하며 청탁(淸濁)으로 어울리게 하여, 종(縱)과 횡(橫)ㆍ경(經)과 위(緯)가 비로소 바로잡혀 결함이 없게 되었다.


[제4문단 — 중국 학자들과의 교류 및 8년에 걸친 검증 작업]

然語音旣異。傳訛亦甚。乃命臣等。就正中國之先生學士。往來至于七八。所與質之者若干人。燕都爲萬國會同之地。而其往返道途之遠。所嘗與周旋講明者。又爲不少。以至殊方異域之使。釋老卒伍之微。莫不與之相接。以盡正俗異同之變。且天子之使至國。而儒者則又取正焉。凡謄十餘稿。辛勤反復。竟八載之久。而向之正罔缺者。似益無疑。

그러나 말소리가 이미 다르고 잘못 전해진 것 또한 심하였으므로, 이에 신들에게 명하시어 중국의 선생ㆍ학사(學士)들에게 나아가 질정(質正, 묻고 바로잡음)하게 하시니, 오고 간 것이 일고여덟 차례에 이르렀고 함께 질의한 자가 여러 사람이었다. 연도(燕都, 북경)는 만국이 모이는 곳이라, 오가는 길이 멀어 일찍이 함께 왕래하며 강론하고 밝힌 자가 또한 적지 않았다. 다른 지방과 이역(異域)의 사신으로부터 승려ㆍ도사(道士)ㆍ병졸의 미천한 자에 이르기까지 서로 접하지 않음이 없어,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의 다른 변화를 다 알아내고자 하였다. 또 천자(天子)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이르면 유자(儒者)들에게서도 바로잡음을 취하였다. 무릇 원고를 열 번 넘게 베껴 쓰며 힘들게 반복하기를 마침내 8년의 오랜 세월이 걸렸으니, 앞서 바로잡아 결함이 없다고 한 것이 더욱 의심할 바 없게 된 듯하였다.


[제5문단 — 문종의 참여와 재검토 작업]

文宗恭順大王。自在東邸。以聖輔聖。參定聲韻。及嗣寶位。命臣等及前判官臣魯參,今監察臣權引,副司直臣任元濬。重加讎校。夫洪武韻用韻倂析。悉就於正。而獨七音先後。不由其序。然不敢輕有變更。但因其舊。而分入字母於諸韻各字之首。用訓民正音。以代反切。其俗音及兩用之音。又不可以不知。則分注本字之下。若又有難通者。則略加注釋。以示其例。且以世宗所定四聲通攷。別附之頭面。復著凡例。爲之指南。

문종공순대왕(文宗恭順大王)께서는 동저(東邸, 세자궁)에 계실 때부터 성인(聖人)으로서 성인을 보좌하시어 성운(聲韻)을 정하는 일에 참여하셨고, 보위(寶位)를 이으신 뒤에는 신들과 전판관(前判官) 신 노삼(魯參), 지금의 감찰(監察) 신 권인(權引), 부사직(副司直) 신 임원준(任元濬)에게 명하시어 거듭 대조하고 교정하게 하셨다. 대저 홍무운(洪武韻)이 운(韻)을 합치고 나눈 것은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유독 칠음(七音)의 순서만은 그 차례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가볍게 변경하지 못하고 다만 그 옛것을 그대로 따르되, 자모(字母)를 여러 운(韻)의 각 글자 첫머리에 나누어 넣고 훈민정음을 써서 반절(反切)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 속음(俗音)과 두 가지로 쓰이는 음 또한 알지 않을 수 없으므로 본자(本字) 아래에 나누어 주석을 달았고, 또 통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간략히 주석을 덧붙여 그 용례를 보였다. 또 세종께서 정하신 《사성통고(四聲通攷)》를 별도로 책머리에 붙이고, 다시 범례(凡例)를 지어 지침으로 삼았다.


[제6문단 — 완성과 간행, 서문을 짓게 된 경위]

恭惟聖上卽位。亟命印頒。以廣其傳。以臣嘗受命於先王。命作序以識顚末。

삼가 생각건대 성상(聖上, 현재의 임금, 단종 혹은 세조)께서 즉위하시어 서둘러 인쇄하여 반포하도록 명하시어 그 전함을 넓히셨다. 신이 일찍이 선왕(先王)께 명을 받은 바 있다 하여, 서문을 지어 그 전말(顚末, 처음과 끝의 경위)을 기록하도록 명하셨다.


[제7문단 — 칠음ㆍ사성의 유래와 36자모 체계의 한계]

切惟音韻。衡有七音。縱有四聲。四聲肇於江左。七音起於西域。至于宋儒作譜。而經緯始合爲一。七音爲三十六字母。而舌上四母。唇輕次淸一母。世之不用已久。且先輩已有變之者。此不可強存而泥古也。

간절히 생각건대 음운(音韻)은 가로로는 칠음(七音)이 있고 세로로는 사성(四聲)이 있다. 사성은 강좌(江左, 중국 남조 지역)에서 비롯되었고 칠음은 서역(西域, 인도 등 서쪽 지역, 곧 범어 음운학을 가리킴)에서 일어났는데, 송(宋)나라 학자들이 운보(韻譜)를 지음에 이르러 경(經)과 위(緯)가 비로소 하나로 합쳐졌다. 칠음은 삼십육자모(三十六字母)가 되었으나, 설상(舌上) 네 자모(모)와 순경(脣輕) 차청(次淸) 한 자모는 세상에서 쓰이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또 선배 학자들 가운데 이미 이를 변경한 이도 있었으니, 이는 억지로 남겨두어 옛것에 얽매일 수 없는 것이다.


[제8문단 — 사성의 변화와 입성(入聲) 종성 문제에 대한 의문]

四聲爲平,上,去,入。而全濁之字平聲。近於次淸。上,去,入。近於全淸。世之所用如此。然亦不知其所以至此也。且有始有終。以成一字之音。理之必然而獨於入聲。世俗率不用終聲。甚無謂也。蒙古韻與黃公紹韻會。入聲亦不用終聲。何耶。如是者不一。此又可疑者也。

사성(四聲)은 평성(平聲)ㆍ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이 되는데, 전탁(全濁)의 글자는 평성일 때 차청(次淸)에 가깝고, 상성ㆍ거성ㆍ입성일 때는 전청(全淸)에 가까우니, 세상에서 쓰이는 바가 이와 같으나 또한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또 처음(초성)이 있고 끝(종성)이 있어야 한 글자의 소리를 이루는 것이 이치의 필연인데, 유독 입성에서만은 세속에서 대체로 종성(終聲)을 쓰지 않으니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다. 몽고운(蒙古韻)과 황공소(黃公紹)의 《운회(韻會)》도 입성에 종성을 쓰지 않으니 어찌된 까닭인가? 이와 같은 것이 한둘이 아니니, 이 또한 의심스러운 바이다.


[제9문단 — 8년간의 노력과 세종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찬양]

往復就正旣多。而竟未得一遇精通韻學者。以辨調諧紐攝之妙。特因其言語讀誦之餘。遡求淸濁開闔之源。而欲精夫所謂最難者。此所以辛勤歷久而僅得者也。臣等學淺識庸。曾不能鉤探至賾。顯揚聖謩。尙賴我世宗大王天縱之聖。高明博達。無所不至。悉究聲韻源委。而斟酌裁定之。使七音四聲。一經一緯。竟歸于正。吾東方千百載所未知者。可不浹旬而學。苟能沈潛反復。有得乎是。則聲韻之學。豈難精哉。

오가며 질정(質正)한 것이 이미 많았으나 끝내 운학(韻學)에 정통한 자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여, 조화(調和)와 뉴섭(紐攝, 성모와 운모가 결합하는 이치)의 묘리를 분변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말과 독송(讀誦)하는 나머지를 통해 청탁(淸濁)과 개합(開闔, 입을 벌리고 오므리는 개구도)의 근원을 거슬러 찾아, 이른바 가장 어렵다는 것을 정밀히 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힘들게 오랜 세월을 거쳐 겨우 얻게 된 까닭이다. 신들은 학문이 얕고 식견이 용렬하여 일찍이 지극히 깊은 이치를 탐구하여 성상의 도모(聖謩)를 드러내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우리 세종대왕께서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고명(高明)하고 박달(博達)하시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으심에 힘입어, 성운(聲韻)의 근원과 유래를 다 궁구하시고 이를 참작하여 재단하고 정하시니, 칠음과 사성이 하나의 경(經)과 하나의 위(緯)로서 마침내 바른 데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 동방이 천백 년 동안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되어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진실로 깊이 잠기어 반복해서 이를 터득할 수 있다면 성운의 학문이 어찌 정밀하기 어렵겠는가?


[제10문단 — 범음(梵音)과의 비교 및 훈민정음의 우수성 결론]

古人謂梵音行於中國。而吾夫子之經。不能過跋提河者。以字不以聲也。夫有聲乃有字。寧有無聲之字耶。今以訓民正音譯之。聲與韻諧。不待音和,類隔,正切,回切之繁且勞。而擧口得音。不差毫釐。亦何患乎風土之不同哉。我列聖製作之妙。盡美盡善。超出古今。而殿下繼述之懿。又有光於前烈矣。

옛사람이 이르기를, 범음(梵音, 산스크리트 발음)은 중국에 행해졌으나 우리 공자(孔子)의 경전은 발제하(跋提河, 인도의 강 이름으로, 불교가 전래된 지역을 가리킴)를 넘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는 문자(文字)로만 전하고 소리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저 소리가 있어야 비로소 문자가 있는 것이니, 어찌 소리 없는 문자가 있겠는가? 이제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이를 번역하니, 소리와 운(韻)이 서로 맞아떨어져 음화(音和)ㆍ유격(類隔)ㆍ정절(正切)ㆍ회절(回切) 같은 번거롭고 수고로운 방법을 기다릴 필요 없이, 입만 열면 음을 얻어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으니, 또한 어찌 풍토(風土)가 다름을 근심하겠는가! 우리 열성(列聖, 여러 대의 임금들)께서 창제하신 오묘함이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훌륭하여 고금(古今)을 뛰어넘으니, 전하(殿下)께서 이를 계승하여 이으신 아름다움 또한 앞선 공렬(功烈)에 빛을 더하셨습니다.


[말미 — 작성 일시 및 신숙주의 관직ㆍ서명]

景泰六年仲春旣望。輸忠協策靖難功臣。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經筵參贊官兼尙瑞尹,修文殿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兼判奉常寺事,知吏曹事,內直司樽院事臣申叔舟。 拜手稽首敬序。

경태(景泰) 6년(1455년) 중춘(仲春, 음력 2월) 기망(旣望, 열엿새) — 수충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겸 상서윤(尙瑞尹), 수문전직제학(修文殿直提學), 지제교(知製敎), 춘추관(春秋館)을 겸하고 봉상시사(奉常寺事)를 겸판(兼判)하며 이조사(吏曹事)를 지(知)하고 내직사준원사(內直司樽院事)인 신 신숙주(申叔舟)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공경히 서문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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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정운역훈서》는 앞서 살펴본 《동국정운》 서문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을 보여줍니다. 두 서문을 종합하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와 그 창제 과정이 훨씬 입체적으로 드러납니다.

1.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

① 중국과의 외교ㆍ통역 문제가 핵심 동기였습니다.

이 서문은 서두부터 "우리 동국이 대대로 중화를 섬겨왔으나 말소리가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에 의지해야 했다"는 점을 명시합니다. 이는 《동국정운》 서문이 강조한 "국내 한자음의 혼란을 바로잡는다"는 목적과는 결이 다른, 보다 실용적이고 외교적인 동기입니다. 즉 명나라의 표준 관찬 운서인 《홍무정운》을 정확히 번역하고 익혀야 사신 왕래와 외교 문서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기존의 반절법이나 한문 표기만으로는 중국의 실제 표준 발음을 정확히 익히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입니다.

 

② 기존 성운학 이론(반절, 36자모)만으로는 중국어 발음을 정밀하게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문은 칠음이 삼십육자모로 정리되긴 했으나 이미 설상음 네 자모나 순경음 차청 한 자모처럼 실제로 쓰이지 않게 된 범주가 있었고, 전탁 성모가 성조에 따라 다르게 실현되는 현상, 입성 종성이 제대로 표기되지 않는 문제 등 기존 이론 체계 자체가 이미 여러 모순과 공백을 안고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즉 중국 학자들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들이 있었고, 기존의 반절ㆍ음화ㆍ유격ㆍ정절ㆍ회절 같은 전통적 표음 방식은 본질적으로 번거롭고 부정확했습니다.

 

③ 소리를 문자로 직접, 정확하게 옮길 수 있는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서문 말미의 비유가 이 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범음(산스크리트 발음)이 중국에 전해졌지만 정작 유교 경전은 인도의 강(발제하)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문자로만 전하고 소리 자체를 정확히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리가 있어야 비로소 문자가 있는 것이니, 어찌 소리 없는 문자가 있겠는가"라는 구절은,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이야말로 소리 자체를 정확히 붙잡아 옮길 수 있는 문자 체계임을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2. 훈민정음을 어떻게 창제했는가 (과정)

① 세종이 직접 운학(韻學)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서문은 세종이 "운학에 뜻을 두어 그 깊은 이치를 궁구했다"고 밝히며, 훈민정음 창제 자체가 세종 개인의 학문적 탐구의 산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② 다수의 학자를 동원해 집단 작업으로 진행했습니다.

성삼문(成三問), 조변안(曹變安), 김증(金曾), 손수산(孫壽山), 신숙주 등이 참여했고, 수양대군과 계양군이 실무를 감독했습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및 그 응용 작업(홍무정운 번역)이 세종 단독이 아니라 집현전 학자 집단과 왕실 인사가 함께한 국가적 프로젝트였음을 보여줍니다.

③ 중국 현지 학자들과 직접 교류하며 검증했습니다.

특히 이 서문에서 두드러지는 대목은, 학자들이 북경을 일고여덟 차례 왕래하며 중국 학자들에게 직접 질정(質正)받았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문헌만 참고한 것이 아니라, 사신ㆍ승려ㆍ도사ㆍ병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실제 중국어 발음을 폭넓게 수집하여 정음(표준음)과 속음(민간음)의 차이까지 파악하려 했습니다. 이는 매우 실증적이고 현장 조사에 가까운 방법론입니다.

④ 오랜 시간과 반복적 수정을 거쳤습니다.

원고를 열 번 넘게 베껴 쓰며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작업했고, 세종 사후에는 문종이 이어받아 다시 대조ㆍ교정하는 작업을 거쳤습니다. 이는 훈민정음의 응용(중국음 표기)이 단기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매우 신중하고 장기적인 검증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줍니다.

⑤ 기존 체계의 틀은 존중하되, 표음 수단만 훈민정음으로 교체했습니다.

문종 대의 재검토 과정에서, 홍무운의 칠음 순서 등 기존 체계는 함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따르되, 각 운의 글자 첫머리에 자모를 배치하고 거기에 "훈민정음을 써서 반절을 대신하게 했다"는 대목이 핵심입니다. 즉 중국 성운학의 분류 체계(칠음, 사성, 36자모 등) 자체는 유지하면서, 그것을 표기하는 도구만 기존의 번거로운 반절법에서 훈민정음이라는 정밀하고 간편한 표음 문자로 바꾼 것입니다. 아울러 속음이나 두 가지로 읽히는 음은 별도로 주석을 달고, 세종이 정한 《사성통고》를 함께 붙여 학습의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3. 두 서문을 종합해서 본 창제 동기

《동국정운》 서문이 "조선 한자음 자체가 이미 혼란스러워졌으니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내적ㆍ규범적 동기를 강조했다면, 《홍무정운역훈》 서문은 "중국과의 소통을 위해 표준 중국어음을 정확히 옮겨 적을 도구가 필요했다"는 대외적ㆍ실용적 동기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서문의 마지막 결론—"입만 열면 음을 얻어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으니, 어찌 풍토가 다름을 근심하겠는가"—은, 훈민정음이 조선어뿐 아니라 어떤 언어의 소리든 정확히 옮겨 적을 수 있는 보편적 표음 도구로 설계되었다는 자부심을 보여줍니다. 즉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애초부터 "조선어 표기"라는 목적에 국한되지 않고, "천하 만물의 소리를 빠짐없이 전할 수 있는 문자"라는 훨씬 야심찬 목표 아래 이루어졌다고 이 서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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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홍무정운역훈》 편찬 과정에서 문종 대에 있었던 재검토 작업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바로 앞 문장과 함께 읽으면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앞 문장과의 연결

바로 앞에서 "홍무운이 운을 합치고 나눈 것은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유독 칠음의 선후(순서)만은 그 차례를 따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즉 《홍무정운》이라는 명나라 관찬 운서 자체에, 성모(자모)들을 배열하는 순서가 전통적인 칠음 순서(아음-설음-순음-치음-후음 등)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감히 가볍게 변경하지 못하고" — 왜 그대로 두었는가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신숙주 등 편찬자들은 이 순서상의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명 태조가 만든 관찬 표준 운서의 체제 자체를 함부로 뜯어고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홍무정운》은 "천하 만국이 종주로 삼는" 권위 있는 표준 문헌이었으므로, 그 틀(체제ㆍ배열)을 조선의 학자들이 임의로 바꾸는 것은 예(禮)에 어긋나는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문의 순서와 체제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자모를 여러 운의 각 글자 첫머리에 나누어 넣고" — 실제로 한 작업

체제는 그대로 두되, 실제로 한 작업은 이것입니다. 《홍무정운》에 실린 각 운(韻)마다, 그 운에 속하는 한자들을 성모(초성)별로 묶어 배열하고, 각 성모 그룹의 맨 앞에 그 성모를 표시하는 장치를 붙였습니다.

"훈민정음을 써서 반절을 대신하게 하였다" — 표기 수단의 교체

바로 이 대목이 앞서 여러 차례 다룬 문제의식과 직결됩니다. 전통적으로 한자의 음을 나타낼 때는 반절(反切, 두 글자를 이용해 앞 글자에서 초성을, 뒷 글자에서 나머지를 따와 조합하는 방식)을 썼는데, 이는 배우는 사람이 그 두 한자를 정확히 읽을 줄 알아야만 작동하는 간접적이고 번거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신숙주 등은 이 반절 표기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훈민정음 글자(ㄱㅋㄲ 등)를 직접 적어 넣어 성모의 음가를 표시했습니다.

종합하면

이 문장이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홍무정운》의 전체 편제(어떤 운에 어떤 글자가 속하는지, 성모가 어떤 순서로 나오는지)는 명나라의 권위 있는 원본을 존중하여 그대로 두었다. 다만 그 안에서 각 한자의 정확한 초성 발음을 알려주는 방식만은, 기존의 번거롭고 간접적인 반절법 대신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 글자를 직접 표기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즉 이는 "체제는 보수적으로 유지하되, 표음 기술(技術)만 혁신했다"는 뜻이며, 앞서 다룬 見溪群疑와 君快虯業의 관계—중국 성운학의 분류 틀은 유지하면서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 수단만 훈민정음으로 교체했다는 논리—가 이 홍무정운 번역 작업 전체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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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서문 전체에서 가장 응축된 결론부에 해당합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상세히 풀이하겠습니다.

원문 재제시 및 구절 단위 분석

① 古人謂梵音行於中國。而吾夫子之經。不能過跋提河者。以字不以聲也。

단어 분석:

  • 古人(고인) — 옛사람. 여기서는 이 비유를 처음 말한 선대 학자를 가리킴
  • 梵音(범음) — 산스크리트(범어)의 발음, 곧 불교 경전이 전해질 때 함께 들어온 인도어 음성 체계
  • 行於中國(행어중국) — 중국에 유행하다, 널리 퍼지다
  • 吾夫子之經(오부자지경) — "우리 공자님의 경전". 夫子는 공자(孔子)를 높여 부르는 말이며, 之經은 유교 경전을 가리킴
  • 不能過跋提河(불능과발제하) — 발제하(跋提河, 인도 북부를 흐르는 강. 부처가 열반한 곳 근처의 강으로 알려짐)를 넘지 못하다. 즉 유교 경전이 인도 땅까지는 전파되지 못했다는 뜻
  • 以字不以聲也(이자불이성야) — 문자(文字)로써 하였지 소리(聲)로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 옛사람이 이르기를, 범음(산스크리트 발음)은 중국에 널리 퍼졌으나, 우리 공자님의 경전은 발제하(跋提河)를 넘어가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문자로만 전했을 뿐 소리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 대비되는 것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방식"과 "유교가 인도로 전해지지 못한 방식"입니다. 불교는 범어의 발음 자체(다라니, 진언 등 음역 방식)까지 함께 전해져 중국인들이 그 소리를 직접 흉내내며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반면, 유교 경전은 오로지 한자라는 표의문자(뜻을 담은 문자)로만 기록되어 있어서, 그 문자를 모르는 다른 언어권(인도)에는 소리가 전달되지 않고 그대로 전파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② 夫有聲乃有字。寧有無聲之字耶。

단어 분석:

  • 夫(부) — 문장 첫머리에 쓰여 "대저", "무릇"이라는 뜻의 발어사(發語詞)
  • 有聲乃有字(유성내유자) — 소리가 있어야 이에 문자가 있다. 乃는 "이에", "비로소"라는 뜻의 접속사
  • 寧有(녕유) — 어찌 ~이 있겠는가 (반어법)
  • 無聲之字(무성지자) — 소리 없는 문자
  • 耶(야) — 의문ㆍ반문의 어조사

번역: 대저 소리가 있어야 비로소 문자가 있는 것이니, 어찌 소리 없는 문자가 있겠는가?

해설: 앞 문장의 논리를 뒤집어 원칙론으로 제시하는 대목입니다. "문자란 본래 소리를 담는 그릇이어야 하는데, 한자는 소리를 직접 담지 못하고 뜻만 전달하는 문자였다"는 비판을 함축하며, 이는 곧 뒤에 나올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부각하기 위한 논리적 포석입니다.


③ 今以訓民正音譯之。聲與韻諧。不待音和,類隔,正切,回切之繁且勞。而擧口得音。不差毫釐。

단어 분석:

  • 今(금) — 이제, 지금
  • 以訓民正音譯之(이훈민정음역지) — 훈민정음으로써 이를(중국음을) 번역하다
  • 聲與韻諧(성여운해) — 소리와 운(성모와 운모)이 서로 조화롭게 들어맞다. 諧는 "화합하다, 잘 맞다"
  • 不待(부대) — 기다릴 필요가 없다, ~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 音和(음화)ㆍ類隔(유격)ㆍ正切(정절)ㆍ回切(회절) — 모두 전통 반절법의 세부 유형들. 두 한자를 조합해 음을 나타내는 방식인데, 성모와 운모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경우(음화), 성모의 종류가 어긋나 예외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경우(유격) 등 여러 복잡한 규칙이 있었음
  • 繁且勞(번차로) — 번거롭고도 수고롭다
  • 擧口得音(거구득음) — 입을 들면(열면) 곧바로 음을 얻는다. 즉 발음해보는 즉시 정확한 소리를 알 수 있다는 뜻
  • 不差毫釐(불차호리) — 털끝(毫)과 낟알(釐)만큼도 어긋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오차조차 없다는 관용적 표현

번역: 이제 훈민정음으로써 이를 번역하니, 소리와 운이 서로 조화롭게 맞아떨어져, 음화ㆍ유격ㆍ정절ㆍ회절 같은 번거롭고 수고로운 방법에 의지할 필요 없이, 입을 열기만 하면 곧바로 음을 얻어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는다.

해설: 이 문장이 이 서문 전체의 결론이자 핵심 주장입니다. 전통적인 반절법은 여러 세부 유형(음화ㆍ유격ㆍ정절ㆍ회절)으로 나뉘어 있을 만큼 복잡하고 예외가 많아, 배우는 사람이 그 규칙 자체를 별도로 익혀야 하는 간접적 방식이었습니다. 반면 훈민정음은 소리 하나하나를 표음문자로 직접 표기하므로, 별도의 규칙을 배울 필요 없이 그 글자를 그대로 발음하기만 하면 정확한 음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음화(音和) :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유격(類隔) : 소리의 부류를 구별하는 관계,정절(正切) : 올바른 반절법,회절(回切) : 순환적·상호참조적인 반절법

 


④ 亦何患乎風土之不同哉。

단어 분석:

  • 亦(역) — 또한
  • 何患乎(하환호) — 어찌 ~을 근심하겠는가 (반어법)
  • 風土之不同(풍토지부동) — 풍토(지역의 자연환경과 언어 습관)가 서로 다름
  • 哉(재) — 감탄ㆍ반문의 어조사

번역: 또한 어찌 풍토가 서로 다름을 근심하겠는가?

해설: 서문 첫머리에서 "사방의 풍토가 달라 소리도 다르다"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을 여기서 되받아 해소하는 구조입니다. 지역마다 말소리가 다른 것이 성운학의 근본적 어려움이었는데, 훈민정음이라는 정밀한 표음 도구가 있으면 그런 지역 차이조차 문제되지 않는다는 결론입니다.


⑤ 我列聖製作之妙。盡美盡善。超出古今。而殿下繼述之懿。又有光於前烈矣。

단어 분석:

  • 我列聖(아열성) — 우리의 여러 대 임금들(列聖). 여기서는 특히 세종과 문종을 가리킴
  • 製作之妙(제작지묘) — 창제하신 오묘함, 만드신 묘리
  • 盡美盡善(진미진선) — 아름다움을 다하고 선함을 다하다. 극도로 완벽하다는 관용적 표현(원래 『논어』에서 순임금의 음악을 평한 "盡善盡美"에서 유래)
  • 超出古今(초출고금) — 고금(예로부터 지금까지)을 뛰어넘다
  • 殿下(전하) — 이 서문을 바치는 대상인 현재의 임금(세조 혹은 단종)
  • 繼述之懿(계술지의) — 이어받아 잇는 아름다움. 繼述은 선왕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뜻, 懿는 "아름답다, 훌륭하다"
  • 又有光於前烈(우유광어전열) — 또한 앞선 공렬(前烈, 선대의 공적)에 빛을 더하다

번역: 우리 여러 대 임금들께서 창제하신 오묘함이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훌륭하여 고금을 뛰어넘으니, 전하께서 이를 이어받아 계승하신 아름다움 또한 앞선 공적에 빛을 더하셨습니다.

해설: 서문을 마무리하는 상투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列聖"(세종ㆍ문종)의 창제 업적을 최고로 찬양한 뒤, 현재 재위 중인 "殿下"가 그 사업을 이어받아 완성ㆍ반포한 것 역시 그에 못지않은 공로임을 강조하여, 신하로서 왕실 3대에 걸친 사업 전체에 경의를 표하는 관용적 결어입니다.


전체 흐름 요약

이 단락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전개됩니다.

  1. 불교(범음)는 소리까지 전해져 중국에 널리 퍼졌지만, 유교(한자)는 소리 없이 문자만 전해져 인도로 넘어가지 못했다 → 문자는 소리를 담아야 진정한 문자다
  2. 그런데 훈민정음이야말로 소리를 그대로, 정확하게, 별다른 규칙 학습 없이 담아낼 수 있는 문자다
  3. 그러니 지역마다 말소리가 다른 문제(성운학의 근본 난제)도 이제 훈민정음만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4. 이 모든 것이 세종ㆍ문종 등 열성(列聖)의 오묘한 창작이며, 현재의 전하께서 이를 계승하여 완성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