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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기

8. 가섭존자와 부처님이 옷을 바꿔 입은 곳

 

8. 가섭존자와 부처님이 옷을 바꿔 입은 곳

 

성지순례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는 것은 부처님제자들에 관한 유적들이다.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대승불교도들에게 가섭(Mahakassapa)존자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선종에서 유명한 전법의 이야기인 삼처전심(三處傳心)이 모두 부처님과 가섭존자 사이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삼처전심 중에서 경전상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이다. 그런데 다자탑전분반좌는 전승에 따라 사왓티 제따와나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곳도 있고 웨살리(Vaisali) 서북쪽에 있던 다자탑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곳도 있다. 의복경(S16:11)에서는 라자가하와 날란다 사이에 있던 다자탑에서 부처님과 가섭존자가 처음 만났고 그 날 서로 옷을 바꾸어 입은 것으로 나타난다. 경에서 다자탑에서 옷을 교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유물이 최근에 나타났다.

 

마하까싸빠(MahaKassapa)존자는 마가다의 마하띠타(Mahatittha)마을에서 바라문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삡빨리(Pippali)였다. 그는 부모님의 뜻대로 일찍 결혼하였으나 아내 밧다 까삘라니(Bhadda Kapilani)와 논의하여 같이 출가하였다. 부처님은 삡빨리가 출가했다는 것을 아시고 라자가하 죽림정사에서 3가우따(6km)떨어진 다자탑에서 앉아 가섭존자를 기다린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을 뵙자마자 자신이 찾는 스승임을 직감하고 세존이시여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라고 세번 고백한다. 부처님 또한 까싸빠여, 마음으로 모든 것을 구족한 그대와 같은 제자에게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안다.’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나는 본다.’고 말하는 자는 그의 머리가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가섭존자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실로 이들은 서로에 대한 설명이 필요없이 만남자마자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다자탑에서 근처 근처의 숲속으로 자리를 옮기셨고 가섭존자는 나무아래 자신의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앉을 자리를 만들어 드렸다. “그대가 입고 있는 가사는 부드럽구나.”라는 말을 듣고 세존이시여이 헤진 헝겊조각으로 만든 가사를 받아주소서.”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그러면 그대는 삼베로 만든 다 떨어진 이 분소의를 입겠는가?’라고 물으셨고 결국 가섭존자와 부처님은 가사를 교환했다. 가섭존자는 이일을 매우 특별하게 여겨 자신을 소개할 때는 이일을 거론하기도 했다. 부처님은 교계경2(S16:7)에서 까싸빠여, 나 혹은 그대가 비구들을 교계해야 한다. 나 혹은 그대가 비구들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 라고 하실만치 자신과 가섭존자를 동격으로 생각하는 발언을 하셨고 실제로 가섭존자를 제외하고 당신의 가사를 누구와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이런 관계가 후대에 가섭존자를 선종의 초조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가섭존자와 가사를 바꿔 입은 장소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한 마음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아무런 안내판이 없어서 우리일행은 길거리에서 한 참을 헤메어야 했다. 다행히 사진을 보여주자 마을사람이 라자가하에서 6km지점에 있는 실라오(Silao)의 허름한 힌두 템플로 안내해 주었다. 그 곳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불상 옆에 무릎굵은 가섭존자의 조각상이 있었다. 힌두인들은 불상과 가섭존자의 조각상에 붉은 색깔을 칠해 놓고 그들의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스님들이 힌두교 사원에서 불상에 절을 올리니 마을사람들 신기해하며 모여들었다. 삼배를 하고 좌선을 하는 우리를 그들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가섭존자의 조각상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33년 인도정부에서 이곳을 방문하여 유물을 조사하면서 부터다. 조사단은 마을에서 스님이 한쪽 무릎을 꿇고 무엇인가를 공양하는 모습의 조각상을 발견하였는데 가섭존자의 발밑에 조각된 글씨를 판독해내어 이 조각상이 가섭존자가 부처님께 옷을 올리는 장면임을 알아내었다. 이 내용은 1934년 인도 정부에서 발간한 책(Epigraphica Indica, Vol XXV)에서 기록되었는데 인도정부는 이 작업 이후에 이곳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 조각상은 곧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최근에 나와 날란다 대학에서 이 사실을 알고 실라오 마을을 방문하여 잊혀진 조각상을 힌두 템플에서 찾아내었다. 그 비문에는 가섭존자의 아내 이름 까삘라니(Kapilani)와 가섭존자가 말년에 구루빠다(Grupada)산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구루빠다(Grupada)는 보드가야에서 동쪽으로 36km떨어진 산이다. 산정상의 바위가 닭(Kukkuṭa)의 발(pāda)처럼 생겼다고 꾸꾸따빠다기리(鷄足山)라고 부르기도한다. 대당서역기에서 현장스님은 이 곳을 다녀가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할 때 가섭파에게 말씀하셨다.'나는 이제 대열반에 들고자 하니 이 가사를 미륵보살이 올때까지 너에게 맡긴다. 모든 비구,비구니,우바새, 우바이를 제도하여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가섭파는 결집을 끝낸 지 20년이 되자 열반에 들고자 계족산(鷄足山)으로 갔다. 지팡이를 두드리니 산이 갈라졌다.부처님의 가사를 받들고 그 가운데로 들어가니 봉우리 세 개가 합쳐졌다. 장차 미륵께서 세상에 나셔서 설법을 마친 후 여전히 교화되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고 이 산에 오르실 것이다.가섭의 처소에 이르러 미륵이 손가락을 튀기면 산 봉우리가 저절로 열리게 된다.이 때 대가섭이 옷을 건네고 절을 올리고 예경한 뒤 몸을 허공으로 날려서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보이며 허공에서 불을 일으켜 몸을 태운 뒤에 적멸에 들어갈 것이다.“

 

계족산에는 지금도 까싸빠 존자의 발바닥 모양의 조각이 선명하게 남아있고 산 정산에는 커다란 수투파도 있다. 이 수투파는 2009년 라닥에서 온 텐진 아난다(Tenzin Ananda)스님이 대만 비구니스님의 후원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아난다 스님은 1700여개의 계단과 저녁에 길을 비추는 태양열 가로등도 만들어 놓았다. 스님은 2023년에는 가야산 정상에 탑과 비문을 세웠다. 가야산은 부처님이 천명의 비구들에게 불타오름 경(S35:28)을 설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난다 스님은 부처님과 까싸빠가 가사를 교환하였던 곳에 사찰을 짓고 조각상을 안치할 예정이다. 이미 스님의 사찰에 부처님과 까싸빠가 가사를 교환하는 조각상을 이미 만들어 놓았다. 다만 부처님이 들고 있는 가사가 너무 작아서 다시 수정할 생각을 갖고 계시다. 아난다 스님의 노력으로 황폐하게 버려진 인도 성지들이 불자들이 참배하기 편리하고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배우기 쉽도록 만들어지고 있다.

 

부처님은 늙음경(S16:5)에서 가섭존자가 늙어서까지 분소의를 입고 지내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그대는 이제 늙었다. 그리고 그대가 입고 있는 분소의들은 그대에게 너무 무겁다. 그대는 장자들이 보시하는 옷을 수용하고 공양청에 응하라. 내 곁에 머물도록 하라.“고 부탁했지만 가섭존자가 분소의만 입고 숲에서 사는 두타행이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을 연민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부처님은 장하고 장하구나, 까싸빠여, 그대는 많은 신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분소의를 입어라. 걸식행을 하라. 숲에서 머물러라"고 허락하셨다. 가섭존자는 눈길을 걸을 때는 함부로 걷지마라. 그대가 남긴 발자국은 뒤에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싯구처럼 나의 삶이 후배들과 후세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지를 염려하며 살았던 분이었다. 선종의 초조로서 가섭존자를 기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해 모범을 보였던 존자의 삶의 태도를 기리는 사찰과 조각상이 만드는 아난다 스님께 존경을 표한다. 禪宗을 표방하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佛事에 적극 동참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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