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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도법스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도법스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저는 22년전 제방선원을 떠나 실상사와 인연이 되었습니다.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공부하면서 도법스님께 많은 걸 배웠고 선방에서 사는 것 이외에도 다른 방식의 출가생활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도법스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제가 비판적인 의견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2011년에 종교평화선언을 비판하였고 그 뒤 붓다로 살자에 대해 비판 했습니다. 이제 ‘21세기 약사경신심명강의를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이 가능한 것은 책들이 다양해도 모두 같은 불교관에서 출판된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비판이 될 것입니다. 스님이 비판받는 것이 힘들다고 하셨듯이 저도 비판하는 것이 힘듭니다.

 

종교평화선언에서 도법스님은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저는 종교평화선언을 비판하며 도법스님이 위와같이 말하게 된 이유를 3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는 종교간의 교류를 자주하는 도법스님은 나의 종교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의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다.

둘째는 연기공식 "A가 있으므로 B가 있고 A가 없으므로 B가 없다라는 것에 "기독교가 있으므로 불교가 있고 불교가 있으므로 기독교가 있다"식의 대입으로 연기법이 오해되었다.

셋째는 모든 종교인은 평화와 행복이라는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는 견해 때문이다.

 

먼저 부처님은 불교와 다른교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많은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문 경(A4:239)에서

 

"비구들이여,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바르게 사자후를 토하라.”라는 말합니다.

 

 

부처님은 이 외에도 사자후의 짧은 경 (M11)에서도 다른 교설과 불교가 왜 다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견해가 있나니, 존재에 대한 견해(상견)와 비존재에 대한 견해(단견)이다. ... 이 두 가지 견해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재난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자들은 탐욕을 가진 자요, 성냄을 가진 자요, 어리석음을 가진 자요, 갈애를 가진 자요, 취착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지 못하고,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은 불교와 다른 종교의 교설은 분명히 다릅니다. 종교간의 교류를 위하여 혹은 나의 종교가 인정받기 위해서 남의 종교를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한 이유로 서로의 진리가 같다고 뭉뚱그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단지 언어와 문법이 다른 것이다.’는 표현은 부처님 제자로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며 단지 그렇게 말하는 자의 희망과 추측에 불과합니다.

 

아시다시피 연기공식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입니다. 한문으로는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처럼 이것()과 저것()으로 아함에서만 14곳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잡아함262, 잡아함296,잡아함297,잡아함298,잡아함299) 이것()과 저것()으로 번역한 이 연기공식은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다양하게 응용되어왔고 도법스님이 애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함에서 시사유고시사유(是事有故是事有) 시사기고시사기(是事起故是事起)처럼 이것()과 이것()으로 번역한 경전도 발견됩니다.(잡아함590,잡아함846,잡아함854,잡아함961)

빠알리경을 보면 이것은 원전이 달라서가 아니라 번역자들의 의도가 들어간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빠알리경는 아래처럼 '이것(imasmiṃ)이 있을 때 이것(idaṃ)이 있다.'로 나타나고 있다.

 

 

 

imasmiṃ(이것이,처격) sati(있을때,현재분사) idaṃ(이것이,주격) hoti.(있다)

 

Imassa(이것의,소유격) uppādā(일어남으로부터,탈격) idaṃ(이것이,주격) uppajjati.(일어난다)

 

Imasmiṃ(이것이) asati(없을때) idaṃ(이것이) na hoti.(없다)

 

Imassa(이것의) nirodhā(소멸함으로부터) idaṃ(이것이) nirujjhati(소멸한다)

 

 

 

이 연기공식은 항상 12연기와 함께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것이것12연기의 각지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가까이에 있는 것을 지칭하고 저것은 멀리에 있는 것을 지칭합니다. 또한 '이것''이것'은 같거나 비슷한 종류를 지시하거나 비교할 때 사용하고 '이것''저것'은 다르거나 이질적인 것을 지시하거나 비교할 때 사용됩니다. 이것(A)과 이것(A)의 관계가 이것(A)과 저것(B)의 관계로 되면서 연기의 순서가 무너졌고 의미가 왜곡되었습니다. 12연기에서는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만 상호의존성이 성립하고 다른 각지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다는 성립하지만 행이 있으므로 무명이 있다는 성립하지 않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다는 성립해도 노사가 있으므로 생이 있다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A)과 저것(B)의 관계로 바뀌고 나서는 모든 경우에도 상호의존성이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A)과 저것(B)'생물''무생물', '개인''집단' '사상'사상'을 대입하여 연기는 삼라만상의 의존성과 조건성을 설명하는 우주적법칙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종교평화선언에서 연기적 세계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저것’ ‘은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존재입니다. ‘저것을 부정하는 것은 이것또한 부정하는 것이요, 남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연기공식을 이것(A)과 저것(B)의 의존관계로 보고 양쪽에 모든 것을 대입한 결과입니다. 도법스님이 기독교가 있으므로 불교가 있다.’ 혹은 '상대편도 빛나고 우리편도 빛나라'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왜곡된 연기의 연장선입니다.

 

 

 

 

 

'붓다로 살자'에 대하여

 

'붓다로 살자'는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붓다로살자는 그 자체의 문장에서 모순성, 허구성이 발견됩니다. 정말 자신이 붓다라면 붓다로 살자는 권유, 캠패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붓다로 살자라고 말할 때 이미 붓다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납니다. “붓다로 살자고 다짐해 놓고 때때로 자신이 정말 붓다인가 의심하고, 자신의 행위가 붓다의 생각과 말에서 벗어났음을 번민하는 것도 이미 자신이 붓다가 아닌 것을 드러납니다. 거듭거듭 붓다로 살자라고 다짐해야 하고 심지어 죽을 힘을 다해서’ “붓다로 살자라고 말해야 한다면 이미 붓다가 아니라는 말이됩니다. 처음부터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또는 초기의 대승운동가들 처럼 보살로 살자말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대승불교의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은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도법스님에 의해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으로 변질됨으로서 불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종교평화선언에서 '종교'가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불성(佛性)을 가진 입장에서 보면 노자, 공자, 석가, 예수, 유일신을 믿는 자, 운명론자, 허무론 자, 인과 부정론 자등도 불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존재가 아니라 '종교'가 차이가 없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비약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이 그토록 강조하셨던 바른 견해, 바른 정진 등의 가르침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붓다로 살자'는 운동은 도법스님이 자승 총무원장 밑에서 자성과 쇄신결사 추진본부장'을 맡아 일 할때 만들어 낸 것입니다. 자승 총무원장시절에 8년간 자성과 쇄신'을 한다고 했지만 지금 결과가 어떻습니까? 자성과 쇄신의 흔적은 없고 종단역사이래로 가장 강력한 자승이라는 권승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지 않았습니까? 스님은 '백인 대중공사'를 통해 종도들 81%'총무원장직선제'를 지지한다는 결과를 보았으면서도 애써 무시하였고, 직선제 1인 시위를 하던 스님들이 탄압받고 징계받을 때도 침묵만 지켰습니다. 40일 넘도록 단식을 한 설조스님이 제적당하고 종이로 만든 가짜 선거법을 태웠다고 제적당한 효림스님, 비구니 석안스님등이 부당하게 제적당하였을때도 여전히 침묵으로 외면하였습니다. 포교원장 지홍스님은 공금을 횡령하여 유죄를 받아 징계절차를 밟고있습니다. '붓다로 살자'는 운동을 주도한 분들이 스스로 붓다로 살지 못하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사실 또한 '붓다로 살자'가 '관념불교' '캠패인 불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21세기 약사경2011년에 도법스님이 주도한 ‘21세기 아쇼카 선언''붓다로 살자'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21세기 약사경에서 스님은 '업보중생 문명에서 본래붓다 문명으로 하루속히 전환되게 하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고성제,고집성제,고멸성제,고멸도성제라는 가르침은 업보중생의 현실과 그 현실에서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이 죄의식에 시달리는 미혹문명입니까?

 

신심명 강의끝부분에 화두를 드는 것이야말로 바로 중도행(中道行)인 것입니다. 붓다는 일생을 양변,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길, 또는 떨어져 나가는 길인 중도행으로 살아 간 사람입니다. 따라서 화두 드는 것 자체가 중도행의 하나인 셈입니다....똥파리가 용광로엔 발을 못 붙이듯이 그 어떤 분별망상도 용광로인 화두에는 발붙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스스로 붓다이기에  ‘붓다로 살자’라고 외쳤던 사람은 화두를 들든, 화두를 들지 않든 언제나 붓다로 살아야 하고 중도행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화두를 들어야 비로서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중도행이 된다면 당장 붓다로 살자, 붓다로 살수 있다고 외쳐왔던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화두를 기준으로 중도행과 중도행이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은 스스로 붓다로 살자는 말을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도둑질하면 당장 도둑놈이라 불리듯이 누구라도 '부처의 행동'을 하면 당장 붓다로 살게된다"는 비유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붓다의 지혜, 붓다의 체험, 붓다의 깨어있음, 붓다의 신통, 붓다의 설법도 할수 없는 사람이 "당장 붓다로 살자"라고 말한다고 당장 붓다로 살아지겠습니까? 붓다의 행동이 무엇이고 붓다의 말은 어떤 것인지 의미규정도 없고 설명도 없이 붓다의 행동을 하라고 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스님이 비유하며 말하는 붓다의 행위, 붓다의 말은 착한 범부의 행동과 범부의 말과 어떻게 다릅니까? 스님은 일반 범부가 착한 행위를 착한 말을 하는 것을 바로 붓다의 행위, 붓다의 말이라고 비약하고 있습니다. 스님의 '붓다로 살자''착하게 살자'는 말일 뿐입니다.

 

 

21세기 약사경에서 주의주장 사로잡힌 자기견해 집착않고 참된변화 가져오는 중도실천 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누구의 주장은 주의주장이고 누구의 주장이 중도실천일까요? 설마 나의 이야기는 중도실천이고 상대방의 이야기는 주의주장이 되는 건가요? 스님은 종교평화선언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입장이 21세기 약사경에서 이어져 상대편도 빛나고 우리편도 빛나라라는 빛나라시리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도법스님이 연기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모든 종교의 목적은 같다'는 막연한 추측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으로 고생하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외로움에 눈물짓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 억울함에 가슴치는 뭇생명을 돌보시는 약사여래"가 계신데 왜 이웃의 청년들이 취업하지 못해서 가난으로 고생하고, 외로움에 눈물짓으며 우리나라가 청소년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약사여래가 갖가지 활동을 보지도 못하고 경험도 못했다면 약사여래가 가난한 자를 돌 본 것처럼, 멸시당해 눈물짓는 사람들을 돌본 것처럼 말하는 것은 허망한 말잔치 아닐까요?

 

'협력도 빛나고 경쟁도 빛나라'고 하다가 뒤에서는 '성장이윤 집착하고 인위조작 하는 미혹문명 내려 놓으라' 합니다. 기업은 다른 기업들과 경쟁을 하고 성장하고 이윤추구를 해야 합니다. 경쟁은 빛나라 격려해놓고 성장이윤은 내려 놓으라는 건 모순이지 않습니까? '상대편도 빛나고 우리편도 빛나라'는 이야기도 상대편이 누구냐에 따라 엉청나게 다른 내용이 됩니다. 상대방이 삿된견해를 가진 자들이고 비윤리적인 사람들이라면 빛나라고 말하는게 타당하겠습니까? "번뇌도 빛나고 깨달음도 빛나라" "선법(善法)도 빛나고 불선법(不善法)도 빛나라" 이렇게 빛나는 대상이 무한정 퍼져나 갈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 모두가 빛나서 선악(善惡)과 시비(是非)의 기준이 사라져 세상은 얼마나 혼란스런 무법천지가 될까요? 그 때가 되면 스님은 또 이렇게 말하겠지요. "붓다도 빛나고 마라도 빛나라" "갈등도 빛나고 화합도 빛나라" "바른견해도 빛나고 삿된 견해도 빛나라"라고.

 

 

 

제안합니다.

붓다로 살자를 그만두고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승가에 귀의합니다로 바꾸고 불교성전을 제대로 만들어 불자들에게 제대로된 불교공부가 되도록 하길 제안합니다. 이번 하안거에 백장선원 대중이 불교성전을 검토해본 결과 종단본 불교성전130여곳이 잘못 표현 된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엉터리 불교성전을 만들어 놓고 불자들에게 이 책으로 불교를 배우라고 가르치는 조계종의 승가는 정말 무책임합니다. 스님께서 개인적인 책을 내는 일을 하시기 보다 이제 모든 불자와 비불자들이 읽게될 불교성전이 부끄럽지 않은 책이 되도록 하는데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붓다로 살자를 그만두고 주인으로 살자운동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후로 이러한 승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집도 절도 없다" "절이 싫으면 가벼운 중이 떠나야지 무거운 절이 떠나나?"라는 속담들은 출가자들이 승가안에서 주인으로 살 수 없었던 세월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 각자도생하게 만드는 조계종단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출가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교육시켜야 할 것은 승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승가의 의미를 알아야 주인으로 살수 있습니다. 승가는 대중공사와 포살을 여법하게 하는 4인이상의 비구비구니 모임입니다. 현전승가의 대중공사는 대중들이 모두 참석하여 모두에게 의견을 물어 결정 하고 보시물을 분배 받기에 평등권과 주인의식을 갖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승가는 갈마를 통해 무엇이 율()이고 비율(非律)인지 판단하는 주체였습니다.(2차결집) 승가는 무엇이 법()이고 비법(非法)인지 판단하는 주체였습니다.(3차결집) 승가는 지속적으로 출가자를 받아들여 수계를 주고 교육시키어 불법(佛法)이 유지되게하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승가는 2600년전 승가의 수행도량(공유재산)을 지켜왔습니다.(사방승가) 승가만이 새로운 율()을 제정할 수 있고 기존의 율()을 삭제할 수 있습니다.

 

승가의 막대한 의무와 권한 때문에 웰라마 경(A9:20)에서 "백 명의 불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백 명의 아라한, 심지어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승가'에 공양하는 공덕이 크다."고 부처님은 말합니다. 부처님은 승가를 분열시키는 자를 부모를 죽이는 것과 같은 '오역죄(五逆罪)'에 포함시켰습니다. 비유하자면 '백명의 아라한'은 백개의 자동차 부품이 모여있는 것이고, 백명의 아라한이 속해있는 '승가'는 그 백개의 부품이 조립되어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 승가가 중요하고 소중한 것처럼 그 승가를 이루는 비구 비구니 한 사람 한 사람은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주인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대접을 해주어야 합니다. 주인으로 사는 사람과 객()으로 사는 사람은 큰 차이가 납니다. 아무리 절에 오래 살아도 객으로 사는 사람은 승단에 대한 애정이 없고, 개인의 이익과 안정만을 바라므로 조건이 맞지 않거나 머물기 싫으면 언제든 바로 떠납니다. 이러한 객들만이 사는 공동체는 삭막하고 이기적이이며 빈부차이가 나고, 주종(主從)관계로 살게 됩니다. 승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 주인의식을 갖고 사는 것이 주인으로 살자는 운동입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불교의 핵심도 그것이고 승가의 내용도 그것입니다.

 

허정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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