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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기

1. 룸비니와 그 주변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를 성지 순례하는 사람이라면 룸비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룸비니 주변까지 둘러보게 된다. 그 주변이란 부처님이 왕자로 살았던 '까삘라왓투 왕궁'과 부처님이 성도후 고국을 찾아와 처음 머물렀던 '니그로다아라마(쿠단)' 그리고 쿠단 주위에 과거 부처님들을 기념하여 만든 '아소카 석주'를 순례하는 것이다. 아소카 석주는 현겁에 출현하신 '까꾸산다(Gotihawa pillar)'부처님과 '꼬나가마나(Nighihawa pillar)'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석주이다. 동쪽으로는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고향인 '데와다하'와 꼴리야 족이 부처님 사리를 모셔와 사리탑을 만든 '라마가마(람그람)'를 순례한다. 이렇게 룸비니 말고도 여섯 곳을 순례하려면 적어도 이틀에서 사흘의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순례객들이 네팔에서의 일정이 일박정도로 잡혀있는데 위와 같은 곳을 순례하려면 2~3일은 필요할 것이다.

 

자 룸비니부터 순례해보자. 룸비니는 마야부인의 친정 데와다하를 가기전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어린왕자 싯타르타가 태어난 장소에는 마하데위사원이라 불리는 철재 보호각이 세워져있다. 바닥에는 큰 크기의 납작한 벽돌이 보이고 벽은 기울어져 있어 발굴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바닥에 있는 벽돌크기를 잘 기억해 두면 다른 수투파를 방문할때 아소카대왕때 세운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용이하다. 마하데위사원을 발굴하다가 중간지점에서 돌덩이를 발견했는데 안내문에는 그돌이 아기가 태어난 정확한 장소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돌맹이에서 그러한 글자가 발견된것도 아니고 단순히 추측으로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돌맹이 모양을 보면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데 그 돌맹이를 보기위해 단체 방문객들은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한다. 마야데위사원 옆에는 아소카석주가 있는데 브라흐미 글자로 이렇게 쓰여져 있다.

"신들(devas)의 사랑을 받는 삐야다시(Piyadasi) 왕이 재위 20년에 친히 방문하다. 여기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탄생하셨기 때문에. 부처님이 태어난 곳에 돌난간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다.룸미니 마을은 세금을 ⅛만 내도록한다."

“여기서 사카무니 붓다가 태어났다(hida Budhe jāte Sakyamuni)"라는 결정적인 증거 때문에 이곳이 역사적인 부처님의 탄생지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아소카석주에 쓰여진 글자들은 브라흐미 문자를 사용하였는데 칙령의 내용이 빠알리어와 거의 일치하여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아소카 석주는 현재 인도와네팔에 13개정도가 남아있는데 순례에 있어서 빼놓치 말아야 할 곳들이다. 석주에서 우리는 룸비니의 본래 이름이 룸미니(Luṃmini)라는 것을 알게된다.  현장스님이 석주를 보았을 때는 석주 위에 빛나는 말 한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룸비니에서 부처님의 탄생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하다.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등에서는 부처님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나셨다고 전한다. 그래서 룸비니 마야대위사원에 있는 석조상에는 마하빠자빠띠고따미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아이를 받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있다. 옆구리로 태어나는 장면은 듣기에도 특별하지만 조각 하기에도 수월했을 것이다. 반면 과거 칠불의 행적을 다룬 대전기경(D14)에는 마야부인의 자궁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다른 여인들은 앉아서 출산을 하거나 혹은 누워서 출산을 한다. 그러나 보살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 보살의 어머니는 오직 서서 출산한다. 이것이 여기서 정해진 법칙이다.”

 

태어나자마자 일곱걸음을 걸었다는 이야기는 남전과 북전이 동일하다. 일곱발자국 걸으며 읊었다는 게송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불본행집경등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으 나타나고 대전기경(D14)에는 나는 세상의 최고(最高)이다. 나는 세상의 제일(第一)이다. 나는 세상의 최상(最上)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생이다.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m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ti.)”고 나타난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탄생게는 부처님이 사르나트의 녹야원으로 전도하러가는 길에 만난 사명외도 우빠까에게 대답한 게송과 매우 유사하다.

 

 

 

                                               룸비니의 탄생조각상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네. 하늘과 인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어 나는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이, 위없는 스승이네

 당신의 스승이 누구냐는 우빠까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자신 만만한 대답이다. 육체의 탄생()게와 정신의 탄생()게가 유사하다는 것은 육체의 탄생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내가 마땅히 편안히 하리라라는 선언은 그대로 오비구를 제도하기 위해서 뜨거운 태양아래서 250km를 걸어가는 붓다의 맨발을 떠오르게 한다. 누가 초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가가 가르침을 설하고 괴로움의 끝을 보게하였던 붓다의 일생은 그대로 탄생게를 실천하는 삶이었다. 나아가 내가 마땅히 편안히 하리라다시 태어남은 없다의 미묘한 차이를 음미해보면 역사속에 꾸준히 갈등해왔던 대승과 소승의 입장차이를 떠올리게 한다.

싯타르타가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난 것, 일곱걸음 걸은 것, 탄생게를 읊은 것, 용이 목욕을 시킨 것, 사당의 신들이 아기에게 절을 올린 것등의 일련의 놀라운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난 것은 니까야에서 자궁으로 태어났다는 전승이 있으니까 상징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일곱걸음 걸으며 탄생게를 읊었다는 것은 니까야 전승에도 실려있어 난감하다. 그런데 이러한 신통과 기적은 탄생때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부처님의 일생을 관통하며 수 많은 신통력이 일어난다. 신통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는 순례자가 마주치는 첫번째 질문이다. 사위성에서 외도를 제압하려고 천불화현과 쌍신변의 신통을 보인후에 도리천으로 올라가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한 이야기, 아름다운 아내를 그리워하는 난다비구를 천상에 데리고가서 아름다운 천녀를 보여주어 공부시킨 이야기, 부처님을 따라오는 릿차위들을 못 따라오게 하려고 강을 만든 이야기, 범천과 인드라왕과 같은 많은 천신들과의 대화, 자신의 미모에 집착하는 케마왕비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창조해 보여줌으로서 집착을 털어내게 한 일, 겁탈하려는 남자에게 자신의 눈알을 손으로 뽑아준 비구니가 부처님을 뵙자 눈이 원상회복되고, 병걸린 비구에게 약속한 고기를 못드리게 되자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내어 낸 청신녀가 부처님을 뵙고나서 원상회복된 이야기, 전생의 공덕으로 7세때 출가하여 삭발하는 순간에 아라한이 된 답바 말라뿟따사미 이야기등 수많은 신통력이 경전에서 발견된다. 

 

 

신통력은 믿어야 하는가?

순례자들이 마주치는 당황스러움은 싯타르타가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등의 신비스러운 사건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일이다. 우리가 순례하는 장소는 거의가 신통력과 관련된 장소이기 때문이고 실제로 팔대성지를 설명하는 여행사의 안내서들은 신통을 중심으로 성지를 설명하고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들어 경전이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 순례자는 부처님의 일생을 따라가다보면 이러한 신통과 기적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신통과 기적을 어떻게 바라보는냐에 따라 순례의 의미와 감흥이 달라진다. 부처님을 시봉하며 같이 수행했던 오비구와 야사와 야사의 친구 50인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우루웰라로 돌아가던중에 만난 30인의 부잣집 자제들은 붓다의 설법으로 모두 예류과를 얻었고 우루웰라로 찾아가서 만난 가섭삼형제와 천명의 제자들도 가야산에서 설해진 불의 설법으로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천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마가다국으로 들어가던 붓다는 제티얀에서 마중나온 빔비사라왕과 12만명의 일행을 만났는데 그중에 11만명이 예류과를 얻었다. 라자가하에 살던 사리뿟다와 목갈라는 그들과 함께 출가한 250명의 수행자들이 붓다의 설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사까족과 꼴리야족의 물싸움에대한 중재의 보답으로 출가한 500명의 청년들도 아라한이 되었으며, 최초의 마하빠자빠띠 비구니를 위시한 500명의 비구니가 다함께 아라한이 되었고 웨살리에서 다함께 열반에 들었다. 54년동안 사람을 사형시키는 직업을 갖었던 망나니 땀바다티까는 사리뿟다의 설법을 듣고 뚜시따 천신으로 태어났고 99명을 죽인 살인마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만나 아라한과를 얻었다. 이렇게 부처님을 만나자마자 혹은 며칠만에 아라한이 되고 단체로 아라한이 되는 일들은 과거생의 공덕을 끌어와 설명하지 않으면 합리적인 설명이 안되는 경우다. 수많은 삶을 거쳐오는 동안 눈을 보시하고 손과 발을 보시하고 몸을 보시했던 자타카이야기들, 과거불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 법구경의 주석서와 장로게 장로니게 주석서등에서는 게송 하나 하나가 전생의 공덕과 악업을 원인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경전과 주석서를 무조건 믿을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안믿을 수도 없어 막막지만 끝내 책을 내던지지 않고 경전읽기를 지속하게 되는 것은 경전 안에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들도 믿지 못하는건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정종이 신하에게 묻는다. 

"석씨(釋氏)가 우협(右脅)에서 탄생하였다는데, 성인(聖人)이 어찌하여 쓰[書]지 않았는가? 사람이 죽으면 지옥(地獄)에 돌아간다는 것도 거짓인가?"하였다. 신하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매우 이치 없는 말입니다. 어찌 사람으로서 옆구리에서 난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이 쓰지 않은 것입니다. 또 사람은 음양 오행(陰陽五行)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고, 죽으면 음양이 흩어져서 혼(魂)은 올라가고 백(魄)은 내려가는 것이니, 다시 무슨 물건이 있어 지옥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이것은 불씨가 미래(未來)와 보지 못한 것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한 것이니, 인주가 믿을 것이 못됩니다."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부처님이 옆구리에서 출생하였다는 것을 진실하게 믿는 불자들은 이러한 기적이 존경과 경배해야 할 내용이지만 정종과 신하의 대화를 보면 부처님의 생애를 기적적으로 표현하는 문장들이 오히려 불교를 허황된 가르침으로 폄하하는 원인임을 알수가 있다. 부처님의 신통력을 부정하는 학자들이나 초기경전도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믿을 만하지 않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증거로 그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우협출생'의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어머니 옆구리에서 태어난것은 크샤뜨리야 출신임을 상징하고 일곱발자국 걸은 것은 육도윤회를 벗어났다는 상징이라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설명은 경전의 내용을 후대에 편집했다는 증거라고 비판받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함경에서는 부처님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나셨다고 전하는데 니까야(D14)에는 마야부인의 자궁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타나는 점이다. 아함경과 니까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상세하게 비교검토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니까야에 우협출생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비교해보아도 니까야가 아함경보다는 원형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부처님 생애를 정리하거나 성지순례를 할때 니까야를 의지하는 이유다. 니까야에는 수많은 기적과 신통력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적과 신통력을 믿어야 하는가? 부처님만이 행하실수 있다는 육신통은 기술이 아니라 지혜(智)의 영역이다. 천안통(天眼通)의 어원은 딥바짝구냐나(dibbacakkhu-ñāṇa)로서 천안지(天眼智)로 번역되어야 한다. 육신통중에 마지막 누진통(āsavakkhaya-ñāṇa)은 사성제를 관통하는 것인데 여기서도 지혜(ñāṇa)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천안통,신족통,숙명통등은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부처님의 지혜(ñāṇa)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신통력을 믿지않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믿지않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교는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할 수는 없다. 신통력을 믿어야 불교공부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분들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경전속의 수많은 기적, 신통력, 예지력, 전생담등에 대해서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치부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 합리적인 사고라는 이유로 신통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나 또한 예전에는 이러한 태도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미루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 믿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이 불교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혼란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 당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잠시 제껴두고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경전공부를 할 수 있으며 훌륭한 불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그대로 잠시 판단을 중지하고 “신기한 일이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라고 지나가면 어떨까? 모른다는 것은 우리를 더 깊은 상상과 지혜로 안내해 줄 수도 있으며 성지의 대부분은 이런 신통기적과 관련되어 있기에 섣부른 판단은 순례의 감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불교공부와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태도이다. 혹시 아는가? 성지순례를 하다보면 신심이 깊어지고 이해가 높어져서 ‘헤아릴 수 없는 모든 티끌의 수를 헤아리고 바닷물은 다 마셔버리고 허공을 세어보고 바람은 묶는다 해도 부처님 공덕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고백하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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