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고
저자의 생각은 발랄하고 유쾌하다. 강수량 차이로 인해서 서양은 독립된 개인이 중요한 사회가, 동양은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강수량에 따라 벼농사와 밀 농사를 짓게 되었고 품종에 따라 노동의 방식이 다르게 되었고 노동 방식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를 만들었다. 적은 강수량의 서양은 밀 농사는 개인주의 성향을 가지게 했고, 벽 중심의 건축으로 발전했다. 반면 많은 강수량 때문에 동양은 벼농사의 집단 노동방식으로 사람간의 협동이 중요하였고, 목재를 이용한 기둥 중심의 건축양식은 외부자연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기차, 버스, 철길이라는 세가지 단어에서 둘을 묶으라는 질문을 던지면 벼농사를 짓는 지역의 사람들은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를 생각하면서 개체 간의 '관계'에 집중해 ‘기차와 철길’을 하나로 묶었고, 밀 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관계가 아닌 각 개체가 가진 성질의 공통점을 찾아서 교통수단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버스와 기차'를 하나로 묶었다고 한다. 비슷한 실험으로 자신의 크기를 동그라미 그림으로 그리라는 질문에 벼농사 지역의 사람들이 밀 농사 지역의 사람들보다 자신을 나타내는 원을 작게 그렸다. 자신을 나타내는 원을 작게 그리는 것은 개인인 나'보다는 '우리'라는 집단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실험결과를 설명하며 자신만의 추리를 펼쳐보이는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저자의 논리에 수긍하게 된다.
단청을 설명하는 부분도 재미있다. 창문 밖으로 경치를 보았을 때 시야에서 윗부분을 프레임하는 것이 서까래와 처마이기에 처마에 예쁘게 색칠한 단청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단청에 대부분 녹색 계통이고 강하게 보색이 되는 자주빛을 사용하는 이유도 처마에 서서 주변 산을 바라보면 자주빛은 나뭇가지처럼 보이고, 녹색은 나뭇잎으로 보여서 주변 풍경이 연속되어 건축물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단청의 색깔만 보더라도 우리 선조들은 자연과 건축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건축물이 자연에 흡수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고 추측한다. 실로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기독교인이라 그런지 성경의 창조신화와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설명하는 부분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예수를 통해서 천국에 간다'라는 말은 '이성을 통해서 이데아에 이른다'와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는 둘 다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가 있는 것으로 보는 공통점이 있다. 서양의 사고방식에는 절대 진리의 세계가 있으며, 그곳에 이르는 길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믿음을 너무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이 깊이 사유해 보아야 할 신선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불교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 불교의 윤회사상이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열반에 이르고 나서야 해탈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발언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윤회가 힌두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라는 일부학자들의 견해를 그 대로 따른 듯이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싯타르타가 브라흐마를 믿는 힌두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부처님도 힌두교인이라는 주장과 같은 오류를 지닌다. 부처님은 자신과 세상의 이치를 깊이 통찰하여 깨달은 사실은 세상을 창조한 브라흐마라는 창조신은 없다는 것이다. 붓다는 브라흐마신이 자신을 창조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착각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또한 깨닫지 못한 중생은 윤회를 한다는 사실이다. 육신통을 통해서 삼계윤회를 설명하는 경전, 4가지 성인의 단계를 설명하는 경전등은 세계 4대성인 이라고 추앙받는 다른 분들을 포함하여 인류의 그 누구도 통찰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내용들이다. 노자의 '비움의 사상'을 염두에 둔 건축물을 ‘선(禪)의 정원'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의아하다. ‘선(禪)의 정원'이라면 노자보다는 불교의 선사상에 의하여 설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앞으로 사회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인간다움도 변할 것인데 그곳에서도 변화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런 생각이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 이러한 생각도 변화하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믿음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까한다. 몇가지 지적질을 했지만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과 이야기를 다루는 범위 그리고 설득력은 이 책을 읽는 많은 시간 동안 입가에 미소가 머물게 하였다. 강수량의 차이를 가지고 인류의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건축물의 차이를 재미있게 풀어 낼 수 있는 작가의 통찰력은 탁월하다. 한국의 유발하라리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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