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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경 2번 게송

법구경 제2번 게송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듯이.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자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에 사람이 깨끗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즐거움이 그를 따르리.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듯

 

 

心爲法本 心尊心使. 中心念善 卽言卽行. 福樂自追 如影隨形.

 

諸法意先導意主意造作若以清淨意或語或行業是則樂隨彼如影不離形

 

 

Manopubbaṅgam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sann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ṃ sukhaṃ anveti

Chāyā va anapāyinī

 

All things are preceded by mind,

Mind is their master, they are produced by mind.

If somebody speaks or acts

With a purified mind,

Hence happiness follows him,

Like never departing shadow.

 

[인연담]

부처님 당시에 사왓티에 인색한 브라흐민이 살았다. 얼마나 인색한지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남에게 주지 않았고, 무엇이든지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오면 다시는 내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는 맛타꾼달리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는 그만 황달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 구두쇠는 아들을 의사에게 데려가면 치료비 쓰는게 아까워서 자신이 배워서 치료하고자 했으나 아들의 병은 더욱 깊어졌다. 아들을 집에 두었다가 죽게 되면 아들의 조문을 온 사람들이 자기네 집에 들어왔다가 자기가 재산이 많다는 것이 알려질까봐 아들을 문 밖의 정자에 내놓았다. 아들이 죽게되면 그 정자에서 바로 화장을 시켜 버릴 셈이었다.

 

그때 부처님은 맛타꾼달리가 누워 있는 곳에 가시었다. 맛타꾼달리는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어리석은 아버지 때문에 그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고 청정하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도 못했고, 또 부처님의 설법을 듣지도, 그 위대한 진리를 실천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몸은 물론이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에도 힘이 듭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마음을 다하여 귀의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이렇게 사뢴 뒤 소년은 곧 아주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제 마음은 이제 아주 평화롭고 고요하게 잘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소년의 간절한 표정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시었다.

맛타꾼달리야, 너는 그것만으로 네가 할 일을 충분히 한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뒤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셨는데, 소년 맛타꾼달리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닌 채 죽었다. 그는 죽자마자 곧바로,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깨어나 맑은 정신을 지닌채 33천에 태어났다.

 

 

[해설]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병이들어 죽어가던 맛타꾼달리가 마음으로 삼귀의를 하고나서 천상에 태어난 이야기다. 여기서도 신구의 산업중에 의업(意業)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말도 할 수 없고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삼귀의를 할 수 있었다. 삼귀의는 수행의 시작이자 중간이자 끝이라 할 정도로 중요하다. 경에서는 삼귀의 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이렇게 삼귀의 하는 것이 얼마나 공덕이 큰 것인지 웰라마 경(A9:20)을 보면 알 수 있다.

 

장자여, 그러나 그러한 보시를 할 때 보시받아 마땅한 사람이 없었으며 아무도 그런 보시를 청정하게 하지 못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견해를 구족한 한 사람을 공양한다면, 이것은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견해를 구족한 백 명의 사람들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일래자를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백 명의 일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불환자를 공양한다면 ,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불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아라한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벽지불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백 명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여래ㆍ아라한ㆍ정등각을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승가를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사방승가를 위하여 승원을 짓는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사향사과의 성인에게 공양하고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하는 것보다 스스로 삼귀의 하는 것이 더 공덕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삼귀의 하는 공덕이 이렇게 크니까 맛타꾼달리가 천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러한 전통이 어느정도 지켜졌다고 본다. 이 게송과 인연담에서는 우리는 의업(意業)의 중요성과 삼귀의(三歸依) 커다란 공덕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다. 불자들이 조석으로 하는 예불, 죽을때까지 하는 예불은 사실 삼귀의를 반복하는 것이다. 불자들에게 삼귀의를 제대로 하는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승가에 귀의 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께 귀의하라고 가르치는 종단 현실이다.

 

 

 

삼귀의를 강조하다보니 아래와 같은 게송이 떠로은다.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 (만약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만 고요히 앉아 있어도)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칠보탑을 쌓은 것보다 수승하다)

 

보탑필경화위진 寶塔畢竟化爲塵 (칠보탑은 필경에 먼지로 변하지만)

 

일념정심성정각 一念淨心成正覺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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