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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 설법하는 다섯가지 태도> 법구경 64번 게송

< 설법하는 다섯가지 태도>

 

법구경 64번 게송

 

어리석은 자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어리석은 자는 평생을 현명한 님을 섬겨도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진리를 알지 못한다.

 

過罪未熟 愚以恬淡. 至其熟時 愚人盡形壽 承事明知人,亦不知眞法 如杓斟酌食.

과죄미숙 우이염담. 지기숙시 우인진형수 승사명지인,역부지진법,여표짐작식.

 

愚者雖終身親近於智人彼不了達摩如匙嘗湯味

 

If a fool be associated with a wise man even all his life, he does not perceive the truth even as a spoon (does not perceive) the taste of soup.

 

[인연담]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승원에 계시던 어느 때, 우다이 비구와 관련하여 게송 64번을 설법하였다. 우다이 비구는 잘 배운 비구들이 앉아서 강의를 하는 자리에 자기도 끼여들어 아는 체하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승원에 처음 온 비구들은 우다이 비구가 법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아는 많은 비구로 생각하여 오온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러자 우다이 비구는 대답하지 못했는데, 그는 그것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질문한 비구들은 부처님이 계시는 승원에서 수행하는 비구가 오온이라든가 육근, 육경 따위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다음 게송을 읊었다.

 

어리석은 자는

설사 지혜로운 사람과 한평생을 살아도

담마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국자가 국맛을 모르듯이.

 

 

[해설]

 

()에는 깔루다이(Kāludāyī) 랄루우다이(Lāludāyī) 사꿀루다이(Sakuludāyī)여러명의 우다이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주인공은 랄루우다이다. 깔루다이는 부처님과 어릴적 친구였고 숫도다나왕이 부처님을 초청하라고 보낸 신하였다. 깔루다이는 다른 신하들처럼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으나 숫도다나의 명령을 잊지않고 부처님께 요청하여 부처님이 고향을 방문하게 하였다. 피부색깔이 검어서 깔루다이(깔라+우다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사꿀루다이는 맛지마니까야 사꿀루다이 경(M77)에 등장하는 데 우기에 안거를 나기위해 라자가하를 찾아온 뿌라나까싸빠,막칼리 고살라, 아지따 께사깜발라,빠꾸나 깟짜야나,산자야 웰랏타뿟따,니간타 나따뿟따 무리들을 찾아가 문답을 하고 부처님께 묻는다. 육사외도들은 스승이 제자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제자들도 스승들을 존중하지 않는데 사문 고따마는 제자들로 부터 존경받고 제자들도 사문 고따마를 존경받는다. 심지어 제자들이 환속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하고서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청정한 범행을 닦지 못했으니 참으로 우리에게는 운이 없다.?고 자신을 비난하지 스승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부처님께 덕담을 건네고 문답을 시작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랄루다이(랄라+우다이)는 바보 우다이라는 뜻이다. 게송 152번과 게송 241번에도 랄루다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바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건방지고 거만했던 것 같다. 152번에서는 배움이 적은 사람은 황소처럼 늙어간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241번에서는 재가신자들에게 쫓겨서 똥통에 빠지는 우다이 이야기가 나온다.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 비구의 설법을 듣고 많은 시민들은 찬사를 보내자 랄루다이는 자기가 설법을 하면 두 비구가 설법을 잘한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기회를 마련하여 랄루다이 비구에게 설법을 청했다. 랄루다이 비구가 법상에 올랐으나 설법을 하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부채로 부채질만 하다가 자기는 다음 차례에 할 테니 다른 비구를 시키라고 말하고는 내려왔다. 재가신자들은 다른 비구를 초청하느라고 시간과 힘을 낭비하게 되었다. 이 같은 방법으로 비구는 두 번이나 더 설법을 미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신자들은 "이 어리석은 비구, 벙어리 비구라고 놀렸다. 신자들의 항의에 랄루다이 비구는 그만 겁에 질려 도망을 쳤고, 허겁지겁 도망을 치다가 그만 똥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바보 같았고 배울 마음도 없었던 우다이 비구에게 국자가 국맛을 모르듯이.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표현은 적절했던 것이다.

 

우다이 경(A5:159)은 인연담에서 소개하듯이 우다이가 설법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부처님은 설법하는 다섯가지 태도를 설명한다.

 

아난다여, 남에게 법을 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난다여, 남에게 법을 설하는 자는 안으로 다섯 가지 사항을 확립한 뒤에 남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나는 순차적으로 더 높은 가르침을 설하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남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 ‘나는 방편을 보면서 가르침을 설하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남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 ‘연민으로 가르침을 설하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남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 ‘물질적인 것을 바라면서 가르침을 설하지 않으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남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고 가르침을 설하리라.’라고 생각하면서 남에게 법을 설해야 한다.”

 

설법하는 다섯가지 태도는 현대 스님들이 잘 새겨야 하는 내용이다. ‘물질적인 것을 바라면서 가르침을 설하지 않으리라.’라는 가르침은 현 시대에 귀 귀울여야 할 가르침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불교방송등에는 돈을 내고 방송을 하는 수행자들이 있다고 한다. 돈으로 명예를 사는 것인데 시청자를 우롱하는 짓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나는 발언을 하는 수행자들이 가끔 보이는데 적어도 방송에 출연시키려면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하는 발언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했으면 한다. 마지막에 자신과 남을 해치지 않고 가르침을 설하리라.’는 말도 주목해야 한다. 어떤 이는 강의할 때 자주 비속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남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남을 폄하함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집착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자신이 쌓아온 학문과 지식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무시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토론이든 수행이든 접근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수행자는 태도가 전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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