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行道地經卷第五
어떤 것을 수식(數息)이라고 하는가?
만일 수행하는 사람이 한가하고 사람이 없는 곳에 앉아 뜻을 잡아 어수선하지 않게 한 다음 나고 드는 숨을 헤아려 열 번까지 이르게 한다.
하나에서부터 둘까지 이르다가 만일 마음이 어수선해지면 마땅히 다시 하나ㆍ둘로부터 헤아려 아홉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
가령 마음이 어수선해지면 마땅히 숨을 다시 헤아려야 하나니, 이것을 수식이라고 말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밤낮으로 한 달이든지 1년이든지 숨 헤아리기를 익혀 열 번째 숨까지 이를 때까지 마음이 어수선하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何謂數息?若修行者坐於閑居無人之處,秉志不亂數出入息,而使至十從一至二,設心亂者當復更數一二至九,設心亂者當復更數,是謂數息。行者如是晝夜習數息,一月一年至得十息心不中亂。於是頌曰:
숨 쉼에 움직이지 않음 저 산과 같아
나고 드는 숨을 헤아려 열까지 이를 것이니
낮과 밤, 한 달, 한 해를 게을리 하지 말고
이렇게 수행하여 숨 헤아리기를 지켜야 한다.
息在不動譬如山,
數出入息令至十,
晝夜月歲不懈止,
修行如是守數息。
숨을 헤아려 이미 안정되었으면 마땅히 서로 따르게 하는[相隨] 수행을 해야 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앞에서 걸어가면 그림자가 뒤따르듯이 수행도 그와 같이 하여 숨이 나고 드는 것을 따라 다른 생각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數息已定當行相隨。譬如有人前行,有從如影隨行;修行如是,隨息出入無他之念。於是頌曰:
숨을 헤아려 뜻이 안정되면 자재를 얻나니
들고 나는 숨을 헤아리는 것이 수행이 된다.
그 마음 서로 따르면 어수선하지 않나니
숨을 헤아려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서로 따른다고 말한다.
數息意定而自由,
數息出入爲修行,
其心相隨而不亂,
數息伏心謂相隨。
수행하는 사람이 이미 서로 따르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면, 그 때는 마땅히 마치 소치는 이가 한쪽에 멈춰 있으면서 저 멀리 소가 먹이 먹는 것만 보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그와 같이 하여 처음 숨을 헤아릴 때부터 다음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다 관찰해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其修行者已得相隨,爾時當觀。如牧牛者住在一面遙視牛食;行者若茲,從初數息至後究竟,悉當觀察。於是頌曰:
소치는 이가 저 멀리 멈춰 있으면서
늪 위에 있는 소 떼를 관찰하는 것처럼
숨을 헤아려 다스리는 것도 또한 그렇게 하고
수의(守意)도 그와 같이 하는 것을 관(觀)이라고 한다.
如牧牛者遙往察,
群在澤上而護視,
持御數息亦如是,
守意若彼是謂觀。
수행하는 사람이 이미 관법을 이루었으면 마땅히 다시 환(還)과 정(淨)을 행할 것이니, 마치 문지기가 문 위에 앉아 나가고 들어오는 사람을 관찰해 모두 아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마땅히 그와 같이 하여 마음을 코끝에 매어두고 숨을 헤아리는 것을 관찰해 그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其修行者已成於觀,當復還淨。如守門者坐於門上,觀出入人皆識知之;行者如是,係心鼻頭,當觀數息,知其出入。於是頌曰:
비유하면 문을 지키는 이가
앉아서 드나드는 사람을 관찰할 적에
한곳에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고
사람 숫자를 모두 살펴 아는 것처럼
譬如守門者,
坐觀出入人,
在一處不動,
皆察知人數。
마땅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숨을 헤아려
나고 드는 숨을 보아야 할 것이니
수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한다면
숨을 헤아려 환과 정을 이루리라.
當一心數息,
觀其出入意,
修行亦如是,
數息立還淨。
어떤 것을 과하게[長] 헤아린다고 하는가?
마침 숨이 이르지 않았는데 미리 헤아리는 것이니, 숨이 코에 이르기도 전에 둘이라고 헤아리는 것을 곧 과하게 헤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何謂數長?適未有息而預數之,息未至鼻而數言二,是爲數長。於是頌曰:
숨이 아직 이르지 앉았는데
나고 들어오는 숨을 헤아리면서
하나를 셀 차례에 둘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이 하면 세는 법을 이루지 못한다.
尚未有所應,
而數出入息,
數一以爲二,
如是不成數。
어떤 것을 미급하게[短] 헤아린다고 하는가?
두 번째의 숨을 하나라고 헤아리는 것이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何謂數短?二息爲一。於是頌曰:
그 숨이 코에 이르렀다가
다시 배꼽에 이르렀는데
두 번째 숨을 하나라고 헤아린다면
이는 곧 헤아리는 법을 잘못하는 것이다.
其息以至鼻,
再還至於齊,
以二息爲一,
是則爲失數。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릴 적에 긴 것을 안다고 하는가?
수행하는 사람이 처음 숨을 헤아릴 때부터 숨이 더디고 빠름을 따라 관찰하여 그 갈래를 보아 헤아리고, 나고 드는 한도(限度)를 알아야 하나니, 이것이 헤아리는 숨이 긴 것을 아는 것이다. 헤아리는 숨이 짧은 것을 아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何謂數息而知長?其修行者,從初數息,隨息遲疾而觀察之,視忖其趣;知出入息、限度知之,是爲息長。數息短者亦復如是。於是頌曰:
숨을 헤아릴 적에 긴 것을 알며
돌이키는 숨도 이와 같이 하나니
가령 이와 같이 살피고 관찰한다면
이것을 숨의 길고 짧음을 안다고 말한다.
數息長則知,
息還亦如是,
省察設若此,
是謂息長短。
어떤 것을 헤아리는 숨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안다고 하는가?
몸 가운데 모든 헐떡거리는 숨[喘息]을 죄다 관찰하는 것이다.17) 들이쉬는 숨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몸이 온화하게 풀리는 것을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일으킬 때에 만일 몸이 나른해지고 졸음의 번뇌[睡蓋]가 생겨 몸이 무거워지면, 곧 그것을 제거해버린 다음 한결같은 마음으로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돌이키는 숨을 헤아리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何謂數息動身則知?悉觀身中諸所喘息;入息亦如是。何謂數息身和釋卽知?初起息時,若身懈惰而有睡蓋,軀體沈重則除棄之,一心數息;數息還入亦復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희열을 경험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가?
숨을 헤아릴 때에 기쁨에 이르는 것이다.18)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편안함을 만났는지를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헤아릴 때 안온함을 얻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마음이 나아가는 데를 안다고 하는가?
숨을 헤아리는 생각을 일으킬 때에 모든 생각을 관찰하는 것19)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數息遭喜卽知?若數息時歡喜所至;息入如是。何謂數息遇安卽知?初數息時則得安隱;息入如是。何謂數息心所趣卽知?起數息想,觀諸想念;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마음의 유순함을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일으킬 때 생각을 분별하면서 생각이 헤아리는 숨을 따르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마음이 깨달아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일으킬 때에 모든 관법(觀法)을 식별하면서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릴 때에 즐거움을 안다고 하는가?
처음 숨을 헤아릴 때에 만일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 기쁘게 하기를 힘써 내쉬는 숨을 순조롭게 하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心柔順數息卽知?始起息想,分別想念而順數息;息入亦爾。何謂心所覺了數息卽知?初起息想,識知諸觀而數息;息入如是。何謂數息歡悅卽知?始數息時,若心不樂,勸勉令喜以順出息;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내쉴 적에 마음이 조복되었음을 안다고 하는가?
가령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으면 강제로 조복하여 고요해지게 한 다음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마음이 해탈하였음을 안다고 하는가?
만일 숨을 내쉴 적에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면 강제로 조복시켜 터득하게 한 다음에 내쉬는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心伏出息卽知?心設不定,强伏令寂而以數息;入息如是。何謂心解脫卽知?若使出息竟不肯解,化伏令度而數出息;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무상(無常)함을 관찰해 안다고 하는가?
모든 헐떡거리는 숨이 다 무상한 것임을 보아 내쉬는 숨을 헤아리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어떤 것을 숨을 내쉴 적에 욕망이 없음을 안다고 하는가?
숨이 일어나고 멸함을 보아 이와 같이 욕망을 여의는 것이니, 이것은 곧 욕망의 여읨을 내쉬는 숨에서 보아 아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數息見無常卽知?見諸喘息皆無有常是爲出息;入息如是。何謂出息無欲卽知?見息起滅,如是離欲,是爲觀離欲出息卽知;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적멸(寂滅)함을 관찰해 안다고 하는가?
숨을 내쉴 때에 멸하여 다하였음을 보는 것이니, 이것은 내쉬는 숨에서 적멸을 보아 아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이 한다.
何謂觀寂滅數息卽知?其息出時觀見滅盡,是爲觀寂出息卽知;入息如是。
어떤 것을 숨을 헤아림에 도의 나아갈 바를 보아 스스로 안다고 하는가?
숨이 나와 멸하는 곳을 보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마음이 곧 번뇌를 여의게 된다.
번뇌를 여의어 욕망을 없애고 3처(處:界)를 버리면 뜻이 곧 해탈하나니, 이 뜻을 잘 보호하여 가지면 이것이 숨을 헤아리는 것이 된다.
이것이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에 대한 열여섯 가지 특별하게 뛰어난 것이다.
何謂見趣道數息卽自知?見息出滅處,睹是以後心卽離塵,以離無欲棄於三處志卽解脫,將護此意是爲數息。出息入息如是,爲十六將勝之說。
수행하는 이가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관찰하는 이유는 고요해지기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안정되게 머무르게 되며, 그 적연(寂然)함을 좇아서 두 가지 일을 얻게 된다. 첫째는 범부요, 둘째는 부처님의 제자이다.
行者所以觀出入息,用求寂故令心定住,從其寂然而獲二事:一者凡夫,二者佛弟子。
어떤 것을 범부가 적연함을 구하는 것인가?
마음을 멈추게 하여 5음(陰)의 번뇌[蓋]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번뇌의 환난을 제거하려고 하는가?
제1선정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제1선정을 구하려고 하는가?
다섯 가지 신통(神通)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何謂凡夫而求寂然?欲令心止住,除五陰蓋。何故欲除諸蓋之患?欲獲第一禪定故。何故欲求第一之禪?欲得五通。
어떤 것을 부처님의 제자가 적연(寂然)함을 구하는 것인가?
구하는 까닭은 온화(溫和)함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온화함을 구하는가?
정법(頂法)을 이룩하려고 하는 것이다. 5음은 공(空)한 것이어서 다 내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을 바로 정법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에 정법을 구하는 것인가?
네 가지 진리를 보아 법인(法忍)에 따라 향하려는 것이다.
何謂佛弟子欲求寂然?所以求者欲得溫和。何故求溫和?欲致頂法;見五陰空悉皆非我所,是謂頂法。何故求頂法?以見四諦,順向法忍。
무슨 까닭에 법인을 구하는 것인가?
세간의 최상법(最上法)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에 세간의 최상법을 구하는 것인가?
모든 법이 다 괴로움[苦]뿐임을 알아서 37도품(道品)20)을 분별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법이 괴로움뿐임을 알려고 하는가?
제8처(處: 地)21)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제8지(地)에 뜻을 두려고 하는가?
그 사람은 도적(道跡)22)을 이루기 위함이다.
何故順求法忍?欲得世閒最上之法。何故求世最上之法?欲知諸法悉皆爲苦,因得分別三十七道品之法。何故欲知諸法之苦?欲得第八之處。何以故?志第八之地,其人欲致道迹之故。
어떤 것을 범부가 숨을 헤아리는 인연으로 적연(寂然)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가?
마음을 숨을 헤아리는 데 두었으므로 한 생각이라도 혼란하지 않고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저 숨을 헤아림을 좇아 적연한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 방편으로부터 5음(陰)의 번뇌[蓋]23)를 모두 소멸하여 없애게 된다.
何謂凡夫數息因緣得至寂然?心在數息,一意不亂無有他念,因是之故,從其數息得至寂然,從其方便諸五陰蓋皆爲消除。
그 때는 그 호흡이 설령 나고 들지라도 항상 마음으로 하여금 그 생각을 다 반연하게 된다. 들이쉬는 숨도 이와 같다.
만일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나아가는 바를 관찰하면, 이것을 행(行)이라고 말하고 마음속이 기쁜 것을 곧 흔열(忻悅)이라고 말하며, 뜻에 맞는 것을 곧 편안함이라고 말하고, 마음의 높기가 제일이어서 자재(自在)하게 되면 이것을 안정된 뜻이라고 말하며, 비로소 5개(蓋)를 제거하면 마음속이 따라 해탈하고 이로부터 집착을 여의게 된다.
爾時其息設使出入,常與心俱緣其想念;入息如是。若出入息觀察所趣是謂爲行,心中歡喜是謂忻悅,其可意者是謂爲安,心尊第一而得自在是爲定意,始除五蓋心中順解從是離著。
어떤 것을 집착을 여의었다고 하는가?
온갖 생각과 애욕과 착하지 못한 법 행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여 기쁘고 편안하며, 마음에 한결같은 안정을 얻으면 다섯 가지 번뇌[品]가 끊어지고 다섯 가지 덕(品:德)을 구족하게 된다.
숨을 헤아리는 법으로 인하여 다섯 가지 덕(德)을 이룩하여 제1선(禪)을 얻게 된다.
何謂離著?遠於衆想愛欲不善之法行也!如是念想歡喜安隱,心得一定除斷五品,具足五品因其數息,緣致五德得第一禪。
이미 제1선을 얻은 다음에 자꾸 익히고 행하여 버리지 않으면, 제1선이 안온하고 견고하여 동요하지 않게 된다.
신통을 구하려고 하면 신족(神足)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니, 천안(天眼)으로 환하게 통해 보고 천이(天耳)로 환하게 통해 들으며, 어디로부터 와서 태어났는지를 알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며, 제 마음대로 자재(自在)하게 된다.
已得第一禪習行不捨,一禪適安堅固不動,欲求神通志于神足,天眼洞視、天耳徹聽,知從來生、知他心念恣意自在。
비유하면 연금술사가 자마금(紫磨金)을 가져다가 자유자재로 영락(瓔珞)ㆍ반지ㆍ팔찌ㆍ보요(步瑤) 같은 것을 제 마음대로 만드는 것처럼, 이미 네 가지 선정을 얻고 나면 자재한 것이 이와 같나니, 이것을 다섯 가지 신통이라고 한다.
譬如金師,以紫磨金自在所作瓔珞、指環、臂釧、步瑤之屬,如意皆成;已得四禪自在如是,此爲五通。
어떤 것을 부처님의 제자가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헤아려 적연한 경지를 얻는 것이라고 하는가?
수행하는 사람이 고요하고 사람이 없는 곳에 앉아서 마음을 거두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입을 다문 채 정진에만 오로지 하여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관찰하되 숨이 코에서부터 점점 바뀌어가면서 나아가 목구멍에 이르렀다가 마침내는 배꼽에까지 이르게 하고, 다시 배꼽에서 도로 코로 나오게 한다. 그때 마땅히 내쉬는 숨이 다르고 들이쉬는 숨이 같지 않음을 살피고 관하여 뜻으로 숨을 따르게 하며, 내쉬고 들이쉼을 순조롭게 하여 마음이 혼란하지 않게 해야 한다.
何謂佛弟子數出入息而得寂然?其修行者坐於寂靜無人之處,斂心不散,閉口專精觀出入息,息從鼻還轉至咽喉,遂到臍中,從臍還鼻。當省察之,出息有異、入息不同,令意隨息,順而出入,使心不亂。
이렇게 숨을 헤아림으로 인하여 뜻이 안정되어 적정해질 수 있고, 그 중간에 다른 생각을 영원히 없애고 오직 부처님과 법과 성중(聖衆)의 덕만 생각하며, 괴로움[苦]ㆍ괴로움의 발생원인[習:集]ㆍ괴로움의 소멸[盡 :滅]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 이 네 가지 진리의 이치만을 생각하므로 곧 흔열(忻悅)을 얻게 되나니, 이것을 온화(溫和)라고 말한다.
因是數息志定獲寂。於是中閒永無他想,唯念佛、法、聖衆之德,苦、習、盡、道四諦之義,便獲欣悅,是謂溫和。
비유하면 사람이 불을 불면 뜨거운 기운이 얼굴을 향해 오는데, 그 불길이 얼굴에 닿는 것은 아니고 다만 뜨거운 기운만 미칠 뿐이다. 그러나 불의 뜨거운 기운을 입으로 불어서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온화해지는 이치도 이와 같은 것이다.
如人吹火熱來向面,火不著面但熱氣耳!其火之熱不可吹作,當作是知溫和如斯。
어떤 것을 온난법(溫暖法)이라고 하는가?
쉽사리 구족(具足)하지 못할 선본(善本)이 아홉 가지가 있다. 즉 미유화(微柔和)ㆍ하유화(下柔和)ㆍ승유화(勝柔和)가 있고, 중하(中下)의 유화ㆍ중중(中中)의 유화ㆍ승중(勝中)의 유화가 있으며, 상유화(上柔和)ㆍ중상(中上)의 유화ㆍ상상(上上)의 유화가 있다.
何謂溫暖法?未具足善本,凡有九事:有微柔和、下柔和、勝柔和,有中、有中中、有勝中,有上柔和、有中上、有上上柔和。
저 미유화와 하유화를 아는 것을 곧 온화(溫和)한 선본(善本)이라고 말하고, 중하ㆍ중중ㆍ중상의 유화를 곧 법정(法頂)의 선본이라고 말하며, 하상ㆍ중상ㆍ상상의 유화를 바로 진리의 유화법인(柔和法忍)이라고 말한다. 상중(上中)의 상유화(上柔和)를 곧 세간에서의 거룩한 법이라고 말한다. 이 아홉 가지 일이 선본의 이치이다.
知彼微柔和、下柔和,是謂溫和之善本也!其中下、中中、中上是謂法頂之善本也!其下上、中上、上上柔和是謂爲諦柔和法忍。上中之上是謂俗閒之尊法也!是九事善本之義。
그러므로 세속의 일과 모든 번뇌가 다하지 못한 수행자가 만일 온화한 행(行)을 얻어 숨을 헤아리는 생각을 지킨다면 이로 인하여 생각이 한결같게 된다.
만일 숨을 돌이킬 때라면 뜻이 그 숨을 따라 다른 생각이 없고, 만일 숨을 내쉴 때라면 숨이 나가고 돌아옴을 알아 마음이 부처님ㆍ법ㆍ거룩한 대중과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들어가 마음이 온화한데 있어서 그 마음이 더욱 수승하게 되나니, 이것을 정법(頂法)이라고 말한다.
故是俗事諸漏未盡。修行若得溫和之行,執數息想因此專念,息若還者意隨其息,無他之念;若息出者知息往反,心入佛、法及在聖衆,苦、習、盡、道如在溫和。其心轉勝是謂頂法。
마치 어떤 사람이 높은 산 위에 머물면서 4방을 관찰하면, 혹은 산에 올라오는 이도 있고, 혹은 도로 내려가는 이도 있는 것처럼, 혹은 거룩한 도에 들어가는 이도 있고, 혹은 범부의 자리에 들어가는 이도 있나니, 수행하는 사람이 이미 정법(頂法)을 얻고 나서 범부의 지위에 드는 것은 몹시 걱정스러운 일이다.
若如有人住高山上觀察四方,或上山者或有下者,或入聖道或入凡夫地。其修行者已得頂法,入凡夫地甚可憂之。
비유하면 산에서 물이 흘러내릴 때, 그 흐름이 빠르고 굽이가 거세어 파도가 가로지르는데, 어떤 사람이 그 물을 건너기 위해 물 속에 들어가 헤엄을 쳐서 저 쪽 언덕에 이르려고 하다가 소용돌이치는 파도에 제지되어 되돌아오다 중류(中流)에 있게 되면, 이미 피곤함이 너무도 극심하여 마침내는 파도에 휩쓸려 그 밑에 빠지고 말 것이니, 그 사람은 틀림없이 죽을 게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요, 저쪽 언덕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대신해 걱정하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譬如山水流行瀑疾起曲撗波,有人欲渡,入水而泅欲至彼岸,迴波制還令在中流,旣疲且極遂沈波水沒在其底;其人心念定死不疑,岸邊住人代之憂慼。修行如是。
이미 밝은 스승을 만나 아침저녁으로 깨우쳐 가부(跏趺)24)를 틀고 앉아서, 거친 옷을 입고 나쁜 음식을 먹으며, 풀방석에 앉아 그 몸을 고달프게 하는 등 이와 같이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도리어 나고 죽는 흐름의 파도에 억제된 것은 은정(恩情)에 몸을 던져 마음이 한결같지 못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생각의 못[池]에 빠졌기 때문이니 어떻게 도의 밝음을 얻겠는가?
已得明師,夙夜覺悟結加趺坐,麤衣惡食坐於草褥,困苦其身;作行如是反爲生死流波所制,投于恩情不能專一,沒於終始衆想流池,安得道明?
그러므로 마땅히 수행하는 사람을 대신해 걱정하는 것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
비유하면 어떤 도사(導師)가 많은 재물과 보배를 싸 가지고 텅 빈 들판 험난한 길을 지나서 자기 집에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악한 도적을 만나 재물을 다 잃어버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마땅히 수행하는 사람을 위하여 걱정하는 것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
是故行者當代憂愁。譬如導師多齎財寶,歷度曠野嶮厄之路,臨欲到家卒遇惡賊亡失財物,衆人悒悒也!當爲修行懷憂如是。
비유하면 농사꾼이 5곡을 심어 그 곡식의 열매가 무성하여 수확할 시기가 되었는데, 갑자기 우박과 서리가 내려 5곡의 열매를 다 잃고 오직 빈 짚만 남았을 적에 그 사람이 걱정하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譬如田家耕種五穀,子實茂盛臨當刈頃,卒有雹霜傷殺穀實,唯有遺草,其人憂愁;修行如是。
이미 정법(頂法)을 얻고 나서 범부의 지위로 들어간다면 마땅히 걱정이 될 것이다. 정법을 얻고 난 다음 다시 타락하는 것은 혹은 나쁜 벗을 만나고 애욕을 생각했거나 부정(不淨)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고 깨끗한 것을 부정한 것이라고 하며, 멀리 나돌아다니며 놀기만 좋아하고 수행을 한결같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오랜 지병에 걸렸거나 혹은 곡식이 귀한 때를 만나 굶주리고 곤궁하여 입에 풀칠조차 이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며, 혹은 집안 일ㆍ부모ㆍ형제ㆍ아내ㆍ자식ㆍ친척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혹은 거처해서는 안 될 시끄러운 가운데 앉아 있기 때문이다.
已得頂法,入凡夫地當爲悒悒。得頂法已而復墮落,或遇惡友念於愛欲,不淨爲淨、淨爲不淨,喜遠遊行不得專精,或遇長疾或遇穀貴,飢匱困厄不繼餬口,或念家事、父母、兄弟、妻息、親屬,或坐不處憒鬧之中。
이미 정법(頂法)을 얻고 나서도 도과(道果)를 이루지 못하면 쇠하고 늙음이 장차 이르러 마음이 결국엔 미혹(迷惑)해지고 갑자기 괴로운[困] 병에 걸려 목숨이 축 늘어져 다하려고 한다면, 일찍이 독실하게 믿었던 부처님ㆍ법ㆍ거룩한 대중과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영원히 다시 믿지 않아 마땅히 익혀야 할 선정을 도리어 버리고, 마땅히 관(觀)해야 할 것을 관하지 않고, 정진을 게을리 하여 본래 생각하였던 법을 영원히 다시는 일으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정법을 좇아서 물러나 타락하게 된다.
已得頂法未成道果,衰老將至心遂迷惑,悤得困病命垂向盡,曾所篤信佛法、聖衆、苦、習、盡、道永不復信;當習于定而反捨之,當觀不觀精進更懈,本所思法永不復起,以是之故從其頂法而退墮落。
어떤 것을 정법에서 물러가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일찍이 믿던 것을 날로 더욱 더 믿으면, 본래 안정되었던 마음을 끝내 움직이지 않게 할 것이요, 관찰하던 것을 잃지 않고 늘 살피고 정진하여 먼저 하던 것보다 더욱 늘려나가며, 생각하던 법을 한결같이 정진하여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법에서 물러가지 않게 된다.
何謂頂法而不退還?如曾所信日信增益,如本定心遂令不動,所觀弗失,常察精進轉增于前,所思念法專精不捨,以是之故不退頂法。
수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하면, 그 한결같은 정진으로 인하여 마음과 생각이 한결같아져서 각기 구경법(究竟法)을 사색하며, 처음부터 일찍이 동요하지 않아 새 것과 옛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아서 곧 내쉬는 숨이 다르고 들이쉬는 숨이 같지 않음을 알게 되며,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다르므로 그 마음으로 하여금 견해와 알음알이를 내게 한다.
이와 같으면, 모든 두려운 생각이 없어지나니, 이것을 중중(中中)과 중상(中上)의 법인을 얻었다고 말한다.
修行如是,因其專精而心想一,各各思惟究竟之法,初未曾動不念新故,如是卽知出息有異、入息不同;出入息異令其心生,見知如此無所畏想,是謂爲中中之上而得法忍。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없고 이 관법을 지어 앞의 뜻과 뒤의 뜻이 일찍이 착란(錯亂)을 일으키지 않으며, 분별하여 마음을 살핀다면 어떻게 왔다갔다하겠는가? 이것을 상중(上中)과 상하(上下)의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말한다.
가령 그 마음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생각하기를 좋아하게 한다면, 뜻이 흔들리거나 혼란스럽지 않으리니, 이것을 상중(上中)의 유순법인이라고 말한다.
心無所想而作是觀:前意、後意未曾錯亂,分別察心云何往反?是謂上中之下柔順法忍。設使其心,愛於專思志不移亂,是謂上中柔順之法。
그 법인은 어느 곳으로 따라 나아가는가?
네 가지 진리[四諦]를 따라 나아가 자세히 살피며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이와 같으면 드디어 청정함을 이루게 되므로 이를 신(信)이라고 말한다. 비록 그러나 이를 얻되, 신근(信根)을 이룩하지 못했을지라도 이 신을 얻으면, 몸[身]과 입[口]과 마음[心意]이 굳세어지므로 이를 정진(精進)이라고 말하며, 아직은 정진근(精進根)을 이룩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뜻이 모든 법으로 향하게 되므로 이를 한결같은 마음[有心]이라 말하며, 염근(念根)을 이룩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마음과 뜻이 한결같으면, 이것을 안정된 뜻[定意]이라고 말하며, 정근(定根)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라도 모든 법을 관찰하여 그 이치를 분별하면, 이것을 지혜라고 말한다.
其忍何所趣順?趣順四諦如審諦住,心以如是遂至淸淨,是謂爲信;雖爾獲此未成信根。以得是信,身口心强,是謂精進;尚未能成精進之根。志向諸法,是謂有心;未成念根。以心一志,是謂定意;未成定根。其觀諸法分別厥義,是謂智慧;
혜근(慧根)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곧 5법(法:陰)을 억측하여 모든 감관[根]으로 향하기 때문이고, 도근(道根)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 있고 오히려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억측하기 때문에 견해가 흔들려 뜻의 안정을 이루지 못하나니, 이것을 상중(上中)과 상상(上上)인 세속의 거룩한 법이라고 한다.
未成慧根。計是五法,向于諸根,未成道根;有念有想尚有所在,而見有遶未成定意。是謂上中之上世俗尊法。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색(色)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곳과 통양(痛痒:受)ㆍ법(法)ㆍ의(意)를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25) 일어나고 소멸하는 근본을 살피고 그 인연을 관찰하여 과거와 미래의 원(願)이 없는 선정[定]을 행하며, 해탈문을 따라 들어가고 생사의 괴로움을 살펴 이 5음(陰)은 곧 근심과 걱정거리일 뿐이라고 헤아리면 의혹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其修行者當知了之,色起滅處,痛、痒、法、意。觀起滅本,察其因緣過去、當來;行無願定,隨入脫門察生死苦;計斯五陰卽是憂患,無有狐疑。爾時則獲解苦法忍。
그 때는 곧 고법인(苦法忍)을 얻었으므로 이미 괴로움의 근본을 보았고, 한 편 지혜의 눈을 얻었으므로 열 가지 번뇌[結]26)를 제거하게 된다.
어떤 것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몸을 탐하는 것이요, 둘째는 귀신을 보는 것이며, 셋째는 삿된 것을 보는 것이요, 넷째는 망설이는 것이며, 다섯째는 계율을 잃는 것이요, 여섯째는 의심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애욕이요, 여덟째는 성냄이며, 아홉째는 교만을 부리는 것이요, 열째는 어리석은 것이다.
已見苦本,便見慧眼,除于十結。何謂爲十:一曰貪身,二曰見神,三曰邪見,四曰猶豫,五曰失戒,六曰狐疑,七曰愛欲,八曰瞋恚,九曰貢高,十曰愚癡。
이 열 가지 번뇌를 버리고 이미 이 마음을 얻었으면, 곧 번뇌가 없는 데[無漏]로 향하여 바른 소견에 들고 범부의 자리를 벗어나 거룩한 도에 머물며,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죄를 범하지 않고, 끝내 비명횡사하지 않아 마침내 도적(道跡)을 이룩할 것이다.
무원삼매(無願三昧)에 들어 정수(正受:禪定)를 행하면 이미 해탈문을 향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법(惡法)은 다시는 생겨나지 않고 모든 악이 저절로 다할 것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법념(法念)은 마땅히 일으켜서 분발하게 하여 일으킨 선법(善法)이 구족(具足)함을 이루게 된다.27)
棄是十結已獲此心則向無漏入於正見,度凡夫地住于聖道,不犯地獄、畜生、餓鬼之罪,終不撗死,會成道迹,無願三昧而行正受,已向脫門。未起惡法則不復生,諸惡自盡;未起法念當使興發,所興善法令具足成;
마음이 이미 이와 같이 원만해져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바로 자자(自恣)라고 말하고, 뜻을 한결같게 하는 것을 곧 자유자재한 안정된 뜻이라고 말하며, 이 차례를 따라 믿고 기억하고 정진하며 관찰하고 호명(護命)하는 것을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그 행을 사색하는 것을 바로 자자삼매(自恣三昧)라고 말하나니, 오로지 도에 정진하여야 신족을 얻을 수 있다.
心已如足隨其所欲,是謂自恣;令志專一,是謂自在定意。從是次第信、念、精進、觀察、護命,是謂爲信;思惟其行,是謂自恣三昧;專精于道而獲神足。
가령 몸과 입과 뜻을 견고하게 수행하면, 이것을 정진하여 뜻을 안정하는 법이라 하고, 뜻이 심식(心識)과 전일하게 되면 이것을 뜻이 안정된 것이라고 말하며, 도(道)의 이치에 들려고 하면 이것을 가르침과 훈계를 살펴 안정된 뜻이라고 말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4신족(神足)을 이루게 된다.
假使修行身、口、心强,是謂精進定意之法。志專心識,是謂意定。欲入道義,是謂察誡定意。以是之緣致四神足。
이미 4신족을 얻은 것을 바로 신근(信根)이라고 말하고, 몸과 마음이 견고해진 것을 바로 정진근(精進根)이라고 말하며, 바른 법을 생각하는 것을 바로 의근(意根)이라 말하고, 그 마음이 전일해진 것을 정근(定根)이라고 말하며, 능히 법을 분별하여 나아갈 바를 아는 것을 바로 지혜근(智慧根)이라고 말하나니, 이런 까닭에 5근(根)을 원만하게 갖추게 된다.
已獲神足,是謂信根;身心堅固,謂精進根;所可思法,是爲意根;其心專一,是謂定根;能分別法而知所趣,是謂智慧根。以是之故具足五根。
그 온화(溫和)한 법을 믿는 것을 바로 신력(信力)이라고 말하나니, 정진력(精進力:進力)ㆍ 의력(意力:念力)ㆍ적의력(寂意力:定力)ㆍ지혜력(智慧力:慧力)도 또한 이와 같다.
其信溫和,是謂信力,精進力、意力、寂意力、智慧力亦復如是。
이 5력(力)을 성취하여 모든 법에 미칠 수 있는 것을 곧 심각의(心覺意)라고 하고, 모든 법을 분별하는 것을 곧 모든 법을 정밀하게 구하는 법각의(法覺意)라고 하며, 몸과 마음이 견고한 것을 곧 정진각의(精進覺意)라고 하고, 마음에 기쁨을 품어 좋아서 뛰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곧 흔열각의(忻悅覺意:喜覺分)라고 말하며, 몸과 뜻이 서로 의지하여 서로 믿고 유순하여 혼란스럽지 않은 것을 곧 신각의(信覺意)라고 말하고, 그 마음이 한결같이 고요한 것을 곧 정각의(定覺意)라고 말하며, 그 마음에 음욕[婬]ㆍ성냄[怒]ㆍ어리석음[癡]의 번뇌를 멸하고 뜻하는 바 원(願)대로 되는 것을 곧 호각의(護覺意)라고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7각의를 이루게 된다.
成就五力能及諸法,則心覺意;分別諸法,是謂精求諸法覺意;身心堅固,是謂精進覺意;心懷喜踊得如所欲,是謂忻悅覺意;身意相依,信柔不亂,是謂信覺意;其心一寂,是謂定覺意;其心見滅婬、怒、癡垢,所志如願,是護覺意。以是之故七覺意成。
가령 모든 법의 이치를 분별하여 관찰하면 이것이 정견(正見)이 되고, 모든 생각하는 것에 삿된 원(願)이 없으면 이것이 정념(正念)이 되며, 몸과 뜻이 견고하면 이것이 정방편(正方便)이 되고, 마음이 경(經)의 이치로 향하면 이것이 정의(正意)가 되며, 그 마음이 한결같으면 이것이 정정(正定)이 되고, 몸과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업(業)이 다 청정하면 곧 정명(正命)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28)이 되어, 이 8정도의 행이 이루어진다.
設使別觀諸法之義,是謂正見;諸所思惟無邪之願,是爲正念;身意堅固,是爲正方便;心向經義,是爲正意;其心專一,是爲正定。身意造業是三悉淨,爾乃得成八正道行。
이 8정도 가운데 정견ㆍ정념ㆍ정방편, 이 세 가지를 헤아려 보면, 이것은 관법(觀法)에 속하고, 정의와 정정, 이 두 가지는 적연(寂然)에 속하나니, 이 관법과 적연 두 가지는 마치 두 필의 말이 한 수레를 끌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此八正道中,正見、正念、正方便,計是三事屬觀;其正意、正定是二事則屬寂然。是觀、寂二,如兩馬駕一車乘行。
만약 무루심(無漏心)29)에서 전일(專一)하지 못한 한 법이라도 있으면, 곧 37품의 법에 두루 들어가서 그 37품의 법을 원만하게 갖추면, 곧 괴로움의 진리를 알게 되나니,30) 이와 같이 헤아리면[比] 곧 두 번째 무루심(無漏心)을 얻는다.
若無漏心不專一法,遍入三十七品之法,以是具足此三十七法,便解知苦;如是之比,卽得第二無漏之心。
그때 생각하기를 ‘지금 욕계(欲界)에도 5음(陰)의 괴로움이 있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도 또한 똑같아서 욕계와 다름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괴로움의 진리[苦法智]를 알고 인(忍)을 따르는 지혜를 성취하였다고 말하나니,31) 이것이 세 번째 무루심을 건립한 것이다.
爾時思惟:‘如今欲界五陰有苦,色界、無色界同然無異。’是謂知苦隨忍之慧則成就,建第三無漏之心。
그리고 이미 이 행(行)을 얻어 그것으로써 괴로움의 진리를 보았기 때문에 18결(結)을 제거하고 나서 색계를 지나고 무색계를 초월하여 지혜에 적절하게 따르므로 곧 네 번째 무루심을 얻는다.
已得是行,用見苦故,除十八結已,過色界,超無色界,順宜慧者卽得第四無漏之心。
이미 네 번째 무루심을 얻고 나서는 곧 삼계(三界)의 고달프고 괴로운 번뇌를 해탈하고서, 곧 스스로 ‘나는 이미 환난을 해탈하여 그 숱한 번뇌가 없나니, 괴로움을 해탈하였다’ 하고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는 곧 스스로 생각하기를 ‘괴로움은 본래 어디서 생긴 것인가? 은애(恩愛)를 근본으로 해서 집착의 그물이 생겼으니, 오래 전부터 오늘날까지 이 은애를 익혀서 지금의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은애의 뿌리를 뽑으면 많은 번뇌가 없어지고 말 것이니, 은애를 여의고 나면 마음에 맞아 흐뭇해하는 기쁨인들 어디로부터 있게 되겠는가?’라고 하면, 이는 괴로움의 발생원인[習]을 알아서 없애는 법인(法忍)이라 이르나니, 이것을 다섯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已獲四無漏心,便度三界勤苦之瑕,卽自了之:‘吾已度患,無有衆惱,爲得度苦。’則自思惟:‘苦本何由?恩愛之本而生著網,從久已來習此恩愛遭患于今,永拔愛根則無衆惱。’已離恩愛忻樂可意,何從而有?是謂解習斷除法忍,是爲第五無漏之心。
욕계의 모든 습기와 집착을 제거하면 곧 7결(結)을 버려 욕계의 모든 환난을 뽑아버릴 줄을 알게 되나니, 이것을 여섯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除於欲界諸所習著,則捐七結,便爲知拔欲界諸患,是謂第六無漏之心。
수행하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색계의 근본은 본래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그 근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탐욕으로부터 일어나고 즐거움은 은애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마음에 맞아 흐뭇해 한다’고 하면, 이것을 일곱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修行自念:‘色界之本,本從何興?諦觀其元,從欲而起。樂出恩愛可意而悅,’是爲第七無漏之心。
이 행으로 인하여 색계와 저 무색계의 모든 12결(結)을 해탈하고 마음이 지혜를 따라 익히면, 이것을 여덟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이상을 여덟 가지 의미로서 부처님의 첫 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以有此行度於色界,其無色界十二諸結心隨習慧,是爲第八無漏之心。是謂八義佛之初子。
이때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삼계를 보아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발생원인[習]을 제거하고 탐욕에 대하여 애착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안온하다고 말하고, 적멸(寂滅)을 좋아하여 흐뭇한 마음으로 달갑게 여기면, 이것이 멸진법해(滅盡法慧)의 인(忍)이라고 하나니, 이것을 아홉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爾時心念:‘吾見三界以除苦習,於欲無愛,是謂安隱。’則樂寂滅可意甘之,是爲滅盡法慧之忍,斯爲第九無漏之心。
이미 이 이치를 얻고 나서 본래의 멸진(滅盡)을 보아 욕계 7결의 속박을 제거하면, 이것을 열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已獲此義見本滅盡,於欲界除七結之縛,是爲第十無漏之心。
만일 스스로 생각하기를 ‘또 색계와 무색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을 적(寂)이라고 말하나니, 이것을 열한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12결(結)의 의심을 제거하여 이미 이 환난을 해탈하였으면, 곧 멸진(滅盡)의 지혜를 얻나니, 이것이 열두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則自念言:‘若不著色及無色界,此謂爲寂。’是爲第十一無漏之心。則除十二諸結之疑,已度此患卽得滅盡之慧,是爲第十二無漏之心。
그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일찍이 없었던 일을 얻은 것이 마치 불세존(佛世尊)께서 법을 깨달으신 것처럼 그렇게 하여 이 도의 이치로 인해 욕계의 괴로움을 알아서 곧 버리며, 괴로움의 발생원인[習]이 좇아 생겨남을 알아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여의고 진멸(盡滅)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이 경지를 얻음으로 인하여 법혜(法慧)의 도인(道忍)에 들게 되나니, 이것을 열세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爾時自念:‘得未曾有!’如佛、世尊解法乃爾,因斯道義,知欲界苦,則棄捐之。知從習生,則離於習,得至盡滅,因此得入法慧道忍,是爲第十三無漏之心。
이때 도로서 욕계를 보아 8결(結)을 버리면, 이것을 버린 다음에는 마땅히 이것을 얻어 법혜(法慧)를 일으키나니, 이것이 열네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爾時以道睹於欲界則棄八結,去是然後會當獲此興隆法慧,是爲第十四無漏之心。
이 때를 맞추어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일찍이 없었던 일을 얻었다’라고 한다면, 이 도행(道行)으로 인하여 색계와 무색계의 괴로움을 해탈하고 모든 괴로움의 발생원인을 제거하여 진멸을 증득하나니, 이것이 열다섯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應時心念得未曾有,以是道行解於色界、無色之苦,而除諸習證於盡滅,是爲第十五無漏之心。
마음이 도를 좇아서 12결을 제거하되 색계와 무색계에서 이 결이 이미 제거되면, 곧 도혜(道慧)를 일으키나니, 이것이 열여섯 번째 무루심이라 한다.
道從其志除十二結,於色、無色界除是結已,則興道慧,是爲第十六無漏之心。
그 때를 맞추어 88결을 제거하고 또한 열 가지 상념(想念)의 결(結)을 버리게 된다.
왜냐 하면, 마치 강물에서 취한 한 방울의 물처럼 구경(究竟)의 도(道)의 이치는 강물과 같고, 그 나머지 아직 제거하지 못한 것은 한 방울의 물과 같기 때문이다.
이에 도적(道迹:須陀洹)을 이룩하여 마침내 성현(聖賢)의 지위에 이르며, 일곱 번 반복해 하늘에 태어나고 일곱 번 반복해 인간에 태어나고서 영원히 괴로움의 근본을 다하게 된다.
應時除盡八十八諸結,當去十想結。所以者何?如從江河取一渧之水,究竟道義如江河水,其餘未除如一渧水,卽成道迹會至聖賢。七反生天、七反人閒,永盡苦本。
수행하는 사람이 이런 것을 헤아림으로써 온갖 번뇌의 뿌리를 뽑고 생사의 흐름을 끊으면, 마음은 곧 기뻐하면서 이미 3도(塗)를 해탈하고 5역죄(逆罪)32)을 범하지 않으며, 이도(異道)를 여의고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외도(外道)를 따라 영화를 희망하지 않고 중우(衆祐)의 덕을 기대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일곱 번 반복해 태어나는 환난을 겪지 않으며, 일찍이 계율을 범하지 않고 수 없이 많은 밝음을 보아 낮밤으로 기뻐하게 된다.
其修行者,以是之比拔衆惱根,斷生死流,心則欣悅;已度三塗不犯五逆,離於異道遇其所知,不從外道悕望榮冀。衆祐之德不更終始,七反之患未曾犯戒,見無數明晝夜歡喜。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흉년이 든 곳을 피하여 풍년이 든 나라에 이르는 것과 같고, 또는 험난한 곳을 벗어나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으며, 옥에 갇혀 있다가 벗어남을 얻은 것과 같고, 병이 나아서 마음으로 기뻐 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잘 수행하면 그로 인하여 적멸(寂滅)을 얻으리니, 적연(寂然)해지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이 익히고 수행하여야 한다.
이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譬如有人避飢饉地至豐賤國,脫嶮得安,繫獄得出,如病除愈心懷喜踊。修行如是,因安般守意則得寂滅,欲求寂然習行如是。於是頌曰:
수면(睡眠)과 심한 게으름을 깨달아 알고
몸에서 숨이 나오는 때를 분별하며
들이쉬는 숨을 수행하고 돌이켜 얻기를 생각하면
이것을 몸의 숨으로 수행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覺了睡眠重懈怠,
分別身中息出時,
修行息入念還得,
是謂身息成其行。
修行道地經卷第五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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