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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승보에 의지 하는 것인가? 승가에 의지하는 것인가?

승보에 의지 하는 것인가?  승가에 의지하는 것인가?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일반 민중이 사용하는 '단순한 의미와 승가'와  부처님이 제정하신 율에따른 '불교적 의미의 승가'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상가는 육사외도의 무리도 상가라고 불렸고 부처님의 무리도 상가라로 불렸는데 이때의 승가를  '단순한 의미와 승가'라고 하며  '모임' '무리'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붓다아누사띠 담마아누사띠 상가아누사띠를 설명하며 계속해서 생각함(anussati, 隨念)을 설명할때 사쌍팔배를 상가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의미와 승가'이다. 이때의 승가는 사쌍팔배의 성인이 4인이상이어야 한다거나 현전승가를 구성하여 갈마와 포살을 한다거나와는 상관이 없다.  오로지 수행계위를 얻은 '모임' '무리'를 뜻한다. 삭까 경(S40:10)에는 천신들이 사쌍팔배가 승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승가는 범부승가가 아닌 사쌍팔배의 모임만이 승가라고 주장한다. 

"목갈라나 존자여,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바르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참되게 도를 닦고,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합당하게 도를 닦으니, 곧 네 쌍 의 인간들이요[四雙] 여덟 단계에 있는 사람들[八輩]이시다. 이런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시다.’라고 승가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니는 것은 참으로 장한 일입니다. 목갈라나 존자여, 승가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지닌 인연으로 여기 어떤 중생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善處], 천상에 태어납니다. " 삭까 경(S40:10)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승가는 특별해지고 복합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율장에서 설명하는 승가는  5종류의 상가(4인승가. 5인승가,10인승가. 20인승가. 20인이상승가)이다. 각 종류에 따라 가능한 갈마와 포살등 의무와 역활이 달라진다. 이러한  '불교적 의미의 승가'는 다시 현전승가, 사방승가등으로 세분화 되었다. 이렇게 두가지 의미의 승가가를 구분하지 않으면 '승가'에 대한 이해가 혼란스러워 진다.  부처님은 '불교적 의미의 승가'를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보시의 분석 경(M142)이나 웰라마 경(A9:20)에서  '불교적 의미의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최고의 공덕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부처님과 사쌍팔배를 비교한다면 부처님께 보시하는 것이 사쌍팔배에 보시하는 것보다 공덕이크다. 그런데 사쌍팔배가 속한 승가와 부처님을 비교한다면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더 공덕이 크다. 그것은 개인(부처님)에 보시하는 것보다 승가(공동체)에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크기때문이다.  이것이 불자들이 알아야할 놀라운 승가의 의미이다.

 

승가의 화합은 갈마를 함께 하고(同一羯磨), 포살을 함께 하는(同一說戒) 것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등정신과 주인정신이 발휘되고 냉철한 이성과 따듯한 우정이 함께한다. 승가는 갈마를 통해 무엇이 율이고 비율인지 판단하는 주체이다.(2차결집) 승가는 무엇이 법이고 비법인지 판단하는 주체이다.(3차결집) 승가는 승단을 단절시키지 않게 지속적으로 출가자를 받아들여 수계를 주고 교육시키는 유일한 단체이다. 승가는 2600년전 부처님이 말씀을 암송하여 전달하여 왔고 공유재산으로서 수행처를 지켜왔다.(사방승가) 승가만이 새로운 율을 제정할 수 있고 기존의 율을 삭제할 수 있다. 수 많은 세월 동안 승가는 전법,호법,전승의 의무를 실천하였고 미래에도 실천할 것이다. 이러한 승가의 막대한 의무와 권한때문에 "백 명의 불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백 명의 아라한, 백 명의 벽지불, 심지어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승가'에 공양하는 공덕이 크다."고 부처님은 말한다.  오죽하면 부처님이 승가를 분열시키는 자를 부모를 죽이는 것과 같은 '오역죄(五逆罪)'에 포함시켰겠는가?

 

비유하자면 '백명의 아라한'은 백개의 자동차 부품이 모여있는 것이고, 백명의 아라한이 속해있는 '승가'는 그 백개의 부품이 조립되어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와 같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후로 이러한 승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집도 절도 없다"  "절이 싫으면 가벼운 중이 떠나야지 무거운 절이 떠나나?" 라는 속담들은 출가자들이 승가안에서 주인으로 살 수 없었던 세월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사찰에 객실을 폐쇄하여 놓고 스님을 여관에서 자라고 등 떠밀면서 돈을 내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은 환영한다.  무엇이 중한줄 모르기에 수행자가 승가의 주인이 아닌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마침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라는 잘못된 한글번역을 계기로 이렇게 승가의 의미를 되새겨 볼수 있게 되었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할 것이다.

 

그 승가가 중요하고 소중한 것처럼 그 승가를 이루는 비구 비구니 한사람 한사람은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주인 인 것을 알아차려야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대접을 해주어야 하고, 마침내 본래 주인으로서 주인 역활을 해야한다. 나는 승가교육의 핵심이 승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시키는 것이고 그 교육의 결과는 승려들이 각자 주인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주인으로 사는 사람과 객으로 사는 사람은 큰 차이가 난다. 아무리 절에 오래 살아도 객으로 사는 사람은 승단에 대한 애정이 없고, 개인의 이익과 안정만을 바란다. 객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바로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객들만이 사는 집단은 삭막하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다. 승려들간에 빈부차이가 나고,주종관계가 된다. 종단에 발생하는 문제를 대할때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개선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내가 혼자 나선들 개선되겠나?"라는 패배의식을 갖거나 자신도 그 무리들에게 동화되어 부와 명예를 얻으려 노력한다.

승가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는 주인 의식을 갖는다. 어디서나 주인으로 살려고한다.

수처작주(隨處作主), 불교의 사상도 그것이고 승가의 내용도 그것이다. 

 

 

[참고] 보시의 분석 경(M142)

아난다여,  열네 가지 개인을 위한 보시가 있다. 여래아라한정등각자께 보시하는 것이 첫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벽지불에게 보시하는 것이 두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여래의 제자인 아라한에게 보시하는 것이 세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아라한과의 실형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네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불환자게 보시하는 것이 다섯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불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여섯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일래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일곱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일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여덟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예류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아홉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예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감각적 욕망들에 대해 탐욕을 여윈 이교도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두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행실이 바른 범부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두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행실이 나쁜 범부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세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축생에게 보시하는 것이 열네 번째 개인을 위한 보시이다. 아난다여, 이 가운데서 축생에게 보시를 하면 백 배의 보답이 기대된다. 행실이 나쁜 범부에게 보시를 하면 천 배의 보답이 기대된다. 행실이 바른 범부에게 보시를 하면 십만 배의 보답이 기대된다. 감각적 욕망들에 대해 탐욕을 여윈 이교도들에게 보시를 하면 천억 배의 보답이 기대된다. 예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보시를 하면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는 보답이 기대된다. 그러나 예류자에게 보시를 하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일래과의 실현을 닦는 자에게  일래자에게  여래아라한정등각자에게 보시를 하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난다여, 그런데 일곱 가지 승가를 위한 보시가 있다.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첫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여래가 완전한 열반에 들고 나서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두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비구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세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비구니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네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와 비구니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다섯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여섯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니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일곱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아난다여, 미래세에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삿된 법을 가졌으며 노란 가사를 목에 두른 일족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승가를 위해 그 계행이 청정치 못한 자들에게 보시를 베풀 것이다. 아난다여. 그렇더라고 승가를 위한 보시는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아난다여,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승가에게 하는 보시보다 그 과보가 더 크다고 나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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