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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인용문

스님 제 생각은 다릅니다를 읽고

 

도법 '중도=팔정도'라고 경전에 언급되고 있고, 석학들도 다 그렇게 쓰지만 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현실 문제를 불교적으로 다루는 데 적절하거나 효과적으로 되기 어렵다.

담정 자기 해석과 다르다고 해서 경전에 언급된 것 자체를 부정하는가! 117

 

도법 중도는 가야 할 길이고, ''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렇게 보면 되지 않을까? 여실지견을 중도행의 하나로 보면, 여기서 보는 것은 행위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 연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붓다 생애의 맥락과도 잘 맞는다고 여겨진다. 붓다 생애의 맥락을 일차적으로 말하면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 자신의 방식으로 관찰 사유해서 연기 실상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초기 자료에 나오는 내용이다. 초전법륜경의 첫 언급이 중도이고 중도가 깨달음과 열반으로 안내하는 길이라고 나온다. 다시 말하자면 중도의 길을 가서 연기법을 깨달았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119

 

담정 그것은 그야말로 스님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스님은 지금까지 우리가 추적해왔던 중과 중도의 차이를 다시 뭉뚱그리고 있다. 중과 중도는 다른 것이다! 중도는 딱 하나다. 팔정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것이 중도가 경전에 등장하는 유일무이한 장면이다.....적어도 오비구는 6년 동안 같이 고행하며 같은 목표로 수행해왔던 도반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장치,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인 연기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 이 문제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초전법륜 앞에 '범천권'이라는 신화적 내용을 첨부하면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이 연기임을 강조하고 있다. 불본행집경을 보면 초전법륜경과 비슷한 37 전묘법륜품轉妙法輪 品 앞에 36 범천권청품梵天勤請品)이 들어 있다. 119

 

담정 지금 스님과 같은 질문을 불전 문학의 시대에도 했기 때문에 '범천권청'이 등장한 것이다. 초전법륜경의 내용만 강조하다 보니, '연기 법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한 장치가 불본행집경에서처럼 37 전묘법륜품앞에 36 범천 권청품을 가져다 놓은 것이다.

도법 중도의 길에 의지해 연기를 깨달았다고 하는 점은 분명한 것 아닌가?

담정 아니다. 그 반대다! 지금과 같은 논의가 생기는 것을 없애기 위한 장치를 해둔 것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은 다 되는데, 초전법륜경만 강조하면 지금과 같이 말이 오가니, 그 불필요함을 없애기 위해 그 앞에 점을 찍어놓은 것이다.

도법 좀 억지스럽다. (웃음)

담정 스님의 억지에 비하면 뭐. (웃음) 122

 

 

 

담정 스님의 중도에 대한 천착과 과잉은 끝이없다. 스님은 그저 부설거사처럼 불교를 해라.(웃음) 스님의 중도 가운데 대부분을 '연기'로 바꾸면 과잉의 문제는 많이 해소될 것이다. 과도한 중도라는 표현이 줄 수 있는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연기로 바꾸고, 그 실천 전체를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서 항상 강조하 시는 '공성의 지혜'라고 한다면 교학 안에서 큰 틀이 맞춰진다.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떤 문제를 논의할 때 지금 답을 찾자는 게 아니고 '다름'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에 더 집중한다. 스님께서 중도를 강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한국 불교에서 선불교 중심이라는 과잉 문제를 실천으로 해결하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라고 본다.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다. 이론은 오직 추상적 보편적 가치로 의미 가 있는 것이다. 그저 구체적 상황에 적용할 때마다 기준점을 잃지 않으면 된다. 구체적인 사례는 구체적으로 다루면 된다. 그것이 곧 실천 테제이다. 그 추상적인 실천 테제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1:1의 경우가 무수하게 생긴다. 그렇지만 스님은 그 두 가지를 같이 놓고 하나를 찾아내고 싶어 한다.

 

도법 나는 반대로 연기의 과잉, 공성의 과잉이라고 반론하겠다.

 

담정 내가 어떤 주장을 한 적이 없는데 무슨 반론을 하는가! 중관학파는 남이 논하지 않는 것은 논파하지 않는다. 스님은 앞에서 '중이라는 말이 연기를 뜻한다면, 연기에 의해서 연기를 설한다가 되기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책인 붓다, 중도로 살다에 서는 '중도의 팔정도행'이라고 했다. 주장이 없고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논파하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 스님은 자기주장의 모순에 대해서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도법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담정 있을 것이 아니라 있다! (웃음)

 

도법 이론가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능력이 매우 부족한 것은 맞다. 그럼에도 끝내 '중도의 팔정도행'이라고 하는 이유는 붓다의 생애 맥락에 따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장 삶의 경험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름으로 확신을 갖고 '중도의 팔정도행'이라고 정리했고, 그 중도의 팔정 도행이 붓다의 삶 전반에 작동하도록 배치한 결과물이 '붓다, 중도로 살다'이다.

 

담정 이런 자의적 해석이 바로 스님의 문제, 중도의 과잉 문제다. 그래서 바로 그것이 실천적 행보로서 '중도''중재의 노력'으로 해석하고 그것만 실천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도법 중도를 중재의 논리로 보고 해석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싸움은 말리고 홍정은 붙인다'라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중재 운운하는 것처럼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비판과 논란 중에 있지만, 그래도 나는 경전 상의 중中과 중도는 같은 내용으로 본다.

 

담정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스님과 나의 차이만 확인할 뿐이다.

 

도법 구마라집도 중을 중도로 풀었다. 구마라집 당시 중국의 상황은 이해되고 동의하지만, 붓다의 말씀을 함부로 취급하진 않았을 것이다.

 

담정 구마라집이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동의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불만족스럽지 않다. 하지만 스님처럼 '중과 '중도'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밝혀내고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자리에 서도 반복되는 주장만 계속하시는 건 오로지 스님의 몫이다. 불설전유 경을 다시 보자. 불설전유경에서 만동자의 경우, 부처님께서 자신의 질문에 답을 못하면 '나는 떠날 것'이라 했다. 그래서 부처님께 꾸지람을 듣는다. 그리고 당신의 가르침을 독화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셨다. 다른 곳에서 부처님께서는 신심 깊은 제자에게는 '그 질문의 답을 찾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고는 삶의 고통은 실제적 인 문제이니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하지 말라!'라고 자세히 설명해주신다. 그리고 염화미소粘華微笑의 예처럼, 대가섭에게는 그저 지긋한 웃음으로 답을 주신다. 형이상학적인 주제라 할지라도 내용이 아니라 자세를 더욱 중요하게 보신 것이다.

 

도법 내가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중에 의지한 행이고, 중도의 행이라고 본다. 이쯤에서 삼제게를 내 방식으로 풀어보겠다.

 

인연 화합의 진리로 이루어진 이것을 나는 공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은 방편일 뿐이며, 방편으로 공이라고 말하는 이것이 바로 중도의 뜻이다.

 

대부분은 '연기인 것 그것이 공이다, 가명이다, 중도다'라고 번역하고 설명하는데, 나는 중도의 의미를 그렇게 풀면 안 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1~2행의 해석은 동의가 된다. 그렇지만 그 뒤에 따라 나오는 3, 4행의 '역위시가명亦為是假名 역시중도의 亦是中道義'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불가피하게 공이라고 말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중도라는 뜻으로, 말로 할 수 없지만 방편으로 공이라고 말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중도의 뜻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풀어야 본래 취지에 맞는다고 본다.

 

담정 스님이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다만 구마라 집이 '가명'이라 번역한 산스끄리뜨어 원문인 '쁘라가쁘띠흐prajñapaih' 에는 그런 뜻이 없다는 점만 명심하기를 바란다.

 

도법 그렇다면 산스끄리뜨어에 부족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담정 그 '가명'이라는 단어는 구마라집의 번역어이다. 도법 그렇다면 구마라집이야말로 참으로 탁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담정 그렇지 않다. 원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옮겨야 하는데 긍정적인 단어를 부정적인 단어로 바꾸었으니 자기 해석이 지나치게 들어간 것이다. '그와 같은 가르침'이 정확한 뜻이다. '가르침''가명' 으로 바꾼 것이다.

 

도법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담정 '가르침''가명'과 같은 뜻인가!

 

도법 공이라고 말하는 붓다의 가르침도 모두 응병여약의 방편이라는 의미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담정 아니다. '그것에 의한 가르침''가명'이라고 한 한역은 구마라집이 만들어낸 뜻이다. 가명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우리 생각은 본뜻과 다르게 가버린다. 가명이 아니라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의 실천행이 중'이 정확한 뜻이다. , 그 가르침의 내용이 1, 2행의 내용이다. 그 가르침의 실천행이 곧 중이라고 이해할 때 '왜 가명이라는 말이 등장하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스님처럼 '중도'를 강조할 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유교와 도교의 영향 아래에 빠져버리게 된다. 더 나아가 정치적 중앙파와 불교의 지향점인 연기 실상을 파악하려는 자세가 헷갈리게 되어 '삶의 괴로움'에 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놓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양견을 말하지 말고 한쪽만 보자고 하는 것이고, 말을 먼저 보지 말고 그 조건을 보자는 것이다. 스님처럼 같은 주장을 무한 반복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웃음)

 

도법 산스끄리뜨어를 번역한 것이 '연기인 그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가르침에 따른 실천이 중이다. 이것을 연기를 공성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가르침에 따른 실천이 중이다'라고 풀고 있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오히려 '공이라고 한다. 가명이라고 한다. 다고 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중도의 뜻이다'라고 한 구마라집의 안목이 훨씬 탁월하다고본다.

 

 

담정 지금 하시는 말씀은 '천안에 있는 천안호두과자 원조집에 가서 우리 호두과자가 더 맛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도법 '연기를 공성이라고 한다. 그와 같은 가르침에 따른 실천이 중이 다'라고 하면 '실상은 말로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말로 한다'라는 표현에서 실상은 말로 할 수 없다는 뜻이 살아나지 않는다.

 

담정 중론449 게송인데, 고작 한 게송에서 끝장을 보려 하는가? (웃음) 앞뒤로 그 이야기가 나온다.

 

도법 그럴지 몰라도 이 게송만 보면 그렇다. 내용을 씹어보면 씹어볼수 록 '역시 구마라집이 탁월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현실에 적용했을 때 경험되지 않고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붓다의 말씀이든 그 무엇이든 필요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현재 직면한 문제, 우리가 직접 대면한 문제를 내 방식으로 하든, 중론의 방식으로 하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고 줄기차게 말하는 것이다.

 

담정 추상적인 내용 속에서 합의된 것의 구체적인 부분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놓자. 그것이 스님과 나의 차이, 우리 조건의 차이이다. 스님이 생각하 시는 '중도'와 각자가 생각하는 '중도'는 다르다.

 

도법 함께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해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경전 근거만이 아니라 실제의 사례를 갖고 구체적으로 답이 나오도록 이야기를 해보자. 만약에 지금 지산재에서 저녁 공양으로 돌솥밥을 먹자고 하는데, 견해가 달라서 다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담정 제일 연장자인 스님이 돌솥밥을 먹자고 하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논리'는 힘이고 권력이고 폭력이다. 우리는 '논리'라고 하면 이론적인, 합리적인 말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어떤 논리, 즉 주의 주장이 펼쳐지고 있는 조건을 무시한 것에서 비롯되는 오해다. 논리도 조건 속에 놓여 있고 그 논리를 펴는 자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조건'이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논리가 진행되는지 보지 못하면 그 안에 빠져버린다. 논의가 진행되는 전체 판을 보자. 말의 함정에 빠져들 어, '돌솥밥이냐? 수제비냐?'를 두고 말을 잇기 시작하면, 그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어떤 담론이 한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순간,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한 안티테제도 그쪽으로 끌려간다.

 

도법 복잡한 것은 놔두고 저녁 공양을 무엇으로 할까 갈등이 생겼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나는 중도, 있는 그대로인 중에 의지해서 하면 바람직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담정 그냥 돌솥밥 먹자. (웃음)

 

도법 양극단을 타파해야 벗어나게 된다고 하는 것을 담정은 논파의 방식이라고 강조하지만, 나처럼 중도적인 방식으로 하면 양극단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이렇게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너무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내가 감당하기 어려우니 가장 단순한 원형인 붓다의 삶 자체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붓다의 삶에 나타나 있는 '중도'중론에서 말하는 '중도'는 많이 다르다. 기회를 만들어 깊이 논의하여 가닥을 쳤으면 하는 마음이다.

 

담정 논파 가운데 논이 없는데 파가 어떻게 있겠는가? 부처님 생애를 촘촘하게 엮지 않아서인지 스님은 언제나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도법 내 나름대로는 실제 삶과 연결해 촘촘하게 봤기 때문에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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