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13일 목요일 오후 9시에 대반열반경(D16) 여섯번째 <온라인불자회> 공부모임을 시작합니다.
다 같이 합장하고 큰 소리로 합창합니다.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붓당 사라남 가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께 귀의합니다.(3번)
담망 사라남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강 사라남 가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승가에 귀의합니다.()
2.1. 그때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제 꼬띠가마로 가자.”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응답했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꼬띠가마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거기 꼬띠가마에 머무셨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 8. Ariyasaccakathā
2.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Tatra sudaṃ bhagavā koṭigāme viharati.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Catunnaṃ, bhikkhave, ariyasaccānaṃ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idaṃ dīghamaddhānaṃ sandhāvitaṃ saṃsaritaṃ mamañceva tumhākañca.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sandhāvitaṃ) 윤회하였다(saṃsaritaṃ).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였다.
Katamesaṃ catunnaṃ? Dukkhassa, bhikkhave, ariyasaccassa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idaṃ dīghamaddhānaṃ sandhāvitaṃ saṃsaritaṃ mamañceva tumhākañca. Dukkhasamudayassa, bhikkhave, ariyasaccassa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idaṃ dīghamaddhānaṃ sandhāvitaṃ saṃsaritaṃ mamañceva tumhākañca. Dukkhanirodhassa, bhikkhave, ariyasaccassa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idaṃ dīghamaddhānaṃ sandhāvitaṃ saṃsaritaṃ mamañceva tumhākañca.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bhikkhave, ariyasaccassa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idaṃ dīghamaddhānaṃ sandhāvitaṃ saṃsaritaṃ mamañceva tumhākañca.
비구들이여, 이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고 꿰뚫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는 잘라졌고, 존재로 인도함(khīṇā bhavanetti)은 부수어졌으며, 다시 태어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punabbhavo) 않는다.”
Tayidaṃ, bhikkhave, dukkhaṃ ariyasaccaṃ anubuddhaṃ paṭividdhaṃ,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 anubuddhaṃ paṭividdhaṃ,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 anubuddhaṃ paṭividdh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anubuddhaṃ paṭividdhaṃ, ucchinnā bhavataṇhā, khīṇā bhavanetti, natthi dāni punabbhavo”ti.
2.3.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게송으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긴 세월을 이 생 저 생으로 치달려왔다.
이제 이 [네 가지 진리]들을 보았다.
존재로 인도함을 근절하였다.
괴로움의 뿌리를 잘라버렸다.
이제 다시 태어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4. 참으로 이렇게 세존께서는 꼬띠가마에 머무시면서 많은 비구들에게 법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이러한 것이 계다. 이러한 것이 삼매다. 이러한 것이 통찰지다. 계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삼매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삼매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통찰지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통찰지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마음은 바르게 번뇌들로부터 해탈하나니, 바로 이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와 존재에 기인한 번뇌와 무명에 기인한 번뇌이다.”라고.
윤회를 벗어나 깨달음으로 향하는 자들 9. Anāvattidhamma sambodhi parāyaṇa
2.5. 그때 세존께서는 꼬띠가마에서 원하는 만큼 머무신 뒤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제 나디까로 가자.”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응답했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나디까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거기 나디까에서 벽돌집에 머무셨다.
Atha kho bhagavā koṭigāme yathābhirantaṃ viharitvā āyasmantaṃ ānandaṃ āmantesi: “āyāmānanda, yena nātikā tenupaṅkamissāmā”ti. “Evaṃ, bhante”ti kho āyasmā ānando bhagavato paccassosi. Atha kho bhagavā mahatā bhikkhusaṃghena saddhiṃ yena nātikā tadavasari.
2.6. 그때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살하라는 비구가 나디까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그의 태어날 곳[行処]은 어디이고 그는 내세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난다라는 비구니가 나디까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그의 태어날 곳은 어디이고 그는 내세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수닷따라는 청신사가 나디까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그의 태어날 곳은 어디이고 그는 내세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수자따라는 청신녀가 나디까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그의 태어날 곳은 어디이고 그는 내세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까꾸다라는 청신사가 … 깔링가라는 청신사가 … 니까따라는 청신사가 … 까띳사바라는 청신사가 … 뚯타라는 청신사가 … 산뚯타라는 청신사가 … 밧다라는 청신사가 … 수밧다라는 청신사가 나디까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그의 태어날 곳은 어디이고 그는 내세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2.7. “아난다여, 살하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脱]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脱]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렀다.[阿羅漢]
“Sāḷho, ānanda,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āsi.
아난다여, 난다 비구니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었다.[不還者]
Nandā, ānanda, bhikkhunī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opapātikā tattha parinibbāyinī anāvattidhammā tasmā lokā.
아난다여, 수닷따 청신사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미혹이 엷어져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一来者]가 되어, 한 번만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
Sudatto, ānanda, upāsako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rāgadosamohānaṃ tanuttā sakadāgāmī sakideva imaṃ lokaṃ āgantvā dukkhassantaṃ karissati.
아난다여, 수자따 청신녀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
Sujātā, ānanda, upāsikā tiṇṇ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sotāpannā avinipātadhammā niyatā sambodhiparāyaṇā.
아난다여, 까꾸다Kukkuṭo 청신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었다.
아난다여, 깔링가 청신사는 … 니까따 청신사는 … 까띳사바 청신사는 … 뚯타 청신사는 … 산뚯타 청신사는 … 밧다 청신사는 … 수밧다 청신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었다.
아난다여, 50명이 넘는 나디까의 청신사들은 임종하여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었다.[不還者]
아난다여, 90명이 넘는 나디까의 청신사들은 임종하여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미혹이 엷어져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一来者]가 되어, 한 번만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
아난다여, 500명이 넘는 나디까의 청신사들은 임종하여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
법의 거울[法鏡dhammādāso]에 대한 법문
2.8. "아난다여, 이와 같이 죽은 뒤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은 여래에게 있어서 어렵거나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람이 죽을 후 일일이 여래에게 찾아와서 묻는다면 이것은 여래에게 번거로운 일이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법의 거울[法鏡]'이라는 법문을 하리니 이것을 구족한 성스러운 제자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지옥을 부수었다. 나는 축생의 모태를 부수었고, 아귀계를 부수었으며, 나는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를 부수어서 흐름에 든 자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라고 스스로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2.9.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그 법의 거울(dhammādāso)이라는 법문이기에 이것을 구족한 성스러운 제자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지옥을 부수었다. 나는 축생의 모태를 부수었고, 아귀계를 부수었으며, 나는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를 부수어서 흐름에 든 자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 라고 스스로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應供. 응공]이시며,
바르고 완전히 깨달으신 분[正等覺. 정등각]이며,
지혜와 실천이 구족하신 분[明行足. 명행족]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선서]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 세간해]이시며,
위 없는 분[無上士. 무상사]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 조어장부]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천인사]이시며,
깨달은 분[佛.. 불]이시며,
존귀하신 분[世尊. 세존]이시다"라고
움직이지 않는 깨끗한 믿음(aveccappasādena)을 지닌다.
‘세존에 의해 잘 설해진 이 가르침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
시간이 걸리지 않고(때를 놓치지 않고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것),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현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법에 움직이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지닌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잘 도를 닦고(실천 수행하고),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러한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대접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세상의 위없는(anuttaraṁ ) 복밭(福田,puññakkhettaṁ)이시다.'라고 승가에 움직이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성자들이 좋아하며 훼손되지 않았고 구멍나지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고 벗어나게 하고 현자들이 찬탄하고, 원만하게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를 구족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법의 거울[法鏡,dhammādāso]이라는 법문이니 이것을 구족한 성스러운 제자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지옥을 부수었다. 나는 축생의 모태를 부수었고, 아귀계를 부수었으며, 나는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를 부수어서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라고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다." Ayaṁ kho so, ānanda, dhammādāso dhammapariyāyo, yena samannāgato ariyasāvako ākaṅkhamāno attanāva attānaṁ byākareyya:
‘khīṇanirayomhi khīṇatiracchānayoni khīṇapettivisayo khīṇāpāyaduggativinipāto, sotāpannohamasm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2.10. 세존께서는 나디까에 머무시면서 많은 비구들에게 이러한 법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이러한 것이 계다. 이러한 것이 삼매다. 이러한 것이 통찰지다. 계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삼매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삼매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통찰지는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통찰지를 철저히 닦아서 생긴 마음은 바르게 번뇌들로부터 해탈하나니, 그 번뇌들은 바로 이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와 존재에 기인한 번뇌와 무명에 기인한 번뇌이다.” 라고.
18분이 참여하여 진지하고 의미있는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어제 이야기된 내용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논점
1.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였기 때문에,나와 그대들은 이처럼 긴 세월을[이곳에서 저곳으로]치달리고 윤회하였다." 평상시에 우리는 누구나 '괴로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아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고, 괴고,행고를 다 알때 성스러운 진리를 아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성자가 되어야 ....탐진치가 소멸해야...취착이 없어야...성스러운 진리를 아는 것이다.
2."이와 같이 죽은 뒤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은 여래에게 있어서 어렵거나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윤회'가 있는 것 같은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
----불교는 존재론도 인식론도 아닌 연기론이다. 연기론은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밝히는 교설이다. 불일불이의 교설이다.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면 부처님이 염려하였던 무기와 희론으로 넘어간다. 윤회의 주체를 묻는 자도 윤회하고, 촛불의 비유를 들어 무아윤회를 설명하는 자도 윤회한다. 다만 탐진치를 없애고, 취착(upadana)을 없애야 윤회하지 않는다.
3.요즘 사찰의 법당안에는 복전함(福田函), 불전함(佛田函) , 시주함(施主函), 보시함(報施函)등의 상자가 있다. 어떠한 이름을 사용해야 가장 공덕이 크다고 할수 있나?
4."이것이 법의 거울[法鏡]이라는 법문이니 이것을 구족한 성스러운 제자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지옥을 부수었다. 나는 축생의 모태를 부수었고, 아귀계를 부수었으며, 나는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를 부수어서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정등각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라고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예류자가 된 자는 스스로 자신의 내생을 예언할 수 있는데, 스승의 인가가 필요하다고 하는 가르침은 왜 그럴까? 라는 논점에 대해서 정리한다.
이 대목을 읽고 '삼귀의한 자'는 모두 예류과를 얻은 성자다라고 보는 이가 있다. 그러면서 "세가지 족쇄를 없앤 사람을 예류과라고 한다"는 문장은 후대에 생겨난 사상으로 이해한다. 기회만 되면 니까야가 후대에 편집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고성제를 '성스로운 괴로움의 진리', 혹은 '괴로움을 보는 성자들의 진리'라고 설명한다면 어떻게 여기서 '삼귀의한 자'는 모두 예류과를 얻은 성자다라고 말할수 있는가? 성자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이미 최소한 "세가지 족쇄를 없앤 예류자"를 뜻한다. 그래서 "성스러운 제자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이라고 조건을 붙인 것이다.
또한 "움직이지 않는 깨끗한 믿음(aveccappasādena)"이란 표현은 "세가지 족쇄를 없앤"경지를 의미한다.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모두 예류과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 움직이지 없는 경(A10:64)에서도 “비구들이여, 내게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믿음(aveccappasannā)을 가진 자들은 모두 예류자들이다."라고 나타나고 있다. 표현이 다르지만 같은 내용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제대로 이해를 못한 것이다.
움직이지 없는 경(A10:64) Avecca-sutta
“비구들이여, 내게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모두 흐름에 든 자들이다. 흐름에 든 자들 가운데 다섯은 여기 [이 세상에서] 완성에 [도달하는 자]요, 다섯은 여기를 떠난 뒤에 완성에 [도달하는 자]이다.”
“Ye keci, bhikkhave, mayi aveccappasannā, sabbe te sotāpannā. Tesaṃ sotāpannānaṃ pañcannaṃ idha niṭṭhā, pañcannaṃ idha vihāya niṭṭh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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