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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불자회

3월 21일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

2024년  3월 14일 공부하고 오늘 3월 21일 목요일 오후 9시, '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 '을 공부합니다.  이 경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법인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설명하는 불교수행의 핵심을 설명하는 경입니다. 한 번으로 끝내기에는 긴경이라서 3월 14, 3월 21일, 4월4일 세번에 걸쳐 이 경을 공부하겠습니다.(3월 28일 목요일은 자유주제 토론날입니다.) 경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중요하기에 파란 글씨로된 주석까지 옮겨왔습니다.  온라인불자회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백장암독송집> 입니다. 이 책이 필요하신 분은 백장암 종무소(063-636-3598)에 연락하시면 받아볼수 있습니다. 

오늘도 다같이 부처님께 예경하고 삼귀의를 하겠습니다.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붓당 사라남 가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3번)

담망 사라남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3번) 

상강 사라남 가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승가에 귀의합니다. (3번)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  Anāpānasati Sutta

                                                                      

                                                                    

 

서언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유명한 여러 장로 제자들과 함께 즉 사리뿟따 존자, 마하목갈라나 존자,

마하깟사빠 존자, 마하깟짜야나 존자, 마하꼿티따 존자, 마하깝삐나 존자, 마하쭌다존자,

아누룻다 존자, 레와따존자, 아난다 존자와 그 외 잘 알려진 장로 제자들과 함께

사왓티에 있는 동쪽 원림[東園林]의 녹자모 강당에 머무셨다.

 

2.   그 무렵 장로 비구들은 신참 비구들을 경책하고 훈계하였다.(*1)
어떤 장로 비구들은 열 명의 신참 비구들을 경책하고 훈계하였고

어떤 장로 비구들은 스무 명 … 서른 명 … 마흔 명의 비구들을 경책하고 훈계하였다.
그 신참 비구들은 장로 비구들의 경책과 훈계를 받아서 차차 고귀한 특별한 경지를 알게 되었다.(*2)

 

3.   그 무렵 세존께서는 보름 포살일의 보름밤에 자자(自恣)를 하기 위해서 비구 승가에 둘러싸여서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비구 승가를 둘러보시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4.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도닦음 때문에 흡족하다. 비구들이여, 나의 마음은 이런 도닦음 때문에 흡족하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얻지 못한 것을(*3) 얻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더 정진하라.나는 여기 사왓티에서 네 번째 달의 보름인 꼬무디(*3-1)를 맞을 것이다."

 

5.   지방에 거주하는 비구들은 세존께서 그곳 사왓티에서 네 번째 달의 보름인 꼬무디를 맞을 것이라는 것을 들었다.
지방에 거주하는 그 비구들은 세존을 뵈러 사왓티로 향했다.

 

6.   그러자 그 장로 비구들은 더욱더 신참 비구들을 경책하고 훈계하였다. 어떤 장로 비구들은 열 명의 신참 비구들을 경책하고 훈계하였고 어떤 장로 비구들은 스무 명 … 서른 명 … 마흔 명의 비구들을 경책하고 훈계하였다.그들 신참 비구들은 장로 비구들의 경책과 훈계를 받아서 차차 고귀하고 특별한 경지(*4)를 알게 되었다.

 

7.   그 무렵 세존께서는 네 번째 달의 꼬무디 보름 포살일에 보름달 아래 비구 승가에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비구 승가를 둘러보시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8.   "비구들이여, 이 회중은 잡담을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 회중은 떠들지 않는다. 이것은 순수하고 완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회중은 공양받아 마땅하고, 환대받아 마땅하며,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니 이 비구 승가는 그러하고 이 회중은 그러하다.


비구들이여 이 회중에게는 적게 보시해도 큰 [결실을] 가져오고 많이 보시하면 더 큰 [결실을] 가져오나니

이 비구 승가는 그러하고 이 회중은 그러하다.


비구들이여, 이 회중은 세상에서 친견하기 어렵나니 이 비구 승가는 그러하고 이 회중은 그러하다.
비구들이여, 이 회중을 친견하기 위해 어깨에 [먹을거리를 준비한] 자루를 메고(*5)

먼 유순의 거리라도 마땅히 찾아 가야 하나니 이 비구 승가는 그러하고 이 회중은 그러하다."

 

9.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아라한들이 있다그들은 번뇌가 다했고 성스러운 삶을 살았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존재에 대한 족쇄를 부수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 있다.“

 

10.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부수어 [정거천에] 화생할[不還] 비구들이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는 돌아오는 법이 없다.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 있다."

 

11.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세 가지 족쇄를 부수고 탐욕과 성냄과 미혹이 엷어져서

한 번만 돌아올[一來] 비구들이 있다그들은 한 번만 이 세상에 돌아와서 괴로움을 종식시킬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 있다."

 

12.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 세 가지 족쇄를 부수어 흐름에 든[預類] 비구들이 있다. 그들은 [파멸처에] 떨어지는 법이 없고 [해탈이] 확실하며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 있다.”

 

13.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닦는 데 전념하는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는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을 …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을 …
다섯 가지 기능[五根]을 …
다섯 가지 힘[五力]을 …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를 …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를 닦는 데 전념하는 비구들이 있다.(*6)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 있다.“

 

14.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자애[慈]를 … 연민[悲]을 … 더불어 기뻐함[喜]을 …평온[捨]을

닦는 데 전념하는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부정을 닦는 데 전념하는 비구들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 있다.


비구들이여, 무상의 인식을 닦는 데 전념하는(*7) 비구들이 있다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들이 이 비구 승가에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 승가에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 데 전념하는 비구들이 있다."

 

(*1) “‘경책하고 훈계하였다(ovadanti anusāsanti)’는 것은

음식에 관한 친절함과 법에 관한 친절함인 두 종류의 친절로써 호의를 베풀면서

명상주제에 대한 경책과 훈계로써 경책하고 훈계하였다는 말이다.”(MA.ⅳ.137)

 

(*2) “‘특별함을 알았다’는 것은

계행을 구족함 등 이전의 특별함보다 더 고귀하며 그 다음단계인

까시나를 통한 준비의 마음 등의 [禪]의 특별함을 알았다는 뜻이다.”(MA.ⅳ.137)

 

(*3) “‘얻지 못한 것(appatta)’과 ‘증득하지 못한 것(anadhigata)’ 등은

아라한과를 말한다.”(MA.ⅳ.137)

 

 

(*4)  “‘특별한 경지(visesa)’라고 하셨다.

여기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약한 자들이 수행을 하여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강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예비단계의 특별함이라 하고, 그 뒤에 고요해진 마음으로 형성된 것들[行]을 명상하면서

어떤 이들은 예류과를 얻고 … 어떤 이들은 아라한과를 얻었을 때

이것은 그 다음의 고귀한 특별함이라 한다.”(MA.ⅳ.137)

 

(*5) “‘어깨에 자루를 메고’라는 것은

여행 도중에 먹을 도시락을 멘다는 것으로

그 도시락을 싸가지고서라도 마땅히 친견하러 가야한다는 뜻이다.”(MA.ⅳ.139)

 

(*6) “여기서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은 세간적인 것과 출세간적인 것으로 설하셨다.

그 순간에 도를 닦는(maggaṃ bhāventi) 비구들에게 이것은 출세간적인 것이고,

위빳사나를 시작한 자들에게 이것은 세간적인 것이다.”(MA.ⅳ.139)

 

(*7)  “‘무상의 인식을 닦는데 전념하는(anicca-saññā-bhāvana-anuyoga)’에서

인식이라는 제목(saññā-sīsa)으로 위빳사나를 설하셨다.”(MA.ⅳ.139)

 

 

 

 

3월 21일부터 공부합니다.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

 

15.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거듭거듭 행하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8)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거듭거듭 행하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성취한다.

네 가지 마음챙김을 닦고 거듭거듭 행하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들을 성취한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거듭거듭 행하면 명지(明知)와 해탈을 성취한다."

 

16.   "비구들이여, 어떻게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어떻게 거듭거듭 행하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17.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9) 앉는다. 그는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10)

 

(*8)  “여기서 많은 비구들이 들숨날숨의 명상주제로 사유(abhiniviṭṭha)하기 때문에 나머지 명상주제들은 간략히 설하고 들숨날숨의 명상주제는 상세하게 설하시면서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이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이 들숨날숨의 명상주제에 관해서는 모든 측면에서 『청정도론』 (제8장 §§135~244)에서

상세하게 설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설한 방법대로 경전의 뜻과 수행방법(bhāvanā-naya)을 알아야 한다.(MA.ⅳ.139) 

 

(*9)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는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a를 옮긴 것이다. 『위방가』는 “이 마음챙김은 코끝이나 입의 표상에 확립되고 잘 확립되었다고 해서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라고 한 것이다.”(VbhA.252)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위방가주석서』는 “입의 표상(mukha-nimitta)이란 윗입술의 가운데 부분이라고 봐야 하나니, 즉 코의 바람이 닿는 곳을 말한다.”(VbhA.368)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전면(全面 혹은 前面)에(parimukhaṃ)’는 구체적으로 

코끝에나, 숨이닿는 윗입술의 중간 부분에 혹은 인중(人中) 즉 코의 밑과 윗입술 사아에 오목하게 골이 진 곳에라는 뜻이다.

 

(*10)  다음 §§18~21에 나타나는 16단계의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은 본경의 핵심이다.

이 16단계는 『상윳따니까야』 제6권 「들숨날숨 상윳따」(Ānāpāna saṃyutta)에 포함된 20개의 경들에 모두 나타나고 있기도 한다. 이 16단계는 다시 크게 네 개로 구성된 네 무리로 구분이 되는데 이 각각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의 각각에 배대된다. §24는 몸에 대한 관찰, §25는 느낌에 대한 관찰, §26은 마음에 대한 관찰, §27은 법에 대한 관찰로 종결된다.

 

 

17.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18.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1)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2)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몸의 작용[身行](*3)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19.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4)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행복을 경험하면서(*5)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마음의 작용[心行](*6)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20.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7)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8)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마음을 집중하면서(*9)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10)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21.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11)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12)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놓아버림을(*13)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14)

 

22.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거듭거듭 행하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1) ‘들이쉬면서는’은 assasanto를 옮긴 것인데 이 단어는 assasati(to breathe)의 현재분사이다. ‘길게 들이쉬면서는’은 길게 들이쉴 때라는 뜻으로 ‘길게 들이쉬어야겠다.’거나 ‘짧게 들이쉬어야겠다.’하는 그런 의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청정도론』 (Ⅷ.168)은 『무애해도』의 설명을 인용하여

이렇게 꿰뚫어 알 때 열의(chanda)가 일어나고, 또한 환희(pāmojja)가 일어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Ps.ⅰ.177)

 

(*2)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온 들숨의 몸의 … 온 날숨의 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체험하면서, 분명하게 하면서 내쉬리라고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체험하면서, 분명하게 하면서 지혜와 함께한 마음으로 들이쉬고 내쉰다.”

( 『청정도론』 Ⅷ.171)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이 문맥에서 몸(kāya)은 호흡 그 자체를 나타낸다.

 

(*3) “여기서 ‘몸의 작용[身行, kāya-saṅkhāra]’은 들숨날숨을 말한다비록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가 몸에 묶여 있고 몸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몸의 작용이라 부른다.”(Pm.220) 신행(身行)을 한역되는 kāya-saṅkhāra를 본서 전체에서 역자는 들숨날숨을 뜻할 때는 ‘몸의 작용’으로 옮기고,

다른 곳에서는 12연기의 두 번째인 의도적 행위를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몸의 의도적 행위’로 옮긴다.

 

(*4)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pīti-paṭisaṃvedi).’ 그것은 대상을 통해서와 미혹하지 않음을 통해서이다.

 그는 희열이 있는 초선과 제2선에 든다. 그가 선에 드는 순간에 禪을 얻음으로써 대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대상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

 희열이 있는 두 선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선과 함께한 희열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그가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특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않음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 『청정도론』 Ⅷ.226~227) 

 ①은 사마타를 닦아서 禪에 들었을 때의 희열이고,

②는 禪에서 출정하여 무상·고·무아의 특상을 꿰뚫는 위빳사나를 할 때의 희열을 말한다.

 

(*5) 『청정도론』은 ‘행복을 경험하면서(sukha-paṭisaṃvedī)’도 희열의 경험과 같은 방법으로 두 측면에서 아해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① 사마타를 닦아서 禪에 들었을 때의 행복과  禪에서 출정하여 무상·고·무아의 특상을 꿰뚫는 위빳사나를 할 때의 행복을 말한다. 다른 점은 행복은 초선부터 제3선까지에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청정도론』 Ⅷ.229)

 

(*6) “마음의 작용[心行, citta-saṅkhāra]은 느낌의 무더기[受蘊]와 인식의 무더기[想蘊]를 말한다. … 

네 가지 禪들로 ‘마음의 작용을 경험한다(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Ⅷ.229)

 

(*7) “‘마음을 경험하면서(citta-paṭisaṃvedī)’란 네 가지 禪들로 먀음을 경험한다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Ⅷ.231)

 

(*8)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abhippamodayaṃ cittaṃ)’ :

여기서는 삼매와 위빳사나의 두 가지 방법으로 기쁘게 한다. 어떻게 삼매를 통해 기쁘게 하는가?

희열(pīti)이 있는 두 禪에 든다. 그 증득의 순간에 그 선과 함께한 희열로 마음을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한다.

어떻게 위빳사나를 통해 기쁘게 하는가? 희열이 있는 두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희열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禪과 함께한 희열을 대상으로 삼아 마음을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한다.”( 『청정도론』 Ⅷ.232)

 

(*9) 『청정도론』 Ⅷ.232는 두 가지로 ‘마음을 집중하면서(samādaha citta)’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는 네 가지 선에 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찰나삼매(khaṇika-citt-ekaggatā, 순간적인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刹那心一境性)를 통해서이다.

찰나삼매는 “그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마음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할 때

그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특상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청정도론』 (Ⅷ.232)은 정의하고 있다.

 

(*10)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 초선을 통해 장애들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제2선을 통해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로부터, 제3선을 통해 희열로부터,

제4선을 통해 행복과 고통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

혹은 그가 그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마음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그가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무상의 관찰로 영원하다는 인식(nicca-saññā)으로부터,

무아의 관찰로 자아라는 인식(atta-saññā)으로부터, 염오의 관찰(nibbidānupassanā)로 즐김(nandi)으로부터,

탐욕의 빛바램의 관찰로 탐욕(rāga)으로부터, 소멸의 관찰로 일어남(samudaya)으로부터,

놓아버림의 관찰로 가짐(ādāna)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 『청정도론』 Ⅷ.233)

 

(*11) “‘무상을 관찰하면서(anicca-anupassī)’라고 했다. 여기서 무상한 것이란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일어나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uppāda-vay-aññathatta-   bhāvā)이다.

무상한 성질(aniccatā)이란 그들에게 존재하는 일어나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이다. 혹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생긴 무더기[蘊]가 그 본래의 모습으로 머물지 않고 순간적인 부서짐(khaṇa-bhaṅga)을 통해 부서진다(bhada)는 뜻이다. 무상의 관찰이란 그 무상함으로 물질 등에 대해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청정도론』 Ⅷ.234)

 

(*12)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virāga-anupassī)’ : 여기 탐욕의 빛바램은 파괴로서의 탐욕의 빛바램과

절대적인 탐욕의 빛바램(khaya-virāgo ca ac-canta-virāgo ca)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파괴로서의 탐욕의 빛바램이란 형성된 것들[行]이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것(khaṇa-bhaṅga)이다.

절대적인 탐욕의 빛바램이란 열반이다. 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함이란 이 둘의 관찰로 일어나는 위빳사나의 도(magga)이다. ‘소멸을 관찰하면서(norodha-anupassī)’라는 구절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 『청정도론』 Ⅷ.235

 

(*13)  “여기서도 ‘놓아버림(paṭinissagga)’은 두 가지이다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다.

놓아버림의 관찰이란 놓아버림 그 자체가 관찰(anu-passanā)이다. 이것은 위빳사나의 도의 동의어이다
① 위빳사나는 ㉠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과보로 나타난] 무더기들과, 업형성력(abhisaṅkhāra)들과 함께 오염원(kilesa)들을 버리기 때문에

㉡ 형성된 것에 대해 [무상 등의] 결점을 보고 그 [형성된 것의] 반대인 열반으로 기울어짐으로써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각각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라 한다.  ② 도는 ㉠ 근절(samuccheda)로써 무더기를 생기게 하는 업형성력들과 함께 오염원들을 버리기 때문에

㉡ 열반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각각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라 한다. 이 두 [위빳사나의 지혜와 도의 지혜]는 각각 이전의 지혜를 계속해서 따라 보기 때문에 관찰[隨觀]이라 한다.”( 『청정도론』 Ⅷ.236)

 

(*14)  『청정도론』의 설명에서 보듯이 ⑫번째까지의 앞의 세 번째의 네 개조까지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방법이 둘 다 적용되었지만 이 네 번째의 네 개조는 위빳사나의 방법만이 적용되고 있다.

 

 

몸의 관찰[身隨觀]

 

2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어떻게 거듭거듭 행하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성취하는가?" (*15)

 

24.   "비구들이여, 비구는
①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를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들숨과 날숨은 몸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몸(*16)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17) 비구는 그때에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


(*15) 이하 본경에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지어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완성하고(§§23~28),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완성하고(§§29~40),

명지와 해탈을 완성하는 것(§§41~43)을 설하고 계신다.

그리고 여기 본경§§23~43에 나타나는 이 내용은 『상윳따니까야』 제6권  「아난다 경」(S54:13)의 전체 내용과 같다. 

 

(*16) “‘한 가지 [형태의] 몸(kāy-aññatara)’이란 흙의 몸 등 네 가지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바람의 몸[風身, vayo-kāya]이라고 나는 말한다는 뜻이다. 혹은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라는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을 물질의 몸[色身, rūpa-kāya]이라한다그중에서 들숨날숨은 감촉의 감각장소[觸處, phoṭṭhabb-āyatana]에 포함되기 때문에 몸의 한 형태이다. 그 때문에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MA.ⅳ.140)

 

(*17) “‘그러므로 여기서(tasmāt-iha)’하는 것은 네 가지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인 바람의 몸이다.

혹은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인 물질의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인 들숨날숨을 관찰하기 때문에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느낌 등의 모든 곳에서 그 뜻을 알아야 한다.”(MA.ⅲ.271)

 

 

 

느낌의 관찰 [受隨觀]

 

25.   "비구들이여, 비구는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受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들숨날숨을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은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느낌이라고 나는 말한다.(*1)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2)

 

 

 

 

마음의 관찰[心隨觀]

 

26.   "비구들이여, 비구는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心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3)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4)
 
(*1)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느낌(vedanāsu vedanāññataraṃ)’이란 세 가지 느낌 가운데 하나인 즐거운 느낌[樂受, sukhavedanā]을 두고 설한 것이다.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sādhukaṃ manasikāra)’이란 희열 등을 경험함으로써 생긴 확실하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2)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이란 희열 등을 경험함으로써 생긴 것이니, 아름답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그리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를 제외하고 마음과 연결된 모든 법들은 마음의 작용[心行]에 포함된다.”(cf Yam.ⅰ.229)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이라는 이름으로써 느낌을 설했다. 마음에 잡도리함이라는 이름으로써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여기서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SA.ⅲ.271)

 

(*3) “이 뜻은 다음과 같다.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라는 방법으로 공부하는 비구가 들숨날숨의 표상을 대상으로 삼지만 그의 마음이 대상에 대해 마음챙김(sati)과 분명한 알아차림(sampajañña)을 확립하면서 공부짓기 때문에 그를 오직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자라고 이름한다. 마음챙김을 잊어버리고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않는 자에게 들숨날숨의 수행은 없다.

그러므로 대상으로써 마음을 경험함 등에 의해 그때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문다고 했다.”(MA.ⅳ.141~142)

 

(*4) “‘마음챙김을 잊어버리고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라는 구문에서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라는 방법으로 공부하는 비구가 들숨날숨의 표상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대상에 대해 마음챙김과 분명히 알아차림을 확립하면서 공부짓기 때문에 그를 오직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자라고 이름한다.

마음챙김을 잊어버리고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않는 자에게 들숨날숨에 마음챙김을 통한 삼매를 닦는 수행은 없다.

그러므로 대상으로써 마음을 경험함 등에 의해 그때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문다고 했다.”(SA.ⅲ.372)

 

 

 

법의 관찰[法隨觀]

 

27.   "비구들이여, 비구는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法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그는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린 것을 통찰지로써 보고 안으로 평온하게 된다.(*5)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6) 비구는 그때에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 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

 

28.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거듭거듭 행하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성취한다."

 

29.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어떻게 닦고 어떻게 거듭거듭 행하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七覺支]을 성취하는가?"

 

30.   "비구들이여,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 때, 그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될 때,

그때 그 비구에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마음챙김의 깨달음이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31.   "그가 그렇게 마음챙기면서 머물 때 그는 통찰지로써 그 법을 조사하고 점검하고 탐구한다.(*7)

비구들이여, 비구가 그렇게 마음챙기면서 통찰지로써 그 법을 조사하고 점검하고 탐구할 때,

 그때 그에게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32.   "그가 통찰지로써 그 법을 조사하고 점검하고 탐구할 때 지칠 줄 모르는 정진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통찰지로써 그 법을 조사하고 점검하고 탐구하면서 지칠 줄 모르는 정진이 생길 때,

그때 그에게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33.   "정진이 생긴 자에게 출세간적인(nirāmisā)(*8) 희열이 생긴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정진이 생겨서 출세간적인 희열이 생길 때, 

그때 그에게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34.   "희열을 느끼는 자는 그의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다.(*9)

비구가 희열을 느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할 때,

그때 그에게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經安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편안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35.   "몸이 편안하고 행복한 자는 그의 마음이 삼매에 든다.

비구가 몸이 편안하고 행복하여 마음이 삼매에 들 때,

그때 그에게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36.   "마음이 그렇게 삼매에 들어 그는 안으로 평온하게 된다.(*10)

비구들이여, 비구의 마음이 그렇게 삼매에 들어 안으로 평온하게 될 때,

그때 그에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11)

 

37.   "비구들이여, 비구가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受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 때,

그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될 때, …<§§30~36의 반복> …

그때 그에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38.   “비구들이여, 비구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心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 때,

그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될 때, …<§§30~36의 반복> …

그때 그에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39.  "비구들이여, 비구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法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 때,

그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될 때, …<§§30~36의 반복> …

그때 그에게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捨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40.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거듭거듭 행하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들을 성취한다."


(*5) “‘그는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린 것을 통찰지로써 보고 안으로 마음이 평온하게 된다.’라고 설하신 구문에서

‘욕심(abhijjhā)’이라는 단어로 감각적 욕망의 장애(kāma-cchanda-nīvaraṇa)를 설하셨고,

‘싫어하는 마음(domanassa)’이라는 단어로 악의(byāpāda)의 장애를 설하셨다.

그리고 이 네 번째 네 개조는 위빳사나로써 설하셨다법을 관찰하는 것은 장애 등의 단락으로써 다섯 가지이다.

(「대념처경」(D22)에서 법념처는 오장애, 오취온, 육내외처, 칠각지, 사성제의 다섯 단락으로 분류되어 나타난다.)

그 중에서 장애의 단락이 처음이고, 그 중에서도 감각적 욕망의 장애와 악의의 장애가 처음이다.

이와 같이 법을 관찰하는 것의 처음을 보이기 위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설하셨다. 
‘버림(pahāna)’이란 무상의 관찰로써 항상하다는 인식[常想]을 버리기 때문에 버림이라는 형태의 지혜를 뜻한다.

‘그것을 통찰지로서 보고(tam paññāya disva)’란 무상, 탐욕의 빛바램, 소멸,

놓아버림의 지혜라 불리는(anicca-virāga-nirodha-paṭinissagga-ñāṇa-saṅkhāta) 그 버림의 지혜를

그 다음의 위빳사나의 통찰지로써, 그것도 그 다음의 것으로써 본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 다음 단계의 위빳사나를 보이셨다. 
안으로 평온하게 된다(ajjhupekkhitā)’란

① 사마타에 든 자가 평온하게 되는 것과 ② 하나로 확립된 자가 평온하게 되는 것으로 두 종류의 평온함이 있다.

함께 생긴 법들에 대해서도 평온함이 있고, 대상(ārammaṇa)에 대해서도 평온함이 있는데

여기서는 대상에 대한 평온함을 뜻한다.(MA.ⅳ.142)

 

(*6)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tasmātiha bhikkhave)’란

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라는 등의 방법으로 공부지을 때

그는 단지 장애 등의 법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필두로 설한

 법들에 대한 그 버림의 지혜도 역시 통찰지로써 보고 안으로 평온해지기 때문에

 “그때 비구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머문다.”라고  알아야 한다.”(MA.ⅳ.142)

 

(*7) “‘조사한다(pavicinati).’는 것은

무상 등(anicc-adi)으로 조사하는 것이고, 나머지 두 단어도 이와 같은 뜻이다.”(MA.ⅳ.142)

 

(*8) “‘출세간적(nirāmisā)’이라는 것은 오염원이 없다는 뜻이다.”(MA.ⅳ.143)

 

(*9)  “’편안하다(passambhati)‘는 것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불안이 편안하게 가라앉았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편안하다는 뜻이다.”(MA.ⅳ.143)

 

(*10)  “‘삼매에 든다(samādhiyati)’는 것은

마치 본삼매에 드는 것(appanāpatta)처럼 바르게 놓인다(sammā thapiyati)는 뜻이다.

안으로 평온하게 된다(ajjhupekkhitā hoti).’는 것은

함께 생긴 내적인 평온으로 인해 안으로 평온하게 된다는 뜻이다.”(MA.ⅳ.143)

 

(*11) “이와 같이 비구가 열네 가지 방법으로 몸을 파악할(kāya-pariggāhaka) 때

그의 몸에 마음챙김인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고,

마음챙김과 함께 한 지혜(ñāṇa)인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고,

반드시 그것과 함께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정진인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고,

‘희열’이 있고, ‘경안’이 있고, 일념(citt-ekaggatā)인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이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음이라 불리는 중립(majjhattākāra)인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upekkhā-sambojjhaṅga)’가 있다.

마치 말들이 고르게 나아갈 때 마부가 ‘이놈이 느리다.’라면서 채찍질을 하거나

혹은 ‘이 놈이 빠르다.’라면서 고삐를 잡아당겨 제어하는 일이 없이

다만 그렇게 볼 때(passamāna) 확고함(ṭhitākāra)이 있는 것과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여섯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음이라 불리는 중립을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라 한다.”(MA.ⅳ.143)

 

 

 


명지와 해탈의 완성

 

41.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을 어떻게 닦고

어떻게 거듭거듭 행하면 명지(明知)와 해탈(*12)을 성취하는가?"

 

42.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한적함에 의지하고

탐욕이 빛바램에 의지하고 소멸에 의지하고 놓아버림에 이르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
…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 편안함의 깨달음이 구성요소를
…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는다."(*13)

 

43.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들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거듭거듭 행하면 명지와 해탈을 성취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그 비구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14)


(*12) ‘명지와 해탈’은 vijjā-vimutti를 옮긴 것이다.

『청정도론주석서』는 “‘명지(vijjā)’는 도(magga)를, ‘해탈(vimutti)’은 과(phala)를 뜻한다.”(Pm.237)라고 설명한다.

 

(*13)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satta bijjhaṅga]는  「모든 번뇌 경」(M2) §21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14) “여기서 들숨날숨을 파악하는 마음챙김(ānāpāna-pariggāhikā sati)은 세간적인 것(lokiyā)이다.

세간적인 들숨날숨이 세간적인 마음챙김의 확립을 성취하고,

세간적인 마음챙김의 확립이 출세간적인 깨달음의 구성요소(lokuttara-bojjhaṅga)를 성취하고,

출세간적인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명지와 해탈의 결과인 열반을 성취한다.

이처럼 세간적인 법일 경우에는 세간적인 것이라고 설했고 출세간적인 법일 경우에는 출세간적인 것이라고 설했다.

그러나 [마하담마락킷따 장로(Mahādhammarakkhita thera)-MAT.ⅱ.314]는 그렇지 않다고 설하였다.

본경에서는 출세간(lokuttara)은 높은 경지의 가르침(upari desanā)으로서 설한 것이다.

세간적인(lokiyā) 들숨날숨이 세간적인 마음챙김의 확립을 성취하고,세간적인 마음챙김의 확립이 세간적인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확립하고,

세간적인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출세간적인 명지와 해탈의 결과인 열반을 성취한다.

여기서 명지와 해탈이라는 두 단어는 명지와 해탈의 결과인 열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MA.ⅳ.143~144)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경(M118)이 끝났다.

 

대림스님 옮김 『맛지마니까야』 제4권 174-199쪽

 

 


 

 

논점

 

1. 아래 존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사리뿟따 존자, 마하목갈라나 존자, 마하깟사빠 존자, 마하깟짜야나 존자, 마하꼿티따 존자, 마하깝삐나 존자, 마하쭌다존자, 아누룻다 존자, 레와따존자, 아난다 존자

 

 

2. 회중(parisā)과 승가(saṃgho)라는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처음에 단어들이 동의어로 사용되다가 뒤에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비구들이여, 이 회중은 공양받아 마땅하고, 환대받아 마땅하며,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니 이 비구 승가는 그러하고 이 회중은 그러하다."

Tathārūpo ayaṃ, bhikkhave, bhikkhusaṃgho; tathārūpā ayaṃ, bhikkhave, parisā yathārūpā parisā āhuneyyā pāhuneyyā dakkhiṇeyyā añjalikaraṇīyā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a.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 승가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회중이 있다. 그 회중에게 적게 보시해도 큰 결실을 가져오고 많이 보시하면 더 큰 결실을 가져온다. 

Tathārūpo ayaṃ, bhikkhave, bhikkhusaṃgho; tathārūpā ayaṃ, bhikkhave, parisā, yathārūpāya parisāya appaṃ dinnaṃ bahu hoti, bahu dinnaṃ bahutaraṃ.

 

 

 

 

3. 이 경에서는 특이하게도 귀의 대상인  승가의 범위(성인(4향4과)이 포함된 승가 + 13종류의 수행을 하는 범부가 포함된 승가)가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 문장으로  범부가 포함된 승가도 귀의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성승가', '범부승가',  '승가비방',  '승가모독' 등의  성인(4향4과)이 포함된 승가등 승가앞에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가 오는 것은 맞지 않다. 

 

비구들이여, 이 회중은 잡담을 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 회중은 떠들지 않는다. 이 것은 순수하고 완전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 회중은 공양 받아 마땅하고, 환대받아 마땅하며, 보시 받아 마땅하고, 합장 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Apalāpāyaṃ, bhikkhave, parisā; nippalāpāyaṃ, bhikkhave, parisā; suddhā sāre  patiṭṭhitā. Tathārūpo ayaṃ, bhikkhave, bhikkhusaṃgho; tathārūpā ayaṃ, bhikkhave, parisā yathārūpā parisā āhuneyyā pāhuneyyā dakkhiṇeyyā añjalikaraṇīyā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a.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 승가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회중이 있다. 그 회중에게 적게 보시해도 큰 결실을 가져오고 많이 보시하면 더 큰 결실을 가져온다. 

Tathārūpo ayaṃ, bhikkhave, bhikkhusaṃgho; tathārūpā ayaṃ, bhikkhave, parisā, yathārūpāya parisāya appaṃ dinnaṃ bahu hoti, bahu dinnaṃ bahutaraṃ.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 승가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회중이 있다. 그 회중은 세상에서 친견하기 어렵다. 

Tathārūpo ayaṃ, bhikkhave, bhikkhusaṃgho; tathārūpā ayaṃ, bhikkhave, parisā, yathārūpā parisā dullabhā dassanāya lokassa. 

 

비구들이여, 이러한 비구 승가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회중이 있다. 그 회중을 친견하기 위해 어깨에 걸망을 메고 먼 유순의 거리라도 마땅히 찾아 가야 한다. 

Tathārūpo ayaṃ, bhikkhave, bhikkhusaṃgho; tathārūpā ayaṃ, bhikkhave, parisā, yathārūpaṃ parisaṃ alaṃ yojanagaṇanāni dassanāya gantuṃ puṭosenāpi.

 

 

 

 

4. 각 번역에 대한 차이를 이야기해보자.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pajānāti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분명히 안다. pajānāti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공부짓는다. sikkhati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련하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수련한다. sikkhati

 

[전재성] 수행승들이여, 호흡새김을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익히면, 이렇게 커다란 과보, 커다란 공덕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viharati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viharati

  pajānāti(8)       sikkhati(56번)     viharati(10번)

 

 

 


 

3월 21일부터 공부합니다.

5. sati에 대한 번역어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마음챙김, 새김, 기억, 알아차림, Mindfulness of Breathing, 安般守意, 

 

[참고]아나빠나사띠(Anāpānasati)에 대한 한문번역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은 정()이고, ()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뜻을 다루어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安爲定般爲莫使動搖守意莫亂意也安般守意名爲御意至得無爲也

 

()은 유()이고, ()은 무()가 되니, 뜻으로 유()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고, 뜻으로 무()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며, 또한 유()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를 생각하지도 않음이 바로 공정(空定)의 뜻과 도를 따르는 행에 응하는 것이다. ()는 만 가지 물건을 말하고, ()는 의() 또는 공()이 된다.

安爲有般爲無意念有不得道意念無不得道亦不念有亦不念無是應空定意隨道行有者謂萬物無者謂疑亦爲空也

 

 

()은 본래의 인연이고, ()은 처소가 없음이니, 도인(道人)은 본래 온 바가 없음을 알고 또한 멸함의 처소가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수의(守意)가 된다.

安爲本因緣般爲無處所道人知本無所從來亦知滅無處所是爲守意也

 

 

()은 청()이고, ()은 정()이며, ()는 무()가 되고, ()는 위()라 이름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여 함이 없는 것이다. ()는 활()이라 하고, ()는 생()이라 하니, 다시 고()를 얻지 않기 때문에 활()이 되는 것이다.

安爲淸般爲淨守爲無意名爲是淸淨無爲也無者謂活爲者謂生不復得苦故爲活也

 

()은 미()이고, 반은 기()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문득 뜻을 지킬[守意] 수 있지만, 만약 이미 뜻이 일어났다면 곧바로 뜻을 지켜야 하니, 만일 이미 뜻을 일으켰다면 곧 달아나서 지키지 못하므로 마땅히 돌이켜야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설하셨다.

安爲未般爲起已未起便爲守意若已意起便爲守意若已起意便走爲不守當爲還故佛說安般守意也

 

 

 

()5()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5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인연을 깨달아 몸과 입과 뜻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安爲受五陰般爲除五陰守意爲覺因緣不隨身口意也

 

수의(守意)는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곧 수의이니,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수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멸하기 때문이니, 뜻이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도()가 되고,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되는 것이다.

守意者無所著爲守意有所著不爲守意何以故意起復滅故意不復起爲道是爲守意

 

수의(守意), 뜻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김[]으로 인하여 죽음[]이 있으므로 뜻을 지킬 수 없으며, 뜻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 죽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김이 있으므로 뜻이 또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도()가 된다.

守意莫令意生生因有死爲不守意莫令意死有死因有生意亦不死是爲道也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열 가지 지혜가 있으니, 숨을 세고[數息] 서로 따름[相隨]과 지()와 관()과 환()과 정()4()를 말한다. 이것이 열 가지 지혜를 이루니, 이른바 37품경(三十七品經)을 합하여 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安般守意有十黠謂數息相隨止觀還淨四諦是爲十黠成謂合三十七品經爲行成也

 

수의(守意), 비유컨대 등불과 같아서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 어둠을 부수며, 둘째 밝음을 보이는 것처럼, 수의(守意)도 첫째 어리석음[愚癡]을 부수고, 둘째 지혜를 보이는 것이다.

守意譬如燈火有兩因緣一者壞冥二者見明守意一者壞癡二者見黠也

 

수의(守意), 뜻이 인연을 좇아 생겨나서 마땅히 인연을 반연(攀緣)하여 집착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된다.

守意意從因緣生當緣因緣莫著是爲守意也

 

수의(守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켜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것은 마땅히 빨리 소멸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미 행한 일은 마땅히 뒤에 뉘우쳐서 억만겁이 지나도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守意有三輩一者守令不得生二者已生當疾滅三者事已行當從後悔計億萬劫不復作也守與意各自異護十方一切覺對不犯是爲守覺彼無爲是爲意是守意也

 

()와 의()는 각기 다르다. 시방의 일체를 보호하여 대경(對境)을 범하지 않음을 깨달음이 바로 수()가 되고, 저 무위(無爲)를 깨달음이 바로 의()가 되니, 이것이 수의이다.

守意中有四樂一者知要樂二者知法樂三者爲知止樂四者爲知可樂是爲四樂法爲行得爲道

 

 

 

 

 

6. 다음 문장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비구들이여, 이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느낌이 들숨날숨에 주의를 잘 기울이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Vedanāsu veda­nāññata­rā­haṃ, bhikkhave, evaṃ vadāmi yadidaṃ— assāsa­passā­sā­naṃ sādhukaṃ manasikāraṃ. 

For I say that careful application of mind to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is an aspect of feelings.

 

 

 

 

 

7. 관찰하면서,  관찰할때, 이 두가지 번역에서 더 좋은 번역은? 

 

비구들이여, 몸들 가운데서 한 가지 몸이 '들숨과 날숨'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

 Kāyesu kāyaññatarāhaṃ, bhikkhave, evaṃ vadāmi yadidaṃ—assāsapassāsā. Tasmātiha, bhikkhave, kāye kāyānupassī tasmiṃ samaye bhikkh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1)

 

비구들이여, 이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느낌이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잘 기울이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 비구는 그때에 느낌들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

Vedanāsu veda­nāññata­rā­haṃ, bhikkhave, evaṃ vadāmi yadidaṃ— assāsa­passā­sā­naṃ sādhukaṃ manasikāraṃ. Tasmātiha, bhikkhave, vedanāsu vedanānupassī tasmiṃ samaye bhikkh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2)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을 놓아버리고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에게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챙기는 자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할때,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

Nāhaṃ, bhikkhave, muṭṭhassatissa asampajānassa ānāpānassatiṃ vadāmi. Tasmātiha, bhikkhave, citte cittānupassī tasmiṃ samaye bhikkh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3)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비구는 그때에 법들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

dhammesu dhammānupassī, bhikkhave, tasmiṃ samaye bhikkh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So yaṃ taṃ abhij­jhā­do­manas­sā­naṃ pahānaṃ taṃ paññāya disvā sādhukaṃ ajjhupekkhitā hoti. Tasmātiha, bhikkhave, dhammesu dhammānupassī tasmiṃ samaye bhikkh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yasmiṃ samaye --whenever; at whichever time

*tasmiṃ samaye --then; on that occasion; at that time

 

 

 

 

 

참고: 주석서 번역에 대한 문제점

 

그 무렵 세존께서는 보름 포살일의 보름밤에 자자(自恣)를 하기 위해서 비구 승가에 둘러싸여서 노지에 앉아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비구 승가를 둘러보시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런 도닦음 때문에 흡족하다. 비구들이여, 나의 마음은 이런 도닦음 때문에 흡족하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얻지 못한 것을얻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욱더 정진하라.나는 여기 사왓티에서 네 번째 달의 보름인 꼬무디(*3-1)를 맞을 것이다."

 지방에 거주하는 비구들은 세존께서 그곳 사왓티에서 네 번째 달의 보름인 꼬무디를 맞을 것이라는 것을 들었다.
지방에 거주하는 그 비구들은 세존을 뵈러 사왓티로 향했다.

 

(*3-1) “네 번째 달의 보름인 꼬무디(komudi catumasini)'란 [우기철의] 마지막 네 번째 달인 깟띠까 달의 보름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이 즈음에] 수련 (kumuda)이 피기 때문에 꼬무디(komudi)라 불리고, 우기(vassika)인 넉 달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네 번째 달(catumasini)'이다. 그러므로 '네 번째 달의 [보름인] 꼬무디'라 불린다."(MA.iv.137)

komudiṃ cātumāsininti pacchimakattikacātumāsapuṇṇamaṃ. sā hi kumudānaṃ atthitāya komudī, catunnaṃ vassikānaṃ māsānaṃ pariyosānattā cātumāsinīti vuccati.


일반적으로 인도의 우기철은 다섯 달로 구성된다. 그것은 ① 아살하(Asālha) ② 사와나(Savana) ③ 밧다라(Bhaddara 혹은 Potthapāda) ④ 앗사유자 (Assayuja) ⑤ 깟띠까(Kattika)이다. 이 가운데 네 번째 달인 앗사유자를 '앞 의 깟띠까 (Pubba-kattika)'라 하기도 하고 다섯 번째 달인 깟띠까를 '뒤의 깟띠까 (Pacchima-kattika)'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 둘은 ' 깟띠까의 두달 (Kattikā dvemāsika)'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안거(vassa)는 아살하 달의 보름에 시작해서 앗사유자의 보름에 마치는데 이렇게 되면 석달간 결제를 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결제에 임하는 비구를 ' 깟띠까 석 달을 [결제한 자](Kattikä-temäsika, Vin.iii.261)'라고 부른다. 마지막 깟띠까 달까지 포함하여 결제한 비구를 '깟띠까 넉 달을 [결제한 자 (Kattikā catumasini, VinA.v. 1076)'라 한다.


“오늘 해제를 않고 그것이 올 때까지 어느 곳에도 가지 않고 오직 여기서 머무를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처럼 비구들에게 해제일을 연기하는 것(pavārana-sangaha)에 대해 공고하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āgamessāmīti udikkhissāmi, ajja apavāretvā yāva sā āgacchati, tāva katthaci agantvā idheva vasissāmīti attho. iti bhikkhūnaṃ pavāraṇasaṅgahaṃ anujānanto evamāha.

 

해제일을 연기하는 것은 표백(表白, natti)으로만 결정하는 갈마[單白羯磨, natti-kamma]를 통해서 행해진다. 이것은 누구에게는 해당되고 누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가? 어리석은 범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위빳사나를 시작한 자와 성스러운 제자들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마타가 아직 약하거나(taruna) 위빳사나가 약한 자에게는 해당된다. pavāraṇasaṅgaho nāma ñattidutiyena kammena diyyati kassa panesa diyyati, kassa na diyyatīti. akārakassa tāva bālaputhujjanassa na diyyati, tathā āraddhavipassakassa ceva ariyasāvakassa ca. yassa pana samatho  taruṇo hoti vipassanā vā, tassa diyyati.

 

그때 세존께서도 비구들의 마음의 작용을 검증하시면서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약한 것을 아시고 '오늘 해제를 하면 사방에서 안거를 지낸 비구들이 이 곳으로 떠나올 것이다.( 이 곳을 떠나갈 것이다 ) 그들이(이 비구들이) [여기 와서(거기서)] 장로 비구들로부터 거처를 얻어 머물면 특별함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유행()하면서 떠나 버리면 이런 수행처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해제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비구들도 이 사왓티로 떠나오지 않을 것이고( 사왓티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 나도 유행(을) 하면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구들의 거처도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거처에서 편안히 머물면서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특별함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면서 그날 해제를 하지 않고 까띠까 달의 보름날에 해제하리라고 비구들에게 해제를 연기하는 것을 통고하셨다. 해제일이 연기되어 공부의 발판을 원하는 자에게 법사나 은사들(acariy- upajjhāyā)이 다가가면 그자도 '만약 발판을 마련해 줄 적절한 분(nissaya -dayaka)이 오면 그분 곁에서 발판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여름의 마지막달까지 머물 수 있다. 그리고 이 해제를 연기하는 것이 비록 단 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대중에게 다 적용된다."(MA.iv.138)

 bhagavāpi tadā bhikkhūnaṃ cittācāraṃ parivīmaṃsanto samathavipassanānaṃ taruṇabhāvaṃ ñatvā  mayi ajja pavārente disāsu vassaṃvuṭṭhā bhikkhū idha osarissanti. tato ime bhikkhū vuḍḍhatarehi bhikkhūhi senāsane gahite visesaṃ nibbattetuṃ na sakkhissanti. sacepi cārikaṃ pakkamissāmi, imesaṃ vasanaṭṭhānaṃ dullabhameva bhavissati. mayi pana apavārente bhikkhūpi imaṃ sāvatthiṃ na osarissanti, ahampi cārikaṃ na pakkamissāmi, evaṃ imesaṃ bhikkhūnaṃ vasanaṭṭhānaṃ apalibuddhaṃ bhavissati. te attano attano vasanaṭṭhāne phāsu viharantā samathavipassanā thāmajātā katvā visesaṃ nibbattetuṃ sakkhissantīti so taṃdivasaṃ apavāretvā kattikapuṇṇamāyaṃ pavāressāmīti bhikkhūnaṃ pavāraṇasaṅgahaṃ anujāni. pavāraṇasaṅgahasmiñhi laddhe yassa nissayapaṭipannassa ācariyupajjhāyā pakkamanti, sopi “sace patirūpo nissayadāyako āgamissati, tassa santike nissayaṃ gaṇhissāmī”ti yāva gimhānaṃ pacchimamāsā vasituṃ labhati. sacepi saṭṭhivassā bhikkhū āgacchanti, tassa senāsanaṃ gahetuṃ na labhanti. ayañca pana pavāraṇasaṅgaho ekassa dinnopi sabbesaṃ dinnoyeva hoti.

*disa adj. like; resembling; as; referring to

*Osarati to flow, to go away, to recede to, to visit

 

 

 

 

 

 

 

 

 

 

https://www.youtube.com/watch?v=zvqvut1qwGk&t=2013s

 

 

 

 

 

 

https://youtu.be/bRjS7dKBlp0?si=ep6ksWlOLCi-TRG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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