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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1권~6권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제1권


지승(智昇) 지음


무릇 목록(目錄)을 만드는 것은, 대개 참과 거짓[眞僞]을 구별하고 잘잘못[是非]을 밝히며, 사람과 연대의 고금(古今)을 기록하고, 권(卷)과 부(部)의 많고 적음을 표시하며, 빠진 것은 주워 모아 넣고 쓸데없이 늘어놓은 것은 지워 없애어, 바른 가르침을 이치에 맞게 엮고 부처님의 말씀[金言]을 순서가 있게 하며, 중요한 곳을 제시하고 요점을 제기하여서 뚜렷이 볼 수 있게 하려는 까닭이다.
다만 법문(法門)이 깊고 오묘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법칙[化網]이 크고 넓다. 전후에 번역하여 전한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것으로 바뀌고, 몇몇 경전은 흩어지고 없어져서, 책의 길이[卷軸]1)에 차이가 있게 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 때에 따라 망령되게 거짓된 것[僞妄]을 보태어, 함께 뒤섞어 복잡하게 하여 그 발자취를 찾기 어렵게도 하였다. 이 때문에 선덕(先德 : 돌아가신 덕이 높은 스님)과 유현(儒賢 : 유교에 정통한 현인)들이 이러한 것들과 관련한 사실과 목록들을 지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거의 6ㆍ7종류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직도 그 근원을 다 밝히지 못하고[未極], 오히려 잊혀지거나 빠진 데가 많이 있었다.
나[智昇]는 견문이 용렬하고 천박하지만, 오랫동안 이 일을 위하여 파헤쳐 찾아내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참고하여 선별하였으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지적하여 가려놓았다. 이에 이렇게 구분해서 이 책을 만들었으니, 어긋나고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부디 모든 철인(哲人)2)들이 머리 맞대고 함께 자세히 보았으면 한다.

선서(善逝)3)이시고, 모니존(牟尼尊 :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며,
무상사[無上]4)이며, 조어장부[調御]5)이신
부처님께 머리 조아려 절하옵니다,
또한 삼승(三乘)6)의 청정하고 오묘한 법(法)과
팔배(八輩)7)와 응진 스님[應眞僧 : 아라한]께 예배합니다.
저는 경의 목록[經錄]을 지어 불법의 성[法城]을 지키고자 하오니
삼보(三寶 : 불ㆍ법ㆍ승)께서는 자비를 드리우사 가호(加護)8)하소서.

원하옵건대 법의 등불[法燈]이 온 밤 내내 비추어
미혹한 무리들이 이로 인하여 지혜의 광명 얻으며
정법(正法)이 영원토록 세간에 머물러 있게 하여
이를 의지하고 배워서 위없는 자리[無上地]에 속히 오르게 하옵소서.

한(漢)나라 효명황제(孝明皇帝) 영평(永平) 10년 정묘(丁卯, 67)로부터 대당(大唐) 신무황제(神武皇帝) 개원(開元) 18년 경오(庚午, 730)까지 무릇 664년 동안 그 동안 번역을 한 승려와 속인들은 총 176인이며, 번역하여 낸 대승ㆍ소승의 삼장(三藏), 성교(聖敎)와 성현들의 집(集)ㆍ전(傳)과 아울러 번역한 이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失譯]까지 합치면, 총 2,278부(部) 도합(都合) 7,046권이다. 그 중에는 지금 있으면서 유행하는 책과 궐본(闕本 : 없는 책)도 다 같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새로 지은 목록[新錄]은 합하여 20권인데, 총(總)ㆍ별(別)로 되어 있다. 총록(總錄)은 여러 경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고, 별록(別錄)은 그 승장(乘藏 : 삼승에 관한 경전)으로 나눈 것인데, 이 두 목록은 각각 10권씩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별록에는 다시 7문(門)이 있다. 이제 먼저 과목을 잘게 나눈 영역[科條]를 서술하고, 나머지는 차례대로 편집하여 싣기로 한다.

총괄군경록(總括群經錄) 상(上)
위는 한(漢)나라로부터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의 번역들인데, 제왕(帝王)의 연대(年代)와 번역한 사람[譯人]과 그 일화 등을 함께 기록하였다. 그리고 번역한 경전 등은 번역한 사람의 연대로 선후(先後)의 차례를 삼았고, 삼장(三藏)의 차례에는 의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목록 가운데 새로운 번역과 예전의 번역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겸하여 서술하였다.

별분승장록(別分乘藏錄) 하(下)
위의 별록(別錄)은 일곱 가지로 자세히 나누었다. 첫째는 번역도 되었고 책도 있는 것[有譯有本], 둘째는 번역은 있었지만 책이 없는 것[有譯無本], 셋째는 경전에서 부분적인 내용을 뽑아 만들어 따로 유행한 것[支派別行], 넷째는 번잡하게 겹친 것을 깎아내어 간략하게 한 것[刪略繁重], 다섯째는 빠진 글은 보충하고 비어 모자란 데는 채운 것[拾遺補闕], 여섯째는 의혹이 있는 데를 재차 상고한 것[疑惑再詳], 일곱째는 삿된 위경으로 바른 가르침 어지럽힌 것[僞邪亂正] 등이다.
이 일곱 문[七門]에는 대승ㆍ소승을 구별하고, 경(經)ㆍ율(律)ㆍ논(論)의 다른 과목은 그 원인을 자세히 다 실었고, 그 부록으로 딸린 것[部偶]도 겸하여 밝혔다.
총록(惣錄)은 10권으로 나누었는데, 제1권으로부터 제10권까지이다.여기서는 대강 그 줄거리만을 나타내며, 그 낱낱의 자세한 설명은 각 권(卷) 안에 있다.

제1권한(漢)ㆍ위(魏) 2대(代) 동안의 승려들과 속인緇素들이 번역한 경(經)ㆍ계(戒)ㆍ갈마(羯磨)9) 등 신구실역(新舊失譯)과 아울러 역인열전(譯人列傳 : 번역자의 전기)을 덧붙였다.
제2권오(吳)ㆍ진(晋) 2대 동안(222~316)의 승려들과 속인들이 번역한 경ㆍ계 등과 신구실역 경전들과 앞의 것과 같이 역인열전(譯人列傳)을 덧붙였다.
제3권동진(東晋)과 부진(符秦) 2대 동안(317~394)의 승려들과 속인들이 번역한 경ㆍ율ㆍ논 등과 신구실역 경전들과 앞의 것과 같이 역인열전(譯人列傳)을 덧붙였다.
제4권요진(姚秦)ㆍ서진(西秦)ㆍ전량(前涼)ㆍ북량(北涼) 4대 동안(385~439)의 승려들과 속인들이 번역한 경ㆍ율ㆍ논과 신구집실역경(新舊集失譯經) 등이다.
제5권송조(宋朝) 1대 동안(420~478)의 승려들과 속인들이 번역한 경ㆍ율ㆍ논 등과 신집실역경(新集失譯經) 등이다.
제6권제(齊)ㆍ양(梁)ㆍ원위(元魏)ㆍ고제(高齊) 4대 동안(479~577)의 승려들과 속인들이 번역한 경ㆍ율ㆍ논 등과 신집실역경률집(新集失譯經律集) 등이다.
제7권주(周)나라ㆍ진(陳)나라ㆍ수(隋)나라 3대 동안(557~617)의 승려들과 속인들이 번역한 경ㆍ율ㆍ논과 전록(傳錄 : 전하는 기록) 등이다.
제8권
제9권8ㆍ9의 두 권은 황조(皇朝) 때(618~907)의 승려들과 속인들이 번역한 경ㆍ율ㆍ논과 전록 등이다.
제10권옛 모든 분들諸家의 목록(目錄)과 부질(部帙 : 책의 권수)이 많고 적은 것과, 같고 다른 것을 상세히 밝혀 서술한다.

별록(別錄)은 10권으로 나누었는데, 제11권으로부터 제20권까지이다.여기서는 대강 그 줄거리만 말하고, 자세한 것은 각 권 속에 있다.

제11권
제12권제11과 제12의 두 권에서는 유역유본(有譯有本)의 보살장(菩薩藏) 경ㆍ율ㆍ논의 목록과 번역한 사람의 시대를 기술한다.
제13권유역유본의 성문장(聲聞藏) 경ㆍ율ㆍ논의 목록과 현성집전(賢聖集傳)의 목록과 또한 번역한 사람의 시대를 기술한다.
제14권유역무본(有譯無本)의 대승(大乘) 경ㆍ율ㆍ논의 궐본 목록이다.
제15권유역무본의 소승(小乘) 경ㆍ율ㆍ논과 현성집전의 궐본 목록이다.
제16권지파(支派)로서 따로 유행한 대ㆍ소승의 경ㆍ율ㆍ논과 현성집전에서 따로 파생한 목록이다.
제17권번잡하게 중복된 것을 깎아내어 생략한 것과 따로 파생한 여러 동본이명(同本異名)의 경(經), 그리고 목록에서 삭제한 것을 기술한다. 또한 빠진 것은 보태고 없어진 것을 모아놓은 구역(舊譯)과 대승ㆍ소승의 경ㆍ율ㆍ논으로 대주(大周)10) 입장록(入藏錄)에 빠져서 목록에 올라가지 않은 것을 기술한다. 더불어 새로 번역한 대승ㆍ소승의 경ㆍ율ㆍ논ㆍ집전 등을 입장목록(入藏目錄)에 새로 편입시킨 것을 기술한다.
제18권의혹이 있어 재차 상고한 목록과 거짓되고 망령되게 진리를 어지럽힌 새롭게 편찬된 위경(僞經), 그리고 여러 목록 가운데의 위경과 여러 사람들이 지은 집초(集鈔) 등의 목록이다.
제19권대승 경ㆍ율ㆍ논의 입장목록(入藏目錄)이다.
제20권소승 경ㆍ율ㆍ논과 현성집전(賢聖集傳)의 입장목록이다.

1. 총괄군경록(總括群經錄) ① 
 
 



1) 후한(後漢) 시대(25년~220년) 수도를 낙양에 두었다. 전한(前漢: 기원전 202년~ 8년)수도는 장안
 
후한의 유씨(劉氏)는 낙양(洛陽)에 도읍하였다.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 정묘(丁卯, 67)로부터 헌제(獻帝) 연강(延康) 원년(元年) 경자(庚子, 220)에 이르기까지, 무릇 11제왕(帝王) 154년 동안에 승려와 속인 12인이 번역해 낸 경ㆍ율과 신구집(新舊集) 실역 등, 모든 경은 총 292부(部) 395권이다.그 중에서 97부 131권은 지금 존재하고, 195부 264권은 궐본(闕本 : 없어진 판본)이다.
『후한경록(後漢經錄)』11)에는 “중직(中直)에서 ‘제왕(帝者)이 인정한 것은 진경(眞經)이고, 그 이름을 배척한 것은 위경(僞經)이다’12)”고 하였다. 연대(年代)와 갑자(甲子)는 당(唐)나라 사예(司隷) 견란(甄鸞)과 성균박사(成均博士) 왕도규(王道珪) 두 학자의 연력(年歷)에 의거하여 참고하고 정하였다.

사문(沙門) 가섭마등(迦葉摩騰)1부(部) 1권(卷). 경(經)
사문 축법란(竺法蘭)4부 15권. 경
사문 지루가참(支婁迦讖)22부 67권. 경집(經集)
사문 안세고(安世高)95부 115권. 경ㆍ율ㆍ집
사문 축불삭(竺佛朔)2부 3권. 경
우바새(優婆塞)13) 안현(安玄)2부 3권. 경집
사문 지요(支曜)10부 11권. 경집
사문 강거(康巨)1부 1권. 경
사문 엄불조(嚴佛調)5부 8권. 경
사문 강맹상(康孟詳)6부 9권. 경ㆍ율
사문 축대력(竺大力)1부 2권. 경
사문 담과(曇果)1부 2권. 경
신구제실역경(新舊諸失譯經)141부 158권14)과 59부 76권이며, 구집(舊集) 82부 82권은 새로 목록에 첨가한다.

(1) 가섭마등(迦葉摩騰)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1권영평 10년(67) 정묘에 백마사(白馬寺)에서 축법란(竺法蘭)과 함께 번역하여 처음 내놓은 경이다. 『구록(舊錄)15)』에서는, “『효명황제사십이장경(孝明皇帝四十二章經)』이다”라고 하였다.
이상 1부 1권은 그 경본이 현재 존재한다.

사문 가섭마등은 축섭마등(竺葉摩騰)이라고도 하고, 또한 섭마등(攝摩騰)이라고도 한다. 여러 기록에 모두 있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자세하지 않다. 앞서 전해 오는 것으로는 가릴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다 밝혀 두었다.
중인도(中印度) 사람이며, 바라문(婆羅門 : 브라만, 즉 승려) 종족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널리 배워서 견문(見聞)이 많았다. 또한 사고력[思力]이 뛰어났으며, 특히 경ㆍ율에 밝았다.
일찍이 서인도의 작은 나라에 가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할 때, 갑자기 이웃 나라가 병사를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병사들이 어떤 일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웃 나라 병사들은 신이한 술법이 있을 것이라 의심하여 몰래 사신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그런데 그 나라의 신하들은 그저 편안하게 그가 강의하는 대승경(大乘經)을 함께 듣고 있었으니, 지신왕(地神王 : 국토를 관장하는 신왕)이 국가를 수호하는 도리를 밝힌 내용이었다. 이에 그 나라와 화평을 청하고 법을 구하였다.
명제(明帝)는 영평 7년 갑자(甲子, 64)에 신장이 1길[丈] 6척이 되고, 목에는 일륜(日輪)16)을 두르고, 광명이 번쩍거리는 금인(金人)17)이 공중에서 날아와 정전(正殿 : 왕이 일을 보는 전각) 앞에 이르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널리 물어보았다.
“이 무슨 신이(神異)한 일인가?”
통인(通人) 부의(傅毅)가 나아가 대답하였다.
“신(臣)이 듣기로는 ‘서역(西域)에 득도한 사람이 있는데 부처라고 한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꿈꾸신 바도 필시 그 분이었을 것입니다.”
황제는 그럴 것이라 여기고서, 낭중(郎中) 채음(蔡愔)과 낭장(郎將) 진경(秦景)과 박사제자(博士弟子) 왕준(王遵) 등 18인에게, 천축(天竺)으로 가서 불법(佛法)을 찾도록 하였다. 그때 채음 등은 대월지국(大月支國)에서 가섭마등을 만나서 한나라로 함께 갈 것을 간곡하게 청하여 마침내 함께 낙읍(洛邑)에 이르렀다. 명제는 후한 상을 내려 접대하고, 또 가져 온 불경과 화상(畵像)을 흰 말에다 싣고[白馬] 함께 낙양(洛陽)에 이르러서, 가람(伽藍 : 사찰)을 세우고 이름을 백마사(白馬寺)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여러 고을에서는 다투어 절을 지어 백마의 은혜를 갚았다.
가섭마등은 백마사에서 『사십이장경』을 번역하여, 처음에는 난대(蘭臺)의 석실(石室) 14번째 칸 안에 봉안하여 두었다. 그로부터 불교는 구름처럼 앞다투어 일어났다. 사문과 신사(信士 : 재가 불자)들이 연이어 번역하여 전하였고[傳譯], 목록에 의거하여 편집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중국 땅에 경전과 불법[經法]이 있게 된 시초였다.
『구록(舊錄)』에서는 “이 경은 본래 외국의 경에서 추려 베낀 것으로, 원래 대부(大部)에서 나왔는데, 요점을 추려 세속의 일을 인용한 것이 마치 『효경(孝經)18)』의 18장(章)과 같다”라고 하였다. 『구록』과 주사행(朱士行)의 『한록(漢錄)』과 승우(僧祐)의 『출삼장기(出三藏記)』 등에는 이런 사실이 나와 있으나, 『도안록(道安錄)』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가섭마등은 크게 교화를 펴서 처음 사람들에게 전하였으나, 아직 믿는 마음이 깊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현묘한 깨달음[妙解]을 간직하고, 다시 번역하지[多飜] 않았다. 우선 그 경의 요점을 추려서 그 당시의 풍속에[時俗] 따라 가르쳤다. 가섭마등은 그 뒤에 낙양에서 생을 마쳤다.
그 유래를 모두 자세히 기재한 것은 주사행의 『한록』과 『고승전(高僧傳)』 등과 같거니와 내[智昇]가 기록의 근원과 시초를 찾는 것은 그 뜻이 역경(譯經)을 기술하는 데에 있으며, 역경의 내력에는 그렇게 된 까닭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러 가지 설명과 널리 다르게 들은 일들을 모으고 따온 것이다. 비록 글은 번거롭게 되었다 하더라도 승려들이 한 일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2) 축법란(竺法蘭)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 8권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십주경(十住經)』이라고도 한다. 처음으로 나왔다. 축불념(竺佛念)의 『십주단결경』과는 동본(同本)이다. 영평 13년(70)에 나왔다. 주사행의 『한록』과 『고승전』ㆍ『장방록(長房錄)』에 보인다.
법해장경(法海藏經) 1권어떤 경본에는 장(藏)자가 없기도 하다. 처음으로 나왔다. 『법해경(法海經)』과 같은 동본이다. 『고승전』과 『장방록』 등에 보인다.
불본행경(佛本行經) 5권영평 11년(68)에 나왔다. 『고승전』과 『장방록』 등에 보인다.
불본생경(佛本生經) 1권『고승전』과 『장방록』 등에 보인다.
이상은 4부 15권인데, 그 경들은 다 궐본이다.

사문 축법란(竺法蘭)은 또한 중인도 사람이다. 스스로 ‘경론 수만 장(章)을 외운다’고 말하였고, 천축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당시 채음(蔡愔) 일행이 그 나라에 도착하였다. 축법란은 가습마등과 함께 돌아다니며 교화할 것을 약속하고, 마침내 그들은 서로 쫓아서 한나라로 와서 만났다. 그때 축법란에게 배우던 무리들이 그를 머무르게 하고자 하여 떠나는 것을 방해하였으므로, 그는 샛길로 낙양에 이르렀다. 낙양에 도착한 이후에는 가섭마등과 함께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나라 말을 잘하게 되자, 처음으로 가섭마등과 함께 『사십이장경』을 번역하였다. 가섭마등이 입적한 뒤에는 축법란은 몸소 『십지단결경』 등 4부를 번역하였다.
예전에 한무제(漢武帝)가 곤명지(昆明池)19)를 파다가 바닥에서 검은 재[黑灰]를 얻었다. 이것에 대하여 동방삭(東方朔)20)에게 물었더니, 동방삭이 말하기를,
“신(臣)은 모릅니다. 서역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축법란이 온 뒤에 그에게 가서 물어 보니, 축법란이 말하였다.
“세계가 파괴될 때의 큰 화재로 생긴[劫火] 재입니다.”
이로써 동방삭의 말이 증명되었는데, 이를 믿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또 진경(秦景)이 돌아올 적에 월지국(月支國)에서 석가불상(釋迦佛像)을 모셔 왔는데, 이것은 우전왕(優塡王)의 전단상사(栴檀像師)가 만든 네 번째의 작품이다. 낙양에 이르자 명제(明帝)는 즉시 베껴 그리게 하여, 청량대(淸涼臺)와 현절릉(顯節陵)21)에 걸어 모시게 하고서 공양을 올렸다. 그로부터 단청(丹靑)22)과 소상(素像)23)이 널리 퍼져 지금까지 이르렀다. 축법란은 그 후에 낙양에서 입적하였는데, 그 때 나이는 60여 세였다.
또 『장방록』 등에서는 “축법란이 『이백육십계(二百六十戒)』를 번역하여 다른 2권과 합쳤다”라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다. 그 이름과 내용[名目]을 자세히 상고하여 보았더니 축법란의 번역이 아니었다. 그 같고 다름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아래 『별록(別錄)』의 궐본(闕本)에 기술한 것과 같았다.

(3) 지루가참(支婁迦讖)
도행반야바라밀경(道行般若波羅蜜經) 10권제목은 『마하반야바라밀도행경(摩訶般若波羅蜜道行經)』, 또는 『반야도행품경(般若道行品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8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명도소품(明度小品)』과 『대반야제사회(大般若第四會)』 등과는 동본이다. 광화(光和) 2년(179) 7월 8일에 나왔다. 『지민도록(支敏度錄)』과 『승우록(僧祐錄)』 두 목록에 보인다.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2권또한 바로 『무량청정경(無量淸淨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이다. 『대아미타경(大阿彌經)』ㆍ『보적무량수회(寶積無量壽會)』 등과는 동본이다. 『오록(吳錄)』에 보인다.
아촉불국경(阿閦佛國經) 2권건화(建和) 2년(148)에 번역하였다. 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부동여래회(寶積不動如來會)』와 같은 동본이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 등에 보인다. 또한 『아촉불찰제보살학성품경(阿閦佛刹諸菩薩學成品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국(國)자가 없기도 하다.
불유일마니보경(佛遺日摩尼寶經) 1권안공(安公)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보명보살회(寶積寶明菩薩會)』와 같은 동본이다. 일명 『고품유일설반야경(古品遺日說般若經)』, 또는 『대보적경(大寶積經)』, 또는 『마하연보엄경(摩訶衍寶嚴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기록에 보인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3권일명(一名) 『시방현재불실재전립정경(十方現在佛悉在前立定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는 “『대반주삼매경(大般舟三昧經)』은 혹 2권이다”라고 하였다. 광화(光和) 2년(179)에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집현호경(大集賢護經)』과 같은 동본이다. 『섭도진록(聶道眞錄)』과 『오록(吳錄)』에 보인다.
도사경(兜沙經) 1권『승우록』과 『오록』에서 보인다. 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여래명호품名號品」의 이역(異譯)이다.
돈진다라소문경(伅眞陀羅所問經) 2권처음에는 『돈진다라소문보여래삼매경(伅眞陀羅所問寶如來三昧經)』이라 하였다. 『구록』에서는 “『돈진다라니왕경(伅眞陁羅尼王經)』이라 하였으며, 혹은 3권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수긴나라경(大樹緊那羅經)』과는 동본이다. 『도안록(道安錄)』에는 보이지 않으며,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과는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도안(道安)은 『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내장백보경(內藏百寶經) 1권또한 『내장백품(內藏百品)』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책과는 조금 다르다. 도안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문보살서경(文殊師利問菩薩署經) 1권또한 바로 『문서경(問署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과 『오록』에 보인다. 도안은 “방등부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잡비유경(雜譬喩經) 1권무릇 열한 가지의 일이 있다. 승우는 “번역한 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비장방은 “『별록(別錄)』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 이상은 현재 보이고, 이 이하는 궐본이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27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담무참(曇無讖) 등이 역출한 것과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1권이는 뒤의 십품(十品)을 거듭 번역한 것이다. 승우가 “이 1권은 있고, 3권은 없다”고 한 것은 『정태록(靜泰錄)』에 보인다. 혹은 대(大)자를 붙이기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었다. 『승우록』에서 “광화(光和) 2년(179) 10월 8일에 역출하였다”라고 하였다.
범반니원경(梵般泥洹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과 같은 동본이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옛날에는 호반(胡般)이라 하였는데, 새로 고쳐 범(梵)이라 하였다.
상액경(象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제법용왕경(諸法勇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광명삼매경(光明三昧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는 “『별록(別錄)』에는 나와 있으나, 『안록(安錄)』에는 없다”라고 하였으며, 비장방은 또한 ”『오록(吳錄)』에도 보인다”라고 하였다.
패본경(孛本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수능엄경(首寶嚴經) 2권중평(中平) 3년(186) 2월 8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첫 번째 번역이다. 또 3권이라고도 하였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ㆍ『오록』에 보인다.
대방편보은경(大方便報恩經) 1권『오록』에 보인다.
아사세왕문오역경(阿闍世王問五逆經) 1권또한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별록』에 보인다.
선경(禪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비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아육왕태자괴목인연경(阿育王太子壞目因緣經) 1권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1백 여 년 뒤에 아육왕태자괴목인연경育王이 나왔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한 경이 아니다고 하였다. 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23부 67권이다.『잡비유경』에는 11부 26권이 현재 보이고, 『대집경』 속에는 12부 41권이 궐본이다

사문 지루가참(支婁迦讖)은 줄여서 지참(支讖)이라고도 하며,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그 행실은 순수하고 기품이 있었으며, 성품은 막힘없이 확 트였고 총명하였다. 계율[法戒]24)을 받아서는 힘써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름이 널리 드러났다. 그는 여러 경을 암송하였고, 뜻은 법을 널리 펴는데 두었다.
한나라 환제[桓]ㆍ영제[靈] 때에 낙양에 머물러 있었다. 환제 건화(建和) 원년 정해(丁亥, 147)로부터, 영제 중평(中平) 3년 병인(丙25)寅, 186)까지 낙양에서 『도행경(道行經)』 등 23부를 번역하였다. 본지(本旨)26)을 깊이 터득하여, 더 이상 부처님의 법을 꾸미거나 덧붙이지 않았으니, 법의 요점을 잘 베풀어 도를 널리 전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하남(河南)의 청신사(淸信士 : 남자 불교 신도) 맹복(孟福)과 장련(張蓮)이 받아 쓴 구역(舊譯)에서 ‘호반니원(胡般泥洹)’이라 한 것은 아직 분명하고 자세하지 않다.
윗대로부터 경을 번역한 이래로 현덕(賢德)들의
필수(筆受 : 역자가 한역한 것을 받아쓰는 일)와 매양 도어(度語 : 범문을 한문으로 번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랑캐 말을 중국말로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오랑캐[胡]는 바로 오천축[五天]의 변방에 사는 무리이다. 여기에는 서융(西戎)의 저강(羗氏) 종족이 있는데, 지금 이를 오랑캐라 한다. 어찌 인도(印度)와 관련이 있겠는가? 아주 동떨어져 상관없는 일[楚越]이므로 상고할 것조차 없었다.
다만 부처님께서 말씀한 경은 모두 범본(梵本)이라 일컬어야 마땅할 것이다. 범(梵)은 “중국말로 청정하다”는 뜻이다. 옛날 겁(劫)이 시작될 때에 범천 세계[梵世]의 광음천(光音天)이 아래로 내려와서 그 땅에 있는 지비(地肥)를 먹으니 몸이 무거워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사람이 되었다. 곧 그들이 오천축의 본래 조상[本祖]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天)이란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만일 그들을 오랑캐[胡]라 한다면, 그 이치가 마땅히 어디서 나왔다는 말인가. 단지 그 나라의 말을 범어(梵語)라고 하는 것은 마치 이 땅의 말을 한어(漢語)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대개 그 의거하는 바가 있어서이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승려들이 모두 세속의 성씨를 썼다. 부진(符秦)27) 때에 사문(沙門) 도안(道安:314~385)이 있었는데, 당시에 홀로 뛰어났다. 그는 거연(居然)히 깨달아 말하기를,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석가(釋迦)의 자손이 되어 아버지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거늘, 어찌 세속의 성을 이어받겠는가? 이제 출가하였니, 마땅히 성씨를 석(釋)으로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서 4아함[四含]을 번역하였는데, 그 글에서 과연 이르기를 “4성(姓)이 출가하였지만, 동일한 석씨[釋種]이다”라고 하였으므로 대중들은 모두가 탄복하였다.4성은 첫째가 찰제리(刹帝利 : 왕족)요, 둘째가 바라문(婆羅門 : 승려)이며, 셋째가 폐사(吠舍 : 평민)요, 넷째가 수달라(戍達羅 : 천민)이다..
그리고 도안은 진(晋)ㆍ진(秦) 때의 목록을 바르게 고치고, 여러 경전을 산정(刪定)28)하여 주(注)를 내기도 하였다. 스스로의 호(號)를 미천(彌天 : 하늘까지 가득 찬 이)라 하였고, 그 말엽의 시기에 번역자의 모범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오랑캐 말을 진나라 말로 번역한다[譯胡爲秦]”고 말을 하였으니, 다섯 가지 손실과 세 가지 쉽지 못한 것[[五失三不易]29)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에 통달한 사람[通人]이라도 한 가지는 막힌 것이 있었으니, 그 아름다움을 다하지 못했다 하리라.
예로부터 호(胡)라고 말한 곳이 있으면 이제부터는 모두 범(梵)자로 고치니,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약간의 허물도 없게 하고 그 바른 것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 『장방록(長房錄)』 등 지루가참의 번역 중에는 『대보적경(大寶積經)』 1권이 있으나, 지금의 『불유일마니보경(佛遺日摩尼寶經)』과 동본이니, 재차 역출한 것이라 한 것은 합당하지 않다. 또 그 문구를 찾아보아도 지루가참의 번역이 아니다. 『별록(別錄)』 중에는 모두 역자를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는데, 이제 『별록』에 의거한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지루가참의 목록에서는 삭제하였다.

(4) 안세고(安世高)
대승방등요혜경(大乘方等要慧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미륵문경(寶積彌勒問經)』의 「팔법회(八法會)」와는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태자모백경(太子慕魄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그의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서 보인다.
장자자제경(長者子制經) 1권일명 『제경(制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서동자경(逝童子經)』과는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적삼매문수문법신경(寶積三昧文殊問法身經) 1권일명 『유일보적삼매문수사리보살문법신경(遺日寶積三昧文殊師利菩薩問法身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입법계체성경(入法界體性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자서삼매경(自誓三昧經) 1권제목 속의 주(注)에는 “「독증품(獨證品)」은 네 번째의 역출이며, 「비구정행(比丘淨行)」은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축법호(竺法護)의 번역과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온실세욕중승경(溫室洗浴衆僧經) 1권또한 바로 『온실경(溫室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명도오십교계경(明度五十挍計經) 2권혹 바로 『명도교계경(明度挍計經)』, 또는 『오십교계경(五十挍計經)』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원년(151)에 나왔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불인삼매경(佛印三昧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팔대인각경(八大人覺經) 1권『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사리불회과경(舍利弗悔過經) 1권또한 바로 『회과경(悔過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 1권영가(永嘉) 2년(146)에 나왔다. 『장아함경(長阿含經)』 제10권의 이역(異譯)이다. 도안(道安)이 주해(注解)를 달았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시가라월육향배경(尸迦羅越六向拜經) 1권혹은 『시가라월육방례경(尸迦羅越六方禮經)』이라고도 한다. 『장아함경(長阿含經)』 제11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장아함십보법경(長阿含十報法經) 2권일명 『다증도장경(多增道章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바로 『십보경(十報經)』이라고도 하는데, 『장아함경』 제9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구록』에서도 역시 “『장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일체유섭수인경(一切流攝守因經) 1권『중아함경(中阿含經)』 제2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구록』에서는 “『일체유섭경(一切流攝經)』이다”라고 하였고, 『오록(吳錄)』에서는 “『유섭수인경(流攝守因經)』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수인경(受因經)』이라고도 하고, 또는 바로 『유섭경(流攝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일체유섭수경一切流攝守』이라고”도 한다. 주사행의 『한록』30)과 『승우록』 두 기록에 보인다.
사제경(四諦經) 1권『중아함경』 제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도안이 “『장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착오였을 것이다.
본상의치경(本相倚致經) 1권『중아함경』 제1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오록(吳錄)』에서는 “『본상의치경(本相倚致經)』은 『연본치경(緣本致經)』과 동본 이다”라고 하였다. 혹 이 의(猗)자를 쓰기도 한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시법비법경(是法非法經) 1권『중아함경』 제2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 두 기록에 보인다.
누분포경(漏分布經) 1권『중아함경』 제2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도안이 “『장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착오였을 것이다.
바라문자명종애념불리경(婆羅門子命終愛念不離經) 1권『중아함경』 제6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십지거사팔성인경(十支居士八城人經) 1권『중아함경』 제6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법의경(普法義經) 1권또한 『보의경(普義經)』, 또는 『구법행경(具法行經)』이라고도 한다. 보법의(普法義)를 사리(舍利)로 만들어서 『구법행사리불경(具法行舍利弗經)』이라고도 한다. 다른 곳에도 다 같이 『중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원가(元嘉) 2년(152)에 번역되어 나왔다. 『광의법문경(廣義法門經)』과 동본이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 두 기록에 보인다.
바라문피사경(婆羅門避死經) 1권『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21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나빈저화칠자경(阿那邠邸化七子經) 1권『증일아함경』 제49권에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난동학경(阿難同學經) 1권표제에서는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조사해 보니 없었다. 『장방록』에 보인다.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 1권『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나왔다. 그 첫머리와 마지막까지 총 30경으로 되어 있지만, 그 첫머리의 경 이름初標名을 따랐기 때문이다. 혹 2권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원가 원년(151)에 나왔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오음비유경(五陰譬喩經) 1권혹은 비(譬)자가 없기도 하다. 일명 『수말소표경(水沫所漂經)』이라고도 한다. 『잡아함경』 제1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전법륜경(轉法輪經) 1권혹은 『법륜전경(法輪轉經)』이라고도 한다. 『잡아함경』 제15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그 본경(本經)과 뒷부분은 같지만, 앞은 다르다. 『승우록』에 보인다.
팔정도경(八正道經) 1권『잡아함경』 제28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 두 기록에 보인다.
마등녀경(摩鄧女經) 1권혹은 『마추녀경(摩鄒女經)』, 또는 『아난위고도녀혹경(阿難爲蠱道女惑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마등가경(摩登伽經)』과 같은 동본이다.
귀문목련경(鬼問目連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아귀보응경(餓鬼報應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난문사불길흉경(阿難問事佛吉凶經) 1권혹은 『아난문사경(阿難問事經)』, 또는 『사불길흉경(事佛吉凶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아난분별경(阿難分別經)』과 같은 동본이다.
내녀기역인연경(奈女祇域因緣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인연(因緣)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며, 또한 바로 『내녀경(奈女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죄업응보교화지옥경(罪業應報敎化地獄經)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지옥보응경(地獄報應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견의경(堅意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견심정의경(堅心正意經)』, 또는 『견심경(堅心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 2권혹 1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수의(守意)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며, 혹은 바로 『안반경(安般經)』이라고도 한다. 도안(道安)은 “『소안반(小安般)』이다”라고 하였으며, 겸하여 주해를 달았다. 『승우록』에는 따로 『대안반경』 1권을 실었고, 『장방록』에서는 다시 『안반경』 1권을 실었는데, 다 중첩된 것이다. 주사행의 『한록』ㆍ『승우록』ㆍ『이곽록(李廓錄)』 세 기록에 보인다.
음지입경(陰持入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승우록』에는 “『제지입경除持入』이라 한 것은 착오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음지입경陰持入』이다”라고 하였다. 도안이 주해를 달았다. 『장방록』에서는 『음지입경陰持入』 외에 따로 『제지입경除持入』이 있는데 착오이다. 주사행의 『한록』과 『승우록』 두 기록에 보인다.
처처경(處處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매의경(罵意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분별선악소기경(分別善惡所起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출가연경(出家緣經) 1권일명 『출가인연경(出家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함정행경(阿鋡正行經) 1권일명 『정의경(正意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십팔니리경(十八尼犁經) 1권혹은 『십팔지옥경(十八地獄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법수진경(法受塵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선행법상경(禪行法想經) 1권『승우록』과 『보창록(寶唱錄)』 두 기록에 보인다.
장자자오뇌삼처경(長者子懊惱三處經) 1권일명 『장자요뇌삼처경(長者夭惱三處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삼처뇌경(三處惱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건타국왕경(揵陀國王經) 1권혹은 국(國)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부모은난보경(父母恩難報經) 1권또한 『근난보경(勤難報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장방록』에는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조사하여 보아도 없다.
구횡경(九橫經)31) 1권『장방록』에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조사하여 보아도 없다. 『장방록』에 보인다.
선행삼십칠경(禪行三十七經) 1권혹은 품(品)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범계보응경중경(犯戒報應輕重經) 1권『목련문비니경(目連問毘尼經)』에서 나왔다. 또한 『범계죄보경중경(犯戒罪報輕重經)』, 또는 『목련문경(目連問經)』이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비구삼천위의경(大比丘三千威儀經) 2권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대승위의경(大僧威儀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는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승우의 『실역록(失譯錄)』 중에는 2부(部)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부에는 각각 2권씩으로 되어 있다. 『별록』의 것을 합하여 지금은 2권만이 있을 뿐이며, 나머지의 2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지경(道地經) 1권처음 번역하여 나왔다. 혹은 대(大)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이 경이 바로 『수행경(修行經)』이다. 원래 외국(外國)의 약본(略本)에서 초록(抄錄)한 것으로 도안이 주해를 달았다. 『승우록』에 보인다. 여러 목록에서는 모두 2권이라 하였다. 도안은 서문(序文)에서 “무릇 7장(章)이 있는데, 이 1권이 역시 온전히 있다”라고 하였다.
가섭결경(迦葉結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비담오법행경(阿毘曇五法行經) 1권혹은 행(行)자가 없기도 하며, 또한 『아비담고혜경(阿毘曇苦慧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남아 있으며, 이하는 궐본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寶積經)』의 「무량수회(無量壽會)」와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는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寶積經)』의 「선주의회(善住意會)」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1권『대월등경(大月燈經)』 제7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서 보인다.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문성십이인연경(聞城十二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내장경(內藏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내장백품경(內藏百品經)』, 또는 『백보경(百寶經)』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년(152) 12월에 번역되어 나왔다. 주사행의 『한록』에 보인다.
사불가득경(四不可得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가(可)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약왕약상보살관경(藥王藥上菩薩觀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공정천감응삼매경(空淨天感應三昧經) 1권『구록』에서는 “『공정삼매경(空淨三昧經)』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졸봉적결의대주경(卒逢賊結衣帶呪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주적경(呪賊經) 1권일명 『벽제적해주(淪除賊害呪)』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승우의 『실역록(失譯錄)』 중에는 같은 이름의 『주적경』 두 본을 모두 실었는데, 『장방록』에는 1책만 있을 뿐이다.
십사의경(十四意經) 1권『구록』에서는 “『보살십사의경(菩薩十四意經)』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법률삼매경(法律三昧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도의발행경(道意發行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도안록(道安錄)과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장방록』에서는 “『장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대십이문경(大十二門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장아함경』에서 나왔다. 안공(安公)이 주해를 달았다. 『보창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소십이문경(小十二門經) 1권『장아함경』에서 나왔다. 안공(安公)이 주해를 달았다. 『보창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칠법경(七法經) 1권『구록』에서는 『아비담칠법행경(阿毘曇七法行經)』이라고 하였으며, 혹은 바로 『칠법행경(七法行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장방록』에서는 “『장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다증도장경(多增道章經) 1권『구록』에서 “도(道)자가 없다”고 말한 것은 다른 경을 말한다, 『십보법경(十報法經)』에서 나왔다. 『장방록』에서는 “『장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의결률경(義決律經) 1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며, 또한 『의결률법행경(義決律法行經)』이라고도 한다. 안공(安公)은 “『장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잡사십사편경(雜四十四篇經) 2권혹은 『잡경사십사편(雜經四十四篇)』이라 고도 한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어느 경인지 모르겠다. 도안은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백육십품경(百六十品經) 1권『구록』에서는 “『증일아함백육십장경(增一阿含百六十章經)』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사두간경(舍頭諫經) 1권『구록』에 보인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사두간태자명이십팔수경(舍頭諫太子明二十八宿經)』, 또는 『태자명성이십팔 숙경(太子明星二十八宿經)』, 또는 『호이경(虎耳經)』이라고도 한다.
유리왕경(瑠璃王經) 1권혹은 『유리경(流離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서는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조사하여 보았으나 없었다. 『장방록』에 보인다.
오문선요용법경(五門禪要用法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태자몽경(太子夢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선경(禪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서는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항수경(恒水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항수불설계경(恒水不說戒經)』이라고도 한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보창록(寶唱錄)』에서는 “『항수계경(恒水誡經)』이다”라고 하였다.
회과법경(悔過法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오법경(五法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오행경(五行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소반니원경(小般泥洹經) 1권『장방록』에서는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서는 “혹은 『니원후제비구경(泥洹後諸比丘經)』, 또는 『니원후변기경(泥洹後變記經)』, 또는 『니원후비구세변경(泥洹後比丘世變經)』, 또는『불반니원후비구세변경(佛般泥洹後比丘世變經)』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정재경(正齋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분명죄복경(分明罪福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난제가라월경(難提迦羅越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선정방편차제법경(禪定方便次第法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선법경(禪法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당래변멸경(當來變滅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 7권혹은 6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순도행경(順道行經)』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영강(永康) 원년(167)에 번역하였으며, 지민도(支敏度)가 서문을 지었다. 『보창록』과 『별록』에 보인다.
오문선요용법경(五門禪要用法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사유요략경(思惟要略經) 1권혹은 바로 『사유경(思惟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법구경(法句經) 4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청빈두로법(請賓頭盧法)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아비담구십팔결경(阿毘曇九十八結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95부 115권이다.『방등요혜경(方等要慧經)』 이하의 54부 59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무량수경(無量壽經)』 이하의 41부 56권은 궐본이다.

사문 안청(安淸)의 자(字)는 세고(世高)이다. 안식국(安息國)의 왕과 정후(正后)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봉양하면서 정성을 다했다. 측은하게 여기는 어진 마음이 미물[蠢類]에까지 미쳤고, 그 말과 행동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게다가 뜻하는 일[志業]에는 총명하고 민첩하게 대응했으며, 학문하기를 지극히 좋아하여, 외국의 전적(典籍)도 환히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칠요(七曜)32)ㆍ오행(五行)33)의 도리[象]와 풍각(風角)34)ㆍ운물(雲物)35)의 점술[占]과 추보(推步)36)와 영축(盈縮)37)의 변화를 모두 궁구하였다. 더불어 의술(醫術)에도 통달하여 침을 잘 놓고 맥(脈)을 잘 짚었으며, 얼굴빛만 보고도 그의 병을 알아 약을 주면 반드시 치료하였다. 그리고 새와 짐승의 우는 소리를 듣고도 그들의 마음을 알았으니, 한번은 길을 가다가 한 떼의 제비를 보고는 문득 도반에게 말하였다.
“제비가 ‘반드시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지저귀고 있다.”
과연 조금 있다가 먹을 것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이에 빼어나고 남다르다는 명성이 서역(西域)에 퍼져서 멀고 가까운 이웃나라가 모두 훌륭하다고 여기며 공경하였다.
안세고는 비록 집에 머물러 있으나[居家], 계율을 받드는 데에는 매우 엄격하였고, 강집(講集 : 강의하는 모임)과 법시(法施 : 법보시)에는 항상 참여하였다. 뒤에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에 인생은 괴롭고 헛된 것이란 것을 깊이 깨닫고, 명성과 재물[名器]를 싫어해서 떠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부왕의 상복[服]을 마친 뒤에는 마침내 숙부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다.
그는 경장(經藏)을 훤히 알았는데, 특히 아비담학(阿毘曇學)38)에 정통하였고, 선경(禪經 : 참선을 기술한 경전)을 외우고 지녀 그 지극히 미묘한 경지까지 통달하였다.
그 후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하였다. 한(漢) 나라 환제(桓帝) 초기(147)에 처음으로 중국[東夏]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영민하여 한 번 들으면 능히 그것을 통달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 지 오래지 않아 중국말에 매우 통달하여 정법(正法)이 미미한 것을 개탄하고, 법을 펴고 번역하는 일에 널리 힘썼다.
안세고는 성품과 사물의 이치를 다 궁구하였으며, 저절로 전생에 맺은 인연[宿緣]을 알았다. 그리하여 세상에 남긴 신이한 자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어느 때인가 안세고는 스스로 말하였다.
“이 몸을 받기 이전에도 안식왕의 태자가 되어 그 나라 안의 장자(長者 : 신분이 높은 사람)의 아들과 함께 출가하였는데, 걸식[分衛]하러 다닐 적에 마땅치 않은 시주를 만나게 되면, 그 장자의 아들은 그때마다 번번이 원망하였다. 나는 자주 그를 꾸짖고 타일렀지만 끝내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치지 않았다. 20여년을 이와 같이 한 뒤에 그와 이별을 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광주(廣州)로 가서 숙세(宿世)의 일을 끝마쳐야 한다. 그대는 경전에 밝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나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으나, 성품이 성을 내고 노하는 일이 많아서 생명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더럽고 추악한 형상[惡形]을 받아 태어나리라. 내가 만일 도를 얻게 되면 반드시 그대를 제도하리라.’
그리고는 마침내 광주에 이르렀더니, 도적떼들이 크게 난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길에서 한 소년을 만났는데, 손에 침을 뱉고 칼을 뽑으면서 말하였다.
‘진정 너를 여기서 만났구나.’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전생에 그대에게 목숨을 빚 진 것이 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찾아와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 그대의 분노는 본래 전생에 가졌던 생각이다.’
그리고는 목을 내어놓고 칼을 받았는데,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도적은 끝내 나를 죽이고 말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길을 메웠는데,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면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후에 나의 영혼[神識]은 도로 와서 안식국왕의 태자가 된 것이니, 바로 지금의 이 몸 안세고이다.”
안세고는 중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면서 경을 널리 펼치는 일을 하였다. 영제(靈帝) 말엽(180년경)에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이 몹시 어지럽게 되었으므로, 그는 법을 전하려고 강남(江南)으로 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마땅히 여산(廬山)을 지나면서 옛날에 같이 공부하던 벗을 제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다가 공정호(䢼亭湖)의 사당에 이르게 되었다. 이 사당에는 옛 부터 신령스런 위엄이 있어서, 떠돌아다니는 장사꾼들이 여기에 기도하면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사람들이 떠나지 못해 발이 묶이는 일이 없었다. 언젠가 신죽(神竹 : 서낭대)을 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미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신죽을 마음대로 가져가자 배가 즉시 뒤집혀서 가라앉아 버렸고, 신죽(神竹)은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뱃사람들이 공경하고 조심하며 신령스런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안세고와 나그네 30여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이 사당에 희생을 바치고 복을 빌자 이에 신령이 내려 말하였다.
“배 안에 계신 사문을 어서 모셔 오도록 하라.”
나그네들은 모두 놀라 안세고에게 사당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였다.
신령이 안세고에게 말하였다.
“나는 전생에 외국에서 그대와 함께 출가하여 도를 배우면서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성품이 화를 잘 내고 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금생(今生)에는 이 공정호의 사당신[廟神]이 되어 주변 천 리를 제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보시한 공덕으로 진귀한 보물이 매우 풍부하지만, 예전에 성을 내던 성품 때문에 이처럼 신령이 되는 업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하던 벗을 만나게 되니,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이제 머지않아 수명이 다할 테인데, 보기 흉한 형체가 너무도 크니, 만일 여기서 죽게 되면 강호(江湖)를 더럽히게 되므로 산 서쪽에 있는 못으로 가겠습니다. 이 몸이 죽고 난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나에게 비단 천 필과 여러 가지 보물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법회를 열고 탑을 세워 좋은 곳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안세고가 말하였다.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제도하려 하는데, 어찌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신령이 말하였다.
“형체가 아주 보기 흉해서 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안세고가 말하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시오.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신령이 제단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는데, 그 꼬리의 길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이무기[大蟒]였다. 이무기가 안세고의 무릎에 이르자, 안세고가 그를 향해 여러 번 범어(梵語)로 부처의 공덕을 찬탄하면서 전생에 했던 약속을 들어 말하였다. 이무기는 비 오듯이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안세고는 곧 비단과 보물을 거두고 나서 이별을 고하고 그곳을 떠났다. 여러 배들이 돛을 올리고 떠나는데, 이무기가 다시 몸을 드러내어 산에 올라가서, 배가 떠나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자, 이내 몸을 감추었다.
삽시간에 안세고 일행은 예장(豫章)에 당도하였고, 안세고는 곧장 사당에 있던 재물로 동사(東寺: 절 이름)를 지었다. 안세고가 떠난 후에 신령은 곧 수명을 다하였다. 저녁 무렵에 한 소년이 배 위에 올라 안세고 앞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다가 그에게서 축원[呪願]39)을 받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안세고는 뱃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방금 전에 있던 소년이 바로 공정 사당의 신령인데, 흉한 허물을 벗어 버렸소.”
그 이후로 사당의 신령은 사라졌고, 다시는 신령스런 영험이 없었다. 그 후에 사람들이 산의 서쪽[山西]의 못에서 죽은 이무기 한 마리를 보았는데,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몇 리나 되었다. 지금의 심양군(潯陽郡) 사촌(蛇村)이 바로 그곳이다.
안세고가 그 뒤에 다시 광주(廣州)에 가서 전생에 자기를 해친 소년을 찾았다. 그때의 소년은 아직도 살아 있었는데, 안세고는 그의 집으로 가서 예전에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면서, 아울러 전생의 인연[宿緣]을 들려주고,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나에게는 아직도 갚아야 할 일이 남아 있도다. 이제 회계(會稽) 땅으로 가서 그것을 다 마치려고 한다.”
그 소년은 안세고의 비범함을 깨닫고, 마음속 깊이 그 뜻을 훤히 이해하고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쳤다. 정중하게 대접하고는 안세고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마침내 회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이르러 바로 시장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시장 안에는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싸우던 사람이 잘못 안세고의 머리를 치는 바람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광주에서 따라온 소년은 연거푸 두 가지 보응(報應)40)을 경험하고는 드디어 불법을 부지런히 닦고는, 그 일에 얽힌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먼 곳에 사는 사람이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소문으로 듣고는, 비통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3세(世)에 걸친 인연의 징표가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안세고는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 무자(戊子, 148)로부터 영제(靈帝) 건령(建寧) 3년 경술(庚戌, 170)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에 『대승방등요혜경(大乘方等要慧經)』 등 95부(部)를 번역하였다. 모두 뜻과 이치가 명석하고 문장이 매우 올바르며, 매끄러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질박하면서도 거칠지 않았으니, 무릇 읽는 이들이 부지런히 힘쓰면서 싫증을 내지 않게 하였다.
안세고는 본래 왕족으로, 그 이름이 외국에서도 유명했으며, 서역에서 온 귀빈이라 모두 안후(安侯)라고 불렀는데,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천축국은 자칭 그들의 글을 천서(天書 : 하늘의 글)라고 하고 말을 천어(天語 : 하늘의 말)라고 하였다. 소리와 뜻이 잘 맞지 않고 중국과는 매우 달라서 안세고의 전후로 나온 번역들 중에는 잘못된 것이 많았다. 유독 안세고가 번역해 낸 것은 여러 번역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안공(安公)은 ‘경을 대하고 가르침을 받는다면 성인을 뵙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여러 대[列代]의 명덕(明德)41)들도 모두 그를 찬양하며 그와 같이 생각하였다.
그 『석도안록(釋道安錄)』과 승우(僧祐)의 『출삼장기(出三藏記)』와 혜교(慧皎)의 『고승전(高僧傳)』 등에는 “안세고의 번역은 다만 39부다”라고 하였다. 『비장방록(費長房錄)』에는 곧 176부로 기재되어 있다.
지금 『비장방록』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거의가 대부(大部)로부터 따로 파생되어 나온 것이어서, 그가 번역한 바른 숫자를 아직 모르므로 이제 순차에 따라 삭제하는 것이니, 아래에서 기술하는 바와 같다.

정리유죄경(情離有罪經)비장방은 “세상에서는 위경(僞經)이다”라고 하였다. 지금도 역시 『의위록(疑僞錄)』에 있다.
팔광경(八光經)
사리불문보녀경(舍利弗問寶女經)
사리불탄보녀설부사의경(舍利弗歎寶女說不思議經)또한 바로 『탄보녀경(歎寶女經)』이라고도 한다.
신월장자회과공불경(申越長者悔過供佛經)또한 『신기장자회과경(申起長者悔過經)』이라고도 하는데, 신월(申越)과 신기(申起)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자세하지 않다. 『팔광경(八光經)』 등 4경(經)은 모두 『대집경大集』에서부터 나왔다.
사백삼매명경(四百三昧名經)『대운경(大雲經)』에서 나왔다.
마하연정진도중죄보품경(摩訶衍精進度中罪報品經)『지도론(智度論)』에서 나왔다.
대가섭우니건자경(大迦葉遇尼乾子經)『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 나왔다.
아난혹경(阿難惑經)『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에서 나왔다.
제일사문경(第一四門經)
제이사문경(第二四門經)
제삼사문경(第三四門經)
감로정의경(甘露正意經)또한 『불입감로조의경(佛入甘露調意經)』이라고도 한다. 『제일사문경(第一四門經)』 등 4경은 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서 나왔다. 또한 『보창록(寶唱錄)』에서도 나왔다. 모두 이 경들은 『대십이문경(大十二門經)』의 일부인데, 뒷사람들이 품(品)을 나누어 베껴낸 것이 마침내 4경이 된 것이다.
존자박구라경(尊者薄拘羅經)혹은 바로 『박구라경(薄拘羅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박구라답이학문경(薄拘羅答異學問經)』이라고도 한다.
바라문행경(婆羅門行經)
장자형제예불경(長者兄弟詣佛經)또한 『장자리사달다형제이인왕불소경(長者梨師達多兄弟二人往佛所經)』이라고도 한다. 『존자박구라경薄拘羅』 등 3경은 『중아함경中阿含』에서 나왔다.
오전투인경(五戰鬪人經)
세간강도보시경(世間强盜布施經)
범천예바라문강당경(梵天詣婆羅門講堂經)
욱가거사견불문법성오경(郁伽居士見佛聞法醒悟經)또한 『수가타거사불위설법득성오경(修伽陀居士佛爲說法得性悟經)』이라고도 한다.
수유경(水喩經)『오전투인경五戰鬪』 등 5경은 모두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나왔다.
불위바라문설사법경(佛爲婆羅門說四法經)
불위사화바라문설오도경(佛爲事火婆羅門說悟道經)
불위바라문설경전경(佛爲婆羅門說耕田經)혹은 전(田)자가 없기도 하다.
불위교만바라문설게경(佛爲憍慢婆羅門說偈經)
불위빈두바라문설상류경(佛爲頻頭婆羅門說像類經)
불위아지라가섭설자타작고경(佛爲阿支羅迦葉說自他作苦經)
목련견중생신모여전경(目連見衆生身毛如箭經)
아나율사유목련신력경(阿那律思惟目連神力經)
무외리차백아난경(無畏離車白阿難經)
상인탈적난경(商人脫賊難經)
세간언미색경(世間言美色經)
순타사미경(純陀沙彌經)혹은 사문(沙門)이라고도 하며, 혹은 순(淳)자를 쓰기도 한다.
상인자작불사경(商人子作佛事經)
바라문통달경론(婆羅門通達經論)
논외도출가경(論外道出家經)
바라문복백경(婆羅門服白經)
정근사념처경(精勤四念處經)
바라문허위경(婆羅門虛僞經)
불위조마취락주설법경(佛爲調馬聚落主說法經)
일체행불항안주경(一切行不恒安住經)
바라문문세존장래유기불경(婆羅門問世尊將來有機佛經)
바라문문불보시득복경(婆羅門問佛布施得福經)
두차바라문논의출가경(豆遮婆羅門論議出家經)
불화화여바라문출가경(佛化火與婆羅門出家經)혹은 화여(火與)를 대여(大與)라고도 한다.
부수비유경(浮水譬喩經)일명 『항수유주경(恒水流澍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유주(流澍)로 쓰기도 한다.
사타바라문출가득도경(四吒婆羅門出家得道經)
과거탄금인경(過去彈琴人經)
바라문해지중술경(婆羅門解知衆術經)
독부장자경(獨富長者經)또한 『독부장자재물무부경(獨付長者財物無付經)』, 또는 『장자명종무자부촉경(長者命終無子付囑經)』이라고도 한다.
불위연소바라문설지선불선경(佛爲年少婆羅門說知善不善經)
불위나구라장자설근숙경(佛爲那拘羅長者說根熟經)혹은 라(羅)ㆍ근(根)ㆍ숙(熟)의 세 글자가 없기도 하다.
선사만족경(禪思滿足經)『불위바라문설사법경(佛爲婆羅門說四法經)』 등 32경은 모두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나왔다.
선비요경(禪秘要經)『치선병비요법(治禪病秘要法)』에서 나왔다.
전세쟁녀경(前世諍女經)
자명과경(子命過經)
가전연무상경(迦旃延無常經)
심라형자경(審裸形子經)일명 『불부라형자경(佛覆裸形子經)』이라고도 한다.
별유경(鱉喩經)『전세쟁녀경(前世諍女經)』 등 5경은 모두 『출생경(出生經)』에서 나왔다.
경면왕경(鏡面王經)『의족경(義足經)』에서 나왔다.
삼독경(三毒經)
수식사경(數息事經)이상의 2경은 『소승잡초(小乘雜抄)』이다.
칠로바라문청위제자경(七老婆羅門請爲弟子經)
고모상일자경(孤母喪一子經)
작독수부생경(斫毒樹復生經)
구리뢰옥경(求離牢獄經)
양시난우경(良時難遇經)
석유이인상애경경(昔有二人相愛敬經)
자인불살경(慈仁不殺經)
마야기여인방불생신입지옥경(摩耶祇女人謗佛生身入地獄經)
최승장자수주원경(最勝長者受呪願經)또한 바로 『수주원경(受呪願經)』이라고도 한다.
불신력구장자자경(佛神力救長者子經)
불도전다라아출가경(佛度旃陁羅兒出家經)
승사승기경(承事勝己經)
조달생신입지옥경(調達生身入地獄經)
다도견중생경(多倒見衆生經)
장자야수득비상관경(長者夜輸得非常觀經)또한 바로 『득비상관경(得非常觀經)』이라고도 한다. 『칠로바라문청위제자경(七老婆羅門請爲弟子經)』 등 15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인수신입음경(人受身入陰經)
인신사백사병경(人身四百四病經)
오음성패경(五陰成敗經)
지옥죄인중고경(地獄罪人衆苦經)
인병의불능치경(人病醫不能治經)『인수신입음경(人受身入陰經)』 등 5경은 모두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에서 나왔다.
아련야습선법경(阿練若習禪法經)『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에서 나왔다.
연화녀경(蓮華女經)『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 나왔다.
가섭힐아난경(迦葉詰阿難經)또한 『가섭책아난쌍도나한유경(迦葉責阿難雙度羅漢喩經)』이라고도 한다.
금색녀경(金色女經)『가섭힐아난경』 등 2경은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나왔다.

이상 『팔광경(八光經)』 등 85부 85권은 『장방록』 등에서는 “모두 안세고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수(隋)나라 개황(開皇)ㆍ인수(仁壽) 2본(本)의 『중경록(衆經錄)』과 새로 총괄하여 낸 『별생초경(別生抄經)』 등을 살펴보면, 이 경들은 모두 여러 경에서 따로 파생되었으며, 혹은 안세고의 역출이 아닌 것도 있으므로, 안세고가 번역한 수(數)에 넣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지금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實錄]하였기 때문에 모두 삭제하였다.

(5) 축불삭(竺佛朔)
도행경(道行經) 1권광화(光和) 2년(179) 10월 8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 경의 후기(後記)와 주사행(朱士行)의 『한록(漢錄)』ㆍ『승우록(僧祐錄)』 등에 보인다. 안공(安公)은 “『도행품(道行品)』은 『반야경(般若經)』에서 가려 뽑아 베낀 것인데, 외국의 고명(高明)한 이가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도안이 서문을 짓고 주석을 달았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2권광화 2년(179) 10월 8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경의 후기와 『고승전』 등에서 보인다. 이상 2경은 동시에
간행을 했기 때문에 번역되어 나온 날이 같다. 『구록(舊錄)』에서는 “『대반주삼매경(大般舟三昧經)』은 혹 1권이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대집현호경(大集賢護經)』과 같은 동본(同本)이다.

이상 2부 3권은 그 경본이 모두 궐본이다.

사문 축불삭(竺佛朔)에 대해서는 경의 후기(後記)에서 “축불삭은 인도 사람이다. 식견과 성품이 밝고 총민하였으며, 널리 알고 여러 가지 일에 재능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한(漢)나라 영제(靈帝) 광화(光和) 초기(178)에 『도행경(道行經)』 등을 가지고 낙양(洛陽)으로 가서 범어[梵]42)를 한어[漢]로 번역하였다. 당시에 번역하는 사람들은 문자에 얽매이고 막혀 그 본뜻을 잃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축불삭은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그 본뜻을 잘 보존하여 경의 뜻을 매우 잘 드러내었다. 월지국(月支國) 사문 지루가참[支讖]이 통역하였고, 하남(河南)의 맹복(孟福:字는 元士)과 장련(張蓮:字는 少安)이 받아썼다. 이 사실은 모두 경의 후기에서 보인다.

(6) 안현(安玄)
법경경(法鏡經) 2권안공이 말하길,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욱가장자회(寶積郁伽長者會)』와 같은 동본(同本)이다. 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사문 엄불조(嚴佛調)가 붓으로 받아썼고, 강승회(康僧會)가 주석을 붙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아함구해십이인연경(阿含口解十二因緣經) 1권또한 『단십이인연경(斷十二因緣經)』43)이라고도 하며, 또는 바로 『아함구해(阿含口解)』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안후구해(安侯口解)』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이 네 가지의 이름이 있으나, 같은 한 본(本)이다. 『내전록(內典錄)』에서 “안세고(安世高)와 안현(安玄)이 함께 『구해(口解)』를 번역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상 2부 3권은 그 경본이 모두 있다.

우바새(優婆塞) 안현(安玄)은 안식국(安息國) 사람이다. 의지가 곧고 성품이 맑고 깨끗하였으며, 심히 한가로우면서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았다. 법계(法戒)를 잘 지켜서 터럭만큼도 이지러뜨리지 않았고, 여러 경들을 널리 외워서 두루 통달하였다.
한나라 영제(靈帝) 때에 낙양(雒陽)에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는데, 공(功)이 있었기에 기도위(騎都尉 : 벼슬이름)라 불렀다. 그의 성품은 고요[虛靜]44)하면서 온화하고 공손하였으며, 항상 불법을 펼치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다. 점차 한나라 말을 익히게 되자, 경전을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항상 사문들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도위(都尉)라고 불렸다.
안현은 광화 4년 신유(辛酉, 181)에 사문 엄불조(嚴佛調)와 함께 『법경경(法鏡經)』 등을 번역하였다. 안현은 입으로 범문(梵文)을 번역하여 읽고 엄불조는 받아썼는데, 이치가 맞고 음이 정확하여 경의 미묘한 뜻을 끝까지 다 나타낼 수 있었다. 그 뛰어나고 아름다운 문장은 후대에까지도 전해지게 되었다.
승우(僧祐)는 “『법경경』을 엄불조가 역출하였다는 것은 그와 함께 번역하였다는 말이요, 또 『아함구해(阿含口解)』를 안세고(安世高)의 번역이라 한 것은 이 분들의 성씨가 같아서 서로 뒤섞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구록(舊錄)』에서도 “안후(安侯)의 『구해(口解)』이다”라고 한 것을 살펴볼 때, 역시 안세고의 역출이 맞았다.

(7) 지요(支曜)
성구광명정의경(成具光明定意經) 1권혹은 『성구광명삼매경(成具光明三昧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바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주사행(朱士行)과 지민도(支敏度)와 승우(僧祐) 등의 세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아나률팔념경(阿那律八念經) 1권혹은 바로 『팔념경(八念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선행렴의경(禪行斂意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선행검의경(禪行檢意經)』은 『중아함경(中阿含經)』 제18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고 하였다. 『구록』에서 보인다.
마유삼상경(馬有三相經) 1권또한 『선마유삼상경(善馬有三相經)』이라고도 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33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비장방(費長房)은 “『오록(吳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마유팔태비인경(馬有八態譬人經) 1권또한 바로 『마유팔태경(馬有八態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마유팔폐악태경(馬有八弊惡態經)』이라고도 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3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비장방(費長房)은 “『오록(吳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소도지경(小道地經) 1권비장방(費長房)은 “『오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 위에 기록한 경은 현재 있고, 이 이후의 경은 궐본이다.
문성십이인연경(聞城十二因緣經) 1권두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안세고가 번역한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과 같은 동본이다. 비장방(費長房)은 “『오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대마야경(大摩耶經) 1권혹은 대(大)자가 없기도 한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마하마야경(摩訶摩耶經)』과는 동본이다. 비장방은 “『오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뇌타화라경(賴吒和羅經) 1권『중아함경』 제3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비장방(費長房)이 “『오록』에서 ‘안공(安公)이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다”는 것은 아마 착오일 것이다.
소본기경(小本起經) 2권혹은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또는 『숙행본기경(宿行本起經)』이라고도 한다. 근래 소(小)자를 붙였을 뿐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과 같은 동본이다. 『구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타락우바새경(墮落優婆塞經) 1권혹은 『우피새경優披塞』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오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10부 11권이다.『소도지경』 이상의 5부 5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문성십이인연경』 이하의 5부 6권은 궐본이다.

사문 지요(支曜)는 서역 사람이다. 여러 경전을 널리 통달하였고, 깊은 이치까지 미묘하게 알았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2년 을축(乙丑, 185)에 낙양에서 『성구광명정의경(成具光明定意經)』 등 10부를 번역하였다.
『장방록(長房錄)』 등에는 또 『수지문불십사사경(首至問佛十四事經)』혹은 불(佛)자가 없기도 하다이 있는데, 내가 그 경본을 보았더니, 이 경은 가려 뽑아서 이미 『별생록(別生錄)』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에 여기서는 삭제하고 기재하지 않는다.

(8) 강거(康巨)
문지옥사경(問地獄事經) 1권주사행의 『한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강신(康臣)혹은 거(巨)자를 쓰기도 하는데, 어느 자가 옳은지는 자세하지 않다은 서역 사람이다.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데 마음이 있었고, 법을 널리 펴는데 뜻을 두었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4년 정묘(丁卯, 187)에 낙양에서 『문지옥사경[問地獄經]』을 번역하였다. 번역한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덧붙여 꾸미지 않았다.

(9) 엄불조(嚴佛調)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 2권일명 『결료제법여환화삼매경(決了諸法如幻化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반야나가실리분(大般若那伽室利分)』과 같은 동본이다. 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장방록』에 보인다.
혜상보살문대선권경(慧上菩薩問大善權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대승방편회(寶積大乘方便會)』와 같은 동본이다. 혹은 보살(菩薩)이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장방록』에서 보인다.
고유마힐경(古維摩詰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고록(古錄)』과 주사행의 『한록』에 보인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무구칭경(無垢稱經)』과 같은 동본이다.
사의경(思意經) 1권또한 『익의경(益意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내습육바라밀경(菩薩內習六波羅蜜經) 1권안공(安公)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혹은 『내육바라밀경(內六波羅蜜經)』이라고도 한다. 또한 ‘『내외육바라밀경內外』’이라고 한 것은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5부 8권이다.앞의 4부 7권은 궐본이고, 뒤의 1부 1권만이 현재 있다.

사문 엄불조(嚴佛調)또한 부조(浮調)라고도 한다. 『승우록』과 『고승전』에 의거하면 이 분은 사문이 맞다. 『장방록』 등에서는 “청신사(淸信士 : 남자 불교 신자)이다”라고 하였는데, 옳지 않다는 임회군(臨淮郡) 사람이다. 소년 시절 남들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였고,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믿음과 지혜가 저절로 일어나자, 마침내 출가하여 도를 닦았고, 경전을 통역하였으므로 당시에 존경을 받았다.
엄불조는 영제(靈帝) 중평(中平) 5년 무진(戊辰, 188)에 낙양에서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濡首菩薩]』 등 5부를 번역하였다. 세상에서는 안후(安候)ㆍ도위(都尉)ㆍ엄불조 세 사람이 번역한 것을 칭찬하였으며, 그들의 뒤를 잇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안공(安公)은 엄불조가 역출한 경을 칭찬하면서 “자세하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책 전체 내용[全本]이 교묘하다”라고 하였다.
또 『장방록』 등에서는 다시 “『가섭힐아난경(迦葉詰阿難經)』이 있고, 또한 엄불조가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경본을 보았더니 여러 경에서 추려 베낀 것[抄]이였고, 몇 가지[條]의 일이 있었다. 수(隋)나라 『중경록(衆經錄)』에서는 “『잡비유경[雜譬喩]』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안세고(安世高)와 섭승원(聶承遠)의 목록에도 모두 이 경이 있는데, 목록을 지은 사람들의 잘못이다. 이는 이미 별도로 베낀 경전으로 번역한 정수(正數)에 넣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또한 『사미십혜경(沙彌十慧經)』이 있는데, 엄불조가 지었고, 아울러 주석과 서문을 썼다고 하였으나, 이미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며, 또 궐본이므로 이제 다 삭제하고 싣지 않는다.

(10) 강맹상(康孟詳)
사리불마목건련유사구경(舍利弗摩目揵連遊四衢經) 1권『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4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별록(別錄)』에 보인다.
흥기행경(興起行經) 2권또한 『엄계숙연경(嚴誡宿緣經)』이라고도 한다. 『오록(吳錄)』에 보인다. 표제에서는 “『잡장(雜藏)』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범망경(梵網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오록』에 보인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사제경(四諦經) 1권흥평(興平) 원년(194)에 번역되어 나왔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중아함경』 제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축도조의 『한록(漢錄)』에 보인다.
태자본기서응경(太子本起瑞應經) 2권또한 『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과현인과경(過現因果經)』과 같은 동본이다. 비장방은 “『삼장기(三藏記)』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승우의 『삼장기』 중에는 “맹상(孟詳)이 『중본기경(中本起經)』을 역출한 것이며, 『서응본기경』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보복경(報福經) 1권혹은 『복보경(福報經)』이라고도 한다. 『오록』에 보인다.
이상은 6부 9권이다.『흥기행경』 이상 2부 3권은 현재 있는 경본이며, 『범망경』 이하의 4부 6권은 궐본이다.

사문 강맹상(康孟詳)은 그 선조가 강거국(康居國) 사람이다. 지혜와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헌제(獻帝) 흥평(興平) 원년 갑술(194)로부터 건안(建安) 4년 기묘(199)에 이르기까지 낙양에서 『사리불마하목건련유사구경』 등의 6부를 번역하였다. 안공(安公)은 “강맹상이 번역한 경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우면서 지취[玄趣]를 드날리기에 충분했다”라고 하였다.

(11) 축대력(竺大力)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2권『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과 같은 동본이다. 일명 『숙행본기경(宿行本起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은 1부 2권이다.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축대력(竺大力)은 서역 사람이다. 뜻은 멀리 유행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어려움과 위험을 꺼리지 않았다.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 정축(197) 3월에 낙양에서 『수행본기경』을 번역하였다. 그 경의 범본(梵本)은 또한 담과(曇果)와 강맹상(康孟詳)이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에서 가져왔는데, 강맹상이 그 말을 통역하였다.

(12) 담과(曇果)
중본기경(中本起經) 2권혹은 『태자중본기경(太子中本起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경의 첫 표제에서는 “『장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1부 2권이다. 그 경본은 현재 있다.

사문 담과(曇果)는 서역 사람이다. 학문은 내외(內外)에 해박하였고, 견해는 진속(眞俗)45)을 두루 통하였다.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에서 경의 범본(梵本)을 가지고 낙양에 이르렀다.
헌제(獻帝) 건안 12년 정해(丁亥, 207)에 『중본기경(中本起經)』을 번역하였는데, 강맹상(康孟詳)이
그 말을 진술하며 통역하였다.
『내전록(內典錄)』 중에는 “담과와 맹상이 함께 번역하였고, 마침내 맹상은 『태자본기서응경(太子本起瑞應經)』과 합쳐서 1권으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다. 이 두 경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합칠 수가 없다. 승우(僧祐)는 “강맹상이 『중본기경(中本起經)』을 번역하여 내었다는 것은 그들이 함께 경을 번역한데 근거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13) 신구제실역경(新舊諸失譯經)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 7권
마하연보엄경(摩訶衍寶嚴經) 1권일명 『대가섭품(大迦葉品)』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보명보살회(寶積普明菩薩會)』와 같은 동본인데, 그 내용 중에 이르기를 “진(晋)나라 말로 번역되었으면, 『진록(晋錄)』에 편입되어야 할 것이나, 지금은 우선 『구록(舊錄)』에 의거하기로 한다”라고 하였다. 승우는 “『마하승보엄경(摩訶乘寶嚴經)』이다”라고 하였다.
후출아미타불게경(後出阿彌陁佛偈經) 1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미증유경(未曾有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때에 번역한 『심희유경(甚希有經)』과 같은 동본이다.
작불형상경(作佛形像經) 1권일명 『우전왕작불형상경(優塡王作佛形像經)』, 또는 『작상인연경(作像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조립형상복보경(造立形象福報經)』과 같은 동본이다.
안택신주경(安宅神呪經) 1권또한 『안택주법경(安宅呪法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안택주(安宅呪)』이다”라고 하였다.
수십선계경(受十善戒經) 1권
고음경(苦陰經) 1권『중아함경』 제25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마요란경(魔嬈亂經) 1권일명 『폐마시목련경(弊魔試目連經)』, 또는 『마왕입목련난복경(魔王入目連蘭腹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3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사미니계경(沙彌尼戒經) 1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한다.
우바리문불경(優波離問佛經) 1권혹은 『우바리률(優波離律)』이라고도 한다.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 4권혹은 『분별공덕경(分別功德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 또는 5권으로 되어 있다.
선요가욕경(禪要呵欲經) 1권표제에서는 “『선요경(禪要經)』의 「가욕품(呵欲品)」이다”라고 하였다.
내신관장구경(內身觀章句經) 1권혹은 구(句)자가 없기도 한다.
잡비유경(雜譬喩經) 2권일명 『보살도인경(菩薩度人經)』이라고도 한다.
육보살명경(六菩薩名經) 1권『장방록』의 「입장록(入藏錄)」에는 “여섯 분의 보살 명호를 또한 외우고 지녀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경론은 현재 있고, 이 이하는 궐본이다.
반주삼매염불장경(般舟三昧念佛章經) 1권이 경은 행품(行品) 별로 번역했다. 네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아미타불게(阿彌陁佛偈)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범본경(梵本經) 4권『구록(舊錄)』에는 “호본(胡本)이다”고 한 것을 새로 범본(梵本)으로 고쳤다. 장안(長安)에서 역출한 듯하다.
니원후천세변경(泥洹後千歲變經) 4권일명 『천세변경(千歲變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니원후천세중변기(泥洹後千歲中變記)』 1권이다”라고 하였다.
제경불명(諸經佛名) 2권이제 이 경은 『부사의공덕경(不思議功德經)』이 아닌가 의심된다.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 1권
칭양백칠십불명경(稱揚百七十佛名經) 1권또한 바로 『백칠십불명경(百七十佛名經)』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칭양공덕경(稱揚功德經)』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남방불명경(南方佛名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일명 “『치성사경(治城寺經)』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옳지 않다. 이것은 절 이름을 표제로 기록한 것이지, 이 경의 다른 이름異名이 아니다.
멸죄득복불명경(滅罪得福佛名經) 1권
관세음소설행법경(觀世音所說行法經) 1권이 경은 『주경(呪經)』이다.
살타파륜보살구심반야도상경(薩陁波崙菩薩求深般若圖像經) 1권
수지불명불타악도경(受持佛名不墮惡道經) 1권
오룡주독경(五龍呪毒經) 1권
취혈기신주경(取血氣神呪經) 1권『구록』에서는 “『혈주(血呪)』이다”라고 하였다.
주적주법경(呪賊呪法經) 1권비장방은 “이출본(異出本)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는 바로 “『주적(呪賊)』이다”라고 하였다.
칠불안택신주경(七佛安宅神呪經) 1권
보살수계법경(菩薩受戒法經) 1권『승우록』에는 경(經)자가 없다. 비장방은 “이출본이다”라고 하였다.
수보살계차제십법(受菩薩戒次第十法) 1권
보살참회법(菩薩懺悔法) 1권
초발의보살상주야육시행오사경(初發意菩薩常晝夜六時行五事經) 1권
정생왕인연경(頂生王因緣經) 1권『구록』에서는 “『정생왕경(頂生王經)』이다”라고 하였다.
장자현수경(長者賢首經) 1권
범지상녀경(梵志喪女經) 1권
삭구설왕경(𤢴狗齧王經) 1권『구록』에서는 “『삭구경(𤢴狗經)』이다”라고 하였다.
근고니리경(勤苦泥犁經) 1권
지옥경(地獄經) 1권
십일인연장경(十一因緣章經) 1권『구록』에서는 “『십일인연경(十一因緣經)』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십이(十二)로 쓰기도 한다.
사문위십이두타경(沙門爲十二頭陁經) 1권
승명수사행경(僧名數事行經) 1권
비구제금률경(比丘諸禁律經) 1권
마하승기률비구요집(摩訶僧祇律比丘要集) 1권일명 『마하승기부비구수용요집법(摩訶僧祇部比丘隨用要集法)』이라고도 한다.
사미십계경(沙彌十戒經) 1권『구록』에서는 “『사미계(沙彌戒)』이다”라고 하였다.
비구니십계경(比丘尼十戒經) 1권
현자오계경(賢者五戒經) 1권
우바새위의경(優婆塞威儀經) 1권
유가삼마사경(庾伽三磨斯經) 1권번역하면 줄여 수행(修行)이라고도 한다. 일명 『달마다라선법(達磨多羅禪法)』이라고도 한다. 혹은 달마다라 보살이 지은 『선경요집(禪經要集)』이라고도 한다.
범음게본(梵音偈本) 1권『구록』에서는 “『호음(胡音)』이다”라고 하였다.
찬칠불게(讚七佛偈) 1권
달화니백구(怛惒尼百句) 1권
오언영송본기(五言詠頌本起) 1권142수(首)
도행품제경범음해(道行品諸經梵音解) 1권『구록』에서는 “『호음(胡音)』이다”라고 하였다.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 1권『승우록』에는 “무릇 17 가지 비유가 있다”고 한다. 혹은 유(喩)자가 없기도 하다. 위의 59부는 다 같이 현재 경본이 있다. 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 있다.
이상은 59부 76권이다.『장방록(長房錄)』에 준하면 본래 합한 권수가 77권이다. 그것은 『분별공덕론』을 5권으로 기록해서이다. 지금 보면 4권으로 되어 있으므로 76권이다. 『육보살명경』의 그 이상 16부 26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반주삼매염불장경』 이하의 43부 50권은 궐본이다.
『장방록』 등에는 “한(漢)나라 이후에 번역한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은 총 125부 148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중의 66부 71권은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 번역하고 어디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상세한 유래를 기술하여 아래와 같이 나열하였다.
불유일마니보경(佛遺日摩尼寶經)한(漢)나라 지참(支讖)의 번역이다.
보살생지경(菩薩生地經)
유일잡난경(惟日雜難經)이상의 2경은 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금강삼매본성청정불괴불멸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혹은 『금강청정경(金剛淸淨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 등에서는 “오(吳) 때의 지겸(支謙)의 번역인데도, 한나라 후대의 『실역록(失譯錄)』에 다시 기재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 경을 상고하면, 이 경은 한대(漢代)에 그 근원을 잃은 것失源도 아니며, 또 지겸이 번역해 낸 것도 아니다. 이 경은 요진(姚秦) 이후의 구마라집(鳩摩羅什) 등의 번역인 것 같다. 지금은 우선 근원을 잃은 것으로 하여, 『진록(秦錄)』에 편입하였다.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 2권오나라 때의 강승회(康僧會)의 번역이다.
시방불명경(十方佛名經)
삼십이상인연경(三十二相因緣經)이상의 2경은 서진(西晋) 때의 축법호(竺法護)의 번역이다.
보살수행경(菩薩修行經)일명 『장자위시소문보살수행경(長者威施所問菩薩修行經)』, 또는 『장자수행경(長者修行經)』이라고도 한다. 이미 일찍이 세 번 번역되어 하나는 현재도 존재하고, 둘은 궐본인데, 목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가섭부불니원경(迦葉赴佛泥洹經)일명 『불반니원시가섭부불경(佛般泥洹時迦葉赴佛經)』이라고도 한다.
철성니리경(鐵城泥犁經)일명 『중아함니리경(中阿含泥犁經)』이라고도 한다.
적지과경(寂志果經)
삼십칠품경(三十七品經)여러 경에서 추려 지은 것이다. 『별생록(別生錄)』에 있다.
칠불소결마유술주(七佛所結麻油述呪)
환사파타신주(幻師陂陁神呪)
주우치주(呪齲齒呪)일명 『주충치(呪蟲齒)』라고도 하며, 또는 바로 『주치(呪齒)』라고도 한다.
주아통주(呪牙痛呪)
주안통주(呪眼痛呪)『가섭부불니원경』 이하 10경은 동진(東晋) 때의 축담무란(竺曇無蘭)의 번역이다.
천불인연경(千佛因緣經)
해팔덕경(海八德經)이상의 2경은 『법상록(法上錄)』에는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보살소생지경(菩薩所生地經)
마하찰두경(摩訶刹頭經)이상 2경은 걸복진(乞伏秦 : 나라 이름 서진) 때 성견(聖堅)의 번역이다.
적조의(寂調意)음(音)을 합하여 만든 글자인데, 의(意)라 하면 잘못된 것이다.
소문경(所問經)일명 『여래소설청정조복경(如來所說淸淨調伏經)』이라고도 한다.
전여신보살경(轉女身菩薩經)일명 『낙영락장엄방편경(樂瓔珞莊嚴方便經)』, 또는 『낙영락장엄녀경(樂瓔珞莊嚴女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의 2경은 송(宋)나라 때 법해(法海)의 번역이다.
사미위의경(沙彌威儀經)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한다. 송나라 때의 구나발마(求那跋摩)의 번역이다.
사천왕경(四天王經)송나라 때의 지엄(智嚴)의 번역이다.
염왕오사자경(鹽王五使者經)일명 『오천사경(五天使經)』이라고도 한다.
비유경(譬喩經)이상의 2경은 송나라 때의 혜간(慧簡)의 번역이다.
팔부불명경(八部佛名經)원위(元魏) 때의 구담유지(瞿曇流支)의 번역이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이 경은 전에 두 번 번역되었다. 하나는 남아있고, 하나는 궐본인데, 목록에 모두 나타나 있다.
반야바라밀신주경(般若波羅蜜神呪經)『대품경(大品經)』에서 나왔다.
공덕장엄왕팔만사천세청불경(功德莊嚴王八萬四千歲請佛經)『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대방광여래성기미밀장경(大方廣如來性起微密藏經) 2권또한 바로 『여래성기경(如來性起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구(舊) 『화엄경(華嚴經)』의 「여래성기품(如來性起品)」이다.
합도신족경(合道神足經) 4권일명 『도신족무극변화경(道神足無極變化經)』이라고도 한다. 곧 『도신족경(道神足經)』의 이명(異名)으로 두 경본은 구별이 없다.
지재경(持齋經)『재경(齋經)』의 다른 이름이다.
과거향연화불세계경(過去香蓮花佛世界經)『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선덕바라문구사리경(善德婆羅門求舍利經)
인홍법경(人弘法經)이상 2경은 『대운경(大雲經)』에서 나왔다.
오십삼불명경(五十三佛名經)『약왕약상경(藥王藥上經)』에서 나왔다.
미륵위녀신경(彌勒爲女身經)
일체시왕소행단바라밀경(一切施王所行檀波羅蜜經)또한 『행단바라밀경(行檀波羅蜜經)』, 또는 『살화단왕경(薩和檀王經)』이라고도 한다.
마조왕경(摩調王經)
소아문법즉해경(小兒聞法卽解經)이상의 4경은 『육도집(六度集)』에서 나왔다.
정제업장경(淨除業障經)『정업장경(淨業障經)』에서 뽑아 베낀 경이다.
십주비파사경(十住毘婆沙經)『십주론(十住論)』에서 뽑아 베낀 경이다.
칠보경(七寶經)『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나왔다.
질다장자청비구경(質多長者請比丘經)
외도유질다장자경(外道誘質多長者經)
불견목우자청비구시도경(佛見牧牛者請比丘示導經)
장자명종무자부촉경(長者命終無子付囑經)『독부장자경(獨富長者經)』의 다른 이름이다. 『질다장자청비구경』 이하 4경은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적골경(積骨經)『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에서 나왔다.
회자경(誨子經)『생경(生經)』에서 나왔다.
범지관무상득해탈경(梵志觀無常得解脫經)『의족경(義足經)』에서 나왔다.
범지피사경(梵志避死經)
빈자득재발광경(貧子得財發狂經)
무해범지집지경(無害梵志執志經)
선패비구경(善唄比丘經)『범지피사경』 이하 4경은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복자경(福子經)
거사물고위부비중충경(居士物故爲婦鼻中蟲經)
수하비경(須河譬經)
교자경(敎子經)일명 『수달교자경(須達敎子經)』, 또는 『수달훈자경(須達訓子經)』이라고도 한다. 『복자경』 등 4경은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나왔다.
용종존국변화경(龍種尊國變化經)
관세누탄경(觀世樓炭經)3품(品)이 있다.
청정법행경(淸淨法行經)이상의 3경은 앞서부터 『위록(僞錄)』에 있었다.
화엄영락경(華嚴瓔珞經)
반야득경(般若得經)이상의 2경은 『승법니송(僧法尼誦)』에서 나왔다. 또한 『위록』에 있다.
현겁천불명경(賢劫千佛名經) 1권승우는 “오직 부처님의 명호만이 있을 뿐이며, 담무란(曇無蘭)이 역출한 『사제경(四諦經)』의 천불(千佛)의 명호와는 다르다”라고 하였다. 『현겁경(賢劫經)』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이상 『불유일마니보경』 이하 66부 72권은 혹은 번역에 근거가 있기도 하고, 혹은 따로 파생되어[別生] 위경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였는데, 이제 이미 그 근거를 찾아서 알았다. 그러므로 한대(漢代) 이후의 근원을 잃은[失源] 경은 아니다. 그러나 『구집[舊]』과 같은 것을 거듭 편입시킴으로써 번거롭고 뒤섞일까 염려되어 이제 다 같이 삭제하였다.

『장방록(長房錄)』에는 “이상의 125부 148권은 다 같이 승우율사(僧祐律師)의 『출삼장기(出三藏記)』에서 지은 것이다. 『고록』과 『구록』 두 목록과 『안록(安錄)』에서 근원을 잃은 것과 아울러 신집(新集)에 실린 역자를 알 수 없는 여러 경의 권부(卷部)는 매우 광대하다. 여러 목록을 교정해 보면 정돈되지 못하고 어수선한[蕪穢] 것이 많으며, 들고 나고 하면서 서로 섞이어 실로 바르게 설명하기 어렵다. 아직 경권(經卷)을 보지도 못했는데, 공연히 명제(名題)만이 열거하였다. 들어옴이 있었으면 근원이 있고, 들어옴이 없었으면 번역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초를 상고하면 이유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이 끝[末]에다 붙여 둔다. 바라건대 뒷날 박식한 사람이 이 원줄기를 벗어나게 본 것이 있다면, 부디 다시 바르게 거두어서 근거가 있게 하여서, 법의 바다[法海]를 밝히어 파도를 고요하게 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이제 비장방의 이 말을 깊이 찾아보아도, 의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그 같고 다른 것을 자세히 찾아보면,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이하는 새로 이 목록에 첨가한다.
발파보살경(拔陂菩薩經) 1권혹은 발파(拔波)라고도 한다. 『안록(安錄)』에서는 “『발파타보살경(颰披陀菩薩經)』이다”라고 하였다. 안공(安公)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 『반주경(般舟經)』 초(初) 4품의 이역(異譯)이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전단수경(栴檀樹經) 1권
아구류경(阿鳩留經) 1권
보살도지경(菩薩道地經) 1권안공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마왕입목건란복경(魔王入目揵蘭腹經) 1권또한 『폐마시목련경(弊魔試目連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마왕입목련복중경(魔王入目連腹中經)』이다”라고 하였다. 『중아함경』 제30권에서 나왔다. 곧 마지막 10경중의 1경이다.
불유오백비구경(佛有五百比丘經) 1권
범인유삼사우치부족경(凡人有三事愚癡不足經) 1권
불계제비구언아이천안시천하인생사호추존자비자경(佛誡諸比丘言我以天眼視天下人生死好醜尊者卑者經) 1권안공은 “이상의 3경은 『중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자견자지위능진결경(自見自知爲能盡結經) 1권
유사구경(有四求經) 1권
불본행경(佛本行經) 1권
하중대취말경(河中大聚沫經) 1권혹은 『수말소표경(水沫所漂經)』, 또는 『취말비경(聚沫譬經)』이라고도 한다. 『중경록(衆經錄)』에서는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고, 지금의 『안록(安錄)』의 선집(先集)에는 “『잡아함경』의 후역(後譯)이다”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별역(別譯)이어서 본래 그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편현자갱경(便賢者坑經) 1권갱(坑)자를 혹은 전(旃)자로 쓰기도 한다.
소비여소경(所非汝所經) 1권
양비구득할경(兩比丘得割經) 1권
도덕사리일경(道德舍利日經) 1권
사리일재왕사국경(舍利日在王舍國經) 1권
독거사유자념지경(獨居思惟自念止經) 1권
문소명종경(問所明種經) 1권
욕종본상유경(欲從本相有經) 1권혹은 『욕종본경(欲從本經)』이라고도 한다.
독좌사유의중생념경(獨坐思惟意中生念經) 1권
불설여시유제비구경(佛說如是有諸比丘經) 1권
비구소구색경(比丘所求色經) 1권
도유비구경(道有比丘經) 1권
색위비상념경(色爲非常念經) 1권『자견자지위능진결경』으로부터 그 이하에 본래 22경이 있는데, 안공(安公)은 “이는 아함(阿含)의 1권인데, 그 중에서 5경은 이미 다른 목록에 구비되어 있으므로, 지금은 다만 17권이 있을 뿐이며, 『잡아함경』 분(分) 가운데 기재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색비구염본기경(色比丘念本起經) 1권
선악의경(善惡意經) 1권
비구일법상경(比丘一法相經) 1권
유이력본경(有二力本經) 1권
유삼력경(有三力經) 1권
유사력경(有四力經) 1권
인유오력경(人有五力經) 1권
불문자류상취경(不聞者類相聚經) 1권『구록』에서는 “『유상취경(類相聚經)』이다”라고 하였다. 『상응상가경(相應相可經)』과는 동본(同本)이다.
천상석위고세재인중경(天上釋爲故世在人中經) 1권혹은 상(上)자를 쓰지 않기도 하는데, 잘못이다.
조두토경(爪頭土經) 1권
신위무유반복경(身爲無有反復經) 1권
사자축생왕경(師子畜生王經) 1권
아수륜자바라문경(阿須倫子婆羅門經) 1권
바라문자명불침경(婆羅門子名不侵經) 1권
생문바라문경(生聞婆羅門經) 1권『구록』에서는 “『생문범지경(生聞梵志經)』이다”라고 하였다.
유상갈경(有▼(阝+桒)竭經) 1권
서두승바라문경(署杜乘婆羅門經) 1권
불재구살국경(佛在拘薩國經) 1권
불재우타국경(佛在優墮國經) 1권경에서는 우수(優隨)라고 썼다.
시시자범수경(是時自梵守經) 1권
유삼방편경(有三方便經) 1권『구록』에서는 “『삼방편경(三方便經)』이다”라고 하였다. 『법경록(法經錄)』에서는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바라문불신중경(婆羅門不信重經) 1권
불고사일경(佛告舍日經) 1권
사의지경(四意止經) 1권『구록』에서는 “『사의지본행경(四意止本行經)』이다”라고 하였다. 『법경록』에서는 “『중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설인자설인골부지부경(說人自說人骨不知腐經) 1권『색비구염본기경』 이하의 25권을 안공(安公)은 “모두 『잡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이제 장경중에 단권(單卷)으로 된 『잡아함경』 속에 찾아보았더니, 모두 이 경들이 있었다. 대부분 뒷사람들이 합쳐서 각 권을 만든 것이다.
잡아함삼십장경(雜阿含三十章經) 1권『법경록』에는 “『잡아함경』에서 나온 이본(異本)이다”라고 하였다.
오십오법계경(五十五法誡經) 1권혹은 『오십오법행경(五十五法行經)』이라고도 한다.
일체의요(一切義要) 1권
설선악도경(說善惡道經) 1권
애욕성경(愛欲聲經) 1권어떤 본에서는 “『애욕일성경(愛欲一聲經)』이다”라고 하였다.
마하차갈선경(摩訶遮曷旋經) 1권
천왕하작저경(天王下作猪經) 1권
시조욕불시경(始造浴佛時經) 1권
십이현자경(十二賢者經) 1권
불병부제조달경(佛倂父弟調達經) 1권『오십오법계경』 이하의 경에 대하여 안공(安公)은 “위의 10경은 『아비담(阿毘曇)』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다만 9경만 있는 것은 1본이 중역경重譯 속에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마왕입목련복경』이 그 경이다.
우타라가섭경(憂墮羅迦葉經) 1권
사부본문경(四部本文經) 1권안공(安公)은 “위의 2경은 『장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는데, 다른 책一本에서는 “『아비담(阿毘曇)』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양덕경(讓德經) 1권
유현자법경(有賢者法經) 1권
마하궐미난문경(摩訶厥彌難問經) 1권혹은 『대궐미경(大厥彌經)』이라고도 한다.
대본장경(大本藏經) 1권
설아난지계경(說阿難持戒經) 1권
아난문하인연지계견세간빈역현도빈경(阿難問何因緣持誡見世間貧亦現道貧經) 1권
급고독사성가문응수시경(給孤獨四姓家問應受施經) 1권
효소쟁불해경자경(曉所諍不解經者經) 1권지금 위에 있는 경(經)자는 착오가 아닌가 한다.
기이도가난문주처경(奇異道家難問住處經) 1권
기이도가난문법본경(奇異道家難問法本經) 1권
현자수력경(賢者手力經) 1권
팔법행경(八法行經) 1권
우다라경(憂多羅經) 1권혹은 하(夏)자로 쓰기도 한다.
전단조불경(栴檀調佛經) 1권
악인경(惡人經) 1권
난제화난경(難提和難經) 1권혹은 『난제화라경(難提和羅經)』이라고도 한다.
사성장자난경(四姓長者難經) 1권『구록』에서는 “『사성장자경(四姓長者經)』이다”라고 하였다.
절불경(折佛經) 1권
도지경중요어장(道地經中要語章) 1권혹은 『소도지경(小道地經)』이라고도 한다. 지요(支曜)가 역출한 것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수련의장(數練意章) 1권『구록』에서는 “『수련경(數練經)』이다”라고 하였다. 안공(安公)은 “이상의 2경은 『생경(生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며, 승우(僧祐)는 살펴보고 “지금의 『생경』에는 이 『수련의장(數練意章)』의 이름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82부 82권처음의 『발피보살경』 등의 3경은 현재 존재하나, 나머지는 모두 궐본이다.은 모두 『승우록(僧祐錄)』 속에 안공(安公)의 고전경(古典經)을 모은 것이다. 고전(古典)은 이미 먼 시대(遠代)의 것이라고 밝혔으므로, 지금은 한말(漢末)에 근원을 잃었다[失源]고 여기어 편집한 것이다. 안공이 본래 기록한 고전에는 총 92경이 있으나, 이제 그 밖의 10경은 여러 목록을 검사하고 찾아서, 혹은 번역한 이[譯主]를 표시하기도 하였고, 혹은 따로 파생[別生]하기도 하였으므로, 그 안에서 이미 기재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삭제하고 82권으로 한 것이다.
앞의 구실역경(舊失譯經) 59부 76권을 합치면, 총 141부 158권인데, 이것은 모두 한대의 근원을 잃은 것이다.

2) 위조(魏曹) 시대
위(魏)나라 조씨(曹氏)는 낙양(洛陽)에다 도읍을 정하였다. 문제(文帝) 황초(黃初) 원년 경자(庚子, 220)로부터 원제(元帝) 함희(咸凞) 2년 을유(乙酉, 265)에 이르기까지 무릇 5제(帝) 46년 동안에 사문 5인이 역출한 경(經)ㆍ계(戒)ㆍ갈마(羯磨)46)는 총 12부 합 18권이다.그 가운데 4부 5권은 현재 경본이 남아 있고, 8부 13권은 궐본이다.

사문 담가가라(曇柯迦羅)1부 1권. 계(戒)
사문 강승개(康僧鎧)3부 4권. 경(經)ㆍ갈마(羯磨)
사문 담무제(曇無諦)1부 1권. 갈마
사문 백연(白延)5부 7권. 경
사문 안법현(安法賢)2부 5권. 경

(1) 담가가라(曇柯迦羅)
승기계본(僧祇戒本)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竺道祖)의 『위세록(魏世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다. 궐본이다.

사문 담가가라(曇柯迦羅)는 중국말로, 법시(法時)라고 하는데, 중인도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크게 부유하였고, 언제나 청정한 복[梵福]을 닦았다. 담가가라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슬기가 있었으며, 자질과 몸가짐이 남보다 뛰어났다. 글을 한번만 읽어도 글의 뜻을 모두 환히 깨달았으며, 사위타론(四韋陁論)을 잘 배워 풍운(風雲)47)ㆍ성수(星宿)48)ㆍ도참(圖讖)49)ㆍ운변(雲變)50)을 두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스스로 “천하의 문리(文理)가 다 나의 가슴과 배[心腹]에 들어 있다”라고 하였다.
25세에 이르러 어느 승방(僧坊)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법승(法勝)51)의 『아비담심론[毘曇]』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가져다 보았는데, 도무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은근히 거듭 살펴보았으나, 더욱 미혹하고 알 수 없었다[惛漠]. 이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학문을 쌓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분전(墳典)52)을 안다고 자부하였고 경적(經籍)53)을 자유자재로 이해하여, 그의 뜻을 두 번도 생각하지 않았고 문장을 거듭 살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불서(佛書)를 보니 문득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나왔으니, 반드시 이치가 깊이 담겨서 따로 중요한 요점이 있을 것이다.”
이에 책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한 비구에게 대략 해석해 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드디어 인과를 깊이 깨닫고 삼세(三世)를 매우 잘 이해하게 되었다.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이 넓고도 넓어 세속의 책들로서는 미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세상의 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정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대승ㆍ소승의 경과 여러 비니(毘尼 : 계율)를 외웠고, 항상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일을 귀하게 여겼으며,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문제(文帝) 황초(黃初) 3년 임인(壬寅, 222)에 낙양으로 왔다. 그때 위나라에는 불법이 있기는 하였으나, 도풍(道風)이 잘못 전해져 쇠퇴하였다. 여러 승려들이 있었으나, 귀의하는 계를 받지 않았고, 다만 머리만 깎고 있는 것이 세속과 다를 뿐이었다. 설령 재계와 참회를 하더라도 섬김에 있어서는 (유교의 의식인) 사사(祠祀 : 사당에서의 제사)를 본받았다.
그러다가 담가가라가 오고 난 뒤부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크게 행해졌다. 당시 여러 승려들이 담가가라에게 계율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담가가라는 율장(律藏)의 곡제(曲制)54)와 문언(文言)55)이 번잡하고 범위가 넓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번창하기 전에는 결코 그것을 받들어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재왕(齊王) 방(芳) 가평(嘉平) 2년 경오(庚午, 250)에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에서 『승기계심(僧祇戒心)』을 번역하여 아침 저녁으로 갖추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범승(梵僧)56)들을 모아 갈마(羯磨 : 계율)를 세우고 계를 받게 하였으니, 중국[東夏]의 계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담가가라가 후에 언제 어디서 입적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2) 강승개(康僧鎧)
욱가장자소문경(郁伽長者所問經) 1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세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욱가라월문보살행경(郁伽羅越問菩薩行經)』이라고도 한다. 가평(嘉平) 4년(252)에 나왔다. 축도조(竺道祖)의 『위세록(魏錄)』에 보인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는데, 곧 제19회(會)가 이것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 2권네 번째 번역되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안세고가 번역하여 낸 것과는 조금 다르다. 또 『보적경』의 「무량수회(無量壽會)」와 같은 동본이다.
사분잡갈마(四分雜羯磨) 1권표제에서는 “『담무덕률부잡갈마(曇無德律部雜羯磨)』이다”라고 하였는데, 「결계장(結界場)」을 첫머리에다 새로 붙였다.
이상은 3부 4권은 그 책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강승개는 인도 사람이다. 널리 여러 경전을 배워서, 심오한 뜻을 잘 드러내었다. 가평(嘉平) 4년(252) 임신(壬申)에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에서 『욱가장자소문경』 등 3부를 번역하였다.
『고승전(高僧傳)』에서는 “4부를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그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으며, 축도조의 『위세록』ㆍ『진세잡록』과 『승우록[僧祐]』ㆍ『보창록[寶唱]』 양대(梁代)의 목록과 장방(長房)ㆍ도선(道宣)ㆍ정매(靖邁)의 세 목록에는 “모두 2부이다”라고 하였으며, 다른 2부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교열(校閱)하기 전에 이제 다시 1부를 얻었으나, 나머지 1부는 검열하였는데도, 아직 찾지 못하였다.

(3) 담무제(曇無諦)
담무덕갈마(曇無德羯磨) 1권표제에서는 “『갈마』 1권이다”라고 하였다. 『담무덕률(曇無德律)』에서 나왔다. 결대계(結大界)를 첫머리에 두었다. 축도조의 『위세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그 책이 현재 존재한다.

사문 담무제는 또한 담제(曇諦)라고도 하며, 중국말로는 법실(法實)이라 한다. 안식국(安息國) 사람이다. 율장(律藏)57)을 잘 배워서 깊은 이치까지 잘 통달하였다. 고귀향공(高貴鄕公)58)의 정원(正元) 원년 갑술(甲戌, 254)에 낙양에 이르렀으며, 백마사(白馬寺)에서 『담무덕갈마』 1부를 번역하였다.

(4) 백연(白延)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2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나라 때 지참(支讖) 등이 번역한 경과 『보적경(寶積經)』의 「무량수회(無量壽會)」와 같은 동본이지만, 문채가 다르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차수뢰경(叉須賴經) 1권어떤 본에는 차(叉)자가 없으며, 『승우록』에서는 우(又)자로 쓰여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수행경(菩薩修行經) 1권일명 『장자위시소문보살수행경(長者威施所問菩薩修行經)』이라 하며, 일명 『장자수행경(長者修行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始興錄)』ㆍ『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제재환경(除災患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제공재환경(除恐災患經)』과는 동본이다.
수능엄경(首寶嚴經) 2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나라 때 지참(支讖) 등이 번역한 것과는 동본이지만, 문채가 다르다. 축도조의 『진세잡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5부 7권인데, 그 책들은 다 궐본이다.

사문 백연은 서역 사람이다. 재주와 총명함이 세상을 덮을 만했으며, 깊은 이해력은 무리에서 뛰어났다. 고귀향공(高貴鄕公)의 감로(甘露) 3년 무인(戊寅, 258)에 낙양에 와서 교화하며 돌아다니다가, 백마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무량청정평등각경』 등 5부를 번역하였다.
『장방록』 등에는 또 『평등각경(平等覺經)』 1권이 있다. 또한 백연이 번역하여 낸 것이다. 지금은 이 경이 바로 『무량청정평등각경』인데, 다만 이름에 넓히고 줄임[廣略]이 있을 뿐이므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5) 안법현(安法賢)
나마가경(羅摩伽經) 3권『축도조록(竺道祖錄)』ㆍ『보창록(寶唱錄)』ㆍ『법상록(法上錄)』ㆍ『영유록(靈裕錄)』 등의 4목록에 보인다. 이 경은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일부분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대본(大本) 앞의 여러 품數品을 요약하여, 이 2권을 만든 것이다. 축도조의 『위세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5권인데, 그 경본은 다 궐본이다.

사문 안법현은 서역 사람이다. 재주가 매우 뛰어났으며, 지혜와 이해력은 더욱 특출하였다. 석장[錫]을 짚고 여러 나라를 유행하다가 먼 곳으로부터 중국에 이르러, 『나마가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에서 다 같이 위나라 때[魏世]라 하였으나, 어느 임금의 해인가를 가릴 수 없으므로, 이제 마지막에다 엮어 둔다. 또 『별록(別錄)』에서도 역시 모든 실역경(失譯經)에 편입시켜, 모두 『오록(吳錄)』 뒤에 나열되어 있다.開元釋教錄卷第一庚午歲西崇福寺沙門智昇撰夫目錄之興也蓋所以別眞僞明是非記人代之古今摽卷部之多少摭拾遺漏刪夷騈贅欲使正教綸理金言有緖提綱擧要歷然可觀也但以法門幽邃化網恢弘前後翻傳年移代謝屢經散滅卷軸參差復有異人時增僞妄致令混雜難究蹤由是以先德儒賢製斯條錄今其存者殆六七家然猶未極根源尚多疏闕昇以庸淺久事披尋參練異同指陳臧否成茲部帙庶免乖違幸諸哲人俯共詳覽稽首善逝牟尼尊 無上丈夫調御士亦禮三乘淨妙法 幷及八輩應眞僧我撰經錄護法城 三寶垂慈幸冥祐惟願法燈長夜照 迷徒因此得慧明正法遐久住世閒 依學速登無上地自後漢孝明皇帝永平十年歲次丁卯至大唐神武皇帝開元十八年庚午之歲凡六百六十四載中閒傳譯緇素摠一百七十六人所出大小二乘三藏聖教及聖賢集傳幷及失譯#摠二千二百七十八部都合七千四十六卷其見行闕本竝該前數新錄合二十卷開爲摠別摠錄括聚群經別錄分其乘藏二錄各成十卷就別更有七門今先敍科條餘次編載摠括群經錄上右從漢至唐所有翻述具帝王年代幷譯人本事所出教等以人代先後爲倫不依三藏之次兼敍目錄新舊同異別分乘藏錄下右別錄之中曲分爲七一有譯有本二有譯無本三支派別行四刪略繁重五拾遺補闕六疑惑再詳七僞邪亂正就七#門中二乘區別三藏殊科具悉委由兼明部偶摠錄分爲十卷起第一盡第十 此粗顯綱條若一一具明在第十卷內第一卷 漢魏二代緇素譯人所出經戒羯磨等及新舊失譯幷附出譯人列傳第二卷 吳晉二代緇素譯人所出經戒等幷新舊失譯諸經同前附出譯人列傳第三卷 東晉苻秦二代緇素譯人所出經律論等幷新舊失譯列傳同前第四卷 姚秦西秦前涼北涼四代緇素譯人所出經律論幷新舊集失譯經等第五卷 宋朝一代緇素譯人所出經律論等幷新集失譯經等第六卷 齊梁元魏高齊四代緇素譯人所出經律論等幷新集失譯經律集等第七卷 周陳隋三代緇素譯人所出經律論及傳錄等第八卷第九卷八九二卷 皇朝緇素譯人所出經律論及傳錄等第十卷 敍古舊諸家目錄部帙多少及詳顯同異別錄分爲十卷起第十一盡第二十此祖顯綱條具述在第十卷內第十一卷第十二卷 十一十二兩卷有譯有本菩薩藏經律論目錄兼述譯人時代第十三卷 有譯有本聲聞藏經律論及賢聖集傳目錄亦述譯人時代第十四卷 有譯無本大乘經律論闕本目錄第十五卷 有譯無本小乘經律論及賢聖集傳闕本目錄第十六卷 支派別行大小乘經律論及賢聖集傳別生目錄第十七卷 刪略繁重別生同本異名經等刪除目錄補闕拾遺舊譯大小乘經律論大周入藏錄中遺漏不上目錄及新譯大小乘經律論集傳等新編入藏目錄第十八卷 疑惑再詳目錄 僞妄亂眞新編僞經及群錄中僞經幷諸家集鈔等目錄第十九卷 大乘經律論入藏目錄第二十卷 小乘經律論賢聖集傳入藏目錄摠括群經錄上之一後漢劉氏都洛陽從明帝永平十年丁卯至獻帝延康元年庚子凡一十一帝一百五十四年緇素一十二人所出經律幷新舊集失譯諸經摠二百九十二部三百九十五卷於中九十七部一百三十一卷見在一百九十五部二百六十四卷闕本以爲後漢經錄云於中直云帝者爲眞兼斥名者是僞年代甲子依唐司隸甄鸞成均博士王道珪二家年歷參定後漢沙門迦葉摩騰 一部 一卷經沙門竺法蘭 四部 一十五卷經沙門支婁迦讖 二十二部 六十七卷經集沙門安世高 九十五部 一百一十五卷經律集沙門竺佛朔 二部 三卷經優婆塞安玄 二部 三卷經集沙門支曜 一十部 一十一卷經集沙門康巨 一部 一卷經沙門嚴佛調 五部 八卷經沙門康孟詳 六部 九卷經律沙門竺大力 一部二卷經沙門曇果 一部 二卷經新舊諸失譯經 一百四十一部一百五十一八卷五十九部七十六卷舊集八十二部 八十二卷新附四十二章經一卷 永平十年丁卯於白馬寺與法蘭共譯初出舊錄云孝明皇帝四十二章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迦葉摩騰或云竺葉摩騰亦云攝摩騰群錄互存未詳孰是先來不譯所以備彰中印度人婆羅門種幼而聰敏博學多聞思力精拔特明經嘗遊西印度有一小國請騰講金光明經俄而鄰國興師而來旣將踐境輒有事㝵兵不能進彼國兵衆疑有異術密遣使覘但見群臣安然共聽其所講大乘經明地神王護國之法於是彼國請和求法明帝以永平七年甲子夢見金人身長丈六項佩日輪光明赫弈飛在殿前明日博問群臣此何神異通人傅毅進奉對曰臣聞西域有得道者號之曰佛陛下所夢將必是乎帝以爲然詔遣郞中蔡愔郞將秦景博士弟子王遵等一十八人往適天竺尋訪佛法於大月支國與摩騰相遇蔡愔等固請於騰遂與同來至于洛邑明帝甚加賞接所將佛經及獲畫像馱以白馬同到洛陽因起伽藍名白馬寺諸州競立報白馬恩騰於白馬寺出四十二章經初緘蘭臺石室第十四閒內自爾釋教相繼雲興沙門信士接踵傳譯依錄而編卽是漢地經法之祖也舊錄云此經本是外國經抄元出大部撮要引俗似孝經十八章出舊錄及朱士行漢錄僧祐出三藏記等道安錄中不載騰以大化初傳人未深信蘊其妙解不卽多翻且撮經要以導時俗騰後終於洛陽載其由委備如朱士行漢錄及高僧傳等昇尋錄之原始意述譯經譯經之來須有由致故傍採衆說以廣異聞雖於文爲繁而僧事備矣十地斷結經八卷 或四卷亦云十住初出與竺佛念十住斷結經同本永平十三年出見朱 士行漢錄及高僧傳長房錄等法海藏經一卷 一本無藏字初出與法海經等同本見高僧傳及長房錄等佛本行經五卷 永平十一年出見高僧傳及長房錄等佛本生經一卷 見高僧傳及長房錄等右四部一十五卷其本竝闕沙門竺法蘭亦中 印度人自言誦經論數萬章爲天竺學者之師時蔡愔旣至彼國蘭與摩騰共契遊化遂相隨而來會彼學徒留㝵蘭乃閒行而至旣達洛陽與騰同止少時便善漢言初共騰譯四十二章經騰卒蘭自譯十地斷結經等四部前漢武帝穿昆明池底得黑灰問東方朔朔云非臣所知可問西域胡人法蘭旣至追以問之蘭云此是劫燒時灰朔言有徵信者甚衆又秦景使還於月支國得釋迦佛像是優塡王栴#壇像師第四作也來至洛陽帝卽勅令圖寫置淸涼臺及顯節陵上供養#自爾丹素流演迄今蘭後終於洛陽時年六十餘矣 又長房等錄云蘭譯二百六十戒合異二卷者不然細詳名目非蘭所翻委求同異如下別錄闕本中述道行般若波羅蜜經十卷 題云摩訶般若波羅蜜道行經亦云般若道行品經或八卷初出與明度小品及大般若第四會等同本光和二年七月八日出見敏祐二錄無量淸淨平等覺經二卷 亦直云無量淸淨經第二出與大阿彌陁及寶積無量壽會等竝同本見吳錄阿閦佛國經二卷 建和元年譯或一卷初出與寶積不動如來會等同本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亦云阿閦佛剎諸菩薩學成品經或無國字佛遺日摩尼寶經一卷 安公云出方等部初出與寶積普明菩薩會等同本一名古品遺日說般若經一名大寶積經一名摩訶衍寶嚴經見僧祐長房二錄般舟三昧經三卷 一名十方現在佛悉在前立定經舊錄云大般舟三昧經或二卷光和二年譯初出與大集賢護經等同本見聶道眞錄及吳錄兜沙經一卷 見僧祐錄及吳錄是華嚴經名號品異譯伅眞陁羅所問經二卷 初云伅眞陁羅所問寶如來三昧經舊錄云伅眞陁羅尼王經或三卷初出與大樹緊那羅經同本安錄無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 阿闍世王經二卷 初出與普超三昧經等同本見僧祐錄安公云出長阿含者非也內藏百寶經一卷 亦云內藏百品初出與世高譯者小異安公云出方等部見僧祐錄文殊師利問菩薩署經一卷 亦直云問署經見僧祐錄及吳錄安公云出方等部雜譬喩經一卷 凡十一事祐云失譯房云見別錄已上見在已下闕大方等大集經二十七卷 初出與曇無讖等出者同本見李廓錄般舟三昧經一卷 是後十品重翻祐有此一卷無三卷者見靜泰錄或加大字第三出祐錄云光和二年十月八日出梵般泥洹經二卷 或一卷初出與大般涅槃經等同本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舊云胡般新改爲梵象腋經一卷 初出見法上錄諸法勇王經一卷 初出見法上錄光明三昧經一卷 初出祐云出別錄安錄無房云亦見吳錄孛本經二卷 初出見僧祐錄首楞嚴經二卷 中平三年二月八日出第一譯又云三卷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吳錄大方便報恩經一卷 見吳錄阿闍世王問五逆經一卷 亦云阿闍世王經初出見長房錄禪經一卷 初出房云見別錄阿育王太子壞目因緣經一卷 佛涅槃後一百餘年育王方出故非佛說或無經字初出見長房錄右二十三部六十七卷 雜譬喩上一十一部二十六卷見在大集經下一十二部四十一卷闕本沙門支婁迦讖亦直云支讖#月支國人操行純深性度開敏稟持法戒以精勤著名諷誦群經志在宣法桓靈之代遊于洛陽從桓帝建和元年丁亥至靈帝中平三年景寅於洛陽譯道行等經二十三部審得本旨曾不加飾可謂善宣法要弘道之士也河南淸信士孟福張蓮筆受而舊譯云胡般泥洹者竊所未委上代翻經已來賢德筆受每至度語無不稱云譯胡爲漢胡乃五天邊俗類此之有氏羌今乃稱胡豈關印度深爲楚越可不詳焉但佛所說經皆合稱爲梵本梵者此言淸淨昔劫初時梵世光音天來下彼土有食地肥者身重不得復去因遂爲人卽五天之本祖也仍其天號而立稱焉若彼稱胡理將何出但彼稱梵語如此土所謂漢言蓋有所憑非爲謬耳如舊日僧悉稱俗姓起符秦世有沙門道安#獨拔當時居然超悟云旣剃落紹繼釋迦子而異父豈曰承襲今去出家宜悉稱釋及翻四含其文果云四姓出家同一釋種衆咸歎伏四姓者一剎帝利二婆羅門三吠舍四戍達羅而安正當晉秦之世#刊定目錄刪注群經自號彌天揩摸季葉猶言譯胡爲秦有五失三不易此蓋通人一蔽未盡美歟上代已來有胡言處今竝改爲梵字庶無紕謬使談者得其正焉又長房等錄支讖譯中復有大寶積經一卷今以與佛遺日摩尼寶經旣是同本不合再出又尋文句非讖所翻別錄之中皆爲失譯今依別錄爲正故讖錄除之大乘方等要慧經一卷 初出與寶積彌勒問八法會同本見長房錄太子慕魄經一卷 初出出六度集中異譯見長房錄長者子制經一卷 一名制經初出與逝童子經等同本見長房錄寶積三昧文殊問法身經一卷 一名遺日寶積三昧文殊師利菩薩問法身經初出與入法界體性經同本見長房錄自誓三昧經一卷 題下注云獨證品第四出比丘淨行中初出與法護出者大同小異見長房錄溫室洗浴衆僧經一卷 亦直云溫室經初出見長房錄明度五十挍計經二卷 或直云明度挍計亦直云五十挍計元嘉元年出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佛印三昧經 一卷見長房錄八大人覺經一卷 見寶唱錄舍利弗悔過經一卷 亦直云悔過經初出見長房錄人本欲生經一卷 永嘉二年出長阿含第十卷異譯道安注解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尸迦羅越六向拜經一卷 或云尸迦羅越六方禮經出長阿含第十一卷異譯見長房錄長阿含十報法經二卷 一名多增道章經或直云十報經出長阿含第九卷異譯舊錄亦云出長阿含見僧祐錄一切流攝守因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卷異譯舊錄云一切流攝經吳錄云流攝守因經亦云受因亦直云流攝亦云一切流攝守見朱士行及僧祐二錄四諦經一卷 出中阿含第七卷異譯見僧祐錄安公云出長阿含者或誤也本相倚致經一卷 出中阿含第十卷異譯吳錄云本相倚致與緣本致經同本或作猗字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是法非法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一卷異譯見士行僧祐二錄漏分布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七卷異譯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安公云出長阿含者或誤也婆羅門子命終愛念不離經一卷 出中阿含第六十卷異譯見長房錄十支居士八城人經一卷 出中阿含第六十卷異譯見長房錄普法義經一卷 亦名普義經一名具法行經普法義作舍利曰具法行舍利弗餘竝同云出中阿含元嘉二年出與廣義法門經同本見士行僧祐二錄婆羅門避死經一卷 出增一阿含第二十三卷異譯見長房錄阿那邠邸化七子經一卷 出增一阿含第四十九卷異譯見長房錄阿難同學經一卷 題云出增一阿含撿無見長房錄七處三觀經一卷 出雜阿含中首末摠三十經從初摽名故也或二卷元嘉元年出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五陰譬喩經一卷 或無譬字一名水沫所漂經出雜阿含第十卷異譯見朱士行漢錄及僧祐錄轉法輪經一卷 或云法輪轉經出雜阿含第十五卷異譯與其本經後同前異見僧祐錄八正道經一卷 出雜阿含第二十八卷異譯見士行僧祐二錄摩鄧女經一卷 或云摩鄒女一名阿難爲蠱道女惑經見長房錄初出與摩登伽經等同本鬼問目連經一卷 初出與餓鬼報應經等同本見長房錄阿難問事佛吉凶經一卷 或名阿難問事經亦云事佛吉凶經見長房錄初出與阿難分別經等同本柰女祇域因緣經一卷 初出或無因緣字亦直云柰女經見長房錄罪業應報教化地獄經一卷 初出或云地獄報應經見長房錄堅意經一卷 初出一名堅心正意經亦名堅心經見長房錄大安般守意經二卷 或一卷或無守意字或直云安般安公云小安般兼注解祐錄別載大安般一卷房錄更載安般一卷竝重也見士行僧祐李廓三錄陰持入經二卷 或一卷祐云除持入誤也亦云陰持入安公注解房錄陰持入外別存除持入者誤也見士行僧祐二錄處處經一卷 見長房錄罵意經一卷 見長房錄分別善惡所起經一卷 見長房錄出家緣經一卷 一名出家因緣經見長房錄阿鋡正行經一卷 一名正意經見長房錄十八泥犂經一卷 或云十八地獄經見長房錄法受塵經一卷 見僧祐錄禪行法想經一卷 見僧祐寶唱二錄長者子懊惱三處經一卷 一名長者夭惱三處經亦直云三處惱經見長房錄揵陁國王經一卷 或無國字見長房錄父母恩難報經一卷 亦云勤報見長房錄房云出中阿含撿無九撗經一卷 房云出雜阿含檢無見長房錄禪行三十七經一卷 或加品字見寶唱錄犯戒報應輕重經一卷 出目連問毘尼經亦云犯戒罪報輕重或云目連問經見長房錄大比丘三千威儀經二卷 或四卷亦云大僧威儀經房云見別錄按僧祐失譯錄中分爲二部部各二卷別錄中合今只有二卷餘三莫存道地經一卷 初出或加大字是修行經抄元外國略本道安注解見僧祐錄群錄竝云二卷准安公序云凡有七章此之一卷文亦備矣迦葉結經一卷 初出見長房錄阿毘曇五法行經一卷 或無行字亦云阿毘曇苦慧經 見僧祐錄已上見存已下闕本無量壽經二卷 初出與寶積無量壽會等同本房云見別錄如幻三昧經二卷 或一卷初出與寶積善住意會等同本見長房錄月燈三昧經一卷 出大月燈經第七異譯見長房錄十二因緣經一卷 初出亦云聞城十二因緣經見僧祐錄內藏經一卷 第二出一名內藏百品或云百寶元嘉二年十二月出見朱士行漢錄四不可得經一卷 初出或無可字見長房錄藥王藥上菩薩觀經一卷 初出見長房錄空淨天感應三昧經一卷 舊錄云空淨三昧經初出見長房錄卒逢賊結衣帶呪經一卷 見長房錄呪賊經一卷 一名辟除賊害呪見長房錄僧祐失譯錄中雙載二本同名呪賊此但存一十四意經一卷 舊錄云菩薩十四意經 見僧祐錄法律三昧經一卷 初出見法上錄道意發行經二卷 或一卷見道安及僧祐錄房云出長阿含大十二門經二卷 或一卷出長阿含安公注解見寶唱及僧祐錄小十二門經一卷 出長阿含安公注解見寶唱錄及僧祐錄七法經一卷 舊錄云阿毘曇七法行經或直云七法行經見僧祐錄房云出長阿含多增道章經一卷 舊錄無道字云異出十報法見長房錄云出長阿含義決律經一卷 或無經字亦云義決律法行經安公云出長阿含見僧祐錄雜四十四篇經二卷 或云雜經四十四篇旣不顯名未知何經安公云出增一阿含見僧祐錄百六十品經一卷 舊錄云增一阿含百六十章經見僧祐錄舍頭諫經一卷 見舊錄第二出亦云舍頭諫太子明二十八宿經亦云太子明星二十八宿經亦云虎耳經瑠璃王經一卷 或云流離房云出增一撿無見長房錄五門禪要用法經一卷 初出見長房錄太子夢經一卷 初出見長房錄禪經二卷 第二出房云見別錄恒水經一卷 初出亦云恒水不說戒經見法上錄寶唱錄云恒水誡經悔過法經一卷 見長房錄五法經一卷 見僧祐錄五行經一卷 見長房錄小般泥洹經一卷 房云見別錄祐錄云或名泥洹後諸比丘經或云泥洹後變記經或云泥洹後比丘世變經或云佛般泥洹後比丘世變經正齋經一卷 見長房錄分明罪福經一卷 見長房錄難提迦羅越經一卷 見僧祐錄禪定方便次第法經一卷 見長房錄禪法經一卷 見長房錄當來變滅經一卷 見長房錄修行道地經七卷 或六卷初出或云順道行經漢永康元年譯支敏度製序見寶唱錄及別錄五門禪要用法經一卷 初出見長房錄思惟要略經一卷 或直云思惟經初出見僧祐錄法句經四卷 初出見長房錄請賓頭盧法一卷 初出見內典錄阿毘曇九十八結經一卷 見僧祐錄右九十五部一百一十五卷 方等要慧下五十四部五十九卷見存無量壽經下四十一部五十六卷闕本沙門安淸字世高安息國王正后之太子也幼懷淳孝敬養竭誠惻隱之仁爰及蠢類其動言立行若踐規矩焉加以志業聰敏剋意好學外國典藉莫不該貫七曜五行之象風角雲物之占推步盈縮悉窮其變兼洞曉醫術妙善鍼脈睹色知病投藥必濟乃至鳥獸鳴呼聞聲知心嘗行見群燕忽謂伴曰燕云應有送食者頃之果有致焉衆咸奇之於是儁異之名被於西域遠近鄰國咸敬而偉之高雖在居家而奉戒精峻講集法施與時相續後#王薨將嗣國位乃深惟苦空厭離名器行服旣畢遂讓國與叔出家修道博綜經藏尤精阿毘曇學諷持禪經略盡其妙旣而遊方弘化遍歷諸國以漢桓之初始到東夏高才悟機敏一聞能達至止未久大通華言慨正法微廣事宣譯高窮理盡性自識宿緣多有神迹世莫能量初高自稱先身已經爲安息王子與其國中長者子俱共出家分衛之時値施主不稱每輒懟恨高屢加訶諫終不悛改如此二十餘年乃與同學辭訣云我當往廣州畢宿世之對卿明經精勤不在吾後而性多恚怒命過當受惡形我若得道必當相度旣而遂適廣州値寇賊大亂行路逢一年少唾手拔刀曰眞得汝矣高笑曰我宿命負卿故遠相償卿之忿怒故是前世時意也遂申頸受刃容無懼色賊遂殺之觀者塡路莫不駭其奇異而此神識還爲安息王太子卽今時世高身是高遊化中國宣經事畢値靈帝之末關洛擾亂乃振錫江南云我當過廬山度昔同學行達䢼亭湖廟此廟舊有靈威商旅祈禱乃分風上下各無留滯嘗有乞神竹者未許輒取舫卽覆沒竹還本處自是舟人敬憚莫不懾影高同旅三十餘舩奉牲請福神乃降祝曰舩有沙門可更呼上客咸驚愕請高入廟神告高曰吾昔外國與子俱出家學道好行布施而性多瞋怒今爲䢼亭廟神周迴千里竝吾所治以布施故珍玩甚豐以瞋恚故墮此神報今見同學悲欣可言壽盡旦夕而醜形長大若於此捨命穢污江湖當度山西澤中此身滅後恐墮地獄吾有絹千疋#幷雜寶物可爲立法營塔使生善處也高曰故來相度何不出形神曰形甚醜異衆人必懼高曰但出衆不怪也神從牀後出頭乃是大蟒不知尾之長短至高膝邊高向之梵語數番讚唄數契蟒悲淚如雨須臾還隱高卽取絹物辭別而去舟侶颺帆蟒復出身登山而望衆人擧手然後乃滅儵忽之頃便達預章卽以廟物造東寺高去後神卽命過暮有一少年上舩長跪高前受其呪願忽然不見高謂舩人曰向之少年卽䢼亭廟神得離惡形矣於是廟神歇滅無復靈驗#後人於山西澤中見一死蟒頭尾數里今潯陽郡蛇村是也高後復到廣州尋其前世害己少年尚在高徑投其家說昔日償對之事幷敍宿緣歡喜相向云吾猶有餘報今當往會稽畢對廣州客悟高非凡豁然意解追恨前愆厚相資供隨高東遊遂達會稽至便入市正値市中有亂相打者誤著高頭#應時殞命廣州客頻驗二報遂精勤佛法具說事緣遠近聞知莫不悲歎明三世之有徵也高以桓帝建和二年戊子至靈帝建寧三年庚戌二十餘載譯大乘要慧等經九十五部竝義理明析文字允正辯而不華質而不野凡在讀者皆亹亹然而不倦焉世高本旣王種名高外國所以西方賓旅猶呼安侯至今爲號焉天竺自稱書爲天書語爲天語音訓詭蹇與漢殊異先後傳譯多致謬濫唯高所出爲群譯之首安公以爲若及面稟不異見聖列代明德咸贊而思焉其釋道安錄僧祐出三藏記慧皎高僧傳等止云高譯三十九部費長房錄便載一百七十六部今以房錄所載多是別生從大部出未可以爲翻譯正數今隨次刪之如後所述情離有罪經房云世注僞疑今亦在疑僞錄八光經舍利弗問寶女經舍利弗歎寶女說不思議經亦直云歎寶女經申越長者悔過供佛經亦云申起長者悔過經申越申起末詳何正八光等四經竝出大集四百三昧名經出大雲經摩訶衍精進度中罪報品經出智度論大迦葉遇尼乾子經出長阿含阿難惑經出人本欲生經第一四門經第二四門經第三四門經甘露正意經 亦云佛入甘露調意經第一四門等四經出僧祐失譯錄亦出寶唱錄竝是大十二門經一部後人分品寫出遂成四經尊者薄拘羅經或直云薄拘羅經亦云薄拘羅答異學問經  婆羅門行經長者兄弟詣佛經 亦云長者梨師達多兄弟二人往佛所經薄拘羅等三經出中阿含五戰鬪人經世閒强盜布施經梵天詣婆羅門講堂經郁伽居士見佛聞法醒悟經亦云修伽陁居士佛爲說法得性悟經水喩經五戰鬪等五經竝出增一阿含佛爲婆羅門說四法經佛爲事火婆羅門說悟道經佛爲婆羅門說耕田經或無田字佛爲憍慢婆羅門說偈經佛爲頻頭婆羅門說像類經佛爲阿支羅迦葉說自他作苦經目連見衆生身毛如箭經阿那律思惟目連神力經無畏離車白阿難經商人脫賊難經世閒言美色經純陁沙彌經或作沙門或爲淳字商人子作佛事經婆羅門通達經論外道出家經婆羅門服白經精勤四念處經婆羅門虛僞經佛爲調馬聚落主說法經一切行不恒安住經婆羅門問世尊將來有幾佛經婆羅門問佛布施得福經豆遮婆羅門論議出家經佛化火與或作大與婆羅門出家經浮水譬喩經一名恒水流澍經或作流澍四咤婆羅門出家得道經過去彈琴人經婆羅門解知衆術經獨富長者經 亦云獨付長者財物無付經亦云長者命終無子付囑經佛爲年少婆羅門說知善不善經佛爲那拘羅長者說根熟經或無羅根熟三字禪思滿足經說四法等三十二經竝出雜阿含禪秘要經出治禪病秘要法前世諍女經子命過經迦旃延無常經審裸形子經一名佛覆裸形子經鼈喩經前世諍等五經竝出生經鏡面王經出義足經三毒經數息事經上二小乘雜抄七老婆羅門請爲弟子經孤母喪一子經斫毒樹復生經求離牢獄經良時難遇經昔有二人相愛敬經慈仁不殺經摩耶祇女人謗佛生身入地獄經最勝長者受呪願經亦直云受呪願經佛神力救長者子經佛度旃陁羅兒出家經承事勝己經調達生身入地獄經多倒見衆生經長者夜輸得非常觀經亦直云得非常觀經七老婆羅門等一十五經竝出出曜經人受身入陰經人身四百四病經五陰成敗經地獄罪人衆苦經人病醫不能治經人受身等五經竝出修行道地經阿練若習禪法經出坐禪三昧經蓮華女經出法句譬喩經迦葉詰阿難經亦名迦葉責阿難雙度羅漢喩經金色女經迦葉詰阿難等二經出雜譬喩右八光經等八十五部八十五卷長房等錄皆云安高所出今按隋開皇仁壽二本衆經錄及新括出別生抄經等此等竝從諸經別生或非安高所出不合足爲翻譯之數今爲實錄故摠刪之道行經一卷 光和二年十月八日出見經後記朱士行漢錄僧祐錄等安公云道行品者般若抄也外國高明者所撰安爲之序幷注般舟三昧經二卷 光和二年十月八日出見經後記高僧傳等二經同時啓夾故出日同也舊錄云大般舟三昧經或一卷第二出與大集賢護經等同本右二部三卷其本竝闕沙門竺佛朔經後記云竺佛朔印度人也識性明敏博綜多能以靈帝光和之初齎道行等經來適洛陽轉梵爲漢譯人時滯雖有失旨然棄文存質深得經意月支沙門支讖傳語河南孟福字元士張蓮字少安筆受竝見經後記法鏡經二卷 安公云出方等部初出與寶積郁伽長者會等同本或一卷沙門嚴佛調筆受康僧會注見僧祐錄阿含口解十二因緣經一卷 亦云斷十二因緣經亦直云阿含口解舊錄云安侯口解凡有四名同是一本內典中安高安玄俱出口解者誤也右二部三卷其本竝在優婆塞安玄安息國人也志性貞白深閑理致秉持法戒毫氂弗虧博誦群經多所通習漢靈帝時遊賈雒陽有功號騎都尉性虛靜溫恭常以法事爲己務漸練漢言志宣經典常與沙門講論道義世所謂都尉者也玄以光和四年辛酉與沙門嚴佛調共出法鏡等經玄口譯梵文佛調筆受理得音正盡經微旨郢匠之美見述後代祐云法鏡佛調出者據其共譯以說又稱阿含口解世高譯者此乃姓同相濫也 舊錄旣名安侯口解計亦合是世高出也成具光明定意經一卷 或云成具光明三昧經或直云成具光明經第二出見朱士行支敏度僧祐等三錄及高僧傳阿那律八念經一卷 或直云八念經一名禪行斂意經舊錄云禪行撿意出中阿含經第十八卷異譯見舊錄馬有三相經一卷 亦云善馬有三相經出雜阿含經第三十三卷異譯房云見吳錄馬有八態譬人經一卷 亦直云馬有八態經一名馬有八弊惡態經出雜阿含經第三十三卷異譯房云見吳錄小道地經一卷 房云見吳錄 已前見存已後闕聞城十二因緣經一卷 第二出與世高譯十二因緣經等同本房云見吳錄大摩耶經一卷 或無大字或二卷初出與摩訶摩耶經同本 房云見吳錄賴咤和羅經一卷 出中阿含經第三十一卷異譯房云見吳錄安云出方等部者或恐誤也小本起經二卷 或云修行本起或云宿行本起近加小字耳初出與瑞應本起經等同本見舊錄及高僧傳墮落優婆塞經一卷 或云優披塞房云見吳錄右一十部一十一卷 小道地上五部五卷見在聞城下五部六卷闕本沙門支曜西域人博達群典妙解幽微以靈帝中平二年乙丑於洛陽譯成具光明等經十部長房等錄又有首至問佛十四事經或無佛字余親見其本乃是經抄已編別生錄內此刪不載問地獄事經一卷 見朱士行漢錄及高僧傳右一部一卷本闕沙門康臣或作巨字未詳孰是西域人心存遊化志在弘宣以靈帝中平四年丁卯於洛陽譯問地獄經言直理詣不加潤飾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二卷 一名決了諸法如幻化三昧經初出與大般若那伽室利分等同本或一卷見長房錄慧上菩薩問大善權經二卷 初出與寶積大乘方便會等同本或無菩薩字或一卷見長房錄古維摩詰經二卷 初出見古錄及朱士行漢錄與唐譯無垢稱經等同本思意經一卷 亦云益意經初出見長房錄菩薩內習六波羅蜜經一卷 安公云出方等部或云內六波羅蜜經亦云內外者見長房錄右五部八卷 前四部七卷本闕後一部一卷見在沙門嚴佛調 亦云浮調據僧祐錄及高僧傳合是沙門長房等錄云淸信士者非也臨淮郡人綺年穎悟敏而好學信慧自然遂出家修道通譯經典見重於時調以靈帝中平五年戊辰於洛陽譯濡首菩薩等經五部世稱安侯都尉佛調三人傳譯號爲難繼安公稱佛調出經省而不繁全本巧妙焉 又長房等錄更有迦葉詰阿難經亦云佛調所譯余親見其本乃是諸經之抄有數條事隨衆經錄云出雜譬喩安世高聶承遠錄內竝有此經錄家誤也旣是別生抄經不合爲翻譯正數又有沙#彌十慧經云佛調自撰幷注序旣非聖言又闕其本今竝刪之舍利弗摩目揵連遊四衢經一卷 出增一阿含第四十一卷異譯見別錄興起行經二卷 亦名嚴誡宿緣經見吳錄見題云出雜藏梵網經二卷 初出見吳錄或三卷四諦經一卷 興平元年出第二譯出中阿含第七卷異譯與世高出者小異見竺道祖漢錄中太子本起瑞應經二卷 亦云瑞應本起第二出與過現因果經等同本房云見三藏記然祐三藏記中孟詳出中本起非瑞應本起也報福經一卷 或云福報見吳錄右六部九卷 興起行經上二部三卷見在梵網經下四部六卷闕本沙門康孟詳其先康居國人有慧學之譽以獻帝興平元年甲戌至建安四年己卯於洛陽譯遊四衢等經六部安公云孟詳所翻弈弈流便足騰玄趣也修行本起經二卷 見始興錄第三出與瑞應本起經等同本一名宿行本起右一部二卷其本見在沙門竺大力西域人情好遠遊無憚艱險以獻帝建安二年丁丑三月於洛陽譯修行本起經其經梵本亦是曇果與康孟詳於迦維羅衛國齎來康孟詳度語中本起經二卷 或云太子中本起經見始興錄經初題云出長阿含右一部二卷其本見在沙門曇果西域人學該內外解通眞俗於迦維羅衛國齎經梵本屆于洛陽以獻帝建安十二年丁亥譯中本起經康孟詳度語內典錄中以曇果與孟詳共出遂與孟詳太子本起瑞應合爲一本者非也二經全異不可合之祐云中本起康孟詳出者據其共譯故耳大方便佛報恩經七卷摩訶衍寶嚴經一卷 一名大迦葉品第二出與賓積普明菩薩會等同本中云晉言合編晉錄今且依舊祐云摩訶乘寶嚴經後出阿彌陁佛偈經一卷 或無經字第二出未曾有經一卷 初出與唐譯甚希有經等同本作佛形像經 一卷一名優塡王作佛形像經一名作像因緣經與造立形像福報經同本安宅神呪經一卷 亦云安宅呪經祐云安宅呪受十善戒經一卷苦陰經一卷 出中阿含經第二十五卷異譯魔嬈亂經一卷 一名弊魔試目連經一名魔王入目連蘭腹經出中阿含經第三十卷異譯沙彌尼戒經一卷 或無經字優波離問佛經一卷 或云優波離律分別功德論四卷 或云分別功德經或三卷或五卷禪要呵欲經一卷 題云禪要經呵欲品內身觀章句經一卷 或無句字雜譬喩經二卷 一名菩薩度人經六菩薩名經一卷 房入藏云六菩薩名亦當誦持 已上存已下闕般舟三昧念佛章經一卷 是行品別翻第四出阿彌陁佛偈一卷 初出梵本經四卷 舊云胡本新改爲梵似長安中出泥洹後千歲變經四卷 一名千歲變經祐云泥洹後千歲中變記一卷諸經佛名二卷 今疑是不思議功德經三千佛名經一卷稱揚百七十佛名經一卷 亦直名百七十佛名今疑出稱揚功德經南方佛名經一卷 舊云一名治城寺經者非也此乃題寺爲記非是經之異名滅罪得福佛名經一卷觀世音所說行法經一卷 是呪經薩陁波崙菩薩求深般若圖像經一卷受持佛名不墮惡道經一卷五龍呪毒經一卷取血氣神呪經一卷 舊錄云血呪呪賊呪法經一卷 房云異出本祐直云呪賊七佛安宅神呪經一卷菩薩受戒法經一卷 祐錄無經字房云異出本受菩薩戒次第十法一卷菩薩懺悔法一卷初發意菩薩常晝夜六時行五事經一卷頂生王因緣經一卷 舊錄云頂生王經長者賢首經一卷梵志喪女經一卷狗齧王經一卷 舊錄云狗經勤苦泥犂經一卷 地獄經一卷十一因緣章經一卷 舊錄云十一因緣經或作十二沙門爲十二頭陁經一卷僧名數事行經一卷比丘諸禁律經一卷摩訶僧祇律比丘要集一卷 一名摩訶僧祇部比丘隨用要集法沙彌十戒經一卷 舊錄云沙彌戒比丘尼十戒經一卷賢者五戒經一卷優婆塞威儀經一卷庾伽三磨斯經一卷 譯言修行略一名達磨多羅禪法或云達磨多羅菩薩撰禪經要集梵音偈本一卷 舊云胡音讚七佛偈一卷怛和尼百句一卷五言詠頌本起一卷 一百四十二首道行品諸經梵音解一卷 舊云胡音法句譬喩經一卷 祐錄云凡十七事或無喩字上五十九部竝見僧祐失譯錄右五十九部七十六卷 准房錄本數合有七十七卷其分別功德論錄云五卷今有四卷故七十六菩薩名上一十六部二十六卷見在般舟下四十三部五十卷闕本長房等錄漢後失譯摠有一百二十五部一百四十八卷今以餘六十六部七十一卷子細讎挍非是失源具述委由列之如左佛遺日摩尼寶經漢支讖譯菩薩生地經惟日雜難經已上二經吳支謙譯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或云金剛淸淨經長房等錄云吳代支謙譯漢後失譯錄中復載今詳此經非是漢代失源復非支謙所出似是姚秦以來什公等譯今且爲失源編於秦錄 舊雜譬喩經二卷吳代康僧會譯十方佛名經三十二相因緣經已上二經西晉竺法護譯菩薩修行經一名長者威施所問菩薩修行經或云長者修行經已曾三譯一存二闕備顯錄中迦葉赴佛泥洹經一名佛般泥洹時迦葉赴佛經鐵城泥犂經一名中阿含泥犂經寂志果經三十七品經抄諸經撰在別生錄七佛所結麻油述呪幻師陂陁神呪呪齲齒呪一名呪虫齒一直名呪齒呪牙痛呪呪眼痛呪迦葉赴下十經東晉竺曇無蘭譯千佛因緣經海八德經已上二經法上錄云姚秦羅什譯 菩薩所生地經摩訶剎頭經已上二經乞伏秦聖堅譯寂調意合作音字意者誤也所問經一名如來所說淸淨調伏經轉女身菩薩經一名樂瓔珞莊嚴方便經一名樂瓔珞莊嚴女經已上二經宋代法海譯沙彌威儀經或無經字宋求那跋摩譯四天王經宋智嚴譯鹽王五使者經一名五天使經譬喩經已上二經宋慧簡譯八部佛名經元魏瞿曇流支譯觀無量壽佛經此經已曾兩譯一存一闕備顯錄中般若波羅蜜神呪經出大品經功德莊嚴王八萬四千歲請佛經出大集經大方廣如來性起微密藏經二卷亦直云如來性起經是舊花嚴經如來性起品合道神足經四卷一名道神足無極變化經卽道神足經之異名二本無別持齋經齋經別名過去香蓮花佛世界經出悲華經善德婆羅門求舍利經人弘法經已上二經出大雲經五十三佛名經出藥王藥上經彌勒爲女身經一切施王所行檀波羅蜜經亦直云行檀波羅蜜經亦名薩和檀王經摩調王經小兒聞法卽解經已上四經出六度集淨除業障經抄淨業障經十住毘婆沙經抄十住論七寶經出增一阿含經質多長者請比丘經外道誘質多長者經佛見牧牛者請比丘示導經長者命終無子付囑經獨富長者經異名質多等四經出雜阿含積骨經出七處三觀經誨子經出生經梵志觀無常得解脫經出義足經梵志避死經貧子得財發狂經無害梵志執志經善唄比丘經梵志避等四經出出曜經福子經居士物故爲婦鼻中虫經須河譬經教子經一名須達教子經亦云須達訓子經福子等四經出雜譬喩龍種尊國變化經觀世樓炭經云有三品淸淨法行經已上三經先在僞錄華嚴瓔珞經般若得經已上二經僧法尼誦出亦在僞錄賢劫千佛名經一卷祐云唯有佛名與曇無蘭所出四諦經千佛名異出賢劫經中異譯右佛遺日下六十六部七十二卷或翻譯有憑或別生疑僞今旣尋知所據故非漢代失源同舊重編恐成繁雜今竝刪也長房錄云已上一百二十五部一百四十八卷竝是僧祐律師出三藏記撰舊二錄及安錄失源幷新集所得失譯諸經卷部甚廣讎挍群目蕪穢者衆出入相交實難詮定未睹經卷空閱名題有入有源無入無譯詳其初始非不有由旣涉遠年故附此末冀後博識脫睹本流希還正收以爲有據瀅澄法海使靜波濤焉今尋長房此言未可依據委求同異如前所述已下新附此錄拔陂菩薩經 一卷或爲拔波安錄云颰披陁菩薩經安公云出方等部是般舟經初四品異譯第五出栴檀樹經一卷 阿鳩留經一卷菩薩道地經 一卷安公云出方等部魔王入目揵蘭腹經 一卷亦名弊魔試目連經舊錄云魔王入目連腹中經出中阿 含第三十卷卽後十經之一也佛有五百比丘經 一卷凡人有三事愚癡不足經 一卷佛誡諸比丘言我以天眼視天下人生死好醜尊者卑者經一卷安公云上三經出中阿含自見自知爲能盡結經 一卷有四求經一卷 佛本行經 一卷河中大聚沫經 一卷或云水沫所漂經或云聚沫譬經衆經錄云出雜阿含今以安錄先集雜含後譯是別譯本非從彼出便賢者坑經 一卷坑字或作旃所非汝所經 一卷兩比丘得割經 一卷道德舍利日經 一卷舍利日在王舍國經 一卷獨居思惟自念止經 一卷問所明種經 一卷欲從本相有經 一卷或云欲從本經獨坐思惟意中生念經 一卷佛說如是有諸比丘經 一卷比丘所求色經 一卷道有比丘經 一卷色爲非常念經 一卷從自見自知下本有二十二經安公云是阿含一卷於中五經已備餘錄今但有十七載雜含分中色比丘念本起經 一卷善惡意經一卷 比丘一法相經一卷有二力本經一卷 有三力經一卷有四力經一卷 人有五力經一卷不聞者類相聚經 一卷舊錄云類相聚經與相應相可經同本天上釋爲故世在人中經 一卷或作無上誤也爪頭土經 一卷身爲無有反復經 一卷師子畜生王經 一卷阿須倫子婆羅門經 一卷婆羅門子名不侵經 一卷生聞婆羅門經 一卷舊錄云生聞梵志經有竭經 一卷署杜乘婆羅門經 一卷佛在拘薩國經 一卷佛在優墮國經 一卷經作優隨是時自梵守經 一卷有三方便經 一卷舊錄云三方便經法經錄云出七處三觀婆羅門不信重經 一卷佛告舍日經 一卷四意止經 一卷舊錄云四意止本行經法錄云出中阿含說人自說人骨不知腐經 一卷色比丘念下二十五經安公云竝出雜阿含今尋藏中單卷雜阿含內竝有此經多是後人合之成卷雜阿含三十章經 一卷法經錄云出雜阿含異本五十五法誡經 一卷或云五十五法行一切義要一卷 說善惡道經一卷愛欲聲經 一卷一本云愛欲一聲經摩訶遮曷旋經 一卷天王下作猪經 一卷始造浴佛時經 一卷十二賢者經 一卷佛倂父弟調達經 一卷五十五法下安公云上十經出阿毘曇今但有九一本入重譯中卽魔王入目連腹經是憂墮羅迦葉經 一卷四部本文經 一卷安公云上二經出長阿含一本云出阿毘曇讓德經一卷 有賢者法經一卷摩訶厥彌難問經一卷 或云大厥彌經大本藏經 一卷說阿難持戒經 一卷阿難問何因緣持 誡見世閒貧亦現道貧經一卷給孤獨四姓家問應受施經 一卷曉所諍不解經者經 一卷今疑上經字錯奇異道家難問住處經 一卷奇異道家難問法本經 一卷賢者手力經一卷 八法行經一卷憂多羅經一卷 或作夏字旃檀調佛經一卷 惡人經一卷難提和難經一卷 或云難提和羅經四姓長者難經 一卷舊錄云四姓長者經折佛經 一卷道地經中要語章 一卷或云小道地經今疑支曜出者是數練意章 一卷舊錄云數練經安公云上二經出生經祐按今生經無此章名右八十二部八十二卷 初拔陂等三經見在餘者竝闕竝是僧祐錄中集安公古典經旣云古典明是遠代今者編於漢末以爲失源安公本錄古典摠有九十二經今以餘之十經撿尋群錄或標譯主或是別生彼中旣載故此除之#通前舊失譯經五十九部七十六卷摠一百四十一部一百五十八卷竝爲漢代失源云魏曹氏都洛陽自文帝黃初元年庚子至元帝咸熙二年乙酉凡經五帝四十六年沙門五人所出經羯磨摠一十二部合一十八卷 於中四部五卷見在八部一十三卷闕本曹魏 沙門曇柯迦羅 一部一 卷戒沙門康僧鎧 三部 四卷經羯磨沙門曇無諦 一部 一卷羯磨沙門白延 五部 七卷經沙門安法賢 二部 五卷經僧祇戒本一卷 初出見竺道祖魏世錄右一部一卷本闕沙門曇柯迦羅魏云法時中印度人家世大富常修梵福迦羅幼而才悟質像過人讀書一覽皆文義通暢善學四韋陁論#風雲星宿圖讖運變莫不該綜自言天下文理畢己心腹至年二十五入一僧坊看遇見法勝毘曇聊取覽之茫然不解慇懃重省更增惛漠乃歎曰吾積學多年浪志墳典遊刃經籍義不再思文無重覽今睹佛書頓出情外當理致鉤深別有精要於是齎牒入房請一比丘略爲解釋遂深悟因果妙達三世始知佛教宏曠俗書所不能及乃棄捨世榮出家精苦誦大小乘經及諸部毘尼常貴遊化不樂專守以文帝黃初三年壬寅來至洛陽于時魏境雖有佛法而道風訛替亦有衆僧未稟歸戒止以剃落爲殊俗耳設復齋懺事同祠祀迦羅旣至大行佛法諸僧請出毘尼迦羅以律藏曲制文言繁廣佛教未昌必不承用遂以齊王芳嘉平二年庚午於洛陽白馬寺出僧祇戒心且備朝夕於是更集梵僧立羯磨受戒東夏戒律始自乎此迦羅後不知所終郁伽長者所問經 一卷或二卷第三譯一名郁伽羅越問菩薩行經嘉平四年出見竺道祖魏錄今編入寶積卽第十九會是無量壽經 二卷第四譯見竺道晉世雜錄及寶唱錄與世高出者小異又與寶積無量壽會等同本四分雜羯磨 一卷題云曇無德律部雜羯磨以結戒場爲首新附右三部四卷其本竝在沙門康僧鎧印度人也廣學群經義暢幽旨以嘉平四年壬申於洛陽白馬寺譯郁伽長者經等三部高僧傳中云譯四部不具顯名竺道祖魏晉錄僧祐寶唱梁代錄等及長房道宣靖邁三錄竝云二部餘二旣不顯名挍閱未見今更得一部餘欠一經撿亦未獲曇無德羯磨 一卷題云羯磨一卷出曇無德律以結大界爲首見竺道祖魏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曇無諦亦云曇諦魏云法實安息國人善學律藏妙達幽微以高貴鄕公正元元年甲戌屆于洛汭於白馬寺譯曇無德羯磨一部無量淸淨平等覺經 二卷第五出與漢世支讖等所出及寶積無量壽會竝本同文異見竺道祖晉世雜錄及僧祐錄叉須賴經 一卷一本無叉字祐錄作又初出見竺道祖及僧祐錄菩薩修行經 一卷一名長者威施所問菩薩修行經一名長者修行經第二出見始興寶唱二錄除災患經 一卷見僧祐錄初出與除恐災患經同本首楞嚴經 二卷第五出與漢世支讖等所出本同文異見竺道祖晉世雜錄及僧祐錄右五部七卷其本竝闕沙門白延西域人也才明蓋世深解踰倫以高貴鄕公甘露三年戊寅遊化洛陽止#白馬寺出無量淸淨等經五部長房等錄又有平等覺經一卷亦云白延所出今以此經卽是無量淸淨平等覺經但名有廣略故不復存也羅摩伽經 三卷見竺道祖寶唱法上靈祐等四錄是華嚴經入法界品少分初出大般涅槃經 二卷第二出略大本前數品爲此二卷見竺道祖魏錄右二部五卷其本竝闕沙門安法賢西域人藝業克深慧解尤峻振錫遊邦自遠而至譯羅摩伽等經二部群錄竝云魏世不辯何帝之年今依編于末又別錄亦載諸失譯經摠於吳錄後列開元釋教錄卷第一 悤錄之一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당(唐)대의 제본 양식(樣式)으로, 두루마리 모양의 책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는 책의 길이를 나타낸다.
  2. 2)사물의 이치에 밝고 식견(識見)이 뛰어난 사람이다.
  3. 3)범어로는 sugata, 부처님 열 가지 이름의 하나이다. 수가타(須伽陀)라 음역하며, 호거(好去)ㆍ묘왕(妙往)이라고 한역한다.
  4. 4)범어로는 anuttara, 부처님 10호(號)의 하나이다. 부처님은 유정 가운데 가장 높아서 위가 없는 대사(大士)라는 뜻이다.
  5. 5)범어로는 Puruadamyasārathi, 여래 10호의 하나이다. 부루사담먁사라제(富樓沙曇藐娑羅提)라 음역하고, 가화장부조어사(可化丈夫調御師)라 한역한다. 부처님은 대자대비하며, 대지(大智)로써 부드러운 말, 간절한 말, 또는 여러 가지 말을 써서 중생을 조복제어하고 바른 이치를 잃지 않게 하는 이라는 뜻이다.
  6. 6)성문ㆍ연각ㆍ보살에 대한 세 가지 교법(敎法)을 말한다.
  7. 7)4향(向)과 4과(果)의 성자를 말한다.
  8. 8)부처님 자비의 힘으로써 중생을 보호하여 주는 일이다.
  9. 9)보통으로 수계(受戒) 또는 참회할 때의 작법이다. 소작(所作)ㆍ판사(辦事)ㆍ작사(作事)라 번역한다.
  10. 10)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세운 주(周)나라이다. 공자(孔子)시대 주나라와 구별하여 무주(武周)라 일컫기도 한다.
  11. 11)후한(後漢)때의 역경총록(譯經總錄)으로, 저자와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12. 12)인도에서 전해 온 것은 진경(眞經)이라 하였고, ‘불설(佛說)’이란 이름을 빌려 위조한 경전, 즉 중국에서 새로 만든 경론만을 지목하여 위경(僞經)이라 하였다.
  13. 13)출가하지 않은 남자 불자를 말한다.
  14. 14)원문에‘一百五十一八’로 되어 있으나, 뒤의 실제 목록을 일일이 세어보니, 158권이다.
  15. 15)‘오래된 기록을 모아 놓은 것’이란 뜻으로, 저자와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16. 16)범어는 ‘sūrya’로 태양이다. 항상 허공에 있으면서 수미산의 허리를 돌면서, 차례로 수미산의 동ㆍ남ㆍ서ㆍ북에 있는 4대주(大洲)를 비춘다. 일륜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중생의 업력(業力)으로 일어나는 바람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17. 17)금신(金神), 부처 또는 불상을 일컫는 말이다. 부처님의 몸이 금빛인데서 이름한다.
  18. 18)공자(孔子)가 제자인 증자(曾子)에게 전한 효도에 관한 논설 내용을 훗날 제자들이 편저(編著)한 것으로, 연대는 미상이다.
  19. 19)호수의 이름이다. 한무제(漢武帝) 원수(元狩)3년 서안 서남 교외에 못을 파서 수전(水戰)을 연습하였다. 못의 주위가 40리, 넓이가 332경(頃: 넓이 단위)이다. 송나라 이후에는 메워져 없어졌다.
  20. 20)한(漢) 무제(武帝) 때의 사람으로 자는 만천(曼倩)이며 벼슬은 상시랑(常侍郞) 태중대부(太中大夫)을 역임했으며, 해학, 변설,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남겼다.
  21. 21)한(漢)의 명제(明帝)의 능(陵)으로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망산( 邙山) 남쪽에 있다. 일반적으로 ‘대한총(大漢塚)’이라고도 한다.
  22. 22)사찰이나 궁궐 등 전통 목조건물의 안팎에 양식화된 무늬를 짙은 채색으로 그려서 아름답게 장식한 것을 말한다.
  23. 23)흙이나 나무, 금속 등으로 조성한 불상이다.
  24. 24)경계하고 규율 있게 한다는 뜻으로, 승려나 신도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이다.
  25. 25)원문에는 ‘경인(景寅)’으로 되어 있는데, ‘병인(丙寅)’이 옳다.
  26. 26)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화신하여 나타내는 일이다.
  27. 27)5호(胡)16국(國)시대의 16국중 하나이며, 前秦(350~394)이라고 칭한다.
  28. 28)불필요한 자구(字句)를 깎고 잘 정리한다는 뜻이다.
  29. 29)도안(312~385)는 격의불교의 폐단을 지적하여 원전의 뜻을 잃게 한 다섯 가지 사항[五失本]을 제시하였으며, 역경의 쉽지 않은 점 세 가지[三不易]를 들었다.
  30. 30)원문에는 “주사행(朱士行)”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는 주사행의 “한록(漢錄)”을 말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번역한다. 이하 같음.
  31. 31)『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에는 『구횡경(九橫經)』에서 ‘횡(橫)’ 자가 ‘횡(撗)’으로 되어 있다.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에 따라 ‘횡(橫)’자로 한다.
  32. 32)해(日)ㆍ달(月)ㆍ수(水)ㆍ화(火)ㆍ목(木)ㆍ금(金)ㆍ토(土) 일곱 개의 별을 지칭하며, 칠정(七政)이라고도 한다.
  33. 33)하늘(天)이 운행하는 순환적인 목금화수토(木金火水土)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
  34. 34)사방의 바람을 살펴 길흉을 점치는 법이다.
  35. 35)구름의 모양이나 움직임을 길흉을 점치는 법이다
  36. 36)천체의 운행을 관측하여 달력을 만드는 일이다.
  37. 37)남음과 모자람이나, 가득 참과 줄어듦을 뜻한다.
  38. 38)아비담(阿毘曇)은 아비다르마(abhidharma)ㆍ아비담마(abhidhamma)를 음사한 말이다. 비담 등으로도 음역하며, 그 뜻을 대법(對法)ㆍ무비법(無比法)ㆍ승법(勝法) 등으로 번역한다. 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정리, 주석, 연구, 요약한 성전으로서의 논서를 가리킨다. 이 논서들에 대한 가르침이다.
  39. 39)주문(呪文)을 외며 기원(祈願)하는 의식이다.
  40. 40)선악의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뜻한다.
  41. 41)마음에 흐림이 없는 밝은 덕행 갖춘 고승대덕을 말한다.
  42. 42)고대 인도의 말로, 산스크리트(Sanskrit)어 이다.
  43. 43)『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에는 ‘이(二)’자(字)가 일(一)획(劃)이 탈획(脫劃)되어 ‘일(一)’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二)’ 자(字)로 고친다.
  44. 44)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외물(外物)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정신 상태를 뜻한다.
  45. 45)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이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46. 46)보통으로 수계(受戒) 또는 참회할 때의 작법이다. 소작(所作)ㆍ판사(辦事)ㆍ작사(作事)라 번역한다.
  47. 47)예로부터 그 사회에서 행하여 온 생활 풍습을 말한다.
  48. 48)동아시아의 별자리인 이십팔수의 하나이다.
  49. 49)미래의 길흉을 예언하는 술법이다.
  50. 50)구름의 변화, 즉 하늘의 변화를 말한다.
  51. 51)달마시리(達摩尸利)라 음역한다. 인도사람이다.
  52. 52)삼분 오전(三墳五典)의 준말이며, 삼황(三皇)ㆍ오제(五帝)의 성현(聖賢)이 지은 책을 말한다.
  53. 53)사서(四書), 오경(五經), 십삼경(十三經) 등의 총칭이다.
  54. 54)자세한 의례 제도를 말한다.
  55. 55)꾸미기만 하고 내용이 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56. 56)청정한 계행을 지니는 스님을 말한다.
  57. 57)삼장(三藏) 가운데 하나로, 불자들이 지켜야 할 생활의 규칙과 처리하는 방법을 적어 놓은 것을 하나로 묶은 것을 말한다.
  58. 58)중국 조위(曹魏)의 폐제(廢帝)이다. 254년 10월에서 256년 5월까지 1년 8개월 동안 제위에 있었다.

 

 

 

개원석교록 제 2 권


지승 지음


1. 총괄군경록 ②

1) 오손(吳孫) 시대
오손(吳孫)씨는 먼저 무창(武昌)에 도읍을 정했다가 뒤에는 도읍을 건업(建業)으로 옮겼다. 손권(孫權)시호(諡號)는 태조문황제(太祖文皇帝) 황무(黃武) 원년 임인(壬寅, 220)으로부터 손호(孫皓)시호가 없음 천기(天紀) 4년 경자(庚子, 280)에 이르기까지, 무릇 네 임금 59년을 지나는 동안 승려와 속인 5인이 역출한 경 등과 실역(失譯)된 경들을 합치면 총 189부 417권이다.그 중에서 61부 92권이 현재 있고, 128부 325권은 궐본이다.

오(吳)의 사문 유기난(維祇難)2부 6권 경집(經集)
사문 축율염(竺律炎)4부 6권 경집
우바새(優婆塞) 지겸(支謙)88부 118권 경률집(經律集)
사문 강승회(康僧會)7부 20권 경집
사문 지강량접(支彊梁接)1부 6권 경
위오양대제실역경(魏吳兩代諸失譯經)87부 261권

(1) 유기난(維祇難)
아차말보살경(阿差末菩薩經) 4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 법호(法護)의 『아차말경(阿差末經)』과 『무진의경(無盡意經)』 등과는 모두 동본(同本)이다. 『오록』과 『별록』의 2록에 보인다.
법구경(法句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법구집(法句集)』이라고도 한다. 존자 법구(法救)가 지었으며, 축율염과 지겸이 함께 번역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오록』에서는 “5권1)이다”라고 하였는데, 자세하지 않다.
이상은 2부 6권이다.『법구경』 2권은 현재에도 있고, 『아차말보살경』 4권은 궐본이다.

사문 유기난은 오(吳)나라 말로는 장애(障礙)라고 한다. 본래 인도 사람이다. 대대로 이도(異道)를 받들면서, 화사(火祠 : 불을 숭배하는 외도)를 숭상하였다. 당시 천축의 어떤 사문이 소승을 배우고 도술을 많이 행하였다. 먼 길을 다녀오다가 해가 지자 사문은 유기난의 집에서 묵어가려 하였으나, 유기난의 집에서는 이도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를 시기하고 꺼려하였다. 그래서 문 밖 한데[露地]에서 자고 가도록 하였는데, 사문은 밤에 몰래 주술(呪術)2)을 써서 유기난의 집에서 섬기는 불을 순식간에 없어지게 하였다. 이에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와 사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집에 들어가 공양할 것을 청하였다.
사문은 주술로 불길을 다시 원래대로 회복시켜 놓았다. 유기난은 사문의 신통한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보고나서 크게 불법을 믿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본래 섬기던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닦고, 이 사문에게 의지하여 화상(和上)3)으로 삼았다. 삼장(三藏)을 수학하여 4아함[四含]4)을 매우 잘하였으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교화하자 모두들 받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반(同伴)인 축율염(竺律炎)과 함께 서역을 출발하여 강좌(江左)에 이르니, 때는 손권(孫權) 황무(黃武) 3년 갑진(甲辰, 224)이었다.
무창군(武昌郡)에서 축율염과 함께 『아차말보살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그러나 유기난과 축율염은 아직 중국말을 잘 하지는 못했으므로, 범어를 번역할 때에 다 나타내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뜻[志]은 본래의 의미를 살리는 데 있었으며, 표현은 꾸밈이 없이 순박하였다.

(2) 축율염(竺律炎)
마등가경(摩登伽經) 3권『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지겸(支謙)과 함께 번역하였다. 『사두간경(舍頭諫經)』과 같은 동본이다. 혹 2권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삼마갈경(三摩竭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분화단왕경(分惒檀王經)』과는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수마제녀경(須摩提女經)』, 또는 『난국왕경(難國王經)』, 또는 『서화단왕경(恕惒檀王經)』이라고도 한다.
불의경(佛醫經) 1권지월(支越)과 함께 번역하였다. 이 경은 온전한 경전全典이 아니고, 대경(大經)을 요약하여 번역한 책이다. 혹은 『불의왕경(佛醫王經)』이라고도 한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범지경(梵志經) 1권『시흥록』에 보인다.
이상은 4부 6권이다.앞의 3부 5권은 현재 있고,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축율염은 인도 사람이다. 해행(解行:불교의 이치를 알고 일을 수행하는 일)이 맑고 엄정하였으며, 안팎의 전적에 널리 통하였다. 유기난과 함께 오(吳)나라 경계를 돌아다녔었다. 유기난이 죽은 후 손권 황룡 2년 경술(庚戌, 230)에 양도(楊都)에서 『마등가경』 등 4부를 번역하였다.
그의 이름은 여러 목록에 것과 같지 않다. 혹은 장염(將炎)이라고도 하고, 혹은 지염(持炎)이라고도 하며, 혹은 율염(律炎)이라고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두 나열해 둔다.

(3) 지겸(支謙)
대명도무극경(大明度無極經) 4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6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다만 『대명도경(大明度經)』이라고도 한다. 『도행소품(道行小品)』과 같은 동본이다. 축도조의 『위록』과 『오록』ㆍ『승우록』 등에 보인다.
아미타경(阿彌陁經) 2권내제(內題)5)에는 『불설제불아미타삼사삼불살서단과도인도경(佛說諸佛阿彌陁三邪6)三佛薩捷檀過度人道經)』으로 되어 있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무량수경(無量壽經)』이라고도 한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안세고(安世高) 등이 번역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 1권또는 바로 『본업경(本業經)』, 또는 『정행품경(淨行品經)』이라고도 한다. 이는 『화엄경(華嚴經)』의 「정행품(淨行品)」의 다른 번역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장방록』에는 『본업경』 외에 따로 「정행품」도 기재되어 있으나 잘못이다.
유마힐경(維摩詰經) 2권유마힐7)이 법문의 부사의함을 찬탄하여 설한 것을 말한다. 일명 『불법보입도문삼매경(佛法普入道門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한나라 때 엄불조(嚴佛調) 등이 번역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혜인삼매경(慧印三昧經) 1권또는 바로 『혜인경(慧印經)』이라고도 하며, 일명 『보전혜인삼매경(寶田慧印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여래지인경(如來智印經)』과는 동본이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구색록경(九色鹿經) 1권『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노녀인경(老女人經) 1권안공(安公)은 “『아비담(阿毘曇)』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오록』에서는 바로 “『노녀경(老女經)』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노모경(老母經)』이다”라고도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이며, 『승우록』에 보인다.
독자경(犢子經) 1권『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유광불경(乳光佛經)』과 같은 동본이다.
패다수하사유십이인연경(貝多樹下思惟十二因緣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당나라 때의 번역인 『연기성도경(緣起聖道經)』과 같은 동본이다.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 1권안공은 “『생경(生經)』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승우는 “『생경』 5권을 다 살펴보았지만, 이런 이름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도간경(稻竿經)』과는 동본이지만, 다르게 번역되었다. 지겸(支謙)이 주(注)도 내고 서문도 지었다. 안공은 서문에서 “한나라 말엽에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이 주석을 내었다”라고 하였다.
용시녀경(龍施女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용시보살본기경(龍施菩薩本起經)』과는 동본이다. 승우는 “『별록(別錄)』에 기재되어 있고, 『안록(安錄)』에는 없다”라고 하였다.
팔길상신주경(八吉詳神呪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신(神)자가 없기도 한다. 혹은 『팔길상경(八吉祥經)』이라고도 한다. 『팔양신주경(八陽神呪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고록(古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蜜持經) 1권혹은 바로 『미밀지경(微蜜持經)』, 또는 『성도항마득일체지경(成道降魔得一切智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출생무량문지경(出生無量門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승예(僧叡)의 『이진록(二秦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화적다라니신주경(華積陁羅尼神呪經) 1권『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혹은 신(神)자가 없기도 하다. 『화취다라니경(華聚陁羅尼經)』과 같은 동본이다.
지구신주경(持句神呪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다린니발경(陁隣尼鉢經)』과 같은 동본이다. 또한 『출다라니구(出陁羅尼句)』라고도 한다.
사하매경(私訶昧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사하말경(私訶末經)』, 또는 『보살도수경(菩薩道樹經)』, 또는 『도수삼매경(道樹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도안(道安)ㆍ지민도(支敏度)ㆍ승우(僧祐) 등의 세 목록에 보인다. 승우는 “이 경이 바로 『보살도수경』이다”라고 하였다.
보살생지경(菩薩生地經) 1권일명 『차마갈경(差摩竭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의 『오록(吳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패경(孛經) 1권또한 『패초경(孛抄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지금의 『패경』 1권이 바로 이 경이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별록』에 보인다.
월명보살경(月明菩薩經) 1권혹은 삼매(三昧)라는 글자를 첨가하기도 하였다. 일명 『월명동자경(月明童子經)』, 또는 『월명동남경(月明童男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삼품제자경(三品弟子經) 1권일명 『제자학유삼배경(弟子學有三輩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법률삼매경(法律三昧經) 1권혹는 바로 『법률경(法律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범지아발경(梵志阿颰經) 1권일명 『아발마납경(阿拔摩納經)』이라고도 한다. 안록(安錄)에서는 바로 “『아발경(阿颰經)』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불개해범지아발경(佛開解梵志阿颰經)』이라고도 한다. 『장아함경(長阿含經)』 제13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異譯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범망육십이견경(梵網六十二見經) 1권일명 『범망경(梵網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別錄)』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장아함경』 제14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
칠지경(七知經) 1권혹은 『칠지경(七智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1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
석마남본경(釋摩男本經) 1권『승우록』에서는 본(本) 자가 없다. 일명 『오음인사경(五陰因事經)』이라고도 한다. 『안록』에는 “『중아함경』 제25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축도조의 『오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제법본경(諸法本經) 1권『중아함경』 제28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폐마시목련경(弊魔試目連經) 1권일명 『마요란경(魔嬈亂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구록(舊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중아함경』 제30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
뇌타화라경(賴吒和羅經) 1권혹은 『나한뢰타화라경(羅漢賴吒和羅經)』이라고도 한다. 후한(後漢)의 지요(支曜)가 번역한 경과는 조금 다르다. 『중아함경』 제31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 승우는 “『별록』에는 실려 있고, 『안록』에는 없다”라고 하였다.
범마유경(梵摩喩經) 1권혹은 유(渝)자로 쓰기도 한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중아함경』 제41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
재경(齋經) 1권일명 『지재경(持齋經)』이라고도 한다. 『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중아함경』 제55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
수마제녀경(須摩提女經)『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22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 『장방록』에서 보인다.
부자수의경(不自守意經) 1권혹은 의(意)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자수경(自守經)』, 또는 『부자수경(不自守經)』이라고도 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11권에서 나온 다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오모자경(五母子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사미라경(沙彌羅經)』과 동본이다.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2권황무(黃武) 연간(222~228)에 번역되어 나왔다. 네 번째의 번역이다. 또한 『태자본기서응경(太子本起瑞應經)』, 또는 『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이라고도 하는데, 맹상(孟詳)의 번역과는 조금 다르다. 진군(陳郡)의 사장(謝鏘)과 오군(吳郡)의 장세(張洗) 등이 붓으로 받아썼고, 위(魏)나라 하동(河東) 왕환(王桓)이 상세하게 교정하였다. 『시흥록(始興錄)』과 『승우록(僧祐錄)』 두 목록에 보인다.
용왕형제경(龍王兄弟經) 1권일명 『난용왕경(難龍王經)』이라고도 하고, 혹은 왕(王)자가 없기도 하며, 일명 『항용왕경(降龍王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장자음열경(長者音悅經) 1권일명 『장자음열불란가섭경(長者音悅不蘭迦葉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바로 『음열경(音悅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칠녀경(七女經) 1권또는 『칠녀본경(七女本經)』이라고도 한다. 안공(安公)은 “『아비담(阿毘曇)』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팔사경(八師經) 1권축도조의 『오록(吳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병사왕오원경(蓱沙王五願經) 1권혹은 이 병(甁)자로 쓰기도 한다. 일명 『불사가왕경(弗沙迦王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안공(安公)은 “『중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조사하여 보았더니 그런 내용이 없었다.
의족경(義足經) 2권축도조의 『오록』과 『승우』ㆍ『보창』 두 목록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16경(經)으로 되어 있다.
수마제장자경(須摩提長者經) 1권일명 『회제불전경(會諸佛前經)』, 또는 『여래소설시현중생경(如來所說示現衆生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난사사경(阿難四事經) 1권『승우록』과 『별록』에 보인다.
미생원경(未生怨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사원경(四願經) 1권축도조의 『오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씨범지경(里氏梵志經) 1권장방은 “『별록』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제구경(猘狗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손다야치경(孫多耶致經) 1권혹은 『범지손다야치경(梵志孫多耶致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안공은 “『중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조사하여 보았더니 없었다.
계소재경(戒銷災經) 1권또는 『계소복재경(戒銷伏災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 보인다.
찬집백연경(撰集百緣經) 10권『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보살본연경(菩薩本緣經) 2권또한 『보살본연집경(菩薩本緣集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2권, 또는 4권으로 되어 있다. 천축 사문 승가사나(僧伽斯那)가 지었다. 『장방록』에 보인다.
유일잡난경(惟日雜難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의 경전은 현재 남아 있고, 이 이하는 궐본이다.
마하반야바라밀주경(摩訶般若波羅蜜呪經) 1권혹은 마하(摩訶)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법경경(法鏡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는 “『별록』에 보이며, 『안록』에는 없다”라고 하였다. 또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다시 『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 2권이 있는데, 역시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경을 거듭 기재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아사세왕녀아술달보살경(阿闍世王女阿術達菩薩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차말보살경(阿差末菩薩經) 4권『오록』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유기난(維祇難)이 번역한 책과는 동본인데, 내용이 다르다.
소아차말경(小阿差末經) 2권『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소(小)라는 글자가 더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바로 앞의 경과는 의당 동본이 아니다.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2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 경은 대본(大本 : 불설대반니원경)의 「서분(序分)」과 「애환품(哀歎品)」을 요약하여 2권으로 만든 것인데, 마지막 3지(紙)가 조금 다를 뿐이다. 축도조(竺道祖)의 『오록』에 보인다. 안공은 “『장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승우는 “지금의 『장아함경』은 이것과는 다르다”라고 하였다.
불이삼거환경(佛以三車喚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마땅히 제2권의 「비유품(譬喩品)」에서 나왔어야 한다.
부장교녀경(不莊校女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수뢰경(須賴經) 1권혹은 『수뢰보살경(須賴菩薩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백연(白延) 등이 번역한 경과는 동본인데, 따로 번역한 것이다. 축도조의 『오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수행경(菩薩修行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창록』에 보인다.
연도속업경(演道俗業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구록(舊錄)』에 보인다. 혹은 업(業)자가 없기도 하다.
방등수능엄경(方等首楞嚴經) 2권황무(黃武8)) 연간(222~229)에 번역하였으며, 두 번째로 나왔다. 후한(後漢)의 지겸(支謙) 등이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축도조의 『오록』에서 보인다. 『안록(安錄)』에는 없다. 승우는 “방등(方等)이란 글자가 없으며,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유명이십게경(惟明二十偈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경(經)자가 없는 곳도 있다. 『승우록』에 보인다.
법멸진경(法滅盡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법몰진경(法沒盡經)』, 또는 『공적보살소문경(空寂菩薩所問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칠불신주경(七佛神呪經) 1권어떤 본에는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마하정진경(摩訶精進經) 1권또한 『대정진경(大精進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십이문대방등경(十二門大方等經) 1권『안록』에는 없다. 승우는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불종상소행삼십게경(佛從上所行三十偈經) 1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승우록』에 보인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가섭마등(迦葉摩騰)이 번역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문장이 매우 올바르며, 말씨와 구절이 볼 만하다. 『별록』에 보인다.
선비요경(禪秘要經) 4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오록』과 『별록』 두 목록에 보인다.
견의경(堅意經) 1권혹은 『견심경(堅心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권진학도경(勸進學道經) 1권어떤 본에는 권(勸)자가 없기도 하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항수계경(恒水戒經) 1권혹은 계(戒)자가 없기도 하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록』에 보인다.
칠루경(七漏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회과법경(悔過法經) 1권혹은 법(法)자가 없기도 하다. 일명 『서시방예배회과문(序十方禮拜悔過文)』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현자덕경(賢者德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범지결정경(梵志結淨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아질국왕경(阿質國王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유루왕사자동비유경(惟婁王師子潼譬喩經) 1권어떤 본에는 비유(譬喩)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남달왕경(藍達王經) 1권일명 『목련공덕경(目連功德經)』, 또는 『목련인연공덕경(目連因緣功德經)』이라고도 한다. 『오록』에 보인다.
백유경(百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오음사경(五陰事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마화작비구경(魔化作比丘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우다라모경(優多羅母經) 1권어떤 본에는 모(母)자가 없기도 하다. 『승우록』에 보인다.
인민구원경(人民求願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수행방편경(修行方便經) 2권또한 『수행방편선경(修行方便禪經)』이라고도 한다. 『오록』에 보인다.
법구경(法句經) 2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또한 『법구집(法句集)』이라고도 한다. 『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88부 118권이다.『유일잡난경』 이상의 51부 69권은 현존해 있고, 『마하반야바라밀주경』 이하 37부 49권은 궐본이다.

우바새(優婆塞) 지겸(支謙)의 자(字)는 공명(恭明)이며, 일명 월(越)이라고도 한다. 대월지국(大月支國) 사람이다. 조부 법도(法度)가 한 나라 영제(靈帝) 때(168~189)에 월지국 사람 수백 명을 인솔하여 한나라에 귀화하였으므로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將)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그의 나이 7세 때에 이웃집에서 죽마(竹馬)를 타고 놀다가 그 집 개에 물리어 정강이뼈가 부서지는 상해를 입었다. 그 이웃 사람이 개를 잡아 간(肝)을 내어서 상처에다 붙여 주려고 하자, 지겸[越]이 말하였다.
“하늘이 이 물건을 내어 사람을 위하여 집을 지키고 짖게 한 것이니, 만일 내가 당신의 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개는 끝내 나를 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 허물이 나에게 있지, 그 개에게는 없습니다. 만일 그 개를 죽임으로써 나의 상처가 낫는다 하여도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없거늘, 하물며 나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을 터인데 공연히 큰 죄만 짓겠습니까? 또한 짐승이란 아무 지각(知覺)도 없거늘, 어찌 이치로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그 이웃 사람은 그의 말에 감동되어, 드디어 다시는 개를 죽이지 않게 되었다.
열 살에 한문을 배우고 열세 살에 바라문의 책을 읽어 모두 정통하게 되었고, 여섯 나라의 말에 달통하였다.
이보다 앞서 환제(桓帝)에서 영제(靈帝)에 이르는 기간(146~189)에 지참(支讖)이 법전(法典)을 번역하였다.
또 지량(支亮)이라는 이의 자(字)는 기명(紀明)인데, 지참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지겸은 또 지량에게서 수업을 받았는데, 널리 경적을 보아 밝게 익히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세간의 기예도 두루 익혔다.
그의 모습은 몸은 호리호리하고 피부는 검고, 얼굴은 야위고 눈은 희며, 눈동자는 황색이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지랑(支郎)의 눈은 황색이고 몸은 호리호리하지만, 지혜주머니이다.”
그는 본래 큰 법을 받들면서 경의 뜻을 정밀하게 연마하였다. 헌제(獻帝) 말년(220)에 한나라가 크게 혼란해지자, 고향 사람 수십 명과 함께 오(吳)나라로 피하였다. 처음 출발하던 날에 옷은 한 벌만 입고 있었다. 큰 추위에 옷을 입지 못한 어느 한 나그네가 그를 따라 왔다. 지겸[越]은 그 나그네를 불러서 함께 잤는데, 한밤중이 되자 나그네는 그의 옷을 빼앗아 입고 도망쳐 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그의 동료들이 그가 입고 있던 옷의 소재를 묻자, 지겸이 말하였다.
“어제 밤에 나그네에게 빼앗겨 버렸소.”
그러자 동료들이 모두 말하였다.
“어째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소?”
지겸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고발하게 되면, 그대들은 틀림없이 그에게 겁탈한 죄를 주었을 것입니다. 어찌 옷 한 벌을 가지고 한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모든 이들은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뒤에 오나라 임금 손권(孫權)이 그가 학문이 박식하고 재주와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만났다. 경전 안에 있는 깊고 은밀한 뜻을 물어 보자, 지겸은 근기에 맞추어[應機] 어려운 것을 해석하여 의심나는 것마다 풀어 주지 않음이 없었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여 절을 하고, 박사(博士)9)로 삼아 동궁(東宮)을 돕고 이끌어 주게 하였으며, 총애가 아주 대단하였다.
지겸은 비록 대교(大教)10)로서 가르치고 있지만, 경에는 범어로 된 글[梵文]이 많아서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이미 중국과 서융[戎]의 말을 잘하였는지라, 여러 경본들을 수집하여 중국어[吳語]로 번역하였다.
손권 황무(黃武) 2년 계묘(癸卯, 223)로부터 양(亮) 건흥(建興) 2년 계유(癸酉, 253)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대명도무극경[大明度經]』 등 88부를 번역하였는데, 곡진하게 성인의 뜻에 들어맞으면서도, 말의 뜻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또 『무량수경[無量壽]』과 『중본기경(中本起經)』에 의거하여 「보살련구(菩薩連句)」와 「범패삼계(梵唄三契)」를 지어 찬탄하였고,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에 주(注)를 달았는데, 모두 세상에 유행하였다.
뒤에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마침내 궁애산(穹隘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세상일과는 인연을 끊었다. 축법란(竺法蘭) 도인으로부터 다시 5계(戒)를 받아 지켰는데, 무릇 함께 노는 이들은 모두 사문들뿐이었다. 뒤에 그 산에서 입적하였으니 춘추 60세였다. 오나라 임금 손량(孫亮)과 여러 승려들은 글로써 말하였다.
“지공명(支恭明)은 자신의 병을 다스리지 않았으며, 그가 하는 일과 행실은 꾸밈없이 수수하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숭앙할 만하였다. 그를 위하여 몹시 슬퍼함을 그치지 못했다. 그때에 애석하게 여긴 바가 이와 같았다.”
지겸이 번역하여 낸 경전의 부(部)와 권(卷)은 다소 여러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승우(僧祐)의 『삼장기(三藏記)』에는 36부만이 실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승우가 기록한 『지겸전[謙傳]』에는 27경이 나와 있고, 혜교(慧皎)11)
의 『고승전(高僧傳)』에는 49경이 있으며, 『장방록(長房錄)』에는 곧 129부(部)가 있다. 지금 『장방록』에 실려 있는 것은 다소 따로 생겨난[別生] 경이며, 혹은 다른 이름으로 겹쳐 기재되기도 하였다. 이제 차례에 따라 삭제하면, 아래에 기술하는 것과 같다.

녹자경(鹿子經)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녹모경(鹿母經)』과 내용이 같다.
신일경(申日經)역시 축법호가 번역한 『월광동자경(月光童子經)』과 같다.
출가공덕경(出家功德經)지금 두 경본이 있는데, 하나는 진(秦)나라 때 번역이라 『진록(秦錄)』에 실려 있고, 하나는 『현우경(賢愚經)』에서 추려 낸 경인데, 지금은 『별생록(別生錄)』 속에 덧붙여 있다.
금강청정경(金剛淸淨經)또한 『금강삼매본성청정불멸불괴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滅不壞經)』이라고도 한다. 후한(後漢) 『실역록(失譯錄)』에 기재된 글을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니, 이것은 지겸이 번역한 경이 아니다. 이제 옮겨서 『진록(秦錄)』에 덧붙여 둔다.
대자무감경(大慈無減經)
보녀문삼십이상경(寶女問三十二相經)
마녀문불설법득남신경(魔女聞佛說法得男身經)『대자무감경』 등의 3경은 모두 『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보해적지성취대비경(寶海寂志成就大悲經)『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보광보살경(普廣菩薩經)곧 『별행수원왕생경(別行隨願往生經)』이 이 경이다. 『관정경(灌頂經)』에서 나왔다.
마조왕경(摩調王經)『육도경(六度經)』에서 나왔다.
불위가리광야귀설법경(佛爲訶利曠野鬼說法經)혹은 『가리경(訶利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에서 나왔다.
고수경(枯樹經)혹은 위에다 대(大)자를 더하기도 한다.
응요렵경(鷹鷂獵經)
치조사경(鵄鳥事經)『고수경』 등 3경은 모두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색무상경(色無常經)
제루진경(諸漏盡經)혹은 누(漏)자가 없기도 하다.
설산무미후경(雪山無獼猴經)혹은 원후(猨猴)로 쓰기도 하며, 혹은 무(無)자가 없기도 하다.
무모자경(無母子經)
부정관경(不淨觀經)
삼종양마경(三種良馬經)
사종양마경(四種良馬經)
수명촉경(壽命促經)
하중초구경(河中草龜經)
국왕성취오법구존어세경(國王成就五法久存於世經)
불위외도수심설이욕경(佛爲外道須深說離欲經)『색무상경色無常』 등 이하 11경은 모두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시아소경(是我所經)
범지경(梵志經)이상 2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걸탐왕경(桀貪王經)『의족경(義足經)』에서 나왔다.
외도선니설도경(外道仙尼說度經)
도범지경(度梵志經)이상 2경은 소승경(小乘經)에서 가려서 뽑은 것이다.
할별경(瞎鼈經)
범지문불세간증감경(梵志問佛世間增減經)
삼어실수경(三魚失水經)
감로도경(甘露道經)
항천범지경(降千梵志經)
범지자사도패경(梵志子死稻敗經)
호구의경(護口意經)
범지문불사경(梵志問佛師經)
법시승경(法施勝經)
수상포경(水上泡經)『할별경』 등 10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수행자경(修行慈經)『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에서 나왔다.
도탈구자경(度脫狗子經)『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나왔다.

이상의 『대자무감경(大慈無減經)』 등 38부 38권은 『장방록』 등에서는 “모두 지겸의 번역이다”라 하였다. 이제 수대(隋代 : 581~619)의 2 책인 『중경록(衆經錄)』과 새로 묶어낸[括] 『별생초경(別生抄經)』 등을 살펴보면, 이 경들은 모두 여러 경에서 가려서 뽑은 것[抄出]이므로, 번역한 경본 수에 넣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제 사실의 기록[實錄]을 남겨두었다. 그러므로 모두 삭제한다.

(4) 강승회(康僧會)
육도집경(六度集經) 8권혹은 9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육도무극도경(六度無極度經)』, 또는 『도무극집(度無極集)』, 또는 『잡무극경(雜無極經)』이라고도 한다. 축도조의 『오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 2권『내전록(內典錄)』에는 구(舊)자가 있고, 『장방록』에는 없다. 또한 『잡비집경(雜譬集經)』이라고도 하고, 혹은 집(集)자가 없기도 하다. 『고승전』과 『장방록』에 보인다.
오품경(吳品經) 5권『승우록』에는 경(經)자가 없다. 모두 10품(品)이 있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장방록』에서는 “곧 이 경은 『소품반야(小品般若)』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정행경(菩薩淨行經) 2권이 경은 『대집보계품(大集寶髻品)』의 이역(異譯)이다. 혹은 바로 『정률경(淨律經)』이라고도 한다. 적오(赤烏) 연간(238~251)에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의 『오록』에 보인다.
권방편경(權方便經) 1권『순권방편경(順權方便經)』과 같은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오록(吳錄)』과 『별록(別錄)』에 보인다.
보살이백오십법경(菩薩二百五十法經) 1권혹 2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으로부터 대승(大僧) 250계(戒)를 밝게 지시하여 놓았다. 『고승전』과 『장방록』 등에 보인다.
좌선경(坐禪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7부 20권이다.『육도집경』 등 2부 10권은 현재 있고, 『오품경』 등 5부 10권은 궐본이다.

사문 강승회의 선조는 강거국(康居國)12) 사람이다. 대대로 인도에서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장사꾼이었기 때문에 교지(交阯 : 지명)로 옮겨 갔다.
강승회 나이 열 살 때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극한 효성으로 복(服)을 마치고 출가하여 아주 엄격하게 수행하였다. 사람됨이 관대하고 올바르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다. 돈독한 뜻을 지녀 배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삼장(三藏)을 환히 이해하고, 널리 육경(六經)13)을 열람하였으며, 천문(天文)14)과 도위(圖緯)15)에 대해서도 배워서 두루 섭렵하였다. 추기(樞機)16)를 분별하였으며, 문서들을 잘 지었다.
당시 손권(孫權)이 이미 강좌(江左)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직 행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우바새 지겸(支謙)이 경전을 번역하여 처음으로 큰 법[大法]이 퍼지기는 하였으나, 백성을 교화시키는 일[風化]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였다.
강승회는 강좌(江左)에서 도를 진작시키고, 더불어 도사(圖寺 : 절)를 세우고자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면서[杖錫] 동쪽으로 유랑하였다. 그러다 오나라 적오(赤烏) 10년(247)에 처음으로 건업(建業)에 이르러 띳집[茅茨]을 짓고 불상을 모셔놓고 도를 닦았다. 당시 오나라에서는 사문(沙門)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도는 알지 못하고, 그 모습만 보고는 이상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담당자가 손권에게 아뢰었다.
“어떤 호인(胡人)이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자칭 사문이라 하는데, 모양새나 복장이 보통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이 일은 마땅히 조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손권이 말하였다.
“옛날 한나라 명제가 꿈에 본 신(神)을 부처라고 불렀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들이 섬기는 바가 어찌 그 유풍(遺風 :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아니겠는가?”
즉시 강승회를 불러 힐문하였다.
“어떠한 영험이 있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가 어느덧 천 년이 흘렀습니다만 유골인 사리(舍利)17)는 신비하게 빛을 발하여 사방을 비추지 아니한 곳이 없습니다. 옛날 아육왕(阿育王)18)은 탑을 세운 것이 8만 4천이었습니다. 대개 탑사(塔寺)를 세우는 것은 여래께서 남기신 가르침[遺化]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과장되고 허황한 일이라 여기면서, 강승회에게 말하였다.
“만일 사리를 얻는다면 탑사를 세우겠지만, 이것이 헛되고 망령된 말이라면 나라에서 정해진 형벌이 있을 것이다.”
이에 강승회는 이레 동안의 기한을 청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법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 한 번의 일에 달려 있다. 지금 지극한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그리고는 모두 고요한 방에서 결재(潔齋)19)하고, 구리로 만든 병으로 가지(加持)20)하고 향을 피우며 예배하였다. 이레의 기한이 끝났지만, 고요하기만 할 뿐 아무런 감응이 없었다.
이에 다시 이레 동안의 기한을 줄 것을 청하여 그리하게 하였으나 역시 아무런 감응이 없자, 손권은 말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술수로다.”
그리고는 죄를 주려고 하자, 강승회가 다시 세 번째로 이레의 기한을 청하니, 손권은 다시 한 번 특별히 그 청을 들어 주었다.
강승회는 법을 지키는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공자[宣尼]는 말씀하시길, ‘문왕(文王)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분이 남기신 글[文]은 나에게 있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법의 영험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지만, 우리들이 감응하지 않고 어찌 왕의 벌만을 기다릴 것이냐? 마땅히 기한까지 목숨을 걸고 서원(誓願)해야 할 것이다.”
삼칠일(三七日)저녁 무렵이 되어도 보이는 바가 없자, 모두들 두려움에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오경(五更)이 되자, 문득 병 속에서 쟁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승회가 스스로 가서 살펴보니, 과연 사리가 들어 있었다.
다음 날 강승회는 사리를 가져다가 손권에게 바쳤다. 조정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았는데, 오색 찬란한 광채가 병 위로 뻗쳐 나왔다. 손권이 직접 손으로 구리 쟁반 위에 병을 기울이자, 사리가 부딪쳐 쟁반이 곧 깨지고 말았다. 손권은 숙연해지면서 놀라 일어나 말하였다.
“참으로 희유한 상서로구나.”
강승회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사리의 신비로운 위엄이 어찌 다만 광채를 말하는 일에만 그치겠습니까? 겁화[劫火]로써도 감히 태울 수 없고, 금강저[金剛杵]21)로도 부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손권은 명령을 내리어 그것을 시험하게 하였다. 강승회는 다시 서원하였다.
“법 구름[法雲]이 바야흐로 덮이기 시작하면, 모든 백성들은 그 은혜를 우러러 보게 될 것이옵니다. 원하옵건대, 다시 신비로운 자취를 드리우셔서 널리 위엄 있는 영험을 보여 주소서.”
이에 사리를 쇠로 된 다듬잇돌[鐵砧] 위에 놓고 힘이 센 자에게 내려치도록 했다. 그러자 쇠로 된 다듬잇돌과 쇠몽둥이는 모두 움푹 파였지만, 사리는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손권은 크게 탄복하여 즉시 탑을 세우게 하였다. 처음으로 불사(佛寺)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에 절 이름을 건초사(建初寺)라고 불렀으며, 이로 인하여 그 땅의 이름을 불타리(佛陀里)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강좌(江左) 지역은 점차로 큰 법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손권의 손자 손호(孫皓)가 정사를 맡게 되자 법령이 가혹해졌다. 부정한 제사[淫祀]를 없애 버렸으며, 불사(佛寺)도 아울러 헐어 없애고자 하였다. 손호가 말하였다.
“이런 불사들이 어찌하여 이토록 흥하게 되었는가? 만일 그 가르침이 참으로 올바르다면, 성전(聖典)과 서로 통하는 것이니, 마땅히 그 도를 보존하고 받들겠지만, 만일 그것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모두 다 불태워 버리리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었다.
“부처님의 위력은 여타의 다른 신(神)과는 다릅니다. 강승회가 상서로운 일을 보여 주어 대황제(大皇帝)께서 절을 창건하신 것입니다. 이제 만일 가벼이 여기시어 훼손한다면 후회하는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손호는 장욱(張昱)을 절로 보내어 강승회에게 힐문하게 하였다. 장욱은 고상하고 재치 있게 말을 잘하여, 거침없이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강승회는 그 질문에 대해 막힘없이 명확한 답변을 했는데, 그 말의 이치가 매우 합당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지만 장욱은 강승회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장욱이 그곳에서 물러나 돌아가려 하니 강승회가 문에서 배웅을 하였다. 마침 절 옆에 부정한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자가 있었다. 장욱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교화[玄化]가 그렇게 훌륭하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무리들이 가까이에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입니까?”
강승회가 말하였다.
“산을 부술 듯한 요란한 천둥소리라도 귀머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은 그 소리가 작아서가 아닙니다. 참으로 이치가 통하면 만 리 밖에서도 응하게 되지만, 만일 그것이 막혀 있다면 간(肝)과 담(膽)처럼 가까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초(楚)나라나 월(越)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욱은 돌아와서 칭찬하였다.
“강승회의 재주와 명석함은 제가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원컨대 왕께서 친히 살펴보소서.”
손호는 크게 조정의 인재를 모아 놓고 말과 수레를 갖추어 강승회를 맞이하였다. 강승회가 자리에 앉자 손호가 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밝히고 있는 선악의 보응[善惡報應]이란 무슨 뜻이오?”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무릇 훌륭한 임금이 효성과 자애로써 세상을 가르치게 되면, 붉은 까마귀가 날고 노인성[老人]이 나타나며, 어진 덕으로 만물을 기르게 되면, 예천(醴泉 : 단맛이 나는 샘)이 솟아오르고 좋은 곡식이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한 행위를 하면 상서로운 일이 있고, 악한 행위를 하면 또한 그와 같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귀신이 그에 대한 벌을 주고, 드러난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주역(周易)』에서도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積善餘慶]’라고 하였고, 『시경(詩經)』에서도 ‘복을 구하는 데에 어그러짐이 없네[求福不回]’라고 읊었습니다. 비록 유가 경전의 격언이라고는 하나,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도 나오는 밝은 교훈입니다.”
손호가 다시 물었다.
“만일 그렇다면 주공[周]22)과 공자[孔]가 이미 말씀하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불교가 필요하단 말이오?”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주공이나 공자의 말씀은 대략 생활에 가까운 자취만을 보여 주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매우 그윽함과 미묘함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일을 행하면 오랜 세월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 길이 극락세계의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선을 권하고 악을 막고자 하셨으니, 어찌 그 가르침이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손호는 그때 그 말을 꺾을 만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손호가 비록 바른 법을 듣게 되었으나, 그 성질이 어리석고 포악하기 때문에 그 잔악함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뒤에 숙위병(宿衛兵)들을 후궁(後宮)으로 보내어 정원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이때 땅 속에서 높이가 수 척(尺)이나 되는 금으로 된 불상을 발견하고는 손호에게 바쳤다.
손호는 사람을 시켜 금불상을 더러운 곳에 놓아두게 하고는 넉 달 여드레 동안이나 오물을 끼얹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갑자기 그의 온몸에 큰 종기가 생겼는데, 특히 음부(陰部) 부분의 고통이 더욱 심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태사(太師)가 점을 치고 나서 말하였다.
“위대한 신령을 범했기 때문이옵니다.”
이에 즉시 여러 사당에 기도를 드렸으나, 고통은 더욱 더 심하여졌다. 궁녀 중에 이전부터 불법을 받드는 이가 있었는데, 손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절에 나아가 복을 빌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손호는 머리를 들면서 물었다.
“부처라는 신(神)이 그렇게도 위대하냐?”
그러자 궁녀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하늘과 신들이 존중하는 위대한 성인이십니다.”
마침내 손호는 마음속으로 그 말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궁녀는 즉시 불상을 가져다가 전(殿) 위에 모셔 두고, 향내 나는 더운 물로 수십 번을 씻고 나서 향을 사르고 참회하게 하였다. 손호는 정성스럽게 베갯머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였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신을 절로 보내어 모든 도인(道人)들을 찾게 하고는 강승회에게 설법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강승회가 그를 따라 궁으로 들어가자, 손호는 예를 갖추어 죄와 복을 얻는 연유에 대하여 물었다. 강승회는 그를 위하여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정밀하고 핵심을 그대로 꿰뚫었다.
손호는 원래 뛰어난 이해력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였고, 이로 인하여 사문의 계율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자 하였다. 강승회는 계문(戒文 : 계율의 조문)은 비밀스런 것으로서 사문이 아닌 자에게는 가벼이 알려 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에 본업(本業) 125원(願)을 취하여 250사(事)로 분류하여 행주좌와(行住坐臥)23) 때에 항상 모두 중생을 구하기를 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손호는 자비의 원력이 넓고도 크다는 것을 깨닫고 착한 마음을 더하였다. 그래서 바로 강승회에게 나아가 5계(戒)를 받고 나니, 열흘이 지나자 질병은 깨끗이 나았다. 이에 강승회가 머물고 있는 절을 더욱 잘 꾸미고 이름을 천자사(天子寺)로 부르게 하고서 종실(宗室 : 왕족)에는 반드시 부처님을 받들 것을 알렸다.
강승회는 오나라 조정에서 자주 정법(正法)을 설하였다. 그렇지만 손호의 성품이 흉악하고 거칠어서 그 오묘한 뜻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오직 응보(應報)24)의 알기 쉬운 일들을 이야기하여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오나라 천기(天紀) 4년(280) 4월에 손호는 진(晋)나라에 항복하였고, 9월에는 병이 들어 죽었는데, 이 해가 바로 진무(晋武) 태강(太康) 원년(280)이었다.
진나라 성제(成帝) 함화(咸和) 연간(327)에 소준(蘇峻)이 난을 일으켜 강승회가 세운 탑사를 불태워 버렸는데, 사공(司空) 하충(何充)이 이를 수리하여 다시 지었다. 평서장군(平西將軍) 소유(逍誘)는 세상에서 불법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삼보(三寶)를 업신여겼는데, 이 절에 들어가서 여러 도인들에게 말하였다.
“오래 전부터 이 탑이 여러 번 빛을 발한다고 들었는데, 허망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도저히 믿을 수 없소. 만일 내가 직접 보게 된다면 더 따지지 않으리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탑에서 즉시 오색 빛이 뿜어져 나와 당찰(堂刹)까지 비추었다. 소유는 숙연해지고 털이 곤두섰다. 이로 말미암아 소유는 불법을 믿고 공경하여 절 동쪽에 다시 작은 탑을 세웠다. 이는 멀게는 대성신(大聖神)의 위력이었으며, 가까이는 역시 강승회의 힘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상(像)을 그려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贊)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공(公)께서 분 퉁소와 거문고 소리
참으로 아름다운 바탕이로다.
마음에는 눈앞의 걱정 따윈 없고
뜻은 넉넉하고 편안하도다.

이 어두운 밤에
그들의 허물을 물리쳤으니
초연하게 멀리 나아갔고
우뚝이 높이 솟았도다.

강승회는 손권의 태원(太元) 원년 신미(辛未, 251)에 창건한 건초사(建初寺)에서 『육도경(六度經)』 등 7부를 번역하였는데, 모두 경의 본체를 신묘하게 터득했으며 글과 뜻도 참으로 올 바랐다.
또 니원(泥洹)의 패성(唄聲)을 전하였는데, 맑고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밝은 분위기여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다.
또 『장방록(長房錄)』 등에는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ㆍ『경면왕경(鏡面王經)』ㆍ『찰미왕경(察微王經)』ㆍ『범황왕경(梵皇王經)』 등이 있다”고 했는데, 위의 4경은 비록 강승회의 번역이었다고는 하나 모두 『육도집(六度集)』 속에서 나왔으므로, 직접 번역한 수효에 넣기에는 합당하지 않고, 이제 『별생록(別生錄)』 속에 등재하였다.
다시 『법경경주해(法鏡經注解)』 2권과 『도수경주해(道樹經注解)』 1권과 『안반경주해(安般經注解)』 1권이 있는데, 이상 3경은 강승회가 서문까지 같이 지었다. 이 3경은 강승회가 비록 주석을 달기는 했어도 본래 그의 번역은 아니다. 그러므로 역시 강승회가 번역한 수효에는 넣지 않는다. 앞의 이 7부는 여기에서 모두 삭제하였다.

(5) 지강량접(支疆梁接)
법화삼매경(法華三昧經) 6권어떤 본에는 정(正)자가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竺法護)의 『정법화경(正法華經)』과 같은 동본이다. 축도조의 『위록(魏錄)』에 보이며, 또한 『시흥록(始興錄)』에서도 보인다.
이상은 1부 6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지강량접은 중국말로는 정무외(正無畏)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손량(孫亮) 오봉(五鳳) 2년 을해(乙亥, 255)에 교주(交州)에서 『법화삼매경』을 번역하였는데, 사문 축도향(竺道馨)이 받아썼다.
『장방록(長房錄)』과 『내전록(內典錄)』 두 목록에는 조위(曹魏)25)시대에 편입되어 있으나, 이제 교주(交州)와 시흥(始興) 땅에 의거하여 나누어, 『오록(吳錄)』에다 넣었다.

(6) 위오(魏吳) 양대 제실역경(諸失譯經)
부사의공덕제불소호념경(不思議功德諸佛所護念經) 2권『충경(虫經)』에서 나왔다. 혹은 『부사의공덕경(不思議功德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공덕경(功德經)』이라고도 한다.
칠불부모성자경(七佛父母姓字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칠불성자경(七佛姓字經)』이다”라고 하였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45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 1권『구록』에서 보인다. 『잡아함경』속에서 나온 이역이다.
아비담감로미론(阿毗曇甘露味論) 2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또한 『감로미아비담(甘露味阿毗曇)』이, 또는 『감로미경(甘露味經)』이라고도 한다. 존자(尊者)26) 구사(瞿沙)가 지었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있고, 이하의 모든 경은 궐본이다.
촉보요경(蜀普曜經) 8권이 경은 촉(蜀) 땅에서 번역되어 나온 것 같다. 첫 번째 번역이다.
장자자서경(長者子誓經) 1권『구록』에 보인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단저지경(無端底持經) 1권『구록』에서는 “『무단저총지경(無端底摠27)持經)』이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촉수능엄경(蜀首寶嚴經) 2권『구록』에 보인다. 촉나라 땅에서 번역되어 나온 것 같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후출수릉엄경(後出首楞嚴經) 2권『구록』에 보인다. “10게송이 있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의 번역이다.
아유월치전경(阿惟越致轉經) 18권『구록』에 보인다.
마하승경(摩訶乘經) 14권혹은 『마하연경(摩訶衍經)』이라고도 한다.
마하연우바리사경(摩訶衍優波提舍經) 5권승우는 “『마하승경(摩訶乘經)』이다”라고 하였다.
삼매왕경(三昧王經) 5권
범왕청문경(梵王請問經) 5권
불종도솔강중음경(佛從兜率降中陰經) 4권『왕종록(王宗錄)』에서 나왔다.
사천왕경(四天王經) 4권4부(部) 4본(本)이 아닌가 의심된다.
마왕청문경(魔王請問經) 4권
석제환인소문경(釋提桓因所問經) 3권
대범천왕청전법륜경(大梵天王請轉法輪經) 3권
법화광서보살현수경(法華光瑞菩薩現壽經) 3권지금의 『정법화경(正法華經)』에서 가려 뽑아서 베낀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보현보살답난이천경(普賢菩薩答難二千經) 3권
법천왕청불천수경(梵天王請佛千首經) 2권또 『대범천왕경(大梵天王經)』 2권이 이것과 같다.
보살상행경(菩薩常行經) 1권『구록』에 보인다.
형화육도경(熒火六度經) 1권『구록』에서는 『명도경(明度經)』 1권이 있는데, 일명 “『형화명도경(熒火明度經)』이다”라고 하였다.
내선바라밀경(內禪波羅蜜經) 1권『구록』에 보인다.
육바라밀경(六波羅蜜經) 1권『구록』에 보인다.
대총지신주경(大摠持神呪經) 1권『구록』에 보인다. 또한 『총지주경(摠持呪經)』이라고도 한다.
아유월치보살계경(阿惟越致菩薩戒經) 1권『구록』에는 보살(菩薩)이란 글자가 없다.
잡수경(雜數經) 20권『구록』에 보인다.
나선비유경(那先譬喩經) 4권『구록』에 보인다.
태자시예본기경(太子試藝本起經) 2권
심단련경(深斷連經) 2권
마하목건련여불각능경(摩訶目揵連與佛捔能經) 1권『구록』에 보인다.
아난득도경(阿難得道經) 1권『구록』에 보인다.
아난반니원경(阿難般泥經) 1권『구록』에 보인다.
아나율념부생경(阿那律念復生經) 1권『구록』에 보인다.
사문분위견괴이경(沙門分衛見怪異經) 1권『구록』에 보인다.
제자본행경(弟子本行經) 1권『구록』에 보인다. “『고승전(高僧傳)』에서는 백법조(白法祖)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위수진천자설법경(爲壽盡天子說法經) 1권『구록』에서는 “『명진천자경(命盡天子經)』이다”라고 하였다.
마시불경(魔試佛經) 1권『구록』에 보인다.
아수륜문팔사경(阿修倫問八事經) 1권『구록』에서는 “『아수륜소문팔사경(阿須倫所問八事經)』이다”라고 하였다.
마갈왕경(摩竭王經) 1권『구록』에서는 “『마갈국왕경(摩竭國王經)』이다”라고 하였다.
살파달왕경(薩波達王經) 1권『구록』에 보인다. 『승우록』에서는 “『보화달왕경(菩和達王經)』이다”라고 하였다.
연소왕경(年少王經) 1권『구록』에 보인다.
시광대자경(是光大28)子經) 1권『구록』에 보인다.
장자난제경(長子難提經) 1권『구록』에 보인다.
여리행경(女利行經) 1권『구록』에 보인다.
사부인연경(四婦因緣經) 1권『구록』에 보인다.
수다라경(須多羅經) 1권『구록』에서는 “『수다라입태경(須多羅入胎經)』이다”라고 하였다.
타가경(墮迦經) 1권『구록』에 보인다. 진나라 말晋言로 번역하면, 견강(堅强)이라 하며, 이미 진나라 말이므로 『진록(晋錄)』에 편입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혹은 수(隋)자로 쓰기도 한다.
반달용왕경(盤達龍王經) 1권『구록』에 보인다.
우미자공양경(牛米自供養經) 1권『구록』에는 양(養)자가 없다.
행목식우경(行牧食牛經) 1권『구록』에 보인다. 혹은 방(放)자로 쓰기도 한다.
타석가목우경(墮釋迦牧牛經) 1권『구록』에 보인다. 혹은 수(隨)자로 쓰기도 한다.
법엄경(法嚴經) 1권『구록』에 보인다. 곧 이 경은 『입법엄경(入法嚴經)』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벽사경(壁四經) 1권『구록』에 보인다.
지사중경(止寺中經) 1권『구록』에 보인다.
안반행도경(安般行道經) 1권『구록』에 보인다.
해혜미묘경(解慧微妙經) 1권『구록』에 보인다.
실도득도경(失道得道經) 1권『구록』에 보인다.
심정심식경(心情心識經) 1권『구록』에 보인다. “주(注)가 있다”라고 하였다.
검의향정경(撿意向正經) 1권『구록』에 보인다.
도덕과증경(道德果證經) 1권『구록』에 보인다.
부자인연경(父子因緣經) 1권『구록』에 보인다.
소관세루탄경(小觀世樓炭經) 1권『구록』에 보인다.
대사제경(大四諦經) 1권『구록』에 보인다.
오방편경(五方便經) 1권『구록』에 보인다.
오유월라명해설경(五惟越羅名解說經) 1권『구록』에 보인다.
오음경(五陰經) 1권『구록』에 보인다.
중오탁세경(中五濁世經) 1권『구록』에 보인다.
대칠거경(大七車經) 1권『구록』에 보인다.
팔정사경(八正邪經) 1권『구록』에 보인다. 승우는 “『팔정팔사경(八正八邪經)』이다”라고 하였다.
팔총지경(八摠持經) 1권『구록』에 보인다.
팔배경(八輩經) 1권『구록』에 보인다.
대십이인연경(大十二因緣經) 1권『구록』에 보인다.
십팔난경(十八難經) 1권『구록』에 보인다.
오십이장경(五十二章經) 1권『구록』에 보인다. 따로 『효명사십이장경(孝明四十二章經)』이 있다.
백팔애경(百八愛經) 1권『구록』에 보인다. 『오개의결경(五蓋疑結經)』에서 가려서 뽑아 베낀 것 같다.
소안반주삼매경(小安般舟三昧經) 1권『구록』에 보인다.
선수경(禪數經) 1권『구록』에 보인다.
군생게경(群生偈經) 1권『구록』에 보인다.
대계경(大戒經) 1권『구록』에 보인다.
의복제경(衣服制經) 1권『구록』에 보인다.
사미리위의경(沙彌離威儀經) 1권『구록』에 보인다.
도본오계경(道本五戒經) 1권『구록』에 보인다.
위의경(威儀經) 1권『구록』에 보인다. 『법경록(法經錄)』에는 경(經)자가 없다.
잡비유경(雜譬喩經) 80권『구록』에 보인다.
이상 87부는 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도 같이 기재되어 있다.
이상은 87부 261권이다.『부사의공덕소호념경』 등 4부 6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촉보요경』 등 83부 255권은 궐본이다.
『장방록(長房錄)』 등의 목록에는 위(魏)ㆍ오(吳)의 실역(失譯)이 총 110부 191권이 있는데, 모두 이는 『고록[古]』과 『구록[舊]』의 두 목록에서 역자를 알 수 없는 여러 경들[諸經]이다. 이제 이 경들을 여기에 덧붙이는 것은 세월이 오래되어 어디에도 근거할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지금 그 밖의 23부 30권은, 혹은 번역의 근원이 있는 것, 혹은 이름이 다르거나 다르게 부르는 것, 혹은 대부(大部)에서 파생된 것, 혹은 의심이 있거나 위경[疑僞]이어서 참되지 못한 것 등을, 이제 모두 지워 없애서 번거롭고 혼잡한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 경을 자세히 기술하면 아래와 같다.
불퇴전륜경(不退轉輪經) 4권북량(北涼)의 『실역록(失譯錄)』속에 기록된 경을 여기서 다시 기재한 것은 이 경이 중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승우록』에는 “안공(安公)이 북량 땅에서 번역한 다른 경은 지금은 『양록(涼錄)』에 실려 있다”라고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싣지 않는다.
소본기경(小本起經) 2권후한(後漢) 지요(支曜)가 번역한 것이다.
사배경(四輩經)혹은 『사배제자경(四輩弟子經)』, 또는 『사배학경(四輩學經)』이라고도 한다. 『법상록(法上錄)』에는 “서진(西晋) 축법호(竺法護)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체혜삼매경(逮慧三昧經)일명 『문수사리문보살십사행경(文殊師利問菩薩十事行經)』이라고도 한다. 단권(單卷)이며, 『월등경(月燈經)』의 다른 이름이다.
선행렴의경(禪行斂意經)또는 『선행검의경(禪行撿意經)』이라고도 한다. 『아나율팔념경(阿那律八念經)』의 다른 이름이다.
유수보살경(濡首菩薩經) 2권바로 『유수보살청정분위경(濡首菩薩淸淨分衛經)』인데, 이는 다만 간략하게 부른 이름이다.
도무극비경(度無極譬經) 3권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대품경(大品經)』에서 나왔다.
시가변왕경(尸呵遍王經)혹은 니(尼)자로 쓰기도 한다.
태자법혜경(太子法慧經)혹은 이 혜(惠)자를 쓰기도 한다. 『시가변왕경』과 이 경 2권은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음인예종행경(淫人曳踵行經)『의족경(義足經)』에서 나왔다.
인사명위도경(人詐名爲道經)
빈녀청경(貧女聽經)
사설명종경(蛇齧命終經)또한 『빈녀청경사설명종생천경(貧女聽經蛇齧命終生天經)』이라고도 한다.
국왕치부인경(國王癡夫人經)
매지혜경(賣智慧經)
초수도경(初受道經)
학경(學經)
복경(福經)『학경』과 『복경』은 같은 경이다.
팔부승행명경(八部僧行名經)
화비경(化譬經)또한 『화유경(化喩經)』이라고도 한다. 『인사명위도경』 등의 8경은 모두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나왔다.
오백바라문문유무경(五百婆羅門問有無經)『오백범지경(五百梵志經)』의 다른 이름이다.
살화보살경(薩和菩薩經)또한 『국왕살화보살경(國王薩和菩薩經)』이라고도 한다.
혜정보변신통보살경(慧定普遍神通菩薩經)또는 『혜정보변국토신통보살경(慧定普遍國土神通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빈녀인경(貧女人經)또한 『빈녀난타경(貧女難陀經)』이라고도 한다.
아추나경(阿秋那經)또한 『아추나삼매경(阿秋那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오백바라문문유무경』 등의 5경은 모두 『의위록(疑僞錄)』에 있다.

4) 서진(西晋) 시대
서진또한 북진(北晋)이라고도 한다 사마씨(司馬氏)는 낙양(洛陽)에 도읍하였다. 무제(武帝) 태시(太始) 원년 을유(乙酉, 265)로부터 민제(慜帝) 건흥(建興) 4년 병자(丙子, 316)에 이르기까지 무릇 4제(帝) 52년을 지나는 동안에 승려와 속인들 12인이 번역한 경(經)ㆍ계(戒)ㆍ집(集) 등과 신(新)ㆍ구(舊)ㆍ집(集) 실역(失譯)의 모든 경들은 총 330부(部) 도합 590권이다.그 중에서 156부 321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177부 269권은 궐본이다.

서진(西晋) 사문 축법호(竺法護)175부 354권 경(經)ㆍ계(戒)ㆍ집(集)
사문 강량루지(疆梁婁至)1부 1권 집
사문 안법흠(安法欽)5부 16권 경ㆍ집
사문 무라차(無羅叉)1부 30권 경
우바새 축숙란(竺叔蘭)2부 5권 경
사문 백법조(白法祖)16부 18권 경
사문 석법립(釋法立)4부 12권 경ㆍ집
사문 석법거(釋法炬)40부 50권 경ㆍ율
청신사(淸信士) 섭승원(聶承遠)2부 3권 경
청신사 섭도진(聶道眞)24부 36권 경ㆍ율
사문 지법도(支法度)4부 5권 경
사문 야라엄(若羅嚴)1부 1권 경
신구제실역경(新舊諸失譯經)58부 59권이다. 55부 56권은 『신집(新集)』에 실려 있고, 3부 3권은 『구집(舊集)』에 실려 있다.

(1) 축법호(竺法護)
광찬반야바라밀경(光讚般若波羅蜜經) 15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대반야경(大般若經)』 제2회(會)와 『방광대품(放光大品)』과는 모두 동본이다. 또한 『광찬마하반야경(光讚摩訶般若經)』이라고도 하며, 모두 27품(品)이다. 태강(太康) 7년(286) 11월 25일에 나왔다. 『도안록(道安錄)』과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밀적금강역사경(蜜迹金剛力士經) 7권혹은 5권, 혹은 4권, 혹은 8권으로 되어 있다. 태강 원년(280) 10월 8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또는 바로 『밀적경(蜜迹經)』이라고도 한다. 『지민도록(支敏度錄)』ㆍ『축도조록(竺道祖錄)』ㆍ『승우록(僧祐錄)』의 세 목록에 보인다. 지금의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3회(會)에 해당한다.
보살설몽경(菩薩說夢經) 2권『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지금의 『보적경』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4회에 해당한다. 이름을 고쳐 「정거천자회(淨居天子會)」라고 한다. 『법상록』에는 “축법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였다. 그러나 우선 『법상록』에 의거하여 정하여 둔다.
보계보살소문경(寶髻菩薩所問經) 2권일명 『보살정행경(菩薩淨行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바로 “『보계경(寶髻經)』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의 「보계품(寶髻品)」을 별도로 번역한 것이다. 태희(太熙) 원년(287) 7월 14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도진록(道眞錄)』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지금은 『보적경』에 편입되었는데, 제47회(會)에 해당한다.
보문품경(普門品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보문경(普門經)』이라고도 하며, 『보적경』의 「문수보문회(文殊菩門會)」와 같은 동본(同本)이다. 태강(太康) 8년(287) 정월 11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섭도진록(聶道眞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포태경(胞胎經) 1권『구록』에서는 “『포태수신경(胞胎受身經)』이다”라고 하였다. 태안(太安) 2년(303) 8월 1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의 「처태회(處胎會)」와는 동본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불토엄정경(文殊師利佛土嚴淨經) 2권혹은 바로 『엄정정토경(嚴淨淨土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불토엄정경(佛土嚴淨經)』이라고도 한다. 태희(太凞) 원년(290)에 번역되어 나왔다. 첫 번째의 번역이다. 『보적경』의 「문수수기회(文殊授記會)」와 같은 동본이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욱가라월문보살행경(郁迦羅越問菩薩行經) 1권혹은 『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이라고도 한다. 곧 『대욱가경(大郁伽經)』이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현(安玄)의 『법경경(法鏡經)』과 『보적경』의 「욱가장자회(郁伽長者會)」 등과는 동본이다. 『도안록(道安錄)』ㆍ『지민도록(支敏度錄)』ㆍ『승우록(僧祐錄)』의 세 목록에 보인다.
환사인현경(幻士仁賢經) 1권혹은 『인현환사경(仁賢幻士經)』이라 하며,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의 「수환사기회(授幻師記會)」와 동본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수마제경(須摩提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바로 『수마제보살경(須摩提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보적경』의 「묘혜회(妙慧會)」와 같은 동본이다. 『섭도진록』ㆍ『축도조록』ㆍ『승우록』 등 세 목록에 보인다.
아사세왕녀아술달보살경(阿闍貰王女阿術達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아사세녀경(阿闍貰女經)』, 또는 『아술달녀경(阿術達女經)』이라고도 한다. 건무(建武) 원년(317)에 번역되었다. 『섭도진록』ㆍ『지민도록』ㆍ『승우록』 등 세 목록에서 보인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는 따로 『무우시경(無憂施經)』이 있고, 『승우록』에서는 다시 『아사세왕녀경(阿闍貰王女經)』이 실려 있다. 두 가지 모두 착오이다.
이구시녀경(離垢施女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태강(太康) 10년(289) 12월 2일에 번역되었다. 『보적경』의 「무구시회(無垢施會)」와 같은 동본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내전록(內典錄)』속에 다시 『무구시응변경(無垢施應辯經)』이 실려 있는데, 착오이다. 이것은 섭도진(聶道眞)의 번역이며, 뒤에서 나타낸 바와 같다.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3권, 또는 4권으로 되어 있다. 『보적경』의 「선주의회(善住意會)」와 같은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태자쇄호경(太子刷護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보적경』의 「아사세왕자회(阿闍世王子會)」와 같은 동본이다.
혜상보살문대선권경(慧上菩薩問大善權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1권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태강(太康) 6년(285) 6월 17일에 번역되었다. 혹은 『대선권경(大善權經)』ㆍ『혜상보살경(慧上菩薩經)』ㆍ『선권방편경(善權方便經)』ㆍ『선권방편소도무극경(善權方便所度無極經)』이라고도 한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미륵보살소문보원경(彌勒菩薩所問本願經) 1권처음 나왔다. 태안(太安) 2년(303) 5월 12일에 번역되었다. 혹은 소문(所問)이란 두 글자가 없기도 하다. 또한 『미륵본원경(彌勒本願經)』, 또는 『미륵난경(彌勒難經)』이라고도 한다. 『보적경』의 「미륵소문회(彌勒所問會)」와 같은 동본이다. 『섭도진록』ㆍ『축도조록』ㆍ『승우록』 세 목록에 보인다.
아차말경(阿差末經) 7권표제에 “진(晋)나라에서는 『무진의경(無盡意經)』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혹은 4권, 또는 5권으로 되어 있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원가(元嘉) 원년(307) 11월 1일에 번역되었다. 혹은 보살(菩薩)이라는 글자를 붙이기도 한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는 『무진의경』 4권을 거듭 싣고 있는데, 이것은 착오다.
대애경(大哀經) 8권『구록』에서는 “『여래대애경(如來大哀經)』이다”라고 하였다. 원강(元康) 원년(291) 7월 7일에 번역하여 8월 23일에 마쳤으며, 마침내 28품(品)이 되었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의 「초품(初品)」을 따로 번역한 것이다. 혹은 6권, 또는 7권으로 되어 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3권태강(太康) 8년(287) 4월 27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경은 『대집경(大集經)』의 「보녀품(寶女品)」의 다른 번역이다.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바로 『보녀문혜경(寶女問慧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보녀삼매경(寶女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무언동자경(無言童子經) 2권혹은 『무언보살경(無言菩薩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대집경』 「무언품(無言品)」의 다른 번역이다. 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십주행도품(菩薩十住行道品) 1권이 경은 『화엄경』 「십주품(十住品)」의 다른 번역이다. 수(隋)나라 사문의 법경(法經)의 『중경목록』에 보인다. 승우와 장방의 목록에서는 다만 『보살십주경菩薩十住』에만 보인다고 하였다. 바로 「행도품(行道品)」이 이것이다.
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 5권일명 『십주경(十住經)』, 또는 『대혜광삼매경(大慧光三昧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원강(元康) 원년(291) 11월 21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 경은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다른 번역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등목보살소문삼매경(等目菩薩所問三昧經) 2권일명 『보현보살정의경(普賢菩薩定意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등목보살경(等目菩薩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은 『신화엄경』 「십정품(十定品)」의 다른 번역이데, 구화엄경舊經에는 이 품이 없었다. 『승우록』에 보인다.
여래흥현경(如來興顯經) 4권일명 『흥현여환경(興顯如幻經)』이라고도 한다. 원강(元康) 원년(291) 12월 25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 경은 『화엄경』 「여래성기품(如來性起品)」과 「십인품(十忍品)」의 다른 번역이다. 『섭도진록』ㆍ『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도세품경(度世品經) 6권혹은 『도세경(度世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원강 원년(291) 4월 13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 경은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의 다른 번역이다. 『섭도진록』ㆍ『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방등반니원경(方等般泥洹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수(隋)나라 때 번역한 『사동자경(四童子經)』과 동본(同本)이다. 혹은 반(般)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이라고도 한다. 태시(太始) 5년(269) 7월 23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보요경(普曜經) 8권일명 『방등본기경(方等本起經)』이라고도 하며, 안공(安公)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영가(永嘉) 2년(308) 5월에 천수사(天水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사문 강수백(康殊白)과 법거(法巨) 등이 받아썼다. 『고록(古錄)』ㆍ『섭도진록』ㆍ『승우록』 세 목록에 보인다.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혹은 『방등정법화경(方等正法華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7권으로 되어 있다, 27품(品)이다. 태강(太康) 7년(286) 8월 10일에 나왔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청신사(淸信士) 장사명(張士明)과 장중정(張仲正)ㆍ섭승원(聶承遠) 등이 받아썼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대방등정왕경(大方等頂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안공(安公)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또한 바로 『정왕경(頂王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유마힐자문경(維摩詰子問經)』, 또는 『선사동자경(善思童子經)』 등 무릇 네 가지 이름이 있다. 『지민도록(支敏度錄)』과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불승도리천품경(佛昇忉利天品經)』이라고도 하며, 『도신족경(道神足經)』과 같은 동본(同本)이다. 태시(太始) 연간(265~274)에 나왔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아유월치차경(阿維越致遮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아유월치경(阿維越致經)』이라고도 한다. 태강(太康) 5년(284) 10월 14일에 돈황(燉煌)에서 나왔다. 『불퇴전경(不退轉經)』과 『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과는 동본이역(同本異譯)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등집중덕삼매경(等集衆德三昧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구록』에서는 “『등집중덕경(等集衆德經)』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바로 『등집경(等集經)』이라고도 하였다. 『집일체복덕경(集一切福德經)』과 같은 동본이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지심범천경(持心梵天經) 4권일명 『장엄불법경(莊嚴佛法經)』, 또는 『등어제법경(等御諸法經)』이라고도 한다. 무릇 17품(品)이다. 혹은 6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소문(所問)이란 두 글자를 더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바로 『지심경(持心經)』이라고도 한다. 태강(太康) 7년(286) 3월 10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섭승원이 받아썼다. 『구록』ㆍ『섭도진록』ㆍ『승우록』 세 목록에 보인다.
지인보살경(持人菩薩經) 4권처음에는 『지인보살소문음종제입이요도혜경(持人菩薩所問陰種諸入以了道慧經)』이라 하였으며,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지세경(持世經)』과는 동본이역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제제방등학경(濟諸方等學經) 1권천축(天竺)에서는 『살화비일승가(薩和鞞日僧伽)』라고 한다. 혹은 학(學)자가 없기도 하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방광총지경(方廣惣持經)』과 동본이다. 『축도조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현보장경(文殊師利現寶藏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현(現)자가 없기도 하다. 『방광보협경(方廣寶篋經)』과 같은 동본이다. 태시(太始) 6년(270) 10월에 나왔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바로 『보장경(寶藏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장방록』에는 따로 『보장경(寶藏經)』 2권을 싣고 있는데, 잘못이 지나치다.
무극보삼매경(無極寶三昧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무극보경(無極寶經)』이라고도 한다. 『보여래삼매경(寶如來三昧經)』과는 동본이다. 영가(永嘉) 원년(307) 3월 3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별록(別錄)』과 『섭도진록』ㆍ『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 3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일명 『아사세왕품경(阿闍世王品經)』이라고도 한다. 태강(太康) 7년(286) 12월 27일에 나왔다. 혹은 삼매(三昧)란 글자가 없기도 하며, 혹은 위에다 문수사리(文殊師利)를 덧붙인 것도 있다. 『안록(安錄)』에는 “다시 번역하여 낸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이다”라고 하였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무소희망경(無所希望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이 희(稀)자를 쓰기도 한다. 일명 『상보경(象步經)』이라고도 한다. 『상액경(象腋經)』과 같은 동본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대정법문경(大淨法門經) 1권표제에는 “『대정법문품상금광수녀소문부수동진소개화경(大淨法門品上金光首女所問溥首童真所開化經)』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장엄법문경(大莊嚴法門經)』과 같은 동본이다. 건흥(建興) 원년(304) 12월 26일에 나왔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순권방편경(順權方便經) 2권일명 『전녀신보살경(轉女身菩薩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유권(惟權)으로 쓰기도 한다. 『구록』에서는 “『순권녀경(順權女經)』, 또는 『수권녀경(隨權女經)』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는 따로 『수권녀경』이 실려져 있는데, 착오이다.
태자목백경(太子沐魄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육도집경(六度集經)』 제4권의 이역이며, 혹은 모백(暮魄)으로 쓰기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월광동자경(月光童子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월명동자경(月明童子經)』, 또는 『신일경(申日經)』이라고도 한다. 『덕호장자경(德護長者經)』과 같은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유광불경(乳光佛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유광경(乳光經)』이라고도 한다. 『독자경(犢子經)』과 같은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었다. 『승우록』에 보인다.
무구현녀경(無垢賢女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태장경(胎藏經)』이라고도 한다. 『전녀신경(轉女身經)』과 같은 동본이다. 『섭도진록』에 보인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 『태장경』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 경이 『무구현녀경』이다.
결정총경(決定摠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결총지경(決摠持經)』이라고도 한다. 『방불경(謗佛經)』과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여래독증자서삼매경(如來獨證自誓三昧經) 1권또한 『독증자서삼매경(獨證自誓三昧經)』, 또는 『여래자서삼매경(如來自誓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한(漢)나라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자서삼매경(自誓三昧經)』과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용시보살본기경(龍施菩薩本起經) 1권『구록』에서는 “『용시본경(龍施本經)』, 또는 『용시녀경(龍施女經)』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용시녀경』과는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팔양신주경(八陽神呪經) 1권또한 바로 『팔양경(八陽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팔길상주경(八吉祥呪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우란분경(盂蘭盆經) 1권또한 『우란경(盂蘭經)』이라고도 하며, 『보은봉분경(報恩奉盆經)』과는 동본이다. 『장방록』에서 보인다.
사불가득경(四不可得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섭도진록(聶道眞錄)』ㆍ『정도록(正度錄)』ㆍ『승우록』 등의 세 목록에 보인다.
범녀수의경(梵女首意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수의녀경(首意女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보망경(寶網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보망동자경(寶網童子經)』이라고도 한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보살행오십연신경(菩薩行五十緣身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구록』에서는 “『보살연신오십사경(菩薩緣身五十事經)』, 또는 『오십연신행경(五十緣身行經)』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축도조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수진천자경(須眞天子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소문(所問)이란 두 글자를 덧붙여 쓰기도 하며, 또한 『문사사경(問四事經)』이라고도 한다. 태시(太始) 3년(267) 11월 8일에 장안(長安) 청문(靑門) 밖의 백마사(白馬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는데, 안문혜(安文惠) 등이 전하고, 섭승원(聶承遠) 등이 붓으로 받아썼으며, 12월 13일에야 마쳤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서 보인다.
해룡왕경(海龍王經) 4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태강(太康) 6년(285) 7월 10일에 나왔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제불요집경(諸佛要集經) 2권천축에서는 『불타승기제(佛陁僧祇提29))』라 하며, 또한 바로 『요집경(要集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현겁경(賢劫經) 13권표제에서는 “『발타겁삼매경(颰陁劫三昧經)』이다”라고 하였으며, 진록(晉錄)에서는 “『현겁정의경(賢劫定意經)』이다”라고 하였다. 영강(永康) 원년(300) 7월 21일에 나왔는데, 조문룡(趙文龍)이 받아썼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7권, 또는 10권으로 되어 있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장방록』 등에는 따로 『발타겁삼매경(颰陁劫三昧經)』이 있는데, 착오이다.
홍도광현삼매경(弘道廣顯三昧經) 4권일명 『아뇩달용왕소문결제호의청정품(阿耨達龍王所問決諸狐疑淸淨品)』, 또는 『입금강문정의경(入金剛問定意經)』이라고도 한다. 모두 12품(品)이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영가(永嘉) 2년(308) 3월에 나왔다. 『축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내전록(內典錄)』에서는 따로 『아뇩달경(阿耨達經)』을 실었는데, 착오이다.
심명경(心明經) 1권일명 『심명녀범지부반즙시경(心明女梵志婦飯汁施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멸시방명경(滅十方冥經) 1권광희(光熙) 원년(306) 8월 14일에 나왔다. 혹은 『시방멸명경(十方滅冥經)』이라고도 한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녹모경(鹿母經) 1권또한 따로 『녹자경(鹿子經)』 1권이 있는데, 이 경과는 전부 똑같다. 『승우록』에 보인다.
마역경(魔逆經) 1권태강(太康) 10년(289) 12월 2일에 낙양성(洛陽城)의 사백마사(四白馬寺)에서 번역되었는데, 섭도진이 받아썼다. 『승우록』과 경의 후기經後記에 보인다.
덕광태자경(德光太子經) 1권혹은 『뇌타화라소문광덕태자경(賴吒和羅所問光德太子經)』이라고도 한다. 태시(太始) 6년(270) 9월 30일에 번역되었다. 『축도조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반니원후관랍경(般泥洹後灌臘經) 1권혹은 『반니원후사배관랍경(般泥洹後四輩30)灌臘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관상경(灌像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사배경(四輩經) 1권혹은 『사배제자경(四輩弟子經)』, 또는 『사배학경(四輩學經)』이라고도 한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당래변경(當來變經) 1권혹은 『당래변식경(當來變識經)』이라고도 한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과거불분위경(過去佛分衛經) 1권『구록』에서는 “『과세불분위경(過世佛分衛經)』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정률경(文殊師利淨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바로 『정률경(淨律經)』이라고도 한다. 태강(太康) 10년(289) 4월 8일에 백마사(白馬寺)에서 번역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역(西域)의 적지(寂志)를 만나 경본을 외어 냈는데, 마지막에 오히려 수품(數品)이 남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잊어버렸다. 다만 기억을 잘하던 도진(道眞)만이 받아썼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문수회과경(文殊悔過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사리(師利)라는 글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또한 『문수오체회과경(文殊五體悔過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수경(離睡經) 1권『중아함경』 제20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수세경(受歲經) 1권『중아함경』 제23권의 맨 첫 번째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낙상경(樂想經) 1권『중아함경』 제26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존상경(尊上經) 1권『중아함경』 제4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의경(意經) 1권『중아함경』 제45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응법경(應法經) 1권역시 『중아함경』 제45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앙굴마경(鴦崛摩經) 1권혹은 마(魔)자로 쓰기도 한다. 혹은 『지계경(指髻經)』, 또는 『지만경(指鬘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3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역사이산경(力士移山經) 1권또한 바로 『이산경(移山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증일아함경』 제36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사미증유법경(四未曾有法經) 1권혹은 법(法)자가 없기도 하다. 또한 『사미유경(四未有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또한 『증일아함경』 제36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성법인경(聖法印經) 1권천축에서의 이름은 『아차담마문도(阿遮曇摩文圖)』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3권에서 나왔다. 혹은 법(法)자가 없기도 하다. 또한 『혜인경(慧印經)』이라고도 한다. 원강(元康) 4년(291) 12월 5일에 주천군(酒泉郡)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수(竺法首)가 받아썼다. 『도진록(道眞錄)』ㆍ『보창록(寶唱錄)』ㆍ『승우록(僧祐錄)』의 세 목록에 보인다.
사두간경(舍頭諫經) 1권표제에는 “『사두간(舍頭諫)』이다”라고 하였다. 진록에는 “『태자이십팔숙경(太子二十八宿經)』, 또는 『호이경(虎耳經)』이다”라고 하였다. 『마등가경(摩登伽經)』과 같은 동본이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안세고世高가 번역하여 낸 경과는 조금 다르다. 『도안록(道安錄)』에 보인다. 『승우록』에는 “『호이의경(虎耳意經)』이다”라고 하였다.
소욕치환경(所欲致患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태안(太安) 3년(304) 정월에 번역하였다. 『섭도진록』ㆍ『왕종록(王宗錄)』ㆍ『승우록』 세 목록에 보인다.
유리왕경(瑠璃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유리(流離)로 쓰기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생경(生經) 5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태강(太康) 6년(285) 정월 19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55경이 있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분별경(分別經) 1권『구록』에서는 “『아난분별경(阿難分別經)』과 같은 동본이다”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오백제자자설본기경(五百弟子自說本起經) 1권태안(太安) 2년(303) 5월에 번역되었다. 혹은 『불오백제자자설본기경(佛五百弟子自說本起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오백제자자설본말경(五百弟子自說本末經)』, 또는 『오백제자본기경(五百弟子本起經)』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대가섭본경(大迦葉本經) 1권혹은 『가섭본경(迦葉本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사자침경(四自侵經) 1권안공(安公)은 “아비담(阿毘曇)31)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신관경(身觀經) 1권『잡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하였는데, 조사하여 보았으나 없었다. 『장방록』에 보인다.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 6권첫 권의 제목에는 “『유차가부미경(楡遮伽復彌經)』이라 하며, 진(晋)나라에서는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태강(太康) 5년(284) 2월 23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7권으로 되어 있으며, 27품(品)이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바로 『수행경(修行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법관경(法觀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있고, 이 이하의 경본들은 궐본이다.
신도행경(新道行經) 10권또한 『소품(小品)32)』이라고도 하며, 혹은 7권으로 되어 있다. 승우는 “다시 『소품(小品)』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시(太始) 8년(372)에 번역되었다. 네 번째로 나왔다. 구역 『도행경(道行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는 다시 『소품』 7권이 실려 있으나, 착오이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 보인다. 그러나 소장되어 있는藏中 것은 이 책이 아니며, 먼저 것은 이미 궐본이 되었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1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31지(紙)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진세잡록(晋世雜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무량수경(無量壽經) 2권일명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이라고도 한다. 영가(永嘉) 2년(308) 정월 21일에 나왔다. 여섯 번째의 번역이다. 한(漢)나라 안세고(安世高)와 지참(支讖) 등이 번역해 낸 경본과는 동본이나, 번역이 다르다. 『축도조록』ㆍ『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장경(菩薩藏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2권안공(安公)의 목록에도 또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을 번역하여 냈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의 번역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 1권또한 『대방광경(大方廣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십지경(十地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살운분타리경(薩芸芬陁利經) 6권태시(太始) 원년(265)에 번역되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에 보인다. 두 번째로 나왔다. 『수록(隋錄)』에서 『살담운(薩曇芸)』이라 한 것은 아마 착오일 것이다. 『승우록』에는 없다.
유마힐소설법문경(維摩詰所說法門經) 1권태안(太安) 2년(303) 4월 1일에 번역되었다. 네 번째로 나왔다. 『섭도진록』에 보인다. 『승우록』에서는 바로 “『유마힐경(維摩詰經)』이다”라고 한다. 『승우록』에는 또 『산유마힐경(刪維摩詰經)』이 있는데, 승우는 “먼저 번역해 낸 『유마힐경』이 번거롭고 겹친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보호하고 삭제하면서 없어진 게송逸偈을 역출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한거경(閑居經) 1권『비화경(悲華經)』과 같은 동본이역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갱출아사세왕경(更出阿闍世王經) 2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안록(安錄)을 준해서 보면, 다만 『갱출아사세왕경』만이 있고,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은 없었다. 『승우록』과 『장방록』에는 이 두 경을 모두 싣고 있지만, 범본(梵本)은 동일하므로, 거듭 역출하였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미륵당래하생경(彌勒當來下生經)』이라고도 한다. 태안(太安) 2년(303)에 나왔다. 17지(紙)로 되어 있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패다수하사유십이인연경(貝多樹下思惟十二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온실세욕중승경(溫室洗浴衆僧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바로 『온실경(溫室經)』이라고도 한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백불명경(百佛名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는 “경(經)자가 없다”고 했다. 『승우록』에 보인다.
광세음대세지수결경(光世音大勢至受決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원강(元康) 연간(291~299)에 나왔다. 또한 바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이라고도 한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용복정경(勇伏定經) 2권안공(安公)은 “다시 『수능엄경首楞嚴』이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원강 원년(291) 4월 9일에 나왔는데, 섭승원(聶承遠)이 붓으로 받아썼다. 여섯 번째의 번역이다. 『섭도진록』ㆍ『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는 다시 『수능엄경首楞嚴』 2권을 싣고 있는데, 잘못이다.
무사의광해동보살경(無思議光孩童菩薩經) 1권또한 『무사의해동경(無思議孩童經)』, 또는 『무사의광경(無思議光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바로 『해동경(孩童經)』이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초일명삼매경(超日明三昧經) 2권태시(太始) 7년(271) 정월에 번역되었다. 처음 나왔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바로 『초일명경(超日明經)』이라고도 한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조명삼매경(照明三昧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유명삼십게경(惟明三十偈經) 1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오대(吳代)의 지겸(支謙)이 역출한 경과는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법몰진경(法沒盡經) 1권혹은 『공적보살소문경(空寂菩薩所問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이 역출한 경과는 동본이다. 혹은 『법멸진경(法滅盡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제신주경(諸神呪經) 3권『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보살경(文殊師利菩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소욱가경(小郁伽經) 1권『대욱가경(大郁伽經)』과는 같지 않다. 『승우록』에 보인다. 혹은 가(迦)자로 쓰기도 한다.
제방불명공덕경(諸方佛名功德經) 1권『승우록』에는 공덕(功德)이란 글자가 없다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 보인다.
시방불명경(十方佛名經) 1권승우록』에는 경(經)자가 없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 보인다.
자인문팔십종호경(慈仁問八十種好經) 1권혹은 바로 『팔십종호경(八十種好經)』이라고도 한다. 『도안록(道安錄)』과 『장방록』에 보인다.
삼십이상인연경(三十二相因緣經) 1권혹은 『보살삼십이상경(菩薩三十二相經)』이라고도 한다. 『도안록』과 『장방록』에 보인다.
엄정정경(嚴淨定經) 1권일명 『서세경(序世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보시녀경(寶施女經) 1권일명 『수마제법률삼매경(須摩提法律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과 『섭도진록』에 보인다.
금익장자자경(金益長者子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이구개경(離垢盖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혜명경(慧明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중우경(衆祐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삼전일명경(三轉日明經) 1권『승우록』에서는 “『월명경(月明經)』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십등장경(十等藏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결도속경(決道俗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식중덕본경(殖衆德本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소법몰진경(小法沒盡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맹시경(猛施經) 1권『구록』에서는 “『맹시도지경(猛施道地經)』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목련상정거천경(目連上淨居天經) 1권어떤 본에는 천(天)자가 없다. 장방은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재법경(菩薩齋法經) 1권혹은 경(經)자가 없고, 혹은 법(法)자가 없기도 하다. 일명 『보살정재경(菩薩正齋經)』, 또는 『지재경(持齋經)』, 또는 『현수보살재법경(賢首菩薩齋法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장방록』에 보인다. 두 목록에는 따로 『보살재경(菩薩齋經)』을 실었는데, 착오이다.
사리불회과경(舍利弗悔過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바로 『회과경(悔過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불회과경(佛悔過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대륙향배경(大六向拜經) 1권『구록』에는 대(大)자가 없다. 태안(太安) 원년(302)에 번역되었다. 혹은 『시가라월육향배경(尸迦羅越六向拜經)』이라고도 한다. 『장아함경(長阿含經)』 제11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지민도록(支敏度錄)』ㆍ『승우록(僧祐錄)』ㆍ『보창록(寶唱錄)』 세 목록에 보인다.
육십이견경(六十二見經) 1권또는 『범망육십이견경(梵網六十二見經)』이라고도 한다. 『축도조록(竺道祖錄)』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장아함경』 제14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누탄경(樓炭經) 6권혹은 5권 또는 8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아함경』 제4분(分) 『기세경(記世經)』의 이역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안공(安公)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보법의경(普法義經) 1권또는 『보의경(普義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때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경본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사리불목련유제국경(舍利弗目連遊諸國經) 1권혹은 『사리불마목건련유제사구경(舍利弗摩目揵連遊諸四衢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4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내녀기역경(㮈女耆域經) 1권혹은 『내녀경(㮈女經)』이라고도 한다. 태안(太安) 연간(302~303)에 번역되었다. 두 번째로 나왔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칠녀본경(七女本經) 1권혹은 『내녀경(奈女經)』이라고도 한다. 태안 연간(302~303)의 번역되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오개의결실행경(五盖疑結失行經) 1권영녕(永寧) 2년(302) 4월 12일에 나왔다. 첫 번째 번역이다. 안공(安公)은 “축법호(竺法護)가 역출한 것과는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불위보살오몽경(佛爲菩薩五夢經) 1권태안 2년(303) 5월에 번역되었다. 두 번째로 나왔다. 일명 『불오몽경(佛五夢經)』, 또는 『태자오몽경(太子五夢經)』, 또는 『선인오몽경(仙人五夢經)』이라고도 한다. 『구록』과 『섭도진록』ㆍ『승우록』 두 목록에서 보인다.
마목건련본경(摩目揵連本經) 1권어떤 본에는 하(訶)자가 있기도 하고, 건(揵)자가 없기도 하다. 『승우록』에서 보인다.
오복시경(五福施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관행불이사사경(觀行不移四事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사부유경(四婦喩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여이긍경(廬夷亘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압라왕경(廅羅王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단야경(檀若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용시경(龍施經) 1권이 경은 지금의 『용시보살본기경(龍施菩薩本起經)』이 아닌가 싶다. 『승우록』에 보인다.
급고독명덕경(給孤獨明德經) 1권『구록』에서는 “『급고독씨경(給孤獨氏經)』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용왕형제타달계왕경(龍王兄弟陁達誡王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권화왕경(勸化王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안왕경(鴈王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안왕오백안구경(鴈王五百鴈俱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해무상경(解無常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성유경(城喩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항룡경(降龍經) 1권『장방록(長房錄)』에 보인다.
사법경(邪法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범죄경(犯罪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고응경(苦應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삼품수행경(三品修行經) 1권또는 『삼품회과경(三品悔過經)』이라고도 한다. 안공(安公)은 “근대의 사람이 『대수행경(大修行經)』을 합쳤다”라고 하였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 보인다. 따로 『삼품회과경』을 실어 둔 것은 착오이다.
부나라경(夫那羅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고객경(賈客經) 2권『승우록』에 보인다.
사문과증경(沙門果證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지금의 『적지과경(寂志果經)』과 동본이 아닌가 싶다.
빈녀위국왕부인경(貧女爲國王夫人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계왕경(誡王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계구경(誡具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계라운경(誡羅云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비구니계(比丘尼戒) 1권승우는 “『비구니계경(比丘尼戒經)』이다”라고 하였다. 『십송률(十誦律)』에서 나왔다. 담마지(曇摩持)33)가 번역하여 낸 것과는 조금 다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가섭결집전경(迦葉結集傳經) 1권혹은 전(傳)자가 없기도 하다. 『구록』에서는 “『가섭결경(迦葉結經)』, 또는 『결집계경(結集戒經)』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는 “『가섭집결경(迦葉集結經)』이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섭도진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기사굴산해(耆闍崛山解) 1권『승우록』에 보인다.
잡비유삼백오십수경(雜譬喩三百五十首經) 25권승우는 “『비유삼백수경(譬喩三百首經)』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나타나 있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175부 354권이다.『법관경(法觀經)』 이상 91부 208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신도행경(新道行經)』 이하의 84부 146권은 궐본이다.

사문 축담마라찰(竺曇摩羅刹)은 중국말로는 법호(法護)라고 한다. 그 선조는 월지국(月氏國)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지(支)씨이며, 대대로 돈황군(燉煌郡)에서 살았다.
나이 여덟 살에 출가하여 외국 사문 축고좌(竺高座)를 스승으로 섬겼으므로, 마침내 축(竺)이라는 성씨로 불렀다.진(秦)ㆍ진(晋) 이전의 사문은 대개 스승의 성씨를 따라 불렀으나, 뒷날 미천(彌天) 도안(道安)으로 인하여 모두 석씨(釋氏)로 부르게 되었다. 경을 매일 만 마디[萬言]씩 읽어서 한 번 보기만 하여도 다 알았다.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절조 있는 행동은 정밀하고 엄격하였다. 뜻이 돈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스승이 만 리 밖에 있다 하여도 찾아 갔다. 이 때문에 육경(六經)34)을 널리 보았고, 마음이 칠적(七籍)35)에서 노닐었다. 그는 세상의 비방과 칭송을 일찍이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당시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에 비록 경읍(京邑)에 사묘(寺廟)와 불상이 존숭되기는 하였으나, 방등(方等)의 심오한 경은 총령(葱領) 밖에 모여 있었다. 법호는 이를 한탄하면서 분발하여 불도를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드디어 스승을 따라 서역(西域)으로 가서 여러 나라를 차례로 돌아다녔다. 외국의 다른 언어가 서른여섯가지이며 서적도 역시 그와 같았는데, 법호는 그것을 두루 배웠다. 훈고(訓詁)36)를 익혔으며, 음과 뜻과 글자의 체(體)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많은 범경(梵經)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돈황(燉煌)에서 장안(長安)에 이르렀고, 뒤에 낙양(洛陽)으로 왔다가, 강좌(江左)로 갔었는데, 오는 길에서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무제(武帝) 태시(太始) 2년 병술(丙戌, 266)로부터 민제(慜帝) 건흥(建興) 원년 계유(癸酉, 313)에 이르기까지 『광찬반야바라밀경(光讚般若波羅蜜經)』 등 175부(部)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청신사(淸信士) 섭승원(聶承遠)과 그의 아들 도진(道眞)ㆍ축법수(竺法首)ㆍ진사륜(陳士倫)ㆍ손백호(孫伯虎)ㆍ우세아(虞世雅) 등이 모두 함께 법호의 뜻을 받들어 집필하고 자세히 교정하였다.
법호는 부지런히 애쓰면서 오직 교를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것을 업으로 삼아 종신토록 베끼고 번역하면서 힘이 들어도 싫증내지 않았다. 경법이 중국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법호의 노력이었다.
말년에는 깊은 산에서 숨어 살았는데, 산에는 맑은 계곡물이 있어 그 물에 항상 목욕하고 양치질하였다. 후에 나무하는 사람들이 물가를 더럽히자 얼마 가지 않아 물이 말라 버렸다. 이에 법호는 배회하면서 탄식하였다.
“사람이 덕이 없어 끝내는 맑은 샘을 그치게 하였구나. 물이 영원히 말라 버린다면 참으로 자급(自給)할 수 없으니 당장 옮겨 가야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샘물이 솟아올라 계곡물이 넘실댔다. 그의 깊은 정성이 감응하는 바가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지둔(支遁)은 그의 상(像)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찬(贊)문을 지었다.

법호공(法護公)의 맑고 고요함이여
그의 도덕은 깊고도 아름다워라.
골자기를 덮는 은미한 읊조림에
마른 샘에서 물이 솟아났네.

아득하여라. 법호공의 경지여
하늘이 내린 도량과 아름다움일세.
발을 유사(流沙)에서 씻고 건너
현묘한 경지를 얻게 되었네.

그 뒤로는 장안 청문(靑門)밖에 절을 세우고 부지런히 도를 행하였다. 이에 덕화(德化)가 멀리까지 퍼졌고, 그의 명성이 사방 먼 데까지 뒤덮였으며, 승려 수천 명이 모두 그를 종장(宗匠 : 스승)으로 섬겼다.
진나라 혜제[惠] 때(290~306)에 서쪽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관중(關中) 지방이 어지러워 백성들이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법호는 문도들과 함께 피난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민지(澠池)에 이르렀는데, 이때 병이 들어 입적하게 되니, 춘추는 78세였다.
법호는 회제懷, 307~312ㆍ민제愍, 313~316 때에도 다시 경을 역출하였으니, 전하는 말에 “법호가 혜제(惠帝, 290~306) 때 서쪽 장안으로 갔고,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나와 민지에 이르러서 입적하였다”는 것은 혹 옳지 않은 것 같다.
법호는 대대로 돈황에서 살아, 그가 행한 법의 교화가 두루 미쳤다. 그때에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돈황보살(燉煌菩薩)이라고 불렀었다. 여러 기록에서 그를 월지보살(月支菩薩)이라 하거나, 또한 천축보살(天竺菩薩)이라 한 것은, 이 모두가 그의 덕을 존중하여 그의 이름을 찬미한 것이다. 그리고 법호는 중국에서 번역하여 부른 이름이요, 담마라찰(曇摩羅刹)은 서방의 범어로 부르는 이름인데, 양(梁)나라 『승우록(僧祐錄)』과 수(隋)나라 『법경록(法經錄)』에는 두 사람으로 여겨 각기 따로 경을 역출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것은 좀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이다. 이제 여러 목록을 자세히 검토하면 법호가 번역하여 낸 경에는 다소 일정하지 못한 점이 있다. 『장방록(長房錄)』에는 보다 더 많은데, 이제 자세히 찾아 묶어 보면 대개 이는 따로 파생한別生 경이요, 법호의 번역이 아니므로, 그가 직접 역경한 경전의 수효에 넣기에는 합당하지 않다. 이제는 진실한 기록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두 그것들을 삭제한 것이니. 아래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사자월불본생경(師子月佛本生經)혹은 본(本)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 등의 모든 목록에는 “법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글을 자세히 보니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실역(失譯)으로 하여 『진록(秦錄)』에 편입시켰다.
법사경(法社經)세상에서는 일찍이 이 경본을 보고, 이 사람이 지은 것인가 의심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의록(疑錄)』에 편입시킨다.
보녀문혜경(寶女問慧經)
범왕변신경(梵王變身經)이상 2경은 『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사자재신통경(四自在神通經)『자재왕경(自在王經)』에서 나왔다.
금강장보살행경(金剛藏菩薩行經)『참비경(斬備經)』에서 나왔다.
광세음경(光世音經)『정법화경(正法華經)』에서 나왔다.
보일광명보살경(寶日光明菩薩經)또한 『보일광명보살문연화국상모경(寶日光明菩薩問蓮華國相貌經)』이라고도 한다. 『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보수동진경(普首童眞經)혹은 부(溥)자를 쓰기도 한다. 『보초경(普超經)』에서 나왔다.
수람본경(隨藍本經)
마왕경(馬王經)
미륵위녀신경(彌勒爲女身經)
마조왕경(摩調王經)『수람본경』 이하의 4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보살회과법경(菩薩悔過法經)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용수십주론(龍樹十住論)』에서 나왔다.
인종소래경(人從所來經)또한 『인소종래경(人所從來經)』이라고도 한다. 『인본욕생경(人本欲生經)』에서 나왔다.
빈궁경(貧窮經)
하고경(何苦經)위의 『빈궁경』 등 2경은 모두 『중아함경』에서 나왔다.
칠보경(七寶經)『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의왕경(醫王經)
실비리천자예불설게경(悉鞞梨天子詣佛說偈經)
사종인경(四種人經)『의왕경』 이하 3경은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한거경(閑居經)
총지경(惣持經)혹은 『불심총지경(佛心摠持經)』이라고도 한다.
복사경(腹使經)
밀구경(蜜具經)
잡찬경(雜讚經)『한거경』 이하 5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여인욕치황미경(女人慾熾荒迷經)
다문경(多聞經)
오의경(寤意經)이상의 3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보녀문혜경(寶女問慧經)』 이하 27경은 모두 따로 만들어진 초경(抄經)이며, 대부(大部)로부터 나왔으므로, 지금은 모두 삭제한다.
중경목록(衆經目錄) 1권법호 자신이 지었으므로 범본(梵本)의 번역이 아니다. 목록에서 이것을 열거하여 서술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기술하지 않았다.

(2) 강량루지(疆梁婁至)
십이유경(十二遊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강량루지는 중국말로는 진희(眞喜)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지조와 생각이 크고 넓으며, 중생을 널리 교화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무제(武帝) 태강(太康) 2년 신축(辛丑, 281)에 광주(廣州)에서 번역하였다.
『십이유경』의 일부가 『시흥록(始興錄)』과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3) 안법흠(安法欽)
도신족무극변화경(道神足無極變化經) 4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합도신족경(合道神足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축법호가 번역한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과는 동본이역(同本異譯)이다. 축도조록(竺道祖錄)에 보인다.
아육왕전(阿育王傳) 7권혹은 대(大)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또한 『대아육왕경(大阿育王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양(梁)나라에서 번역한 『아육왕경』과는 같은 경본이다. 광희(光凞) 연간(306)에 번역되었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현보장경(文殊師利現寶藏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는 『시현보장경(示現寶藏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보협경(寶篋經)』과 같은 동본이다. 태안(太安) 연간(302~303)에 번역되었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아사세왕경(阿闍貰王經) 2권태강(太康) 연간(280~289)에 번역되었으며, 『축도조록』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초경(普超經)』과 같은 동본이다.
아난목거경(阿難目佉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미밀지경(微蜜持經)』과 동본이역이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이상은 5부 16권이다.앞의 2부 11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뒤의 3부 5권은 궐본이다.

사문 안법흠은 안식국(安息國) 사람이다. 여러 경전을 두루 배워서 깊은 이치까지 환히 알아 막힘이 없었다. 무제(武帝) 태강(太康) 2년 신축(辛丑, 281)으로부터 혜제(惠帝) 광희(光凞) 원년 병인(丙寅, 306)에 이르기까지 낙양(洛陽)에서 『도신족무극변화경』 등 5부를 번역하였다.

(4) 무라차(無羅叉)
방광반야바라밀경(放光般若波羅蜜經) 30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광찬대품경(光讚大品經)』과 같은 동본이다. 혹은 20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방광마하반야경(放光摩訶般若經)』, 또는 『마하반야방광경(摩訶般若放光經)』이라고도 한다. 원강(元康) 원년(291)에 번역되어 나왔다. 경의 후기(後記)에 보인다.
이상의 1부 30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무라차경의 후기(後記)에는 무차라(無叉羅)라고 하였다는 우전국(于國) 사람이다.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 신해(辛亥, 291) 5월 15일에 진류(陳留) 창항(倉恒)경의 후기에는 원(垣)으로 썼다.의 수남사(水南寺)에서 『방광경(放光經)』 1부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그 해 12월 24일에 마쳤다. 하남거사(河南居士) 축숙란(竺叔蘭)이 구술하고, 축태현(祝太玄)과 주현명(周玄明)이 받아썼다.
그 경은 원래 범본(梵本)이다. 영천(穎川)의 사문 주사행(朱士行)이 일찍이 낙양(洛陽)에서 『도행경(道行經)』을 강의하였는데, 깊은 뜻에 이르러서는 가끔 통하지 않는지라, 매양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 경은 대승의 요체(要諦)인데, 번역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맹세코 뜻을 세워 목숨을 버리더라도 멀리 가서 대본(大本)을 찾아야겠다.”
마침내 조위(曹魏) 감로(甘露) 5년 경진(庚辰, 260)에 옹주(雍州)를 출발하여 서쪽 유사(流沙)를 지나 우전국(于國)에 이르러 범서(梵書)로 된 정본(正本) 90장(章) 60만여 언(言)을 얻어 필사하였다. 진(晋)나라 태강(太康) 3년 임인(壬寅, 282)에 제자 불여단(弗如檀)진나라 말로는 법요(法饒)라 한다.등 10인을 보내어 낙양으로 가져오게 하였는데, 그 제자들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우전국의 소승을 배우는 여러 무리들이 마침내 그 곳[한나라]의 왕에게 아뢰었다.
“한(漢)나라 땅의 사문이 바라문의 책으로 정전(正典)을 미혹하게 하고 어지럽히고자 하고 있습니다. 왕은 이 땅의 주인이신데, 만일 이것을 금지하지 아니하면, 장차 대법(大法)이 끊어져 한나라는 귀머거리와 소경의 땅으로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임금님의 허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경전을 가지려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행은 깊이 원통한 마음을 품고, 마침내 경을 태워서 이 일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였다. 왕은 시험하고자 하여 궁전 정원에다 장작을 쌓아 놓고 불태우게 되었다. 사행은 그 불 곁의 계단으로 나아가 서원하며 말하였다.
“만일 대법이 한나라 땅에 유통되어져야 한다면 경이 불에 타지 않게 하옵소서. 만일 감응이 없다면 그것이 운명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경을 불 속에 집어던졌다. 불이 다 탄 뒤에 보니,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고, 책 표지도 본래 그대로였다. 다시 또 선명한 광채가 떠올랐다. 이에 대중들이 놀라고 감복하여 모두가 그 신비한 감응을 칭송하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경전을 가지고 와서 낙양에 도달하여 3년간 머물렀다. 다시 허창(許昌)에 이르러서 2년을 머물다, 마지막에 진류의 수남사에 이르게 되었는데, 대중들이 무라차 등에게 청하여 번역해 내게 되었다.
『축도조록(竺道祖錄)』ㆍ『승우록(僧祐錄)』ㆍ『왕종록(王宗錄)』ㆍ『보창록(寶唱錄)』ㆍ『이곽록(李廓錄)』ㆍ『법상록(法上錄)』ㆍ『영유록(靈裕錄)』 등의 여러 목록에서 모두 주사행이 역출하였다고 한 것은, 이 모두가 그 근원을 찾은 사람에게 의거하여 공(功)을 미루어 돌리고자 했을 뿐이다. 이제 경전 후기(後記)와 『지민도록(支敏度錄)』과 여러 목록 등에 의거하면, 이 경은 무라차와 축숙란(竺叔蘭) 등이 함께 번역한 것이라고도 한다.
주사행은 우전국에 머물러 있다가 나이 80에 입적하였다. 서방의 사유법(闍維法)에 의거하여 화장(火葬)하였는데, 나무가 다 타고 불이 꺼졌는데도 시신(尸身)은 그대로 온전히 있었다. 대중은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면서 빌며 말하였다.
“만일 참으로 도법을 얻으셨다면, 마땅히 헐어 무너져야 하십니다.”
이 말에 따라 시신은 부서져 흩어졌으므로, 마침내 뼈를 수습하여 탑을 세웠다. 그가 우전국에 있으면서 입적하였으므로, 그 경은 바로 주사행이 번역한 것이 아니다.

(5) 축숙란(竺叔蘭)
이비마라힐경(異毗摩羅詰經) 3권승우는 “『이유마힐경(異維摩詰經)』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사(思)자를 쓰기도 한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원강(元康) 6년(296)에 번역되었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엄불조(嚴佛調)와 지겸(支謙) 등이 번역 출간한 경본과 같은데, 번역된 글이 다르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수능엄경(首寶嚴經) 2권원강 원년(291)에 번역되어 나왔다. 일곱 번째 번역이다. 지참(支讖)ㆍ지겸(支謙)ㆍ백연(白延)ㆍ법호(法護) 등이 번역하여 낸 경본과 같으나, 번역된 글이 다르다. 『섭도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5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우바새(優婆塞) 축숙란이제 『승우록』의 「주사행전(朱士行傳)」ㆍ「축숙란전(竺叔蘭傳)」ㆍ『방광경(放光經)』의 「후기(後記)」와 지민도(支敏度)의 『합수능엄경기(合首寶嚴經記)』에는 모두가 축숙란은 백의거사(白衣居士)라 하였고, 『장방록(長房錄)』과 『내전록(內典錄)』 등의 목록에는 사문(沙門)이라 하였는데, 사문이란37) 기록은 착오이다.은 본래 천축 사람이다. 그의 조부 누타(婁陀)는 뜻이 돈독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맑고 간결하면서 절조가 있었다. 당시에 국왕이 법도가 없고 흉포하자, 백성들이 반란(反亂)을 꾀하여 도적이 되었다. 신하와 장병(將兵)들은 죄를 얻으면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그 나라에서 세력있는 이들을 불러 함께 반역하려 하였으므로, 누타는 성을 내어 말하였다.
“그대들은 미천한 출신이면서 요직(要職)을 맡고 있다. 덕으로써 은혜를 갚지 못하고 도리어 반역을 꾀한단 말이냐? 나는 차라리 충성을 다하다가 죽을지언정, 반역하고 살고 싶지는 않다.”
반역한 이들은 역모가 누설될 것을 두려워하여 곧 그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누타의 아들 달마시라(達摩尸羅)중국말로는 법수(法首)라 한다는 이보다 앞서 다른 나라에 있었다. 그의 부형(婦兄 : 손위 처남) 두 사람은 다 같이 사문이었는데, 아버지가 살해되고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럽다는 말을 듣고는 곧 그는 두 사문과 함께 진(晋)나라로 달아나 하남(河南)에서 살다가 숙란을 낳게 되었다.
숙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말을 잘 하였으며, 두 외숙[舅]에게 경법(經法)을 묻고 배웠는데, 한 번 들으면 깨쳤으며, 범어와 중국말과 서책이며 또한 모든 문사(文史 : 문학과 역사)까지도 잘 알았다. 그러나 성질이 자못 경솔하였고, 사냥질을 하며 법도 없이 굴었다. 한번은 혼자 말을 타고 사슴을 쫓아가다가 호랑이를 만나 말에서 떨어지면서 그의 오른 팔이 부러졌다. 시간이 흘러 병이 조금 낫자 사냥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자주 꾸짖고 타일렀으나 끝내 고치지 않았으므로, 그 때문에 채식만을 하면서 살았다.
성격이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여 대여섯 되를 먹고 나야 비로소 시원함을 느꼈다. 한번은 몹시 취하여 길가에 누웠다가 그만 하남(河南)의 군문(郡門)으로 들어가 주정을 부리다가 관리의 단속에 걸려 하남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하남윤(河南尹) 악광(樂廣)이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술에 취하자 숙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떠돌이 나그네인데 무엇 때문에 남들이 마시는 술을 배웠는가?”
숙란이 말하였다.
“두강(杜康)38)이 술을 빚어서 천하가 다 함께 마시도록 하였는데, 어째서 마셔서는 안 될 떠돌이도 있습니까?”
악광이 또 말하였다.
“술을 마시는 것은 그렇다 치고 어찌하여 미쳐서 난리를 쳤는고?”
대답하였다.
“저[民]는 비록 미치기는 하였으나 난리는 치지 않았고, 오히려 부군(府君)께서는 비록 취하기는 하였지만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악광은 크게 탄복하였으며 그 때에 앉아 있던 손님이 말하였다.
“외국에서 온 사람이 어찌 그리도 얼굴이 하얀고?”
숙란이 말하였다.
“하남 사람들은 얼굴이 검은데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저의 얼굴만 희다 하여 어찌 그리도 괴이하게 여기십니까?”
이때에 손님이나 주인이 모두 그의 임기응변의 말재주에 감탄하면서 마침내 그를 놓아 보냈다.
얼마 뒤에 아무런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는 스스로 말하였다.
“하나의 붉은 대문[朱門]을 들어섰더니, 금과 은으로 된 집[堂]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나타나 자신이 나의 할아버지라 하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선행(善行)을 닦은지라, 지금 이런 과보로 여기에 있는데, 너는 죄를 지은 사람인데, 어떻게 올 수 있었느냐?’
그 때에 문지기가 몽둥이로 나를 내몰았으므로 대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옛날 나와 같이 사냥하던 친구가 매와 개에게 물려 피를 흘리며 울부짖으면서 나에게 구제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나는 10여 걸음을 도망쳐 가다가 소머리를 한 사람[牛頭人]을 만났는데, 나를 작살로 찌르려 하였으므로 내가 말하였다.
‘나는 여러 세상 동안 부처님의 제자였고, 언제나 두 분의 사문에게 공양을 하였는데, 무슨 죄로 나를 다스리려 합니까?’
그러자 소머리를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비록 복을 받게 되기는 하나 사냥을 한 죄와는 관련이 없다.’
그 때에 갑자기 그 두 분 외숙이 와서 소머리를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우리들 두 사람은 항상 그의 공양을 받았다. 악은 적고 선이 더 많으니 그런 죄는 면할 수 있다.’
그리하여 도인(道人)을 따라 나오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행실을 고치고 자비를 베풀면서 오로지 경법에만 뜻을 두었다.
진나라 혜제(惠帝) 원강(元康) 원년(291)에 무라차(無羅叉)와 함께 『방광경(放光經)』을 역출하였으며, 뒤에는 낙양에서 스스로 『이비마라힐경』 등 2부를 번역하여 내었는데, 그는 이미 범어와 중국말을 잘 알았기 때문에 번역한 의미가 정밀하고 합당하였다.
뒤에 모친의 상(喪)을 당하여 석 달만에 바로 장사를 치르려 하자, 어떤 이웃 사람이 말하였다.
“지금은 세월이 편안하지 못하니 내년에 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숙란이 말하였다.
“무릇 태어난 사람은 한 번은 죽는 것이요. 죽은 이는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사람과 신(神)의 길이 다르니, 이치로 보아 그러합니다. 만일 돌아가신 어머니를 영혼이 계실 땅에 모시게 되면, 어버이에 효도하려는 마음을 마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내년까지 기다렸다가 도망다니면서 모실 땅이 없게 되면, 어느 겨를에 받들어 모실 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는 장사를 지냈다. 그 다음 해에는 석륵(石勒)39)이 난(亂)을 일으켰으므로 도둑 떼들이 제멋대로 들끓었다. 그래서 피난하여 형주(荊州)로 갔다. 그 후에 그는 병들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친한 사람[知識]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며칠 뒤에 곧 죽었다. 그와 친한 사람은 그가 수명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6) 백법조(白法祖)
보살서경(菩薩逝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서동자경(逝童子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서경(逝經)』이라고도 한다. 『장자자제경(長者子制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수행경(菩薩修行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위시장자문관신행경(威施長者問觀身行經)』, 또는 『장자수행경(長者修行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1권『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 나왔다. 이 경의 『초분유행경(初分遊行經)』의 다른 번역이다. 또는 바로 『니원경(泥洹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애도반니원경(大愛道般泥洹經) 1권『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5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현자오복경(賢者五福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있고, 이하는 궐본이다.

엄정불토경(嚴淨佛土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정토경(淨土經)』이라고도 한다. 『문수불토엄정경(文殊佛土嚴淨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욱가라월문보살경(郁伽羅越問菩薩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안공(安公)이 번역한 『법경경(法鏡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등집삼매경(等集三昧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무량파마다라니경(無量破魔陁羅尼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미밀지경(微蜜持經)』과 같은 동본이역이다.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유체보살경(惟逮菩薩經) 1권『고승전(高僧傳)』과 『승우록』에 보인다.
단특다라니경(檀特陁羅尼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여래흥현경(如來興顯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선권경(善權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해룡왕경(海龍王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지심범지경(持心梵志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6부 18권이다.『현자오복경』 이상 5부 6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엄정불토경』 이하 11부 12권은 궐본이다.

사문 백원(白遠)의 자(字)는 법조(法祖)이며, 본래의 성은 만(萬)씨로 하내(河內) 사람이다. 아버지인 위달(威達)은 유학(儒學)의 바른 이치를 잘 알고 있어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며, 주부(州府)에서 관리로 임명하려고 불러도 모두 응하지 않았다.
법조는 어린 나이에 도심(道心)을 일으켜서 아버지에게 출가할 것을 여쭈었는데, 그 말의 이치가 절실하고 지극하여 아버지가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의복을 바꾸어 입고 불도를 따랐다.
법조는 재주와 생각이 뛰어났고, 민첩하고 밝은 지혜가 여러 사람 중에서도 아주 빼어났다. 경(經)을 하루에 8~9천 구절을 외웠고, 방등(方等)을 깊이 궁구[硏味]하여 깊숙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으며, 세속의 분색(墳索:책)에도 해박하여 그 뜻을 꿰뚫는 바가 많았다. 이에 장안(長安)에 정사를 지어놓고 강습(講習)을 업으로 삼으니, 속인과 승려들로서 숭앙하여 받드는 이가 거의 천 명이나 되었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말엽(306)에 태재(太宰)인 하간왕(河間王) 옹(顒)이 관중(關中)에 주둔하면서 마음을 겸허하게 하고서 그를 공경하고 중하게 대우하며 사우(師友 : 스승과 벗)의 예로써 대하였다. 그리고는 늘 한가한 새벽[閑辰]이나 조용한 밤[靜夜]까지 자주 도덕에 대하여 함께 강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에 서부(西府)의 건물이 처음 지어졌으며, 매우 번성하였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도 모두 그가 멀리까지 내다보는 능력에 대하여 탄복하였다.
법조는 이미 널리 섭렵하여 견문이 많았고 범어(梵語)와 진어(晋語 : 중국어)까지도 잘 통하였다. 혜제 때(290~306)에는 『보살서경(菩薩逝經)』 등 16부를 번역하였다.
흣날 갑자기 제자와 여러 도인(道人)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며칠 뒤에 전생의 인연을 갚게 되리라.”
그리고는 이별의 말을 하면서 편지를 써서 경상(經像 : 경과 불상)과 자재(資財)를 나누어 주기를 모두 마쳤다. 그때 진주자사(秦州刺史)로 있던 장보(張輔)가 법조와 함께 동행하였는데, 다음 날 새벽에 장보에게로 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장보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마침내 그에게 살해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그가 숙명(宿命)을 아는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성은 이(李)요. 이름은 통(通)이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말하였다.
“법조(法祖)법사께서 염라대왕(閻羅大王)의 거처에 계시면서 왕을 위하여 『수능엄경(首寶嚴經)』을 강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분이 말씀하기를 ‘경을 강하는 일을 마치면 도리천(忉利天)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또 좨주(祭酒) 왕부(王浮)라는 사람과 도사(道士) 기공(基公)은 차례로 몸을 결박당한 채로 법조에게 참회를 구하는 것을 보았다.”
옛날에 법조가 평소 왕부와 더불어 매양 사(邪)와 정(正)을 다툴 때, 왕부가 여러 번 굽히게 되어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40)』을 지어 불법을 왜곡하고 비방하였는데, 그 재앙이 그에게 돌아왔기 때문에 죽어서야 비로소 참회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 『장방록』 등에는 다시 “일곱 가지 경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한 “법조가 번역하여 내었다”고 했는데, 지금 그 모두는 따로 파생한[別生] 경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삭제하고, 기록해두지 않는다.

불문사동자경(佛問四童子經)
조복왕자도심경(調伏王子道心經)이상 2경은 모두 『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오백왕자작정토원경(五百王子作淨土願經)혹은 유동(幼童)이라 쓰기도 한다. 『보초경(普超經)』에서 나왔다.
삼환동경(三幻童經)혹은 유동(幼童)이라 쓰기도 한다. 역시 『보초경』에서 나왔다.
이동자견불설게공양경(二童子見佛說偈供養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오백유동경(五百幼童經)또한 『동자경童子』이라고도 한다.
수달경(首達經)또한 『유선수달경(惟先首達經)』이라고도 한다. 이상 2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7) 석법립(釋法立)
제덕복전경(諸德福田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바로 『제복전경(諸福田經)』이라고도 하고, 혹은 『복전경(福田經)』이라고도 한다. 법립과 법거(法炬)가 함께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누탄경(樓炭經) 6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대루탄경(大樓炭經)』이라고도 한다. 『장아함경』에서 나왔다. 제4분(分)의 『기세경(記世經)』과는 동본인데, 번역이 다르게 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역출한 5권과는 조금 다르다. 혹은 5권, 또는 8권으로 되어 있다. 『승우록』에 보인다.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 4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법구본말경(法句本末經)』, 또는 『법유경(法喩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 또는 6권으로 되어 있다. 법립과 법거가 함께 역출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불장방등경(佛藏方等經)』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4부 12권이다.앞의 3부 11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립은 어디 사람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지혜와 도가 매우 뛰어났고, 중생 깨우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혜제(惠帝) 때(290~306)에 법거(法炬) 등과 함께 낙양에서 『제덕복전경』 등 4부를 번역하였다.

(8) 석법거(釋法炬)
우전왕경(優塡王經) 1권『보적경(寶積經)』 「우타연왕희(優陁延王會)」와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전세삼전경(前世三轉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은색녀경(銀色女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사세왕수결경(阿闍世王受決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채련위왕경(採蓮違王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관세불형상경(灌洗佛形像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사월팔일관경(四月八日灌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바로 『관경(灌經)』이라고도 한다. 『마하찰두경(摩訶刹頭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항수경(恒水經) 1권또한 『항하유경(恒河喩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9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정생왕고사경(頂生王故事經) 1권또한 바로 『정생왕경(頂生王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1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구욕경(求欲經) 1권『중아함경』 제22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고음인사경(苦陰因事經) 1권『중아함경』 제25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첨파비구경(瞻婆比丘經) 1권혹은 첨파(瞻波)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29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복음경(伏婬經) 1권『중아함경』 제3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수경(數經) 1권『중아함경』 제35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파사닉왕태후붕진토분신경(波斯匿王太后崩塵土坌身經) 1권『증일아함경』 제18권에서 나온 것으로서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또 『파사닉왕상모경(波斯匿王喪母經)』이 있는데, 바로 이 경이 『진토분신경(塵土坌身經)』이다. 번거롭게 거듭 기재하지 않는다.
빈비사라왕예불공양경(頻毗娑羅王詣佛供養經) 1권또한 빈바(頻婆)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 제26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앙굴계경(鴦崛髻經) 1권축법호의 『지계경(指髻經)』과는 대동소이하다. 『증일아함경』 제3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난제석경(難提釋經) 1권『잡아함경』 제3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상응상가경(相應相可經) 1권단권(單卷)인 『잡아함경』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만법경(慢法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아난분별경(阿難分別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법해경(法海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해팔덕경(海八德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사세왕문오역경(阿闍世王問五逆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나운인욕경(羅云忍辱經) 1권혹은 바로 『인욕경(忍辱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불위년소비구설정사경(佛爲年少比丘說正事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사갈비구공덕경(沙曷比丘功德經) 1권장방은 “『구록(舊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군우비경(群牛譬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비구피녀악명욕자살경(比丘避女惡名欲自殺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있고, 이 이하는 궐본이다.
복전경(福田經) 1권일명 『제덕복전경(諸德福田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석법립(釋法立)이 번역한 경과는 조금 다르다. 축도조의 『진록(晋錄)』에 보인다.
제경보살명경(諸經菩薩名經) 2권『장방록』에 보인다.
정의경(正意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그 목록 중의 주(注)에서는 “두 번째의 번역이나, 어느 것이 초역본(初譯本)인지는 자세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명제석시경(明帝釋施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누탄경(樓炭經) 8권세 번째의 번역이다. 이 경은 『장아함경』 제4분(分) 『기세경(記世經)』의 이역이다. 축법호와 석법립이 번역한 경과 거의 같다. 먼저 법립과 함께 번역했는데, 법립이 낸 경은 그 뜻을 다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널리 의견을 구한다. 『지민도록(支敏度錄)』과 『보창록(寶唱錄)』 두 목록에 보인다.
정반왕반니원경(淨飯王般泥洹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빈궁로공경(貧窮老公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위취경(危脆經) 『장방록』에 보인다.
대사비유경(大蛇譬喩經) 1권또한 바로 『대사경(大蛇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구록』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나한가류타이경(羅漢迦留陁夷經) 1권혹은 나한(羅漢)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조갑경토비경(爪甲擎土譬經) 1권혹은 『조갑취토경(爪甲取土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구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쇠리경(衰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중생미연삼계경(衆生未然三界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구욕설법경(求欲說法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나순유경(羅旬喩經) 1권이 경은 별생경(別生經) 가운데 『나미수경(羅彌壽經)』의 이명(異名)이 아닌가 의심된다. 『장방록』에 보인다.
유교법률경(遺敎法律經) 3권일명 『유교법률삼매경(遺敎法律三昧經)』, 또는 『유교삼매경(遺敎三昧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이상은 40부 50권이다.『비구피녀악명욕자살경(比丘避女惡名欲自殺經』 이상 24부 24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복전경』 이하의 16부 26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거(釋法炬) 역시 씨족(氏族)이 자세하지 않다. 재능과 도량이 높고 뛰어났으며,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일에 뜻을 품었다. 혜제(惠帝) 때(290~306)에 처음 법립(法立)과 함께 경을 역출하였고, 법립이 입적한 뒤에는 법거가 마침내 스스로 『우전왕경(優塡王經)』 등 40부를 번역하였다.
또 『장방록(長房錄)』 등의 목록에는 다시 여러 경이 있는데, 모두 법거의 번역이라 하였다. 이제 그 모두는 따로 파생된[別生] 경인데, 목록을 지은 이들의 착오를 일으킨 것이므로, 여기서는 모두 삭제한다. 그 경들을 기술하면 아래와 같다.

시비시경(時非時經)또한 『시경(時經)』이라고도 한다. 경의 후기(後記)에 준하면 법거의 번역이 아니며, 뒤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마녀문불설법득남신경(魔女聞佛說法得男身經)『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대비비구본원경(大悲比丘本願經)『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왕고조행경(往古造行經)
거발경(擧鉢經)이상 2경은 모두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에서 나왔다.
이금공태산속죄경(以金貢太山贖罪經)
조달교인위악경(調達敎人爲惡經)이상 2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불항앙굴마인민환희경(佛降鴦崛魔人民歡喜經)
앙굴마귀화경(鴦崛魔歸化經)혹은 부사(婦死)로 쓰기도 하였으나, 필시 착오이다. 이상 2경은 모두 『앙굴마라경(鴦崛魔羅經)』에서 나왔다.
위제희자월야문부인경(韋提希子月夜問夫人經)혹은 천인(天人)이라 쓰기도 한다. 『장아함경』에서 나왔다.
복행경(福行經)
악도경(惡道經)일명 『악의경(惡意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요의(要意)로 쓰기도 하였으나, 필시 착오이다. 목록 중에서 악도(惡道)와 악의(惡意) 두 이름을 모두 기재한 것은 잘못이다.
식에경(息恚經)
유연경(柔軟經)
수지경(受持經)
명칭경(名稱經)
부미경(浮彌經)『복행경』 이하 7경은 모두 『중아함경』에서 나왔다.
비조유경(飛鳥喩經)
적목소연경(積木燒燃經)일명 『대고수경(大枯樹經)』이라고도 한다.
파사닉왕예불유오위의경(波斯匿王詣佛有五威儀經)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비조유경』 이하 4경은 모두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보시경(普施經)
차마비구유중병경(差摩比丘喩重病經)
불위비구설소두유경(佛爲比丘說燒頭喩經)
우타이좌수하적정조복경(優陁夷坐樹下寂靜調伏經)
불위비구설대력경(佛爲比丘說大力經)
사대색신생염리경(四大色身生厭離經)
이신이욕경(異信異欲經)
불위비구설삼법경(佛爲比丘說三法經)
엽유다소경(葉喩多少經)
불위비구설극심험난처경(佛爲比丘說極深險難處經)
불위제비구설막사유세간경(佛爲諸比丘說莫思惟世間經)혹은 『막사유세간사유경(莫思惟世間思惟經)』이라고도 한다.
중생신예경(衆生身穢經)
안색상계경(眼色相繫經)
비구어색염리경(比丘於色厭離經)
사제세무경(捨諸世務經)
영아유경(嬰兒喩經)
전륜성왕칠보현세간경(轉輪聖王七寶現世間經)
향사위법경(向邪違法經)
전부유경(田夫喩經)
신인자생오종과환경(信人者生五種過患經)
소다제계경(少多制戒經)
무시본제경(無始本際經)
나한우병사왕경(羅漢遇甁沙王經)
존자구저가독일사유경(尊者瞿低迦獨一思惟經)
인민질역수삼귀경(人民疾疫受三歸經)
항수류주경(恒水流澍經)혹은 유수(流樹)라고 쓰기도 한다.
회하경(灰河經)일명 『진회하비유경(塵灰河譬喩經)』이라고도 한다. 목록에 두 경의 이름을 따로따로 기재한 것은 착오이다.
파사닉왕조모명종경(波斯匿王祖母命終經)
주금유경(鑄金喩經)
목저유경(木杵喩經)
금사정사존자병경(金師精舍尊者病經)
군양유경(群羊喩經)
처중행도경(處中行道經)
파사닉왕녀명과예불경(波斯匿王女命過詣佛經)
비구문불명경(比丘問佛名經)
우바새명종경(優婆塞命終經)『보시경(普施經)』 이하 35경은 모두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비구분위경(比丘分衛經)
화난경(和難經)
사업자활경(邪業自活經)
비구각언지경(比丘各言志經)
화난석경(和難釋經)
비구질병경(比丘疾病經)
무구경(無懼經)
독초유경(毒草喩經)
독유경(毒喩經)
마유경(馬喩經)『비구분위경』 이하 10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비유육인경(譬喩六人經)『매의경(罵意經)』에서 나왔다.
아사세왕문진한종하생경(阿闍世王問瞋恨從何生經)
마하비구경(摩訶比丘經)
조달유경(調達喩經)『아사세왕문진한종하생경』 이하 3경은 소승경전에서 가려서 뽑은 경小乘抄經이다.
전단도탑경(栴檀塗塔經)『백연경(百緣經)』에서 나왔다.
무상경(無常經)
비구구증인경(比丘求證人經)
아범화리비구무상경(阿梵和利比丘無常經)
비구문불하고사세학도경(比丘問佛何故捨世學道經)
불간병비구불수장자청경(佛看病比丘不受長者請經)
좌선비구명과생천경(坐禪比丘命過生天經)
방일경(放逸經)
심천학비구경(深淺學比丘經)
구제비구경(拘提比丘經)
파리비구방범행경(波利比丘謗梵行經)
북방세리경(北方世利經)
유리왕공석자경(流離王攻釋子經)
신능도하경(信能渡河經)
유중생삼세작악경(有衆生三世作惡經)
총명비구경(聰明比丘經)
설법난치경(說法難値經)
조달문불안색경(調達問佛顔色經)『무상경(無常經)』 이하 17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효식경(曉食經)『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에서 나왔다.
수하유경(須河喩經)『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나왔다.
『마녀문불설법득남신경(魔女聞佛說法得男身經)』 이하 89경은 모두 큰 경[大經]으로부터 가려서 뽑아 역출한 것으로 『별생록(別生錄)』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삭제하였다.

(9) 섭승원(聶承遠)
초일명삼매경(超日明三昧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바로 『초일명경(超日明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은 축법호가 먼저 범문(梵文)을 번역하여 냈으나, 말과 뜻이 번거롭고 중복되어 있었다. 그래서 섭승원(聶承遠)이 이 경의 문맥과 게송을 자세히 교정하여 삭제하고 고쳐서 앞의 경보다 훌륭하게 하였다. 『고승전』과 『승우록』에 보인다.
월난경(越難經) 1권일명 『난장자경(難長者經)』, 또는 『난경(難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3권은 그 경본이 모두 있다.

청신사(淸信士) 섭승원은 명철한 이해력과 재주가 있었고, 돈독한 뜻으로 법에 힘썼다. 축법호가 경을 번역하는 데에 많이 참여하여 문구를 교정하고, 겸하여 붓을 잡고 뜻을 받아썼다. 흣날 혜제(惠帝) 때(290~306)에는 직접 『초일명삼매경』 등의 2부를 번역하였다.
또 『장방록』 등에는 “섭승원이 다시 『가섭힐아난경(迦葉詰阿難經)』을 번역했다”라고 하였는데, 이 경은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가려 뽑아서[抄] 따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또 한(漢)나라 때의 엄불조(嚴佛調)와 안세고(安世高)와 섭승원이 지은 세 목록에 모두 기재한 것은, 착오가 매우 심한 것이다.

(10) 섭도진(聶道眞)
무구시보살분별응변경(無垢施菩薩分別應辯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 번역한 『이구시경(離垢施經)』과 같은 동본이다. 또한 『분별응보경(分別應報經)』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33회(會)에 해당한다. 다른 목록에서 어떤 이는 축법호의 역출이라 하였으나 착오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제보살구불본업경(諸菩薩求佛本業經) 1권혹은 제(諸)자가 없기도 한다. 이 경은 『화엄경』 「정행품(淨行品)」의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반열반경(文殊師利般涅槃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출보살본기경(異出菩薩本起經) 1권혹은 기(起)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삼만다발타라보살경(三曼陁颰陁羅菩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수재경(菩薩受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있고, 이 이하는 궐본이다.

대방광보살십지경(大方廣菩薩十地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의 번역과 대동소이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십법주경(菩薩十法住經) 1권이 경은 『화엄경』 「십주품(十住品)」의 이역이다. 세 번째로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십주경(十住經) 12권이 경은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이역이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연신오십사경(菩薩緣身五十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오십연신경(五十緣身經)』과는 대동소이하다. 『장방록』에 보인다.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제불요집경(諸佛要集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적음보살원경(寂音菩薩願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구오안법경(菩薩求五眼法經) 1권승우는 “경(經)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혹은 『오안문(五眼文)』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도행육법경(菩薩道行六法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초지경(菩薩初地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십도지경(菩薩十道地經) 1권어떤 이는 이 경은 앞에서 번역된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이라고 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문수사리여리의녀론의극사유마경(文殊師利與離意女論議極似維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잡행법(菩薩雜行法)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소행사법(菩薩所行四法)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숙명경(菩薩宿命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문수사리정률경(文殊師利淨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 번역과는 조금 다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계독수단문(菩薩戒獨受壇文)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참회법(菩薩懺悔法) 1권다르게 번역되어 나온 책이라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24부 36권이다.『보살수재경(菩薩受齋經)』 이상의 6부 6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대방광보살십지경(大方廣菩薩十地經)』 이하 18부 30권은 궐본이다.

청신사(淸信士) 섭도진은 곧 승원(承遠)의 아들이다. 부자(父子)가 모두 청렴하고 총명하였으며, 모두 번역하는[度語]41) 일을 업으로 삼았다. 무제(武帝) 태강(太康) 초(280)로부터 회제(懷帝) 영가(永嘉) 말(310)까지, 그 기간 동안 묻고 배우며 법호(法護)를 위해 받아썼다. 이외에 법호가 입적 후에는 도진이 마침내 『무구시보살분별응변경(無垢施菩薩分別應辯經)』 등의 경전 24부를 스스로 번역하였다. 정성으로 법호를 스승으로 섬겼고, 참으로 그의 칭찬을 받았다. 또 문구를 잘하여 말과 뜻이 분명하였다.
하나(一)42)는 또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다시 29경이 있고, 역시 도진의 번역이라 하였는데, 이제 이들은 모두 따로 파생하였고, 간추려 베낀 경[抄經]이므로 여기서는 삭제하고 기재하지 않았다.

보살봉시예탑작원념경(菩薩奉施詣塔作願念經)
사자보뢰음보살문발심경(師子步雷音菩薩問發心經)
보살삼법경(菩薩三法經)『보살봉시예탑작원념경』 이하 3경은 모두 『문수불토엄정경(文殊佛土嚴淨經)』에서 나왔다.
보살보시참회법(菩薩布施懺悔法)『결정비니경(決定毗尼經)』에서 나왔다.
자재왕보살문여래경계경(自在王菩薩問如來警戒經)혹은 『보살계신자재경(菩薩戒身自在經)』이라고도 한다.
보살도시행경(菩薩導示行經)
보살초발심시경(菩薩初發心時經)
무언보살유통법경(無言菩薩流通法經)
무언보살경(無言菩薩經)
보살출요행무애법문경(菩薩出要行無㝵法門經)
광미보살조칠보제경(光味菩薩造七寶梯經)『자재왕보살문여래경계경』 이하 7경은 모두 『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보살여의신통경(菩薩如意神通經)
보살계자재경(菩薩戒自在經)이상 2경은 『자재왕경(自在王經)』에서 나왔다.
적음보살문오탁경(寂音菩薩問五濁經)혹은 적의(寂意)라고도 한다.
전륜성왕발심구정토경(轉輪聖王發心求淨土經)이상 2경은 『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대운밀장보살문대해삼매경(大雲密藏菩薩問大海三昧經)『대운경(大雲經)』에서 나왔다.
부수동진경(溥首童眞經)『보초경(普超經)』에서 나왔다.
유동보살경(儒童菩薩經)혹은 보살(菩薩)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파사닉왕욕벌앙굴마라경(波斯匿王欲伐鴦崛摩羅經)『앙굴마라경(鴦崛摩羅經)』에서 나왔다.
대광명보살백사십팔원경(大光明菩薩百四十八願經)
보살육법행경(菩薩六法行經)
보살본원행품경(菩薩本願行品經)
보살고행경(菩薩苦行經)
보살가수면경(菩薩訶睡眠經)
보살가가과경(菩薩訶家過經)『대광명보살백사십팔원경』 이하 6경은 『승우록』에서는 “간추려 베낀 경抄經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대승에서 간추려 베낀 경大乘抄經이다.
보살계요의경(菩薩戒要義經)『지지경(地持經)』에서 나왔다.
보살오법행경(菩薩五法行經)
초발의보살행이행법경(初發意菩薩行易行法經)이상 2경은 모두 『십주론(十住論)』에서 나왔다.
전륜성왕칠보구족경(轉輪聖王七寶具足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중경목록(衆經目錄) 1권도진 자신이 지었으므로, 범본(梵本)의 번역이 아니다. 목록을 전하고 서술하는 데서 이것을 열거한다. 여기서는 다시 싣지 않았다.

또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우바새 위사도(衛士度)가 혜제(惠帝) 때(290~306)에 『마하반야바라밀도행경(摩訶般若波羅蜜道行經)』 2권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구역에 따라 『도행경(道行經)』을 삭제하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여 요약해서 출간하였다.『승우록』에서는 “여러 목록에서 모두 『도행경』 2권은 위사도가 요약하여 출간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미 구경(舊經)을 삭제하기도 하고 요약하기도 하여 낸 경이므로, 곧 범본을 따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지금은 『별생록(別生錄)』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기록하지 않는다.

(11) 지법도(支法度)
서동자경(逝童子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장자제경(長者制經)』, 또는 『제경(制經)』, 또는 『보살서경(菩薩逝經)』, 또는 『서경(逝經)』이라고도 한다. 이 다섯 경본은 거의 같으나, 따로 따로 번역되었으므로, 이름들을 달리했을 뿐이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선생자경(善生子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기다밀(祇多蜜)ㆍ축난제(竺難提) 등이 번역해 낸 경본과 동본(同本)이다. 『중아함경』 제33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지민도록(支敏度錄)』ㆍ『축도조록(竺道祖錄)』ㆍ『보창록(寶唱錄)』 등의 세 목록에 보인다.
문수사리현보장경(文殊師利現寶藏經) 2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한 『현보장경(現寶藏經)』과 같은 동본이다. 『축도조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십선십악경(十善十惡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의 『진록(晋錄)』과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4부 5권이다.『서동자경』 등 2부 2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문수사리현보장경』 등 2부 3권은 궐본이다.

사문 지법도(支法度)는 어떠한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혜제(惠帝) 영녕(永寧) 원년 신유(辛酉, 301)에 『서동자경』 등 4부를 번역하였다.
또 『승우록』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혜제 때에 사문 지민도(支敏度)는 양지(兩支:支讖ㆍ支謙)와 양축(兩竺:竺法護ㆍ竺叔蘭)이 번역한 4본(本)장방의 목록에는 다시 백연一白을 더 보태어 5본으로 하였다. 이제 『승우록』과 『합경기(合經記)』에 의거하면 4본만으로 이루어졌고, 백연(白延)은 없었다.을 합하여 『수능엄경(首寶嚴經)』 8권으로 만들었고,승우는 “혹은 5권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1지(支:支謙)와 양축(兩竺:축법호ㆍ축숙란)이 번역한 3본을 합하여 『유마경(維摩經)』 5권으로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나, 이미 이 경들은 범본(梵本)을 따로 번역한 것이 아니요, 또 그 경본들은 궐본되었기 때문에 이 목록에서는 삭제하고 기재하지 않는다.

(12) 야라엄(若羅嚴)
시비시경(時非時經) 1권혹은 바로 『시경(時經)』이라고도 한다. 『경후기(經後記)』에 보인다.
이상의 1부 1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야라엄은 외국 사람이다. 『시비시경』 1부를 번역하였다. 『경후기(經後記)』에는 “외국의 법사 야라엄은 손에는 범본[胡本]을 잡고, 입으로는 스스로 통역하였으며, 양주(涼州) 도인 우격(于閴)혹은 한보(釬▼(王+寶))로 쓰기도 한다.이 성(城)에서 기록하였다”라고 하였다. 장방 등은 모두 법거(法炬)의 번역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이미 어느 황제, 어느 때인지 알지 못한지라, 우선 『서진록(西晋錄)』에 덧붙여 둔다.

(13) 신구제실역경(新舊諸失譯經)
방등다라니경(方等陁羅尼經) 1권
보엄경(寶嚴經) 1권
오복덕경(五福德經) 1권
이상은 3부 3권이다.이 경본들은 모두 궐본이다. 장방(長房) 등의 목록에는 서진(西晋)의 실역(失譯)은 총 8부 15권이라 하였다. 『오록』과 『별록』 두 목록의 모든 단주(單注)에는 “원강(元康) 연간(291~299)에 번역되었으나, 번역한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여러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지적한 것은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음에 따로 적은 경들은 오히려 실역과는 다르다. 이제 다음의 5부 12권은 여러 목록을 조사하여 찾아보고, 겸하여 경문을 열람하면, 모두가 근거가 있었다. 그러므로 곧 실역이 아니다. 그 원유(源由)를 자세히 갖추어 기술하여, 아래와 같이 나열한다.

도세품경(度世品經) 6권
아뇩달용왕경(阿耨達龍王經) 2권이 경은 『홍도광현삼매경(弘道廣顯三昧經)』의 이명(異名)이다. 이상 2경은 축법호(竺法護)의 번역이다.
여래비밀장경(如來秘密藏經) 2권일명 『대방광여래성기미밀장경(大方廣如來性起微密藏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여래성기경(如來性起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구역 『화엄경(華嚴經)』 「여래성기품(如來性起品)」이다. 후한(後漢)의 실역(失譯)에 이미 올려 있으므로, 이를 거듭 기재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다. 여기에서는 『별생록(別生錄)』에 덧붙여 둔다.
명상속해탈지바라밀경(明相續解脫地波羅蜜經) 1권송(宋) 때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의 번역이다.
제자학유삼배경(弟子學有三輩經) 1권『삼품제자경(三品弟子經)』의 이명(異名)이다. 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이후로는 새로 이 목록에 덧붙인 것이다.

태자화휴경(太子和休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태자쇄호경(太子刷護經)』과 같은 동본(同本)이다.
살담분타리경(薩曇分陁利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살운분타리경(薩芸芬陁利經)』이다”라고 하였으며, 또는 바로 『분타리경(分陁利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법화경(法華經)』 「보탑품(寶塔品)」과 「천수품(天授品)」 2품을 각각 약간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방발경(放鉢經) 1권이 경은 『보초경(普超經)』 「거발품(擧鉢品)」의 이역이다. 제1권에서 나왔다. 안공(安公)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보살섬경(菩薩睒經) 1권혹은 『효자섬경(孝子睒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다만 『섬경(睒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육도집경(六度集經)』의 제2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수왕경(長壽王經) 1권
법상주경(法常住經) 1권
함수유경(鹹水喩經) 1권『구록』에서는 “『함수비유경(鹹水譬喩經)』이다”라고 하였다. 『중아함경』 제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도조경(兜調經) 1권『중아함경』 제44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사위국왕몽견십사경(舍衛國王夢見十事經) 1권혹은 바로 『십몽경(十夢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사위국왕십몽경(舍衛國王十夢經)』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파사익왕십몽경(波斯匿王十夢經)』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증일아함경』 제5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안공(安公)은 “『아비담(阿毗曇)』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옥야녀경(玉耶女經) 1권혹은 『옥야경(玉瑘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아속달경(阿遬達經)』과 같은 동본이다.
효자경(孝子經) 1권일명 『효자보은경(孝子報恩經)』이라고도 한다.
알다화다기경(頞多和多耆經) 1권
보달왕경(普達王經) 1권
불멸도후관렴장송경(佛滅度後棺斂葬送經) 1권일명 『비구사경(比丘師經)』, 또는 『사비구경(師比丘經)』이라고도 한다.
귀자모경(鬼子母經) 1권
범마난국왕경(梵摩難國王經) 1권
가전연설법몰진게경(迦旃延說法沒盡偈經) 1권표제에서는 “부처님께서 비구 가전연(迦旃延)에게 법몰진게(法沒盡偈) 120장(章)을 말하게 하셨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가전연게(迦旃延偈)』라고 한다.
불치신경(佛治身經) 1권혹은 불(佛)자가 없기도 한다. 『구록』에서는 “『불치신경(佛治身經)』이다”라고 하였으며, 그 밖의 다른 목록에서도 모두 같다.
치의경(治意經) 1권『구록』에서는 “『불치의경(佛治意經)』이다”라고 하였으며, 그 밖의 다른 목록에서도 모두 같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있으며, 이 이하는 궐본이다.

미륵당래생경(彌勒當來生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미륵래시경(彌勒來時經)』과 같은 동본이다.
실리월경(失利越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월광동자경(月光童子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료본생사경(異了本生死經) 1권『도간경(稻芉經)』과 같은 동본이다.
내장대방등경(內藏大方等經) 1권이 경은 『불장대방등경(佛藏大方等經)』인 듯하다.
소아사세경(小阿闍世經) 1권
소수뢰경(小須賴經) 1권
목거경(目佉經) 1권안공(安公)은 “방등부(方等部)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이 경은 『아난목거경(阿難目佉經)』인 듯하다.
미륵경(彌勒經) 1권안공은 “『중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타람경(墮藍經) 1권안공은 “『중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칠사경(七事經) 1권안공은 “『중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뇌타우라경(賴吒謣羅經) 1권안공은 “『중아함경』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환예경(歡豫經) 1권『법경록(法經錄)』에서는 “『권예경(勸豫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12권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십이사경(十二死經) 1권이 경은 『십이품생사경(十二品生死經)』인 듯하다.
칠부경(七婦經) 1권
아난분지사시경(阿難邠坻四時施經) 1권『구록』에서는 “『아난분지사시보시경(阿難邠坻四時布施經)』이다”라고 하였다.
칠거경(七車經) 1권『중아함경』의 「칠거비유경(七車譬喩經)」인 듯하다.
해유팔사경(海有八事經) 1권
난등각제일경(難等各第一經) 1권『구록』에서는 “『아난가섭각설제일경(阿難迦葉各說第一經)』이다”라고 하였다.
유류경(惟留經) 1권『구록』에서는 “『유류왕경(惟留王經)』이다”라고 하였다.
이가난경(理家難經) 1권
가류다왕경(迦留多王經) 1권
범지사손경(梵志闍孫經) 1권『고록(古錄)』에서는 “『범지사손경(梵志闍遜經)』이다”라고 하였다.
파달왕경(波達王經) 1권
비심읍읍경(悲心悒悒經) 1권
취도세도경(趣度世道經) 1권
장자위세경(長者威勢經) 1권
치주경(癡注經) 1권
조달경(調達經) 1권
화달경(和達經) 1권
발거사경(鉢呿沙經) 1권
분팔사리경(分八舍利經) 1권혹은 분신(分身)이라고 쓰기도 한다.
응행률(應行律) 1권
실담모(悉曇慕) 2권
길법험(吉法驗) 1권
구전겁기진(口傳劫起盡) 1권
타건지법(打揵秖法) 1권
이상은 55부 56권이다.『치의경(治意經)』 이상 19부 19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미륵당래생경(彌勒當來生經)』 이하 36부 37권은 궐본이다.

양(梁)나라 『승우록(僧祐錄)』에는 “안공(安公)의 목록 중 실역경(失譯經)은 오직 『승우록』에만 실려 있고, 『장방록(長房錄)』 등의 목록에는 모두 없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실린 안공의 실역은 총 142경전이다. 이제 그 밖의 다른 87부는 모든 기록을 조사하고 찾아보았더니, 거의가 번역한 이[譯主]가 적혀 있으며, 혹은 별도로 간추려 뽑은 경[抄經]이거나, 그 사람이 지은 전기(傳記)였다. 이미 근거가 있기 때문에 삭제하여 싣지 않은 것이며, 안공도 시대를 표시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우선 진(晋)나라 시대 말미에 덧붙여 놓는다.
앞의 옛 실역경[舊失譯經] 3부 3권까지 합치면, 총 58부 59권인데, 모두 서진(西晋) 때의 근원을 잃어버린 것[失源]이다.開元釋教錄卷第二 笙庚午歲西崇福寺沙門智昇撰摠括群經錄上之二吳孫氏前都武昌後都建業從孫權謚太祖文皇帝黃武元年壬寅至孫皓無謚天紀四年庚子凡經四主五十九年緇素五人所出經等幷及失譯摠一百八十九部四百一十七卷 於中六十一部九十二卷見在一百二十八部三百二十五卷闕本吳 沙門維祇難 二部 六卷經集沙門竺律炎 四部 六卷經集優婆塞支謙 八十八部 一百一十八卷經律集沙門康僧會 七部 二十卷經集沙門支彊梁接 一部 六卷經魏吳兩代諸失譯經 八十七部二百六十一卷阿差末菩薩經四卷 初出與西晉法護阿差末及無盡意經等竝同本見吳別二錄法句經二卷 初出亦云法句集尊者法救撰與律炎支謙共出見僧祐錄吳錄云竺卷未詳右二部六卷 法句經二卷見在阿差末四卷闕本沙門維祇難吳云障㝵本印度人世奉異道以火祠爲上有天竺沙門習學小乘多行道術經遠行逼暮欲寄難家宿難家旣奉異道猜忌釋子乃處之門外露地而宿沙門夜密加呪術令難家所事之火欻然變滅於是擧家共出啓請沙門入室供養沙門還以呪術變火令生難旣睹沙門神力勝己卽於佛法大生信樂乃捨本所事出家爲道依此沙門以爲和上受學三藏妙善四含遊化諸國莫不皆奉與同伴竺律炎發自西域因到江左#以孫權黃武三年甲辰於武昌郡共竺律炎出阿差末等經二部而祇難及炎旣未善方音翻梵之際頗有不盡志存義本辭近朴質摩登伽經三卷 見法上錄與支謙共出與舍頭諫經等同本或二卷第四譯三摩竭經一卷 初出見始興錄與分和檀王經同本異出一名須摩提女經一名難國王經一名恕和檀王經佛醫經一卷 與支越共出非是全典從大經略出或云佛醫王經見寶唱錄梵志經一卷 見始興錄右四部六卷 前三部五卷見在後一部一卷闕本沙門竺律炎印度人也解行淸厲內外博通與維祇難同遊吳境維祇卒後以孫權黃龍二年庚戌於楊都譯摩登伽等經四部其名群錄不同或云將炎或云持炎或云律炎未詳孰是故備列之大明度無極經四卷 第二出或六卷亦直云大明度經與道行小品等同本見竺道祖魏吳錄及僧祐等錄阿彌陁經二卷 內題云佛說諸佛阿彌陁三邪三佛薩棲檀過度人道經第三出亦名無量壽見竺道祖僧祐二錄與世高等譯小異菩薩本業經一卷 亦直名本業經亦名淨行品經是華嚴淨行品異譯見僧祐錄長房錄中本業之外別載淨行品者誤也維摩詰經二卷 維摩詰說不思議法門之稱一名佛法普入道門三昧經第二出或三卷見竺道祖僧祐二錄與漢佛調等譯少異慧印三昧經一卷 亦直云慧印經一名寶田慧印三昧經初出與如來智印經同本見道祖僧祐二錄九色鹿經一卷 出六度集異譯見法上錄老女人經一卷 安公云出阿毘曇吳錄直云老女經或云老母經初出見僧祐錄犢子經一卷 見法上錄初出與乳光佛經等同本貝多樹下思惟十二因緣經一卷見長房錄第三出與唐譯緣起聖道經等同本了本生死經一卷 安公云出生經祐按五卷生經無此名見僧祐錄與稻芉經同本異出謙自注幷製序安公序云漢末出謙注龍施女經一卷 初出與龍施菩薩本起經同本祐云別錄所載安錄無八吉祥神呪經一卷 初出或無神字或云八吉祥經與八陽神呪經等同本房云見古錄無量門微密持經一卷 亦直云微密持經一名成道降魔得一切智經初出與出生無量門持經等同本見僧睿二秦錄及僧祐錄華積陁羅尼神呪經一卷 見寶唱錄或無神字與華聚陁羅尼等同本持句神呪經一卷 初出見長房錄與陁鄰尼鉢經等同本亦云出陁羅尼句私訶昧經一卷 第二出或云私訶末一名菩薩道樹亦名道樹三昧見道安支敏度僧祐等三錄祐云此經卽是菩薩道樹菩薩生地經一卷 一名差摩竭經初出見竺道祖吳錄及僧祐錄孛經一卷亦云孛抄經祐云今孛經一卷卽是第二出見僧祐錄及別錄月明菩薩經一卷 或加三昧字一名月明童子經一名月明童男經見僧祐錄三品弟子經一卷 一名弟子學有三輩經見長房錄法律三昧經一卷 亦眞云法律經第二出見長房錄梵志阿颰經一卷 一名阿颰摩納經安錄直云阿拔經亦名佛開解梵志阿颰經出長阿含第十三卷異譯見長房錄梵網六十二見經一卷 一名梵網經房云見別錄出長阿含第十四卷異譯七知經一卷 或作七智見長房錄出中阿含第一卷異譯釋摩男本經一卷 祐錄無本字一名五陰因事經安錄云出中阿含第二十五異譯見竺道祖吳錄及僧祐錄諸法本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八異譯見長房錄弊魔試目連經一卷 一名魔嬈亂房云見舊錄出中阿含第三十卷異譯賴咤和羅經一卷 或云羅漢賴咤和羅經與後漢支曜出者少異出中阿含第三十一異譯祐云別錄所載安錄中無梵摩喩經一卷 或作渝字見道祖僧祐二錄出中阿含第四十一異譯齋經一卷 一名持齋經見別錄及僧祐錄出中阿含第五十五異譯須摩提女經一卷 出增一阿含第二十二異譯見長房錄不自守意經一卷 或無意字或云自守亦不自守經出雜阿含第十一卷異譯見長房錄五母子經一卷 見長房錄初出與沙彌羅經同本太子瑞應本起經二卷 黃武年譯第四出亦云太子本起瑞應亦直云瑞應本起與孟詳出者小異陳郡謝鏘吳郡張洗等筆受魏河東王桓詳定見始興僧祐二錄龍王兄弟經一卷 一名難龍王經或無王字一名降龍王經初出見長房錄長者音悅經一卷 一云長者音悅不蘭迦葉經亦直云音悅經初出見長房錄七女經一卷 亦云七女本經安公云出阿毘曇初出見僧祐錄八師經一卷 見竺道祖吳錄及僧祐錄初出蓱沙王五願經一卷 或作甁字一名弗沙迦王經見長房錄初出安公云出中阿含撿無義足經二卷 見竺道祖吳錄及僧祐寶唱二錄初出有一十六經須摩提長者經一卷 一名會諸佛前亦名如來所說示現衆生見長房錄阿難四事經一卷 見僧祐錄及別錄未生怨經一卷 見長房錄四願經一卷 見竺道祖吳錄及僧祐錄里氏梵志經一卷 房云見別錄猘狗經一卷 見長房錄孫多耶致經一卷 或云梵志孫多耶致經見長房錄安公云出中阿含撿無戒銷災經一卷 亦云戒銷伏災經見舊錄撰集百緣經十卷 見內典錄菩薩本緣經二卷 亦云菩薩本緣集經或二卷或四卷天竺沙門僧伽斯那撰見長房錄惟日雜難經一卷 見長房錄上見存已下闕摩訶般若波羅蜜呪經一卷 或無摩訶字見寶唱錄法鏡經二卷 或一卷第二出祐云見別錄安錄中無又長房等錄更有郁伽長者經二卷亦云謙譯卽是此經不合重載阿闍世王女阿術達菩薩經一卷 初出見長房錄阿差末菩薩經四卷 見吳錄第三出與維祇難所譯本同文異小阿差末經二卷 見別錄及僧祐錄旣加小字與次前經應非同本大般泥洹經二卷 第三出此略大本序分哀歎品爲二卷後三紙小異耳見竺道祖吳錄安公云出長阿含祐云今長阿含與此異佛以三車喚經一卷 見長房錄云出法華應出第二卷譬喩品不莊挍女經一卷 初出見寶唱錄須賴經一卷 或云須賴菩薩經第三出與白延等出者同本別譯見竺道祖吳錄及僧祐錄菩薩修行經一卷 初出見寶唱錄演道俗業經一卷 初出見舊錄或無業字方等首楞嚴經二卷 黃武年譯第二出與後漢支讖等出者同本見竺道祖吳錄安錄中無祐無方等字云見別錄惟明二十偈經一卷 初出或無經字見僧祐錄法滅盡經一卷 初出或云法沒盡或云空寂菩薩所問經見長房錄七佛神呪經一卷 一本無經字見長房錄摩訶精進經一卷 亦云大精進經 見長房錄十二門大方等經一卷 安錄無祐云見別錄佛從上所行三十偈經一卷 或無經字見僧祐錄四十二章經一卷 第二出與摩騰譯者小異文義允正辭句可觀見別錄禪秘要經四卷 或無經字初出見吳別二錄堅意經一卷 或云堅心經第二出見長房錄勸進學道經一卷 一本無勸字初出見長房錄恒水戒經一卷 或無戒字第二出見舊錄七漏經一卷 房云見別錄悔過法經一卷 或無法字一名序十方禮拜悔過文見僧祐錄賢者德經一卷 見僧祐錄梵志結淨經一卷 見長房錄阿質國王經一卷 見長房錄惟婁王師子潼譬喩經一卷 一本無譬喩字見長房錄藍達王經一卷 一云目連功德經亦云目連因緣功德經見吳錄百喩經一卷 見長房錄五陰事經一卷 見長房錄魔化作比丘經一卷 見長房錄優多羅母經一卷 一本無母字見僧祐錄人民求願經一卷見長房錄修行方便經二卷亦云修行方便禪經見吳錄法句經二卷 第二出亦法句集見別錄及僧祐錄右八十八部一百一十八卷 惟日雜難經上五十一部六十九卷見在摩訶般若呪下三十七部四十九卷闕本優婆塞支謙字恭明一名越大月支人也祖父法度以漢靈帝世率國人數百歸化拜率善中郞將越年七歲騎竹馬戲於鄰家爲狗所齧脛骨傷碎鄰人欲殺狗取肝傅瘡越曰天生此物爲人守吠若不往君舍狗終不見齧此則失在於我不關於狗若殺之得差尚不可爲況於我無益而空招大罪且畜生無知豈可理責由是鄰人感其言至遂不復殺十歲學漢書十三學婆羅門書竝得精妙兼通六國語音初桓靈世支讖譯出法典有支亮字紀明資學於讖謙又受業於亮博覽經籍莫不明練世閒藝術多所綜習其爲人細長黑瘦眼多白而睛黃時人爲之語曰支郞眼中黃形體雖細是智囊其本奉大法精練經旨獻帝之末漢室大亂與鄕人數十共奔於吳初發日唯有一被有一客隨之大寒無被越呼客共眠夜將半客奪其被而去明旦同侶問被所在越曰昨夜爲客所奪同侶咸曰何不相告答曰我若告發卿等必以劫罪罪之豈宜以一被而殺一人乎遠近聞者莫不歎服後吳主孫㩲聞其博學有才慧卽召見之因問經中深隱之義越應機釋難無疑不折權大悅拜爲博士使輔導東宮甚加寵祑越以大教雖行而經多梵文莫有解者旣善華戎之語乃收集衆本譯爲吳言從權黃武二年癸夘至亮建興二年癸酉三十餘載譯大明度等經八十八部曲得聖義辭旨文雅又依無量壽中本起經製讚菩薩連句梵唄三契注了本生死經皆行於世後太子登位遂隱於穹隘山不交世務從竺法蘭道人更練五戒凡所遊從皆沙門而已後卒於山中春秋六十吳主孫亮與衆僧書曰支恭明不救所疾其業履沖素始終可高爲之惻愴不能已已其爲時所惜如此謙所出經部卷多少諸說不定其僧祐三藏記唯載三十六部祐錄謙傳云出二十七經慧皎高僧傳乃有四十九經長房錄中便載一百二十九部今以房錄所載多是別生或異名重載今隨次刪之如後所述鹿子經 與西晉竺法護所出鹿母經文同申日經 亦與法護所出月光童子經同出家功德經 今有兩本一是秦譯附於秦錄一從賢愚抄出今附別生錄中金剛淸淨經 亦云金剛三昧本性淸淨不滅不壞經後漢失譯錄中復載詳文非是支謙所出今移附秦錄大慈無減經寶女問三十二相經魔女聞佛說法得男身經 大慈無減等三經竝出大集經寶海寂志成就大悲經 出悲華經普廣菩薩經 卽別行隨願往生經是出灌頂經摩調王經 出六度經佛爲訶利曠野鬼說法經 或云訶利出中阿含枯樹經 或上加大字鷹鷂獵經鴟鳥事經 枯樹等三經竝出增一阿含色無常經諸漏盡經 或無漏字雪山無獼猴經 或作猿猴或無無字無母子經 不淨觀經三種良馬經 四種良馬經壽命促經 河中草龜經國王成就五法久存於世經佛爲外道須深說離欲經 色無常等十一經竝出雜阿含是我所經 梵志經上二經竝出生經桀貪王經 出義足經外道仙尼說度經度梵志經 上二經小乘抄瞎鼈經 梵志問佛世閒增減經三魚失水經 甘露道經降千梵志經 梵志子死稻敗經護口意經 梵志問佛師經法施勝經 水上泡經瞎鼈等十經竝出出曜經修行慈經 出修行道地經度脫狗子經 出雜譬喩右大慈無減經等三十八部三十八卷長房等錄竝云謙譯今按隋代二本衆經錄及新括出別生抄經等此等竝從諸經抄出不合足爲翻譯之數今存實錄故竝刪之六度集經八卷 或九卷或云六度無極度經或云度無極集或云雜無極經見竺道祖吳錄及僧祐錄舊雜譬喩經二卷 內典有舊字房錄中無亦云雜譬集經或無集字見高僧傳及長房錄吳品經五卷 祐錄無經字云凡有十品第三出房云卽是小品般若見僧祐錄菩薩淨行經二卷 是大集寶髻品異 譯或直云淨律經云赤烏年出見竺道祖吳錄權方便經一卷 與順權方便經等同本初出見吳錄及別記菩薩二百五十法經一卷 或二卷以此替大僧二百五十戒示皓者是見高僧傳及長房錄坐禪經一卷 見長房錄右七部二十卷 六度等二部十卷見在吳品等五部十卷闕本沙門康僧會其先康居國人世居印度其父因商賈移于交阯會#年十餘歲二親竝亡以至性奉孝服畢出家厲行甚峻爲人弘雅有識量篤志好學明解三藏博覽六經天文圖緯多所綜涉辯於樞機善屬文翰孫權稱制江左而佛教未行先有優婆塞支謙宣譯經典旣初染大法風化未全僧會欲使道振江左興立圖寺乃杖錫東遊以吳赤烏十年初達建業營立茅茨設像行道吳國以初見沙門睹形未及其道疑爲矯異有司奏曰有胡人入境自稱沙門容服非恒事應撿察權曰吾聞漢明夢神號稱爲佛彼之所事豈其遺風耶卽召會詰問有何靈驗會曰如來遷迹忽逾千載遺骨舍利神曜無方昔阿育王起塔乃八萬四千夫塔寺之興所以表遺化也權以爲誇誕乃謂會曰若能得舍利當爲造塔如其虛妄國有常刑會請期七日乃謂其屬曰法之興廢在此一擧今不至誠後將何及乃共潔齋靖室以銅甁加持燒香禮請七日期畢寂然無應求申二七亦復如之權曰此寔欺誑將欲加罪更請三七權又特聽會謂法屬曰宣尼有言文王旣沒文不在茲乎法雲應降而吾等無感何假王憲當以誓死爲期耳三七日暮猶無所見莫不震懼旣入五更忽聞甁中鎗然有聲會自往視果獲舍利明旦呈權擧朝集觀五色光焰照曜甁上權自手執甁寫于銅盤舍利所衝盤卽破碎權肅然驚起曰希有之瑞也會進而言曰舍利威神豈直光相而已乃劫燒之火不能焚金剛之杵不能碎權命令試之會更誓曰法雲方被蒼生仰澤願更垂神迹以廣示威靈乃置舍利於鐵鉆上使力者擊之於是砧磓俱陷舍利無損權大嗟服卽爲建塔以始有佛寺故號建初寺因名其地爲佛陁里由是江左大法遂興至孫皓卽政法令苛虐廢棄淫祀乃及佛寺竝欲毀壞皓曰此由何而興若其義教眞正與聖典相應者當存奉其道如其無實皆悉焚之諸臣僉曰佛之威力不同餘神康會感瑞大皇創寺今若輕毀恐貽後悔皓遣張昱詣寺誥會昱雅有才辯難問從撗會應機騁詞文理鋒出自旦至夕昱不能屈旣退會送于門寺側有淫祀者昱曰玄化旣孚此輩何故近而不革會曰震霆破山聾者不聞非音之細茍在理通則萬里懸應如其阻塞則肝膽楚越昱還歎會才明非臣所測願天鑑察之皓大集朝賢以馬車迎會會就坐皓問曰佛教所明善惡報應何者是耶會對曰夫明主以孝慈訓世則赤烏翔而老人見仁德育物則醴泉涌而嘉禾生善旣有瑞惡亦如之故爲惡於隱鬼得而殺之爲惡於顯人得而誅之易稱積善餘慶詩詠求福不回雖儒典之挌言卽佛教之明訓皓曰若然則周孔已明何用佛教會曰周孔所言略示近迹至於釋教則備極幽微故行惡則有地獄長苦修善則有天宮永樂擧茲以明勸助不亦大哉皓當時無以折其言皓雖聞正法而昏暴之性不勝其虐後使宿衛兵入後宮治園於地得一金像高數尺呈皓皓使著不淨處至四月八日以穢汁灌之共諸群臣笑以爲樂俄爾之閒擧身大腫陰處尤痛叫呼徹天太史占言犯大神所爲卽祈祀諸廟而苦痛彌劇婇女先有奉法者因問訊云陛下就佛圖中求福不皓擧頭問曰佛神大耶婇女云佛爲大聖天神所尊皓爲心悟具語意故婇女卽迎像置殿上香湯洗數十過燒香懺悔皓叩頭于枕自陳罪狀有頃痛閒遣使至寺問訊諸道人請會說法會卽隨入皓具問罪福之由會爲敷析詞甚精要皓先有才欣然大悅因求看沙門戒會以戒文秘禁不可輕宣乃取本業百二十五願分爲二百五十事行住坐臥皆願衆生皓見慈願廣普益增善意卽就會受五戒旬日疾瘳乃於會所住更加修飾號爲天子寺宣示宗室莫不必奉會在吳朝亟說正法以皓性兇麤不及妙義唯敍報應近事以開其心至吳天紀四年四月皓降晉九月會遘疾而終是歲晉武太康元年也至晉成咸和中蘇峻作亂焚會所建塔司空何充復更修造平西將軍趙誘世不奉法傲篾三寶入此寺謂諸道人曰久聞此塔屢放光明虛誕不經所未能信若必自睹所不論耳言竟塔卽出五色光照曜堂剎誘肅然毛豎由此信敬於寺東更立小塔遠由大聖神感近亦康會之力故圖寫厥像傳之于今孫綽爲之贊曰會公蕭瑟寔惟令質心無近累情有餘逸厲此幽夜振彼尤黜超然遠詣卓矣高出會以權太元元年辛未於所創建初寺譯六度等經七部竝妙得經體文義允正又傳泥洹唄聲淸靡哀亮一代摸式又長房等錄更有阿難念彌經鏡面王經察微王經梵皇王經上之四經雖云會譯然竝出六度集中不合爲正譯之數今載別生錄中復有法鏡經注解二卷道樹經注解一卷安般經注解一卷已上三經會兼製序三經會雖注解本非僧會所翻故亦不爲會譯之數兼前七部今竝刪之法華三昧經六卷 一本有正字初出與法護正法華等同本見竺道祖魏錄亦見始興錄右一部六卷本闕沙門支疆梁接#吳云正無畏西域人以孫亮五鳳二年乙亥於交州譯法華三昧經沙門竺道馨筆受長房內典二錄編於曹魏之代今依交州及始興地割入吳錄不思議功德諸佛所護念經二卷 出虫經或云不思議功德或直云功德經七佛父母姓字經一卷 舊錄云七佛姓字經出增一阿含第四十五異譯雜阿含經一卷 見舊錄出雜阿含中異譯阿毘曇甘露味論二卷 或無論字亦云甘露味阿毘曇或云甘露味經尊者瞿沙造上見存已下闕蜀普曜經八卷 似是蜀土所出第一譯長者子誓經一卷 見舊錄第二出無端底持經一卷 舊錄云無端底摠持經第二出蜀首楞嚴經二卷 見舊錄似蜀土所出第三譯後出首楞嚴經二卷 見舊錄云有十偈第四譯阿惟越致轉經一十八卷 見舊錄摩訶乘經十四卷 或云摩訶衍摩訶衍優波提舍經五卷 祐云摩訶乘三昧王經五卷 梵王請問經五卷佛從兜率降中陰經四卷 出王宗錄四天王經四卷 疑四部四本魔王請問經四卷釋提桓因所問經三卷大梵天王請轉法輪經三卷法華光瑞菩薩現壽經三卷 今疑抄正法華普賢菩薩答難二千經三卷梵天王請佛千首經二卷 又大梵天王經二卷似此菩薩常行經一卷 見舊錄熒火六度經一卷 舊錄有明度經一卷云一名熒火明度經內禪波羅蜜經一卷 見舊錄六波羅蜜經一卷 見舊錄大摠持神呪經一卷 見舊錄亦云摠持呪經阿惟越致菩薩戒經一卷 舊錄無菩薩字雜數經二十卷 見舊錄那先譬喩經四卷 見舊錄太子試藝本起經二卷深斷連經二卷摩訶目揵連與佛捔能經一卷 見舊錄阿難得道經一卷 見舊錄阿難般泥洹經一卷 見舊錄阿那律念復生經一卷 見舊錄沙門分衛見怪異經一卷 見舊錄弟子本行經一卷 見舊錄高僧傳云白法祖譯爲壽盡天子說法經一卷 舊錄云命盡天子經魔試佛經一卷 見舊錄阿須倫問八事經一卷 舊錄云阿須倫所問八事經摩竭王經一卷 舊錄云摩竭國王經薩波達王經一卷 見舊錄祐錄云菩和達王經年少王經一卷 見舊錄是光大子經一卷 見舊錄長者難提經一卷 見舊錄女利行經一卷 見舊錄四婦因緣經一卷 見舊錄須多羅經一卷 舊錄云須多羅入胎經墯迦經一卷 見舊錄晉言堅强旣曰晉言合編晉錄或作隋字盤達龍王經一卷 見舊錄牛米自供養經一卷 舊錄無養字行牧食牛經一卷 見舊錄或作放字墮釋迦牧牛經一卷 見舊錄或作隨字法嚴經一卷 見舊錄疑卽是等入法嚴經壁四經一卷 見舊錄止寺中經一卷 見舊錄安般行道經一卷 見舊錄解慧微妙經一卷 見舊錄失道得道經一卷 見舊錄心情心識經一卷 見舊錄云有注撿意向正經一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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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十六部 一十八卷經沙門釋法立 四部 一十二卷經集沙門釋法炬 四十部 五十卷經律淸信士聶承遠 二部 三卷經淸信士聶道眞 二十四部三十六卷經律沙門支法度 四部 五卷經沙門若羅嚴 一部 一卷經新舊諸失譯經 五十八部五十九卷五十五部五十六卷新附 三部三卷舊集光讚般若波羅蜜經十五卷 初出或十卷與大般若第二會及放光大品竝同本亦云光讚摩訶般若經凡二十七品太康七年十一月二十五日出見道安錄及僧祐錄密迹金剛力士經七卷 或五卷或四卷或八卷太康元年十月八日出亦直云密迹經見支敏度竺道祖及僧祐三錄今編入寶積當第三會菩薩說夢經二卷 見法上錄今編入寶積當第四會改名淨居天子會法上錄云護公所出詳文乃非且依上錄爲定寶髻菩薩所問經二卷 一名菩薩淨行經舊錄直云寶髻經是別譯大集寶髻品太熙元年七月十四日出見道眞僧祐二錄今入寶積當四十七會普門品經一卷 初出亦云普門經與寶積文殊普門會等同本太康八年正月十一日出見聶道眞錄及僧祐錄胞胎經一卷 舊錄云胞胎受身經太安二年八月一日出與寶積處胎會同本見聶道眞錄及僧祐錄文殊師利佛土嚴淨經二卷 或直云嚴淨淨土經亦云佛土嚴淨經太熙元年譯初出與寶積文殊授記會等同本見竺道祖晉世雜錄及僧祐錄郁迦羅越問菩薩行經一卷 或云郁伽長者經卽大郁伽經或二卷第四出與安玄法鏡及寶積郁伽長者會等同本見道安敏度僧祐三錄幻士仁賢經一卷 或云仁賢幻士經初出與寶積授幻師記會同本見聶道眞錄及僧祐錄須摩提經一卷 初出亦直云須摩提菩薩經與寶積妙慧會等同本見聶道眞竺道祖僧祐等三錄阿闍貰王女阿術達菩薩經一卷 第二出亦云阿闍貰女經亦云阿述達女經建武元年譯見眞敏祐等三錄祐房二錄別存無憂施經祐錄更載阿闍貰王女經二俱誤也離垢施女經一卷 初出太康十年十二月二日出與寶積無垢施會等同本見道眞僧祐二錄內典錄內更載無垢施應辯經者誤也彼道眞譯如後所顯如幻三昧經二卷 第二出或三卷或四卷與寶積善住意會等同本見僧祐錄太子刷護經一卷 初出見法上錄與寶積阿闍世王子會等同本慧上菩薩問大善權經二卷 第二出或一卷太康六年六月十七日出或云大善㩲經或云慧上菩薩經或云善權方便經或云善㩲方便所度無極經見眞祐二錄彌勒菩薩所問本願經一卷 初出太安二年五月十一日譯或無所問二字亦云彌勒本願經一名彌勒難經與寶積彌勒所問會等同本見道眞道祖僧祐三錄阿差末經七卷 題云晉曰無盡意或四卷或五卷出大集第三譯元嘉元年十一月一日出或加菩薩字見眞祐二錄祐房二錄重載無盡意經四卷誤也大哀經八卷 舊錄云如來大哀經元康元年七月七日出八月二十三已訖有二十八品是大集初品別譯或六卷或七卷見竺道祖晉世雜錄及僧祐錄寶女所問經三卷 太康八年四月二十七日出是大集寶女品異譯或四卷亦直云寶女問慧經亦云寶女三昧經見道祖僧祐二錄無言童子經二卷 或云無言菩薩經是大集無言品異譯或一卷見聶道眞錄及僧祐錄菩薩十住行道品一卷 是華嚴十住品異譯見隋沙門法經錄祐房二錄直云菩薩十住卽此行道品是漸備一切智德經五卷 一名十住又名大慧光三昧或十卷元康元年十一月二十一日出是華嚴十地品異譯見聶道眞及僧祐二錄等目菩薩所問三昧經二卷 一名普賢菩薩定意或直云等目菩薩經或三卷是新花嚴十定品異譯舊經無此品見僧祐錄如來興顯經四卷 一名興顯如幻經元康元年十二月二十五日出是華嚴經如來性起品及十忍品異譯見聶道眞及僧祐二錄度世品經六卷 或云度世經或五卷元康元年四月十三日出是華嚴離世間品異譯見聶道眞僧祐二錄方等般泥洹經二卷 初出與隋譯四童子經同本或無般字或三卷或云大般泥洹經太始五年七月二十三日出見道眞僧祐二錄普曜經八卷 一名方等本起安公云出方等部永嘉二年五月於天水寺出第二譯沙門康殊白法巨等筆受見古眞祐三錄正法華經十卷 或云方等正法華或七卷二十七品太康七年八月十日出第三譯淸信士張士明張仲正聶承遠等筆受見眞祐二錄大方等頂王經一卷 初出安公云出方等部亦直云頂王經一名維摩詰子問經亦云善思童子經凡四名見支敏度錄及僧祐錄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二卷 初出或三卷亦云佛昇忉利天品經與道神足經等同本太始年出見聶道眞及僧祐錄阿惟越致遮經三卷 初出或四卷或云阿惟越致經太康五年十月十四日於燉煌出與不退轉經廣博嚴淨經同本異譯見眞祐二錄等集衆德三昧經三卷 初出舊錄云等集衆德經或直云等集經與集一切福德經等同本或二卷見聶道眞錄及僧祐錄持心梵天經四卷 一名莊嚴佛法又名等御諸法凡十七品或六卷初出或加所問二字或直云持心經太康七年三月十日出聶承遠筆受見舊眞祐三錄持人菩薩經四卷 初云持人菩薩所問陰種諸入以了道慧經初出或三卷與持世經同本異出見僧祐錄濟諸方等學經一卷 天竺薩和鞞日僧迦或無學字初出與方廣摠持經同本見竺道祖錄及僧祐錄文殊師利現寶藏經三卷 初出或無現字與方廣寶篋經等同本太始六年十月出或二卷亦直云寶藏經見僧祐錄長房錄中別載寶藏經二卷誤之甚也無極寶三昧經一卷 初出或云無極寶經與寶如來三昧同本永嘉元年三月三日出見別錄及聶道眞僧祐二錄普超三昧經三卷第二出或四卷一名阿闍世王品太康七年十二月二十七日出或無三昧字或上加文殊師利安錄云更出阿闍世王經見祖祐二錄無所希望經一卷 第二出或作悕字一名象步經與象腋經等同本見聶道眞錄及僧祐錄大淨法門經一卷 題云大淨法門品上金光首女所問溥首童眞所開化經初出與大莊嚴法門經等同本建興元年十二月二十六日出見聶道眞及僧祐二錄順㩲方便經二卷 一名轉女身菩薩經或作惟㩲舊錄云順㩲女經亦云隨㩲女經第二出或一卷見道眞僧祐二錄祐房二錄別存隨權女經誤也太子沐魄經一卷 第三出六度集第四卷異譯或作暮魄見僧祐錄月光童子經一卷 初出一名月明童子經或名申日經與德護長者經等同本見僧祐錄乳光佛經一卷 第二出亦云乳光經與犢子經等同本異出見僧祐錄無垢賢女經一卷 第二出或名胎藏經與轉女身經等同本見聶道眞錄祐房二錄載胎藏經卽此無垢賢女經是決定摠經一卷 初出或云決摠持經與謗佛經同本見僧祐錄如來獨證自誓三昧經一卷 亦云獨證自誓三昧經或云如來自誓三昧經第二出與漢安世高自誓三昧經同本見僧祐錄龍施菩薩本起經一卷 舊錄云龍施本經或云龍施女經第二出與龍施女經同本見僧祐錄八陽神呪經一卷 亦直云八陽經第二出與八吉祥呪經等同本見長房錄盂蘭盆經一卷 亦云盂蘭經與報恩奉盆經同本見長房錄四不可得經一卷 第二出見聶道眞正度僧祐等三錄梵女首意經一卷 初出一名首意女經見僧祐錄寶網經一卷 初出亦云寶網童子經見聶道眞僧祐二錄菩薩行五十緣身經一卷 初出舊錄云菩薩緣身五十事經亦云五十緣身行經見竺道祖錄及僧祐錄須眞天子經三卷 初出或二卷或加所問二字亦云問四事經太始三年十一月八日於長安靑門外白馬寺出安文惠等傳聶承遠等筆受至十二月十三日訖見道祖僧祐二錄海龍王經四卷 初出或三卷太康六年七月十日出見聶道眞錄及僧祐錄諸佛要集經二卷 天竺曰佛陁僧祇提亦直云要集經初出見僧祐錄賢劫經十三卷 題云颰陁劫三昧晉曰賢劫定意經永康元年七月二十一日出趙文龍筆受初出或七卷或十卷見道眞僧祐二錄房等別存颰陁劫三昧經誤也弘道廣顯三昧經四卷 一名阿耨達龍王所問決諸狐疑淸淨品亦名入金剛問定意經凡十二品或二卷永嘉二年三月出見眞祐二錄內典中別載阿耨達經誤也心明經一卷 一名心明女梵志婦飯汁施經見僧祐錄滅十方冥經一卷 光熙元年八月十四日出或云十方滅冥經見聶道眞錄及僧祐錄鹿母經一卷 又別有鹿子經一卷與此全同見僧祐錄魔逆經一卷 太康十年十二月二日於洛陽城西白馬寺出聶道眞筆受見僧祐錄及經後記德光太子經一卷 或云賴咤和羅所問光德太子經太始六年九月三十日出見竺道祖錄及僧祐錄般泥洹後灌臘經一卷 或云般泥洹後四輩灌臘經亦直云灌像經見長房錄四輩經一卷 或云四輩弟子經亦云四輩學經見法上錄當來變經一卷 或云當來變識經見道眞僧祐二錄過去佛分衛經一卷 舊錄云過世佛分衛經見僧祐錄文殊師利淨律經一卷 初出又直云淨律經太康十年四月八日於白馬寺出先遇西域寂志誦出經本後尚有數品其人忘但宣憶者道眞筆授見祖祐二錄文殊悔過經一卷 初出或加師利字亦云文殊五體悔過經見僧祐錄離睡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卷異譯見長房錄受歲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三卷初異譯見長房錄樂想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六異譯見長房錄尊上經一卷 出中阿含第四十三異譯見長房錄意經一卷 出中阿含第四十五異譯見長房錄應法經一卷 亦出中阿含第四十五異譯見長房錄鴦崛摩經一卷 或作魔字或云指髻經或云指鬘經出增一阿含第三十一異譯見道眞僧祐二錄力士移山經一卷 亦直云移山經見僧祐錄出增一阿含第三十六異譯四未曾有法經一卷 或無法字亦云四未有經見長房錄亦出增一阿含第三十六異譯聖法印經一卷 天竺名阿遮曇摩文圖出雜阿含第三或無法字亦云慧印經元康四年十二月五日於酒泉郡出竺法首筆受見道眞寶唱僧祐三錄舍頭諫經一卷 題云舍頭諫晉曰太子二十八宿經一名虎耳經與摩登伽經等同本第五出與漢世高出者少異見道安錄祐云虎耳意經所欲致患經一卷 初出太安三年正月譯見道眞王宗僧祐三錄瑠璃王經一卷 第二出或作流離見僧祐錄生經五卷初出或四卷太康六年正月十九日出有五十五經見聶道眞錄及僧祐錄分別經一卷 舊云與阿難分別經等同本者非也見長房錄五百弟子自說本起經一卷 太安二年五月譯或云佛五百弟子自說本起舊錄云五百弟子自說本末經亦云五百弟子本起經見道眞僧祐二錄大迦葉本經一卷 或云迦葉本經見僧祐錄四自侵經一卷 安公云出阿毘曇見僧祐錄身觀經一卷 云出雜阿含撿無見長房錄修行道地經六卷 初卷題云榆遮伽復彌經晉曰修行道地太康五年二月二十三日出或七卷二十七品第三出亦直云修行經見祐唱二錄法觀經一卷 見長房錄上見存已下闕新道行經十卷 亦名小品或七卷祐云更出小品太始八年譯第四出與舊道行等同本房錄更載小品七卷誤也見祐房二錄藏中者非此本先闕仁王般若經一卷 或二卷三十一紙初出房云見晉世雜錄無量壽經二卷 一名無量淸淨平等覺經永嘉二年正月二十一日出第六譯與漢世高支讖等所出本同文異見竺道祖錄及僧祐錄菩薩藏經三卷 初出見長房錄般舟三昧經二卷 安公錄云更出般舟三昧經第五出見僧祐錄菩薩十地經一卷 亦云大方廣經亦直云十地經初出見僧祐錄薩芸芬陁利經六卷 太始元年譯見竺道祖晉世雜錄第二出隋錄云薩曇芸者恐誤祐錄中無維摩詰所說法門經一卷 太安二年四月一日譯第四出見聶道眞錄祐錄直云維摩詰經祐錄又有刪維摩詰經祐云意謂先出維摩繁重護刪出逸偈也閑居經一卷 與悲華經等同本異譯初出見僧祐錄更出阿闍世王經二卷 第四出見僧祐錄若准安錄但有更出阿闍世王經無普超三昧祐房二錄雙載二經旣梵本同不合再出彌勒成佛經一卷 初出一名彌勒當來下生經太安二年出一十七紙 見聶道眞錄及僧祐錄十二因緣經一卷 第四出亦云貝多樹下思惟十二因緣見僧祐錄溫室洗浴衆僧經一卷 第二出亦直云溫室經見聶道眞錄及僧祐錄百佛名經一卷 初出祐無經字見僧祐錄光世音大勢至受決經一卷 初出元康年出亦直云觀世音受記經見聶道眞僧祐二錄勇伏定經二卷 安公云更出首楞嚴也康元年四月九日出聶承遠筆受第六譯見道眞僧祐二錄祐房二錄更載首楞嚴二卷者誤也無思議光孩童菩薩經一卷 亦云無思議孩童經亦名無思議光經舊錄直云孩童經初出見僧祐錄超日明三昧經二卷 太始七年正月譯初出或三卷或直云超日明經見聶道眞錄及僧祐錄照明三昧經一卷 初出見僧祐錄惟明三十偈經一卷 或無經字第二出與吳代支謙出者本同見長房錄法沒盡經一卷 或云空寂菩薩所問經第二出與支謙出者同本或云法滅盡經見僧祐錄諸神呪經三卷 見僧祐錄文殊師利菩薩經一卷 見長房錄小郁伽經一卷 與大郁伽經不同見僧祐錄或作迦字諸方佛名功德經一卷 祐無功德字見僧祐長房二錄十方佛名經一卷 祐無經字見僧祐長房二錄慈仁問八十種好經一卷 或直云八十種好經見道安錄及長房錄三十二相因緣經一卷 或云菩薩三十二相經見道安錄及長房錄嚴淨定經一卷 一名序世經見僧祐錄寶施女經一卷 一名須摩提法律三昧見僧祐錄及道眞錄金益長者子經一卷 見僧祐錄離垢蓋經一卷 見僧祐錄慧明經一卷 見僧祐錄衆祐經一卷 見僧祐錄三轉日明經一卷 祐錄云月明見僧祐錄十等藏經一卷 見僧祐錄決道俗經一卷 見僧祐錄殖衆德本經一卷 見僧祐錄小法沒盡經一卷 見僧祐錄猛施經一卷 舊錄云猛施道地經見僧祐錄目連上淨居天經一卷 一本無天字房云出佛本行集經見僧祐錄菩薩齋法經一卷 或無經字或無法字一名菩薩正齋經一名持齋經一名賢首菩薩齋法經初出見僧祐長房二錄別載菩薩齋經誤也舍利弗悔過經一卷 第二出亦直云悔過經見僧祐錄佛悔過經一卷 見僧祐錄大六向拜經一卷 舊錄無大字太安元年譯或云尸迦羅越六向拜經出長阿含第十一異譯見支敏度僧祐寶唱三錄六十二見經一卷 亦云梵網六十二見經見道祖僧祐二錄出長阿含第十四異譯樓炭經六卷 或五卷或八卷初出是長阿含第四分記世經異譯見聶道眞錄及僧祐錄安公云出方等部者不然也普法義經一卷 亦云普義經第二出與漢代世高出者大同小異見聶道眞錄及僧祐錄舍利弗目連遊諸國經一卷 或云舍利弗摩目揵連遊諸四衢經出增一阿含第四十一異譯見僧祐錄柰女耆域經一卷 或云柰女經太安年譯第二出見聶道眞錄及僧祐錄七女本經一卷 或云柰女經太安年譯第二出見聶道眞錄及僧祐錄五蓋疑結失行經一卷 永寧二年四月十二日出第一譯安公云不似護公出見聶道眞錄及僧祐錄佛爲菩薩五夢經一卷 太安二年五月譯第二出一名佛五夢經一名太子五夢經一名仙人五夢經見舊錄及道眞僧祐二錄摩目揵連本經一卷 一名有訶字無揵字見僧祐錄五福施經一卷 見僧祐錄觀行不移四事經一卷 見僧祐錄四婦喩經一卷 見僧祐錄廬夷亘經一卷 見僧祐錄廅羅王經一卷 見僧祐錄檀若經一卷 見僧祐錄龍施經一卷 今疑是龍施菩薩本起經見僧祐錄給孤獨明德經一卷 舊錄給孤獨氏經見僧祐錄龍王兄弟陁達誡王經一卷 見僧祐錄勸化王經一卷 見僧祐錄鴈王經一卷 見僧祐錄鴈王五百鴈俱經一卷 見僧祐錄解無常經一卷 見僧祐錄城喩經一卷 見僧祐錄降龍經一卷 見長房錄邪法經一卷 見長房錄犯罪經一卷 見長房錄苦應經一卷 見長房錄三品修行經一卷 亦云三品悔過經安公云近代人合大修行經見僧祐長房二錄別存三品悔過經誤也夫那羅經一卷 見長房錄賈客經二卷 見僧祐錄沙門果證經一卷 見僧祐錄今疑與寂志果經同本貧女爲國王夫人經一卷 見長房錄誡王經一卷 見僧祐錄誡具經一卷 見僧祐錄誡羅云經一卷 見僧祐錄比丘尼戒一卷 祐云比丘尼戒經出十誦律與曇摩持所出少異初出見僧祐錄迦葉結集傳經一卷 或無傳字舊錄云迦葉結經或云結集戒經祐云迦葉集結經第二出見道眞僧祐二錄耆闍崛山解一卷 見僧祐錄雜譬喩三百五十首經二十五卷 祐云譬喩三百首經見僧祐錄房云見別錄右一百七十五部三百五十四卷法觀經上九十一部二百八卷見在新道行經下八十四部一百四十六卷闕本沙門竺曇摩羅察晉言法護其先月氏國人本姓支氏世居燉煌郡年八歲出家事外國沙門竺高座爲師遂稱竺姓 秦晉已前沙門多隨師稱姓後因彌天道安遂摠稱釋氏誦經日萬言過目則能而天性純懿操行精苦篤志好學萬里尋師是以博覽六經遊心七藉雖世務毀譽未嘗介抱是時晉武之世寺廟圖像雖崇京邑而方等深經蘊在蔥外護乃慨然發憤志弘大道遂隨師至西域歷遊諸國外國異言三十六種書護皆遍學貫綜詁訓音義字體無不備曉遂大齎梵經還歸東夏自燉煌至長安後到洛陽及往江左沿路傳譯寫爲晉文起武帝太始二年景戌至慜帝建興元年癸酉出光讚般若等經一百七十五部淸信士聶承遠及子道眞竺法首陳士倫孫伯虎虞世雅等皆共承護旨執筆詳挍而護孜孜所務唯以弘通爲業終身寫譯勞不告倦經法所以廣流東夏者護之力也末隱居深山山有淸㵎恒取澡漱後有採薪者穢其水側俄頃而燥護乃俳佪歎曰人之無德遂使淸泉輟流水若永竭眞無以自給正當移去耳言訖而泉流滿㵎其幽誠所感皆此類也故支遁爲之像贊云護公澄寂道德淵美微吟穹谷枯泉漱水邈矣護公天挺弘懿濯足流沙領拔玄致後立寺於長安靑門外精勤行道於是德化遐布聲蓋四遠僧徒數千咸共宗事及晉惠西幸長安關中蕭條百姓流移護與門徒避地東下至澠池遘疾而卒春秋七十有八 護於懷愍之世仍更出經傳云惠帝西幸長安護公避亂東出至澠池卒者或未然也護世居燉煌而化道周洽時人咸謂之燉煌菩薩也衆錄或云月支菩薩亦云天竺菩薩者斯皆重其德稱羙其號也然法護者此土翻名曇摩羅剎西方梵稱而梁僧祐錄及隋法經錄內立爲二人云各別出經小非詳審也今詳撿群錄護所出經多少不定長房錄中其數彌衆今細尋括多是別生等經有非護公所出不可足爲正譯之數今爲實錄故摠刪之如後所述師子月佛本生經 或無本字房等諸錄云護公譯詳文乃非今爲失譯編於秦錄法社經 世注爲疑曾見其本是人所造今編疑錄寶女問慧經梵王變身經 上二經出大集四自在神通經 出自在王經金剛藏菩薩行經 出斬備經光世音經 出正法華經寶日光明菩薩經 亦云寶日光明菩薩問蓮華國相貌經出悲華經普首童眞經 或作溥字出普超經隨藍本經 馬王經彌勒爲女身經摩調王經 隋藍等四經竝出六度集菩薩悔過法經 或無經字出龍樹十住論人從所來經 亦云人所從來出人本欲生經貧窮經 何苦經 貧窮等二經竝出中阿含七寶經出增一阿含經 醫王經悉鞞梨天子詣佛說偈經四種人經 醫王等三經竝出雜阿含閑居經 摠持經或云佛心摠持腹使經 蜜具經雜讚經 閑居等五經竝出生經女人慾熾荒迷經 多聞經寤意經 已上三經竝出出曜經寶女下二十七經竝是別生抄經從大部出今竝刪之衆經目錄一卷 護公自撰非梵本翻敍目錄中列此不復存也十二遊經一卷 初出右一部一卷本闕沙門彊梁婁至晉言眞喜西域人志情曠放弘化在懷以武帝太康二年辛丑於廣州譯十二遊經一部見始興錄及寶唱錄道神足無極變化經四卷 第二出一名合道神足經或三卷與竺法護所出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同本異譯見竺道祖錄阿育王傳七卷 或加大字亦云大阿育王經或五卷初出與梁譯育王經同本光熙年譯見竺道祖錄文殊師利現寶藏經二卷 初出亦云示現寶藏經或三卷與寶篋經等同本太安年譯見竺道祖錄阿闍貰王經二卷 太康年譯見竺道祖錄第三出與普超經等同本阿難目佉經一卷 第三出與微密持經等同本異譯見竺道祖錄右五部一十六卷 前二部十一卷見在後三部五卷闕本沙門安法欽安息國人學贍衆經幽鑑無滯以武帝太康二年辛丑訖惠帝光熙元年丙寅於洛陽譯道神足等經五部放光般若波羅蜜經三十卷 第二出與光讚大品等同本或二十卷亦云放光摩訶般若經亦云摩訶般若放光經元康元年出見經後記右一部三十卷其本見在沙門無羅叉經後記云無叉羅  于闐國人以惠帝元康元年辛亥五月十五日於陳留倉恒經記作垣 水南寺譯放光經一部至十二月二十四日訖河南居士竺叔蘭口傳祝太玄周玄明筆受其經梵本元是穎川沙門朱士衡嘗於洛陽講道行經至於深義往往不通每歎此經大乘之要而譯理不盡誓志捐身發心尋取遂以曹魏甘露五年庚辰發迹雍州西度流沙至于闐國寫得正品梵文九十章六十萬餘言以晉太康三年壬寅遣弟子弗如檀晉言法饒等十人送還洛陽未發之閒于闐小乘學衆遂以白王云漢地沙門欲以婆羅門書惑亂正典王爲地主若不禁之將斷大法聾盲漢地王之咎也王卽不聽齎經士衡憤慨乃求燒經爲證王欲試驗乃積薪殿庭以火燒之士衡臨階而誓曰若大法應流漢地者經當不燒若其無應命也如何言已#投不損一字皮牒如故更覺光鮮大衆駭服稱其神感遂送達到洛陽住三年復至許昌二年後至陳留水南寺衆請無羅叉等譯出而竺道祖僧祐王宗寶唱李廓法上靈裕等諸錄竝云朱士衡出者此蓋據其元尋之人推功歸之耳今據經後記支敏度錄諸雜目等乃是無叉羅竺叔蘭等共譯其朱士衡停在于闐年八十而卒依西方闍維法薪盡火滅而尸骸猶全衆咸驚異乃呪曰若眞得道法當毀壞應聲碎散遂斂骨起塔焉旣在于闐終亡其經定非其譯也異毘摩羅詰經三卷 祐云異維摩詰經或作思字或二卷元康六年譯第三出與佛調支謙等所出本同文異見道祖僧祐二錄首楞嚴經二卷 元康元年出第七譯與支讖支謙白延法護等所出本同文異見聶道眞錄及僧祐錄右二部五卷其本竝闕優婆塞竺叔蘭 今准僧祐錄中朱士行傳竺叔蘭傳放光經後記支敏度合首楞嚴記皆云叔蘭是白衣居士長房內典等錄云是沙門首誤也本天竺人祖父婁陁篤志好學淸簡有節操國王無道#百姓思亂有賊臣將兵得罪懼誅以其國豪呼與共反婁陁怒曰君出於微賤而任居要職不能以德報恩而反爲逆謀乎我寧守忠而死不反而生也反者懼謀泄卽殺之而作亂婁陁子達摩尸羅晉言法首先在他國其婦兄二人竝爲沙門聞父被害國內大亂卽與二沙門奔晉居于河南生叔蘭叔蘭幼而聰辯從二舅諮受經法一聞而悟善梵晉語及書亦兼諸文史然性頗輕躁遊獵無度嘗單騎逐鹿値虎墮馬折其右臂久之乃差後馳騁不已母數呵諫終不改爲之蔬食乃止性嗜酒飮至五六升方暢嘗大醉臥於路傍仍入河南郡門喚呼吏錄送河南獄河南尹樂廣與賓客共酣已醉謂蘭曰君僑客何以學人飮酒叔蘭曰杜康釀酒天下共飮何有僑舊廣又曰飮酒可爾何以狂亂乎答曰民雖狂而不亂猶府君雖醉而不狂廣大呼時坐客曰外國人那得面白叔蘭曰河南人面黑尚不疑僕面白復何怪耶於是賓主歎其機辯遂釋之頃之無疾暴亡三日還蘇自說入一朱門金銀爲堂見一人自云是其祖父謂叔蘭曰吾修善累年今受此報汝罪人何得來耶時守門人以杖驅之入竹林中見其獵伴爲鷹犬所啄齧流血號叫求救於叔蘭叔蘭走避數十步値牛頭人欲扠之叔蘭曰我累世佛弟子常供二沙門何罪見治牛頭人答此雖受福不關獵罪俄而見其兩舅來語牛頭曰我等二人恒受其供惡少善多可得相免遂隨道人歸旣而還蘇於是改節修慈專志經法以晉惠帝元康元年與無羅叉出放光經後於洛陽自出異毘摩詰等經二部旣學兼梵晉故譯義精允後遭母艱三月便欲葬有鄰人告曰今歲月不便可待來年叔蘭曰夫生者必有一死死者不復再生人神異塗理之然也若使亡母棲靈有地則烏鳥之心畢矣若待來年恐逃走無地何暇奉營乎遂卽葬畢明年石勒果作亂寇賊蹤撗因避地奔荊州後無疾忽告知識曰吾將死矣數日便卒識者以爲知命菩薩逝經一卷 第三出亦云誓童子經或直名逝經與長者子制經等同本見長房錄菩薩修行經一卷 第三出亦云威施長者問觀身行經亦云長者修行經見長房錄佛般泥洹經一卷 出長阿含是初分遊行經異譯亦直云泥洹經見長房錄大愛道般泥洹經一卷 出增一阿含第五十卷異譯賢者五福經一卷 見長房錄上見在已下闕嚴淨佛土經二卷 第二出亦云淨土經與文殊佛土嚴淨經等同本見長房錄郁伽羅越問菩薩經一卷 第五出與漢安公所出法鏡經等同本見長房錄等集三昧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無量破魔陁羅尼經一卷 第四出與微密持經等同本異譯大方等如來藏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惟逮菩薩經一卷 見高僧傳及僧祐錄檀特陁羅尼經一卷 見長房錄如來興顯經一卷 見長房錄善權經一卷 見長房錄海龍王經一卷 見長房錄持心梵志經一卷 見長房錄一十六部一十八卷 賢者五福上五部六卷見在嚴淨佛土下十一部十二卷闕本沙門白遠字法祖本姓萬氏河內人父威達以儒雅知名州府辟命皆不行祖少發道心啓父出家詞理切至父不能奪遂改服從道祖才思儁徹敏朗絕倫誦經日八九千言硏味方等妙入幽微世俗墳索多所該貫乃於長安#造築精舍以講習爲業白黑宗稟幾亘千人晉惠之末#太宰河閒王顒鎭關中虛心敬重待以師友之敬每至閑辰靜夜輒談講道德于時西府初建俊㐅甚盛能言之士咸伏其遠達祖旣博涉多聞善通梵晉之語於惠帝代譯菩薩逝經等一十六部後忽謂弟子及諸道人云我數日對當至便辭別作素書分布經像及資財訖張輔爲秦州刺史祖與俱往明晨詣輔共語忽忤輔意遂爲所害時人以爲知宿命矣後少時有人姓李名通死而更蘇云見祖法師在閻羅王處爲王講首楞嚴經云講竟應往忉利天又見祭酒王浮及道士基公次被杻械求祖懺悔祖平素之日與浮每爭邪正浮屢屈旣瞋不自忍乃作老子化胡經以誣謗佛法殃有所歸故死方思悔耳又長房等錄更有七經亦云祖出今以竝是別生故刪不立#謂佛問四童子經調伏王子道心經 已上二經竝出大集五百王子作淨土願經 或作幼童出普超經三幼童經 或作幼童出普超經二童子見佛說偈供養經 出雜阿含五百幼童經 亦云童子首達經 亦云惟先首達經上二經竝出生經諸德福田經一卷 初出或云諸福田經或直云福田經立與法炬共出見僧祐錄樓炭經六卷 第二出或云大樓炭經出長阿含與第四分記世經同本異出與法護所出五卷者少異或五卷或八卷見僧祐錄法句譬喩經四卷 第二出一名法句本末經亦云法喩經或四卷或六卷立與法炬共出見僧祐錄大方等如來藏經一卷 舊錄云佛藏方等經初出見僧祐錄右四部一十二卷 前三部十一卷見在後一部一卷闕本沙門釋法立不知何許人也智道弘拔悟物爲先於惠帝代共法炬等於洛陽譯諸德福田等經四部優塡王經一卷 與寶積優陁延王會同本初出見長房錄前世三轉經一卷 初出與銀色女經同本見長房錄阿闍世王受決經一卷 初出與採蓮違王經同本見長房錄灌洗佛形像經一卷 初出亦云四月八日灌經亦直云灌經與摩訶剎頭經同本見長房錄恒水經一卷 亦云恒河喩經出中阿含第九卷異譯見長房錄頂生王故事經一卷 亦直云頂生王經出中阿含第十一異譯見長房錄求欲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二異譯見長房錄苦陰因事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五異譯見長房錄瞻婆比丘經一卷 或作瞻波出中阿含第二十九異譯見長房錄伏婬經一卷 出中阿含第三十卷異譯見長房錄數經一卷 出中阿含第三十五卷異譯見長房錄波斯匿王太后崩塵土坌身經一卷出增一阿含第十八卷異譯見長房錄又有波斯匿王喪母經卽此塵土坌身經是無繁重載頻毘娑羅王詣佛供養經一卷 亦云頻婆出增一阿含第二十六異譯見長房錄鴦崛髻經一卷 與竺法護指髻經大同小異出增一阿含第三十一異譯見長房錄難提釋經一卷 出雜阿含第三十卷異譯見長房錄相應相可經一卷 出單卷雜阿含經異譯見長房錄慢法經一卷 第二出與阿難分別經等同本見長房錄法海經一卷 第二出與海八德經同本見長房錄阿闍世王問五逆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羅云忍辱經一卷 或直云忍辱經見長房錄佛爲年少比丘說正事經一卷 見長房錄沙曷比丘功德經一卷 房云見舊錄群牛譬經一卷 見長房錄比丘避女惡名欲自殺經一卷 見長房錄上見存已下闕福田經一卷 一名諸德福田經第二出與法立譯者少異見竺道祖晉錄諸經菩薩名經二卷 見長房錄正意經一卷 見長房錄錄中注云第二出未詳何者爲初譯本明帝釋施經一卷 見長房錄樓炭經八卷 第三出是長阿含第四分記世經異譯與法護法立所出者大同先共法立出立以意未悉故廣之見敏度寶唱二錄淨飯王般泥洹經一卷 初出見長房錄貧窮老公經一卷 初出見法上錄危脆經一卷 見長房錄大蛇譬喩經一卷 亦直云大蛇經房云見舊錄羅漢迦留陁夷經一卷 或無羅漢字見長房錄爪甲擎土譬經一卷 亦云爪甲取土經房云見舊錄衰利經一卷 見長房錄衆生未然三界經一卷 見長房錄求欲說法經一卷 見長房錄羅旬喩經一卷 今疑是別生經中羅彌壽經異名見長房錄遺教法律經三卷 一名遺教法律三昧經一云遺教三昧經或二卷見始興錄右四十部五十卷 比丘避女上二十四部二十四卷見在福田經下一十六部二十六卷闕本沙門釋法炬亦未詳氏族器量高峙遊化在懷於惠帝代初與法立同共出經法立沒後炬遂自譯優塡王等經四十部又長房等錄更有諸經竝云炬出今以皆是別生之經錄家誤上今竝刪之如後所述時非時經亦直云時經准經後記非法炬譯如後所述  魔女聞佛說法得男身經出大集經 大悲比丘本願經出悲華經 往古造行經擧鉢經上二經竝出普超三昧經  以金貢太山贖罪經調達教人爲惡經 上二經竝出六度集佛降鴦崛魔人民歡喜經鴦崛魔歸化經 或云婦死應誤上二經竝出鴦崛魔羅經韋提希子月夜問夫人經 或作天人出長阿含福行經惡道經 一名惡意經或作要意應誤也錄中惡道惡意二名雙載者非也  息恚經柔軟經受持經名稱經浮彌經 福行下七經竝出中阿含飛鳥喩經積木燒燃經 一名大枯樹經波斯匿王詣佛有五威儀經增一阿含經飛鳥喩等四經竝出增一阿含 普施經差摩比丘喩重病經佛爲比丘說燒頭喩經優陁夷坐樹下寂靜調伏經佛爲比丘說大力經四大色身生厭離經異信異欲經佛爲比丘說三法經葉喩多少經佛爲比丘說極深險難處經佛爲諸比丘說莫思惟世閒經 或云莫思惟世閒思惟經衆生身穢經眼色相繫經比丘於色厭離經捨諸世務經嬰兒喩經轉輪聖王七寶現世閒經向邪違法經田夫喩經信人者生五種過患經少多制戒經無始本際經羅漢遇甁沙王經尊者瞿低迦獨一思惟經人民疾疫受三歸經恒水流澍經 或作流樹灰河經 一名塵灰河譬喩經錄中二名別載誤也波斯匿王祖母命終經鑄金喩經木杵喩經金師精舍尊者病經群羊喩經處中行道經波斯匿王女命過詣佛經比丘問佛名經優婆塞命終經普施下三十五經竝出雜阿含 比丘分衛經和難經邪業自活經比丘各言志經和難釋經比丘疾病經無懼經毒草喩經毒喩經馬喩經比丘分衛下十經竝出生經  譬喩六人經出罵意經阿闍世王問瞋恨從何生經摩訶比丘經調達喩經阿闍世等三經小乘抄經 栴檀塗塔經出百緣經 無常經比丘求證人經阿梵和利比丘無常經比丘問佛何故捨世學道經佛看病比丘不受長者請經坐禪比丘命過生天經放逸經深淺學比丘經拘提比丘經波利比丘謗梵行經北方世利經流離王攻釋子經信能渡河經有衆生三世作惡經聰明比丘經說法難値經調達問佛顏色經 無常下一十七經竝出出曜經曉食經出修行道地經 須河喩經出雜譬喩魔女下八十九經竝從大經抄出別生錄載此中除之超日明三昧經二卷 第二出或直云超日明經或三卷此經護公先出梵文而辭義煩重承遠詳整文偈刪改勝前見高僧傳及僧祐錄越難經一卷 一名曰難長者經一名難經初出見長房錄右二部三卷其本竝在淸信士聶承遠明解有才篤志務法護公出經多參正文句兼執筆承旨後於惠帝代自譯超日明等經二部又長房等錄云承遠更譯迦葉詰阿難經此乃雜譬喩抄非是別翻又漢世佛調世高及此承遠三錄俱載誤之甚也無垢施菩薩分別應辯經一卷 第二出與法護離垢施經等同本亦云分別應報今編入寶積當第三十三會餘錄有云竺法護出者誤也見長房錄諸菩薩求佛本業經一卷 或無諸字是花嚴淨行品異譯見長房錄文殊師利般涅槃經一卷 見長房錄異出菩薩本起經一卷 或無起字見長房錄三曼陁颰陁羅菩薩經一卷 見長房錄菩薩受齋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上見存已下闕大方廣菩薩十地經一卷 第二出與法護譯者大同小異見長房錄菩薩十法住經一卷 是花嚴十住品異譯第三出見長房錄十住經十二卷 是花嚴十地品異譯第二出見長房錄菩薩緣身五十事經一卷 第二出與五十緣身經大同小異見長房錄觀世音受記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諸佛要集經二卷 第二出見長房錄寂音菩薩願經一卷 見長房錄菩薩求五眼法經一卷 祐無經字或云五眼文見長房錄菩薩道行六法經一卷 見長房錄菩薩初地經一卷 見長房錄菩薩十道地經一卷 有云是前譯菩薩十地見長房錄文殊師利與離意女論議極似維摩經一卷 見長房錄菩薩雜行法一卷 見長房錄菩薩所行四法一卷 見長房錄菩薩宿命經一卷 見長房錄文殊師利淨律經一卷 第二出與法護譯小異見長房錄菩薩戒獨受壇文一卷 見長房錄菩薩懺悔法一卷 云異出本見長房錄右二十四部三十六卷 菩薩受齋上六部六卷見在大方廣下一十八部三十卷闕本淸信士聶道眞卽承遠息父子淸悟皆以度語爲業從武帝太康初至懷帝永嘉末其閒詢稟諮承法護筆受之外及護歿後眞遂自譯無垢施#應辯等經二十四部誠師護公眞當其稱頗善文句辭義分炳一又長房等錄更有二十九經亦云道眞所出今以竝是別生抄經故刪之不存也菩薩奉施詣塔作願念經師子步雷音菩薩問發心經菩薩三法經菩薩奉施等三經竝出文殊佛土嚴淨經 菩薩布施懺悔法出決定毘尼經 自在王菩薩問如來警戒經或云菩薩戒身自在經  菩薩導示行經菩薩初發心時經無言菩薩流通法經無言菩薩經菩薩出要行無㝵法門經光味菩薩造七寶梯經自在王菩薩等七經竝出大集 菩薩如意神通經菩薩戒自在經上二經出自在王經 寂音菩薩問五濁經或云寂意轉輪聖王發心求淨土經上二經出悲華大雲密藏菩薩問大海三昧經出大雲經溥首童眞經出普超經 儒童菩薩經或無菩薩字出六度集經 波斯匿王欲伐鴦崛魔羅經出鴦崛魔羅經 大光明菩薩百四十八願經菩薩六法行經菩薩本願行品經菩薩苦行經菩薩呵睡眠經菩薩呵家過經 大光明等六經祐錄云抄今竝爲大乘抄經  菩薩戒要義經出地持經菩薩五法行經初發意菩薩行易行法經上二經竝出十住論 轉輪聖王七寶具足經出雜阿含 衆經目錄一卷道眞自撰非梵本翻傳敍錄中列此不復存也 又長房等錄云優婆塞衛士度於惠帝代出摩訶般若波羅蜜道行經二卷云從舊道行中刪改略出 僧祐錄云衆錄竝云道行經二卷衛士度略出 旣取舊經刪略卽非梵本別翻今載別生錄中此不復存也逝童子經一卷 第四出亦名長者制經亦直云制經亦名菩薩逝經亦直云逝經五本大同別譯爲異名殊耳見寶唱錄善生子經一卷 初出與祇多蜜竺難提等所出同本出中阿含第三十三異譯見支敏度竺道祖寶唱等三錄文殊師利現寶藏經二卷 第三出與竺法護所出現寶藏經等同本見竺道祖錄及寶唱錄十善十惡經一卷 初出見竺道祖晉錄及寶唱錄右四部五卷 逝童子等二部二卷見在文殊現寶藏等二部三卷闕本沙門支法度未詳何許人於惠帝代永寧元年辛酉譯逝童子經等四部又僧祐長房等錄於惠帝時沙門支敏度合兩支支懺支謙 兩竺竺法護竺叔蘭四本 房錄更加一白爲五本今准祐錄及合經記但四本合成無白延也首楞嚴爲八卷祐云或爲五卷 合一支支謙兩竺竺法護竺叔蘭 三本維摩爲五卷旣非梵本別翻復闕其本故此錄中刪而不載時非時經一卷 或直云時經見經後記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若羅嚴外國人也譯時非時經一部經後記云外國法師若羅嚴手執胡本口自宣譯涼州道人于閴或作釪窴城中寫記房等皆云法炬譯者謬也旣莫知於帝代且附西晉錄中方等陁羅尼經一卷寶嚴經一卷 五福德經一卷右三部三卷其本竝闕 長房等錄西晉失譯摠八部一十五卷云別二錄竝單注元康年中出不顯譯人詳覽群錄未見指的所以別件猶殊失譯今以餘之五部一十二卷撿尋群錄兼閱經文皆有所憑卽非失譯具述由委列之如左度世品經六卷阿耨達龍王經二卷是弘道廣顯三昧經異名已上二經竺法護譯 如來秘密藏經二卷 一名大方廣如來性起微密藏經亦直云如來性起經是舊華嚴經如來性起品後漢失譯已有此復重載誤之甚也今附別生錄中 明相續解脫地波羅蜜經一卷宋求那跛陁羅譯  弟子學有三輩經一卷三品弟子經異名吳支謙譯已後新附此錄太子和休經一卷 第二出與太子刷護經等同本薩曇分陁利經一卷 舊錄云薩芸芬陁利經亦直云分陁利經是法華經寶塔天授二品各少分異譯放鉢經一卷 是普超經擧鉢品異譯出第一卷安公云出方等部菩薩睒經一卷 或云孝子睒經亦直云睒經第二出出六度集第二卷異譯長壽王經一卷 法常住經一卷鹹水喩經一卷 舊錄云鹹水譬喩經出中阿含第一卷異譯兜調經一卷 出中阿含第四十四卷異譯舍衛國王夢見十事經一卷 或直云十夢經舊錄云舍衛國王十夢經或云波斯匿王十夢經出增一阿含第五十一卷異譯安公云出阿毘曇玉耶女經一卷 或云玉耶經初出與阿遬達經等同本孝子經一卷 一名孝子報恩經頞多和多耆經一卷普達王經一卷佛滅度後棺斂葬送經一卷 一名比丘師經亦名師比丘經鬼子母經一卷 梵摩難國王經一卷迦旃延說法沒盡偈經一卷 題云佛使比丘迦旃延說法沒盡偈百二十章直云迦旃延偈佛治身經一卷 或無佛字舊錄云佛治身經餘錄竝同治意經一卷 舊錄云佛治意經餘錄竝同上見存已下闕彌勒當來生經一卷 初出與彌勒來時經等同本失利越經一卷 第二出與月光童子經等同本異了本生死經一卷 與稻芉經等同本內藏大方等經一卷 今疑是佛藏大方等經小阿闍世經一卷 小須賴經一卷目佉經一卷 安公云出方等部今疑是阿難目佉經彌勒經一卷 安公云出中阿含墮藍經一卷 安公云出中阿含七事經一卷 安公云出中阿含賴咤謣羅經一卷 安公云出中阿含歡豫經一卷 法經錄云勸豫云出中阿含第十二十二死經一卷 今疑是十二品生死經七婦經一卷阿難邠坻四時施經一卷 舊錄云阿難邠 祗四時布施經七車經一卷今疑是中阿含七車譬喩經海有八事經一卷難等各第一經一卷 舊錄云阿難迦葉各說第一經惟留經一卷 舊錄云惟留王經理家難經一卷 迦留多王經一卷梵志闍孫經一卷 古錄云梵志闍遜經波達王經一卷 悲心悒悒經一卷趣度世道經一卷 長者威勢經一卷癡注經一卷 調達經一卷和達經一卷鉢呿沙經一卷 分八舍利經一卷或作分身應行律一卷 悉曇慕二卷 吉法驗一卷口傳劫起盡一卷 打揵柢法一卷右五十五部五十六卷 治意經上一十九部一十九卷見在彌勒當來下三十六部三十七卷闕本梁僧祐錄云安公錄中失譯經唯祐錄載房等竝闕祐載安公失譯摠一百四十二經今以餘八十七部撿尋諸錄多題譯主或是別生抄經及人撰傳記旣有所憑故刪不載安旣不標時代今且附於晉末通前舊失譯經三部三卷摠五十八部五十九卷竝爲西晉失源云開元釋教錄卷第二 摠錄之二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여기에서는 “『오록』에서는 축권이다(吳錄云竺卷)”이라고 되어 있으나,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서는 “『오록』에서는 5권이다(吳錄云五卷)”이라고 되어 있다.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 따른다.
  2. 2)불행이나 재해를 막으려고 주문을 외거나 술법을 부리는 일이다.
  3. 3)본래는 아사리와 함께 수계사(授戒師)인 스님을 말하는 것이나, 후세에는 덕이 높은 스님을 가리키게 되었다.
  4. 4)『장아함경』ㆍ『중아함경』ㆍ『잡아함경』ㆍ『증일아함경』을 말한다.
  5. 5)책의 안겉장이나 본문 첫머리에 쓴 제목을 말한다.
  6. 6)『고려대장경』 외에는 ‘야(耶)’자로 표기되어 있다.
  7. 7)인도 비야리국 장자로서, 속가에 있으면서 보살행업을 닦은 이다.
  8. 8)삼국시대 동오(东吴)(222~280) 군주 손권(孙权)의 첫 번째 연호로 8년간 사용했다.
  9. 9)옛날 교학(敎學)을 맡았던 벼슬을 말한다.
  10. 10)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또한, 대승(大乘)의 가르침, 혹은 화엄경(華嚴經), 밀교(密敎), 만트라 등을 말한다.
  11. 11)중국 스님(497~554)으로 남북조 때 회계(會稽) 상우(上虞) 사람이다. 불교와 유교에 통달하였다.
  12. 12)당시 대월씨(大月氏)를 받들었다. 같은 종족이다. 현재 신강북경으로 소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13. 13)중국의 여섯 경서로 역경(易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춘추(春秋)ㆍ예기(禮記)ㆍ악경(樂經)을 말하며, 악경 대신 주례(周禮) 넣기도 한다.
  14. 14)천체(天體)의 모든 현상을 말한다.
  15. 15)하도(河圖)와 위서(緯書)로, 미래의 일이나 점술(占術)에 관한 비결을 담은 책들이다.
  16. 16)사물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나 중요한 곳을 뜻한다.
  17. 17)석가(釋迦)나 고승(高僧)의 유골(遺骨). 佛舍利(불사리). 佛骨(불골)이 있다.
  18. 18)인도 마우리 왕조의 제3대왕(재위BC272~BC232)이다.
  19. 19)몸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정제하는 것을 뜻한다.
  20. 20)부처의 대자 대비한 힘으로, 중생이 부처와 일체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일을 뜻한다.
  21. 21)보살 제불의 법구로서, 그 재질이 매우 견고하여 모든 것을 쳐서 부술 수 있다고 한다.
  22. 22)주(周) 무왕(武王)의 아우로, 이름은 단(旦)이며, 무왕을 도와서 주왕(紂王)을 치고, 무왕이 죽은 뒤, 조카 성왕(成王)을 도와서 주(周)왕조의 기초를 굳힌 사람이다. 유가(儒家)에서 성인(聖人)의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23. 23)불교에서 이르는, 일상의 생활의 동작인 네 가지 동작. 즉, 가고, 머무르고, 앉고, 자는 일을 말한다.
  24. 24)선악(善惡)의 인연에 응하여 받는 길흉 화복의 과보(果報)를 뜻한다.
  25. 25)조위(曹魏, 220 ~ 266)는 중국 한나라(漢朝) 말기의 삼국 중에 하나다.
  26. 26)덕(德)ㆍ행(行)ㆍ지(智)를 구비한 사람을 말한다.
  27. 27)‘총(揔)’ 자(字)는 총(摠) 자가 같은 자(字)이다
  28. 28)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등에는 태(太)로 되어 있다.
  29. 29)『고려대장경』에는 ‘착(捉)’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수대장경』에는 ‘제(提)’되어 있고, 자세히 상고해보면 ‘제(提)’가 맞다. 그에 따라 ‘제(提)’ 자(字)로 고쳤다.
  30. 30)『고려재장경』에는 ‘배(軰)’ 자(字)로 되어 있다. ‘배(軰)’ 자(字)는 ‘배(輩)’ 자(字)와 같은 자(字)이다.
  31. 31)아비담(阿毘曇)은 아비달마(阿毘達磨)라고 한다. 삼장(三藏)중에 논장(論藏)에 속한다.
  32. 32)『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蜜經)』으로 후진(後秦)시대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408년에 장안(長安)의 소요원(逍遙園)에서 번역하였다.
  33. 33)서역승(西域僧)이다. 뜻으로 해석하면 법혜(法慧), 혹은 법해(法海)라 한다.
  34. 34)육경(六經)은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예기(禮記)』ㆍ『악기(樂記)』ㆍ『역경(易經)』ㆍ『춘추(春秋)』의 6가지 경서를 말한다.
  35. 35)칠적(七籍)은 유학(儒学)의 최고 중요한 경전인 『논어(论语)』ㆍ『자사자(子思子)』ㆍ『공손니자(公孙尼子)』ㆍ『자천자(子车子)』ㆍ『내업(内业)』ㆍ『맹자(孟子)』ㆍ『순자(荀子)』의 7가지 경서를 말한다.
  36. 36)경서 따위 고문의 자구(字句)를 해석하는 일을 말한다.
  37. 37)‘시사문수(是沙門首)’에서 ‘수(首)’는 송(宋)ㆍ원(元)ㆍ명(明)본에는 ‘자(者)’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후자를 따라 교정하고 번역하였다.
  38. 38)중국 고대에 처음으로 술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뜻한다.
  39. 39)중국의 5호(胡) 16국(國)의 하나인 후조(後趙)를 세운 사람이다.
  40. 40)중국 서진(西晉)의 도사(道士) 왕부(王浮)가 지은 도교(道敎)의 가짜 경전(經典)이다.
  41. 41)범문을 한문으로 번역하다는 뜻이다.
  42. 42)‘일(一)’ 자(字)가 다른 본에는 없고, 『고려대장경』에만 있다.

 

 

 

 

 

개원석교록 제 3 권


지승 지음


1. 총괄군경록 ③

5) 동진(東晋) 시대
동진의 사마(司馬)씨는 건강(建康)에 도읍하고 있었다.또한 남진(南晋)이라고도 한다. 원제(元帝) 건무(建武) 원년 정축(丁丑, 317)으로부터 공제(恭帝) 원희(元凞) 2년 경신(庚申, 420)에 이르기까지 무릇 11제(帝) 104년 동안 승려와 속인들 열여섯 명이 번역한 경(經)ㆍ율(律)ㆍ논(論)과 신구집(新舊集)의 실역(失譯) 경전 등은 총 168부 468권이다.85부 336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83부 132권은 궐본이다.

사문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3부 14권. 경
사문 지도근(支道根)2부 7권. 경
사문 축담무란(竺曇無蘭)61부 63권. 경(經)ㆍ계(戒)ㆍ집(集)
사문 구담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5부 118권. 경ㆍ논과 교수법(敎授法)
사문 가류타가(迦留陁伽)1부 1권. 현성집(現聖集)
사문 강도화(康道和)1부 3권. 경
사문 불타발타라(佛陁跋陁羅)13부 125권. 경ㆍ율ㆍ논ㆍ집
사문 담마(曇摩)1부 2권. 율요(律要)
사문 비마라차(卑摩羅叉)2부 5권. 율잡사(律雜事)
사문 석법현(釋法顯)7부 26권. 경(經)ㆍ계(戒)ㆍ논ㆍ집
사문 기다밀(祇多蜜)33부 45권. 경
거사(居士) 축난제(竺難提)2부 5권. 경
사문 축법력(竺法力)1부 1권. 경
사문 석숭공(釋嵩公)3부 3권. 경ㆍ집
사문 석퇴공(釋退公)1부 1권. 경
사문 석법용(釋法勇)1부 1권. 경
신구제실역경(新舊諸失譯經)40부 48권. 그 중의 2부 3권은 구집(舊集)이요, 38부 45권은 신집(新集)에 덧붙여 있다.

(1)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
대관정경(大灌頂經) 12권혹은 대(大)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록(長房錄)』에는 “9권이라고도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장방은 “『잡록(雜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대공작왕신주경(大孔雀王神呪經) 1권『축도조록(竺道祖錄)』과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었다.
공작왕잡신주경(孔雀王雜神呪經) 1권『축도조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두 번째 번역되었다.
이상은 3부 14권이다.처음의 1부 12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2부 2권은 궐본이다.

사문 백시리밀다라는 중국말로는 길우(吉友)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며, 국왕의 아들이다. 그는 마땅히 대를 이어야 했으나, 나라를 아우에게 양보하였으니, 아무도 모르게 태백(太伯)43)의 전례를 따랐다. 이미 마음을 깨달고, 하늘의 계시를 받아서, 드디어 사문이 되었다.
백시리밀다라는 타고난 자태가 높고 밝으며, 풍채[風神]도 뛰어나서, 직접 그를 대하면, 곧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총명함과 변재로 볼 때 깨친 자가 아닐 수 없었다.
서진(西晋) 영가(永嘉) 연간(307~310)에 처음 중국에 와서 강좌(江左)를 지나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승상(丞相) 왕도(王導)가 한 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서, 그를 벗으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ㆍ광록(光祿) 주백인(周伯仁)ㆍ태상(太常) 사유여(謝幼璵)ㆍ정위(廷尉) 환무륜(桓茂倫)은 모두가 일대의 명사(名士)들인데, 그를 만나면 종일토록 탄복하며 가슴을 열고 교분[契]을 맺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왕도가 백시리밀다라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백시리밀다라는 허리띠를 풀고 엎드려 누워서 대하였고, 깨달음에 대해서 신통하게 알아서 말[悟言神解]하였다. 당시 상서령(尙書令) 변망지(卞望之)도 역시 백시리밀다라와 사이좋게 지냈는데, 잠시 변망지가 그를 보려 왔다. 백시리밀다라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용모를 꾸미며 단정하게 앉아 그를 대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백시리밀다라는 대답하였다.
“왕공(王公)의 풍류와 도[風道]는 다른 사람의 따르는 바가 되고, 변망지는 사물의 이치와 법도를 따르기 때문에 그러했을 뿐입니다.”
제공(諸公)들은 이에 그 정신이 깨끗하고 넉넉한 것에 탄복하였고, 모두가 그의 적절한 대응을 칭찬하였다.
환정위(桓廷尉)가 일찍이 백시리밀다라를 위하여 표제[目]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오래도록 짓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가 “백시리밀다라는 탁랑(卓朗)44)이라고 할만하다”고 하자, 이에 환정위는 감탄하고 매우 탄복하면서, 탁랑이 표제(標題)로서 극히 합당하게 여겼다.
대장군 왕처충(王處冲)은 그 당시 남하(南夏)에 있었는데, 왕도ㆍ주백인 등 여러 공(公)들이 모두 백시리밀다라의 기량을 중히 여긴다는 말을 듣고, 잘못 보았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백시리밀다라를 만나고 나서는 기뻐하였고, 달려가 한 번 얼굴을 대할 때에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 조심하였다.
왕공이 일찍이 백시리밀다라를 일컬어 말하였다.
“외국사람으로 (공경할 만한 이는) 그대 한 사람만 있을 뿐이요.”
백시리밀다라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만일 내가 그대들[諸君]과 같았다면, 오늘날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의 사람들은 적절하고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하였다.
백시리밀다라는 성품이 고상하고 대범하였다. 진(晋)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공(公)들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때에는 비록 통역을 통하기는 했으나, 신기하게 그 뜻을 깨달아, 그가 전하는 것을 다 알았다. 그의 타고난 빼어남은 보통사람의 생각[常情]으로는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백시리밀다라는 주술(呪術)을 잘하여, 가르치는 바가 모두 영험이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고좌법사(高座法師 : 법사의 존칭)라고 불렀다.
원제(元帝) 때(317~322)에 『대관정경』 등 3부를 번역하였으며, 또 제자 멱력(覓歷)에게 휼륭한 소리[高聲]가 나는 범패(梵唄)45)를 가르쳐 주어서, 지금까지 그 소리가 전해지게 되었다. 나이 80여 세인 함강(咸康) 연간(335~342)에 입적하였다. 여러 공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백시리밀다라는 언제나 석자강(石子崗)의 동쪽에 있으면서 두타행(頭陀行)46)을 하였다. 그리고 생을 마친 후에는 여기에 장사지냈다. 성제(成帝, 326~342)는 그의 풍류와 도[風道]를 그리워하여 그를 위해 무덤에 찰주(刹柱)47)를 세웠다. 후에 관우(關右)의 사문이 건강(建康)에 와 머물면서 비로소 무덤이 있는 곳에 절을 세웠다. 진군(陳郡)의 사곤찬(謝琨贊)이 절 짓는 일을 완성하고, 지난 일들의 자취를 따라 훤히 밝혀서, 절의 이름을 고좌사(高座寺)라고 하였다

(2) 지도근(支道根)
아촉불찰제보살학성품경(阿閦佛刹諸菩薩學成品經) 2권태강(太康) 연간(280~289)에 번역되었다. 두 번째 번역이다. 한(漢)나라 때 지참(支讖)이 번역한 것과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祿)』에 보인다.
방등법화경(方等法華經) 5권함강(咸康) 원년(335)에 번역되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네 번째 번역되었다. 축법호(竺法護)의 『정법화경(正法華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상은 2부 7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지도근은 법미[味]를 깨닫고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불도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성제(成帝) 함강 원년 을미(乙未, 335)에 『아촉불찰제보살학성품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장방록』 등 목록에는 모두 “『아촉불경(阿閦佛經)』이라 하였고, 태강(太康) 연간(280~289)에 번역되었다”라고 하였는데, 태강년은 서진(西晋)의 무제(武帝) 때여서, 함강 연간(335~342)과는 서로 60여 년의 차이가 있다. 같은 한 사람이 양조(兩朝) 때에 경을 번역하였다는 것은 시기가 너무 동떨어진 감이 있다. 이는 옮겨 적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일 것이다. 대부분 함강 연간으로 되어 있다.

(3) 축담무란(竺曇無蘭)
채련위왕상불수결호묘화경(採蓮違王上佛授決號妙華經) 1권또한 바로 『채련위왕경(採蓮違王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었다. 『아사세왕수결경(阿闍世王受決經)』과는 동본이다.
다린니발경(陁隣尼鉢經) 1권또한 『다린발주경(陁隣鉢呪經)』이라고도 한다.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구신주경(持句神呪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서는 “『다린발경(陁隣鉢經)』 외에 또 『지구신주경』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마니라단경(摩尼羅亶經) 1권또한 『마니라단신주경(摩尼羅亶神呪經)』이라고도 한다.
현사발타소설신주경(玄師颰陁所說神呪經) 1권목록에서는 “환사(幻師)라고 하였고, 소설(所說)이라는 글자도 없다. 혹은 발(跋)자를 쓰기도 하며, 또한 파타(波陁)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고록(古錄)』에서는 “『환왕발타경(幻王颰陁經)』이다”라고 하였다.
적지과경(寂志果經) 1권『장아함경(長阿含經)』 제17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철성니리경(鐵城泥犁經) 1권『중아함경(中阿含經)』 제12권에서 나왔다. 『오천사경(五天使經)』과는 동본이다.
아뇩풍경(阿耨風經) 1권진나라 언어에 의거하여 순서가 매겨졌으며, 『중아함경』 제2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범지알라연문종존경(梵志頞羅延問種尊經) 1권또한 『알파라연경(頞波羅延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3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니리경(泥犁經) 1권혹은 『중아함니리경(中阿含泥犁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 제5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계덕향경(戒德香經) 1권혹은 『계덕경(戒德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1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사니려경(四泥黎經) 1권혹은 『사대니리경(四大泥犁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기재되어 있다”라고 하였고, 승우는 “실역(失譯)이다”라고 하였다. 『증일아함경』 제48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국왕불리선니십몽경(國王不犂先尼十夢經) 1권혹은 선니(先泥)라고 쓰기도 한다. 『증일아함경』 제51권에서 나오는 이역이다.
수말소표경(水沫所漂經) 1권일명 『하중대취말경(河中大聚沫經)』, 또는 『취말비경(聚沫譬經)』이라고도 한다. 『오음비유경(五陰譬喩經)』과 동본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1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옥야경(玉耶經) 1권일명 『장자예불설자부무경경(長者詣佛說子婦無敬經)』, 또는 『옥야녀경(玉耶女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아속달경(阿遬達經)』과 같은 동본이다.
오고장구경(五苦章句經) 1권처음 번역되었다. 일명 『제천오고경(諸天五苦經)』, 또는 『오도장구경(五道章句經)』, 또는 『정제죄개오락불법경(淨除罪蓋娛樂佛法經)』이라고도 한다.
자애경(自愛經) 1권혹은 『자애부자애경(自愛不自愛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구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중심경(中心經) 1권혹은 『중심정행경(中心正行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대중심경(大中心經)』, 또는 『소중심경(小中心經)』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장방록』에서는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조사하여 보았으나 없었다.
견정경(見正經) 1권일명 『생사변식경(生死變識經)』이라고도 한다.
대어사경(大魚事經) 1권
아난칠몽경(阿難七夢經) 1권혹은 바로 『칠몽경(七夢經)』이라고도 한다.
가조아나함경(呵鵰阿那含經) 1권일명 『하조경(荷鵰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가(苛)자를 쓰기도 한다.
신세경(新歲經) 1권
비구청시경(比丘聽施經) 1권일명 『청시비구경(聽施比丘經)』이라고도 한다.
불반니원마하가섭부불경(佛般泥洹摩訶迦葉赴佛經) 1권또한 『가섭부불반열반경(迦葉赴佛般涅槃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의 경본은 현재 있으며, 이 이하는 궐본이다.
독우경(犢牛經) 1권일명 『독자경(犢子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었다. 『유광경(乳光經)』과 같은 동본이다.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1권세 번째 번역되었다. 길우(吉友)가 번역한 것과는 동본이다.
칠불소결마유술주경(七佛所結麻油述呪經) 1권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 두 경본을 거듭하여 실었는데, 어떤 이는 이본(異本)이라고도 한다.
대신모결서주경(大神母結誓呪經) 1권
이원법원신주경(伊洹法願神呪經) 1권
해일액신주경(解日厄神呪經) 1권
육신명신주경(六神名神呪經) 1권
단지라마유술신주명(檀持羅麻油述神呪經) 1권
마유술주경(麻油述呪經) 1권
마니라단신주안마경(摩尼羅亶神呪按摩經) 1권
의왕유루연신주경(醫王惟樓延神呪經) 1권혹은 『아난소문의왕유루연신주경(阿難所問醫王惟樓延神呪經)』이라고도 한다.
용왕주수욕경(龍王呪水浴經) 1권
십팔용왕신주경(十八龍王神呪經) 1권
청우주경(請雨呪經) 1권
지우주경(止雨呪經) 1권
친수경(嚫水經) 1권
환사아이추신주경(幻師阿夷鄒神呪經) 1권
주수경(呪水經) 1권
약주경(藥呪經) 1권
주독경(呪毒經) 1권
주시기병경(呪時氣病經) 1권
주소아경(呪小兒經) 1권
주치경(呪齒經) 1권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는 다시 한 경본의 이름을 등재하였는데, 이 경과 동본이다. 표제에는 “이본(異本)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충치경(虫齒經)』, 또는 『우치경(齲齒經)』이라고도 한다.
주아통경(呪牙痛經) 1권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는 다시 한 경본의 이름을 등재하였는데, 이 경과 동본이다. 표제에는 “이본(異本)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치통경(齒痛經)』이라고도 한다.
주안통경(呪眼痛經) 1권
오안문경(五眼文經) 1권이 경은 섭도진(聶道眞)이 번역한 『구오안법경(求五眼法經)』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이욕우바새우바이계문(離欲優婆塞優婆夷戒文) 1권또한 『구행이십이계문(具行二十二戒文)』이라고도 한다.
죄업보응경(罪業報應經) 1권『죄업응보교화지옥경(罪業應報敎化地獄經)』과는 동본이다. 두 번째 번역되었다.
팔사경(八師經) 1권두 번째 번역되었다.
평사왕오원경(蓱沙王五願經) 1권일명 『불사가왕경(弗沙迦王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었다.
의족경(義足經) 2권장방은 “『오록(吳錄)』에 보이는데, 또한 다르게 번역되었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십선십악경(十善十惡經) 1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오록』에서는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안공(安公)은 “『아비담(阿毘曇)』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치선법경(治禪法經) 1권
범천책수경(梵天策數經) 1권『구록』에서는 “『제천사경(諸天事經)』이다”라고 하였다.
제천지경(諸天地經) 1권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 1권태원(太元) 6년(381)에 승순(僧純)ㆍ담마지(曇摩持)ㆍ축승서(竺僧舒)의 3가(家) 경본을 합하여, 이 1권으로 만들었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마땅히 두 번째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삼백육십계삼부합이(三百六十戒三部合異) 2권서문에는 대비구(大比丘)라는 글자가 덧붙어 있다. 태원 6년(381) 6월 20일에 사진서사(謝鎭西寺)에서 승려들을 집합시켜 자세히 거듭 교정하였다. 『구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61부 63권이다.『불반니원마하가섭부불경』 이상의 24부 24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독우경』 이하의 37부 39권은 결본이다.

사문 축담무란은 중국말로는 법정(法正)이라 한다. 서역 사람이다.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6년 신사(辛巳, 381)로부터 태원 20년 을미(乙未, 395)에 이르기까지 양도(楊都)의 사진서사(謝鎭西寺)에서 『채련위왕상불수결호묘화경(採蓮違王上佛授決號妙華經)』 등의 61부를 번역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장방록(長房錄)』에 보인다.
또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다시 48경이 있고, 또한 “법정(法正)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이 경들은 따로 파생된 것으로, 간추려 베낀 경[抄經]이며, 혹은 위경[僞]인지 의심이 되기 때문에 모두 삭제하였다. 아래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구호신명경(救護身命經)또한 『구호신명제인병고액경(救護身命濟人病苦厄經)』이라고도 한다. 『주록(周錄)』에서는 정경(正經)에 편입되어 있으나, 『구록』에서는 “위경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제 『구록(舊錄)』에 의거하여 편집한다.
제천문여래경계불가사의경(諸天問如來警戒不可思議經)
견수세계경(見水世界經)이상의 2경은 모두 『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용왕결원오룡신주경(龍王結願五龍神呪經)
대장군신주경(大將軍神呪經)이상의 2경은 『관정경(灌頂經)』에서 나왔다.
무오아경(無吾我經)『보초경(普超經)』에서 나왔다.
미란경(彌蘭經)혹은 미련(彌連)이라 쓰기도 하고, 또는 『미련경(彌蓮經)』이라고도 한다.
마천국왕경(摩天國王經)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미란경』 등 이하의 3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현겁천불명경(賢劫千佛名經)『현겁경(賢劫經)』에서 나왔다. 서문에는 “『현겁경』에서는 2천1백의 여러 도무극(度無極)48)을 설명하며, 구루손불(拘樓孫佛)49)을 초조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 『천불명경(千佛名經)』은 따로 번역한 경본이 있는데, 구나제불(拘那提佛)50)을 초조로 삼고 있다.
삼십칠품경(三十七品經)안공(安公)은 “『율경(律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는 “태원(太元) 21년 병신(丙申, 396) 6월에 사진서사(謝鎭西寺)에서 지었다”라고 하였다.
삼십삼천원관경(三十三天園觀經)
비구성취오법입지옥경(比丘成就五法入地獄經)
학인란의경(學人亂意經)이상의 3경은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불위비구설대열지옥경(佛爲比丘說大熱地獄經)
석제환인예목련방광경(釋提桓因詣目連放光經)
목련견대신중생연철전신경(目連見大身衆生燃鐵纏身經)
견일중생거체분예도신경(見一衆生擧體糞穢塗身經)
중생정유철마성화치연경(衆生頂有鐵磨盛火熾然經)
나바조위응소착경(羅婆鳥爲鷹所捉經)
십법성취악업입지옥경(十法成就惡業入地獄經)
사행법경(蛇行法經)
비구욕우천자방광경(比丘浴遇天子放光經)
천어수라욕투전경(天於修羅欲鬪戰經)
천제석수계경(天帝釋受戒經)
비구문불석제환인인연경(比丘問佛釋提桓因因緣經)
사천왕안행세간경(四天王按行世間經)
불견범천정경(佛見梵天頂經)
제석자심전승경(帝釋慈心戰勝經)
천신금보경(天神禁寶經)
아육왕공양도량수경(阿育王供養道場樹經)
권행유증경(勸行有證經)
계상응법경(戒相應法經)
선사만족경(禪思滿足經)『불위비구설대열지옥경』 이하의 20경은 모두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나왔다.
야계경(野鷄經)
별미후경(鱉獼猴經)
고호오경(蠱狐烏經)혹은 조(鳥)자를 쓰기도 한다.
제자명과경(弟子命過經)
여타경(驢駝經)
구살라국오왕경(拘薩羅國烏王經)혹은 라(羅)자가 없기도 한다.
공작경(孔雀經)
부부경(夫婦經)『야계경』 등 이하 8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군우천두경(群牛千頭經)
집수행사경(集修行士經)
폭상경(暴象經)『군우천두경』 등 이하 3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지옥중생상해경(地獄衆生相害經)『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에서 나왔다.
적취오유경(赤嘴烏喩經)
아난다원라운모경(阿難多洹羅云母經)『적취오유경』 등 2경은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가려 뽑은 경이다.

(4) 구담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두 번째 번역이다. 혹은 58권으로 되어 있다. 융안(隆安) 원년(397) 11월 10일에 동정사(東亭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그 2년(398) 6월 25일에 마쳤다. 담마난제(曇摩難提)가 역출한 경과 동본이며, 사문 도자(道慈)가 받아썼다. 『축도조록(竺道祖錄)』에 보인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51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융안 원년(397) 정월에 나왔다. 담마난제가 번역한 경본과는 약간 다르며, 축도조가 받아썼다. 혹은 42권, 또는 33권인지 일정하지 않다. 또한 60권으로 된 것도 있다. 『축도조록』과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아비담심론(阿毗曇心論) 4권혹은 『아비담심(阿毗曇心)』이라고도 한다. 논(論)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존자(尊者) 법승(法勝)이 지었다. 태원(太元) 16년(391)에 여산(廬山)에 있으면서 혜원(慧遠)법사를 위하여 역출하였으며, 도자(道慈)가 받아썼다. 『승우록』에 보인다.
삼법도론(三法度論) 2권태원 16년(391)에 여산에 있으면서 혜원법사를 위하여 역출하였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담마난제가 역출한 경과 대동소이하다. 혹은 3권이라고도 하는데, 『별록(別錄)』에서는 “1권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바로 삼법도(三法度)라 하여 논(論)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혹은 경론(經論)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교수비구니법(敎授比丘尼法)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며, “여산에 있으면서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5부 118권이다.앞의 4부 117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담승가제바는 중국말로는 중천(衆天)이다. 혹은 제화(提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음(音)이 잘못된 까닭이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도(道)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멀리까지 명철한 스승을 찾아다녔다.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여 다 암송하였다. 특히 『아비담심론(阿毗曇心論)』을 잘하여 그 섬세한 뜻까지 꿰뚫었다. 그는 언제나 『삼법도론[三法]51)』을 읽으며, 밤낮으로 그 뜻에 감탄하고, 그 의미를 음미하였다. 그것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곳집[府]으로 삼았다.
사람됨이 빼어나고 밝으며, 사물을 보는 통찰력이 뛰어났고, 행동거지는 온화하면서도 공손하였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쓰고, 진실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부진(苻秦)의 건원(建元) 연간(343)에 장안(長安)으로 들어와서 널리 교화를 펼치며 논(論) 2부를 번역하였다. 『진록(秦錄)』에 모두 다 있다.
뒤에 진(晋)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6년 신묘(辛卯, 391)에 강좌(江左)에서 거닐면서 교화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법사가 묘전(妙典)52)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널리 경장(經藏)을 모으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자리를 마련[側席]해 놓고, 멀리서 오는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르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곧장 여악(廬岳)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였다. 곧 그 해에 『아비담심론』과 『삼법도론』 등을 번역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승가제바는 반야대(般若臺)에서 범문(梵文)을 손에 들고, 입으로는 진(晋)나라 말로 번역하였는데, 화려함은 버리고 실질을 보존하여 그 본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힘썼다. 지금 전하는 대분이 그 문장이다.
안제(安帝) 융안(隆安) 원년 정유(丁酉, 397)에 건강(建康)으로 오니, 진나라 조정의 왕공(王公)과 풍류를 즐기는 명사(名士)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공경의 예를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 상서령(尙書令) 위군(衛軍) 동정후(東亭候) 낭야(瑯琊) 왕순(王珣)살펴보건대 『고승전』ㆍ『승우록』ㆍ『장방록』 등에는 다 같이 왕순이라 말하였고, 『중아함경』 서문에서는 왕원림(王元琳)이라 하였는데, 원림은 왕순의 자(字)이다은 평소에 믿음과 지혜가 있어 정법(正法)을 지키면서 정사(精舍 : 절이나 사원)를 건립하고 널리 공부하는 무리를 불러들였다. 승가제바가 온 뒤에 왕순은 곧 그를 맞이하여 그 정사에서 『아비담』을 강설할 것을 청하자,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승가제바의 종치(宗致)53)는 이미 극히 섬세하고 오묘[精妙]하였고, 말의 뜻은 명석하여 깊은 뜻까지 떨쳐냈으므로, 온 대중들이 다 함께 기뻐하면서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 해 겨울에 왕순은 의학사문(義學沙門) 석혜지(釋慧持) 등 40여 인을 모집하여 놓고, 다시 승가제바를 청하여 그 절에서 『중아함경』과 『증일아함경』 두 아함(阿含)을 번역하였는데, 계빈국 사문 승가라차(僧伽羅叉)가 범본(梵本)을 잡고, 승가제바는 진나라 말로 통역하였다. 그 다음 여름에야 비로소 끝마쳤다. 예주(豫州) 사문 도자(道慈)가 붓으로 받아썼고, 오(吳)나라 이보(李寶)와 당화(唐化)가 함께 기록[書]하였다.
승가제바는 여산과 건강의 두 곳에서 5부 118권의 경을 함께 번역해 내었다. 승가제바는 중국과 서융(西戎)54)을 차례로 돌아다녀 풍속을 모두 다 알았으며, 말과 행동은 조용하면서도 기민하였고, 농담[談笑]을 잘하였다. 그리하여 그 도와 교화의 명성과 칭찬이 들리지 않는 데가 없었다. 뒤에 어디서 입적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5) 가류타가(迦留陁伽)
십이유경(十二遊經) 1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강량루지(畺梁婁至)가 번역한 경과는 조금 다르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가류타가는 중국말로는 시수(時水)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널리 깨우쳐 주는 방편이 있었으며, 도를 마음속에 품고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7년 임진(壬辰, 392)에 『십이유경』 1부를 번역하였다.

(6) 강도화(康道和)
익의경(益意經) 3권두 번째 번역이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주사행(朱士行)의 『한록(漢錄)』에서는 “2권이다”라고 하였고, 번역한 사람은 기록하지 않았다.
이상의 1부 3권은 궐본이다.

사문 강도화는 계덕(戒德)55)에 위의(威儀)가 있었고, 온 중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21년 경신(景申56), 396)에서 『익의경』 1부를 번역하였다.

(7) 불타발타라(佛陁跋陁羅)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60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원래는 50권인데, 뒷사람이 나누어서 60권으로 만든 것이다. 사문 지법령(支法領)이 우전국(于闐國)으로부터 범본을 얻어 와서, 의희(義凞) 14년(418) 3월 10일에 도량사(道場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해서, 원희(元凞) 2년(420) 6월 10일에 끝마쳤다. 법업(法業)이 받아썼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출생무량문지경(出生無量門持經) 1권혹은 『신미밀지경(新微密持經)』이라고도 한다. 여산(廬山)에서 번역하였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의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密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승우록』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따로 『신미밀지경(新微密持經)』을 기재하였는데, 그것은 착오이다.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 1권혹은 바로 『여래장경(如來藏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원희 2년(420)에 도량사(道場寺)에서 번역하였다. 축도조의 『진세잡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10권혹은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8권으로 되어 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또한 『승우록』에서도 보인다. 또한 송(宋)나라 때도 나왔다.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40권혹은 30권으로 되어 있다. 범본은 법현(法顯)이 마갈리국(摩竭提國)에서 가져와서, 의희 12년(416) 11월에 투량사(鬪場寺)57)에서 법현과 함께 역출하였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승우가 법현의 목록에도 기재한 것은 그와 함께 번역한 것에 의거했을 뿐이다.
승기비구계본(僧祇比丘戒本) 1권또한 『마하승기계본(摩訶僧祇戒本)』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도량사에서 번역하였다. 『보창록』에 보인다. 승우가 법현(法顯)의 목록에도 기재한 것은 승우와 법현이 함께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두 군데 모두 기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 2권일명 『유가차라부미경(庾伽遮羅浮迷經)』이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이다. 여산(廬山)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부정관경(不淨觀經)』이라고도 한다. 또한 『수행방편선경(修行方便禪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수행방편선경(修行方便禪經)』의 「수행방편」에는 무릇 17품(品)이 있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발원경(文殊師利發願經) 1권혹은 게(偈)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원희 2년(420)에 투장사(鬪場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경의 후기(後記)에 “외국의 사부대중四部衆58)이 예불(禮佛)할 때에 이 경을 많이 외우면서 발원하고 불도를 구한다”라고 하였다.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 2권송(宋)나라 영초(永初) 2년(421)에 도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서 보인다. 여덟 번째의 번역이다. 안세고(安世高)ㆍ지참(支讖)ㆍ지겸(支謙)ㆍ승개(僧鎧) 등이 번역하여 낸 경본과는 동본이다.
보살본업경(菩薩本業經) 1권또한 바로 『본업경(本業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정행품(淨行品)」이다.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서 보인다. 『대주입장록(大周入藏錄)』에는 “경본이 있다”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궐본되었다. 일단 다시 기재하여 둔다.
정육바라밀경(淨六波羅蜜經) 1권『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 보인다.
방편심론(方便心論) 1권법업(法業)과 함께 역출하였다. 『고승전』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과거인과경(過去因果經) 4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상은 13부 125권이다.『문수사리발원경』 이상 8부 116권은 경본이 현재 있고, 『신무량수경』 이하 5부 9권은 궐본이다.

사문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부르며, 본래의 성은 석(釋)씨이다.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59)의 후예이다. 조부(祖父) 달마제바(達摩提婆)중국말로는 법천(法天)이다는 일찍이 북천축(北天竺)에 장사하러 갔다가, 그대로 거기에 눌러 앉아 살았다. 아버지 달마수리야(達摩修利耶)중국말로는 법일(法日)이다는 젊어서 일찍 죽었다.
각현은 세 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외로이 살았다. 5년 동안 살다가 어머니마저 잃고 외갓집에서 자랐다. 종조부(從祖父)60) 구마리(鳩摩利)는 각현이 총명하고 뛰어나며, 게다가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가엾이 여겨서, 다시 데려와서 도를 닦게 하여 사미가 되게 하였다.
17세가 되어 함께 공부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경전을 익히고 암송하였는데, 대중들은 모두 한 달 걸리는 것을 각현은 하루 만에 외워버렸다. 그 스승은 감탄하여 말하였다.
“각현의 하루는 다른 사람의 삼십일에 필적할 정도구나.”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나서는 더욱 부지런히 수행에 정진하고, 많은 경전들을 널리 배워 대부분 통달하였다. 젊어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일찍이 함께 수학했던 승가달다(僧伽達多)와 함께 계빈(罽賓)에 유학하여 같은 장소에서 수년을 보냈다. 승가달다는 비록 각현의 재주와 똑똑함에 감복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그에 대해 다 알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 밀실에서 문을 닫고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각현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으므로 승가달다가 놀라서 물었다.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각현이 대답하였다.
“잠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미륵보살님께 예경을 드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을 마치자 문득 사라졌다. 이에 승가달다는 각현이 성인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도 그의 깊고 얕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 여러 번 각현의 신통한 변화를 보고, 경건한 마음으로 구하여 물은 뒤에야, 비로소 각현이 불환과(不還果 : 阿那含)61)를 증득했음을 알았다.
각현은 언제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하고, 두루 각 나라의 풍속을 모두 관찰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서쪽으로 와서 계빈에 이르렀는데, 법과 대중들이 청정하고 명랑한 모습을 보고, 이에 개연(慨然)62)히 동쪽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우리 동료들은 모두 도를 구하려는 뜻은 가지고 있으나, 참다운 스승을 만나지 못해 깨달음을 일으킬 인연이 없구나.”
그리고는 곧 계빈국의 대중들에게 물었다.
“그 어느 분이 동토(東土)에 교화를 널리 펼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말하였다.
“불타발타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천축국의 나가려성(那呵黎城)에서 출생하여 석가세존의 성과 도학(道學)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이미 경론(經論)을 통달하였고, 어려서부터 대선사 불대선(佛大先)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전부터 계빈에 있었습니다.”
다시 또 지엄에게 말하였다.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불타발타라 그 사람뿐입니다.”
그러자 지엄이 간절히 요청하였고, 각현은 마침내 딱하게 여기며 허락하였다. 이에 대중을 버려두고 스승을 하직한 채 양식을 싸 가지고 동쪽으로 갔다. 걷고 달린 지 3년 동안을 추위와 더위를 연이어 겪었다. 이미 총령(葱嶺)을 넘어 도중에 여섯 나라를 경유하였고, 그 나라의 군주들은 멀리 떠나는 교화자(敎化者)63)를 공경하고, 모두 마음을 기울여 물자를 바쳤다.
교지국(交阯國)에 이르러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갔다. 배가 한 섬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각현은 손으로 산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기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
선장이 말하였다.
“길을 떠난 사람들은 하루의 시간이라도 아낍니다. 순풍을 만나기 어려우므로 정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2백 리쯤 나아갔으나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불어서 배가 도로 그 섬으로 향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그의 신이(神異)함을 깨닫고, 모두 스승으로 섬겼으며, 배의 진퇴를 그에게 묻곤 하였다. 뒤에 순풍을 만났으므로 동행하던 배들이 모두 출발하였으나, 각현은 말하였다.
“움직여서는 안 된다.”
선장은 곧 멈추었다. 그런데 이미 앞서 출발한 배들은 모두 일시에 전복되어 버렸다. 그 후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선박들을 모두 출발시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기꺼이 따르려는 자가 없었다. 때문에 각현이 스스로 일어나서 밧줄을 풀어 배 한 척만 출발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해적들이 쳐들어 와서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약탈을 당하였다.
얼마 후에 청주(靑州)의 동래군(東萊郡)에 이르렀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장안(長安)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찾아가 그를 따랐다. 구마라집은 크게 기뻐하면서 함께 법상(法相)을 논하여,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를 들어내어 깨달아 얻은 것이 많았다. 그로 인하여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당신의 해석은 보통 사람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닌데, 높은 명성을 얻은 것은 무엇 때문이오?”
구마라집이 답하였다.
“저의 나이가 많기 때문이지, 어찌 반드시 강의가 훌륭하다고 칭찬함이겠습니까?”
구마라집은 매양 의심스러운 뜻이 있으면 반드시 각현에게 물어서 결정하곤 하였다.
당시 후진(後秦)의 임금 요흥(姚興)은 오로지 경법(經法)에 뜻을 두어서, 3천여 승려에게 공양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승려들이 궁궐에 왕래하면서 성대하게 인사(人事)를 하였으나, 오직 각현만은 선정을 닦으면서 대중과는 함께하지 않았다.
그는 흣날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어제 고향에서 배 다섯 척이 함께 출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제자는 그 말을 외부 사람들에게 전하여 알렸다. 관중(關中)의 기존 승려들은 모두 각현이 미미한 일을 나타내어 대중을 현혹시킨다고 생각하였다. 또 각현이 장안에 있으면서 선의 가르침[禪業]을 크게 홍포하자, 사방에서 선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이르렀다. 다만 배움의 감화됨에 깊고 얕음이 있었고, 법을 얻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 경박하고 위선된 무리로 인하여 교활하게 속이는 일도 있었다. 어느 한 제자가 약간의 관행(觀行)64)을 닦고서 스스로 말하였다.
“나는 아나함(阿那含)65)의 과(果)를 얻었다.”
각현이 아직 가까이하여 조사하고 묻기도 전에 마침내 이 근거 없는 소문이 퍼져서, 대단한 원망과 비방을 받고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각현의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이름을 감추고 잠적해 버렸으며, 어떤 이는 야밤에 담을 넘어 달아났으므로 반나절 사이에 대중들이 거의 다 흩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각현은 평안을 유지하면서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 기존의 승려 승략(僧䂮)과 도항(道恒) 등이 각현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도 오히려 당신이 얻은 법을 설하시지 않았는데, 당신이 전에 다섯 척의 배가 온다고 예언한 것은 허황되고 사실이 아닙니다. 또 문도들이 속이고 미혹하게 해서 혼란을 일으킨 것은 이미 계율에 위배되므로 도리로 보아 함께 머무를 수 없소. 응당 여기에 오래 머물지 말고 속히 떠나시오.”
각현이 말하였다.
“나의 몸은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아 떠나고 머무는 것이 매우 쉽소. 다만 품고 있는 뜻을 다 펴지 못한 것이 유감이며 그것을 억울하게 여길 뿐이오.”
이에 제자 혜관(慧觀) 등 40여 인과 함께 떠났는데, 그의 정신과 뜻은 차분하고 침착하였으며, 처음과 같이 얼굴빛이 다르지 않았다.
진실을 아는 대중들은 모두 다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승(僧)ㆍ속(俗)의 전송하는 사람들이 수 천여 명이었다. 요흥(姚興)도 각현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하면서 도항(道恒)에게 말하였다.
“불현(佛賢 : 覺賢)사문은 도(道)를 마음에 품고 이곳으로 와서 머물러 부처님께서 남기신 교법을 선양하고자 하였으나, 입을 다물고 아직 말은 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어찌 말 한 마디 허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요흥은 칙명을 내려 각현의 뒤를 급히 뒤따라가게 하였으나, 각현은 사신에게 대답하였다.
“진실로 은혜로운 임금의 뜻은 알겠지만, 칙명은 받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문도들을 이끌고 밤에도 길을 걸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악(廬岳) 사문 혜원(慧遠)은 평소 그의 풍모와 명성을 사모하고 있던 터라, 이에 사람을 보내어 관내로 들어오게 하면서 글을 써서 빌고 청하였다. 뒤에 여악에 이르자, 기뻐하며 마치 오래 사귄 벗과 같이 대하였다. 혜원은 각현이 배척당한 것은 그 잘못이 문인(門人)에게 있으며, 다섯 척의 배를 예언한 것과 같은 것은 단지 그 설(說)이 자기 생각에 있던 것을 말한 것일 뿐이므로, 계율에 대해서는 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제자 담옹(曇邕)을 파견하여 요흥과 관중(關中)의 대중 스님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배척한 사건을 해결하였다. 혜원은 각현에게 여러 편의 선경(禪經 : 선종 관련 경전)을 번역해 낼 것을 청하였다.
각현은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거처하는 일에 있어 안락을 구하지 않았다. 여산에서는 1년 가량 머물고, 다시 서쪽 강릉(江陵)으로 갔는데, 마침 외국의 선박이 들어왔다. 물어 보니 과연 천축에서 온 다섯 척의 배로, 각현이 예시했던 그대로였다.
그때 온 나라의 사대부와 서민들이 다투어 와서 예를 올리고 받들어 보시하는 이도 있었으나, 각현은 모두 받지 않았다. 대신 각현은 발우를 들고 탁발을 다니되 귀천을 묻지 않았다.
당시 진군(陳郡)의 원표(袁豹)는 송(宋)나라 무제(武帝)가 태위(太尉)로 있던 시절에 장사(長史) 벼슬을 하였는데, 송나라 무제가 남쪽으로 유돈(劉敦)을 토벌할 때 수행하여 강릉에 주둔하고 있었다. 각현은 제자 혜관(慧觀)과 함께 원표에게 나아가서 걸식을 하였다. 원표는 평소 불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야박하게 대접하여 미처 배불리 먹지 못하고 물러났다. 원표가 말하였다.
“아직 만족하지 못한 듯하니, 잠시 더 머물러 주십시오.”
각현이 말하였다.
“단월(檀越 : 시주자)께서 보시하는 마음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든 음식이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원표는 즉시 좌우에게 호령하여 음식을 더 올리게 하였으나, 역시 다 없어져 버렸으므로, 원표는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리고는 혜관에게 물었다.
“이 사문이 어떤 사람이오?”
혜관이 말하였다.
“덕행과 도량이 고매하여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원표는 몹시 탄복하고 기이하게 여기고서 태위(太威)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태위는 청하여 만나보고는 매우 숭앙하고 공경하며, 필요한 물자를 공양함이 빠짐이 없었다. 얼마 후에 태위는 도읍으로 돌아갔다. 각현에게도 함께 돌아가자고 청하여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각현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진실해 중국의 풍속과는 같지 않았다. 그리고 뜻이 운치가 있고 맑고 원대하여 평소 깊숙한 이치를 지니고 있었다.
양도(楊都)의 법사 승필(僧弼)은 덕망이 높았던 사문 보림(寶林)에게 보내는 편지에 쓰기를 “투량사(鬪場寺)의 선사(禪師)는 매우 위대한 인품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분은 바로 천축국의 왕으로서 어찌 품격이 우아한 사람[風流人]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가 칭송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보다 앞서 사문 지법령(支法領)은 우전국(于闐國)에서 『화엄경(華嚴經)』 범본(梵本) 3만 6천의 게(偈)를 얻었으나, 아직 번역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의희 14년(418)에 오군(吳郡)의 내사(內史) 맹의(孟顗)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가 각현을 초청하여 역장(譯匠)66)으로 삼았다.
각현은 손에 범문(梵文)을 쥐고 사문 법업(法業)ㆍ혜엄(慧嚴) ㆍ혜의(慧義) 등 1백여 명과 함께 도량사에서 번역해 내었다. 문장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여 정하고, 한문(漢文)과 범문(梵文)을 회통시켜 신묘하게 경전의 요체를 들어내었다. 그러므로 도량사에서는 아직까지도 화엄당(華嚴堂)이 남아 있다. 또 사문 법현(法顯)은 천축에서 얻은 『승기율(僧祇律)』의 범본을 각현에게 부탁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각현은 안제(安帝) 융안(隆安) 2년 무술(戊戌, 398)로부터 송(宋)나라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에 이르기까지, 양도(楊都)와 여산(廬山)의 두 곳에서 『화엄경』 등 총 13부를 번역하였다. 모두 그 그윽한 이치를 궁구하고, 신묘하게 문장의 뜻을 다 드러냈다.
각현은 송나라 원가(元嘉) 6년(429)에 입적하였다. 춘추는 71세였다.또 『승우록』과 『장방록』 두 목록에는 다시 각현이 “『신미밀지경(新微密持經)』을 번역하여 내고, 곧 『생무량문지경(生無量門持經)』을 번역해 내었다”라고 하였는데, 이 두 경을 다 기재한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두 경은 지겸(支謙)이 먼저 번역하였기 때문에 그와 구별하기 위하여 신(新)자를 덧붙인 것이다. 또한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과 『본업경(本業經)』이 있는데, 이 두 경은 모두 『화엄경』의 별품(別品)이다. 각현은 이미 대품(大品)을 번역해 내었으므로, 따로 번역하였다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이 경은 그 『본업경』과 동일한 경이다. 주(周)의 『입장록(入藏錄)』에는 아직 그 경본이 보이지 않으므로, 우선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 이 한 경만을 두고, 『본업경』은 삭제하여 싣지 아니한다.

(8) 담마(曇摩)
잡문율사(雜問律事) 2권처음 번역되었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2권이며 궐본이다.

사문 담마는 중국말로 번역하면 법(法)이라 한다. 율학(律學)을 잘 하였다. 안제(安帝) 융안(隆安) 4년 경자(庚子, 400) 3월 2일에 양도(揚都)에서 상서령(尙書令) 왕법도(王法度)의 정사(精舍)에 있을 때, “사문 석승준(釋僧遵) 등의 20여 대덕들이 『잡문율사』를 번역해 주기를 청하였다”는 것이 책 첫머리의 서문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 책은 불(佛)ㆍ법(法)ㆍ승(僧)의 물건을 서로 지니는 관계[互相交涉]와 차별 범위[分齊]가 너무도 다르니, 모름지기 잘 지켜야 함을 밝히고 있다.

(9) 비마라차(卑摩羅叉)
십송율비니서(十誦律毗尼序) 3권또한 『십송율서(十誦律序)』라고도 한다. 지금은 『십송률(十誦律)』의 마지막 뒤의 3권에 합하여 들어가 있다. 장방은 『비니송(毗尼誦)』 주(注)에서 “이것이 십송(十誦)이고, 뒤는 선송(善誦)이다”라고 하였는데 틀린 것이다. 그 선송에는 4권이 있으며, 이것은 십송 중의 제10송(誦)이다. 『이진록(二秦錄)』에 보인다.
잡문율사(雜問律事) 2권『중율요용(眾律要用)』이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5권이다.앞의 『십송율비니서』 3권은 현재 그 책이 있으며, 뒤의 『잡문율사』 2권은 궐본이다.

사문 비마라차는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구안(無垢眼)이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침착하고 고요하면서 지기[志]가 있었고, 어릴 적에 출가하여 도를 실천하면서 고행(苦行)에 힘썼다. 눈이 푸른 사람이므로, 당시 또한 청안율사(靑眼律師)라 하였다.
먼저 구자국[龜茲]에 있으면서 율장(律藏)을 널리 폈으므로,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鳩摩羅什)도 그 당시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구자국이 멸망하자, 오전(烏纏)으로 몸을 피하였다. 얼마 후에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경장(經藏)을 크게 넓힌다는 말을 듣고, 또 비니(毘尼 : 계율의 총칭)의 수승한 품류[勝品]를 다시 중국에 두루 미치게 하고자, 석장(錫杖)을 짚고 유사(流沙)를 지나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요진(姚秦) 홍시(弘始) 8년(406)에 관중(關中)에 도달하자, 구마라집은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고 대하였으며, 또한 서로 멀리서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세상을 떠나자, 또 안제(安帝) 의희 연간(405~418)에 관좌(關左)로 나아가 돌아다녔다. 수춘(壽春)에 머물면서 석간사(石澗寺)에 있었는데, 계율을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였으므로 비니(毗尼)를 널리 퍼지게 하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십송률(十誦律)』 58권 맨 뒤의 1송(誦)은 수계하는 법[受戒法]과 모든 선을 이루는 법[諸成善法事]을 밝혔으므로, 그 뜻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선송(善誦)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 뒤에 선송을 고쳐서 비니송(毗尼誦)이라 하였는데, 이 때문에 두 가지의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다시 3권의 『율서(律序』를 지어 뒤에다 두게 되었으므로, 총 61권으로 된 것이다.『고승전(高僧傳)』과 『장방록』에서는 “앞의 58권을 펼쳐, 61권이 되었다”고 한 것은 조금 자세히 살피지 못해서이다. 그 『비니서(毗尼序)』 3권은 혹은 근래의 경본에 편성하여 제9송(誦)에 두었고, 뒤의 제10송(誦)은 전권(前卷)의 제55ㆍ56ㆍ57권에 해당한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이제 그 옛 『십송률』을 조사하여 보면 제10송은 후권에 있으며, 제59권으로부터 61권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제 옛 책古本에 의거하여 바르게 한다.
얼마 후에 남쪽 강릉(江陵)으로 나아가 신사(辛寺)에서 하안거[夏坐]하면서 『십송률』을 열어 강의하였고, 이미 중국말을 통하였으므로 잘 이해하며 받아들였다. 이 무위(無爲)의 신묘한 경본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시에 문장을 분석하고 이치를 구하는 이들이 마치 수풀처럼 모여들어, 조목[條]에 밝고, 금계[禁]를 아는 이의 수효도 역시 많았다. 율장(律藏)이 중국에 크게 넓혀진 것은 이 비마라차의 힘이었다. 뒤에 『잡문율사』 2권을 내었는데,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받아썼다.
『고승전』에서는 “도량사의 혜관이 종지(宗旨)를 깊이 묶어서, 그 제정한 금계를 기록하여 경(輕)ㆍ중(重)으로 2권을 만들어 서울로 올려 보내자, 승니(僧尼)들이 읽고 탐구하며 경쟁적으로 베껴 전하였다. 당시 어리석은 사람들이 공손치 못한 말로 “비마라차의 촌스러운 말을 혜관이 재치 있게 기록하니, 온 장안 사람들이 베껴 쓰느라 종이가 옥(玉)같이 귀해졌다”라고 하였다. 이 『잡문율사』는 곧 도량사의 혜관이 교수를 받으면서 의심이 있으면 그 일에 따라 물었고, 비마라차가 결단하여 준 것을 듣고는 곧 그것을 기록하여 2권으로 만들어 세상에 유행시킨 것이므로, 따로 범본(梵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마라차가 번역하고, 담마(曇摩)가 출간하였다는 것 역시 이 목록을 지은 이들이 착오로 기재한 것이다.
또 비마라차는 덕을 기르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시끄러움을 버리고 세속을 여의었다. 그 해 겨울 다시 수춘(壽春)의 석간사(石澗寺)로 돌아왔다가 그 절에서 입적하였으니, 나이는 77세였다.

(10) 석법현(釋法顯)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경(經)의 기록에서는 “『방등대반니원경(方等大般泥洹經)』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네 번째 번역이다. 의희 12년(416) 10월 1일에 도량사에서 각현(覺賢)과 함께 번역하기 시작하여, 보운(寶雲)이 붓으로 받아썼으며, 14년(418) 정월 2일에 끝마쳤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은 『장아함경(長阿含經)』의 초분(初分) 「유행경(遊行經)」의 이역(異譯)이다. 여러 목록에서 모두 “법현이 『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을 번역해 내었다”라고 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곧 앞의 『대반니원경』에 방등(方等)의 글자를 붙인 것이며, 이 경은 소승(小乘)의 열반문(涅槃文)이다. 법현의 번역과 같기 때문에 이 글자를 넣어 구별한 것이다.
잡장경(雜藏經) 1권두 번째의 번역이다. 『귀문목련아귀보응경(鬼問目連餓鬼報應經)』과 같은 동본(同本)이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승기비구니계본(僧祇比丘尼戒本) 1권또한 『비구니바라제목차승기계본(比丘尼波羅提木叉僧祇戒本)』을 각현(覺賢)과 함께 번역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역유천축기전(歷遊天竺記傳) 1권또한 『법현전(法顯傳)』이라고도 한다. 법현 자신이 천축을 왕래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지은 것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 13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부진(苻秦)의 승가제바(僧伽提婆) 등이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장방은 “법현과 각현이 함께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불유천축기(佛遊天竺記) 1권『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7부 26권이다.앞의 5부 12권은 현재에 보인다. 뒤의 2부 14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현은 본래의 성(姓)이 공(龔)씨이며, 평양(平陽) 무양(武陽) 사람이다. 법현은 세 형이 있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차례로 죽었다. 그 아버지는 재앙이 법현에게도 미칠까 두려워하여 법현이 넷 살 되던 해에 바로 출가시켰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집에서 머물렀는데, 병이 위독해져서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찰로 돌려보냈더니, 이틀 만에 병이 나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으므로, 절문 밖에 작은 집을 짓고 서로 왕래하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열 살 때에 부친상을 당하자, 숙부는 그의 어머니가 늙은 데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억지로 환속(還俗)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이 말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티끌같은 세상을 멀리 여의고자 도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숙부는 그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서 곧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자,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지만, 장사(葬事)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절로 돌아왔다.
일찍이 동학(同學) 수십 인과 함께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그때 굶주린 도둑들이 그 곡식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여러 사미(沙彌)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법현만은 홀로 남아 도둑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곡식을 원한다면 뜻대로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그대들은 과거에도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고프고 가난하게 지내는데, 지금 다시 남의 것을 빼앗으면, 아마도 내세(來世)에는 가난이 더욱 심해질까 염려되오. 빈도(貧道)67)는 미리 그대들을 위하여 걱정하여 말할 따름이다.”
말을 마치고 바로 돌아와 버렸더니, 도둑들은 곡식을 그대로 두고 갔고, 수백 인의 여러 스님들은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구족계[大戒]를 받고는 지조와 행실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의궤(儀軌)68)가 바르고 엄숙하였다. 늘 경율이 어긋나고 빠진 것을 개탄하고는 맹세코 찾아 구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안제(安帝) 융안(隆安) 3년(399)에 동학(同學)인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응(慧應)ㆍ혜외(慧嵬) 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사하(沙河)를 건넜는데,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돌아다니는 짐승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히 넓고 끝없이 멀어서 가야 될 곳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오직 해와 달을 보면서 동서를 분간하고, 죽은 사람의 해골로 길의 표지를 삼을 뿐이었다. 여러 번 뜨거운 바람[熱風]이 불고 악귀(惡鬼 : 악한 귀신)를 만나서, 꼭 죽을 지경이었다. 법현은 모든 걸 인연에 맡기고 목숨을 내던져 곧바로 위험하고 어려운 곳을 지났다.
얼마 후에 총령(葱嶺)에 이르렀는데, 총령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고, 악룡(惡龍)이 혹독한 비바람을 토하여 모래와 자갈이 날렸다. 산길은 험하고 위태하였으며, 깎아지른 절벽은 천 길이나 되었다. 옛 사람들이 돌을 뚫어 길을 내고, 그 곁에 사다리를 걸쳐 놓은 것들을 7백여 군데나 건넜다. 또 조교(弔橋)69)를 건너고 강물을 건너기 수십여 차례씩이나 하였으니, 모두가 한(漢)나라 때 장건(張騫)이나 감부(甘父)도 이르지 못한 곳이었다.
다음에는 소설산(小雪山)을 넘었는데,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자, 혜경은 입을 다물고 벌벌 떨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 법현에게 말하였다.
“저는 죽을 것 같습니다. 당신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다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를 어루만지며 울면서 말하였다.
“원래의 계획을 이루지 못한 것은 천명(天命)이니,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하여 다시 혼자 힘으로 나아가, 마침내 험준한 산을 넘어 무릇 30여 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리하여 북천축(北天竺)에 이르렀고, 차츰 중천축국(中天竺國)에까지 왔다. 왕사성(王舍城)과의 거리가 30여 리가 안 되는 곳에 한 절이 있었는데, 어두워져서 그 절에서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 법현이 기사굴산(耆闍崛山)70)으로 나아가려 하자, 그 절 스님이 충고하였다.
“길이 매우 험준하여 고생스러운 데다가 흑사자(黑師子)들이 많아 자주 사람을 잡아먹는데, 무슨 일로 가려고 하는가?”
법현이 말하였다.
“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71)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목숨은 기약할 수 없고, 내쉬는 숨도 보전하기 어렵습니다만, 어찌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여기까지 와서 가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스님을 딸려 보냈다.
법현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이었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따라온 두 스님은 무서워하여서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가 버렸다. 법현만 혼자 산중에 남아 향을 피우고 예배하며 우뚝이 옛 자취를 생각하고 감상하니, 마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뵙는 듯하였다.
밤이 되자 세 마리의 흑사자가 와서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문 외우는 일을 멈추지 않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염(念)하였다. 그러자 사자들은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를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우면서 말하였다.
“만일 나를 해치고자 하거든 내가 경 읽기[誦經]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만일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곧 물러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자 사자들은 한참 있다가 가버렸다.
이튿날 새벽 다시 돌아오는데 길이 다하여 완전히 막혀 있고, 덤불이 우거지고 날짐승ㆍ길짐승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다만 한 좁은 길로만 통할 수 있었다. 미처 1리(里) 남짓 가지도 못하였는데, 홀연히 한 도인(道人)을 만났다. 나이는 90세 정도였고, 용모와 복장은 거칠고 소박하였으나, 정신과 기력[神氣]는 걸출하고 고상하였다. 법현은 비록 그의 운치가 고매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였지만, 그 분이 신인(神人)인 줄은 깨닫지 못하였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다가, 또 한 젊은 도인을 만나게 되자, 법현이 물었다.
“아까 늙은 그 노인은 누구입니까?”
젊은 도인이 대답하였다.
“두타(頭陁) 제자 대가섭(大迦葉)72)이십니다.”
법현은 비로소 크게 한탄하고는 산 앞까지 갔지만, 돌 하나가 굴 입구를 가로질러 막고 있었으므로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법현은 눈물을 흘리며 공경을 드리고 나서 떠났다.지금 생각하면 법현이 답사한 곳은 바로 계족산(鷄足山) 대가섭파(大迦葉波)가 입적한 곳이었고, 부처님께서 옛날에 사셨던 취봉산(鷲峰山)이 아니었다.
또 나아가 가시국(迦施國)에 이르렀다. 그 나라 정사(精舍) 안에는 흰 귀를 가진 용이 있었다. 항상 대중 스님들과 약속하여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하였다. 누구든지 모두 믿으면 효험이 있었다. 사문들은 용을 위하여 용사(龍舍)를 짓고 아울러 복식(福食)을 베풀었다. 매번 여름 안거를 마칠 무렵이면, 문득 용은 화(化)하여 한 마리 작은 뱀이 되는데, 양쪽 귀는 모두 흰 빛이었다. 대중들은 모두 이것이 그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구리 쟁반에 낙(酪 : 우유)을 담아 그 안에 놓아두고, 상좌(上座)에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두루 문안하듯이 하면, 곧 용으로 화하여 사라진다. 해마다 한 번씩 출현하는데, 법현도 이 용을 친견하였다.
뒤에 중천축(中天竺)에 이르렀다. 마갈제국(摩竭提國) 파련불읍(巴連弗邑) 아육왕탑(阿育王塔)의 남쪽 천왕사(天王寺)에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었고, 또 『살바다율초(薩婆多律抄)』ㆍ『잡아비담심연경(雜阿毗曇心綖經)』ㆍ『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등을 얻었다.이 『방등니원경』은 곧 6권이며,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의 범본(梵本)이다. 경의 후기(後記)에 준하면 『방등대반니원경(方等大般泥洹經)』이라 하였으나, 아니다. 3권이면 『방등니원경』이다.
법현은 그 곳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범서(梵書)와 범어(梵語)를 배워서, 비로소 자신이 직접 글을 베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경상(經像)을 지니고, 상인(商人)들에게 의탁하여 사자국(師子國)에 도착하였다. 법현과 함께 동행했던 10여 명의 동료들은 남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였다. 지나온 자취를 뒤돌아보니, 오직 자기 혼자뿐이었으므로, 마음속에 늘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때마침 옥으로 된 불상 앞에서 한 상인(商人)이 진(晋)나라 땅에서 생산된 둥근 모양의 백단선(白團扇)을 공양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애달프고 구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2년간 머무르고, 다시 『미사색율(彌沙塞律)』ㆍ『장아함경(長阿含經)』ㆍ『잡아함경(雜阿含經)』과 잡장(雜藏)의 경본을 얻었는데, 모두 중국 땅에는 없는 경들이었다.
그 사자국에는 부처님의 치아[佛齒]가 있었는데, 매년 3월이 되면 그 나라의 왕이 미리 10일 전에 흰 코끼리를 장엄하고, 신분이 높고 말을 잘 하며, 지혜 있는 신하 한 명에게 왕의 의상(衣裳)을 입고, 코끼리 위에 올라 북을 치면서 큰 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시던 45년 동안에 설법하여 제도한 사람은 한량없는 [億數]데, 중생들의 인연이 다하여 열반에 드신 것이다. 그로부터 1497년 동안 세간에서는 오랫동안 어두워졌으니, 가히 중생들은 불쌍하구나.”
그로부터 10일 후에 부처님 치아를 무외정사(無畏精舍)에서 모시고 나오자, 향과 꽃을 모두 마련하여 저마다 와서 공양하였다.
그때가 바로 진(晋)나라 의희(義凞) 원년(405)이었다. 계산하면 의희 원년 태세(太歲) 을사(乙巳)로부터 지금의 개원(開元) 18년 세차(歲次) 경오(庚午, 730)까지는 곧 1822년이 된다.
이윽고 상인들의 큰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동쪽으로 돌아왔다.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큰 폭풍을 만나 배가 파괴되어 물이 들자, 사람들은 모두 당황하고 두려워서, 즉시 모은 여러 물건들을 버렸다.
법현은 상인들이 경상(經像)마저 던져 버릴까, 두려워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염하였고, 중국 대중 스님들에게도 귀명(歸命)하게 하였다. 그리고 배를 바람에 맡겨 항해하였으나, 배는 파손되지 않았다.
그렇게 90여 일을 가서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달포 만에 한 밤중에 갑자기 큰 바람을 만나고, 배에 벽락이 쳐서 온 배 안의 사람들은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대중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이 사문을 탔기 때문에 우리들이 낭패(狼狽 :실패)를 보게 되었다. 한 사람 때문에 온 대중을 다 죽게 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모두 법현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의 단월(檀越)73)이 성난 소리로 상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이 이 사문을 내려놓겠다면 나도 함께 내려놓으시오. 그렇지 아니면 마땅히 죽음을 보게 될 것이오. 중국의 제왕(帝王)은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들을 공경하고 있소. 내가 중국에 이르러 왕에게 고하면, 반드시 당신네들에게 죄를 물을 것이오.”
상인들은 서로 쳐다보며 낯빛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만두었다.
이미 식수도 떨어지고 양식도 다 고갈되어, 오직 바람에 내맡긴 채 바다를 떠내려갔다. 뜻밖에 언덕에 다다랐는데, 명아주풀[藜藿菜]74)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이곳이 바로 중국 땅인 줄은 알았다. 다만 어느 곳인지는 아직 헤아릴 수 없었다. 곧 작은 배를 타고 포구에 들어가 마을을 찾다가 사냥꾼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법현이 물었다.
“이 곳은 어느 지역입니까?”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이 곳은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 뇌산(牢山) 남쪽 해안입니다.”
사냥꾼은 돌아가 태수(太守) 이억(李嶷)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억은 평소 불법을 공경하며 믿고 있었는데, 뜻밖에 사문이 멀리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몸소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법현은 경상(經像)을 모시고 그를 따라서 돌아왔다.
얼마 후 법현은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청주자사(靑州刺史)는 법현에게 더 머물며 겨울나기를 청하였지만, 법현이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땅에 몸을 던진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약한 바를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는데,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법현은 남쪽 건강(建康)에 이르러 도량사에서 외국 선사 불타발타라(佛陁跋陁羅)에게 가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등 6부를 번역하고, 『유천축전(遊天竺傳)』 1권도 지었다.
법현은 이미 『대반니원경』을 번역하여 세상에 내어 유포시켜, 교화하고 함께 보고 듣게 하였다.
성명은 알 수 없는 어떤 한 집이 양도(楊都) 주작문(朱雀門) 근처에 살았는데, 대대로 바른 교화를 받들었다. 스스로 『대반니원경』 1부를 베껴 써서 독송하고 공양하였다. 별도로 경실(經室 : 경을 모시는 방)이 없어, 그 경을 잡서(雜書)들과 함께 방에 놓아두었는데, 후에 갑자기 바람과 불이 일어나서, 그의 집에까지 미쳤다. 재물이 모두 타버렸지만, 오직 『대반니원경』 만은 온전히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을음도 묻지 않았고, 책의 빛깔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양도(楊都)에 함께 전해지자, 모두들 신통하고 영묘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입적하였는데, 춘추는 86세였다. 대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서러워하였다.

(11) 기다밀(祈多蜜)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 1권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십주품(十住品)」의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여래삼매경(寶如來三昧經) 2권혹은 1권75)이다. 일명 『무극보삼매경(無極寶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이다. 『무극보경(無極寶經)』과 동본(同本)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지도경(大智度經) 4권다섯 번째 번역이다. 지참(支讖)의 『도행경(道行經)』과 『대반야경(大般若經)』 제4회(會) 등과는 동본이다. 『승우록』과 『축도조록』에 보인다.
보문품경(普門品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법호(法護)의 『보문품(普門品)』과 『보적경(寶積經)』 「문수보문회(文殊普門會)」와는 동본이다. 『승우록』과 『축도조록』에 보인다.
아술달경(阿述達經) 1권『보적경(寶積經)』 「무외덕회(無畏德會)」와 같은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 2권안세고(安世高)의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과 『보적경』 「선주의회(善住意會)」 등과는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이다. 축도조의 『진록(晋錄)』에 보인다.
미륵소문본원경(彌勒所問本願經) 1권법호(法護)의 『미륵본원경(彌勒本願經)』과 『보적경』 「미륵소문회(彌勒所問會)」와는 동본이다. 두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십지경(十地經) 1권법호(法護)의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과 같은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유마힐경(維摩詰經) 4권엄불조(嚴佛調)의 『고유마경(古維摩經)』과 같은 동본이다. 다섯 번째 번역이다. 장방은 “『남래신록(南來新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무소희망경(無所悕望經) 1권세 번째 번역이다. 『상액경(象腋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부광경(浮光經) 1권혹은 유광(乳光)이라고 쓰기도 한다. 『독자경(犢子經)』과 같은 동본이다. 네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여래독증자서삼매경(如來獨證自誓三昧經) 1권세 번째 번역이다. 안세고의 『자서삼매경(自誓三昧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현관경(普賢觀經) 1권일명 『관보현보살경(觀普賢菩薩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도혜록(道慧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영락경(瓔珞經) 12권일명 『현전보경(現前報經)』이라고도 한다. 축불념(竺佛念)의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과는 동본이다. 혹은 14권으로 되어 있다. 장방은 “『남래신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조명삼매경(照明三昧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선경(禪經) 4권장방은 “『남래신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법몰진경(法沒盡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정재경(菩薩正齋經) 1권세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위혁장자육향배경(威革長者六向拜經) 1권혹은 위화(威華)라고 쓰기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중아함경』 제3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지만경(指鬘經) 1권혹은 지계(指髻)라고 쓰기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31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소욕치환경(所欲致患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오개의결실행경(五盖疑結失行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분위경(分衛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23부 45권이다.처음의 2부 3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대지도경(大智度經)』 이하의 21부 42권은 궐본이다.

사문 기다밀은 혹은 기밀다(祇蜜多)라고도 하며, 중국말로는 가우(謌友)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식견과 성품이 화통하고 민첩하며, 총명함과 활달함이 크고도 넓었다. 또 널리 교화하는 일에 뜻을 두고, 멀리 돌아다님에 꺼림이 없었다. 진(晋)나라 때(265~316)에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 등 23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에는 모두 “기다밀은 진나라 때에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그가 어느 황제 대(代)에 번역하였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만일 함락(咸洛)이 아니었으면, 이는 강남(江南)의 일부였을 것이다.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장방(長房)은 “그 이외에도 모두 『잡별제록(雜別諸錄)』에 나타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보시녀경(寶施女經)』『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과 『마조왕경(摩調王經)』『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이 있으나, 이미 이 경들은 따로 파생된[別生] 경이므로, 여기서는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는다.

(12) 축난제(竺難提)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 3권원희(元凞) 2년(420)에 번역하였다. 세 번째로 나왔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축법호(竺法護)의 『대선권경(大善權經)』과 같은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38회(會)에 해당한다.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陁羅尼呪經) 1권또한 바로 『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위혁장자육향배경(威革長者六向拜經) 1권진(晋)ㆍ송(宋) 연간에 광주(廣州)에서 번역되었다. 『중아함경』 제3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시흥록(始興錄)』과 『보창록(寶唱錄)』에서 보인다.
이상은 3부 5권이다.앞의 2부 4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거사(居士) 축난제는 중국말로 번역하면 희(喜)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도(道)에 뜻을 두어 게으름이 없었고, 실천이 원대하면서 능히 편안하였다. 깊은 이치까지 깨달아 알았으며, 이에 말은 진(晋)나라의 속담[俗]까지 훤하게 통하였다.
공제(恭帝) 원희 원년 기미(己未, 419)에서 송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 등의 3부를 번역하였다.

(13) 축법력(竺法力)
무량수지진등정각경(無量壽至眞等正覺經) 1권일명 『낙불토락경(樂佛土樂經)』, 또는 『극락불토경(極樂佛土經)』이라고도 한다. 일곱 번째의 번역이다. 『정도록(正度錄)』에 보인다. 세고(世高)ㆍ지참(支讖)ㆍ지겸(支謙)ㆍ승개(僧鎧)ㆍ백연(白延)ㆍ법호(法護) 등의 번역한 경본과는 동본이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축법력은 서역 사람이다. 업행(業行)이 맑으면서 고상하고, 지혜와 도[智道]가 높고 우뚝하였다. 중국말에 잘 통하여서, 경의 미미한 데까지 신묘하게 설명하였다.
공제 원희 원년 기미(己未, 419) 2월에 『무량수지진등정각경』 1부를 번역하였다.

(14) 석숭공(釋嵩公)
일난경(日難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이 경은 『월난경(越難經)』인데, 마지막에 설한 것이 조금 다르다. 『조록(趙錄)』과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평사왕오원경(蓱沙王五願經) 1권또한 『불사왕경(弗沙王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이다. 『조록』과 『시흥록』에 보인다.
가섭결집계경(迦葉結集戒經) 1권세 번째 번역이다. 『조록』과 『시흥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3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석숭공은 혹은 고공(高公)이라고도 한다. 진(晋)나라 말엽에 『일난경』 등 3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에서 진나라 말기(末期)라고 하였으나, 어느 황제의 연대인지는 알 수 없었다.

(15) 석퇴공(釋退公)
가섭금계경(迦葉禁戒經) 1권일명 『마하비구경(摩訶比丘經)』, 또는 『진위사문경(眞僞沙門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그 경본은 궐본이다.

사문 석퇴공은 『가섭금계경』 1부를 번역하였다. 진(晋)나라 말기(末期)라고 하였으나, 어느 황제의 연대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16) 석법용(釋法勇)
불개해범지아발경(佛開解梵志阿颰經) 1권『장아함경』 제1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조록(趙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그 경본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용은 『범지아발경』 1부를 번역하였다. 진(晋)나라 말기(末期)라고 하였으나, 역시 어느 황제의 연대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17) 신구제실역경(新舊諸失譯經)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2권혹은 『나선경(那先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의 『실역록(失譯錄)』에 보인다.
현성집(賢聖集)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다라니장구경(陁羅尼章句經) 1권승우는 “장(章)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승우의 『실역록』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이다. 『지구신주경(持句神呪經)』과 같은 동본이다.
대승경(大乘經)인데 궐본이다.
이상은 2부 3권이다.
『장방록(長房錄)』 등의 동진(東晋)의 실역(失譯)은 총 53부 57권이다.
이제 제외한 2부 3권 외 나머지 51부 54권도 다 같이 『장방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혹은 후한(後漢)의 『실역록』에 이미 기재되어 있는 것과 번역한 사람[譯人]이 있는 따로 파생된 경[別生經] 등은 아래에 자세하게 나열해 둔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삼세삼천불명경(三世三千佛名經)
천불인연경(千佛因緣經)
오십삼불명경(五十三佛名經)
팔부불명경(八部佛名經)
시방불명경(十方佛名經)
현겁천불명경(賢劫千佛名經)
칭양백천불명경(稱揚百千佛名經)
남방불명경(南方佛名經)
멸죄득복불명경(滅罪得福佛名經)
비구제금율경(比丘諸禁律經)
마하승기율비구요집우바리문불경(摩訶僧祇律比丘要集優波離問佛經)
사미위의비구니십계경(沙彌威儀比丘尼十戒經)
수십선계경(受十善戒經)
사미니계경(沙彌尼戒經)
현자오계경(賢者五戒經)
우바새위의경(優婆塞威儀經)
파야득경(波若得經)
관세루탄경(觀世樓炭經)
반주삼매염불장경(般舟三昧念佛章經)
유가삼마사경(庾伽三摩斯經)
선요가욕경(禪要呵欲經)
칠불소결마유술주(七佛所結麻油述呪)
왕룡주독경(王龍呪毒經)
우치주(齲齒呪)
칠불안택신주(七佛安宅神呪)
안택주(安宅呪)이상의 29부 29권은 후한(後漢)의 『실역록』에 이미 기재되어 있으나, 여기에 다시 기재한 것은 중요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삼귀오계대패호신주경(三歸五戒帶佩護身呪經)
칠만이천신왕호비구주경(七萬二千神王護比丘呪經)
십이만신왕호비구니주경(十二萬神王護比丘尼呪經)
백결신왕호신주경(百結神王護身呪經)
궁택신왕수진좌우경(宮宅神王守鎭左右經)
총묘인연사방신주경(塚墓因緣四方神呪經)
복마봉인대신주경(伏魔封印大神呪經)
마니라단대신주경(魔尼羅亶大神呪經)
소오방룡섭역독신주경(召五方龍攝疫毒神呪經)
범천신책경(梵天神策經)
보광경(普廣經)이상 11부 11권은 모두 백시리밀다라(白尸梨蜜多羅)가 번역한 『대관정경(大灌頂經)』 제1권에서부터 제11권까지이다.
유교삼매경(遺敎三昧經) 2권혹은 『유교삼매법률경(遺敎三昧法律經)』이라고도 한다. 서진(西晋)의 법거(法炬) 번역이다. 『위록(僞錄)』에도 역시 기재되어 있다.
아나함경(阿那含經) 2권송나라 지엄(智嚴)의 번역이다. 『위록(僞錄)』에도 역시 기재되어 있다.
미증유인연경(未曾有因緣經) 2권혹은 바로 『미증유경(未曾有經)』이라고도 한다. 이미 일찍이 두 번 번역되었는데, 한 경본은 있고, 한 경본은 궐본이다.
선정방편차제법경(禪定方便次第法經)후한(後漢) 안세고(安世高)의 번역이다.
칠불신주(七佛神呪)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현자오복경(賢者五福經)서진(西晋) 백법조(白法祖)의 번역이다.
마니라단신왕주안마경(摩尼羅亶神王呪案摩經)혹은 왕(王)자가 없기도 하다. 축담무란(竺曇無蘭)의 번역이다.
본행육바라밀경(本行六波羅蜜經)송나라 구나발타라의 번역이다.
우바새오계경(優婆塞五戒經)송나라 저거경성(沮渠京聲)의 번역이다.
삼귀오계신왕명경(三歸五戒神王名經)『관정경(灌頂經)』에서 간추려서 뽑은 경(抄經)이다.
정의삼매경(定意三昧經)『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에서 나왔다.
이하는 새로 이 목록에 덧붙인다.
결정비니경(決定毗尼經) 1권일명 『파괴일체심식경(破壞一切心識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寶積經)』 「우바리회(優波離會)」와는 동본인데, 번역이 다르다. 승우는 “여러 목록에서 모두 돈황(燉煌)에서 번역되었다 하였으나, 나타나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역인전(譯人傳)』에는 “진(晋)나라 때에 나왔으나, 어느 황제 때에 나왔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미륵래시경(彌勒來時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과 같은 동본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도간경(稻芉經) 1권『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과 같은 동본이다.
조립형상복보경(造立形像福報經) 1권『작불형상경(作佛形像經)』과 동본이다.
보은봉분경(報恩奉盆經) 1권『우란분경(盂蘭盆經)』과 동본이다.
사자분신보살소문경(師子奮迅菩薩所問經) 1권
화취다라니주경(華聚陁羅尼呪經) 1권이상 두 경은 동본인데, 번역을 다르게 하여 나왔다.
육자주왕경(六字呪王經) 1권『육자신주왕경(六字神呪王經)』과 동본이다.
선법방편다라니경(善法方便陁羅尼經) 1권
금강비밀선문다라니경(金剛秘密善門陁羅尼經) 1권이상의 두 경은 동본인데 번역을 다르게 하여 나왔다.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 3권
칠불소설신주경(七佛所說神呪經) 4권첫 권에는 『칠불십일보살설대다라니신주경(七佛十一菩薩說大陁羅尼神呪經)』이라 하였다.
살라국경(薩羅國經) 1권혹은 『살라국왕경(薩羅國王經)』이라고도 한다.
반니원경(般泥洹經) 2권혹은 『니원경(泥洹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바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장아함경』 초분(初分) 『유행경(遊行經)』의 이역이다. 여러 장록(藏錄)속에 1권이라 한 것은 오직 이 상권(上卷)을 말한 것이며, 하권(下卷)이 빠졌다.
연본치경(緣本致經) 1권『중아함경』 제1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고래세시경(古來世時經) 1권『중아함경』 제1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범지계수정경(梵志計水淨經) 1권『중아함경』 제2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삼귀오계자심염리공덕경(三歸五戒慈心厭離功德經) 1권『중아함경』 제39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전유경(箭喩經) 1권『중아함경』 제6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식시획오복보경(食施獲五福報經) 1권일명 『시색력경(施色力經)』ㆍ『복덕경(福德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 제24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만원자경(滿願子經) 1권승우의 『실역록』에 진(晋)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편입시켰다. 『잡아함경』 제1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마등녀해형중육사경(摩鄧女解形中六事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마등가사두간경(摩登伽舍頭諫經)』과 같은 동본이다.
아귀보응경(餓鬼報應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목련설지옥아귀인연경(目連說地獄餓鬼因緣經)』이라고도 한다. 『귀문목련경(鬼問目連經)』과 같은 동본이다.
득도제등석장경(得道梯橙錫杖經) 1권표제에는 “『득도제등경(得道梯橙經)』 「석장품(錫杖品)」 제12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바로 『석장경(錫杖經)』이라고도 한다.
승호경(僧護經) 1권혹은 『승호인연경(僧護因緣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인연승호경(因緣僧護經)』이라고도 한다.
호정경(護淨經) 1권
목환자경(木槵子經) 1권혹은 환(患)자를 쓰기도 하고, 또는 이 환(檈)자를 쓰기도 한다.
무상처경(無上處經) 1권
노지장자인연경(盧志長者因緣經) 1권
오왕경(五王經) 1권
사미십계법병위의(沙彌十戒法幷威儀) 1권또한 『사미위의계본(沙彌威儀戒本)』이라고도 한다.
사미니이계문(沙彌尼離戒文) 1권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 1권
오백문사경(五百問事經) 1권
아육왕비유경(阿育王譬喩經) 1권표제에서는 “『천존설아육왕비유경(天尊說阿育王譬喩經)』이다”라고 하였다. 『고경록(古經錄)』에서는 “부처님을 천존(天尊)이다”라고 불렀으므로 곧 불설(佛說)과 같은 말이다.
찬집삼장급잡장전(撰集三藏及雜藏傳) 1권또한 『찬삼장경급잡장경(撰三藏經及雜藏經)』이라고도 한다.
미륵작불시사경(彌勒作佛時事經) 1권『승우록』에는 사(事)자가 없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미륵래시경(彌勒來時經)』과 같은 동본이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도수삼매경(道樹三昧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사아매경(私阿昧經)』과 동본이다. 『지민도록(支敏度錄)』에 보인다.
이상은 38부 45권이다.마지막의 2부 3권은 궐본이고, 그 밖의 모두는 다 같이 현재 경본이 있다.

앞의 36부 42권은 다 같이 『입장록(入藏錄)』에 보이는 경본인데, 그 번역한 사람[譯主]을 알지 못한다. 모든 『실역록(失譯錄)』에서는 “궐본이다”라고 하였으나,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시일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진(晋)나라 말기(末期)에 편집하였으니, 빼거나 없어지[遺漏]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앞의 구실역경(舊失譯經) 2부 3권까지 합하면 총 40부 48권인데, 이는 모두 동진(東晋)의 실원(失源)이라 할 것이다.

6) 전진(前秦) 시대
부진(苻秦)의 부(苻)씨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다.또한 전진(前秦)이라고도 한다. 부건(苻健)시호(諡號)는 명제(明帝)이다 황시(皇始) 원년 신해(辛亥, 351)로부터 부등(符登)시호가 없다 태초(太初) 9년 갑오(甲午, 394)에 이르기까지, 무릇 5군주(君主) 44년을 지나는 동안에 사문 6인이 번역한 경(經)ㆍ율(律)ㆍ논(論) 등은 총 15부 도합 197권이다.
그 중에서 7부 65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8부 132권은 궐본이다. 장방(長房)은 황시(皇始) 원년 갑인(甲寅, 354)으로부터 연초(延初) 원년 정유(丁酉, 397)라 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쓴 연력(年曆)이 같지 않고, 2년씩의 차이가 있다. 그 후 안공(安公)의 『증일아함경』 서문에 준하여 그 갑자(甲子)을 헤아려보면, 『장방록』의 착오다.

사문 담마지(曇摩持)3부 3권. 계본(戒本)과 단문(壇文)
사문 구마라불제(鳩摩羅佛提)1부 2권. 집(集)
사문 승가발징(僧伽跋澄)3부 27권. 논(論)ㆍ집(集)
사문 담마비(曇摩蜱)1부 5권. 경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2부 46권. 논
사문 담마난제(曇摩難提)5부 114권. 경ㆍ논ㆍ집

(1) 담마지(曇摩持)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 1권혹은 『십송대비구계(十誦大比丘戒)』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비구니대계(比丘尼大戒) 1권또한 『십송비구니계(十誦比丘尼戒)』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교수비구니이세단문(敎授比丘尼二歲壇文) 1권혹은 니(尼)자가 없기도 하다. 승순(僧純)이 구자국(龜茲國)에서 범본(梵本)을 얻어와 축불념(竺佛念)이 말을 통역하고, 혜상(慧常)이 받아썼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3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담마지는 혹은 시(侍)라고 하였는데, 중국말로는 법혜(法慧) 또는 법해(法海)라고도 한다. 서역 사람이다. 율장(律藏)을 잘 지녔어, 계경(契經)76)의 미묘한 곳까지 알았다. 부견(苻堅)시호(諡號)는 장렬천왕(莊烈天王)이다. 건원(建元) 3년 정묘(丁卯, 367)로부터 4년 무진(戊辰, 368)에 이르기까지 장안(長安)에서 『십송비구계본』 등 3부를 번역하였다. 축불념(竺佛念)이 말을 통역하고, 혜상(慧常)이 받아썼다.
안공(安公)의 『승계(僧戒)』 서문에는 “축불념이 그 범문을 베끼고, 도현(道賢)이 말을 통역하였으며, 혜상이 받아썼다”라고 하였다. 그 『비구니계(比丘尼戒)』는 『승우록(僧祐錄)』에는 “진(晋)나라 간문제(簡文帝, 371~372) 때에 사문 승순(僧純)이 서역 구이국(拘夷國)에서 범본을 얻어 관중(關中)으로 와서 축불념과 담마지와 혜상으로 하여금 함께 번역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삼가 『장방록』 등의 목록을 살펴보면, 모두 혜상을 그 번역한 이譯主로 삼았고, 담마지와 축불념은 함께 도와 번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진나라 승려秦僧 혜상(慧常)은 원래 천축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며, 혜상이 비록 함께 번역해 내었다 하더라도, 『비구니계(比丘尼戒)』의 범본을 잡은 이는 바로 담마지요, 축불념은 번역할 말을 전한 사람이며, 혜상은 붓으로 받아 쓴 것이다. 그 승계(僧戒)와는 어떻게 구별되느냐 하면, 이것은 별도의 표제(標題)로 되어 있다. 혜상은 본말(本末)의 일을 여러 번 생각하여 교정한 것이므로 분명히 혜상은 번역을 도왔던 사람이요, 담마지가 번역한 주(主)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재한 것이다. 담마지의 기록에는 혜상을 따로 거론하지도 않았다.

(2) 구마라불제(鳩摩羅佛提)
사아함모초해(四阿含暮抄解) 2권또한 『사아함모초경(四阿含暮抄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2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구마라불제는 중국말로는 동각(童覺)이라 한다. 서역 사람이다. 부견(苻堅)의 건원(建元) 18년 임오(壬午, 382) 8월에 업사(鄴寺)에서 『사아함모초해』 1부를 번역하였는데, 그해 겨울 11월에 끝마쳤다. 구마라불제가 범본(梵本)을 잡고 축불념(竺佛念)ㆍ축불호(竺佛護)가 중국[秦] 말로 통역하였으며, 사문 승도(僧導)ㆍ승예(僧叡)ㆍ담구(曇究)가 받아썼다.

(3) 승가발징(僧伽跋澄)
존바수밀보살소집론(尊婆須蜜菩薩所集論) 10권혹은 『바수밀경(婆須蜜經)』이라고도 하는데, 혹은 12권, 또는 14권으로 되어 있다. 건원(建元) 20년(384) 3월 5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7월 13일에 끝마쳤다. 승가발징과 담마난제(曇摩難提)와 승가제바(僧伽提婆) 3인이 범본을 잡고, 축불념이 통역하여 전하였으며, 혜숭(慧嵩)이 받아썼다. 『승우록』에 보인다.
비바사론(鞞婆沙論) 14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또한 『비바사아비담(鞞婆沙阿毗曇)』, 또는 『광설(廣說)』이라고도 한다. 혹은 15권, 또는 19권으로 되어 있다. 건원 19년(383) 4월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8월 말에 끝마쳤다. 담마난제가 범문을 기록하고, 불도라찰(佛圖羅刹)이 번역하여 전하였으며, 민지(敏智)가 받아썼다. 『승우록』에 보인다.
승가라찰소집경(僧伽羅刹所集經) 3권혹은 『승가라찰집(僧伽羅刹集)』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건원 20년(384)에 시작하여 11월 30일에 마쳤다. 축불념이 번역의 말을 전하고, 혜숭(慧嵩)이 받아썼다. 『승우록』에서 보인다. 장안(長安) 석양사(石羊寺)에서 번역하였다. 또한 불호(佛護)가 번역의 말을 전하였다고도 한다.
이상은 3부 27권이다.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승가발징은 혹은 발등(跋橙)이라고도 하며, 중국말로는 중현(衆現)이라고도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의지가 강하고 굳세[毅然]면서도 깊고 아름다운 도량이 있었다. 이름난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닦고 익혀 자세하고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여러 전적(典籍)을 널리 보았고, 특히 여러 경전을 잘 암송하였으며, 『비바사론(毗婆沙論)』은 그 미묘한 의미를 꿰뚫었다.『비바사론(毗婆沙論)』은 곧 『비바사론(鞞婆沙論)』이니, 이는 『대비바사론(大毗婆沙論)』이 아니다. 항상 여러 곳을 돌아다니겠다는 뜻을 품고, 풍속을 관찰하며 널리 교화하였다.
부견의 건원(建元) 말엽(384)에 관중(關中)으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대승의 경전은 널리 유포되지 못하였고, 선수(禪數)의 학문이 매우 성하였는데, 그가 장안(長安)에 이르게 되자, 모두가 그를 법장(法匠)77)이라 일컬었다.
부견의 비서랑(秘書郎) 조정(趙政)은 자(字)는 문업(文業)이었다. 그는 학식이 넓고 재주가 있으면서 불교의 큰 법을 숭앙하였다. 일찍이 외국에서는 『비바사론』을 존숭하여 익히며, 승가발징이 이를 외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에 4사(四事)78)로써 예배 공양하면서 범문(梵文)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승가발징은 건원 17년 신사(辛巳, 381)로부터 21년 을유(乙酉, 385)에 이르기까지 명성과 덕망이 있는 법사 석도안(釋道安) 등과 함께 『존바수밀보살소집론』 등 3부를 번역하였는데, 양주(涼州) 사문 축불념(竺佛念)과 외국 사문 불도라찰(佛圖羅刹)이 번역하여 전하였고, 사문 민지(敏智)ㆍ혜숭(慧嵩)과 비서랑 조문업(趙文業)이 받아썼다. 안공(安公)과 법화(法和)가 마주하여 함께 교정하였다. 승가발징은 계덕(戒德 : 계를 지니는 공덕)이 바르고 높았으며, 마음에 잡념이나 망상이 없이 세속을 벗어났다. 관중(關中)의 승려들은 그를 모범으로 삼고 본받았다. 그 후에 어디서 입적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불도라찰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덕업(德業)이 순수하고, 경전을 두루 보아 해박하였으며, 오랫동안 중국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중국말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가 범문(梵文)을 널리 번역하였으므로 그때 세상에서 크게 칭찬 받았다.『승우록』 등의 여러 목록에서는 모두 “『비바사론(鞞婆沙論)』을 승가제바(僧伽提婆)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안공이 지은 논의 서문을 준하면, “승가발징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제 그 논의 서문에 의거해 바로 잡는다. 『승우록』 등의 여러 목록에서는 다시 “승가발징은 『잡아비담비바사론(雜阿毗曇毗婆沙論)』 14권을 지었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비바사론(鞞婆沙論)』이 이것이다.

(4) 담마비(曇摩蜱)
마하반야바라밀초경(摩訶般若波羅蜜鈔經) 5권혹은 초(鈔)자가 없기도 한다. 혹은 7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반라야(般羅若)』, 또는 『수보리품(須菩提品)』, 또는 『장안품(長安品)』이라고도 한다. 차례대로 여섯 번째로 번역되어 나왔다. 『도행소품명도경(道行小品明度經)』과 같은 동본이다. 승예(僧叡)의 『이진록(二秦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5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담마비는 중국말로는 법애(法愛)라고 한다. 인도 사람이다. 인물됨이 밝고 민첩하며, 중생을 널리 깨우쳐 주는 일에 뜻을 두었다. 부견(苻堅) 건원(建元) 18년 임오(壬午, 382)에 『마하반야바라밀초경』 1부를 번역하였다. 불호(佛護)불호는 곧 불도라찰(佛度羅刹)이다가 번역하여 전하고, 혜진(慧進)이 붓으로 받아썼으며, 안공(安公)이 교정하였다. 『공전(共傳)』에는 “『대품방광광찬(大品放光光讚)』과 같은 경본이다”라고 한 것은 의혹이 있을까 두려워 찾아보아도 자세하지 않다.

(5) 승가제바(僧伽提婆)
아비담팔건도론(阿毗曇八揵度論) 30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한다. 또는 20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가전연아비담(迦旃延阿毗曇)』, 또는 『아비담경팔건도(阿毗曇經八揵度)』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발지론(發智論)』과는 동본이다. 건원 19년(383) 4월 20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10월 20일에 끝마쳤다. 『승우록』에 보인다.
아비담심(阿毗曇心) 16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13권으로 되어 있다. 건원 말년(384)에 낙양(洛陽)에서 번역되었다. 승예의 『이진록(二秦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46권이다.앞의 1부 30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6권은 궐본이다.

사문 승가제바혹은 제화(提和), 또는 (僧迦楴婆)라고도 하는데, 대개 이 말들은 범어의 음을 중국 음으로 말했을 뿐이다는 중국말로는 중천(衆天)이라 한다. 계빈국 사람이다. 성(姓)은 구담(瞿曇)씨이다. 부견 건원(建元) 19년 계미(癸未, 383)에 장안(長安)에 왔다. 사문 법화(法和)가 청하여 번역을 하게 하였다. 19년(383)에서부터 건원 말년(384)에 이르기까지 『아비담팔건도론』 2부를 번역하여 내었다.그의 『비바사론(鞞婆沙論)』 14권은 안공(安公)의 서문에 준거하면, 이 논은 승가발징(僧伽跋澄)이 번역한 것이므로, 이제 여기에서는 삭제한다.
양주(涼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하여 전하고, 혜력(慧力)과 승무(僧茂)가 붓으로 받아썼으며, 법화(法和)가 그 뜻을 정리하였고, 안공(安公)이 서문을 지었다.
뒷날 진(晋)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6년(391)에 여산(廬山)에서 있다가, 건강(建康)으로 가서 다시 경론(經論)을 번역하였다. 그 자세한 것은 『진록(晋錄)』에 나타난 바와 같다.

(6) 담마난제(曇摩難提)
중아함경(中阿鋡經) 59권건원(建元) 20년(384)에 나왔다. 이는 맨 첫 번째의 번역이다. 축불념(竺佛念)이 받아썼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증일아함경(增壹阿鋡經) 50권첫 번째의 번역이다. 건원 20년(384) 갑신(甲申) 여름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389) 봄까지 40권을 마쳤다. 축불념이 번역하여 전하고, 담숭(曇嵩)이 받아썼다. 안공(安公)이 지은 경의 서문에서는 “『승예록(僧叡錄)』ㆍ『승우록(僧祐錄)』ㆍ『보창록(寶唱錄)』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고 한 것이 보인다. 승우가 “33권 및 24권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착오일 것이다.
삼법도론(三法度論)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삼법도(三法度)』라고도 하며,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진(晋)나라 때의 승가제바(僧伽提婆)가 번역하여 낸 것과는 조금 다르다. 『장방록』에 보인다.
승가라찰집(僧伽羅刹集) 2권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700년 뒤에 승가라찰(僧伽羅刹)이 지었는데,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아육왕식괴목인연경(阿育王息壞目因緣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요진(姚秦)의 건초(建初) 6년 신묘(辛卯, 391)에 안정성(安定城)에서 상서령(尙書令) 요민(姚旻)을 위하여 2월 18일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25일에 마쳤다.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하여 전하고, 겸하여 서문도 지었다. 『이진록(二秦錄)』에 보인다. 이 경은 마땅히 후진(後秦)에 포함시켜야 하는데, 다수의 의견에 따라 여기에 덧붙인다.
이상은 5부 114권이다.앞의 4부 113권은 궐본이고, 뒤의 1부 1권만이 현재 있다.

사문 담마난제는 중국말로는 법희(法喜)라고도 한다. 도거륵국(兜佉勒國) 사람이다. 어려서 세속을 떠났으며, 총명과 지혜가 일찍 갖추어졌다. 경전을 연구하고 외우며, 전일하고 정밀하게 공부하고, 삼장(三藏)을 두루 보았다. 『중아함경』과 『증일아함경』 두 아함을 암송하였으며, 널리 알고 두루 들어 정리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추앙하고 탄복하였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보았고,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항상 말하였다.
“홍법(弘法)의 근본 요체는 아직 듣지 못한 곳에 베풀어야 한다.”
그 때문에 멀리 유사(流沙)79)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배를 품고 동쪽으로 와서, 부견의 건원 20년(384)에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담마난제는 학업이 이미 뛰어났고 도에 대한 명성이 매우 성하였으므로, 부견은 깊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면서 후하게 공양을 베풀었다.
이보다 앞서 중국에는 여러 경 중에 아직 4아함(四阿含)이 없었는데, 부견의 시신(侍臣)인 무위태수(武威太守) 조정(趙政)이 깊이 법장(法藏)에 뜻을 두어, 이에 안공(安公)과 함께 경을 번역하여 낼 것을 청하였다. 조정은 장안성(長安城) 안에서 의학승(義學僧)들을 모아 두 아함의 범본(梵本)을 베껴내고서야, 비로소 번역을 시작하였다. 축불념이 번역하여 전하고, 혜숭(慧嵩)이 받아썼다.
담마난제는 부견 건원 20년 갑신(甲申, 384)으로부터 요장(姚萇) 건초(建初) 6년 신묘(辛卯, 391)에 이르기까지 『중아함경(中阿含經)』 등 5부를 번역하였다. 담마난제는 그 후에 서역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생을 마친 곳은 알 수 없다.開元釋教錄卷第三 笙庚午歲西崇福寺沙門智昇撰摠括群經錄上之三東晉司馬氏都建康 亦云南晉從元帝建武元年丁丑至恭帝元熙二年庚申凡一十一帝一百四年緇素十六人所譯經幷新舊集失譯諸經摠一百六十八部四百六十八卷 八十五部三百三十六卷見在八十三部一百三十二卷闕本東晉沙門帛尸梨蜜多羅 三部一十四卷經沙門支道根二部 七卷經沙門竺曇無蘭六十一 部六十三卷經戒集沙門瞿曇僧伽提婆 五部一百一十八卷經論教授法沙門迦留陁伽一部一卷賢聖集沙門康道和一部 三卷經沙門佛陁跋陁羅一十三部 一百二十五卷經沙門曇摩一部 二卷律要沙門卑摩羅叉 二部 五卷律雜事沙門釋法顯 七部 二十六卷經戒論集沙門祇多蜜 三十三部 四十五卷經居士竺難提 二部 五卷經沙門竺法力 一部 一卷經沙門釋嵩公 三部 三卷經集沙門釋退公 一部 一卷經沙門釋法勇 一部 一卷經新舊諸失譯經 四十部 四十八卷二部 三卷舊集三十八部 四十五卷新附大灌頂經十二卷 或無大字房錄云九卷未詳房云見雜錄大孔雀王神呪經一卷 見竺道祖錄及僧祐錄初出孔雀王雜神呪經一卷 見竺道祖錄及僧祐錄第二出右三部一十四卷 初一部十二卷見在後二部二卷闕本沙門帛尸梨蜜多羅晉言吉友西域人國王之子當承繼世而以國讓弟闇軌太伯旣而悟心天啓遂爲沙門蜜天姿高朗風神超邁直爾對之便卓出於物況其聰辯言悟者乎西晉永嘉中始到此土仍過江左止建初寺丞相王導一見而奇之以爲吾之徒也由是名顯太尉庾元規光祿周伯仁太常謝幼璵廷尉桓茂倫皆一代名士見之終日累歎披襟致契導嘗詣蜜蜜解帶偃伏悟言神解尚書令卞望之亦與蜜致善須臾望之至蜜乃斂襟飾容端坐對之有問其故蜜曰王公風道期人卞令軌度格物故其然耳諸公於是歎其精神灑屬皆得其所桓廷尉嘗欲爲蜜作目久之未得有云尸梨蜜可謂卓朗於是桓乃咨嗟絕歎以爲摽題之極大將軍王處沖時在南夏聞王周諸公皆器重蜜疑以爲失鑑及自見蜜乃欣振奔至一面盡虔王公嘗謂蜜曰外國有君一人而已耳蜜笑而答曰若使我如諸君今日豈得在此當時以爲佳對蜜性高簡不學晉語每與諸公言論雖因傳譯而神領意解盡其傳致以爲自然縱拔非常情所測也蜜善持呪術所向皆驗時人呼爲高座法師於元帝代譯灌頂等經三部又授弟子覓歷高聲梵唄傳響迄今年八十餘咸康中卒諸公聞之痛惜流涕蜜常在石子岡東行頭陁旣卒因葬于此成帝懷其風爲樹剎塚所後有關右沙門來遊建康迺於塚處起寺陳郡謝琨贊成其業追旌往事仍曰高座寺也阿閦佛剎諸菩薩學成品經二卷 太康年出第二譯與漢支讖譯者大同小異見竺道祖晉世雜錄方等法華經五卷 咸康元年譯見竺道祖晉世雜錄第四出與法護正法華等同本右二部七卷其本竝闕沙門支道根履味遊方懷道利物以成帝咸康元年乙未譯阿閦佛剎等經二部 長房等錄竝云阿閦佛經太康年譯其太康年在西晉武帝代與咸康相去向六十年同是一人兩朝出經者恐時太懸也此應傳寫差誤多是咸康耳採蓮違王上佛授決號妙華經一卷亦直云採蓮違王經第二出與阿闍世王受決經同本陁鄰尼鉢經一卷 亦云陁鄰鉢呪經第二出與持句神呪經等同本房錄陁鄰鉢經外更存持句神呪經者非也摩尼羅亶經一卷 亦云摩尼羅亶神呪經玄師颰陁所說神呪經一卷 錄云幻師無所說字或作跋字亦云波陁古錄云幻王颰陁經寂志果經一卷 出長阿含第十七卷異譯鐵城泥犂經一卷 出中阿含第十二卷與五天使經同本阿耨風經一卷 晉言依次出中阿含第二十七卷異譯梵志頞羅延問種尊經一卷 亦云頞波羅延出中阿含第三十七卷異譯泥犂經一卷 或云中阿含泥犂經出中阿含第五十三卷異譯戒德香經一卷 或云戒德經出增一阿含第十三卷異譯四泥黎經一卷 或云四大泥犂房云別錄載祐云失譯出增一阿含第四十八卷異譯國王不犂先尼十夢經一卷 或作先泥出增一阿含第五十一卷異譯水沫所漂經一卷 一名河中大聚沫經一名聚沫譬經與五陰譬喩經同本出雜阿含經第十卷異譯玉耶經一卷 一名長者詣佛說子婦無敬經或云玉耶女經第二出與阿遬達經等同本五苦章句經一卷 初出一名諸天五苦經一名五道章句經一名淨除罪蓋娛樂佛法經自愛經一卷 或云自愛不自愛經房云見舊錄中心經一卷 或云中心正行經舊錄云大中心經亦云小中心經房錄云出六度集今撿無見正經一卷 一名生死變識經大魚事經一卷阿難七夢經一卷 或直云七夢經呵雕阿那含經一卷 一名荷雕或作苛字新歲經一卷比丘聽施經一卷 一名聽施比丘經佛般泥洹摩訶迦葉赴佛經一卷亦云迦葉赴佛般涅槃經上見存已下闕犢牛經一卷 一云犢子經第三出與乳光經等同本孔雀王呪經一 卷第三出與吉友所譯者同本七佛所結麻油述呪經一卷 祐失譯錄重載兩本一云異本大神母結誓呪經一卷伊洹法願神呪經一卷解日厄神呪經一卷六神名神呪經一卷檀持羅麻油述神呪經一卷麻油述呪經一卷摩尼羅亶神呪按摩經一卷醫王惟樓延神呪經一卷 或云阿難所問醫 王惟樓延神呪經龍王呪水浴經一卷十八龍王神呪經一卷請雨呪經一卷 止雨呪經一卷嚫水經一卷幻師阿夷鄒神呪經一卷呪水經一卷  藥呪經一卷呪毒經一卷 呪時氣病經一卷呪小兒經一卷呪齒經一卷 祐失譯錄更載一本名與此同題云異本一云虫齒二云齲齒呪牙痛經一卷 祐云失譯錄更載一本名與此 同題云異本或作齒痛呪眼痛經一卷五眼文經一卷 今疑是聶道眞所出求五眼法異名離欲優婆塞優婆夷戒文一卷 亦云具行二 十二戒文罪業報應經一卷 與罪業應報教化地獄經同本第二出八師經一卷 第二出蓱沙王五願經一卷 一名弗沙迦王經第二出義足經二卷 房云見吳錄亦云異出第二出十善十惡經一卷 第二譯吳錄云異出安公云出阿毘曇治禪法經一卷梵天策數經一卷 舊錄云諸天事經諸天地經一卷十誦比丘戒本一卷 太元六年合僧純曇摩持竺僧舒三家本以爲此一卷見寶唱錄當第二出三百六十戒三部合異二卷 序加大比丘字太元六年六月二十日於謝鎭西寺合僧詳重挍見舊錄及寶唱錄右六十一部六十三卷 佛般泥洹上二十四部二十四卷見在犢牛經下三十七部三十九卷闕本沙門竺曇無蘭晉云法正西域人也以孝武帝太元六年辛巳至太元二十年乙未於楊都謝鎭西寺譯採蓮違王等經六十一部見長房錄 又長房等錄更有四十八經亦云法正所譯今以竝是別生抄經或是疑僞故竝刪之如後所述救護身命經 亦云救護身命濟人病苦厄經周錄編入正經舊錄云僞 今依舊編諸天問如來警戒不可思議經見水世界經 已上二經竝出大集龍王結願五龍神呪經大將軍神呪經 上二經出灌頂無吾我經出普 超經 彌蘭經或作彌連亦云彌蓮摩天國王經 阿難念彌經彌蘭等三經竝出 六度集 賢劫千佛名經出賢劫經序云賢劫經說二千一百諸度無極以枸樓孫佛爲首此千佛名有別譯本拘那提佛以爲初首三十七品經 安公云出律經僧祐錄云晉太元二十一年歲在丙申六月在謝鎭西寺撰出三十三天園觀經比丘成就五法入地獄經學人亂意經 上三經出增一阿含佛爲比丘說大熱地獄經釋提桓因詣目連放光經目連見大身衆生燃鐵纏身經見一衆生擧體糞穢塗身經衆生頂有鐵磨盛火熾然經羅婆鳥爲鷹所捉經十法成就惡業入地獄經蛇行法經比丘浴遇天子放光經天於修羅欲鬪戰經天帝釋受戒經比丘問佛釋提桓因因緣經四天王按行世閒經佛見梵天頂經帝釋慈心戰勝經天神禁寶經阿育王供養道場樹經勸行有證經 戒相應法經禪思滿足經 佛爲比丘說下二十經竝出雜阿含野鷄經 鼈獼猴經蠱狐烏經 或作鳥字弟子命過經 驢駝經拘薩羅國烏王經 或無羅字孔雀經夫婦經 野鷄等八經竝出生經中群牛千頭經 集修行士經暴象經 群牛等三經竝出出曜經地獄衆生相害經 出修行道地經赤嘴烏喩經阿難多洹羅云母經 赤嘴烏等二經雜譬喩抄中阿含經六十卷 第二出或五十八卷隆安元年十一月十日於東亭寺出二年六月二十五日訖與曇摩難提出者同本沙門道慈筆受見道祖錄增壹阿含經五十一卷 第二出隆安元年正月出與難提本小異竺道祖筆受或四十二或三十三無定亦有六十卷成者見道祖及寶唱錄阿毘曇心論四卷 或云阿毘曇心無論字尊者法勝造太元十六年在廬山爲慧遠法師譯出道慈筆受見僧祐錄三法度論二卷 太元十六年在廬山爲遠法師出第二譯與難提出者大同小異或三卷別錄云一卷或直云三法度無論字或云經論見僧祐錄教授比丘尼法一卷 房云見別錄亦云在廬山出右五部一百一十八卷 前四部一百一十七卷本在後一部一卷本闕沙門瞿曇僧伽提婆晉言衆天或云提和音訛故也罽賓國人入道修學遠訪明師學通三藏多所誦持尤善阿毘曇心洞其纖旨常誦三法度晝夜嗟味以爲道之府也爲人儁朗有深鑑儀止溫恭務在誨人恂恂不怠苻秦建元中來入長安宣流法化譯論二部備於秦錄後以晉孝武帝世太元十六年辛卯遊化江左先是廬山慧遠法師翹勤妙典廣集經藏虛心側席延望遠賓聞其至止卽請入廬嶽卽以其年請出阿毘曇心及三法度等提婆乃於般若臺手執梵文口宣晉語去華存實務盡義本今之所傳蓋其文也至安帝隆安元年丁酉來遊建康晉朝王公及風流名士莫不造席致敬尚書令衛軍東亭侯琅瑘王珣准高僧傳僧祐錄長房錄等竝云王珣中含經序乃云王元琳元琳多是珣之字也雅有信慧荷持正法建立精舍廣招學衆提婆旣至珣卽延請仍於其舍講阿毘曇名僧畢集提婆宗致旣精詞旨明析振發義奧衆咸悅悟其冬珣集義學沙門釋慧持等四十餘人更請提婆於其寺譯中增二阿含罽賓沙門僧#伽羅叉執梵本提婆翻爲晉言至來夏方訖豫州沙門道慈筆受吳國李寶唐化共書提婆於廬山建康二處共出五部一百一十八卷提婆歷遊華戎備悉風俗從容機警善於談笑其道化聲譽莫不聞焉後不知所終十二遊經一卷 第二出與畺梁譯者少異見竺道祖晉世雜錄及寶唱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迦留陁伽晉言時水西域人弘喩有方懷道遊國以孝武帝太元十七年壬辰譯十二遊經一部益意經三卷 第二出見竺道祖晉世雜錄朱士行漢錄云二卷不顯譯人右一部三卷本闕沙門康道和戒德有儀軌範群物以孝武帝太元二十一年景申譯益意經一部大方廣佛華嚴經六十卷 初出元五十卷後人分爲六十沙門支法領從于闐得梵本來義熙十四年三月十日於道場寺出元熙二年六月十日訖法業筆受見祖祐二錄出生無量門持經一卷 或云新微密持經於廬山譯第五出與支謙無量門微密持經等同本見祖祐二錄祐房等錄別存新微密持經誤也大方等如來藏經一卷 或直云如來藏經第三出元熙二年於道場寺譯見竺道祖晉世雜錄及僧祐錄觀佛三昧海經十卷 或云觀佛三昧經或八卷見竺道祖晉世錄亦見僧祐錄亦出宋世摩訶僧祇律四十卷 或云三十卷梵本是法顯於摩竭提國將來義熙十二年十一月於鬪場寺共法顯出見竺道祖錄祐在顯錄據共譯故耳僧祇比丘戒本一卷 亦云摩訶僧祇戒本第二出於道場寺譯見寶唱錄祐在法顯錄中祐與覺賢共出互載皆得達摩多羅禪經二卷 一名庾伽遮羅浮迷譯言修行道地於廬山出一名不淨觀經亦名修行方便禪經祐云禪經修行方便凡十七品見僧祐錄文殊師利發願經一卷 或加偈字元熙二年於鬪場寺出見僧祐寶唱二錄經後記云外國四部衆禮佛時多誦此經以發願求佛道新無量壽經二卷 宋永初二年於道場寺出見僧祐寶唱二錄第八譯與世高支讖支謙僧鎧等所出同本菩薩本業經一卷 亦直云本業經是華嚴淨行品見僧祐長房二錄大周入藏有今闕且復存之淨六波羅蜜經一卷 見僧祐長房二錄方便心論一卷 共法業出見高僧傳初出過去因果經四卷 房云見別錄第五譯右一十三部一百二十五卷 文殊發願上八部一百一十六卷見在新無量壽下五部九卷闕本沙門佛陁跋陁羅晉言覺賢本姓釋氏迦維羅衛國人甘露飯王之苗裔也祖父達摩提婆 此云法天嘗商旅於北天竺因而居焉父達摩修利耶此云法日少亡賢三歲孤與母居五年復喪母爲外氏所養從祖鳩摩利聞其聰敏兼悼其孤露乃迎還度爲沙彌至年十七與同學數人俱以習誦爲業衆皆一月賢一日誦畢其師歎曰賢一日敵三十夫也及受具戒修業精勤博學群經多所通達少以禪律馳名嘗與同學僧伽達多共遊罽賓同處積載達多雖服其才明而未測其人也後於密室閉戶坐禪忽見賢至驚問何來答云暫至兜率致敬彌勒言訖便隱達多知是聖人未測深淺後屢見賢神變乃敬心祈問方知得不還果常欲遊方弘化備觀風俗會有秦僧智嚴西至罽賓睹法衆淸僧乃慨然東顧曰我之同輩斯有道志而不遇眞匠發悟莫由卽諮訊#國衆孰能流化東土僉云有佛陁跋陁者出生天竺那呵梨城族姓相承世遵道學其童齔出家已通解經論少受業於大禪師佛大先先時亦在罽賓乃謂嚴曰可以振維僧徒#宣授禪法者佛陁跋陁其人也嚴旣要請苦至賢遂愍而許焉於是捨衆辭師裹糧東逝涉驟三載緜歷寒暑旣度蔥嶺路經六國國主矜其遠化竝傾懷資俸至交阯乃附舶循海而行經一島下賢以手指山曰可止於此舶主曰客行惜日調風難遇不可停也行二百餘里忽風轉吹舶還向島下衆人方悟其神咸師事之聽其進止後遇便風同侶皆發賢曰不可動舶主乃止旣而有先發者一時覆敗後於闇夜之中忽令衆舶俱發無肯從者賢自起收纜唯一舶獨發俄爾賊至留者悉被抄害頃之至靑州東萊郡聞鳩摩羅什在長安卽往從之什大欣悅共論法相振發玄微多所悟益因謂什曰君所釋不出人意而致高名何耶什曰吾年老故耳何必能稱美談什每有疑義必共諮決秦主姚興專志經法供養三千餘僧竝往來宮闕盛修人事唯賢守靜不與衆同後語弟子云我昨見本鄕有五舶俱發旣而弟子傳告外人關中舊僧咸以爲顯異惑衆又賢在長安大弘禪業四方樂靜者竝聞風而至但染學有淺深得法有濃淡澆僞之徒因而詭滑有一弟子因少觀行自言得阿那含果賢未卽撿問遂致流言大被謗讟將有不測之禍於是徒衆或藏名潛去或踰牆夜走半日之中衆散殆盡賢乃夷然初不介意舊僧僧䂮道恒等謂賢曰佛尚不聽說已所得法先言五舶將至虛而無實又門徒誑惑互起同異旣於律有違理不同止宜可時去勿得久留賢曰我身若流萍去留甚易但恨懷抱未申以爲慨然耳於是與弟子慧觀等四十餘人俱發神志從容初無異色識眞者咸共歎惜白黑送者數千人姚興聞去悵恨乃謂道恒曰佛賢沙門挾道來遊#欲宣遺教緘言未吐良用深慨豈可以一言之咎令萬夫無導因勅令追之賢謂使曰誠知恩旨無預聞命於是率侶宵征南指廬嶽沙門惠遠素欽風德乃遣使入關致書祈請後至廬嶽忻然如舊遠以賢之被擯過由門人若懸記五舶止說在同意亦於律無犯乃遣弟子曇邕致書姚主及關中衆僧解其擯事遠乃請出禪數諸經賢志在遊化居無求安停山歲許復西適江陵遇外國舶主旣而訊訪果是天竺五舶先所見者也傾境士庶競來禮事其有奉施悉皆不受持鉢分衛不問豪賤陳郡袁豹爲宋武帝太尉長史宋武南討劉敦豹隨府屆于江陵賢將弟子慧觀詣豹乞食豹素不敬信待之甚薄未飽辭退豹曰似未足且復小留賢曰檀越施心有限故今所設已罄豹卽呼左右益飯飯果盡#豹大慚愧旣而問慧觀曰此沙門何如人觀曰德量高邈非凡所測豹深歎異以啓太尉太尉請與相見甚崇敬之資供備至俄而太尉還都請與俱歸安止道場寺賢儀軌率素不同華俗而志韻淸遠雅有淵致楊都法師僧弼#與名德沙門寶林書曰鬪場禪師甚有大心便是天竺王何風流人也其見稱如此先是沙門支法領於于闐國得華嚴梵本三萬六千偈未有宣譯到義熙十四年吳郡內史孟顗右衛將軍褚叔度卽請賢爲譯匠乃手執梵文共沙門法業慧嚴慧義等百有餘人於道場寺譯出詮定文旨會通華戎妙得經體故道場寺猶有華嚴堂焉又沙門法顯於天竺所得僧祇梵本復請賢譯賢從安帝隆安二年戊戌訖宋永初二年辛酉於楊都廬山二處譯華嚴等經摠一十三部竝究其幽旨妙盡文意賢以宋元嘉六年泥洹春秋七十有一矣 又僧祐長房二錄復云賢出新微密持經卽出生無量門持經是不合雙載對彼支謙先譯故加新字又有菩薩十住及本業經此之二經竝是華嚴別品覺賢旣譯大部不合別出此經其本業一經周入藏錄有未見其本且復存之十住一經刪之不立也雜問律事二卷 初出見長房錄右一部二卷本闕沙門曇摩晉翻云法善於律學以安帝隆安四年庚子三月二日於楊都尚書令王法度精舍沙門釋僧遵等二十餘德請譯雜問律事序具卷首明佛法僧物互相交涉分齊差殊甚要須善防護十誦律毘尼序三卷 亦云十誦律序今合入十誦末後三卷是房云毘尼誦注云是十誦後善誦非也其善誦有四卷是十誦中第十誦也見二秦錄雜問律事二卷 衆律要用第二出見二秦錄右二部五卷 前毘尼序三卷見在 後雜問事二卷本闕沙門卑摩羅叉晉云無垢眼罽賓國人沈靜有志幼出家履道苦節成務爲人眼靑時亦號爲靑眼律師先在龜茲弘闡律藏四方學者競往師之鳩摩羅什時亦預焉及龜茲陷沒乃避地烏纏#頃之聞什在長安大弘經藏叉欲使毘尼勝品復洽東國於是杖錫流沙冒險東入以姚秦弘始八年達自關中什以師禮敬待叉亦以遠遇欣然及羅什棄世叉以安帝義熙年中乃出遊關左逗于壽春止石㵎寺律徒雲聚盛闡毘尼羅什所譯十誦五十八卷最後一誦謂明受戒法及諸成善法事逐其義要名爲善誦叉後改善誦爲毘尼誦故猶二名存焉復出三卷律序置之於後摠成六十一卷高僧傳及長房錄乃云開前五十八卷爲六十一卷者小非詳審也其毘尼序三卷或有近代經本編在第九誦後第十誦前卷當第五十五六七者非也今撿古十誦本乃在第十誦後卷當第五十九至六十一今者依古本爲正頃之南適江陵於辛寺夏坐開講十誦旣通晉言善相領納無作妙本大闡當時析文求理者其聚如林明條知禁者數亦殷矣律藏大弘叉之力也後出雜問律事二卷道場慧觀筆受 高僧傳云道場慧觀深括宗旨記其所制內禁輕重撰爲二卷送還京師僧尼披尋競相傳寫時闇者諺曰卑羅鄙語慧觀才錄都人繕寫紙貴如玉今謂雜問律事乃是道場慧觀於教有疑隨事諮問卑摩爲決聞便錄之撰成二卷流行於世卽非別有梵本卑摩譯之其曇摩出者亦卽此是錄家誤載也又養德好閑棄諠離俗其年冬復還壽春石㵎卒於寺焉春秋七十有七大般泥洹經六卷 經記云方等大般泥洹經或十卷第四譯義熙十二年十月一日於道場寺共覺賢出寶雲筆受至十四年正月二日訖見道祖僧祐二錄大般涅槃經三卷 或二卷是長阿含初分遊行經異譯群錄竝云顯出方等泥洹者非卽前大泥洹經加方等字此小乘涅槃文似顯譯故以此替之雜藏經一卷 第二出與鬼問目連餓鬼報應經等同本見僧祐寶唱二錄僧祇比丘尼戒本一卷 亦云比丘尼波羅提木叉僧祇戒本共覺賢譯見長房錄歷遊天竺記傳一卷 亦云法顯傳法顯自撰述往來天竺事見長房錄雜阿毘曇心十三卷 第二出與苻秦僧伽提婆等所出同本見僧祐錄房云顯與覺賢共譯佛遊天竺記一卷 見僧祐錄右七部二十六卷 前五部一十二卷見在後二部一十四卷闕本沙門釋法顯本姓龔平陽武陽人也顯有三兄齠年次喪其父恐懼及顯數歲便放出家居數年病篤欲死因送還寺信宿便差不肯復歸母欲見之不能得爲立小屋於門外以擬去來十歲遭父憂叔父以其母寡獨不立逼使還俗顯曰本不以有父而出家也正欲遠塵離俗故入道耳叔父善其言#乃止頃之母喪至性過人葬事旣畢仍卽還寺嘗與同學數十人於田中刈稻時有飢賊欲奪其穀諸沙彌悉奔走唯顯獨留語賊曰若欲須穀隨意所取但君等昔不布施故此生飢貧今復奪人恐來世彌甚貧道預爲君憂故相語耳言訖卽還賊棄穀而去衆僧數百人莫不歎服及受大戒志行明潔儀軌整肅常慨經律舛闕誓志尋求以安帝隆安三年與同學慧景道整慧應慧嵬等發自長安西度沙河上無飛鳥下無走獸四顧茫茫莫測所之唯視日以准東西人骨以標行路耳屢有熱風惡鬼遇之必死顯任緣委命直過險難有頃至蔥嶺#嶺冬夏積雪有惡龍吐毒風雨沙礫山路艱危壁立千仞昔有人鑿石通路傍施梯道凡度七百餘梯又躡懸絙過河數十餘處皆漢時張騫甘父所不至也次度小雪山遇寒風暴起慧景噤戰不能前語顯云吾其死矣卿可時去勿得俱殞言絕而卒顯撫之泣曰本圖不果命也奈何復自力孤行遂過山險凡所經歷三十餘國至北天竺次往中國未至王舍城三十餘里有一寺逼暮仍停明旦顯欲詣耆闍崛山寺僧諫曰路甚艱險且多黑師子亟經噉人何由可至顯曰遠涉數萬誓到靈鷲身命不期出息非保豈可使積年之誠旣至而廢耶雖有險難吾不懼也衆莫能止乃遣兩僧送之顯旣至山中日將曛夕遂欲停宿兩僧危懼捨之而還顯獨留山中燒香禮拜翹感舊迹如睹聖儀至夜有三黑師子來蹲顯前舐脣搖尾顯誦經不輟一心念佛師子乃低頭下尾伏顯足前顯以手摩之呪曰汝若欲相害待我誦竟若見試者可便退去師子良久乃去明#晨還反路窮幽深榛木荒梗禽獸交撗正有一徑通行而已未至里餘忽逢一道人年可九十容服麤素而神氣儁遠顯雖覺其韻高而不悟是神人須臾進前逢一年少道人顯問曰向耆年是誰耶答曰頭陁弟子大迦葉也顯方惋慨良久旣至山前有一大石撗塞室口遂不得入顯乃流涕致敬而去今謂顯所陟者是鷄足山大迦葉波入寂之所非佛舊居處鷲峯山也 又至迦施國精舍裏有白耳龍每與衆僧約令國內豐熟皆有信效沙門爲起龍舍幷設福食每至夏坐訖日龍輒化作一小蛇兩耳悉白衆咸識是龍以銅盂盛酪置於其中從上坐至下行之似若問訊遍乃化去年輒一出顯亦親見此龍後卻至中天竺於摩竭提巴連弗邑阿育王塔南天王寺得摩訶僧祇律又得薩婆多律抄雜阿毘曇心綖經方等泥洹等經此方等泥洹卽六卷大般泥洹經之梵本也准經後記名爲方等大般泥洹經非謂三卷方等泥洹也顯留三年學梵書梵語躬自書寫於是持經像寄附商客到師子國顯同旅十餘或留或亡顧影唯己常懷悲慨忽於玉像前見商人以晉地一白團扇供養不覺悽然下淚停二年復得彌沙塞律長雜二阿含及雜藏本竝漢土所無其師子國中有佛齒每年三月彼之國王預前十日莊嚴白象遣一貴重辯說智臣著王衣裳象上擊鼓大聲唱言如來在世四十五年說法度人無量億數衆生緣盡乃般泥洹自爾已來一千四百九十七載世閒長昏衆生可愍卻後十日佛齒當出無畏精舍可辦香花各來供養正當晉義熙元年計從義熙元年太歲乙巳至今開元十八年歲次庚午便成一千八百二十二載矣旣而附商人大舶循海東還舶有二百許人値大暴風舶壞水入衆人惶怖卽取雜物棄之顯恐商人棄其經像唯一心念觀世音及歸命漢土衆僧#舶任風而去得無傷壞行九十日達耶婆提國停五月復隨他商侶東趣廣州擧帆月餘日夜忽大風合舶震懼衆共議曰坐載此沙門使我等狼狽不可以一人故令一衆俱亡欲推棄之法顯檀越厲聲呵商人曰汝若下此沙門亦應下我不爾便當見殺漢地帝王奉佛敬僧我至彼告王必當罪汝商人相視失色僶俛而止旣水盡糧竭唯任風隨流忽至岸見䉫藋菜依然知是漢地但未測何方卽乘小舩入浦尋村遇獵者二人顯問此何地耶獵人曰是靑州長廣郡牢山南岸獵人還以告太守李嶷嶷素敬信忽聞沙門遠至躬自迎勞顯持經像隨還頃之欲南歸刺史請留過冬顯曰貧道投身於不反之地志在弘通所期未果不得久停遂南造建康於道場寺就外國禪師佛陁跋陁羅譯大般泥洹經等六部撰遊天竺傳一卷顯旣出大泥洹經流布教化咸使見聞有一家失其姓名居近揚都朱雀門世奉正化自寫一部讀誦供養無別經室與雜書共屋後風火忽起延及其家資物皆盡唯泥洹經儼然具存煨燼不侵卷色無異楊都共傳咸稱神妙後到荊州卒于辛寺春秋八十有六衆咸慟惜焉菩薩十住經一卷 是華嚴十住品異譯見長房錄寶如來三昧經二卷 或一卷一名無極寶三昧經第二出與無極寶經同本見長房錄大智度經四卷 第五出與支讖道行經及大般若第四會等同本見僧祐錄及竺道祖錄普門品經一卷 第二出與法護普門品及寶積文殊普門會同本見僧祐錄及竺道祖錄阿述達經一卷 與寶積無畏德會等同本第三出見長房錄也如幻三昧經二卷 與世高如幻三昧及寶積善住意會等同本第三出見竺道祖晉錄彌勒所問本願經一卷 與法護彌勒本願及寶積彌勒所問會同本第二出見長房錄十地經一卷 與法護菩薩十地經等同本第三出見長房錄維摩詰經四卷 與嚴佛調古維摩經等同本第五出房云見南來新錄無所悕望經一卷 第三出與象腋經等同本見長房錄浮光經一卷 或作乳光與犢子經等同本第四出見長房錄如來獨證自誓三昧經一卷 第三出與世高自誓三昧經等同本見長房錄普賢觀經一卷 一名觀普賢菩薩經房云見道慧錄初出瓔珞經十二卷 一名現前報與竺佛念菩薩瓔珞同本或十四卷房云見南來 新錄初出照明三昧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禪經四卷 房云見南來新錄法沒盡經一卷 見長房錄菩薩正齋經一卷 第三出見長房錄威革長者六向拜經一卷 或作威華第二出見長房錄出中阿含第三十三異譯指鬘經一卷 或作指髻出增一阿含第三十一異譯見長房錄所欲致患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五蓋疑結失行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分衛經一卷 見長房錄右二十三部四十五卷 初二部三卷本在大智度下二十一部四十二卷本闕沙門祇多蜜或云祇蜜多晉云歌友西域人識性通敏聰達宏遠志存弘化無憚遠遊爰於晉代譯菩薩十住等經二十三部諸錄盡云祇多蜜晉世譯未詳何帝若非咸洛應是江南一部見僧祐錄房云已外竝彰雜別諸錄又有寶施女經 出大集經摩調王經出六度集 旣是別生刪之不錄大乘方便經三卷 元熙二年譯第三出或二卷與法護大善權經等同本見始興錄今編入寶積當第三十八會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陁羅尼呪經一卷 亦直云請觀世音經第二出見法上錄威革長者六向拜經一卷 晉宋間於廣州譯出中阿含第三十三卷異譯見始興錄及寶唱錄右三部五卷 前二部四卷本在後一部一卷本闕居士竺難提晉翻云喜西域人志道無倦履遠能安解悟幽旨言通晉俗以恭帝元熙元年己未爰曁宋世譯大乘方便經等三部無量壽至眞等正覺經一卷 一名樂佛土樂經一名極樂佛土經第七譯見正度錄與世高支讖支謙僧鎧白延法護等所出同本右一部一卷本闕沙門竺法力西域人業行淸高智道崇峙善通方語妙稱經微以恭帝元熙元年己未二月譯無量壽至眞等正覺經一部日難經一卷 第二出卽是越難經後說事少異見趙錄及始興錄蓱沙王五願經一卷 亦名弗沙王經第三出見趙錄及始興錄迦葉結集戒經一卷 第三出見趙錄及始興錄右三部三卷其本竝闕沙門釋嵩公或云高公於晉末譯日難等經三部群錄竝云晉末不知何帝之年迦葉禁戒經一卷 一名摩訶比丘經一名眞僞沙門經初出見始興錄右一部一卷本闕沙門釋退公譯迦葉禁戒經一部云於晉未詳何帝之年佛開解梵志阿颰經一卷 出長阿含第十三卷異譯見趙錄右一部一卷本闕沙門釋法勇譯梵志阿颰經一部云晉末#出亦未詳何帝之年那先比丘經二卷 或云那先經或三卷初出見僧祐失譯錄賢聖集見在陁羅尼章句經一卷 祐無章字見僧祐失譯錄第三出與持句神呪經等同本大乘經闕本右二部三卷長房等錄東晉失譯摠有五十三部五十七卷今除二部三卷之外餘五十一部五十四卷竝是房錄上或後漢失譯錄中已載之者及有譯人別生經等委列如左觀無量壽佛經 三世三千佛名經千佛因緣經 五十三佛名經八部佛名經 十方佛名經賢劫千佛名經稱揚百千佛名經南方佛名經 滅罪得福佛名經比丘諸禁律經摩訶僧祇律比丘要集優波離問佛經沙彌威儀比丘尼十戒經受十善戒經 沙彌尼戒經賢者五戒經 優婆塞威儀經波若得經 觀世樓炭經般舟三昧念佛章經庾伽三摩斯經 禪要呵欲經七佛所結麻油述呪五龍呪毒經齲齒呪七佛安宅神呪安宅呪已上二十九部二十九卷後漢失譯錄中已有此中復載故知重也三歸五戒帶佩護身呪經七萬二千神王護比丘呪經十二萬神王護比丘尼呪經百結神王護身呪經宮宅神王守鎭左右經塚墓因緣四方神呪經伏魔封印大神呪經魔尼羅亶大神呪經召五方龍攝疫毒神呪經梵天神策經 普廣經已上一十一部一十一卷竝是尸梨蜜所譯大灌頂經從第一卷至第十一遺教三昧經二卷 或云遺教三昧法律經西晉法炬譯僞錄中亦有阿那含經二卷 宋智嚴譯 僞錄亦有未曾有因緣經二卷 或直云未曾有經已曾再譯一存一闕禪定方便次第法經 後漢安世高譯七佛神呪 吳支謙譯賢者五福經 西晉白法祖譯摩尼羅亶神王呪案摩經 或無王字竺曇無蘭譯本行六波羅蜜經 宋求那跋陁羅譯優婆塞五戒經 宋沮渠京聲譯三歸五戒神王名經 抄灌頂經定意三昧經 出十住斷結經已下新附此錄決定毘尼經一卷 一名破壞一切心識初出與寶積優波離會同本異譯祐云衆錄竝云於燉煌出不顯譯人傳云晉世出未詳何帝時彌勒來時經一卷 第三出與羅什彌勒下生經等同本見法上錄稻芉經一卷 與了本生死經等同本造立形像福報經一卷 與作佛形像經同本報恩奉盆經一卷 與盂蘭盆經同本師子奮迅菩薩所問經一卷華聚陁羅尼呪經一卷 上二經同本異出六字呪王經一卷 與六字神呪王經同本善法方便陁羅尼經一卷金剛秘密善門陁羅尼經一卷 上二經同本異出菩薩本行經三卷七佛所說神呪經四卷 初卷云七佛十一菩薩說大陁羅尼神呪經薩羅國經一卷 或云薩羅國王經般泥洹經二卷 或直云泥洹經亦云大般泥洹經是長阿含初分遊行經異譯諸藏中一卷者唯是上卷欠下卷也緣本致經一卷 出中阿含第十卷異譯古來世時經一卷 出中阿含第十三卷異譯梵志計水淨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三卷異譯三歸五戒慈心厭離功德經一卷 出中阿含第三十九卷異譯箭喩經一卷 出中阿含第六十卷異譯食施獲五福報經一卷 一名施色力經一名福德經出增一阿含第二十四卷異譯滿願子經一卷 僧祐失譯錄中有晉言故移編此出雜阿含第十三卷異譯摩鄧女解形中六事經一卷 第五出與摩登伽含頭諫經等同本餓鬼報應經一卷 第三出一名目連說地獄餓鬼因緣經與鬼問目連經等同本得道梯橙錫杖經一卷 題云得道梯橙經錫杖品第十二亦直云錫杖經僧護經一卷 或云僧護因緣經亦云因緣僧護經護淨經一卷 木槵子經一卷或作患字又作檈無上處經一卷盧志長者因緣經一卷五王經一卷沙彌十戒法幷威儀一卷 亦云沙彌威儀戒本沙彌尼離戒文一卷舍利弗問經一卷五百問事經一卷阿育王譬喩經一卷 題云天尊說阿育王譬喩經古經呼佛以爲天尊卽佛說也撰集三藏及雜藏傳一卷 亦云撰三藏經及雜藏經彌勒作佛時事經一卷 祐錄無事字第二出與彌勒來時經等同本見寶唱錄道樹三昧經二卷 第二出與私阿昧經同本見支敏度錄右三十八部四十五卷 末後二部三卷闕本餘竝見在前三十六部四十二卷竝是入藏見經莫知譯主諸失譯錄闕而未書似是遠代之經#故編於晉末庶無遺漏焉通前舊失譯經二部三卷摠四十部四十八卷竝爲東晉失源云秦苻氏都長安 亦云前秦起苻健謚爲明帝 皇始元年辛亥至苻登無謚 太初九年甲午凡經五主四十四年沙門六人所譯經論等摠一十五部合一百九十七卷 於中七部六十五卷見在八部一百三十二卷闕本房云皇始元年甲寅延初元年丁酉與諸家年曆不同校二年向後准安公增一序勘其甲子房錄錯矣苻秦 沙門曇摩持 三部 三卷戒本壇文沙門鳩摩羅佛提 一部 二卷集沙門僧伽跋澄 三部 二十七卷論集沙門曇摩蜱 一部 五卷經沙門僧伽提婆 二部 四十六卷論沙門曇摩難提 五部 一百一十四卷經論集十誦比丘戒本一卷 或云十誦大比丘戒初出見僧祐錄比丘尼大戒一卷 亦云十誦比丘尼戒第二出見僧祐錄教授比丘尼二歲壇文一卷 或無尼字僧純於龜茲國得梵本來佛念譯語慧常筆受見寶唱錄右三部三卷其本竝闕沙門曇摩持或云侍秦言法慧或云法海西域人善持律藏妙入契經以苻堅謚莊烈天王建元三年丁卯四年戊辰於長安譯十誦戒本等三部竺佛念傳語慧常筆受 安公僧戒序云佛念寫其梵文道賢爲譯慧常筆受其比丘尼戒僧祐錄云晉簡文帝時沙門僧純於西域拘夷國得梵本到關中令佛念曇摩侍慧常共出謹按長房等錄皆以慧常爲其譯主與曇摩持竺佛念共譯今以秦僧慧常元不遊於天竺常雖共出尼戒執本乃是曇摩佛念傳譯常爲筆受與其僧戒何別此乃別摽慧常推挍本末事乃分明常爲助翻曇摩爲主故入曇摩之錄慧常不別存焉四阿含暮抄解二卷 亦云四阿含暮抄經見僧祐錄右一部二卷其本見在沙門鳩摩羅佛提秦言童覺西域人以苻堅建元十八年壬午八月於#鄴寺譯阿含暮抄一部冬十一月乃訖佛提執梵本佛念佛護譯爲秦文沙門僧導#僧睿曇究筆受尊婆須蜜菩薩所集論十卷 或云婆須蜜經或十二卷或十四卷建元二十年三月五日出至七月十三日訖跋澄難提提婆三人執本佛念譯傳慧嵩筆受見僧祐錄鞞婆沙論十四卷 或無論字亦云鞞婆沙阿毘曇亦云廣說或十五卷或十九卷建元十九年四月出至八月末訖難提錄爲梵文佛圖羅剎譯傳敏智筆受見僧祐錄僧伽羅剎所集經三卷 或云僧伽羅剎集初出或五卷建元二十年出十一月三十日訖佛念傳譯慧嵩筆受見僧祐錄於長安石羊寺出亦云佛護傳譯右三部二十七卷其本竝在沙門僧伽跋澄或云跋橙秦言衆現罽賓國人毅然有淵懿之量歷尋名師修習精詣博覽衆典特善數經暗誦毘婆沙貫其妙旨毘婆沙卽鞞婆沙是非大毘婆沙也常浪志遊方觀風弘化苻堅建元之末來入關中先是大乘之典未廣禪數之學甚盛#旣至長安咸稱法匠焉堅秘書郞趙政字文業博學有才崇仰大法嘗聞外國宗習毘婆沙而跋澄諷誦乃四事禮供請譯梵文澄以建元十七年辛巳至二十一年乙酉共名德法師釋道安等譯婆須蜜等三部涼州沙門竺佛念外國沙門佛圖羅剎傳語沙門敏智慧嵩秘書郞趙文業筆受安公法和對共挍定跋澄戒德整峻虛靖離俗關中僧衆則而像之後不知所終佛圖羅剎不知何國人德業純粹該#覽經典久遊中土善達秦言#其宣譯梵文#見稱當世祐等群錄竝云鞞婆沙論僧伽提婆譯今准安公論序云僧伽跋澄譯今准論序爲正祐等群錄復云跋澄譯雜阿毘曇毘婆沙論十四卷者卽鞞婆沙論是也摩訶般若波羅蜜鈔經五卷 或無鈔字或七卷亦云般羅若一名須菩提品亦名長安品次第六出與道行小品明度等同本見僧睿二秦錄及僧祐錄右一部五卷其本見在沙門曇摩蜱秦言法愛印度人器宇明敏志存弘喩以符堅建元十八年壬午譯般若鈔經一部佛護譯傳佛護卽佛圖羅剎也 慧進筆受安公挍定共傳云與大品放光光讚同本者或恐尋之未審也阿毘曇八揵度論三十卷 或無論字或二十卷或云迦旃延阿毘曇或云阿毘曇經八揵度初出與唐譯發智論同本建元十九年四月二十日出至十月二十三日訖見僧祐錄阿毘曇心十六卷 初出或十三卷建元末年於洛陽出見僧睿二秦錄及僧祐錄右二部四十六卷 前一部三十卷見在後一部十六卷闕本沙門僧伽提婆 或云提和亦云僧迦禘婆蓋是言音楚夏耳 秦言衆天罽賓國人姓瞿曇氏以苻堅建元十九年癸未遊於長安沙門法和請令翻譯起十九年訖建元末出八揵度等論二部 其鞞婆沙十四卷准安公序是跋澄譯今此除之涼州沙門竺佛念譯傳慧力僧茂筆受法和理其指歸安公製序後以晉孝武帝太元十六年遊於廬山及往建康更出經具如晉錄所顯中阿鋡經五十九卷 建元二十年出是第一譯竺佛念筆受見竺道祖晉世雜錄及僧祐錄增壹阿鋡經五十卷 第一譯建元二十年甲申夏出至來春訖爲四十卷佛念傳譯曇嵩筆受見安公經序僧睿僧祐寶唱錄竝載祐云三十三及二十四卷恐誤三法度論二卷 初出或云三法度無論字與晉世僧伽提婆出者小異見長房錄僧伽羅剎集二卷 佛去世後七百年僧伽羅剎造初出見寶唱錄阿育王息壞目因緣經一卷 第三出姚秦建初六年辛卯於安定城爲尚書令姚旻二月十八日出至二十五日訖佛念傳譯兼製序見二秦錄此應入後秦從多附此右五部一百一十四卷 前四部一百一十三卷闕本後一部一卷見在沙門曇摩難提秦言法喜兜佉勒國人髫年離俗聰慧夙成硏諷經典#以專精致業遍觀三藏闇誦中增二阿含博識洽聞靡所不練是以國內遠近咸共推服少而觀方遍涉諸國常謂弘法之體宜宣布未聞故遠冒流沙懷寶東遊以苻堅建元二十年至于長安難提學業旣優道聲甚盛苻堅深見禮接厚致供施先是中土群經未有四含堅侍臣武威太守趙政志深法藏乃與安公共請出經政於長安城內集義學僧寫出二含梵本方始翻譯佛念傳語慧嵩筆受提以苻堅建元二十年甲申至姚萇建初六年辛卯譯中含等經五部提後還西域不知所終開元釋教錄卷第三 摠錄之三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43)주(周) 태왕(太王)의 아들 구오(句吳)를 가리킨다.
  2. 44)탁월하고 맑게 환하다는 뜻이다
  3. 45)여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뜻한다.
  4. 46)깨닫음을 향해 용맹 정진하는 모습을 말한다.
  5. 47)절의 행사나 법회 등을 알리는 안내문을 높게 세운 깃대로서,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도 한다.
  6. 48)생사의 경지를 벗어나 피안에 도달하여 크게 깨닫는 일이다. 구경(究竟)ㆍ도피안(到彼岸) 또는, 단순히 도(度)라고도 풀이한다. 바라밀다(波羅蜜多)라고 한다.
  7. 49)과거칠불(過去七佛)중 4번째 부처님으로, 현재 현겁(賢劫)나타난 부처님이다.
  8. 50)과거칠불(過去七佛)중 5번째 부처님으로, 현재 현겁(賢劫)나타난 부처님이다.
  9. 51)바소발다(婆素跋陀, Vasubhadra)가 지은 책인데, 동진(東晋) 시대(391)에 승가제바(僧伽提婆) 번역한 4아함의 의의를 3진도(眞度)의 체계로 분류하여 해석하고 있다.
  10. 52)원묘(圓妙)한 경전이라는 뜻으로 『법화경』을 말한다.
  11. 53)한 종파의 핵심적 교의를 뜻하면, 종지(宗旨)와 같은 뜻이다.
  12. 54)중국 서쪽에 살던 이민족을 말한다.
  13. 55)계를 지키는 공덕을 뜻한다.
  14. 56)‘경신(景申)’은 ‘경신(庚申)’과 같은 말이다. 원본의 한자를 그대로 쓴다.
  15. 57)투량사(鬪場寺)가 바로 도량사(道場寺)이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에 의거해 양주(楊州) 투량사(鬪場寺)로 기록하는 것이 옳다.
  16. 58)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 또는 비구ㆍ비구니ㆍ사미ㆍ사미니를 말한다.
  17. 59)인도 가비라국의 왕으로, 정반왕의 아우이다.
  18. 60)할아버지의 형제를 말한다.
  19. 61)범어로는 anāgāmin하며, 아나함(阿那含)은 음역이다. 성문(聲聞) 4과 중의 제3번째이며, 욕계(欲界)에서 죽어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에 나고는 번뇌가 없어져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20. 62)억울하거나 의분으로 몹시 분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21. 63)중생을 가르쳐 교화하는 사람을 말한다.
  22. 64)관(觀)은 바르게 아는 것이며, 행(行)은 인(因)과 과(果)에 두루 통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마음을 관하고 실천하는 수행을 뜻한다.
  23. 65)앞의 불환과(不還果)와 같다.
  24. 66)번역하는 사람의 우두머리, 즉 대장을 뜻한다.
  25. 67)덕(德)이 적다는 뜻으로, 중이나 도사(道士)가 자신을 일컫는 겸칭이다
  26. 68)밀교(密敎)에서 염송(念誦)ㆍ공양(供養)의 의식에 대한 규칙을 뜻한다.
  27. 69)양 둔덕에 줄 따위를 건너 지르고 거기에 매단 다리인데, 懸橋(현교)을 말한다..
  28. 70)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의 동북쪽에 솟아 있고, 석존이 설법하던 곳으로 이름난 산이다.
  29. 71)기사굴산(耆闍崛山)의 번역이다.
  30. 72)부처님의 10대 제자인데,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항상 적은 것에도 만족하며 몸과 마음을 수행(修行)하는 데 제일인 제자(弟子)로 두타제일(頭陀第一)이 일컫는다.
  31. 73)시주(施主)자, 즉 보시(布施)를 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32. 74)비름과의 한해살이 풀이다
  33. 75)『고려대장경』에는 ‘2권(二卷)’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맞지 않다. 『신수대장경』에 따라 ‘1권(一卷)’으로 번역하였다.
  34. 76)위로는 진리에,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부합하다는 뜻으로, ‘불경’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35. 77)법문(法門)의 장인(匠人)으로 학덕을 갖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36. 78)공양하는 네 가지. 즉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탕약(湯藥)이나, 의복ㆍ음식ㆍ산화(散華)ㆍ소향(燒香)니나, 방사(房舍)ㆍ음식ㆍ의복ㆍ산화소향. 등을 말한다.
  37. 79)몽고의 큰 사막을 말한다.

 

 

 

 

 

 

 

 

 

 

 

개원석교록 제 4 권


지승 지음

1. 총괄군경록 ④

7) 후진(後秦) 시대
진의 요(姚)씨는 상안(常安)에 도읍하고 있었다.후진(後秦)이라고도 한다 요장(姚萇)시호(諡號)는 소무황제(昭武皇帝)이다. 백작(白雀) 원년 갑신(甲申, 384)으로부터 요홍(姚泓)시호가 없다. 영화(永化) 3년 정사(丁巳, 417)에 이르기까지 무릇 3군주(君主) 34년 동안 사문 5인이 번역하여 낸 경(經)ㆍ율(律)ㆍ논(論) 등은 총 94부 624권이다.그 중에서 66부 528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28부 96권은 궐본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후기(後記)에서 말한 홍시(弘始) 3년 신축(辛丑, 401)을, 왕도규(王道珪)는 경자(庚子, 400)라 하였고, 어떤 책에서는 역시 세재(歲在)를 “신축(401)이다”라고 하였다. 장방(長房)과 견란(甄鸞)도 다시 1년씩의 차이가 있는데, 이제 후기에 의거하여 바로 잡아, 차례로 1년씩 미루었다.

요진(姚秦) 사문 축불념(竺佛念)12부74권. 경ㆍ율ㆍ집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74부384권. 경ㆍ율ㆍ논ㆍ집
사문 불야다라(弗若多羅)1부58권. 율
사문 불타야사(佛陁耶舍)4부84권. 경ㆍ율
사문 담마야사(曇摩耶舍)3부 24권. 경ㆍ논

(1) 축불념(竺佛念)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 10권처음에는 『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最勝問菩薩十住除垢斷結經)』이라고 하였다. 일명 『십천일광삼매정경(十千日光三昧定經)』, 또는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11권, 또는 14권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二秦錄)』ㆍ『고승전』ㆍ『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 12권일명 『현재보경(現在報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13권, 또는 14권, 또는 16권으로 되어 있다. 부진(符秦) 건원(建元) 12년(376) 7월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ㆍ『고승전』ㆍ『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 5권처음에는 『보살종도술천강신모태설광보경(菩薩從兜術天降神母胎說廣普經)』이라 하였으며, 또한 바로 『태경(胎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 또는 8권으로 되어 있다. 『이진록』ㆍ『고승전』ㆍ『승우록』에 보인다.
중음경(中陰經) 2권『이진록』ㆍ『고승전』ㆍ『승우록』에 보인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2권혹은 바로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비내야율(鼻柰耶律) 10권일명 『계인연경(誡因緣經)』, 또는 『비내야경(鼻柰耶經)』, 또는 『계과인연경(戒果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사문 담경(曇景)이 받아썼다. 안공(安公)이 지은 경의 서문에 보면 “부진(符秦) 건원(建元) 14년 임오(壬午, 378) 정월 12일에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출요경(出曜經) 20권또한 『출요론(出曜論)』이라고도 한다. 혹은 19권으로 되어 있다. 부진 건원19년(383)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ㆍ『고승전』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현재 경본이 있고, 이하는 궐본이다.

지인보살경(持人菩薩經) 3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의 『지인경(持人經)』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지세경(持世經)』과 동본(同本)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相經) 5권또한 『대운경(大雲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담무참(曇無讖)의 『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과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보처경(菩薩普處經) 3권『장방록』에 보인다.
십송비구니계소출본말(十誦比丘尼戒所出本末)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순(僧純)이 구이국(拘夷國)에서 범본(梵本)을 얻어와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하였는데, 문장이 번잡하였으므로, 뒤에 축법태(竺法汰)가 삭제하여 바르게 고쳤다. 『보창록』에 보인다.
왕자법익괴목인연경(王子法益壞目因緣經) 1권혹은 『아육왕식괴목인연경(阿育王息壞目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2부 74권이다.『출요경』 이상의 7부 61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지인보살경』 이하 5부 13권은 궐본이다.

사문 축불념은 양주(涼州) 사람이다. 스무 살에 출가하였는데, 의지[志業]가 맑고 강건하였다. 밖으로는 온화하고 내면은 밝았으며, 화통하고 영민하고 밝았다. 많은 경전을 외우고 익혔으며, 대략 외전(外典)1)들도 섭렵하였는데, 『창힐편(蒼詰篇)2)』과 『이아(爾雅)3)』의 훈고(訓詁)4)에 더욱 밝고 통달하였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풍속을 골고루 보았다. 집안이 대대로[家世] 서하(西河)에 있어서 방언[方語]에 환하게 밝았으며, 중국과 오랑캐 말의 소리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의학(義學)의 이름은 비록 유명하지 않았으나, 들은 바가 많다는 명성은 크게 드러났다.
부씨(符氏)의 건원(建元) 연간(365~384)에 담마지(曇摩持)ㆍ구마라불제(鳩摩羅佛提)ㆍ승가발징(僧伽跋澄)ㆍ제바난제(提婆難提) 등이 장안(長安)으로 들어왔고, 안공(安公)과 조정(趙政) 등이 그들에게 여러 경들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당시의 명덕(名德 : 명성과 덕행이 있는 비구)들도 번역할 수 없었으므로, 대중들은 모두 축불념을 추대하여 명장(明匠)으로 삼았다.
안세고(安世高)와 지겸(支謙) 이후 축불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 부견(符堅)과 요흥(姚興) 2대에 걸쳐 번역하는 사람들의 종주(宗主 )가 되었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의 승려와 대중들은 모두 함께 그를 칭찬하였다.
축불념은 부견ㆍ요흥 2대 때에 스스로 『십주단결경』 등 12부를 번역하였다.『장방록』에 따로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 10권이 있는데, 잘못이다. 주(住)와 지(地)의 두 가지 뜻에는 구별이 없으며, 이제 십주(十住)를 두고, 십지(十地)는 삭제한다. 뒤에 병이 들어 상안(常安)에서 입적하였는데, 원근(遠近)의 승려와 속인들이 탄식하고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 구마라집(鳩摩羅什)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40권또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신대품경(新大品經)』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방광경(放光經)』과 같은 동본이다. 혹은 30권, 또는 24권, 또는 27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弘始) 5년 계묘(癸卯, 403) 4월 23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6년(404) 4월 23일에 끝마쳤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蜜經) 10권표제에서는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이다”라고 하였으며, 소품(小品)이라는 글자가 없다. 승우는 “『신소품경(新小品經)』이다”라고 하였다. 『도행경(道行經)』ㆍ『명도경(明度經)』 등과 동본이다. 일곱 번째 번역이다. 혹은 7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10년(408) 2월 6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4월 30일에 마쳤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1권또한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계셨다”고 한 것은 첫 번째 번역이다. 원위(元魏)의 보리유지(菩提留支) 등이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 2권또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1권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진(晋)나라 때 법호(法護)와 양조(梁朝)의 진제(眞諦)가 번역한 경과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1권또한 『마하대명주경(摩訶大明呪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과 같은 동본이다. 경의 표제에 보인다.
보살장경(菩薩藏經) 3권일명 『부루나문경(富樓那問經)』, 또는 『대비심경(大悲心經)』이라고도 한다. 지금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고, 제17회(會)인 「부루나회(富樓那會)」에 해당한다. 홍시 7년(405)에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호(法護)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진록(二秦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선비보살경(善臂菩薩經) 2권지금은 『보적경』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26회(會)에 해당한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수마제보살경(須摩提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 「묘혜회(妙慧會)」와 같은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자재왕보살경(自在王菩薩經) 2권혹은 보살(菩薩)이란 글자가 없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분신왕경(奮迅王經)』과 동본이다. 홍시 9년(407) 상서령(尙書令) 요현(姚顯)의 제택(第宅 : 살림집과 정자)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예(僧叡)가 붓으로 받아쓰고, 아울러 서문도 지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장엄보리심경(莊嚴菩提心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호가 번역한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주경(十住經) 4권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십지품(十地品)」의 이역(異譯)이다. 구마라집과 불타야사(佛陁耶舍)가 함께 번역하며 내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승우록』에서는 “『신법화경(新法華經)』이다”라고 하였다. 처음 7권 27품(品)이었는데, 뒷사람이 「천수품(天授品)」을 더 보태어 28품이 되었다. 홍시 8년(406) 여름에 대사(大寺)에서 번역하였으며, 승예(僧叡)가 붓으로 받아썼고, 아울러 서문도 지었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3권일명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유마힐경(維摩詰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서는 “『신유마힐경(新維摩詰經)』이다”라고 하였다. 홍시 8년(406)에 대사(大寺)에서 번역하였으며, 승조(僧肇)가 붓으로 받아썼고, 승예(僧叡)가 서문을 지었다. 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대수긴나라왕소문경(大樹緊那羅王所問經) 4권또한 『설불가사의품(說不可思議品)』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대수긴나라경(大樹緊那羅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참(支讖)이 번역한 『돈진타라경(伅眞陁羅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집일체복덕삼매경(集一切福德三昧經) 3권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등집중덕경(等集衆德經)』과 같은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진적사록(眞寂寺錄)』에 보인다.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 4권혹은 바로 『사익경(思益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서는 “『사익의경(思益義經)』이다”라고 하였다. 홍시 4년(402) 12월 1일에 소요원(逍遙園)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축법호가 번역한 『지심경(持心經)』과 보리유지(菩提留支)가 번역한 『승사유경(勝思惟經)』과는 모두 동본이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지세경(持世經) 4권일명 『법인경(法印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호의 『지인경(持人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수(隋)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가 번역한 『제법본무경(諸法本無經)』과 같은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아미타경(阿彌陁經) 1권또한 『무량수경(無量壽經)』이라고도 한다. 홍시 4년(402) 2월 8일에 번역되었으며, 처음으로 번역된 것이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칭찬정토경(稱讚淨土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호가 번역한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과 동본이다. 홍시 4년(402)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1권일명 『미륵수결경(彌勒受決經)』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대지사리불경(大智舍利弗經)』이라고 하였다. 『미륵래시경(彌勒來時經)』과 동본이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 또는 『하생성불경(下生成佛經)』, 또는 『당하성불경(當下成佛經)』이라고도 한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 1권또한 바로 『보리경(菩提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가야산정경(伽耶山頂經)』, 또는 『보리무행경(菩提無行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가야산정경』과 『상두정사경(象頭精舍經)』 등과 동본이다. 『승우록』의 경도(經圖 : 경의 내력도)에 따로 『보리경(菩提經)』 1권을 기재한 것은 착오이다.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대금색공작왕경(大金色孔雀王經)』이라고도 한다. 소요원(逍遙園)에 있으면서 번역하였으며, 아울러 결계장법(結界場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3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바로 『수능엄경』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서는 “『신수능엄경(新首楞嚴經)』이다”라고 하였다. 아홉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방등수능엄용복정경(方等首楞嚴經勇伏定經)』과 같은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부사의광보살소문경(不思議光菩薩所問經) 1권또한 다만 『부사의광보살소설경(不思議光菩薩所說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무사의광해동보살경(無思議光孩童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한 『무사의해동경(無思議孩童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화수경(華手經) 13권혹은 화수(華首)라고도 한다. 일명 『섭제선근경(攝諸善根經)』, 또는 『섭제복덕경(攝諸福德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10권, 또는 11권, 또는 12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8년(406)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불수반열반약설교계경(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 1권또한 불림반(佛臨般)이라고도 하며, 일명 『유교경(遺敎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천불인연경(千佛因緣經) 1권『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범망경(梵網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홍시 8년(406)에 초당사(草堂寺)에서 3천 학사(學士)들이 최후에 번역하여 내었다. 이 1품(品)의 범본(梵本)에는 61품이 있었으며, 모두 번역하여 마쳤다. 융영(融影) 등 3백 인이 일시에 함께 보살 10계(戒)를 받았는데, 승조(僧肇)가 수여(授與)하였다. 경의 앞 서문에 보인다.
불장경(佛藏經) 4권일명 『선택제법경(選擇諸法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3권, 또는 2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7년(405) 6월 12일에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청정비니방광경(淸淨毗尼方廣經) 1권『문수정률경(文殊淨律經)』과 같은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혹은 『대지도경론(大智度經論)』, 또는 『마하반야석론(摩訶般若釋論)』이라고도 한다. 혹은 70권, 또는 110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4년(402) 여름에 소요원(逍遙園)에서 번역을 시작하여 7년(405) 12월 27일에 끝마쳤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중론(中論) 4권또한 『중관론(中觀論)』이라고도 한다. 혹은 8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11년(409)에 대사(大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예(僧叡)가 서문을 지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앞의 『지도론』과 함께 용수(龍樹)보살이 지었다.
십이문론(十二門論) 1권용수보살이 지었다. 홍시 10년(408)에 대사(大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예(僧叡)가 서문을 지었다. 『승우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백론(百論) 2권제바보살(提婆菩薩)이 지었다. 홍시 6년(404)에 번역되어 나왔다. 승조(僧肇)가 서문을 지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십주비바사론(十住毗婆沙論) 14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용수보살이 지었다. 혹은 12권, 또는 15권으로 되어 있다. 『장방록』에 보인다.
대장엄경론(大莊嚴經論) 15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마명보살(馬鳴菩薩)이 지었다. 혹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장방록』에 보인다.
발보리심론(發菩提心論) 2권혹은 『발보리심경(發菩提心經)』, 또는 『경론(經論)』이라고도 한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방우경(放牛經) 1권또한 『목우경(牧牛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46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해팔덕경(海八德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해경(法海經)』과 같은 동본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선비요경(禪秘要經) 3권혹은 『선비요법(禪秘要法)』이라고도 한다.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지겸(支謙) 등이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등지인연경(燈指因緣經) 1권『이곽록』에 보인다.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 1권또한 『십송바라제목차계(十誦波羅提木叉戒)』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마지(曇摩持) 등이 번역하여 낸 것과 동본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성실론(成實論) 20권혹은 24권, 또는 16권, 또는 14권으로 되어 있다. 홍시 13년(411) 9월 8일에 상서령(尙書令) 요현(姚顯)의 청으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14년(412) 9월 15일에 끝마쳤다. 담구(曇晷)가 받아썼다.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 900년에 하리발마(訶梨跋摩)가 지었다. 『승우록』에 보인다.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일명 『보살선법경(菩薩禪法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바로 『선경(禪經)』이라고도 하며, 또는 『선법요(禪法要)』, 또는 『아란야습선법(阿蘭若習禪法)』이라고도 하는데, 이 세 이름은 모두가 같은 경본이다. 홍시 4년(402) 정월 5일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9년(407) 윤(閏) 5월에 거듭 교정하여 마쳤다. 『이진록』ㆍ『승우록』ㆍ『보창록』 세 목록에 보인다.
보살가색욕법(菩薩呵色欲法) 1권혹은 『보살가색욕경(菩薩訶色欲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보살가색욕(菩薩呵色欲)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선법요해(禪法要解) 2권혹은 『선요경(禪要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사유요략법(思惟要略法) 1권혹은 『사유요략법경(思惟要略法經)』, 또는 『사유경(思性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잡비유경(雜譬喩經) 1권홍시 7년(405) 10월에 번역되어 나왔다. 도략(道略)이 수집하였다.
마명보살전(馬鳴菩薩傳) 1권『장방록』에 보인다.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1권『장방록』에 보인다.
제바보살전(提婆菩薩傳) 1권『장방록』에 보인다.
법계체성무분별경(法界體性無分別經) 2권『보적경(寶積經)』 「법계체성회(法界體性會)」와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이로부터 이하는 궐본이다.
대선권경(大善權經) 2권『보적경』 「대승방편회(大乘方便會)」과 같은 동본이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30권혹은 신(新)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혹은 24권으로 되어 있다. 지참(支讖)과 무참(無讖)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진록』과 『이곽록』에 보인다.
대방등정왕경(大方等頂王經) 1권법호(法護) 등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아사세경(阿闍世經) 2권지참(支讖) 등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섬본기경(睒本起經) 1권또한 바로 『섬경(睒經)』이라고도 한다. 『육도경(六度經)』에서 나온 이역이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축난제(竺難提)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보망경(寶網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칭양제불공덕경(稱揚諸佛功德經) 3권일명 『집화경(集華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홍시 7년(405)에 번역되었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관보현보살경(觀普賢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미증유인연경(未曾有因緣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현겁경(賢劫經) 7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홍시(弘始) 4년(402) 3월 5일에 번역되었다. 법호(法護)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담공(曇恭)이 받아썼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일명 『현겁삼매경(賢劫三昧經)』, 또는 『현겁정의경(賢劫定意經)』이라고도 한다. 무릇 세 가지의 이름이 있다. 『승우록』에서는 “『신현겁경(新賢劫經)』이다”라고 하였다.
선신마하신주경(善信摩訶神呪經) 2권『이곽록』에 보인다.
지지경(持地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1권『이곽록』에 보인다.
보살계본(菩薩戒本)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지금 이 『보살계본』은 『범망경(梵網經)』 하권이 아닌가 싶다.
문수회과경(文殊悔過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사리불회과경(舍利弗悔過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십주론(十住論) 10권용수보살이 지었다. 홍시(弘始) 연간(399~415)에 번역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끝마치지는 못하였다. 제8권의 마지막은 『육도집(六度集)』과 비슷하다. 『이진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지금 이 『십주론』은 곧 『십주바사론(十住婆沙論)』이 아닌가 의심된다.
검제죄복경(撿諸罪福經) 10권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인연관경(十二因緣觀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바수반두전(婆藪盤豆傳)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번경도(翻經圖)』에 보인다.
이상은 74부 384권이다.『제바보살전(提婆菩薩傳)』 이상의 52부 302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법계체성무분별경(法界體性無分別經)』 이하 22부 82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국말로는 동수(童壽)일명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라고 한다. 외국에서 이름을 짓는 법은 대부분 부모의 이름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구마라집의 부친은 구마라염(鳩摩羅炎)이었고, 모친의 이름은 기바(耆婆)였기 때문에 그 두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라고 한다. 천축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재상을 지냈는데, 구마라집의 조부(祖父) 구마달다(鳩摩達多)는 재기가 뛰어나서 다른 사람과는 비할 바 없었고, 명성이 나라 안에서 높았다.
아버지 구마염(鳩摩炎)은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절개가 있었는데, 장차 재상의 지위를 이으려고 할 때에 사양하고 피하여, 집을 떠나 동쪽으로 총령(葱領)을 넘었다. 구자국(龜茲國) 왕이 그가 영예(榮譽)를 버리고 속세를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모하여, 몸소 교외(郊外)까지 나가 영접하고 청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구자국왕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 갓 스무 살이었는데, 사려가 깊고 이치를 잘 알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그리하여 눈으로 한 번만 보아도 반드시 이해하였고, 한 번만 들어도 곧 외웠다. 또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옛 법에 슬기로운 자식을 낳을 것이라 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하였으나, 그녀는 그들 모두와는 혼인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구마염을 한 번 보고 나서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구자국왕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구마염에게 억지로 그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후에 구마라집을 잉태하였다. 구마라집이 어머니 태 안에 있을 적에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깨달음과 총명함이 평소의 배가 되었다. 작리대사(雀梨大寺)에 가서 경(經)을 들었는데, 홀연히 천축의 말을 저절로 통하게 되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깊은 이치를 끝까지 다 궁구해 냈으므로,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고 신이(神異)롭게 생각하였다.
그 절에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있었는데,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지혜로운 아들을 잉태한 것이다.”
그리고 사리불(舍利弗)이 태 안에 있을 적의 증험을 말하였다. 이미 구마라집이 출생하니, 출중하기가 불가사의하였다. 그녀는 구마라집이 출생한 뒤 예전의 천축어를 다 잊어버렸다.
얼마 후에 그의 어머니는 출가하여 도(道)를 닦고 배워서 초과(初果)5)
를 얻었다.
구마라집도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스승에게 경을 배웠는데, 하루에 천 게송[偈]을 암송하였다. 한 게송에는 32자가 있었으니, 모두 3만2천 언(言)이었다. 『아비담[毗曇]』을 암송하여, 이미 그 스승이 전수한 것을 넘어섰고, 그 뜻을 곧 저절로 이해하고 통하여, 그윽한 이치를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시 구자국 사람들은 구마라집의 어머니를 왕의 누이로서 보호함이 너무도 심했으므로, 그녀는 구마라집을 이끌고 피하였다.
구마라집의 나이 아홉 살 때에 계빈(罽賓)에 도착하여, 덕망이 높은 법사 반두달다(槃頭達多)를 만났다. 바로 그는 계빈국 왕의 사촌 아우였다. 그는 이치에 깊고 정밀하여 큰 기량(器量)이 있었으며, 삼장(三藏)과 9부(部)를 훤히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날마다 1천 게송씩을 외웠으며, 이름이 온 나라에 퍼져 있었다.
구마라집은 곧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마침내 그에게서 『잡장(雜藏)』ㆍ『중아함경(中阿含經)』ㆍ『장아함경(長阿含經)』 등을 배워 무릇 4백만 언(言)을 암송하였다.
반두달다는 구마라집과 논의(論議)할 적에는 늘 그의 의론이 깊고 뛰어남에 깊이 탄복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곧 구마라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외도(外道)의 논사(論師)들을 모아 놓고 서로 함께 논란하게 하였다.
대화를 처음 할 때, 외도들은 구마라집의 나이가 어리다고 경시하여 말투가 자못 공손하지 못하였다. 구마라집은 그 틈을 타 그들의 기세를 꺾어 버리니, 외도들은 굴복하고 부끄러워하며 말을 못하였다. 왕은 더욱 공경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날마다 말린 거위 고기 한 쌍(悉)과 멥쌀ㆍ밀가루 각 세 말[斗]에다 소(酥 : 우유) 여섯 되를 주었으니, 이것은 외국인에게 행하는 상등 공양이었다. 구마라집이 머물고 있던 사찰의 주지도 이에 비구 다섯 사람과 사미 열 사람을 차출하여 운영하고 보살피게 하여 비로 쓸고 물을 뿌리게 하여 구마라집의 제자와 같게 하였으니, 그를 존경하고 숭배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열두 살이 되어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끌고, 구자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때에 월지(月氏)의 북쪽 산에 이르렀는데, 그 산에 있던 한 나한(羅漢)이 그를 보자, 기이하게 여기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언제나 이 사미를 수호해야 됩니다. 이 사미가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파계(破戒)하지 않는다면, 불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우바국다(優波毱多)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계(戒)를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능히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다만 지혜가 영특하며 재주 있는 법사(法師)가 될 뿐일 것입니다.”
구마라집은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鉢]를 머리 위에 이었는데,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발우의 형태는 굉장히 큰데,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라고 하자마자 무거워서 감당할 수가 없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만 발우를 내려놓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곧 대답하였다.
“저의 마음에 분별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우에 경중(輕重)이 있었습니다.”
구마라집은 사륵국에서 『아비담(阿毗曇)』과 『육족론[六足]』의 여러 문(門)과 『증일아함경[增一阿含]』을 배워 암송하였다. 그리고 구자국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명성이 온 나라를 덮었다. 그 때에 구자국의 승려 1만여 인은 그를 범부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모두가 받들고 공경하여 감히 그보다 위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향을 사르는 차례에도 먼저 서지도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4위타(四韋陁:베타)와 5명(明)의 여러 논[諸論]들과 외도의 경서(經書)를 널리 읽었으며, 음양(陰陽)ㆍ성산(星算 : 천문과 산수)도 모두 다 극진히 연구하여 길흉(吉凶)에 묘하게 통달하였으므로, 그의 예언은 부절(符節)6)을 합하듯 딱 들어맞았다.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잘한 법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수행자(修行者)들 모두가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러한 것들을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뒤에 비마라차(卑摩羅叉)로부터 『십송률(十誦律)』을 배웠고, 또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로부터 대승(大乘)을 물어 전수받았는데,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옛날 소승(小乘)을 배운 것은, 마치 사람이 금(金)을 알지 못하고, 놋쇠를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긴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대승의 요의(要義)를 널리 구하고, 『중론(中論)』과 『백론(百論)』 두 논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배우고 외웠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구자국을 하직하고 천축국으로 가게 되었다. 구자국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나라는 얼마 있지 않아 쇠망할 것입니다. 나는 이곳을 떠납니다. 천축에 가서 3과(果)를 증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이별에 임하여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방등(方等)의 심오한 교의의 참 마음[眞丹]을 널리 떨쳐야 하는데, 그것을 동토(東土)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만은 이익이 없을 것이니, 그것을 어찌 해야겠느냐?”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보살의 도는 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큰 교화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의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구마라집은 구자국에 체류하여 왕의 신사(新寺)에 거주하다가 『대품경(大品經)』을 얻었다. 그리하여 막 책장을 펼치고 읽으려 하는데, 악마[魔]가 와서 경문(經文)을 가렸으므로 백지만 보일 뿐이었다. 구마라집은 이것이 악마의 소행인 줄 알고, 서원하는 마음을 더욱 견고히 지니자, 악마는 사라지고 글자가 나타났으므로, 이에 읽고 익혔다.
뒤에 작리대사(雀梨大寺)에서 대승경(大乘經)을 독송하고 있는데, 홀연히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거늘, 어째서 이러한 것을 읽는 것인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너는 바로 작은 악마로구나. 마땅히 때가 되었으니 속히 떠나라. 나의 마음은 대지(大地)와 같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구자국 신사(新寺)에 머문 지 2년 동안 대승의 경론들을 널리 독송하였으며, 그 비밀스럽고 심오한 뜻을 훤히 꿰뚫었다.
구자왕은 구마라집을 위하여 금사자좌(金師子座)를 만들고, 대진(大秦)의 비단으로 자리를 깔아,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법좌(法座)에 올라 설법하게 하였다.
뒤에 계빈국(賓國)으로 가서 그의 스승 반두달다(槃頭達多)를 위하여 일승(一乘)의 미묘한 이치를 자세히 설하자, 그 스승은 감탄하고 마음으로 복종하여, 곧 구마라집에게 스승의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나는 바로 화상(和上)의 소승의 스승이고, 화상은 바로 나의 대승의 스승이십니다.”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구마라집의 뛰어남에 엎드려 높이 받들었다. 강설(講說)할 때에는 왕들이 법좌 옆에 꿇어 엎드리고,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올라가게 하였으니, 그를 소중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이미 구마라집의 도(道)는 서역에 떨쳤고, 그의 명성은 동국(東國)에까지 미쳤다.
부씨(符氏) 건원(建元) 13년 정축(丁丑, 377) 정월에 태사(太史)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어떤 별이 외국 영역[分野]에 나타났으니, 덕이 높은 지인(智人)이 중국으로 들어와 보좌하게 될 것입니다.”
부견은 평소에 구마라집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이에 깨닫고 말하였다.
“짐(朕)이 듣건대, 서역에 구마라집이 있다고 한다. 아마 그 분이 아니겠는가?”
19년(383)에 부견은 효기장군(驍騎將軍) 여광(呂光) 등을 파견하여, 병사 7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구자국(龜茲國)과 오기국(烏耆國) 등 여러 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출발에 임하여 부견은 여광에게 말하였다.
“짐이 들으니 거기에는 구마라집이라는 이가 있어, 법상(法相)을 깊이 이해하고 음양(陰陽)을 잘 알아, 저 학문의 종주(宗主)가 되어 있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건대, 만일 구자국을 쳐서 이기면, 곧바로 역마를 급히 달려 구마라집을 후송하도록 하라.”
여광의 군대가 아직 이르기 전에, 구마라집은 구자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운이 쇠하였습니다. 반드시 강한 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경사(京師)의 사람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면, 삼가 공손히 받들어야 하며 그들의 칼날에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백순은 구마라집의 진언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하였다. 여광은 마침내 구자국을 격파하여 백순을 죽이고 구마라집을 사로잡았다.
여광은 성질이 거칠고 오만하였다. 구마라집의 지혜와 도량을 아직 측량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만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겨 그를 희롱하고 핍박하여 그 절개를 이지러뜨리려 하였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지게 하기도 하였으나, 구마라집은 항상 인욕(忍辱)하는 마음으로 일찍이 안색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광은 부끄럽게 여기면서 그만두었다.
여광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다. 장수와 졸개들이 이미 휴식하고 있었는데,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낭패를 당할 것이니, 군사를 언덕 위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 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나서 수심이 몇 길[丈]이나 되었고, 죽은 사람이 수천 인이었다. 여광은 비로소 구마라집의 신비한 능력에 더욱 공경하였다.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말하였다.
“이곳은 흉하고 망할 땅이므로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돌아올 운수를 미루어 짐작하고 헤아려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중도에 반드시 머무를 만한 복된 땅이 있을 것입니다.”
여광은 구마라집의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양주(涼州)에 이르러서 부견(符堅)이 요장(姚萇)에게 시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양토(涼土)를 점령하여 웅거하면서 한 지방의 임금이 되었다. 구마라집은 양토에 여러 해 동안 머무르면서 자주 그를 위하여 예언을 하였고, 그 일은 뒤에 모두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러나 여광의 부자(父子)는 도를 널리 펴지 않는 까닭에, 그 경법(經法)을 널리 쌓아 두고도 선양하고 교화할 방법이 없었다. 부견(符堅)은 이미 세상을 떠나 끝내 서로 대면하지 못하였다.
요장(姚萇)이 구마라집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마음을 비우고는 내조(來朝)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러 여씨(呂氏)들은 구마라집이 지혜로운 계책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요씨를 위해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요장이 죽고 아들 요흥(姚興)시호는 문조황제(文祖皇帝)이다.이 자리를 잇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돈독히 요청하였다.
홍시(弘始) 3년 신축(辛丑, 401) 3월 궁중의 나무에 연리지(連理枝)7)가 생기고, 소요원(逍遙園)의 파[葱]가 변하여 난초[茞]가 되었다. 이것을 아름답고 상서로운 일로 여겨 지혜로운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 하였다.
그 해 12월 20일에 구마라집은 상안(常安)에 도착하였다. 요흥은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여 구마라집을 특별히 총애하였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면 오래 머물러 하루 해가 지나갔고,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극진한 데까지 나아가서 한 해를 다 보내도록 싫증을 몰랐다.
대법(大法 : 불교)이 동방에 전해진 것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위(魏)ㆍ진(晋) 시대를 거치면서 경론(經論)이 점차로 많아졌다. 그러나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낸 경론들은, 대부분 문자에 막히고 의미가 규격화된 것이 많았다. 요흥은 젊어서부터 삼보(三寶)를 공경하여 단단히 강설(講說)을 모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상안에 이른 뒤에, 요흥은 그를 청하여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으로 들어오게 하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이미 경전들을 거의 암송하고 있었고, 궁구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중국말에도 능통하여 음역(音譯)에도 유창하였다. 이전의 옛 번역 경전들을 살펴보면, 경문의 뜻이 지나치게 잘못된 곳이 많았다. 앞선 번역들이 바른 지취(旨趣)8)를 잃은 이유는, 범본(梵本)과 대조하여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요흥은 사문 승조(僧肇)ㆍ승략(僧䂮)ㆍ승막(僧邈)ㆍ승예(僧叡) 등 8백여 인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다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은 옛날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였다. 옛날의 번역을 새로운 글로 바꾸어 놓으니, 뜻이 모두 원만하게 소통되었다. 대중들은 모두 마음으로 우러르고 기뻐하며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요흥은 불도가 깊어 그 신행은 오직 잘[善] 할뿐이며, 믿음[信]은 삼계(三界)의 고통을 벗어나는 좋은 나루이며,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칙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요흥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을 12부(部)에 노닐게 하여,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저술하여,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왕공(王公) 이하가 모두 그의 풍모를 흠앙하고 찬탄하였다. 요흥은 종실(宗室)의 상산공(常山公) 현(顯)과 안성후(安成候) 숭(嵩)이 모두 인연과 업(業)을 독실하게 믿었으므로, 여러 번 구마라집을 상안대사(常安大寺)로 청하여 새로 번역한 경전을 강설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홍시 4년 임인(壬寅, 402)으로부터 14년 임자(壬子, 412)에 이르기까지 『대품(大品)』ㆍ『소품(小品)』ㆍ『금강경(金剛經)』 등 74부 380여 권을 번역하였는데, 그 모두가 신묘한 근원을 훤하게 드러내고, 그윽한 이치를 빼어나게 잘 나타내었다. 당시 사방의 의학(義學) 사문들이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이름과 덕망이 빼어난 사람과 재주가 창달한 2공(公)과 도항(道恒)ㆍ승표(僧標)ㆍ혜예(慧叡)ㆍ승돈(僧敦)ㆍ승필(僧弼)ㆍ승조(僧肇) 등 30여 승려들이 전수받고, 그윽한 뜻을 찾아 정밀하게 연구하면서 열심히 궁구하였다.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은 도업(道業)이 오묘한 이였으나, 이에 사람을 보내어 닦은 것을 물었다. 용광사(龍光寺)의 도생(道生)도 지혜와 견해가 미묘한 데까지 꿰뚫은 이였으나, 역시 관중(關中)에 들어와 묻고 전수받았다. 구마라집의 성대한 업적은 위대하고 오래되었으나, 오늘날까지도 모두 우러러보게 되었다.
처음에 사문 승예(僧叡)는 재능과 식견이 높고 밝았으나, 언제나 구마라집을 따라다니면서 옮기어 베끼는 일[傳寫]을 담당하였다. 구마라집은 늘 승예를 위하여 사방의 문체[辭體]를 논하고, 범어와 한자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분별하여 말하였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을 대단히 중시한다. 그 궁상체(宮商體)의 운율(韻律)은 현악기를 들어와야 좋아진다. 무릇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고,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이 있다. 그러므로 범문을 중국어로 바꾸게만 되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대의(大意)를 살렸다 하더라도 문체가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으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집은 일찍이 사문 법화(法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준 적이 있다.

마음의 산이 밝은 덕을 길러
그 향내 1만 유순(由旬)에 퍼지고
난새[鸞]9)
가 외로히 오동나무에서 애절하게 우니
청아한 소리 구천(九天)에 사무치네.

무릇 게송을 10수(首) 지었는데, 문장과 비유가 모두 이와 같았다.
구마라집은 평소에 대승을 좋아하여 대승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는데, 항상 한탄하였다.
“내가 붓을 들어 대승의 『아비담(阿毗曇)』을 저술한다면, 가전연자(迦旃延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붓을 꺾노니, 논(論)을 지은들 무엇하겠느냐?”
그리고는 대승 『아비담』을 짓는 것을 처연히 그만두었다. 오직 요흥(姚興)을 위하여 『실상론(實相論)』 두 권을 저술하였다. 내는 말은 문장을 이루어 깎아내어 고칠 것이 없었고, 문장과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하여 현묘하고 심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구마라집은 사람됨이 영명하고 투철하였으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 남달랐다. 또한 기연에 응하여 깨달아 아는 것은 무리 가운데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돈독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하였으며, 차별 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고,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되 종일토록 게으르지 않았다.
당시 사문 승예(僧叡)를 요흥이 매우 총애하였는데,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은 모두 승예가 이에 참여하여 바로잡았다. 예전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내놓은 『정법화경(正法華經)』 「수결품(受決品)」에서 “하늘은 사람을 보고[天見人], 사람은 하늘을 본다[人見天]”고 하는 데가 있는데,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말하였다.
“이 말은 범본(梵本)에서와 뜻은 같으나, 다만 말이 실질보다 지나친 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자 승예가 말하였다.
“장차 사람과 하늘이 서로 닿아서 접촉하지 않으면, 사람과 하늘이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구마라집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사실이 그렇다.”
승예와 구마라집이 서로 함께 개발하는 것이 모두 이런 종류였다.
일찍이 진승(秦僧) 도융(道融)이 『신법화경(新法華經)』을 강설하는 것을 듣고 구마라집이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불법을 일으킬 사람은 바로 도융 그 사람이다.”
그 때에 갑자기 사자국(師子國)에서 한 바라문(婆羅門)이 나타났는데, 그는 총명하면서 말재주가 있고, 많이 배워 서역의 속서(俗書)는 펼쳐서 외우지 못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나라 외도들의 종장(宗匠)이 되어 있었다. 구마라집이 관중(關中)에서 크게 불법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분개하여 그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석씨(釋氏 : 불교)의 도풍만을 홀로 중국 땅에 전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우리들의 바른 교화의 경전을 동쪽 나라에 전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마침내 낙타를 타고 책을 등에 싣고 상안(常安)으로 들어왔다. 요흥(姚興)은 그의 입과 눈이 능숙한 것을 보고 자못 매혹되었다. 이에 바라문은 요흥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에는 방향이 없으며, 각기의 일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지금 진(秦)나라의 스님들과 구변(口辯)의 힘을 겨루어 보려고 일부러 멀리서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수한 사람에게 곧 그 교화를 전하게 하여 주십시오.”
요흥은 곧 이를 허락하였다.
당시 관중에 있는 사방의 승려와 대중들은 그들의 모자람을 느끼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상대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구마라집이 도융에게 말하였다.
“이 외도는 총명하기가 보통 사람과 다르니, 말싸움을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이길 것이다. 위없는 큰 도를 얻음은 우리 승도(僧徒)들에게 있는데도, 그에게 굴복한다면 자못 슬픈 일이다. 만일 외도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한다면 우리들의 법륜(法輪)의 바퀴축이 꺾일 것이니, 어찌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대 한 사람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도융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도 재주와 힘이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역 외도의 경서(經書)를 다 읽어 보지 못하였다. 곧 비밀스럽게 사람을 시켜 바라문 교도들이 읽는 경전의 제목을 베껴 오게 하여, 한 번 펴 보고는 곧 외웠다.
그 후 날을 정하여 논의(論議)를 하게 되었는데, 요흥이 몸소 그 자리에 나왔고, 공경(公卿)들이 모두 모였으며, 관중의 승단과 대중들도 모두 사방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그때 도융은 바라문과 서로 주고받으며 칼날 같은 언변으로 현묘한 기풍을 날렸으니, 바라문이 미치지 못할 바의 경계였다. 그때 바라문은 스스로 말과 이론으로는 자신이 굴복되었음을 알았으나, 아직도 널리 많은 책을 읽은 것을 과시하려 하였다. 이에 도융은 그가 읽은 책과 통론한 논과 진(秦) 땅의 경전과 역사책의 제목을 나열하니, 진(秦) 땅의 권수와 부수가 세 배나 더 많았다. 이에 구마라집은 그 기세를 타서 조롱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대진(大秦 : 중국의 나라 이름)의 넓은 학문을 듣지도 못했는가? 어찌하여 갑자기 경솔하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가?”
그 바라문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항복하였다. 그는 도융의 발 아래 머리가 땅에 닿게 절을 하고, 채 열흘이 못되어 그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났다. 상법의 운[像運]10)이 다시 중국 땅에 일어나게 된 것은 구마라집과 도융의 힘이었다.
또 비구 배도(杯度)가 팽성(彭城)에 있었는데, 구마라집이 상안(常安)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그대와 놀고 이별한 지 어언 3백여 년이건만, 이생에는 아득히 만날 기약이 없구나. 내생에 만나는 것이 어찌 이리도 더디단 말이냐?”
구마라집이 임종할 무렵 병을 참으면서, 대중 스님들과 이별을 고하며 말하였다.
“내가 법상(法相)11)을 만나 아직 뜻을 다 펴지 못하였는데,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대신하겠는가? 나는 우매한 사람이었는데도 잘못하여 역경(譯經)을 맡게 되었다. 만일 내가 전한 것에 잘못이 없다면, 나를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진(秦)나라 홍시(弘始) 연간(399~415)에 입적하였다. 즉시 소요원에서 외국의 법에 의하여 화장하였다.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없어졌건만, 오직 그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 믿음으로 법을 넓힌 증험이었다.구마라집의 입적에 대해서는 모든 기록이 일정하지 않다. 『고승전(高僧傳)』에서는 “홍시 11년(409) 8월 20일에 상안에서 입적하였다”라고 하였고, 혹자는 7년(405)이라고 하였으며, 혹자는 8년(406)이라고 하였다. 『고승전』을 취하면 11년(409)이 옳다고 하겠으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성실론(成實論)』 후기(後記)에서 말한 것을 보면, “대진(大秦) 홍시 13년 신해(辛亥, 411) 9월 8일에 상서령(尙書令) 요현(姚顯)의 청으로 이 논(論)을 번역하여 내면서, 다음해 9월 15일에 다 끝마쳤다”라고 하였다. 이 14년(412) 말(末)을 준해 보면, 구마라집은 아직 입적하지 않았다. 또 승조(僧肇)가 진나라 왕 요흥(姚興)에게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올리면서 그 표(表)에서 말하기를 “나는 구마라집 문하(門下)에 있은 지 10여 년입니다”라고 하였다. 만일 구마라집이 4년(402)에 경을 번역하였고, 11년(409)에 입적하였다 하면, 그 동안의 기간은 8년이어서 10년이 다 차지 않았는데, 어떻게 문하에 있은 지 10여년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홍시 연간(399~415)에 입적하였다는 것만을 알 수 있으며, 그 연월일을 확정할 수는 없다 하겠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낸 경의 부권(部卷)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어 다소 일정하지 않다. 『장방록(長房錄)』 중에는 그 수가 더욱 많아 이제 자세히 참고하여 점검해 보면, 이 많은 경들이 따로 파생한[別生] 것이며, 또는 한 경본(經本)에 여러 개의 이름이 있고, 혹은 기록한 이들의 착오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 자세한 것은 아래와 같으므로, 이제 모두 삭제하였다.

십송률(十誦律) 61권『승우록』에서는 “구마라집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이전의 58권은 구마라집이 통역度語하였으므로, 구마라집이 바로 번역한 것은 아니며, 마지막 3권은 비마라차(卑摩羅叉)가 이어서 번역하여 뒤에다 붙였다. 이미 나머지의 기록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구마라집의 번역으로 기재하지 않았다.
방광반야바라밀경(放光般若波羅蜜經) 20권장방은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 『방광반야』의 범본(梵本)과 『대품(大品)』은 동본(同本)이다. 『대품』을 번역할 때에는 요흥(姚興)이 구경(舊經)을 잡고, 구마라집이 신본(新本)을 번역하여 낸 것이다. 만일 『방광반야』를 구마라집이 번역했다 한다면, 그 구경은 어느 경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대품』은 신본이요, 『방광반야』는 구경(舊經)임을 알 수 있는데, 이 경을 거듭 2본(本)으로 보고 기재하는 것은 지나친 착오다.
반야경론집(般若經論集) 20권장방은 “『오록(吳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 『경론집』은 여산(廬山)의 혜원(慧遠)법사가 『대지도론(大智度論)』의 문구가 너무 번거로워서, 초학자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에 번거롭고 어지러운 것을 깎아내어 질박한 문장을 근본에 맞게 해서, 20권으로 지은 것이다. 또한 『대지론요략(大智論要略)』, 또는 『석론요초(釋論要抄)』라고도 한다. 이것은 혜원이 『대지도론』의 요점을 간략하게 추린 것이다. 그러므로 구마라집이 따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선법요(禪法要) 3권하주(下注)에 “먼저 번역한 홍시(弘始) 원년(399)의 책을 거듭 교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승예(僧叡)가 지은 서문에서도 “먼저 번역한 책을 거듭 교정하였다”라고 하였으므로, 두 가지 이름을 기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승예가 지은 경 서문에 의거하면, 곧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아란야습선법경(阿蘭若習禪法經) 2권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혹은 경(經)자가 없다.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과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이제 말하자면 그렇지 않으니, 이는 곧 『좌선삼매경』의 다른 이름別名이다. 그 문구를 찾아보면 처음과 끝이 아주 같다. 이 경은 처음 번역되어 나온 것이며, 교정한 것이 아니다.
낙영락장엄경(樂瓔珞莊嚴經) 1권장방은 “『이곽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경의 후기(後記)에 준하면, 이 경은 담마야사(曇摩耶舍)가 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의 번역이 아니므로, 이제 담마야사(曇摩耶舍)의 목록에다 기재한다.
실상론(實相論) 1권『고승전』에서는 “구마라집이 요흥(姚興)을 위하여 2권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이 논은 범본의 번역이 아니기 때문에 기재하지 않는다.
왕고성화불국원행법전경(往古性和佛國願行法典經)혹은 생화(生和)라고 쓰기도 한다. 『문수불토엄정경(文殊佛土嚴淨經)』에서 나왔다.
불경해철시방경(佛𡄇咳徹十方經)
불제화출보살경(佛齊化出菩薩經)
마업경(魔業經)
과거무변광정불토경(過去無邊光淨佛土經)
허공장보살문지경(虛空藏菩薩問持經)
득기공덕경(得幾功德經)또한 『득기복경(得幾福經)』이라고도 한다.
과마법계경(過魔法界經)
태백마왕견신경(太白魔王堅信經)
불제자화마자게송경(佛弟子化魔子偈頌經)
개화마경(開化魔經)
마왕변신경(魔王變身經)『불경해철시방경』 이하 10경은 모두 『대집(大集)』에서 나왔다.
관세음경(觀世音經)『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다.
다라니법문육종동경(陁羅尼法門六種動經)
미륵보살본원대시성불경(彌勒菩薩本願待時成佛經)
불변시회신경(佛變時會身經)
동방선화세계불좌진동경(東方善華世界佛座震動經)『다라니법문육종동경』 이하 4경은 모두 『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작왕경(雀王經)
불석위록왕경(佛昔爲鹿王經)
보살신위합왕경(菩薩身爲鴿王經)『작왕경』 이하 3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무량락불토경(無量樂佛土經)또한 국토(國土)라고도 쓴다. 『앙굴경(央崛經)』에서 나왔다.
불문아수륜대해유감경(佛問阿須倫大海有減經)『중아함경』에서 나왔다.
불적견천복륜상경(佛跡見千輻輪相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불심총지경(佛心惣持經)
수우왕경(水牛王經)
토왕경(兎王經)『불심총지경』 이하 3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미후여비공희치변경(獼猴與婢共戲致變經)
왕후위강랑경(王后爲蜣蜋經)『미후여비공희치변경』 이하 2경은 모두 『잡비유경(雜譬喩經)』에서 나왔다.
비구응공법행경(比丘應供法行經)승우(僧祐)는 주(注)에서 “「의경(疑經)」에 편입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역시 「의록(疑錄)」에 있다.
이상은 모두 35부 136권이다.

(3) 불야다라(弗若多羅)
십송률(十誦律) 58권홍시(弘始) 6년(404) 10월 17일에 중사(中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이진록(二秦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58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불야다라는 중국말로는 공덕화(功德華)라고 한다.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계행(戒行)으로 칭송받았으며, 삼장(三藏)에 두루 통하였다. 특히 『십송률』 부(部)에 정통하여 외국에서는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미 성과[聖果]12)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홍시 10년(408)에 석장(錫杖)을 짚고 관중(關中)으로 들어왔다. 진(秦)나라 임금 요흥(姚興)은 상빈(上賓)의 예로 예우하였으며, 구마라집도 그 계행과 범절을 추종하고, 정중하고 공손한 태도에 각별히 존경하였다. 이에 앞서 경법(經法)은 비록 전해졌지만, 율장(律藏)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미 불야다라가 이 율부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가 다 사모(思慕)하고 있었다. 홍시 6년 갑진(甲辰, 404) 10월 17일에 상안(常安)의 중사(中寺)에 의학사문(義學沙門) 6백여 인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십송률』 범본(梵本)을 외우게 하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중국(秦) 말로 번역하였다. 번역의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가 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세상을 하직하였다. 대중들은 미처 대업(大業)이 끝나기 전에 장인(匠人)13)
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매우 비통해하고 한스러워 했다.
다음에는 서역의 사문 담마류지(曇摩流支)중국말로는 법락(法樂)이다.가 가업을 버리고 불도에 들어가, 오로지 율장(律藏)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홍시 7년(405) 가을에 관중에 도착하였다.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담마류지가 비니(毘尼 : 계율)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율부를 완성하기를 희망하였다. 곧 그에게 편지를 띄워 통호(通好 : 좋은 관계)하며 말하였다.
“불교가 흥기하여 먼저 상국(上國)에서 행해지고, 그 갈래가 나뉜 이후로 4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문의 계율에 있어서는 빠진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지난번에 서역의 도사 불야다라는 계빈 사람인데, 『십송률』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 법사는 달통한 재주와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이것을 통역하여 전[傳譯]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송률』의 글이 막 절반을 넘기 시작하였을 적에, 불야다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중도에서 그치게 되어, 대업을 완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개탄스럽고 한스러움이 매우 컸습니다.
인자(仁者)께서 이 귀중한 경을 가지고 몸소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만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운수가 이른 것이지 어찌 사람이 만든 일이겠습니까? 생각하건데, 도를 널리 펴고 중생을 감응시키는 때가 되었으니, 도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인색하지 않으시리라고 믿습니다.
만일 율학의 문도들을 위하신다면, 이 경본을 완성시켜서 청정한 행을 열어 보이고, 그들의 눈과 귀를 씻어 주시어, 처음 참여한 무리들이 위없는 나루를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거룩한 일[勝業]에 참여하려는 자들을 해와 달처럼 밝게 한다면, 이것은 곧 은혜가 깊고 덕이 두터워지리니, 사람과 신(神)들이 함께 감동할 것입니다. 부디 자비를 드리워 제가 이 편지를 보내는 뜻에 어긋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담마류지는 혜원의 편지를 받고, 요흥의 정성스러운 요청을 받게 되자, 이에 구마라집과 함께 이 『십송률』을 번역하여 마쳤다.
세밀히 연구하고 고증하여 계율의 조목을 조사하여 정했는데도, 구마라집은 오히려 문장이 번거롭고, 잘 되지 못하였다고 여겼다. 구마라집이 이미 입적하였기 때문에 다듬어 정리할 수 없었다.
담마류지는 상안의 대사(大寺)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혜관(慧觀)이 양도(揚都)로 오도록 요청하였다. 담마류지가 말하였다.
“그 땅에는 사람도 있고 법도 있으니, 충분히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율의 가르침이 없는 곳으로 가야 됩니다.”
이에 다른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는데, 그 뒤에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4) 불타야사(佛陁耶舍)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 1권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보살(菩薩)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허공잉경(虛空孕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의 별분(別分)이다. 삼장(三藏)은 뒤에 외국으로 돌아갔는데, 계빈국에서 이 경을 얻어 상인(商人)에게 맡기어 양주(涼州)로 보냈다. 석도혜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홍시 14년(412)에 번역을 시작하여 15년(413)에 마쳤다. 양주(涼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전역(傳譯)하였고, 진(秦)나라 사문 도함(道含)이 받아썼다. 승예(僧叡)의 『이진록』과 『승우록』과 『고승전』 등에 보인다.
사분율(四分律) 60권또한 『담무덕률(曇無德律)』이라고도 한다. 본래 번역한 권수는 45권, 또는 40권, 또는 44권으로 되어 있다. 지금 또한 70권으로 되어 있는 것은, 홍시 10년(408)에 중사(中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는데, 혜변(慧辯)이 전역(傳譯)하였다.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사분승계본(四分僧戒本) 1권혹은 승(僧)자가 없기도 한다. 또한 『담무덕계본(曇無德戒本)』이라고도 한다. 『진세잡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4부 84권이며, 그 경본은 모두 있다.

사문 불타야사는 중국에서는 각명(覺名)이라고 하며, 또는 각칭(覺稱)야사(耶舍)는 곧 명칭(名稱)을 뜻한다. 『고승전』에서는 각명(覺明)이라고 번역하였는데, 뜻이 조금 어긋난다.이라고도 한다. 계빈국 사람이다. 바라문(婆羅門) 종족으로서 세속에 있을 때는 외도(外道)를 섬겼다. 한 사문이 그의 집으로 가서 걸식을 하자, 불타야사의 아버지는 성을 내며 사람을 시켜 사문을 구타하게 하였는데, 갑자기 그 아버지의 손과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무당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현인(賢人)을 범한 죄로 귀신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즉시 이 사문을 청하여 정성을 다하며 참회하였더니, 며칠 후에 문득 병이 나았다. 이로 인하여 불타야사를 출가시켜 그 사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당시 불타야사의 나이는 13세였는데, 한번은 스승을 따라 멀리 행각을 하다가 광야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스승은 빨리 달아나 피하려 하였으나, 불타야사가 말하였다.
“이 호랑이는 이미 배가 불러 필시 사람을 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잠시 후 호랑이는 사라졌다. 그리고 앞으로 가다 보니 과연 호랑이가 먹다 남긴 고기가 보였다. 스승은 속으로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15세가 되어 경을 외웠는데, 하루에 5, 6만 언(言)을 암송하였다. 그러나 거주하는 사찰에서 항상 밖으로 분위(分衛 : 걸식)를 나갔기 때문에, 읽고 외우는 일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한 나한(羅漢)이 그의 총명하고 영민한 것을 소중히 여겨, 항상 밥을 빌어다 그를 공양하였다.
19세가 되자 대승과 소승의 경전 수백만 언을 암송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대쪽같고 오만하여 꽤나 지견(知見)이 있는 것으로 자처하여 자기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여러 승려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하여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에 대한 깊은 원한을 잊어버렸다.
나이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가 되어서도 계단(戒壇)14)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3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사미(沙彌)로 있었다. 외삼촌에게 오명(五明)15)의 여러 논(論)을 배우고, 세간의 법술(法術)을 많이 익혔으며,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항상 독송에 힘써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언제나 단정히 앉아서 뜻을 사유하였고,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그가 오로지 정진함은 이와 같았다.
후에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렀는데, 그 당시 태자는 달마불다(達摩弗多)중국말로는 법자(法子)라고 부른다.였다. 그는 불타야사의 용모가 단아한 것을 보고 지내온 내력을 물었다. 불타야사의 응답이 맑고 그윽한 멋[淸雅]이 있었다. 태자는 기뻐하면서 그를 궁궐로 청하여 공양하고 융숭하게 접대하였다. 구마라집이 뒤에 사륵국에 이르러 불타야사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구마라집은 어머니를 따라 동쪽으로 돌아갔으나, 불타야사는 그대로 사륵국에 머물렀다. 얼마 후 사륵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였다.
당시 부견(符堅)은 여광(呂光)을 파견하여 구자국을 공격하게 하였다. 구자왕은 급히 사륵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므로, 사륵왕은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구하러 갔다. 불타야사로 하여금 남아서 태자를 보필하도록 하고 뒷일을 맡겼다. 그러나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구자국이 함락되었으므로, 사륵왕은 돌아와서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이에 불타야사는 한탄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구마라집과 서로 만난 지는 오래이지만, 아직 회포를 다 풀지 못했는데, 그가 갑자기 타향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서로 만날 것을 기약하겠느냐?”
불타야사는 10여 년을 머무른 뒤에 왕이 죽고 나자, 구자국으로 가서 법화(法化)16)를 매우 성대하게 하였다. 그때 구마라집은 고장(姑臧)에 있었는데, 편지를 보내 불타야사를 청하였다. 양식을 싸 가지고 떠나려고 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만류하였으므로 다시 1년여 더 머물렀다.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구마라집을 찾아가겠다. 비밀리에 행장을 꾸려 밤중에 출발하여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된다.”
제자가 말하였다.
“내일 아침 추격해 와서 다시 송환되는 것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불타야사는 곧 맑은 물 한 사발을 가져다 약을 타서 수십 언(言)의 주문을 외운 뒤에, 제자에게 그 물로 발을 씻게 하고는 곧바로 야밤에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까지 수백 리를 갔다. 그리고는 제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제자가 대답하였다.
“오직 몹시 세찬 바람 소리만 들리고 눈에서 눈물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불타야사는 또 주문을 외운 물로 발을 씻게 하고는 머물러 쉬었다. 다음날 아침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뒤쫓았으나, 거리가 이미 수백 리나 떨어져 미치지 못하였다. 고장에 도착하였으나 구마라집은 이미 상안(常安)으로 들어간 뒤였다.
구마라집은 그가 고장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요흥(姚興)에게 권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으나, 요흥은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얼마 후에 구마라집에게 명하여 경장(經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교법을 널리 선양하려면 글 뜻을 두루 통달하게 되어야 합니다. 빈도(貧道 : 자신을 낮춘 말)는 비록 경전의 글을 외울 수는 있지만, 아직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오직 불타야사만이 경을 깊이 통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고장에 있으니, 원컨대 조칙을 내리시어 그를 불러서, 한 마디 말을 세 번 상세하게 살피고 나서, 붓을 들어 미묘한 말씀을 빠뜨리지 말게 하시고, 천 년의 세월 뒤에도 신뢰를 받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요흥은 구마라집의 말을 따라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불타야사에게 후한 선물을 주며 초빙하였다. 그러나 모두 받지 않고 오지 않았으므로, 거듭 편지를 보내 돈독히 회유하였다. 그제야 상안에 도착하니, 요흥이 몸소 나가 영접하고 문안하였다. 그리고는 따로 소요원에 신성(新省)을 세우고 4사(四事)를 공양하였으나, 모두 받지 않고 때가 되면 걸식하여 하루에 한 끼니를 들 뿐이었다.
당시 구마라집은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한 달 남짓 동안 의문이 나서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붓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타야사가 이르고 나서는 함께 검증하여 결정을 하게 되자, 문장의 이치가 바로 잡혀져서 도인과 속인 3천여 인이 모두 다 그 대요(大要)에 알맞음을 감탄하였다.
불타야사는 코밑수염이 붉고 『비바사(毗婆沙)』를 능숙하게 알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붉은 코밑수염의 비바사라고 불렀으며, 또 구마라집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대비바사(大毗婆沙)라고도 호칭하였다. 사부대중의 공양으로 의발(衣鉢)과 침구[臥具]가 세 칸 집에 가득히 찼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흥은 그 공양들을 팔아서 성의 남쪽에 절을 지었다.
전에 불타야사가 『담무덕률(曇無德律)』을 암송하였는데, 사례교위(司隷校尉) 요상(姚爽)혹은 요석(姚奭)이라고도 한다.이 불타야사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요흥은 누락되거나 잘못된 것이 있을까 의심하여, 불타야사에게 시험삼아 강(羌:西域)의 약방문을 각각 40여 지(紙) 가량을 암송하게 하고, 사흘 후에 그것을 암송해 보게 하였는데, 옆에서 책을 잡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대중들은 그 기억력이 뛰어남에 탄복하였다.
곧바로 홍시 10년 무신(戊申, 408)에 『사분율(四分律)』과 『장아함경(長阿含經)』 등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15년 계축(癸丑, 413)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마쳤다. 양주(涼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진(秦)나라 말로 번역하였고, 도함(道含)이 받아 적었으며, 번역을 다 마치자 역장(譯場)을 해산하였다.
요흥은 불타야사에게 비단 만 필을 보시하였는데, 모두 다 받지 않았다. 축불념과 도함에게는 각각 비단 천 필을 보시하고, 명덕(明德) 사문 5백 인에게도 모두 후하게 보시하였다.
불타야사는 뒤에 계빈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어느 곳에서 입적했는지는 알 수 없다.『사분률(四分律)』 서문에는 “임진년(壬辰年, 392)에 진(晋)나라 사문 지법령(支法領)이 서쪽으로 유사(流沙)를 건너 멀리 천축(天竺) 길을 가 우전(于塡)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담무덕부(曇無德部)의 요체를 체득한 대승 삼장 불타야사를 만났다. 그는 문재가 아름답고 견문이 넓으며, 경ㆍ율을 밝게 정통하였다. 삼장은 방등(方等)을 모두 훤히 암송하였고, 그 나라에서 모든 경전을 널리 수집하여 정사(精舍)에 두었다. 무신년(戊申年, 408)에 처음 진(秦)나라에 들어오자, 진나라 임금 요흥(姚興)이 기뻐하면서 맞이하였다. 곧 그 해에 청하여 율장(律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때 계율을 지닌 사문 3백여 인을 모아서 장안의 중사(中寺)에서 번역하였는데, 곧 지법령의 제자 혜변(慧辯)이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임진년은 곧 진나라 건초(建初) 7년(392)이고, 무신년은 곧 홍시 10년(408)이다. 또 어떤 이는 “불타야사와 축불념이 지법령이 가지고 온 범본(梵本)을 함께 교감(校勘)한 후에 번역하여 냈다”고하였다. 여러 설들이 조금씩 다른데, 누가 정확한지 자세하지 않다17). 또 승조(僧肇)의 『장아함경』 서문과 『고승전(高僧傳)』에서는 모두 『사분율(四分律)』을 홍시 12년(410)에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부(部)가 다 끝났을 때를 근거하면서 말한 것 같다.

(5) 담마야사(曇摩耶舍)
차마경(差摩經) 1권동진(東晋) 융안(隆安) 연간(397~401)에 광주(廣州)에 도달하여 백사사(白沙寺)에서, 청신녀(淸信女) 장보명(張普明)을 위하여 이 경을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마땅히 『진록(晋錄)』에 편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진(秦)나라에 덧붙인 것도 있다. 『고승전』과 『장방록』에 보인다.
낙영락장엄방편품경(樂瓔珞莊嚴方便品經) 1권일명 『전여신보살문답경(轉女身菩薩問答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竺法護)의 『순권방편경(順權方便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서는 구마라집의 번역이라 하였으나, 경 후기에 준하여 담마야사의 번역이라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싣는다.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毗曇論) 22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20권, 또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담마굴다(曇摩崛多)와 함께 석양사(石羊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석도표(釋道標)가 서문을 지었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3부 24권이다.처음의 1부 1권은 궐본이고, 뒤의 2부 23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담마야사는 중국말로는 법칭(法稱)『고승전』에서는 법명(法明)이라 번역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는다.이라고도 한다. 계빈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14세가 되어서는 불야다라(弗若多羅)도 그를 인정해주어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다. 성장하여서는 기백이 높고 시원하였으며, 전아하고 신령스런 지혜가 있었다. 경률(經律)을 두루 보아 훤히 깨닫는 것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생각은 팔선(八禪)18)을 닦는데 있었고, 마음은 칠각(七覺)19)을 공부하는[遊學]데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부두바태(浮頭婆駄)20)라고 하였다. 산과 호수에서 홀로 수행하면서도 호랑이나 외뿔소를 피하지 않았다. 혼자 거처하여 사유(思惟)하면서 밤과 낮을 잊었다. 일찍이 나무 아래서 수행하며 늘 스스로를 엄하게 꾸짖었다.
“나이 30에 이르도록 아직 과위(果)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게으른 것이냐?”
이에 여러 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정진하고 괴로움을 겪으며 지은 죄를 참회하였다. 이어 꿈에 박차천왕(博叉天王)21)을 뵈었는데, 그가 말하였다.
“사문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널리 교화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하거늘, 어찌 자질구레한 예절[小節]에 얽매여 홀로 자기만을 좋게 할 뿐인가? 도(道)는 여러 인연을 빌려 다시 때를 기다려서 무르익게 되는데, 분수가 아닌데도 억지로 구하면 죽도록 하여도 증험이 없게 된다.”
꿈에서 깨어나 스스로 생각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도를 전수하고자 하였다. 그는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나라를 거쳐 진(晋)나라 융안(隆安) 연간(397~401)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毗婆沙律)』을 잘 외웠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대비바사(大毗婆沙)라고 하였다.
그때 청신녀(淸信女) 장보명(張普明)이 있었는데, 불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담마야사는 그녀를 위하여 부처님 생애의 연기(緣起)에 대하여 설하고, 아울러 『차마경(差摩經)』 1권을 번역해 내었다.
의희(義凞) 연간(405~418)에 상안(常安)으로 갔다. 당시 요흥(姚興)이 신하의 신분으로 제왕의 칭호(稱號)를 함부로 사용僭號]하면서도, 불법을 매우 존숭하고 있었다. 담마야사가 그곳에 이르자 매우 특별하게 예우를 하였다. 마침 천축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중국말로 법장(法藏)가 관중(關中)으로 들어왔는데, 동기상구(同氣相求)22)라 완연히 옛 친구들 같았다. 이로써 담마야사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毗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 9년 정미(丁未, 407)에 범문(梵文)을 써내기 시작하여, 16년 갑인(甲寅, 414)에 이르러 멈췄다. 경사(經師)들은 점차로 중국말[秦語]을 익히어 스스로 번역하게 되어, 17년 을묘(乙卯, 415)에야 비로소 끝마쳤으니, 모두 22권이었다. 진나라 태자 요홍(姚泓)이 친히 이치의 의미를 관리하였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하여 서문을 썼다. 또 『낙영락경(樂瓔珞經)』 1권을 번역하여 냈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에서 노닐다가 신사(辛寺)에 머물면서, 선법(禪法)을 크게 펼쳤다. 편안하게 공부하던 빈객[賓]들이 가시덤불을 헤치고[披榛] 이른 자가 3백여 인이나 되었다. 무릇 도착한 선비나 서민들은 비록 그 전에는 신심(信心)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를 보고 나면 모두가 공경하고 마음으로 따랐다. 담마야사는 스스로 말하길 ‘한 스승과 한 제자가 있어 도를 익혀 모두 아라한[羅漢]이 되었다하니, 전수(傳授)한 사람은 그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일찍이 바깥문[外門]에서 문을 닫고 좌선(坐禪)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5인의 사문이 그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사문이 나무 끝에서 날아오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이따금 있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신명(神明 : 신령)과 교유[交接]하면서도 이를 숨기고 어리석은 속인들과 함께 하였다. 비록 도의 자취[道迹]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때 사람들은 모두 그는 이미 성과(聖果)23)에 올랐다고 말하였다. 송(宋)나라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서역으로 돌아갔는데, 언제 입적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8) 서진(西秦) 시대
진(秦)의 걸복(乞伏)씨는 완천(菀川)에 도읍하고 있었다.또한 서진(西秦)이라고도 한다. 걸복국인(乞伏國仁)시호(諡號)는 선렬왕(宣烈王)이다. 건의(建義) 원년 을유(乙酉, 385)로부터 걸복모말(乞伏慕末)시호가 없다. 영홍(永弘) 4년 신미(辛未, 431)에 이르기까지 무릇 4주(主) 47년을 지나는 동안에 사문 1인이 번역한 경과 3진대(三秦代)의 신(新)ㆍ구(舊) 실역(失譯) 경ㆍ율ㆍ논 등은 총 56부 110권이다.그 중에서 32부 79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24부 31권은 궐본이다.

걸복진(乞伏秦)의 사문(沙門) 석성견(釋聖堅)15부 24권. 경(經)
삼진대(三秦代)의 신ㆍ구의 모든 실역경[新舊諸失譯經]총41부 86권인데, 7부 7권은 구집(舊集)이고, 34부 79권은 새로 덧붙인 것이다.

(1) 석성견(釋聖堅)
나마가경(羅摩伽經) 3권이 경은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 일부분의 이역(異譯)이다. 『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태자수대나경(太子須大拏經) 1권『육도집경(六度集經)』 제2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강릉(江陵)의 신사(辛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유상(庾爽)이 받아썼다. 혹은 『수달나경(須達拏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始興錄)』과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마땅히 진세(晋世)에 편입시켜야 하나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진(秦)에 덧붙인 것이다.
섬자경(睒子經) 1권일명 『효자섬경(孝子睒經)』ㆍ일명 『보살섬경(菩薩睒經)』ㆍ일명 『불설섬경(佛說睒經)』ㆍ일명 『섬본경(睒本經)』ㆍ『효자은경(孝子隱經)』 등 무릇 여섯 가지 이름이 있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육도집경(六度集經)』 제2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마하찰두경(摩訶刹頭經) 1권또한 『관불형상경(灌佛形像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관불경(灌佛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관세불형상경(灌洗佛形像經)』과 동본이다. 『시흥록』에 보인다.
무애제지법무경(無崖際持法門經) 1권일명 『무제경(無際經)』이라고도 한다. 『존승보살소문경(尊勝菩薩所問經)』과 같은 동본이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연도속업경(演道俗業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이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법상록』에 보인다.
제공재환경(除恐災患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백연(帛延)이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ㆍ『보창록』ㆍ『법상록』 세 목록에 보인다.
현수경(賢首經) 1권일명 『현수부인경(賢首夫人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에 보인다.
아난분별경(阿難分別經) 1권또한 『아난문사불길흉경(阿難問事佛吉凶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부인우고경(婦人遇辜經) 1권일명 『부우대경(婦遇對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과 『법상록』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의 경들은 현재 있고, 이하는 궐본이다.
방등주허공장경(方等主虛空藏經) 8권또한 『허공장소문경(虛空藏所問經)』, 또는 『권발보살장엄보리경(勸發菩薩莊嚴菩提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 「허공장품(虛空藏品)」의 이역이다. 『진세잡록(晋世雜錄)』과 『법상록』에 보인다. 『나마가경(羅摩伽經)』과 동본이라 하였으나, 아니다.
보살소생지경(菩薩所生地經) 1권일명 『마갈소문경(摩竭所問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조록(趙錄)』에 보이는데, 앞뒤의 어느 조(趙)인지는 모르겠다. 기록한 사람에 따라 서진(西秦)에 덧붙였다. 『시흥록』에 보인다.
패경(孛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 보인다.
동가섭해난경(僮迦葉解難經) 1권 또한 『동가섭경(童迦葉經)』이라고도 한다. 『구마가섭경(鳩摩迦葉經)』과 동본이다. 승우(僧祐)는 “『장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유상(庾爽)이 받아썼다. 『시흥록』ㆍ『왕종록(王宗錄)』ㆍ『보창록』ㆍ『지민도록(支敏度錄)』 등 네 목록에 보인다.
칠녀본경(七女本經) 1권또한 『여본심명경(女本心明經)』. 또는 『칠녀경(七女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민도의 『경론도록(經論都錄)』에 보인다.
이상은 15부 24권이다.『부인우고경(婦人遇辜經)』 이상의 10부 12권은 현재 경본에 있고, 『방등주허공장경(方等主虛空藏經)』 이하 5부 12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성견은 혹은 법견(法堅)이라고도 하고, 또는 견공(堅公)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 나열하여 둔다. 도량이 크고 넓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에 마음이 있었다.
걸복진(乞伏秦)의 태초(太初) 연간(388~408)에 하남국(河南國)에서 건귀(乾歸)시호는 무원왕(武元王)이다.를 위하여 『나마가경(羅摩伽經)』 등 15부를 번역하였다. 성견이 돌아다니면서 교화한 곳을 찾아보면, 가는 곳마다 경을 번역해 냈으며, 일정한 처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시대[世代] 목록에 덧붙이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법상(法上)의 총주(摠注)에 의거하여 걸복(乞伏)의 진 시대[秦世]의 목록에 편입시켜 둔다.

(2) 삼진(三秦) 시대의 신구실역경(新舊失譯經)
사미라경(沙彌羅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오모자경(五母子經)』과 동본이다.
살화살왕경(薩惒薩王經) 1권
아다삼매경(阿多三昧經) 1권혹은 아타阿陁라고도 쓴다.
타현왕경(陁賢王經) 1권
발타회과경(颰陁悔過經) 1권
방등결정(方等決經) 1권
비구이사경(比丘二事經) 1권『승우록』에는 “삼사(三事)”라고 하였다. 이 『비구이사경』 이상의 7부는 『승우록』에서는 “안공(安公)의 『관중이경(關中異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7부 7권이다.처음의 『사미라경』은 지금 현재 경본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궐본이다.

『장방록(長房錄)』에는 “이 경들은 모두 사문 승우(僧祐)의 『출삼장집록(出三藏集錄)』과 석도안(釋道安)이 기록한 『관중이경(關中異經)』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도로 3진세(三秦世) 때의 목록에 덧붙여 편입시켜서, 모두 번역한 이와 시대와 처소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장방록』에는 다시 “범본경(梵本經) 4권각주(脚注)에는 “이 경들은 장안(長安)에서 번역되어 나온 것 같다”라고 하였다.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후한(後漢)의 실역록(失譯錄)에 이미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기재하면 중복하여 올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삭제하여 기재하지 않는다.
이하는 새로 이 목록에 덧붙인다.

천왕태자벽라경(天王太子辟羅經) 1권혹은 천왕(天王)이란 글자가 없기도 한다. 또한 『태자비라경(太子譬羅經)』이라고도 한다.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 1권
대진보적유일경(大珍寶積惟日經) 1권
타가라문보살경(墮迦羅問菩薩經) 1권
아난위고도주경(阿難爲蠱道呪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아난위고도소주경(阿難爲蠱道所呪經)』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이 장경 속에 있는 『마등녀경(摩鄧女經)』이 아닌가 한다.
왕사성영취산경(王舍城靈鷲山經) 1권『구록』에서는 “『왕사성영취산요진경(王舍城靈鷲山要眞經)』이다”라고 하였다.
사도경(思道經) 1권
불재죽원경(佛在竹園經) 1권
법위인경(法爲人經) 1권
도의경(道意經) 1권
아이비구경(阿夷比丘經) 1권
팔덕경(八德經) 1권이 경은 『해팔덕경(海八德經)』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선덕경(善德經) 1권
마하건타유위라진신비구등도경(摩訶揵陁惟衛羅盡信比丘等度經) 1권『구록』에서는 “『진신비구경(盡信比丘經)』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14부 14권이다.처음의 『천왕태자벽라경』만이 경본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궐본이다.

『승우록』에서는 “이 경들은 모두 안공(安公)의 『관중이경(關中異經)』에 있다” 하였으며,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궐본이라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승우가 기재한 안공의 『관중이경』은 총 24부 24권인데, 그 가운데 7부는 『장방록』에 나열한 것과 같다. 지금 14경을 다시 실렸음으로 앞의 경까지 합하면 21부다. 나머지 3부는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 모두 번역한 이[譯主]를 표시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기재하지 않는다.

대보적경(大寶積經) 1권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다. 제43회(會)에 해당하는데, 이름을 고쳐서 「보명보살회(普明菩薩會)」라고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마하연보경(摩訶衍寶經)』과 『엄불유일마니보경(嚴佛遺日摩尼寶經)』 두 경과 동본이역이다.
도제불경계지광엄경(度諸佛滰界智光嚴經) 1권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불화엄입여래덕지부사의경계경(佛華嚴入如來德智不思議境界經)』과 같은 동본이다. 『구록(舊錄)』에서는 “『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체불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과 같은 동본이다”라고 하였는데, 전혀 다르다.
대비분타리경(大悲分陁利經) 8권또한 『대승비분타리경(大乘悲分陁利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무참(曇無讖)의 『비화경(悲華經)』과 같은 동본이다.
대금색공작왕주경(大金色孔雀王呪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불설대금색공작왕주경(佛說大金色孔雀王呪經) 1권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 두 경은 동본이다.
대방광여래비밀장경(大方廣如來秘密藏經) 2권『대주록(大周錄)』에서는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과 동본이다”라고 하였으나, 아니다.
금강삼매본성청정불괴불멸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 1권또한 『금강청정경(金剛淸淨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라고 하였고, 후한(後漢)의 실역(失譯)에 다시 기재되어 있으나, 모두 다 아니다. 지금 그 문구를 찾아보면, 진(秦)나라 때 번역과 같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싣는다.
사자월불본생경(師子月佛本生經) 1권『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이제 그 문구를 찾아보면, 이는 축법호의 번역이 아니다. 진(秦)나라 때의 번역과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에 옮겨 싣는다.
십길상경(十吉祥經) 1권
일체지광명선인자심인연불식육경(一切智光明仙人慈心因緣不食肉經) 1권
정업장경(淨業障經) 1권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20권
출가공덕경(出家功德經) 1권이 경은 『현우경(賢愚經)』에서 간추려 역출한 경이 아니다.
비니모경(毗尼母經) 8권또한 『비니모론(毗尼母論)』이라고도 한다.
살바다비니비바사(薩婆多毗尼毗婆沙) 9권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 3권혹은 부(部)자가 없기도 하다. 또한 4권으로 되어 있다.
벽지불인연론(辟支佛因緣論) 2권
십팔부론(十八部論) 1권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부이집론(部異執論)』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 등은 모두 “진제(眞諦)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아니다.
불입열반밀적금강력사애련경(佛入涅槃密迹金剛力士哀戀經) 1권
무명라찰집(無明羅刹集) 1권또한 『무명라찰경(無明羅刹經)』이라고도 한다. 혹 2권으로 되어 있다.

이상 20부 65권은 모두 『입장경(入藏經)』에서 보인다. 이 경들은 진(秦)나라 때에 번역되어 나온 것과 같다.여러 경본에는 모두 진나라 시대 말秦言이라는 글자가 있다. 여러 「실역록(失譯錄)」에 모두 아직 실려 있지 않으므로, 지금 이 「진록(秦錄)」에 덧붙이는 것이니, 빠져 없어지는 것을 면하게 하고 싶어서이다.
앞의 옛 실역경[舊失譯經] 7부 7권과 새로 덧붙인 안공(安公)의 『관중이경(關中異經)』 등을 합하면, 총 41부 86권인데, 모두 3진(秦)의 실역(失譯)에 실어 둔다.

9) 전량(前涼) 시대
전량의 장(張)씨는 고장(姑臧)에 도읍하고 있었다.새로 기재된 다른 목록에는 연대(年代)가 없고 『견란록(甄鸞錄)』에 의하면 대부분 진(晋)의 연호를 따르고 있다. 장궤(張軌)시호(諡號)는 무왕(武王)이다. 영녕(永寧) 원년 신유(辛酉, 301)로부터 천석(天錫)진(秦)에서 표기대장군양주목(驃騎大將軍涼州牧)으로 봉(封)하였다. 함안(咸安) 6년 병자(丙子, 376)에 이르기까지 무릇 8주(主) 76년을 지나는 동안 외국의 우바새(優婆塞) 1인이 경전을 번역하였으니, 4부 6권이다.그 중에서 1부 1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3부 5권은 궐본이다.

전량(前涼)의 우바새 지시륜(支施崙)4부 6권. 경

(1) 지시륜(支施崙)
수뢰경(須賴經) 1권조위(曹魏)의 백연(白延)과 오(吳)나라 지겸(支謙)과 송(宋)나라 공덕현(功德賢)이 번역해 낸 『수뢰경(須賴經)』과 동본이다. 경 후기(後記)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었다. 함안(咸安) 3년(373)에 나왔다.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 2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세고(安世高)와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과 『보적경』 「선주의회(善住意會)」 등과 동본이다. 『수릉엄경(首楞嚴經)』 후기(後記)에 보인다. 함안 3년(373)에 번역되어 나왔다.
상금광수경(上金光首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진(晋)나라 축법호의 『대정법문경(大淨法門經)』과 수(隋)나라 야사(耶舍)의 『대장엄법문경(大莊嚴法門經)』과는 동본이다. 함안 3년(373)에 번역되어 나왔다. 『수능엄경』 후기에 보인다.
수릉엄경(首楞嚴經) 2권여덟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지참(支讖)과 오(吳)나라 지겸(支謙)과 위(魏)나라 백연(白延)과 진(晋)나라 축법호 등이 번역하여 낸 『수능엄경』과 동본이다. 함안 3년에 번역되어 나왔다. 경 후기에 보인다.
이상은 4부 6권이다.『수뢰경』 1부 1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여환삼매경』 등 5부 3권은 궐본이다.

우바새 지시륜은 월지(月支) 사람이다. 여러 경전을 널리 알았고, 특히 방등경[方等]을 잘 알았다. 중생을 교화하는데 뜻을 두고, 아직 법을 듣지 못한 곳에 법을 전하였다. 경전을 받들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양(涼)나라 땅에 도달하였다. 장공(張公)은 그를 만나보고는 존중하게 되었으며, 청하여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함안(咸安) 3년 계유(癸酉, 373)진(晋)나라 연호를 따른다.에 양주(涼州) 주내(州內)의 정청당(正廳堂) 뒤 잠로헌(湛露軒)에서 『수뢰경(須賴經)』 등 4부를 번역하여 냈었다. 구자왕(龜茲王)의 세자(世子) 백연(帛延)이 말을 전하고, 상시(常侍) 서해(西海) 조숙(趙肅)과 회수령(會水令) 마역(馬亦)과 내시래(內侍來) 공정(恭政) 3인이 붓으로 받아썼으며, 사문 석혜상(釋慧常)과 석진행(釋進行)이 같이 있으면서 증의[證]하였다. 양주는 저절로 그 언어[辭]에 속했으므로, 문장을 더 꾸미지는 않았다. 『수뢰경』 후기와 『수능엄경』 후기에 나와 있다.전량(前涼) 대(代)에도 다시 경을 번역하여 냈을 것이니, 후배後進들은 그것을 만나게 되면 부디 계속하여 엮고 덧붙일지어다.

16) 북량(北涼) 시대
북량의 저거(沮渠)씨는 처음에 장액(張掖)에 도읍을 정했다가, 나중에는 고장(姑臧)으로 옮겼다. 몽손(蒙遜)시호(諡號)는 무선왕(武宣王)이다.의 영안(永安) 원년 신축(辛丑, 401)으로부터 무건(茂虔)위(魏)에서 하서왕(河西王)으로 봉(封)하다. 승화(承和) 7년 기묘(己卯, 439)에 이르기까지, 무릇 2주(主) 39년을 지나는 동안에, 승려들과 속인 9인이 번역하여 낸 경ㆍ율ㆍ논 등과 아울러 신집(新集)ㆍ구집(舊集)의 실역(失譯)한 모든 경은 총 82부 311권이다.그 중에서 25부 209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57부 102권은 궐본이다.

북량(北涼)의 사문 석도공(釋道龔)2부 12권. 경
사문 석법중(釋法衆)1부4권. 경
사문 승가타(僧伽陁)1부 2권. 경
사문 담무참(曇無讖)19부 131권. 경ㆍ율ㆍ집
안양후(安陽侯) 저거경성(沮渠京聲)1부 2권. 집
사문 부타발마(浮陁跋摩)1부 60권. 논
사문 석지맹(釋智猛)1부 20권. 경
사문 석도태(釋道泰)2부 4권. 논
사문 석법성(釋法盛)1부 1권. 경
신ㆍ구의 모든 실역경총 52부 75권인데, 그 중에서 5부 18권은 구집(舊集)이요, 48부 57권은 새로 덧붙인 것이다.

(1) 석도공(釋道龔)
보량경(寶梁經) 2권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44회(會)에 해당한다. 축도조(竺道祖)의 『하서록(河西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비화경(悲華經) 10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의 『한거경(閑居經)』 및 『대비분타리경(大悲分陁利經)』과 담무참(曇無讖)의 『비화경(悲華經)』 등과 동본이다. 장방은 “『고록(古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 경은 먼저 번역된 것을 석도공이 다시 삭제하여 고친 것 같다. 곧 담무참이 번역해 낸 경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이상은 2부 12권이다.앞의 『보량경』 1부 2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뒤의 『비화경』 1부 10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도공은, 마음을 비우고 널리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을 도(道)로 삼았다. 북량의 하서왕(河西王)저거몽손(沮渠蒙遜)의 참호(僭號)이다. 영안(永安) 연간(401~411)에 장액(張掖)에서 저거몽손을 위하여 『보량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2) 석법중(釋法衆)
대방등다라니경(大方等陁羅尼經) 4권혹은 대(大)자가 없기도 하다. 일명 『방등단지다라니경(方等檀持陁羅尼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바로 『단지다라니경(檀持陁羅尼經)』이라고도 한다. 축도조의 『진세잡록(晋世雜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4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중은 고창군(高昌郡) 사람이다. 역시 영안(永安) 연간(401~411)에 장액(張掖)에서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을 위하여 『대방등다라니경』 1부를 번역하였다. 보창록(寶唱錄)에서는 “고창군에 있으면서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자세하지 않다.

(3) 승가타(僧伽陁)
혜상보살문대선권경(慧上菩薩問大善權經) 2권일명 『대선권경(大善權經)』, 또는『혜상보살경(慧上菩薩經)』, 또는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이라고도 하는데, 이 네 가지 이름을 가진 경은 모두 같은 경본이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엄불조(嚴佛調)와 진(晋)나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하여 낸 『대선권경(大善權經)』과 『보적경(寶積經)』 「대승방편회(大乘方便會)」 등과 동본이다.
이상은 1부 2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승가타는 중국말로는 요선(饒善)이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중생을 제도하는데 뜻을 두었고, 중생을 교화하고 이끄는 일에 마음을 품고 있었다. 역시 영안(永安) 연간(401~411)에 장액에서, 저거몽손을 위하여 『대선권경』 1부를 번역하였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4) 담무참(曇無讖)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혹은 36권으로 되어 있다.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현시(玄始) 3년(414)에 번역하기 시작하여 10년(421) 10월 23일에 끝마쳤다. 그 범본(梵本)에는 3만 5천 게송偈□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 번역된 것은 다만 1만여 게송이니, 처음의 3분의 1에 그쳤을 뿐이다. 축도조의 『양록(涼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30권혹은 바로『대집경(大集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때의 지참(支讖)과 요진(姚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하여 낸 것과 동본이다. 혹은 29권, 또는 31권, 또는 32권, 또는 40권으로 되어 있다. 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온 경을 베끼면서 권(卷)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일정하지 않다. 축도조의 『양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대방광삼계경(大方廣三戒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 「삼률의회(三律儀會)」와 동본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비화경(悲華經) 10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대비분타리경(大悲分陁利經)』과 같은 동본이다. 축도조의 『하서록(河西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승우는 “『별록(別錄)』이다”라고 하고, 혹은 “도공이 번역하여 내었다”라고 하였다. 지금 도공과 지참이 동일한 경본을 두 곳에 모두 실었는데, 아마도 옳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한다.
금광명경(金光明經) 4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18품(品)이 있다. 축도조의 『하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새로 번역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과 같은 동본이다. 지금은 8권으로 된 경에 합쳐져 들어가 있다. 이 4권 본은 『산번록(刪繁錄)』에 있다.
대방등대운경(大方等大雲經) 6권일명 『대방등무상대운경(大方等無相大雲經)』, 또는 『대운무상경(大雲無相經)』, 또는 『대운밀장경(大雲密藏經)』, 또는 『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 또는 5권으로 되어 있다. 내원사(內苑寺)에서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예록僧叡』ㆍ『이곽록李廓』ㆍ『승우록僧祐』 세 목록에 보인다.
복중녀청경(腹中女廳經) 1권일명 『부장교녀경(不莊挍女經)』이라고도 한다. 『무구현녀경(無垢賢女經)』과 『전여신경(轉女身經)』 등과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10권혹은 경(經)자가 없으며, 혹은 논(論)이라고도 한다. 또한 『보살계경(菩薩戒經)』, 또는 『보살지경(菩薩地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8권으로 되어 있다. 『유가론(瑜伽論)』 「본지분(本地分)」의 보살지(菩薩地)에서 나왔다. 축도조의 『하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7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한다. 바로 『재가보살계경在家菩薩戒』이다. 혹은 5권, 또는 6권, 또는 10권으로 되어 있다. 현시(玄始) 15년 병인(丙寅, 426) 4월 23일 번역하기 시작하여, 7월 23일에 끝마쳤다. 사문 도양(道養)이 받아썼다. 경 후기(後記)와 『승우록』에 보인다.
보살계본(菩薩戒本) 1권「지지계품(地持戒品)」에서 나왔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대당(大唐)의 현장(玄奘)법사가 번역하여 낸 계본(戒本)과 같은 동본이다. 『별록(別錄)』에서는 “돈황(燉煌)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문타갈왕경(文陁竭王經) 1권『중아함경』 제11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불소행찬경전(佛所行讚經傳) 5권혹은 경(經)이라 하여 전(傳)자가 없기도 하고, 혹은 전(傳)이라고 하여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마명보살이 지었다. 또한 『불본행경(佛本行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경본이 현재 있고, 이하는 궐본이다.

승만경(勝鬘經) 1권또한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송(宋)나라 공덕현(功德賢)이 번역하여 낸 『승만경』과 『보적경』의 「승만부인회(勝鬘夫人會)」와 동본이다.
나마가경(羅摩伽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조위(曹魏)의 안법현(安法賢) 등이 번역해 낸 경과 동본이며, 다만 넓이거나 줄인 것廣略이 다를 뿐이다. 이 경은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일부분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능가경(楞伽經) 4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송(宋)나라 공덕현(功德賢)과 원위(元魏)의 보리류지(菩提留支)와 당(唐)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陁) 등이 번역해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수진천자경(須眞天子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의 축법호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오록(吳錄)』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며, 또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낸 경을 재차 번역한 것 같다”라고 하였다.
해룡왕경(海龍王經) 4권혹은 신(新)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해 낸 경과 동본이다. 현시(玄始) 7년(418)에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의 『하서록(河西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공덕보광보살경(功德寶光菩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보살계단문(菩薩戒壇文) 1권또한 『우바새계단문(優婆塞戒壇文)』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보살계우바새계단문(菩薩戒優婆塞戒壇文)』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9부 131권이다.『불소행찬경전』 이상의 12부 118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승만경』 이하의 7부 13권은 궐본이다.

사문 담무참은 담마참(曇摩懺)이라고도 하고, 담모참(曇謨懺)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범음(梵音)을 취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말로는 법풍(法豊)이라고 한다. 중인도(中印度) 사람이며, 바라문(婆羅門) 종족이다.
담무참은 여섯 살 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베 짜는 일[織]로 품을 팔아 담무참을 길렀다.
사문 달마야사(達摩耶舍)중국말로는 법칭(法稱)이라고도 한다.는 도인이나 속인의 종조로서 존경받고, 이양(利養)24)이 풍부함을 보고, 그의 어머니는 그것을 부러워하여, 담무참을 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10세 때 동학(同學) 여러 사람과 함께 진언[呪]을 읽었는데, 총명하고 민첩함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하루에 경전을 1만여 언(言)이나 암송하였다.
처음에는 소승을 배웠고, 오명(五明)의 여러 논(論)들을 두루 보았다. 그의 강설(講說)은 변론이 익숙하여 대항하여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 백두선사(白頭禪師)를 만나 함께 논의(論議 : 문답하여 사리를 밝히는 일)를 하였는데, 익힌 업이 이미 다른지라 서로 논쟁한 지 백 일[十旬]이나 하였다. 담무참이 아무리 날카롭게 일으켜 공박하고 힐난하여도, 백두선사는 끝내 수긍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담무참은 그의 정밀한 논리에 굴복하고는 백두선사에게 말하였다.
“제가 경전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선사는 곧 나무껍질에 쓰인 『열반경(涅槃經)』을 주었다. 담무참은 곧 이 경전을 읽어 보고는, 놀라면서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좁은[坎井] 식견으로 오랫동안 광대한 대승[大方]의 뜻을 모르고 헤맸구나.”
그리고는 대중을 모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침내 대승에 전념하게 되었다. 나이 20세가 되자 대승과 소승의 경전 2백만여 언(言)을 암송하였다.
담무참의 사촌 형은 코끼리를 잘 조련하였다. 그는 왕이 타던 귀가 흰 큰 코끼리를 죽게 하였다. 왕은 진노하여 그의 사촌 형을 죽이고 말하였다.
“감히 유해를 돌보는 사람이 있으면 삼족(三族)을 멸할 것이다.”
그의 친척들은 감히 가서 보는 자가 없었으나, 담무참은 가서 곡(哭)을 하고 그를 장사지냈다. 왕이 진노하여 담무참을 죽이려 하자, 담무참이 말하였다.
“왕께서는 법에 의거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고, 저는 친척이기 때문에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어느 쪽이나 다 대의(大義)를 어기지 않은 것인데, 어찌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곁에 있던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으나 담무참의 기색은 태연자약하였다.
왕은 그의 의지와 기개를 기특하게 여겨, 마침내 그를 머무르게 하고, 공양하였다. 담무참은 주술(呪術)을 훤히 이해하여, 행하는 바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그래서 서역에서는 그를 대신주사(大神呪師)25)라고 불렀다.
뒤에 왕을 수행하여 산에 들어갔는데, 왕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담무참은 은밀히 주문을 외워 돌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찬탄하여 말하였다.
“대왕의 은택에 감응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마른 돌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왕의 덕을 찬탄하였고, 때에 맞추어 비가 내려 매우 알맞게 혜택을 주니, 백성들은 칭찬하여 노래를 불렀다.
왕은 담무참의 도술을 기뻐하였으며 매우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다. 그러나 얼마 후 왕의 마음이 점차 소홀하여졌고, 그를 대우하는 것도 점점 박해졌다. 담무참은 성을 내며 말하였다.
“나는 마땅히 단지에 물을 담아 못으로 가서, 주문을 외워 용이 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천하를 크게 가물게 해야겠다. 그러면 왕은 반드시 주문을 청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용을 놓아 주어 비를 내리게 하면 대우하는 것이 다르게 될 것이다.”
드디어 단지를 가지고 용을 잡으러 갔는데, 이를 밀고(密告)한 사람이 있었다. 왕은 분노하여 담무참을 잡아들였다. 담무참은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대열반경(大涅槃經)』 본(本)의 앞부분 1 협(夾)과 아울러 『보살계경(菩薩戒經)』『지지경(地持經)』이다.과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가지고 구자국(龜茲國)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구자국에서는 대부분 소승만을 배워 『열반경』을 믿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고장(姑臧)으로 가서는 여관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경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경을 베개 삼아 잤는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끌어다 땅 위에다 두었다. 담무참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 이것을 도둑의 소행이라 생각하였다. 이 같은 일이 사흘 밤 동안 계속되고, 공중에서 말이 들렸다.
“이 경은 여래의 해탈(解脫)을 갈무리한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을 베개로 삼는가?”
담무참은 부끄러움을 깨닫고, 경을 특별히 높은 곳에다 두었다. 그날 밤에 그것을 훔치려는 자가 있었는데, 들려고 하여도 들려지지 않았다. 여러 도둑들이 함께 경본을 들어 올리려 하였으나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담무참이 경을 들어 올렸는데 조금도 무거워하지 않았다. 도둑들은 그것을 보고 담무참을 성인이라 여기고, 모두 와서 엎드려 사죄하였다.
그 당시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담무참의 명성을 듣고, 불러서 상면하고는 매우 후하게 접대하였다. 저거몽손은 평소에 대법(大法)을 받들어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으므로, 담무참을 청하여 경본을 번역 출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무참은 아직 중국말을 잘 알지 못했고, 또 그를 도와 전역(傳譯)할 이도 없었기 때문에, 이치를 어기게 될까 염려하여 즉시 번역하는 것을 수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무참은 중국어를 3년 동안 배우고서야 비로소 『열반경』 첫부분 10권을 번역하였다.
이때에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은 하서(河西) 지방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담무참이 경장(經藏)을 펴내자, 서로 깊이 추앙하여 존중하고, 범문(梵文)을 옮겨 바꾼 것을 혜숭이 받아 적었다. 도인과 속인 수백 인이 의심나는 것을 종횡으로 묻고 힐난하였으나, 담무참은 그때그때 알맞게 막힌 것을 해석하였으며, 걸리는 것이 없었다. 혜숭과 도랑 등은 다시 널리 여러 경전들을 번역 출간하기를 청하여, 차례로 『대집경[大集]』ㆍ『대운경[大雲]』ㆍ『비화경[悲華]』ㆍ『지지경[地持]』ㆍ『열반경[涅槃]』 등 총 19부를 번역하였다.
담무참은 『열반경』 본의 품수(品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조국으로 돌아가서 찾아서 구하였다. 그때 그는 모친상을 당하였으므로, 1년가량 더 머문 뒤에 우전국(于塡國)에 가서 경본을 얻어, 다시 고장(姑臧)으로 돌아와서, 이어 번역하여 4질(帙)이 되었다.
담무참은 현시(玄始) 3년 갑인(甲寅, 414)에 처음 번역을 시작하여 15년 병인(丙寅, 426)에 끝마쳤다.장방은 “현시 10년(421)에 마쳤다는 것은 『열반경』을 다 번역했을 때이고, 그 밖의 다른 경까지 마친 때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후기(後記)에 준하면, “병인년(丙寅年)에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곧 15년(426) 중간에도 오히려 경을 번역하였다는 것이 된다. 담무참은 의화(義和) 3년 계유(癸酉, 433) 3월에 입적하였으므로, 그 중간 6년간에도 의당 경을 번역하였을 것이나, 기록 중에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자세하지는 않다.
담무참은 일찍이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귀신이 마을에 들어오면 반드시 많은 재앙과 역병(疫病)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저거몽손은 믿지 않고, 몸소 자신이 귀신을 보고 증험하기를 원하였다. 담무참이 즉시 저거몽손에게 주술을 걸자, 저거몽손은 귀신을 보고 놀라며 두려워하였으므로 담무참이 말하였다.
“마땅히 정결히 하고 정성을 다하여 재계(齋戒)하고 신주(神呪)를 외워 역귀(疫鬼)를 쫓아내야 합니다.”
그리고는 3일 동안 주문을 외운 뒤에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귀신은 북쪽으로 떠났습니다.”
그런 뒤에 북쪽 경계 밖에서는 역질로 죽는 사람들이 수만이나 되었다. 저거몽손은 그를 경탄하고 더욱더 공경하면서 예우가 극진하였다.
때마침 위(魏)의 태무황제(太武皇帝)가 담무참의 도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맞으려고 하면서, 우선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만일 담무참을 보내 주지 않으면 곧 병사를 내어 공격하리라.”
저거몽손은 스스로 헤아려 보아도 나라가 미약하여 명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담무참은 많은 술법이 있으므로, 혹시 위(魏)나라를 위하여 자기를 도모할까 염려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하였다. 이에 은밀히 계교를 내어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처음에는 담무참이 『열반경』을 번역하여 권수(卷數)를 다 정하였는데, 외국 사문 담무발(曇無發)이 말하였다.
“이 경은 품수(品數)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담무참은 일찍이 슬퍼하면서, 반드시 거듭 찾아서 번역하겠다는 것을 맹세하였다. 저거몽손은 그가 서역으로 가려는 뜻을 알고, 거짓으로 물자와 양식을 보내고 후하게 보화(寶貨)를 선사하였다.
출발하기 며칠 전에 담무참은 눈물을 흘리면서 대중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말하였다.
“나의 업의 과보가 장차 이를 것인데, 뭇 성인들께서도 이를 구할 수는 없다. 본래 나는 마음의 서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출발하여 40리쯤 갔는데, 저거몽손은 자객(刺客)을 보내어 그를 살해하였다. 그 때의 나이 49세였는데, 대중들은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얼마 후 저거몽손의 좌우에는 항상 대낮에도 귀신이 나와 칼로 공격하였다. 저거몽손은 그 뒤 4월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저거몽손은 의화(義和) 3년(433) 3월에 담무참을 살해하고, 곧 그 해 4월에 병이 들어 죽었으니 진실로 보응(報應)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다. 장방이 “담무참이 세간에 있다가 승화(承和) 4년(436)에 입적하였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 의화 3년(433)은 곧 위(魏)의 연화(延和) 2년 계유(癸酉, 433)이다.
처음에 담무참이 고장(姑臧)에 있을 때 장액(張掖)의 사문 도진(道進)이 담무참으로부터 보살계(菩薩戒)를 받으려 하자 담무참은 말하였다.
“우선 허물부터 참회하라.”
이에 도진은 밤낮 7일 동안 정성을 다하고, 8일째 되는 날 새벽에 담무참에게 나아가 계를 받기를 청하자, 담무참은 갑자기 성을 내었다. 도진은 다시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의 업장이 아직 녹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하고, 3년 동안 전력을 기울여 좌선도 하고 참회도 하였다. 도진은 곧 선정(禪定) 중에 석가문불(釋迦文佛 : 석가모니부처님)이 여러 보살들과 함께 자기에게 계법을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 같은 장소에 있던 10여 인이 모두 도진이 본 것과 같은 꿈을 꾸었다. 도진이 담무참에게 나아가 그 일을 말하려고 하는데, 아직 십 보 앞에 이르기도 전에 담무참은 놀라 일어나며 외쳤다.
“장하고 장하도다. 이미 계를 깊이 느끼어 터득[感得]하였구나. 나는 마땅히 다시 그대를 위하여 증명하리라.”
그리고는 차례로 불상 앞에서 계상(戒相)26)을 해설하였다.
그 당시 사문 도랑(道朗)은 관서(關西) 지방에서 명예를 떨치고 있었는데, 도진이 계를 감득한 그날 밤에 도랑도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다. 이에 도랑은 자신의 계랍(戒臘 : 계를 받은 년수)을 낮다고 여겨 도진의 법제자(法弟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도진에게서 계를 받은 사람들이 천여 인이나 되었다. 이 계법이 전수(傳授)되어 마침내 지금까지 이른 것은, 모두 담무참이 남긴 법도이다.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은 반드시 이파륵(伊波勒)보살이 이 땅에 전래(傳來)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담무참이 전하여 번역하였다. 아마도 담무참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보살계경(菩薩戒經) 8권『승우록』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다 같이 “담무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이 경은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의 별명(別名)이기 때문에 두 번 싣지 않는다.
허공장경(虛空藏經) 5권『승우록』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역시 “담무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곧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 「허공장품(虛空藏品)」에서 나누어져 나와 따로 유행한 경이다. 지금은 『별생록(別生錄)』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싣지 않는다.
우바새계본(優婆塞戒本) 1권『보창록(寶唱錄)』에서는 “담무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고,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역시 『별생록』에 실려 있으므로, 따로 기재하지 않는다.
선신녀경(善信女經) 2권
무위도경(無爲道經) 2권
거사청승복전경(居士請僧福田經) 1권
결정죄복경(決定罪福經) 1권위의 4경은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 모두 “담무참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세간의 주석世注에서는 의심스럽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모두 구록(舊錄)에 의거하여 「의록(疑錄)」에 덧붙여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기재하지 않는다.

(5) 저거경성(沮渠京聲)
선법요해(禪法要解)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하여 낸 것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2권인데, 궐본이다.

안양후(安陽候) 저거경성은 곧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사촌 아우이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지조가 있고, 타고난 성품이 탁 트여 민첩하면서 명랑하였다. 어릴 적부터 슬기가 있고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서책과 기록들을 섭렵하여 담론(談論 : 담화와 논의)을 잘하였다. 어릴 적에 5계(戒)를 받고 내전(內典 : 불경)에 뜻을 기울였다. 여러 경전들을 읽고, 곧 암송하였는데, 항상 ‘학문에 힘쓰고 많이 들어 아는 것은 대사(大士 : 보살)의 성대한 사업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젊을 때 일찍이 유사(流沙)를 건너 우전국(于塡國)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천축의 법사 불타사나(佛陁斯那)중국말로는 각장(覺將)이라 부른다.를 구마제대사(瞿摩帝大寺)에서 만났다. 저거경성[安陽]은 불타사나를 좆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道義]를 자문 받았다.
불타사나는 본래 대승을 배웠으며, 타고난 재질이 빼어나 5천만 게송[偈□]을 암송하였고, 선법(禪法)을 밝게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사람 중에 스승[人中師子]라고 불렀다. 안양후는 불타사나에게서 선법(禪法)의 모든 비밀스런 요술을 받아서, 범본(梵本)을 입으로 암송하였다. 동쪽에 있는 양(涼)나라 땅에 돌아와 무건(茂虔) 승화(承和) 연간(433~439)에 『선법요해』 1부를 번역하였다.

(6) 부타발마(浮陁跋摩)
아비담비바사론(阿毗曇毗婆沙論) 60권혹은 『팔건도(八揵度)』라는 글자를 덧붙이기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역(唐譯) 『대비바사론(大毗婆沙論)』과는 동본이다. 혹은 나누어 84권이 되기도 하고, 혹은 109권이 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6백여 년 뒤에 5백 나한應眞들이 지었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60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부타발마는 혹은 불타발마(佛陁跋摩)라 하기도 하며, 중국말로는 각개(覺鎧)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품행이 분명하고 곧았으며, 총명함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이장(二藏)을 배우고 익혔으며, 특히 『비바사론(毗婆沙論)』을 잘하였다. 항상 이 논(論)을 지녀 독송하면서 마음의 요체[心要]로 삼았다.
승화(承和) 연간(433~439)에 고장(姑臧)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도태(道泰)는 뜻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어, 젊어서부터 총령(葱嶺) 우측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비바사론』 범본(梵本) 10만여 게송을 얻어 고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리를 비워놓고 마음을 비운 채, 눈 밝은 장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부타발마가 이 논을 가지고 마음공부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그 당시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의 태자 무건(茂虔)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건의 승화 5년 정축(丁丑, 437) 4월 중순에 양주성(涼州城) 안의 한예궁사(閑豫宮寺)에서, 부타발마를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도태(道泰)가 붓으로 받아 적고,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과 의학승(義學僧) 3백여 인이 문장의 뜻을 바로잡았다. 승화 7년 기묘(己卯, 439) 7월에 비로소 끝마쳤으니, 무릇 1백 권이었다. 사문 도연(道挻)이 서문을 지었다.
얼마 후 위(魏)나라 태무제(太武帝)가 서쪽으로 고장(姑臧)을 정벌하였다. 양(涼) 지방이 멸망하는 난리 통에 경서(經書)와 집기[什物]들이 모두 분탕(焚蕩)질 당하였다. 끝내 40권을 잃어버리고, 오늘날에는 60권만이 남아 있다. 부타발마는 난리를 피하여 서역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입적한 곳은 알지 못한다.서문에는 “을축년(乙丑年)에 번역되어 나왔으니 ,곧 저거몽손의 현시(玄始) 14년(425)이다”라고 하였다. 정묘년에 마쳤으니, 곧 현시 16년(427)인데, 목록과 동일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7) 석지맹(釋智猛)
반니원경(般泥洹經) 20권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무참(曇無讖)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상은 1부 20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석지맹은 경조(京兆)의 신풍(新豊) 사람이다. 품성이 단정하고 분명했으며, 행실이 맑고 깨끗하였다. 어려서부터 법복(法服)을 입고 학업을 닦는 데에 전념하여, 독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외국의 도인들이 석가의 유적(遺跡)을 말하고, 또 방등(方等)의 여러 경전들이 서역(西域)에 유포되었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분발하는 마음을 일으켜 마음은 먼 서역으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만 리도 지척이고, 천 년의 세월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요진(姚秦) 홍시(弘始) 6년 갑진(甲辰, 404) 해에 같은 뜻을 품은 사문 15인을 불러 결의하고 장안(長安)을 떠났다. 강을 건너고 골을 넘기를 서른여섯 번 하고, 마침내 양주성(涼州城)에 이르렀다. 서쪽으로 양관(陽關)을 떠나 2천여 리나 뻗친 유사(流沙)로 들어가자, 땅에는 물도 없고 풀도 없었으며, 길에는 행인(行人)들도 끊어졌다. 겨울에는 몹시 춥고 여름에는 너무 더웠다. 사람들이 죽어서 널려 있는 뼈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낙타에 양식을 싣고 떠났으나, 이정(里程)이 몹시 힘들고 괴로웠다.
마침내 선선(鄯鄯)ㆍ구자(龜茲)ㆍ우전(于塡)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풍속을 두루 살펴보고, 우전국으로부터 서남으로 2천 리를 가서 비로소 총령(葱嶺)에 올랐다. 그러나 도반[同侶 : 벗] 아홉 사람은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갔다. 석지맹은 남은 도반(道伴)과 함께 1천7백여 리를 더 나아가서 파륜국(波淪國)에 이르렀다. 함께 가던 축도숭(竺道嵩)이 또 목숨을 잃어 화장을 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시신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였다. 석지맹은 비탄에 젖어 놀라 신이하게 생각하고, 이에 스스로 남은 네 사람과 함께 힘써 나아가서, 눈 덮인 산을 세 번이나 넘었다.
얼음으로 된 낭떠러지가 하얗게 깔려 백천 길[丈]이나 되었다. 높이 동아줄로 다리를 놓았는데, 그 허공을 타고 건너면서 아래를 보아도 밑이 보이지 않고, 위를 쳐다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았으며, 추위는 너무도 혹독하여 몸도 영혼도 벌벌 떨렸다.
다시 남쪽으로 천 리를 가서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렀고, 재차 신두하(辛頭河)를 건너자 설산(雪山)들이 벽처럼 우뚝 서 있는데, 앞으로 갈수록 더욱더 심하였다. 아래에는 장기(瘴氣:풍토병)가 많고, 악귀(惡鬼)가 길을 막아 끊었으므로 가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다. 그러나 석지맹은 정성스런 마음이 그윽이 사무쳐서 위험한 길을 능히 건널 수 있었고, 마침내 계빈성(罽賓城)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항상 5백의 나한(羅漢)이 머물렀는데, 항상 아뇩달지(阿耨達池)27)를 왕래하였다. 그 중에 큰 덕을 갖춘 한 나한이 석지맹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찬탄하였다. 석지맹이 국토에 대해서 물으니, 그를 위하여 사천하(四天下)28)의 일을 말해 주었다. 그 일들은 『석지맹전(釋智猛傳)』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석지맹은 먼저 기사국(奇沙國)에서 부처님의 글이 새겨진 석타호(石唾壺)를 보았으며, 또 이 나라에서 부처님 발우[鉢]도 보았다. 광채는 자줏빛을 띠었는데, 네 가장자리도 모두 그러했다. 석지맹은 향과 꽃을 올리고 발우를 이고 발원하였다.
“발우에 만일 감응(感應)이 있다면, 가벼워질 수도 있고 무거워질 수도 있게 하소서.”
그러자 점점 발우가 무거워져서 끝내는 힘으로 들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상[案]에 내려놓았는데, 그 때에는 다시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도심(道心)이 감응한 바가 이와 같았다.
다시 서남쪽으로 1천3백 리를 가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에 이르러, 부처님 머리카락과 치아, 육계골(肉髻骨 : 정수리 뼈)을 친견하였다. 부처님의 자취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던, 빽빽한 숲과 악마를 항복시킨 보리수(菩提樹)를 보았다. 석지맹은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루 동안을 공양하였고, 아울러 보개(寶蓋 : 보옥으로 장식된 덮개)와 큰 가사[大衣]로는 항마상(降魔像)을 덮어 주었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신령스런 불가사의한 일[變異]을 샅샅이 살폈는데, 하늘 사다리[天梯]와 용의 못[龍池]을 본 일 등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뒤에 화씨성(華氏城)에 이르렀는데, 여기는 아육왕(阿育王)의 옛 도읍지였다. 그곳에는 큰 지혜 있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는데, 이름은 나열(羅閱)이었다. 그는 모든 족속들에게 존숭을 받았고, 법을 널리 폈으므로 왕에게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순은으로 된 세 길[丈] 높이의 탑(塔)을 세웠다. 사문 법현(法顯)이 앞서 그의 집에서 6권본 『니원경(泥洹經)』을 얻은 일이 있었다. 그는 석지맹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보고 물었다.
“진(秦)나라 땅에는 대승의 학문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모두가 대승의 학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열은 놀라면서 찬탄하였다.
“희유하고 희유한 일이다. 아마 보살이 가서 교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석지맹은 그의 집으로 가서 『니원경(泥洹經)』 범본(梵本) 1부를 얻고, 또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범본 1부와 그 밖의 경의 범본을 찾아서 얻었다. 그는 유통시킬 것을 서원하고, 이에 곧 되돌아왔다.
갑자년(424)에 천축을 출발하여 동행한 네 분의 스님들은 길에서 세상을 떠났고, 석지맹과 담찬(曇纂)만이 함께 양주(涼州)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건(茂虔)의 승화(承和) 연간(433~439)에 『니원경』을 번역하였는데, 20권이 되었다. 석지맹은 송(宋)나라 원가(元嘉, 424~453) 말년에 입적하였다.
내[智昇]가 사문이 기록하여 열거한 행로(行路)를 찾아 돌아다녀보니, 때에 따라 간혹 서로 같지 않았다. 부처님 발우와 정골(頂骨)이 있는 장소도 역시 서로 어긋났다. 아마도 천축으로 가는 길이 한 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령한 정골과 발우도 옮길 때, 다른 곳에 옮겨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술(傳述)한 것을 보고 들은 지식[見聞]을 그대로 본보기로 삼기는 어렵다.

(8) 석도태(釋道泰)
대장부론(大丈夫論) 2권제바라(提波羅)보살이 지었다. 『번경도(飜經圖)』에 보인다.
입대승론(入大乘論) 2권견의(堅意)보살이 지었다. 당(唐)나라 『구록(舊錄)』에 보인다. 또한 『내전록(內典錄)』과 『번경도』에서도 보인다.
이상은 2부 4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도태는 재주와 민첩함을 타고났고, 충기(冲氣)가 명랑하였으며, 견문을 넓히는 취미가 기이하여, 멀리 다른 나라의 말을 참구하였다. 때때로 중국 땅[漢土]에는 방등(方等)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 그윽한 종지[幽宗]가 대강 창달하였으나, 오직 3장(藏) 9부(部)만은 익숙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석장(錫杖)을 짚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총령(葱嶺)의 서쪽까지 이르러, 범문(梵文)의 뜻을 널리 보고 높은 뜻[旨]을 이어받았다. 아울러 『바사론(婆沙論)』 범본 10만여 게송과 여러 경론(經論)을 얻어 동쪽으로 중국[涼土]에 돌아왔다. 마침내 부타발마(浮陁跋摩)를 만나 『비바사론(毗婆沙論)』을 함께 번역하였다.
도태는 그 후에 스스로 『대장부론』 등 2부를 번역하였다.또 『장방록(長房錄)』과 『내전록(內典錄)』 두 목록에서는 “양(涼)나라 때에 다시 사문 담각(曇覺)이 고창국(高昌國)에서 『현우경(賢愚經)』 1부를 번역하였으니, 곧 송(宋)나라 원가(元嘉) 22년(445)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말한다면 옳지 못하다. 원가 16년(439) 기묘(己卯, 439)에 양나라는 이미 멸망하여 없어졌는데, 어떻게 22년(445) 을유(乙酉, 445)에 그대로 경을 번역하여 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 두 목록의 기록은 착오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정매(靖邁)의 경도(經圖)에 의하면, 원위(元魏) 때에 있는 것으로 편집되어 있다. 위(魏)ㆍ송(宋)이 비록 둘 다 송나라의 수도인 건업(建業)에 있었고, 위나라의 도읍이 항안(恒安)이라 하더라도, 지역(地域)으로 논한다면, 합당하므로 『위록(魏錄)』에 속하게 된다.

(9) 석법성(釋法盛)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菩薩投身餓虎起塔因緣經) 1권『승우록』에서는 “『이신시아호경(以身施餓虎經)』이다”라고 하였다. 경 후기(後記)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성은 고창(高昌) 사람이다. 역시 양(涼)나라 때에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 1권을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앞의 고승(高僧) 「담무참전(曇無讖傳)」끝부분에 “그때 고창에는 사문 법성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역시 경을 구하려고 외국을 다녀왔어, 전(傳)한 것이 4권이다”라고 하였다.
그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 후기(後記)에는 “그 때에 국왕이 부처님 설법을 들은 뒤, 곧 그곳에다 큰 탑[大塔]을 세웠으니, 이름을 보살투신아호탑(菩薩投身餓虎塔)이라 하였다. 지금도 그 탑이 있는데, 동쪽으로 면한 산 아래에 승방(僧房)과 강당이 달린 정사(精舍)가 있으며, 거기에는 항상 5천의 대중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4사(四事)29)를 공양하였다.
법성은 그 때에 온 나라 안의 문둥병자나 미치광이ㆍ귀머거리ㆍ소경ㆍ손발이 오그라진 앉은뱅이ㆍ절름발이 등 온갖 병든 사람들이 모두 이 탑으로 와서, 향을 사르고 등불을 켜며, 향니(香泥)로 땅을 바르고 쓸고 뿌리며, 아울러 머리를 조아려 정성껏 참회하면, 온갖 병들이 모두 낫는 것을 보았다. 먼저 온 사람이 병이 나아서 떠나면 뒤에 다른 이들이 와서 모두 그렇게 하였으므로, 언제나 백여 명이 들끓었다. 귀천을 묻지 않고 모두가 그러하였으므로 끝내 끊어지는 때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제 『고승전(高僧傳)』의 글을 자세히 살피고 경 후기 설명을 본다면, 법성이 서역을 돌아다녔던 일은 거짓이 아니다. 또 “몸소 신령스런 탑[靈龕]을 보았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의당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만일 법성이 스스로 이 경을 번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경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그 자신이 서방으로 갔었거늘, 어찌 경교(經敎 : 경의 가르침)를 전하지 않았겠는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세히 조사하여 밝혀 보니, 그 일이 이에 분명하여졌다. 이제 법성의 번역이므로 이 목록에 편성하여 실은 것이다.

(10) 신구(新舊) 제실역경(諸失譯經)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 4권일명 『불퇴전경(不退轉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아유월치차경(阿惟越致遮經)』과 같은 동본이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대인욕경(大忍辱經) 10권
금륜왕경(金輪王經) 1권
현겁오백불명(賢劫五百佛名) 1권
이상은 5부 18권이다.앞의 2부 6권은 경본이 현재 있고, 뒤의 3부 12권은 궐본이다.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모두 “이 경들은 사문 승우(僧祐)의 『신집(新集)』과 석도안(釋道安)의 『양토이경(涼土異經)』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제는 도로 양 나라 시대(涼世)의 목록에 덧붙여 넣어 번역의 근원을 알지 못[失譯源]한다고 하였다. 시대와 번역한 사람이 있고 없는 것과 권부(卷部)의 많고 적음과 번역하여 낸 처소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이하는 이 목록에 새로 덧붙인 것이다.

우바이정행법문경(優婆夷淨行法門經) 2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바로 『정행경(淨行經)』이라고도 한다.
장자법지처경(長者法志妻經) 1권
대애도비구니경(大愛道比丘尼經) 2권또한 『대애도수계경(大愛道受戒經)』이라고도 한다. 『구록(舊錄)』에서는 “『대애도경(大愛道經)』이다”라고 하였다.
삼혜경(三慧經) 1권
보살등행경(菩薩等行經) 1권이 경 이하는 궐본이다.
사무외경(四無畏經) 1권
권변경(權變經) 1권『구록』에서는 “『문수사리권변삼매경(文殊師利權變三昧經)』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바로 『권변삼매경(權變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십구화경(十漚惒經) 1권
칠언선리경(七言禪利經) 1권『구록』에서는 “『구화칠언선리경(漚惒七言禪利經)』이다”라고 하였다.
보살십구화경(菩薩十漚惒經) 1권이제 앞의 『십구화경(十漚惒經)』과 같은 경이 아닌가 한다.
병사왕경(甁沙王經) 1권
유무경(有無經) 1권
오백게경(五百偈經) 1권
수야월국빈인경(須耶越國貧人經) 1권『구록』에서는 “『수야월국빈인임척두경(須耶越國貧人賃剔頭經)』이다”라고 하였다.
부목경(浮木經) 1권
배유경(坯喻經) 1권
요괴경(妖怪經) 1권
아반계니원경(阿般計泥洹經) 1권어떤 본에는 『도사계니원경(陶射計泥洹經)』이라고 하였다.
사비상경(四非常經) 1권
오실개경(五失盖經) 1권
요진경(要眞經) 1권
본무경(本無經) 1권
권덕경(勸德經) 1권
십오덕경(十五德經) 1권
부모인연경(父母因緣經) 1권지금의 『부자인연경(父子因緣經)』과 같은 경이 아닌가 싶다
혜행경(慧行經) 1권
미생왕경(未生生經) 1권지금은 『미생원경(未生怨經)』이 아닌가 싶다.
내외무위경(內外無爲經) 1권
도정경(道淨經) 1권
칠사본말경(七事本末經) 1권『구록』에서는 “『칠사본행경(七事本行經)』이다”라고 하였다.
백보삼매경(百寶三昧經) 1권
삼승경(三乘經) 1권
기역술경(耆域術經) 1권『구록』에서는 “『기역사술경(耆域四術經)』이다”라고 하였다.
오개리의경(五盖離疑經) 1권지금은 『오개의결실행경(五盖疑結失行經)』이 아닌가 싶다.
태자지지경(太子智止經) 1권
도덕장경(道德章經) 1권
고상경(苦相經) 1권
수불득도경(須佛得度經) 1권
유경(由經) 1권
분연원국가라월경(分然洹國迦羅越經) 1권
오음사경(五陰事經) 1권
의결법사경(義決法事經) 1권
십사유경(十思惟經) 1권
분별육정경(分別六情經) 1권
삼실개경(三失盖經) 1권
불보삼매경(佛寶三昧經) 1권
법지녀경(法志女經) 1권
이상은 47부 49권이다.오직 처음의 4부 6권만이 경본이 있으며, 그 나머지 모두는 궐본이다.

『승우록』에는 “안공(安公)의 『양토이경(涼土異經)』과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궐본이라, 기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지금 다시 『양록(涼錄)』에 덧붙여 넣는 것은 실역(失譯)으로 생각해서이다. 승우는 “『양토이경』에는 총 59부가 기재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 중 5부는 『장방록』에 이미 기재되어 있고, 지금 다시 47부가 나왔으므로 앞의 것과 합하면 52부가 된다. 나머지는 모두 7부 14권이 있다. 삼가 『장방록』 등의 목록을 살펴보면 모두 근거가 있다. 그러므로 곧 번역한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것[失譯]도 아니다. 이 때문에 이 목록에서는 삭제하여 기재하지 않으며, 이제 그 모든 사항[條件]을 아래와 같이 나열한다.

수보리품경(須菩提品經) 7권『반야초경(般若鈔經)』의 이명(異名)이다. 전진(前秦)의 담마비(曇摩蜱) 번역이다.
문수사리시현보장경(文殊師利示現寶藏經) 2권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 번역이다.
칠지경(七知經) 1권혹은 칠지(七智)로 쓰기도 한다. 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난용왕경(難龍王經) 1권혹은 『난룡경(難龍經)』이라고도 한다. 또한 『용왕형제경(龍王兄弟經)』의 이명(異名)이다. 오나라 지겸의 번역이다.
아타삼매경(阿陁三昧經) 1권곧 『아다삼매경(阿多三昧經)』의 이명이며, 안공(安公)의 『관중이경(關中異經)』에 이미 실려 있다.
대오탁경(大五濁經) 1권『구록』에서는 “『대오탁세경(大五濁世經)』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목록에서는 “위경(僞經)이다”라고 하였다. 지금도 역시 거기에 편성되어 있다.
수지문십사장경(首至問十四章經) 1권『구록』에서는 “『수지문불십사의경(首至問佛十四意經)』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수지문십사사경(首至問十四事經)』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후한(後漢) 지요(支曜)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추려서 베낀 경抄經이므로 「별생록(別生錄)」에 싣는다.
대방광십륜경(大方廣十輪經) 8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역(唐譯)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과 동본이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의「제13분(分)」이다. 양나라 시대涼代의 번역인 것 같은데, 여러 목록에서는 기재하지 않았다. 이제 이 양나라 시대涼代의 마지막에 덧붙여 두니, 없어지거나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신(新)ㆍ구(舊)를 모두 합하면 총 53부 75권인데, 모두 북량(北涼) 시대의 실원(失源)에 기록하여 둔다.開元釋教錄卷第四 笙庚午歲西崇福寺沙門智昇撰摠括群經錄上之四秦姚氏都常安 亦云後秦起姚萇謚爲昭武皇帝 白雀元年甲申至姚泓無謚永和三年丁巳凡經三主三十四年沙門五人所出經論等摠九十四部合六百二十四卷於中六十六部五百二十八卷見在二十八部九十六卷闕本准大智度論後記云弘始三年歲在辛丑王道珪云庚子一本亦云歲在辛丑房及甄鸞更差一載今依後記爲正次第排之姚秦 沙門竺佛念一十二部 七十四卷 經律集沙門鳩摩羅什 七十四部三百八十四卷經律論集沙門弗若多羅 一部 五十八卷律沙門佛陁耶舍 四部 八十四卷 經律沙門曇摩耶舍 三部 二十四卷 經論十住斷結經十卷 初云最勝問菩薩十住除垢斷結經一名十千日光三昧定亦云十地斷結或十一卷或十四卷第二出見三秦錄高僧傳僧祐錄菩薩瓔珞經十二卷 一名現在報第二出或十三卷或十四卷或十六卷符秦建元十二年七月出見二秦錄高僧傳僧祐錄菩薩處胎經五卷 初云菩薩從兜術天降神母胎說廣普經亦直云胎經或四卷或八卷見二秦錄高僧傳僧祐錄中陰經二卷 見二秦錄高僧傳僧祐錄菩薩瓔珞本業經二卷 或直云瓔珞本業經初出見長房錄鼻柰耶律十卷 一名誡因緣經亦云鼻柰耶經亦云戒果因緣經沙門曇景筆受見安公經序符秦建元十四年壬午正月十二日出出曜經二十卷 亦云出曜論或十九卷苻秦建元十九年出見二秦錄高僧傳僧祐寶唱等錄上見在已下闕持人菩薩經三卷 第二出與法護持人羅什持世同本見長房錄大方等無相經五卷 亦名大雲經或四卷與曇無讖方等大雲同本初出見長房錄菩薩普處經三卷 見長房錄十誦比丘尼戒所出本末一卷 第三出僧純於拘夷國得梵本佛念爲譯文煩後竺法汰刪改正之見寶唱錄王子法益壞目因緣經一卷 或云阿育王息壞目因緣經第三出見僧祐錄右一十二部七十四卷 出曜上七部六十一卷見在持人下五部一十三卷闕本沙門竺佛念涼州人弱年出家志業淸堅外和內朗有通敏之鑑諷習衆經粗涉外典其蒼雅詁訓尤所明練少好遊方備觀風俗家世西河洞曉方語華戎音義莫不兼釋故義學之譽雖闕洽聞之聲甚著苻氏建元年中有曇摩持鳩摩羅佛提僧伽跋澄提婆難提等來入長安安公趙政等請出衆經當時名德莫能傳譯衆咸推念以爲明匠自安高支謙之後莫踰於念在苻姚二代爲譯人之宗故關中僧衆咸共嘉焉念於苻姚二代自譯十住斷結等經一十二部長房錄中別存十地斷結經十卷者非也住之與地二義無別今存十住十地刪之後遘疾卒于常安遠近白黑莫不歎惜摩訶般若波羅蜜經四十卷 亦名大品般若經祐云新大品經第三出與放光等同本或三十卷或二十四或二十七弘始五年癸卯四月二十三日出至六年四月二十三日訖見二秦錄及僧祐錄小品般若波羅蜜經十卷 題云摩訶般若波羅蜜無小品字祐云新小品經與道行明度等同本第七譯或七卷弘始十年二月六日出至四月三十日訖見二秦錄及僧祐錄金剛般若波羅蜜經一卷 亦云金剛般若經佛在舍衛國者初出與元魏留支等出者同本見二秦錄及僧祐錄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二卷 亦云仁王般若經或云一卷第二出與晉世法護與梁朝眞諦譯者同本異出房云見別錄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一卷 亦云摩訶大明呪經初出與唐譯 般若心經等同本見經題上菩薩藏經三卷一名富樓那問經亦名大悲心經今編入寶積當第十七會名富樓那會弘始七年出或二卷第二出與法護出者同本見二秦錄僧祐錄善臂菩薩經二卷 今編入寶積當第二十六會見法上錄須摩提菩薩經一卷 第二出與寶積妙慧會等同本見長房錄自在王菩薩經二卷 或無菩薩字初出與奮迅王經同本弘始九年於尚書令姚顯第出僧睿筆受幷製序見二秦錄及僧祐錄莊嚴菩提心經一卷 第四出與法護菩薩十地經等同本房云見別錄十住經四卷 或五卷是華嚴十地品異譯什與佛陁邪舍共出見二秦錄及僧祐錄妙法蓮華經八卷 僧祐錄云新法華經初爲七卷二十七品後人益天授品成二十八弘始八年夏於大寺出僧睿筆受幷製序第五譯見二秦錄及僧祐錄維摩詰所說經三卷 一名不可思議解脫或直云維摩詰經僧祐錄云新維摩詰經弘始八年於大寺出僧肇筆受睿製序第六譯見二秦錄及僧祐錄大樹緊那羅王所問經四卷 亦云說不可思議品或直云大樹緊那羅經第二出與支讖伅眞陁羅經同本見長房錄集一切福德三昧經三卷 與竺法護等集衆德經等同本異出第三譯見眞寂寺錄思益梵天所問經四卷 或直云思益經僧祐錄云思益義經弘始四年十二月一日於逍遙園出第二譯與法護持心留支勝思惟竝同本見二秦錄及僧祐錄持世經四卷 一名法印經或三卷第三出與法護持人經等同本見二秦錄及僧祐錄諸法無行經二卷 或一卷與隋崛多諸法本無經等同本初出見二秦錄及僧祐錄阿彌陁經一卷 亦名無量壽經弘始四年二月八日譯初出與唐譯稱讚淨土經等同本見二秦錄及僧祐錄彌勒成佛經一卷 第二出與法護彌勒成佛經同本弘始四年出見二秦錄及僧祐錄彌勒下生經一卷 一名彌勒受決經初云大智舍利弗與彌勒來時經同本第四出亦云彌勒成佛經亦云下生成佛或云當下成佛見二秦錄及僧祐錄文殊師利問菩提經一卷 亦直云菩提經一名伽耶山頂經一名菩提無行經初出與伽邪山頂經象頭精舍經等同本見僧祐錄經圖中別載菩提經一卷者誤也孔雀王呪經一卷 第四出亦名大金色孔雀王經在逍遙園出幷結界場法悉備具房云見別錄首楞嚴三昧經三卷 或二卷亦直云首楞嚴經僧祐錄云新首楞嚴經第九出與方等首楞嚴勇伏定經等同本見僧祐錄不思議光菩薩所問經一卷 亦云不思議光菩薩所說經亦云無思議光孩童菩薩經第二出與竺法護無思議孩童經同本見長房錄華手經十三卷 或爲華首一名攝諸善根經亦名攝諸福德經或十卷或十一卷或十二卷弘始八年譯見二秦錄及僧祐錄佛垂般涅槃略說教誡經一卷 亦云佛臨般一名遺教經見僧祐錄千佛因緣經一卷 見法上錄梵網經二卷 第二出弘始八年於草堂寺三千學士最後出此一品梵本有六十一品譯訖融影等三百人一時共受菩薩十戒僧肇受見經前序佛藏經四卷 一名選擇諸法經或三卷或二卷弘始七年六月十二日出見二秦錄及僧祐錄淸淨毘尼方廣經一卷 與文殊淨律經等同本第三出見法上錄大智度論一百卷 或云大智度經論亦云摩訶般若釋論或七十卷或一百一十卷弘始四年夏於逍遙園出七年十二月二十七日訖見二秦錄及僧祐錄中論四卷 亦云中觀論或八卷弘始十一年於大寺出僧睿製序見二秦錄及僧祐錄兼前智度論竝龍樹菩薩造十二門論一卷 龍樹菩薩造弘始十年於大寺出僧睿製序見僧祐錄及寶唱錄百論二卷 提婆菩薩造弘始六年出僧肇製序見二秦錄及僧祐錄十住毘婆沙論十四卷 或無論字龍樹菩薩造或十二卷或十五卷見長房錄大莊嚴經論十五卷 或無經字馬鳴菩薩造或十卷見長房錄發菩提心論二卷 或云發菩提心經亦云經論見李廓錄放牛經一卷 亦云牧牛經出增一阿含第四十六卷異譯房云見別錄海八德經一卷 第三出與法海經等同本見法上錄禪秘要經三卷 或云禪秘要法無經字或四卷與支謙等出者同本第二出房云見別錄燈指因緣經一卷 見李廓錄十誦比丘戒本一卷 亦云十誦波羅提木叉戒第三出與曇摩持等出者同本見僧祐錄成實論二十卷 或二十四或十六或十四弘始十三年九月八日尚書令姚顯請出至十四年九月十五日訖曇晷筆受佛滅後九百年訶梨跋摩造見僧祐錄坐禪三昧經三卷 一名菩薩禪法經初出或直云禪經或云禪法要或云阿蘭若習禪法三名同是一本弘始四年正月五日出至九年閏五月重校正見二秦僧祐寶唱三錄菩薩呵色欲法一卷 或云菩薩訶色欲經或直云菩薩呵色欲初出見僧祐錄禪法要解二卷 或云禪要經初出見僧祐錄思惟要略法一卷 或云思惟要略法經或直云思惟經第二出見長房錄雜譬喩經一卷 弘始七年十月出道略集馬鳴菩薩傳一卷 見長房錄龍樹菩薩傳一卷 見長房錄提婆菩薩傳一卷 見長房錄法界體性無分別經二卷 與寶積法界體性會同本初出見法上錄 從此下闕大善權經二卷 與寶積大乘方便會等同本第四出見李廓錄大方等大集經三十卷 或加新字或二十四卷與支讖無讖所出者同本見二秦錄及李廓錄大方等頂王經一卷 與法護等出者同本第二出見長房錄阿闍世經二卷 與支讖等出者同本第五譯房云見別錄睒本起經一卷 亦直云睒經出六度經異譯第三出見李廓錄請觀世音經一卷 初出與竺難提出者同本見李廓錄寶網經一卷 第二出與法護出者同本見李廓錄稱揚諸佛功德經三卷 一名集華經初出弘始七年譯見二秦錄及僧祐錄觀普賢菩薩經一卷 第二出見李廓錄未曾有因緣經二卷 初出見法上錄賢劫經七卷 第二出弘始四年三月五日出與法護譯者同本曇恭筆受見二秦錄及僧祐錄一名賢劫三昧經一名賢劫定意經凡三名祐錄云新賢劫經善信摩訶神呪經二卷 見李廓錄持地經一卷 見長房錄觀佛三昧經一卷 見李廓錄菩薩戒本一卷 初出見長房錄今疑此菩薩戒本卽梵網下卷是文殊悔過經一卷 第二出見長房錄舍利弗悔過經一卷 第三出見法上錄十住論十卷 龍樹菩薩造弘始年譯未訖第八末似六度集見二秦錄及僧祐錄今疑此十住論卽十住婆沙是撿諸罪福經十卷 房云見別錄十二因緣觀經一卷 見長房錄婆藪盤豆傳一卷 初出見翻經圖右七十四部三百八十四卷提婆菩薩傳上五十二部三百二卷見在法界體性經下二十二部八十二卷闕本沙門鳩摩羅什秦言童壽一名鳩摩羅耆婆外國製名多以父母爲本什父鳩摩羅炎母字耆婆故兼取爲名也天竺人也家世國相什祖父達多倜儻不群名重於國父鳩摩炎聰明有懿節將嗣相位乃辭避出家東度蔥嶺龜茲王聞其棄榮#捨俗甚敬慕之自出郊迎請爲國師王有妹年始二十才悟明敏過目必能一聞則誦且體有赤黶法生智子諸國娉之竝不行及見炎心欲當之王聞大喜逼以妻焉遂生於什什之在胎其母慧解#倍常往雀梨大寺聽經忽自通天竺語難問之辭必窮淵致衆咸歎異有羅漢達摩瞿沙曰此必懷智子爲說舍利弗在胎之證旣而生什歧嶷若神什生之後還#忘前語頃之其母出家修道學得初果什年七歲亦俱出家從師受經日誦千偈偈有三十二字凡三萬二千言誦毘曇旣過師授其義卽自通解無幽不暢龜茲國人以其母王女利養甚多乃攜什避之什年九歲進到罽賓遇名德法師槃頭達多卽罽賓王之從弟也淵粹有大量三藏九部莫不縷貫亦日誦千偈名播諸國什旣至仍師事之遂誦雜藏長二阿含凡四百萬言達多每與什論議深推服之聲徹於王王卽請入集外道論師共相攻難言氣始交外道輕其幼稚言頗不順什乘其隙#而挫之外道折服愧惋無言王益敬異日給鵝腊一雙粳麪各三斗酥六升此外國之上供也所住寺僧乃差大僧五人沙彌十人營視灑掃有若弟子其見尊崇如此至年十二其母攜還龜茲至月氏北山有一羅漢見而異之謂其母言常當守護此沙彌若至三十五不破戒者當大興佛法度無數人與優波鞠多無異若戒不全無能爲也正可才明儁詣法師而已什進到沙勒國頂戴佛鉢心自念言鉢形甚大何其輕耶卽重不可勝失聲下之母問其故答曰我心有分別故鉢有輕重耳什於沙勒國誦阿毘曇六足諸門增一阿含及還龜茲名蓋諸國龜茲僧衆一萬餘人疑非凡夫咸推而敬之莫敢居上由是不預燒香之次遂博覽四韋陁五明諸論外道經書陰陽星算莫不究曉妙達吉凶言若苻契爲性率達不厲小撿修行者頗非之什自得於心未嘗介意後從畀摩羅叉學十誦律又從須利耶蘇摩諮稟大乘乃歎曰吾昔學小乘譬人不識金以鍮石爲妙矣於是廣求義要誦中百二論及十二門等有頃什母辭往天竺謂龜茲王白純曰汝國尋衰吾其去矣行至天竺進登三果什母臨去謂什曰方等深教應大闡眞丹傳之東土唯爾之力但於自身無利其可如何什曰大士之道利彼亡軀若必使大化流傳洗悟矇俗雖復身當鑪鑊苦而無恨於是留住龜茲止王新寺得大品經始就披讀魔來蔽文唯見空牒什知魔所爲誓心逾固魔去字顯仍誦習之後於雀梨大寺讀大乘經忽聞空中語曰汝是智人何以讀此什曰汝是小魔宜時速去我心如地不可轉也停住二年廣誦大乘經洞其秘奧龜茲王爲造金師子座以大秦錦褥鋪之令什陞而說法後往罽賓爲其師槃頭達多具說一乘妙義師感悟心服卽禮什爲師言我是和上小乘師和上是我大乘師矣西域諸國服什神儁咸共崇仰每至講說諸王長跪座側命什踐而登焉其見重如此什道震西域聲被東國苻氏建元十三年歲次丁丑正月太史奏有星見外國分野當有大德智人入輔中國堅素聞什名乃悟曰朕聞西域有鳩摩羅什將非此耶十九年堅遣驍騎將軍呂光等率兵七萬西伐龜茲及烏耆諸國臨發謂光曰聞彼有鳩摩羅什深解法相善閑陰陽爲彼學之宗朕甚思之若剋龜茲卽馳驛送什光軍未至什謂其王白純曰國運衰矣當有勍歒日下人從東方來宜恭承之勿抗其鋒純不從而戰光遂破龜茲殺純獲什光性疏慢未測什智量見其年尚少乃凡人戲之什被逼旣至遂虧其節或令騎牛及乘惡馬欲使墮落什常懷忍辱曾無異色光慚愧而止光還中路置軍於山下將士已休什曰不可在此必見狼狽宜徙軍隴上光不納至夜果雨洪潦暴起水深數丈死者數千光始加敬異什謂光曰此凶亡之地不宜淹留推數揆運應速言歸中路必有福地可居光從之至涼州聞苻堅已死遂割據涼土制命一隅焉什停涼積年數言未然後皆如說呂光父子旣不弘道故薀其經法無所宣化苻堅已亡竟不相見姚萇聞其高名虛心要請諸呂以什智計多解恐爲姚謀不許東入及萇卒子興謚爲文祖皇帝襲位復遣敦請弘始三年歲次辛丑三月有樹連理生于廟廷逍遙一園蔥變爲茞以爲美瑞謂智人應入其年十二月二十日什至常安興待以國師之禮甚見優寵悟言相對則淹留終日硏微造盡則窮年忘倦自大法東被始於漢明歷涉魏經論漸多而支竺所出多滯文格義興少崇三寶銳志講集什旣至止仍請入西明閣及逍遙園譯出衆經什率多闇誦無不究達轉解秦言音譯流利旣覽舊經義多乖謬皆由先譯失旨不與梵本相應興使沙門僧肇僧䂮僧邈僧睿等八百餘人諮受什旨更令出大品什持梵本興執舊經以相讎挍其新文異舊者義皆圓通衆皆愜服莫不欣讚焉興以佛道沖邃其行唯善信爲出苦之良津御世之洪則故託意九經遊心十二乃著通三世論以勖示因果王公已下竝欽贊厥風興宗室常山公顯安成侯嵩竝篤信緣業屢請什於常安大寺講說新經什以弘始四年壬寅至十四年壬子譯大品小品金剛等經七十四部三百八十餘卷竝暢顯神源發揮幽致于時四方義學沙門不遠萬里名德秀拔者暢二公乃至道恒僧摽慧睿僧敦僧弼僧肇等三十餘僧稟訪精硏務窮幽旨廬山慧遠道業沖粹乃遣使修問龍光道生慧解洞微亦入關諮稟盛業久大至今仰則焉初沙門慧睿才識高朗常隨什傳寫什每爲睿論西方辭體商略同異云天竺國俗甚重文藻其宮商體韻以入絃爲善凡覲國王必有讚德見佛之儀以歌歎爲尊經中偈頌皆其式也但改梵爲秦失其藻蔚雖得大意殊隔文體有似嚼飯與人非徒失味乃令人歐噦也什嘗作頌贈沙門法和云心山育德薰流芳萬由旬哀鸞鳴孤桐淸響徹九天凡爲十偈辭喩皆爾什雅好大乘志存敷演嘗歎曰吾若著筆作大乘阿毘曇非迦旃延子比也今在秦地深識者寡折翮於此將何所論乃悽然而止唯爲姚興著實相論二卷出言成章無所刪改辭喩婉約莫非淵奧什爲人神情映徹傲岸出群應機領會鮮有其疋且篤性仁厚汎愛爲心虛己善誘終日無倦時有沙門僧睿興甚嘉焉什所譯經睿竝參正昔竺法護出正法華受決品云天見人人見天什譯經至此乃言曰此語與梵本義同但在言過質睿應聲曰將非人天交接兩得相見乎什大喜曰實然而睿與什共相開發皆此類也嘗聽秦僧道融講新法華什乃歎曰佛法之興融其人也俄而師子國有一婆羅門聰辯多學西土俗書罕不披誦而爲彼國外道之宗聞什在關大行佛法乃卽慨然謂其徒曰寧可偏使釋氏之風獨傳震旦而令吾等正化之典不洽東國因遂乘駝負書遠涉來入常安姚興見其口眼便僻頗亦惑之而婆羅門乃啓興曰至道無方各尊其事今故遠來請與秦僧捔其辯力隨有優者卽傳其化興卽許焉于時關中四方僧衆相視缺然莫敢當者什謂融曰此之外道聰明殊人捔言必勝豈可得使無上大道在於吾徒爲彼而屈良可悲矣若使外道肆情得志則是我等法輪摧軸豈可然乎如吾所睹在君一人道融自顧才力#不減而彼西域外道經書未盡披讀乃密令人寫婆羅門所讀經目一披卽誦其後剋日將就論義姚興自出公卿皆會關中僧衆四遠必集爾時道融與婆羅門擬相詶抗鋒辯飛玄彼所不逮婆羅門雖自覺知辭理已屈然意猶以廣讀爲誇道融乃列其所讀書幷更通論秦地經史名目卷部三倍多之什仍乘勢因嘲之曰君可不聞大秦廣學那忽輕爾遠來婆羅門心生愧伏頂禮融足旬日之中無何而去像運再顯鳩摩羅什道融力焉又杯度比丘在彭城聞什在常安乃歎曰吾與此子戲別三百餘年杳然未期遲有遇於來生耳什臨終力疾與衆僧告別曰因法相遇殊未盡伊心方復異世惻愴何言自以闇昧謬充傳譯若所傳無謬使焚身之後舌不燋爛以秦弘始中卒卽於逍遙園依外國法焚尸薪滅形化唯舌不變信弘法之有徵也 什公卒時諸記不定高僧傳云弘始十一年八月二十日卒於常安或云七年或云八年傳取十一爲正此不然也准成實論後記云大秦弘始十三年歲次豕韋九月八日尚書令姚顯請出此論至來年九月十五日訖准此十四年末什仍未卒又准僧肇上秦主姚興涅槃無名論表云肇在什公門下十有餘載若什四年出經十一年卒始經八載未滿十年云何乃言十有餘載故知但卒弘始年中不可定其年月也 然什出經部卷衆說多少不同長房錄中其數彌廣今細參驗多是別生或有一本數名或是錄家錯上具件如左今悉刪之十誦律六十一卷 僧祐錄云是什譯出今以前五十八卷是什度語非什正翻後之三卷卑摩羅叉續出置之於後已備餘錄此不存之放光般若波羅蜜經二十卷 房云第二出見別錄今以放光梵本與大品同譯大品時興執舊經什出新本若言放光什譯舊經何者是耶故知大品爲新放光爲舊重載二本誤之甚也般若經論集二十卷 房云見吳錄今謂此集乃是廬山遠法師以大智度論文句繁積初學難尋乃刪煩翦亂令質文有體撰爲二十卷亦云大智論要略亦云釋論要抄此乃遠公撮略前論非什別翻也禪法要三卷 下注云先譯弘始元年重挍正睿製序旣云先譯重挍不合存其二名准僧睿經序 卽坐禪三昧經是也阿蘭若習禪法經二卷 房云見別錄或無經字與坐禪三昧同本異出今謂不然此卽坐禪三昧之別名也尋其文句首末大同是初出本非挍正者樂瓔珞莊嚴經一卷 房云見李廓錄令准經後記乃是曇摩耶舍所譯非什 翻也今移附彼錄實相論一卷 高僧傳云二卷什爲姚興撰出非梵本傳故闕之也往古性和佛國願行法典經 或作生和出文殊佛土嚴淨經佛謦咳徹十方經佛齊化出菩薩經魔業經 過去無邊光淨佛土經虛空藏菩薩問持經得幾功德經 亦云得幾福經過魔法界經 太白魔王堅信經佛弟子化魔子偈頌經開化魔經 魔王變身經佛謦咳下十經竝出大集觀世音經 出法華經陁羅尼法門六種動經彌勒菩薩本願待時成佛經佛變時會身經東方善華世界佛座震動經陁羅尼等四經竝出悲華經雀王經 佛昔爲鹿王經菩薩身爲鴿王經 雀王等三經竝出六度集無量樂佛土經 亦云國土出央崛經佛問阿須倫大海有減經 出中阿含佛迹見千輻輪相經 出雜阿含佛心摠持經 水牛王經兔王經 佛心等三經竝出生經獼猴與婢共戲致變經王后爲蜣蜋經 獼猴等二經竝出雜譬喩比丘應供法行經 祐注入疑經今亦在疑錄已上都有三十五部一百三十六卷十誦律五十八卷 弘始六年十月十七日於中寺出見二秦錄右一部五十八卷本在沙門弗若多羅秦言功德華罽賓國人少出家以戒節見稱備通三藏而專精十誦律部爲外國師宗時人咸謂已階聖果以弘始十年振錫入關秦主興待以上賓之禮羅什亦挹其戒範厚相崇敬先是經法雖傳律藏未闡聞多羅旣善斯部咸共思慕以弘始六年甲辰十月十七日集義學沙門六百餘人於常安中寺延請多羅誦出十誦梵本羅什譯爲秦文三分獲二多羅遘疾奄然棄世衆以大業未卒而匠人殂往悲恨之深有踰常痛次有西域沙門曇摩流支秦云法樂棄家入道偏以律藏持名以弘始七年秋達自關中廬山釋慧遠聞支旣善毘尼希得究竟律部乃遣書通好曰佛教之興先行上國自分流以來四百餘年至於沙門德式所闕尤多西域道士弗若多羅是罽賓人其諷十誦梵本有羅什法師通才博見爲之傳譯十誦之中文始過半多羅早喪中途而寢不得究竟大業慨恨良深傳聞仁者齎此經自隨甚欣所遇冥運之來豈人事而已耶想弘道爲物感時而動叩之有人必情無所悋若能爲律學之徒畢此經本開示梵行洗其耳目使始涉之流不失無上之津參懷勝業者日月彌朗此則惠深德厚人神同感矣幸願垂懷不乖往意流支旣得遠書及姚興敦請乃與什共譯十誦都畢硏詳考覈條制審定而什猶恨文煩未善旣而什化不獲刪治流支住常安大寺慧觀欲請往揚都支曰彼土有人有法足以利世吾當更行無律教處於是遊化餘方莫知所之虛空藏菩薩經一卷 初出或無菩薩字與虛空孕經等同本是大集別分三藏後還外國於罽賓得此經附商人送致涼州見道慧宋齊錄及 僧祐錄長阿含經二十二卷 弘始十四年出至十五年訖涼州沙門佛念傳譯秦國沙門道含筆受見僧睿二秦錄及僧祐錄高僧傳等四分律六十卷 亦云曇無德律本譯四十五卷或云四十卷或云四十四卷今亦有七十卷者弘始十年於寺中出慧辯傳譯見晉世雜錄及祐錄僧傳等四分僧戒本一卷 或無僧字亦云曇無德戒本見晉世雜錄及僧祐錄右四部八十四卷其本竝在沙門佛陁耶舍秦言覺名或云覺稱 耶舍是名稱義高僧傳中翻爲覺明義稍乖也罽賓國人婆羅門種世事外道有一沙門從其家乞其父瞋怒令人歐之父遂手腳攣躄不能行止乃問於筮師對曰坐犯賢人鬼神使然也卽請此沙門竭誠悔過數日便瘳因令耶舍出家爲其弟子時年十三嘗從師遠行於曠野逢虎師欲走避耶舍曰此虎已飽必不侵人俄而虎去前行果見餘肉師密異之至年十五誦經日得五六萬言所住寺常於外分衛廢於誦習有一羅漢重其聰敏恒乞食供之十九誦大小乘經數百萬言然性簡傲頗以知見自處謂少堪己師故不爲諸僧所重但美儀止善談笑見者忘其深恨年及受戒莫爲臨壇所以向立之歲猶爲沙彌乃從其舅學五明諸論世間法術多所通習二十有七方受具戒恒以讀誦爲務手不釋牒每端坐思義不覺虛中而過其專精如此後至沙勒國時太子達摩弗多秦言法子見其容貌端雅問所從來耶舍詶對淸辯太子悅之仍請宮內供養待遇隆厚羅什後至從其受學甚相尊敬什隨母東歸耶舍留止頃之王薨太子卽位苻堅遣呂光攻龜茲龜茲王急求救於沙勒王自率兵救之使耶舍留輔太子委以後任救軍未至而龜茲已敗王歸具說羅什爲光所執乃歎曰我與羅什相遇雖久未盡懷抱其忽羈虜相見何期停十餘年王薨因至龜茲法化甚盛什在姑臧遣信要之裹糧欲去國人請留復停歲餘後語弟子云吾欲尋羅什可密裝夜發勿使人知弟子曰恐明旦追至不免復還耳耶舍乃取淸水一鉢以藥投中呪數十言與弟子洗足卽便夜發比至旦行數百里問弟子曰何所覺耶答曰唯聞疾風之響眼中淚出耳耶舍又與呪水洗足住息明旦國人追之已差數百里不及行達姑臧而什已入常安什聞其至姑臧勸興迎之興未納頃之命什譯出經藏什曰夫弘宣法教宜令文義圓通貧道雖誦其文未善其理唯佛陁耶舍深達經致今在姑臧願下詔徵之一言三詳然後著筆使微言不墜取信千載也興從之卽遣使招迎厚加贈遺悉不受重信敦喩方至常安興自出候問別立新省於逍遙園四事供養竝不受至時分衛一食而已于時羅什出十住經一月餘日疑難猶豫尚未操筆耶舍旣至共相徵決辭理方定道俗三千餘人皆歎其賞要舍爲人髭赤善解毘婆沙故時人號曰赤髭毘婆沙旣爲羅什之師亦稱大毘婆沙四輩供養臥具滿三間屋不以關心興爲貨之於城南造寺耶舍先誦曇無德律司隸挍尉姚爽或云姚奭請令出之興疑其遺謬乃試耶舍令誦羌藉藥方各四十餘紙三日乃執文覆之不誤一字衆服其强記卽以弘始十年戊申譯四分律幷長阿含等經至十五年癸丑方訖涼州沙門竺佛念譯爲秦言道含筆受譯畢解坐興嚫耶舍布絹萬疋悉皆不受佛念道含布絹各千疋名德沙門五百人皆重嚫施耶舍後還罽賓不知所終 四分序云壬辰之年有晉國沙門支法領西越流沙遠期天竺路經于塡會遇曇無德部體大乘三藏沙門佛陁邪舍才艶博聞明練經律三藏方等皆諷誦通利卽於其國廣集諸經於精舍還以歲在戊申始達秦國秦主姚欣然卽以其年請出律藏時集持律沙門三百餘人於長安中寺出卽以領弟子慧辯爲譯其壬辰年卽秦建初七年也戊申歲卽弘始十年也又有說云耶舍與佛念等共勘法領所將梵本然後翻出衆說少殊未詳孰正又准僧肇長阿含序及高僧傳竝云四分弘始十二年出者此或據部終時說也差摩經一卷 東晉隆安年達廣州在白沙寺爲淸信女張普明譯此應入晉錄隨人附秦見高僧傳及長房錄樂瓔珞莊嚴方便品經一卷 一名轉女身菩薩問答經第三出與法護順㩲方便經等同本李廓錄云羅什譯准經後記云耶舍出故移編此舍利弗阿毘曇論二十二卷 或無論字或二十卷或三十卷共曇摩崛多於石羊寺出釋道摽製序見僧祐寶唱二錄及高僧傳右三部二十四卷 初一部 一卷闕本後二部二十三卷見在沙門曇摩耶舍秦言法稱 高僧傳翻爲法明義乖也罽賓國人少而好學年十四爲弗若多羅所知長而氣幹高爽雅有神慧該覽經律明悟出群陶思八禪遊心七覺時人方之浮頭婆馱孤行山澤不避虎兕獨處思念動移宵日嘗於樹下每自剋責年將三十尚未得果何其懈哉於是累日不寢不食專精苦到以悔先罪乃夢見博叉天王語之曰沙門當觀方弘化曠濟爲懷何守小節獨善而已道假衆緣復須時熟非分强求死而無證覺自思惟欲遊方授道旣而踰歷諸國冒涉艱危以晉隆安中初達廣州住白沙寺耶舍善誦毘婆沙律人咸號爲大毘婆沙有淸信女張普明諮受佛法耶舍爲說佛生緣起幷爲譯出差摩經一卷至義熙中來入常安時姚興僭號甚宗佛法耶舍旣至深加禮異會有天竺沙門曇摩掘多秦言法藏來入關中同氣相求宛然若舊因共出舍利弗阿毘曇以秦弘始九年丁未書出梵文停至十六年甲寅經師漸閑秦語令自宣譯至十七年乙卯方訖凡二十二卷秦太子泓親管理味沙門道標爲之作序又出樂瓔珞經一卷耶舍後南遊江陵止于辛寺大弘禪法其有味靖之賓披榛而至者三百餘人凡士庶造者雖先無信心見皆敬悅自說有一師一弟子修業竝得羅漢傳者失其名又嘗於外門閉戶坐禪忽有五沙門來入其室又時見沙門飛來樹端者往往非一常交接神明而俯同矇俗雖道迹未彰時人咸謂已階聖果至宋元嘉中辭還西域而不知所終秦乞伏氏都菀川 亦云西秦從乞伏國仁謚宣烈王 建義元年乙酉至乞伏慕末無謚 永弘四年辛未凡經四主四十七年沙門一人譯經及三秦代新舊失譯經律論等摠五十六部一百一十卷 於中三十二部七十九卷見在二十四部三十一卷闕本乞伏秦 沙門釋聖堅 一十五部 二十四卷經三秦代新舊諸失譯經 四十一部八十六卷七部七卷舊集 三十四部七十九卷新附羅摩伽經三卷 是華嚴入法界品少分異譯見內典錄太子須大拏經一卷 出六度集第二卷異譯於江陵辛寺出庾爽筆受或云須達拏見始興錄及寶唱錄應入晉世隨人附秦睒子經一卷 一名孝子睒經一名菩薩睒經一名佛說睒經一名睒本經一名孝子隱經凡六名第四出出六度集第二卷異譯見始興錄及法上錄摩訶剎頭經一卷 亦名灌佛形像經亦直云灌佛經第二出與灌洗佛形像經同本見始興錄無崖際持法門經一卷 一名無際經與尊勝菩薩所問經等同本初出見始興錄及法上錄演道俗業經一卷 第二出與支謙譯者同本見法上錄除恐災患經一卷 第二出與帛延譯者同本見始興寶唱法上三錄賢首經一卷 一名賢首夫人經見始興錄阿難分別經一卷 亦名阿難問事佛吉凶經第三出見始興錄及法上錄婦人遇辜經一卷 一名婦遇對經見始興法上二錄上見存已下闕方等主虛空藏經八卷 亦云虛空藏所問經一名勸發菩薩莊嚴菩提經或五卷是大集虛空藏品異譯見晉世雜錄及法上錄云與羅摩伽經同本非也菩薩所生地經一卷 一名摩竭所問經 第二出見趙錄未知前後趙逐人附西秦見始興錄孛經一卷 第三出見法上錄僮迦葉解難經一卷 亦云童迦葉經與鳩摩迦葉經同本祐云出長阿含庾爽筆受見始興王宗寶唱支敏度等四錄七女本經一卷 亦名女本心明經亦名七女經第三出見支敏度都錄右一十五部二十四卷 婦人遇辜上十部一十二卷見在方等主下五部一十二卷闕本沙門釋聖堅或云法堅亦謂堅公未詳孰是故備列之器量弘普利物爲心以乞伏秦太初年間於河南國爲乾歸謚武元王譯羅摩伽等經一十五部尋其聖堅遊化隨處出經旣適無停所弗知附見何代世錄爲正今依法上摠注入乞伏秦世錄云沙彌羅經一卷 第二出與五母子經同本薩和薩王經一卷阿多三昧經一卷 或作阿陁陁賢王經一卷颰陁悔過經一卷方等決經一卷比丘二事經一卷 祐錄云三事上七部僧祐錄云安公關 中異經右七部七卷初沙彌羅經有本餘者竝闕長房錄云竝是沙門僧祐出三藏集錄釋道安所記關中異經今還附入三秦世錄摠爲失譯時代處云房錄復有梵本經四卷腳下注云似是長安中出 後漢失譯錄中已有此中復載旣是重上刪之不存也已下新附此錄天王太子辟羅經一卷 或無天王字亦云太子譬羅經菩薩本行經一卷大珍寶積惟日經一卷墮迦羅問菩薩經一卷阿難爲蠱道呪經一卷 舊錄云阿難爲蠱道所呪經今疑是藏中摩鄧女經王舍城靈鷲山經一卷 舊錄云王舍城靈鷲山要眞經思道經一卷 佛在竹園經一卷法爲人經一卷 道意經一卷阿夷比丘經一卷 八德經一卷今疑是海八德經善德經一卷摩訶揵陁惟衛羅盡信比丘等度經一卷 舊錄云盡信比丘經右一十四部一十四卷 初太子辟羅經有本餘者竝闕僧祐錄云安公關中異經長房等錄竝闕不載祐載安公關中異經摠二十四部二十四卷於中七部如房錄中列今更出一十四經通有二十一部餘之三部長房等錄皆摽譯主故此闕之大寶積經一卷 今編入寶積當弟四十三會改名普明菩薩會第三出與摩訶衍寶嚴佛遺日摩尼寶二經同本異譯度諸佛境界智光嚴經一卷 初出與佛華嚴入如來德智不思議境界經等同本舊云與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等同本者全乖也大悲分陁利經八卷 亦云大乘悲分陁利經第二出與曇無讖悲華經等同本大金色孔雀王呪經一卷 第五出佛說大金色孔雀王呪經一卷 第六出二經同本大方廣如來秘密藏經二卷 大周錄云與大方等如來藏經同本者非也金剛三昧本性淸淨不壞不滅經一卷亦名金剛淸淨經長房等錄云吳支謙譯後漢失譯中復載竝非也今尋文句似秦時譯故移編此師子月佛本生經一卷 長房等錄云西晉竺法護譯今尋文句非是護公所出似秦代譯故移編此十吉祥經一卷一切智光明仙人慈心因緣不食肉經一卷淨業障經一卷別譯雜阿含經二十卷出家功德經一卷 非是賢愚抄出者毘尼母經八卷 亦云毘尼母論薩婆多毘尼毘婆沙九卷三彌底部論三卷 或無部字或云四卷辟支佛因緣論二卷十八部論一卷 初出與部異執論等同本房等竝云眞諦譯者非也佛入涅槃密迹金剛力士哀戀經一卷無明羅剎集一卷 亦云無明羅剎經或二卷右二十部六十五卷竝是見入藏經似是秦時譯出數本經中竝有秦言之字諸失譯錄竝未曾載今附此秦錄庶免遺漏焉通前舊失譯經七部七卷及新附安公關中異經等摠四十一部合八十六卷竝爲三秦失譯云前涼張氏都姑臧 新上餘錄無年依甄鸞錄多從晉年號從張軌謚爲武王永寧元年辛酉至天錫秦封驃騎大將軍涼州牧咸安六年景子凡經八主七十六年外國優婆塞一人譯經四部合六卷於中一部一卷見在三部五卷闕本前涼優婆塞支施崙四部六卷經須賴經一卷 與曹魏白延吳支謙宋功德賢所出須賴經同本見經後記第三出咸安三年出如幻三昧經二卷 第四出與安高法護如幻三昧及寶積善住意會等同本見首楞嚴經後記咸安三年出上金光首經一卷 第二出與晉法護大淨法門經隋耶舍大莊嚴法門經同本咸安三年出見首楞嚴經後記首楞嚴經二卷 第八出與漢支讖吳支謙魏白延晉法護等所出首楞嚴同本咸安三年出見經後記右四部六卷 須賴經一部一卷見在如幻等五部三卷闕本優婆塞支施崙月支人也博綜衆經特善方等意存開化傳於未聞奉經來遊達於涼土張公見而重之請令翻譯以咸安三年癸酉從晉年號也 於涼州州內正聽堂後湛露軒下出須賴等經四部龜茲王世子帛延傳語常侍西海趙潚會水令馬亦內侍來恭政三人筆受沙門釋慧常釋進行同在會證涼州自屬辭不加文飾也出須賴經後記及首楞嚴經後記前涼之代應更出經後進遇之幸續編附北涼沮渠氏初都張掖後徙姑臧自蒙遜謚武宣王永安元年辛丑至茂虔魏封河西王承和七年己卯凡經二主三十九年緇素九人所出經論等幷新舊集失譯諸經摠八十二部合三百一十一卷於中二十五部二百九卷見在五十七部一百二卷闕本北涼沙門釋道龔 二部 一十二卷經沙門釋法衆 一部 四卷經沙門僧伽陁 一部 二卷經沙門曇無讖 一十九部 一百三十一卷經律集安陽侯沮渠京聲 一部 二卷集沙門浮陁跋摩 一部 六十卷論沙門釋智猛 一部 二十卷經沙門釋道泰 二部 四卷論沙門釋法盛 一部 一卷經新舊諸失譯經 五十二部七十五卷五部一十八卷舊集四十八部 五十七卷 新附寶梁經二卷 今編入寶積當第四十四會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悲華經十卷 第三出與法護閑居經及大悲分陀利曇無讖悲華經等同本房云見古錄似是先譯龔更刪改今疑卽無讖出者是右二部一十二卷 前寶梁經一部二卷見存後悲華經一部十卷闕本沙門釋道龔虛心廣運弘利爲道以北涼河西王蒙遜僭號永安年間於張掖爲蒙遜譯寶梁等經二部大方等陁羅尼經四卷 或無大字一名方等檀持陁羅尼經或直云擅持陁羅尼經見竺道祖晉世雜錄及僧祐錄右一部四卷其本見在沙門釋法衆高昌郡人亦以永安年中於張掖爲河西王蒙遜譯大方等陁羅尼經一部寶唱錄云在高昌郡譯未詳孰是慧上菩薩問大善㩲經二卷 一名大善㩲經一名慧上菩薩經一名大乘方便經凡四名本竝同第五出與漢佛調晉法護所出大善㩲經及寶積大乘方便會等同本右一部二卷本闕沙門僧伽陁涼言饒善西域人意存兼濟化誘居懷亦以永安年中於張掖爲蒙遜譯大善㩲經一部見始興錄及法上錄大般涅槃經四十卷 或三十六卷第五譯玄始三年出至十年十月二十三日訖梵本具足有三萬五千偈今所譯者止萬餘偈三分始一耳見竺道祖涼錄及僧祐錄大方等大集經三十卷 或直云大集經第三出與漢世支讖姚秦羅什出者同本或二十九或三十一或三十二或四十卷良由初出卽寫分卷不同見竺道祖涼錄及僧祐錄大方廣三戒經三卷 初出與寶積三律儀會同本見法上錄悲華經十卷 第四出與大悲分陁利經等同本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祐云別錄或云龔上出今疑道龔與讖同是一經二處竝載恐未然也金光明經四卷 初出一十八品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與新譯金光明最勝王經等同本今入八卷合經中此四卷者在刪繁錄大方等大雲經六卷 一名大方等無相大雲經一名大雲無相經一名大雲密藏經或云方等大雲經或四卷或五卷於內菀寺譯第二出見僧睿李廓僧祐三錄腹中女聽經一卷 一名不莊挍女經與無垢賢女經轉女身經等同本第三出見長房錄菩薩地持經十卷 或無經字亦云論亦名菩薩戒經又名菩薩地經或八卷出瑜伽論本地分中菩薩地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優婆塞戒經七卷 或無經字是在家菩薩戒或五卷或六卷或十卷玄始十五年丙寅四月二十三日出至七月二十三日訖沙門道飬筆受見經後記及僧祐錄菩薩戒本一卷 出地持戒品中第二出與大唐奘法師所出戒本等同本別錄云燉煌出見僧祐錄文陁竭王經一卷 出中阿含第十一卷異譯見長房錄佛所行讚經傳五卷 或云經無傳字或云傳無經字馬鳴菩薩造亦云佛本行經見長房錄上見在已下闕勝鬘經一卷 亦云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經初出見長房錄與宋功德賢所出勝鬘經及寶積勝鬘夫人會同本羅摩伽經一卷 第四出與曹魏安法賢等所出同本但廣略異是華嚴入法界品少分見長房錄楞伽經四卷 初出與宋功德賢元魏菩提留支唐實叉難陁等所出同本見長房錄須眞天子經一卷 第二出與西晉法護出者同本房云見吳錄又云羅什出似再譯海龍王經四卷 或加新字第二出與竺法護出者同本玄始七年出見竺道祖河西錄及僧祐錄功德寶光菩薩經一卷 見長房錄菩薩戒壇文一卷 亦云優婆塞戒壇文祐云菩薩戒優婆塞戒壇文見僧祐寶唱二錄右一十九部一百三十一卷所行讚上一十二部一百一十八卷見在勝鬘經下七部一十三卷闕本沙門曇無讖或云曇摩懺亦云曇謨讖蓋取梵音不同故也涼云法豐中印度人婆羅門種讖六歲父亡母以傭織養讖見沙門達摩耶舍此言法稱道俗宗敬豐於利養其母羡之故以讖爲弟子十歲與同學數人讀呪聰敏出群讀經日得萬餘言初學小乘兼覽五明諸論講說精辯莫能詶抗後遇白頭禪師共讖論議習業旣異交諍十旬讖雖攻難鋒起而禪師終不肯屈讖服其精理乃謂禪師曰頗有經典可得見不禪師卽授以樹皮涅槃經本讖尋讀驚悟方自慚恨以爲坎井之識久迷大方於是集衆悔過遂專業大乘至年二十所誦大小乘經二百餘萬言讖從兄善能調象騎殺王所乘白耳大象王怒誅之令曰敢有視者夷三族親屬莫敢往讖哭而葬之王怒欲誅讖讖曰王以法故殺之我以親而葬之竝不違大義何爲見怒傍人爲之寒心其神色自若王奇其志氣遂留供養讖明解呪術所向皆驗西域號爲大神呪師後隨王入山王渴乏須水不能得讖乃密呪石出水因讚曰大王惠澤所感遂使枯石生泉鄰國聞者皆歎王德于時雨澤甚調百姓稱詠王悅其道術深佳優寵頃之王意稍歇待之漸簿讖怒曰我當以罌水詣池呪龍入罌令天下大旱王必請呪然後放龍降雨則見待何如遂持罌造龍有密告之者王怒捕讖讖懼誅乃齎大涅槃經本前分一夾幷菩薩戒經地持經也菩薩戒本奔龜茲龜茲國多小乘學不信涅槃遂至姑臧止於傳舍慮失經本枕之而寢有人牽之在地讖驚謂是盜者如此三夕聞空中語曰此如來解脫之藏何以枕之讖乃慚悟別置高處夜有盜之者擧不能勝乃數過擧之遂不能動明旦讖持經去不以爲重盜者見之謂是聖人悉來拜謝河西王沮渠蒙遜聞讖名呼與相見接待甚厚蒙遜素奉大法志在弘通請令出其經本讖以未參土言又無傳譯恐言舛於理不許卽翻於是學語三年方譯初分十卷是時沙門慧嵩道朗獨步河西値其宣出法藏深相推重轉易梵文嵩公筆受道俗數百人疑難縱撗讖臨機釋滯未嘗留㝵朗等更請廣出餘經謂大集大雲悲華地持等兼涅槃經摠十九部讖以涅槃經本品數未足還國尋求値其母亡遂留歲餘後於于塡更得經本復還姑臧續譯成四帙焉讖以玄始三年甲寅創首翻譯至十五年丙寅都訖房云玄始十年訖者此乃涅槃竟時非餘經也准優婆塞戒經後記云丙寅年出此卽十五年中猶出經也讖至義和三年癸酉三月方卒中間六載應更出經錄中不言故未詳也讖嘗告遜云有鬼入聚落必多災疫遜不信欲躬見爲驗讖卽以術加遜遜見而駭怖讖曰宜潔誠齋戒神呪驅之乃讀呪三日謂遜曰鬼北去矣旣而北境之外疫死萬數遜益敬憚禮遇彌崇會魏太武皇帝聞其道術遣使迎請且告遜曰若不遣讖便卽加兵遜自揆國弱難以拒命兼慮讖多術或爲魏謀己進退惶惑乃密計除之初讖譯出涅槃卷數已定而外國沙門曇無發云此經品未盡讖嘗慨然誓必重尋蒙遜因其行志乃僞資發遣厚贈寶貨未發數日乃流涕告衆曰讖業對將至衆聖不能救矣以本有心誓義不容停行四十里遜密遣刺客害之時年四十九衆咸慟惜焉旣而遜左右常白日見鬼神以劍擊遜至四月寢疾而終遜以義和三年三月害讖卽其年四月遇疾而終信哉報應不虛如影之隨形也房云讖在處世承和四年卒者非也其義和三年卽魏延和二年歲在癸酉也初讖在姑臧有張掖沙門道進欲從讖受菩薩戒讖云且悔過乃竭誠七日七夜至第八日晨詣讖求受讖忽大怒進更思惟但是我業障未銷耳乃戮力三年且禪且懺卽於定中見釋迦文佛與諸大士授已戒法其夕同止十餘人皆感夢如進所見進欲詣讖說之未至十步讖驚起唱言善哉善哉已感戒矣吾當更爲汝作證次第於佛像前爲說戒相沙門道朗振譽關西當進感戒之夕朗亦通夢乃自卑戒臘求爲法弟於是從進受者千有餘人傳授此法迄至于今皆讖之遺則有別記云菩薩地持經應是伊波勒菩薩傳來此土後果是讖所傳譯疑讖或非凡也菩薩戒經八卷 祐房等錄竝云讖譯今以是地持之別名故不雙載也虛空藏經五卷 祐房等錄亦云讖譯今以卽是大集虛空藏品析出別行今載別生錄中此不復存也優婆塞戒本一卷 寶唱錄云讖譯復云出優婆塞戒經今亦載別生錄中不別存也善信女經二卷無爲道經二卷居士請僧福田經一卷決定罪福經一卷 上之四經長房等錄皆云讖譯復云世注爲疑今竝依舊附疑此中不載禪法要解二卷 第二出與羅什出者同本見長房錄右一部二卷本闕安陽侯沮渠京聲卽河西王蒙遜從弟爲人强志疏通敏朗少有智鑑涉獵書記善於談論幼稟五戒銳意內典所讀衆經卽能諷誦常以爲務學多聞大士之盛業也少時嘗度流沙到于塡國於瞿摩帝大寺遇天竺法師佛陁斯那涼言覺將安陽從之諮問道義斯那本學大乘天才秀出誦半億偈明了禪法故西方諸國號爲人中師子安陽從受禪法諸秘要術口誦梵本東歸於涼以茂虔承和年中譯禪法要解一部阿毘曇毘婆沙論六十卷或加八揵度字初出與唐譯大毘婆沙論同本或分成八十四卷或一百九卷佛後六百餘年五百應眞造見僧祐寶唱二錄右一部六十卷其本見在沙門浮陁跋摩或云佛陁跋摩涼言覺鎧西域人也幼而履操明直聰悟出群習學三藏偏善毘婆沙常誦持此論以爲心要承和年中達于姑臧先有沙門道泰志用强果少遊蔥右遍歷諸國得毘婆沙梵本十有萬偈還至姑臧側席虛襟企待明匠聞跋摩遊心此論請爲翻譯蒙遜已薨子茂虔襲位以虔承和五年丁丑四月中旬於涼州城內閑豫宮寺請跋摩譯焉泰卽筆受沙門慧嵩道朗與義學僧三百餘人考正文義至七年己卯七月方訖凡一百卷沙門道挻爲之製序有頃魏太武帝西伐姑臧涼土崩亂經書什物皆被焚蕩遂失四十卷今唯有六十存焉跋摩避亂西反莫知所終序云乙丑歲出卽蒙遜玄始十四年也丁卯歲訖卽玄始十六年也與錄不同未詳何以般泥洹經二十卷 見道慧宋齊錄反僧祐錄第六譯與無讖大般涅槃經等同本右一部二十卷本闕沙門釋智猛京兆新豐人稟性端明厲行淸白少襲法服修業專至諷誦之聲以夜續晝每見外國道人說釋迦遺迹又聞方等衆經布在西域常慨然有感馳心遐外以爲萬里咫尺千載可追也遂以姚秦弘始六年甲辰之歲招結同志十有五人發迹長安渡河跨谷三十六所至涼州城旣而西出陽關入于流沙二千餘里地無水草路絕行人冬則嚴厲夏則瘴炎人死聚骨以摽行路驝駝負糧理極辛阻遂歷鄯鄯龜茲于塡諸國備觀風俗從于塡西南行二千里始登蔥嶺而同侶九人退還猛與餘伴進行千七百餘里至波淪國同旅竺道嵩又復無常將欲闍毘忽失尸所在猛悲歎驚異於是自力而前與餘四人三度雪山冰崖皓然百千餘仞飛絙爲橋乘虛而過窺不見底仰不見天寒氣慘酷影戰魂慄復南行千里至罽賓國再渡辛頭河雪山壁立轉甚於前下多瘴氣惡鬼斷路行者多死猛誠心冥徹履險能濟旣至罽賓城恒有五百羅漢住此國中而常往反阿耨達池有大德羅漢見猛至止歡喜讚歎猛諮問方土爲說四天子事具在猛傳猛先於奇沙國見佛文石唾壺又於此國見佛鉢光色紫紺四際盡然猛香花供養頂戴發願鉢若有應能輕能重旣而轉重力遂不堪及下案時復不覺重其道心所應如此復西南行千三百里至迦維羅衛國見佛髮佛牙及肉髻骨佛影佛迹炳然具存又睹泥洹堅固之林降魔菩提之樹猛喜心內充設供一日兼以寶蓋大衣覆降魔像其所遊踐究觀靈變天梯龍池之事不可勝數後至華氏城是阿育王舊都有大智婆羅門名羅閱宗擧族弘法王所欽重造純銀塔高三丈沙門法顯先於其家已得六卷泥洹及見猛至問云秦地有大乘學不答曰悉大乘學羅閱驚歎曰希有希有將非菩薩往化耶猛就其家得泥洹梵本一部又尋得摩訶僧祇律梵本一部及餘經梵本誓願流通於是便反以甲子歲發天竺同行四僧於路無常唯猛與曇纂俱還涼州以虔承和年中譯出泥洹成二十卷猛以宋元嘉末卒昇歷尋遊方沙門記列道路時或不同佛鉢頂骨處亦乖爽將知遊往天竺非止一路頂鉢靈遷時屆異土故傳述見聞難以例也大丈夫論二卷 提波羅菩薩造見翻經圖入大乘論二卷 堅意菩薩造見唐舊錄亦見內典錄及翻經圖右二部四卷其本見在沙門釋道泰才敏自天沖氣疏朗博聞奇趣遠參異言往以漢土方等旣備幽宗粗暢其所未練唯三藏九部故杖策冒嶮爰至蔥西綜覽梵文義承高旨幷獲婆沙梵本十萬餘偈及諸經論東歸於涼遂遇浮陁跋摩共翻毘婆沙論泰後自譯大丈夫論等二部 又長房內典二錄云於其涼代復有沙門曇覺於高昌國譯賢愚經一部卽當宋元嘉二十二年也今謂不然元嘉十六年己卯涼國已絕如何二十二年乙酉仍有譯經故知二錄誤也今依靖邁經圖編在元魏之代魏宋雖竝宋居建業魏都恒安以地而論合屬魏錄菩薩投身餓虎起塔因緣經一卷僧祐錄云以身施餓虎經見經後記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法盛高昌人也亦於涼代譯投身餓虎經一卷故前高僧曇無讖傳末云于時有高昌沙門法盛亦經往外國有傳四卷其投身餓虎經後記云爾時國王聞佛說已卽於是處起立大塔名爲菩薩投身餓虎塔今見在塔東面山下有僧房講堂精舍常有五千衆僧四事供養法盛爾時見諸國中有人癩病及癲狂聾盲手腳躄跛及種種疾病悉來就此塔燒香燃燈香泥塗地修治掃灑幷叩頭懺悔百病皆愈前來差者便去後來輒爾常有百餘人不問貴賤皆爾終無絕時今詳僧傳之文及閱經記之說法盛遊於西域此事不虛復云親睹靈龕故應非謬若非盛之自譯何得著彼經終旣能自往西方豈有不傳經教考覈終始事乃分明今爲盛翻編載斯錄不退轉法輪經四卷 一名不退轉經第二出與竺法護阿惟越致遮經等同本金剛三昧經二卷 或一卷大忍辱經十卷金輪王經一卷賢劫五百佛名一卷右五部一十八卷 前二部六卷見在後三部一十二卷闕本長房等錄竝云是沙門僧祐新集釋道安涼土異經今還附入涼世目錄爲失譯源庶知時代顯譯有無卷部多少出之處所已下新附此錄優婆夷淨行法門經二卷 或無經字亦直云淨行經長者法志妻經一卷大愛道比丘尼經二卷 亦云大愛道受戒經舊錄云大愛道經三慧經一卷 菩薩等行經一卷此已下闕四無畏經一卷㩲變經一卷 舊錄云文殊師利權變三昧經或直云㩲變三昧經十漚和經一卷七言禪利經一卷 舊錄云漚和七言禪利經菩薩十漚和經一卷 今疑與前十漚和同甁沙王經一卷 有無經一卷五百偈經一卷須耶越國貧人經一卷 舊錄云須耶越國貧人賃剔頭經浮木經一卷 坏喩經一卷妖怪經一卷阿般計泥洹經一卷 一本作陶射計泥洹經四非常經一卷 五失蓋經一卷要眞經一卷 本無經一卷勸德經一卷 十五德經一卷父母因緣經一卷 今疑與父子因緣經同慧行經一卷 未生王經一卷今疑是未生怨經內外無爲經一卷 道淨經一卷七事本末經一卷 舊錄云七事本行經百寶三昧經一卷 三乘經一卷耆域術經一卷 舊錄云耆域四術經五蓋離疑經一卷 今疑是五蓋疑結失行經太子智止經一卷 道德章經一卷苦相經一卷須佛得度經一卷 由經一卷分然洹國迦羅越經一卷五陰事經一卷 義決法事經一卷十思惟經一卷 分別六情經一卷三失蓋經一卷 佛寶三昧經一卷法志女經一卷右四十七部四十九卷 唯初四部六卷有本餘者竝闕僧祐錄云安公涼土異經長房等錄闕而不載今還附入涼錄以爲失譯祐載安公涼土異經摠五十九部於中五部房錄已載今更出四十七部通前五十二部餘有七部一十四卷謹按長房等錄皆有所憑卽非失譯是故此錄刪之不存今具條件列之如左須菩提品經七卷 般若鈔經異名前秦曇摩蜱譯文殊師利示現寶藏經二卷 西晉竺法護譯七知經一卷 或作七智吳支謙譯難龍王經一卷 或云難龍經亦云龍王兄弟經異名吳支謙譯阿陁三昧經一卷 卽阿多三昧經異名安公關中異經已載大五濁經一卷 舊錄云大五濁世經群錄云僞今亦編之首至問十四章經一卷 舊錄云首至問佛十四意經或云首至問十四事經亦云後漢支曜譯今爲抄經載別生錄大方廣十輪經八卷 初出與唐譯地藏十輪經同本是大集第十三分似涼代譯群錄不載今附此涼末庶免遺漏耳通新及舊摠五十三部合七十五卷竝爲北涼失源云開元釋教錄卷第四 摠錄之四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본전(本傳) 이외의 전(傳)을 말한다. 즉, 『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을 말한다.
  2. 2)한초(漢初)의 사서(辭書)이다.
  3. 3)13경(經)의 하나이며, 옛 중국의 사전(辭典)으로 19권으로 되어 있다.
  4. 4)경서 따위 고문의 자구(字句)를 해석하는 일이다.
  5. 5)성문(聲聞) 4과의 하나이며, 예류과(預流果)를 말하는데,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고 처음으로 성인의 무리에 참여하는 자리를 뜻한다.
  6. 6)옛날, 대나무에 글자를 쓰고 두 조각으로 내어 양자가 하나씩을 가지고, 후일 그것을 맞추어 봄으로써 증거로 삼던 것이다.
  7. 7)가지가 다른 나뭇가지끼리 맞닿아서 하나로 된 것을 말한다.
  8. 8)어떤 일에 대한 깊은 맛. 또는, 그 일에 깃들어 있는 오묘한 뜻을 말한다.
  9. 9)봉황의 한 가지인 영조(靈鳥)로 닭 비슷한데, 털은 붉은 바탕에 오채(五彩)가 섞였으며, 소리는 오음(五音)에 맞는다고 하였다.
  10. 10)석가(釋迦)가 입멸(入滅)한 후 5백 년간의 불교를 정법(正法)이라 하고, 그 후 천 년간의 불교를 상법(像法)이라 함. 부처가 설교한 법은 있으나 사람들의 신앙이 형식화하여 불상(佛像)이나 사탑(寺塔) 등의 건축물을 주로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시대를 말한다.
  11. 11)불교의 용어로, 모든 법의 모양이나 상태를 뜻한다.
  12. 12)성자(聖者) 되는 수행을 쌓아서 얻은 결과로서의 깨달음, 곧 열반을 뜻한다.
  13. 13)종장(宗匠)이라고도 한다.
  14. 14)스님으로서 계법(戒法)을 전수받는 식단(式壇)이나 戒場(계장)을 뜻한다.
  15. 15)고대 인도의 바라문이 연구한 다섯 가지 명(明). 문학의 성명(聲明), 기술의 공교명(工巧明), 의술(醫術)의 의방명(醫方明), 논리학의 인명(因明), 철학의 내명(內明)을 말한다.
  16. 16)설법(說法)하여 중생을 교화(敎化)함을 말한다.
  17. 17)『고려대장경』에는 “누가 정확한지 자세하지 않다[未詳孰正]”고 되어 있으나, 『대정신수대장경』에는 어느 왕 때인지 자세하지 않다[未詳孰王]고 되어 있다.
  18. 18)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각각 사선(四禪)을 말한다.
  19. 19)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닦는 37가지 도행(道行) 가운데 제6. 칠보리분(七菩提分)ㆍ칠각지(七覺支)ㆍ칠각의(七覺意)이라고도 한다. 불도를 수행하는데, 지혜로써 참되고 거짓되고 선하고 악한 것을 살펴서 골라내고 알아차리는데, 택법각분(擇法覺分)ㆍ정진각분(精進覺分)ㆍ희각분(喜覺分)ㆍ제각분(除覺分)ㆍ사각분(捨覺分)ㆍ정각분(定覺分)ㆍ염각분(念覺分) 7종이 있다
  20. 20)불타발타라의 다른 이름으로,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부른다.
  21. 21)범어로는 비류박차(毗留博叉), 또는 운비류파차(雲毗流波叉) 하고, 중국말로는 광목(廣目)이라하는데, 눈이 다른 사람보다 광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미산 서쪽 백은사(白銀山)에 거주하는 천왕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 중의 하나이다.
  22. 22)같은 기(氣)를 가진 자는 서로 찾아서 모인다는 뜻이다.
  23. 23)성자(聖者) 되는 수행을 쌓아서 얻은 결과로서의 깨달음, 곧 열반을 뜻한다.
  24. 24)이익으로써 몸을 보양(保養)하다는 뜻이다.
  25. 25)부사의한 힘을 가진 스승이라는 뜻이다.
  26. 26)계법의 조규(條規)에 따라 실지로 행할 때에 그 행하는 모양의 여러 가지 차별이 있는 것을 말한다.
  27. 27)염부주(閻浮洲)의 4대하인 긍가ㆍ신도ㆍ박추ㆍ사다의 근원이며, 설산의 북, 향취산의 남쪽에 있다.
  28. 28)수미산의 사방에 있는 4개의 대주(大洲)인데, 남을 섬부주(贍部洲), 동을 승신주(勝身洲), 서를 우화주(牛貨洲), 북을 구로주(瞿盧洲) 등을 말한다.
  29. 29)공양하는 네 가지 물건인데, (1)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탕약(湯藥). (2) 의복ㆍ음식ㆍ산화(散華)ㆍ소향(燒香). (3) 방사(房舍)ㆍ음식ㆍ의복ㆍ산화소향 등을 말한다.

 

 

 

개원석교록 제 5 권


지승 지음


1. 총괄군경록 ⑤

11) 송(宋) 시대
송나라 유(劉)씨는 건업(建業)에 도읍하였다. 무제(武帝) 영초(永初) 원년 경신(庚申, 420)으로부터 순제(順帝) 승명(昇明) 3년 기미(己未, 479)에 이르기까지 무릇 8주(主) 60년 동안에 승려들과 속인 22인이 번역하여 낸 경(經)ㆍ율(律)ㆍ논(論) 등과 아울러 잡집(雜集)과 실역(失譯)의 모든 경은 총 465부 717권이다.그 중에서 93부 243권은 경본이 현재 있고, 372부 474권은 궐본이다.

송(宋)의 사문 불타집(佛陁什)3부 32권. 율(律)ㆍ계(戒)ㆍ갈마(羯磨)
사문 강량야사(畺良耶舍)2부 2권. 경
사문 담마밀다(曇摩蜜多)12부 17권. 경
사문 석지엄(釋智嚴)10부 31권. 경
사문 석보운(釋寶雲)4부 17권. 경(經)ㆍ집(集)
사문 이섭바라(伊葉波羅)1부 13권. 논(論)
사문 구나발마(求那跋摩)10부 18권. 율ㆍ집
사문 승가발마(僧伽跋摩)5부 24권. 율ㆍ논ㆍ집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52부 134권. 경ㆍ논ㆍ집
사문 석담무갈(釋曇無竭)1부 1권. 경
거사(居士) 저거경성(沮渠京聲)28부 28권. 경ㆍ율
사문 석혜간(釋慧簡)10부 10권. 경ㆍ집
사문 공덕직(功德直)2부 7권. 경
사문 석승거(釋僧璩)1부 1권. 갈마(羯磨)
사문 석법영(釋法穎)1부 1권. 니계(尼戒)
사문 축법권(竺法眷)6부 29권. 경
사문 석상공(釋翔公)1부 2권. 경
사문 석도엄(釋道嚴)2부 3권. 경ㆍ율
사문 석용공(釋勇公)3부1) 3권. 경
사문 석법해(釋法海)2부 2권. 경ㆍ율
사문 석선공(釋先公)1부 1권. 경
사문 승가발미(僧伽跋彌)1부 1권. 율초(律抄)
신집실역제경(新集失譯諸經)307부 340권

(1) 불타집(佛陀什)
오분율(五分律) 30권또한 『미사색률(彌沙塞律)』이라고도 한다. 혹은 34권으로 되어 있다. 『별록(別錄)』에서는 “24권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착오였을 것이다. 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오분비구계본(五分比丘戒本) 1권또한 『미사색계본(彌沙塞戒本)』이라고도 한다. 『축도조록(竺道祖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미사색갈마(彌沙塞羯磨) 1권『축도조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32권이다.율(律)과 계(戒) 본(本)은 현재 있으며, 갈마(羯磨) 본은 궐본이다.

사문 불타집은 중국말로는 각수(覺壽)라고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미사색부(彌沙塞部)에서 가르침을 받아 율품(律品)에 오로지 힘을 써서 정진하였으며, 겸하여 선요(禪要)에도 달통하였다.
폐제(廢帝) 의부(義符) 경평(景平) 원년 계해(癸亥, 423) 7월에 양도(楊都)에 이르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률(彌沙塞律)』 범본(梵本)을 얻었으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건업(建業)의 모든 승려들은 불타집이 이미 이 학문(學問)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곧 그 해(423) 겨울 11월에 용광사(龍光寺)에 모여 번역하였으며, 『오분율(五分律)』이라고 칭하였다. 불타집은 범문을 잡고 우전(于塡) 사문 지승(智勝)이 통역을 하고, 용광사 사문 축도생(竺道生)과 동안사(東安寺) 사문 석혜엄(釋慧嚴)이 함께 붓을 들고 대조하며 교정하였다. 송(宋)의 시중(侍中) 낭야왕(瑯琊王) 연(練)이 시주자[檀越]가 되어서, 다음해(424) 12월에야 비로소 모두 마쳤다. 그리하여 번역한 계의 요점[戒心]과 갈마문(羯磨文)이 다 세상에 유행하였다. 불타집이 어디서 입적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2) 강량야사(畺良耶舍)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1권또한 『무량수관경(無量壽觀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도혜의 『송제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관약왕약상이보살경(觀藥王藥上二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송제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2부 2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강량야사는 중국말로는 시칭(時稱)이라고 한다. 서역 사람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즐기려는 마음과 욕심[嗜欲]이 적었다. 『아비담(阿毗曇)』을 잘 암송하였고, 율부(律部)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경전에 대해서도 해박하였다. 삼장(三藏)에도 밝았지만, 선문(禪門)에도 전념하여 힘을 쏟았다. 매양 한 번 마음을 관조[遊觀]하면, 혹 7일 동안은 일어나지 않았다. 늘 삼매(三昧)로 바로 받아들인 것을 여러 나라에 전하고 교화하였다.
원가(元嘉) 원년 갑자(甲子, 424)에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사하(沙河)를 건너와 건업(建業)에 도착하자, 문제(文帝) 의융(義隆)이 매우 감탄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칙명으로 종산(鍾山)의 도림정사(道林精舍)에 머물렀는데, 사문 보지(寶誌)가 그의 선법(禪法)을 숭배하였다. 사문 승함(僧含)의 청으로 『관무량수경』과 『관약왕약상이보살경』을 번역하였고, 승함이 곧 붓으로 받아 적었다. 이 두 경전은 정토(淨土)로 나아가는 큰 인[洪因]이 되고, 업장[障]을 바꾸는 비술(秘術)로 여겼다. 그리하여 조용히 읊조리고 음미되어 송나라에 널리 퍼졌다. 평창(平昌)의 맹의(孟顗)는 소문을 듣고 흠모하며 공경하여, 필요한 물자를 넉넉하고 후하게 공급하였다. 맹의는 회계(會稽)의 수령으로 나가게 되면서 함께 떠날 것을 간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 후에 강릉(江陵)으로 옮겨서 쉬었다. 원가 19년(442)에 서쪽으로 민촉(岷蜀)을 돌아다니며 곳곳에서 도를 폈으니, 선을 배우는 사람들[禪學]이 무리를 이루었다. 후에 돌아와 강릉에서 입적하였으니 춘추는 60세였다.

(3) 담마밀다(曇摩蜜多)
허공장보살신주경(虛空藏菩薩神呪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요진(姚秦) 불타야사(佛陁耶舍)의 『허공장경(虛空藏經)』과 수(隋)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의 『허공잉경(虛空孕經)』 등과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과 『위세록(魏世錄)』에 보인다.
관허공장보살경(觀虛空藏菩薩經) 1권또한 『허공장관경(虛空藏觀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상액경(象腋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소희망경(無所希望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제법용왕경(諸法勇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일체법고왕경(一切法高王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전녀신경(轉女身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구현녀경(無垢賢女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 1권아래 주(注)에 “『심공덕경(深功德經)』 중에서 나왔다. 혹은 행법(行法)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보현관경(普賢觀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오문선경요용법(五門禪經要用法)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것과 동본이다. 『보창록(寶唱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 2권열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세고가 번역한 『무량수경(無量壽經)』과 『보적경(寶積經)』의 「무량수회(無量壽會)」 등과 동본이다. 『진적사록(眞寂寺錄)』에 보인다.
욱가장자소문경(郁伽長者所問經) 1권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안현(安玄)의 『법경경(法鏡經)』과 『보적경』의 「욱가장자회(郁伽長者會)」 등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佛昇利忉天爲母說法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한 『불승도리천경(佛昇忉利天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선비요경(禪秘要經) 5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일명 『선법요(禪法要)』라고 한다. 원가(元嘉) 18년(441)에 기원사(祇洹寺)에서 번역하여 나왔다. 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승우록』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금은 『선비요경』 5권이 있으나, 문장이 극히 뒤섞이고 엇갈려 유행하지 못하고 있다. 『산번록(刪繁錄)』에 기술한 것과 같다.
이상은 12부 17권이다.『오문선경요용법』 이상의 7부 7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무량수경』 이하의 5부 10권은 궐본이다.

사문 담마밀다는 중국말로는 법수(法秀)라고 한다. 계빈(罽賓) 사람이다. 나이 예닐곱 때부터 신명(神明)이 맑고 올곧았으며, 불사(佛事)나 법회[法事]를 볼 때마다 저절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의 부모는 사랑하고 기이하게 여겨서, 마침내 그를 출가시켰다. 계빈국에는 성인과 통달한 이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담마밀다는 자주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여러 경들을 널리 관통하였다. 특히 선법(禪法)은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는데, 그가 얻은 비밀스런 요체(秘要)는 지극히 은밀하고 심오하였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깊이가 있어 지혜가 있고, 의식에 대한 규칙[儀軌]에는 상세히 정돈되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두 눈썹이 붙어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연미선사(連眉禪師)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교화를 널리 펼치겠다고 맹세하였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구자국(龜慈國)에 이르렀다. 구자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구자국 왕의 꿈에 신(神)이 말하였다.
“큰 복덕이 있는 사람이 내일 나라로 들어올 것이니, 그대는 마땅히 공양하여야 한다.”
다음날 아침, 곧바로 외사(外司)에 칙령을 내려 ‘만일 이방인(異邦人)이 국경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달려와 아뢰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과연 담마밀다가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왕은 몸소 교외로 나가 그를 맞이하여 궁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왕은 드디어 그에게 계(戒)를 받고 사사(四事)의 공양을 다하였다. 담마밀다는 편안하게 옮겨 다닐 수 있었고, 이양(利養)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몇 년을 머물고는 떠날 마음을 가졌다. 그러자 다시 신(神)이 왕의 꿈에 내려와 말하였다.
“복덕 있는 사람이 왕을 버리고 떠나리라.”
왕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이윽고 왕과 신하들이 극구 말렸으나, 그를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유사(流沙)를 지나 돈황(燉煌)에 이르러서, 넓은 들판에다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나무 천 그루를 심고, 정원 백 이랑[畝]2)을 조성하였다. 승방ㆍ누각ㆍ못과 숲이 지극히 엄숙하고 청정하였다. 얼마 지나서 다시 양주(涼州)로 가서 공부(公府)의 옛 절에 다시 당우(堂宇)를 경영하였는데, 배우러 온 문도들이 많아서 선업(禪業)이 매우 왕성하였다.
항상 강좌(江左)의 여러 백성들에게 법을 전하려는 뜻을 두었으므로, 원가(元嘉) 원년(424)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촉(蜀)에 이르렀다. 이윽고 협주(峽州)를 나와 형주(荊州)에 머물면서, 장사사(長沙寺)에다 선관(禪舘 : 선을 공부하는 집)을 지었다. 지극히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사리(舍利) 얻기를 기도하였는데, 10여 일을 지나 마침내 한 매(枚)를 감응하여 얻었다. 그릇에 부딪쳐 소리가 나는데, 빛을 내뿜어 온 방 안에 가득하였다. 도속(道俗)의 문도들은 그들의 마음으로 결심한 것보다 백배나 더 더욱 열심히 용맹정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건업(建業)에 이르러, 처음에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기원(祇洹)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담마밀다의 도(道)에 대한 소문은 본래부터 드러났는데, 그가 서울에 이르자 사람들이 예배하고 문안을 드렸다.
송(宋)의 문원황후(文袁皇后)로부터 황태자ㆍ공주에 이르기까지 계궁(桂宮)에서 재(齋)를 베풀지 않음이 없었다. 그들은 황후의 내전[椒掖]에서 계(戒)를 청하였으며, 문후(問侯)에 참여한 사신들이 열흘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원가 원년 갑자(甲子, 424)로부터 18년 신사(辛巳, 441)에 이르기까지 『허공장보살신주경』 등 12부를 번역하였다. 항상 선의 교리[禪道]로써 학도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게 배우러 온 이들은 천 리를 멀다 하지 않았고, 사부 대중과 원근(遠近)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대선사(大禪師)라고 불렀다.
회계태수(會稽太守) 맹의(孟顗)는 진리[眞諦]를 깊이 믿으면서 삼보(三寶)를 섬기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다. 그는 평소부터 선(禪)의 묘미를 좋아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매우 두터웠다. 절하(浙河)에 부임하면서 담마밀다를 청하여 함께 돌아다녔고, 찬현(鄼縣)의 산에 탑사(塔寺)를 세웠다.
동쪽 변경의 옛 풍속은 대부분 무당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지만, 오묘한 교화가 퍼지면서부터 집집마다 바른 법으로 귀의하였다. 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데마다 마음으로 신복되지 않음이 없었다.
뒤에 건업(建業)으로 돌아와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러 쉬었다. 담마밀다 선사는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맑아서 평소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는데, 종산(鍾山)의 진악(鎭岳)은 숭산(嵩山)과 화산(華山)보다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항상 하사(下寺)의 터와 짜임새가 훌륭한 형세에 따르지 못했음을 한탄하여, 이에 높은 모양의 땅에 따라 산세(山勢)를 헤아려서 돌을 자르고 나무를 깎아 상사(上寺)를 지었다. 전방(殿房)과 선실(禪室)이 숙연하여 깊고도 멀어서 실로 영취산(靈鷲山)의 바위와 비슷하였고, 기원정사[祇樹]와 매우 비슷한 모양[髣髴]세를 갖추었다. 이에 마음을 쉬려는 대중들이 만 리에서도 몰려들었는데, 경의 풍송(諷誦)이 엄숙하고 온화하였으므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교화가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서역으로부터 남토(南土)에 이르기까지 무릇 돌아다닌 곳에는 단회(檀會 : 교단에 모임)를 일으키어 교법을 널리 펼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처음 선사가 계빈을 떠날 때에는 가비라신(迦毗羅神)이 호위하여 전송하였다. 마침내 구자국에 이르러 중도에서 되돌아가려고 하자, 이에 그 신(神)은 모습을 드러내어 선사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신통력은 변화무쌍하여 자유자재로 어디든지 돌아다니는데, 나와 함께 남방(南方)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곧바로 모습을 거두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멀리서 양도(楊都)에까지 함께 이르렀다. 이에 상사(上寺)에다 그 상(像)을 그려 벽에 붙였는데, 지금까지도 신령스런 소문[聲影]의 효험이 있어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들여 복을 빌면 소원을 이루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가 19년(442) 7월 6일 상사(上寺)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87세였다. 도속(道俗) 4부 대중이 곡(哭)을 하면서 뒤를 따랐으며, 이에 종산(鍾山) 송희사(宋凞寺) 앞에 장사지냈다.

(4) 석지엄(釋智嚴)
무진의보살경(無盡意菩薩經) 6권제목 첫머리에 “『대집경(大集經)』속에 무진의(無盡意)가 설한 「불가진의품(不可盡義品)」 제22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다만 『무진의경(無盡意經)』, 또는 『아차말경(阿差末經)』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한 『아차말경』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법화삼매경(法華三昧經) 1권『법화경(法華經)』에서 갈려 나온 것支流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광박엄정불퇴전륜경(廣博嚴淨不退轉輪經) 4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6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바로 『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 또는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이라고도 한다. 축법호의 『아유월치차경(阿惟越致遮經)』과 같은 동본이다. 원가 4년(427)에 번역되어 나왔다.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사천왕경(四天王經) 1권『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보요경(普曜經) 8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6권, 또는 4권으로 되어 있다. 촉(蜀)의 『보요경』, 축법호의 『보요경』과 당나라 번역의 『방광장엄경(方廣莊嚴經)』은 모두 동본이다. 『송제록』과 『승우록』과 『고승전』 등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생경(生經) 5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선덕우바새경(善德優婆塞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아나함경(阿那含經) 2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0부 31권이다.『사천왕경』 이상의 4부 12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보요경』 이하의 6부 19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지엄은 서양주(西涼州) 사람이다. 스무 살 때에 출가하였는데, 곧 부지런히 정진함으로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이 버린 낡은 누더기 조각으로 만든 법의[納衣]를 입고 좌선(坐禪)하며 오래도록 풀이나 나무의 열매[蔬食]를 먹고 살았다. 매양 이름난 스승을 널리 찾아 섬기고 경전의 가르침을 널리 구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서역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계빈국(罽賓國)에 도달하여 마천다라정사(摩天陁羅精舍)로 들어갔다. 불타선(佛駄先) 비구로부터 선법(禪法)을 묻고 받았으며, 점차로 깊이 들어가 3년이 지나자, 그 공부는 10년을 한 것보다 더 뛰어났다. 불타선은 그가 선정에 조예가 있음을 알고는 특별히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여겼다. 여러 승려와 속인들은 그 소문을 듣고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중국 땅에도 도를 구하는 사문이 있었구나.”
그제야 중국인들을 경시하지 않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공경히 대접하였다.
당시 불타발타라(佛陁跋陁羅)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역시 그 나라의 선(禪)의 종장(宗匠)이었다. 지엄은 곧 그에게 법을 중국에 전하고자 동쪽으로 가자고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는 그의 간절한 뜻을 가상히 여겨 마침내 함께 동쪽으로 떠났다. 이리하여 사막을 건너고 위험을 넘어 1년여 만에 관내(關內)에 도착하였다. 항상 불타발타라를 따라 함께 장안(長安)에 머물렀는데, 얼마 후 불타발타라가 뜻밖에 중국 승려들에게 축출을 당하였다. 지엄도 서쪽에서 온 도반들과는 함께 관내를 나와 이리저리 흩어졌다. 산동(山東)의 정사(精舍)에서 쉬면서 좌선하고 경을 외우면서 힘써 정진하고 수학하였다.
진(晋)나라 의희(義凞) 13년(417)에 송(宋)의 무제(武帝)가 서쪽 요홍(姚泓)을 정벌하여 승리하고, 개선하는 도중에 산동을 통과하였다. 당시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가 무제의 어가(御駕)를 호송하고 산천을 유람하다가 지엄이 있던 정사에 왔는데, 뜻을 함께한[同志] 세 승려가 각기 승상(繩床)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든 것을 보았다. 왕회가 이에 손으로 두드리자, 세 사람은 눈을 떴지만, 잠시 후 도로 눈 감고 말하려 들지 않았다.
왕회는 마음으로 그들의 기이함을 존경하고 여러 노인들을 찾아가 물어 보자, 모두 말하였다.
“이 분들은 숨어 살면서 여러 해 동안 일찍이 밖으로 나온 일이 없었습니다.”
왕회는 송 무제에게 이 일을 아뢰었고, 무제는 그들을 맞이하여 도읍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기꺼이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지엄이 두 사람의 천거를 받아 따라가게 되었다.
왕회는 도를 생각함이 평소 독실하고 예로써 섬기기를 잘하였다. 지엄이 도읍으로 올라오자, 즉시 시흥사(始興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지엄은 성품이 고요하고 조용[虛靜]3)하였으므로, 마음은 세속의 번잡함을 피하려 하였다. 왕회는 이에 동쪽 성문 밖에 다시 정사를 건립하였으니, 곧 지원사(枳園寺)였다.
지엄은 전에 서역에서 얻어 온 범본의 여러 경전들을 아직도 번역하지 못하였는데, 원가 4년 정묘(丁卯, 427)에 이르러서야 사문 보운(寶雲)과 함께 『무진의보살경』 등 10부를 번역해 냈다.
지엄은 사찰에 있으면서 별청(別請)4)을 받지 않고 항상 탁발하여 생활을 하였으니, 도화(道化)가 이승과 저승에까지 끼쳐서 모두가 감복하였다.
지엄은 청렴하고 소박하여 욕심이 적었으므로 보시를 받으면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베풀어 주었다. 젊어서부터 사방을 행각하면서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허심탄회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밝혀 말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행실이 많았지만, 세상에 모두 전해지지 않았다.
이전에 지엄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때, 5계(戒)를 받아 계율을 이지러지게 하거나 범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나, 항상 계를 받지 못했다고 의심하고 번번이 그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선관(禪觀)을 닦았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
마침내 다시 바다를 건너 또 한 번 천축국에 가서 여러 밝게 통달한 분에게 묻고자 하였다. 마침 나한(羅漢) 비구를 만나 그 일을 자세히 물었더니, 나한은 감히 판결을 내리지 않고, 이에 지엄을 위하여 정(定)에 들어 도솔궁(兜率宮)으로 가서 미륵(彌勒)에게 여쭈었다. 미륵은 ‘계를 받았다’고 대답해 주었다. 이 말을 들은 지엄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도보로 돌아오다가 계빈국에 이르러서 병 없이 입적하였다. 그때 나이 78세였다.
그 나라는 범인과 성인의 화장하는 장소를 각기 달리하였다. 지엄이 비록 계행에 대한 지조로 고명하기는 하였지만, 실지의 수행은 아직 판별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시신을 범승(凡僧)의 묘지로 옮기려 하였으나,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바꾸어 성인의 묘지로 향하자 갑자기 저절로 가벼워졌다.
지엄의 제자인 지우(智羽)와 지원(智遠)이 일부러 서역으로부터 돌아와 이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고는 함께 외국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써 지엄을 추측하여 보아도 참으로 득도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직 4향4과[向果]5)의 어느 중간이며, 또는 깊은지 얕은지 모를 뿐이다.

조복중생업경(調伏衆生業經)『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일음현정법경(一音顯正法經)혹은 『일음연정법경(一音演正法經)』이라고도 한다. 『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선덕바라문문제바달다경(善德婆羅門問提婆達多經)『대운경(大雲經)』에서 나왔다.
비라삼매경(毗羅三昧經) 2권『승우록』 등의 모든 기록에서는 모두 주(注)에 의경(疑經)으로 하였는데, 『대주록(大周錄)』에서는 이를 간행(刊行)하면서 정경(正經)으로 하였다. 지금 찾아보니, 문장과 언사가 천박하고 뜻이 성기고 빠졌기 때문에 의경(疑經)에다 넣고, 조목과 용도科用의 쓸모없는 논쟁稗穢 을 없앤다.

『조복중생업경』 등의 4부 5권은 『장방록(長房錄)』 등의 기록에서는 모두 “지엄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지금 앞의 3경은 따로 파생한[別生] 경이요, 뒤의 1권은 위경으로 의심[疑僞]이 되므로, 지금 실제의 기록에서는 모두 삭제하였다.

(5) 석보운(釋寶雲)
불본행경(佛本行經) 7권혹은 『불본행찬전(佛本行讚傳)』이라고도 한다. 육합산사(六合山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5권이라고도 한다. 『승우록(僧祐錄』ㆍ『보창록(寶唱錄)』ㆍ『내전록(內典錄)』 등의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불본행찬경(佛本行讚經)』이다”라고 하였다.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 2권영초(永初) 2년(421)에 도량사(道場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어떤 목록에서는 “육합산사(六合山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아홉 번째의 번역이다. 『보적경』의 「무량수회(無量壽會)」와 같은 동본이다. 『도혜록(道慧錄)』과 『승우록』 등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竺道祖)의 『진세잡록(晋世雜錄)』에 보인다.
부법장경(付法藏經) 6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이상은 4부 17권이다.앞의 1부 7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뒤의 3부 10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보운은 양주(涼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학행(學行)이 있었다. 뜻과 인품[志韻]이 굳세면서 깨끗하여 세상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젊어서부터 바르고 곧고 순수하고 깨끗하기로 이름이 났다. 법을 구하는 데에 간절하여 몸을 잊어버리고 도만을 절실하게 구하였다. 그리고 몸소 신령스런 자취[靈跡]를 보고 널리 경(經)의 가르침을 구하려고 맹세하였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초(初)에 멀리 서역으로 떠났는데, 법현(法顯)ㆍ지엄(智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따랐다. 유사(流沙)를 지나 설령(雪嶺)을 넘으면서 온갖 괴로움과 위험을 어려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전국(于塡國)과 천축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두루 신령스런 이적을 보았다. 곧 나찰(羅刹)의 들을 지나면서 하늘의 북소리를 들었으며, 석가모니께서 남기신 자취를 우러러보고 많은 예배를 하였다.
석보운은 외국에 있으면서 두루 범어(梵語)와 범서(梵書)를 배워 천축 여러 나라의 말과 글의 뜻을 모두 완전히 익혔다. 뒷날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불타발타(佛陁跋陁) 선사를 따라 선(禪)을 닦고 배우기를 태만하지 않고 부지런히 힘썼다. 그런데 불타발타선사가 갑자기 후진(後秦)의 승려들에게 축출당하면서 그도 또한 그곳을 황망하게 떠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이 불타발타가 추방당한 일을 해결하여 불타발타와 함께 양도(楊都)로 돌아와 도량사(道場寺)에서 편안히 머물렀다.
대중 스님들은 보운이 의지가 굳고 단단해서 아주 먼 외국에 가서 도를 널리 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묻고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지엄(智嚴)과 함께 여러 경을 번역하였는데, 지엄이 세상을 떠나자 보운은 혼자 경을 널리 번역하였다. 원가(元嘉) 연간(424~453)에는 『불본행경』 등의 4부를 번역하였다. 보운은 손에 범본(梵本)을 잡고 입으로 널리 번역할 때, 중국말과 서융(西戎)의 말을 모두 잘 알았다. 그래서 음훈(音訓)이 올바르고 진실하여 보운이 결정한 것은 모두가 믿고 복종하였다.
처음에 관중(關中)의 사문 축불념(竺佛念)은 번역하여 펴는 것을 잘하여 부견(符堅)과 요흥(姚興)의 2대에 걸쳐 많은 경전을 번역 출간하였다. 그러나 중국[江左]어와 범어를 연결한 번역은 보운을 능가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보운은 진(晋)나라와 송(宋)나라 때에 법장(法藏)을 크게 유통시켰으며, 사문 혜관(慧觀) 등이 모두 벗으로 여기고 친하게 지냈다. 보운의 성품은 그윽한 것을 좋아하여 거처를 늘 한가롭고 고요하게 했다. 마침내 육합산사(六合山寺)에 갔는데, 산에는 기근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아 좀도둑들이 들끓었다. 보운이 설법하여 잘 타이르고 가르치게 되자, 대부분 잘못을 고치고 예로써 섬기며 공양하는 자가 열 집에서 아홉 집이나 되었다.
얼마 후 도량사의 혜관이 임종할 때 보운에게 서울로 돌아와 절 일을 모두 맡아줄 것을 청하였다. 보운은 할 수 없이 돌아가 1년 남짓 도량사에 머무르다가 다시 육합산사(六合山寺)로 돌아갔다. 원가 26년(449)에 산사(山寺)에서 입적하였는데, 이때의 춘추가 74세였다. 그가 외국을 돌아다닌 일은 따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것이 있다.

(6) 이섭바라(伊葉波羅)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 13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고승전』과 『승우록』에 보인다. 혹은 14권으로 되어 있다.
이상은 1부 13권인데, 그 경본은 궐본이다.

사문 이섭바라는 중국말로는 자재(自在)라고 부르며, 서역 사람이다. 삼장(三藏)을 오묘하게 통달하였고, 4아함(阿含)을 밝게 알았다. 원가(元嘉) 3년 병인(丙寅, 426)에 팽성(彭城)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북쪽 서주자사(徐州刺史) 태원왕(太原王) 중덕(仲德)을 위하여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을 번역하였다. 「택품(擇品)」까지 번역하고 거리낀 일이 있어 마침내 마치지 못하였다. 다만 10권만을 완성하였을 뿐이며, 자사가 몸소 받아썼다. 8년 신미(辛未, 431)에 이르러 다시 구나발마(求那跋摩)를 청하여 뒤를 이어서 모두 마쳐 13권을 완성하였다.

(7) 구나발마(求那跋摩)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9권일명 『보살지경(菩薩地經)』이라고도 한다. 10권으로 되어 있다. 기원사(祇洹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록』과 『승우록』 두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장방록』 등 목록에서는 “모두 『선계경(善戒經)』 20권이다”라고 하였고, 또 “제자가 다시 2품(品)을 더 번역하여 30권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모두 잘못이다.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1권『우파리문보살수계법(優波離問菩薩受戒法)』이라고도 한다. 『보창록』에 보인다. 만일 『승우록』에 준한다면 “이 한 권을 가져다 앞의 경 9권을 합쳐서 10권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북지(北地)의 경본에는 “그것을 따로 떼어 실은 지가 이미 오래 되어서 합칠 수가 없으므로, 우선 옛 결정에 의거하여 둔다”라고 하였다.
보살내계경(菩薩內戒經) 1권『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우바새오계위의경(優婆塞五戒威儀經) 1권『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사미위의(沙彌威儀) 1권혹은 『사미위의경(沙彌威儀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사분비구니갈마법(四分比丘尼羯磨法) 1권승우는 “『담무덕갈마(曇無德羯磨)』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잡갈마(雜羯磨)』이다”라고 하였다. 원가 8년(431)에 기원사(祇洹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과 『고승전』 등에 보인다. 또한 바로 『사분갈마(四分羯磨)』라고도 한다.
우바새오계상경(優婆塞五戒相經) 1권일명 『우바새오계약론(優婆塞五戒略論)』이라고도 한다. 원가 8년(431)에 기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첫 번째 번역이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용수보살위선타가왕설법요게(龍樹菩薩爲禪陁迦王說法要偈) 1권당(唐)의 『구록(舊錄)』에 보인다.
선신이십이계(善信二十二戒) 1권또한 『이욕우바새우바이구행이십이계문(離欲優婆塞優婆夷具行二十二戒文)』, 또는 『삼귀우바새계(三歸優婆塞戒)』라고도 한다. 승우는 “『삼귀급우바새이십이계(三歸及優婆塞二十二戒)』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우바새계(優婆塞戒)』이다”라고 하였다. 『고승전』과 『승우록』에 보인다.
경률분이기(經律分異記)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0부 18권이다.『용수보살위선타가왕설법요게』 이상의 8부 16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선신이십이계』 이하의 2부 2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나발마는 중국말로는 공덕개(功德鎧)라고 부른다. 본래 찰리종(刹利種)6)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이 되어 계빈국(罽賓國)을 다스렸다. 조부(祖父) 가리발타(呵梨跋陁)중국말로 번역하면 사자현(師子賢)이다.는 강직한 성격으로 인하여 유배(流配)를 당하였고, 아버지 승가아난(僧伽阿難)중국말로 번역하면 중희(衆喜)이다.은 산택(山澤 : 산과 숲과 내와 못)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구나발마는 나이 14세가 되자, 기략(機略)과 견해가 빼어났으며,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무릇 넓었고, 덕을 숭상하고 선(善)에 힘썼다.
그 어머니가 일찍이 들짐승 고기를 장만하여 구나발마에게 이를 요리하도록 하였으므로 구나발마가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생명이 있는 무리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없는데, 그의 목숨을 미리 죽게 하는 일은 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성을 내며 말하였다.
“설령 죄를 얻게 된다 하여도 내가 마땅히 너를 대신할 것이다.”
구나발마는 훗날 기름을 끓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데이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아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참아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고통은 너의 몸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대신할 수 있겠느냐?”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눈앞의 고통조차도 오히려 대신할 수 없거늘, 하물며 삼도(三塗)7)의 고통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머니는 이에 잘못을 뉘우치고 죽을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았다.
18세가 되자 점을 치는 사람이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나이 30세가 되면 대국(大國)을 공격하여 누르고 즉위해서 남면(南面)하면 제왕으로 존귀하게 칭하게 될 것이요, 만일 세상의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과(聖果)8)를 얻게 될 것이다.”
나이 20에 이르러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9부(部)에 막힘이 없이 밝았으며, 4아함(阿含)을 두루 깨달았으며, 경전 백여 만 언(言)을 암송하였다. 율품(律品)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선(禪)의 요의(要義)에 있어서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에 그를 모두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 30에 이르러 계빈왕이 죽었는데, 왕을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며 말하였다.
“구나발마는 왕실의 맏아들이며, 또 재주가 밝고 덕이 높으니 환속시켜서 국왕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청하자.”
그리하여 수백의 군신(群臣)들이 두세 차례나 간곡하게 청하였으나, 구나발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법사의 자리를 사양하고 무리들을 피하여 산간에 들어가서 계곡물을 마시며 산과 들에 홀로 노닐면서 인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사자국(師子國)에 이르러 풍속을 살피면서 교화를 넓혔다. 진리를 아는 무리들은 모두 “이미 초과(初果)를 얻었다”고 말하였다. 몸가짐과 차림새가 사물을 감화시켜 이를 본 이들은 마음을 일으켜 불법에 귀의하게 되었다.
후에 사바국(闍婆國)에 이르렀다. 처음 도착하기 하루 전에 사바왕의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한 도사(道士)가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다음날 아침에 과연 구나발마가 도착하였으므로, 왕의 어머니가 정성스런 예로써 공경하고, 이어 5계(戒)를 받았다. 왕의 어머니가 왕에게 권하면서 일러 말하였다.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어미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다. 나는 이미 계를 받았는데, 네가 믿지 않는다면 후생의 인연에는 오늘과 같은 과보가 영원히 단절될까 두렵구나.”
왕은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로 곧바로 명을 받들어 계를 받았다. 왕은 어머니에게 감화 받음[染習]이 이미 오래되었는지라, 오로지 힘써 정진하여 점차로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얼마 지나서 이웃 나라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였는데, 왕이 구나발마에게 말하였다.
“외적이 힘을 믿고 침범하여 업신여기려 하는데, 만일 상대하여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다치고 죽는 자가 많을 것이고, 만일 이를 막지 않는다면 장차 멸망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오로지 높으신 스님의 명을 따르고자 하는데 무슨 계책이 있으십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포악한 적이 공격을 하면 의당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자비심을 일으켜서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왕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겨루려 하는데, 군기(軍旗)를 세우고 북을 울리면서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문득 적들이 물러나 흩어졌다. 왕은 빗나간 화살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 구나발마가 그를 위하여 주문을 외운 물로 상처를 씻어 주자 이틀이 지나 평상시처럼 회복되었다. 왕은 공경하는 마음과 믿음이 차츰 더 깊어갔다. 이에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법문(法門)에 몸을 의탁하려 한다. 경들은 다시 총명한 임금을 뽑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은 모두 절을 하고 엎드려 청하였다.
“왕께서 만일 나라를 버리신다면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적국이 흉악하고 강성해서 험한 형세로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만일 왕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어느 곳에 처하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하늘같은 자비로 가엾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왕은 차마 그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세 가지의 원(願)을 청하였다.
“만일 허락한다면 마땅히 머물러서 나라를 다스리겠다. 첫 번째의 원은 무릇 이 나라 경계 안에서는 모두 함께 화상(和上)을 받들도록 하는 것이요, 두 번째의 원은 다스리는 경내에서는 일체 살생을 금하는 것이며, 세 번째의 원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기뻐하며 한결같이 공손히 받들었다. 이로부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따르며 계를 받았다. 왕은 후에 구나발마를 위하여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는데, 몸소 자재를 끌고 가다 발가락을 다쳤다. 구나발마가 또다시 주문으로 치료하니 얼마 안 되어 회복되었다. 도(道)로 교화하는 소문이 원근으로 전파되어 이웃 나라에서 풍문을 듣고 모두 사신을 보내어 요청하였다.
당시에 양도(楊都)에는 덕으로 이름 높은 사문 혜관(慧觀)과 혜총(慧聰) 등이 있었는데, 멀리에서 소문을 듣고 오로지 음식을 올리고[飡稟]자 생각하였다. 원가 원년(424) 9월에 문제(文帝)에게 직접 아뢰어 구나발마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곧바로 교주자사(交州刺史)에게 칙명을 내려 배를 띄워 맞아들이도록 하였다. 혜관 등은 또 사문 법장(法長)ㆍ도충(道沖)ㆍ도준(道儁) 등을 보내어 그에게 가서 기청(祈請)하게 하였다. 더불어 구나발마와 사바왕(娑婆王) 바다가(婆多伽)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송나라 지역에 왕림하여 도(道)의 가르침이 유행(流行)되기를 희망하였다.
구나발마는 성스러운 교화를 넓힘에 있어 먼 곳으로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이미 상인(商人) 축난제(竺難提)를 따라서 배로 어떤 작은 나라로 향하고자 하였다. 마침 순풍을 만나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의 유문(遺文)9)에 이르기를 “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껴 드디어 송나라 경계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문제(文帝)는 구나발마가 이미 남해(南海)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주군(州郡)에 칙명을 내려 비용을 내어 서울로 오게 하였다. 시흥(始興)을 경유하는 길에서 멈추어 1년쯤을 보내었다. 시흥에는 호구산(虎丘山)이 있는데 형세가 우뚝 솟고 봉우리와 산마루가 높고 가팔랐다. 구나발마는 그 모습이 기사굴산(耆闍崛山)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을 영취산(靈鷲山)으로 바꾸었다.
산사(山寺)의 바깥에는 별도로 선실(禪室)을 지었다. 선실은 절에서 몇 리쯤 떨어져 있어 경쇠[磬]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방망이[椎]가 울리면 구나발마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간혹 비를 무릅쓰고 왔는데도 젖지 않았고, 혹은 진흙을 밟고 왔는데도 습기가 차지 않았으니, 당시의 많은 도인과 속인들은 숙연하면서 더욱 공경하였다. 절에는 보월전(寶月殿)이 있었는데 구나발마는 보월전 북쪽 벽에 손수 나운상(羅云像)과 정광불(定光佛) 앞에 유동(儒童)이 머리카락을 풀어 엎드린 형상을 그렸다. 형상을 그려 놓은 뒤에는 매일 저녁마다 빛을 발하기를 오래 한 뒤에야 그쳤다.
시흥태수(始興太守) 채무지(蔡茂之)는 깊이 존숭하며 우러렀다. 후에 채무지가 죽으려 할 적에 구나발마는 몸소 가서 보고는 설법하여 편안하게 하였다. 후에 그 집안의 사람이 꿈을 꾸었더니 채무지가 절 안에서 여러 승려들과 함께 법을 강론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실로 구나발마가 교화하여 인도한 덕분이었다.
이 산에는 본래 호랑이로 인한 재앙이 많았다. 구나발마는 이곳에 거주한 뒤부터 밤이나 낮에 오가면서 혹시 호랑이를 만난다 하여도 지팡이로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이를 희롱하며 지나갔다. 이로부터 산길을 가는 나그네나 물길을 가는 객들이 왕래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의 덕에 감동하여 교화에 귀의하는 이들이 열에 일곱 또는 여덟이었다.
구나발마가 일찍이 별실에서 선정에 들었는데,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절의 승려가 사미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사미는 한 마리의 흰 사자가 기둥에 대고 서 있고, 하늘 끝까지 푸른 연꽃이 피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사미는 놀라 두려워하면서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가서 사자를 쫓자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의 신령하고 기이함은 견줄 데가 없었으며, 그러한 일들은 대부분 이와 같았다.
후에 문제(文帝)가 혜관(慧觀) 등에게 거듭 칙명을 내려서 다시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다. 이리하여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여 가서, 원가 8년(431) 정월에 건업(建業)에 도착하였다. 문제가 불러들여 만나보고 은근하게 위문하며 말하였다.
“제자는 항상 재계를 지키며 살생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 몸으로 목숨 바친 물건[殉物]을 가까이하여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사께서 이미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이 나라에 와서 교화를 펴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가르치시겠습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대저 도(道)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사물(事物)에 있는 것이 아니며, 법(法)이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왕과 범부는 수양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범부의 경우는 몸이 비천하고 이름 또한 하잘것없어 말과 명령에 위엄이 없습니다. 만일 자신의 고단한 몸을 이기지 못한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제왕은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고 만백성을 자식으로 삼습니다. 한마디의 좋은 말을 하게 되면 사녀(士女)들이 함께 기뻐하고, 한 번 선정(善政)을 펴면 신과 사람이 화합하게 됩니다. 목숨을 죽이는 형벌을 쓰지 않고 힘을 쓰는 사역을 시키지 않는다면, 바람과 비를 때에 맞게 내리게 하고, 춥고 따뜻한 기후가 알맞게 되어서 온갖 곡식이 더욱 번성하고, 뽕과 삼[麻]이 빽빽하게 우거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재(齋)를 지닌다면, 그 재 역시 크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살생을 하지 않는다면 덕도 크다고 할 것입니다. 정녕코 반나절의 음식을 줄여서 한 마리 짐승의 목숨을 온전히 보존한 후에야 비로소 널리 구제한 것이 됩니다.”
문제는 이에 책상을 어루만지며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대저 속인은 고원한 진리에 미혹되고 사문들은 비근한 교리에 막히고 맙니다. 고원한 진리에 미혹된다는 것은 지극한 도(道)를 공허한 말로 여기는 것을 말하고, 비근한 교리에 막힌다는 것은 글의 편(篇)과 장(章)에 구애되어 연연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사께서 말씀하신 바는 참으로 도를 깨치게 하고 사리를 밝게 합니다. 가히 더불어 천인(天人)의 경지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칙명을 내려 기원사(祈寺)에 머무르게 하고, 공양을 융숭하게 하니, 공경(公卿)ㆍ제후(諸候)와 뛰어난 선비들은 그를 높이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뒤에 절에서 『법화경(法華經)』과 『십지경(十地經)』을 개강하였다. 법석(法席)을 여는 날에는 수레와 일산이 거리에 가득 찼고, 구경을 하며 오가는 사람들로 어깨가 서로 맞닿고 발꿈치가 서로 이어졌다. 구나발마의 신부(神府)는 자연스럽고, 묘한 말재주는 아주 뛰어났는데, 혹 때로는 통역하는 사람을 빌어서 깨닫게 하기도 하였다.
구나발마는 곧 기원사에서 『보살선계경』 등 10부를 번역하였다.그 『선계경』을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모두 20권이다”라고 하였다. 하주(下注)에는 “후에 제자가 정림사(定林寺)에서 다시 2품(品)을 번역하여 30권을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지금은 다만 9권, 또는 10권일 뿐이다. 이것은 베껴 옮길 때에 착오로 2(二) 자(字)란 글자를 위에다 붙여 썼기 때문일 것이다. 『승우록』에도 “10권이다”라고만 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목록의 것은 베껴 옮길 때의 착오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고승전』을 살펴보면 “기원사의 혜의(慧義)가 청하여 『보살선계경』을 번역 출간하였는데, 처음에 28품(品)을 내고, 후에 제자가 대신 2품10)을 내어서 30품을 되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 계속 번역되어 30권을 이루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착오이다. 또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 다시 말하기를 “구나발마가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 13권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이섭바라(伊葉波羅)가 10권을 번역 출간하였고, 구마발마가 뒤에 계속 번역하여 13권을 완성한 것이 됨으로, 구나발마가 다시 따로 번역해 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두 곳에서 다 같이 이 경을 싣는다면 역시 옳지 못하다. 이제 이섭바라의 번역에서는 싣지 않고 여기 싣는다. 글과 뜻이 모두 상세하고 진실하여 범어와 중국어의 차이가 없었다.
당시 영복사(影福寺)의 여승 혜과(慧果)와 정음(淨音) 등이 함께 구나발마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지난 6년(429)에 사자국(師子國)에 8인의 여승이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말하기를 ‘송나라 땅에는 아직 여승이 있었던 적이 없었거늘, 어떻게 우바새ㆍ우바이(二衆)에게 수계(受戒)하는 법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면서 ‘계품(戒品)이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계법은 원래 대승중(大僧衆 : 큰 승려의 무리)이 있어 나오는 것이다. 설사 본래의 규정대로 계를 얻는 데에는 구애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도를 사랑(愛道)하는 인연은 같다.”
여러 여승들이 또 연월이 차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애써 다시 받으려 하자, 구나발마는 칭찬하며 말하였다.
“장하도다. 진실로 더욱 분명하게 하려 한다면, 매우 기뻐하면서 함께 도울 것이다. 다만 서역국 여승의 승랍(僧臘)이 아직 차지 않았고, 또 10인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송나라 말을 배우게 해서 별도로 서역의 거사(居士)를 통하여 다시 외국에서 여승을 청하여 오게 해서 10인의 수를 채워야 할 것이다.”
그 해 여름에 정림하사(定林下寺)에서 안거(安居)하였다. 당시에 신자(信者)가 꽃을 꺾어서 자리에 깔았는데, 오직 구나발마가 앉은 자리에만 꽃의 빛깔이 더욱 싱싱하였다. 대중들은 모두가 성스러운 예(禮)로써 숭앙하였다.
여름에 기원사로 돌아갔다. 그 해 9월 28일 점심이 끝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전각[閣]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제자가 뒤에 이르러 보니 이미 입적하여 있었다. 그때 춘추가 65세였다. 아직 입적하기 전에 미리 게송 36행(行)의 유문(遺文)을 지었는데, 자신의 인연에 대해 설하기를 “이미 사다함과[二果]11)를 증득하였다”라고 하였다. 손으로 직접 봉함하고 제자 아사라(阿沙羅)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이 글을 가지고 돌아가서 천축의 승려에게 보여 주고 이 나라의 승려들에게도 보여 주어라.”
입적한 뒤에 곧바로 승상(繩床)에 가부좌(跏趺坐)하여 앉혔는데, 얼굴 모습이 선정[定]에 든 것과 다름이 없었다. 모여든 도인과 속인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다 같이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을 알았다. 또 용이나 뱀처럼 생긴 길이 한 필(匹)쯤 되는 물체가 하나 시신 옆에서 일어나 곧바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곧 남쪽 숲 계단(戒壇) 앞에서 외국의 법에 의하여 화장[闍毘]하였다. 사부대중이 빽빽하게 모여 향나무를 쌓아 놓고 향유(香油)를 뿌려 유음(遺陰 : 시체)을 불살랐다. 오색의 불꽃이 일어나서 불기운이 하늘에 빛났다. 이때 하늘은 맑고 환하였으며, 도인이나 속인들이 모두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에 그곳에 백탑(白塔)을 세웠다. 다시 계를 받으려고 한 여승들은 슬픈 탄식의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던 계를 받을 수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처음 구나발마가 송나라에 이르자, 문제(文帝)는 그로부터 보살계(菩薩戒)를 받고자 했었는데, 미처 받지 못했다. 이제는 갑자기 그가 세상을 떠나 버렸으므로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한지라, 애석하고 슬퍼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스님네로 하여금 그의 유문(遺文)을 번역하게 하였다.유문은 『고승전(高僧傳)』에 있는데, 번거로울까 두려워 싣지 않는다.

(8) 승가발마(僧伽跋摩)
비니마득륵가(毗尼摩得勒伽) 10권첫 권에는 “『살바다부비니마득륵가(薩婆多部毗尼摩得勒伽)』이다”라고 하였다. 원가(元嘉) 12년 을해(乙亥, 435) 정월에 말릉(袜陵) 평락사(平樂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그 해 9월 22일에 끝마쳤다. 도혜의 『송제록(道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잡아비담심론(雜阿毗曇心論) 11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하며, 또한 『잡아비담경(雜阿毗曇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잡아비담비바사(雜阿毗曇毗婆沙)』라”고 하였다. 혹은 14권으로 되어 있다. 네 번째 번역이다. 원가 11년 갑술(甲戌, 434) 9월에 장간사(長干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만 1년 만에 마쳤다. 『승우록』과 경의 서문에 보인다.
권발제왕요게(勸發諸王要偈) 1권용수(龍樹)보살이 지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분별업보략(分別業報略) 1권대용(大勇)보살이 지었다. 혹은 『대용보살분별업보략집(大勇菩薩分別業報略集)』이라고도 한다. 『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청성승욕문(請聖僧浴文) 1권『승우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5부 24권이다.앞의 4부 24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승가발마는 중국말로는 중개(衆鎧)라 부르며, 인도 사람이다. 어려서 속세를 버렸으며, 맑고 준수하면서 계덕(戒德)이 있었다. 율장(律藏)을 잘 알았으며, 그 중에서도 『잡심론(雜心論)』에 정통하였다.
원가(元嘉) 10년 계유(癸酉, 433)에 유사(流沙)에서부터 걸어 건업(建業)에 이르렀다. 풍채와 도량이 넓고 맑아서 도인이나 속인들은 그를 공경하면서 특별하게 대우하였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높이 섬기면서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일찍이 경평(景平) 원년(423)에 평륙령(平陸令) 허상(許桑)은 집을 허물어 절을 지었는데, 이 때문에 평륙사(平陸寺)라고 이름 붙였다. 후에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승가발마의 도행(道行)이 순수하고 갖추어졌다 여겨 그에게 그 절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고, 공양으로 높이 받들어 그의 덕을 드러내었다. 승가발마는 혜관과 함께 3층탑을 올리고, 도(道)를 행하며 경을 독송하여 밤낮 그치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승려들이 모여들어 도화(道化)가 널리 퍼졌다.
처음에 삼장법사는 계품(戒品)에 아주 밝았으므로 영복사(影福寺)의 비구니 혜과(慧果) 등을 위해 다시 구족계를 받게 하려 하였다. 이때는 2부 대중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었는데, 삼장이 그만 입적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서 사자국(師子國)의 비구니 철살라(鐵薩羅) 등이 이곳으로 왔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청하여 승가발마를 스승으로 삼아 삼장의 궤범(軌範)을 이어받도록 하였다.
기원사(祈寺)의 혜의(慧義)는 양도(楊都)에서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차이나는 것을 바로잡으니, 지닌 뜻이 같지 않다’라고 여겨, 직접 승가발마와 엎치락뒤치락 논쟁을 하였다. 승가발마는 종(宗)을 표방하고 법(法)을 드러내었는데, 이치[理]와 증명[證]이 분명하면서 진실하였다. 그러므로 혜의는 마침내 완고하고 편협함을 돌리고 수그려서 추복(推服)하였다. 이에 제자들을 이끌어 계를 받아 잘 지키게 하였다. 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는 수백 인에 이르렀다.
송나라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은 그의 계범(戒範)을 높이 받들고 재공(齋供)을 널리 베푸니, 4부 대중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서울로 모여들었다.
얼마 후 이름과 덕이 높은 큰스님 혜관(慧觀) 등은 승가발마가 『잡심론』을 오묘하게 알아서 그 의미를 꿰뚫어 암송한다고 여겼다. 먼저 삼장(三藏)을 비록 번역하였지만 아직 책으로는 엮지 못했으므로, 곧 11년(434) 9월에 장간사(長干寺)로 학사(學士)들을 불러들여 다시 승가발마를 청하여 번역 출간하게 하였다. 보운(寶雲)이 말을 번역하고, 혜관이 스스로 받아 적었으며, 자세히 상고하고 교정하여 1년 만에 끝마쳤다. 이어서 『비니마득륵가』 등 5부를 번역하였다.
승가발마는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역경하는 일을 마치자,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만류하였으나, 그를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 원가 19년(442)에 서역 상인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그가 언제 입적하였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9)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寶積經)』의 「승만부인회(勝鬘夫人會)」와 같은 동본(同本)이다. 원가 13년(436) 8월 14일에 단양군(丹陽郡)에서 나왔다. 보운(寶雲)이 말을 전하고, 혜관(慧觀)이 받아썼다. 『도혜록(道慧錄)』ㆍ『승우록(僧祐錄)』ㆍ『이곽록(李廓錄)』 등에 보인다.
대방광보협경(大方廣寶篋經) 3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문수현보장경(文殊現寶藏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상속해탈지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地波羅蜜了義經) 1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해탈요의경(解脫了義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상속해탈경(相續解脫經)』이라고도 한다. 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이 경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의 뒤의 2품(品)이다. 『도혜록』ㆍ『승우록』ㆍ『이곽록』ㆍ법상록(法上錄)』 등 네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형주(荊州)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4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원가 20년(443)에 도량사에서 번역되었으며, 혜관(慧觀)이 받아썼다. 『입능가경(入楞伽經)』ㆍ『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등과 동본이다. 『도혜록』ㆍ『승우록』ㆍ『법상록』 등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단양군(丹陽郡)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보살행방편경계신통변화경(菩薩行方便境界神通變化經) 3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살차니건자경(大薩遮尼乾子經)』과 동본이다. 혹은 경계(境界)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이곽록』에 보인다.
노모녀육영경(老母女六英經) 1권또한 『노모경(老母經)』이라고도 하며,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노녀인경(老女人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長房)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신일아본경(申日兒本經) 1권혹은 『신아본경(申兒本經)』이라고도 하며,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월광동자경(月光童子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는데, 그 목록에서 “신도본(申兜本)이다”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
아난타목거니가리타경(阿難陁目佉尼呵離陁經) 1권혹은 『무량문지경(無量門持經)』에서 나온 것이며, 여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密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며, 『장방록』에는 “따로 『무량문지경(無量門持經)』에서 나왔다”고 기재한 것은 착오이다.
앙굴마라경(央崛魔羅經) 4권도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도혜록』ㆍ『승우록』ㆍ『법상록』 등의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대법고경(大法鼓經) 2권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도혜록』ㆍ『승우록』ㆍ『이곽록』ㆍ『법상록』 등 네 목록에 보인다.
대의경(大意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두타경(十二頭陁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수제가경(樹提伽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와관사(瓦官寺)에서 번역되었으며, 범본(梵本)은 법현(法顯)이 가져왔다. 『고승전』에서는 “기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도혜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앵무경(鸚鵡經) 1권또한 『도조경(兜調經)』이라고도 한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44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비마숙경(鞞摩肅經) 1권『중아함경』 제57에서 나온 이역이다.
사인출현세간경(四人出現世間經) 1권『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8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일상사념여래경(十一想思念如來經) 1권혹은 『십일사유념여래경(十一思惟念如來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 제48에서 처음 나온 이역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아속달경(阿遬達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옥야경(玉耶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4권형주(荊州)의 신사(辛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여섯 번째의 번역이다.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ㆍ『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과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과 『이곽록』ㆍ『승우록』 등 목록에 보인다.
마하가섭도빈모경(摩訶迦葉度貧母經) 1권장방은 “『별록』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품생사경(十二品生死經) 1권장방은 “『별록』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죄복보응경(罪福報應經) 1권일명 『윤전오도죄복보응경(輪轉五道罪福報應經)』, 또는 『윤전오도경(輪轉五道經)』, 또는 『오도륜경(五道輪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서 보인다”라고 하였다.
중사분아비담론(衆事分阿毗曇論) 12권혹은 논(論)자가 없기도 한다. 제자 보리야사(菩提耶舍)와 함께 번역하였다. 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당역(唐譯) 『품류족론(品類足論)』과 동본이다. 『장방록』에는 번역하여 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사품학법경(四品學法經) 1권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羅闍爲優陁延王說法經) 1권또한 『빈두로위왕설법경(賓頭盧爲王說法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경본이 현재 있고, 이후는 궐본이다.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요진(姚秦)의 불타야사(佛陁耶舍)가 번역한 『허공장경(虛空藏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무량의경(無量義經) 1권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소제(蕭齊)의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陁耶舍)가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해 낸 2권과 『제법본무경(諸法本無經)』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소무량수경(小無量壽經) 1권혹은 소(小)자가 없기도 하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아미타경(阿彌陁經)』과 당역(唐譯) 『칭찬정토경(稱讚淨土經)』과 동본이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에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아미타경』이라고도 한다. 『도혜록』과 『승우록』 두 목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형주(荊州)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장방록』에서 따로 『아미타경』을 실은 것은 착오이다.
팔길상경(八吉祥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의 『팔길상주(八吉祥呪)』와 법호(法護)의 『팔양신주경(八陽神呪經)』 등과 동본이다. 원가 29년(452) 정월 3일에 형주성(荊州城)에서 사공(司空) 형주자사(荊州刺史)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을 위하여 번역하여 내었으며, 6일에 끝마쳤다. 『승우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무애제지법문경(無崖際持法門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성견(聖堅)이 번역해 낸 것과 『존승보살소문경(尊勝菩薩所問經)』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빈자수뢰경(貧子須賴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백연(白延)ㆍ지겸(支謙) 등이 번역해 낸 것과 동본이다. 『이곽록』에 보인다.
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또한 『화부현재불명경(華敷現在佛名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칭양제불공덕경(稱揚諸佛功德經)』과 같은 동본이다. 원가 29년(452) 정월 7일에 형주(荊州)에서 남초왕(南譙王)을 위하여 번역해 내었다. 『시흥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3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이곽록』에 보인다.
무우왕경(無憂王經) 1권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번역되었다. 『오록(吳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본행육바라밀경(本行六波羅蜜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처칠처삼관경(異處七處三觀經) 1권혹은 이처(異處)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잡장경(雜藏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귀문목련경(鬼問目連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목련항용왕경(目連降龍王經) 1권혹은 왕(王)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항룡경(降龍經)』, 또는 『항용왕경(降龍王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용왕형제경(龍王兄弟經)』과는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일난경(日難經) 1권일명 『월난경(越難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섭승원(聶承遠)의 『월난경(越難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석육십이견경(釋六十二見經) 4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서는 “1권이다”라고 하였다.
청반특비구경(請般特比丘經) 1권혹은 반특(般特)이라고도 쓰며, 또한 반시(般時)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두타경(十二頭陁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아나율칠념장경(阿那律七念章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보법삼통략경(十報法三統略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육재팔계경(六齋八戒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아란야습선경(阿蘭若習禪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과 동본이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보살가욕경(菩薩訶欲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나선경(那先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2권 본(本)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십이유경(十二遊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구록(舊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제일의오상략집(第一義五相略集) 1권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고승전』에서는 “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나왔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52부 134권이다.『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 이상의 26부 100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허공장보살경』 이하의 26부 34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는 중국말로는 공덕현(功德賢)이라 부르며, 중인도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12)
이라 불렀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종족이다. 어려서 오명(五明)의 여러 논(論)을 익혔으며, 천문(天文)ㆍ서산(書算)ㆍ의방(醫方)ㆍ주술(呪術)에도 널리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에 우연히 『아비담잡심론(阿毗曇雜心論)』을 읽고 깨달아 불법을 깊이 숭상하게 되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외도(外道)를 섬겨 사문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집을 버리고 잠적하여 멀리 스승이 될 만한 훌륭한 사람을 구하였다. 곧바로 머리를 깎고 옷을 바꿔 입고는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에는 삼장(三藏)에 두루 통하였다. 사람됨이 인자하고 온화하면서 공손하였으며, 스승 섬기기를 극진히 하였다. 얼마 뒤 소승(小乘)의 스승을 떠나서 대승을 배우려 갔다. 대승의 스승은 시험삼아 경전이 담긴 상자를 찾아 선택하게 하였는데, 곧 『대품(大品)』과 『화엄(華嚴)』을 얻었으므로 그 스승은 기뻐하며 칭찬하면서 말하였다.
“너는 대승에 중한 인연이 있구나.”
이때부터 독송하고 강의하는 데에 막힘이 없었다. 보살계법(菩薩戒法)13)을 받고, 이에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법(正法)에 귀의할 것을 권하였다.
“만일 오로지 외도만을 고수한다면 비록 돌아가더라도 이익이 없겠지만, 만일 삼보(三寶)께 귀의한다면 길이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그의 지극한 말에 감격하여 드디어 외도를 버리고 불법을 따랐다.
구나발타라가 이전에 사자국(師子國) 등 여러 나라에 이르렀을 때에는 모두가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 주었다. 이미 동방에 인연이 있었는지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중도에 바람이 그치고 마실 물까지 다 떨어지게 되자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구나발타라는 말하였다.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시방(十方)의 부처님을 염(念)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면 어찌 감응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주문과 경을 외우면서 간절히 예배하고 참회하였다. 갑자기 동북풍[信風]이 세차게 일더니, 먹구름이 일면서 비를 내렸다. 그래서 온 배 안의 사람들이 근심을 들었다. 그의 지성에 감응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원가(元嘉) 12년 을해(乙亥, 435)에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때에 자사(刺史) 차랑(車朗)이 표문(表文)을 올려 보고하자, 문제(文帝)는 사신을 보내어 영접하였다. 이윽고 양도(楊都)에 이르자 칙명을 내려 승려 혜엄(慧嚴)과 혜관(慧觀)에게 신정(新亭)의 교외에서 위문하게 하였다. 그들은 구나발타라의 정신과 마음이 맑고 투철한 것을 보고는 경건하게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통역을 통하여 서로 말을 나누었으나, 잠시 만나보고도 곧 친해져서 매우 기뻐했다. 처음에는 기원사(祈洹寺)에 머물렀다. 얼마 후 문제(文帝)는 그를 초청하여 만나본 후에 더욱 깊이 숭배하며 존경하였다.
낭야(瑯耶) 안연지(顔延之)는 해박한 지식을 지닌 능력 있는 석학(碩學)이었다. 그가 의관을 갖추고 문을 나서면, 서울과 원근의 사람들이 그를 보기위해 모여들어 관(冠)과 수레가 줄을 이었다. 대장군(大將軍)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승상(承相) 남초왕(南譙王) 의선(義宣)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얼마 뒤에 뭇 스님들이 모두 경전을 번역할 것을 요청하자, 기원사에서 모든 의학(義學) 승려들을 모아 놓고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번역하였으며, 동안사(東安寺)에서는 『법고경(法鼓經)』을 내었다. 후에 단양군(丹楊郡)에서 『승만경(勝鬘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는데, 그 때의 무리들이 7백여 인이나 되었다. 보운(寶雲)이 말을 번역하고,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는데, 오가면서 자문하고 분석하여 본지(本旨)를 오묘하게 얻었다.
후에 초왕(譙王)이 형주(荊州)를 평정하고서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였으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개창하였다. 곧 신사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ㆍ『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ㆍ『소무량수경(小無量壽經)』ㆍ『앙굴마라경(央崛魔羅經)』ㆍ『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ㆍ『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ㆍ『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ㆍ『팔길상경(八吉祥經)』 등과 아울러 앞에서 번역하여 낸 경 등 무릇 52부를 번역하였는데, 대부분 제자 법용(法勇)이 통역하여 전하였다.
초왕은 구나발타를 청하여 『화엄경(華嚴經)』 등을 강의하게 하였는데,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겨 부끄러워 여러 날을 탄식하였다. 그리하여 곧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면서 신명이 응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랬더니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나서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 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서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는가?”
구나발타라는 그 사실을 자세하게 대답하였더니, 그가 말하였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 즉시 칼로 머리를 베니 다시 새 머리가 생겼다.
그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명령하고는 물었다.
“아프지 않은가?”
“아프지 않다.”
그리고 문득 꿈에서 깨어났더니 마음이 기뻐지고 즐거워졌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말과 뜻이 모두 알 수 있게 되어 송나라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강의를 하러 나갔다. 제자 법용이 번역 말을 전하고, 승념(僧念)이 도강(都講)14)이 되었다. 비록 통역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였으나, 오묘한 해석이 가능하였다.
원가 말기(末期)에 이르러 초왕이 여러 번 괴이한 꿈을 꾸게 되었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서울에 장차 혼란이 있게 될 것입니다.”
1년이 되지 않아서 두 원흉(元凶)이 역모를 꾸몄다. 효건(孝建, 454~456) 초기에 이르러 초왕이 몰래 역절(逆節)을 도모하자, 구나발타라는 얼굴에 근심을 띠고 말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구나발타라는 간절하게 간언(諫言)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반드시 기대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빈도(貧道)는 호종(扈從)하지 않겠습니다.”
초왕은 여론이 그를 믿는 바가 있다고 여기고 그를 핍박하여 함께 데리고 갔다.
양산(梁山)에서의 패배로 배에 불이 나고 뒤집혀 상황이 급박하였다. 게다가 언덕까지는 너무 멀어서 구제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잡고 강물로 뛰어들었는데 물이 무릎에 찼다. 지팡이를 가지고 물을 짚어 보니 물속이 깊고 흐름이 매우 빨랐다. 한 어린아이가 뒤쪽에서 따라와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주므로 돌아보며 어린아이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린아이인데, 어찌 나를 건너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순식간에 10여 보나 나아가서 강 언덕으로 올라와 있었다. 곧바로 납의(納衣)를 벗어서 어린아이에게 주려고 두루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몸의 털들이 곤두서면서 비로소 신령의 힘이었음을 알았다.
당시 왕현모(王玄謨)가 양산의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효무제(孝武帝)는 군대에 칙명을 내려 구나발타라를 찾게 되면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역신(驛信)으로 조정[臺]에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후 그를 찾아 배를 태워 서울로 보내자, 효무제는 곧바로 접견하고 돌아보며 자세하게 물었다.
“만나기를 고대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만나게 되었구료.”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이미 잘못을 저질렀으니, 아무리 눈물 흘려도 분수로 헤아려 보면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금 접견을 하게 되어 거듭 살아난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칙명으로 물었다.
“누구누구와 더불어 역모를 하였소?”
대답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군사(軍事)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창(張暢)과 송영수(宋靈秀) 등이 모두 빈도에게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확실한 것은 단지 제가 전생에 지은 인연[宿緣]을 예기치 못하여 이로 인해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효무제가 말하였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날 칙명으로 후당(後堂)에 거주하게 하고, 옷과 물건을 제공하여 베풀고 하인과 수레를 지급하여 주었다.
처음 구나발타라가 형주(荊州)에 있은 지가 10년이 되었는데, 매번 초왕(譙王)에게 보낸 편지와 상소를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군사가 패하고 서찰들을 검사하여 보니 군사에 대한 일은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효무제는 그의 순수하고 근실함을 알고는 더욱더 예로써 대우하였다. 후에 한가하게 말을 나누다가 장난삼아 물었다.
“승상(丞相)이 생각나지 않았습니까?”
대답하였다.
“공양을 받은 지가 10년인데, 어찌 그 은덕을 잊겠습니까? 이제는 폐하를 섬기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승상을 위하여 3년간 향을 피우고자 원합니다.”
효무제는 섭섭한 마음이 들어 안색을 찌푸렸으나, 의리상 허락하였다. 중흥사(中興寺)가 완성되자, 그곳에 옮겨 거주하게 하고 그를 위하여 세 칸의 방을 마련하여 주었다.
후에 동부(東府)에서 연회를 열고 왕공(王公)들이 모두 모였는데, 칙명으로 구나발타라를 불러서 만나보았다. 당시에는 아직 깨끗하게 삭발[淨髮]을 하지 않아 머리가 희끗희끗하였다. 효무제가 멀리서 바라보고는 상서(尙書) 사장(謝莊)에게 돌아보며 말하였다.
“마하연(摩訶衍)은 총명하고 기미를 아는 이인데, 늙음이 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구나. 짐이 시험삼아 그 일을 물어 보면 그는 반드시 사람의 의중을 꿰뚫어 볼 것이다.”
구나발타라가 계단을 올라오자, 그를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마하연은 멀리서 온 뜻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다만 한 가지의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곧바로 그 소리에 응하여 말하였다.
“빈도가 멀리 제경(帝京)에 와서 30년이나 되었습니다. 천자의 은혜로운 대우에 부끄러움이 끝이 없습니다. 다만 70살이 되어 늙고 병들었으니, 오직 죽음 한 가지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효무제는 그의 임기응변을 가상히 여겨 어좌(御座) 가까이 앉도록 하여 온 조정이 눈여겨보도록 하였다.
후에 말릉(秣陵) 경계에 있는 봉황루(鳳凰樓) 서쪽에 절을 세웠는데, 매일 한밤중이 되면 문득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살펴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여러 사람들이 번번이 악몽을 꾸며 시달리곤 하였다. 구나발타라는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였다.
“너의 묵은 인연이 이곳에 있다. 내가 지금 절을 세워 항시 너희들을 위하여 도를 행하고 예참을 하겠다. 만일 머무르려 한다면 절을 호위하는 선한 귀신이 되고, 만일 머무르지 않겠다면 각자 편리한 바를 따르도록 하라.”
이윽고 도인과 속인 10여 인이 같은 날 저녁 꿈에 천여 인의 귀신들이 모두 짐을 꾸려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그로부터 절 안의 대중들은 편안하게 되었다.
대명(大明) 7년(463) 천하에 가뭄이 들어 산천에 기도를 올렸는데, 여러 달이 되어도 효험이 없었다. 효무제는 그를 청하여 비를 빌도록 하며 말하였다.
“반드시 감응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만일 그래도 효험이 없다면 다시는 서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우러러 삼보(三寶)를 의지하고 폐하의 위엄이 있으니, 반드시 은택이 내릴 것을 기대합니다. 만일 감응이 없게 된다면 다시는 뵙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북호(北湖)의 조대(釣臺)로 가서 향을 사르고 빌면서 다시는 먹거나 마시지도 않고 조용히 경을 외우며 은밀히 비밀스런 주술까지 하였다. 다음날 저녁때가 되자, 서북쪽에서 처음에는 마치 수레를 덮는 일산과 같은 구름이 일어났다. 해가 서쪽에 있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일고 구름이 합쳐져 연일 비가 내렸다. 다음날 아침에 공경(公卿)들이 들어와 축하를 하자, 칙명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고 하사품을 연이어 내려 주었다.
구나발타라는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소식(蔬食)만 하였으며, 항상 향로를 잡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양 식사를 끝내고 나면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새들이 모여들어 그의 손바닥에서 먹을 것을 취하였다. 명제(明帝) 대(代)에 이르러서는 예로써 공양함이 더욱 융숭하였다. 태시(太始) 4년(468) 정월에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미리 죽을 것을 예견하고 명제와 공경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임종하던 날 오래도록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말하였다.
‘하늘 꽃과 성상(聖像)이 보인다.’
오전 10시 경에 드디어 입적하게 되었으니, 나이는 75세였다. 명제가 매우 애석하고 아깝게 여겨 부조를 매우 융성하게 하였다. 공경(公卿)들도 모두 장례에 모여들었으니, 영예로움과 애도함이 모자람이 없었다.

반니원경(般泥洹經) 1권혹은 반(般)자가 없기도 하다. 효건(孝建) 원년(454)에 신사(辛寺)에서 번역되었다. 도혜의 『송제록(宋齊錄)』에 보인다. 지금 이 단권(單卷)의 『니원경』을 찾아보았더니 위 아래의 문구가 구나발타라의 번역이 아니었으며, 이 경은 지겸(支謙)이나 축법호(竺法護)의 번역인 것 같다. 이제 이 2권도 찾아 얻었으므로 우선 『동진록(東晋錄)』속에 덧붙여 둔다.
석마남본경(釋摩男本經) 1권오(吳)나라 지겸(支謙)의 번역이다.
삼장법사자술유(三藏法師自述喩) 1권범본(梵本)을 번역하여 낸 것이 아니므로, 역시 여기서는 삭제하였다.
당래선택제악세계경(當來選擇諸惡世界經)
과거행단바라밀경(過去行檀波羅蜜經)이상 2경은 모두 『비화경(悲華經)』에서 나왔다.
살룡제일국경(殺龍濟一國經)『육도경(六度經)』에서 나왔다.
삼인연경(三因緣經)『장아함경』에서 나왔다.
삼소겁경(三小劫經)『누탄경(樓炭經)』에서 나왔다.
불입감로문정의경(佛入甘露門正意經)『대십이문경(大十二門經)』에서 나왔다.
아란나경(阿蘭那經)『중아함경』에서 나왔다.
사리불등비구득신작증경(舍利弗等比丘得身作證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나뢰경(那賴經)
타주착해중경(墮珠着海中經)
구생경(舅甥經)
사리불반니원경(舍利弗般泥洹經)
부채위우경(負債爲牛經)
군신경(君臣經)이상의 6경은 모두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사식경(四食經)『소승잡초(小乘雜抄)』이다.
아난견기악체곡무상경(阿難見妓樂啼哭無常經)
불왕위가섭병경(佛往慰迦葉病經)
불명아난예최승장자경(佛命阿難詣最勝長者經)
이교사경(二僑士經)
목련제보시망즉보경(目連弟布施望卽報經)이상의 5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반니원경』 등 23부 23권은 혹 따로 파생된 것을 간추려 베낀 경[別生抄經]들이며, 혹은 구나발타라가 번역해 낸 경이 아니다. 이제 사실의 기록[實錄]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모두 삭제하였다.

(10) 석법용(釋法勇)
관세음보살수기경(觀世音菩薩受記經) 1권일명 『관세음수결경(觀世音受決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와 섭도진(聶道眞)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왕종록(王宗錄)』ㆍ『승우록(僧祐錄)ㆍ『이곽록(李廓錄)』ㆍ『법상록(法上錄)』 등의 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용은 범명(梵名)으로 담무갈(曇無竭)이라 한다. 본래 성(姓)은 이(李)씨이고, 유주(幽州) 황룡국(黃龍國) 사람이다. 어려서 사미가 되어 고행(苦行)을 닦았으며, 계율을 지니면서 경을 독송하였으므로, 스승의 귀여움을 받았다. 일찍이 법현(法顯)과 보운(寶雲) 등 여러 스님들이 직접 불국(佛國)을 갔었다는 소문을 듣고 개연(慨然)히 몸을 돌보지 않겠다는 서원을 하였다.
마침내 송(宋)나라 영초(永初) 원년(420)에 뜻을 같이하는 사문 승맹(僧猛)ㆍ담랑(曇朗) 등의 무리 25인을 불러 모아, 깃발과 일산 등 함께 공양도구를 가지고 북쪽 지방을 출발하여 멀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하남국(河南國)에 이르렀고, 이어서 해서군(海西郡)으로 나와 유사(流沙)로 진입하여 고창군(高昌郡)에 도착하였다. 이어 구자국(龜茲國)과 사륵국(沙勒國) 등의 여러 나라를 경유하여 총령(葱嶺)에 올라 설산(雪山)을 넘었다. 잔로(棧路)는 험악하여 낙타와 말은 가지도 못했으며, 층층이 빙설(氷雪)만 쌓여 풀과 나무는 자라지도 않았다. 산에는 장기(瘴氣)15)가 많았고, 아래로는 큰 강이 쏜살같이 흘렀다.
동쪽과 서쪽의 두 산허리에 줄을 매어 다리[橋]로 삼았는데, 떨어진 거리는 지극히 먼데 열 사람이 일단 건너가 저쪽 기슭에 도착하면 연기를 피워서 표지로 삼았고, 뒷사람들은 이 연기를 보고 앞사람이 이미 도착했음을 알고 비로소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약 오랫동안 연기를 보지 못하면 사나운 바람이 그 줄을 흔들어 사람이 강물 속으로 떨어졌음을 알았다.
총령을 넘은 지 3일이 지나 다시 설산(雪山)으로 올라갔다. 깎아지른 절벽에는 어디에도 발을 디딜 곳이 없었으며, 절벽에는 모두 곳곳에 오래된 말뚝 구멍이 서로 마주 대하고 늘어 서 있었다. 한 사람이 각각 네 개의 말뚝에 의지해 먼저 아래의 말뚝을 뽑아 손으로 위의 말뚝을 휘어잡고 기어올라 계속해서 서로 번갈아 올라갔다. 그렇게 3일을 지내서야 평지에 도착하여 서로 점검을 하여 보니 동료 12인을 잃었다.
계속 나아가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부처님 발우[佛鉢]에 예배하고, 1년 남짓 머물렀다. 그리고 범서(梵書)와 범어(梵語)를 배워 마침내 범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범문(梵文)으로 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 1부를 얻었다.
담무갈과 동행할 사문은 남아 있는 13인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서쪽으로 가서 신두나제하(新頭那提河)중국말로 번역하면 사자구(師子口)라 한다.에 이르렀고, 강물의 서쪽 가를 따라 월지국(月氏國)으로 들어가서 부처님 육계(肉髻)와 부처님 정골(頂骨)에 예배하고 흰 불목선(拂木船)을 보았다.
그 후 단특산(檀特山) 남쪽에 있는 석류사(石留寺)에 이르렀다.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승려 3백여 인은 여러 가지 3승(三乘)을 배우고 있었다. 담무갈은 이 사찰에 머물러 있으면서 구족계를 받았다. 천축의 사문 불타다라(佛陁多羅)중국말로 번역하면 각구(覺救)이다.를 그 지방의 승려들은 이르기를 “그는 이미 도과(道果)를 증득하였다”라고 하였다. 담무갈은 불타다라를 청하여 화상(和上)으로 삼고, 중국 사문 지정(志定)을 아사리(阿闍梨)16)로 삼았다.
이 절에서 석 달 동안 여름 안거(安居)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나 중천축(中天竺)으로 향하였다. 길은 텅 비고 광활했는데, 언제나 석밀(石蜜)17)만을 가지고 식량으로 삼았다. 동행한 13인 가운데 8인이 길에서 죽고, 나머지 5인만이 동행하였다. 담무갈은 여러 번 위험을 겪었지만, 모시고 있는 『관세음경』에 생각을 집중하여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사위국(舍衛國)에 도착할 무렵 들판에서 산 코끼리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이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부르고 신명을 다하여 귀의하자, 곧 수풀 속에서 사자가 나오니 코끼리 떼는 놀라 어쩔 줄 모르며 달아났다.
뒤에 항하(恒河)를 건넜는데, 또 들소 떼를 만났다.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막 사람을 해치려 하였는데, 담무갈이 관세음보살께 귀의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자, 이윽고 큰 독수리가 날아왔으므로 들소들이 놀라 그만 흩어져서 마침내 해를 면하게 되었다. 그의 정성스런 마음이 감응을 얻어 위험에 처할 때에 구제 받음이 모두 이러한 종류였다.
뒤에 남천축(南天竺)에서 배를 타고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그가 겪은 일의 자취는 별도로 전기(傳記)가 있다. 원가(元嘉) 말년에 양도(楊都)에 도착하여 손수 『관세음수기경』 1부를 번역해 냈는데, 오늘날 세상에 전해진다. 후에 그가 입적(入寂)한 곳은 알지 못한다.

(11) 저거경성(沮渠京聲)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1권또한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이라고도 하며, 도혜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승우록』에서는 “먼저 고창군(高昌郡)에 있을 때 번역해 냈다”라고 하였으나, 뒤에 제(齊)나라로 돌아와서 내었다.
간왕경(諫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대소간왕경(大小諫王經)』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번역인 『승군왕경(勝軍王經)』과 『승광천자경(勝光天子經)』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別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치선병비요경(治禪病秘要經) 1권혹은 『치선병비요법(治禪病秘要法)』이라고도 하여,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선요비밀치병경(禪要秘密治病經)』이라 하며, 또는 2권으로 되어 있다. 『잡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한다. 효건(孝建) 2년(455) 9월 8일에 죽원사(竹園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하여 9월 25일에 끝마쳤다. 『승우록』과 『보창록』 등의 목록에 보인다.
정반왕열반경(淨飯王涅槃經) 1권혹은 반(般)자가 더 붙기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법거(法炬)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진학경(進學經) 1권혹은 『권진학도경(勸進學道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 등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팔관재경(八關齋經) 1권다르게 번역되어 나온 경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오무반복경(五無返復經) 1권일명 『오반복대의경(五反覆大義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부(附)자를 쓰기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불대승대경(佛大僧大經) 1권두 가지 처음 이름兒名이 있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야기경(耶祇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말라왕경(末羅王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마달국왕경(摩達國王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혹은 국왕(國王)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전다월국왕경(旃陁越國王經) 1권혹은 국왕(國王)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오공포세경(五恐怖世經) 1권혹은 『오공포경(五恐怖經)』이라고도 하며,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제자사부생경(弟子死復生經) 1권혹은 『사망갱생경(死亡更生經)』이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가섭금계경(迦葉禁戒經) 1권일명 『마하비구경(摩訶比丘經)』, 또는 『진위사문경(眞僞沙門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보살서경(菩薩誓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자자제경(長者子制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중음경(中陰經) 1권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관세음관경(觀世音觀經) 1권먼저 고창군(高昌郡)에 있을 적에 번역하였다가 그가 제(齊)나라로 돌아와서 내었다. 『승우록』에 보인다.
파사익왕상모경(波斯匿王喪母經) 1권혹은 『파사익왕경(波斯匿王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는 “『파사익왕경(波邪匿王經)』이다”라고 하였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으며, 『증일아함경』 제18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 1권효건(孝建) 2년(455)에 종산(鍾山)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대애도반니원경(大愛道般泥洹經)』이라고 하며 『승우록』에 보인다. 『증일아함경』 제5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제자만위기역술경(弟子慢爲耆域述經) 1권또한 『제자위기역술만계우제자희탄경(弟子爲耆域述慢戒羽弟子戲誕經)』이라고도 하며,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아난문사불길흉경(阿難問事佛吉凶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장자음열경(長者音悅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이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오고장구경(五苦章句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무란(曇無蘭)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분화단왕경(分惒檀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률염(竺律炎)이 번역한 『삼마갈경(三摩竭經)』과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제자사불길흉경(弟子事佛吉凶經) 1권승우는 “『제자문사불길흉경(弟子問事佛吉凶經)』이다”라고 하였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생사변식경(生死變識經) 1권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견정경(見正經)』의 이명인 듯 싶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우바새오계경(優婆塞五戒經) 1권또한 『오상경(五相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오계상경(五戒相經)』과는 동본이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현자율의경(賢者律儀經) 1권또한 위의(威儀)라고도 한다. 장방은 “『별록』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28부 28권이다.『가섭금계경』 이상의 15부 15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으며, 『보살서경』 이하의 13부 13권은 궐본이다.

거사(居士) 저거경성은 곧 북량(北涼)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사촌 아우인 안양후(安陽候)이다. 위(魏)가 북량을 병탄(倂呑)하자 남쪽 송(宋)나라로 도망하여 뜻을 감추고 신분을 낮추어 세상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않았으며, 항상 탑사(塔寺)에서 머물러 놀았으며, 거사의 신분으로 일생을 마쳤다.
단양윤(丹陽尹) 맹의(孟覬)가 보고는 사귀려고 청하여 서로 만났는데, 한 번 대면한 뒤부터는 바로 숭배하고 애경하였다. 그리고 극진히 공양을 베풀고 넉넉하게 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저거경성은 효무제(孝武帝) 효건(孝建) 2년 을미(乙未, 455)에 양도(楊都)의 죽원사(竹園寺)와 종산(鍾山)의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등 28부를 번역하였다. 통상 오래도록 글을 보고 익힌 후에 붓을 들고 쓸 적에는 막힘이 없었다.
저거경성은 처자(妻子)와도 끊고 살았으며, 욕심이나 영리(榮利)를 바라지 않았다. 조용히 법려(法侶 : 불법을 같이 배우는 동료)들과 경전을 널리 펼쳐 유통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건업(建業)의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면서 훌륭하게 여겼다. 대명(大明) 말년(464)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보명왕경(普明王經)
범마황경(梵摩皇經)이상의 2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마이비구경(𡡉夷比丘經)
우바새오법경(優婆塞五法經)이상의 2경은 모두 『중아함경』에서 나왔다.
석종문우바새경(釋種問優婆塞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청신사아이선경(淸信士阿夷扇經)또한 『아이선지부자경(阿夷扇持父子經)』이라고도 한다.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오백범지경(五百梵志經)여러 목록에서는 모두 「의록(疑錄)』에다 덧붙어 놓았다.
『보명왕경』 등 7경 중에서 6경은 따로 파생[別生]한 것이고, 1경은 거짓이 아닌지 의심(疑僞)이 된다고 한다. 지금 사실의 기록[實錄]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모두 삭제한 것이다.

(12) 석혜간(釋慧簡)
염라왕오천사자경(閻羅王五天使者經) 1권일명 『철성니려경(鐵城泥黎經)』이라고도 한다. 『장방록』에 보인다. 『중아함경』 제2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구담미기과경(瞿曇彌記果經) 1권『중아함경』 제28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장자자육과출가경(長者子六過出家經) 1권『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2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 1권『증일아함경』 제5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빈궁로공경(貧窮老公經) 1권혹은 『빈로경(貧老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해태경자경(懈怠耕者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해태경아경(懈怠耕兒經)』이다”라고 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청빈두로법(請賓頭盧法) 1권혹은 경(經)자를 덧붙이기도 하며, 『장방록』에 보인다.
선생자경(善生子經) 1권또한 다르게 번역되어 나온 『육향배경(六向拜經)』이라고도 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중아함경』 제33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불열반후제비구경(佛涅槃後諸比丘經) 1권또한 『역사발타경(力士跋陁經)』이라고도 하며, 『잡아함경』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장방록』에 보인다.
비유경(譬喩經) 1권『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10부 10권이다.『청빈두로법』 이상의 7부 7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선생자경』 이하의 3부 3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혜간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효무제(孝武帝) 대명(大明) 원년 정유(丁酉, 457)에 녹야사(鹿野寺)에서 『염라왕오천사자경(閻羅王五天使者經)』 등 10부를 번역하였다.

진위사문경(眞僞沙門經)저거경성(沮渠京聲)이 번역한 『가섭금계경(迦葉禁戒經)』과 문구가 완전히 같다. 이 경은 『가섭금계경』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기록한 이들의 착오로 두 경의 이름을 실었다.
약사유리광경(藥師琉璃光經)또한 『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이라고도 한다. 『대관정경(大灌頂經)』에서 나왔다. 『승우록』의 주(注)에서는 “「의경(疑經)」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다.
석가필죄경(釋迦畢罪經)
살신제가인경(殺身濟賈人經)이상의 2경은 모두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아난견수광서경(阿難見水光瑞經)일명 『수광경(水光經)』이라고도 하며, 『대승경』에서 간추려 베낀 경抄經이다.
상인구재경(商人求財經)
구담미경(瞿曇彌經)이상의 2경은 모두 『중아함경』에서 나왔다.
사위성중인상자발광경(舍衛城中人喪子發狂經)
학인란의경(學人亂意經)또한 『모자작비구비구니란의경(母子作比丘比丘尼亂意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의 2경은 모두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대역사출가득도경(大力士出家得道經)또한 『역사발타경(力士跋陁經)』이라고도 한다.
이로남녀견불출가득도경(二老男女見佛出家得道經)이상의 2경은 모두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전사마폭지방불경(旃闍摩暴志謗佛經)『생경(生經)』에서 나왔다.
절위사문경(竊爲沙門經)
갈사사가학도경(獦師捨家學道經)이상의 2경은 모두 『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주원경(呪願經)승우는 「위록(僞錄)」에 실었다.
『진위사문경』 등 15부는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모두 “혜간(慧簡)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이제 대부분은 따로 파생된 경[別生經]이므로 삭제하여 싣지 않았다.

(13) 공덕직(功德直)
보살염불삼매경(菩薩念佛三昧經) 6권혹은 바로 『염불삼매경(念佛三昧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수(隋)나라 달마급다(達磨笈多)가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이 경은 『대집경(大集經)』의 별분(別分)이다. 도혜의 『송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무량문파마다라니경(無量門破魔陁羅尼經) 1권혹은 바로 『파마다라니경(破魔陁羅尼經)』이라고도 하며, 일곱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지겸(支謙)이 번역한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密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이상은 2부 7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공덕직은 서역 사람이다. 도(道)와 계합됨이 이미 광대하여 중생들을 잘 이끌어 날마다 새롭게 하였다. 효무제(孝武帝) 대명(大明) 6년 임인(壬寅, 462)에 돌아다니다가 형주(荊州)에 이르러서 선방사(禪房寺)에 머물렀다. 사문 현창(玄暢)이 그를 청하여 『보살염불삼매경』 등 2부를 번역하게 하였다. 현창이 글과 뜻의 교정을 보았는데, 말과 지취(旨趣)가 아름답고 은밀하였다. 현창이 손을 펴면 손에서 향내가 나오고 손바닥에서는 물이 흘러 나왔데, 그를 측량할 수 없었다.
후에 성도(成都)로 가서 대석사(大石寺)에 머물렀는데, 곧 그곳은 아육왕탑(阿育王塔)이 있는 곳이었다. 손수 금강밀적(金剛密迹) 등 16신상(神像)을 조성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공덕직은 형주에서 수년간 머물렀다. 그 뒤에 어디서 입적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14) 석승거(釋僧璩)
십송갈마비구요용(十誦羯磨比丘要用) 1권혹은 『약요갈마법(略要羯磨法)』이라고 하기도 한다. 장방은 “2권이다”라고 하였고, 승우는 “1권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승거는 성(姓)은 주(朱)씨요, 오(吳)나라 사람이다. 출가하여 승업(僧業)의 제자가 되었다. 여러 경전을 두루 기쁘게 펼쳐보았으며, 특히 『십송율(十誦律)』에 밝았으며, 겸하여 역사책[史籍]을 잘 알았고 문장을 매우 잘 지었다.
처음에는 오나라 호구산(虎丘山)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가 그의 풍모를 듣고 흠모하여 칙명으로 ‘양도(楊都)에 나와서 승정(僧正)이 되어 대중을 기쁘게 하라’고 하였으므로 나와서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러 있었다. 승거는 대명(大明) 7년 계묘(癸卯, 463)에 『십송갈마비구요용』 1부를 지었다.

(15) 석법영(釋法潁)
십송비구니계본(十誦比丘尼戒本) 1권또한 『십송비구니바라제목차계본(十誦比丘尼波羅提木叉戒本)』이라고도 하며, 혹은 『십송비구니대계(十誦比丘尼大戒)』라고도 한다. 『승우록(僧祐錄)』과 『보창(寶唱錄)』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계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영은 속성(俗姓)은 삭(索)씨이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13세에 출가하여 법향(法香)의 제자가 되어 양주(涼州) 공부사(公府寺)에서 머물렀다. 동학(同學) 법력(法力)과 함께 율장(律藏)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석법영은 엎드려 받아 가슴에 지니고 난[伏膺] 이후에는 다시 청하여 배우는 일도 없고, 한 번 들은 것은 기억하였으며, 율부(律部)를 정밀하게 연구하고 경론(經論)을 널리 섭렵하였다.
원가 말년(453)에 건업(建業)에 이르러 신정사(新亭寺)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는 법영의 학업이 밝다 함을 듣고 칙명으로 도읍의 승정(僧正)이 되게 하였다. 후에 그것을 사임하고 다보사(多寶寺)로 돌아와 언제나 조용한 방에서 선정(禪定)을 익혔으며, 또한 때로는 율석(律席)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후에 장간사(長干寺)에 가서 머물렀다. 명제(明帝)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십송비니계본』 1부를 모아 번역하였으며, 겸하여 갈마(羯磨)를 번역 출간하였으므로 당대에 유행하였다.

(16) 축법권(竺法眷)
무진의경(無盡意經) 10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아차말경(阿差末經)』과 같은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아술달보살경(阿述達菩薩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寶積經)』의 「무외덕회(無畏德會)」와 같은 동본이다.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광주(廣州)에서 번역하였다. 『시흥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해의경(海意經) 7권『시흥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여래은지부사의경(如來恩智不思議經) 5권『시흥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보정경(寶頂經) 5권『시흥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삼밀저야경(三密底耶經) 1권중국말로 번역하면 『현인용률경(賢人用律經)』이다. 『시흥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6부 29권인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축법권은 인도 사람이다. 뜻하는 성품이 넓고 간결하며 중생을 깨우치고 이롭게 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명제(明帝)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광주(廣州)에서 『무진의경』 등 6부를 번역하였다.

(17) 석상공(釋翔公)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 2권일명 『결료제법여환화삼매경(決了諸法如幻化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한(漢)나라 엄불조(嚴佛調)가 번역하여 낸 경과 『대반야나가실리분(大般若那伽室利分)』은 모두 동본이다. 『시흥록(始興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2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상공은 또한 삭공(朔公)이라고도 한다. 남해군(南海郡)에 있으면서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 1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기록에서는 바로 “송(宋)나라 때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연대와 이름을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어느 제왕(帝王) 때인지 자세하지 않다.

(18) 석도엄(釋道嚴)
불장대방등경(佛藏大方等經) 1권또한 『문명현경(問明顯經)』이라고도 하며, 『화엄경(華嚴經)』 「명난품(明難品)」의 이역(異譯)이다. 『시흥록(始興錄)』과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 2권일명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3권인데, 그 경본이 모두 궐본이다.

사문 석도엄은 송(宋)나라 때 『불장대방등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기록에서는 바로 “송나라 때 번역이다”라고만 하였고, 제왕의 연대를 나타내지 않았다.

(19) 석용공(釋勇公)
범녀수의경(梵女首意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조록(趙錄)』과 『법상록』에 보인다.
공정삼매경(空淨三昧經) 1권또한 『공정천감응삼매경(空淨天感應三昧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조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권진학도경(勸進學道經) 1권또한 『권진경(勸進經)』이라고도 하며, 『양사(梁史)』와 함께 번역하여 내었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이상은 3부 3권이며, 그 경본은 모두 궐본이다.

사문 석용공은 송나라 때에 『범녀수의경』 등 3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기록에는 “송나라 때 번역이다”라고만 하였고, 제왕의 연대를 나타내지 않았다.

차익경(車匿經)또한 『차익본말경(車匿本末經)』이라고도 하며,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이 경은 『시가변왕경(尸呵遍王經)』의 이명(異名)이다. 여러 목록에서는 “석용공의 번역이다”라고 하였으나, 이제 이 경은 따로 파생한 것을 추려 베낀 경이므로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는다.

(20) 석법해(釋法海)
적조음소문경(寂調音所問經) 1권일명 『여래소설청정조복경(如來所說淸淨調伏經)』이라고도 한다. 서진(西晋)의 법호(法護)가 번역한 『문수정률경(文殊淨律經)』과 같은 동본이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보인다.
낙영락장엄방편경(樂瓔珞莊嚴方便經) 1권일명 『대승영락장엄경(大乘瓔珞莊嚴經)』이라고도 한다. 또한 『전여신보살경(轉女身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의 법호가 번역한 『순권방편경(順權方便經)』과 같은 동본이다. 『시흥록』ㆍ『승우록』ㆍ『법상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2권이다.앞의 『적조음소문경』은 그 경본이 현재 있고, 뒤의 『낙영락장엄방편경』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해는 송나라 때에 『적조음소문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의 주(注)에서는 “송나라 때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그 연대를 나타내지 않아 어느 제왕 때인지 알지 못한다.

(21) 석선공(釋先公)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1권일명 『문수사리보살십사행경(文殊師利菩薩十事行經)』이라고도 한다. 일명 『체혜삼매경(逮慧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대월등경(大月燈經)』 제7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조록(趙錄)』과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선공은 송나라 때[宋世]에 『월등삼매경』 1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의 주(注)에서는 “송나라 때이다”라고만 하였고, 번역한 때의 연대를 나타내지 않아 어느 제왕(帝王) 때인지 알지 못한다.

(22) 승가발미(僧伽跋彌)
미사색률초(彌沙塞律抄) 1권『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궐본이다.

사문 승가발미는 사자국(師子國) 사람이다. 그는 『미사색률초』 1부를 번역하였다. 『대주록(大周錄)』에는 『보창록』을 가리키면서도 제왕의 연대를 말하지 않았다. 그 『보창록』에 그 경본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선 송(宋)의 목록에 붙여 두면서 근거가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23) 신집실역제경(新集失譯諸經)
여래지인경(如來智印經) 1권일명 『제불법신경(諸佛法身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혜인삼매경(慧印三昧經)』과 동본이다.
노모경(老母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노녀인경(老女人經)』과 같은 동본이다.
법멸진경(法滅盡經) 1권
심심대회향경(甚深大廻向經) 1권
불위황죽원노바라문설학경(佛爲黃竹園老婆羅門說學經) 1권『중아함경』 제40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우바이타사가경(優波夷墮舍迦經) 1권『중아함경』 제55권18)에서 나온 이역이다. 혹은 가(迦)자가 없기도 한다.
사견경(邪見經) 1권『중아함경』 제60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대사문백일갈마법(大沙門百一羯磨法) 1권혹은 『대사문갈마법(大沙門羯磨法)』이라고도 하며, 『십송률(十誦律)』에서 나왔다.
가정비구설당래변경(迦丁比丘說當來變經) 1권혹은 바로 『가정비구경(迦丁比丘經)』이라고도 한다.
이후에 나오는 경들은 궐본이다.
시방불명경(十方佛名經) 1권어떤 책에는 “십만(十萬)이다”라고 하였는데, 착오인 듯하다.
화엄정경(華嚴淨經) 1권
삼십칠품경(三十七品經) 1권승우는 두 책을 모두 실으면서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우선 한 책만 기재한다.
칠불각설게(七佛各說偈) 1권
유왕여래경(乳王如來經) 1권혹은 『무유왕경(無乳王經)』이라고도 한다. 『유광불경(乳光佛經)』과 동본인 듯하다.
현재시방불명경(現在十方佛名經) 1권
과거제불명경(過去諸佛名經) 1권
천오백불명경(千五百佛名經) 1권
오백칠백불명경(五百七百佛名經) 1권혹은 오백칠십(五百七十)이라고도 한다.
관세음성불경(觀世音成佛經) 1권
문수인연경(文殊因緣經) 1권
문수본원경(文殊本願經) 1권
문수관경(文殊觀經) 1권
미륵수하경(彌勒須河經) 1권
도사문불경(導師問佛經) 1권
발타보살백이천난경(颰陁菩薩百二千難經) 1권
지신보살경(持身菩薩經) 1권혹은 『지신경(持身經)』이라고도 한다.
현수보살이백문경(賢首菩薩二百問經) 1권
금강녀보살경(金剛女菩薩經) 1권
선의보살경(善意菩薩經) 1권
보살종도솔천강중음경(菩薩從兜率天降中陰經) 1권
보살행희경(菩薩行喜經) 1권
보살정본업경(菩薩淨本業經) 1권
보살초업경(菩薩初業經) 1권
보살사사경(菩薩四事經) 1권
보살십육원경(菩薩十六願經) 1권
보살오십덕행경(菩薩五十德行經) 1권
보살교법경(菩薩敎法經) 1권
보살정행경(菩薩正行經) 1권
보살출입제칙경(菩薩出入諸則經) 1권
보살모성자경(菩薩母姓字經) 1권
보살가성경(菩薩家姓經) 1권
보살비구경(菩薩比丘經) 1권
보살경(菩薩經) 1권이제 보살 위에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
보살작륙아상본사경(菩薩作六牙象本事經) 1권
보살사자왕경(菩薩師子王經) 1권
욕상공덕경(浴像功德經) 1권새로 번역된 것은 범본(梵本)과 같으나, 같은 경인지 다른 경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욕승공덕경(浴僧功德經) 1권
타린니목거경(陁隣尼目佉經) 1권이제 『아난타목거니경(阿難陁目佉尼經)』이 아닌가 한다.
예경제탑경(禮敬諸塔經) 1권
반야바라밀게경(般若波羅蜜偈經) 1권
불청정게경(佛淸淨偈經) 1권
태자출국이십게경(太子出國二十偈經) 1권
불십력게(佛十力偈) 1권
시방불신주(十方佛神呪) 1권
사천왕신주(四天王神呪) 1권
십이인연결루신주(十二因緣結縷神呪) 1권
마하신주(摩訶神呪) 1권
이산신주(移山神呪) 1권
항마신주(降魔神呪) 1권
위덕다라신주(威德陁羅神呪) 1권본래는 성(成)자로 되어 있었는데, 착오이다.
화마결신주(和魔結神呪) 1권
구마가섭경(鳩摩迦葉經) 1권『동가섭해난경(僮迦葉解難經)』과 동본이며, 『장아함경』 제7권에서 나온 이역이다. 『법경록(法經錄)』에는 “『중아함경』 제16권에서 나온 이역이다”라고 하였다.
출요경(出要經) 20권
행도경(行道經) 7권
장아함경(長阿含經) 3권승우는 “이 경은 『장아함경』에서 빠져 남은 책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홍도경(弘道經) 2권
사천왕경(四天王經) 1권승우는 “경 뒤에 주문(呪文)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덧붙여 놓은 것 같다”라고 하였다.
제천아수륜투경(諸天阿須倫鬪經) 1권
금색녀경(金色女經) 1권『잡비유경(雜譬喩經)』속에 있다. 승우는 “다르게 번역되어 나온 경본이다”라고 하였다.
치선귀매불안경(治禪鬼魅不安經) 1권
첨파국불설계경(瞻波國佛說戒經) 1권
불재서지산설법경(佛在誓枝山說法經) 1권
불삼독사경(佛三毒事經) 1권
불칠사경(佛七事經) 1권
불문화복경(佛問和伏經) 1권
불의행경(佛意行經) 1권
인불생삼심경(因佛生三心經) 1권
불취경(佛聚經) 1권
칠불본연경(七佛本緣經) 1권
석가문지발경(釋迦文枝鉢經) 1권
불가사경(佛袈裟經) 1권
불대의경(佛大衣經) 1권
가섭해경(迦葉解經) 1권
가섭인연경(迦葉因緣經) 1권
사리불문서경(舍利弗問署經) 1권
가섭독증자서경(迦葉獨證自誓經) 1권
사리불탄도여인경(舍利弗歎度女人經) 1권
사리불생서방경(舍利弗生西方經) 1권
사리불목련니원경(舍利弗目連泥洹經) 1권지금 이 경은 『생경(生經)』속에 있는 『사리불반니원경(舍利弗般泥洹經)』이 아닌가 싶다.
목련소문경(目連所問經) 1권
목련인연경(目連因緣經) 1권
아난견변경(阿難見變經) 1권
난타경(難陁經) 1권
아나함칠념경(阿那含七念經) 1권
나한보자경(羅漢菩子經) 1권
빈두로취발경(賓頭盧取鉢經) 1권
애행비구경(愛行比丘經) 1권
애신비구경(愛身比丘經) 1권
전비구경(旃比丘經) 1권
선성비구경(善星比丘經) 1권
육군비구경(六群比丘經) 1권
자재왕비구경(自在王比丘經) 1권
나사달비구경(羅邪達比丘經) 1권
비구화수밀경(比丘和須蜜經) 1권
현계미래비구경(玄戒未來比丘經) 1권이제 현(玄)이란 글자는 착오인 듯하다.
비구법상경(比丘法相經) 1권
석종동자경(釋種童子經) 1권
존자바차율경(尊者婆蹉律經) 1권
계빈이사미경(罽賓二沙彌經) 1권
사미지계경(沙彌持戒經) 1권
해주우바새회경(海洲優婆塞會經) 1권
현자잡사경(賢者雜事經) 1권
제자수학경(弟子修學經) 1권
제자행택중우적겁경(弟子行澤中遇賊劫經) 1권
제자정진경(弟子精進經) 1권
가제라월문오계경(迦提羅越問五戒經) 1권
나라연천왕경(那羅延天王經) 1권
비사문천왕경(毗沙門天王經) 1권
사대천왕경(四大天王經) 1권
제천수경(諸天壽經) 1권
마현성불경(魔現成佛經) 1권
마왕계경(魔王誡經) 1권이 계(誡)자는 시(試)자가 아닌가 싶다.
정반왕경(淨飯王經) 1권
불장열두단왕경(佛葬閱頭檀王經) 1권
아육왕작소아시경(阿育王作小兒時經) 1권지금 『육왕전(育王傳)』에서 나온 경이 아닌가 싶다.
소아육왕경(小阿育王經) 1권
우전왕조서심녀경(優塡王照逝心女經) 1권지금 이 경은 대승장(大乘藏)속에 있는 『우전왕경(優塡王經)』이 아닌가 싶다.
가이왕두보시경(迦夷王頭布施經) 1권
과존왕경(果尊王經) 1권
불거사경(佛居士經) 1권
항공왕경(降恐王經) 1권지금 공(恐)자가 착오인 듯하다.
마라왕경(摩羅王經) 1권
마등왕경(摩登王經) 1권
사이국경(舍夷國經) 1권
나제지왕경(羅提坻王經) 1권혹은 『국왕라제비경(國王羅提▼(土+畢)經)』이라고도 한다.
마하유월왕경(摩訶惟越王經) 1권
유사왕경(流沙王經) 1권
십사왕경(十四王經) 1권
왕이죽시경(王以竹施經) 1권
권왕지오계경(勸王持五戒經) 1권
태자전사라차경(太子旃舍羅差經) 1권
장자성덕경(長者盛德經) 1권
장자법심경(長者法心經) 1권
장자인현경(長者仁賢經) 1권
장자원라월경(長者洹羅越經) 1권
불문순타장자수락정행경(佛問淳陁長者受樂淨行經) 1권
바라문문사경(婆羅門問事經) 1권
바라문등쟁설경(婆羅門等爭說經) 1권
육사예파사익왕경(六師詣波斯匿王經) 1권
니건재경(尼揵齋經) 1권
명성범지경(明星梵志經) 1권
도솔범지경(兜率梵志經) 1권
범지발타경(梵志拔陁經) 1권
범지계화정경(梵志計火淨經) 1권
범지문의경(梵志問疑經) 1권
범지의경(梵志意經) 1권
범지호모경(梵志好母經) 1권
범지음녀경(梵志婬女經) 1권
범지육사경(梵志六師經) 1권
천후현녀경(天后賢女經) 1권
덕녀문경(德女問經) 1권
빈녀소시획홍보경(貧女少施獲弘報經) 1권
미가녀경(彌家女經) 1권
이인작사문제단형설경(二人作沙門弟斷兄舌經) 1권
기허살전다라경(氣噓殺旃陁羅經) 1권
안능시살인경(眼能視殺人經) 1권
고독삼형제경(孤獨三兄弟經) 1권
아검타경(阿劍他經) 1권
불란가경(不蘭伽經) 1권
소신일경(小申日經) 1권
바라내휘사성경(波羅奈媈四姓經) 1권혹은 부(婦)자를 쓰기도 한다.
대성가주고서불경(大姓家主叩書不經) 1권
제위경(提謂經) 1권
강라경(强羅經) 1권
금전용왕경(金轉龍王經) 1권
소갈용왕경(蘇曷龍王經) 1권
삼용왕경(三龍王經) 1권
호왕경(虎王經) 1권
갈왕경(蠍王經) 1권
독룡사시경(毒龍蛇施經) 1권
방우법경(放牛法經) 1권지금 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있는 『방우경(放牛經)』이 아닌가 싶다.
양우경(養牛經) 1권
염라왕경(閻羅王經) 1권지금 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있는 『염라왕오천사자경(閻羅王五天使者經)』이 아닌가 싶다.
아귀경(餓鬼經) 1권
철저니리경(鐵杵泥犁經) 1권
연경(緣經) 1권
약경(藥經) 1권
고혜경(苦慧經) 1권
혜달경(慧達經) 1권
법족경(法足經) 1권
신수경(身數經) 1권
선복경(選福經) 1권
보시경(布施經) 1권
조선경(助善經) 1권
고래경(古來經) 1권지금 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있는 『고래세시경(古來世時經)』이 아닌가 싶다.
효순경(孝順經) 1권
연본경(緣本經) 1권지금 이 경은 장경(藏經)속에 있는 『연본치경(緣本致經)』인 듯하다.
도세경(度世經) 1권
법장경(法藏經) 1권
명주경(明住經) 1권
선게경(善憩經) 1권
식질경(植質經) 1권
명상경(名相經) 1권
괴이경(怪異經) 1권
멸괴경(滅怪經) 1권
본발경(本鉢經) 1권
안발경(案鉢經) 1권
제법경(諸法經) 1권
여탈경(與脫經) 1권
복원경(伏願經) 1권
보견경(寶見經) 1권
진제경(眞提經) 1권
명의경(明義經) 1권
현재경(見在經) 1권
석론(釋論) 1권승우는 “이 논(論)은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베낀 1권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잡사경(雜事經) 1권
지해경(旨解經) 1권승우는 바로 “『의지잡해(義旨雜解)』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석학경(釋學經) 1권
도도속경(度道俗經) 1권
제복덕경(諸福德經) 1권
설인신경(說人身經) 1권
시색력경(施色力經) 1권
색입시경(色入施經) 1권
계법률경(戒法律經) 1권
미생화경(未生火經) 1권
미생재경(未生災經) 1권
염불품경(念佛品經) 1권
수미산경(須彌山經) 1권
성패품경(成敗品經) 1권경목(經目)에는 혹은 “「성패품(成敗品)」 제4라 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이 경은 『누탄경(樓炭經)』의 1품인 것 같으나, 지금 『누탄경』을 검토하여 보았으나, 이 품(品)이 없었다.
세간진보경(世間珍寶經) 1권『구록(舊錄)』에서는 “『세간소망진보경(世間所望珍寶經)』이다”라고 하였다.
현도신족경(現道神足經) 1권
성행무상경(成行無想經) 1권
회과제죄경(悔過除罪經) 1권
심자요행경(深自僥倖經) 1권
보시지계경(布施持戒經) 1권
생서방재경(生西方齋經) 1권
조욕실법경(造浴室法經) 1권
유의왕해경(有疑往解經) 1권
장아함방법경(長阿含方法經) 1권
영인효유덕경(令人孝有德經) 1권
인어출가자경(人於出家者經) 1권
심응심탐모경(心應深貪慕經) 1권
지수화풍공경(地水火風空經) 1권
구욕자제의경(求欲者除意經) 1권
지계교인살생경(持戒敎人殺生經) 1권
칠월십오일랍법경(七月十五日臈法經) 1권
공고교만유이배경(功高憍慢有二輩經) 1권
환희보시유오사경(歡喜布施有五事經) 1권혹은 권(勸)자를 쓰기도 하나 착오이다.
삼몽경(三夢經) 1권
삼회처경(三悔處經) 1권
삼승무당경(三乘無當經) 1권
사서경(四署經) 1권
사등의경(四等意經) 1권
사정단경(四政斷經) 1권
사후경(四厚經) 1권
오서경(五署經) 1권
오곡세경(五穀世經) 1권
오란경(五亂經) 1권
오야경(五耶經) 1권
육선경(六禪經) 1권
육도육십행경(六度六十行經) 1권
육배아유월치경(六輩阿惟越致經) 1권
칠중경(七衆經) 1권
칠류경(七流經) 1권
칠사경(七使經) 1권
칠배인횡사경(七輩人橫死經) 1권
칠세작선경(七歲作善經) 1권
팔방만물무상경(八方萬物無常經) 1권
팔쌍경(八雙經) 1권
구결경(九結經) 1권
구뇌경(九惱經) 1권
구도관신경(九道觀身經) 1권
십부승경(十部僧經) 1권
십이의경(十二意經) 1권
십이아련야고행경(十二阿練若高行經) 1권
십이부경명(十二部經名) 1권
삼십이승나경(三十二僧那經) 1권
삼십사의경(三十四意經) 1권
오십덕상경(五十德相經) 1권
육십품경(六十品經) 1권
육십이의경(六十二疑經) 1권
칠십이관경(七十二觀經) 1권
백법경(百法經) 1권
유일삼매경(惟日三昧經) 1권
월전삼매경(月電三昧經) 1권
무언삼매경(無言三昧經) 1권
아화삼매경(阿和三昧經) 1권
선행법경(禪行法經) 1권지금 이 장경(藏經)속에 있는 『선행법상경(禪行法想經)』이 아닌가 싶다.
수미산비경(須彌山譬經) 1권
일월비경(日月譬經) 1권
해수비경(海水譬經) 1권
약초유경(藥草喩經) 1권
공덕천비경(功德天譬經) 1권
현겁비경(賢劫譬經) 1권
금강비경(金剛譬經) 1권
보장비경(寶藏譬經) 1권
명주비경(明珠譬經) 1권
취목비경(聚木譬經) 1권
사대비경(四大譬經) 1권
오부위의소복경(五部威儀所服經) 1권혹은 『오부승복경(五部僧服經)』이라고도 한다. 『고승전』에서는 “백법조(白法祖)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결계문경(結界文經) 1권
사미리계경(沙彌離戒經) 1권
오계보응경(五戒報應經) 1권
육족아비담(六足阿毗曇) 1권
잡비유경(雜譬喩經) 6권혹은 『제잡비유(諸雜譬喩)』라고도 한다.
비유경(譬喩經) 1권승우는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다시 한 책이 있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우선 한 책만 기재한다.
잡비유경(雜譬喩經) 1권모두 열한 가지의 일이 수록되어 있다.
이상은 307부 340권이다.처음의 9부 9권만이 경본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궐본이다.

이는 모두 양대(梁代)의 사문 승우(僧祐)의 목록에 있는 새로 수집된 실역(失譯)의 모든 경전이다. 『승우본록(僧祐本錄)』에서는 승우가 새로 수집한 경은 총 1,306부 1,570권이다. 이제 자세히 조사하여 총괄한 나머지는 999부 1,230권이다. 이 경들은 대부분 따로 파생된 경[別生經]이며, 혹은 장방(長房) 등의 『실역록(失譯錄)』에 이미 기재되어 있고, 연대가 기록되어 있고, 그 중에는 번역한 이[譯主]가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제외하면 307부 340권이다. 이번에 조사하여 총괄한 경들은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아직 기재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새로 여기에다 모아서 실원(失源)이라 하여 둔다. 그리고 『승우록』에는 다만 “번역한 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失譯]”고만 하고 연대를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선 『송록(宋錄)』의 맨 끝에 덧붙여 두어 빠지거나 누락되지 않기를 바란다.開元釋教錄卷第五 笙庚午歲西崇福寺沙門智昇撰摠括群經錄上之五宋劉氏都建業自武帝永初元年庚申至順帝昇明三年己未凡八主六十年緇素共有二十二人所出經律論等幷雜集失譯諸經摠四百六十五部七百一十七卷 於中九十三部二百四十三卷見在三百七十二部四百七十四卷闕本宋沙門佛陁什 三部 三十二卷律戒羯磨沙門畺良耶舍 二部 二卷經沙門曇摩蜜多 一十二部 一十七卷經沙門釋智嚴 一十部 三十一卷經沙門釋寶雲 四部 一十七卷經集沙門伊葉波羅 一部 一十三卷論沙門求那跋摩 一十部 一十八卷律集沙門僧伽跋摩 五部 二十四卷律論集沙門求那跋陁羅 五十 二部一百三十四卷經論集沙門釋曇無竭 一部 一卷經居士沮渠京聲 二十八部 二十八卷經律沙門釋慧簡 一十部 一十卷經集沙門功德直 二部 七卷經沙門釋僧璩 一部 一卷羯磨沙門釋法穎 一部 一卷尼戒沙門竺法眷 六部 二十九卷經沙門釋翔公 一部 二卷經沙門釋道嚴 二部 三卷經律沙門釋勇公 三部 三卷經沙門釋法海 二部 二卷經律沙門釋先公 一部 一卷經沙門僧伽跋彌 一部 一卷律抄新集失譯諸經 三百七部 三百四十卷五分律三十卷 亦云彌沙塞律或三十四卷別錄云二十四卷恐謬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五分比丘戒本一卷 亦云彌沙塞戒本見竺道祖錄及僧祐錄彌沙塞羯磨一卷 見竺道祖錄及僧祐錄右三部三十二卷 律戒見在羯磨本闕沙門佛陁什宋言覺壽罽賓國人少受業於彌沙塞部專精律品兼達禪要以廢帝義符景平元年癸亥七月屆於楊都先沙門法顯於師子國得彌沙塞律梵本未及翻譯而顯遷化建業諸僧聞什旣善此學於是請令出焉卽以其年冬十一月集龍光寺譯稱爲五分律什執梵文于塡沙門智勝傳語龍光沙門竺道生東安沙門釋慧嚴共執筆參正宋侍中琅瑘王練爲檀越至來年十二月方訖仍出戒心及羯磨文等竝行於世什後不知所終觀無量壽佛經一卷 亦云無量壽觀經初出見道慧宋齊錄及高僧傳觀藥王藥上二菩薩經一卷 第二出見宋齊錄及高僧傳右二部二卷其本見在沙門畺良耶舍宋云時稱西域人性剛直寡嗜欲善誦阿毘曇博涉律部其餘諸經多所該綜雖三藏兼明而以禪門專業每一遊觀或七日不起常以三昧正受傳化諸國以元嘉元年甲子遠冒沙河萃于建業文帝義隆深加歎異勅止鍾山道林精舍沙門寶誌崇其禪法沙門僧含請譯觀無量壽及藥王藥上觀含卽筆受以此二經是淨土之洪因轉障之秘術故沈吟嗟味流通宋國平昌孟顗承風欽敬資給豐厚顗出守會稽固請不從後移憩江陵元嘉十九年西遊岷蜀處處弘道禪學成群後還卒於江陵春秋六十矣虛空藏菩薩神呪經一卷 第二出與姚秦耶舍虛空藏及隋崛多虛空孕經等同本見李廓魏世錄觀虛空藏菩薩經一卷 亦名虛空藏觀經亦直云虛空藏菩薩經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象腋經一卷 第四出與無所希望經等同本見李廓錄諸法勇王經一卷 第二出與一切法高王經等同本見李廓錄轉女身經一卷 第四出與無垢賢女經等同本見李廓錄觀普賢菩薩行法經一卷 下注云出深功德經中或無行法字亦云普賢觀 經第三出見僧祐錄五門禪經要用法一卷 第二出與安高出者同本見寶唱錄及僧祐錄新無量壽經二卷 第十出與世高無量壽經及寶積無量壽會等同本見眞寂寺錄郁伽長者所問經一卷 第六出與安玄法鏡經及寶積郁伽長者會等同本見李廓錄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一卷 第三出與法護佛昇忉利天經等同本見李廓錄觀無量壽佛經一卷 第二出與薑良耶舍出者同本見寶唱錄禪秘要經五卷 或無經字一名禪法要元嘉十八年於祇洹寺出或三卷見僧祐錄第三出今有禪秘要經五卷文極交錯不可流行如刪繁錄中述右一十二部一十七卷 五門禪經上七部七卷見在無量壽經下五部十卷闕本沙門曇摩蜜多宋言法秀罽賓人也年六七歲神明澄正每見法事輒自然欣躍其親愛而異之遂令出家罽賓多出聖達屢値明師博貫群經特深禪法所得之要極其微奧爲人沈邃有慧解儀軌詳整生而連眉故世稱連眉禪師焉少好遊方誓志宣化遊歷諸國遂適龜茲未至一日王夢神告曰有大福德人明當入國汝應供養明旦卽勅外司若有異人入境必馳奏聞俄而蜜多果至王自出郊迎延請入宮遂從稟戒盡四事之供蜜多安而能遷不滯利養居數年蜜有去志神又降夢曰福德人捨王去矣王惕然驚覺旣而君臣固留莫之能止遂度流沙進到燉煌於曠野之地建立精舍植柰千株開園百畝房閣池林極爲嚴淨頃之復適涼州仍於公府舊寺更營堂宇學徒濟濟禪業甚盛常以江左多民志欲傳法以元嘉元年展轉至蜀俄而出峽停止荊州於長沙寺造立禪館翹誠懇惻祈請舍利旬有餘日遂感一枚衝器出聲放光滿室門徒道俗莫不更增勇猛人百其心居頃之沿流東下至于建業初上中興寺晚憩祇洹其道聲素著傾都禮訊自宋文袁皇后及皇子公主莫不設齋桂宮請戒椒掖參候之使旬日相屬從元嘉元年甲子至十八年辛巳譯虛空藏神呪等經一十二部常以禪道教授學徒凡所歸投不遠千里四輩遠近皆號大禪師焉會稽太守孟顗深信眞諦以三寶爲己任素好禪味敬心慇重及臨浙河請與同遊乃於酇縣之山建立塔寺東境舊俗多趣巫祝及妙化所移比屋歸正自西徂東無思不服後還建業憩定林下寺禪師天性凝靜雅愛山水以爲鍾山鎭嶽特美嵩華常歎下寺基構未窮形勝於是乘高相地揆卜山勢斬石刊木營建上寺殿房禪室肅然深遠實依俙鷲巖髣髴祇樹矣於是息心之衆萬里來集諷誦肅邕望風成化爰自西域至于南土凡所遊履靡不興造檀會敷陳教法初禪師之發罽賓也有迦毘羅神衛送遂至龜茲於中路欲反乃現形告辭禪師曰汝神力通變自在遊處將不相隨共往南方語畢卽收影不見遂遠從至于楊都故仍於上寺圖像著壁迄至于今猶有聲影之驗潔誠祈福莫不亨願以元嘉十九年七月六日卒于上寺春秋八十有七道俗四部行哭相趍仍葬于鍾山宋熙寺前無盡意菩薩經六卷 初題云大集經中無盡意所說不可盡義品第二十二亦直云無盡意經亦名阿差末經第四出與法護阿差末等同本見李廓錄法華三昧經一卷 法華支流見長房錄廣博嚴淨不退轉輪經四卷 第三出或六卷或直云廣博嚴淨經亦直云不退轉法輪經與法護阿惟越致遮經等同本元嘉四年出見宋齊錄及僧祐錄四天王經一卷 見僧祐錄及高僧傳普曜經八卷第三出或六卷或四卷與蜀普曜竺法護普曜及唐譯方廣莊嚴竝同本見宋齊錄及僧祐錄高僧傳等淨度三昧經一卷 初出見長房錄菩薩瓔珞本業經二卷 第二出見長房錄生經五卷 第二出與法護出者同本房云見別錄善德優婆塞經一卷 見長房錄阿那含經二卷 見長房錄右一十部三十一卷 四天王經上四部一十二卷見在普曜經下六部一十九卷闕本沙門釋智嚴西涼州人弱冠出家便以精勤著稱納衣宴坐蔬食永年每欲博事名師廣求經誥遂周流西國進到罽賓入摩天陁羅精舍從佛馱先比丘諮受禪法漸染三年功踰十載佛馱先見其禪思有緖特深器異彼諸道俗聞而歎曰秦地乃有求道沙門矣始不輕秦類敬接遠人時有佛陁跋陁羅比丘亦是彼國禪匠嚴乃要請東歸欲傳法中土跋陁嘉其懇至遂共東行踰越歲時達于關內恒相依附共止長安頃之跋陁撗爲秦僧所擯嚴與西來徒衆竝分散出關仍憩山東精舍坐禪誦經力精修學晉義熙十三年宋武西伐姚泓剋捷旋旆塗出山東時始興公王恢從駕遊觀山川至嚴精舍見其同志三僧各坐繩牀禪思湛然恢乃彈指三人開目俄而還閉不與交言恢心敬其奇訪諸耆老皆云隱居積歲未嘗輒出恢卽啓宋武延請還都莫肯行者屢請旣至二人推嚴隨行恢道懷素篤禮事甚備還都卽住始興寺嚴性虛靜志避囂塵恢乃於東郊之際更起精舍卽枳園寺也嚴前還於西域所得梵本衆經未及譯寫到元嘉四年丁卯乃共沙門寶雲譯出無盡意等經十部嚴在寺不受別請常分衛自資道化所被幽顯咸服嚴淸素寡欲隨受隨施少而遊方無所滯著稟性沖退不自陳敍故雖多美行世無得而盡傳嚴昔未出家時曾受五戒有所虧犯後入道受具足常疑不得戒每以爲懼積年禪觀而不能自了遂更汎海重到天竺諮諸明達値羅漢比丘具以事問羅漢不敢判決乃爲嚴入定往兜率宮諮啓彌勒彌勒答云得戒嚴大喜躍於是步歸行至罽賓無疾而卒時年七十八彼國凡聖燒身各處嚴雖戒操高明而實行未辯始移尼向凡僧墓地而尸重不起改向聖墓則飄然自輕嚴弟子智羽智遠故從西來報此徵瑞俱還外國以此推嚴信是得道人也但未知果向中間若深淺耳調伏衆生業經 出大集經一音顯正法經 或云一音演正法經出悲華經善德婆羅門問提婆達多經 出大雲經毘羅三昧經二卷 祐等諸錄皆注爲疑大周錄中刊之爲正今尋文言淺鄙義理疏遺故入疑科用除稗穢調伏衆生等四部五卷長房等錄皆云嚴譯今以前三別生後一疑僞今爲實錄故竝刪之佛本行經七卷 或云佛本行讚傳於六合山寺出或云五卷見僧祐寶唱內典等錄高僧傳云佛本行讚經新無量壽經二卷 永初二年於道場寺出一錄云於六合山寺出第九譯與寶積無量壽會等同本見道慧僧祐等錄淨度三昧經二卷 第二出見竺道祖雜錄付法藏經六卷 初出見李廓錄右四部一十七卷 前一部七卷見在後三部十卷闕本沙門釋寶雲涼州人也弱年出家精勤有學行志韻剛潔不偶於世故少以直方純業爲名而求法懇惻忘身殉道誓欲躬睹靈迹廣尋經教以晉隆安之初遠適西域與法顯智嚴先後相隨涉履流沙登踰雪嶺勤苦艱至不以爲難遂歷于塡天竺諸國備睹靈異乃經羅剎之野聞天鼓之音釋迦影迹多所瞻禮雲在外域遍學梵書天竺諸國音字詁訓悉皆貫練後還長安隨禪師佛陁跋陁受業修學禪門孜孜不怠及禪師撗爲秦僧所擯雲亦奔亡會廬山遠公解其擯事共歸楊都安止道場寺僧衆以雲志力堅猛弘道絕域莫不披衿諮問敬而受焉初共智嚴同出諸經嚴旣遷化雲獨宣譯以元嘉年中譯佛本行經等四部雲手執梵本口自宣譯華戎兼通音訓允正雲之所定衆咸信服初關中沙門竺佛念善於宣譯於符姚二代顯出衆經江左練梵莫踰於雲故於晉宋之際弘通法藏沙門慧觀等咸友而善之雲性好幽居以保閑寂遂適六合山寺山多荒民俗好草竊雲說法教誘多有改惡禮事供養十室而九頃之道場慧觀臨卒請雲還都摠理寺任雲不得已而還居道場歲許復還六合以元嘉二十六年終於山寺春秋七十有四其遊履外國別有記傳雜阿毘曇心十三卷 第三出見高僧傳及僧祐錄或十四卷右一部一十三卷闕本沙門伊葉波羅宋云自在西域人妙通三藏明解四含以元嘉三年景寅遊於彭城爲北徐州刺史太原王仲德譯雜阿毘曇心譯至擇品緣㝵未竟遂輟但成十卷刺史親自筆受至八年辛未更請求那跋摩續譯都訖成十三卷菩薩善戒經九卷 一名菩薩地或十卷於祇洹寺出見竺道祖僧祐二錄及高僧傳長房等錄竝云善戒經二十卷又云弟子更出二品成三十卷竝非也 菩薩善戒經一卷 優波離問菩薩受戒法見寶唱錄若准祐記將此爲初卷兼前九卷共成十卷然北地經本離之已久不可合之且依舊定菩薩內戒經一卷 見法上錄優婆塞五戒威儀經一卷 見寶唱錄沙彌威儀一卷 或云沙彌威儀經見長房錄四分比丘尼羯磨法一卷 祐云曇無德羯磨亦云雜羯磨元嘉八年於祇洹寺出見僧祐寶唱二錄及高僧傳等亦直云四分羯磨優婆塞五戒相經一卷 一名優婆塞五戒略論元嘉八年於祇洹寺出第一譯見僧祐寶唱二錄及高僧傳龍樹菩薩爲禪陁迦王說法要偈一卷 見唐舊錄善信二十二戒一卷 亦云離欲優婆塞優婆夷具行二十二戒文亦云三歸優婆塞戒祐云三歸及優婆塞二十二戒或云優婆塞戒見高僧傳及僧祐錄經律分異記一卷 見長房錄右一十部一十八卷 龍樹說法要偈上八部一十六卷見在善信二十二戒下二部二卷闕本沙門求那跋摩宋言功德鎧本剎利種累世爲王治在罽賓國祖父呵梨跋陁此云師子賢 以剛直被徙父僧伽阿難此云衆喜 因潛隱山澤跋摩年十四便機見儁達深有遠度仁愛汎博崇德務善其母嘗須野肉令跋摩辦之跋摩啓曰有命之類莫不貪生夭彼之命非仁人矣母怒曰設令得罪吾當代汝跋摩他日煮油誤澆其指因謂母曰代兒忍痛母曰痛在汝身吾何能代跋摩曰眼前之苦尚不能代況三塗耶母乃悔悟終身斷殺至年十八相工見而謂曰君年三十當撫臨大國南面稱尊若不樂世榮當獲聖果至年二十出家受戒洞明九部博曉四含誦經百餘萬言深達律品妙入禪要時號曰三藏法師至年三十罽賓王薨絕無紹嗣衆咸議曰跋摩帝室之胤又才明德重可請令還俗以紹國位群臣數百再三固請跋摩不納乃辭師違衆林拪谷飮孤行山野遁迹人世後到師子國觀風弘教識眞之衆咸謂已得初果儀形感物見者發心後至闍婆國初未至一日闍婆王母夢見一道士飛舶入國明旦果是跋摩來至母敬以聖禮從受五戒母因勸王曰宿世因緣得爲母子我已受戒而汝不信恐後生之因永絕今果王迫以母勅卽奉命受戒染習旣久專精漸篤頃之鄰兵犯境王謂跋摩曰外賊恃力欲見侵侮若與鬪戰傷殺必多如其不拒危亡將至今唯歸命師尊不知何計跋摩曰暴寇相攻宜須禦捍但當起慈悲心勿興害念耳王自領兵擬之旗鼓始交賊便退散王遇流矢傷腳跋摩爲呪水洗之信宿平復王恭信稍殷乃欲出家修道因告群臣曰吾欲躬拪法門卿等更擇明主群臣皆拜伏勸請曰王若捨國則子民無依且歒國兇强恃險相對如失恩覆則黔首奚處大王天慈寧不愍命王不忍固違乃就群臣請三願若許者當留治國一願凡所王境同奉和上二願盡所治內一切斷殺三願所有儲財賑給貧病群臣歡喜僉然敬諾於是一國皆從受戒王後爲跋摩立精舍躬自引材傷王腳指跋摩又爲呪治有頃平復道化之聲播於遐邇鄰國聞風皆遣使要請楊都名德沙門慧觀慧聰等遠挹風猷思欲飡稟以元嘉元年九月面啓文帝求迎請跋摩當卽勅交州刺史令汎舶延致觀等又遣沙門法長道沖道儁等往彼祈請幷致書於跋摩及闍婆王婆多伽等必希顧臨宋境流行道教跋摩以聖化宜廣不憚遊方先已隨商人竺難提舶欲向一小國會値便風遂至廣州故其遺文云業行風所吹遂之於宋境此之謂也文帝知跋摩已至南海於是復勅州郡令資發至都路由始興經停歲許始興有虎丘山山形聳峭峯嶺高絕跋摩謂其髣髴耆闍崛乃改名靈鷲於山寺之外別立禪室去寺數里磬音不聞每至鳴椎跋摩已至或致雨不沾或履泥不濕時衆道俗莫不肅然增敬寺有寶月殿跋摩於殿北壁手自畫作羅云像及定光儒童布髮之形像成之後每夕放光久之乃歇始興太守蔡茂之深加敬仰後茂之將死跋摩躬自往視說法安慰後家人夢見茂之在寺中與衆僧講法實由跋摩化導之力也此山本多虎災自跋摩居之晝行夜往或時値虎以杖按頭弄之而去於是山旅水賓去來無梗盛德歸化者十有七八焉跋摩嘗於別室入禪累日不出寺僧遣沙彌往候之見一白師子緣柱而立亘空彌漫生靑蓮花沙彌驚恐大呼往逐師子豁無所見其靈異無方類多如此後文帝重勅觀等復更敦請乃汎舟下都以元嘉八年正月達于建業文帝引見勞問慇懃因又言曰弟子常欲持齋不殺迫以身殉物不獲從志法師旣不遠萬里來化此國將何以教之跋摩曰夫道在心不在事法由己非由人且帝王與疋夫所修各異疋夫身賤名劣言令不威若不剋己苦躬將何爲用帝王以四海爲家萬民爲子出一嘉言則士女咸悅布一善政則人神以和刑不夭命役無勞力則使風雨適時寒暖應節百穀滋繁桑麻鬱茂如此持齋齋亦大矣不殺亦衆矣寧在闕半日之飡全一禽之命然後方爲弘濟耶帝乃撫凡歎曰夫俗人迷於遠理沙門滯於近教迷遠理者謂至道虛說滯近教者則拘戀篇章至如跋摩法師所言眞謂開悟明達可與談於天人之際矣乃勅住祇洹寺供給隆厚公王英彦莫不宗奉俄而於寺開講法花及十地法席之日軒蓋盈衢觀矚往還肩隨踵接跋摩神府自然妙辯天絕或時假譯人而往復懸悟跋摩卽於祇洹寺譯菩薩善戒經等十部其善戒經長房等錄竝云二十卷下注云後弟子於定林更出二品成三十卷者非也今但九卷或云十卷應是傳寫差誤加其二字僧祐錄中只云十卷故知餘錄傳寫誤也又按高僧傳云祇洹慧義請出菩薩善戒始得二十八品後弟子代出一品成三十品房等錄云續成三十卷者誤之甚也又長房等錄復云跋摩譯雜阿毘曇心十三卷今以伊葉波羅譯出十卷跋摩後續成其十三非謂跋摩更別翻出二處俱載此亦不然今此刪之載於前錄竝文義詳允梵宋弗差影福寺尼慧果淨音等共請跋摩云去六年有師子國八尼至都云宋地先未經有尼那得二衆受戒恐戒品不全跋摩云戒法本在大僧衆發設不本事無妨得戒如愛道之緣諸尼又恐年月不滿苦欲更受跋摩稱云善哉茍欲增明甚助隨喜但西國尼年臘未登又十人不滿且令學宋語別因西域居士更請外國尼來足滿十數其年夏在定林下寺安居時有信者採花布席唯跋摩所坐花彩更鮮衆咸崇以聖禮夏竟還祇洹其年九月二十八日中食未畢先起還閣其弟子後至奄然已終春秋六十有五未終之前預造遺文偈頌三十六行自說因緣云已證二果手自封緘付弟子阿沙羅云我終後可以此文還示天竺僧亦可示此境僧也旣終之後卽扶坐繩牀顏貌不異似若入定道俗赴者千有餘人竝聞香氣芬烈咸見一物狀若龍蛇可長一疋許起於尸側直上衝天莫能名者卽於南林戒壇前依外國法闍毘之四部鱗集香薪成𧂐灌之香油以燒遺陰五色焰起氛氳麗空是時天景澄朗道俗哀歎仍於其處起立白塔欲重受戒諸尼悲泣望斷不能自勝初跋摩至宋文帝欲從受菩薩戒未及諮稟奄而遷化以本意不遂傷恨彌深乃令衆僧譯出其遺文云遺文在傳恐繁故止毘尼摩得勒伽十卷 初卷云薩婆多部毘尼摩得勒伽元嘉十二年乙亥正月於祙陵平樂寺出至九月二十二日訖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雜阿毘曇心論十一卷 或無論字亦云雜阿毘曇經房云雜阿毘曇毘婆沙或十四卷第四譯元嘉十一年甲戌九月於長干寺出周年乃訖見僧祐錄及經序勸發諸王要偈一卷 龍樹菩薩撰第二出見僧祐錄及高僧傳分別業報略一卷 大勇菩薩撰或云大勇菩薩分別業報略集見僧祐錄及高僧傳請聖僧浴文一卷 見僧祐錄及高僧傳右五部二十四卷 前四部二十三卷見在後一部一卷闕本沙門僧伽跋摩宋言衆鎧印度人也少而棄俗淸峻有戒德明解律藏尤精雜心以元嘉十年癸酉步自流沙屆于建業風宇宏肅道俗敬異咸宗而事之號曰三藏法師初景平元年平陸令許桑捨宅建剎因名平陸寺後道場慧觀以跋摩道行純備請住此寺崇其供養以表厥德跋摩共觀起塔三層行道諷誦日夜不輟僧衆歸集道化流布初三藏法師深明戒品將爲影福寺尼慧果等重受具戒是時二衆未備而三藏遷化俄而師子國比丘尼鐵薩羅等至衆乃共請跋摩爲師繼軌三藏祇洹慧義擅步楊都謂爲矯異執志不同親與跋摩拒論翻覆跋摩摽宗顯法理證明允慧義遂迴其剛褊靡然推服乃率其弟子服膺稟戒僧尼受者數百許人宋彭城王義康崇其戒範廣設齋供四衆殷盛傾于都邑頃之名德大僧慧觀等以跋摩妙解雜心諷誦通達先三藏雖譯未及繕寫以十一年九月於長干寺招集學士更請出焉寶雲譯語觀自筆受硏挍精悉周年方就續出摩得勒伽等凡五部跋摩遊化爲志不滯一方旣傳經事畢將還本土衆咸祈請莫之能留以元嘉十九年隨西域賈人舶還外國莫詳其終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一卷第二出與寶積勝鬘夫人會等同本元嘉十三年八月十四日於丹陽郡出寶雲傳語慧觀筆受見道慧僧祐李廓等錄大方廣寶篋經三卷 第四出或二卷與文殊現寶藏經等同本見李廓錄相續解脫地波羅蜜了義經一卷 或二卷亦名解脫了義經亦直云相續解脫經於東安寺出是解深密經後二品見道慧僧祐李廓法上等四錄高僧傳云於荊州出楞伽阿跋多羅寶經四卷 第二出元嘉二十年於道場寺譯慧觀筆受與入楞伽及大乘入楞伽經等同本見道慧僧祐法上等錄高僧傳云丹陽郡出菩薩行方便境界神通變化經三卷初出與大薩遮尼乾子經同本或無境界字見李廓錄老母女六英經一卷 亦云老母經第三出與老女人經等同本房云見別錄申日兒本經一卷 或云申兒本第三出與月光童子經等同本房云見別錄錄云申兜本誤也阿難陁目佉尼呵離陁經一卷 或云出無量門持經第六譯與無量門微密持經等同本房云見別錄房錄別載出無量門持經者誤也央崛魔羅經四卷 道場寺出見道慧僧祐法上等錄高僧傳云於荊州辛寺出大法鼓經二卷 東安寺出見道慧僧祐李廓法上等四錄大意經一卷 房云見別錄十二頭陁經一卷 房云見別錄樹提伽經一卷 房云見別錄雜阿含經五十卷 於瓦官寺譯梵本法顯齎來高僧傳云祇洹寺出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鸚鵡經一卷 亦名兜調經出中阿含第四十四異譯房云見別錄鞞摩肅經一卷 出中阿含第五十七異 譯四人出現世間經一卷 出增一阿含第八卷異譯房云見別錄十一想思念 如來經一卷 或云十一思惟念如來經出增一阿含第四十八初異譯房云見別錄阿遬達經一卷 第三出與玉耶經等同本房云見別錄過去現在因果經四卷 於荊州辛寺出第六譯與修行本起瑞應本起等同本見始興及李廓僧祐等錄摩訶迦葉度貧母經一卷 房云見別錄十二品生死經一卷 房云見別錄罪福報應經一卷 一名輪轉五道罪福報應經亦云輪轉五道經亦云五道輪經房云見別錄衆事分阿毘曇論十二卷 或無論字共弟子菩提耶舍譯初出與唐譯品類足論同本房錄不題所出四品學法經一卷 或無經字房云見別錄賓頭盧突羅闍爲優陁延王說法經一卷 亦云賓頭盧爲王說法經房云見別錄上見存已後闕虛空藏菩薩經一卷 第二出與姚秦佛陁耶舍所出虛藏經等同本房云見別錄無量義經一卷 初出與簫齊曇摩伽陁耶舍出者同本見李廓錄諸法無行經一卷 第二出與羅什所出二卷者及諸法本無經同本房云見別錄小無量壽經一卷 或無小字第二出與羅什阿彌陁及唐譯稱讚淨土同本孝建年出一名阿彌陁見道慧僧祐二錄高僧傳云於荊州出房錄別存阿彌陁經者誤也八吉祥經一卷 第三出與支謙八吉祥呪法護八陽神呪經等同本元嘉二十九年正月三日於荊州城內爲司空荊州刺史南譙王劉義宣出六日訖見僧祐寶唱二錄無崖際持法門經一卷 第二出與聖堅出者及尊勝菩薩所問經同本房云見別錄貧子須賴經一卷 第四出與白延支謙等出者同本見李廓錄現在佛名經三卷 亦名華敷現在佛名第二出與稱楊諸佛功德經等同本元嘉二十九年正月七日於荊州爲南譙王出見始興錄及高僧傳淨度三昧經三卷 第三出見李廓錄無憂王經一卷 於荊州辛寺譯見吳錄及僧祐錄本行六波羅蜜經一卷 房云見別錄異處七處三觀經一卷 或無異處字出雜阿含異譯房云見別錄雜藏經一卷 第四出與鬼問目連經等同本房云見別錄目連降龍王經一卷 或無王字或云降龍經或云降龍王經第二出與龍王兄弟經同本房云見別錄曰難經一卷 一云越難經第三出與聶承遠越難經等同本房云見別錄釋六十二見經四卷 房云見別錄祐錄云一卷請般特比丘經一卷 或作般特亦云般時房云見別錄十二頭陁經一卷 房云見別錄阿那律七念章經一卷 房云見別錄十報法三統略經一卷 房云見別錄六齋八戒經一卷 房云見別錄阿蘭若習禪經二卷 第二出與羅什坐禪三昧經同本見李廓錄菩薩訶欲經一卷 第二出與羅什出者同本房云見別錄那先經一卷 第二出與二卷者同本房云見別錄十二遊經一卷 第二出房云見舊錄第一義五相略集一卷 於東安寺出見僧祐錄高僧傳云於荊州辛寺出右五十二部一百三十四卷 賓頭盧上二十六部一百卷見在虛空藏下二十六部三十四卷闕本沙門求那跋陁羅宋言功德賢中印度人也以大乘學故世號摩訶衍本婆羅門種幼學五明諸論天文醫方呪術靡不博貫後遇見雜心尋讀驚悟乃深崇佛法焉其家世外道禁絕沙門乃捨家潛遁遠求師匠卽落髮改服專志學業及受具戒博通三藏爲人慈和恭順事師盡勤頃之辭小乘師進學大乘大乘師試令探取經匣卽得大品華嚴師喜而歎曰汝於大乘有重緣矣於是讀誦講義莫能詶抗進受菩薩戒法乃奉書父母勸歸正法曰若專守外道則雖還無益若歸依三寶則長得相見其父感其至言遂棄邪從正跋陁前到師子諸國皆傳送資供旣有緣東方乃隨舶汎海中塗風止淡水復竭擧舶憂惶跋陁曰可同心幷力念十方佛稱觀世音何往不感乃密誦呪經懇到禮懺俄而信風暴至密雲降雨一舶蒙濟其誠感如此元嘉十二年乙亥至廣州時刺史車朗表聞文帝遣使延接旣至楊都勅名僧慧嚴慧觀於新亭郊勞見其神情朗徹莫不虔敬雖因譯交言而欣若傾蓋初住祇洹寺俄而文帝延請深加崇敬琅瑘顏延之通才碩學束帶造門於是宋都遠近冠蓋相望大將軍彭城王義康丞相南譙王義宣竝師事焉頃之衆僧共請出經於祇洹寺集義學諸僧譯出雜阿含經東安寺出法鼓經後於丹楊郡譯出勝鬘楞伽經徒衆七百餘人寶雲傳譯慧觀執筆往復諮扸妙得本旨後譙王鎭荊州請與俱行安止辛寺更創殿房卽於辛寺出無憂王過現因果小無量壽央崛魔羅相續解脫波羅蜜了義現在佛名第一義五相略八吉祥等諸經幷前所出凡五十二部多是弟子法勇傳度譙王欲請講華嚴等經而跋陁自忖未善宋語愧歎積旬卽旦夕禮懺請乞冥應夢有人白服持劍擎一人首來至其前曰何故憂耶跋陁具以事對答曰無所多憂卽以劍易首更安新頭語令迴轉曰得無痛耶答曰不痛豁然便覺心神喜悅旦起言義皆備領宋語於是就講弟子法勇傳譯僧念爲都講雖因譯人而玄解往復元嘉將末譙王屢有怪夢跋陁曰都中將有禍亂未及一年而二凶搆逆及孝建之初譙王陰謀逆節跋陁顏容憂慘而未及發言譙王問其故跋陁諫爭懇切乃流涕而出曰必無所冀貧道不容扈從譙王以其物情所信乃逼與俱下梁山之敗火檻轉迫去岸懸遠判無濟理唯一心稱觀世音手捉笻竹杖投身江中水齊至膝以杖刺水水深流駛見一童子尋後而至以手牽之顧謂童子汝小兒何能度我恍惚之間覺行十餘步仍得上岸卽脫納衣欲賞童子顧覓不見擧身毛豎方知神力焉王玄謨督軍梁山孝武帝駿勅軍中得摩訶衍善加料理驛信送臺俄而尋得合舸送都孝武卽時引見顧問委曲曰企望日久今始相遇跋陁對曰旣染舋戾分爲灰粉今得接見重荷生造勅問竝譙爲賊答曰出家之人不預戎事然張暢宗靈秀等竝是驅逼貧道所明但不圖宿緣乃逢此事孝武曰無所懼也是日勅住後堂供施衣物給以人乘初跋陁在荊州十載每與譙王書疏無不記錄及軍敗簡撿無片言及軍事者孝武明其純謹益加禮遇後因閑談聊戲問曰念丞相不答曰受供十年何可忘德今從陛下乞願爲丞相三年燒香帝悽然動容義而許焉及中興寺成勅令移住爲開三閒房後於東府宴會王公畢集勅見跋陁未及淨髮白首皓然孝武遙望顧謂尚書謝莊曰摩訶衍聰明機解但念老期已至朕試問之其必悟人意也跋陁上階因迎謂之曰摩訶衍不負遠來之意但有一在卽應聲答曰貧道遠歸帝京垂三十載天子恩遇銜愧罔極但七十老病唯一死在帝嘉其機辯勅近御而坐擧朝屬目後於秣陵界鳳凰樓西起寺每至夜半輒有推戶而喚視不見人衆屢魘夢跋陁燒香呪願曰汝宿緣居此我今起寺行道禮懺常爲汝等若住者爲護寺善神若不能居各隨所安旣而道俗十餘人同夕夢見鬼神千數皆荷擔移去寺衆遂安大明七年天下宂旱祈禱山川累月無驗帝遂請令祈雨必使有感如其無效不須相見跋陁答曰仰馮三寶陛下天威冀必降澤如其無獲不復重見卽往北湖釣臺燒香祈請不復飮食默而誦經密加秘呪明日晡時西北角雲起初如車蓋日在桑榆風震雲合連日降雨明旦公卿入賀勅見慰勞䞋施相續跋陁自幼以來蔬食終身常執持香爐未嘗輟手每食輒分食飛鳥乃集手取食至明帝之世禮供彌盛到太始四年正月覺體不平便預與明帝及公卿等告辭臨終之日延佇而望云見天華聖像禺中遂卒春秋七十有五明帝慟惜賻送殷厚公卿會葬榮哀備焉般泥洹經一卷 或無般字孝建元年於辛寺譯見道慧宋齊錄今尋此單卷泥洹上下文句非是跋陁所翻似是謙護等譯今尋得二卷且附東晉錄中釋摩男本經一卷 吳支謙譯三藏法師自述喩一卷 非梵本出故亦刪之當來選擇諸惡世界經過去行檀波羅蜜經 上二經竝出悲華經殺龍濟一國經 出六度經三因緣經 出長阿含三小劫經 出樓炭經佛入甘露門正意經 出大十二門經阿蘭那經 出中阿含舍利弗等比丘得身作證經 出雜阿含那賴經 墮珠著海中經舅甥經 舍利弗般泥洹經負債爲牛經君臣經 上六經竝出生經四食經 小乘雜抄阿難見妓樂啼哭無常經佛往慰迦葉病經佛命阿難詣最勝長者經二僑士經目連弟布施望卽報經 上五經竝出出曜經般泥洹等二十三部二十三卷或是別生抄經或非跋陁所出今爲實錄故摠刪之觀世音菩薩受記經一卷 一名觀世音受決經第三出與西晉法護道眞出者同本見王宗僧祐李廓法上等錄及高僧傳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法勇梵名曇無竭本姓李氏幽州黃龍國人也幼爲沙彌便修苦行持戒諷經爲師所異嘗聞法顯寶雲諸僧躬踐佛國慨然有忘身之誓遂以宋永初之元招集同志沙門僧猛曇朗之徒二十五人共齎幡蓋供養之具發迹北土遠適西方初至河南國仍出海西郡進入流沙到高昌郡經歷龜茲沙勒諸國前登蔥嶺雪山棧路險惡驢馬不通增冰峨峨絕無草木山多瘴氣下有大江浚急如箭於東西兩山之脅繫索爲橋相去極遠十人一過到彼岸已擧煙爲識後人見煙知前已度方得更進若久不見煙則知暴風吹索人墮江中行蔥嶺三日方過復上雪山懸崖壁立無安足處石壁皆有故弋孔處處相對人各執四弋先拔下弋手攀上弋展轉相代三日方過乃到平地相待料撿同侶失十二人進至罽賓國禮拜佛鉢停歲餘學梵書竟便解梵語求得觀世音受記經梵文一部無竭同行沙門餘十三人西行到新頭那提河此云師子口緣河西入月氏國禮拜佛肉髻骨及睹白拂木舩後至檀特山南石留寺住僧三百餘人雜三乘學無竭便停此寺受具足戒天竺沙門佛陁多羅此云覺救彼方衆僧云其已得道果無竭請爲和上漢沙門志定爲阿闍梨於寺夏坐三月日復北行至中天竺曠遠之處常齎石蜜爲糧其同侶八人路亡五人俱行屢經危棘無竭所齎觀世音經常專心繫念進涉舍衛國中野逢山象一群無竭稱名歸命卽有師子從林中出象驚怖奔走後渡恒河復値野牛一群鳴吼而來將欲害人無竭歸命如初尋有大鷲飛來野牛驚散遂得免害其誠心所感在險克濟皆此類也後於南天竺隨舶汎海達廣州所歷事迹別有記傳元嘉末年達于楊都手自宣譯觀世音受記經一部今見傳于世後不知所終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一卷 亦云彌勒上生經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僧祐錄云先在高昌郡譯出於後齎還諫王經一卷 初出亦云大小諌王經與唐譯勝軍王經及勝光天子經同本房云見別錄治禪病秘要經一卷 或云治禪病秘要法無經字或云禪要秘密治病經或二卷云出雜阿含孝建二年九月八日於竹園寺出其月二十五日訖見僧祐寶唱等錄淨飯王涅槃經一卷 或加般字第二出與法炬出者同本房云見別錄進學經一卷 或云勸進學道經第二出與支謙等出者同本房云見別錄八關齋經一卷 異出本房云見別錄五無返復經一卷 一名五反覆大義經或作附字房云見別錄佛大僧大經一卷 二兒名房云見別錄耶祇經一卷 房云見別錄末羅王經一卷 房云見別錄摩達國王經一卷 房云見別錄或無國王字旃陁越國王經一卷 或無國王字房云見別錄五恐怖世經一卷 或云五恐怖經房云見別錄弟子死復生經一卷 或云死亡更生房云見別錄迦葉禁戒經一卷 一名摩訶比丘經亦名眞僞沙門經第二出房云見別錄菩薩誓經一卷 第五出與長者子制經等同本房云見別錄中陰經一卷 房云見別錄觀世音觀經一卷 先在高昌郡譯出於彼齎還見僧祐錄波斯匿王喪母經一卷 或云波斯匿王經 祐云波邪匿王房云見別錄出增一阿含第十八卷異譯佛母般泥洹經一卷 孝建二年於鐘山定林上寺出一名大愛道般泥洹經見僧祐錄出增一阿含第五十卷異譯弟子慢爲耆域述經一卷 亦云弟子爲耆域述慢戒羽弟子戲誕經第四出與阿難問事佛吉凶經等同本房云見別錄長者音悅經一卷 第二出與支謙出者同本房云見別錄五苦章句經一卷 第二出與曇無蘭出者同本房云見別錄分和檀王經一卷 第二出與竺律炎三摩竭經同本房云見別錄弟子事佛吉凶經一卷 祐云弟子問事佛吉凶經房云見別錄生死變識經一卷 今疑是藏中見正經異名房云見別錄優婆塞五戒經一卷 亦云五相經第二出與五戒相經同本房云見別錄賢者律儀經一卷 亦云威儀房云見別錄右二十八部二十八卷 迦葉禁戒上一十五部一十五卷見在菩薩誓經下一十三部一十三卷闕本居士沮渠京聲卽北涼河西王蒙遜從弟安陽侯也魏倂涼後南奔于宋晦志卑身不交世務常遊止塔寺以居士自畢丹陽尹孟顗見而善之請與相見一面之後雅相崇愛亟設供饌厚相優贍京聲以孝武帝孝建二年乙未於楊都竹園寺及鍾山定林上寺譯彌勒上生經等二十八部通習積久臨筆無滯京聲居絕妻孥無欲榮利從容法侶宣通經典是以建業白黑咸敬而嘉焉以大明之末遘疾而卒普明王經梵摩皇經 上二經竝出六度集𡡉夷比丘經優婆塞五法經 上二經竝出中阿含釋種問優婆塞經 出雜阿含淸信士阿夷扇經 亦云阿夷扇持父子經出生經五百梵志經 群錄注疑普明王等七經六是別生一云疑僞今爲實錄故竝刪之閻羅王五天使者經一卷 一名鐵城泥黎經見長房錄出中含第十二異譯瞿曇彌記果經一卷 出中阿含第二十八異譯見長房錄長者子六過出家經一卷 出增一阿含第二十七卷異譯見長房錄佛母般泥洹經一卷 出增一阿含第五十卷異譯見長房錄貧窮老公經一卷 或云貧老經第二出見長房錄懈怠耕者經一卷 舊錄云懈怠耕兒經見長房錄請賓頭盧法一卷 或加經字見長房錄善生子經一卷 亦云異出六向拜經見長房錄出中阿含第三十三卷異譯佛涅槃後諸比丘經一卷 亦云力士跋陁經云出雜阿含見長房錄譬喩經一卷 見長房錄右一十部一十卷 請賓頭盧上七部七卷見在善生子經下三部三卷闕本沙門釋慧簡未詳何許人也以孝武帝大明元年丁酉於鹿野寺譯五天使者等經十部眞僞沙門經 與京聲所出迦葉禁戒經文句全同乃是彼經異名錄家錯上藥師琉璃光經 亦云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出大灌頂經祐錄注爲疑經者非釋迦畢罪經殺身濟賈人經 上二經竝出六度集阿難見水光瑞經 一云水光經大乘抄經商人求財經瞿曇彌經 上二經竝出中阿含舍衛城中人喪子發狂經學人亂意經 亦云母子作比丘比丘尼亂意經上二經竝出增一阿含大力士出家得道經 亦云力士跋陁經二老男女見佛出家得道經上二經竝出雜阿含旃闍摩暴志謗佛經 出生經竊爲沙門經獵師捨家學道經 上二經竝出出曜經呪願經 祐載僞錄眞僞沙門等一十五部長房等錄竝云慧簡所出今以多是別生等經故刪之不存也菩薩念佛三昧經六卷 或直云念佛三昧經或五卷第一譯與隋笈多出者同本是大集別分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無量門破魔陁羅尼經一卷 或直云破魔陁羅尼經第七譯見僧祐錄與支謙無量門微密持經等同本右二部七卷其本竝在沙門功德直西域人也道契旣廣善誘日新以孝武帝大明六年壬寅遊至荊州寓禪房寺沙門玄暢請出念佛三昧等經二部暢刊正文義詞旨婉密而暢舒手出香掌中流水莫之測也後適成都止大石寺卽是阿育王塔乃手自作金剛密迹等十六神像傳至于今直留荊數年後不知所終矣十誦羯磨比丘要用一卷 或云略要羯磨法房云二卷祐云一卷見僧祐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僧璩姓朱吳國人出家爲僧業弟子摠悅衆經尤明十誦兼善史籍頗製文藻始住吳虎丘山孝武欽其風聞勅出楊都爲僧正悅衆止于中興寺璩以大明七年癸卯撰十誦羯磨一部十誦比丘尼戒本一卷 亦云十誦比丘尼波羅提木叉戒本或云十誦比丘尼大戒見僧祐寶唱二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法穎俗姓索氏燉煌人十三出家爲法香弟子住涼州公府寺與同學法力俱以律藏知名穎伏膺已後學無再請記在一聞硏精律部博涉經論元嘉末至建業止新亭寺孝武以穎學業兼明勅爲都邑僧正後辭任還多寶寺常習定閑房亦時開律席後移住長干寺以明帝彧太始年中集出十誦尼戒一部兼出羯磨流行於代無盡意經十卷 第五出與阿差末經等同本見始興僧祐寶唱等錄阿述達菩薩經一卷 第四出興寶積無畏德會等同本太始年於廣州出見始興寶唱等錄海意經七卷 見始興僧祐寶唱等錄如來恩智不思議經五卷 見始興僧祐寶唱等錄寶頂經五卷 見始興僧祐寶唱等錄三密底耶經一卷 宋言賢人用律經見始興僧祐寶唱等錄右六部二十九卷其本竝闕沙門竺法眷印度人也志性弘簡開利爲務以明帝彧太始年中於廣州譯無盡意等經六部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二卷一名決了諸法如幻化三昧經第二出與漢嚴佛調譯者及大般若那伽室利分竝同本見始興錄右一部二卷其本見在沙門釋翔公亦云朔公在南海郡譯濡首菩薩經一部群錄直云宋世不顯年名未詳何帝佛藏大方等經一卷 亦名問明顯經是華嚴經明難品異譯見始興錄及法上錄瓔珞本業經二卷 一名菩薩瓔珞經第三出見始興及法上錄右二部三卷其本竝闕沙門釋道嚴於宋世譯佛藏方等經等二部群錄直云宋世出不顯帝年梵女首意經一卷 第二出見始興錄及趙錄法上錄空淨三昧經一卷 亦云空淨天感應三昧經第二出見始興錄及趙錄法上錄勸進學道經一卷 亦名勸進經與梁史共出第三譯右三部三卷其本竝闕沙門釋勇公於宋世譯梵女首意等經三部群錄雖云宋世不顯帝年車匿經 亦名車匿本末經出六度集中是尸阿遍王經異名群錄雖云勇公所出今以是別生抄經故刪之不存也寂調音所問經一卷 一名如來所說淸淨調伏經與西晉法護文殊淨律經等同本第四出見始興錄及法上錄樂瓔珞莊嚴方便經一卷 一名大乘瓔珞莊嚴經亦名轉女身菩薩經第四出與西晉法護順㩲方便經等同本見始興錄及僧祐法上錄右二部二卷 前寂調音經見在後樂瓔珞經闕本沙門釋法海於宋世譯寂調音等經二部群錄注云宋世譯出旣不顯年未詳何帝月燈三昧經一卷 一名文殊師利菩薩十事行經一名逮慧三昧經出大月燈經第七卷異譯見趙錄及法上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先公於宋世譯月燈經一部群錄注云宋世不顯譯年未詳何帝彌沙塞律抄一卷 見寶唱錄右一部一卷闕本沙門僧伽跋彌師子國人也譯彌沙塞律抄一部大周錄中指寶唱錄不言帝代其寶唱錄尋本未獲且寄於宋錄以彰有據耳新集失譯諸經如來智印經一卷 一名諸佛法身第二出與慧印三昧經同本老母經一卷 第二出與老女人經等同本法滅盡經一卷甚深大迴向經一卷佛爲黃竹園老婆羅門說學經一卷出中阿含第四十卷異譯優波夷墮舍迦經一卷 出中阿含第五十五異譯或無迦字邪見經一卷出中阿含第六十卷異譯大沙門百一羯磨法一卷 或云大沙門羯磨法出十誦律迦丁比丘說當來變經一卷 或直云迦丁比丘經已後闕本十方佛名經一卷本作十萬疑錯 華嚴淨經一卷三十七品經一卷 祐載兩本竝云異出今且存一七佛各說偈一卷乳王如來經一卷 或無乳王經今疑與乳光佛經同本現在十方佛名經一卷過去諸佛名經一卷千五百佛名經一卷五百七百佛名經一卷 或云五百七十觀世音成佛經一卷文殊因緣經一卷文殊本願經一卷文殊觀經一卷 彌勒須河經一卷導師問佛經一卷颰陁菩薩百二千難經一卷持身菩薩經一卷 或云持身經賢首菩薩二百問經一卷金剛女菩薩經一卷善意菩薩經一卷菩薩從兜率天降中陰經一卷菩薩行喜經一卷菩薩淨本業經一卷菩薩初業經一卷菩薩四事經一卷菩薩十六願經一卷菩薩五十德行經一卷菩薩教法經一卷 菩薩正行經一卷菩薩出入諸則經一卷菩薩母姓字經一卷菩薩家姓經一卷 菩薩比丘經一卷菩薩經一卷 今疑本上脫字菩薩作六牙象本事經一卷菩薩師子王經一卷浴像功德經一卷 與新譯者梵本同未詳同別浴僧功德經一卷陁鄰尼目佉經一卷 今疑卽是阿難陁目佉尼經禮敬諸塔經一卷般若波羅蜜偈經一卷佛淸淨偈經一卷太子出國二十偈一卷佛十力偈一卷 十方佛神呪一卷四天王神呪一卷十二因緣結縷神呪一卷摩訶神呪一卷 移山神呪一卷降魔神呪一卷 威德陁羅神呪一卷本作成字錯也和魔結神呪一卷鳩摩迦葉經一卷 與僮迦葉解難經同本出長阿含第七卷異譯法經錄云出中阿含第十六卷異譯出要經二十卷 行道經七卷長阿含經三卷祐云疑是殘缺長阿含經 弘道經二卷四天王經一卷 祐云後有呪似人所附諸天阿須倫鬪經一卷金色女經一卷 雜譬喩中有祐云異出本治禪鬼魅不安經一卷瞻波國佛說戒經一卷佛在誓枝山說法經一卷佛三毒事經一卷 佛七事經一卷佛問和伏經一卷 佛意行經一卷因佛生三心經一卷 佛聚經一卷七佛本緣經一卷釋迦文枝鉢經一卷 佛袈裟經一卷佛大衣經一卷 迦葉解經一卷迦葉因緣經一卷 舍利弗問署經一卷迦葉獨證自誓經一卷舍利弗歎 度女人經一卷舍利弗生西方經一卷舍利弗目連泥洹經一卷 今疑是生經中舍利弗般泥洹經目連所問經一卷 目連因緣經一卷阿難見變經一卷 難陁經一卷阿那含七念經一卷羅漢菩子經一卷賓頭盧取鉢經一卷愛行比丘經一卷 愛身比丘經一卷栴比丘經一卷 善星比丘經一卷六群比丘經一卷 自在王比丘經一卷羅邪達比丘經一卷比丘和須蜜經一卷玄戒未來比丘經一卷 今疑玄字錯比丘法相經一卷 釋種童子經一卷尊者婆蹉律經一卷罽賓二沙彌經一卷 沙彌持戒經一卷海洲優婆塞會經一卷賢者雜事經一卷 弟子修學經一卷弟子行澤中遇賊劫經一卷弟子精進經一卷迦提羅越問五戒經一卷那羅延天王經一卷毘沙門天王經一卷 四大天王經一卷諸天壽經一卷 魔現成佛經一卷魔王誡疑是試字經一卷 淨飯王經一卷佛葬閱頭檀王經一卷阿育王作小兒時經一卷 今疑出育王傳小阿育王經一卷優塡王照逝心女經一卷 今疑是大乘藏中優塡王經迦夷王頭布施經一卷果尊王經一卷 佛居士經一卷降恐王經一卷今疑恐字錯 摩羅王經一卷摩登王經一卷 舍夷國經一卷羅提坻王經一卷或作國王羅提經摩訶惟越王經一卷流沙王經一卷 十四王經一卷王以竹施經一卷 勸王持五戒經一卷太子旃舍羅差經一卷長者盛德經一卷 長者法心經一卷長者仁賢經一卷長者洹羅越經一卷佛問淳陁長者受樂淨行經一卷婆羅門問事經一卷婆羅門等爭說經一卷六師詣波斯匿王經一卷尼揵齋經一卷 明星梵志經一卷兜率梵志經一卷 梵志拔陁經一卷梵志計火淨經一卷 梵志問疑經一卷梵志意經一卷 梵志好母經一卷梵志婬女經一卷 梵志六師經一卷天后賢女經一卷 德女問經一卷貧女少施獲弘報經一卷彌家女經一卷二人作沙門弟斷兄舌經一卷氣噓殺旃陁羅經一卷眼能視殺人經一卷孤獨三兄弟經一卷 阿劍他經一卷不蘭伽經一卷 小申日經一卷波羅奈媈四姓經一卷 或作婦字大姓家主叩書不經一卷提謂經一卷强羅經一卷 金轉龍王經一卷蘇曷龍王經一卷 三龍王經一卷虎王經一卷 蝎王經一卷毒龍蛇施經一卷放牛法經一卷今疑是藏中放牛經 養牛經一卷閻羅王經一卷 今疑是藏中閻羅王五天使者經餓鬼經一卷 鐵杵泥犂經一卷緣經一卷 藥經一卷 苦慧經一卷慧達經一卷 法足經一卷身數經一卷 選福經一卷布施經一卷 助善經一卷古來經一卷今疑是藏中古來世時經 孝順經一卷緣本經一卷今疑是藏中緣本致經 度世經一卷法藏經一卷 明住經一卷善憩經一卷 植質經一卷名相經一卷 怪異經一卷滅怪經一卷 本鉢經一卷案鉢經一卷 諸法經一卷與脫經一卷 伏願經一卷寶見經一卷 眞提經一卷明義經一卷 見在經一卷釋論一卷祐云疑是大智度論抄之一卷 雜事經一卷旨解經一卷祐云疑卽義旨雜解 釋學經一卷度道俗經一卷 諸福德經一卷說人身經一卷 施色力經一卷色入施經一卷 戒法律經一卷未生火經一卷 未生災經一卷念佛品經一卷 須彌山經一卷成敗品經一卷經目或云成敗品第四似是樓炭經之一品今撿樓炭無此品世間珍寶經一卷舊錄云世間所望珍寶經現道神足經一卷 成行無想經一卷悔過除罪經一卷 深自僥倖經一卷布施持戒經一卷 生西方齋經一卷造浴室法經一卷 有疑往解經一卷長阿含方法經一卷令人孝有德經一卷人於出家者經一卷心應深貪慕經一卷地水火風空經一卷求欲者除意經一卷持戒教人殺生經一卷七月十五日臘法經一卷功高憍慢有二輩經一卷歡喜布施有五事經一卷或作勸字錯三夢 經一卷 三悔處經一卷三乘無當經一卷 四署經一卷四等意經一卷 四政斷經一卷四厚經一卷 五署經一卷五穀世經一卷 五亂經一卷五耶經一卷 六禪經一卷六度六十行經一卷六輩阿惟越致經一卷七衆經一卷七流經一卷 七使經一卷七輩人撗死經一卷七歲作善經一卷八方萬物無常經一卷 八雙經一卷九結經一卷 九惱經一卷九道觀身經一卷 十部僧經一卷十二意經一卷 十二阿練若高行經一卷十二部經名一卷 三十二僧那經一卷三十四意經一卷 五十德相經一卷六十品經一卷 六十二疑經一卷七十二觀經一卷 百法經一卷惟日三昧經一卷 月電三昧經一卷無言三昧經一卷 阿和三昧經一卷禪行法經一卷 今疑是藏中禪行法想經須彌山譬經一卷 日月譬經一卷海水譬經一卷 藥草喩經一卷功德天譬經一卷 賢劫譬經一卷金剛譬經一卷 寶藏譬經一卷明珠譬經一卷 聚木譬經一卷四大譬經一卷五部威儀所服經一卷 或云五部僧服經高僧傳云白法祖譯結界文經一卷 沙彌離戒經一卷五戒報應經一卷 六足阿毘曇一卷雜譬喩經六卷 或云諸雜譬喩譬喩經一卷 祐云異出更有一本今且存一雜譬喩經一卷 凡十一事右三百七部三百四十卷 唯初九部九卷有本餘者竝闕竝是梁代沙門僧祐錄中新集失譯諸經然僧祐本錄祐所新集摠一千三百六部一千五百七十卷今細撿括餘九百九十九部一千二百三十卷多是諸別生經或長房等失譯錄中已載及有代錄之中摽其譯主除此之外有三百七部三百四十卷撿括長房等錄皆未曾載今新集於此以爲失源然祐錄中但云失譯不摽年代今且附於宋錄之末庶免遺漏焉開元釋教錄卷第五摠錄之五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원문에는 ‘이(二)’ 자(字)로 되어 있으나, 뒤 내용확인 결과 ‘삼(三)’ 자(字)의 탈획으로 보인다. 교정하여 번역한다.
  2. 2)논밭ㆍ집터 따위의 면적 단위이다. 중국 상고 시대에는 사방 6척을 1보(步), 100보를 1묘(畝)라 하고, 진(秦) 이후는 240보를 1묘로 하였다.
  3. 3)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외물(外物)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정신 상태를 말한다.
  4. 4)여러 스님 가운데 특히 한 스님만을 청하여 공양하는 것을 말한다.
  5. 5)소승들이 수행하여 과(果)를 증득하는 네 가지 계위(階位)를 말한다. 4향(四向)은 아직 과(果)에 이르지 못한 동안 과(果)를 증득하는 네 가지 계위(階位)인데, 수다원향ㆍ사다함향ㆍ아나함향ㆍ아라한향을 말하고, 4과(四果)는 증득한 네 가지 계위(階位)를 말하는데,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ㆍ아라한과를 말한다.
  6. 6)인도 4성(姓)의 하나이며, 전쟁에 종사하고,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종족, 또는 왕이 될 수 있으므로 왕족이라고도 한다.
  7. 7)지옥ㆍ축생ㆍ아귀의 3 지옥을 말한다.
  8. 8)성자(聖者) 되는 수행을 쌓아서 얻은 진정한 과(果), 곧 열반을 말한다.
  9. 9)고인(故人)이 생전에 쓴 글을 말한다.
  10. 10)『고려대장경』에는 ‘일품(一品)’으로 되어 있는데, 뒤의 30품을 고려할 때 탈획된 것으로 보인다. 교정하여 번역한다.
  11. 11)성문(聲聞) 4과(果)의 하나인, 사다함(斯陀含)은 일래과는 뜻으로 번역한다. 인간에서 이 과를 얻으면 반드시 천상에 갔다가 다시 인간에 돌아와서 열반을 깨닫고, 천상에서 이 과를 얻으면 먼저 인간에 갔다가 다시 천상에 돌아와 열반의 증과를 얻는다. 이렇게 천상과 인간 세계를 한번 왕래하므로 일래과라 한다.
  12. 12)마하연나(摩訶衍那)의 준말이다. 대승(大乘)이라 번역한다. 성문ㆍ연각의 2승 교법을 소승이라 함에 대해서 보살의 교법을 대승이라 한다.
  13. 13)대승의 보살들이 받아 지니는 계율을 말한다.
  14. 14)예전 글방에서 여러 날 배운 것을 한꺼번에 선생 앞에서 외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15. 15)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를 말한다.
  16. 16)제자의 행위를 교정하고 지도하는 큰스님을 말한다.
  17. 17)산속의 나무나 돌 사이에 벌이 집을 짓고 모아 둔 꿀을 말한다.
  18. 18)『고려대장경』은 ‘삼십오(三十五)’로 되어 있는데, ‘오십오(五十五)’의 탈획으로 보인다. 교정하여 번역한다.

 

 

 

 

개원석교록 제 6 권


지승 지음


1. 총괄군경록 ⑥

12) 남제(南齊) 시대
제(齊)나라 소(蕭)씨는 건업(建業)에 도읍하고 있었다.남제(南齊)를 말한다. 고제(高帝) 건원(建元) 원년 기미(己未, 479)로부터 화제(和帝) 중흥(中興) 2년 임오(壬午, 502)에 이르기까지 무릇 7주(主) 24년간을 지나는 동안 사문 7인이 번역하여 낸 경(經)과 율(律)은 총 12부 33권이다.이 중에서 7부 28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5부 5권은 궐본(闕本)이다.

소제(蕭齊)의 사문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陁耶舍)1부 1권. 경
사문 마하승(摩訶乘)2부 2권. 경ㆍ율
사문 승가발타라(僧伽跋陁羅)1부 18권. 율
사문 달마마제(達摩摩提)2부 2권. 경
사문 구나비지(求那毗地)3부 6권. 경ㆍ집
사문 석담경(釋曇景)2부 2권. 경
사문 석법화(釋法化)1부 1권. 경

(1)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陁耶舍)
무량의경(無量義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담마가타야사는 중국말로 법생칭(法生稱)이라고 부르며 중인도 사람이다. 중생을 깨우치는 데에 마음을 두었으며, 중생을 인도하고 이익 되게 하는 일은 버리지 않았다.
고제(高帝) 도성(道成)의 건원(建元) 3년 신유(辛酉, 481)에 광주(廣州) 조정사(朝亭寺)에서 『무량의경』 1부를 번역하였다.
담마가타야사는 손으로는 예서(隷書)1)를 잘 썼고, 입으로는 중국말[齊言]을 잘 하였으므로 경(經)을 사람들에게 전수(傳受)하였다. 무당산(武當山) 사문 혜표(慧表)가 영명(永明) 3년(485)에 『무량의경』 1부를 양도(楊都)로 가지고 온 것을 바르게 고쳐 써서 유포시켰다.

(2) 마하승(摩訶乘)
오백본생경(五百本生經) 1권『승우록』에 보인다. 승우는 “권수(卷數)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고, 장방은 “1권이다”라고 하였다.
타비리율(他毗利律) 1권중국말로는 『숙덕율(宿德律)』이라 하며, 『승우록』에 보인다. 승우는 “권수가 자세하지 않다”라고 하였고 장방은 “1권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2부 2권인데, 모두 궐본이다.

사문 마하승은 서역 사람이다. 그의 마음은 오묘한 도(道)를 품고 있었고, 뜻은 법을 널리 펴는 데에 맺혀 있었다. 무제(武帝) 색(賾)의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광주(廣州)에서 『오백본생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3) 승가발타라(僧伽跋陁羅)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毗婆沙) 18권혹은 『비바사율(毗婆沙律)』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선견율(善見律)』이라고도 한다. 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8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승가발타라는 중국말로는 중현(衆賢)이며, 서역 사람이다. 마음속에 도를 품어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교화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한이 없었다. 『사자상전(師資相傳)』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우바리(優波離)는 율장(律藏)을 결집(結集)2)하고, 그 해 7월 15일에 자자(自恣)3)를 마쳤다. 향과 꽃으로 율장에 공양한 뒤 바로 한 점을 찍어 율장 앞에 놓았다. 해마다 이와 같이 한 점씩을 찍다가 우바리가 열반하려 할 때 그것을 가져다 제자 타사구(陁寫俱)에게 전하였고, 타사구가 열반에 들면서 또 제자 수구(須俱)에게 전하고, 수구는 또 제자 실가바(悉伽婆)에게 전하고, 실가바는 또 제자 목건련자제수(目揵連子帝須)에게 전하고, 목건련자제수는 또 제자 전다발사(旃陁跋闍)에게 전하였다. 이와 같이 하면서 스승이 제자에게 서로 전해 오다가 지금의 삼장법사(三藏法師)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에게까지 전하여졌다. 삼장법사는 이 율장을 가지고 광주(廣州)에 이르렀다가 배를 타고 돌아가려 할 즈음에 이 율장을 제자 승가발타라에게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승가발타라는 무제(武帝) 영명(永明) 6년 무진(戊辰, 488)장방은 “기사(己巳, 489)이다”라고 하였다.에 사문 승의(僧禕)와 함께 광주 죽림사(竹林寺)에서 『선견률비바사』를 번역하고, 함께 안거(安居)하다가 영명 7년 기사(己巳, 489)장방은 “경오(庚午, 490)이다”라고 하였다. 7월 15일에 자자를 마치고, 앞의 스승의 법과 같이 향과 꽃으로 율장에 공양을 마치고는 또 한 점을 찍었으니, 그 해까지 975점(點)이었다.
점 하나가 바로 1년이다. 조백휴(趙伯休)가 양(梁)의 대동(大同) 9년(543)에 여산(廬山)에서 고행율사(苦行律師) 홍도(弘度)를 만나 이 부처님 열반 후의 중성점기(衆聖點記)4)의 연월(年月)이 끝난 기록을 얻었다. 그 해가 바로 제나라 영명 7년(489))이었다. 조백휴는 홍도를 찾아가서 말하였다.
“영명 7년(489) 이후에는 어찌하여 다시 점이 찍혀 있지 않습니까?”
홍도가 대답하였다.
“그 이전에는 모두 도를 얻은 성인이라 손수 점을 찍었다. 그러나 빈도(貧道)는 범부인지라 다만 머리에 이고 받들어 지녔을 뿐 감히 점을 찍지 못하였습니다.”
백휴는 이런 계산으로 양나라 대동 9년(543) 계해(癸亥, 543)까지 헤아려 보니 꼭 1,028년이었다. 내[智昇]가 백휴의 계산법에 의하여 대당(大唐) 개원(開元) 18년(730) 경오(庚午, 730)까지 계산하니 1,216년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바로 여래 멸도(滅度)의 원근(遠近)이 차이가 있어 취할 수 없었다.이 먹으로 점을 찍은 기록과 법현(法顯)이 전한 사자국(師子國)의 『불아정사창기(佛牙精舍唱記)』의 연대와는 전혀 동 떨어진다. 여기서 말한 “우바리가 율장을 결집하고 자자(自恣)를 마친 뒤 손수 한 점을 찍고, 해마다 이와 같이 하면서 스승이 제자에게 차츰 서로 전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다”고 한다면, 이 『선견비바사』는 우바리가 결집한 것도 아니며, 이후 20부 중에는 그들이 소속된 종(宗)의 해석에 따라 한 사람이 뜻의 요점을 추려서 해석한 것도 있으니, 그 전부가 비니(毘尼 : 계율)는 아니다. 곧 찬집(撰集) 이후 해마다 한 점씩 찍었다 하면 이것은 혹시 그럴 듯도 하지만, 만일 우바리가 손수 점을 찍었다 한다면 곧 지남(指南)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4) 달마마제(達摩摩提)
묘법연화경제바달다품제십이(妙法蓮華經提婆達多品第十二) 1권지금은 『묘법연화경』 제5권에 편입되어 있다. 처음에 사문 법헌(法獻)이 우전국(于塡國)에서 범본(梵本)을 얻어 왔다는 것이 도혜의 『송제록(宋齊錄)』에 보인다. 『승우록』에서는 “고창군(高昌郡)에서 범본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관세음참회제죄주경(觀世音懺悔除罪呪經) 1권영명 8년(490) 12월 15일에 번역 출간되어 나왔다. 『승우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2권이다.『제바달다품』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관세음참회제죄주경』은 궐본이다.

사문 달마마제는 중국말로는 법의(法意)라고 부르며, 서역 사람이다. 중생을 깨치게 하려는 뜻이 깊었으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인도하고 깨우쳐 주었다. 무제(武帝) 영명(永明) 8년 경오(庚午, 490)에 사문 법헌(法獻)을 위하여 양도(楊都)의 와관사(瓦官寺)에서 『묘법연화경제바달다품』 등 2부를 번역하였다.
법헌은 그 때에 승정(僧正)5)이었다. 이보다 앞서 법헌은 송(宋)의 원휘(元徽) 3년(475)에 서역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우전국(于塡國)에서 경의 범본(梵本)과 부처님의 치아[佛牙]를 얻어 가비라신(迦毗羅神)6)

의 호위를 받아 송나라로 돌아왔다.
경은 제(齊)나라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사문 법의(法意)와 함께 번역하여 냈으며, 부처님 치아는 종산(鍾山)의 상정림사(上定林寺)에 안전하게 모셨다.부처님 치아는 길이가 세 치쯤 되었고, 둘레도 역시 그 만큼 컸으며, 빛깔은 황백색(黃白色)을 띠었다. 그 치아는 끝이 조그맣게 볼록 나온 것이 마치 지금의 도장 무늬 같아서 온화하고 윤택하면서 깨끗하여 자못 주옥(珠玉)과 같았다. 삼가 『내경(內經)』을 살펴보면 부처님 치아는 네 개가 있는데, 하나는 도리천(忉利天)에 있고, 또 하나는 용왕의 궁전에 있으며, 또 하나는 사자국(師子國)에 있고, 또 하나는 오장국(烏萇國)에 있었다. 지금의 이 치아는 곧 오장국에 있었던 치아이다. 뒤에 갑자기 잃어버렸는데, 이것이 우전국에 나타났으므로 법헌이 우전국에서 청하여 모시고 돌아온 것이다.
양(梁)의 보통(普洞) 3년(522) 정월에 갑자기 대여섯 사람이 모두 무기를 가지고 초저녁에 문을 두드리면서 임천전(臨川殿) 아래의 노비(奴婢)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하였다.
“부처님 치아가 각(閣)에 모셔져 있으므로 각을 열어 조사하여 보아야겠다.”
절의 승려가 그들의 말대로 따라 주자, 그 중의 우두머리가 부처님 치아 앞으로 가서 함(函)을 열고 치아를 꺼내 세 번 예배하고 나서 비단 수건에 치아를 싸서 동쪽 산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뒤에 찾아보니, 도리어 돌아와 정림사에 안치되어 있었다.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진(陳)나라를 병합(倂合)하고 그대로 종악(鍾岳)에 두었는데, 인수(仁壽) 3년(603)에 내사령(內使令) 예장왕(豫章王) 간(暕)이 양주(楊州)로부터 가져와 문제에게 바쳤다. 그 해 5월 15일에 칙명으로 동선정사(東禪定寺)로 보내어 공양하게 하였다. 부처님 치아에 대한 신령하고 이상한 일들은 승우(僧祐)의 『불아기(佛牙記)』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그 동선정사가 바로 지금의 대장엄사(大莊嚴寺)이다.

(5) 구나비지(求那毗地)
수달경(須達經) 1권일명 『수달장자경(須達長者經)』이라 하며, 『중아함경』 제39권에서 나왔다. 승우는 “건무(建武) 2년(495)에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장방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백유경(百喩經) 4권또한 『백구비유경(百句譬喩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천축의 승가사나(僧伽斯那)가 지었으며, 영명 10년(492) 9월 10일에 번역되었다. 『승우록』에 보인다. 승우 등은 “모두 번역되어 10권으로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여기의 4권에도 백 가지 비유가 다 갖추어져 있다.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패다수하경(貝多樹下經)』과 같은 동본이다. 승우는 “건무 2년(495)에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으며, 『고승전』과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6권이다.앞의 2부 5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구나비지는 중국말로는 덕진(德進)이라 부르며, 중인도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도(道)를 따르면서 천축의 대승 법사 승가사(僧伽斯)를 스승으로 섬겼다. 총명하면서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부지런히 독송하여 익혔다. 그래 서 암송하고 있는 대승과 소승 경전만도 10여 만 언(言)이나 되었다. 겸하여 세속의 전적을 배웠고, 음양(陰陽)을 밝게 알았으며, 그 기후와 시기를 보고 점(占)을 치면 거의 다 맞혔다. 그 때문에 도술에 대한 칭찬이 서역에 널리 퍼졌다.
건원(建元) 초(479)에 강회(江淮)에 이르러서 비야리사(毗耶離寺)에 머물렀다. 석장(錫杖)을 짚고 무리를 따를 적에도 위의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왕공(王公) 이하 모두가 다투어 청하고 찾아뵈었다.
처음 승가사(僧伽斯)가 천축국에서 수다라장(修多羅藏) 12부경(部經) 중에서 절실하고 긴요한 비유만을 추려 모아 1부를 만드니, 무릇 백 가지 사항이었다. 이를 새로 배우는 이들에게 가르쳤는데, 구나비지는 그것을 모두 암송하고 그 뜻까지 밝게 알았다.
그리하여 무제(武帝) 영명 10년 임신(壬申, 492) 가을의 9월에 번역하여 제(齊)나라 글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곧 『백유경(百喩經)』이다. 그리고 다시 『수달경』과 『십이인연경』을 번역하였다. 송(宋)나라 대명(大明, 457~464) 이후에는 번역한 경이 거의 끊어졌는데, 이 법보(法寶)를 널리 유포하게 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모두 그를 찬미하였다.
구나비지는 사람됨이 넓고 후하면서 식견과 법도가 있었으며, 중생을 접하여 깨우치기를 잘하였고, 몸소 부지런히 도를 행하면서 밤이나 낮이나 게으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외국의 승려들이 만 리 밖에서 모여들었고 남해(南海)의 상인(商人)들도 모두 존경하고 섬겨 공양과 선물이 1년 내내 끊이지 않았다. 성품이 자못 복이 쌓인 분이어서 재보(財寶)가 넉넉하였다. 그러나 그 재물은 불사(佛事)를 경영하는 데만 썼고 사사로운 데에는 쓰는 일이 없었다. 건업(建業)의 회수(淮水) 곁에 지관사(止觀寺)를 지어 중각(重閣)7)ㆍ층문(層門)ㆍ전방(殿房)을 정연히 장식하고, 학도를 기르면서 교화를 베풀었으므로, 그의 덕업(德業)은 아주 크게 드러났다. 중흥(中興) 2년(502) 겨울에 입적하였다.

(6) 석담경(釋曇景)
마하마야경(摩訶摩耶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일명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 또는 『마야경(摩耶經)』이라고도 한다. 2권으로 되어 있다. 『왕종록(王宗錄)』ㆍ『보창록(寶唱錄)』ㆍ『법상록(法上錄)』 등의 세 목록에 보인다.
미증유인연경(未曾有因緣經) 2권『도라후라사미(度羅睺羅沙彌)』의 서문이다. 또한 바로 『미증유경(未曾有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시흥록』에 보인다.
이상은 2부 3권이며, 그 경본이 모두 있다.

사문 석담경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제(齊)나라 때에 『마하마야경』 등 2부를 번역하였다. 여러 목록에서는 바로 “제나라 때에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연대를 나타내지 밝히지 않아서, 어느 제왕(帝王) 때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7) 석법화(釋法化)
복중녀청경(腹中女聽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구현녀경(無垢賢女經)』과 같은 동본이다. 장방은 “『고록(古錄)』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은 궐본이다.

사문 석법화는 폐제(廢帝) 보권(寶卷) 영원(永元) 연간(499~500)에 『복중녀청경』 1부를 외워서 번역하였다[誦出].
여러 목록에서는 서로 이어받아 모두 외워내었다고 말하고 있다. 송출하였다는 뜻은 자세하지 못하나 전례에 의하여 나열한 것이다. 먼저의 번역이 있기 때문에 의혹이나 허물은 면할 수 있다.또 『장방록(長房錄)』과 『내전록(內典錄)』 등의 목록에서는 “제(齊)나라 때 강주(江州) 사문 도정(道政)이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 1권을 깎아 내고 고치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옳지 못하다. 뒤의 「대승록(大乘錄)」에서 자세히 기술한 것과 같다. 또 장방 등은 다시 “제나라 때 사문 법도(法度)가 양도(楊都)에서 『회하경(灰河經)』 1권과 『비발률(毗跋律)』 1권을 번역하여 내었다”라고 하였다. 이제 이 『회하경』은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그 『비발률』은 수(隋)나라 『법록(法錄)』에는 “법도(法度)가 거짓으로 만들어僞造 함부로 계율이란 이름을 쓰고 있어 이제는 없애고 여기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장방 등은 또 “제나라 때 사문 석법니(釋法尼)가 『익의경(益意經)』 2권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제 이 경은 곧 제나라 말 양나라 초에 승려 법니가 눈을 감고 외워 낸 것인데, 지금 현재도 경본이 있으나 그 글과 이치가 서로 어긋나서 유행할 수조차 없었다. 만일 제나라 말에 번역되어 나왔다면 『승우록』에서는 무엇 때문에 기재하지 않았겠는가? 지금은 의부(疑部)에 편입되어 있으므로 정록(正錄)에는 두지 않는다. 장방 등은 또 “제나라 때 사문 도비(道備)가 『구상경(九傷經)』 등 5부 5권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여러 목록에서는 모두 의경(疑經)이라 하였으므로, 이제는 옛 설(說)에 의거하여 결정하였다.


14) 전량(前梁) 시대
양(梁)나라 소(蕭)씨는 건업(建業)에 도읍하고 있었다.혹은 전량(前梁)이라고도 한다. 무제(武帝) 천감(天監) 원년 임오(壬午, 502)로부터 경제(敬帝) 태평(太平) 2년 정축(丁丑, 557)에 이르기까지 무릇 4주(主) 56년을 지나는 동안 승려들과 속인 8인이 번역하여 낸 경(經)ㆍ율(律)ㆍ논(論)과 여러 전기(傳記) 등과 아울러 새로 모은 실역(失譯)의 모든 경은 총 46부 201권이다.이 중에서 40부 191권은 그 경본이 현재 있으며, 6부 10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승우(釋僧祐)3부 39권. 보(譜)ㆍ록(錄)ㆍ집(集)
사문 만다라선(曼陁羅仙)3부 11권. 경
사문 승가바라(僧伽婆羅)10부 32권. 경ㆍ논ㆍ전(傳)
사문 석보창(釋寶唱)2부 54권. 경ㆍ집ㆍ니전(尼傳)
사문 석명휘(釋明徽)1부 1권. 니계(尼戒)
왕자(王子) 월파수나(月婆首那)1부 1권. 경
사문 파라말타(波羅末陁)11부 24권. 경ㆍ논
사문 석혜교(釋慧皎)1부 14권. 승전(僧傳)
신집실역제경(新集失譯諸經)14부 25권. 경ㆍ논ㆍ집

(1) 석승우(釋僧祐)
석가보(釋迦譜) 10권제(齊)나라 때에 지었으며 따로 5권 본이 있다. 이것들은 자세함과 간략함에 차이가 있다. 장방은 “4권이다”라고 하였으나, 착오인 것 같다. 『승우록』과 『장방록(長房錄)』ㆍ『내전록(內典錄)』 등의 목록에 보인다. 『제록(齊錄)』에 편입시키는 것이 옳은데, 사람에 따라 『양록(梁錄)』에 덧붙인다.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15권『승우록』에는 자신이 “10권이다”라고 하였으나 15권본도 보인다. 『장방록』과 『내전록』 두 목록에는 “16권이다”라고 하였다. 『승우록』ㆍ『장방록』ㆍ『내전록』 등 목록에 보인다. 역시 제나라 때 지었다.
홍명집(弘明集) 14권『승우록』 등 세 목록에서 모두 “10권이다”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14권이 보인다. 『승우록』ㆍ『장방록』ㆍ『내전록』 등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39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석승우는 양도(楊都)의 건초사(建初寺) 스님이다. 속성은 유(兪)씨이며, 그의 선조는 팽성(彭城)의 하비(下邳) 사람이다. 아버지 대(代)에 건업(建業)에 와서 살았다. 승우는 나이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건초사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는데, 뛸 듯이 도(道)를 좋아하여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부모는 그의 뜻을 가상히 생각하여 우선 입도(入道)하는 것을 허락하고 승범(僧範) 도인을 스승으로 섬기게 하였다.
나이 14살이 되었을 적에 집안사람들이 비밀리에 혼처를 구했는데, 승우가 이를 알아차리고 피하여 정림사(定林寺)에 이르러 법달(法達)법사에게 몸을 맡겼다. 법달 또한 계덕(戒德)이 자세하고 엄숙하여 법문(法門)의 동량(棟梁)이었다. 승우는 그를 스승으로 받들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그 후 나이가 차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지조가 굳고 밝았다.
처음에 법영(法潁)스님에게 수업을 받았다. 법영은 이미 한 시대의 명장(名匠)이었고, 율학(律學)의 종조였다. 승우는 이에 생각을 다하여 깊이 연구하고 구하길 새벽부터 밤까지 게으르지 않았다. 마침내 율부(律部)에 크게 정통하여 선철(先哲)들의 격려를 받았다.
무제(武帝) 연(衍)도 서로 만나보고 깊이 예우하였다. 승단(僧團)의 일에 관한 의문은 모두 칙명으로 그에게 나아가서 심의 결정하도록 하였다. 나이가 들어 노쇠하고 다리에 병이 생기자 칙명으로 가마를 타고 내전에 들어오는 것을 윤허하였고, 육궁(六宮)이 계(戒)를 받게 하였으니, 그가 조정에서 존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제(齊) 경릉왕(竟陵王)과 문선왕자(文宣王子) 양량(良梁)과 임천왕(臨川王) 굉(宏)과 남평왕(南平王) 위의동(偉儀同)과 진군(陳郡)의 원앙(袁昻)과 영강(永康) 정공주(定公主)와 귀빈(貴嬪) 정씨(丁氏) 등도 모두 그의 계범(戒範)을 숭배하여 스승과 제자의 예를 다하였으며, 무릇 도인과 속인으로서의 문도(門徒)가 된 자가 만여 인에 달하였다.
승우는 율장(律藏)에 훤히 밝았고, 겸하여 글을 잘 쓰는 재주도 있어 기록(記錄)들을 찾아서 수집하고 편찬하여 책[部帙]을 만들었다. 이는 기록을 찾아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功)은 적게 들이면서 널리 통달하기를 바라서였다. 또, 실법문[實法門]의 가장 중요한 것[綱要]은 석가의 가르침이 으뜸으로 한 종취[釋氏元宗]이기 때문이다.
소제(蕭齊) 말기로부터 양대(梁代)에 이르는 동안 『석가보(釋迦譜)』 등 3부를 지었고, 그 밖에 스스로 『법원집(法苑集)』ㆍ『세계기(世界記)』ㆍ『사자전(師資傳)』 등을 지었으나, 이는 장경에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등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 것과 같다.

(2) 만다라선(曼陁羅仙)
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摩訶般若波羅蜜經) 2권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바로 『문수반야바라밀경(文殊般若波羅蜜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으며 승가바라(僧伽婆羅)가 번역하여 낸 경과 『대반야경(大般若經)』 제7회 「만수실리분(曼殊室利分)」과 동본이다. 또한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는데, 46회(會)에 해당한다. 『이곽록』과 『속고승전』에 보인다.
법계체성무분별경(法界體性無分別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금은 『보적경』에 편입되어 있고 제8회(會)에 해당한다. 『이곽록』ㆍ『보창록』 두 목록과 『속고승전』에 보인다.
보운경(寶雲經) 7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진(陳)나라 때 수보리(須菩提)가 번역한 『대승보운경(大乘寶雲經)』과 당(唐)나라 때 달마류지(達摩流支)가 번역한 『보우경(寶雨經)』 등과 동본이역이다. 『진록(陳錄)』과 『속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3부 11권인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만다라선은 중국말로는 약성(弱聲)이라 부르며, 또한 홍약(弘弱)이라고도 한다. 부남국(扶南國 : 캄보디아) 사람이다. 신령하게 알고 뛰어나게 깨쳐서 이승과 저승 일을 다 알았다. 좋은 일이나 험한 일을 가리지 않고 중생을 깨우치고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다. 고귀한 범경(梵經)을 가지고 멀리서 와서 공헌(貢獻)하였다.
무제(武帝) 천감(天監) 2년 계미(癸未, 503)에 양나라 서울에 이르렀다. 칙명으로 승가바라(僧伽婆羅)와 함께 번역을 하게 하여 마침내 『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 등 3부를 번역하여 내었다. 비록 전역(傳譯)에 종사하기는 하였지만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번역해 낸 경문의 많은 부분이 본래의 뜻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3) 승가바라(僧伽婆羅)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앞의 만다라선(曼陁羅仙)이 번역한 경과 『대반야경(大般若經)』 「만수실리분(曼殊室利分)」은 동본이다. 장방은 “앞의 만다라선이 번역하여 낸 2권보다 조금 더 낫다”라고 하였다.
대승십법경(大乘十法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원위(元魏)의 각정(覺定)이 번역하여 낸 『십법경(十法經)』과 동본이다. 보통(普通) 연간(520~526)에 번역되었으며, 또한 바로 『십법경(十法經)』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도일체제불경계지엄경(度一切諸佛境界智嚴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원위(元魏)의 담마류지(曇摩流支)가 번역한 『입불경계경(入佛境界經)』과 동본이다.
팔길상경(八吉祥經) 1권만일 어떤 사람이라도 이 여덟 부처님의 명호를 들으면 온갖 귀신들의 재난에 침해받지 않는다. 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팔길상주(八吉祥呪)』와 『팔양신주경(八陽神呪經)』 등과 동본이다.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2권또한 『공작왕다라니경(孔雀王陁羅尼經)』이라고도 하며, 일곱 번째의 번역이다. 당(唐)나라 의정(義淨)이 번역한 『대공작주왕경(大孔雀呪王經)』과 같은 동본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사리불다라니경(舍利弗陁羅尼經) 1권이 주문에는 큰 신력이 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능히 지니면 설산(雪山)에 있는 8야차왕(八夜叉王)8)이 언제나 와서 옹호하며 하고자 하는 일이 마음대로 된다. 아홉 번째의 번역이며, 지겸(支謙)이 번역하여 낸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密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 2권또한 바로 『문수문경(文殊問經)』이라고도 한다. 천감(天監) 17년(518)에 점운관(占雲館)에서 번역하였다. 원담윤(袁曇允)이 붓으로 받아쓰고, 광택사(光宅寺) 사문 법운(法雲)이 자세하게 교정하였다.
보살장경(菩薩藏經) 1권
해탈도론(解脫道論) 12권또한 13권이라고도 한다. 천감 14년(515)에 점운관에서 번역하였다.
아육왕경(阿育王經) 10권혹은 대(大)자가 위에 붙기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 안법흠(安法欽)이 번역한 『육왕전(育王傳)』과 동본이역(同本異譯)이다. 천감 11년(512) 6월 20일에 양도(楊都)의 수광전(壽光殿)에서 번역되었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10부 32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장방록』과 『속고승전』에 모두 보이는데, 모두 부수(部數)와 이름을 자세하게 나열하지는 않았다.

사문 승가바라는 중국말로는 중개(衆鎧) 또는 승양(僧養)이라 부르며, 부남국(扶南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게 깨달아서, 일찍이 불법과 인연이 있었다. 비록 경론을 갖추어 탐구하였지만 대법(對法 : 아비달마)도 두루 익혔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도리를 깨달은 경지는 점점 유포되어 해남(海南)까지 명성이 퍼졌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에는 율장(律藏)에 두루 정통하였고, 뜻은 방편을 관하는데 힘썼으며, 즐거이 중생 교화하는 일을 받들어 했다.
제(齊)나라에서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소문을 듣고 뱃길을 따라 제나라 서울에 이르러 정관사(正觀寺)에 머무르면서 천축 사문 구나발타(求那跋陁)의 제자가 되었다. 다시 구나발타로부터 방등경(方等經)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여름 한 철이 지나기 전에 널리 섭렵하여 거의 통달하였고, 이어 여러 나라의 글자와 말도 이해하게 되었다.
제나라가 패망하고 도의 가르침도 무너지자, 승가바라는 고요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외부 사람과 사귀는 일을 끊고 한적한 방에 머물면서 마음을 정양하며 공부만을 하였다.
대량(大梁)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뛰어난 이들을 찾고 모았는데 천감(天監) 5년(506)에 왕의 부름을 받아 양(梁)의 서울 수광전(壽光殿)과 화림원(華林園)과 정관사(正觀寺)와 점운관(占雲館)과 부남관(扶南館) 등 다섯 곳에서 경을 번역하였다.
곧 천감 5년 병술(丙戌, 506)에서부터 보통(普通) 원년 경자(庚子, 520)에 이르기까지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등 10부를 번역하였다.그 범본(梵本)들은 모두 만다라선(曼陁羅仙)이 가져 온 것이다.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승가바라는 다시 『육왕전(育王傳) 5권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앞의 『육왕경(育王經)』이 바로 이 『육왕전』이다. 그러므로 거듭 싣는 것은 옳지 않다.
처음 경을 번역한 날에는 무제(武帝)가 수광전의 법좌(法座)에 몸소 참석하여 그 글을 받아썼다. 그런 뒤에야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맡겨 그 경본을 다 번역하게 하였다. 칙명으로 사문 보창(寶唱)ㆍ혜초(慧超)ㆍ승지(僧智)ㆍ법운(法雲)과 원담윤(袁曇允) 등에게 상대(相對)하게 하여 주소(注疎)를 내게 하였다. 그 내용을 꾸미는 데에도 차례가 있었고 번역의 근본 취지를 빠뜨리지 않았다. 천자(天子)가 아주 융숭하게 예로써 대접하였으며, 이들을 인접(引接)하여 가승(家僧)으로 삼고, 담당 관리에게 물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도인이나 속인들이 이들을 달리 보게 되었다.
승가바라는 사재(私財)를 모으지 않았고, 그에게 보시한 물건으로는 머무를 절을 세웠다.
태위(太尉) 임천왕(臨川王) 굉(宏)은 대접과 예우가 매우 융숭하였다. 보통 5년(524)에 병이 나서 정관사(正觀寺)에서 입적하였으니, 그 때의 나이는 65세였다.

(4) 석보창(釋寶唱)
경률이상(經律異相) 50권천감(天監) 15년(516)에 칙명으로 지었다. 목록에서는 “목록과 함께 55권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낙질이 되어 그 목록이 없어져서, 다만 이 50권만이 있다. 그 목록에는 다만 편제(篇題)만을 찬집하였으므로 그 외의 다른 글들은 없었다. 『보창록』과 『장방록』에 보인다.
비구니전(比丘尼傳) 4권진(晋)ㆍ송(宋)ㆍ제(齊)ㆍ양(梁) 네 시대의 비구니의 행장을 기술하였는데, 새로 이 목록에 편입되었다.
이상은 2부 54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석보창은 양(梁)나라 서울에 있던 장엄사(莊嚴寺)의 스님이었다. 속성은 잠(岑)씨이며, 오군(吳郡) 사람이다. 승우(僧祐)율사의 뛰어난 제자였다. 학식이 넓고 견문이 두루 미쳐서 그와 필적할 만한 이가 적었다. 그래서 무제(武帝)가 아주 숭배하고 공경하였다.
천감(天監) 연간(503~519)에 자주 칙명으로 집(集)을 편찬하였는데, 모두 무제의 뜻에 꼭 맞았다. 15년 병신(丙申, 516)에 또 칙명으로 『경률이상(經律異相)』 1부를 지었고, 보창은 또 따로 『비구니전(比丘尼傳)』 4권을 지었다.
『장방록』에는 다시 『명승전(名僧傳)』 등 7부가 있으나, 이것은 장경(藏經)에 편입되지 않기 때문에 빼고 논하지 않는다. 그 밖의 일은 모두 『속고승전(續高僧傳)』에 갖추어 실려 있다.

(5) 석명휘(釋明徽)
오분비구니계본(五分比丘尼戒本) 1권또한 『미사색니계본(彌沙塞尼戒本)』이라고도 한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명휘는 양나라 서울의 건초사(建初寺) 스님이다. 계행(戒行)이 아주 깨끗하였고, 미사색부(彌沙塞部)를 힘써 익혔다. 송(宋)나라 때 각수(覺壽)가 『미사색률(彌沙塞律)』을 번역하였는데 다만 『비구계본(比丘戒本)』만을 번역하여 내었고 비구니계는 없었다. 그러므로 명휘는 마침내 무제(武帝) 보통(普洞) 3년 임인(壬寅, 522)에 대율(大律) 안에서 『비구니계(比丘尼戒)』 1권을 추려 내어 번역하였으니, 바로 지금 유행하는 계본(戒本)이 그것이다.목록을 지은 이가 말하기를 “이 계를 조사하여 보니 중학(衆學) 9)뒤에 7멸쟁법(七滅諍法)10)
이 없었다. 율본(律本)이 비록 간략하다 하더라도 뜻을 준용한다면 화합하여 편안하게 하는 것이거늘 어찌 비구니라 하여 다툼이 있을 적에 그 다툼을 없애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기율(僧祇律)』 정문(正文)에는 비구와 동일하게 있다. 때문에 그 율의 제40에 ‘중학법(衆學法)속에는 오직 더러운 풀汚草과 물만이 제외되며 7멸쟁법은 그 법의 순서에 따라 모두 비구의 것과 같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저 스승이 불안해하는 것은 이치가 통하지 않아서이다.


(6) 월파수나(月婆首那)
대승정왕경(大乘頂王經) 1권또한 『유마아경(維摩兒經)』이라고도 하며, 서진(西晋) 축법호가 번역한 『방등정왕경(方等頂王經)』과 수(隋)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가 번역한 『선사동자경(善思童子經)』 등과 동본이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과 『속고승전』 등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왕자(王子) 월파수나는 중인도(中印度) 우선니국(優禪尼國) 왕의 아들이다.이 우선니국은 혹은 남천축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서천축에 있다고도 하여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 나라가 중천축 유박(維博) 서쪽에 근거하여 있으면서 남쪽에 가깝기 때문에 전한 이의 말이 서로 틀려서 한 방향으로 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면서부터 알았고 성품이 준수하면서 명랑하였으며 깊고 오묘한 이치를 체득해서 깨달았다. 불경을 전문적으로 배워 특히 뜻과 이치에 정통하였으며, 음운(音韻)을 훤히 알았고 아울러 방언(方言)도 잘하였다.
이보다 앞서 동위(東魏)의 흥화(興和) 연간(539~542)에 불경 3부를 번역하였고, 양(梁)나라 대동(大同) 연간(535~545)에는 위(魏)의 양무제(梁武帝)를 따라 머무르면서 칙명으로 외국 사자(使者)에게 내리는 명령을 모두 맡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정왕경(頂王經)』 1부를 번역하였다.

(7) 파라말타(波羅末陁)
금광명경(金光明經) 7권혹은 6권으로 되어 있다. 22품(品)이다. 승성(承聖) 원년(552)에 정관사(正觀寺)와 양웅(楊雄)의 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양(涼)나라 때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4권에는 18품(品)이었는데, 진제(眞諦)가 다시 4품을 내었으므로 앞의 품을 합하여 22품이 되었고, 7권이 된 것이다. 지금은 『산번록(刪繁錄)』에 있다.
무상의경(無上依經) 2권양(梁)나라 소태(紹泰) 3년 정축(丁丑, 557) 9월 8일에 평고현(平固縣)에서 남강(南康) 내사(內史) 유문타(劉文陁)의 청으로 번역하여 내게 되었다. 이 경의 후기(後記)에 보인다. 장방은 “진(陳)나라 때 번역되었다”고 하나 잘못이다. 여러 연력(年曆)에 모두 소태 3년이 없었다. 『별록(別錄)』에서 보는 바와 같다.
열반경본유금무게론(涅槃經本有今無偈論) 1권장방은 “태청(太淸) 4년(550)에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으나, 여러 연력(年曆)을 검토하여 보아도 태청은 4년까지 이르지 않았다. 이하는 다 같다.
결정장론(決定藏論) 3권이 논에는 양언(梁言)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것으로 보아 양나라 때의 번역인데, 그 문구를 찾아보니 이 논은 진제(眞諦)가 번역하여 낸 것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실차난타(實叉難)가 번역한 것과 동본이다. 승성(承聖) 2년 계유(癸酉, 553) 9월 10일에 형주(衡州) 시흥군(始興郡) 건흥사(建興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월바수나(月婆首那) 등이 말을 전하고, 사문 지개(智愷) 등이 붓을 잡았으며, 아울러 서문을 지었다. 이 논 서문에 보인다.
여실론(如實論) 1권처음 표제에 “『여실론』 「반질난품(反質難品)」이다”라고 하였다. 장방은 “태청(太淸) 4년(550)에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 1권승성(承聖) 3년(554) 예장(豫章)의 보전사(寶田寺)에서 번역되었으며,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 축법호 등이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1권승성 3년(554) 예장의 보전사에서 번역되었으며, 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십칠지론(十七地論) 5권당(唐)나라 때에 번역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동본이며, 번역하다가 5권이 되었을 때 난리를 만나 그만두게 되었다. 『속고승전(續高僧傳)』에 보인다. 태청 4년(550)에 부춘령(富春令) 육원철(陸元哲)의 집에서 사문 보경(寶瓊) 등 20인의 명덕(名德)들이 번역하였다.
중론(中論) 1권장방은 “태청 4년에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삼세분별론(三世分別論) 1권장방은 “태청 4년(550)에 번역되어 나왔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모두 『장방록(長房錄)』과 『내전록(內典錄)』 등의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1부 24권이다.『여실론』 이상의 6부 15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인왕반야경』 이하 5부 9권은 궐본이다.

사문 파라말타는 중국말로는 진제(眞諦)이며, 혹은 구라나타(拘羅那他)라 하기도 하는데 중국말로는 친의(親依)라고 번역한다. 모두 범문(梵文)의 이름인데 본래 서인도의 우선니국(優禪尼國) 사람으로 바라문 종성(種姓)이다.
파라말타는 도에 들어가는 모습과 행동이 투명하고 밝았으며, 기품이 청정하면서 엄숙하였다. 풍신(風神)이 뛰어나게 맑고 유연하였으며 스스로 세속을 멀리하였다. 뭇 장경(藏經)의 자세한 부분까지 가슴 속에 넣어 두지 않음이 없었으며, 예술적인 재능도 평소에 연마하여 남달랐다. 비록 불교의 이치를 따라 배워 통하였지만 여러 길에 통달한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멀리 어려운 난관을 섭렵하며 평탄하고 험한 일을 가림이 없이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중천축에서 머물렀다.
양무제(梁武帝) 대동(大同) 연간(535~545)에 칙명으로 직성(直省) 장범(張氾) 등을 부남국(扶南國)에 헌사(獻使)로 보냈다가 귀국할 적에 중천축 마가타국(摩伽陁國)을 방문하게 하여 덕망 있는 스님과 삼장(三藏)과 아울러 대승의 여러 논(論)과 『잡화경(雜華經)』 등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그 때에 진제(眞諦)는 행화(行化)가 멀리까지 알려졌고, 그 거동이 성현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때 백성들에게 은혜와 이익을 주는 대덕 스님을 찾자, 그 나라에서는 곧 진제를 손꼽으면서 아울러 경론을 보내며 공손하게 황제의 뜻을 받들게 하였다. 진제는 평소 마음속에 품은 것이 있었기에 기꺼이 명에 따랐다.
대동 12년(546) 8월 15일에 남해(南海)에 도달하였는데, 오던 길이 험난하여 2년 동안 도중에서 지체하다가 태청(太淸) 2년(548) 윤(閏) 8월에야 비로소 도성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에 무제는 몸소 맞이하여 예배 공경하고 보운전(寶雲殿)에 있게 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공양하였다.
진제는 경의 가르침을 번역하여 전하고자 진(秦)나라 때를 부러워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글을 번역해 내니 재일(齋日)을 넘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양나라 말년에는 도(道)가 쇠퇴하면서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켜 불법을 능멸하였으며, 양이 무너지게 되자 널리 펼칠 기회를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걸어서 동쪽 땅으로 들어갔다.
또 부춘령(富春令) 육원철(陸元哲)에게로 가자 비로소 받들며 법의 인연을 물어 왔다. ‘역경(譯經)하여 전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머리 좋고 뛰어난 사문 보경(寶瓊) 등 20여 인을 초빙하여 『십칠지론(十七地論)』을 번역하여 마침내 5권을 만들었다. 그러나 나라에 난리가 그치지 않았으므로 측근에게 부촉해서 통역하여 전하게 하였다. 태보(太寶) 연간(550~551)에 이르러 후경(候景)의 청으로 돌아와서 대(臺)에 있으면서 공양을 받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전쟁과 흉년이 연이어 일어났고 불법은 거의 무너졌다. 때마침 원제(元帝)가 새로이 황제가 되자 성왕의 뒤를 이어 나라가 밝아지고 평화가 오게 되었다. 마침내 금릉(金陵)의 정관사(正觀寺)에 머물면서 원선사(願禪師) 등 20여 인과 함께 『금광명경(金光明經)』을 번역하였고, 3년(554) 2월 다시 예장(豫章)으로 돌아왔다.
또 신오(新吳)의 시흥(始興)으로 갔다가 다시 소태보(蕭太保)를 따라 재[嶺]를 넘어 남강(南康)에 이르렀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 번역을 하였으나 어수선한 환경이라서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다.
진제가 양나라 때에 번역해 낸 경론(經論)은 총 11부였으며, 양나라 말년에 진(陳)나라로 들어가서 다시 경론을 번역하였으니 뒤에 기술한 바와 같다.
『장방록(長房錄)』과 『내전록(內典錄)』 등의 목록에는 『십팔부론(十八部論)』 1권이 있고 역시 진제의 번역이라 하였으나, 이제 그 문구를 찾아보았더니 이 논은 진제의 번역이 아니었다. 이미 부집(部執)이 같아서 두 번 번역했다 하기가 맞지 않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는 삭제한다. 『별록(別錄)』에서 기술한 것과 같다. 또 『금광명소(金光明疎)』 등 6부 26권이 있는데, 모두 진제가 지은 것이지만 역시 여기서는 삭제한다.『장방록』과 『내전록』 등의 목록에서는 또 “천감(天監) 15년(516) 말에 도현(道賢)이 『우루빈경(優婁頻經)』 1권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또 바로 “헌상(獻上)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자세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의록(疑錄)」에 편입시키고, 여기서는 삭제하고 기재하지 않는다.

(8) 석혜교(釋慧皎)
고승전(高僧傳) 14권서록(序錄)이 1권이고 전(傳)이 13권이므로 합쳐서 14권이다. 천감(天監) 18년(519)에 지었다. 『장방록』과 『내전록』 두 목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4권이며, 그 책은 현재 있다.

사문 석혜교는 씨족(氏族)은 확실하지 않으며 회계(會稽)의 상우(上虞) 사람이다. 학문이 내외(內外) 전적(典籍)에 통달하였고, 널리 경(經)과 율(律)을 가르쳤다.
가상사(嘉祥寺)에 머무르면서 봄과 여름에는 법을 널리 펼쳤고 가을과 겨울에는 저술에 종사하여 『열반경(涅槃經)』과 『범망경(梵網經)』의 의소(義疎)를 지었다.
또 보창(寶唱)이 지은 『명승전(名僧傳)』에는 쓸데없는 것이 많아 마침내 그 예를 개진해 보이면서 광범위한 전기(傳記)를 이루고자 『고승전(高僧傳)』 1부를 지었다. 처음은 한(漢)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67)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은 양(梁)나라 천감(天監) 18년(519)에 이르기까지의 무릇 453년 동안 승려 257인과 또 곁따라 나오는 239인을 합치면 도합 496인의 전기를 수록하였는데, 그 덕업(德業)에 따라 전체를 10례(例)로 분류하였다.
그 서문에서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에 지은 『명승전』에는 아마도 번거롭고 광범위한 것을 꺼려서였는지 그 사실을 잘라 줄였기에 숨겨진 자취[抗迹]의 기이함이 버려지고 깎인 곳이 많았다. 출가한 사람이 나라에서 임금의 손님이 되면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높은 경지만 밟고 홀로 있는 것을 스스로 멀리[自遠高蹈獨絕]하여야 한다. 영화를 사양하고 애욕을 버린 사람을 찾음은 본래 세속인이 현인이 되는 것을 격려하고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승려를 논하지 않고 끝내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시대에 전기를 쓸 때에는 흔히 명승(名僧)이라 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건대 이름[名]과 높다[高]는 것에는 우열(優劣)이 있는 것 같다. 만일 실질적으로 도를 행하였어도 광채를 숨겼다면 그 사람은 높긴 하여도[高] 이름난[名] 것은 아니다. 또 공덕이 적어도 시대에 적합한 사람은 이름은 있어도 높은 스님은 아니다. 이름은 났어도 경지가 높은 스님이 아니면 본래 여기서는 기록할 스님이 아니며, 경지가 높으면서 이름이 나지 않았어도 지금 이 기록에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명(名)이란 글자를 없애고 고(高)란 글자를 대신 쓴 것이다.”
삼가 이 『고승전』을 자세히 읽어 보면 뜻과 예(例)가 밝게 드러났고, 글과 말[文詞]이 완곡하고 간명하다. 참으로 불후(不朽)의 전기라 할 만하며, 영원히 귀감(龜鑑)이 될 것이다.

(9) 신집실역제경(新集失譯諸經)
마리지천경(摩利支天經) 1권혹은 『소마리지천경(小摩利支天經)』이라고도 하며, 이 경은 『다라니집경(陁羅尼集經)』의 제10권이다. 처음의 『마리지천경(摩利支天經)』과는 약간 다르게 번역되었다.
육자신주왕경(六字神呪王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육자주왕경(六字呪王經)』과 동본이다.
허공장보살문불경(虛空藏菩薩問佛經) 1권또한 『허공장보살문칠불다라니주경(虛空藏菩薩問七佛陁羅尼呪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칠불신주경(七佛神呪經)』이라고도 한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수(隋)나라 때 번역한 『여래방편선교주경(如來方便善巧呪經)』과 동본이다.
삼겁삼천불명경(三劫三千佛名經)『과거장엄겁천불명경(過去莊嚴劫千佛名經)』이 상권(上卷)이고, 『현재현겁천불명경(現在賢劫千佛名經)』이 중권(中卷)이며, 『미래성수겁천불명경(未來星宿劫千佛名經)』이 하권이다. 장방의 『입장록(入藏錄)』에 보인다. 거기에는 3권의 경본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합하여 1부로 되었다.
모리만다라주경(牟梨曼陁羅呪經) 1권혹은 경(經)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다.
아타바구귀신대장상불다라니경(阿吒婆拘鬼神大將上佛陁羅尼經) 1권혹은 바로 『아타바구주경(阿吒婆拘呪經)』이라고도 한다.
아미타고음성왕다라니경(阿彌陁鼓音聲王陁羅尼經) 1권
대보현다라니경(大普賢陁羅尼經) 1권
대칠보다라니경(大七寶陁羅尼經) 1권
육자대다라니경(六字大陁羅尼經) 1권
장자녀암제차사자후요의경(長者女菴提遮師子吼了義經) 1권
보살오법참회문(菩薩五法懺悔文) 1권또한 『보살오법참회경(菩薩五法懺悔經)』이라고도 한다.
다라니잡집(陁羅尼雜集) 10권
대승오음론(大乘五陰論) 1권바수반두(婆藪盤豆)보살이 지었다. 진조(陳朝)의 『대승사장록(大乘寺藏錄)』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과 동본이다. 이 논은 궐본이다.
이상은 14부 25권이다. 『대승오음론』을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 「입장경(入藏經)』에 있으나, 『장방록(長房錄)』 등의 「실역록(失譯錄)』에는 빠져서 기재되어있지 않았다. 그 문구(文句)를 찾아보았더니 이는 시대가 오래 된 번역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양말(梁末)의 번역에 편입시키고, 양나라 때의 실원[梁代失源]이라고 하였다.

15) 후위(後魏) 시대
후위 원(元)씨는 처음에 항안(恒安)에 도읍하고 있다가 도읍을 남쪽 낙양(洛陽)으로 옮겼으며 후에 업(鄴)으로 옮겼다.또 후위라고 하였다. 처음 도무제(道武帝) 황시(皇始) 원년 병신(丙申, 396)곧 동진(東晋)의 태원(太元) 21년이다.으로부터 마지막 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靖帝) 무정(武定) 8년 경오(庚午, 550)에 이르기까지 무릇 13제(帝) 155년 동안5제(帝)는 항안에 도읍하였으며,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8년(494)에 이르러 남쪽으로 천도하여 7제(帝)가 낙양에 있었으며, 마지막 1제(帝)가 업에 도읍하고 있었다.에 승려들과 속인 12인이 번역한 경(經)ㆍ논(論)ㆍ전(傳) 등은 총 83부 274권이다.그 중에서 73부 255권은 현재 있으며, 10부 19권은 궐본이다.

후위[元魏]의 사문 석혜각(釋慧覺) 1부 13권. 집(集)ㆍ경
사문 석담요(釋曇曜)3부 7권. 경ㆍ전(傳)
사문 길가야(吉迦夜)5부 19권. 경ㆍ논ㆍ전집
사문 담마류지(曇摩流支)3부 8권. 경
사문 석법장(釋法場)1부 1권. 경
사문 늑나마제(勒那摩提)3부 9권. 경
사문 보리류지(菩提留支)30부 101권. 경ㆍ논
사문 불타선다(佛陁扇多)10부 11권. 경ㆍ논
바라문(婆羅門)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18부 92권. 경ㆍ계(戒)ㆍ논
왕자(王子) 월바수나(月婆首那)3부 7권. 경
사문 비목지선(毗目智仙)5부 5권. 논
사문 달마보리(達磨菩提)1부 1권. 논

(1) 석혜각(釋慧覺)
현우경(賢愚經) 13권혹은 15권, 또는 16권, 혹은 17권으로 되어 있다. 또한 『현우인연경(賢愚因緣經)』이라고도 한다. 도혜의 『송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3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혜각은 담각(曇覺)이라고도 한다. 승우(僧祐)는 담각이라 하였는데, 양주(涼州) 사람이다. 그의 높은 경계는 하늘에 닿았으며, 풍신(風神)은 시원하게 깨쳤으며, 계율의 경지[戒地]가 맑게 빼어나고, 슬기로운 감식(鑑識)은 막힘없이 통하였다.
우전국(于闐國)에서 경의 범본(梵本)을 얻어 왔다. 그는 태무황제(太武皇帝) 태평진군(太平眞君) 6년 을유(乙酉, 445)에 우전국으로부터 고창국(高昌國)으로 돌아와서 사문 위덕(威德)과 함께 『현우경』 1부를 번역하였다. 정매(靖邁)의 『역경도기(譯經圖記)』에 보인다.양(梁)나라 사문 승우(僧祐)의 『현우경기(賢愚經記)』를 살펴보면 “하서(河西) 사문 담각(曇覺)ㆍ위덕(威德) 등 모두 8인이 뜻을 맺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멀리까지 가서 경전을 찾았다. 우전국(于闐國)의 대사(大寺)에서 반차우슬(般遮于瑟) 법회를 만났다. 반차우슬이란 중국말漢言로는 5년마다 모든 대중들이 한데 모인다는 뜻이다. 삼장(三藏)의 여러 학승들이 저마다 법보(法寶)를 널리 펼쳐서 경을 설하기도 하고 율을 강하기도 하여 그의 학업(學業)에 따라 가르쳤다. 그 때에 담각 등 여덟 스님들은 그 인연에 따라 나누어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다투어 범음(梵音)을 익히고 중국말로 뜻을 분석하여 정밀하게 번역하여 저마다 들은 것을 써 두었다. 고창국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모아 1부를 만든 것이다. 그들이 유사(流沙)를 넘어 양주로 이르렀는데, 그 때의 사문 석혜랑(釋慧朗)은 하서(河西) 지방의 종장(宗匠)이어서 도업(道業)이 깊고 넓었으며 『방등경(方等經)』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 경에서 기록한 근원이 되는 것은 비유(譬喩)에 있다고 생각된다. 비유에서 밝히는 것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기재한 것이므로 선과 악이 서로 바뀌는데 있는 것이니, 곧 어진 이賢者와 어리석은 자愚者로 분류하게 된다. 앞 시대에 전한 경전에서 이미 비유라는 제목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이름을 바꾸어서 현우(賢愚)라고 지은 것이다.”

(2) 석담요(釋曇曜)
대길의신주경(大吉義神呪經) 2권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법상록』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1권네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도조록(竺道祖錄)』과 『속고승전』에 보인다.
부법장전(付法藏傳) 4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리류지록(菩提流支錄)』과 『속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3부 7권이다.『대길의신주경』 1부 2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정도삼매경』 등 2부 5권은 궐본이다.

사문 석담요는 어디 사람인지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젊을 때에 출가하여 몸가짐과 행이 굳고 곧았으며, 사람됨이 바르고 검약하였다.
위(魏)의 화평(和平) 연간(460~465)에 북대(北臺)에 머물러 있을 때는 소현통(昭玄統)으로서 승가 대중[僧衆]을 편안히 의탁하게 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미묘함을 얻게 하였다.
항안(恒安)의 석굴(石窟) 통락사(通樂寺)에 머물렀으니 곧 위제(魏帝)가 지은 절이었다. 항안에서 서북쪽으로 30리 떨어진 무주산(武周山) 북면(北面)의 바위 낭떠러지에 돌을 새겨 불사(佛寺)를 건립하여 이름을 영암사(靈巖寺)라 지었다. 감실(龕室)의 크기는 높이가 20여 길[丈]에 달하였고, 3천여 인을 수용할 만하였다.
앞면에는 따로 불상을 새겨 온갖 솜씨와 아름다움을 다하였고, 감실에는 따로 다른 모양을 새기어 사람과 귀신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것이 30리까지 즐비하게 서로 이어졌다. 동쪽 머리의 승사(僧寺)에는 항상 천여 인의 비석이 현재에도 남아 있으니 갑자기 다 자세히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이보다 앞서 태무황제(太武皇帝) 태평진군(太平眞君) 7년(446)에 사도(司徒) 최호(崔皓)가 간사하고 아첨을 잘하여 황제로 하여금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를 숭상하고 존중하게 하여 그를 천사(天師)로 배(拜)하고 도교(道敎)를 더욱 존경하게 하면서 승려들을 죽이고 사탑을 불태웠다. 그리고 경인(庚寅, 450)에 이르러서 태무황제가 문둥병에 걸리게 되자 비로소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겸하여 백족선사(白足禪師)가 와서 그의 지혜를 열어 주었으므로 부끄러움과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곧 최호를 죽여 저자에다 매장하고 그의 입이 묻힌 곳에 뒷간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그곳을 더럽히게 하였다.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태무황제가 죽고 손자 문성제(文成帝)가 자리에 오르자 곧 탑과 절을 세우고 경전을 찾아 모으게 하니 법이 허물어진 지 7년 만에 삼보(三寶)가 다시 흥성하게 되었다.
석담요는 앞서 불교가 능멸당하고 피폐해짐을 개탄하다가 이제 다시 회복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화평 3년 임인(壬寅, 462)에 옛날 북대에 지었던 석굴(石窟)에 여러 덕망 있는 스님들을 모아 천축의 사문들을 상대하면서 『대길의신주경』 등 3부를 번역하여 후현(後賢)들에게 유통되게 하였으니, 그의 뜻은 불법이 끊어지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었다.

(3) 길가야(吉迦夜)
대방광보살십지경(大方廣菩薩十地經) 1권다섯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장엄보리심경(莊嚴菩提心經)』과 같은 동본이다. 『시흥록』과 도혜의 『송제록』에 보인다.
칭양제불공덕경(稱揚諸佛功德經) 3권또한 『집제불화경(集諸佛花經)』이라고도 하고, 또한 바로 『집화경(集華經)』이라고도 하며, 일명 『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 등이 번역해 낸 경과 동본이다. 도혜의 『송제록』에 보인다.
방편심론(方便心論) 1권혹은 2권으로 되어 있다. 무릇 4품(品)으로 되었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동진(東晋)의 각현(覺賢)이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도혜의 『송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 6권혹은 인연(因緣)이란 글자가 없으며, 또한 『부법장경(付法藏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 또는 2권으로 되어 있다. 도혜의 『송제록』에 보인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송(宋)나라 지엄(智嚴)과 위(魏)나라 담요(曇曜)가 번역하여 낸 경과는 동본이다. 역시 『승우록』에 보인다.
잡보장경(雜寶藏經) 8권목록에서는 “13권이다”라고 하였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지금은 다만 8권이 있을 뿐이다. 도혜의 『송제록』과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은 5부 19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길가야는 중국말로는 하사(何事)라고 부르며, 서역 사람이다.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에 생각이 있었고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효문제(孝文帝) 연흥(延興) 2년 임자(壬子, 472)에 소현통(昭玄統) 사문 담요(曇曜)를 위하여 『대방광보살십지경』 등 5부를 번역하였으며, 유효표(劉孝摽)가 받아썼다.

(4) 담마류지(曇摩流支)
신력입인법문경(信力入印法門經) 5권정시(正始) 원년(504)에 번역되어 나왔다. 화엄(華嚴)의 권속경(眷屬經)이다.
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체불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 2권또한 『여래입일체불경계경(如來入一切佛境界經)』이라고도 한다. 경명(景明) 2년(501)에 백마사(白馬寺)에서 번역하였으며, 첫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양(梁)나라 승가바라(僧伽婆羅)가 번역한 『도일체제불경계지엄경(度一切諸佛境界智嚴經)』과 동본이다.
금색왕경(金色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구담류지(瞿曇流支)가 번역한 경과 동본이며, 정시 4년(507)에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에서는 “보리류지(菩提留支)가 뒤에 다시 거듭 대조하여 교감(校勘)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상은 3부 8권이다.앞의 2부의 7권은 경본이 현재 있으며,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담마류지는 중국말로는 법희(法希) 또는 법락(法樂)이라 부르며, 남인도(南印度) 사람이다. 집을 버리고 도(道)에 들어가 특히 율장(律藏)으로 이름이 전해졌으며, 도를 넓히는 일을 책무로 삼아 중생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선무제(宣武帝) 때(500~515)에 낙양(洛陽)을 돌아다니면서 교화를 폈다. 경명(景明) 2년 신사(辛巳, 501)로부터 정시(正始) 4년 정해(丁亥, 507)에 이르기까지 선무제를 위하여 『신력입인법문경』 등 3부를 번역하였으며, 사문 도보(道寶)가 받아썼다. 『장방록』 등 목록에 보인다.

(5) 석법장(釋法場)
변의장자자경(辯意長者子經) 1권혹은 『변의장자자소문경(辯意長者子所問經)』이라고도 하며, 일명 『장자변의경(長者辯意經)』이라고도 한다. 『법상록』에 보인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석법장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역시 선무제(宣武帝) 때(500~515)에 낙양에서 『변의장자자경』 1부를 번역하였다.목록을 지은 이는 “삼가 『고승전』 등을 살펴보면 모두 이르되 ‘진(晋)나라 때의 도안(道安)이 출가한 지 몇 해 뒤 비로소 스승에게 경을 구해 달라 하자, 그 스승은 맨 처음에 『변의경(辯意經)』 1권을 주었다. 그 경에는 5천 언(言)이나 수록되어 있었는데, 도안은 한 번 보고 바로 모두 암송하여 버렸다. 그리고 또 도안은 실역(失譯)에 다시 그 경의 이름을 기재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에 의거하면 동진(東晋) 때에 『변의경』이 이미 세상에 유행되고 있었거늘 어떻게 위(魏)나라 선무제 때에 처음 석법장이 번역하여 내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6) 늑나마제(勒那摩提)
묘법연화경론(妙法蓮華經論) 1권바수반두(婆藪盤頭)보살이 지었다. 또한 『법화경론(法華經論)』이라고도 하며, 시중(侍中) 최광(崔光)과 승랑(僧朗) 등이 받아썼다. 『장방록』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리류지가 번역해 낸 경과 대동소이하다. 표제에서는 “『묘법연화경우바리사(妙法蓮華經優波提舍)』이다”라고 하였다.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4권또한 『보성분별칠승증상론(寶性分別七乘增上論)』이라고도 하며, 혹은 3권, 또는 5권으로 되어 있다. 조흔(趙欣)의 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리류지(菩提留支)가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보적경론(寶積經論) 4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보리류지가 번역한 『대승보적경론(大乘寶積經論)』과 동본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은 3부 9권이다.앞의 2부 5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뒤의 1부 4권은 궐본이다.

사문 늑나마제는 혹은 바제(婆提)라 하기도 하는데, 중국말로는 보의(寶意)라 부르며, 중인도 사람이다. 학식이 풍부하고, 이(理)와 사(事)에 모두 통하였으며, 삼장(三藏)의 교문(敎文)을 무려 1억의 게송을 암송하였으니, 한 게송은 32자(字)다. 그는 더욱 선관(禪觀)에 밝았으며, 그의 뜻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에 있었다.
선무제(宣武帝) 정시(正始) 5년 무자(戊子, 508)에 처음으로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비로소 『묘법연화경론』 등 3부를 번역하였다. 사문 승랑(僧朗)ㆍ각의(覺意)와 시중(侍中) 최광(崔光) 등이 받아썼다. 경을 번역한 날에는 낙양의 내전(內殿)에서 보리류지가 경본을 전하였고, 늑나선다(勒那扇多)가 참예하여 도왔다.
그 후에 세 대덕(大德)은 근거 없는 소문을 쫓아 각자 배워 익힌 것을 전하며 서로 방문하지 않았다. 황제는 불법을 널리 펴서 흥성시키고 왜곡되고 장황한 것을 간략하게 펴기 위하여 세 처소에 모두 칙명을 내려 저마다 번역하여 마치게 하고 이에 참조하여 교정하게 하였다. 그 동안 숨어 있으면서 서로 왕래가 없어서 글과 뜻은 때로는 겹치거나 다르게 꿰매어져 있었다. 뒷사람들이 그것을 합쳐서 함께 통부(通部)로 만들었다. 『보창록』 등의 목록에 보인다.이 때문에 『법화경론(法華經論)』ㆍ『보적경론(寶積經論)』ㆍ『보성론(寶性論)』 등에는 각각 두 본(兩本)이 있게 되었다.
처음 보의(寶意) 사문은 신통한 이해력이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위(魏)나라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고 기억하면서 잘 쓰이지도 않은 궁벽한 말까지 두루 다 알았다.
황제는 매양 그에게 『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하게 하였다. 해석할 때는 깨닫게 하는 정묘한 뜻이 매번 튀어나왔다. 하루는 높은 자리에 바로 앉았는데, 어떤 사람이 홀(笏)에다 스님의 이름을 새겨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높은 벼슬아치[大官] 같았다. 그가 말하였다.
“천제(天帝)의 명을 받들어 법사께 『화엄경』 강의를 청하러 왔습니다.”
보의는 말하였다.
“지금 이 법석(法席)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경문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부탁하는 명을 마땅히 따르겠습니다. 비록 그렇게 하겠으나, 법사(法事)를 돕는 데는 혼자는 할 수 없으니, 도강(都講) ㆍ 향화(香火) ㆍ 유나(維那) ㆍ 범패(梵唄)도 모두 필요하므로 청하여 정하도록 하십시오.”
그 사자(使者)는 곧 청한 바대로 하고 여러 승려들에게 강의한 것을 보고 있다가 법사(法事)가 다 끝나게 되자, 또 앞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천제의 명을 받들어야 하므로 내려와서 맞이합니다.”
그러자 보의는 이에 웃음을 머금고 기뻐하는 낯으로 대중에 하직을 고하고 갑자기 그 법좌(法座)에서 그대로 앉아 입적하였다. 도강 등의 네 스님도 역시 때를 같이하여 함께 입적하였다. 이 일을 듣고 보고 한 모든 이들은 전에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비야사문경(毗耶娑問經) 2권『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모두 “보의가 낙양(洛陽)에서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으나, 이제 그 경의 서문을 살펴보면 “흥화(興和) 4년(542)에 구담류지(瞿曇流支)가 업도(鄴都)에서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은 구담류지의 기록에 옮겼다.
십지경론(十地經論) 12권주(注)에는 “처음 논을 번역할 때에 아직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여 기세간(器世間)이라 할 것을 잔자세간(盞子世間)이라 하였다. 뒷날 궁전에 들어가 재(齋)를 지내다가 여러 숙덕(宿德)들이 제자에게 그릇을 가져 오게 하자, 모두 발우 뚜껑을 가져다 준 것을 보고 그제서야 그릇이란 말을 깨치고, 이 모두 이름을 고쳐 기세간(器世間)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십지경론』을 『장방록』 등의 목록에서는 ‘늑나마제가 보지류지(菩提留支)와 함께 번역하였다’고 하여 두 곳에 모두 기재하고 있다. 이제 최광(崔光)이 지은 논의 서문論序을 살펴보면 ‘보리류지와 늑나마제가 낙양전(洛陽殿)에 있으면서 두 사람이 같이 번역하였고, 불타선다(佛陁扇多)가 말을 전하였으며, 황제가 몸소 받아 썼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기록에 각기 두는 것은 이치로 옳지 못하다. 지금은 합하여 한 경본으로 하여 보리류지 기록에다 둔다.
용수보살화향방(龍樹菩薩和香方) 1권무릇 50가지의 법이 있는데, 이제 삼장(三藏)의 가르침이 아니므로 기록하지 않는다.
이상 3부는 이제 모두 삭제한다.

(7) 보리류지(菩提留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1권영평(永平) 2년(509)에 호상국(胡相國)의 집에서 번역하였다. 이 경은 두 번째 번역이며, 승랑(僧朗)이 받아썼다. 진나라 때의 구마라집 번역본과 『대반야경(大般若經)』 제9회(會)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과 같은 동본이다. 『법상록』에 보인다.
미륵보살소문경(彌勒菩薩所問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대승방등요혜경(大乘方等要慧經)』과 동본이다. 조흔(趙欣)의 집에서 번역하였으며, 각의(覺意)가 받아썼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고, 제41회(會)에 해당하는데, 이름을 고쳐 『미륵보살문팔법회(彌勒菩薩問八法會)』라고 한다.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 6권신구(神龜) 원년(518)에 낙양에서 번역되었으며, 이 경은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축법호(竺法護)의 『지심경(持心經)』과 구마라집의 『사익경(思益經)』은 모두 동본인데 다르게 번역되어 나왔다. 『법상록』과 『속고승전』에 보인다.
심밀해탈경(深密解脫經) 5권전본(全本)이 처음 번역되었다. 연창(延昌) 3년 (514)에 낙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변(僧辯)이 받아썼다. 당(唐)나라 때 번역한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상속해탈절경(相續解脫節經)』 등과 모두 동본이다. 『법상록』과 『속고승전』에 보인다.
입능가경(入楞伽經) 10권연창 2년(513)에 번역되었으며, 세 번째의 번역이다. 송(宋)나라 공덕현(功德賢)이 번역한 4권 『능가경(楞伽經)』과 당나라 때 번역된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등과 모두 동본이며, 승랑(僧朗)과 도잠(道湛)이 받아썼다. 『속고승전』에 보인다.
대살차니건자소설경(大薩遮尼乾子所說經) 10권혹은 수기(受記)라는 글자가 더 있고, 소설(所說)이라는 글자가 없기도 하다. 혹은 7권, 또는 8권으로 되어 있다. 일명 『보살경계분신법문경(菩薩境界奮迅法門經)』이라고도 한다. 정광(正光) 원년(520)에 낙양 사주목(司州牧) 여남왕(汝南王)의 집에서 번역하였으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신통변화경(神通變化經)』과 동본이다.
무자보협경(無字寶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승랑(僧朗)이 받아썼다. 당(唐)나라 때 번역된 『대승리문자경(大乘離文字經)』과 같은 동본이다.
가야산정경(伽耶山頂經) 1권또한 『가야정경(伽耶頂經)』이라고도 하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의 『문수문보리경(文殊問菩提經)』과 같은 동본이다.
방불경(謗佛經) 1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서진(西晋)의 축법호가 번역한 『결정총지경(決定總持經)』과 동본이다.
대방등수다라왕경(大方等修多羅王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각정전유경(覺定轉有經)』과 동본이다.
문수사리순행경(文殊師利巡行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수(隋)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가 번역한 『문수시리행경(文殊尸利行經)』과 동본이다. 각의(覺意)가 받아썼다.
불어경(佛語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주(周)나라 때 굴다(崛多)가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승랑(僧朗)이 받아썼다.
불명경(佛名經) 12권혹은 13권, 또는 나누어 20권으로 하기도 한다. 정광(正光) 연간(520~534)에 호상국(胡相國)의 집에서 번역하였다. 『속고승전』에 보인다.
법집경(法集經) 6권혹은 7권, 또는 8권으로 되어 있다. 연창(延昌) 4년(515)에 낙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랑(僧朗)이 받아썼다. 『법상록』과 『속고승전』에 보인다.
호제동자다라니경(護諸童子陁羅尼經) 1권또한 『호제동자청구남녀다라니경(護諸童子請求男女陁羅尼經)』이라고도 한다.
차마바제수기경(差摩婆帝受記經) 1권정광 연간(520~534)에 낙양(洛陽)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1권정광 연간(520~534)에 낙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7장이다. 목록에는 “2권이다”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
십지경론(十地經論) 12권혹은 15권으로 되어 있다. 천친(天親)보살이 지은 『석십지경(釋十地經)』이다. 영평(永平) 원년(508) 4월에 태극자정(太極紫亭)에서 번역되었으며, 황제가 손수 받아썼다. 뒤에 사문 승변(僧辯) 등에게 맡겨 마치게 하였는데, 논의 글이 다 끝난 것은 4년(511)의 첫 여름이었다. 최광(崔光)의 서문에 보인다.
미륵보살소문경론(彌勒菩薩所問經論) 5권혹은 6권, 또는 7권, 또는 10권으로 되어 있다. 『미륵소문경(彌勒所問經)』을 해석한 것인데, 곧 『보적경』 제41회(會)이다. 이 논은 낙양의 조흔(趙欣)의 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대승보적경론(大乘寶積經論) 4권첫 번째의 번역이며, 보의(寶意)가 번역한 것과 동본이다. 단권(單卷) 『보적경』을 해석한 것이니, 곧 『대보적경』 제43회 「보명보살회(普明菩薩會)」가 그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蜜經論) 3권천친보살이 지었다. 영평(永平) 2년(509)에 호상국(胡相國)의 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랑(僧朗)이 받아썼다. 첫 번째의 번역이며, 당(唐)나라 때 의정(義淨)이 번역한 『능단금강론석(能斷金剛論釋)』과 같은 동본이다.
문수사리보살문보리경론(文殊師利菩薩問菩提經論) 2권일명 『가야산정경론(伽耶山頂經論)』이라고도 한다. 바수반두보살이 지었다. 천평(天平) 2년(535)에 업성(鄴城)의 은주사(殷周寺)에 있으면서 번역하였으며, 승변(僧辯)과 도잠(道湛)이 받아썼다.
법화경론(法華經論) 2권표제에서는 “『묘법연화경우바리사(妙法蓮華經優波提舍)』이다”라고 하였으며, 혹은 1권으로 되어 있다. 담림(曇林)이 붓으로 받아썼고 아울러 서문을 지었으며,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앞의 보의(寶意)가 번역하여 낸 것과 동본이다. 처음에 귀경송(歸敬頌)이 있는 것이 바로 이 경론이다. 『속고승전』에 보인다.
승사유범천소문경론(勝思惟梵天所問經論) 4권혹은 3권으로 되어 있다. 보태(普泰) 원년(531)에 낙양의 원조탕(元挑湯)의 집에서 번역하였으며, 승변과 승랑이 받아썼다. 목록에서는 “10권이다”라고 하였으나, 마땅히 착오다. 『속고승전』에 보인다.
무량수경론(無量壽經論) 1권표제에서는 “『무량수경우바리사원생게(無量壽經優波提舍願生偈)』이다”라고 하였으며, 바수반두보살이 지었다. 영안(永安) 2년(529) 낙양의 영녕사(永寧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승변이 받아썼다.
십이인연론(十二因緣論) 1권정의(淨意)보살이 지었다.
백자론(百字論) 1권제바(提婆)보살이 지었다.
파외도소승사종론(破外道小乘四宗論) 1권제바보살이 지었다.
파외도소승열반론(破外道小乘涅槃論) 1권제바보살이 지었다.
보성론(寶性論) 4권혹은 5권으로 되어 있다. 제일 먼저 번역되어 나왔다. 보의(寶意)가 번역한 논과 동본이다. 이상은 모두 『장방록』과 『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이상은 30부 101권이다.앞의 29부는 현재 그 경책이 있고, 뒤의 『보성론』 1부는 궐본이다.

사문 보리류지는 중국말로는 도희(道希)라고 부르며, 북인도 사람이다. 삼장(三藏)에 두루 통하고 다라니[總持]에 미묘하게 들어갔으며, 뜻은 불법을 널리 펴는 데에 두고, 두루 다니면서 보고 듣고 하였다. 마침내 도를 마음에 품고 밤을 걸어 멀리 총령(葱嶺) 부근까지 이르게 되었다.
위(魏)나라 영평(永平) 연간(508~511)에 동화(東華)에 머물러 있었는데, 선무제(宣武帝)가 명을 내려 맞이하여 남모르게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고 위로하였다. 뒤에 영녕대사(永寧大寺)에 머무르게 하여 공양이 풍족하게 하고 아주 융숭하게 접대하였으며, 7백의 범승(梵僧)에게도 다 같이 공양을 두루 공급하였다. 그리고 칙명으로 보리류지에게 역경의 원장(元匠)이 되게 하였다.
그 절은 본래 효명(孝明)황제 희평(凞平) 원년(516)에 영태후(靈太后) 호(胡)씨가 세운 절로 궁성 앞 창합문(閶闔門)의 남쪽 어도(御道) 동쪽에 있었다. 그 절 안에는 9층의 부도(浮圖)가 있었는데, 목조로 만들어 높이가 90여 길[丈]에 달하였다. 위쪽에는 또 황금 찰간(刹竿)이 있어 그 높이가 열 길[十丈]에 달하여 땅에서는 천 자[尺]나 솟아나 있었다. 대(臺)에서 멀리 백 리(里)나 떨어진 외곽에서도 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처음 터를 닦던 날 땅을 파서 황천(黃泉)에 이르러 금상(金像) 32구(軀)를 얻게 되었다. 태후는 상서로운 조짐이며 법을 받들고 믿는 좋은 징후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기이한 구슬로 장식을 만들어 세간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다하도록 찰간의 밑 둥에 금으로 된 보병(寶甁)을 설치하였다. 그 병에는 스물다섯 섬[斛]을 담을 수 있었고, 이슬을 받는 금 쟁반은 열한 겹으로 만들어졌으며 쇠사슬로 반듯하게 서로 버티게 하였다. 그 쟁반과 사슬 위에는 모두 금 풍경11)[金鐸]이 있어서 마치 하나의 돌로 된 옹기와 같았다.
9층 탑신의 모든 모서리에는 모두 큰 풍경[鐸]을 매달아 아래 위에 모두 130개가 달려 있었다. 그 탑의 사면은 아홉 칸으로 되어 있었고 여섯 개의 창과 세 개의 지게문[戶]은 모두 붉은 칠[朱漆]로 된 부채 모양의 문[扉]이었다. 여러 개의 금방울을 달아 늘어뜨렸는데, 층마다 5천4백 개씩이나 있었다. 또 방울의 머리 부분에는 금(金)을 입혀 놓은 불사(佛事)는 정밀하고 미묘하였다. 토목 공사에는 다 금빛으로 깔아 장식하여 수를 놓아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긴긴 밤 바람이 불면 방울과 풍경의 소리가 뒤섞여 울려 댕그랑 하는 소리가 10여 리 밖에까지 들렸다. 북쪽에는 정전(正殿)이 있는데, 그 형상은 태극(太極)을 본떠 만들었다. 그 안의 모든 불상은 금ㆍ옥ㆍ구슬로 수를 놓아 그 정교한 아름다움은 당대에 견줄 데가 없었다.
천여 칸의 승방(僧房)이 서로 인접하였고 누대(樓臺)와 도관(道觀)이 별처럼 펼쳐져 들쭉날쭉하게 사이사이 솟아 있으며, 주홍빛과 자줏빛으로 조각을 장식하고 단청(丹靑)으로써 무늬를 이루었다.
향나무ㆍ잣나무ㆍ쥐똥나무ㆍ소나무와 기이한 풀들이 무더기로 모여 있고, 사원의 담장은 빙 둘러쳐져 있는데 모두 서까래와 기와로 그 위를 덮었다.
정남쪽으로 세 문이 있고, 누(樓)는 세 겹으로 세 길이 열려 있어 땅에서의 거리가 2백여 자에 달하여 그 모습은 마치 하늘로 통하는 문과 같았으며 번쩍번쩍 빛나며 화려하였다. 협문(夾門)에는 네 역사(力士)와 네 마리의 사자가 도열하고 있는데, 금ㆍ옥으로 장식되어 장엄하고 찬란하였다.
동ㆍ서의 두 문도 이와 같았으나 다른 것은 오직 누각이 두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북문으로 통하는 길은 다만 길만 있을 뿐이었다.
그 네 문 밖에는 느티나무가 심어져 있고 맑은 물로 주위를 에워싸게 하여 서울로 여행하는 나그네들이 그 그늘에서 쉬어 갔다. 길에는 날아다니는 먼지가 하나도 없었으며, 하늘을 가리는 구름의 혜택을 입지 않고도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주니 이것이 어찌 세속의 모습이라 하겠는가?
이에 조칙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 상경(常景)에게 명하여 절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때문에 비문에는 “수미산(須彌山)의 보배 전각[『殿]과 도솔천(兜率天)의 청정한 궁전[淨宮]도 오히려 이보다는 못하리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외국에서 바친 경전과 불상도 모두 이 절에 소장되었다.
절이 처음 이룩되자 명제(明帝)와 태후(太后)는 함께 부도(浮圖)에 올라 궁중을 내려다보니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듯하였다. 아래로는 구름과 비에 임하고 위로는 하늘이 맑고 밝았다. 궁전 안의 일들이 보이는 까닭에 사람들이 부도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당시 보리달마(菩提達摩)라는 서역의 사문이 있었는데, 파사국(波斯國) 사람이었다. 그는 서역으로부터 낙양(洛陽)에 와 돌아다니다가 이 절 금쟁반에 번쩍이는 햇빛이 구름 끝까지 비추며, 보배 방울이 바람을 머금어 천지 밖까지 울리는 것을 보고, 노래로 읊어 찬탄하면서 신공(神工)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며 스스로 말하였다.
“나이 150살이 되도록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데가 없었으나, 이와 같이 아름답고 정교한 절은 이 염부제(閻浮提) 안에는 없으리라. 부처님의 경계로 말한다 해도 역시 견줄 데 없겠구나.”
그리고 입으로 나무(南無)를 부르며 연일 합장하였다.
효창(孝昌) 2년(526)에 큰 바람이 불어 집이 쓰러지고 나무가 뽑혔는데, 찰간 위의 보병(寶甁)이 한 길 남짓한 땅 속으로 떨어져서 들어갔으므로 다시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새 보병으로 안치하였다.
영희(永凞) 3년(534) 2월 하늘에서 벼락이 내렸기 때문에 황제는 능운대(陵雲臺)에 올라가서 불길을 바라보고 남양왕(南陽王) 보거록상서장(寶炬錄尙書長) 손치(孫稚)를 파견하여 우림군(羽林軍) 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불을 끄게 하였다. 이때에 하늘에서 우레와 비가 쏟아지면서 천지가 캄캄해지고 눈과 싸라기도 번갈아가며 쏟아졌다. 그런데 새벽에 탑의 여덟 번째 층에서 불이 일어났다.
이때에 두 사람의 도인(道人)이 탑이 불에 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며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그 불길은 석 달이 넘도록 타올랐고 땅에 묻힌 찰주(刹柱)는 한 해가 다 가도록 연기가 남아 있었다.
그 해 5월에 어떤 사람이 동래군(東萊郡)에서 왔다면서 말하였다.
“부도(浮圖)가 바다 속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광명이 엄연하였으며, 함께 본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윽고 구름과 안개가 어지럽게 일어나더니 그 소재(所在)를 잃어버렸다.”
7월이 되어 평양왕(平陽王)은 시중(侍中) 곡사춘(斛斯椿)의 협공을 받아 서쪽 장안(長安)으로 패하여 달아났으며, 10월에는 낙양의 도읍지를 장업(漳鄴)으로 옮겼다.
이에 앞서 보리류지는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처음으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번역하였으며, 그 처음의 「명장(命章)」은 선무황제(宣武皇帝)가 친히 받아썼다. 그러한 뒤에 비로소 사문 승변(僧辯) 등에게 맡겨 논(論)의 글을 다 끝마치게 하였다. 불법이 융성해지고 뛰어난 사람들이 왕성하게 일어나니 서로 전해 주며 힘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삼장 보리류지는 낙양(洛陽)에서 선무제 영평(永平) 원년 무자(戊子, 508)로부터 업도(鄴都)에서 효정제(孝靖帝) 천평(天平) 2년 을묘(乙卯, 535)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서로 이어 번역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 등과 『십지론』 등 30부를 번역하여 내었다.
또 황제는 청신사(淸信士) 이곽(李廓)에게 명하여 『중경록(衆經錄)』을 찬술하게 하였다. 이곽은 학문이 유불(儒佛)에 통달하였고, 조리 있게 경론을 꿰뚫어 알아서 진실로 사표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에 이렇게 나와 있다.
“삼장법사 보리류지의 방 안에 있는 경론과 범본은 1만 아름[甲]은 족히 되며, 그가 새로 번역한 고본(藁本)만도 한 칸 방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의 지혜는 늑나(勒那)스님과 서로 비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신령한 깨달음과 총명하고 재빠른 이해력은 방언(方言)까지 훤하게 알았다. 또한 주술(呪術)에도 능하였으니 그와 대항하여 견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한번은 우물 입구에 앉아 있었는데, 목욕하는 물통은 비어 있었고, 제자는 아직 오지 않아서 물을 퍼줄 사람이 없었다. 이에 보리류지는 버들가지를 들어 우물 속을 가리키며 가만히 주문을 몇 번 외웠다. 그러자 샘물이 위로 솟아올라 우물 난간과 평평하게 되니, 발우로 바로 물을 떠서 세수를 하였다. 옆에 있던 승려들이 모두 보았지만 누구도 그의 신통력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저 큰 성인이라고 크게 탄복할 뿐이었다. 이에 보리류지가 말하였다.
“함부로 칭찬하지 말라. 이러한 술법은 외국에서는 모두가 다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만이 익히지 않아 성인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리고는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이 비밀 술법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분신왕문경(奮迅王問經) 2권
불필정입인경(不必定入印經) 1권
일체법고왕경(一切法高王經) 1권
제일의법승경(第一義法勝經) 1권
순중론(順中論) 2권이상의 5부 7권은 『장방록』 등의 기록에는 모두 “보리류지가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경의 첫 권을 번역한 서문의 기록을 살펴보면 모두 “구담류지(瞿曇留支)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은 구담류지의 목록에 기재한다.
보계보살사법경론(寶髻菩薩四法經論) 1권
삼구족경론(三具足經論) 1권
전법륜경론(轉法輪經論) 1권이상의 3부 3권은 『장방록』 등에서는 역시 “보리류지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 서문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는 비목지선(毗目智仙)의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3부도 역시 그의 목록에 옮겨 기재한다.
중경론목록(衆經論目錄) 1권이 목록은 보리류지의 찬술이다. 그러나 이것은 범본(梵本)을 따로 번역한 것이 아니므로 지금은 목록에 이것을 서술하고 여기서는 기재하지 않는다.
보살경계분신법문경(菩薩境界奮迅法門經) 10권『보창록』에는 “보리류지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 경은 『살차니건자경(薩遮尼乾子經)』의 이명(異名)이므로 따로 기재하지 않는다.

(8) 불타선다(佛陁扇多)
십법경(十法經) 1권원상(元象) 2년(539) 업도(鄴都)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양(梁)나라 승가바라(僧伽婆羅)가 번역한 경과 동본이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다. 제9회(會)에 해당하며, 「대승십법회(大乘十法會)」라 한다.
무외덕보살경(無畏德菩薩經) 1권또한 『무외덕녀경(無畏德女經)』이라고도 한다. 원상 2년(539)에 업도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다섯 번째 번역이다. 『아술달경(阿術達經)』과 같은 동본이다. 지금은 『보적경』에 편입되어 있고 제32회(會)에 해당하며, 담림(曇林)이 받아썼다.
여래사자후경(如來師子吼經) 1권정광(正光) 6년(525)에 낙양(洛陽)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첫 번째 번역이다. 당(唐)나라 일조(日照)가 번역한 『방광사자후경(方廣師子吼經)』과 동본이다.
은색녀경(銀色女經) 1권원상 2년(539)에 업도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서진(西晋)의 법거(法炬)가 번역한 『전세삼전경(前世三轉經)』과 동본이다.
정공경경(正恭敬經) 1권일명 『위덕다라니중설경(威德陁羅尼中說經)』이라 하며, 혹은 『정법공경경(正法恭敬經)』이라고도 한다. 원상 2년(539) 업도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첫 번째의 번역이다. 수(隋)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가 번역한 『선경경(善敬經)』과 동본이다.
전유경(轉有經) 1권원상 2년(539)에 업도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두 번째 번역이다. 보리류지(菩提留支)가 번역한 『방등수다라경(方等修多羅經)』과 동본이다.
아난다목거니하리다린니경(阿難陁目佉尼訶離隣尼經) 1권여덟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지겸(支謙)의 『무량문미밀지경(無量門微密持經)』과 같은 동본이다.
금강상미다라니경(金剛上味陁羅尼經) 1권정광(正光) 6년(525)에 낙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첫 번째의 번역이다. 수(隋)나라 사나굴다(闍那崛多)가 번역한 『금강장경(金剛場經)』과 동본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2권보태(普泰) 원년(531)에 낙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진(陳)나라 진제(眞諦)와 당(唐)나라 현장(玄奘)이 번역한 『섭대승론(攝大乘論)』과 동본이다. 아승거(阿僧佉)가 지었다.
무자보협경(無字寶篋經) 1권원상 2년(539)에 업도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두 번째의 번역이다. 보리류지 등과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이상의 10부는 다 같이 수나라 『비장방록(費長房錄)』과 당나라 『내전록』 등에 보인다.
이상은 10부 11권이다.앞의 9부 10권은 현재 그 경본이 있고,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사문 불타선다는 중국말로는 각정(覺定)이라 부르며, 북인도 사람이다. 신령하게 깨달아서 총명하고 민첩하며, 내외(內外) 학문에 널리 통달하였다. 특히 방언(方言)을 잘 알았으며, 예술(藝術)에도 매우 솜씨가 있었다.
효명제(孝明帝) 정광(正光) 6년 을사(乙巳, 525)로부터 효정제(孝靖帝)의 원상(元象) 2년 기미(己未, 539)에 이르기까지 낙양(洛陽)의 백마사(白馬寺)와 업도(鄴都)의 금화사(金華寺)에서 『십법경(十法經)』 등 10부를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曇林) 등이 받아썼다.

(9)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
득무구녀경(得無垢女經) 1권혹은 득(得)자가 없으며, 일명 『논의변재법문경(論議辯才法門經)』이라고 한다. 흥화(興和) 3년(541)에 업도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세 번째의 번역이다. 『보적경(寶積經)』 「무구시회(無垢施會)」와 법호(法護)가 번역한 『이구시경(離垢施經)』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성선주의천자소문경(聖善住意天子所問經) 3권흥화(興和) 3년(541)에 업성(鄴城)의 금화사(金華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담림(曇林)이 받아썼다. 다섯 번째 번역이며, 혹은 4권으로 되어 있다. 『보적경』 「선주의회(善住意會)」와 법호가 번역한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 등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비야사문경(毗耶娑問經) 2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보적경』 「광박선인회(廣博仙人會)」와 동본이다. 흥화 4년(542) 7월 7일에 상서령(尙書令) 의동(儀同) 고공(高公)의 집에서 번역되었으며, 30일에 마쳤다. 사문 담림(曇林)이 받아썼다. 경의 앞 서기(序記)에 보인다.
분신왕문경(奮迅王問經) 2권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자재왕경(自在王經)』과 동본이다. 흥화 4년(542) 7월 30일 상서령 의동 고공의 집에서 경본을 열어 처음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의 앞 서기(序記)에 보인다.
불필정입정입인경(不必定入定入印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의정(義淨)이 번역한 『입정부정인경(入定不定印經)』과 동본이다. 흥화(興和) 4년(542) 9월 19일 상서령 의동 고공의 집에서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의 앞 서기(序記)에 보인다.
일체법고왕경(一切法高王經) 1권일명 『일체법의왕경(一切法義王經)』이라고도 한다. 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제법용왕경(諸法勇王經)』과 같은 동본이다. 흥화 4년(542) 6월 23일 두태위(竇太尉)의 정창사(定昌寺)에서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曇林)이 받아썼다. 경의 앞 서기(序記)에 보인다.
제일의법승경(第一義法勝經) 1권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대위등광선인경(大威燈光仙人經)』과 동본이다. 흥화 4년(542) 9월 1일 상서령 의동 고공의 집에서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의 앞 서기에 보인다.
금색왕경(金色王經) 1권흥화 4년(542) 금화사(金華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두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담마류지(曇摩流支)가 번역하여 낸 경과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팔부불명경(八部佛名經) 1권또한 『팔불명경(八佛名經)』이라고도 한다. 흥화 4년(542) 금화사(金華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장방록』에 보인다.
순중론(順中論) 2권무착보살이 지었다. 무정(武定) 원년(543) 8월 10일 상서령 의동 고공의 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의 앞 서기에 보인다.
유식론(唯識論) 1권일명 『파색심(破色心)』이라 하며, 혹은 『유식무경계론(唯識無境界論)』이라고도 한다. 금화사에 있으면서 번역되었으며, 천친(天親)보살이 지었다. 첫 번째 번역이며, 진(陳)나라 진제(眞諦)가 번역한 『유식론(唯識論)』과 당(唐)나라 때 번역한 『이십유식론(二十唯識論)』은 모두 동본이다. 『장방록』에 보인다.
일수로가론(一輸盧迦論) 1권용수(龍樹)보살이 지었다. 금화사에 있으면서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그 목록에서는 “『이가수로가론(伊迦輸盧迦論)』이다”라고 하였다.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 70권흥화 원년(539)에 업성(鄴城)의 대승상(大承相) 고징(高澄)의 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담림(曇林)ㆍ승방(僧昉) 등이 받아썼다. 『장방록』에 보인다.
무구우바이문경(無垢優婆夷問經) 1권흥화 4년(542)에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해탈계본(解脫戒本) 1권가섭비부(迦葉毗部)에서 나왔다. 무정(武定) 원년(543) 업도의 시중(侍中) 상서령(尙書令) 고징(高澄)의 청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경 앞의 서문에 보인다. 승방(僧昉)이 붓으로 받아썼고, 아울러 서문을 지었다. 역시 『장방록』에 보인다.
보살사법경(菩薩四法經) 1권금화사(金華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담림(曇林)과 이희의(李希義) 등이 받아썼다. 『장방록』에 보인다.
보의묘아경(寶意猫兒經) 1권금화사에서 고중밀(高仲密)을 위하여 번역되어 나왔다. 『장방록』에 보인다.
독자도인문론(犢子道人問論) 1권금화사에서 고중밀을 위하여 번역되어 나왔다. 이희의(李希義)가 받아썼다.
이상은 18부 92권이다.『해탈계본』 이상의 15부 89권은 현재 경본이 있으며, 『보살사법경』 이하 3부 3권은 궐본이다.

바라문(婆羅門) 구담반야류지는 중국말로는 지희(智希)라고 부르며, 중인도 바라내성(波羅㮈城) 정지(淨志)의 종족이다. 젊어서부터 불법을 배워 경의 뜻을 미묘하게 익혔으며, 신령한 이해력이 남달리 뛰어났고, 방언(方言)을 잘 알았다.
효명제(孝明帝) 희평(凞平) 원년(516)에 돌아다니던 중에 낙양(洛陽)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뒤에 서울이 업(鄴)으로 옮겨질 때 역시 옮겨갔다.
효정제(孝靖帝) 원상(元象) 원년 무오(戊午, 538)로부터 무정(武定) 원년 계해(癸亥, 543)에 이르기까지 업성(鄴城) 안에 있는 금화사(金華寺)와 창정사(昌定寺) 두 절과 상서령(尙書令) 의동(儀同) 고공(高公)의 집에서 『득무구녀경(得無垢女經)』 등 18부를 번역하였다. 사문 승방(僧昉)ㆍ담림(曇林)과 거사(居士) 이희의(李希義)가 받아썼다.

회쟁론(廻諍論) 1권
업성취론(業成就論) 1권이상의 2론(論)은 『장방록』 등의 목록에는 모두 “구담반야류지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처음 번역된 경의 서기(序記)에 살펴보면 “비목지선(毗目智仙)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경의 기록에 의거하여 바로잡는다.

또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위(魏)나라 때 사문 보리류지는 반야류지와 함께 앞뒤로 경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목록에 옮겨 베낄 때 대부분 경솔하게 각기 위의 글자를 생략하고 다만 유지(流支)라고만 썼으므로 어느 유지인지 확실하지 않다. 지금까지 여러 역경 목록이 있으나 서로 뒤섞여 있으므로 어느 유지인지 확정하기 어렵다. 이제 실록(實錄)을 찾아보아도 그 건(件)에 대한 주(注)는 역시 앞에서와 같았다. 그러므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은 여러 후진(後進)을 기다릴 뿐이다.

(10) 월파수나(月婆首那)
마하가섭경(摩訶迦葉經) 2권또한 『대가섭경(大迦葉經)』이라고도 하며, 혹은 대(大)자가 없기도 하다. 흥화(興和) 3년(541)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좌복야(左僕射) 내시중(內侍中) 사도(司徒) 공손등(公孫騰)의 집에서 번역되었다. 경의 앞 서문에 보인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고, 제23회(會)에 해당한다.
승가타경(僧伽吒經) 4권원상(元象) 원년(538)에 사도 공손등의 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속고승전』에서 보인다.
빈바사라왕문불공양경(頻婆娑羅王問佛供養經) 1권흥화 3년12)(541)에 번역되었으며,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26권에서 나온 이역(異譯)이다.
이상은 3부 7권이다.앞의 2부 6권은 현재 경본이 있고, 뒤의 1부 1권은 궐본이다.

왕자(王子) 월파수나는 중국말로는 고공(高空)이라 부르며, 중인도 우선니국(優禪尼國)의 왕자이다.
효정제(孝靖帝) 원상(元象) 원년 무오(戊午, 538)로부터 흥화(興和) 3년 신유(辛酉, 541)에 이르기까지 업도(鄴都)의 사도(司徒) 공손등(公孫騰)의 집에서 『마하가섭경』 등 3부를 번역하였으며, 사문 승방(僧昉)이 받아썼다. 월파수나는 위(魏)에서 양(梁) 및 진대(陳代)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들을 다시 번역하였는데, 따로 기술한 바와 같다.

(11) 비목지선(毗目智仙)
보계보살사법경론(寶髻菩薩四法經論) 1권표제에서는 “『보계경사법우파제사(寶髻經四法優波提舍)』이다”라고 하였으며, 천친보살이 지었다. 흥화 3년(541) 9월 1일에 금화사(金華寺)에서 어사중위(御史中尉) 고중밀(高仲密)을 위하여 번역하였고, 사문 담림(曇林)이 받아썼다. 경 앞 서문에 보인다.
삼구족경론(三具足經論) 1권표제에서는 “『삼구족경우파제사(三具足經優波提舍)』이다”라고 하였으며, 천친보살이 지었다. 흥화 3년(541) 9월 13일에 금화사에서 표기대장군 고중밀을 위하여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曇林)이 받아썼다. 경 앞 서문에 보인다.
전법륜경론(轉法輪經論) 1권표제에는 “『전법륜경우파제사(轉法輪經優波提舍)』이다”라고 하였으며, 천친보살이 지었다. 흥화 3년(541) 8월 11일에 금화사에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발해(勃海) 고중밀을 위하여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 앞 서문에 보인다.
업성취론(業成就論) 1권천친보살이 지었으며,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당(唐)나라 때 번역된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과 동본이다. 흥화 3년(541) 7월 25일에 고중밀을 위하여 금화사에서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 앞 서문에 보인다.
회쟁론(廻諍論) 1권용수보살이 지었다. 흥화 3년(541) 3월 20일에 금화사에서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어사중위 발해 고중밀(高仲密)을 위하여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이 받아썼다. 경 앞 서문에 보인다.
이상은 5부 5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사문 비목지선은 북인도 오장국(烏萇國) 사람이며, 찰리 왕 종족[刹利王種]이며, 석가(釋迦)의 후예(後裔)이다. 옛날 비유리왕(毗流離王)이 가비라성(迦毗羅城)을 무너뜨리고 석가 종족을 마구 죽였다. 그때 네 석가 자손이 그들의 핍박에 분개하여 계율을 범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비유리왕의 군사들과 싸웠다. 마침내 비유리왕을 물리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비라성에서는 (네 석가 자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불법을 위하는 종족으로서 군사를 내어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는데, 너희들은 싸워 그 군사들을 물리쳤으니 우리의 종족이 아니다.”
이리하여 내쫓겼으므로 멀리 떠나서 여러 나라에 몸을 의탁하였다. 그들은 본시 성인의 후예였으므로 다투어 한 갈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네 석씨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서 각각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 지금의 오장국(烏萇國) 범연왕(梵衍王) 등은 모두 그들의 후예인데, 자자손손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비목지선법사는 바로 이들 왕족인데, 삼장(三藏)을 잘 배워 익혔고, 그 중에서도 『아비담(阿毗曇)』을 가장 잘하였다. 구담류지와 위(魏)나라의 경계를 같이 돌아다녔는데, 구담류지를 존경하여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효정제(孝靖帝) 흥화(興和) 3년(541) 신유(辛酉, 541)에 업성(鄴城)의 금화사(金華寺)에 머물면서 구담류지와 함께 『보계보살사법경론(寶髻菩薩四法經論)』 등 5부를 번역하였으며, 사문 담림(曇林)이 받아썼다.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어사중위(御史中尉) 발해(勃海) 고중밀(高仲密)은 그들의 단월(檀越 : 시주자)이 되어 번역해 주기를 청하였고 공양을 올렸다. 이런 사실은 모두 경의 첫머리 서기(序記)에 보인다.
비목지선법사는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교화를 널리 폈으며, 유사(流沙)의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온 것도 그의 뜻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범문(梵文)을 이미 번역하였으므로 의당 부권(部卷)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견문이 얕고 좁아서 아직 두루 찾아보지 못하였으므로 우선 보게 된 5경만을 여기 기재하여 둔다. 그러므로 후진(後進)들이 다행히 번역된 경을 찾게 된다면 부디 이어 보충하여 기재해 주기 바란다. 법문(法門)에 잘못이 없게 함이 어찌 잘한 일이 아니겠는가?
위(魏)나라로부터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전해오는 목록이 하나만이 아니나, 비목지선법사는 아직 기록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법을 넓힌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고, 높이 수행한 자취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애닯고 슬픈 일이며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12) 달마보리(達磨菩提)
열반론(涅槃論) 1권혹은 『대반열반경론(大般涅槃經論)』이라고도 한다. 바수반두(婆藪盤豆)보살이 지었으며, 『대경(大經)』을 간략하게 해석한 것이다. 『내전록(內典錄)』에 보인다.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본(本)이 현재 있다.

사문 달마보리는 중국말로는 법각(法覺)이라 번역한다. 『내전록』에는 “달마보리가 『열반론』을 번역하였다”라고 하였다. 제왕의 연대를 나타내지 않고 위(魏)나라 말에 편입시켰으므로, 지금도 역시 그와 같이 여기에 덧붙여 둔다.또 『열반론』 3권이 있는데, 또한 표제에서는 “달마보리의 번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문을 찾아보니 앞의 논을 해석한 것이데, 혹 보리달마가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16) 북제(北齊) 시대
북제의 고(高)씨는 업(鄴)에 도읍하고 있었다.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원년 경오(庚午, 550)로부터 고항(高恒)시호(諡號)가 없다. 승광(承光) 원년 정유(丁酉, 577)에 이르기까지 무릇 6주(主) 28년을 지나는 동안에 승려와 속인 2인이 번역하여 낸 경론은 8부 52권이다.

북제 사문 나련제려야사(那連提黎耶舍)7부 51권. 경ㆍ논
거사(居士) 만천의(萬天懿)1부 1권. 경

(1) 나련제려야사(那連提黎耶舍)
보살견보삼매경(菩薩見寶三昧經) 16권혹은 14권으로 되어 있다. 천통(天統) 4년(568)에 천평사(天平寺)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지금은 『보적경(寶積經)』에 편입되어 있으며, 제16회(會)에 해당한다.
대집월장경(大集月藏經) 10권표제에서는 “『대집경(大集經)』 「월장분(月藏分)」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12권, 또는 15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월장경(月藏經)』이라고도 한다. 천통 2년(566)에 천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대집수미장경(大集須彌藏經) 2권안의 표제에서는 “『대승대집경(大乘大集經)』 「수미장분(須彌藏分)」 제15이다”라고 하였다. 혹은 바로 『수미장경(須彌藏經)』이라고도 한다. 천보(天保) 9년(558)에 천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대비경(大悲經) 5권천보 9년(558)에 천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대주록(大周錄)』에서는 “『열반경』의 지파(支派)이다”라고 하였다.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11권혹은 10권으로 되어 있다. 천보 8년(557)에 천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시등공덕경(施燈功德經) 1권또한 『연등경(然燈經)』이라고도 한다. 천보 9년(558)에 천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법승아비담심론경(法勝阿毗曇心論經) 6권대덕(大德) 우파선다(優波扇多)가 지었으며, 혹은 7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고, 또는 법승(法勝)이란 글자가 없기도 하며, 혹은 별역(別譯)이란 글자가 더 붙기도 하고, 혹은 『법승아비담론(法勝阿毗曇論)』이라고도 한다. 하청(河淸) 2년(563)에 천평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모두 『장방록』에 보인다.
이상은 7부 5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모두 있다.

사문 나련제려야사는 중국말로는 존칭(尊稱)이라 부르며, 북인도 오장국(烏場國) 사람이다. 바른 발음으로는 오다(鄔茶)라고 해야 한다.다(茶) 음은 지(持)와 야(耶)의 반절이다. 현장(玄奘)법사는 오장나(烏仗那)라 하는데, 당(唐)나라 말로 번역하면 동산이란 뜻이며, 옛날 전륜왕(轉輪王)이 있던 동산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 나라 임금은 부처님과 같은 씨족이고, 성(姓)도 역시 석가(釋迦)이며, 찰제리(刹帝利) 종족이다.이 찰제리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토전주(土田主)라는 뜻이다. 이것은 겁(劫)이 시작된 초기에 먼저 땅을 나누어 주인이 되게 하였으므로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 지금은 이른바 국왕(國王)이 바로 그것이다.
나련제려야사는 나이 열일곱 살 때 발심하여 출가하였고, 이어 이름난 스승을 찾아 만나 바른 가르침을 두루 들었다. 스물한 살 때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여러 숙로(宿老)13)들이 부처님의 행적을 찬탄하면서 “어느 나라에는 부처님의 발우[鉢]가 있고, 어느 나라에는 옷과 정골사리[頂骨 : 머리 뼈]와 치아가 있어서 신비한 변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마침내 곧 마음을 일으키어 우러러 받들기를 원했다.
처음 계(戒)를 받으려면 모름지기 율상(律相)을 알아야 되므로 다섯 여름 안거를 채우고 유행(遊行)길을 떠났다. 그러므로 천제(天梯) 및 석대(石臺)의 자취와 용묘(龍廟)와 보탑(寶塔)이 있는 지방의 모든 나라를 두루 여행하면서 친견하고 머리 숙여 예배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일찍이 죽원사(竹園寺)에서는 한 번 가서 10년 동안이나 머무르면서 승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명덕(明德) 스님들을 많이 만났다. 어떤 한 존자가 사람의 기연(機緣)을 보고 깊이 알았다. 그 존자가 나련제려야사에게 말하였다.
“만일 그대가 고요히 도를 닦을 수만 있다면 성인의 과위(果位)를 얻게 될 것이나, 그대가 사방을 돌아다니면 끝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까 두렵구나.”
그 날 그가 비록 이런 말을 듣기는 하였으나,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년에 와서 이 말이 생각났지만 장차 후회한들 어떻게 하겠는가?
나련제려야사는 북쪽으로는 설산(雪山)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사자국(師子國)에 이르기까지 성인의 발자취를 샅샅이 돌아보고 마침내 옛 땅으로 되돌아왔다.
이어 그는 오장국 임금인 진대사(眞大士)를 만났는데, 자신이 겪고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험삼아 그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 보면, 그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려 백성들은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였다. 새벽 5경(更)이면 일어나서 먼저 삼보(三寶)께 예배드리며 향과 꽃과 기악(伎樂)으로 정성을 다하여 공양하였다. 날이 밝으면 궁전으로 올라가 비로소 정무(政務)를 살폈다. 그리고는 진시(辰時:오전7~9시)가 되면 향수로 불상을 목욕시켰고, 궁중에는 항상 하루에 1백 분의 스님을 모시고 재(齋)를 베풀어 왕과 부인이 손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재가 끝난 뒤에는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무예(武藝)를 익히게 하였다. 해질 무렵에는 열 줄의 경을 베껴 써서 여러 대덕 스님들과 함께 법의 뜻을 담론하였다. 다시 여러 신하들과 치정(治政)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어둠이 깔리면 불당으로 들어가 손수 등촉을 받들어 불을 밝히고는 예배를 드리며 경을 독송하였다. 그 일정이 항상 조목조목 바르게 행하였다. 이렇게 하루 일과를 마친 다음에야 물러나 고요한 곳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지은 공덕은 30년 동안 변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백 명의 그의 아들은 정성과 효성을 마음에 간직하고 섬겼으며, 석씨 종족의 여풍(餘風)이 이 나라에 이어져 흐르고 있었다.
다만 절이 산 언덕에 있어 들불로 타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스님들에게 각기 서로 사람을 보내서 사방 멀리 피신하도록 일렀다. 그리하여 여섯 사람씩 동반이 되어 설산 북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설산의 가파른 꼭대기에 이르게 되면 사람과 귀신이 다니는 두 길이 나타났다. 사람이 가는 길은 거칠면서 험하였고, 귀신이 가는 길은 툭 트이고 편히 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길가는 나그네는 마음이 헷갈려 흔히 귀신의 길을 찾아들었다. 그리하여 점차 그 경내로 들어가게 되면 곧 귀신을 만나 살해당하였다.
예전에 한 성왕(聖王)이 있었는데, 그 길의 첫머리에 비사문천왕(毗沙門天王)14) 석상(石像)을 만들어 사람이 가는 길을 석상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도록 세워 놓았다. 나련제려야사와 함께 이 길을 가던 한 스님이 잘못해서 귀신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련제려야사는 이를 알아차리고 입으로는 관음신주(觀音神呪)를 외우며 뒤쫓아 갔으나, 백 걸음도 채 못 가서 귀신에게 살해를 당했다. 자신은 다행히 주문의 힘 때문에 이런 재액을 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는데 이번에는 산적(山賊)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마음으로 앞의 주문을 외웠더니 곧 신령의 호위를 입게 되어 산적들과 맞닥뜨려 눈을 마주쳤는데도 서로 보지 못하였다.
이어 동쪽 길을 따라 나아가다가 예예국(芮芮國 : 흉노의 다른 부족)에 이르렀다. 때마침 돌궐(突厥)의 난(亂)이 일어나 서쪽 길이 끊어져 버렸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버리고 마침내 길을 따라 떠돌아다니다가 북쪽의 니해(泥海) 근방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돌궐과는 남쪽으로 7천여 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그곳도 역시 편안하지 못하였으므로 멀리 제(齊)나라 경계로 몸을 돌렸다.
천보(天保) 7년(556)에 업도(鄴都)에 도착하였는데, 문선황제(文宣皇帝) 양(洋)은 각별하게 특별한 예우로써 그를 맞이하여 항상 인륜에 맞게 특별히 대우하였다.
나련제려야사는 이때의 나이가 40세였다. 골격이 굳건하고 모습이 웅장하며 단아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의 평판이 대단하였다. 이로 인하여 문선황제의 예우는 더욱 융숭하고 극진하였다. 황제는 천평사(天平寺)에 머물게 하고, 경을 번역할 삼장(三藏)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궁전 안에 보존하고 있던 범본(梵本) 1천여 갑(甲)을 황제의 명으로 절로 보냈다. 나련제려야사를 상방(上房)에 있게 하고, 그를 위하여 도량을 세워 진기하고 미묘한 많은 물건을 공양하였다. 따로 부엌[廚庫]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는 황제가 존경하며 숭앙한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나련제려야사는 문선황제 천보 8년 정축(丁丑, 557)으로부터 위(緯)시호(諡號)가 없다. 천통(天統) 4년 무자(戊子, 568)에 이르기까지 업성(鄴城)의 천평사에서 『보살견실삼매경(菩薩見實三昧經)』 등 7부를 번역하였다. 칙명으로 소현(昭玄)의 대통(大統)인 사문 법상(法上) 등 20여 인에게 번역을 감호하고 관장하게 하였으며, 소현도(昭玄都)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와 장자(長子) 사문 달마사나(達摩闍那)중국말로는 법지(法智)라고 부른다.와 거사(居士) 만천의(萬天懿)가 말을 전[傳語]하였다.
나련제려야사는 제(齊)나라 때에 정법(正法)을 크게 일으켰고, 중생들의 마음을 널리 통하게 하였다.
문선황제는 불법을 존중하는 것이 남다르고 특별하여 몸소 범본(梵本)에 예를 올리고 뭇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삼보의 넓은 터전이다. 이 때문에 내가 특별히 공경하는 것이다.”
그가 불법을 받들고 믿는 정성이 이와 같았다.
나련제려야사는 늘 번역을 하다가 틈이 날 때에는 신주(神呪)를 베풀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구제하였고 또 드러나게 사람들을 도와 공을 세우는 일들이 많았다. 얼마 지난 뒤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소현도(昭玄都)의 소임을 부촉하였다. 곧 자리를 바꾸어 소현통(昭玄統)이 되게 하였다. 그는 나라에서 얻는 공록(供祿)을 자신의 생활에만 쓰지 않고, 즐거이 자혜(慈惠)로운 마음을 일으켜 기꺼이 복된 일[福業]을 일으켰다. 공양을 마련하여 스님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가난하며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옥에 갇힌 죄수나 축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구제하였고, 저자의 좁고 번잡한 곳에는 우물[義井]을 만들어 몸소 물을 길어서 중생들에게 넘치게 공급하였다.
또 급군(汲郡)의 서쪽 산에 세 개의 절을 세웠는데, 샘이 있는 골짜기를 끼고 있어서 산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또 몹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거두어 요양토록 하고, 남녀의 구역을 서로 달리하여 사사공양(四事供養)하여 힘써 두루 공급하였다.
또 돌궐(突厥)의 객관(客館)을 찾아가서 육재일[六齋]15)
를 지킬 것을 권유하고, 양의 고기를 끊고 방생(放生)하게 하고 채식[素食]을 먹게 하였다. 또 한 번은 병에 걸려 백 일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천자(天子)와 황후가 몸소 와서 문안을 드렸다. 나련제려야사는 감복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본래 외국에서 온 나그네로서 덕행도 높지 못한데, 천자의 거마를 지금 내린 것은 불법을 존중하신 까닭이십니다. 마음으로 그 뜻을 헤아리자니 부끄러움과 두려움만이 교차합니다.”
나련제려야사는 뒷날 수(隋)나라 때에도 다시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그것은 수나라 목록에 갖추어 실려 있다. 그러므로 그 자세한 것은 거기에서 기술한 것과 같다.

(2) 만천의(萬天懿)
존승보살소문일체제법입무량문다라니경(尊勝菩薩所問一切諸法入無量門陁羅尼經) 1권세 번째 번역되어 나왔다. 『무애제지법문경(無涯際持法門經)』과 같은 동본이다. 혹은 바로 『존승보살소문경(尊勝菩薩所問經)』이라고도 하며, 또한 바로 『입무량문다라니경(入無量門陁羅尼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은 1부 1권이며, 그 경본이 현재 있다.

거사 만천의는 본래 성은 척발(拓跋)이며, 북대(北代)의 운중(雲中) 사람이다. 위(魏)나라에서는 열 개의 성씨[十姓]로 나뉘었는데, 그로 인하여 만후(萬候)씨로 되었다. 대대로 낙양(洛陽)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시 하남(河南) 사람이 되었으며, 뒤에는 성(姓)을 만(萬)씨로만 불렀다.
젊은 시절에 출가하여 바라문(婆羅門)으로부터 사사(師事) 받았는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의지력이 있었다. 범서(梵書)와 범어(梵語)를 잘하였고, 겸하여 주술(呪術)까지도 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름에 응하여 번역하는 데에 자주[數] 참여하게 되었다.
만천의는 무성제(武成帝) 잠(湛)의 하청(河淸) 연간(562~564)에 업도(鄴都)에서 스스로 『존승보살소문일체제법입무량문다라니경』 1부를 번역하였다. 『장방록(長房錄)』에 보인다.開元釋教錄卷第六 笙庚午歲西崇福寺沙門智昇撰摠括群經錄上之六齊蕭氏都建業亦云南齊自高帝建元元年己未至和帝中興二年壬午凡經七主二十四年沙門七人所譯經律摠一十二部三十三卷於中七部二十八卷見在五部五卷闕本蕭齊沙門曇摩伽陁耶舍 一部 一卷經沙門摩訶乘 二部 二卷經律沙門僧伽跋陁羅 一部 一十八卷律沙門達摩摩提 二部 二卷經沙門求那毘地 三部 六卷經集沙門釋曇景 二部 二卷經沙門釋法化 一部 一卷經無量義經一卷 第二出見僧祐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曇摩伽陁邪舍齊言法生稱中印度人悟物居情導利無捨以高帝道成建元三年辛酉於廣州朝亭寺譯無量義經一部邪舍手善隸書口解齊言傳受經人武當山沙門慧表永明三年齎至楊都繕寫流布五百本生經一卷 見僧祐錄祐云未詳卷數房云一卷他毘利律一卷 齊言宿德律見僧祐錄祐云未詳卷數房云一卷右二部二卷其本竝闕沙門摩訶乘西域人也棲心妙道結志弘通以武帝賾永明年中於廣州譯五百本生經等二部善見律毘婆沙十八卷 或云毘婆沙律亦直云善見律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右一部一十八卷其本見在沙門僧伽跋陁羅齊言衆賢西域人懷道放曠化惠無窮師資相傳云佛涅槃後優波離旣結集律藏訖卽於其年七月十五日受自恣竟以香花供養律藏便下一點置律藏前年年如是優波離欲涅槃持付弟子陁寫俱陁寫俱欲涅槃付弟子須俱須俱付弟子悉伽婆悉伽婆付弟子目揵連子帝須目揵連子帝須付弟子旃陁跋闍如是師師相付至今三藏法師不出其名三藏法師將律藏至廣州臨上舶反還去以律藏付弟子僧伽跋陁羅跋陁以武帝永明六年戊辰房云己巳共沙門僧禕於廣州竹林寺譯出名爲善見律毘婆沙因共安居以永明七年己巳歲房云庚午七月半受自恣竟如前師法以香花供養律藏訖卽下一點當其年計得九百七十五點點是一年趙伯休梁大同九年於廬山値苦行律師弘度#得此佛涅槃後衆聖點記年月訖齊永明七年伯休訪弘度云自永明七年已後云何不復見點弘度答云自此已前皆是得道聖人手自下點貧道凡夫止可奉持頂戴而已不敢輒點伯休因此筭至梁大同九年癸亥歲合得一千二十八年昇依伯休所計推至大唐開元十八年庚午之歲合得一千二百一十六年若然則是如來滅度遠近參差未堪取行此墨點記與法顯所傳師子國佛牙精舍唱記年歲全懸此云優波離集律藏竟自恣了已手自下點年年如是展轉相付流傳至今者此或不然尋此善見婆沙非是波離所集乃是部分已後二十部中隨彼所宗釋一家義撮要而解非全部毘尼也卽此撰集已後年下一點此或如然若言波離手自下點者未可卽爲指南也妙法蓮華經提婆達多品第十二一卷今編入妙法華在第五卷初沙門法獻於于塡國得梵本來見道慧宋齊錄僧祐錄云於高昌郡獲梵本未詳孰正觀世音懺悔除罪呪經一卷永明八年十二月十五日譯出見僧祐錄及寶唱錄右二部二卷提婆達多品見在觀世音呪經闕本沙門達摩摩提齊言法意西域人悟物情深隨方啓喩以武帝永明八年庚午爲沙門法獻於楊都瓦官寺譯提婆達多品等二部獻時爲僧正獻以宋元徽三年遊歷西域於于塡國得經梵本幷及佛牙有迦毘羅神衛護還宋經至齊永明中共沙門法意譯出佛牙安置鍾山上定林寺佛牙可長三寸圍亦如之色帶黃白其牙端䆘凸若今印文而溫潤光潔頗類珠玉謹按內經佛有四牙一在忉利天一在龍王宮一在師子國一在烏萇國此卽烏萇國牙也後忽失之乃現于塡獻於于塡請還到梁普通三年正月忽有數人竝執器仗初夜扣門稱臨川殿下奴叛有人告云在佛牙閣上請開閣撿視寺僧從其言主帥至佛牙座前開函取牙作三禮已錦巾盛牙繞東山去後尋卻得還安定林隋文倂陳仍在鍾嶽至仁壽三年內使令豫章王暕從楊州將獻文帝其年五月十五日勅送東禪定寺供養佛牙靈異具如僧祐佛牙記此不復廣其東禪定寺卽今大莊嚴寺是也須達經一卷 一名須達長者經出中阿含第三十九卷僧祐云建武二年出異譯見長房錄及高僧傳百喩經四卷 亦云百句譬喩經或五卷天竺僧伽斯那撰永明十年九月十日譯見僧祐錄祐等竝云譯成十卷此之四卷百事足矣十二因緣經一卷 第五出與貝多樹下經等同本祐云建武二年出見高僧傳及長房錄右三部六卷 前二部五卷見在後一部一卷闕本沙門求那毘地齊言德進中印度人弱齡從道師事天竺大乘法師僧伽斯聰慧强記勤於諷習所誦大小乘經十餘萬言兼學世典明解陰陽其候時逢占多有徵驗故道術之稱有聞西域建元初來至江淮止毘耶離寺執錫從徒威儀端肅王公已下競相請謁僧伽斯於天竺國抄集修多羅藏十二部經中要切譬喩撰爲一部凡有百事以教授新學毘地悉皆通誦兼明義旨以武帝永明十年壬申秋九月譯爲齊文卽百喩經也復出須達及十二因緣自宋大明已後譯經殆絕及其宣流法寶世咸羙之毘地爲人弘厚有識#度善於接誘勤躬行道夙夜匪懈是以外國僧衆萬里歸集南海商人悉共宗事供贈往來歲時不絕性頗福積富於財寶然營建法事已無私焉於建業淮側造止觀寺重閣層門殿房整飾養徒施化德業甚著以中興二年冬卒摩訶摩耶經一卷 第二出一名佛昇忉利天爲母說法亦云摩耶經或二卷見王宗寶唱法上等三錄未曾有因緣經二卷 度羅睺羅沙彌序亦直云未曾有經第二出見始興錄右二部三卷其本竝在沙門釋曇景不知何許人於齊代譯摩耶經等二部群錄直云齊世譯出旣不顯年未詳何帝腹中女聽經一卷 第五出與無垢賢女經等同本房云見右錄右一部一卷闕本沙門釋法化以廢帝寶卷永元年中誦出腹中女聽經一部衆錄相承竝云誦出未詳誦意依而列之以有先譯故免疑失又長房內典等錄云齊時江州沙門道政刪改彌勒成佛經一卷此或不然如後大乘錄中廣述又房等復云齊代沙門法度於楊都出灰河經一卷毘跋律一卷今以灰河經出雜阿含其毘跋律隋法錄云法度僞造以濫律名今廢不立房等又云齊代沙門釋法尼譯益意經二卷今以此經卽是齊末梁初僧法尼閉目誦出者今見有本文理差舛不可流行若言齊末出者祐錄何故不載今編疑部正錄不存房等又云齊代沙門道備出九傷等經五部五卷群錄竝疑今依舊爲定也梁蕭氏都建業 亦云前梁自武帝天監元年壬午至敬帝太平二年丁丑凡經四主五十六年緇素八人所出經論及諸傳記等幷新集失譯諸經摠四十六部二百一卷 於中四十部一百九十一卷見在六部十卷闕本沙門釋僧祐 三部 三十九卷譜錄集沙門曼陁羅仙 三部 一十一卷經沙門僧伽婆羅 一十部 三十二卷經論傳沙門釋寶唱 二部 五十四卷經集尼傳沙門釋明徽 一部 一卷尼戒王子月婆首那 一部 一卷經沙門波羅末陁 一十一部 二十四卷經論沙門釋慧皎 一部 一十四卷僧傳新集失譯諸經 一十四部二十五卷釋迦譜十卷 於齊代撰別有五卷本與此廣略異房云四卷恐誤見僧祐錄及長房內典等錄合入齊錄隨人附梁出三藏記集十五卷 祐錄自云十卷見有十五卷長房內典二錄云十六卷見僧祐長房內典等錄亦齊時撰弘明集十四卷 祐等三錄竝云十卷今見十四卷見僧祐長房內典等錄右三部三十九卷其本竝在沙門釋僧祐楊都建初寺僧也本姓兪氏其先彭城下邳人父世居建業祐年數歲入建初寺禮拜因踊躍樂道不肯還家父母怜其志且許入道師事僧範道人年十四家人密爲訪婚祐知而避至定林投法達法師達亦戒德精嚴爲法門梁棟祐師奉竭誠及年滿具戒執操堅明初受業於沙門法穎穎旣一時名匠爲律學所宗祐迺竭思鑽求無懈昏曉遂大精律部有勵先哲武帝衍深相禮遇凡僧事顧疑皆勅就審決年衰腳疾勅聽乘輿入內爲六宮受戒其見重如此及齊竟陵文宣王子良梁臨川王宏南平王偉儀同陳郡袁昂永康定公主貴嬪丁氏等竝崇其戒範盡師資之敬凡白黑門徒萬有餘衆祐洞明律藏兼善文藻搜集記錄撰爲部帙庶尋覽之者功省而博達實法門之綱要釋氏之元宗也自簫齊末爰及梁代撰釋迦譜等三部自外法苑集世界記師資傳等以非入藏故闕不論竝如三藏記等具顯文殊師利所說摩訶般若波羅蜜經二卷或一卷亦直云文殊般若波羅蜜經初出與僧伽婆羅出者及大般若第七會曼殊室利分同本亦編入寶積當四十六會見李廓錄及續高僧傳法界體性無分別經二卷 第二出今編入寶積當第八會見李廓寶唱二錄及續高僧傳寶雲經七卷 初出與陳代須菩提大乘寶雲經及唐達摩流支寶雨經等同本異譯見東錄及續高僧傳右三部一十一卷其本竝在沙門曼陁羅仙梁言弱聲亦云弘弱扶南國人神解超悟幽明畢觀無憚夷險志存開化大齎梵經遠來貢獻以武帝天監二年癸未屆于梁都勅僧伽婆羅令共翻譯遂出文殊般若等經三部雖事傳譯未善梁言故所出經文多隱質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一卷第二出與前曼陁羅出者及大般若曼殊室利分同本房云少勝前曼陁羅所出二卷者大乘十法經一卷 初出與元魏覺定所出十法經同本普通年譯亦直云十法經度一切諸佛境界智嚴經一卷 第二出與元魏曇摩流支入佛境界經同本八吉祥經一卷 若人聞此八佛名號不爲一切諸鬼神衆難所侵第四出與八吉祥呪及八陽神呪經等同本孔雀王呪經二卷 亦云孔雀王陁羅尼經第七譯與唐義淨大孔雀呪王經等同本見寶唱錄舍利弗陁羅尼經一卷 此呪有大神力若能持者雪山有八夜叉王常來擁護所欲隨心第九譯與支謙所出無量門微密持經等同本文殊師利問經二卷 亦直云文殊問經天監十七年於占雲館譯袁曇允筆受光宅寺沙門法雲詳定菩薩藏經一卷解脫道論十二卷 亦云十三卷天監十四年於占雲館譯阿育王經十卷 或加大字第二出與西晉安法欽育王傳同本異譯天監十一年六月二十日於楊都壽光殿譯見寶唱錄右一十部三十二卷其本竝在竝見長房錄續高僧傳中都有部數名不備列沙門僧伽婆羅梁言衆鎧亦云僧養扶南國人也幼而穎悟早附法津雖經論具探而偏習對法聲聞漸布垂譽海南具足已後廣精律藏勇意觀方樂崇開化聞齊國弘法隨舶至都住正觀寺爲天竺沙門求那跋陁弟子復從跋陁硏精方等未盈炎燠博涉多通乃解數國書語値齊曆亡墜道教陵夷婆羅靜潔身心外絕交故擁室棲閑養素資業大梁御宇搜訪術能以天監五年被勅徵召於梁都壽光殿華林園正觀寺占雲館扶南館等五處傳譯卽以天監五年景戌至普通元年庚子譯文殊般若等經十部 其梵本竝是曼陁羅獻者長房等錄復云婆羅更出育王傳五卷者非也前育王經卽是其傳不合重載初翻經日於壽光殿武帝躬臨法座筆受其文然後乃付譯人盡其經本勅沙門寶唱慧超僧智法雲及袁曇允等相對疏出華質有敍不墜譯宗天子禮接甚厚引爲家僧所司資給道俗改觀婆羅不畜私財以其嚫施成立住寺太尉臨川王宏接遇隆重普通五年因疾卒于正觀寺春秋六十有五經律異相五十卷 天監十五年奉勅撰錄云幷目錄五十五卷今闕其目但五十卷其目但纂篇題應無別事見寶唱錄及長房錄比丘尼傳四卷 述晉宋齊梁四代尼行新編入錄右二部五十四卷其本竝在沙門釋寶唱梁都莊嚴寺僧也俗姓岑氏吳郡人僧祐律師之高足也博識洽聞罕有其疋武帝甚相崇敬天監年中頻勅撰集皆愜帝旨十五年景申又勅撰經律異相一部唱又別撰尼傳四卷房錄之中復有名僧傳等七部非入藏故闕不論餘竝備在續高僧傳五分比丘尼戒本一卷 亦云彌沙塞尼戒本見寶唱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明徽梁都建初寺僧也戒行精苦習彌沙塞部徽以宋代覺壽譯彌沙塞律但出比丘戒本而無尼戒遂以武帝普通三年壬寅於大律內抄出尼戒一卷卽今見行者是 撰錄者曰撿此戒中衆學之後無七滅諍律本雖略准義合安豈可尼僧有諍不殄祇律正文與僧同有故彼律第四十云衆學法中唯除污草及水七滅諍法隨順法竝同比丘彼師不安理不通也大乘頂王經一卷 亦云維摩兒經與西晉法護方等頂王及隨崛多善思童子經等同本第三出見長房錄及續高僧傳等右一部一卷其本見在王子月婆首那中印度優禪尼國王之子 此優禪尼國或云在南天竺亦云在西天竺未能定矣或可此國據在中天之維博西近南故傳說差誤不定一方也生知俊朗體悟幽微專學佛經尤工義理洞曉音韻兼善方言先於東魏興和年中譯經三部梁大同中從魏之梁武帝留住勅遣摠知外國使命因譯頂王經一部金光明經七卷 或六卷二十二品承聖元年於正觀寺及楊雄宅出涼世無讖出四卷者有十八品眞諦更出四品足前成二十二分爲七卷今在刪繁錄無上依經二卷 梁紹泰三年丁丑九月八日於平固縣南康內史劉文陁請令譯出見經後記房云陳代出者非也諸家年曆竝無紹泰三年如別錄中會涅槃經本有今無偈論一卷 房云太淸四年出撿諸年曆太淸不至四年已下竝同決定藏論三卷 中有梁言字是梁代譯尋其文句是眞諦出也大乘起信論一卷 初出與唐實叉難陁出者同本承聖二年癸酉九月十日於衡州始興郡建興寺出月婆首那等傳語沙門智愷等執筆幷製序見論序如實論一卷 初題云如實論反質難品房云太淸四年出仁王般若經一卷 承聖三年於豫章寶田寺譯第三出與西晉法護等出者同本彌勒下生經一卷 承聖三年於豫章寶田寺譯第五出與羅什等出者同本十七地論五卷 與唐譯瑜伽師地論同本翻得五卷遇難遂輟見續高僧傳太淸四年於富春令陸元 哲宅爲沙門寶瓊等二十名德譯中論一卷 房云太淸四年出三世分別論一卷 房云太淸四年出已上竝見長房內典等錄右一十一部二十四卷 如實論上六部一十五卷見在仁王經下五部九卷闕本沙門波羅末陁梁言眞諦或云拘羅那他此曰親依竝梵文之名字也本西印度優禪尼國人婆羅門種姓頗羅墮景行澄明器宇淸肅風神爽拔悠然自遠群藏廣部罔不厝懷藝術異能偏素精練雖遵融佛理而以通道知名遠涉艱關無憚夷險歷遊諸國遂止中天梁武大同中勅直省張汜等送扶南獻使返國仍遣聘中天竺摩伽陁國請名德三藏幷求大乘諸論雜華經等眞諦遠聞行化儀軌聖賢搜選名匠惠益氓品彼國乃屈眞諦幷齎經論恭膺帝旨旣素蓄在心渙然聞命以大同十二年八月十五日達于南海沿歷險闊仍滯兩春以太淸二年閏八月始屆都邑武皇面申禮敬安置於寶雲殿竭誠供養帝欲傳翻經教不羡秦時更出新文有逾齊日屬道銷梁季寇羯憑陵法爲時崩不果宣述乃步入東土又往富春令陸元哲創奉問津將事傳譯招延英秀沙門寶瓊等二十餘人翻十七地論適得五卷而國難未靜側附通傳至大寶年爲侯景請還在臺供養于斯時也兵飢相接法幾頹焉會元帝啓祚承聖淸夷乃止于金陵正觀寺與願禪師等二十餘人翻金光明經三年二月還返豫章又往新吳始興復隨蕭太保度嶺至于南康竝隨方翻譯棲遑靡託諦於梁代所出經論摠十一部梁末入陳復出經論如後所述 長房內典等錄有十八部論一卷亦云諦譯今尋文句非是諦翻旣與部執本同不合再出今此刪之如別錄中述復有金光明疏等六部二十六卷竝是眞諦所撰亦竝刪之 長房內典等錄復云天監十五年木道賢獻優婁頻經一卷直云獻上不辯委曲且編疑錄此刪不載高僧傳十四卷 序錄一卷傳十三卷共成十四天監十八年撰見長房內典二錄右一部一十四卷其本見在沙門釋慧皎未詳氏族會稽上虞人學通內外博訓經律住嘉祥寺春夏弘法秋冬著述撰涅槃梵網義疏又以唱公所撰名僧頗多浮宂因遂開例成廣著高僧傳一部始于漢明帝永平十年終至梁天監十八年凡四百五十三載二百五十七人又傍出附見者二百三十九人都合四百九十六人開其德業大爲十例其序略云前之作者或嫌以繁廣刪減其事而抗迹之奇多所遺削謂出家之士處國賓王不應傲然自遠高蹈獨絕尋辭榮棄愛本以勵俗爲賢若此而不論竟何所紀又云前代所撰多曰名僧竊謂名之與高如有優劣至若實行潛光則高而不名寡德適時則名而不高名而不高本非所紀高而不名則備之今錄故省彼名音代以高字謹詳覽此傳義例甄著文詞婉約實可以傳之不朽永爲龜鏡矣新集失譯諸經摩利支天經一卷 或云小摩利支天經是陁羅尼集經第十卷初摩利支天經少分異譯六字神呪王經一卷 第二出與六字呪王經同本虛空藏菩薩問佛經一卷 亦云虛空藏菩薩問七佛陁羅尼呪經亦云七佛神呪經初出與隋譯如來方便善巧呪經同本三劫三千佛名經三卷 過去莊嚴劫千佛名經卷上現在賢劫千佛名經卷中未來星宿劫千佛名經卷下見長房入藏錄彼爲三本經今合爲一部牟梨曼陁羅呪經一卷 或無經字阿咤婆拘鬼神大將上佛陁羅尼經一卷 亦直云阿咤婆拘呪經阿彌陁鼓音聲王陁羅尼經一卷大普賢陁羅尼經一卷大七寶陁羅尼經一卷六字大陁羅尼經一卷長者女菴提遮師子吼了義經一卷菩薩五法懺悔文一卷 亦名菩薩五法懺悔經陁羅尼雜集十卷大乘五陰論一卷婆藪盤豆菩薩造見陳朝大乘寺藏錄初出與唐譯大乘五薀論同本此論闕右一十四部二十五卷除五陰論餘竝入藏經房等失譯錄中闕而不載尋其文句非是遠代故編梁末以爲梁代失源云魏元氏初都恒安南遷洛陽後遷鄴亦云後魏始從道武帝皇始元年丙申 卽東晉太元二十一年也終東魏孝靖帝武定八年庚午凡一十三帝一百五十五年五帝都恒安至孝文帝太和十八年南遷七帝都洛陽一主都鄴緇素一十二人所譯經論傳等摠八十三部二百七十四卷 於中七十三部二百五十五卷見在一十部一十九卷闕本元魏沙門釋慧覺 一部 一十三卷集經沙門釋曇曜 三部 七卷經傳沙門吉迦夜 五部一十九卷 經論傳集沙門曇摩流支 三部 八卷經沙門釋法場 一部 一卷經沙門勒那摩提 三部 九卷論沙門菩提留支 三十部 一百一卷經論沙門佛陁扇多 一十部 一十一卷經論婆羅門瞿曇般若流支 一十八部九十二卷經戒論王子月婆首那 三部 七卷經沙門毘目智仙 五部 五卷論沙門達磨菩提 一部 一卷論賢愚經十三卷 或十五卷或十六卷或十七卷亦云賢愚因緣經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右一部一十三卷其本見在沙門釋慧覺一云曇覺祐云曇覺涼州人牆仞連霄風神爽悟戒地淸拔慧鑑通微於于闐國得經梵本以太武皇帝太平眞君六年乙酉從于闐還到高昌國共沙門威德譯賢愚經一部見靖邁經圖 按梁沙門僧祐賢愚經記云河西沙門釋曇覺威德等凡有八僧結志遊方遠尋經典於于闐大寺遇般遮于瑟之會般遮于瑟者漢言五年一切大衆集也三藏諸學各弘法寶說經講律依業而教覺等八僧隨緣分聽於是競習胡音析以漢義精思通譯各書所聞還至高昌乃集爲一部旣而踰越流沙齎到涼州于時沙門釋慧朗河西宗匠道業淵博摠持方等以爲此經所記源在譬喩譬喩所明兼載善惡善惡相翻卽賢愚之分也前代傳經已多譬喩故因事改名號曰賢愚焉大吉義神呪經二卷 或四卷見法上錄淨度三昧經一卷 第四出見竺道祖錄及續高僧傳付法藏傳四卷 第二出見菩提流支錄及續高僧傳右三部七卷吉義呪經一部二卷見在淨度經等二部五卷闕本沙門釋曇曜未詳何許人也少出家攝行堅貞風鑑閑約以魏和平年中住北臺昭玄統綏緝僧衆妙得其心住恒安石窟通樂寺卽魏帝之所造也去恒安西北三十里武周山北面石崖就而鐫之建立佛寺名曰靈巖龕之大者擧高二十餘丈可受三千許人面別鐫像窮諸巧麗龕別異狀駭動人神櫛比相連三十餘里東頭僧寺恒供千人碑碣見存未卒陳委先是太武皇帝太平眞君七年司徒崔皓邪佞諛詞令帝崇重道士寇謙之拜爲天師珍敬老氏殘害釋種焚毀寺塔至庚寅年太武感致厲疾方始開悟兼有白足禪師來相啓發生愧悔心卽誅崔皓埋之都市以口爲廁令衆穢之至壬辰年太武云崩孫文成立卽起塔寺搜訪經典毀法七載三寶還興曜慨前陵廢斦今重復以和平三年壬寅故於北臺石窟集諸德僧對天竺沙門譯吉義等經三部流通後賢意存無絕大方廣菩薩十地經一卷 第五出與羅什莊嚴菩提心經等同本見始興錄及道慧宋齊錄稱揚諸佛功德經三卷 亦名集諸佛花經亦直名集華經一名現在佛名經或四卷第三出與羅什等出者同本見道慧宋齊錄方便心論一卷 或二卷凡四品第二出與東晉覺賢出者同本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付法藏因緣傳六卷 或無因緣字亦云付法藏經或四卷或云二卷見道慧宋齊錄第三出與宋智嚴魏曇曜出者同本亦見僧祐錄雜寶藏經八卷 錄云十三卷未詳今只有八卷見道慧宋齊錄及僧祐錄右五部一十九卷其本竝在沙門吉迦夜魏云何事西域人也遊化在慮導物爲心以孝文帝延興二年壬子爲昭玄統沙門曇曜譯大方廣十地等經五部劉孝摽筆受信力入印法門經五卷 正始元年出華嚴眷屬經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二卷 亦名如來入一切佛境界經景明二年於白馬寺出第一譯與梁僧伽婆羅度一切諸佛境界智嚴經同本金色王經一卷 初出與瞿曇流支譯者同本正始四年出法上錄云菩提留支後更重勘右三部八卷 前二部七卷見在後一部一卷闕本沙門曇摩流支魏云法希亦云法樂南印度人棄家入道偏以律藏傳名弘道爲務感物而動宣武帝世遊化洛陽以景明二年辛巳至正始四年丁亥爲宣武帝譯信力等經三部沙門道寶筆受見長房等錄辯意長者子經一卷 或云辯意長者子所問經一名長者辯意經見法上錄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釋法場未詳何許人也亦以宣武帝時於洛陽譯辯意經一部撰錄者曰謹按高僧等傳竝云晉時道安出家數載方啓師求經師創付辯意經一卷可五千言一覽便誦又安公失譯復載其名准此東晉之時辯意已行於世如何至魏宣武始云法場出也妙法蓮華經論一卷 婆藪盤豆菩薩造亦云法華經論侍中崔光僧朗等筆受見長房錄初出與菩提留支譯者大同小異題云妙法蓮華經優波提舍究竟一乘寶性論四卷 亦云寶性分別七乘增上論或三卷或五卷於趙欣宅出見寶唱錄第二譯與菩提留支出者同本寶積經論四卷 第二出與菩提留支大乘寶積經論同本見寶唱錄右三部九卷 前二部五卷見在後一部四卷闕本沙門勒那摩提或云婆提魏言寶意中印度人學識優贍理事兼通三藏教文凡誦一億偈偈三十二字尤明禪觀意存遊化以宣武帝正始五年戊子初屆洛邑遂譯法華論等三部沙門僧朗覺意侍中崔光等筆受當翻經日於洛陽內殿菩提留支傳本勒那扇多參助其後三德乃徇流言各傳師習不相訪問帝以弘法之盛略敍曲煩勅三處各翻訖乃參挍其間隱沒互有不同致有文旨時兼異綴後人合之共成通部見寶唱等錄所以法華寶積寶性等論各有兩本耳 初寶意沙門神理標異領牒魏詞偏盡隅隩帝每令講華嚴經披釋開悟精義每發一日正處高座忽有持笏執名者形如大官奉天帝命來請法師講華嚴經意曰今此法席尚未停止待訖經文當從來命雖然法事所資獨不能建都講香火維那梵唄咸亦須之可請令定使者卽如所請見講諸僧旣而法事將了又見前使云奉天帝命故來下迎意乃含笑熙怡告衆辭訣奄然卒於法座都講等四僧亦同時俱逝凡所聞見歎未曾有毘耶娑問經二卷 長房等錄竝云寶意於洛陽譯今按經序乃云興和四年瞿曇流支於鄴都譯今移在瞿曇錄中十地經論十二卷 注云初譯論時未善魏言名器世閒爲盞子世間後因入殿齋見諸宿德從弟子索器乃摠授鉢幞因悟器是摠名遂改爲器世閒此十地論長房等錄勒那菩提二處俱載今按崔光論序乃云菩提留支勒那摩提在洛陽殿內二人同譯佛陁扇多傳語帝親筆受二錄各存理將未可今合爲一本在留支錄中龍樹菩薩和香方一卷 凡五十法今以非三藏教故不錄之上之三部今竝刪也金剛般若波羅蜜經一卷 永平二年於胡相國第譯是第二出僧朗筆受與秦世羅什及大般若第九會能斷金剛分等同本見法上錄彌勒菩薩所問經一卷 第二出與大乘方等要慧經同本於趙欣宅譯覺意筆受今編入寶積當第四十一會改名彌勒菩薩問八法會勝思惟梵天所問經六卷 神龜元年於洛陽譯是第三出與法護持心羅什思益竝同本異出見法上錄及續高僧傳深密解脫經五卷 全本初譯延昌三年於洛陽出僧辯筆受與唐譯解深密經及相續解脫節經等竝同本見法上錄及續高僧傳入楞伽經十卷 延昌二年譯是第三出與宋功德賢四卷楞伽及唐譯大乘入楞伽經等竝同本僧朗道湛筆受見續高僧傳大薩遮尼乾子所說經十卷 或加受記無所說字或七卷或八卷一名菩薩境界奮迅法門經正光元年於洛陽爲司州牧汝南王於第出第二譯與神通變化經同本無字寶篋經一卷 初出僧朗筆受與唐譯大乘離文字經等同本伽耶山頂經一卷 亦云伽耶頂經第二出與羅什文殊問菩提經等同本謗佛經一卷 第二出與西晉法護決定摠持經同本大方等修多羅王經一卷 初出與覺定轉有經同本文殊師利巡行經一卷 初出與隋崛多文殊尸利行經同本覺意筆受佛語經一卷 初出與周世崛多出者同本僧朗筆受佛名經十二卷 或云十三卷或分爲二十卷正光年於胡相國第譯見續高僧傳法集經六卷 或七卷或八卷延昌四年於洛陽出僧朗筆受見法上錄及續高僧傳護諸童子陁羅尼經一卷 亦云護諸童子請求男女陁羅尼經差摩婆帝受記經一卷 正光年於洛陽出不增不減經一卷 正光年於洛陽出七紙錄云二卷者誤十地經論十二卷 或十五卷天親菩薩造釋十地經永平元年四月於太極紫亭譯帝親筆受後付沙門僧辯等訖盡論文至四年夏首畢見崔光序彌勒菩薩所問經論五卷 或六卷或七卷或十卷釋彌勒所問經卽寶積第四十一會是在洛陽趙欣宅出大乘寶積經論四卷 第一譯與寶意出者同本釋單卷寶積經卽大寶積第四十三會普明菩薩會是金剛般若波羅蜜經論三卷 天親菩薩造永平二年於胡相國宅出僧朗筆受第一譯與唐義淨所出能斷金剛論釋等同本文殊師利菩薩問菩提經論二卷一云伽耶山頂經論婆藪盤豆菩薩造天平二年在鄴城殷周寺出僧辯道湛筆受法華經論二卷 題云妙法蓮華經優波提舍或一卷曇林筆受幷製序第二出與前寶意出者同本初有歸敬頌者是見續高僧傳勝思惟梵天所問經論四卷 或三卷普泰元年於洛陽元挑湯宅出僧辯僧朗筆受錄云十卷應誤見續高僧傳無量壽經論一卷 題云無量壽經優波提舍願生偈婆藪盤豆菩薩造永安二年於洛陽永寧寺出僧辯筆受十二因緣論一卷 淨意菩薩造百字論一卷 提婆菩薩造破外道小乘四宗論一卷 提婆菩薩造破外道小乘涅槃論一卷 提婆菩薩造寶性論四卷 或五卷初出與寶意出者同本已上竝見長房錄及內典錄右三十部一百一卷 前二十九部見在後寶性論一部闕本沙門菩提留支#魏言道希北印度人也遍通三藏妙入摠持志在弘法廣流視聽遂挾道宵征遠莅蔥左以魏永平之歲至止東華宣武下勅慇懃敬勞後處之永寧大寺供待甚豐七百梵僧竝皆周給勅以流支爲譯經之元匠也其寺本孝明帝熙平元年靈太后胡氏所立在宮前閶闔門南御道之東中有九層浮圖架木爲之擧高九十餘丈上有金剎復高十丈出地千尺去臺百里已遙見之初營基日掘至黃泉獲金像三十二區太后以爲嘉瑞奉信法之徵也是以飾制瑰奇窮世華美剎表置金寶甁容二十五斛承露金槃一十一重鐵鎖角張槃及鎖上皆有金鐸如一石甕九級諸角皆懸大鐸上下凡有一百三十枚其塔四面九間六窗三戶皆朱漆扉扇垂諸金鈴層有五千四百枚復施金鐸鋪首佛事精妙殫土木之工繡莊金鋪驚駭心目高風永夜鈴鐸和鳴鏗鏘之音聞十餘里北有正殿形擬太極中諸像設金玉珠繡作工巧綺冠絕當世僧房周接千有餘間臺觀星羅參差間出彫飾朱紫繢以丹靑栝柏楨松異草叢集院牆周帀皆施椓瓦正南三門樓開三道三重去地二百餘尺狀若天門赫弈華麗夾門列四力士四師子飾以金玉莊嚴煥爛東西兩門例皆如此所可異者唯樓兩重北門通道但路而置其四門外樹以靑槐亘以淥水京師行旅多庇其下路斷飛塵不由渀雲之潤淸風送涼豈藉合歡之發乃詔中書舍人常景製寺碑文故云須彌寶殿兜率淨宮莫尚於斯是也外國所獻經像皆在此寺寺旣初成明帝及太后共登浮圖視宮中如掌內下臨雲雨上天淸朗以見宮中事故禁人不聽登之有西域沙門菩提達摩者波斯國人也越自西域來遊洛京見金盤炫日光照雲表寶鐸含風響出天外歌詠讚歎疑是神工自云年一百五十歲歷涉諸國靡不周遍如此寺精廬閻浮所無也訖佛境界亦無有比口唱南無合掌連日孝昌二年大風發屋拔樹剎上寶甁隨風而墮入地丈餘復命工人更安新者至永熙三年二月爲天所震帝登陵雲臺望火遣南陽王寶炬錄尚書長孫稚將羽林一千來救于斯時也雷雨晦冥霰雪交注第八級中平旦火起有二道人不忍焚燼投火而死其焰相續經餘三月入地剎柱乃至周年猶有煙氣其年五月有人從東萊郡至云見浮圖在於海中光明儼然同睹非一俄而雲霧亂起失其所在至七月平陽王爲侍中斛斯椿所挾西奔長安至十月而洛京遷于漳鄴先時留支奉勅創翻十地經論厥初命章宣武皇帝親自筆受然後方付沙門僧辯等訖盡論文佛法隆盛英儁蔚然相從傳授孜孜如也三藏留支從洛陽宣武帝永平元年戊子至鄴都孝靖帝天平二年乙卯將三十年相繼翻譯出金剛般若等經十地等論共三十部帝又勅淸信士李廓撰衆經錄廓學通玄素條貫經論雅有標擬故其錄云三藏法師留支房內經論梵本可有萬甲所翻新文筆受藁本滿一間屋然其慧解與勒那相亞而神悟聰敏洞善方言兼工呪術則無抗衡矣嘗坐井口澡灌內空弟子未來無人汲水流支乃操柳杖聊撝井中密加誦呪纔始數遍泉水上涌平及井欄卽以鉢酌用之灌洗傍僧具見莫測其神咸共嘉歎大聖人也留支曰勿妄襃賞斯乃術法外國共行此方不習謂爲聖耳懼惑世間遂秘不恒奮迅王問經二卷不必定入印經一卷一切法高王經一卷第一義法勝經一卷順中論二卷 已上五部七卷長房等錄竝云菩提留支所譯今按經初本譯序記竝云瞿曇留支非菩提也今移在瞿曇錄中寶髻菩薩四法經論一卷三具足經論一卷轉法輪經論一卷 已上三部三卷房等亦云菩提留支所譯今按序記乃是毘目智仙故此三部亦移彼錄衆經論目錄一卷 此是留支所撰非是梵本別翻今目錄中敍此不復存也菩薩境界奮迅法門經十卷寶唱錄云菩提留支譯今以卽是薩遮尼乾子經異名故不別存也十法經一卷 元象二年於鄴都出第二譯與梁僧伽婆羅出者同本今編入寶積當第九會名大乘十法會無畏德菩薩經一卷 亦云無畏德女經元象二年於鄴都譯第五出與阿術達經等同本今編入寶積當第三十二會曇林筆受如來師子吼經一卷 正光六年於洛陽出第一譯與唐日照方廣師子吼經同本銀色女經一卷 元象二年於鄴都譯第二出與西晉法炬前世三轉經同本正恭敬經一卷 一名威德陁羅尼中說經或名正法恭敬經元象二年於鄴都出第一譯與隋闍那崛多善敬經同本轉有經一卷 元象二年於鄴都譯第二出與菩提留支方等修多羅經同本阿難陁目佉尼訶離陁鄰尼經一卷第八譯與支謙無量門微密持經等同本金剛上味陁羅尼經一卷 正光六年於洛陽出第一譯與隋崛多金剛場經同本攝大乘論二卷 普泰元年於洛陽出與陳眞諦唐玄奘所出攝論同本阿僧佉作無字寶篋經一卷 元象二年於鄴都出第二譯與留支等出者同本上十部竝見隋費長房錄及唐內典錄等右一十部一十一卷 前九部十卷見在後一部一卷闕本沙門佛陁扇多魏言覺定北印度人神悟聰敏內外博通特善方言尤工藝術以孝明帝正光六年乙巳至孝靖帝元象二年己未於洛陽白馬寺及鄴都金花寺譯十法等經十部沙門曇林等筆受得無垢女經一卷 或無得字一名論義辯才法門興和三年於鄴都出第三譯與寶積無垢施會及法護離垢施經同本見長房錄聖善住意天子所問經三卷 興和三年於鄴城金華寺出曇林筆受第五譯或四卷與寶積善住意會及法護如幻三昧經等同本見長房錄毘耶娑問經二卷 初出與寶積廣博仙人會同本興和四年七月七日於尚書令儀同高公第譯三十日畢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奮迅王問經二卷 第二出與羅什自在王經同本興和四年七月三十日於尚書令儀同高公第內啓挾創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不必定入定入印經一卷 初出與唐義淨入定不定印經同本興和四年九月十九日於尚書令儀同高公第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一切法高王經一卷 一名一切法義王經第三出與諸法勇王經等同本興和四年六月二十三日在竇太尉定昌寺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第一義法勝經一卷 初出與大威燈光仙人經同本興和四年九月一日於尚書令儀同高公第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金色王經一卷 興和四年於金華寺出沙門曇林筆受第二出與曇摩流支出者同本見長房錄八部佛名經一卷 亦云八佛名經興和四年於金華寺出沙門曇林筆受見長房錄順中論二卷 無著菩薩造武定元年八月十日於尚書令儀同高公第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唯識論一卷 一名破色心或云唯識無境界論在金花寺出天親菩薩造第一譯與陳眞諦唯識論及唐譯二十唯識論竝同本見長房錄一輸盧迦論一卷 龍樹菩薩造在金華寺出見長房錄錄云伊迦輸盧迦論正法念處經七十卷 興和元年於鄴城大承相高澄第譯曇林僧昉等筆授見長房錄無垢優婆夷問經一卷 興和四年出見長房錄解脫戒本一卷 出迦葉毘部武定元年在鄴都侍中尚書令高澄請出見經前序僧昉筆受幷製序亦見長房錄菩薩四法經一卷 金華寺出曇林李希義等筆受見長房錄寶意猫兒經一卷 於金華寺爲高仲密出見長房錄犢子道人問論一卷 於金華寺爲高仲密出李希義筆受右一十八部九十二卷 解脫戒上一十五部八十九卷見在菩薩四法經下三部三卷闕本婆羅門瞿曇般若流支魏云智希中印度波羅柰城淨志之種少學佛法妙閑經旨神理標異領悟方言以孝明帝熙平元年遊寓洛陽後京師遷鄴亦與時徙以孝靖帝元象元年戊午至武定元年癸亥於鄴城內在金華昌定二寺及尚書令儀同高公第內譯得無垢女等經一十八部沙門僧昉曇林居士李希義等筆受迴諍論一卷 業成就論一卷已上二論長房等錄皆云瞿曇流支譯今按經初本譯序記乃云毘目智仙今依經記爲正又續高僧傳云當魏時有沙門菩提流支與般若流支前後出經而衆錄傳寫率多輕略各去上字但云流支而不知是何流支迄今群錄譯目相涉難得詳定今搜訪實錄件注如前餘所未見者俟諸後進耳摩訶迦葉經二卷 亦云大迦葉經或無大字興和三年於驃騎大將軍左僕射內侍中司徒公孫騰第譯見經前序今編入寶積當第二十三會僧伽咤經四卷 元象元年於司徒公孫騰第譯見續高僧傳頻婆娑羅王問佛供養經一卷 興和三年出增一阿含第二十六卷異譯右三部七卷 前二部六卷見在後一部一卷闕本王子月婆首那魏言高空中印度優禪尼國王子以孝靖帝元象元年戊午訖興和三年辛酉於鄴都司徒公孫騰之第譯迦葉等經三部沙門僧昉筆受首那從魏之梁及於陳代更譯諸經如別所述寶髻菩薩四法經論一卷 題云寶髻經四法優波提舍天親菩薩造興和三年九月一日在金華寺爲御史中尉高仲密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三具足經論一卷 題云三具足經優波提舍天親菩薩造興和三年九月十三日在金華寺爲驃騎大將軍高仲密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轉法輪經論一卷 題云轉法輪經優波提舍天親菩薩造興和三年八月十一日在金華寺爲開府儀同三司勃海高仲密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業成就論一卷 天親菩薩造初出與唐譯大乘成業論同本興和三年七月二十五日爲高仲密於金華寺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迴諍論一卷 龍樹菩薩造興和三年三月二十日於金華寺爲驃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御史中尉勃海高仲密譯沙門曇林筆受見經前序記右五部五卷其本見在沙門毘目智仙北印度烏萇國人剎利王種釋迦之苗裔曩者毘流離王壞迦毘羅城誅殘釋種當斯時也有四釋子忿其見逼不思犯戒出外拒軍流離遂退歸還本國城中不受告曰吾爲法種誓不行師汝退彼軍非吾族也旣被放斥遠投諸國本是聖胤競宗樹之四釋支離皆王一國今烏萇梵衍王等竝其後也嗣胤相承于今不絕智仙法師卽斯王種妙閑三藏最善毘曇與瞿曇流支同遊魏境而瞿曇流支尊事爲師以孝靖帝興和三年辛酉於鄴城內在金華寺共瞿曇流支譯寶髻論等五部沙門曇林筆受驃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御史中尉勃海高仲密爲檀越啓請供養竝見經前序記而智仙法師遊方弘化踰越沙險志在利生旣啓梵文應多部卷但余見淺狹尋覽未周所睹五經件述如右後進儻遇幸希續補使法門無謬豈不善歟自魏及唐傳錄非一智仙法師未蒙編載弘法之名莫著高行之迹靡彰傷哉悲哉深可嗟矣涅槃論一卷 或云大般涅槃經論婆藪盤豆菩薩造略釋大經見內典錄初出右一部一卷其本見在沙門達磨菩提此云法覺內典錄云達磨菩提譯涅槃論不顯帝代而編魏末今亦同彼附於此中復有涅槃論三卷亦題達磨菩提譯尋文乃釋前論或疑是人造也齊高氏都鄴 亦云北從文宣帝天保元年庚午至高恒無謚承光元年丁酉凡經六主二十八年緇素二人所出經八部五十二卷高齊沙門那連提黎耶舍 七部五十一卷經論居士萬天懿 一部一卷經菩薩見寶三昧經十六卷 或十四卷天統四年於天平寺出今編入寶積當第十六會大集月藏經十卷 題云大集經月藏分或十二卷或十五卷或直云月藏經天統二年於天平寺出大集須彌藏經二卷 內題云大乘大集經須彌藏分第十五或直云須彌藏經天保九年於天平寺出大悲經五卷 天保九年於天平寺出大周錄云涅槃支派月燈三昧經十一卷 或十卷天保八年於天平寺出施燈功德經一卷 亦名然燈經天保九年於天平寺出法勝阿毘曇心論經六卷 大德優波扇多造或七卷或無經字或無法勝字或加別譯字或云法勝阿毘曇論河淸二年於天平寺出竝見長房錄右七部五十一卷其本竝在沙門那連提黎耶舍齊言尊稱北印度烏場國人正音應云鄔荼 荼音持耶反奘法師云烏仗那唐翻云苑謂昔輪王之苑囿也其王與佛同氏亦姓釋迦剎帝利種 齊云土田主也由劫初之時先爲分地主因卽號焉今所謂國王者是也舍年十七發意出家尋値名師備聞正教二十有一得受具篇聞諸宿老歎佛景迹或言某國有鉢某國有衣頂骨牙齒神變非一遂卽起心願得瞻奉以戒初受須知律相旣滿五夏發足遊方所以天梯石臺之迹龍廟寶塔之方廣周諸國竝親頂禮僅無遺逸曾竹園寺一住十年通履僧坊多値明德有一尊者深識人機見語舍云若能靜修應獲聖果恐汝遊涉終無所成爾日雖聞情無領悟晩來卻想悔將何及耶舍北背雪山南窮師子歷覽聖迹仍旋舊壤乃睹烏場國主眞大士焉自所經見罕儔其類試略述之安民以理民愛若親後夜五更先禮三寶香花伎樂竭誠供養日出昇殿方覽萬機次到辰時香水浴像宮中常設日百僧齋王及夫人手自行食齋後消食習諸武藝日景將昳寫十行經與諸德僧共談法義復與群臣量議治政瞑入佛堂自奉燈燭禮拜讀誦各有恒條了其常業乃還退靜三十餘年斯功不替王有百子誠孝居懷釋種餘風胤流此國但以寺接山阜野火所焚各相差遣四遠投告六人爲伴行化雪山之北至于峻頂見有人鬼二路人道荒險鬼道利通行客心迷多尋鬼道漸入其境便遭殺害昔有聖王於其路首作毘沙門天王石像手指人路同伴一僧錯入鬼道耶舍覺已口誦觀音神呪至百步追及已被鬼害自以呪力得免斯厄因復前行又逢山賊專念前呪便蒙靈衛賊來相突對目不見循路東指到芮芮國値突厥亂西路不通反鄕意絕乃隨流轉北至泥海之旁南距突厥七千餘里彼旣不安遠投齊境天保七年屆於鄴都文宣帝洋極見殊禮偏異恒倫耶舍時年四十骨梗雄雅物議彈之緣是文宣禮遇隆重安置天平寺中請爲翻經三藏殿內梵本千有餘甲勅送於寺處以上房爲建道場供窮珍妙別立廚庫以表尊崇舍從文宣帝天保八年丁丑至緯無謚天統四年戊子於鄴城天平寺譯菩薩見實等經七部勅昭玄大統沙門法上等二十餘人監掌翻譯昭玄都瞿曇般若流支長子沙門達摩闍那齊言法智及居士萬天懿傳語舍於齊時大興正法弘暢衆心文宣重法殊異躬禮梵本顧謂群臣曰此乃三寶洪基故我偏敬其奉信推誠爲如此也耶舍每於宣譯之睱時陳神呪冥救顯助立功多矣未幾授昭玄都俄轉爲統所獲供祿不專自資好起慈惠樂興福業設供飯僧施諸貧乏獄囚繫畜咸將濟之市𢌅鬧所多造義井親自漉水津給衆生又於汲郡西山建立三寺依泉旁谷製極山美又收養厲疾男女別坊四事供承務令周給又往突厥客館勸持六齋羊斷放生受行素食又曾遇病百日不起天子皇后躬問起居耶舍歎曰我本外客德行未隆乘輿今降重法故爾內撫其心愧懼交集耶舍後至隋代更出諸經備在隋錄具如彼述尊勝菩薩所問一切諸法入無量門陁羅尼經一卷 第三出與無崖際持法門經等同本或直云尊勝菩薩所問經亦直云入無量門陁羅尼經右一部一卷其本見在居士萬天懿本姓拓跋北代雲中人也魏分十姓因爲萬俟氏世居洛陽故復爲河南人也後單稱萬氏#少曾出家師婆羅門而聰慧有志力善梵書梵語兼工呪術由是應召得預翻傳之數懿以武成帝湛河淸年中於鄴都自譯尊勝菩薩所問經一部見長房錄開元釋教錄卷第六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한자 붓글씨 서체(書體)의 한 가지이며, 전서(篆書)의 자획(字畫)을 간략하게 고친 것이다.
  2. 2)석존이 멸도한 뒤 그 교법이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 제자들이 저마다 들은 것을 외워, 그 바르고 그릇됨을 논의하고, 기억을 새롭게 하여 정법(正法)을 편집한 사업이다.
  3. 3)여름 안거의 마지막 날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이 모여서 서로 견(見)ㆍ문(聞)ㆍ의(疑) 세 가지로, 그 동안 지은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행사이다.
  4. 4)부처님 입멸한 뒤에 여러 현성들이 율장을 전해 받으면서, 해마다 한 점씩을 찍어서 그 지내온 연수를 표시한 것을 말한다.
  5. 5)승관(僧官)의 이름이다.
  6. 6)세속의 복덕을 맡은 귀신의 이름이다.
  7. 7)강경(講經)이나 설법할 때에 쓰던 곳이다.
  8. 8)바른 불법(佛法)을 지키는 여덟 야차신(夜叉神)인데, 곧, 보현(寶賢)ㆍ만현(滿賢)ㆍ산지(散支)ㆍ중덕(衆德)ㆍ응념(應念)ㆍ대만(大滿)ㆍ무비력(無比力)ㆍ밀엄(密嚴)등을 말한다.
  9. 9)비구ㆍ비구니가 지키는 계율 가운데, 복장ㆍ식사ㆍ의위(儀威) 등에 관한 자세한 규칙을 제정한 것이다. 그 수효가 많고, 또 항상 배워 익혀야 할 것이라는 뜻에서 중학이라고 하였다.
  10. 10)율종(律宗)에서 4쟁(諍)을 일으켰을 때 쟁론을 소멸시키는 일곱 가지이다. (1) 현전비니(現前毘尼), (2) 억념비니(憶念毘尼), (3) 불치비니(不癡毘尼), (4) 백언비니(白言毘尼), (5) 다어비니(多語毘尼), (6) 죄처소비니(罪處所毘尼), (7) 초부지비니(草覆地毘尼)이다.
  11. 11)처마 끝에 다는 작은 경쇠이다.
  12. 12)원문에는 ‘2년’이나, 다른 본에는 ‘3년’으로 되어 있다. 후자를 따라 번역하였다.
  13. 13)경험이 풍부하고 사리(事理)에 밝은 노인을 말한다.
  14. 14)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이며, 수미산(須彌山)의 북쪽 중턱에 살며, 북방을 수호하는 천왕이다.
  15. 15)매달 8ㆍ14ㆍ15ㆍ23ㆍ29ㆍ30일의 6일을 말한다. 이 6일은 4천왕이 천하를 순행하면서 사람의 선악을 살피는 날이다. 이 날에는 사람마다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지계(持戒)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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