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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삼보라는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해 보시오> 66번 게송

<삼보라는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해 보시오>

 

법구경 66번 게송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에게 원수처럼 행동한다.

고통스런 결과를 불러들일 몹쓸 행동을 하면서.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을 적으로 삼아 방황한다.

악한 행위를 일삼으며 고통의 열매를 거둔다.

 

愚人施行 爲身招患. 快心作惡 自致重殃.

우인시행 위신초환. 쾌심작악 자치중앙.

 

愚人不覺知與自仇敵行造作諸惡業受定眾苦果

 

caranti bālā dummedhā amitteneva attanā

karontā pāpakaṃ kammaṃ yaṃ hoti kaṭukapphalaṃ

 

Fools of little understanding being, enemies to themselves, wander about doing evil deeds which bear bitter fruits.

 

[인연담]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나병 환자 숩빠붓다와 관련하여 게송 66번을 설법하였다. 어느 때 나병 환자 숩빠붓다(Suppabuddha)는 대중의 맨 뒤에 앉아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다가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설법이 끝나 대중들이 모두 흩어 졌을 때 그는 부처님께 나아가 자기가 예류과를 성취한 사실을 말씀 드리려고 했다. 이때 삭까 천왕은 숩빠붓다의 신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 보기 위해 그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해 보았다.

 

"당신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오. 당신은 구걸로 생활을 해오고 있고, 아무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소. 나는 당신에게 막대한 돈을 주어 앞으로도 당신이 편안하게 살아가게 해줄 테니 삼보에 대한 당신의 신심을 포기하는 것이 어떻소? 당신이 삼보라는 것이 필요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나는 당신에게 이 같은 행운의 기회를 줄 거요.“

 

그러자 숩빠붓다가 대답했다.

 

"당신은 나를 가난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성자들이 지니게 되는 일곱 가지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신심(信心) 계행 악행을 부끄러워함 악행을 두려워함 법을 배우거나 설법을 즐겨 들음 널리 베품 지혜입니다. 이런 보물을 가지고 있는 나를 어째서 가난하다고 하는 겁니까?“

 

삭까 천왕은 그의 신심(信心)을 확인하고 부처님께 가서 자신과 숩빠붓다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전해 드렸다. 부처님은 설사 수천 수만의 천왕들이 숩빠붓다에게 삼보에 대한 신심을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될 수 없으리라고 하였다. 부처님과 삭까 천왕 사이에 그런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숩빠붓다는 부처님 앞에 이르러 자기가 성취한 예류과에 대해 보고드렸다.

그런데 숩빠붓다는 그렇게 예류과를 성취한 뒤 승원에서 돌아가던 중 소에 받혀서 죽고 말았다. 숩빠붓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승원에도 알려져 비구들은 부처님께 숩빠붓다가 죽은 다음 어디에 태어났는지를 여쭈었다. 부처님은 그가 천상에 태어났다고 대답하셨다.

 

 

[해설]

 

법구경에서 등장하는 숩빠붓다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처님의 부인 야소다라의 아버지이고 여기서 등장하는 나병환자이다. 나병환자가 우연히 설법하는 곳에 들려서 설법을 듣고 예류자가 되어 제석천의 제안을 물리치며 나에게는 일곱가지의 보물이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여기서도 제석천이 등장한다. 제석천은 정말로 수행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예류자가 된 숩빠붓다가 어떻게 삼보라는 것이 필요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천대받는 나병환자였지만 부처님을 만나 설법을 이해한 공덕이 무량하다. 그의 외침이 귓가에 쟁쟁하다. “어째서 나를 가난하다고 하는 겁니까?” 설사 예류자가 아니어도 삼보에 귀의하고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즐기며 살아가는 불자들도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나를 가난하다고 하는 겁니까?”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 성경에는 예수님이 맹인이나 귀먹은 사람이나 나병환자가 치료되는 경우가 흔하게 나타난다. 하나의 예를 소개한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한복음9:2~7)

 

부처님은 예수님처럼 맹인을 눈 뜨게하고 못 걷는 사람을 걷게하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하는 등의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 부처님은 설법을 하여 법을 알아듣게 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만 신통력을 사용하신다. 우루웰라까싸빠가 자신의 거만함을 꺽도록 하기 위해 물위를 걷는등의 신통력을 보이셨고, 야사 아버지가 야사를 찾아왔을 때 옆에 있는 야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하여 설법에 집중하게 하였고, 자신의 미모에 취해 있는 케마왕비를 위해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고 그 여인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무상함을 깨닫게 하시는 등 모두 법을 이해시키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신통을 사용하셨다. 깨달음의 단계도 명확해서 어떤 종류의 번뇌는 어느 단계에서 사라지고 어떤 번뇌는 남아있다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셨다. 이렇게 인간의 정신 수준을 단계별(四向四果)로 설명해 놓은 분은 인류사에 부처님 이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 제자들은 꿈이나 생시에 부처님의 형상을 본다든가 소리를 듣는다는 것에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건들로 내가 법을 이해하느냐가 관건이다. 기적적인 현상이든 깨달음이든 어떤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이 제시되어 있어 불교내에서 이단(異端)이 적은 것이다. 법구경 인연담에서 거론되는 인물들도 설법을 듣고 법을 이해했느냐 못했느냐하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들이 등장한다. 기적적인 현상과 인간의식의 변화를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을 갖지 못하는 종교들은 항상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단이 발생하고 사이비(似而非)가 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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