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강승회(康僧會)1) 서문[序]
康僧會序
안반(安般)2)이라는 것은 여러 부처님들의 큰 가르침[大乘]으로, 세속에서 표류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안반의 선법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것으로 6정[六情]을 다스린다. 정(情)에는 안[內]과 바깥[外]이 있는데,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心]은 안이고, 색(色)⋅성(聲)⋅향(香)⋅미(味)⋅촉감[細滑]⋅사념(邪念)은 바깥이라 한다. 경(經)에서 “여러 바다의 12가지 현상[事]”이라고 한 것은, 안과 바깥의 6정이 삿된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바다가 온 세상의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夫安般者諸佛之大乘以濟衆生之漂流也其事有六以治六情情有內外眼耳鼻舌身心謂之內矣色聲香味細滑邪念謂之外也經曰諸海十二事謂內外六情之受邪行猶海受流
굶주린 사람이 꿈에서도 밥을 먹는 것은 대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음이 이렇게 만족을 모르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은, 마음의 아주 작은 것에도 6정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너무나 흐릿하고 어렴풋하며, 그 작용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서, 보아도 그것을 그릴 수 없고, 들어도 소리로 나타낼 수 없으며, 이것을 맞닥뜨려 알려 해도 그 앞에 아무 것도 없고, 이것을 좇아서 탐구해도 뒤에 남는 것이 없으니, 지극히 은밀하고 너무나 오묘하여 그 모습을 터럭만큼도 형용할 수 없다. 그래서 범천[梵]·제석[釋]·신선[仙]·성자[聖]도 6정의 실체를 밝힐 수 없었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게 마음에 심어져 고요히 생겨난 것이다.
餓夫夢飯蓋無滿足也心之溢盪無微不浹怳惚髣髴出入無閒視之無形聽之無聲逆之無前尋之無後深微細妙形無絲髮梵釋僊聖所不能照明默種于此化生乎
육정의 이런 모습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을 ‘음[陰]’이라고 하니, 마치 그늘진 곳에 농부[種夫]가 땅을 깊게 파서 손수 씨앗을 덮어주면 씨앗이 셀 수 없을 만큼 열매를 맺으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 이루어진 과정을 알 수 없고, 씨를 뿌린 사람도 그 수(數)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래에서 하나가 썩어도 위에서는 만 가지가 생겨나고,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960번을 변하게 되어, 하루 밤낮이면 13억의 생각[意]이 생겨나게 된다. 생각마다 하나의 몸통[一身]이 있으나 마음[心]은 제 스스로 알 수 없으니, 저 씨 뿌리는 농부와 같은 것이다.
彼非凡所睹謂之陰也猶以晦曀種夫深芬闓手覆種孳有萬億旁人不睹其形種家不知其數也一朽乎下萬生乎上彈指之閒心九百六十轉一日一夕十三億意意有一身心不自知猶彼種夫也
이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이 날뛰지 않게 꽉 붙잡고 호흡을 시작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센다. 열을 셀 때까지 잘못되지 않으면 생각이 고요한 상태가 되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짧은 입정[小定]3)은 3일을 하고, 긴 입정[大定]은 7일을 하는데, 고요히 다른 생각[念]은 없어지고 죽은 듯이 생각이 맑아지니, 이것을 첫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是以行寂繫意著息數一至十十數不誤意定在之小定三日大定七日寂無他念怕然若死謂之一禪
선(禪)은 버린다는 뜻이니, 13억의 더러운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수를 세어 생각을 고요히 했고, 뜻[念]을 바꿔서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따르니, 더러운 생각은 열에 여덟이 제거되고 바로 두 가지 생각[二意]만 남게 된다. 이처럼 생각이 고요해지고 뜻이 부처님의 법을 따르게 된 것은, 수를 세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도다. 그래서 모든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가고 마음이 점점 맑아지게 되니, 이를 일러 두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禪棄也棄十三億穢念之意已獲數定轉念著隨蠲除其八正有二意意定在隨由在數矣垢濁消滅心稍淸淨謂之二禪也
다시 그 나머지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코끝[鼻頭]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지(止)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는 지(止)의 선법을 얻으면 삼독(三毒)4)、사주(四走)5)、오음(五陰)6)、육명(六冥)7) 등의 모든 더러운 것이 소멸하게 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마음의 밝은 빛이 명월주(明月珠)의 빛보다 더 밝을 것이다(㷡然心明踰明月珠). 음탕하고 거짓된 더러운 마음은 거울이 아주 더러운 진흙탕에 놓인 것과 같으니, 눕히면 하늘을 비출 것이고 엎어두면 땅만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총명하고 지혜롭고 성스러우며 이치에 통달한 마음은 온 세상을 비출 것이다. 하늘과 땅이 광대하여 평범한 사람은 엿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한 까닭은 오직 그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어 혼탁해졌기 때문이니, 온갖 더러움에 물든 마음은 저 진흙탕에 놓인 거울보다 더 심한 것이 있는 것이다.
又除其一注意鼻頭謂之止也得止之行三毒四走五陰六冥諸穢滅矣,㷡然心明踰明月珠, 婬邪污心猶鏡處泥穢垢污焉偃以照天覆以臨土聰睿聖達萬土臨照雖有天地之大靡一夫而能睹所以然者由其垢濁衆垢污心有踰彼鏡矣
만약 좋은 스승을 얻어 더러운 것을 깎아내고 마음을 잘 닦아내면, 마음에 남아 있던 적은 흠과 아주 작은 얼룩도 시원하게 씻기어 남은 것이 없게 되고, 이런 마음을 들어서 온 세상을 비춘다면 터럭과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이치까지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마음에 묻은 흠이 없어지고 밝은 마음만이 남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정(情)은 생각[意]을 요동치게 하고 뜻[念]을 어지럽게 하여, 만 가지 이치 중에 하나라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마치 시장에서 마음을 놓아버리고 제멋대로 듣는다면 많은 소리들을 들으나, 집으로 돌아와 들은 것을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말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이 풀어지고 생각[意]이 흩어지면 그 총명함이 흐려지고 어둡게 된다. 만약 스스로 조용한 곳에 머물며 마음과 생각을 고요하게 한다면, 뜻[志]에 거짓된 욕망이 없게 되고, 귀를 기울여 고요히 듣게 되어서, 들은 불법의 모든 구절[萬句]을 조금도 잃지 않으며, 부처님의 한 마디 말씀[片言]도 분명하게 깨우치니, 마음[心]이 고요해지고 생각[意]이 맑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고요하게 생각을 모아서 코끝에 집중하는 것, 이것을 세 번째 선(禪)이라고 하는 것이다.
若得良師剗刮瑩磨薄塵微曀蕩使無餘擧之以照毛髮面理無微不察垢退明存使其然矣情溢意散念萬不識一矣猶若於市馳心放聽廣採衆音退宴在思不識一夫之言心逸意散濁翳其聰也若自閑處心思寂寞志無邪欲側耳靖聽萬句不失片言斯著心靖意淸之所由也行寂止意懸之鼻頭謂之三禪也
다시 그 몸을 관찰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반복하여 세밀히 살피면, 몸 안의 더러운 농과 빽빽하게 곤두선 머리털을 마치 눈물이나 고름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사람[人]과 사물[物]을 모두 관찰한다면, 그 흥성함은 쇠망함과 같고, 존재하는 것은 쇠망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어, 부처님의 삼보(三寶)를 믿게 되고, 모든 어둠[冥]은 전부 밝아질 것이니, 이를 일러 네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還觀其身自頭至足反覆微察內體污露森楚毛豎猶睹膿涕於斯具照天地人物其盛若衰無存不亡信佛三寶衆冥皆明謂之四禪也
마음을 다잡아 고요히 하고 바른 뜻[念]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6정의 음(陰)이 다 소멸하게 되니, 이것을 환(還)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러운 욕심이 소리 없이 사라지면, 그 마음은 곧바로 대상을 구분하는 의식작용(想)8)이 없어지게 되니, 이것을 정(淨)이라고 한다. 안반의 선법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이 곧장 밝아지고, 그 밝음으로 온 세상을 관찰한다면 아무리 깊이 감추어진 것도 관찰하지 못할 것이 없다. 지나온 셀 수 없는 겁(劫)의 시간, 현재와 미래의 일들, 사람[人]과 사물[物]의 변화, 현재 존재하는 방방곡곡의 모든 세상[諸刹],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을 모두 알 수 있다. 또한 세존(世尊)의 가르침과 교화, 그리고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외고 학습하는 것도,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보지 못함이 없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함이 없게 되어, 6정의 흐릿하고 어렴풋한 모습도, 존재와 소멸의 시작과 그 이유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커지면 온 세상[八極]에 두루 미치게 되고, 가늘어지면 머리카락보다 가는 것[毛釐]도 꿸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을 바로잡고, 수명(壽命)을 주관하며, 거룩한 덕[神德]을 발휘하고, 천병(天兵)9)도 무너뜨리며,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키고, 세상의 방방곡곡을 옮겨 다닌다. 이 여덟 가지 불가사의는 범천[梵]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니, 이런 신묘한 덕의 무한함은 안반의 여섯 가지 선법[六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攝心還念諸陰皆滅謂之還也穢欲寂盡其心無想謂之淨也得安般行者厥心卽明擧明所觀無幽不睹往無數劫方來之事人物所更現在諸剎其中所有世尊法化弟子誦習無遐不見無聲不聞怳惚髣髴存亡自由大彌八極細貫毛氂制天地住壽命猛神德壞天兵動三千移諸剎八不思議非梵所測神德無限六行之由也
세존께서 처음 이 경전을 말씀하려고 할 때, 큰 진동(震動)이 있어, 사람과 천신이 얼굴색을 바꾸어 이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였고. 세존께서는 3일 동안 안반(安般)의 선법을 하시고 바로잡을 것[質]10)이 없게 되었다. 이 때 세존께서 변화되어 두 몸이 되었는데, 하나는 하등(何等)이라고 불렸고, 다른 하나는 존주(尊主)라고 불렸으니, 이 당시의 일에서 그 뜻이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대사(大士), 상인(上人), 육쌍(六雙), 십이배(十二輩)11) 모두 안반의 선법을 굳게 행하였다.
世尊初欲說斯經時大于震動人天易色三日安般無能質者於是世尊化爲兩身一曰何等一尊主演于斯義出矣大士上人六雙十二輩靡不執行
이름이 안청(安清)인 보살이 있었는데, 자(字)는 세고(世高)이고 안식왕(安息王)12)의 정실 왕후의 자식이다. 그는 나라를 숙부에게 양보하고 고국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다가13) 드디어 경사(京師)에 머무르게 되었다. 또한 그는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아주 많았으며. 신묘한 모사[神摸]⋅천체의 운행[七正]14)⋅세상의 변화[盈縮]15)⋅풍기(風氣)⋅길흉(吉凶)⋅산사태[山崩]⋅지진[地動]⋅침놓기[鍼䘑] 등의 여러 기술에 통달했다. 낯빛을 보면 병을 알았고, 새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하늘과 땅[二儀]16)처럼 넓고 어진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 백성들의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걱정하여. 먼저 자신의 귀를 세우고 자신의 눈을 열어서, 백성들의 모든 것을 잘 보고 들으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백성들에게 석가모니 부처님[正眞]의 6도[六度]17)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안반의 비밀스럽고 오묘한 뜻을 번역해 주었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그들의 더럽고 탁한 생각이 모두 없어졌으며, 맑고 깨끗한 덕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다.
有菩薩名安淸字世高安息王嫡后之子讓國與叔馳避本土翔而後集遂處京師其爲人也博學多識貫綜神摸七正盈縮風氣吉凶山崩地動鍼脈諸術睹色知病鳥獸鳴啼無音不照懷二儀之弘仁愍黎庶之頑闇先挑其耳卻啓其目欲之視明聽聰也徐乃陳演正眞之六度譯安般之秘奧學者塵興靡不去穢濁之操就淸白之德者也
나는 말세에 태어나 땔감을 짊어 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부모님을 여의었고 세 분의 스승도 모두 돌아가셨다. 구름과 해를 우러러보았지만 슬프게도 질정을 받을 곳이 없게 되었고, 머리를 돌려 바라보아도 눈물만이 주르륵 흐를 뿐이다.18) 오랫동안 쌓아온 복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남양(南陽)의 한림(韓林) 선생님, 영천(潁川)의 피업(皮業) 선생님, 회계(會稽)의 진혜(陳慧)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 분의 현자(賢者)들은 독실하고 철저하게 불도를 믿으셨고, 넓고 바른 덕을 지니고 계셨다. 또한 끊임없이 정진하셨으며 불도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다. 내가 이 분들을 좇아 물음을 청하면, 세 분의 대답은 모두 진리에 딱 들어맞았고 그 의미도 서로 어긋남이 없으셨다. 그리고 지혜를 베푸시고 불법의 의미를 해석해주셔서 내가 불도를 따져서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니, 제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이 비루한 데가 많고, 부처님의 뜻을 궁구하지도 못하였기에, 삼가 명철한 많은 현인들께서 함께 꼼꼼히 살펴봐주시고, 불법의 의미에도 군더더기가 많이 있으니, 성인들께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다듬어서 감춰졌던 부처님의 신묘한 뜻을 드러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余生末蹤始能負薪考妣殂落三師凋喪仰瞻雲日悲無質受睠言顧之潛然出涕宿祚未沒會見南陽韓林穎川皮業會稽陳慧此三賢者信道篤密執德弘正烝烝進進志道不倦余從之請問規同矩合義無乖異陳慧注義余助斟酌非師所傳不敢自由也言多鄙拙不究佛意明哲衆賢願共臨察義有肬腨加聖刪定共顯神融矣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19)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此經多隨字除數息相隨之隨餘皆他本作隨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김달진 번역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부처님께서 월지국(越祗國)의 기수정사(羈瘦精舍)에 계셨는데, 월지국은 다른 이름으로 차닉가라국(遮匿迦羅國)이라고도 하였다.
佛在越祇國舍羈瘦國亦說一名遮匿迦羅國
이때에 부처님께서 90일 동안 앉아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시고 부처님께서 다시 홀로 90일 동안 앉아 사유(思惟)하고 헤아리신 것은, 시방 사람 및 꿈틀거리고 날고 기고 움직이는 무리들을 도탈(度脫)시키려 하신 것이었다.
時佛坐行安般守意九十日佛復獨坐九十日者思惟挍計欲度脫十方人及蜎飛蠕動之類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90일 동안 안반수의를 행한 것은, 안반수의로 자재한 자념(慈念)의 뜻을 얻고 돌이켜서 안반수의를 행한 다음, 다시 뜻을 거두어 행함을 생각한 것이다.
復言我行安般守意九十日者安般守意得自在慈念意還行安般守意已復收意行念也
안(安)은 몸이고, 반(般)은 숨[息]이며,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수(守)는 금함[禁]이고, 또한 계(戒)를 범하지 않음을 말한다. 금(禁)은 또한 보호함[護]이니, 호(護)는 일체를 두루 보호하여 범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의(意)는 숨[息]이요, 또한 도(道)가 된다.
安爲身般爲息守意爲道
안(安)은 생겨남[生]이고, 반(般)은 멸함[滅]이며, 의(意)는 인연이 되고, 수(守)는 도가 된다.
守者爲禁亦謂不犯戒禁者亦爲護護者遍護一切無所犯意者息意亦爲道也
안(安)은 셈[數]이고, 반(般)은 서로 따름[相隨]이며, 수의(守意)는 그침[止]이 된다.
安爲生般爲滅意爲因緣守者爲道也
안(安)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고, 반(般)은 묶인 것을 푸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安爲數般爲相隨守意爲止也
안(安)은 죄를 피하는 것이고, 반(盤)은 죄에 들지 않는 것이고,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安爲念道般爲解結守意爲不墮罪也
안(安)은 정(定)이고, 반(般)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뜻을 다루어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安爲避罪般爲不入罪守意爲道也
안(安)은 유(有)이고, 반(般)은 무(無)가 되니, 뜻으로 유(有)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고, 뜻으로 무(無)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며, 또한 유(有)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無)를 생각하지도 않음이 바로 공정(空定)의 뜻과 도를 따르는 행에 응하는 것이다. 유(有)는 만 가지 물건을 말하고, 무(無)는 의(疑) 또는 공(空)이 된다.
安爲定般爲莫使動搖守意莫亂意也安般守意名爲御意至得無爲也
안(安)은 본래의 인연이고, 반(般)은 처소가 없음이니, 도인(道人)은 본래 온 바가 없음을 알고 또한 멸함의 처소가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수의(守意)가 된다.
安爲有般爲無意念有不得道意念無不得道亦不念有亦不念無是應空定意隨道行有者謂萬物無者謂疑亦爲空也
안(安)은 청(淸)이고, 반(般)은 정(淨)이며, 수(守)는 무(無)가 되고, 의(意)는 위(爲)라 이름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여 함이 없는 것이다. 무(無)는 활(活)이라 하고, 위(爲)는 생(生)이라 하니, 다시 고(苦)를 얻지 않기 때문에 활(活)이 되는 것이다.
安爲本因緣般爲無處所道人知本無所從來亦知滅無處所是爲守意也
안(安)은 미(未)이고, 반은 기(起)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문득 뜻을 지킬[守意] 수 있지만, 만약 이미 뜻이 일어났다면 곧바로 뜻을 지켜야 하니, 만일 이미 뜻을 일으켰다면 곧 달아나서 지키지 못하므로 마땅히 돌이켜야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설하셨다.
安爲淸般爲淨守爲無意名爲是淸淨無爲也無者謂活爲者謂生不復得苦故爲活也
안(安)은 5음(陰)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반(般)은 5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인연을 깨달아 몸과 입과 뜻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安爲未般爲起已未起便爲守意若已意起便爲守意若已起意便走爲不守當爲還故佛說安般守意也
수의(守意)는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곧 수의이니,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수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멸하기 때문이니, 뜻이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도(道)가 되고,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되는 것이다.
安爲受五陰般爲除五陰守意爲覺因緣不隨身口意也
수의(守意)는, 뜻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김[生]으로 인하여 죽음[死]이 있으므로 뜻을 지킬 수 없으며, 뜻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 죽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김이 있으므로 뜻이 또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도(道)가 된다.
守意者無所著爲守意有所著不爲守意何以故意起復滅故意不復起爲道是爲守意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열 가지 지혜가 있으니, 숨을 세고[數息] 서로 따름[相隨]과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과 4제(諦)를 말한다. 이것이 열 가지 지혜를 이루니, 이른바 『37품경(三十七品經)』을 합하여 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守意莫令意生生因有死爲不守意莫令意死有死因有生意亦不死是爲道也
수의(守意)는, 비유컨대 등불과 같아서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 어둠을 부수며, 둘째 밝음을 보이는 것처럼, 수의(守意)도 첫째 어리석음[愚癡]을 부수고, 둘째 지혜를 보이는 것이다.
安般守意有十黠謂數息相隨止觀還淨四諦是爲十黠成謂合三十七品經爲行成也
수의(守意)는, 뜻이 인연을 좇아 생겨나서 마땅히 인연을 반연(攀緣)하여 집착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된다.
守意譬如燈火有兩因緣一者壞冥二者見明守意一者壞癡二者見黠也
수의(守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켜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것은 마땅히 빨리 소멸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미 행한 일은 마땅히 뒤에 뉘우쳐서 억만겁이 지나도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守意意從因緣生當緣因緣莫著是爲守意也
수(守)와 의(意)는 각기 다르다. 시방의 일체를 보호하여 대경(對境)을 범하지 않음을 깨달음이 바로 수(守)가 되고, 저 무위(無爲)를 깨달음이 바로 의(意)가 되니, 이것이 수의이다.
守意有三輩一者守令不得生二者已生當疾滅三者事已行當從後悔計億萬劫不復作也守與意各自異護十方一切覺對不犯是爲守覺彼無爲是爲意是守意也
수의(守意) 가운데 네 가지 즐거움[樂]이 있으니, 첫째는 요체(要體)를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위[上]를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옳음[可]을 아는 즐거움이 바로 네 가지 즐거움이다. 법(法)은 행(行)이 되고, 얻음[得]은 도(道)가 된다.
守意中有四樂一者知要樂二者知法樂三者爲知止樂四者爲知可樂是爲四樂法爲行得爲道
수의(守意)의 여섯 가지 일에 안과 밖이 있다. 숨을 셈[數息]과 서로 따름[相隨]과 멈춤[止]은 밖[外]이 되고, 관(觀)과 환(還)과 정(淨)은 안[內]이 되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숨을 생각함과 서로 따름과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은 뜻을 익혀서 도(道)에 가까워지려고 하기 때문이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여의면 곧바로 세간을 따르게 된다.
守意六事爲有內外數隨止是爲外觀還淨是爲內隨道也何以故念息相隨止觀還淨欲習意近道故離是六事便隨世閒也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음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뜻을 거둠이 되며, 지(止)는 뜻을 정함이 되고, 관(觀)은 뜻을 여읨이 되고, 환(還)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정(淨)은 뜻을 지킴이 되니, 사람이 능히 뜻을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 일을 행할 뿐이다.
數息爲遮意相隨爲斂意止爲定意觀爲離意還爲一意淨爲守意用人不能制意故行此六事耳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뜻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얻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선(禪)을 얻지 못하는가? 습(習)을 다 버리며 도(道)를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何以故數息用意亂故何以故不得用不識故何以故不得禪用不棄習盡證行道故也
숨을 세는 것은 땅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보습이 되며, 지(止)는 멍에가 되고, 관(觀)은 씨앗이 되며, 환(還)은 비가 되고, 정(淨)은 행함이 되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일로 마침내 도를 따르는 것이다.
數息爲地相隨爲犂止爲軛觀爲種還爲雨淨爲行如是六事乃隨道也
숨을 세어서 바깥을 끊고, 서로 따라서 안을 끓으며, 지(止)는 죄를 멈추는 것이고, 관(觀)을 행하여 뜻을 제거하며,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환(還)이 되고, 생각이 끊어짐은 정(淨)이 된다.
數息斷外相隨斷內止爲止罪行觀卻意不受世閒爲還念斷爲淨也
뜻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뜻을 정하려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뜻을 끊으려면 마땅히 멈춤[止]을 행할 것이요, 도의 뜻을 얻으려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5음(陰)을 향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돌이킬[還] 것이요, 소유가 없으려면 마땅히 청정[淨]해야 할 것이다.
意亂當數息意定當相隨意斷當行止得道意當觀不向五陰當還無所有當爲淨也
일이 많으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일이 적으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가가(家家)의 뜻을 다하려면 마땅히 멈춤[止]을 행할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하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세간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 환(還)이 되며, 생각이 끊어지면 정(淨)이 된다.
多事當數息少事當相隨家中意盡當行止畏世閒當觀不欲世閒爲還念斷爲淨也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5음(陰)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서로 따르는가? 5음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지(止)하는가? 5음을 관(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5음을 관하는가?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는가? 고(苦)를 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환(還)하는가? 생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정(淨)하는가? 5음(陰)을 분별하여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다.
何以故數息不欲隨五陰故何以故相隨欲知五陰故何以故止欲觀五陰故何以故觀陰欲知身本故何以故知身本欲棄苦故何以故爲還厭生死故何以故爲淨分別五陰不受故
곧바로 지혜를 따르면 여덟 가지 도(道)를 얻고 따로 소원을 얻으니, 숨을 행할 때는 세는 것을 따르며, 서로 따를 때는 생각을 따르며, 멈출[止] 때는 정(定)을 따르며, 관(觀)할 때는 정(淨)을 따르며, 돌이킬[還] 때는 뜻을 따르며, 정(淨)할 때는 도(道)를 따르고 또한 행(行)을 따른다.
便隨黠慧八種道得別爲得所願也行息時爲隨數相隨時爲隨念止時爲隨定觀時爲隨淨還時爲隨意淨時爲隨道亦爲隨行也
숨을 세는 것은 4의지(意止)가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4의단(意斷)이 되며, 멈춤[止]은 4신족념(神足念)이 되고, 관(觀)은 5근(根)과 5력(力)이 되며, 돌이킴[還]은 7각의(覺意)가 되고, 정(淨)은 8행(行)이 된다.
數息爲四意止相隨爲四意斷止爲四神足念觀爲五根五力還爲七覺意淨爲八行也
숨을 세는 것을 얻고도 서로 따르지 않으면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얻고도 멈추지[止]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멈춤을 얻고도 관(觀)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고, 관(觀)을 얻고도 돌이키지[還]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돌이킴을 얻고도 청정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니, 청정함을 얻고 다시 청정해야 마침내 수의가 된다.
得息不相隨不爲守意得相隨不止不爲守意得止不觀不爲守意得觀不還不爲守意得還不淨不爲守意得淨復淨乃爲守意也
이미 숨을 생각하여 악(惡)이 생겨나지 않는데도 다시 세는 것은 함께 뜻을 막아 6쇠(衰)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서로 따름을 행하는 것은 6쇠의 행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고, 멈춤[止]은 6쇠의 행을 제거하려는 것이며, 관(觀)은 6쇠의 행을 끊으려는 것이고, 돌이킴[還]은 6쇠의 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며, 청정함[淨]은 6쇠를 멸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미 소멸하여 다하고 나면 문득 도(道)를 따르게 된다.
已念息惡不生復數者爲共遮意不隨六衰故行相隨爲欲離六衰行止爲欲卻六衰行觀爲欲斷六衰行還爲欲不受六衰行淨爲欲滅六衰已滅盡便隨道也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으려고 하는 것인데, 숨 가운데는 길고 짧음이 있으니, 마땅히 다시 이 길고 짧은 뜻을 막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수의(守意)는 악(惡)을 멈추고자 하기 때문이니, 악은 또한 가히 지킬 수도 있고 또한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악이 이미 다하면 마땅히 다시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다.
數息欲遮意息中有長短當復遮是長短意也何以故守意欲止惡故惡亦可守亦不可守何以故惡已盡不當復守也
숨을 세는 것에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색(色)을 보고 마땅히 비상(非常)과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마땅히 성냄ㆍ의심ㆍ질투함을 분명히 알고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다.
數息有三事一者當坐行二者見色當念非常不淨三者當曉瞋恚疑嫉念過去也
숨을 셈[數息]이 어지러운 것은 마땅히 인연을 좇아 일어난 바임을 알아야만 하고, 이것은 안의 뜻[內意]임을 알아야만 한다. 첫 번째 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바깥 뜻[外意]의 허물이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오기 때문이요, 두 번째 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안의 뜻의 허물이니, 숨이 가운데로부터 나오기 때문이요, 3ㆍ5ㆍ7ㆍ9번째는 바깥 뜻에 속하고, 4ㆍ6ㆍ8ㆍ10번째는 안의 뜻에 속한다. 질투ㆍ성냄ㆍ의심의 세 가지 뜻은 안에 있고,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의 일곱 가지 뜻과 나머지는 밖에 속한다.
數息亂者當識因緣所從起當知是內意一息亂者是外意過息從外入故二息亂者是內意過息從中出故三五七九屬外意四六八十屬內意嫉瞋恚疑是三意在內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是七意及餘事屬外也
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밖이 되고, 숨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안이 된다. 숨은 뜻을 좇아 생기므로 생각과 숨을 합쳐 하나라고 세는데, 숨이 다 하면 하나를 세기도 하고 또한 하나를 세지 않기도 하는 것은, 뜻은 밖에 있는 채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유컨대 돈을 세면서 뜻은 다섯 번째에 있는데 세기는 하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숨을 셈[數息]에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이유는, 밖에는 7악(惡)이 있고 안에는 3악(惡)이 있으므로 적은 것이 능히 많은 것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다.
得息爲外不得息爲內息從意生念息合爲一數息至盡數爲一亦非一意在外息未盡故譬如數錢意在五數爲一也數息所以先數入者外有七惡內有三惡用少不能勝多故先數入也
숨을 셈에 얻지 못하는 것은 그 본래의 뜻[本意]을 잃었기 때문이니, 본래의 뜻은 비상(非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의 이치이다. 이 본래의 뜻을 잃고 뒤바뀜[顚倒]에 떨어지기 때문에 또한 사(師)를 잃어버린다. 사(師)는 처음 앉았을 때 첫 번째 들이 쉬는 숨[入息]에서 몸의 편안함과 차례대로 행함을 얻으니, 그 본래의 뜻을 잃었기 때문에 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數息不得者失其本意故本意謂非常苦空非身失是意墮顚倒故亦爲失師師者初坐時第一入息得身安便次第行爲失其本意故不得息也
숨을 셈[數息]에 뜻으로 항상 마땅히 비상ㆍ고ㆍ공ㆍ비신을 생각해야 하며, 숨이 나와도 또한 없어지고 들어가도 또한 없어짐을 헤아려야 한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도를 얻음이 빠를 것이니, 마땅히 비상(非常)과 공(恐)의 뜻을 가져야만 하며, 이 뜻을 얻으면 곧 숨 세는 것을 얻는다.
數息意常當念非常苦空非身計息出亦滅入亦滅已知是得道疾當持非常恐意得是意卽得息也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른 까닭은, 내쉬는 숨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숨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식음(識陰)이 된다. 이런 까닭에 다른 것이니, 도인(道人)은 마땅히 이 뜻을 분별해야만 한다.
入息出息所以異者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陰有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用是爲異道人當分別是意也
들이쉬는 숨은 죄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요, 내쉬는 숨은 죄를 제거하기 위함이요, 뜻을 따름[隨意]은 죄를 여의기 위함이며, 들이쉬는 숨은 인연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요, 내쉬는 숨은 인연에 이르기 위함이요, 뜻을 따름은 인연을 여의지 않기 위함이다.
入息者爲不受罪出息者爲除罪守意者爲離罪入息者爲受因緣出息者爲到因緣守意者爲不離因緣也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함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죄가 이름이요, 둘째는 행이 공교롭지 않아서요, 셋째는 정진하지 않아서 이다.
數息不得有三因緣一者罪到二者行不互三者不精進也
들이쉬는 숨은 짧고 내쉬는 숨은 길며, 따라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 도의(道意)가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은 죄(罪)가 되니, 죄는 밖에 두어야지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入息短出息長無所從念爲道意有所念爲罪罪惡在外不在內也
숨을 셀 때 뜻을 여의면 숨이 길어지고, 숨을 얻으면 숨이 짧아지며, 편안하게 행하지 못하면 숨이 길게 되고, 정(定)하면 짧게 되며, 만물을 생각하면 긴 숨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짧은 숨이 되며, 열 번째 숨에 이르지 못하고 그쳤다가 다시 세는 것은 긴 숨이 되고, 열 번째 숨을 얻은 것은 짧은 숨이 된다. 숨을 얻으면 짧게 되니, 왜냐하면, 멈추고 다시 세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얻으면 또한 길게 되니, 왜냐하면, 숨을 쉬지[休] 않기 때문에 길게 되는 것이다. 숨이 긴 것도 스스로 알고 숨이 짧은 것도 스스로 아는 것은, 뜻이 있는 곳을 따라서 길고 짧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아는 것이 되고,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數息時有離意爲喘息長得息爲喘息短不安行息爲長定爲短念萬物爲長息無所念爲短息未至十息壞復更數爲長息得十息爲短息得息爲短何以故止不復數故得息亦爲長何以故息不休故爲長也喘息長自知喘息短自知謂意所在爲自知長短意覺長短爲自知意不覺長短爲不自知也
도인(道人)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뜻을 멈추려고 하니, 마땅히 무슨 인연으로 뜻을 멈춤을 얻을 것인가? 이제 안반수의를 설하겠으니 들을지어다.
道人行安般守意欲止意當何因緣得止意聽說安般守意
무엇이 안(安)이 되고, 무엇이 반(般)이 되는가? 안(安)은 들이쉬는 숨이라 하고, 반(般)은 내쉬는 숨이라고 한다. 생각과 숨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안반(安般)이라고 하며, 수의(守意)는 뜻을 멈춤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何等爲安何等爲般安名爲入息般名爲出息念息不離是名爲安般守意者欲得止意
행자(行者)와 새로 배우는 이에게는 네 가지 안반수의의 행이 있으니, 두 가지 악(惡)을 제거하면 16승(勝)을 즉시 스스로 알아, 마침내 안반수의를 행하여 뜻을 멈춤을 얻게 하리라.
在行者新學者有四種安般守意行除兩惡十六勝卽時自知乃安般守意行令得止意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세는 것이요, 둘째는 서로 따르는 것이요, 셋째는 멈추는 것이요, 넷째는 관(觀)하는 것이다.
何等爲四種一爲數二爲相隨三爲止四爲觀
무엇이 두 가지 악(惡)인가? 열 번째 숨을 넘지 말 것과 열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말 것이다.
何等爲兩惡莫過十息莫減十數
무엇이 16승(勝)인가? 즉시 스스로 숨이 길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짧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몸을 움직임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미세(微細)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하지 못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춤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추지 않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꺼움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껍지 않음을 아는 것, 곧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만물이 이미 없어져 다시 숨을 얻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아는 것, 안으로 다시 생각할 바 없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身命)을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을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이것이 즉시 스스로 아는 열여섯 가지이다.
何等爲十六勝卽時自知喘息長卽自知喘息短卽自知喘息動身卽自知喘息微卽自知喘息快卽自知喘息不快卽自知喘息止卽自知喘息不止卽自知喘息歡心卽自知喘息不歡心卽自知內心念萬物已去不可復得喘息自知內無所復思喘息自知棄捐所思喘息自知不棄捐所思喘息自知放棄軀命喘息自知不放棄軀命喘息自知是爲十六卽時自知也
무엇이 열 번째 세기를 넘지 않는 것이며, 열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않은 것인가? 숨이 이미 다했는데 아직 세지 않는 것이 넘는 것이요,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곧바로 세는 것이 덜 하는 것이다. 세기를 넘어서 놓친 것도 또한 악(惡)이요, 미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악이니, 이것이 두 가지 악이 된다.
問何等爲莫過十數莫減十數報息已盡未數是爲過息未盡便數是爲減失數亦惡不及亦惡是爲兩惡
두 번째 숨에 이르러 어지러운 것은 짧은 숨이 되고, 아홉 번째 숨에 이르러 어지러운 것은 긴 숨이 되며, 열 번째 숨을 얻는 것은 상쾌한 숨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미세함이 된다. 뜻이 긴 데에 있다면 바로 뜻을 돌이켜서 ‘나는 왜 긴 것을 생각하는가?’라고 해야 하며, 뜻이 짧은 데에 있다면 즉시 깨달아서 뜻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니, 멈추면 집착이 된다. 신명(身命)을 버리는 것을 숨을 행한다[行息]고 이르니, 도의(道意)를 얻으면 문득 신명을 버리며, 아직 도의를 얻지 못했으면 항상 몸을 아끼는 까닭에 신명을 버리지 못한다. 숨이 미세한 것은 도(道)가 되고, 긴 것은 생사(生死)가 되며, 짧은 숨이 움직이면 생사가 되고, 도(道)보다 길면 짧음이 되니, 왜냐하면, 도의(道意)를 얻지 못하여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짧음이 된다.
至二息亂爲短息至九息亂爲長息得十息爲快息相隨爲微意在長便轉意我何以故念長意在短卽時覺不得令意止止爲著放棄軀命者謂行息得道意便放棄軀命未得道意常愛身故不放棄軀命也息細微爲道長爲生死短息動爲生死長於道爲短何以故不得道意無知見故爲短也
숨을 세는 것은 단(單)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복(複)이 되며, 멈춤[止]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관(觀)은 뜻을 앎이 되며, 돌이킴[還]은 도를 행함이 되고, 청정함[淨]은 도에 들어감이 된다.
數息爲單相隨爲複止爲一意觀爲知意還爲行道淨爲入道也
셀 때 생각이 열 번째 숨이 이르러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외선(外禪)이요, 몸의 부정(不淨)을 생각하고 공(空)을 따르는 것이 바로 내선(內禪)이다.
數時爲念至十息爲持是爲外禪念身不淨隨空是爲內禪也
선법(禪法)은 악이 와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을 ‘버린다’고 한다. 입을 다물고 숨을 셈에 기(氣)의 나고 듦을 따르되, 기가 어떤 곳에서 일어나고 어떤 곳에서 멸하는지 알아야 한다.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숨을 세지 못하고, 더디고 빠르고 크고 적음이 있어도 또한 세지 못하며, 귀로 어지러운 소리를 들으면 또한 세지 못한다.
禪法惡來不受是名爲棄閉口數息隨氣出入知氣發何所滅何所意有所念不得數息有遲疾大小亦不得數耳聞聲亂亦不得數也
숨을 셈에 뜻이 숨 세는 데만 있다면 공교함이 되지 못하니, 뜻을 행하여야 마침내 멈춤[止]이 되며, 숨을 셀 때 뜻이 다만 숨에만 있다면 이것은 공교함이 되지 못하니, 마땅히 뜻이 좇아서 일어나는 곳과 기(氣)가 멸하는 곳을 알아야만 마침내 세는 것에 응하여서 인연이 다하면 문득 정의(定意)를 얻는 것이다.
數息意在息數爲不工行意在意乃爲止數息意但在息是爲不工當知意所從起氣所滅是乃應數因緣盡便得定意也
수의(守意)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하여 이미 숨을 생각함에 악(惡)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수의가 된다. 숨은 인연을 따라 생겨나니, 인연이 없고 인연을 멸한다면 숨도 끊어져 멈추는 것이다. 숨을 세는 것이 지극히 성실하고, 숨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인욕(忍辱)이 되며, 숨을 셈에 기가 미세하여 다시 나고 드는 줄을 깨닫지 못해야만 이에 마땅히 한 생각을 지켜서 멈출 것이다. 숨은 몸에도 있고 또한 밖에도 있으니, 인연을 얻어 숨이 생기며 죄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숨이 있으니, 인연을 끊으면 숨이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守意者念出入息已念息不生惡故爲守意息見因緣生無因緣滅因緣斷息止也數息爲至誠息不亂爲忍辱數息氣微不復覺出入如是當守一念止也息在身亦在外得因緣息生罪未盡故有息斷因緣息不復生也
숨을 셈에 제2선(禪)을 따를 것이니, 왜냐하면,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제2선을 따르는 것이다.
數息以爲隨第二禪何以故用不待念故爲隨第二禪也
숨을 세기만 하는 것은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며, 숨을 생각해야 마침내 수의가 되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숨은 들어오는 중이고 뜻은 다했으며 식(識)은 수를 세는 데 있다.
數息爲不守意念息乃爲守意息從外入息未盡息在入意在盡識在數也
열 가지 숨에 열 가지 뜻이 있어 열 개의 묶임[絆]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어 두 개의 묶임이 되며, 멈춤[止]에 한 가지 뜻이 있어 한 개의 묶임이 된다.
十息有十意爲十絆相隨有二意爲二絆止爲一意爲一絆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악한 뜻이 되어 가히 묶을 수 없으며, 악한 뜻이 멈추어야 마침내 숨을 셈을 얻으니, 이것이 조화가 되어야 가히 뜻을 묶을 수 있다.
不得息數爲惡意不可絆惡意止乃得數是爲和調可意絆也
이미 숨을 얻었으면 숨을 버리고, 이미 서로 따름을 얻었으면 서로 따름을 버리며, 이미 멈춤을 얻었으면 멈춤을 버리고, 이미 관(觀)을 얻었으면 관을 버리며, 다시 돌이키지 말 것이니, 다시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숨을 세어 뜻을 부리거나 또한 뜻이 숨을 부리게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숨이 뜻을 부리게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뜻이 숨을 부리게 된다.
已得息棄息已得相隨棄相隨已得止棄止已得觀棄觀莫復還莫復還者莫復數息亦使意意亦使息也有所念爲息使意無所念爲意使息也
숨에 네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바람, 둘째는 기운, 셋째는 숨, 넷째는 헐떡거림[喘]이다. 소리가 있는 것은 바람이 되고, 소리가 없는 것은 기운이 되며, 나고 드는 것은 숨이 되고, 나고 드는 기운이 다하지 못한 것은 헐떡거림이 된다.
息有四事一爲風二爲氣三爲息四爲喘有聲爲風無聲爲氣出入爲息氣出入不盡爲喘也
숨을 세는 것은 바깥을 끊음이요, 서로 따르는 것은 안을 끊음이며, 밖으로 부터 들어올 때 세는 것은 바깥을 끊음이고 또한 바깥 인연을 여의려 하는 것이요, 가운데로부터 나올 때 세는 것은 안의 인연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니, 바깥은 몸을 여읨이 되고, 안은 뜻을 여읨이 된다. 몸을 여의고 뜻을 여의는 이것이 바로 서로 따르는 것이 되며, 나고 드는 숨 이것이 두 가지 일이 된다.
數息斷外相隨斷內數從外入爲斷外亦欲離外因緣數從中出爲欲離內因緣外爲身離內爲意離身離意離是爲相隨出入息是爲二事也
숨을 세는 것은 안과 밖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니, 무엇이 안과 밖인가? 안(眼)ㆍ이(耳)ㆍ비(鼻)ㆍ구(口)ㆍ신(身)ㆍ의(意)는 안이 되고,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ㆍ염(念)은 밖이 된다.
數息爲欲斷內外因緣何等爲內外謂眼耳鼻口身意爲內色聲香味細滑念爲外也
숨 쉼을 행하는 것은 뜻을 공(空)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인데 다만 나머지 뜻만 멈추려고 한다면 어떻게 공으로 향하겠는가? 숨 가운데는 숨 쉬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行息爲使意向空但欲止餘意何以爲向空息中無所爲故也
숨을 셀 때 뜻이 달아나는 것 아닌가? 이를 곧바로 깨닫는다면 죄는 무겁고 뜻은 가벼우니, 죄가 뜻을 이끌어 빨리 가버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數息意走不卽時覺者罪重意輕罪引意去疾故不覺也
도(道)를 행하여 이미 숨 쉬는 것을 얻으면 저절로 숨 쉬는 것이 싫어져서 뜻을 돌리려고 하여도 다시 세고 싶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이 숨 쉬는 것을 얻음이요,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도 또한 그렇다.
行道已得息自厭息意欲轉不復欲數如是爲得息相隨止觀亦爾也
나고 드는 숨의 사라짐을 알아서 숨의 모습[相]을 얻고, 생사(生死)를 알아서 다시 쓰지 않음으로써 생사의 모습을 얻는다면, 이미 4선(禪)을 얻은 것이니, 다만 공(空)을 생각하여 도(道)를 심을 것이다.
知出入息滅滅爲得息相知生死不復用爲得生死相已得四禪但念空爲種道栽
숨 쉬는 것을 행하여 이미 정(定)을 얻어서 다시 기(氣)의 나고 듦을 깨닫지 못한다면, 문득 관(觀)할 수 있으니, 첫째 마땅히 55가지 일을 관해야 하고, 둘째 마땅히 몸 가운데서 12인연을 관해야 한다.
行息已得定不復覺氣出入便可觀一當觀五十五事二當觀身中十二因緣也
그렇다면 숨이 나고 듦에 나고 드는 곳이 있는가? 숨이 들어올 때가 바로 그 곳이요, 숨을 내쉴 때가 바로 그 곳이다. 숨을 세며 몸으로 앉아서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生)ㆍ사(死)ㆍ식(識)을 멈추고 행하지 않음이 바로 앉음[坐]이 된다.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고 다시 헤아리는 것은 숨은 본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問息出入寧有處不報息入時是其處出息時是其處數息身坐痛痒思想生死識止不行是爲坐也念息得道復挍計者用息無所知故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었는데 어찌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가? 뜻은 숨을 알지만 숨은 뜻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뜻을 헤아릴 수 없다면 곧바로 숨을 세도록 해서 뜻을 정하려고 하지만, 비록 숨을 세더라도 다만 악(惡)이 생겨나지 않을 뿐이요 지혜는 없으니, 마땅히 어떤 행으로 지혜를 얻어서 첫 번째로부터 열 번째까지 이르러 분별하여 어지러움을 안정시키고 대경(對境)을 식별하여 약(藥)을 쓰겠는가? 이미 정의(定意)를 얻었다면 곧바로 지혜를 따라서 헤아림을 얻어 관(觀)을 따른다.
問念息得道何以爲無所知報意知息息不知意是爲無所知人不能得挍計意便令數息欲令意定雖數息但不生惡無有黠智當何等行得黠慧從一至十分別定亂識對行藥已得定意便隨黠慧得挍計爲墮觀也
무엇이 세는 것[數]이 되는가? 센다는 것은 일[事]을 말한다. 비유컨대 사람이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구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죄를 세는 것이지만 도인(道人)은 복을 세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 번째까지 정하여 한 번 뜻을 일으키면 첫 번째가 되고, 두 번 뜻을 일으키면 두 번째가 되어, 세기를 열 번째에서 마치니, 열 번째까지 이르면 끝이 되는 까닭에, 열까지 세는 것이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問何等爲數報數者謂事譬如人有事更求是爲數罪道人數福何以故正爲十一意起爲一二意起爲二數終於十至十爲竟故言十數爲福
또한 죄가 있다는 것은, 능히 숨 쉬는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되며, 또한 생사(生死)에 뜻을 두어 소멸하지 못하고 세간에 떨어져 세간 일을 끊지 못하므로 죄가 되는 것이다. 6정(情)의 여섯 가지 일에다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사(生死)ㆍ식(識)을 합한 열 가지는 안의 열 번째까지의 숨에 응하고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는 밖의 열 번째까지의 숨에 응하니, 이른바 멈추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復有罪者用不能壞息故爲罪亦謂意生死不滅墮世閒已不斷世閒事爲罪也六情爲六事痛痒思想生死識合爲十事應內十息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嫉妒瞋恚癡應外十息謂止不行也
무엇이 열여섯 가지 일인가? 열여섯 가지는 세어서 열여섯 번째까지 이름을 말하니, 즉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을 이 열여섯 번째까지 행하여 여의지 않음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問何等爲十六事報十事者謂數至十六者謂數相隨止觀還淨是爲十六事爲行不離爲隨道也
숨을 세는 것은 바람을 생각하여 색(色)을 따르게 되니, 어떻게 도에 응(應)하는가? 뜻을 행함이 세는 데에 있고 색과 기(氣)를 생각하지 않으면, 모두 곧바로 소멸하여 비상(非常)에 떨어지거나 비상을 아는 것이 도가 된다. 도인(道人)이 도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두 가지를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앉음[坐]이고, 둘째는 행함[行]이다.
問數息念風爲隨色何以應道報行意在數不念色氣盡便滅墮非常知非常爲道也道人欲得道要當知坐行二事一者爲坐二者爲行
앉음과 행함은 같은 것인가, 같지 않은 것인가? 때로는 같고 때로는 같지 않으니,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 등 이 여섯 가지 일을 때로는 앉아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니면서 하기도 하니, 왜냐하면 숨을 세어서 뜻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앉음[坐]이 되고, 뜻이 법을 따르는 것이 행이 되며, 이미 뜻을 일으켜서 여의지 않음은 행도 되고 또한 앉음도 된다.
問坐與行爲同不同報有時同有時不同數息相隨止觀還淨此六事有時爲坐有時爲行何以故數息意定是爲坐意隨法是爲行已起意不離爲行亦爲坐也
좌선(坐禪)하는 법은,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세지 않고,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세지 않는 것이다.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센다는 것은, 첫 번째 숨을 세는 것을 아직 마치지 않았는데 곧바로 두 번째를 말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세는 것이니, 이런 것은 지나친 정진(精進)이 된다.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센다는 것은, 숨이 이미 두 번 들어왔는데 겨우 첫 번째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세는 것이니, 이런 것은 미치지 못하는 정진이 된다.
坐禪法一不數二二不數一一數二者謂數一息未竟便言二是爲一數二如是爲過精進二數一者謂息已入二甫言一是爲二數一如是爲不及精進
세 번째로부터 네 번째에 이르고, 다섯 번째로부터 여섯 번째에 이르며, 일곱 번째로부터 여덟 번째에 이르고, 아홉 번째로부터 열 번째에 이르기까지 각각 부분이 있으니, 마땅히 속한 곳을 분별하여 첫 번째에 있어서는 첫 번째를 세고, 두 번째에서는 두 번째를 세는 것이 바로 법을 행하는 것이며, 곧바로 정진을 따르는 것이다.
從三至四五至六七至八九至十各自有分部當分別所屬在一數一在二數二是爲法行便墮精進也
앉음[坐]으로 도를 따르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숨을 세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둘째는 경을 외우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셋째는 경을 듣고 기뻐하며 앉아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다.
有三坐墮道一爲數息坐二爲誦經坐三爲聞經喜坐是爲三也
앉음[坐]에 3품(品)이 있으니, 첫째는 미합좌(味合坐)요, 둘째는 정좌(淨坐)요, 셋째는 무유결좌(無有結坐)이다.
무엇이 미합좌인가? 뜻이 행을 집착하여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미합좌가 된다. 무엇이 정좌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좌가 된다. 무엇이 무유결좌인가? 맺음이 이미 다한 것이 무유결좌가 된다.
坐有三品一爲味合坐二爲淨坐三爲無有結坐何等爲味合坐謂意著行不離是爲味合坐何謂爲淨坐謂不念爲淨坐何等爲無有結坐謂結已盡爲無有結坐也
숨[息]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식(雜息)이요, 둘째는 정식(淨息)이요, 셋째는 도식(道息)이다.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 잡식이 되고, 세어서 열 번째까지 이르도록 어지럽지 않는 것이 정식이 되고, 이미 도를 얻는 것이 도식이 된다.
息有三輩一爲雜息二爲淨息三爲道息不行道是爲雜息數至十息不亂是爲淨息已得道是爲道息也
숨에 세 가지가 있으니, 대식(大息)이 있고, 중식(中息)이 있고, 미식(微息)이 있다. 입으로 말하는 바가 있는 것은 대식이요, 멈추고 도를 생각하는 것은 중식이요, 멈추고 4선(禪)을 얻는 것은 미식이다.
息有三輩有大息有中息有微息口有所語謂大息止念道中息止得四禪微息止也
부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숨을 세어 뜻을 지킬 것을 가르치셨는가? 네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둘째는 뜻을 어지럽힘을 피하게 하려는 까닭이요, 셋째는 인연을 막아 생사와 만나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넷째는 니원도(泥洹道)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
問佛何以教人數息守意報有四因緣一者用不欲痛故二者用避亂意故三者用閉因緣不欲與生死會故四者用欲得泥洹道故也
비유컨대 해가 광명이 없다고 설하는 것에 네 가지 까닭이 있으니, 첫째는 구름이 끼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지가 끼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큰 바람이 불기 때문이요, 넷째는 연기가 끼었기 때문인 것처럼,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에도 또한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생사를 생각하여 헤아리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몹시 여위었기 때문이요, 넷째는 앉아서 죄지(罪地)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譬喩說日無光明者有四因緣一者用有雲故二者用有塵故三者用有大風故四者用有煙故數息不得亦有四因緣一者用念生死挍計故二者用飮食多故三者用疲極故四者用坐不得更罪地故
이 네 가지 일이 모두 상(相)이 있으니, 앉아 숨을 세면서 갑자기 다른 일을 생각하여 숨과 뜻을 잃는 것은 바로 생각하여 헤아리는 상이요, 골절이 모두 아파 능히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많이 먹은 상이요, 몸이 무겁고 뜻이 혼몽하여 다만 자려고만 하는 것은 바로 몹시 여읜 상이요, 4면(面)으로 앉았기만 하여 한 숨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죄지(罪地)의 상이다. 만일 죄가 됨을 알았다면 마땅히 경행(經行)을 하거나 앉아 경문(經文)을 읽어서 뜻으로 죄를 익히지 않으면 또한 화(禍)가 소멸될 것이다.
此四事來皆有相坐數息忽念他事失息意是爲念挍計相骨節盡痛不能久坐是爲食多相身重意瞪瞢但欲睡眠是爲疲極相四面坐不得一息是爲罪地相以知罪當經行若讀經文坐意不習罪亦禍消也
도인(道人)은 도를 행하여 마땅히 근본을 생각할 것이니, 무엇이 근본인가? 심(心)ㆍ의(意)ㆍ식(識)이 바로 근본이 된다.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보이지 않아서 이미 생겨났다가 곧바로 멸하여 근본의 뜻이 다시 생겨나지 않으니, 이 뜻을 얻음이 도의(道意)가 된다. 근본의 뜻이 이미 소멸하면 고통이 있지 않으며, 다시 인연으로 생겼다가도 곧바로 끊어지니, 정의(定意)가 날로 수승해진다. 날로 수승해지는 것이 정의가 되니, 때로는 숨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따름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며, 때로는 멈춤[止]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관(觀)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한다. 정(定)의 인연(因緣)을 얻음에 따라 곧바로 행한다.
道人行道當念本何等爲本謂心意識是爲本是三事皆不見已生便滅本意不復生得是意爲道意本意已滅無爲痛更因緣生便斷也定意日勝日勝爲定意有時從息得定意有時從相隨得定意有時從止得定意有時從觀得定意隨得定因緣直行也
숨 쉬는 것을 행하여 또한 탐(貪)에 떨어지니, 왜냐하면 뜻이 정해지면 문득 기뻐지기 때문이니, 곧바로 마땅히 나는 숨과 드는 숨을 헤아려야만 생각이 사라질 때, 숨이 생겨나면 몸이 생겨나고, 숨이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 아직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어째서 인가? 기뻐서 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이니, 곧바로 탐욕을 멈추어야 한다.
行息亦墮貪何以故意以定便喜故便當計出息入息念滅時息生身生息滅身滅尚未脫生死苦何以故喜已計如是便貪止也
숨을 세는 것은 빠르게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느리게 하려고 하며, 때로는 숨 세는 것을 마땅히 느리게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을 빠르게 하기도 하니, 왜냐하면 숨을 셀 때 뜻이 어지럽지 않으면 마땅히 느리게 해야 하고, 세는 것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빠르게 해야 한다. 서로 따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數息欲疾相隨欲遲有時數息當安徐相隨時當爲疾何以故數息意不亂當安徐數亂當爲疾相隨亦同如是也
첫 번째로 세는 것과 또한 서로 따르는 것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비록 숨을 세더라도 마땅히 기(氣)의 나고 듦을 알아 뜻을 세는 것에 붙여두어야 하며, 숨을 세다가 다시 서로 따르는 것과 지와 관을 행한다면, 이른바 숨 쉬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하니, 전생의 습(習)이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觀)에 있는 것이다. 비록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을 얻더라도 마땅히 돌이켜서 숨 세는 것으로부터 일으켜야 한다.
第一數亦相隨所念異雖數息當知氣出入意著在數也數息復行相隨止觀者謂不得息前世有習在相隨止觀雖得相隨止觀當還從數息起也
숨을 셀 때 뜻을 여의지 않으면 이것은 법을 여읜 것이 되며, 법이 아니기 때문에 숨을 셀 때 뜻이 죄를 따르지 않지만, 뜻을 세간에 둔다면 곧 죄에 떨어진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니, 뜻이 어지럽지 않아서 다시 서로 따르는 것을 행한다면 상지중(上之中)의 뜻을 증득하고 멈춤[止]을 알 것이다. 멈춤은 관(觀)과 같고 돌이킴[還]은 정(淨)과 같다.
數息意不離是爲法離爲非法數息意不隨罪意在世閒便墮罪也數息爲不欲亂意故意以不亂復行相隨者證上次意知爲止止與觀同還與淨同也
도를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었다가 그 뜻이 어긋났다면, 마땅히 다시 숨을 세거나 경(經)을 읽어야 하며, 마침내 다시 선(禪)을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으면,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
行道得微意當倒意者謂當更數息若讀經已乃復行禪微意者謂不數息及行相隨也
부처님은 여섯 가지 깨끗한 뜻이 있으니, 이른바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다. 이 여섯 가지 일로 능히 형체 없는 것을 제어하신다.
佛有六潔意謂數息相隨止觀還淨是六事能制無形也
숨은 또한 뜻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니, 왜냐하면, 셀 때 뜻이 숨에 있으면 뜻이 되지만, 세지 않을 때는 뜻과 숨이 각자 스스로 행동하니, 이것은 뜻이 아니요, 숨을 좇아 생겨나니 숨이 이미 그치면 뜻도 없는 것이다.
息亦是意亦非意何以故數時意在息爲是不數時意息各自行是爲非意從意生息已止無有意也
사람이 뜻을 부리지 못하고 뜻이 사람을 부리니, 뜻을 부리는 이는 이른바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淨)에서 『37품경』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뜻을 부리는 것이니, 사람이 도를 행하지 않고, 탐내어 구하며 욕심을 따르면, 이것은 뜻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人不使意意使人使意者謂數息相隨止觀還淨念『三十七品經』是爲使意人不行道貪求隨欲是爲意使人也
숨에 구식(垢息)이 있으니, 때[垢]를 버리지 못하면 숨을 얻지 못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3명(冥) 가운데서 가장 극심한 것이 이 구식이다. 무엇이 3명인가? 3독(毒)이 일어날 때는 몸속이 틀림없이 어둡기 때문에 3명이라고 한다. 3독은 첫째 탐음(貪婬), 둘째 성냄[瞋恚], 셋째 어리석음[愚癡]이니, 사람이 모두 이 세 가지 일로 인해서 죽는 까닭에 독(毒)이라고 한다. 숨을 셀 때는 뜻이 숨 세는 데에 있지만 세지 않을 때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선한 뜻도 있고, 악한 뜻도 있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뜻도 있다.
息有垢息垢不去不得息何等爲息垢謂三冥中最劇者是爲息垢何等爲三冥謂三毒起時身中正冥故言三冥三毒者一爲貪婬二爲瞋恚三爲愚癡人皆坐是三事死故言毒也數息時意在數息未數時有三意有善意有惡意有不善不惡意
사람이 숨 쉬는 상(相)을 얻었는지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만물과 모든 좋은 경계를 관(觀)해서 뜻이 다시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숨 쉬는 상을 얻은 것이요, 뜻이 다시 집착한다면 이것은 상을 얻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다시 정진하여 가가(家家)의 뜻을 행함을 없애려고 해야 한다. 이른바 6정(情)이 가가의 뜻이니 만물을 탐애하는 것이 모두 가가의 뜻이다.
欲知人得息相者當觀萬物及諸好色意不復著是爲得息相意復著是爲未得當更精進行家中意欲盡者謂六情爲意家貪愛萬物皆爲意家也
서로 따르는 것은 이른바 선법(善法)을 행하여 이를 좇아 해탈을 얻어 마땅히 서로 따르는 것이며, 또한 5음(陰)과 6입(入)을 따르지 않고 숨과 뜻이 서로 따르는 것이다.
相隨者謂行善法從是得脫當與相隨亦謂不隨五陰六入息與意相隨也
세 번째 멈춤[止]은, 무슨 까닭에 코끝에 멈추어 있는가?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 모두 코로부터 나고 드니, 뜻으로 옛 곳을 익힌다면 또한 인식하기 쉽기 때문에 코끝에 붙여두는 것이다. 악한 뜻이 오면 이를 끊는 것이 선(禪)이니, 어떤 때는 코 밑에 멈추어 있고 어떤 때는 마음속에 멈춰 있기도 하여, 붙어 있는 곳에서 멈추기 때문에, 사(邪)가 와서 사람의 뜻을 어지럽힌다면 한 가지 일로 똑바로 관하여, 모든 악이 와도 마땅히 마음이 움직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問第三止何以故止在鼻頭報用數息相隨止觀還淨皆從鼻出入意習故處亦爲易識以是故著鼻頭也惡意來者斷爲禪有時在鼻頭止有時在心中止在所著爲止邪來亂人意直觀一事諸惡來心不當動心爲不畏之哉也
멈춤[止]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어서 멈추는 것이며, 둘째는 서로 따라서 멈추는 것이며, 셋째는 코끝에 멈추는 것이며, 넷째는 마음을 쉬어서 멈추는 것이다.
止有四一爲數止二爲相隨止三爲鼻頭止四爲息心止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5락(樂)과 6입(入)을 제지(制止)하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이 코끝에 이르러 죄다 그친다는 것은, 이른바 악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코끝에 이르러 멈춘다는 것이요, 내쉬는 숨이 코끝에 이르러 죄다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뜻이 다시 몸을 떠나서 악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코끝에 멈춘다는 것이요, 또한 처음 숨을 들이쉴 때 문득 한 생각으로 향하고 다시 구르지 않아서 숨의 나고 듦을 또 다시 깨닫지 못함을 말하니, 이것이 바로 멈춤이 된다.
止者謂五樂六入當制止之也入息至盡鼻頭止謂惡不復入至鼻頭止出息至盡著鼻頭謂意不復離身行向惡故著鼻頭亦謂息初入時便一念向不復轉息出入亦不復覺是爲止也
멈춘다는 것은,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는 앞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달아도 뒤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닫지 못하므로, 앞의 뜻을 깨달아 뜻을 서로 관(觀)해서 곧바로 나고 드는 숨을 살피되 실패한다면 문득 상(相)을 받아들여 생사를 두려워해서 뜻을 버리고 곧바로 도의(道意)의 상(相)을 따르니, 서로 따르지 말고 다만 생각을 코끝에 붙여두어 5음(陰)의 인연을 다시 생각하지 않아 죄가 끊어지고 뜻이 소멸하며, 또한 헐떡거리지 않음이 바로 멈춤[止]이 된다.
止者如如出息入息覺知前意出不覺後意出覺前意爲意相觀便察出入息見敗便受相畏生死便卻意便隨道意相也莫爲相隨者但念著鼻頭五陰因緣不復念罪斷意滅亦不喘息是爲止也
서로 따르지 말라는 것은, 다시 뜻으로 나고 듦을 생각한다거나 5음의 인연을 따르지 않으며, 다시 헐떡거리지 않음을 말한다.
莫爲相隨者謂莫復意念出入隨五陰因緣不復喘息也
네 번째 관(觀)한다는 것은, 숨을 관하다가 실패할 때에는 신체(身體)를 관하여 숨 쉬는 것과 달리하는 것이니, 인연이 나타나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소멸하는 것이다.
第四觀者觀息敗時與觀身體異息見因緣生無因緣滅也
마음과 뜻으로 상(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른바 뜻에는 얻으려고 하는 바가 있으나, 마음으로 인연은 모이면 마땅히 다시 소멸함을 헤아려서 곧바로 하고 싶은 바를 끊고 다시 향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으로 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心意受相者謂意欲有所得心計因緣會當復滅便斷所欲不復向是爲心意受相也
인연을 인식하여 상(相)을 관함을 구족한다는 것은, 이른바 5음(陰)의 인연을 인식해 알아서, 내쉬는 숨도 또한 관하고 들이쉬는 숨도 또한 관한다는 것이다. 관(觀)은 이른바 5음을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관을 구족하는 것이요, 또한 뜻에 응하여 의상(意相)을 관함이 두 가지 인연이 되어 안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한다.
以識因緣爲俱相觀者謂識知五陰因緣出息亦觀入息亦觀觀者謂觀五陰是爲俱觀亦應意意相觀爲兩因緣在內斷惡念道也
내쉬는 숨이 다르고 들이 쉬는 숨이 다름을 관한다는 것은, 이른바 내쉬는 숨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숨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식음(識陰)이 됨을 말하니, 인연을 따라 일어나 문득 음(陰)을 받으며, 뜻이 향하는 바에 떳떳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도인은 마땅히 이것을 분별하여 알아야 한다. 또한 내쉬는 숨이 소멸하는 것을 들이쉬는 숨을 생긴다고 하며, 들이쉬는 숨을 소멸하는 것을 내쉬는 숨이 생긴다고도 한다.
觀出息異入息異者謂出息爲生死陰入息爲思想陰有時出息爲痛痒陰入息爲識陰隨因緣起便受陰意所向無有常用是故爲異道人當分別知是亦謂出息滅入息生入息滅出息生也
연고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과 만물에 대하여 뜻이 일어났다가 이미 멸하고 물건도 생겨났다가 다시 죽으니, 이것이 바로 연고가 없는 것이다.
無有故者謂人意及萬物意起已滅物生復死是爲無有故也
내쉬는 숨이 아니면 이것은 들이쉬는 숨이며, 들이쉬는 숨이 아니면 이것은 내쉬는 숨이라고 하는 것은, 숨을 내쉴 때 뜻으로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거나 숨을 들이쉴 때 뜻으로 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非出息是入息非入息是出息非謂出息時意不念入息入息時意不念出息所念異故言非也
중신(中信)은, 이른바 도(道) 가운데 들어가 도의 인연을 보고 도를 믿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신이다.
中信者謂入道中見道因緣信道是爲中信也
다섯 번째 돌이킨다[還]는 것은, 묶임[結]을 버리는 것이니, 이른바 몸의 일곱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다.
여섯 번째 정(淨)은, 묶임을 버리는 것이니, 뜻의 세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돌이킨다[還]고 하며, 돌이킨다는 것은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이 아니다.
第五還棄結者謂棄身七惡第六淨棄結者爲棄意三惡是名爲還還者爲意不復起惡惡者是爲不還也
몸을 돌이킨다는 것은, 이른바 악을 돌이킨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인 돌이킴[還]을 얻어도 아직 몸이 있기도 하고 또한 몸이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뜻이 있으면 몸이 있고 뜻이 없으면 몸이 없으므로 뜻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돌이킨다’고 한다.
돌이킨다는 것은, 이른바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이 아니다.
還身者謂還惡得第五還尚有身亦無身何以故有意有身無意無身意爲人種是名爲還還者謂意不復起惡起惡者是爲不還
또한 이른바 먼저 몸을 돕고 뒤에 뜻을 돕는다고 하니,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를 하지 않는 것은 몸을 돕는 것이 되고, 탐ㆍ진ㆍ치를 하지 않는 것은 뜻을 돕는 것이 된다.
亦謂前助身後助意不殺盜婬兩舌惡口妄言綺語是爲助身不嫉瞋恚癡是爲助意也
5음(陰)을 돌이킨다는 것은, 비유컨대 금을 사려다가 돌을 얻었다면 곧바로 땅에 버리고 쓰지 않듯이, 사람들은 모두 5음을 탐애하여 고통을 얻지만 문득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5음을 돌이킴이 된다.
還五陰者譬如買金得石便棄捐地不用人皆貪愛五陰得苦痛便不欲是爲還五陰也
무엇이 문득 소멸하여 다한 곳을 본 것인가? 이른바 무소유(無所有)가 바로 소멸하여 다한 곳이다.
이미 소유가 없다면 무슨 까닭에 ‘곳’이라고 하는가? 무소유한 곳이 네 곳이 있으니, 첫째 나는 새는 공중으로 곳을 삼고, 둘째 나한(羅漢)은 니원으로 곳을 삼고, 셋째 도는 유위(有爲)가 없음으로 곳을 삼고, 넷째 법은 관(觀)으로 곳을 삼는다.
何等爲便見滅盡處謂無所有是爲滅處問已無所有何以故爲處者無所有處有四處一者飛鳥以空中爲處二者羅漢以泥洹爲處三者道以無有爲處四者法在觀處也
내쉬고 들이쉬는 숨에서 5음의 상(相)을 받는다는 것은, 뜻이 삿되고 생각을 빠르게 하여, 굴려서 되돌려 추사(麤思)가 생기고 5음의 상을 받는 것이다. 받는다는 것은, 상(相)을 받지 않음을 받는 것이니, 5음의 상을 받음으로써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 소멸한다는 것은, 12인연을 받은 사람이 12인연을 좇아 태어나고 또한 12인연을 좇아 죽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5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出息入息受五陰相者謂意邪念疾轉還正以生覺斷爲受五陰相言受者謂受不受相也以受五陰相知起何所滅何所滅者爲受十二因緣人從十二因緣生亦從十二因緣死不念者爲不念五陰也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이른바 좋거나 나쁜 인연이 일어났다가 곧바로 다시 멸하며, 또한 몸과 기(氣)가 생기고 소멸함도 생각하면 문득 생겨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득 소멸함을 말하는 것이다.
뜻은 몸과 더불어 동등하니, 이 생사의 도를 끊음이 이 생사 가운데 있으며, 일체의 악한 일이 모두 뜻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知起何所滅何所謂善惡因緣起便復滅亦謂身亦謂氣生滅念便生不念便死意與身同等是爲斷生死道在是生死閒一切惡事皆從意來也
지금은 먼저가 아니고 먼저는 지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먼저 생각한 바는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지금 생각은 먼저 생각이 아니요, 또한 전생에 지은 바와 금생에 지은 바가 각기 복(福)을 얻음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행한 바의 선(善)은 먼저 행한 바의 악이 아님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숨은 앞의 숨이 아니고 앞의 숨은 지금 숨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今不爲前前不爲今者謂前所念已滅今念非前念亦謂前世所作今世所作各自得福亦謂今所行善非前所行惡亦謂今息非前息前息非今息也
생사를 분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뜻은 생각이 생겨나면 곧 생기고 생각이 소멸하면 소멸하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말 한 것이다. 만물과 몸, 과거나 미래의 복도 끝내 다하고 마니, 왜냐하면, 모두 생겨나면 문득 소멸하고 소멸하면 문득 다하기 때문이니, 이미 다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마땅히 힘써 구해야 할 것이다.
爲生死分別者爲意念生卽生念滅卽滅故言生死當分別萬物及身過去未來福爲索盡何以故盡以生便滅滅便盡已知盡當盡力求也
앞을 봄에 좇아서 온 바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은 좇아서 온 바가 없으므로 뜻이 일어나면 사람이 된다고 하며, 또한 사람은 스스로 지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좇아서 온 바가 있다고 하니, 사람이 스스로 지어 스스로 얻음이 바로 좇아 온 바가 없는 것이다.
視上頭無所從來者謂人無所從來意起爲人亦謂人不自作來者爲有所從來人自作自得是爲無所從來也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은, 이른바 5음(陰)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요, 또한 생사의 뜻과 사람의 뜻과 유상(有常)을 분별함을 안다는 것이며, 또한 무상(無常)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生死當分別者謂知分別五陰亦謂知分別意生死人意爲常知無有常亦爲分別也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죄가 나타나지 않지만 사람이 생사의 즈음에 있어서는 마땅히 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이다.
後視無處所者爲今現在不見罪人在生死會當得無有脫於罪故言後視無有處所
아직 도의 자취를 얻지 못하였으나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열다섯 가지 뜻을 얻었으므로 중도에 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열다섯 가지 뜻을 얻어 곧바로 도를 따른다면, 또한 굴려서 올라가 아라한에 이를 것이다.
未得道迹不得中命盡謂已得十五意不得中死要當得十五意便墮道亦轉上至阿羅漢也
중도에 도의 자취를 얻어 또한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 것은, 숨과 뜻과 몸의 세 가지 일에 있어서, 이른바 좋거나 나쁜 뜻은 마땅히 도의 자취를 얻었다가 또한 다시 중도에 무너지기도 하며, 숨은 죽었다가 다시 생겨나며, 좋은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소멸하기도 하지만, 몸은 또한 중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中得道亦不得中命盡爲息意身凡三事謂善惡意要當得道迹亦復中壞息死復生善意起復滅身亦不得中死也
무엇이 정(淨)인가? 모든 탐욕하는 대상은 부정(不淨)이 되니, 탐욕을 제거하면 바로 정(淨)이 된다.
무엇이 5음(陰)의 상(相)인가? 비유컨대 불은 음(陰)이 되고 땔감은 상(相)이 된다.
何等爲淨謂諸所貪欲爲不淨除去貪欲是爲淨何等爲五陰相譬喩火爲陰薪爲相也
숨을 세는 것[數息]으로부터 정(淨)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관(觀)이 되니, 이른바 몸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 본래 존재가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안의 뜻으로는 숨을 세고 밖의 뜻으로 나쁜 인연을 끊음이 바로 두 가지 뜻이 된다.
從息至淨是皆爲觀謂觀身相隨止觀還淨本爲無有內意數息外意斷惡因緣是爲二意也
무슨 까닭에 먼저 안팎으로 신체를 관(觀)하지 않고, 도리어 먼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하고 돌이키고 청정함을 하는가? 뜻이 청정하지[淨] 않기 때문에 몸을 보지 못하니, 뜻이 이미 청정하다면 문득 몸의 안팎에 열아홉 가지 도(道)가 있음을 다 본다. 열아홉 가지 행이 있는데, 사람이 열아홉 가지 병이 있기 때문에 또한 열아홉 가지 약이 있으니, 몸을 관하여 악로(惡露)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탐음(貪陰)을 멈추는 약이 되고, 4등심(等心)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성냄[瞋恚]을 그치는 약이 되며, 스스로 ‘본래 무슨 인연이 있는가?’라고 헤아리는 것은 바로 어리석음[愚癡]을 그치는 약이 되고,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바로 생각이 많은 것의 약이 된다.
問何以故不先內外觀身體反先數息相隨止觀還淨報用意不淨故不見身意已淨便悉見身內外道行有十九行用人有十九病故亦有十九藥觀身念惡露是爲止貪婬藥念四等心是爲止瞋恚藥自計本何因緣有是爲止愚癡藥安般守意是爲多念藥也
스스로 신체의 안팎을 관할 것이니, 무엇이 신(身)이 되고, 무엇이 체(體)가 되는가? 뼈와 살은 신이 되고, 6정(情)이 합하여 체가 된다. 무엇이 6정인가? 눈은 빛에 합하며,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코는 냄새를 향하며, 입은 맛에 끌리며, 매끄러움[細滑]에 몸이 쇠퇴하며, 뜻은 종자(種子)도 되고 어리석음도 되고 물건을 낳는 것도 된다.
內外自觀身體何等爲身何等爲體骨肉爲身六情合爲體也何等爲六情謂眼合色耳受聲鼻向香口欲味細滑爲身衰意爲種栽爲癡爲有生物也
신체가 안과 밖으로 중복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탐구(貪求)함은 크고 작음이 있고 앞과 뒤가 있으니, 얻고자 하는 바를 마땅히 분별하여 관해야 한다.
內外身體所以重出者何謂人貪求有大小有前後謂所欲得當分別觀
관한다는 것은, 보는 것이 생각이 되고 생각으로 인해 보이게 되니, 관한다는 것은 즉 아는 것이다.
觀者見爲念念因見觀者爲知也
신체를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앉아서는 일어남을 생각하고 일어나서는 뜻을 생각하여 소행(所行)하는 뜻과 소착(所着)하는 식(識)을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체를 관하여 멈추는 것이다.
身觀止者坐念起起念意不離在所行意所著爲識是爲身觀止也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무엇이 생각이 소멸한 때가 되는가? 나고 듦을 생각하여 기(氣)가 다했을 때 뜻과 숨이 소멸하는 때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비유컨대 허공에 그리려 해도 그릴 곳이 없는 것처럼 생사의 뜻과 도의 뜻도 모두 그러하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숨과 뜻을 설명할 수 없어서 저절로 설명이 소멸한 때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물건은 인연을 좇아 생기므로 근본을 끊는 것이 소멸한 때가 된다.
出息入息念滅時何等爲念滅時謂念出入氣盡時意息滅出息入息念滅時譬如畫空中無有處生死意道意俱爾也出息入息念滅時亦不說息意息說滅時出息入息念滅時物從因緣生斷本爲滅時也
안팎으로 통양(痛痒)을 보고 관한다는 것은, 통양이 좇아 일어나는 바를 보면 문득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고 관함이 된다. 안팎의 통양이라는 것은, 밖의 좋은 물건은 외양(外痒)이 되고 밖의 나쁜 물건은 외통(外痛)이 되며, 안의 맞는 뜻은 내양(內痒)이 되고 안의 맞지 않는 뜻은 내통(內痛)이 된다.
內外痛痒見觀者爲見痛痒所從起便觀是爲見觀也內外痛痒者謂外好物爲外痒外惡物爲外痛內可意爲內痒內不可意爲內痛
안에 있으면 내법(內法)이 되고 밖의 인연에 있으면 외법(外法)이 되며, 또한 눈은 안이 되고 빛은 밖이 되며, 귀는 안이 되고 소리는 밖이 되며, 코는 안이 되고 냄새는 밖이 되며, 입은 안이 되고 맛은 밖이 되며, 마음은 안이 되고 생각은 밖이 되며, 좋고 매끄러움을 보고 뜻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양(痒)이 되고, 추악(麤惡)함을 보고 뜻으로 내키지 않는 것이 바로 통(痛)이 되니, 모두 죄에 떨어진다.
在內爲內法在外因緣爲外法亦謂目爲內色爲外耳爲內聲爲外鼻爲內香爲外口爲內味爲外心爲內念爲外見好細滑意欲得是爲痒見麤惡意不用是爲痛俱墮罪也
통양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만약 사람이 팔뚝이 아파도 아프다는 뜻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저 일체 몸의 아픔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여 아픈 데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아픔을 멈춤이 된다. 생각할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생각이 아픈 데에 집착한 바가 없으며, 스스로 몸을 아껴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아껴 마땅히 스스로의 몸을 관하는 것도 또한 멈춤[止]이 된다.
痛痒觀止者若人臂痛意不作痛反念他一切身痛如是以意不在痛爲止痛亦可念亦不可念念痛無所著自愛身當觀他人身意愛他人身當自觀身亦爲止也
안팎으로 통양이 거듭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경계[色]를 보고 사랑함에 박하고 후함이 있어서 그 뜻이 평등하지 않아 관함에 많거나 적거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관하는 도를 두 가지로 분별하니, 마땅히 안으로는 어리석음이 있는 지를 관하고 밖으로는 자증(自證)할 것을 관해야 한다.
內外痛痒所以重出者何謂人見色愛有薄厚其意不等觀多與少異故重分別觀道當內觀有癡當外觀以自證也
몸과 마음의 통양(痛痒)이 각자 다르니, 춥고 더움 그리고 칼과 몽둥이의 극심한 고통을 얻는 것은 몸의 통(痛)이 되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수레에 타는 것과 좋은 옷과 몸에 편리한 모든 것은 몸의 양(痒)이 된다. 마음의 통(痛)은 자신을 걱정하고 다시 다른 사람과 만 가지 물건을 걱정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통이 되고, 마음이 좋아하는 바와 모든 환희를 얻는 것이 바로 마음의 양(痒)이 된다.
身心痛痒各自異得寒熱刀杖痛極是爲身痛得美飯載車好衣身諸所便是爲身痒心痛者身自憂復憂他人及萬事是爲心痛心得所好及諸歡喜是爲心痒也
뜻의 상(相)을 관하는 것에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속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과 5락(樂)ㆍ6쇠(衰)를 마땅히 제지하고 끊는 것이다.
意相觀者有兩因緣在內斷惡念道一者謂五樂六衰當制斷之
관한다는 것은, 스스로 몸을 관하는 것이니, 몸은 추(麤)와 세(細)를 알지 못하므로 얻어서 마침내 깨닫는 것이 바로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함이 된다.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면 숨도 또한 이 뜻이요, 세는 것도 또한 이 뜻이니, 셀 때에 숨을 관하는 것이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함이 된다.
觀者自觀身身不知麤細以得乃覺是爲意意相觀意意相觀息亦是意數亦是意數時觀息爲意意相觀也
뜻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음탕[婬]한 짓을 하려고 하면 제지하여 하지 않으며, 성[瞋恚]을 내려고 하면 제지하여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은 짓을 하려 하면 제지하여 짓지 않으며, 탐하려고 하면 제지하여 구하지 않아서, 모든 악한 일을 일절 향하지 않음이 바로 관하여 멈춤이 된다. 또한 『37품경』을 알아서 항상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이 멈춤이 된다.
意觀止者欲婬制不爲欲瞋恚制不怒欲癡制不作欲貪制不求諸惡事一切不向是爲觀止亦謂以知『三十七品經』常念不離爲止也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 다[盡]하고 정(定)하여 문득 관한다는 것은, 다한다는 것은 죄가 다함을 말하고, 정은 숨이 뜻을 멈춤을 말한다.
出息入息盡定便觀者盡謂罪盡定謂息止意
정관(定觀)은 관하여 멈춰서 돌이켜 청정함을 말하고, 다하여 멈춤[盡止]은 내가 능히 이를 설하고 이를 깨우쳤더라도 이것을 두루 다시 하는 것이 바로 다하여 멈춤이 된다. 숨을 일으키는 곳에서 만약 보시하여 복을 지음과 일체의 선법(善法)이 이미 일어났다가 곧바로 멸하고, 다시 뜻이 삿됨을 생각하여 죄행(罪行)을 향하여 익히며, 또한 무수한 전세(前世)와 금세(今世)에 뜻이 이와 같이 서로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도 또한 그러함을 이미 깨우쳐 알았다면,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미 끊었다면 안팎의 뜻으로 뜻을 관하여 멈춤이 된다.
定觀者謂觀止還淨也盡止者謂我能說是曉是遍更是是爲盡止也所起息若布施作福一切善法已起便滅更意念耶向習罪行亦無數古世今世意不如是相隨他人亦爾已知覺當斷已斷爲內外意意觀止也
안팎의 법을 본받는다는 것은, 안의 법은 몸을 말하고 밖의 법은 다른 사람을 말하며, 계를 지니는 법도 있고 계를 지니지 않는 법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본받는 것이다.
內外法法者內法謂身外法謂他人有持戒法有不持戒法是爲內外法法也
안의 법은, 지혜를 행하여 『37품경』을 여의지 않으며, 일체의 다른 일을 뜻 가운데 두지 않고, 도를 행하여 도를 얻음이 바로 안의 법이 된다. 밖의 법은, 생사를 따르고 생사를 행하면 문득 생사를 얻어 벗어나지 못하므로 일체를 마땅히 끊어야만 하니, 이미 끊었다면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관하여 멈춤이 된다.
內法謂行黠不離『三十七品經』一切餘事意不墮中行道得道是爲內法外法謂墮生死謂生死行便得生死不脫一切當斷已斷爲內外法觀止也
법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일체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 몸을 제 몸인 줄 알지만 자세히 헤아린다면 내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이 있고 색이 있으나 눈도 또한 몸이 아니고 색도 또한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미 죽으면 눈이 있어도 보이는 바가 없고, 또한 색이 있어도 응하는 바가 없으니, 몸이 이와 같다면 다만 식(識)이 있을 뿐이지 또한 몸은 아닌 것이다.
法觀止者一切人皆自身爲身諦挍計非我身何以故有眼有色眼亦非身色亦非身何以故人已死有眼無所見亦有色無所應身如是但有識亦非身
왜냐하면, 식은 형체도 없고 또한 가볍게 멈추는 곳도 없으니,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도 또한 그러하며, 이렇게 헤아림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법을 관하여 멈추는 것이다. 또한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악을 생각하는 것은 멈춤이 아니니, 왜냐하면 뜻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何以故識無有形亦無所輕止如是計眼耳鼻舌身意亦爾得是計爲法觀止亦謂不念惡爲止念惡爲不止何以故意行故也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上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강승회(康僧會) : 지겸에 이어 3세기 중반부터 활동한 역경승이다. 그는 오의 손권(孫權)에 이어 손호(孫皓)에 이르기까지 수도였던 건업(建鄴,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육도집경』및『구잡비유경』등을 번역하였다. 이상옥,「고역(古譯) 경전에 나타난 ‘참회(懺悔)’ 용어의 번역과 정착 과정」,『한국선학』33호, 한국선학회, 2012, 168~169쪽 참조.
2)
안반(安般) : 범어 ‘anapana’를 음사한 말로 아나파나(阿那波那) 혹은 안나반나(安那般那)로 표기되던 것을 줄여 안반이라 고 한 것이다. 같은 말로 수식관(數息觀)이라고도 하는데, 수를 헤아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집중시키는 관법이다.
3)
소정(小定) :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4)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성냄, 어리석음 따위를 독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5)
사주(四走) : 마음이 사방으로 치닫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명확하지 않다.
6)
오음(五陰) :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범주의 요소이다. 물체인 색(色), 감각인 수(受), 인식 작용의 상(想), 의지 작용인 행(行), 마음 작용의 식(識)을 이른다.
7)
육명(六冥) : 직역하면 여섯 가지 어둠을 뜻하나 명확하지 않다. 이전의 번역에서는 6도(六道)로 번역해 두었으나 근거는 알 수 없다. 육도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불교에서 중생이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를 6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아수라도(阿修羅道)·인간도(人間道)·천상도(天上道)를 말한다.
8)
상(想)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의식 작용을 말한다.
9)
천병(天兵) : 황제의 군대를 의미하기도 하며 혹은 하늘이 내려 보낸 군사나 수많은 군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10)
질(質) : 질정(質正)을 의미한다. 즉 일의 옳고 그름을 따져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11)
십이배(十二輩) : 십이배는 십이천(十二天)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십이천은 인간을 수호하는 열두 하늘이란 의미로 그곳을 지키는 열두 신(神). 사방(四方), 사유(四維)의 팔천(八天)에 상, 하의 2천(天) 및 일(日), 월(月)의 2천(天)을 더한 것이다. 곧 동에 제석천(帝釋天), 동남에 화천(火天), 남에 염마천(閻魔天), 서남에 나찰천(羅刹天), 서에 수천(水天), 서북에 풍천(風天), 북에 비사문천(毘沙門天), 동북에 대자재천(大自在天), 상(上)에 범천(梵天), 하(下)에 지천(地天), 그리고 일천(日天), 월천(月天)을 이른다.
12)
안식왕(安息王) : 고대 이란계 왕국인 파르티아의 왕을 말한다.
13)
상이후집(翔而後集) :『논어』「향당(鄕黨)」의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는 내용에서 나온 말이다.
14)
칠정(七正) : 일(日)ㆍ월(月)과,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의 오성(五星)인데, 순 임금이 이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여 길흉을 판단하여 정사를 행하였다고 한다.
15)
영축(盈縮) : 진퇴(進退)ㆍ굴신(屈伸)ㆍ다소(多少)ㆍ장단(長短)ㆍ수요(壽夭)ㆍ영허(盈虛) 등 온갖 변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16)
이의(二儀) : 양과 음, 또는 하늘과 땅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17)
육도(六度) :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을 말한다.
18)
머리를 돌려 ~ 흐를 뿐이다. :『시경(詩經)』「대동(大東)」에 “주나라가 가는 길은 숫돌처럼 판판하여 그 곧기가 화살과 같도다. 군자가 밟는 길이요 소인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내가 머리를 돌려 그 길을 돌아보며 줄줄 눈물을 흘리노라.[周道如砥 其直如矢 君子所履 小人所視 睠言顧之 潸焉出涕]”라는 내용이 있다.
19)
이 경에서는 수(隨)라는 글자를 자주 사용하는데, 수식상수(數息相隨)의 수 자를 생략한다. 나머지 다른 모든 본(本)에서는 수 자를 쓴다.
불설대안반수의경 하권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下
후한 안식 안세고 한역
김달진 번역
後漢安息三藏安世高譯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깨닫고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아니, 바로 그 때가 각(覺)이 되고 그 다음이 지(知)가 된다. 각(覺)은 숨의 길고 짧음을 깨닫는 것이요, 지(知)는 숨의 생기고 소멸함과, 거칠고 미세함과, 더디고 빠름을 아는 것이다.
出息入息自覺,出息入息自知;當時爲覺,以後爲知;覺者謂覺息長短,知者謂知息生滅、麤細、遲疾也。
날숨과 들숨에서 진(盡)과 지(止)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른바 날숨과 들숨을 깨달아 때를 맞추려고 하는 것은 진(盡)이 되고, 또한 만물과 몸이 생겨났다가 다시 멸함을 헤아리는 마음은 의지(意止)가 된다.
出息入息覺盡止者,謂覺出入息欲報時爲盡,亦計萬物身生復滅。止者,謂意止也。
공(空)을 보고 관(觀)한다는 것은, 도를 행하여 관(觀)을 얻어서 다시 몸을 보지 않아 문득 공(空)과 무소유(無所有)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른바 뜻에 집착한 바가 없는 것이다. 뜻에 집착한 바가 있으면 이로 인하여 소유(所有)가 있으니, 6입(入)을 끊으면 문득 현명(賢明)을 얻을 것이다. 현(賢)은 몸을 말하고, 명(明)은 도를 말한다.
見觀空者,行道得觀,不復見身。便墮空無所有者,謂意無所著;意有所著因,爲有斷六入,便得賢明。賢謂身,明謂道也。
어느 곳에서 나오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비유컨대 돌을 생각하다가 돌에서 나와 나무에 들어가면 돌은 곧 소멸하듯이 5음(陰)도 또한 그러하여, 색에서 나와 통양(痛痒)에 들어가고, 통양에서 나와 사상(思想)에 들어가며, 사상에서 나와 생사에 들어가고, 생사에서 나와 식(識)에 들어가니, 이미 이것을 분별한다면 마침내 『37품경』을 따를 것이다.
知出何所、滅何所者,譬如念石出、石入,木石便滅。五陰亦爾,出色入痛痒,出痛痒入思想;出思想入生死,出生死入識,已分別是,乃墮三十七品經也。
무엇이 무위도(無爲道)를 사유(思惟)함인가? 사(思)는 헤아리는 것이고, 유(惟)는 듣는 것이며,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위(爲)는 설한 대로 행하는 것이며, 도(道)는 얻음이 되기 때문에, 무위도(無爲道)를 사유한다고 말한 것이다.
問:何等爲思惟無爲道?報:思爲挍計,惟爲聽,無謂不念萬物,爲者如說行,道爲得,故言思惟無爲道也。
사(思)는 염(念)이 되고, 유(惟)는 흑백(黑白)을 분별함이 되며, 흑(黑)은 생사가 되고, 백(白)은 도가 되며, 도는 소유가 없는 것이니, 이미 소유가 없음을 분별했다면 곧 소유가 없는 까닭에 무위도를 사유한다고 말하지만, 만일 소위(所爲)와 집착한 바가 있다고 계교(計校)한다면, 사유가 아니다. 사(思)는 또한 물(物)이 되고 유(惟)는 뜻을 이해함이 되니, 뜻을 이해하면 문득 12인연의 일을 알게 된다. 또한 사(思)는 염(念)이 되고, 유(惟)는 헤아림이 된다.
思爲念,惟爲分別白黑。黑爲生死,白爲道。道無所有,已分別無所有,便無所爲,故言思惟無爲道。若計有所爲、所著,爲非思惟。思亦爲物,惟爲解意;解意便知十二因緣事。亦謂思爲念,惟爲計也。
생사를 끊고 신족(神足)을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생(生)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사(死)가 되니, 신족(神足)을 얻은 이는 능히 날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斷生死得神足,謂意有所念爲生,無所念爲死。得神足者,能飛行故,言生死當斷也。
신족을 얻음에 다섯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희(喜), 둘째는 신(信), 셋째는 정진, 넷째는 정(定), 다섯째는 통(通)이다. 4신족에서 염력(念力)이 다하지 않으면 5통(通)을 얻고, 염력이 다하여 자재(自在)로우면 6통으로 향하니, 도인(道人)으로서 4신족을 한다면 5통을 얻고, 뜻을 없앤다면 가히 6통을 얻을 것이다. 뜻을 없앤다는 것은, 이른바 만물을 뜻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는 신(信), 둘째는 정진(精進), 셋째는 의(意), 넷째는 정(定), 다섯째는 지혜[黠]이니, 이 다섯 가지가 4신족이 되고, 생각이 힘이 되는 것은 여섯 가지 일이다.
得神足有五意:一者、喜;二者、信;三者、精進;四者、定;五者、通也。四神足念不盡力得五通,盡力自在向六通,爲道人四神足,得五通盡意可得六通盡意,謂萬物意不欲也。一、信;二、精進;三、意;四、定;五、黠,是五事,爲四神足。念爲力者,凡六事也。
신(信)을 따르는 것은 4신족념(神足念)에 속하며, 희(喜)를 따르고 정진을 따르고 정을 따르고 지혜를 따르는 것은 5근(根)에 속한다. 희정(喜定)에 따름을 도를 믿는다고 하고, 역정(力定)을 따름을 정진이라고 하며, 의정(意定)을 따름을 의념정(意念定)이라 하고, 시정(施定)을 따름을 도를 행한다고 한다. 종자가 되기 때문에 뿌리가 있으니, 함이 있는 것은 모두 악이 되므로 문득 상(想)이 생긴다.
從信爲屬四神足念,從喜、從念精進、從定、從黠,是爲屬五根也。從喜定,謂信道;從力定,謂精進;從意定,謂意念定;從施定,謂行道也。爲種故有根,有爲之事皆爲惡,便生想。
능히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선(禪)을 얻음은 바로 인(因)이 힘이 되며, 또한 악이 능히 선한 뜻을 이기지 못함을 말한다. 소멸했다가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힘이 되니, 역정(力定)이란 악한 뜻이 오려고 해도 능히 선한 뜻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역정이 되는 것이다.
不能得勝。謂得禪是因爲力,亦謂惡不能勝善意。滅復起,故爲力。力定者,惡意欲來,不能壞;善意故,爲力定也。
도인이 도를 행하여 아직 관(觀)을 얻지 못했으면 마땅히 관을 얻기를 계교(計校)할 것이니, 있는 곳에서 뜻을 관하되 다시 굴리지 않는 것이 관을 얻음이 된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고 좌선(坐禪)하여 두 가지 법을 관하니, 때로는 몸을 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뜻을 관하기도 하며, 때로는 헐떡거리는 숨을 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有)를 관하기도 하며, 때로는 무(無)를 관하기도 하니, 인연이 있는 곳에서 마땅히 분별하여 관해야 한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고 두 가지 법을 관하면, 악은 이미 없어졌다.
道人行道未得觀,當挍計得觀。在所觀意不復轉,爲得觀。止惡一法,爲坐禪;觀二法,有時觀身,有時觀意,有時觀喘息,有時觀有,有時觀無,在所因緣當分別觀也。止惡一法,觀二法,惡已盡。
멈추어 관한다는 것은, 도를 관하는 것이니, 악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면 도를 보지 못하며, 악이 이미 없어져야 마침내 도를 관함을 얻는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춤이 악을 앎이 되니, 일체를 능히 제어하여 뜻에 집착하지 않음이 멈춤이 되며, 또한 숨을 세어 서로 따라서 멈춤이 된다. 숨을 세어 서로 따라서 멈춤이 바로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는 것이 되니, 악이 이미 멈추면 문득 관(觀)을 얻기 때문에 두 가지 법을 관함이 되며, 4제(諦)를 얻음이 되며, 정(淨)을 행함이 된다.
止觀者爲觀道。惡未盡不見道,惡已盡,乃得觀道也。止惡一法爲知惡,一切能制不著意爲止,亦爲得息想隨止。得息想隨止,是爲止惡一法。惡已止,便得觀故。爲觀二法,爲得四諦,爲行淨。
마땅히 다시 정(淨)을 지어야한다는 것은, 고(苦)를 알아 습(習)을 버리고 진(盡)을 알아 도를 행하는 것이니, 마치 해가 돋을 때에 청정함이 12문(門)에서 굴러 나옴과 같기 때문에 경(經)에서 도(道)를 좇아 해탈을 얻는다고 말했다.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보는 것이 마치 해가 돋을 때와 같으니, 비유컨대 해가 돋으면 보이는 것이 많아서 모든 어둠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다.
當復作淨者,識苦棄習,知盡行道。如日出時淨,轉出十二門故,經言:從道得脫也。去冥見明,如日出時,譬如日出多所見,爲棄諸冥。
어둠이 고(苦)가 되니, 어떻게 고가 됨을 아는가? 걸리는[罣礙] 바가 많기 때문에 고(苦)가 됨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 습(習)을 버림이 되는가? 이른바 일을 짓지 않는 것이다.
冥爲苦,何以知爲苦?多所罣礙,故知爲苦。何等爲棄習?謂不作事。
무엇이 증득함을 다함이 되는가? 이른바 소유가 없는 것이니, 도(道)는 고(苦)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습(習)을 끊고 증득함을 다하여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何等爲盡證?謂無所有。道者,明識苦、斷習、盡證、念道。識從苦生,不得苦,亦無有識,是爲苦也。
증득함을 다한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은 다 마땅히 늙고 병들고 죽는 줄을 알아 증득하는 것이며, 만물도 모두 마땅히 없어지는 줄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증득함을 다함이 된다. 비유컨대 해가 돋아 네 가지 일을 지음과 같다. 첫째는 어둠을 파괴함이니, 지혜(慧)가 능히 어리석음[癡]을 파괴함을 말하고, 둘째는 소견이 밝음이니, 어리석음을 없애면 홀로 지혜만 있음을 말하며, 셋째는 만물의 색을 봄이니, 몸에 소유한 모든 악로(惡露)를 보는 것이요, 넷째는 만물을 성숙(成熟)함이니, 만일 해와 달이 없으면 만물이 성숙하지 못하듯이 사람도 지혜와 어리석음이 없으면 뜻이 또한 성숙하지 못한다.
盡證者,謂知人盡。當老病死證者,知萬物皆當滅,是爲盡證也。譬如日出作四事:一、壞冥,謂慧能壞癡;二、見明,謂癡除獨慧在;三、見色萬物,爲見身諸所有惡露;四、成熟萬物,設無日月,萬物不熟;人無有慧,癡意亦不熟也。
위의 행을 다 행한 이는 행할 바의 일이 이미 행하여졌으므로 분별하여 설하지 않으니, 이른바 5직성(直聲)을 행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행을 얻은 것이다.
上頭行俱行者,所行事已行,不分別說,謂行五直聲,身心幷得行也。
제(諦)를 좇아 법을 생각하여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고, 제를 좇아 법을 생각하여 뜻이 생각하는 바에 붙어 있으면, 이것이 문득 생겨나 생사를 구하고, 생사를 얻어 도를 구하며, 도를 얻어 안과 밖으로 행을 따라 뜻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법을 생각하여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는 것이다.
從諦念法,意著法中;從諦念法,意著所念是便生是,求生死得生死,求道得道。內外隨所起意,是爲念法。意著法中者。
4제(諦)를 좇아 저절로 뜻이 생겨남을 안다면, 이것은 마땅히 태어나지 않고 얻을 수 없음을 얻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곧바로 뜻을 제거하여 두려워서 감히 범하지 못하는 것이고, 행하는 바와 생각하는 바가 항상 도에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음이 된다. 이것을 법정(法正)이라고 하니, 제(諦)의 근본을 좇아 근본을 일으켜 뜻에 붙어 있는 것이다.
從四諦自知意生,是當得,是不生,是不得,是便卻,意畏不敢犯。所行所念常在道,是爲意著法中也。是名爲法,正從諦本起,本著意。
법정(法正)이란 도법(道法)을 말하고, 제(諦)를 따른다는 것은 4제의 근본에서 일어남을 말하며, 뜻에 붙어 있다는 것은 향하는 바의 생사와 온갖 일이 모두 본래 뜻을 좇아 일어남을 말한다.
法正者,謂道法。從諦,謂四諦。本起著意者,謂所向生死萬事,皆本從意起。
뜻에 붙어 있으면 곧바로 5음(陰)이 생기므로 일으킨 바의 뜻을 마땅히 끊어야 하니, 근본을 끊으면 5음도 끊어지며, 때로는 저절로 끊어져 생각하지 않는다. 뜻이 저절로 일어나면 죄가 되고, 다시 도에 있지 않으면 죄가 되니,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便著意,便有五陰所起。意當斷,斷本五陰便斷。有時自斷不念,意自起爲罪,復不定在道爲罪,未盡故也。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다는 것은, 제(諦)의 뜻으로 만물을 생각하면 외법(外法) 가운데 떨어지게 되고, 뜻으로 만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법 가운데 떨어지게 된다.
意著法中者,諦意念萬物,爲墮外法中,意不念萬物,爲墮道法中。
5음(陰)은 생사법이 되고, 『37품경』은 도법(道法)이 되니,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다는 것은, 이른바 5음을 제어하여 범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항상 도를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을 말하니, 이것이 바로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는 것이다.
五陰爲生死法,三十七品經爲道法。意著法中者,謂制五陰不犯,亦謂常念道不離,是爲意著法中也。
본래 바른 곳이라는 것은, 밖에 있으면 물(物)의 근본이 되고 복(福)이 되며 안에 있으면 모두 『37품경』이 되니, 도를 행함은 한 때의 실마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所本正者,所在外爲物本,爲福所;在內摠爲三十七品經,行道非一時端故。
근본으로 한 바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37품경』의 법을 행하여 만약 차례대로 행을 따르면, 뜻이 사(邪)에 들어가지 않음이 바름이 되기 때문에 본래 바른 곳이라고 한 것이다. 본래 바른 곳은 각자 행이 다르니, 무위(無爲)로써 근본을 대(對)하고, 구하지 않음으로써 정(正)을 대하며, 무위(無爲)를 일삼음으로써 무위를 대하고, 영원하지 않음으로써 도(道)를 대하며, 무유위(無有爲)로써 대하니, 또한 소유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바름도 없는 것이 무소유(無所有)가 된다. 정각(定覺)으로 몸에 이와 같은 법을 받아들인다.
言所本者,謂行三十七品經法,如次第隨行,意不入邪爲正,故名爲所本。正所本正,各自異行,以無爲對本,以不求爲對正;以無爲爲對無爲,以不常爲對道,以無有爲對亦無有所、亦無有本、亦無有正,爲無所有也。定覺受身,如是法。
도설(道說)은 이른바 법정(法定)이니, 도설이라는 것은 좇아 온 바의 인연을 설하여 도를 얻음을 말한다.
道說謂法定。道說者,謂說所從因緣得道。
음(陰)을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5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들어감이 있다는 것은 5음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며, 인하여 생사음(生死陰)이 있다는 것은 정(正)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정(正)은 도가 스스로 바른 것이니 다만 스스로 마음을 바르게 할뿐이다.
見陰受者,爲受五陰。有入者,爲入五陰中。因有生死陰者,爲受正;正者,道自正,但當爲自正心耳。
사람들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숨을 세는 것을 얻고, 서로 따름을 얻고, 멈춤[止]을 얻어 문득 환희하지만, 이 네 가지는 비유컨대 나무를 비비면 연기는 날지라도 물(物)을 익힐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무엇을 얻었다고 기뻐할 것인가? 아직 뛰어난 요체(要體)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人行安般守意,得數,得相隨,得止,便歡喜,是四種。譬如鑽火見煙,不能熟物,得何等喜?用未得出要故也。
안반수의에 열여덟 가지 번뇌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도를 따르지 못하게 하니, 첫째는 애욕(愛欲), 둘째는 성냄[瞋恚], 셋째는 어리석음[愚癡], 넷째는 재미와 즐거움[戱樂], 다섯째는 아만(我慢), 여섯째는 의심, 일곱째는 받아 행하지 않는 모습[不受行相], 여덟째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 아홉째는 생각하지 않음이다.
安般守意有十八惱,令人不隨道:一爲愛欲,二爲瞋恚,三爲癡,四爲戲樂,五爲慢,六爲疑,七爲不受行相,八爲受他人相,九爲不念。
열째는 엉뚱한 생각, 열한째는 불만스런 생각, 열두째는 과도한 정진, 열셋째는 미급한 정진, 열넷째는 놀래고 두려워함, 열다섯째는 뜻을 강제함, 열여섯째는 걱정, 열일곱째는 조급하게 서두름, 열여덟째는 뜻을 헤아리지 않고 행하는 사랑, 이것이 바로 열여덟 가지 번뇌이다. 이 열여덟 가지 인연을 호지(護持)하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니, 호지함으로써 문득 도를 얻는다.
十爲他念,十一爲不滿念,十二爲過精進,十三爲不及精進,十四爲驚怖,十五爲强制意,十六爲憂,十七爲悤悤,十八爲不度意行愛,是爲十八惱。不護是十八因緣不得道,以護便得道也。
받아 행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은, 이른바 32가지 물(物)을 관(觀)하지 않고, 『37품경』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받아서 행하지 않는 모습이다.
不受行相者,謂不觀三十二物,不念三十七品經,是爲不受行相。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라는 것은, 이른바 아직 열 번째 숨을 얻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서로 따름[相隨]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受他人相者,謂未得十息,便行相隨,是爲受他人相。
엉뚱한 생각이라는 것은, 이른바 들이쉴 때 내쉬는 숨을 생각하고 내쉴 때는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엉뚱한 생각이다.
他念者,入息時念出息,出息時念入息,是爲他念。
불만스런 생각이라는 것은, 이른바 아직 첫 번째 선(禪)을 얻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두 번째 선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만스런 생각이다.
不滿念者,謂未得一禪,便念二禪,是爲不滿念。
뜻을 강제한다는 것은, 이른바 앉았을 때 뜻이 어지러워 숨을 얻지 못하면 마땅히 경행(經行)과 경을 읽어 어지러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뜻을 강제하는 것이다.
强制意者,謂坐亂,意不得息,當經行、讀經,以亂不起,是爲强制意也。
정진으로 지혜를 삼아 이 여섯 가지 일 가운데서 달릴 것이니,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 이것이 바로 여섯 가지이다.
精進爲黠,走是六事中,謂數息、相隨、止、觀、還、淨,是爲六也。
무엇이 빠른 숨이고, 무엇이 느린 숨이며, 무엇이 기운이고, 무엇이 힘이며, 무엇이 바람인가? 제어하는 것이 뜻이 되고, 숨은 명궁(命宮)이 되고, 기운은 보고 듣는 것이 되며, 바람은 능히 말하는 것이 되니 도(道)를 좇아 굽혔다 펴지며, 힘은 능히 무거운 성냄[瞋恚]을 들어 올릴 수 있다.
何等爲喘?何等爲息?何等爲氣?何等爲力?何等爲風?喘者,爲意息,爲命守,爲氣,爲視聽風,爲能言語,從道屈伸力,爲能擧重瞋恚也。
반드시 수의(守意)를 좇아 도를 얻을 것이니, 무슨 연(緣)으로 수의를 얻는가? 세는 것으로부터 굴려서 숨을 얻고, 숨을 굴려서 서로 따름을 얻으며,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도 또한 그렇다.
要從守意得道,何緣得守意?從數轉得息,息轉得相隨,止觀還淨亦爾也。
도를 행함은 뜻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니, 마땅히 세 가지 일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먼저 몸이 본래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관하고 생각하되 다만 5음(陰)의 행으로부터 왔다면 5음을 끊어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니, 비유컨대 잠깐 동안 맡겨놓은 듯이 할 뿐이요, 뜻으로 풀지 않고 아홉 가지 도를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증지(證知)한다. 둘째는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내관(內觀)하여 숨의 나고 듦을 따름이요, 셋째는 숨을 내쉬고 들이쉬다가 생각이 사라졌을 때 숨의 나고 듦이 조금 가벼운 것이다.
行道欲得止意,當知三事:一者、先觀念身本何從來,但從五陰行有,斷五陰不復生;譬如寄託須臾耳,意不解,念九道以自證。二者、自當內視心中隨息出入。三者、出息入息念滅時,息出小輕。
생각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소유(所有)가 없다는 것을 아는가? 뜻이 정(定)하면 문득 공(空)을 알게 되니, 공을 알면 곧바로 소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슨 까닭에 숨을 쉬는가? 쉬지 않으면 곧바로 죽기 때문이다. 몸은 다만 기(氣)가 지은 바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기가 없어지면 공(空)이 되고, 공을 깨달으면 도(道)에 떨어지게 된다.
念滅時,何等爲知無所有?意定便知空,知空便知無所有。何以故?息不報便死,知身但氣所作,氣滅爲空,覺空墮道也。
그러므로 도를 행하는데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몸을 관함이요, 둘째는 한 마음을 생각함이요, 셋째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함이다. 다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몸의 통양(痛痒)을 멈춤이요, 둘째는 입의 소리를 멈춤이요, 셋째는 뜻의 염행(念行)을 멈춤이다. 이 여섯 가지 일로서 재빨리 숨을 얻게 된다.
故行道有三事:一者、觀身;二者、念一心;三者、念出入息。復有三事:一者、止身痛痒;二者、止口聲;三者、止意念行,是六事疾得息也。
경(經)을 의거하여 말하건대 한 생각을 한 마음이라 이르고, 가까이 생각함을 몸을 헤아린다고 이르며, 많은 생각을 한 마음이라 이르고, 생각을 여의지 않음을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고 이르니, 몸소 이 네 가지를 행한다면 재빨리 숨을 얻게 된다.
要經言:一念謂一心,近念謂計身,多念謂一心,不離念謂不離念。身行是四事,便疾得息也。
좌선하면서 숨을 세어 즉시 뜻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복(福)이요, 마침내 안온하여 어지럽지 않음이 바로 미래의 복이며, 더욱 오래되어 계속 다시 안정된 것이 바로 과거의 복이 된다.
坐禪數息,卽時定意,是爲今福;遂安隱不亂,是爲未來福;益久續復安定,是爲過去福也。
좌선하면서 숨을 세어 뜻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죄요, 마침내 안온하지 못하여 어지러운 뜻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미래의 죄며, 좌선하여 더욱 오래되었으나 마침내 안정하지 못한 것은 바로 과거의 죄가 된다.
坐禪數息不得定意,是爲今罪;遂不安隱亂意起,是爲當來罪;坐禪益久遂不安定,是爲過去罪也。
또한 몸의 잘못과 뜻의 잘못이 있으니, 몸은 바르되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뜻의 잘못이요, 몸이 굽어서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몸의 잘못이 된다.
亦有身過、意過:身直數息不得,是爲意過;身曲數息不得,是爲身過也。
좌선하여 스스로 깨달아 뜻을 정(定)할 수 있으니, 뜻으로 기뻐하면 뜻을 어지럽히고, 기뻐하지 않으면 도의 뜻이 된다.
坐禪自覺得定意,意喜爲亂意,不喜爲道意。
좌선하여 생각과 숨이 이미 멈추면 곧바로 관(觀)하고, 관하여 멈추면 다시 숨을 행하니, 사람이 도(道)를 행하되 마땅히 이것으로 떳떳한 법[常法]을 삼아야 한다.
坐禪念息已止便觀,觀止復行息。人行道,當以是爲常法也。
부처님께서 5신(信)을 설하셨으니, 첫째는 부처님이 계시고 경이 있음을 믿음이요, 둘째는 집을 떠나 머리를 깎고 도(道)를 구함이요, 셋째는 앉아서 도를 행함이요, 넷째는 숨을 얻음이요, 다섯째는 뜻을 정(定)함이니, 생각할 바를 생각하지 않음도 공(空)이 되고 어려움[難]을 생각하지 않음도 공이 된다.
佛說有五信:一者、信有佛有經;二者、去家下頭髮求道;三者、坐行道、四者、得息;五者、定意。所念不念爲空,難不念爲空。
무슨 까닭에 숨을 생각하는가? 숨에는 5색(色)과 탐음ㆍ진에ㆍ우치ㆍ애욕이 없으니 이것이 또한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何以故念息?報曰:息中無五,色貪、婬、瞋恚、愚癡、愛欲,是亦爲空也。
몸 가운데 뜻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이른바 뜻을 몸에 두어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몸 가운데 뜻을 사람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숨을 헤아리게 해서 지혜로써 능히 뜻을 제어하고 다시 숨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可守身中意者,謂意在身觀,是爲身中意。人不能制意:故令數息,以黠能制意,不復數息也。
무엇이 스스로 아는 것이며, 무엇이 스스로 증득하는 것인가? 5음(陰)을 능히 분별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아는 것이고, 도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스스로 증득하는 것이다.
問:何等爲自知?何等爲自證?報:謂能分別五陰是爲自知,不疑道是爲自證也。
무엇이 무위(無爲)인가? 무위에 두 가지가 있으니, 밖의 무위가 있고 안의 무위가 있다. 눈으로 색을 보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코로 냄새를 맡지 않고, 입으로 맛을 맛들이지 않으며, 몸으로 매끄러움을 탐내지 않고, 뜻으로 망령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밖의 무위가 되고,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止] 관(觀)하며 돌이키고[還] 정(淨)하는 것이 바로 안의 무위가 된다.
問曰:何等爲無爲?報:無爲有二輩:有外無爲,有內無爲。眼不觀色,耳不聽聲,鼻不受香,口不味味,身不貪細滑,意不志念,是爲外無爲;數息、相隨、止、觀、還、淨,是爲內無爲也。
현재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어찌 무위가 되는가? 몸과 입으로 계(戒)를 삼고 뜻으로 도행(道行)을 향한다면, 아무리 생각하는 바가 있더라도 본래 무위로 나아가게 된다.
問:現有所念,何以爲無爲?報:身口爲戒,意向道行,雖有所念,本趣無爲也。
무엇을 무(無)라고 하며, 무엇을 위(爲)라고 하는가?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위(爲)는 경을 따라 행하는 것이니, 일을 가르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무위(無爲)라고 한다.
問:何等爲無?何等名爲?報:無者,謂不念萬物;爲者,隨經行指事稱名,故言無爲也。
만약 숙명(宿命)의 대(對)가 당도한다면 무엇으로 물리치는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춤과 관(觀)과 돌이킴과 정(淨)을 행하며, 『37품경』을 염하여 능히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으니, 숙명의 대를 물리칠 수 없다면 숨을 세고 『37품경』을 행한다.
問:設使宿命對來到,當何以卻?報:行數息、相隨、止、觀、還、淨,念『三十七品經』能卻。難:宿命對不可卻,數息行『三十七品經』。
어떻게 해서 능히 물리칠 수 있는가? 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악이 소멸하니, 만약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觀)하고 돌이키고 정(淨)하여 능히 악을 소멸하지 못한다면, 세간 사람들이 모두 도를 얻을 수 없겠지만, 악을 소멸하기 때문에 도를 얻는다.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하며 돌이키고 정(淨)하며, 『37품경』을 행한다면, 오히려 부처도 될 것인데 하물며 죄대(罪對)이겠는가? 시방에 산처럼 쌓였을지라도 정진하여 도를 행하면 죄와 만나지 않을 것이다.
何以故能卻?報:用念道故消惡。設使數息、相隨、止、觀、還、淨不能滅惡,世閒人皆不得道,用消惡,故得道。數息、相隨、止、觀、還、淨,行三十七品經尚得作佛,何況罪對,在十方積如山,精進行道,不與罪會。
경(經)에서 무슨 까닭에 만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가? 이것을 짓기 때문이니, 숨을 세면 12품에 떨어지게 된다. 무엇이 12품인가? 숨을 셀 때는 4의지(意止)에 떨어지고, 숨이 어지럽지 않을 때는 4의념단(意念斷)에 떨어지며, 열 번째 숨을 얻으면 4신족(神足)에 떨어지게 되니, 이것이 바로 12품에 떨어지는 것이다.
問曰:經言作是何以故不會?報:用作是故也。數息爲墮十二品。何謂十二品?數息時,墮四意止;息不亂時,爲墮四意念斷,得十息;有時爲墮四神足,是爲墮十二品也。
무엇이 『37품경』을 생각함이 되는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하며 돌이키고 정(淨)하는 행이 바로 여섯 가지 일이며, 이것이 바로 『37품경』을 생각하는 것이다. 숨을 세기를 행하는 것은 또한 『37품경』을 행하기 위함이다.
問:何等爲念『三十七品經』?報:謂數息、相隨、止、觀、還、淨,行是六事,是爲念三十七品經也。行數息,亦爲行三十七品經。
무슨 까닭에 『37품경』을 행함이 되는가? 숨을 세면 4의지(意止)에 떨어지게 된다.
問:何以故爲行『三十七品經』?報:數息爲墮四意止。
무슨 까닭에 4의지가 되고, 또한 4의단(意斷)에 떨어지는가?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4의단이 되고, 또한 4신족(神足)에 떨어지며, 신(信)을 따르기 때문에 4신족이 되는 것이다.
何以故?爲四意止,亦墮四意斷,用不待念,故爲四意斷;亦墮四神足,用從信,故爲神足也。
숨을 세면 신근(信根)에 떨어지게 되니, 부처님을 믿어서 뜻으로 기뻐하는 까닭에 신근이 생기며, 또한 능근(能根)에도 떨어지니, 앉아서 근(根)을 행하는 까닭에 능근에 떨어지게 되며, 또한 식근(識根)에도 떨어지니, 제(諦)를 아는 까닭에 식근이 되며, 또한 정근(定根)에도 떨어지니, 뜻이 편안한 까닭에 정근이 되며, 또한 혜근(慧根)에도 떨어지니, 어리석은 뜻을 여의고 묶임[結]을 푸는 까닭에 혜근이 되는 것이다.
數息爲墮信根,用信佛意喜,故生信根;亦墮能根,用坐行,故爲墮能根;亦墮識根,用知諦,故爲識根:亦墮定根,用意安,故爲定根;亦墮黠根,用離癡意解結,故爲黠根也。
숨을 세면 또한 신력(信力)에도 떨어지니 의심하지 않는 까닭에 신력이 되며, 또한 진력(進力)에도 떨어지니 정진하는 까닭에 진력이 되며, 또한 염력(念力)에도 떨어지니 유여한 뜻이 능히 쇠하지 않는 까닭에 염력이 되며, 또한 정력(定力)에도 떨어지니 마음이 한결같은 까닭에 정력이 되며, 또한 혜력(慧力)에도 떨어지니 앞에서 말한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을 분별하는 까닭에 혜력이 되는 것이다.
數息亦墮信力,用不疑,故爲信力;亦墮進力,用精進,故爲進力;亦墮念力,用餘意不能攘,故爲念力;亦墮定力,用一心,故爲定力;亦墮黠力,用前分別四意止、斷、神足,故爲黠力也。
숨을 세면 또한 각의(覺意)에도 떨어지니 고(苦)를 인식하는 까닭에 각의가 되며, 또한 법식각의(法識覺意)에도 떨어지니 도의 인연을 아는 까닭에 법각의(法覺意)가 되며, 또한 역각의(力覺意)에도 떨어지니 악을 버리는 까닭에 역각의가 되며, 또한 애각의(愛覺意)에도 떨어지니 도를 탐내고 좋아하는 까닭에 애각의가 되며, 또한 식각의(息覺意)에도 떨어지니 뜻을 멈추는 까닭에 식각의가 되며, 또한 정각의(定覺意)에도 떨어지니 생각하지 않는 까닭에 정각의가 되며, 또한 수각의(守覺意)에도 떨어지니 행을 여의지 않는 까닭에 수각의가 되는 것이다.
數息亦墮覺意。用識苦,故爲覺意;亦墮法識覺意,用知道因緣,故爲法覺意;亦墮力覺意,用棄惡,故爲力覺意;亦墮愛覺意,用貪樂道,,故爲愛覺意;亦墮息意覺,用意止,故爲息意覺;亦墮定覺意,用不念,故爲定覺意;亦墮守覺意,用行不離,故爲守覺意也。
숨을 세면 또한 8행(行)에도 떨어진다. 뜻이 바른 까닭에 8행에 들어가니, 정의(定意)와 자심(慈心)과 정념(正念)과 정법(凈法)은 바른 몸이 되고 지성스러운 말과 부드러운 말과 곧은 말과 돌이키지 않는 말은 바른 입이 된다. 지혜에 뜻을 두며, 믿음에 뜻을 두며, 인욕에 뜻을 두는 것은, 바른 마음이 되니, 이른바 소리와 숨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10선(善)으로 도행(道行)에 떨어짐이 된다.
數息亦墮八行,用意正,故入八行。定意、慈心、念淨法,是爲直身;至誠語、軟語、直語、不還語,是爲直語。黠在意,信在意,忍辱在意,是爲直心。所謂以聲息,是爲十善墮道行也。
숨을 세면 또한 바른 소견에 떨어지니 자세히 관하는 까닭에 바른 소견이 되며, 또한 바른 행에 떨어지니 도를 향하는 까닭에 바른 행이 되며, 또한 바른 대치(對治)에 떨어지니 『37품경』을 행하는 까닭에 바른 대치가 되며, 또한 바른 뜻에 떨어지니 제(諦)를 생각하는 까닭에 바른 뜻이 되며, 또한 바른 정(定)에 떨어지니 뜻이 청백하여 마구니 떼를 파괴하는 까닭에 바른 정이 된다. 이것이 바로 8행이다.
數息亦墮直見,用諦觀,故爲直見;亦墮直行,用向道,故爲直行;亦墮直治,用行『三十七品經』,故爲直治;亦墮直意,用念諦,故爲直意;亦墮直定,用意白淨,壞魔兵,故爲直定,是爲八行。
무엇이 마구니 떼인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이 바로 마구니 떼이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바로 마구니 떼를 파괴함이 되니, 37품으로 응당 거둬 묶어야 한다.
何等爲魔兵?謂色、聲、香、味、細滑,是爲魔兵。不受是爲壞魔兵。三十七品應斂。
만약 스스로 몸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면, 탐음을 멈추고 뜻이 어지럽지 않아서 나머지 뜻도 멈추며, 스스로 통양(痛痒)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통양을 관하면 성냄[瞋恚]을 멈추며, 스스로 뜻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관하면 어리석음[愚癡]을 멈추며, 스스로 법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법을 관하면 도를 얻으니, 이것을 4의지(意止)라 한다.
設自觀身,觀他人身,止婬,不亂意,止餘意;自觀痛痒,觀他人痛痒,止瞋恚;自觀意,觀他人意,止癡;自觀法,觀他人法,得道,是名爲四意止也。
몸을 피하는 것은 경계를 피함이 되며, 통양(痛痒)을 피하는 것은 5락(樂)을 피함이 되며, 뜻을 피하는 것은 생각을 피하고 법을 피함이 되며, 원업(願業)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남을 대치함이니, 이것을 4의념단(意念斷)이라고 한다.
避身爲避色,避痛痒爲避五樂,避意爲避念,避法不墮願業治生,是名爲四意念斷也。
고(苦)를 인식한다는 것은 본래 고이기 때문이며, 고가 된다는 것은 몸이 있기 때문이며, 고를 좇아 인연이 일어난다는 것은 보는 바의 만물이 고(苦)이기 때문이다. 습(習)이라는 것은, 본래 고(苦)가 되기 때문에 고를 좇아 인연이 생기게 된다. 진(盡)이라는 것은, 만물이 모두 파괴되어 고(苦)와 습(習)을 늘리기 때문에 다시 8도(道) 가운데 떨어지는 것이다. 도인은 마땅히 이 8도를 생각해야 하니, 이것을 4위(爲)와 4수고(收苦)라고 하며, 4신족념(神足念)을 얻는다.
識苦者,本爲苦,爲苦者,爲有身。從苦爲因緣起者,所見萬物。苦習者,本爲苦,從苦爲因緣生。盡者,萬物皆當敗壞。爲增苦習,復當爲墮八道中。道人當念是八道,是名爲四,爲四收苦,得四神足念也。
부처님을 믿어 뜻으로 기뻐하는 것을 신근(信根)이라고 하니 스스로 지키고 행하는 법이 되며, 제(諦)를 좇아 몸과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능근(能根)이라고 하니 정진이 되며, 제(諦)를 좇아 생각하여 제를 이루는 것을 제근(諦根)이라고 하니 수의(守意)가 되며, 제를 좇아 뜻을 한결같이 하고 제를 좇아 한 뜻에 멈추는 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하니 정의(正意)가 되며, 제를 좇아 제를 관하는 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니 도의(道意)가 된다. 이것이 바로 5근(根)이다.
信佛意喜,是名爲信根。爲自守行法,從諦身意受,是名能根,爲精進;從諦念遂諦,是名識根,爲守意;從諦一意,從諦一意止,是名定根,爲正意;從諦觀諦,是名黠根,爲道意,是名爲五根也。
제(諦)를 좇아 믿어 다시 의심하지 않는 것을 신력(信力)이라고 하니 탐(貪)을 버리고 도를 행하며, 제를 좇아 스스로 정진하여 나쁜 뜻이 능히 정진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진력(進力)이라고 하니 나쁜 뜻이 일어나려고 하다가 즉시 없어지며, 제를 좇아 뜻을 옳게 하여 그 뜻을 능히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염력(念力)이라고 하니 안과 밖을 관(觀)하며, 제를 좇아 정(定)하여 나쁜 뜻이 능히 좋은 뜻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정력(定力)이라고 하니 4선(禪)을 생각하며, 제를 좇아 지혜를 얻어 나쁜 뜻이 능히 지혜의 뜻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혜력(慧力)이라고 하니 나고 들며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남을 생각한다. 이것을 5력(力)이라 한다.
從諦信不復疑,是名信力;棄貪行道從諦自精進,惡意不能敗精進,是名進力;惡意欲起當卽時滅,從諦是意無有能壞意,是名念力;內外觀從諦以定,惡意不能壞善意,是名定力;念四禪從諦得黠,惡意不能壞黠意,是名黠力。念出入盡復生,是名爲五力也。
제(諦)를 좇아 제를 염하는 것을 각의(覺意)라고 하니 도의 뜻을 얻으며, 제를 좇아 제를 관하는 것을 법식각의(法識覺意)라고 하니 생사의 뜻을 얻으며, 제를 좇아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을 역각의(力覺意)라고 하니 도를 지녀 잃지 않아서 힘이 되며, 제를 좇아 희제(喜諦)를 구족하는 것을 애각의(愛覺意)라고 하니 도법(道法)을 탐내어 도행(道行)과 도법을 행하며, 제를 좇아 뜻이 쉼을 얻는 것을 식각의(息覺意)라고 하니 이미 쉬어 안온하며, 제를 좇아 생각과 뜻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정각의(定覺意)라고 하니 스스로 뜻을 알아서 안정하며, 제를 좇아 뜻을 자재하고 행하는 바를 좇아 관하는 것을 이 수의각(守意覺)이라고 한다. 이렇게 4제를 좇아 뜻을 관하는 것을 7각의(覺意)라고 한다.
從諦念諦,是名爲覺意得道意。從諦觀諦,是名法名法識覺意;得生死意,從諦身意持,是名力覺意;持道不失爲力,從諦足喜諦,是名愛覺意;貪道法行道行道法,從諦意得休息,是名息意,覺已息安隱,從諦一念意,是名定覺意;自知意,以安定從諦自在意在,所行從觀,是名守意覺;從四諦觀意,是名爲七覺意也。
제(諦)를 좇아 제를 지키는 것을 바른 신도(信道)라고 하며, 제를 좇아 바르게 제를 행하는 것을 이 바른 염도(念道)라고 하며, 제를 좇아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을 바른 치법(治法)이라고 하니, 네 가지 악에 이른바 4전도(顚倒)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며, 제를 좇아 제를 생각하는 것을 바른 뜻이라 하고,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다고 하며, 제를 좇아 마음과 뜻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바른 정(定)이라고 한다.
從諦守諦,是名直信道;從諦直從行諦,是爲直從行念道;從諦身意持,是名直治法。不欲墮四惡者,謂四顚倒。從諦念諦,是名直意不亂意;從諦一心意,是名直定。
한 마음으로 우두머리를 삼아 세 가지 법의(法意)의 행을 지을 것이니, 소리와 몸과 마음의 행을 갖춘다면 이와 같은 것이 불제자(佛弟子)의 8행이다. 이를 4선(禪)이라 하며, 4의단(意斷)이 되는 것이다.
爲一心上頭,爲三法意行,俱行以聲身心,如是佛弟子八行,是名四禪,爲四意斷也。
첫 번째 행은 바른 생각이니 마음에 속하여 항상 도를 생각하는 것이요, 두 번째 행은 바른 말이니 입에 속하여 4의(意)를 끊음이요, 세 번째 행은 바른 관(觀)이니 몸에 속하여 몸의 안팎을 관함이요, 네 번째 행은 바른 소견이니 도를 믿음이요, 다섯 번째 행은 바른 행이니 네 가지 악인 이른바 4전도에 떨어지지 않음이요, 여섯 번째 행은 바른 대치(對治)이니 나머지 뜻을 끊음이요, 일곱 번째 행은 바른 뜻이니 탐욕에 떨어지지 않음이요, 여덟 번째 행은 바른 정(定)이니 마음을 바르게 함이다. 이것이 여덟 가지 행이니, 벽지불과 아라한은 행하지 않는 바이다.
第一行爲直念,屬心,常念道;第二行爲直語,屬口,斷四意;第三行爲直觀,屬身,觀身內外;第四行爲直見信道;第五行爲直行,不隨四惡,謂四顚倒;第六行爲直治,斷餘意;第七行爲直不墮貪欲;第八行爲直定正心,是爲八行。佛、辟支佛、阿羅漢所不行也。
첫 번째 행인 바른 생각이란 무엇이 바른 생각이 되는가? 이른바 만물을 생각하지 않아서 뜻이 그 가운데 떨어지지 않음이 바로 바른 생각이요, 만물을 생각하여 뜻이 그 가운데 떨어진다면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第一行爲直念。何等爲直念?謂不念萬物,意不墮是中,是爲直念;念萬物,意墮中,爲不直念也。
4의지(意止)란, 첫 번째 의지는 몸과 생각을 쉬는 것이요, 두 번째 의지는 통양(痛痒)을 생각하는 것이요, 세 번째 의지는 숨의 나고 듦을 생각하는 것이요, 네 번째 의지는 법의 인연을 생각함이니, 이것이 바로 4의지가 된다. 도인은 마땅히 이 4의지를 생각할 것이니, 첫째는 내가 전생에 몸을 사랑했던 까닭에 해탈을 얻지 못하였으며, 둘째는 지금 극심한 원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삶에 애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미 끊었다면 바깥 몸을 관하여 멈춰야 한다.
四意止者:一意止爲身念息,二意止爲念痛痒,三意止爲念意息出入,四意止爲念法因緣,是爲四意止也。道人當念是四意止:一者、爲我前世愛身,故不得脫;二者、今有劇怨家。何以故?所欲者愛生,當斷已斷,爲外身觀止也。
4의지(意止)에서 뜻을 멈춘다는 것은, 뜻을 몸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뜻을 통양(痛痒)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며, 뜻을 뜻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뜻을 법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지만, 뜻이 색(色)과 식(識)을 따라서 곧바로 생겨나면 이것은 멈추지 않음이 된다.
四意止者,意止者,意不在身爲止意,不在痛痒爲止意,不在意爲止意,不在法爲止意。隨色誠便生,是爲不止也。
사람이 어떻게 4의지에 떨어지지 않는가?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과 부정(不淨)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4의지에 떨어지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뜻으로 늘 고와 공과 비신과 부정을 생각하여 도를 행한다면, 늘 이 네 가지를 생각하여 여의지 않으므로, 문득 빠르게 4의지를 얻는다.
問:人何以故不墮四意止?報:用不念苦、空、非身、不淨故,不墮四意止。若人意常念苦、空、非身、不淨,行道者常念是四事不離,便疾得四意止也。
무엇이 몸의 의지(意止)가 되는가? 이른바 늙고 병들고 죽음을 생각함이니, 이것이 몸의 의지가 된다.
무엇이 통양(痛痒)의 의지가 되는가? 이른바 옳지 못한 뜻이니, 이것이 통양의 의지가 된다.
무엇이 뜻의 의지가 되는가? 이른바 이미 생각하고 다시 생각함이니, 이것이 뜻의 의지가 된다.
무엇이 법의 의지가 되는가? 이른바 갈 때는 행(行)이 되고 돌아올 때는 법이 되며, 또한 이것을 지어 이것을 얻음을 말하니, 이것이 법의 의지가 된다.
問:何等爲身意止?謂念老、病、死,是爲身意止。何等爲痛痒意止?謂所不可意,是爲痛痒意止。何等爲意意止?謂已念、復念,是爲意意止。何等爲法意止?謂往時爲行,還報爲法,亦謂作是得是,是爲法意止也。
4의지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상(無常)을 생각하는 의지요, 둘째는 고(苦)와 몸[身]을 생각하는 의지요, 셋째는 공(空)과 유(有)를 생각하는 의지요, 넷째는 부정(不淨)과 낙(樂)을 생각하는 의지이니, 이것이 4의지가 된다.
四意止有四輩:一者、念非常意止,;二者、念苦身意止;三者、念空有意止;四者、念不淨樂意止,是爲四意止。
일체 천하의 일은 모두 몸의 통양(痛痒)에 떨어지고 법에 떨어지니, 모두 합쳐도 이 네 가지 일에 불과하다.
一切天下事皆墮身痛痒、墮法,都盧不過是四事也。
4의지란, 첫째는 다만 숨을 생각하여 뜻을 삿되게 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다만 선을 생각하고 악을 생각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몸도 아소(我所)가 아니며, 만물도 모두 아소가 아니다’라고 하여 다시는 향하지 않음이요, 넷째는 눈으로 색(色)을 보지 않아서 뜻을 법 가운데 둠이니, 이것을 4의지라 한다.
四意止者:一者、但念息不邪念;二者、但念善不念惡;三者、自念身非我所,萬物皆非我所,便不復向;四者、眼不視色,意在法中,是名爲四意止也。
도인은 마땅히 4의지를 행할 것이니, 첫째는 눈으로 마땅히 몸 가운데 악로(惡露)를 헤아릴 것이요, 둘째는 뜻으로 기뻐하여 즐거움을 생각함에 마땅히 통양(痛痒)의 고(苦)를 생각할 것이요, 셋째는 나의 뜻이 성나면 다른 사람의 뜻도 또한 성내고 나의 뜻이 구르면 다른 사람의 뜻도 또한 구르므로 다시는 뜻을 굴리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나의 뜻이 질투하면 다른 사람의 뜻도 또한 질투하고 내가 다른 사람의 악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도 또한 나의 악을 생각함으로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니, 이것이 법이 된다.
道人當行四意止:一者、眼色當挍計身中惡露;二者、意歡喜念樂,當念痛痒苦;三者、我意瞋他,人意亦瞋;我意轉他,人意亦轉,便不復轉意;四意者,我意嫉他,人意亦嫉;我念他人惡,他人亦念我惡,便不復念,是爲法也。
몸의 의지(意止)라는 것은, 스스로 몸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는 것이다. 무엇이 몸이 되는가? 통양(痛痒)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려 하면 통양은 수(數)가 있지 않으며, 뜻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려 하면 과거의 뜻과 미래의 뜻이 있으므로 또한 몸이 아니며, 법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려 하면 과거와 미래의 법이 있으므로 또 한 몸이 아니며, 행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려 하면 행은 형용이 없으므로 몸이 아닌 줄을 아니, 이렇게 헤아려야 4의지가 된다.
身意止者,自觀身,觀他人身。何等爲身?欲言痛痒是身,痛無有數;欲言意是身,復非身有過去,意未來意;欲言法是身:復非身有過去未來法;欲言行是身,行無有形,知爲非身。得是計,爲四意止也。
뜻이 색(色)에 떨어지지 않으면 염식(念識)도 또한 생겨나지 않으며, 귀ㆍ코ㆍ입ㆍ몸도 또한 그러하다. 뜻을 몸에 두지 않으면 멈춤[止]이 되고, 뜻을 통양(痛痒)에 두지 않으며 뜻을 생각에 두지 않으며 뜻을 법에 두지 않으면 멈춤이 된다.
意不墮色念,識亦不生,耳、鼻、口、身亦爾。意不在身,爲心意不在痛痒,意不在念,意不在法爲心也。
누가 몸과 뜻과 통양을 주장하여 아는가? 몸이 있어서 몸의 뜻이 알고, 통양이 있어서 통양의 뜻이 알고, 뜻의 뜻이 있어서 뜻의 뜻이 알고, 굶주림이 있어서 굶주림의 뜻이 알고, 목마름이 있어서 목마름의 뜻이 알고, 추움이 있어서 추움의 뜻이 알고, 더움이 있어서 더움의 뜻이 아니, 이것으로써 분별하여 안다.
問:誰主知身意痛痒者?報:有身,身意知;痛痒,痛痒意知;意意,意意知;有飢,飢意知;有渴,渴意知;有寒,寒意知:有熱,熱意知。以是分別知也。
몸의 뜻이 몸의 뜻을 일으키고, 통양의 뜻이 통양의 뜻을 일으키고, 뜻의 뜻이 뜻의 뜻을 일으키고, 법의 뜻이 법의 뜻을 일으키므로, 4의지는 이른바 뜻으로 악을 생각함을 제어하여 일으키지 않도록 하니, 이것이 바로 멈춤[止]이다.
身意起身意,痛痒意起痛痒意,意意起意意,法意起法意。四意止,謂意念惡,制使不起,是爲止也。
4의지는 또한 4선(禪)을 따르며 4의지를 따르니, 4의지를 따르면 도에 가까워져 악을 짓지 않고 곧바로 선한 뜻이 생긴다. 4선(禪)은 4의정(意定)도 되고, 4의지도 된다.
四意止亦隨四禪,亦隨四意止。墮四意止爲近道,不著惡便善意生;四禪爲四意定,爲止意也。
도를 행하는 데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몸을 멈춤이요, 둘째는 통양을 멈춤이요, 셋째는 뜻을 멈춤이요, 넷째는 법을 멈춤이다. 몸을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색(色)을 보고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요, 통양을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스스로 잘난 체 하지 않는 것이요, 뜻을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멈춰서 성내서 않는 것이요, 법을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도인은 4의지를 행하여서 뜻이 일어나고 생각이 생겨나면 즉시 대(對)를 인식하고 약을 쓸 것이니, 한 의지(意止)만 얻으면 곧바로 네 의지를 얻게 된다.
行道有四因緣:一、止身;二、止痛痒;三、止意;四、止法。止身者,謂見色念不淨;止痛痒者,謂不自貢高;止意者,謂止不瞋恚;止法者,謂不疑道人行。四意止,意起念生,卽時識對行藥,得一意止,便得四意止也。
4의정(意定)이란, 첫째는 스스로 몸을 관(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며, 둘째는 스스로 통양(痛痒)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통양도 관하며, 셋째는 스스로 마음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마음도 관하며, 넷째는 스스로 법의 인연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법의 인연도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몸에서 안팎의 인연과 이루어지고 어그러지는 일을 관하여 마땅히 나의 몸도 또한 이루어지고 어그러지는 줄 생각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4의정이 된다.
四意定:一者、自觀身,亦復觀他人身;二者、自觀痛痒,亦復觀他人痛痒;三者、自觀心,亦復觀他人心;四者、自觀法因緣,亦復觀他人法因緣。如是身,一切觀內外因緣、成敗之事,當念我身,亦當成敗,如是是爲四意定也。
사람이 4의(意)를 멈추고자 하면, 버리는 것으로 밖을 삼고, 거두는 것으로 안을 삼으며, 이미 거두어들인 뜻으로 밖을 삼고 버리는 것으로 안을 삼기도 한다.
人欲止四意,棄爲外,攝爲內;已攝意爲外,棄爲內也。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한다는 것은, 이른바 스스로 몸을 관하여 뜻을 여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사람 몸의 괴로움을 관하여, 다른 사람의 몸이 통양이 아님을 관하는 것이니, 뜻과 법도 또한 그러하다. 스스로 몸을 탐한다면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며 다른 사람의 몸을 생각하고 곧바로 스스로 몸을 관하니, 이것이 4의지(意止)가 된다.
觀他人身,謂自觀身不離他,便爲觀他人身苦,觀他人身爲非痛,痒意法亦爾也。自貪身,當觀他人身;念他人身,便自觀身,如是爲意止。
뜻으로 행하는 것을 보아서 어떻게 멈추는가? 뜻으로 자기가 몸을 탐하는 것을 관(觀)한다면 곧바로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도록 하니, 뜻을 탐하는 것으로부터 굴렸기 때문에 응당 멈추며, 만약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탐한다면 마땅히 돌이켜 자기의 몸을 관한다.
問:意見行何以爲止?報:意以自觀身貪,便使觀他人身,爲意從貪轉故應止;若意貪他人身,當還自觀身也。
때로는 자신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은 관하지 않으며, 때로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자신의 몸은 관하지 않으며, 때로는 자기의 몸도 관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며, 때로는 자기의 몸도 관하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지 않으니, 자기의 몸을 관하는 이는 계교하여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해야 한다.
有時自身觀,不觀他人身;有時當觀他人身,不當自觀身;有時可自觀身,亦可觀他人身;有時不可自觀身,亦不可觀他人身。自觀身者,爲挍計觀他人身。
뜻이 멈추지 않으면 모름지기 자기 몸에 비추어 생각하다가 곧바로 다른 사람의 몸으로 굴려서 비추어 다른 사람 몸의 살찐 몸뚱이와 하얀 살갗과 검은 눈썹과 빨간 입술을 관할 것이니, 살찐 것을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불룩함을 생각하고, 하얀 것을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뼈다귀를 생각하고, 눈썹의 검은 것을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아주 검음을 생각하고, 붉은 입술을 보고는 마땅히 붉은 피를 생각해야 한다. 몸에 있는 모든 것을 계교하여 이런 뜻을 얻어 곧바로 굴린다면, 다시는 몸을 애착하지 않을 것이다.
意不止,須自念身爲著,便轉著他人身。觀他人身爲見色、肥、白、黛眉、赤脣,見肥當念死人脹,見白當念死人骨,見眉黑當念死人正黑,見朱脣當念血正赤。挍計身諸所有,以得是意便轉,不復愛身也。
관(觀)에 안과 밖이 있으니, 질투(嫉妬)ㆍ성냄[瞋恚]ㆍ어리석음[愚癡]은 안을 관하는 것에 해당되고, 탐음(貪婬)은 밖을 관하는 것에 해당한다. 탐(貪)한다면 마땅히 무상하여 어그러짐을 생각하고, 음(婬)하다면 마땅히 소유한 악로(惡露)를 생각할 것이니, 만약 자기의 몸을 관하여 음(婬)하다면 마땅히 4의단(意斷)을 생각해야 한다.
觀有內外,嫉、恚、疑當內觀,貪、婬當外觀,貪當念非常敗,婬當念對所有惡露。如自觀身婬,當念四斷意也。
관(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밖을 관함이요, 둘째는 안을 관함이다. 몸을 관하는 데 36가지가 있으니, 일체 대(對)가 있는 것은 모두 밖을 관함에 속하고, 소유가 없는 것은 도가 됨으로 이것은 안을 관함이 된다.
觀有兩輩:一者、觀外;二者、觀內。觀身有三十六物,一切有對皆屬外;觀無所有爲道,是爲內觀也。
관(觀)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의 검고 파랗고 빨갛고 하얀 네 가지 빛깔을 관함이요, 둘째는 생사를 관함이요, 셋째는 9도(道)를 관함이다. 하얀 것을 관하여 검은 것으로 본다면 부정(不淨)이 되니, 마땅히 전례를 들어서 다음을 배운다면 도를 얻을 것이요, 아직 도를 얻지 못하여 듣기를 힘쓴다면 각별히 지혜를 증득할 것이다.
觀有三事:一者、觀身四色,謂黑、靑、赤、白;二者、觀生死;三者、觀九道。觀白見黑爲不淨,當前聞以,學後得道;未得道,爲聞得別,爲證得,爲知也。
관(觀)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뜻을 관하는 것이요, 셋째는 행을 관하는 것이요, 넷째는 도를 관하는 것이 바로 네 가지 관이 된다. 비유컨대 사람이 물건을 지키다가 도적이 온다면 곧바로 물건을 놓아버리고 도적을 보듯이, 이미 관을 얻었다면 곧바로 몸을 놓아버리고 물(物)을 관하는 것이다.
觀有四:一者、身觀;二者、意觀;三者、行觀;四者、道觀,是爲四觀。譬如人守物,盜來便捨物;視盜人已得觀,便捨身觀物也。
관(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밖의 모든 소유한 색을 관함이요, 둘째는 안의 무소유를 관함이다. 공(空)을 관하여 이미 4선(禪)을 얻었다면 공하여 소유가 없음을 관하니, 뜻이 있거나 뜻이 없거나 간에 소유가 없는 것이 바로 공이 되며, 또한 네 가지를 버려서 4선(禪)을 얻는다고 한다.
觀有二事:一者、觀外諸所有色;二者、觀內謂無所有。觀空已得四禪,觀空無所有,有意、無意、無所有,是爲空,亦謂四棄得四禪也。
세간의 일을 끊으려면 마땅히 4의지(意止)를 행하고, 4의지를 제거하려면 마땅히 4의단(意斷)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탐욕에 떨어져 탐욕을 행하기 때문이다. 4신족(神足)을 행하여 날아다니되, 다만 5근(根)만 있고 5력(力)이 없으면 능히 제어하지 못하며, 다만 5력만 있고 5근이 없으면 능히 4신족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5력을 굴리면 능히 상차(上次)의 12품 4의단(意斷)을 제어할 수 있으니, 현재의 죄를 짓지 않고 다만 옛 죄를 마치는 것이 바로 4의단이 된다.
欲斷世閒事,當行四意止,欲除四意止,當行四意斷,人墮貪,貪故行。四神足飛,但有五根無有五力,不能制,但有五力無有五根,不生。得四神足,尚轉五力,能制上次十二品。四意斷,不作現在罪,但畢故罪,是爲四意斷也。
옛 것을 마치고 새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4의지(意止)가 되며, 옛 것을 마치고 새 것을 그치는 것이 4의단(意斷)이 되며, 옛 것을 마치고 새 것을 끊는 것이 4신족(神足)이 된다. 족함을 알아서 다시 구하지 않는 것이 수의(守意)이니, 수의는 마침이 되고, 생겨남은 새 것이 되며, 늙음은 옛것이 되며, 죽는 것은 신체가 되고, 파괴되는 것은 다함[盡]이 된다.
畢故不受新,爲四意止,故畢新止,爲四意斷,故竟新斷,爲四神足。知足不復求守意,意爲畢,生爲新,老爲故,死爲身體壞敗爲盡也。
4의단(意斷)이란, 늘 도를 생각하여 선한 생각이 생겨나면 곧바로 악한 생각이 끊어지는 까닭에 악도(惡道)를 끊게 되고, 선한 생각이 그치면 곧바로 악한 생각이 생겨나는 까닭에 악을 끊지 못하게 된다.
四意斷,謂常念道。善念生便惡念斷,故爲斷息道;善念止,便惡念生故爲不斷也。
4의단(意斷)이라는 것은, 뜻이 스스로 악으로 향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단(斷)이 되고, 또한 죄를 생각하지 않음을 단(斷)이라고 한다.
四意斷者,意自不欲向惡是爲斷,亦謂不念罪斷也。
4신족(神足)이란, 첫째는 몸의 신족, 둘째는 입의 신족, 셋째는 뜻의 신족, 넷째는 도의 신족이니, 날음[飛]을 생각하여 소멸하려 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도를 따르지 못한다.
四神足:一者、身神足;二者、口神足;三者、意神足;四者、道神足。念飛,念不欲滅,不隨道也。
4이제발(伊提鉢)이란, 4는 숫자가 되고 이제는 멈춤[止]이 되고 발은 신족이 되며, 날려고 하면 문득 날고 때로는 정진하여 7일 동안 앉는다면, 문득 얻으니 혹은 7개월 혹은 7년이 되기도 한다.
四伊提鉢,四爲數,伊提爲止,鉢爲神足。欲飛便飛,有時精進坐七日便得,或七日,或七歲也。
4신족을 얻으면 세간에 오래 있을 수 있어서 죽지 않는 약이 있으니, 첫째는 뜻이 구르지 않음이요, 둘째는 믿음이요, 셋째는 생각함이요, 넷째는 제(諦)가 있음이요, 다섯째는 지혜가 있음이니, 이것이 신족의 약이 된다.
得神足可久在世閒,不死有藥:一者、意不轉;二者、信;三者、念;四者、有諦;五者、有黠,是爲神足藥也。
4신족을 얻어 세간에 오랫동안 있지 않는 것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그 몸의 나쁜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가며, 둘째는 사람이 능히 경도(經道)를 받음을 좇는 이가 없기 때문에 가며, 셋째는 나쁜 사람이 비방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得四神足,不久在世閒,有三因緣:一者、自厭其身臭惡,故去;二者、無有人能從受經道,故去;三者、恐怨惡人誹謗得罪,故去也。
신족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수레와 말을 타거나 그냥 걷거나 빠르게 달리는 것도 또한 신족이요, 밖으로 계(戒)가 견고함도 또한 신족이요, 지성스러움도 또한 신족이요, 인욕함도 또한 신족이니, 신족을 행함은 마땅히 날아다닌다는 뜻이다.
神足九輩,謂乘車馬,步疾走,亦爲神足;外戒堅亦爲神足;至誠亦爲神足;忍辱亦爲神足也。行神足當飛意。
무엇이 날아다닌다는 뜻인가?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믿음이요, 둘째는 정진이요, 셋째는 정(定)이요, 넷째는 구르지 않는 뜻이다.
무엇이 믿음의 비행(飛行)이며, 무엇이 정진의 비행이며, 무엇이 정의 비행이며, 무엇이 구르지 않는 뜻의 비행인가? 이른바 날아다니는 것에 집착하여 뜻을 굴리지 않는 것이다. 몸은 도를 행하려고 하지 않을 지라도 뜻이 행하려고 한다면 문득 행하여지니, 신족이란 이와 같이 뜻으로 날고자 하면 즉시 날 수 있다.
問:何爲飛意?報:有四因緣:一者、信;二者、精進;三者、定;四者、不轉意。何等爲信?信飛行。何等爲精進?飛行。何等定?飛行。何等爲不轉意?謂著飛行不轉意也。身不欲行道,意欲行便行,神足如是,意欲飛卽能飛也。
5근(根)이란, 비유컨대 물(物)을 심은 것이 견고해야 마침내 뿌리가 나며, 견고하지 않으면 뿌리가 있지 않은 것과 같으니, 신(信)은 빗물이 되고, 구르지 않는 뜻은 힘이 되고, 보는 바의 만물은 뿌리가 되며, 뜻을 제어함도 힘이 된다.
五根,譬如種物,堅乃生根,不堅無有根。信爲水雨,不轉意爲力,所見萬物爲根,制意爲力也。
신근(信根) 가운데 3음(陰)이 있으니, 첫째는 통양(痛痒)이요, 둘째는 사상(思想)이요, 셋째는 식음(識陰)이며, 정근(定根) 가운데도 1음이 있으니, 식음(識陰)을 말한다.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에는 1음(陰)이 있기도 하고 2음이 있기도 하며 3음이 있기도 하고 4음이 있기도 하여 모두 음이 있다.
信根中有三陰:一爲痛痒,二爲思想,三爲識陰。定根中有一陰,謂識陰也。五根、五力、七覺意,中有一陰者,中有二陰者,中有三陰者,有四陰者,皆有陰。
이 도행(道行)은 무슨 연(緣)으로 음이 있는가? 니원(泥洹)은 음이 없지만 나머지는 모두 음이 있으니, 7각의도 위의 셋은 입에 속하고 가운데 셋은 몸에 속하고 아래의 하나는 뜻에 속한다.
問:是道行,何緣有陰?報:以泥洹無陰,餘皆有陰也。七覺意,上三覺屬口,中三覺屬身,下一覺屬意。
무엇이 각(覺)인가? 생각 생각이 각이 되고, 생각 생각이 얻음[得]이 되니, 이 뜻을 깨달아 얻으면 곧바로 도를 따르게 된다. 밖의 7각의는 생사에 떨어지고, 안의 7각의는 도를 따르게 되니, 안의 7각의는 『37품경』을 말하고, 밖의 7각의는 만물을 말한다. 각(覺)이라는 것은, 일을 인식하여 문득 각의(覺意)를 따르는 것이다. 어떤 각의는 도각(道覺)을 따르고, 어떤 각의는 죄각(罪覺)에 떨어지니, 『37품경』은 곧 바른 뜻이므로 이것은 도각을 따름이 되고, 악한 뜻은 죄각에 떨어지게 된다.
何等爲覺?念念爲覺,念念爲得,覺得是意,便隨道也。外七覺意爲墮生死,內七覺意爲隨道。內七覺意者,謂『三十七品經』;外七覺意者,謂萬物也。覺者爲識事,便隨覺意也。有覺意便隨道覺,有覺意墮罪覺。『三十七品經』便正意,是爲隨道;覺善惡,是爲墮罪也。
무엇이 제(諦)를 좇아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인가? 이른바 몸은 7계(戒)를 지니고, 뜻은 3계를 지니니, 이것이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이다. 제(諦)의 뜻을 좇아 휴식(休息)을 얻고, 4제(諦)의 뜻을 좇아 인연이 쉬니, 쉰다는 것[休]은 멈추는 것이요, 쉰다는 것[息]은 생각하는 것이며, 도를 얻음은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問:何等爲從諦身意持報?謂身持七戒,意持三戒,是爲身意持也。從諦意得休息,從四諦意因緣休;休者爲止,息爲思,得道爲受思也。
도법을 탐내고 좋아하여 마땅히 도를 행하는 것은 애각의(愛覺意)가 되고, 도를 지녀 잃어버리지 않음은 역각의(力覺意)가 되고, 이미 열 번째 숨을 얻어 몸이 안온한 것은 식각의(息覺意)가 되고, 이미 편안함을 저절로 아는 것은 정각의(定覺意)가 된다.
貪樂道法,常行道爲愛覺意,持道不失爲力覺意,已得十息身安隱爲息覺意,自知已安爲定覺意。
몸과 뜻을 지녀 뜻이 달아나지 않음이 지님[持]이 되니, 제(諦)를 좇아 자재하여 뜻이 행할 바에 있으면 이른바 4제(諦)를 얻은 것이며, 또한 4의지(意止)와 4의단(意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을 생각할 수 있으니, 이것이 자재한 뜻이 행하는 데 있어 제를 좇음이 된다.
身意持,意不走爲持,從諦自在,意在所行,謂得四諦。亦可念四意止,亦可四意斷,亦可四神足,亦可五根、五力、七覺意、八行,是爲自在意。在所行從諦。
관(觀)은 『37품경』의 요체(要體)를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수의(守意)가 되고, 각(覺)은 이른바 제(諦)를 깨달아 다시는 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觀者,爲『三十七品經』要。是爲守意覺者,謂諦不復受罪也。
8행(行)에 안과 밖이 있으니, 몸은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이 되고, 소리는 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가 되고, 뜻은 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가 되니, 이것은 앞머리의 3법(法)으로 열 가지 일이 되며 밖에 있는 것이고, 5직(直)은 안에 있다.
八行有內外,身爲殺、盜、婬,聲爲兩舌、惡口、妄言、綺語,意爲嫉、妒、癡。是上頭三法,爲十事在外,五道在內也。
제(諦)를 좇아 제(諦)가 따름을 지키는 것은 신(神)이 되고, 지키는 것은 호(護)가 되니, 이른바 법(法)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제(諦)는 도(道)가 된다.
從諦守諦,從爲神,守爲護,謂法不犯罪,諦爲道。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과 부정(不淨)을 아는 것은 바른 소견이 된다.
무상을 사람이 상(常)으로 계교하며, 고를 생각하여 낙(樂)으로 삼고, 공을 헤아려 유(有)로 삼으며, 비신으로써 몸을 짓고, 부정을 계교하여 정(淨)으로 삼는 것은 바로 바르지 못한 소견이 된다.
知非常、苦、空、非身、不淨爲直見;非常人計爲常,思苦爲樂,空計爲有,非身用作身,不淨計爲淨,是爲不直見也。
무엇이 바른 소견인가? 본래의 인연을 믿으며, 숙명(宿命)을 좇아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바른 소견이다.
무엇이 바른 대치(對治)인가? 분별하고 사유하여 능히 선한 뜻을 이루는 것이, 바로 바른 대치가 된다.
무엇이 바른 말인가? 선한 말을 지키고 법을 범하지 않아서 응하는 대로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바른 말이다.
무엇이 바른 업(業)인가? 몸소 행에 응하여 행을 범하지 않는 것을 바른 업이라고 한다.
何等爲直見?信本因緣,知從宿命有,是名爲直見。何等爲直治?分別思惟,能到善意,是爲直治。何等爲直語?守善言,不犯法,如應受言,是名爲直語也。何等爲直業?身應行不犯行,是名爲直業也。
무엇이 바른 치행(治行)인가? 도를 얻은 이를 따라 계행(戒行)을 가르치는 것을 바른 치행이라고 한다.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행하고 행하되 한다고 하는 생각이 없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아 중단하지 않고, 방편을 버리지 않는 것을 바른 정진의 방편이라고 한다.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 늘 경(經)과 계(戒)를 향하는 것을 바른 생각이라고 한다.
무엇이 바른 정(定)인가? 뜻이 미혹되지 않고 또한 행을 버리지 않는 것을 바른 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행으로 현자(賢者)로 하여금 8업행(業行)을 구족하게 하니, 이미 구족하였다면 곧바로 도를 행한다.
何等爲直治?隨得道者教戒行,是名爲直治也。何等爲直精進?行行無爲,晝夜不中止,不捨方便,是名爲直精進方便也。何等爲直念?常向經戒,是名爲直念。何等爲直定?意不惑亦不捨行,是名爲直定。如是行,令賢者八業行具,已行具足,便行道也。
여덟 가지 바름[直]은 대치(對治)가 있고 행(行)이 있으니, 여덟 가지 바름을 행하여 마침내 뛰어난 요체(要體)를 얻어서 몸이 계(戒)를 범하지 않음이 바로 바른 대치가 된다. 혜(慧)와 신(信)과 인욕(忍辱)은 행하는 몸이 된다. 뜻을 지님을 바른 대치라고 하니, 이른바 생각하는 바가 없음이 바름[直]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음이 바르지 않음[不直]이 된다.
八直有治、有行,行八直,乃得出要,身不犯戒,是爲直治。慧、信、忍辱是爲行身,意持是名爲直治。謂無所念爲直,有所念爲不直也。
12부경(部經)은 모두 다 『37품경』을 따르니, 비유컨대 온갖 냇물과 사방의 흐름이 모두 큰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37품경』은 바깥이 되고, 사유(思惟)는 안이 되니, 사유하여 도(道)를 낳기 때문에 안이 된다. 도인(道人)이 도를 행하여 『37품경』을 분별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 예배함이 된다. 『37품경』은 세간을 따르기도 하고 또한 도를 따르기도 하니, 경을 외워 입으로 설하는 것은 세간을 위함이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에 응함이며, 계를 지니는 것은 몸을 제어하기 위함이요, 선(禪)은 뜻을 흩어버리기 위함이다.
十二部經都皆墮『三十七品經』中,譬如萬川四流,皆歸大海。『三十七品經』爲外,思惟爲內。思惟生道故爲內;道人行道,分別『三十七品經』,是爲拜佛也。『三十七品經』亦墮世閒,亦墮道。諷經口說是爲世閒,意念是爲應道。持戒爲制身,禪爲散意。
행(行)은 원(願)을 따르고, 원은 또한 행을 따르니, 도를 행하여 향하는 곳을 뜻이 여의지 않아서, 뜻이 부처님께 이르러 뜻을 돌이키지 않는다. 차례를 따라 행하여 도를 얻기도 하고, 또한 차례를 따르지 않고 행하여 도를 얻기도 하니, 이른바 4의지(意止)와 4의단(意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을 행하는 것이 차례를 따르는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하고 몸이 편한 것을 싫어하여 한 생각으로 이것을 좇아 도를 얻는 것은 차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行從願,願亦從行。行道所向,意不離;意至佛,意不還也。亦有從次第行得道,亦有不從次行得道。謂行四意止、斷、神足、五根、五力、七覺意、八行,是爲從次第。畏世閒惡,身便一念從是得道,是爲不從次第。
도인이 능히 37품의 행의 뜻을 얻을 수 있다면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름과 멈춤[止]을 순종(順從)하지 않아도 되니, 몸과 입에 일곱 가지가 있고 마음과 뜻과 식(識)에 각각 열 가지씩 있기 때문에 37품이 된다.
道人能得三十七品行意,可不順從數息、相隨、止也。身口七事,心、意、識各有十事,故爲三十七品。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은 밖에 속하고, 5근과 5력은 안에 속하며, 7각의와 8행은 도를 얻은 것이다.
四意止、斷、神足屬外,五根、五力屬內,七覺意、八行得道也。
니원법에 40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37품경』과 아울러 3향(向)을 말한다. 이 40가지가 모두 니원법이 된다.
泥洹有四十輩,謂『三十七品經』幷三向,凡四十事皆爲泥洹。
숨을 세는 것은 니원법인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는 것은 코끝에 뜻을 멈추는 것이니, 집착한 곳이 있으므로 니원법이 되지 않는다.
니원법은 유(有)가 되는가? 니원법은 무유(無有)가 되니, 다만 고(苦)를 멸하며, 일명 뜻이 다했다고도 한다.
니원법은 소멸함이 되는가? 다만 선과 악이 소멸할 뿐이다.
問:數息爲泥洹,非報數息、相隨,鼻頭止意有所著,不爲泥洹,泥洹爲有不?報:泥洹爲無有,但爲苦滅,一名意盡。難:泥洹爲滅。報:但善惡滅耳。
행을 아는 이는 때로는 4의지(意止)를 행할 수 있고, 때로는 4의단(意斷)을 행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4신족(神足)을 행할 수도 있고, 때로는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을 행할 수도 있다. 제(諦)라는 것은 어지러움을 정(定)할 줄 아는 것이니, 정하면 행을 알고, 어지러우면 행을 알지 못한다.
知行者,有時可行四意止,有時可行四意斷,有時可行四神足,有時可行五根、五力、七覺意、八行。諦者爲知定亂。定爲知行,亂爲不知行也。
무슨 까닭에 5근과 5력과 7각의와 8행이 있는가? 사람에게 5근이 있으므로 도에도 5근이 있고, 사람에게 5력이 있으므로 도에도 5력이 있으며, 사람에게 7사(使)가 있으므로 도에 7각의가 있고, 행에 8직(直)이 있으므로 도의 여덟 가지에 응하니, 병에 따라 약을 설한 것이며, 인연이 서로 응한 것이다.
問:何以故正有五根、五力、七覺意、八行?報:人有五根,道有五根;人有五力,道有五力;人有七使,道有七覺意;行有八直,應道八種。隨病說藥,因緣相應。
눈은 색(色)을 받아들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입은 맛보려하고, 몸은 매끄러움을 탐하니, 이것이 바로 5근(根)이 되는데, 무슨 까닭에 근이라고 하는가? 이미 받아들였다면 마땅히 다시 낳는 까닭에 근이라고 한다.
眼受色、耳聞聲、鼻向香、口欲味、身貪細滑,是爲五根。何以故名爲根?已受當復生,故名爲根。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바로 역(力)이 되고, 7사(使)에 떨어지지 않음이 각의(覺意)가 되고, 8직(直)은 도행(道行)에 응함이 된다. 5근(根)은 견고한 뜻이 되고, 5력(力)은 구르지 않는 뜻이 되며, 7각의(覺意)는 뜻을 멈춤이 되고, 8행은 바른 뜻이 된다.
不受色、聲、香、味、細滑,是爲力,不墮七使爲覺意,已八直爲應道行。五根堅意,五力爲不轉意,七覺爲正意,八行爲直意也。
무엇이 선한 뜻이 되고, 무엇이 도의 뜻이 되는가?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과 5근과 5력은 선한 뜻이 되고, 7각의와 8행은 도의 뜻이 된다. 도의 선함도 있고 세간의 선함도 있으니, 4의지로부터 5근과 5력까지는 바로 도의 선함이 되고, 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탐(貪)ㆍ진(瞋)ㆍ치(癡)를 하지 않는 것은 세간의 선함이 된다.
問:何等爲善意?何等爲道意?報:謂四意止、斷、神足、五根、五力,是爲善意;七覺意八行,是爲道意。有道善,有世閒善。從四意止至五根、五力,是爲道善;不婬、兩舌、惡口、妄言、綺語、貪、瞋、癡,是爲世閒善。
자세히 본다는 것은, 만물이 모두 마땅히 소멸함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자세히 보는 것이며, 만물은 무너져 어그러지고 몸도 마땅히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자세히 관(觀)함이 된다.
諦見者,知萬物皆當滅,是爲諦見;萬物壞敗,身當死,以不用爲憂,是爲諦觀。
뜻이 날뛰거나 달아나면 곧바로 꾸짖어 대치(對治)하여 제어하는 것은 죄를 제거함이 되며, 모든 몰려드는 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선(禪)이 된다.
意撗意走,便責對得制,是爲除罪;諸來惡不受爲禪。
안에 있는 열두 가지 일은, 첫째는 마음, 둘째로부터 여섯째까지는 지혜, 일곱째는 셈[數], 여덟째는 서로 따름[相隨], 아홉째는 멈춤[止], 열째는 관(觀), 열한째는 돌이킴[還], 열두째는 정(淨)이니, 이것이 안의 열두 가지가 된다.
一心內意十二事智慧,七爲數,八爲相隨,九爲止,十爲觀,十一爲還,十二爲淨,是爲內十二事。
밖에 다시 열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눈, 둘째는 색(色), 셋째는 귀, 넷째는 소리, 다섯째는 코, 여섯째는 냄새, 일곱째는 입, 여덟째는 맛, 아홉째는 몸, 열째는 매끄러움, 열한째는 뜻, 열두째는 욕심을 받아들임이니, 이것이 밖의 열두 가지가 된다.
外復十二事,一爲目,二爲色,三爲耳,四爲聲,五爲鼻,六爲香,七爲口,八爲味,九爲身,十爲細滑,十一爲意,十二爲受欲,是爲外十二事也。
술사(術闍)라는 것은 지(智)가 되니, 대체로 세 가지 지(智)가 있다. 첫째는 수없는 전세(前世) 적 부모와 형제와 처자를 아는 것이요, 둘째는 수없는 전세의 흑백(黑白)과 장단(長短)을 알고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는 것이요, 셋째는 독(毒)이 이미 끊어진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이다.
術闍者爲智,凡有三智:一者、知無數世父母、兄弟、妻子;二者、知無數世白黑、長短,知他人心中所念;三者、毒以斷,是爲三也。
사라태타(沙羅惰怠)는 6통(通)의 지(智)가 되니, 첫째는 신족(神足)이요, 둘째는 환히 들음이요, 셋째는 다른 사람의 뜻을 앎이요, 넷째는 본래 온 곳을 아는 것이요, 다섯째는 어느 곳에 왕생(往生)할 것인지를 아는 것이요, 여섯째는 본래 누(漏)가 다한 줄을 아는 것이 바로 여섯 가지가 된다.”
沙羅惰怠者,爲六通智:一爲神足,二爲徹聽,三爲知他人意,四爲知本所從來,五爲知往生何所,六爲知索漏盡,是爲六也。
佛說大安般守意經卷下
이 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서문과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이 책에 착오가 있는 듯한데, 경(經)과 주석[注]이 구분이 되지 않고 이어져서 쓰여 있다. 불법의 의미에는 마디가 있어 이것을 해석하는데, 때때로 구분되지 않는 곳이 많이 있다. 그래도 함부로 마디 짓지 않았으니, 뒤에 있을 현자(賢者)에게 맡긴다.
此經按經首序及見經文,似是書者之錯,經注不分而連書者也。義當節而注之,然往往多有不可分處,故不敢擅節,以遺後賢焉。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불설대안반수의경』 2권(ABC, K0806 v20, p.1070b01-1077b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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