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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어머니와 여행

2020103

 

오랫만에 어머니를 만나 같이 여행을 다니기로 했다. 집 떠나온지 34, 비로서 어머니를 내 발로 찾아간다. 그동안 어머니를 두 번정도 뵈었다. 한번은 정혜사 선원에 살때 어머니를 초청해서 공양을 대접해 드렸다. 전화통화 할 때마다 어머니가 울먹이면서 말을 못이어 가시길레 내가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다행히 공양주보살, 선원장스님을 비롯한 선방스님들의 협조덕 분에 어머니는 진수성찬에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가셨다. 그 뒤로는 통화할 때 또박또박 말을 잘하셨다. 천장사 주지할 때도 절에서 하루 묵어 가시도록 하였다. 작은 절이지만 아들이 주지를 하고 있는 것에 자랑스러워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오랫동안 선방에 돌아다니는 걸 이해하지 못하셨다.

 

금년 백장암에서 하안거를 마치면서 어머니 연세가 궁금해서 전화로 물어보았다. 83, 이제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 늦기전에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을 계획하다. 그런 생각을 하게된 이유는 올해 523일 원만스님이 69세로 돌아가시는 걸 보게된 탓도 있으리라.

 

어머니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일주일을 보낼 것인가. 내가 아는 어떤 스님은 절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20년동안 살고 있다. 내가 출가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내가 어머니를 모셔야하는데 어머니는 광양에 사는 동생에 의해서 모셔지고 있다. 어머니께 물어볼 것들이 떠오른다. 내가 태어난 정확한 시간을 물어보아야겠다. 장닌삼아 사주를 보려고해도 시간을 몰라서 보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내가 어머니뱃속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는 나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물어보아야겠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하며 살았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내가 출가한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듣고싶다. 당신의 팔십 인생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 하시는지, 요즘 관심있는 일이 무었인지도 물어 보아야겠다.

 

 

 

2020 10 4

 

광양에 가기 위해서 백장암에서 1박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스님들이 반갑고 상시적으로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백장암 다각실이 정겹다. 다음날 오전에 동광양시 동생네 집에 도착, 동생은 출근하여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와 제수씨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앞두고 있는 손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같이 점심을 맛나게 먹고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어머니와 나는 출발했다. 어디로 가는 거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나도 몰라요라고 대답하면서 차를 몰았다. 홀로 오래 사셔서 그런지 어머니는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셨다. 깜박이를 넣고 서행하면서 이야기에 귀 귀울였다. 내가 몰랐던 한 여자의 일생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충남 전동면 청송리 서당골에서 5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김정숙여사는 딸이라서 그리고 맏이라서 엉청난 구박을 받고 자랐단다. 다른 동생들은 모두 초등학교에 보냈는데 김정숙 어린이만은 학교문턱을 밟아보지 못했다. 학교를 안가니 친구도 없었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어머니를 눈덮인 숲에다 버리려고 숲으로 갔다가 차마 못버리고 왔다.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직접들려 준 이야기다. 그릇을 깼다고 혼나고 바느질 못한다고 혼나고 매를 맞아서 놀라는 습관이 생겼다했다. 아버지가 집에 없는 날에는 더욱 심해서 아버지가 집에 없는 것이 두려웠다한다. 아버지를 따라 어린 나이에 일본에가서 일을 하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치만 외할머니의 죽음을 당신이 지켰고 병든 외할아버지의 똥오줌을 받아내며 임종을 지킨 것도 당신이었다. 조치원 시장에서 외할머니가 보따리 장사하는 것을 보고 식당에서 일했던 어머니는 당신이 월급을 어머니의 손에 쥐어주고 시장을 봐다가 외할머니댁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사랑을 받지 못하였지만 가장 효녀다운 행동을 하였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일만하고 구박받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시집을 갔으나 아이 셋을 낳고 남편은 기차사고로 운명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였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서둘러 재혼을 시켰는데 중매쟁이의 농간으로 20여살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거기서 다시 남매를 낳았다. 결혼 생활은 고달프고 험난했다. 늙은 남편은 일을 못하니 당신이 논일 밭일 집안일등 모든 일을 해야 했다. 속이 좁은 남편은 의지처가 되어주지 못했고 싸움이 잦았다. 어릴적에 부모님이 싸울 때 나는 동구밖에 나가서 싸움이 잦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왔다. 농사만으로 학비를 댈수 없어 어머니는 열무, 배추, 오이 ,옥수수등을 내다파는 보따리 장사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이 세상에 대한 기억은 엄마의 울음소리다. 그것이 어떤 상황인가를 몰랐는데 이번에 어머니의 이야기로 확인하게 되었다. 내 동생을 임신하고 나를 등에 엎고 누나 손을 잡고 도망가다 아버지에게 잡혀와서 어머니가 내지르는 한탄, 울붖음,통곡이었다. 그래도 30년을 같이 살고 아이까지 둘을 둔 남편에게 사랑하는 마음이나 정이 생기지는 않았어요? 라고 묻자 어머니는 그런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머니 이야기를 듣다보니 쌍계사란 절에 도착하게 되었다. 다행히 아는 스님이 있어 그 스님의 도움으로 방 두 개를 잡았다. 공양간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도량을 산책을 하면서 객방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렇게 당신의 이야기를 단시간에 해버린 일은 없을 듯하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착하고 착하고 착한 여자, 이야기를 맛나게 하는 여자, 이야기속에서 나를 보기도 하였다. 가끔 죽음을 어떻게 맞이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지금 어머니는 옆방에서 일찍 주무시고 계시다. 틀니를 빼시니 더욱 늙어 보인다.

 

 

 

 

2020105

 

쌍계사에서 아침공양을 하고 쉬다가 화엄사에 들리다. 계단이 많은 것을 염려 했으나 다행히 어머니는 사뿐사뿐 계단을 오르신다. 예전에 고생한 것으로 보면 분명 어딘가는 아프셔야 정상인데 허리도 꼿꼿하고 밥도 잘드시고 걸음도 씩씩하다. 어머니는 화엄사의 가람배치를 보더니 놀라신다. 산에 둘러 쌓인 양지 바른 전각을 보고 감탄하신다. 어제 하루 묵은 절보다 여기가 더 낳다고 하신다. 겉모습은 이층이지만 내부로 들러가 보면 단층인 각황전을 둘러 보시며 또 감탄하신다. 저렇게 크고 웅장한 기둥은 처음 보시는 것이라 한다. 나는 각황전 참배를 하고 어머니는 다른 전각을 둘러 보신다. 전각과 전각 사이를 걸닐며 도량을 살펴보는 어머니를 발견하다. 수학여행온 소녀 같다. 명부전 앞에서는 죽음후에 저기 대왕님들에게 7일마다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들 심판원들의 대장인 지장보살님에게 기도를 많이 하셔야 한다고.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다. 구층암에 올라 모과나무 기둥으로 지어진 건물을 구경하다. 어머니는 금새 도량에서 만난 지팡이를 짚은 노보살님과 이야기를 나누신다.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어머니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보살님에게 당신의 고생담을 이야기한다. 그 보살님도 노름을 좋아하는 남편이 일찍 죽어서 육남매를 혼자서 길러야 했다고. “누가 더 고생하셨는지 이야기를 해보셔요. 제가 심판을 봐드릴테니...”라고 나는 말하고 두분 앞에 앉다. 이야기를 끝내고 우리는 계단이 없는 계곡쪽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그분하고 어머니하고 누가 더 고생을 한 것 같아요?라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망설임도 없이 당신이 더 고생했다고 대답한다.

 

코로나로 인해서 화엄사 공양간에서 점심을 못먹고 묘운스님 토굴로 가다가 음식을 잘 할 것 같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멸치쌈밥을 먹었는데 둘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맛나기까지 해서 만족스럽다. 공양을 마치고 묘운스님의 토굴에 당도했다. 묘운스님은 심리상담을 하는지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어머니는 다시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주섬주섬 눈물을 쏱으며 내놓았다. 어제 하신 말씀과 겹치는 부분도 있었으나 새로운 이야기도 있다. 외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남편에 대한 분노는 여전히 강하게 튀어 나왔다. 내가 출가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느냐고 물었다. 의외로 어머니의 기억은 사실과 달랐다. 나는 새벽에 부모님 머리맡에 편지를 써놓고 출가를 했는데 어머니는 내가 대낮에 출가를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써놓은 편지의 존재를 몰랐고 편지 내용도 전혀 모르셨다. 사람이 왜 태어나고 늙고 죽는지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절로 간 것이라고 설명하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어 후련하다고 하셨다. 그동안 그 이유를 몰라서 답답했다고. 이렇게 소통이 안되어서야...나의 편지를 아버지도 안읽어 보고 남동생도 안읽어 보았다는 것을 삼십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편지는 어디 있는거야?

어머니는 이야기도중 서울에 사는 당신의 남동생이 보고싶다한다. 동생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두 동생과 전화 연결이 되어 만날 약속을 하고 곧 동생을 볼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하셨다. 친절한 상담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준 묘운스님과 포웅으로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2020106

 

새벽4시에 깨어서 나는 좌선을 하는데 어머니는 내가 안자고 앉아 있는이유가 잠자리가 불편한 것으로 오해했는지 나를 이불쪽으로 끌어당겼다. 아흐...이게 참선이라는 것을 모르시다니...하면서도 나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2시간을 누워서 나를 관찰한 내용을 아침공양을 하면서 묘운스님께 이야기 한다. 스님들은 그렇게 바보같이 앉아 있어요.라고 싱겁게 설명하자 어머니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묘운스님이 정성스럽게 차려준 죽을 먹고 서울로 향하다.

서울로 자가용을 끌고 가는 것은 처음이고 피곤한 일이라 서두름 없이 서산에서 쉬어가기로 하다. 서산 일로향실에서 점심을 먹다. 어머니를 목욕탕에 데려다 드리다. 어지러움증으로 제대로 목욕을 못하고 나오시다. 83세의 모친이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고 볼 수 있지만 고혈압과 빈혈은 어머니께 가장 큰 문제인 듯 하다. 인근 사찰에서 저녁 초대를 받아 어머니와 함께 가다. 도반스님과 나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세차를 하다. 나는 차가 더러워도 대충 타고 다니는데 아무런 불편을 못 느끼지만은 어머니는 나의 차가 더러운 것이 항상 눈에 거슬렸나 보다. 어머니는 나의 털털한 성격을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닮은 까닭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옷을 대충입는등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저녁공양을 하면서 어머니는 당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다시 풀어놓으셨다. 이번여행은 어머니의 한 풀이 여행이라고 불러야 할만큼 감정을 깊이 드러내신다.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구전동화처럼 어머니는 당신의 굴곡진 삶을 드러내고 어루만지고 달래고 내질렀다. 때로는 눈물을 훔치며 먼 곳을 바라보셨다. 그러나 강물도 오래 흐르다보면 소리가 잦아들고 송아지를 찾는 어미소의 울음도 사그러지는 법, 이야기를 반복해서 토해내고 감정을 폭팔시킬 수록 얼굴은 밝아지고 표정은 환해졌다. 가끔 얼굴에 스쳐가는 웃음이 보기 좋다. 더군다나 묘운스님등 다른 스님들이 나에 대해서 덕담하는 말을 건네니 어머니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시다가 이야기를 이어가시는 것을 보면... 내일은 드디어 생전 처음으로 외삼촌을 만나고 조계사 1인시위하는 곳에도 가볼 계획이다.

 

 

 

2020107

 

서산에서 네비를 따라 외삼촌 동네에 다다르다. 외삼촌이 마당에 마중나와서 손을 흔드신다. 어머니와의 진한 포웅, 25년전쯤 외삼촌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여 9개월간 병원에 입원에 있는데도 하나뿐인 누나인 어머니는 병문안을 가보지 못했다. 그 죄의식을 항상 가지고 살았기에 외삼촌을 만나러가자는 의견에 그렇게 좋아하셨고 만나고나서는 그렇게 울먹이셨다. 오토바이사고로 다친 다리는 완치되어 정상적인 다리나 한 가지였다. 그 사고가 외삼촌에게는 먼나먼 일이라는 듯 별일 아니라는 듯, 우는 누나를 달랜다. 여기서도 어머니의 단골 레파토리는 배운게 없어서이다. 한글을 알지 못하니 혼자서 찾아 올 수가 없었다는 것에는 찾아온 사람이나 기다리던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이나 모두 수긍하는 바이다. 그래서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온 내가 고맙고 대견하다. 나이 오십세살에 찾아온 조카를 칠십구세된 외삼촌이 맞이하는 반응이다. 남동생이 너무 쌩쌩하게 걷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탓에 어머니의 문안 안간 죄는 사그라 들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면 마음이 가벼워지기 힘들었을 테다. 어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큰일을 했다는 칭잔을 듣는 존재가되다. 이렇게 작은 일을 해놓고 그렇게 큰 칭찬을 받는 경우다.  외삼촌은 어릴적에 눈을 뭉쳐서 먹고 고드름을 먹어서 틀니를 하게되었다고 어머니와 똑 같은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외삼촌은 일찍이 도시로나와 장사를 시작해서 집한채를 마련할 수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삼남매를 키우고 주택연금에 가입하여 노후를 보장받고 있다. 누나는 남편 복이 없다한다. 외삼촌댁을 나서며 그렇게 서로 궁금했으면 외삼촌은 왜 누나를 찾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말로 표현되어지는 것 밖에 진실이 따로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잠시해보다. 어쨌든 어머니의 마음의 짐은 덜어졌고 낮에서 밤까지 외숙모님과 수다는 끊어질 듯 이어진다.

 

나는 조계사에서 나눔의 집 문제로 시위를 하고 있는 불자들을 만나러 외삼촌댁을 빠져나오다. 조계사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는 불자들을 만나 잠깐 피켓을 들다. 나눔의집 사건이 PD수첩에 방영된지 보름이 지났는데도 총무원장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스님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불교신문도 침묵을 지키고있다. 법보신문은 원행스님의 범법행위는 거론하지 않고 내부고발자들이 문제라는 식의 보도를 하고있다. 그나마 몇몇 재가자들이 1인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 불교계 내에서 보이는 반응의 전부다. 포교사인 무구거사, 보리심보살, 허리가 아프신 보명님, 조중동 폐간운동을 하고 있는 가루라보살님등을 만나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여기저기에서 몸으로 보여주는 가루라보살님이 가능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해야할 일이기에 한다는 진언(眞言)에서 보살의 위엄을 느끼다. 지하철을 타고 외삼촌댁으로 오는데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고 소설,게임,바둑,독서,주식, 오락프로, 영화등 화면에 나타나는 다양함이 놀랍다. 돌아 올 때까지도 어머니와 외숙모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외삼촌은 이제는 고생한 이야기는 다지나간 일이고 이제 남은건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최근에 몇 번 하시는 말씀이고 나도 자주 뇌까리는 주문이다.

 

 

 

 

 

2020108

 

외삼촌댁에서 나와 성남에 있는 누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와 나는 서산으로 출발.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에게 본격적으로 질문하다. 어릴적에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학교에 보내지 않아 한글을 모르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동안에도 배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배울 수 있었지 않았나요?” 배우지 못했다는 말을 70년 이상 하지말고 지금이라도 한글을 배워 보시는게 어떠세요? 만약 한글만 배웠더라면 어머니 인생이 그렇게 고생길은 되지 않았을 터인데...라는 점에는 어머니도 동의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글을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고 당신 이름과 어머니 아버지는 쓸 줄 안다고 하신다. 한병에 천이백원하는 소주를 세병 팔면 얼마냐는 질문에 삼천육백원이라는 대답이 금방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글을 배우면 단시간에 깨우치실 것 같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면서 지나치는 도로표지판을 크게 읽으며 따라하도록 했다. 칠거리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꼬막을 아주 맛있어 하셔서 두번이나 더 시켜드리다.

 

오후에는 천장사 아래동네에사는 여래자 보살을 만나러가다. 여래자 보살님은 팔십세로 어머니보다는 세 살 작지만 목소리에 기운이 넘치고 화끈한 성격이 어머니와 닮은 점이 있다. 예상대로 여래자 보살님과 어머니는 잘 통했다. 여래자보살님은 맛난 것을 대접해주고자 했지만 우리는 베트남국수를 먹었고 돈까스도 추가로 시켰다. 어머니는 국물이 입맛에 맞지 않다며 반 이상을 남기신다. 나도 남기려 했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말끔하게 그릇을 비웠다. 버스타고 돌아가신다는 여래자보살님을 설득해서 집으로 모셔다 드리다. 여래자 보살님은 집까지 왔으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웬일인지 어머님이 거듭 거부하신다. 여래자 보살님은 냉장고에 보간중인 무화과를 내오고 차비도 주신다. 안받는 다는 어머니의 의사를 무시하고 여래자보살님의 호의를 낚아채다. 혼자 사시는 여래자 보살님이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게 좋게 보였다. 이름이 청이라고 부른다.

 

 

 

 

2020109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날이다. 며칠 더 있으면 한글도 가르쳐드리려고 했는데 어제 며느리와 통화때 내일 간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이왕 그렇게 말했는데 다시 번복하도록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오늘 보내드리기로 하다. 문제는 이 분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보내드려야 하는데 혼자서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데려다 주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디든 다니시도록 연습 시키는 것이라고 이해를 구하다. 편지지에 "이 분은 당진에서 광주를 거쳐 광양으로 갑니다"라고 쓰고 동생네 집 주소를 적고 며느리 전화번호와 내 전화번호를 적었다. 이 편지메모가 없이도 아들네 집을 찾아갈 수 있지만 비상용으로 적어드린 것이다. 약간 긴장한 어머니는 편지를 고히 받아 지갑에 넣었다. 당진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고 점심을 같이 먹고 광주행 버스에 타시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해외에 나가면 손짓 발짓으로 소통하면서 한달이고 두달이고 여행을 잘 한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이고 여러각도에서 이런 시도의 잇점을 설명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글자를 몰라도 어디가든지 잘 물을 수 있다고 손을 흔들었다. 버스에 타는 모습을 마중나올 며느리에게 보내고자 버스옆에서 사직을 찍었다. 버스에 서시더니 소녀처럼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지으며 웃으셨다. 방금 5시간 40분 걸려서 당진-광주-동광양-동생네집앞까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여행을 끝내서인지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서려있다. 좀더 일찍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는 남는다. 그래도 이제라도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서 다행이라는 마음도 인다. 천지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머니처럼 정겹고, 포근하고, 만만하고, 든든하고, 친구같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어머니와 여행. 참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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