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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불자회

2024년 1월 11일 담장 밖 경(tirokuṭṭa sutta) + 인연담+논점제기

2024년 1월 4일 '불교상담과 대화법'에 대한 방기연소장님의 강의 를 들었고 1월 11일 목요일 <백장암독송집>에 실려 있는 경전 순서대로  담장 밖 경(tirokuṭṭa sutta)을 공부합니다. 천도재를 왜 해야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초기 경전에서 제시하는  경입니다. <백장암독송집> 이 필요하신분들은 백장암 종무소(063-636-3598)에 연락하셔요'

 

다같이 부처님께 예경하고 삼귀의를 하겠습니다.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붓당 사라남 가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께 귀의합니다.(3번)

담망 사라남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강 사라남 가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승가에 귀의합니다.()

 

담장 밖 경(Kp7) 윤문

 

죽은 이들은 거리의 담장 밖에 서 있거나

옛집에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 있네.

 

사람들은 많은 음식을 차려 놓았으나

그들이 과거에 지은 업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네 기억하지 않네.

 

죽은 이들을 애처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철의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이렇게 헌공해야하네.

이 공덕이 죽은 이들에게 돌아가기를! 죽은 이들이 행복하기를!”

 

그곳에 모여 풍요로운 음식을 헌공한 후손들에게,

모여든 죽은 이들은 참으로 감사해야 하네.

후손들 때문에 이런 것을 얻었으니 그들이 오래 살기를!

우리에게 헌공했으니 그들에게 반드시 과보가 있으리!"

 

죽은 이들이 사는 곳에는

농사도, 농사지을 소도, 장사도, 장사할 돈도 없다네.

그들은 오직 우리가 주는 것만으로 살아가네.

 

마치 물이 언덕에서 골짜기로 흘러가듯이

죽은 이들은 여기서 받은 것만으로 살아가네.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죽은 이들은 여기서 받은 것만으로 살아가네.

 

"그는 나에게 재산을 물려주었고 나를 위해 일했네.
그는 나의 가족이고 동료이고 친구였네.”
과거에 죽은 이가 우리에게 했던 공덕을 회상하며
죽은 이들을  위해 헌공을 해야 하네.

 

 

후손들이 울고 슬퍼하며 통곡한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네.
여기 서 있는 죽은 이들에게
아무 이득이 없네.

 

화합승가에 행한 그대들의 보시는 
오랫동안 이익이 되고 반드시  좋은 과보를 받네
.

 

이렇게 후손들이 해야할 의무인 
죽은 이들을 위한 훌륭한 헌공을 하였으니
비구들은 힘을 얻었고
후손들에게 적지 않은 공덕이 생겨났네.

 

 


1월 11일 목요일 오후 9시에 '담장밖의 경'을 가지고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다음에도 천도재에. 관련된 '자눗소니 경'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이번 논점을 정리합니다.

승가에 보시하는 것보다 귀의하는 것이 더 공덕이 크다.고 경에서 확인되었고
시간이 없어서 중단된 논점을 올립니다. 저의 제안 이외에도 천도재에 관하여 다른 궁금점들을 올려주셔요.

 

논점

 

1. 죽은 이들에게 보시하는 것과 승가에 보시하는 것중에 한 가지만 택한다면 어느 곳에 보시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승가에 보시하는 것, 승가에 보시하는 백중행사의 유래,

 

 

2. 이미 다른 곳(천상,인간,축생등)에 태어난 조상들에게는 어떻게 보시해야 하는가?

아귀계에 태어난 조상만이 헌공을 받을 수있다.

 

 

3. '승가에 귀의 하는 것'과 '승가에 보시하는 것'중에 무엇이 공덕이 더 큰가 ? 그 이유는 무엇인가?

승가에 귀의 하는 것, 웰라마경을 근거로.....

 

 

4. 담장밖의 경과 자눗소니 경에 의거하면 우리나라에서 진행되는 49재는 어떻게 변경되어야 하는가?
 
•시체를 염하는 것(구멍을 다 막는것)이 불교적인 방법인가?

•스님들이 상주가 되었을때나 절을해야 할때 가사를 벗고 장삼을 입고있는데 이렇게하는 근거는?

•영가전에 절을 몇 번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영가전에 물과 차와 술중에서 무엇을 올리는가?

•잔을 올릴때 두번 혹은 세번 돌리는 것이 맞는가? 안 돌리는게 맞는가?

•천도재때 금강경 독경하는 것이 적당한가, 초전법륜경등 다른 경을 읽는 것은 어떤가?
(백장암에서는 초전법륜경을 독경하도록 권하고 있음)

 


• 천도재를 지낼때 부르지 않은 다른 조상들도 와서 먹을 수 있는가? 

 


•현재 불교장례지도사들은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가? 

 

• 아귀 목구멍이 바늘구멍만하다는 것이 사실일까?( 발우공양에서 발우 닦은 물을 깨끗하게 먹어야 하는 이유 )

 

 

 

 

 

 

담장 밖 경(tirokuṭṭa sutta)- 천도재의 유래

파란색은 수정한것이고 빨간색은 삭제되어야 하는 것

 

     각묵 Bhikkhu Ānandajoti
     전재성

1.죽은 이들은 거리의 담장 밖에 서 있거나

옛집에 찾아와서 들어오려고 문기둥에 서 있네.

2.사람들은 많은 음식을 차려 놓았으나 먹고 마시면서도
그들이 과거에 지은 업 때문에
아무도 죽은 이들을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네 기억하지 않네.

“Tirokuṭṭesu tiṭṭhanti, sandhisiṅghāṭakesu ca;
Dvārabāhāsu tiṭṭhanti, āgantvāna sakaṁ gharaṁ.

Pahūte annapānamhi,khajjabhojje upaṭṭhite;
Na tesaṁ koci sarati,sattānaṁ kammapaccayā.


They stand beyond the walls,
and at the junctions and crossroads,
they stand at the door-posts,
having come to their former homes.

But when abundant food and drink,
both staple and non-staple, is prepared,

no one remembers these
beings, because of their past unwholesome deeds,


1. 담장 밖의 거리 모퉁이에 서 있으면서 가신 친지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 있나이다.


2. 여러 가지 음식과 많은 음식을 차렸으나 뭇 삶들의 업으로 인해 아무도 님 들을 알아채지 못하나이다.

Outside the walls they stand and wait,
at the junctions and the crossroads.
Returning to their former homes
they wait beside the door posts.


죽은 이들을이를 애처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철의 정갈하고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이렇게 헌공보시하고해야하네. 이렇게 빌어야 한다네.

이 공덕이 죽은 이들에게 돌아가기를! 죽은 이들이 행복하기를!”

Evaṁ dadanti ñātīnaṁ,ye honti anukampakā;
Suciṁ paṇītaṁ kālena,kappiyaṁ pānabhojanaṁ;
‘Idaṁ vo ñātīnaṁ hotu,sukhitā hontu ñātayo’.

Thus those who are compassionate
give to their departed relatives,
at the right time, pure, excellent,
suitable drink and food.

Thinking: “May this go to our relatives,
may our relatives be happy!”
Those who have gathered,
the departed relatives who have assembled
around the food and drink,
respectfully offer their thanks:
3. 연민에 가득 차서 가신 친지들에게 제철의 정갈하고 훌륭하고 알맞은 음식과 음료를 헌공하오니 

4. 가신 친지들을 위한 것이니 친지들께서는 행복하소서. 

그곳에 모여 풍요로운 음식을 공양한 후손들에게,이 모여친척의 그늘에 모여든 죽은 이들은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참으로 이렇게 감사해야 하네
.
Te ca tattha samāgantvā,ñātipetā samāgatā;
Pahūte annapānamhi,sakkaccaṁ anumodare.


“후손들그들 때문에 이런 것을 얻었으니 그들이 오래 살기를!
우리에게 공양헌공했으니 그들시주에게 반드시 과보가 있으리.없지 않으리.우리를 이런 위치에 있게 해준 그들에게 보답이 있기를!”
‘Ciraṁ jīvantu no ñātī,yesaṁ hetu labhāmase;
Amhākañca katā pūjā,dāyakā ca anipphalā’.


saying: “ May our relatives live long!
Those to whom we owe this gain,
for we have been honoured,
those who give are not without reward!”

For in that place there is no ploughing,
and cattle-rearing is not found there,
similarly there is no trading,
or buying and selling of gold.
여기에 모여 친지의 가신 님들도 함께 했으니 풍요로운 음식의 성찬에 진실로 기뻐하소서.

5. 우리가 얻었으니 우리의 친지들은 오래 살리라. 
우리에게 헌공했으니 시주 에게 과보가 없지 않으리.



죽은 이들이 사는 곳에는
농사도, 농사지을 소도, 장사도, 장사할 돈도 없다네.
그들은 오직 우리가 주는 것만으로 살아가네.
Na hi tattha kasī atthi,gorakkhettha na vijjati;
Vaṇijjā tādisī natthi,hiraññena kayākayaṁ;
Ito dinnena yāpenti,petā kālagatā tahiṁ. 


마치 물이 언덕에서 골짜기로 흘러가듯이
여기서 우리가 주는 것으로 죽은 이들은 받은 것만으로 살아가네좋은 과보를 받네.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이
여기서 우리가 주는 것으로 죽은 이들은 받은 것만으로 살아가네좋은 과보를 받네.
Unname udakaṁ vuṭṭhaṁ,yathā ninnaṁ pavattati;
Evamevaṁ ito dinnaṁ,petānaṁ upakappati.

Yathā vārivahā pūrā,paripūrenti sāgaraṁ;
Evamevaṁ ito dinnaṁ,petānaṁ upakappati.

The departed in that place who have died, have to subsist on gifts.
Just as water that rains on the highlands, flows down to the lowlands,
so too what has been given here
is of benefit to the departed.

Just as rivers that are full
flow and fill up the ocean,
so too what has been given here
is of benefit to the departed.
6. 가신 님들이 사는 곳 거기에는 농사도 없고 목축도 없고 장사도 없고 황금 의 거래도 없이 보시받은 것으로 연명하나니

7. 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계곡으로 흐르듯 이처럼 참으로 보시가 이루어졌 으니 가신 님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니이다.
8. 넘치는 강물이 바다를 채우듯 이처럼 참으로 보시가 이루어졌으니 가신 님 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니이다.


그는 나에게 재산을 물려주었고 나를 위해 일했네.

그는 나의 가족이고 동료이고 친구였네.”
과거에 죽은 이가 우리에게 했던 일을 공덕을이렇게 회상하며
죽은 이들을  위해 공양 올려야 하네.
‘Adāsi me akāsi me,
ñāti mittā sakhā ca me’;
Petānaṁ dakkhiṇaṁ dajjā,
pubbe katamanussaraṁ.



그렇게 오랫동안 땅을 치고 후손들이 울며 슬퍼하고 통곡한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네.
여기 서있는 죽은 이들에게이 서 있는데 죽은 이울
아무 이득이 소용이 없네
.

Na hi ruṇṇaṁ vā soko vā,
yā caññā paridevanā;
Na taṁ petānamatthāya,
evaṁ tiṭṭhanti ñātayo.





Thinking: “He gave to me, he worked for me,
he was my relative, my friend, my companion,”
he should give gifts for the departed,
remembering what they have done before.

For no tears, or grief,
or any other lamentations,
are of any use to the departed,
as long as their relatives continue grieving in this way.


9. '나에게 베풀었다. 나에게 선행을 했다. 그들은 나의 친지, 친구, 그리고 동료였다'라고 예전의 유익한 기억을 새기며 가신 님들에게 헌공해야 하느니라.





10. 이처럼 친지들이 서 있는데 울거나 슬퍼하거나 달리 비탄에 잠기는 것은 헛되이 가신 님들을 위하는 것이 아닐지니라.




화합승가에 행한 그대의 보시는 공양 올리면
오랫동안 이익이복덕이 되고 반드시 즉시 좋은 과보를 받네
.


Ayañca kho dakkhiṇā dinnā,
saṅghamhi suppatiṭṭhitā;
Dīgharattaṁ hitāyassa,
ṭhānaso upakappati.

*This offering that has been given,
well placed in the Saṅgha,
is for their lasting welfare,
and aids them right away.

이렇게 후손들이 해야할 의무인 친척들은
죽은 이를 위해 훌륭한 공양을 올렸으니
올리고

죽은 이는 이로 인해 좋은 과보를 받고
비구들은 힘을 얻었고으니
후손들에게 적지 않은 공덕이 생겨났네.
얻은 공덕은 적은 것이 아니네
.

So ñātidhammo ca ayaṁ nidassito,
Petāna pūjā ca katā uḷārā;
Balañca bhikkhūnamanuppadinnaṁ,
Tumhehi puññaṁ pasutaṁ anappakan”ti.
But that gift that has been given,
and well placed in the Sangha,
is of benefit to them for a long time,
immediately it is of benefit.
 
This then is the definition of a relative’s duties
and by this great honour has been done to the departed,
strength has also been given to the monks,
and no little merit has been produced by you!
11. 그대가 바친 이헌공은 참모임에 의해 잘 보존되었으니 오랜 세월 그것이 축복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일지니라.





12. 친지들에 대한 의무가 실현되었고 가신 님들을 위한 훌륭한 헌공이 이루 어지니 수행승들에게 크나큰 힘이 부여되었고 그대들에 의해서 적지 않은 공덕이 생겨났느니라.

 

 

 

생전예수재

 

 

 

온라인불자회 초청 큐알코드

 

 

담장밖경 (Tirokuṭṭa Kanda, Khp.7) 인연담 

법구경 이야기 (도서출판 옛길, 무념, 응진 역)

 

 

부처님이시여, 우루웰라 깟사빠, 나디 깟사빠, 가야 깟사빠 삼형제는 어떤 공덕을 지었습니까?

그들도 또한 공덕을 짓고 아라한과만을 얻고 싶다는 서원을 세웠다.

과거 구십이 대겁 전, 그 겁에서는 띳사와 뿟사, 두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셨다.

뿟사 부처님 시대에 마힌다 왕이 까시를 다스리고 있었다.

왕의 첫째 왕비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뿟사라 지었다.

뿟사는 출가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고 붓다가 되었다.

왕의 장남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었을 때, 왕의 막내아들은 첫 번째 상수제자가 되었고 제사장의 아들은 두 번째 상수 제자가 되었다.

왕은 부처님께 가서 말했다.

나의 장남은 존귀하신 부처님이고, 나의 막내아들은 첫 번째 상수제자이고, 나의 제사장의 아들은 두 번째 상수 제자이다.”

왕은 이들 세 사람을 쳐다보고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부처님은 나의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의 것이다. 승가는 나의 것이다.”

그는 세 번에 걸쳐 감흥어를 읊었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가치있고, 스스로 올바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왕은 부처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나의 수명이 구만 년이 남았습니다.

내가 죽는 그날까지 다른 집으로 탁발하러 가지 말고 오직 나에게서만 네 가지 필수품(음식, 가사, , 거처)을 받도록 하시오.”

왕은 부처님의 동의를 받고 붓다와 승가에 공양 올리는 특권을 홀로 누리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공양 올릴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왕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또 있었다.

둘째 아들이 오백 명의 군인을, 셋째 아들이 삼백 명의 군인을, 넷째 아들이 이백 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자신들의 형, 뿟사 부처님께 공양 올릴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공양 올릴 기회를 달라고 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얼마 후에 국경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세 왕자는 왕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세 왕자가 국경지방에 질서를 회복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자 왕은 왕자들을 껴안고 이마에 키스하면서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원하는 것이 있거든 주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다 들어주겠다.”

좋습니다, 폐하.”

세 왕자는 왕의 제의를 받아들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아들들에게서 아무런 요구가 없자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아들들아, 원하는 것이 있거든 주저 말고 말해보아라. 내가 모두 들어주겠다.”

우리의 형인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싶습니다. 이것 외에 다른 포상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다.”

저희들이 영원히 공양 올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칠년 동안만 공양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것만은 허락해줄 수 없다.”

좋습니다. 그러면 육년 동안만, 아니면 오년, 사년, 삼년, 이년, 일 년 동안만,

이것도 아니 된다면 칠개월, 육개월, 오개월, 사개월, 삼 개월 동안만이라도 공양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것도 허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삼형제에게 각각 한 달씩 삼개월 동안 공양 올릴 권리를 누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좋다. 삼개월 동안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도록 하여라.”

삼형제에게는 집사와 재산관리인이 있었다. 집사는 많은 일을 도와주는 사람과 요리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삼형제는 집사와 재산관리인을 불러서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삼개월 동안 사미십계를 받고 나무껍질로 물들인 가사를 걸치고 부처님과 함께 살 것이오.

우리가 없는동안 음식을 준비해서 공양 올리는 것은 그대들이 할 일이오.

그대들은 매일 구만명의 비구들과 천명의 군인들에게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올리도록 하시오.

오늘 이후로 우리는 묵언(黙言)을 할 참이오.”

삼형제는 천 명의 부하들과 함께 십계를 받고 사미가 되어

가사를 걸치고 사원에 머물며 계를 지키고 설법을 듣고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성실히 시봉하였다.

재산관리인과 아내는 삼보에 대한 심신이 깊었다. 그는 왕자들의 창고에서 곡물을 꺼내와 집사에게 넘겼다.

집사는 일만천명의 친척들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여 부처님이 계시는 승가에 공양 올렸다.

그때 사악하고 나쁜 친척들은 아이들이 쌀죽과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들을 달라고 울고 보채자 승가에 공양 올릴 음식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스님들이 공양을 마치고 남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스님들에게 올리기도 전에 먼저 아이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친척들은 점점 탐욕스러워져서 아이들에게 음식을 주면서 자기들도 먹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맛있는 음식을 보기만 하면 먹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사악한 친척들은 모두 만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스님들에게 올릴 음식을 먹어버렸기 때문에 죽어서 아귀로 태어났다.

삼형제와 천명의 부하들은 함께 천상에 태어나, 천상에서 인간계로,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윤회하면서 구십이 대겁을 보냈다.

이것은 삼형제가 그때 아라한과를 얻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공덕을 지은 결과이다.

그들이 세운 서원은 단지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을 뿐이다.

나는 이런 영광스런 자리를 주는 데 있어서 편애하지 않는다.

그때의 집사는 지금의 빔비사라 왕이고 재산관리인은 라자가하의 위사카 장자이고 삼형제 왕자들은 깟사빠 삼형제이다.

그 친척들은 아귀로 태어나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겨 다니면서 위빳시 시키 웨사부 부처님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아귀로 있었다. 아귀들은 수명이 사만년인 현겁(現劫)에서 까꾸산다 부처님에게 다가가 배고픔을 호소하였다.

우리가 언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나의 시대에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

내가 지나간 후 커다란 땅이 일 요자나 솟아오를 때 꼬나가마나 부처님이 출현하실 것이다. 그분에게 물어보도록 하여라.”

그들은 꼬나가마나 부처님께서 출현하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쭈었다. 꼬나가마나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시대에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

내가 지나간 후 커다란 땅이 일 요자나 솟아오를 때 깟사빠 부처님이 출현하실 것이다. 그분에게 여쭈어 보거라.”

그들은 굶주림의 고통을 참으며 기다렸다가 깟사빠 부처님이 출현하시자 다가가서 여쭈었다. 깟사빠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시대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내가 지나간 후 커다란 땅이 일 요자나 솟아오를 때 고따마 부처님이 출현하실 것이다.

 

그때 그대들의 친척 빔비사라가 왕이 될 것이다.

그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그 공덕을 그대들에게 회향한다면 그대들은 천상의 음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부처님 사이의 기간(佛間劫)이 그들에게는 내일과 같았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자 빔비사라 왕은 첫째 날 부처님께 공양 올렸지만 그들에게 공덕을 회향하지 않았다.

그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왕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끔직스러운 소리를 질러댔다.

밤새 잠을 못자고 무서운 소리와 형상에 시달린 왕은 날이 밝자

웰루와나 사원으로 달려가 부처님께 어젯밤의 끔찍스런 일을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대왕이여, 구십이 대겁 전, 뿟사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셨을 때 이 아귀들은 그대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비구 승가에 올려야 할 음식을 먹어치웠기 때문에 아귀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계속 아귀로 윤회하면서 까꾸산다 부처님, 꼬나가마나 부처님, 깟사빠 부처님께 언제 음식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쭈었고

부처님들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대왕이 공양올리고 공덕을 회향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젯밤 그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운 이유입니다.

대왕께서 공양을 올렸지만 그들은 그 복덕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그러면 제가 다시 공양 올리고 공덕을 회향한다면 그들은 그 복덕을 받을 수 있습니까?”

대왕이여, 그렇습니다.”

다음날 왕은 부처님과 비구 승가를 초청했다.

다음 날이 되자 부처님은 비구들과 함께 왕궁에 도착하여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왕의 옛 친척이었던 아귀들도 왕궁에 와서 담장 밖에 서서

왕이 자신들에게 공덕을 회향해 주기를 잔뜩 기대하며 담장 밖에 서있었다.

부처님은 신통으로 왕이 옛 친척들인 아귀들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왕은 여러 가지 많은 음식을 올리고 나서 부처님 손에 공덕수를 부으며 말했다.

이 청정수를 부음으로써 오늘 올린 공양 공덕이 나의 옛 친척인 아귀들에게 돌아가기를 기원합니다.”

그가 보시 공덕을 친척아귀들에게 회향했을 때 아귀들 앞에 천상의 음식과 감로수가 나타났다.

아귀들은 음식과 물을 먹고 건강한 외모와 다섯 감관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다음날 아귀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왕에게 나타나자 왕은 또 부처님께 와서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어젯밤에는 아귀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왕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대왕이여, 당신은 가사를 보시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왕은 부처님이 계시는 비구 승가에 가사를 보시하고 말했다

이 보시 공덕을 저의 친척인 아귀들에게 회향합니다.”

그가 이렇게 보시공덕을 회향했을 때 아귀들은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천상의 옷을 입게 되었다.

이제 아귀들은 아귀의 형상을 벗고 천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부처님은 신통으로 왕의 친척들이 행복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왕은 이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부처님은 보시에 대한 이익에 대해 법문하시며 담장 밖 경(Tirokuṭṭa Kanda, Khp.7)을 설하셨다.

 

 

 


 

천도재에 대한 다양한 의견

 

< 파욱스님과의 질의 응답 >

 

중음신(中陰身)은 무엇입니까?

테라바다(상좌부) 삼장에 따르면, 중음신 같은 그런 것은 없다.

죽음의 마음(cuti citta)과 재생연결식(patisandhi citta) 사이에는 어떠한 심찰라도 없고,

중음의 삶 같은 어떤 것도 없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에 태어난 경우에 죽음의 마음과 신으로의 재생연결식 사이에 심찰라도 없으며 중음의 삶 같은 어떤 것도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면 죽음의 마음과 지옥에서의 재생연결식 사이에 중음의 삶 같은 그런 것은 없다.

그는 죽음 후에 곧바로 지옥으로 간다.

이 중음신에 관해서는 사람이 죽어서 잠시 아귀계에 머물렀다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거론되는 문제이다.

아귀의 삶을 중음의 삶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귀의 삶은 결코 중음의 삶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이렇다.

현재의 죽음의 마음 후에 아귀로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났다.

아귀의 죽음의 마음 후에 다시 인간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났다.

악업의 업력이 끝났을 때, 결과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는 또 다른 선업에 의해 다시 인간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났다.

그래서 윤회나 연기의 법칙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아귀계의 짧은 삶을 중음의 삶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통찰지로 연기를 식별할 수 있다면 이 잘못된 믿음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통찰지로 연기를 식별해야 한다. 그러면 중음신 같은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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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의 법칙>

 

아시반다까뿟따 경(S42:6) Asibandhakaputta-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날란다에서 빠와리까의 망고 숲에 머무셨다.

 

2. 그때 아시반다까뿟따 촌장이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시반다까뿟따 촌장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서쪽 지방에 사는 바라문들은 물병을 가지고 다니고 세왈라 수초로 만든 화환을 두르고 물속에 들어가고 불 지피는 헌공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어서 임종한 사람을 위로 인도한다고 하고 잘 다스린다고 하고 천상에 가게 한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세존아라한정등각자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에 태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까?”

 

4. “촌장이여, 그렇다면 이제 그대에게 다시 물어보리니 그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설명해보라.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중상모략을 하고, 욕설을 하고, 잡담을 하고, 간탐하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차 있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에 태어나소서.’라고 한다 하자.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수많은 군중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에 태어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5. “촌장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크고 넓은 바윗덩이를 깊은 물속으로 던진다 하자.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곳으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올라오소서, 큰 바윗덩이시여. 떠오르소서, 큰 바윗덩이시여. 뭍으로 나오소서, 큰 바윗덩이시여.’라고 한다 하자.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크고 넓은 바윗덩이는 수많은 군중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 주위를 돌며 예배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올라오고 떠오르고 뭍으로 나오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촌장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중상모략을 하고, 욕설을 하고, 잡담을 하고, 간탐하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차 있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들이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에 태어나소서.’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6.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중상모략을 멀리 여의고, 욕설을 멀리 여의고, 잡담을 멀리 여의고, 간탐하지 않고, 마음에 악의가 없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소서.’라고 한다 하자.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수많은 군중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7. “촌장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버터 단지나 참기름 단지를 가지고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깬다 하자. 그러면 단지의 파편이나 조각은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고 버터나 참기름은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 곳으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 주위를 돌면서 예배하면서 내려가소서, 버터와 참기름이시여. 가라앉으소서, 버터와 참기름이시여. 아래로 내려가소서, 버터와 참기름이시여.’라고 한다 하자.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그 버터나 참기름은 수많은 군중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 주위를 돌며 예배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내려가고 가라앉고 아래로 내려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촌장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중상모략을 멀리 여의고, 욕설을 멀리 여의고, 잡담을 멀리 여의고, 간탐하지 않고, 마음에 악의가 없고,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군중이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찬미가를 암송하고 합장한 채 그의 주위를 돌며 예배하면서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소서.’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8.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아시반다까뿟따 촌장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 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색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시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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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인 제사>

 

그때 우다이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세존께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나누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우다이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께서도 제사를 칭송하십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모든 제사를 칭송하지는 않는다.

바라문이여, 그러나 나는 모든 제사를 칭송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바라문이여, 그 제사를 통해서 소들을 죽이지 않고 염소와 양들을 죽이지 않고 닭과 돼지들을 죽이지 않고 여러 생명들을 살해하지 않는,

즉 항상 보시를 베풀고 대를 이어가는 제사를 나는 칭송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살생을 포함하지 않는 제사에 아라한들과 아라한도에 든 자들은 다가가기 때문이다.”

세상의 장막을 벗겨버리며 세상에서 시간과 태어날 곳을 넘어섰고 잘 제어된 청정범행을 닦는 자들은 살생을 포함하지 않는 적절한 제사를 적당한 때에 거행하는 그런 제사에 참여한다.

공덕에 관해서 현명하신 부처님들은 이러한 제사를 칭송하노라.

어떤 이는 깨끗한 믿음을 가진 마음으로 제사와 슈랏다에 어울리는 공양물을 올리고 제사지낸다.

좋은 들판인 청정범행을 닦는 자들과 보시를 올려 마땅한 그들에게 올린 공양은 잘 준 것이고 잘 제사 지낸 것이고 잘 얻은 것이다.

그 제사는 좋은 결실을 가져오고 삼보에 신심있고 슬기롭고 현명한 자는 아낌없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제사 지낸 뒤 악의가 없는 행복한 세상을 얻으리.“ - 쌍윳따 니까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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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결실과 이익이 있는 제사>

 

꾸미단따 브라흐민(제관)은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 부처님, 이 제사보다 덜 어렵고 덜 번거롭고 그러나 더 큰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 다른 제사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브리흐민이여.

그것은 덜 어렵고 덜 번거롭고 어느 누구라도 청정한 마음으로 계행을 지키는 것입니다.

살생을 하지말고, 주지않은 건 갖지 말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 말며, 술을 금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덜 어렵고, 덜 번거로우며, 그러나 더 큰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고따마 존자님 이 다섯가지 계(오계)보다도 더 큰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 다른 제사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브리흐민이여. 그것은, 붓다는 온전히 깨달은 분이며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바른 뜻과 문장을 갖춘 법을 설합니다.

그리고 완전하고도 청정한 수행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계행을 닦습니다.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마음챙김에 머뭅니다.

그 결과 네 가지 선정을 통하여 번뇌를 맑힙니다.

그리고 열반을 성취하고 윤회의 사슬을 끊습니다.

이런 수행이 바로 그 어떤 제사보다도 더 단순하고 더 많은 결실과 이익을 가져오는 제사입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고따마 존자님 저를 재가신도로 받아 주십시오.

저는 각각 700마리의 황소와 수송아지와 암송아지와, 염소와 숫양을 모두 풀어 주겠습니다.

저는 그들을 살려주고 푸른 풀을 먹게 하겠습니다.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하고 시원한 바람이 그들 주의에 감돌게 하겠습니다."

꾸따단따 경(Kutadanta sutta)(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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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에 대하여..

49재는 초기경에 바탕한 의식은 아닙니다.

초기경이나 아비담마에 의하면, 죽고 나서 행하는 의식보다는 죽기전 특히 죽기 직전에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을 위해서 법을 설해주어 그 사람이 집착을 여의고 편안하게 한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49재가 상업화되고 속물화되는 것은 불자들이 스스로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특히 법(dhamma)을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아가는 불자들은 삿된 작자들의 삿된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49재는 단순하게 조상에게 음식을 올리는 제사가 아니라 돌아가신 분에게 부처님의 법문을 들려주어 집착을 여의게 하는 의식이며, 출가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보시를 하여 영가가 그 공덕으로 선처에 태어나게 하고, 재에 참석한 사람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의 삶을 점검해보는 숭고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의 가정에서 상이 생기면 항상 법을 념하고 고인을 위한 자비의 념을 하고 경을 독송하고 일정기간(우리 불교의 전통대로 49일이 좋겠죠)을 스스로 근신하며 우리 가정을 있게 해주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헌신한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아울러 자신의 삶도 겸허하게 돌아보는 기간을 가지며 그분의 이름으로 사회나 사찰에 보시하는 것은 참으로 좋고 유익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재()는 조상들에게 음식을 올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재는 포살로 옮기는 우뽀사타(uposatha)의 번역입니다.

부처님 시대부터 불자들은 초하루나 보름이나 그믐 등의 정해진 날에는 절에가서 5계나 8계나 10계를 지키면서(특히 8, 중국에서는 이를 8관재계라 옮겼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까지는 철저하게 지켜지던 풍속이었습니다.)

자신을 다스리고 공덕을 쌓았습니다. 49재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49재는 돌아가신 분의 공덕을 위해서 후손들이 절에 가서 계를 지키고 법문을 듣고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 되어야합니다. 그 이상의 복잡한 의미부여는 혼란스러워질 뿐이라 생각됩니다.

- 각묵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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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에는 중음천, 49, 천도재 등이 없다

부파불교시대에 오면서 무아와 윤회라는 굉장히 어렵고도 상충되는 교리에 대하여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윤회의 주체와 인식의 범위가 초기불교의 6식을 넘어서 아뢰야식이라는 8식으로 까지 확대 됩니다. 그리고 중음천 사상이 탄생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북방및 중국으로 넘어 오면서 중국의 민간신앙등과 합쳐져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확대재생산 된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지막 숨넘어갈때의 의식이 환생시 첫번째 의식이 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의 의식을 좋게 갖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논서에 보면 파리가 파리채로 맞아죽는 그 찰나적인 순간에도 마지막 의식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임종전에 염불을 해주고 살아생전에 선업을 했던 좋은 행위들을 기억하게 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도록 하는게 중요하기에 이곳에서는 임종직전의 의식을 중요시합니다.

49재나 천도재 그리고 제사 등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것은 내자신의 정신적 안정과 행복을 우선적으로 위한 것이고, 그리고 이러한 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선업을 쌓도록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그런 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오늘날처럼 상업적으로 변질된 49재나 천도재 의식은 결코 수행승에게나 재가자에게나 모두다 좋지 않은 불선업이라고 봅니다. 똑같은 돈을 주어도 진심으로 공양하고 예경하면 스스로 복을 쌓는 것이겠지만... 이기적인 마음으로 장사적인 행태로 돈을 주고 받는다면 이건 매불이거나 장사꾼들의 상행위나 불법적인 뇌물이겠지요.

사찰 공간안에 귀신을 끌고 들어오는, 특히 법당안에 귀신을 끌고 들어오는 행위는 어떠한 논리를 내세워도 불교도의 올바른 모습은 아닙니다... 그런게 필요하다면 신도의 집에 가서 하거나 죽은자의 무덤 앞에서 하면 됩니다... 어쩌다 한국불교는 죽은자들의 놀이판이 되었는지... 어떻게 하다가 귀신들이 노니는 장소로 변했는지 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붓다의 법에 밝지 못해도 천도재 제삿상 차리고 염불하는데에는 입에 침 튀겨가며 장황설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 어쩌다 불교가 이모양 이꼴이 되었는지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입니다...

몇번이라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게 있다면... 불교는 죽은자를 (귀신이든 시체이든) 위한 종교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닙니다. 오직 현재 이자리 이곳 세간사에 사는 중생들을 위한 가르침 입니다. 따라서 사찰에서 죽은 자를 전부다 몰아내야 합니다... 죽은 자들이 차지하고 앉아야 할 공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꼭 필요하다면 담장 밖이나 아니면 따로이 전각을 만들면 됩니다... 법당은 붓다의 법을 배우는 곳이지 결코 죽은자를 위해서 염불하거나 굿판을 벌이는 장소가 아닙니다...

여러번에 걸쳐서 말씀드리지만.. 천도재나 제사를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자신의 만족이나 행복한 마음을 위한 것입니다. 천도재를 하든 제사를 지내든... 조상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나면 조상이나 부모님에게 불효한 마음이 조금은 참회되는 것 같고 기분도 좋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내 삶도 되돌아 보게 되고.. 가족들과 제삿밥 둘러 앉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천도재를 꼭 하고 싶으면 수행승을 집으로 모셔서 하면 됩니다. 또한 천도재는 개인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염불을 해드려도 좋고 또는 집에 모셔논 불상에다가 매일같이 기도하거나... 그럼 충분하다고 봅니다...

도대체 어쩌다 천도재가 사찰에서 돈 놀이로 전락했는지... 가슴을 칠 노릇입니다... 무식한 불자들과 무식한 수행승들이 모두 다 만들어 낸 왜곡된 불교의 단편들 입니다... 타락하고 이기적이고 더럽혀진 마음으로 불교를 믿는 불자들에 의해서 불교가 이토록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오염된 불자들이 오염된 불교를 만들고 있는 것 입니다. 저는 결코 수행승만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이비 불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 합니다...

이제라도 배우고 올바르게 불교를 알아서... 제대로 된 믿음으로 가져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ㅡ 스리랑카 불자님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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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올리는 공양(供養) 뿐 천도재란 없다

천도재는 중인도 마갈타국의 북쪽의 숲에서 죽은자를 위한 장례를 치루던 것에서 전래되어 오게 되었고, 중국을 통하여 들어오면서 도교의 시왕사상(十王思想)이 접목 되면서 오늘날의 한국불교의 49. 천도재로 자리를 잡게되었습니다. 한국불교는 효라는 명분 아래 재가 크게 성행했습니다. 부수적으로 행했던 재가 돈벌이가 잘되니 본말이 전도되어 재만 지내는 절이 아마 8~90%는 차지할 것입니다.

대승경전의 지장보살은 가진 재산을 팔아 부처님을 찾아 가던중 헐벗은 이웃에 옷까지 벗어주고나니 부처님께는 가진 향하나 피워 부처님뵙기를 소원하였고, 목련 존자도 스님들 하안거 끝나는날 갖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스님들께 공양을 베풀어 어머니가 지옥고를 벗어 났다고 하던데, 현시대의 불자들은 절에다 천도재를 위탁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사람이 죽어 초상이 나면, 무당을 불러다 진호귀(鎭呼鬼)라는 자리걷이 굿을 해주고, 3년상을 치루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속이 미신으로 외면당하기도 했지만, 굿하는것이 번거로우니 굿하는대신 절에서 49재나 천도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천도재, 구병시식, 점 등은 무당들 것인데 불교에서 따라(흡수?)해 버린 것이지요. 역으로, 무속인이 법당을 차리고 삼존불까지 모셔두고, 주력까지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남자 박수는 법사로. 여자무당은 보살로 불리우고 있으니. 불교의 법당,법사, 보살호칭까지 사용하고 있지요.

이렇게 되다보니 일반인들은 무속집인지 절집인지 구분을 못하게된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절집에도 사주봐주고 천도재하고, 무당집에도 점쳐주고 굿하고, 인등, 연등까지 접수받고 있습니다.

유명한 절에서 하는 천도재는 억대까지 있다 합니다. 상을 당해 초재부터 막재까지 절에서 하게되면 수백만원이 드는데, 막말로 돈없는 사람은 절에다 위패하나 올릴 수 없는 입장입니다.

방법이 있다면, 영험적으로 돈되는건 다 끌어드린 비불교적인 요소들을 한국정서에 맞게 시정하고, 붓다의 가르침과 수행을 지도해주는 근본불교로 돌아가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오계를 지키며 청정한 삶을 살며 선정을 통하여 윤회를 끊는 길이 더 큰 결실과 이익이 있는 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도재를 백만날 지내고 만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낸다해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며,주지않는 것을 탐내며, 삿된 음행을 하며, 거짓말을 하며, 술을 마신다면 아무 이익이 없다 하십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지막 숨넘어갈때의 의식이 환생시 첫번째 의식이 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의 의식을 좋게 갖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집착한 것이 임종시 떠오르면 바로 재생을 한답니다. (사랑했던 동물등이 떠오르면 축생으로서 윤회.) 살아 계실 때, 여의치 않으면 임종전에 삼보에 귀의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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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스리랑카 사찰 마하위하라에서 스리랑카인 및 한국 불자들을 위한 영가 추모법회를 행하였습니다.

2020년 돌아가신 23명의 스리랑카인들과 이정숙님, 김은주님의 가족 영가들을 위한 공덕 회양식을 가졌습니다.

스리랑카 노동자들은 매년 한국에서 팔, 다리를 잃고,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며, 사고로 죽는 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2020년 한해에만 여러가지 이유로 사망한 스리랑카 청년들이 20여명이나 됩니다. 코로나가 만연한 상황으로, 많은 분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하위하라에서는 한국 하늘 아래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스리랑카인들을 기리기 위해 보시물을 올리고 대념처경을 독송하고 영가들에게 공덕을 회향하였습니다.

*법회식순

1.삼귀의 오계

2.삼보의 공덕

3.공양물 올리기

4.축원

5.영가단에 대념처경, 담장 밖(Tirokutta, 띠로꿋따 )경 독송

6.공덕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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