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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공간의 미래>를 읽고

<공간의 미래>를 읽고

 

 

<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고 김현준에 매료되어서 이번에는 <공간의 미래>를 읽었다. ‘코로나가 가속화 시킨 공간의 변화라는 부제처럼 코로나 시대에 앞으로 공간은 어떻게 변화했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예측하고 있다. ‘건축가라면 갈등이 있는 곳에 창의적 디자인을 통해서 갈등을 화합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관심은 늘 사람이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이 사는 집을 짓는 일은 늘 사람이 중심이되어야 한다. 사람이 중심이된다는 점에서 건축가는 종교가와 정치가와 예술가와도 닮았다. 건축이 단순한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사이에 소통을 촉진하고 화합을 도모하게 한다는 사실은 나도 너끈히 동의하는 말이다. 출가한 이래로 여러 사찰에 옮겨 다니며 살다보니 각 사찰이나 선원의 공간이 사람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가를 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인도성지순례를 하면서 인도성지에 세워진 세계 각국의 사찰을 돌아보며 우리나라 사원과 어떻게 다른가 열심히 관찰하기도 하였다.

 

지금 한국의 선원은 많은 스님들이 큰방에 모여 정진하는 것인데 부처님 당시와는 많이 달라진 전통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오히려 작은 개인처소(꾸띠)에서 정진하였으며 포살등 필요한 시간에만 대중과 함께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대중이 큰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정진,공양,좌선등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많기에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큰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은 겨울에 난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생겨난 사건인데 마치 부처님시대의 전통처럼 오해되어져 왔다. 육화경의 신화동주(身和同住)를 잘못 해석한 탓이기도하다. 특히 좌선시간을 너무 많이 정해놓은 것과 스승이나 도반들과 탁마를 하지 않는 것은 시급히 수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불교계의 사찰은 이른바 명산대찰이란 말처럼 거개가 관광지화가 되었다. 그래서 사찰을 찾으면 관람료를 내어야하고 도량마당에 들어서면 백일기도 ,기와불사, 인등기도, 산신기도등 각종기도에 접수 받기를 권유당한다. 관람료를 받으니 관광객으로 생각하기에 절에 온 것을 환영하기 보다는 정숙’ ‘들어오지 마시오’ ‘발길을 돌려 주셔요라는 글귀처럼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선원처럼 고요한 환경을 요하는 공간은 철저하게 관리하더라도 일반사찰은 누구라도 접근이 용이하도록 문턱을 낯추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설계한 열린교회는 참신하다. 교회는 실제로 일요일 오전에만 많이 사용되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비어 있는 공간인데 교회 1층을 커피숍, 도서관등 친교의 공간으로 만들어 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와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십자가는 되도록 보이지 않게 안쪽으로 배치하고 교회의 외형도 둥굴게 팔을 벌려 안아주는 형태의 교회를 지었다. 이러한 열려있는 교회가 많아 질수록 젊은이들이 갈 곳이 많아져서 우리사회가 더 행복해질 것이다. 사찰도 방문객들에게 조용히 차를 마시거나, 스님들께 상담을 받거나, 문화재를 관람하거나, 나무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해 주어 그들이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가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지금처럼 등산객에게도 관람료를 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말 그대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저자는 주택 소유를 통해서 더 많은 청년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 때 바람직한 사회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아파트의 '소유''임대'의 차이에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애착, 이웃에 대한 존중, 나에 대한 자존감이 달라진다는 것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누구나 쉽게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집을 소유한 사람이 많은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더 건전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절을 보니 출가한지 몇십년이 지났어도 자기만의 개인 공간이 없어서 각자도생하는 출가자들의 현실이 오버렙 된다. 공공의 사찰이 몇몇 사람들이 몇십년 주지를 하면서 개인 처소가 되어가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이 개인이 수입이 되어가는게 지금 조계종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공찰의 주지나 강사들은 임명권자의 눈치를 보며 사느라 비판적인 말을 못하고 산다. 대중의 뜻으로 운영되는 종단이 되려면 우선 누구나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개인이 사찰을 지은 창건주스님들도 종단에 비판적인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현재상황에서는 개인소유가 보장되어도 공심(公心)이 생기는 것 같지도 않다.

 

 

 

저자는 인간을 너무 착하게 봐서 공산주의가 실패 실패했다고 말한다. 아파트를 재건축할 때 같은 단지 내에 분양 아파트 옆에 임대 아파트를 넣었는데 아파트 소유자들은 임대 주택 주민들과 엘리베이터도 공유하기 싫어하고 자녀들을 같은 학교에 보내기도 싫어하는 현상이 생겼단다. 이처럼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선하지 않기에 소셜믹스(소득의 차이나 인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섞여사는 것)는 상대방의 배경이 어떤지 모르는 '익명성'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도시에 공원, 벤치, 도서관이 많아져서 누구나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에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도록 해야한다. 저자는 규모가 작더라도 시내 곳곳에 선형의 공원,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 규모는 작아지고 다양성은 많은 학교, 특색 있는 지방 도시등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실천적인 제안들은 정치가들이 당장 정책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재능기부를 비판하는 내용도 흥미롭다 재능은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재능을 통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기부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과 같은 재능 기부는 시장을 교란하여 미래를 망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덕성 경쟁을 그만두고 각 분야에서 실질적 경쟁을 만들어야 위선자들이 판치는 세상을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19세기에 석탄을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을 때 우유와 수소라는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는데 석유가 수소보다 생산 단가가 아주 조금 싸다는 이유로 석유를 선택하여 지금의 환경위기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기후 변화와 전염병의 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의 선택이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기에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코로나시대에 바뀌어 가는 많은 것들에 대한 설명과 앞으로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긍정적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저자가 제시하는 이야기들은 되새겨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법과 인과법을 이렇게 공간의 미래에서 들으니 숙연하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부처님 가르침은 기후온난화, 사회갈등, 심리갈등, 윤리등 모든 문제에 관련되어 있지만 정작 사회인들이 건축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인문학을 통해서 더욱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스승이 가르쳐준 높은 가르침을 활용하지 못하고 49재를 지내고, 생일기도를 해주고, 입시기도를 해주는 차원에서 승려의 역할이 머물고 있으니 삭발하고 회색옷 입고 사는 사람들이 자꾸만 자꾸만 골동품이 되어간다. 게다가 지금 관람료 문제에서 시작한 갈등 때문에 1월에 승려대회를 한다고 하니 거룩해야 할 승려대회가 집단 이기주의적인 철없는 행동으로 비춰질까 염려된다. 더구나 승려대회 이유가 한 여권 정치인의 출당과 제명이라니... 부처님 뵙기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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