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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질문 빈곤 사회에서 밑줄친 문장

여기는 나를 사람 취급 안해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해서 혐오가치를 극대화하고 그 혐오의 대상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신과 성서를 소환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모든 개혁은 상호의존적임을 기억하자

 

배움이란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나쁜 질문의 예,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하는가? ,아니오만을 요구하기에 나뿐질문이고 인간의 성적지향이 마치 개인의 호불호의 문제라는 왜곡된 전제에서 출발하기에 나쁜질문이다.

 

한국은 교육과 문화에서 물음표를 박탈하는 사회다.

 

 

비판적 문제제기가 결려된 대안이란 대부분,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권력과 이득확장을 위한 현상유지적인 장치일 경우가 많다.

 

 

나의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할 때 나의 성공이나 행복의 기준들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준 규격속에 넣는다.

 

 

나는 아이디어를 공격한다.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변화란 뜨개질을 하는 것과 같아서 지치지 말고 꾸준하게 일해야한다.

 

예수라는 상표는 사용하지만 그 예수와는 상관없는 지독한 이기주의 여성,난만,소수자,타종교 혐오주의, 물질만능주의,성공지상주의가 한국의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1992년 세계보건기구는 모든 다양한 성적지향을 인간 섹슈얼리티의 정상적 형태로 인정하는 것을 공식화하였다.

 

희망의 근거는 성공의 보장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꾸고 그 목적과 꿈을 위해 씨름하는 그 과정 한가운데 있다.

 

당신은 동성애를 찬성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당신은 혐오를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 올바른 질문을 하는 것, 성숙한 민주사회의 첫걸음이다.

 

2005517일은 국제성소수자 혐오반대의 날이다.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를 지닌 사람(a person with disability)

 

각자의 생각이 다를수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을 빼 들 필요는 없다.바렌보임-

 

 

포장전시하는 삶은 언제나 아이 엠 파인이다. 사람마다 갈등과 번민의 어두운 장면들은 생략된다. 가식의 삶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한다.결국 대체불가능한 삶은 서서히 소진된다.

 

연민이야말로 함께살아감의 가장근원적인 존재방식이다.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시작점이 아니다.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이다.

 

예수는 안식일을 지킨다는 절대적인 종교적 관습보다 인간 생명이 먼저라고 하면서,생명철학을 설파했다. 생명철학이 담긴 사랑은 예수 메세지의 정점이다.

 

외로움은 세상이나 주변사람들뿐만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반면 고독이란 자기자신과 함께있음의 상태이다. 모든 사유는 고독의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제 없는 삶을 살수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문제들과 씨름하는 삶을 살것인가로 질문의 구성을 바꾸어야한다.

 

당신은 무엇을 하련가? 나는 삶이 비처럼 나 자신에게 쏱아지게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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