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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불자회

2023년 5월 4일 목요일 토론 정리 -벨루와가마에서 안거

2023년 5월 4일 목요일 오후 9시에 대반열반경(D16) 일곱번째 <온라인불자회> 공부모임을 시작합니다.

다 같이 합장하고 큰 소리로 합창합니다.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붓당 사라남 가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께 귀의합니다.(3번)

담망 사라남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강 사라남 가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승가에 귀의합니다.()

 

 

 

벨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하심  12. Veḷu­vagāma­ vas­sūpaga­mana

 

2.21. 그때 세존께서는 암바빨리 숲에서 원하는 만큼 머무신 뒤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제 벨루와가마로가자.”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응답했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벨루와가마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거기 벨루와가마에 머무셨다.

 

2.2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도반을 따르거나 지인을 따르거나 후원자를 따라서 웨살리 전역으로 흩어져서 안거를 하여라. 나는 여기 이 벨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할 것이다.”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etha tumhe, bhikkhave, samantā vesāliṃ yathāmittaṃ yathā­sandiṭ­ṭhaṃ yathā­sam­bhat­taṃ vassaṃ upetha. Ahaṃ pana idheva veḷuvagāmake vassaṃ upagacchāmī”ti.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세존께 응답한 뒤 비구들은 도반을 따르거나 지인을 따르거나 후원자를 따라서 웨살리 전역으로 흩어져서 안거를 하였다. 세존께서는 거기 벨루와가마에서 안거를 하셨다.

“Evaṃ, bhante”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ṭissutvā samantā vesāliṃ yathāmittaṃ yathā­sandiṭ­ṭhaṃ yathā­sam­bhat­taṃ vassaṃ upagacchiṃsu. Bhagavā pana tattheva veḷuvagāmake vassaṃ upagacchi.

 

 

2.23. 그때 세존께서는 안거를 하시는 도중에 혹독한 병에 걸려서 죽음에 다다르는 극심한 고통이 생기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마음챙기고 알아차리시면서 흔들림 없이 그것을 감내하셨다. 그때 세존께 이런 생각이 드셨다.

Atha kho bhagavato vassūpagatassa kharo ābādho uppajji, bāḷhā vedanā vattanti māraṇantikā. Tā sudaṃ bhagavā sato sampajāno adhivāsesi avihaññamāno. Atha kho bhagavato etadahosi:

*khara: rough; hard; sharp; painful.        *bāḷha:strong; much; excessive   *māraṇantikā: 死に近い、瀕死の

 

 

내가 신도들(upaṭṭhāke,시자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비구 승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반열반에 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이 병을 정진으로 다스리고 생명의 상카라를 굳세게 하여 머무르리라.”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 병을 정진으로 다스리고 생명의 상카라(jīvita­saṅ­khā­raṃ)를 굳세게 하여 머무셨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 병을 가라앉히셨다.

“na kho metaṃ patirūpaṃ, yvāhaṃ anāmantetvā upaṭṭhāke anapaloketvā bhikkhusaṃghaṃ pari­nib­bā­yey­yaṃ. Yannūnāhaṃ imaṃ ābādhaṃ vīriyena paṭipaṇāmetvā jīvita­saṅ­khā­raṃ adhiṭṭhāya vihareyyan”ti. Atha kho bhagavā taṃ ābādhaṃ vīriyena paṭipaṇāmetvā jīvita­saṅ­khā­raṃ adhiṭṭhāya vihāsi. 

*Upaṭṭhāka: a servitor, personal attendant, servant, "famulus" Ānanda was the last u. of Gotama Buddha

“It would not be appropriate for me to become fully extinguished before informing my supporters and taking leave of the mendicant Saṅgha.

 

 

2.24. 세존께서는 병이 나으신지 오래되지 않아서 간병실에서 나와 승원의 그늘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다가가서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인내하시는 모습을 뵈었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삶을 지탱하시는 모습을 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 저의 몸도 [세존께서 아프셨기 때문에] 마치 술에 취한 것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존께서 아프셨기 때문에 저는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고, 어떠한 법들도 제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게는 세존께서는 비구 승가를 두고 아무런 분부도 없으신 채로 반열반에 들지는 않으실 것이다.’라는 어떤 안심이 있었습니다.”

 

2.25. “아난다여, 그런데 비구 승가는 나에 대해서 무엇을 [] 바라는가?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없이 법을 설하였다. 아난다여, 여래가 [가르친] 법들에는 스승의 주먹[師拳]과 같은 것이 따로 없다.

“Kiṃ panānanda, bhikkhusaṃgho mayi paccāsīsati? Desito, ānanda, mayā dhammo anantaraṃ abāhiraṃ karitvā. Natthānanda, tathāgatassa dhammesu ācariyamuṭṭhi. 

 

아난다여, ‘나는 비구 승가를 거느린다.’거나 비구 승가는 나의 지도를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자는 비구 승가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당부할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여래에게는 나는 비구 승가를 거느린다.’거나 비구 승가는 나의 지도를 받는다.’라는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가 비구 승가에 대해서 무엇을 당부한단 말인가?

Yassa nūna, ānanda, evamassa: ‘ahaṃ bhikkhusaṃghaṃ pariharissāmī’ti vā ‘mamuddesiko bhikkhusaṃgho’ti vā, so nūna, ānanda, bhikkhusaṃghaṃ ārabbha kiñcideva udāhareyya. Tathāgatassa kho, ānanda, na evaṃ hoti: ‘ahaṃ bhikkhusaṃghaṃ pariharissāmī’ti vā ‘mamuddesiko bhikkhusaṃgho’ti vā. Sakiṃ, ānanda, tathāgato bhikkhusaṃghaṃ ārabbha kiñcideva udāharissati. Ahaṃ kho panānanda, etarahi jiṇṇo vuddho mahallako addhagato vayo anuppatto. Āsītiko me vayo vattati. Seyyathāpi, ānanda, jajjarasakaṭaṃ veṭhamissakena yāpeti;

 

 

아난다여, 이제 나는 늙어서 나이 들고 노후하고, 긴 세월을 보냈고 노쇠하여, 내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여래의 몸도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살아] 간다고 여겨진다. 아난다여, 여래가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이런 [세속적인] 명확한 느낌들을 소멸하여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 머무는 그런 때에는 여래의 몸은 더욱더 편안해진다.”

evameva kho, ānanda, veṭhamissakena maññe tathāgatassa kāyo yāpeti. Yasmiṃ, ānanda, samaye tathāgato sabba­nimittā­naṃ amanasikārā ekaccānaṃ vedanānaṃ nirodhā animittaṃ cetosamādhiṃ upasampajja viharati, phāsutaro, ānanda, tasmiṃ samaye tathāgatassa kāyo hoti. 

 

 

자신과 법을 섬으로 삼고 귀의처로 삼아라

 

2.26.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灯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自帰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灯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帰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Tasmātihānanda,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随観]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随観]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随観]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随観]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짓기를 원하는 비구들은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Kathañcānanda,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Idhānand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Evaṃ kho, ānanda,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Ye hi keci, ānanda, etarahi vā mama vā accayena attadīpā viharissanti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tamatagge me te, ānanda, bhikkhū bhavissanti ye keci sikkhākāmā”ti.

 

 

 

제가 요즘 만행중이라서 토론 시간을 깜박 잊는 일이 생겼다. 오늘은 칠곡군에 와 있는데 갑자기 모 스님과 전화를 하느라 토론시간을 잊은 것이다. 그래서 meet링크를 올려 달라는 일봉스님과 도정스님의 문자도 못보고 10분정도 늦게 meet링크를 올렸다. 오늘은 15명이 참석하였고 토론 주제가 모두 관심을 가질 만한 사항이라 진지하게 토론 되었다.  3개의 논점을 소화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마지막에서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5월 20일 '윤석렬퇴진 시국법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까지 시국법회에 지지하는 의사를 표해주신 스님들이 80여명 되는데  보낸 문자에 비해서는 저조한 수치이다. 시국법회 준비위원장 도정스님은 오마이뉴스에 인터뷰를 하였는데 조힛수가 50만이 넘었다. 오늘은 청량심보살님도 마무리 축원을 해 주셨다. 

 

 

논점

 

1. 아난다여, 그런데 비구 승가는 나에 대해서 무엇을 [] 바라는가?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없이 법을 설하였다. 아난다여, 여래가 [가르친] 법들에는 스승의 주먹[師拳ācariyamuṭṭhi]과 같은 것이 따로 없다."

부처님은 스승의 주먹[師拳ācariyamuṭṭhi]은 없다며 숨김없이 다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대승경전은 왜 더 수승한 가르침이 있다고 말하는 걸까? 

...법화경의 이야기를 주로 하였지만 다른 경전에서도 대승이 수승하다는 표현들이 있고 대승이란 용어 자체가 자기들이 더 수승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기영거사님은 사향사과에서 보살십지등으로 수행계위를 설명하는 것이 벌써 차이를 두고 있는것이라고 설명했다. 법화경을 보자. 

 

 『법화경』 비유품에 지혜 제일이라고 하는 사리불이 방편품의 설법을 듣고 지난날 오해하였던 일과 지금에 이르러 진실을 알고 크게 깨닫고 기뻐하는 장면이 있다. "옛날에는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만 부처가 될 수 있음을 허락하면서 우리들 성문 제자에게는 이에 참여시키지 않았으므로 지극히 슬픈 마음을 가지고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들이 성불의 가르침을 바라고 기다렸으면 부처님은 틀림없이 대승의 가르침으로 우리들을 구하셨을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이 방편의 가르침을 베푸신 것을 그것이 방편인 줄도 모르고 수행하여 소승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그러던 중 오늘 법화경의 법문을 듣고 비로소 진실의 가르침인 일불승법(一佛乘法)을 알게 되었고, 종래의 가르침이 소승의 가르침이요, 방편의 가르침임을 알게 되었다."고 깨닫고 기뻐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부처가 사리불에게 미래에 화광여래(華光如來)라는 부처가 되어 삼승법으로 중생을 교화할 것이라고 수기(授記)한다. 이 수기에 이어 사리불은 일불승법을 이해하여 수기까지 받았지만, 자기의 도반인 1200명의 아라한들을 위하여 삼승법은 방편이요, 일불승법은 진실이라는 설법을 다시 해 주기를 간청하였고, 부처는 이에 응하여 설법을 하는데, 이것이 화택삼거유(火宅三車喩)라는 비유설화이다.

..법화경의 비유품(臂喩品)에 세 수레의 비유가 회삼귀일을 상징한다.

성문·연각은 모두 소승불교의 성자를 상징하며 소극적이고 염세적인 불교관을 표방한다. 보살은 물론 대승불교의 이상적 전형이지만, “내가 소승보다 우월하다.”고 하는 자만심을 지녔기 때문에 이 세 수레에 포함된다. 따라서, 회삼귀일사상은 이들 세 유형의 불교가 ‘법화(法華)’라는 일승으로 회향하여야 한다는 대승불교의 이상을 대변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일반적으로 소승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상대적 입장 또한 버려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일승이란 대승의 궁극, 상대적 차별의식의 초월이라고 해석한다. 이 ≪법화경≫의 논리는 대승정신의 현양이라는 측면과 함께 모든 상대적 차별을 불식시킨다는 사상성 때문에 우리 나라의 불교인들에게 매우 존중되었다. 회삼귀일사상에 많은 관심을 보인 인물은 원효·의상(義湘) 등이다.

원효의 회삼귀일사상에서 강조하는 ‘귀일(歸一)’의 정신은 원효의 화쟁논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즉, 진여(眞如)·생멸(生滅)로 표현되는 일심의 경지는 궁극에 있어서 ‘하나’를 지향하게 된다. 그것이 곧 ‘귀일심원(歸一心源)’, 즉 일심의 원천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2.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自灯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自帰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灯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帰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Tasmātihānanda,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대승불자들 중에는 다른 종교들에 진리가 있다(종교평화선언)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입장과 비교해보자.  

 

..불교가 다른종교와 다르다는 경전의 내용을 이해해보자는 문제였음에도 진리가 다른종교에도 있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자신의 평소 생각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토론에 임하기전에 경전의 내용을 읽고 그것에 기반해서 토론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열반경의 후반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불교가 다른 종교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수밧다여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수밧다여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수밧다여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있다수밧다여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수밧다여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

...팔정도가 있다는 것은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있다는 것이고, 연기론적인 사유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는 상견이나 단견이 있을뿐 연기론적인 견해와 사유가 없다. 부처님은 이것을 범망경(D1)에서 62가지 사견으로 정리하셨고 바른견해를 번뇌가 있는 바른견해와 번뇌가 없는 바른 견해로 자세히 설명하셨다. 진리가 다른 종교에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연기론과 다른 사상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3."아난다여, 누구든지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짓기를 원하는 비구들은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유언이 아닌데 마지막 유언이라고 보는 분들이 많다. 이것과 마지막 유언(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과 어떤 차이가 있나?

...방일하지 말라는 것은 알아차림을 유지하라는 것이고 자등명 법등명도 사념처를 닦는것으로 설명되고 사념처는 알아차림(sati)을 유지 하는 것이으로 결국은 같은 내용으로 봐야 한다. 같은 내용임에도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가르침이 마미막 유언으로서 더 와 닿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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