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크리스천
(질문 빈곤 사회를 읽고)
‘질문 빈곤 사회’를 정성스럽게 읽었다. 곳곳에 숨어있는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저자는 사고가 열려있는 참 괜찮은 지혜로운 크리스천이다. “배움이란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하기를 배우는 것이다.”라는 조언은 웅숭깊다. 이러한 삶의 깃발을 올린 자가 난파선(難破船)일 리가 없다. 어디를 가나, 어느 날마다 좋은 날이 될 것이다. “희망의 근거는 ‘성공의 보장’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꾸고 그 목적과 꿈을 위해 씨름하는 그 과정 한가운데 있다.”라는 말은 ‘종은 질문하기를 배우는 것’에 대한 해석이다. 고정된 관념을 가지게 되면 우리 편은 환대하고 내 생각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배척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어리석음(無明)으로부터 탐욕(貪慾)과 증오(憎惡)가 발생하는 이치이다. 안목을 바꿈으로써 문제 해결이 저절로 된다. 그 시작이 좋은 질문이다.
이미 몇가지 전제가 되어있는 질문들은 나쁜 질문들이다. 질문에 인정하고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같은 오류에 빠져버린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하는가?라는 질문은 예, 아니오를 요구하기에 나쁜질문이고 인간의 성적지향이 마치 개인의 호불호의 문제인 것처럼 왜곡하기에 나쁜질문이다.
붓다도 좋은 질문을 강조했다. 몰리야팍구나(S12:12)에게 ‘누가 집착하느냐’는 좋은 질문이 아니다. 무엇을 조건으로 집착이 있게 되느냐?가 좋은 질문이다.라고 강조했다. ‘누가 집착하느냐’, ‘누가 사랑 하느냐’는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반대로 무엇을 조건으로’ 집착이 있게 되느냐?는 질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파악하게 한다. 나쁜질문은 갈등과 혼란으로 이끌고 좋은 질문은 화합과 지혜로 이끈다.
질문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질문을 못하게 하는 집단은 답답하다. 침묵을 강요하는 그 곳에는 이미 나쁜전제들이 깔려있다. 보수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14년째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기독교인들이 가진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기인한다. 이 책이 보수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그런면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적그 찬성하는 불교계가 더욱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대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타락을 지적하는 문장들에서 승가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해서 혐오가치를 극대화하고 그 혐오의 대상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신과 성서를 소환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예수라는 상표는 사용하지만 그 예수와는 상관없는 지독한 이기주의 여성,소수자,타종교 혐오주의, 물질만능주의, 성공지상주의가 한국의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 문장에서 ‘예수’라는 단어에 ‘붓다’를 대입하고 ‘기독교’ 대신에 ‘불교’를 대입하면 거의 맞는 문장이 된다. 기독교보다는 고정관념이 덜한 승가이지만 요즈음의 승가(僧伽)는 언제인가부터 몇몇이 좌지우지하는 단체가 되어버렸고 그 때문에 승려들 사이에 사업주와 종업원이라는 경쟁구조가 되어버렸다. 부처님이래로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승가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
“비판적 문제제기가 결여된 대안이란 대부분,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권력과 이득확장을 위한 현상유지적인 장치일 경우가 많다.”는 문장에서는 불교중흥을 위하여 보여주기위한 안거,삼보사찰순례, 선서화전, 비판적 시각을 잃은 언론들의 거창한 자화자찬 기사들이 정작 승가의 불평등문제나 빈부의 문제를 감추는 눈가리개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어떤 팻말이 붙은 집에 사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떤 생각으로 사느냐가 중요하기에 크리스챤 강남순이 오래된 도반처럼 반갑다. 저자가 그동안 사유하기를 멈춘 기독교 기득권들에게 받았을 비판과 비난,협박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인용한다. “외로움은 세상이나 주변사람들 뿐만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반면 고독이란 ‘자기자신과 함께있음’의 상태이다. 모든 사유는 고독의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기타 발췌글-
모든 개혁은 상호의존적임을 기억하자
나의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할 때 나의 성공이나 행복의 기준들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준 규격속에 넣는다.
나는 아이디어를 공격한다.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변화란 뜨개질을 하는 것과 같아서 지치지 말고 꾸준하게 일해야한다.
1992년 세계보건기구는 모든 다양한 성적지향을 인간 섹슈얼리티의 정상적 형태로 인정하는 것을 공식화하였다.
당신은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당신은 혐오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올바른 질문을 하는 것, 성숙한 민주사회의 첫걸음이다.
2005년 5월 17일은 국제성소수자 혐오반대의 날이다.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를 지닌 사람(a person with disability)
각자의 생각이 다를수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을 빼 들 필요는 없다.바렌보임-
포장전시하는 삶은 언제나 아이 엠 파인이다. 사람마다 갈등과 번민의 어두운 장면들은 생략된다. 가식의 삶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한다.결국 대체불가능한 삶은 서서히 소진된다.
연민이야말로 함께살아감의 가장근원적인 존재방식이다.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시작점이 아니다.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이다.
예수는 안식일을 지킨다는 절대적인 종교적 관습보다 인간 생명이 먼저라고 하면서,생명철학을 설파했다. 생명철학이 담긴 사랑은 예수 메세지의 정점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제 없는 삶을 살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문제들과 씨름하는 삶을 살것인가”로 질문의 구성을 바꾸어야한다.
당신은 무엇을 하련가? 나는 삶이 비처럼 나 자신에게 쏱아지게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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