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면 그 어떤 것이든, 모든 존재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7. 야싸출가와 최초의 재가신자의 이야기(Yasa pabbajja pāthama upāsakathā)
1. 그때 바라나씨 시에 야싸라고 불리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 유복한 부호의 아들이 있었다. 그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었는데, 하나는 겨울궁전이고, 하나는 여름궁전이고, 하나는 우기궁전이었다.
Tassa tayo pāsādā honti—eko hemantiko, eko gimhiko, eko vassiko.
그는 우기궁전에서 넉달 동안은 기녀들의 음악에 둘러싸여 궁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So vassike pāsāde cattāro māse nippurisehi tūriyehi paricārayamāno na heṭṭhāpāsādaṁ orohati.
그때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들을 갖추고 탐닉했는데, 그가 먼저 잠들면, 시녀들이 잠들었지만, 기름등은 밤이 지나자 타올랐다.
Atha kho yasassa kulaputtassa pañcahi kāmaguṇehi samappitassa samaṅgībhūtassa paricārayamānassa paṭikacceva niddā okkami, parijanassapi niddā okkami, sabbarattiyo ca telapadīpo jhāyati.
2 그때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먼저 깨어서, 자신의 시녀들이 잠자는 것을 보았다. 어떤 시녀는 비파(vīṇaṁ)를 겨드랑이에 끼고, 어떤 시녀는 작은 북(mudiṅgaṁ)을 목에 달고, 어떤 시녀는 장구(āḷambaraṁ)를 겨드랑이에 끼고, 어떤 시녀는 머리를 산발하고, 어떤 시녀는 침을 흘리고, 어떤 시녀는 잠꼬대를 하는데, 마치 눈앞에 시체더미를 보는 것과 같았다.
aññissā kacche vīṇaṁ, aññissā kaṇṭhe mudiṅgaṁ, aññissā kacche āḷambaraṁ, aññaṁ vikesikaṁ, aññaṁ vikkheḷikaṁ, aññā vippalapantiyo, hatthappattaṁ susānaṁ maññe.
보고나서 그에게 재난에 대한 위험이 생겨나 싫어하여 떠남에 마음이 확립되었다. 그래서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감흥어린 말을 했다.
Disvānassa ādīnavo pāturahosi, nibbidāya cittaṁ saṇṭhāsi.Atha kho yaso kulaputto udānaṁ udānesi—
[야싸] "오! 괴롭다. 오! 고통이다."
“upaddutaṃ vata bho, upassaṭṭhaṃ vata bho”ti. “Oh the oppression! Oh the affliction!”
3. 그리고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황금 신발을 신고 집문으로 향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데 장애가 없기를!'이라고 말하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성문으로 향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데 장애가 없기를!'이라고 말하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이씨빠따나 지역에 있는 미가다야로 향했다.
4. 그때 세존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노천에서 경행하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훌 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경행을 그만두고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감흥어린 말을 했다.
[야싸] "오! 참으로 괴롭습니다. 오! 참으로 고통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세존] "야싸여,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여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야싸여, 오십시오! 앉으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가르침을 설하겠습니다."
“idaṃ kho, yasa, anupaddutaṃ, idaṃ anupassaṭṭhaṃ. Ehi, yasa, nisīda, dhammaṃ te desessāmī”ti.
5 그래서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여기에는 고통이 없다.'라고 듣고 환희하고 용약하여 황금 신발을 벗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리에 앉은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세존께서는 차제설법(anupubbiṁ katha)을 설했다.
곧,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 ·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 했다. dānakathaṁ sīlakathaṁ saggakathaṁ, kāmānaṁ ādīnavaṁ, okāraṁ saṅkilesaṁ, nekkhamme ānisaṁsaṁ pakāsesi.
6. 그리고 세존께서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건강한 마음(kallacittaṁ), 유연한 마음, 열린 마음, 기뻐하는 마음, 청정한 마음(pasannacittaṁ)이 생겨난 것을 알자(aññāsi), 모든 부처님들에게 핵심이 되는 법문을 설했다.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했다.
Yadā bhagavā aññāsi yasaṁ kulaputtaṁ kallacittaṁ, muducittaṁ, vinīvaraṇacittaṁ, udaggacittaṁ, pasannacittaṁ, atha yā buddhānaṁ sāmukkaṁsikā dhammadesanā taṁ pakāsesi—dukkhaṁ, samudayaṁ, nirodhaṁ, maggaṁ.
마치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Seyyathāpi nāma suddhaṁ vatthaṁ apagatakāḷakaṁ sammadeva rajanaṁ paṭiggaṇheyya; :evameva yasassa kulaputtassa tasmiṁyeva āsane virajaṁ vītamalaṁ dhammacakkhuṁ udapādi
[야싸] '무엇이든 생겨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이다.'—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n”ti.
(바라나시로 장면 이동: 편집되었다는 것을 보여줌)
7. 그후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의 어머니가 궁전에 올라갔는데,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가 보이지 않자, 대부호인 장자를 찾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대부호인 장자에게 말했다.
[야싸의 어머니] "장자여, 그대의 아들 야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대부호인 장자는 사방으로 사자를 말에 태워 파견하고, 자신은 이씨빠따나 지역에 있는 미가다야를 찾았다. 대부호인 장자는 황금 신발의 흔적을 발견 하고 그것을 추적하였다. 세존께서는 대부호인 장자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Atha kho seṭṭhi gahapati catuddisā assadūte uyyojetvā sāmaṁyeva yena isipatanaṁ migadāyo tenupasaṅkami.
[세존] '대부호인 장자가 여기에 앉아서 여기에 앉은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를 볼 수 없도록 내가 신통변화를 나타내 보이면 어떨까?'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와 같은 신통변화를 나투었다.
“yannūnāhaṃ tathārūpaṃ iddh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eyyaṃ yathā seṭṭhi gahapati idha nisinno idha nisinnaṃ yasaṃ kulaputtaṃ na passeyyā”ti. Atha kho bhagavā tathārūpaṃ iddh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esi.
9. 마침 대부호인 장자가 세존께 다가 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대부호]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를 보았습니까?"
“api, bhante, bhagavā yasaṁ kulaputtaṁ passeyyā”ti?
[세존] "장자여, 그렇다면, 이곳에 앉으십시오. 아마 이곳에 앉으면, 이곳에 앉아 있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대부호인 장자는 '내가 이곳에 앉으면,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를 볼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환희하고 용약하여 세존께 인사를 하고 그곳에 앉았다.
“Tena hi, gahapati, nisīda, appeva nāma idha nisinno idha nisinnaṁ yasaṁ kulaputtaṁ passeyyāsī”ti.
“idheva kirāhaṁ nisinno idha nisinnaṁ yasaṁ kulaputtaṁ passissāmī”ti haṭṭho udaggo bhagavantaṁ abhivādetvā ekamantaṁ nisīdi.
10. 한쪽에 물러 앉은 대부호인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차례로 가르침을 설했다. 예를 들어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임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대부호인 장자에게 건강한 마음, 유연한 마음, 열린 마음, 기뻐하는 마음, 청정한 마음이 생겨난 것을 알자, 모든 부처님들에게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것을 설했다.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했다. 마치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대부호인 장자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seyyathidaṃ—dānakathaṃ sīlakathaṃ saggakathaṃ, kāmānaṃ ādīnavaṃ okāraṃ saṃkilesaṃ, nekkhamme ānisaṃsaṃ pakāsesi. Yadā bhagavā aññāsi yasaṃ kulaputtaṃ kallacittaṃ, muducittaṃ, vinīvaraṇacittaṃ, udaggacittaṃ, pasannacittaṃ, atha yā buddhānaṃ sāmukkaṃsikā dhammadesanā taṃ pakāsesi—dukkhaṃ, samudayaṃ, nirodhaṃ, maggaṃ.
* "꼰당냐는 앎을 얻었다.(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라는 문장과 여기 "야사의 아버지가 청정한 마음이 생겨난 것을 알자(aññāsi)"라는 문장에서 똑같이 안냐시(aññāsi )가 사용되고 있다.그러므로 안냐시(aññāsi )는 '구경의 앎'이 아니라 이해했다(understood)라는 의미인 것을 알수 있다.
[대부호] '무엇이든 생겨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n”ti.
그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얻고, 진리를 알고, 진리에 깨우쳐 들어가,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승의 가르침을 신뢰하여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Atha kho seṭṭhi gahapati diṭṭhadhammo pattadhammo viditadhammo pariyogāḷhadhammo tiṇṇavicikiccho vigatakathaṃkatho vesārajjappatto aparappaccayo satthusāsane bhagavantaṃ etadavoca
[대부호]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abhikkantaṃ, bhante, abhikkantaṃ, bhante. Seyyathāpi, bhante, nikkujjitaṃ vā ukkujjeyya, paṭicchannaṃ vā vivareyya, mūḷhassa vā maggaṃ ācikkheyya, andhakāre vā telapajjotaṃ dhāreyya—‘cakkhumanto rūpāni dakkhantī’ti; evamevaṃ bhagavatā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
세존이시여, 이제 저는 세존께 귀의 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최초로 삼귀의를 제창한 재가의 남자신자가 되었다.
Esāhaṃ, bhante, bhagavant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ṃghañca. Upāsakaṃ maṃ bhagavā dhāretu ajjatagge 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n”ti. Sova loke paṭhamaṃ upāsako ahosi tevāciko.
논점
오늘은 7명이 토론하였다. 오늘은 주로 시계생천의 가르침과 기복불교의 차이를 토론하느라 1~3번까지의 논점만 토론하였다. 불자로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바라는 욕망, 불교적인 기복불교는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 하였다.
1. 부처님이 처음 사용하신 신통력은 무엇인가?
야사 아버지가 야사를 볼 수 없도록 한 신통인데, 더 먼저 나타난 신통은 보리수아래서 깨닫고 나서 누구에게 설법할까하고 생각하다가 웃따까라마뿟따와 알라라깔라마가 언제 죽었는지 알아내고, 오비구가 녹야원에 있다고 알아낸 신통(천안통)
2. 불교의 '시계천의 차제설법'은 무엇이며 언제 하는 것인가? 또 기복불교와 어떻게 다른가?
금생의 행복(보시,지계)-- 내생의 행복(천상)-- 궁극적인 행복(사성제로 열반성취) -이것이 불교의 전부다.
금생의 행복(보시,지계)과 내생의 행복(천상)은 재가자들에게 설법하셨다.
보시,지계,천상의 법문은 인과와 공덕을 믿고 하늘나라(극락이 아닌 천당)를 믿어야 하기에 이것만 이야기하면 기독교와 흡사하다. 기복과 작복의 뜻을 분명하게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의 상황을 예를 들어보자.
예) 어떤 사람이 퇴근길에 절에 들려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하며 자신의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면 이 것은 기복인가 작복인가?
기복이다- 박정규거사,기영거사,일봉스님,한병식거사,황태종거사
작복이다- 허정스님,도정스님
위에서 든 예)가 작복인 이유:
보시,지계,생천은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불교는 보시를 하더라도 대상에 따라 공덕이 달라진다는 걸 가르친다. 그래서 보시의 대상을 선택하는 하여 같은 행위라하더라도 공덕의 차이가 있게 된다. 보시받는 대상에 따라 공덕이 달라지는데 그중에서 삼귀의 하는 공덕이 매우크다는 것은 웰라마 경(A9:20)을 보면 알수 있다.
즉, 옆집 아저씨에게 절하고 빌지 않고 부처님께 절하고 빈다는 것은 비는 대상을 선택한 기복이며, 절한다는 것은 이미 삼귀의를 한자의 행위이거나 혹은 지금 삼귀의를 하는 행위이기에 작복(수행)이라고 봐야한다. 여기서 마음으로 삼귀의 하는 의업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불자의 행위는 갠지스강에 목욕하며 하늘나라에 나게 해달라고 비는 외도의 행위나 돌을 연못에 던지고 떠올라라 비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웰라마 경(A9:20)
장자여, 그러나 그러한 보시를 할 때 보시받아 마땅한 사람이 없었으며 아무도 그런 보시를 청정하게 하지 못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⓵견해를 구족한 한 사람을 공양한다면, 이것은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견해를 구족한 백 명의 사람들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⓶일래자를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백 명의 일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⓷불환자를 공양한다면 ,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불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⓸아라한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⓹벽지불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⓺여래ㆍ아라한ㆍ정등각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⓻비구승가를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⓼사방승가를 위하여 승원을 짓는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청정한 마음으로 ⓽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사향사과의 성인에게 공양하고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하는 것보다 스스로 ⓽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 더 공덕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삼귀의 공덕이 이렇게 엄청나게 크니까 병든 소년이 의업만으로 천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법구경 제2번 게송에서 맛타꾼달리가 생각으로 삼귀의한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난 이야기)에서도 알수 있다.
참고글: 바른 기복과 삿된 기복(웰라마 경(A9:20) 해설) https://whoami555.tistory.com/13742349
옛스님들은 도솔천에 나기를 바라는 결사를 하기도 함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경허스님의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함께 정혜를 닦아 함께 도솔천에 나서 함께 불과를 이루는 계사를 결성하는 글)'에서도 도솔천에 나기를 발원하는 결사를 함.
3.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하겠습니다."와 "지심귀명례"의 차이는?
"지심귀명례"는 현재 조계종 의례집에는 "목숨바처 귀의 합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하겠습니다."는 믿음의 지속성을 의미하는데 "지심귀명례"는 믿음의 강도를 나타낸다.지속적으로 귀의하고 믿음을 갖는 것이 이해를 통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더 바람직하며 불교적이다. "목숨바처 귀의 합니다".라는 것은 인간에게 정서적으로 좋치 않으므로 예불문을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하겠습니다."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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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논점은 시간관계상 토론하지 못함
4. "모든 부처님들에게 핵심이 되는 법문"은 무엇인가?
5. 법문을 이해하고 감탄 즉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라는 정형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몇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6. "이렇게 해서 그가 최초로 삼귀의를 제창한 재가의 남자신자가 되었다."는 누가 말한 것인가?
법구경 제2번 게송(의업의 중요성)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부처님 당시에 사왓티에 인색한 브라흐민이 살았다. 얼마나 인색한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고, 무엇이든지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오면 다시는 내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는 맛타꾼달리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는 그만 황달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 구두쇠는 아들을 의사에게 데려가면 치료비 쓰는게 아까워서 자신이 배워서 치료하고자 했으나 아들의 병은 더욱 깊어졌다. 아들을 집에 두었다가 죽게 되면 아들의 조문을 온 사람들이 자기네 집에 들어왔다가 자기가 재산이 많다는 것이 알려질까봐 아들을 문 밖의 정자에 내놓았다. 아들이 죽게되면 그 정자에서 바로 화장을 시켜 버릴 셈이었다.
그때 부처님은 맛타꾼달리가 누워 있는 곳에 가시었다. 맛타꾼달리는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어리석은 아버지 때문에 그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고 청정하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도 못했고, 또 부처님의 설법을 듣지도, 그 위대한 진리를 실천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몸은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에도 힘이 듭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마음을 다하여 귀의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뢴 뒤 소년은 곧 아주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제 마음은 이제 아주 평화롭고 고요하게 잘 안정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소년의 간절한 표정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였다.
"맛타꾼달리야, 너는 그것만으로 네가 할 일을 충분히 한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셨는데, 소년 맛타꾼달리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닌 채 죽었다. 그는 죽자마자 곧바로,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깨어나 맑은 정신을 지닌채 33천에 태어났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병이들어 죽어가던 맛타꾼달리가 마음으로 삼귀의를 하고나서 천상에 태어난 이야기다. 여기서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중에 의업(意業)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말도 할 수 없고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삼귀의를 할 수 있었다. 의업(意業)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다른 이야기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소레야(법구경43번게송) 이야기가 있다.
그림으로 보는 부처님의 일생:
https://www.dhammatalks.net/Articles/Life_of_the_Buddha_in_Picture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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