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코로나시대의 불교의 역활

 

코로나시대의 불자의 역활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19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19가 지속되면서 오프라인 활동은 최소화되고 기존 오프라인 세상에서 이루어지던 유통, 소비, 교육, 의료 등 대다수의 일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고등학교는 물론 전 교육기관이 정상적인 교육일정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지속되고 사회적으로는 저성장과 저고용이 장기화 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계층간의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코로나 발생초기에 일부교회가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고 광장에서 대규모집회를 진행함으로서 코로나를 확산시켜서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일이 있었다. 지금은 완화되어 1단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마스크를 언제 벗고 예전과 같이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될지 아무도 모른다. 전문가들은 백신이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최소 3년간은 코로나의 영향 아래서 생활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의 바램이 포함된 전망일 뿐이다.

 

우리 불자들은 코로나시대를 맞아 종교의 역할을 생각해 본다.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진리이며 가르침이라고 자랑하던 불교는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낼 수 있을까? 불교는 인류의 위기 앞에서 어떤 처방과 위안을 내 보낼 수 있을까? 종교가 코로나로 야기되는 저성장과 저고용의 문제, 빈부의 양극화, 자영업자의 어려움, 코로나블루, 증가하는 실업율등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국민들이 겪는 우울함, 답답함, 좌절감을 위로하고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혹은 무엇을 중시하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코로나와 기후위기등의 문제를 신()의 시험이라거나 운명이라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해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는 인간이 겪는 괴로움과 고로움의 원인을 면밀히 진단하여 괴로움이 소멸되는 길을 제시 하듯이 코로나와 기후위기등의 문제를 진단하고 그 해결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목표없이 질주해온 현대문명은 인간은 어린아이 손에 칼자루를 쥔 것처럼 위험하다. 불자들에게는 이번 코로나사태는 무한경쟁의 달리기를 멈추고 어떻게 살아야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기회로 다가온다. 이러한 물음은 멀게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부터, 가깝게는 불교가 세상에 생겨나면서부터 던져진 질문이다.

불교는 욕망의 충족보다는 욕망의 다스림을 말하고 무조건적인 존재의 지속(윤회)보다는 존재의 원인은 무엇이며 존재의 종식(해탈)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는 종교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냉정한 말이지만 코로나로부터 생겨난 불편함과 괴로움은 이미 평상시에 불교가 설명하는 불편함과 괴로움과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코로나시대와 기후위기시대를 맞아 혼란스럽고 외로워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위안과 위로가 필요하다. 불교에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건강한 세상살이를 격려하는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이 많이 있다.

 

 

불교에서 재가자와 출가자에게 공통되는 부분을 거론한다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중에서 계학(戒學)일 것이다. 이 부분은 윤리도덕적인 가르침으로 출가자든 재가자든 누구나 지키고 따라야 할 근본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계학(戒學)이 의무사항이 아니다. 불교는 특정한 구절을 믿거나 진언(眞言)을 외우는 종교가 아니며 붓다의 교설에는 어떠한 것도 강요나 일방통행이 없다. 불자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삼귀의도 누가 시키거나 남을 따라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철저히 자발적인 수용과 다짐이다. 불자가 되는 방법은 경에서 한결같이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은 부처님앞에서 놀라움과 기쁨을 느낀다. 그 결과 삼귀의를 하게 된다. 삼귀의는 목숨이 붙어있는 그 날까지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확신에서 비롯된 결연한 맹세이다. 삼귀의는 불자가 되는 절차이면서 동시에 출가하려는 이에게는 비구가 되는 절차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삼귀의를 하고 나서 오계를 받게 되는데 오계란 것도 삼귀의를 맹세한 자가 가야 하는 자연스런 삶의 태도이다.

 

마하나마 경(A8:25)에서 세존이시여, 어떻게 재가신자가 계를 지닙니까?”라고 묻자 부처님은 마하나마여, 재가신자는 생명(pāṇa)을 죽이는 것(atipātā)을 멀리 여읜다(paṭivirato hoti),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읜다.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을 멀리 여읜다,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읜다. 이렇게 재가신자는 계를 지닌다(sīlavā hotī).”라고 대답한다.

 

이 다섯가지 조항을 공통적으로 서술하는 빠띠위라또 호띠(paṭivirato hoti)는 멀리(paṭi) 여읨,떠남,회피함(virato)이 있다(hoti)는 뜻으로 하지말라는 명령어가 아니다. ‘계를 지님(sīlavā)이 있다(hotī)’는 것도 계를 지켜라는 강압적인 표현이 아니다. 삼귀의가 자발적인 것처럼 오계(五戒)는 삶에 적용해보고 그 이로움을 알아서 스스로 받아 지니는 자발적인 생활규칙이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고 동시에 타인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이해와 경험이 있고나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계율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길이다.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읜다는 조항은 생명을 죽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생명을 학대하고 고통을 주는 것까지 포함된다. 인간은 농업축산공업등 모든 방면에서 기계화 대량화로 산업혁명을 일으켰지만 그 결과 자원고갈, 환경파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좁은 축사에서 닭과 돼지와 소들이 대량으로 길러지고 있다. 거기에다 유전자조작된 사료와 항생제가 범벅이된 사료를 먹인다. 그러한 고기를 섭취하는 것이 인간의 건강에 해로울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인간의 욕망은 대량생산 시스템을 버리지 않는다. 이제는 멈추고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읜다는 조항도 단순히 도둑질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쓸모없는 것을 계속 만들어내고 필요하지 않음에도 물건을 변덕스럽고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도 포함된다. 유행이 지났다고 디자인이 마음에 안든다고 버리고 바꾸는 현대인의 소비생활은 매일매일 쓰레기 산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읜다는 조항은 일부일처제의 제도를 지키는 것뿐만아니라 성폭력, 성추행등의 문제이기도하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타인을 괴롭히는 것은 첫 번째 조항과 같은 폭력이다.

 

거짓말을 멀리 여읜다는 조항은 이간질,욕설,잡담까지 입으로 짓는 4종류의 구업을 말한다. 이러한 구업은 가족과 친구 사이는 물론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사이에도 발생하여 전쟁에 이르기도한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팔구할의 갈등이 언어와 태도의 문제임을 깨닫는다면 이 조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읜다는 조항은 단순하게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아니라 방일의 근본이 되기에술을 마시지 것을 삼가라는 의미이다. 술을 마심으로서 앞의 네가지 계를 무너뜨리게 되므로 술 마시는 것을 삼가라는 뜻이다. ‘방일의 근본이 되는마약이나 환각제등의 약물도 여기에 포함된다. 결론적으로 오계는 모든 생명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는 법구경의 말씀처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가르침이고 누구라도 이해 가능한 상식(常識)이다.

 

오계를 지키는 것은 자발성을 바탕으로 하기에 자신의 분수에 따라 부분적으로 계를 받아지니기도 한다. 불자들은 경우에 따라서 오계보다 적은 계를, 반대로 더 많은 계를 받아 실천할 수도 있다. 1계만을 받아 가지는 재가신자도 있고 2, 3, 4계를 수지(受持)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각각 일분행(一分行), 소분행(小分行), 다분행(多分行), 만분행(滿分行)재가신자라고 부른다. 재가불자는 오계에서 3가지를 보텐 8계를 수지하기도 하는데 팔계는 오계에다 6)높고 화려한 평상에 앉지 않는다. 7)향유를 바르고 꽃다발을 쓰고 춤추고 노래하는 곳에 가지 않는다. 8) 정오가 지난 뒤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3가지가 더해진 것이다.

 

재가자에게 계는 강제조항이 아니기에 계를 위반해도 처벌이 없다. 출가자가 계를 범했을 때는 현전승가의 갈마를 통해서 여러 가지 벌()을 받아야 하지만 재가자의 경우는 단지 죄를 고백하고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그것으로 끝난다. 신도의 자격을 박탈하는 벌은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계를 지킬 것이냐 또는 지키지 말 것이냐 하는 판단은 일반사람들의 선택에 달렸다. 붓다는 그들에게 선택을 돕는 설명을 할 뿐이다. 경미함 경(A8:40)에서 생명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는 것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생명을 죽이는 것을 자행하고 습관적으로 행하고 많이 지으면, 지옥에 태어나게 되고 축생의 모태에 태어나게 되고 아귀계에 태어나게 된다. 생명을 죽여서 받는 가장 경미한 과보는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자행하고 습관적으로 행하고 많이 지으면, 지옥에 태어나게 되고 축생의 모태에 태어나게 되고 아귀계에 태어나게 된다. 주지 않은 것을 가져서 받는 가장 경미한 과보는 사람이 재물을 잃게 된다. 비구들이여, 삿된 음행을 자행하고 습관적으로 행하고 많이 지으면, 지옥에 태어나게 되고 축생의 모태에 태어나게 되고 아귀계에 태어나게 된다. 삿된 음행을 해서 받는 가장 경미한 과보는 적들로 하여금 원한을 맺게 한다.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자행하고 습관적으로 행하고 많이 지으면, 지옥에 태어나게 되고 축생의 모태에 태어나게 되고 아귀계에 태어나게 된다. 거짓말을 해서 받는 가장 경미한 과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사람의 비방을 받게 된다.”

 

부처님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현생의 과보는 생략하고 내생에 받는 과보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살인하고 도둑질하면 어떤 과보를 받는지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나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다른경전에서 부처님은 윤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살인하고 도둑질했을 때에 금생에 받는 과보만을 설명하고 윤회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금생의 과보와 내생의 과보를 동시에 설명한다. 부처님의 설명방식은 경의 말씀이라도 이해되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판단중지하고 남겨두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의도는 오계를 지키는 이익과 불이익을 설명하여 사람들에게 오계를 지키려는 의도를 내게하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바라면서도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방식의 삶을 살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세상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오해와 자만심으로 다른 생명을 죽이고 괴롭히면서 그것이 당연한 인간의 권리인 것처럼 생각해왔다. 역지사지의 상식을 거부해왔다. 인류가 오계라는 다섯가지를 역지사지하고 이를 실천하였다면 오늘날의 환경오염, 해수면 상승, 미세먼지, 오존파괴, 기후 온난화등의 재앙이 발생하였을까? 우리는 이제라도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역지사지의 상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혜는 오랜수행 끝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비는 성인군자(聖人君子)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역지사지의 상식으로 오계(五戒)를 지키고 받아들이는 곳에서 지혜와 자비가 출현한다. 역지사지의 상식은 상호존중하는 공존의 지혜이자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부처님이 주는 메세지다. 오계는 번거러운 규칙이 아니라 나에게 이로움을 가져다 주는 다섯가지 생활수칙이요, 행복으로 인도 하는 다섯가지 길이다. 불자이건 불자가 아니건 코로나 시대에 오계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그들에게는 행복의 길이 시작된다. 우리는 오계를 지키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로워지고 고립되는 삶이 아니라 자기성찰의 기회,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을 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종단에 바라는 것은 불교가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는 메시지로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계를 실천하고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는 이들에게 전국 곳곳에 명산대찰은 마땅히 장소를 제공되어야 한다. 이 시대의 수행자는 소욕지족의 삶과 자기성찰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따듯한 차를 내어주며 격려하고 탁마하는 도반이 되어야 한다. 이는 불교가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이유이고 사찰이 공동체의 소유물로 보존 되어온 이유이다.

 

--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