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기복과 삿된 기복, 바른 작복과 삿된 작복으로 나누어야
붓다는 성도 후 사르나트에서 다섯 수행자들에게 첫 설법을 하여 그들을 교화하고 나서 다시 바라나시에 사는 청년 야사를 교화 합니다. 그때 야사와 야사의 아버지를 교화하기 위해 설법을 하게 되는데 이 때는 처음부터 4성제를 설하지 않습니다. "보시를 실천하고 계율을 준수하면 하늘나라에 나게 됩니다(dānakatha sīlakatha saggakatha)라는 공덕(복)을 짓는 가르침을 설합니다.
시계생천 법문을 듣고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서 "여러 가지 애욕에는 위험과 공허함과 번뇌가 있고 애욕에서 벗어나면 큰 공덕이 있습니다."라고 설하시며 상대방이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한 삶을 따르고자 한다는 것을 아시고나서 드디어 고집멸도의 가르침을 설하십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길을 가르칩니다. 부처님 이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주문을 외거나 강물에 목욕하거나 동물희생제, 불의 숭배등을 통해서 천상에 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부처님 이전부터 기복돠 작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천상에 나는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말합니다. 시계생천 법문은 그 자체가 불교적인 기복이며 작복입니다.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기복이며 그곳에 가기 위해 구체적인 행위가 작복입니다. 기복과 작복은 나누어 질수 없는 것으로 그 관계를 첫번째 마음과 두번째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복과작복의 첫번째가 보시입니다. 보시는 보시를 통해서 공덕을 짓고자 하는 마음(기복)에서 출발하여 구체적인 행위를 하여(작복) 보시합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전에 보시의 대상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보시의 분석 경 (M142)에서 개인에 대한 보시 14가지와 승가에 대한 보시 2가지를 설합니다.
" ① 여래․아라한․정등각, ② 벽지불, ③ 아라한, ④ 아라한과의 실현을 닦는 자, ⑤ 불환자, ⑥ 불환과의 실현을 닦는 자, ⑦ 일래자, ⑧ 일래과의 실현을 닦는 자, ⑨ 예류자, ⑩ 예류과의 실현을 닦는 자, ⑪ 감각적 욕망들에 대해 탐욕을 여읜 이교도, ⑫ 행실이 바른 범부, ⑬ 행실이 나쁜 범부, ⑭ 축생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네 가지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과 여래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서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 이 두가지 승가를 위한 보시를 설명합니다. 개인에 대한 보시보다 승가에 대한 보시가 공덕이 더 크다고 설명합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면 설해질수 없었던 가르침입니다.같은 사과 하나를 보시하더라도 대상에 따라서 공덕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왕에 보시하는 김에 공덕이 더 큰 대상에 보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같은 보시로 더 큰 공덕을 받으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같은 보시로 더큰 공덕을 얻으려는 마음, 이것을 기복입니다.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기복은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바른견해는 두 종류가 있는데 유루(有漏)의 바른견해(正見)와 무루(無漏)의 바른견해(正見)입니다. 대사십경(Mahācattārīsaka sutta,M117)에서 "유루의 바른견해(正見)란 공덕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여전히 번뇌와 힘께하고 집착과 함께 하는 정견이며 무루의 바른견해(正見)란 성스럽고 번뇌와 힘께 하지 않고 출세간의 것으로 8정도의 한 요소이다 (atthi, bhikkhave, sammādiṭṭhi sāsavā puññabhāgiyā upadhivepakkā; atthi, bhikkhave, sammādiṭṭhi ariyā anāsavā lokuttarā maggaṅgā.)"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공덕을 가져오는(puññabhāgiyā)혹은 공덕의 편에 있는 유루의 바른 견해라고 설명하는 것에 유의해야합니다. 유루의 바른견해는 그자체로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불교적인 기복과 작복은 바른견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바른견해가 없는 기복과 작복을 허황된 기복, 삿된 작복이라고 합니다. 즉,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거짓말을 하고 중상모략을 하고 욕설을 하고 잡담을 하고 간탐하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차 있고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좋은 세상에 나기를 바라는 것은 '큰 바윗덩이를 깊은 물속에 던져놓고 수많은 군중이 ‘떠올라라. 떠올라라“하는 것과 같습니다.아시반다까경(S42:6)
허황된 기복, 삿된 작복은 인과를 무시하고 요행을 바랍니다. 부처님은 인과의 원리에 맞지 않는 허황된 기도를 비판하셨지만 바른견해를 바탕으로한 기복과 작복은 시계생천이라는 가르침으로 설하셨습니다. 보시는 신구의 삼업으로 보시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따듯한 눈빛을 나누는 것부터 재물을 보시하고 금강경 사구게를 보시하는 것까지 공덕을 짓는 보시는 다양합니다. 불자들은 기본적으로 삼귀의를 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법당에 와서 부처님께 과일등을 올리고 불전함에 시주를 하고 기와불사와 각종불사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시한 공덕으로 사업이 잘 되고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허황된 기도, 요행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바른견해를 바탕으로한 기복(기도)입니다. 결론적으로 바른견해를 바탕으로 하는 기복과 작복은 권장해야 합니다.
보시의 분석 경에서는 보시를 받을 대상을 16가지 설명하고 있다면 무엇을보시하고 어떻게하는가에 대한 설명은 재산이 없더라도 남에게 줄 수 있는 7가지 보시(無財七施)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화안시(和顔施)는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미소(微笑)짓는 것입니다.
둘째 언시(言施)는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심시(心施)는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며.
넷째 안시(眼施)는 사랑을 담은 눈빛, 부드러운 눈빛으로 베푸는 것이고.
다섯째 신시(身施)는 다른이의 짐을 들어주는등 상대방을 위해 몸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여섯째 좌시(坐施)는 자기의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 것이요.
일곱째 찰시(察施)는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속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시는 일상생활에서 삶의 태도와 습관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무재칠시(無財七施)를 일살생활에 실천 한다면 이것도 훌륭한 보시이자 기복이며 작복입니다. 웰라마경에서는 '보시의 공덕'보다 잠간 동안이라고 '삼귀의'를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설명합니다.
법구경 제2번 게송의 인연담을 보면 맛타꾼달리의 아들은 죽기 직전에 누운자세에서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귀의합니다"라는 생각만 하였는데도 도리천에 태어납니다. 보시하는 공덕보다 수행의 공덕(삼귀의, 무상관,자애관,무아관등)이 크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和顔施)도 보시고 사랑스러운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을 하는 것(言施)도 보시이고 상대방에게 따뜻한 마음을 품는 것(心施)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眼施)도 보시입니다. 무재칠시를 아름다운 시로 잘 표현한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라는 시를 소개 합니다.
오래된 기도 - 이문재 -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끝-
예) 어느것이 기복일까요?
A:법당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며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행위
B:법당에서 부처님께 사과1박스를 올리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행위
.....A는 보시하지 않고 절과 기원만 하므로 기복이라 할 수 있고, B는 사과1박스를 보시하면서 기원 하므로 작복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A의 경우 마음으로 삼귀의를 하면서 기원한다면 이것은 B의 사과1박스를 보시하는 공덕보다 더 큰 공덕(복)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어떤 보시보다 삼귀의를 하며 절을 하는 행위가 공덕이 크기에 이것을 기복으로도 작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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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라마 경(A9:20) 해설
1.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치에서 제따 숲의 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때 급고독 장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급고독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자여, 그대의 가문에서는 보시를 하는가?”
“세존이시여, 저의 가문에서는 보시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친 것이어서, 시큼한 죽과 함께 뉘가 섞인 싸라기 쌀로 만든 것입니다.”
2. “장자여, 거친 것을 보시하든 뛰어난 것을 보시하든 존중함이 없이 보시하고, 존경함이 없이 보시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보시하지 않고, 내버리듯이 보시하고, [보시의 과보가] 오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지고 보시하면, 비록 어떤 곳에서 그에게 그런 보시의 과보가 생기더라도 그의 마음은 훌륭한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기울지 못하고, 훌륭한 의복을 즐기는 것으로 기울지 못하고, 훌륭한 탈것을 즐기는 것으로 기울지 못하고, 다섯 가닥의 훌륭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으로 기울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이나 아내나 하인들이나 심부름꾼들이나 일꾼들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고, [그가 한 말을] 잘 알아서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장자여, 이것은 존중함이 없이 한 업들의 과보 때문이다.”
3. “장자여, 거친 것을 보시하든 뛰어난 것을 보시하든 존중하면서 보시하고, 존경하면서 보시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보시하고, 소중히 여기면서 보시하고, [보시의 과보가] 온다는 견해를 가지고 보시하면, 어떤 곳에서 그에게 그런 보시의 과보가 생길 때 그의 마음은 훌륭한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기울고, 훌륭한 의복을 즐기는 것으로 기울고, 훌륭한 탈것을 즐기는 것으로 기울고, 다섯 가닥의 훌륭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으로 기운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나 아내나 하인들이나 심부름꾼들이나 일꾼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고, 귀 기울이고, [그가 한 말을] 잘 알아서 마음에 새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장자여, 이것은 존중함을 가지고 한 업들의 과보 때문이다.”
<해설>
정성껏 보시하느냐, 함부로 보시하느냐는 보시하는 자의 태도에 의해서 과보가 달라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 “장자여, 옛날에 웰라마라는 바라문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큰 보시를 했다. 그는 은으로 가득 채운 8만4천 개의 황금그릇을 보시했고, 금으로 가득 채운 8만4천 개의 은그릇을 보시했고, 칠보로 가득 채운 8만4천 개의 동 그릇을 보시했다. 8만4천의 코끼리를 보시했나니 황금으로 장식되고 황금의 깃발을 가지고 황금의 그물로 덮인 것들이었다. 8만4천 대의 마차를 보시했나니 사자 가죽으로 덮인 것, 호랑이 가죽으로 덮인 것, 표범 가죽으로 덮인 것, 황색 담요로 덮인 것, 황금으로 장식된 것, 황금의 깃발을 가진 것, 황금의 그물로 덮인 것들이었다. 8만4천의 암소들을 보시했나니 섬세한 황마(黃麻)로 엮은 밧줄을 가졌으며 은으로 된 우유통을 가진 것들이었다. 8만4천의 처녀들을 보시했나니 보석을 박은 귀걸이로 장식하고 있었다. 8만4천의 침상을 보시했나니 양털로 된 덮개가 있고, 흰색의 모직 이불이 깔려 있고, 영양 가죽 깔개가 펴져있고, 차양으로 가려졌고, 양쪽에 심홍색의 베개가 있었다. 8만4천 꼬띠의 옷을 보시했나니 섬세한 아마(亞麻)로 된 것, 섬세한 비단으로 된 것, 섬세한 모직으로 된 것, 섬세한 면으로 된 것이었다. 하물며 먹을 것과 마실 것, 즉 딱딱한 것, 부드러운 것, 액즙, 주스에 대해서는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강처럼 흘렀다.”
5. “장자여,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참으로 그때에 큰 보시를 한 웰라마 바라문은 아마 어떤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장자여, 그러나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된다. 바로 내가 그때 웰라마 바라문이었으며 내가 그런 큰 보시를 했다.
<해설>
부처님이 웰라마 바라문으로 살면서 엄청난 보시를 했지만 이때는 성인사과와 부처님과 승가라는 보시의 대상이 없어서 큰 공덕을 짖지 못했습니다.
장자여, 그러나 그러한 보시를 할 때 보시받아 마땅한 사람이 없었으며 아무도 그런 보시를 청정하게 하지 못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견해를 구족한 한 사람을 공양한다면, 이것은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견해를 구족한 백 명의 사람들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일래자를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백 명의 일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불환자를 공양한다면 ,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불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아라한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벽지불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여래ㆍ아라한ㆍ정등각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승가를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사방승가를 위하여 승원을 짓는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謂居士!雖鞞藍大富婆羅門作如是施,施與閻浮提凡夫人至百辟支佛,不如施與如來、無所著、等正覺,此得福多。謂居士鞞藍大富婆羅門作如是施,施與閻浮提凡夫人至百辟支佛,作房舍以施與招提僧者,得福多。謂居士鞞藍大富婆羅門作如是施,施與閻浮提凡夫人,至作房舍已施與招提僧,不如以清淨意作三自歸佛法及比丘僧、受其戒,此得福多(T73佛說須達經)
<해설> 보시받아 마땅한 사람, 보시를 청정하게 하는 사람은 ‘견해를 구족한 한 사람(수다원)’부터입니다. 성인4과를 설명하다가 가장 큰 보시공덕을 가져오는 보시는 사방승가를 위하여 승원을 짓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대웅전 불사, 혹은 요사체 불사를 권하는 권선문으로 사용하면 최상의 권선문이 될 것입니다. 대신 천원을 보시하더라도 최상의 보시가되게 하려면 ”승가에 보시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라도 되뇌여야 겠지요.
부처님이 재가자들에게 처음 설하시는 보시(報施)지계(持戒)천상(天上)법문(施dānakatha 戒sīlakatha 天saggakatha)은 윤회하면서도 잘 사는 방법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전생에 웰라마라는 바라문으로 살 때 금, 은, 코끼리, 마차, 암소, 처녀, 침상, 먹을것등 엄청난 보시를 했지만 부처가 되고보니 엄청난 보시보다 더 큰 공덕(복,과보)을 가져오는 보시를 발견합니다. 부처님이 깨닫기전에는 무엇을 어떻게 보시하느냐를 중요시 했지만 부처님이 깨달은 뒤부터는누구에게 보시하느냐에 따라 공덕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불자들은 웰라마경의 가르침을 믿고 수행자와 부처님과 승가에 보시하게 됩니다. 법당에 와서 부처님께 과일등을 올리고 불전함에 시주를 하고 기와불사와 사찰불사에 보시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 그 공덕이 있을텐데 그 공덕을 이번에는 사업이 잘 되는 쪽으로 혹은 병든 아들이 쾌차하는데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바람을 갖습니다. 이것은 허황된 기도, 요행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보시공덕의 과보를 믿고 행하는 기도입니다. 혹자는 사과 3개 올려 놓고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고 핀잔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진정성을 누가 알겠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보시가 바탕이 된 기도는 부처님이 비판하였던 외도들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조건 불교의 편을 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도 부처님이 되고나서 각 보시가 갖는 공덕의 차이를 깨닫고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세세생생 윤회하는 중에 삼보를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삼보를 청하는 삼보통청, 아침저녁으로 예불드리며 합창하는 칠정례, 금차 지극지정성 헌공발원재자 동서사방 출입제처 상봉길경(항상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만 만나고) 불봉재해(재해를 만나지 아니하고).... 병고자 즉득쾌차 박복자 복덕구족 빈궁자 영득복장 단명자 수명장원 무자자 속득생남....심중소구 여의원만 형통지발원등 불보살의 명훈가피를 바라는 이러한 기도는 부처님과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보시중에서 제일 수승하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시작된 행위입니다.
부처님이 웰라마였을 때 엄청난 보시를 하였지만 깨닫고 보니 보시하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공덕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고 ‘견해를 구족한 자’등에게 보시하게 한 것, 불법을 만나기 전 과거에는 태양신이나 목신등에 헌공 기도하던 것을 이제는 대상을 바꾸어 삼보에 보시하고 기도하게 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느나라든 삼보에 의지하여 보시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불교는 바람직한 기복불교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몽고의 침입에 맞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우리조상들도 보시중에서 법보시가 최고의 공덕이 있다는 믿음을 실천한 것일 테구요.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머리위에 경전이고 몇 천겁을 지나가도,
신위상좌변삼천(身爲牀座遍三千) 부처님의 몸을 업고 삼천세계 거닐어도,
약불전법도중생(若佛傳法度衆生) 만일 중생에게 부처님법 전해주지 못한다면,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 그는 필경 부처은혜 갚은 이라 못하리라.
아마 그당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은 난리통에 왜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 미친짓을 하느냐고 힐난했을 것입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해설> 보시의 공덕을 설하고 있는 웰라마경이지만 실제로는 보시보다도 삼보에 귀의하는 공덕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경을 설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시를 많이해도 청정한 마음으로 삼귀의 하는 건만 못합니다. 보시는 남에게 하는 것이지만 삼귀의는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 날까지 귀의하겠습니다.”라고 차분하면서도 굳건하게 귀의 하는 공덕이 이전의 보시공덕보다 더욱 수승합니다.
"청정한 마음으로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서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소젖을 한번 짜는 동안만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만큼이라도 무상이라고 [관찰하는 지혜에서 생긴] 인식을 닦는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해설> 그렇다고 보시한 공덕을 쫓아가는 불교, 기도만하는 불교로 흐를까하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삼귀의 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공덕이 보시하는 삶 보다 크다고 설명하고 있고 소젖을 한번 짜는 동안만큼,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만큼이라도 자애의 마음과 무상을 관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 있다고 말하니까요. 그러므로 부처님이 설하신 ‘자애경’ ‘보배경’ ‘축복경’을 읽고 외운다면 이것 또한 대단한 공덕이 될 것입니다. 그 경을 외우고 내용을 음미하는그 순간이 바로 자애를 닦고 무상을 관하는 순간이니까요. 그래서 남방불교권에서는 마치 우리나라의 반야심경처럼 언제 어디서든 이들 경전을 외웁니다.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 (만약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만 고요히 앉아 있어도)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칠보탑을 쌓은 것보다 수승하다)
보탑필경화위진 寶塔畢竟化爲塵 (칠보탑은 필경에 먼지로 변하지만)
일념정심성정각 一念淨心成正覺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
끝
佛言:「長者!彼彌羅摩如是行施,不如有人以其飲食施一正見人,一正見人不如施百正見人,百正見人不如施一須陀洹,一須陀洹不如施百須陀洹,百須陀洹不如施一阿那含,一阿那含不如施百阿那含,百阿那含不如施一阿羅漢,一阿羅漢不如施百阿羅漢,百阿羅漢不如施一緣覺,一緣覺不如施百緣覺,百緣覺不如施如來、應、正等覺,施如來、應、正等覺不如施佛及隨佛大苾芻眾,施佛及隨佛大苾芻眾不如施四方一切持鉢僧食,施四方一切持鉢僧食不如施四方一切僧園林,施四方一切僧園林不如施四方一切僧精舍,施四方一切僧精舍不如盡形志心歸依佛、法、僧,盡形志心歸依佛、法、僧不如盡形不殺生、不偷盜、不婬欲、不妄語、不飲酒,盡形不殺生、不偷盜、不婬欲、不妄語、不飲酒,不如有人於十方世界,徧一切處行大慈心饒益眾生,離諸分別心無相故,所得果報勝前果報。」(T74佛說長者施報經)
그러나 아래 소개하는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에는 임종시에 부처님 이름을 한번 들어도 해탈하게 되며 지장보살 명호를 만번외우면 의식주도 풍족하여지고 마음도 편안하여 진다고한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복을 준다는 대승경전의 말씀을 따르는 불자들은 기복불교를 더욱 좋아하게 될 것이다.
"미래 현재의 모든 중생들이 임종할 때에 한 부처님 명호나 한 보살님 명호나 한 벽지불의 명호만 들어도 죄가 있고 없고를 물을 것 없이 다 해탈하게 된다."
"만약 미래세에 어떤 사람들이 의복과 음식이 부족하여 구하여도 원대로 안 되며, 혹은 질병이 많고, 혹은 흉하고 쇠한 것이 많아서 집안이 불안하고 권속이 흩어지며 혹은 빗나가는 일들이 많이 닥쳐서 몸을 괴롭히고 잠결에도 놀래는 일이 많거든, 이러한 사람들이 지장보살의 명호를 듣거나 지장의 형상을 보고 지극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염하여 만 번을 채우면, 이 모든 여의찮은 일이 점점 소멸되고 안락하게 되며 의식도 풍족하여지고 꿈에도 모두가 편안하리라."
* '기도'라는 용어가 신에게 비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용어라해서 불교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이 있습니다. 언어는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불자들이 공덕을 바라는 기도는 허황된 것이나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기에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볼수는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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