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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백제의 미소, 그 천년의 여운

[백제의 미소, 그 천년의 여운]

 

                                                                         

                                                                                공주대 사학과 정재윤교수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국도를 타고 1시간 남짓 달리면 서산나들목에 다다른다. 그 다음 가야산 상왕봉으로부터 발원한 물길이 서산시 운산면의 용현계곡을 만들며 굽이쳐 흘러드는 용현리 입구까지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용현계곡의 물소리가 잦아드는 한쪽 골짜기를 찾아들면, ‘백제의 미소’로 알려져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국보 제84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앙의 소탈한 모습의 본존불상과, 좌우의 반가 사유상과 보살 입상은 첫인상에서부터 일반적인 삼존불상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의 파괴, 즉 초탈함을 느끼게 한다. 그 이름도 유명한 ‘백제의 미소’라는 말은 한국 역사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고 김원용 박사의 저서 『한국미의 탐구』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마애불을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공감하였다. 때문에 현재는 ‘백제의 미소’가 서산 마애삼존불을 가리키는 별칭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서산 마애삼존불이 갖고 있는 ‘온화하고 고졸한 미소’와 ‘형식의 파격’은 다른 어떤 백제의 문화유산보다 백제스러움을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로서 한국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진정한 가치는 조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신이 아닌 이웃집 아저씨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친근한 불상의 얼굴과 더불어, 하루의 태양의 조도에 따라 바뀌는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의 미소는 천오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당시 살아 움직이는 백제인들의 소탈한 미소를 현대인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른 아침 살짝 미소만 머금다가 오후의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는 입꼬리를 올려 활짝 웃는다. 해가 저물고 달이 뜨면 불상 아래에 켜진 촛불과 함께 다시 불상 본연의 근엄한 얼굴로 돌아간다. 이렇듯 백제의 미소는 천년을 이어 왔고, 다시 앞으로 천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미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산신령으로 화한 백제의 부처]

 

보면 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발견된 지 겨우 50여 년밖에 안 되었다. 1959년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이었던 홍사준 박사의 의뢰로 고 황수영·김재원 박사가 현장 조사를 하여 마애불상을 발견하였는데, 홍사준 박사의 불상 발견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원래 서산은 ‘백암사(白菴寺)’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가야산 일대를 중심으로 불교가 꽃핀 지역이다. 그런데 현장 조사를 갔던 홍사준 박사는 아무리 찾아봐도 불상은커녕 탑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모든 것을 체념한 홍사준 박사는 지나가던 나무꾼에게 혹시 불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나무꾼은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는디유.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라고 느릿느릿한 서산 지역의 사투리로 ‘산신령과 두 마누라[?]’의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이다. 그 나무꾼의 말을 듣고 찾아간 계곡의 암벽 가운데에 바로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있었다.

 

불상을 자세히 보니 나무꾼의 설명대로 중앙의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이 새겨진 삼존불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더욱 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은 나무꾼의 마애불에 대한 설명이 그 어떤 묘사보다도 정확하였다는 점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산신령이었고, 본마누라는 본존불 우측에 서 있는 보살, 작은마누라는 좌측의 다리를 꼬고 턱을 괴어 앉아 있는 반가 사유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가야산 계곡의 한쪽 귀퉁이에서 보살을 마누라로 두면서 산신령 노릇을 하던 백제 부처는 세상에 알려지면서 다시금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상으로 화하게 되었다.

 

그런데 백제의 몇 되지 않는 부처가 왜 도읍지도 아닌 가야산 깊은 계곡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백제 시대 서산 지역의 중요성과 관련이 있다. 일찍부터 백제 중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서산 지역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한강 유역을 상실한 백제는 이전 시기 중국과의 교섭 창구였던 한강 유역의 기항지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백제는 중국으로 갈 수 있는 새로운 항구를 모색하였고, 그 결과 서산 지역이 그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서산 지역이 위치한 태안반도는 중국과의 거리가 우리나라에서 직선거리로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당시에 직항로가 사용되었을지는 의문이지만 중국과의 항로에 중요한 지표가 되는 덕적도와는 불과 30㎞에 불과하여, 이전 시기 항로와 가장 유사한 경로로 항해가 가능하였다. 이렇듯 대중국 교섭의 기항지이자 기착지로 서산 지역이 부상하면서, 자연스레 백제로 들어오는 선진 문물이 서산 지역에 내려진 후 육로를 통해 도읍이 위치한 충청남도 내륙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서산 지역에서 충청남도 내륙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동쪽의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험준한 산지를 넘어야만 가능하였다. 바로 서산에서부터 공주·부여 지역으로 이동하는 유일한 통로가 지금의 서산 마애삼존불이 위치하고 있는 가야산 협곡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남북조와 백제, 그리고 서산 지역과 공주·부여 지역을 오가던 백제의 상인들은 수없이 가야산 협곡을 오갔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국제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던 불교문화도 바로 이 경로를 통해서 도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아마도 이 가야산 협곡에 부처가 터를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백제 중앙에서는 고구려·신라와의 해상 접경지가 된 서산 지역이 불법의 힘으로 호국과 민심을 수습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6세기 말~7세기 초 위덕왕(威德王)에서 무왕(武王)에 이르는 시기는 백제 불교의 극성기였다.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를 지키고 왕실의 안전을 기원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익산 미륵사(彌勒寺)와 같은 대 불사를 진행하였다. 왕실에서는 선진 문물의 중요한 통로인 가야산 협곡에 미륵사와 마찬가지로 보원사(普願寺)를 건립하고,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조성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 가야산 일대에 위치한 예산 수덕사(修德寺) 등에서 백제 시대 고승인 혜현(慧顯)이 몸을 담는 등 가야산은 백제 시대 불교문화의 성지로 꽃피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서산 지역과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주민들은 속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몸을 던지며 멀리서 가야산을 바라보고 항해가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가야산은 바다에 몸을 맡긴 뱃사람들이 자신이 비로소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증거였다. 이들은 가야산에 부처가 터를 잡고 언제까지든 자신들의 안전과 부의 축적을 도와주길 기원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모든 이들의 기원을 바탕으로 새겨진 것이 바로 서산 마애삼존불상일 것이다. 왕에서 민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평화로운 세계, 바로 백제인들이 바라는 불국토에 존재하는 부처의 모습이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부처가 된 백제인의 얼굴]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언제부터인가 서산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로 부각되었다. 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백제를 보기 위해 마애불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가장 백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상 때문에 당대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부여가 아닌 서산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와 부여에는 수많은 백제의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름다운 탑과 훌륭한 왕의 무덤들, 그리고 왕궁 터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의 수도라는 것은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이기에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백제와 관련된 것 가운데 공주와 부여에는 없고 서산에만 있는 것이 있다.

 

일국의 도읍에도 없던 것이 서산에만 남아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백제 사람’이다. ‘백제 사람’이란 옛 도읍지에 남아 있는 수많은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이들일 것이다. 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 ‘백제 사람’은 없고, 그들이 남긴 것들만 우리 곁에 자리한다. 그런데 서산 지역에는 공주와 부여에 비해 많은 백제 문화유산은 없지만 ‘백제 사람’이 있다. 바로 서산 마애삼존불상 그 자체가 ‘백제 사람’의 모습과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어디에서나 봄직한 우리 주변의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본존불의 모습은 우리가 백제인의 혈육임을 증명하고 있다. 근엄한 얼굴로 인생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출해 줄 것 같은 신의 모습이 아니라, 밤새 술잔을 나누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인간의 모습이다. 좌우의 보살도 근엄한 얼굴이 아니라 ‘김치’하면서 웃는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큰 바위 얼굴은 보면 볼수록 감칠맛이 우러나는 우리의 장맛과 같은 감동을 선사해 주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백제 사람들의 성격을 설명할 때 흔히들 진취성과 개방성, 그리고 여유와 온화함, 부드러움, 자유분방함 등을 든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소박한 새김 기법과 자유로운 불상의 배치에서는 백제인들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마애불의 순박하고 푸근한 미소에서는 시종일관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철학이 묻어난다.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조성된 마애불은, 한편으로는 바다를 무대로 활동하는 백제 사람의 진취성과 역동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당대 서산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백제인들의 개방성에 기인하였다. 당시 바다는 선진 문물과 문화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었으며, 바다와 육지를 이어 주는 요충지라는 지역적 특수성은 서산 지역 백제인의 개방성을 함양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마애불이라는 당대 유행하던 문화 양식을 받아들인 것 자체도 이러한 개방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산의 백제인들은 당대 어느 지역의 백제인들보다 국제 사회의 유행을 잘 알고 있었고, 새로운 문물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그 불상의 얼굴에 자신의, 혹은 자신의 부모와 친척, 이웃의 얼굴을 새겨 넣음으로써 자신들의 모습과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불상의 법의 아래로 보이는 바지의 일자로 트인 밑단과 도련의 덧댐 흔적은 바로 백제인들의 옷 바로 그것이다. 백제의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백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긴 시간을 넘어 현대인과 소통하고 있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천오백 년 전 3명의 백제 사람과 다름없다. ‘백제’가 아닌 ‘백제 사람’을 보고 싶다면 서산으로 방향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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