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
종림스님은 공,공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즐긴다. 공을 공집합으로, 대각선으로, 소실점으로 설명하면서 공이 가지고 있는 안팎을 뒤집어보기도하고 가루로 만들기도 하면서 놀고있다. 공에대해서 이렇게 끈질기게 그리고 유쾌하게 집착하고 있는 스님이 있다는 것은 희유한 일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언어는 어느덧 히미해져 담배연기처럼 사라져버리기도 하지만 연기뒤엔 스님의 너털 웃음같은 것이 남겨지기도한다. 다가갈 수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는 것에 대해 부처님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그 침묵은 이제 어디서 들어야 하는가?
“사람은 오온으로 여래를 묘사하면서 묘사를 시도하지만 여래는 그 오온을 제거했고, 그 뿌리를 잘랐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만들었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다. 왓차여, 여래는 오온이라는 이름에서 해탈하여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나니 마치 망망대해와도 같다. 그에게는 ‘태어난다.’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고,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고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라는말도 적용될 수 없고, ‘태어니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다" <왓차곳따 불 경(M72)>
'공空에 대한 단상들'에서 몇 부분을 옮기다
0과 1
1에서 시작하지 말고
0에서 시작해라.
1에서 시작한다면
살아도 죽은 송장이다.
0에서 시작한다면
1도 살고 2도 살고 3도 산다.
01 02 03……
이 글은 포카라에 머물 때 쓴 글이다. 포카라는 머물고 싶은 곳 중의 하나다. 안나푸루나도 있고 페와호도 있고 바히라섬의 힌두사원도 있다.
그런데 내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유와 무인데 왜 0과 1이라는 생각이 튀어나왔을까. 아마도 유와 무의 사이에 있는 공의 위치가 무도 될 수 있고 유도 될 수 있는 조금은 어중간한 입장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0과 1이라면 공의 위치를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출가하기 전에 마지막 본 책이 싸르뜨르의 ??존재와 무??였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글자만 봤던 것 같다. 무화無化라는 개념 하나는 생각이 난다. 화化라는 개념은 지금도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다. 화라는 말은 노장적인 개념이다. 무화, 물화, 신화,내화, 외화 등등.
무엇무엇이 되다, 변화하다 라는 의미는 들루즈와 카타리의 되기 아니면 생성이라는 개념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 그 전까지 하던 일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였다. 나는 나 자신을 신의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절대정신이 현현하여 나타나는 마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면 나같이 방황하는 인간들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지도의 그림이 그려지면 그려질수록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빈 구석이 더 많아진다. 따라서 고민도 갈등도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출가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일들 중의 하나, 만일 공의 입장이 있다면, 나를 공의 위치에 두고 세계를 쳐다보고 세계와 사건을 해석해보는 것이었다.
유와 무는 대對가 되는 것일까. 있다와 없다는 무슨 의미일까. 없다는 없다고 치고 있다는 어떻게 있는 것일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너무 간단한데 괜히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있다 할 때의 있다라는 말은 무엇무엇이 있다 라는 무엇무엇을 지칭한다. 있다와 있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유의 영역이다. 있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사는데 계속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변화하여 다른 것들이 되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나타난다.
무적인 것의 개입이다. 이러한 무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나 세
계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무의 개입 정도는 무시해도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신이 주사위놀음을 했을
리는 없으니까. 신의 뜻을 알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아느냐가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 사물을 지칭한다면, 말의 개념을 확실히 하고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구성을 한다면
세계가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언어나 논리의 실증주의자들이다. 과
학적인 입장도 이 중의 하나다. 과학에도 변수야 있기는 있지만 상수를 기반으로 변수가
풀려나간다. 이 상수들 위에 기능이나 기술이 세워진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보다 가능한
가 가능하지 않는가가 문제다. 삶의 의미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이데거는 있다와 있는 것을 존재와 존재자로 구별한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 있는 것
으로서의 존재자가 아닌 없는 것으로서의 무다. 문제는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자들이 존재
를 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이나 공작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존재의 속삭임을
무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적인 존재라고 한다. 연기적이란 불변의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 이전에 인도에서는 유신론적인 창조설이나 유물론적인 적
취설이 있었다. 연기는 신적인 실체도 물질적인 실체도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연기를 인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실체론적인 사고다. 오히려 연과 연의 관
계, 조건과 조건의 결합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연기적인 존재는 실체가 아닌 것으로 있
는 것, 가합, 합성된 존재, 환幻과 같은 존재로 지칭된다.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은….
세계는 무상하다. 잠시도 쉬지 않는구나. 피곤하다. 쉴 곳, 상수, 정지점을 찾게 된다. 사
물은 변화해도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을 거야. 불성일까. 그래서 변하지 않는 법을 추구하
기 시작한다. 사물의 영역을 구분하고 법의 개념들을 정리한다. 부파불교가 가졌던 태도
들이다. 아무리 세계를 분류하고 정리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의 반발로, 아니다 아닌 것들을 더 밀고 나간다. 아냐, 그런 개념들은 성립이 안
돼. 그런 태도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러한 입장이 반야부 계통의 태도였던 것 같
다.
먼 길을 돌아 왔습니다. 공적인 입장의 탄생에 대한 배경이였습니다. 공, 너 누구야. 몰라
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연기의 후예인 것은 맞는 것 같고 아닌 것의 이름정도
일까.
공은 있다와 없다, 이다와 아니다라는 개념이 없는 영역이다. 개념이 아닌 개념일까. 태어
나자마자 오해와 비난이 쏟아진다. 그래서 용수가 독살당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없다,
그래서 어찌하라고. 비었다. 신도 없고 법도 없다고. 그럼 막 살아도 되는거야. 아무튼 공
에 대한 오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도가적인 영향도 있었겠지만 한역의 불전에서
는 공이 무나 허로 번역되었다. 무는 초월의 세계일까. 유의 입장에서 본다면 있는 것이
아닌 초월의 세계이다. 그래서 칼루파하나는 공을 초월의 신적인 세계의 문을 열었다고
비판한다. 대승불교의 유신론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원시불교의 경험론적이고 인식
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리고 유와 무의 이원론적인 입장이 문제될 수도 있다. 공이 무의 영역에 편입됨으로써
무는 유의 근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때문에 유와 무를 연결할 수 있는 다리가 필
요해진다. 그런데 어째 다리가 시원치 않다. 본성론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또 공이라는 말이 명사적인 용법으로 사용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무엇무엇인 것이라고
할 때는 있는 어떤 것, 유가 된다. 말이 가지는 개념의 문제이다. 없는 개념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허황해진다. 차라리 공한 무엇무엇이라고 하는 형용사나 무엇무엇이 공하다
는 술어적인 용법으로 사용된다면 많은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 그래서 티베트에서는 공
이 아니라 공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아무튼 공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무엇
무엇이라고 하는 내용이 없는 말이다. 조금은 구체적으로 지칭할 수 있고 위치만이라도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접근하기가 훨씬 쉬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야 유와 무의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을 것 같다. 불변의 실체로서의 유, 실체가 아닌
것으로 있는 것, 불不이나 비非라는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영역이다. 공으로서의 존재, 공
의 영역은 무의 영역일까 유의 영역일까. 아니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영역일까. 무로서
의 세계는 초월의 세계다. 무의 무, 절대무라는 세계도 있는 걸까.
유와 무의 사이에 비非와 공空의 영역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무의 영역도 있고
유의 영역도 있다. 아니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닐까. 만일에 유와 무 사이의 선이 아니라,
있는 것의 구성적인 입장과 무의 신적인 초월의 입장으로 나눈다면 공은 어디에 위치할
까. 초월도 아니고 구성도 아닌 경계선에 확실히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0과 1
이라는 생각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0은 너무 재미있는 개념이다. 0은 수이기도 하고 수가 아니기도 하다. 수가 아니지만 자리
가 있다. 0은 무한과 동격이고 0은 모든 것이다. 공집합은 더 재미있다. 공집합은 집합론
에서 수의 집합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공집합에서 0이 열이면 0도 되고 10도 된다. 아
니 11도 된다. 하나가 더 붙는다. 나머지가 있다. 이 나머지가 자유의 영역이고 창조의 장
場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공집합을 유와 무의 사이가 아니라, 공을 구성과 초월의 경
계선에 위치시킨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구성주의는 지상에서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이르기를 바란다면, 초월주의는 하늘의 신이
지상에 강림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문제는 있는 것을 아무리 잘 구성해도 빈구석이
있고 초월의 세계에 구원을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구성주의도 아니고 초월주의도 아닌, 무로 넘어가지도 않고 유에 편입되지도 않고 0과 1
의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이 공이라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0.5라는 존재
종림 /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중국여행팀 중에 ‘쩜오’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다. 어떻게 쩜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조금은 어눌한 조금은 엉뚱한, 상식에 어긋나는 듯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붙여진 별명인 것 같다. 때로는 기가 있는 곳이라도 만나면 기를 받으려 사라
지곤 한다. 지금은 동천洞天을 찾아 헤메고 있지만.
0.5는 반일까, 아니면 중간일까. 아무튼 1이 못된 어떤 것이다. 수학에서 0.5는 1이 되기
위한 준비단계, 정수가 아닌 소수다. 1이 되기 위해 꿈틀거리는 무엇인가다. 일상에서는 1
이 못된 모자라는 것이다. 철학이라면 0.5의 위치를 어디다 어떻게 두어야 할까. 0.5는 1이
라는 형상도 내용도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이다.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요,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라. 무명씨로 이름해도 될까. 너무 격상된
이름이 아닐까. 과분한 이름이 아니라면 무와 유, 공과 색, 0과 1 사이의 점, 연결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진공묘유의 묘유일 수 있을까.
무극이 태극이요,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사상을 낳고…. 음과 양이 만나서 하나의 사
물을 형성한다. 음과 양을 매개하는 것은 기이다. 음의 기나 양의 기는 뭉쳤다 헤어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0.5는 음일까 기일까. 음일 수도 있고 기일 수도 있다.
역에 유혼이라는 놈이 있다. 유혼은 말 그대로 떠도는 혼이라는 이야기다. 떠도는 유랑
자, 소속도 없고 정착도 하지 못한 놈이다.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실체도 알 수 없
고 이름도 알 수 없는 놈이다.
1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존의 질서를 흔들고 파괴할 수도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놈이다. 기존의 질서나 틀에서 본다면 위험한 불청객이다. 속담에 모르는 천사보다 아는
악마가 낫다고 하듯이, 유혼은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나 생성이라
는 측면에서 본다면 또 다른 역할도 있다.
유혼은 수로서 셈해지지 않은, 셈할 수 없는 영역이다. 유혼은 극에서, 끝과 시작, 변화와
선택의 선에서 나타난다. 유혼이 나타나면 위험한 동거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회적인 질
서가 흔들리고 인간은 병이 생긴다. 유혼은 왜 발생할까. 기본적으로는 하나가 둘로 나누
어지는데 있다. 하나로 돌아가면 될까. 그런데 돌아갈 하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부여한다. 문
제의 시작이다. 말은 말대로 사물은 사물대로 놀기 시작한 것이다. 분리된 둘을 일대일 대
응시켜 연결시켜야 하는데 뭔가 어긋나고 맞지를 않는다. 모순 역설이 발생한다. 그것이
유혼이다. 실체가 없는데 말만 있는 것은 허구요, 실체는 있는데 이름이 없는 것도 존재
가 아니다.
수학에 서수와 기수라는 것이 있다. 기수는 하나 둘 셋을 말하고, 서수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라는 위치, 자리를 말한다. 같은 3이라도 세 개라는 개수를 말하기도 하고 세 번째
라는 위치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집합에서 세 개의 합이 세 개가 아니라, 전체를 포함
하여 네 개가 된다. 수와 자리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나가 들어갈 집이 없다. 떠돌이
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 둘 셋의 계산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셈해지지 않은 부분, 셈할 수 없는 영역
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이 미치지 못하는, 무엇
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무라고 이름해도 좋고 공이라 이름해도
좋다. 만일에 계산을 할 때 계산할 수 없는 어떤 것까지 포함하여 계산을 한다면 어떤 그
림들이 나올까.
하나일 때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둘이 만난다면 사건이 발생한다. 음과 양이 만나서 사
물을 형성하듯이, 두 선이 직각으로 만난다면 대각선이 만들어진다. 대각선에는 나머지
가 있다. 가로선에도 세로선에도 속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
느냐에 따라 세계를 보는 시각에 차이가 생기는 것 같다. 셈해지지 않은 셈할 수도 없는
나머지를 무시해도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나머지에서 항상 문
제가 발생한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수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각선의 길이는 정수로서
표현할 수가 없다. 라는 소수다. 수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학파
는 해산하게 된다. 역에 있어서도 하도와 낙서, 정역에 이르기까지 대각선의 나머지 부
분, 수도 되고 괘도 되는 5와 10이라는 수를 안에 두느냐 밖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가로와 세로의 사각의 영역에서 산다. 가로와 세로의 대응관계 속에서 풀어
간다. 너와 나, 말과 사물의 관계다. 그래도 문제가 안 풀릴 때에는 대각선을 긋든지 아니
면 가로지르는 선을 긋는다. 우리는 말을 가지고 산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
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고 존재는 말이 규정한다. 말이 말을 낳고 말만 무성한 세상이
다.
사물로 돌아가면 조금은 나아질까. 세로와 가로의 선은 직선적으로 진행된다. 대각선을
가로나 세로의 선으로 삼아 원을 그린다면 원의 지름이 된다. 원은 순환한다. 사각의 방도
가 아니라 원도가 그려진다. 내가 원의 중심이 될 수 있을까. 나를 원의 중심에 둔다면 조
금은 나아질 것 같다.
1에서 본다면 0.5는 모자라는 놈이다. 일상에서 본다면 유혼은 기존의 틀이나 질서에 적응
하지 못하고 벗어난 놈들이다. 잘라버릴까. 버린 자식들이다. 더 이상 미련을 둘 필요도
없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동서양의 문명을 비교할 때 쓰는 비유 중의 하나, 서양에서는 알 수 없는 위험한 용을 퇴
치하는 기사가 문명을 개척하는 영웅의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심우도에서 이
야기하는 것과 같이 야생의 길들여지지 않은 소를 찾아 잘 길들여 소도 없고 나도 없는 세
계를 그린다. 이것은 한 극단의 예를 비유로 든 것이긴 하지만, 서양의 이러한 태도가 0이
라는 수의 도입이 늦어지고 무한이라는 개념의 도입을 꺼렸다고 한다. 이것이 실체적이
고 분석적인 서양문명의 성격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역에는 귀혼괘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 돌아갈까. 옛날 집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새로운 집
을 지을까. 법화경에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가 있다. 어릴 때 집을 나간 아들이 떠돌이 거
지생활을 하다가 자기 집인 줄 모르고 밥을 얻으러 온다.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따뜻
하게 맞아주고 집을 물려준다. 그러나 이것은 전제가 있다.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 사회적
인 여유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여유분은 셈에 없는 부분이다. 계산되지 않은 여유분이 있
어야 하는데, 어째 세상은 각박하게 흐르기만 하는 것 같다.
토인비의 문명발달사에 의하면 문명의 건립은 창조적 프롤레타리아트들에 의해 발생한
다. 성장기에는 창조적 브루조아지로서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하지만, 쇠퇴기에는 창조력
을 잃고 지배적 소수자로 전락한다. 초기의 문제해결의 방법이 상황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유랑민 프롤레타리아들이 발생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무산
자일까 아니면 머물지 못하는 자들일까. 무엇을 가지고 돌아갈까. 전원의 꿈을 가지고 돌
아갈까. 문제는 돌아갈 집이 없는 놈들이다. 해결책이 없다. 인식불가능하고 결정불가능
하고 셈해질 수 없는 미정이다.
대각선의 나머지 영역, 집합의 나머지 영역, 이런 것들을 역에서는 미제未齊라고 한다. 돌
아갈 수 없다면 끝까지 갈 수 밖에 없다. 돌아와도 끝을 보고, 말의 끝, 생각의 끝을 한번
쯤은 보고 돌아와야할 것 같다.
이러한 결정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설명들은 많다. 빛의 입자나 파동, 입자들의 나타남과
사라짐, 거기에다 관찰자들의 개입까지 있다. 입자들의 위치가 불확실해진다. 우연과 필
연에서 우연적인 요소들의 작용도 있다. 유전자는 복제작용만을 한다. 그런데 변이가 발
생한다. 그러나 그 변종이 살아남을지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연선택이다. 진화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끝까지 가서 보고 돌아오고 돌아와서 무엇을 어떻게 할까. 공은 빛이다. 공의 빛이 비치
는 땅에서 소나무를 심고 바위를 어루만지며 어떤 집을 지을까.
일상의 집들은 이념의 그림자 속에서 법과 제도의 틀에서 관습이나 경험에 따라 삶을 꾸
려나간다. 공적인 경험에 근거한 삶이라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종교적인 꿈을 가진 인
간이라면 공의 빛을 받아서 하늘의 별이 될까. 철학적인 인간이라면 공의 파편들을 모아
이념이나 개념의 집을 지을 것 같다. 작가라면 카오스의 거품들을 모아 떠도는 소리나 색
에 형태를 부여하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작품이 말을 한다. 그렇다면 내가 작품이 되
고 작품은 내가 되고, 보는 사람은 둘째치고.
그러고보니 말할 수 없는 소녀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융이 신화를 분석한 것이다. 음
과 양이 맞물려 있는 그림이다. 반음 반양이 만나기는 했으나 뭔가 형상을 이루기 전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세 개의 점
종림 /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세 개의 점이라, 하나의 점도 많은데.
점이 아닌 점일까. 공의 그림자 정도일까. 우리는 점으로 살아간다. 점이 없이도 살 수 있
을까. 불교적인 입장이라면 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공에는 말도 없고 점도 없다. 침묵하
면 될까. 침묵도 하나의 말이다. 침묵에서 길어낸 말이라면 어떨까.
연기는 이것과 저것의 관계 아니면 합성으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시작도 끝
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아닌 것으로서의 존
재라는 것이다.
중론中論에서는 구사론자들의 개념화된 말들을 분석하여 그러한 말들의 개념은 성립하
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무엇 무엇이다 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모든 것이 제해진 빈 어떤 것, 무어라 이름할 수 있을까, 형
상화할 수 있을까. 무의미의 거울에 나타난 형상일까.
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보통 형태를 먼저 그리고 배경을 그린다. 안이 아니라 밖부터 그린
다면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아닌 것들을 제한 나머지 부분이 있다.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동서양의 문화가 하나로 통합되어가지만,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비교할 때 서양
의 문화를 양의 문화, 동양의 문화를 음의 문화로 구분하기도 했다. 우리들의 문화 중에
서 유교적인 사고가 양적인 성향이라면 불교나 도교는 음적인 영역에 속한다. 삼교의 통
합을 꿈꾸지만, 그렇게 효과적인 것 같지는 않다.
음의 문화는 빼기의 문화이다. 화폐가 힘이 되고 기술이 끝간 데를 모르는 상황이라면 빼
기의 태도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돈은 무엇이든지 가능하고 기술은 불가능이
없다. 무엇을 위해 주어진 길이 아니라 내 삶의 의미같은 것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좋
을 것 같다.
우리는 과거를 근거삼아 현재를 관계 짓고 미래의 목표를 향해 걸어간다. 나는 왜 태어났
을까. 나는 누구일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나 한번쯤 물어보는 생각들이다. 이
러한 하나하나의 생각들이 점이 되어 내 주위에 찍힌다. 내 삶의 영역이 된다.
자화상, 나 자신의 가장 멋있는 모습. 비탈진 작은 언덕에서 괭이인지 지팡이인지를 짚고
석양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모습이다. 일이라면 세상의 빈구석을 채워주는
정도랄까.
하고 싶었던 일들 중의 하나, 불교적인 이념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잡은 점이 공적
인 것이었다. 공이 지향점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면 어떤 점이 되어야 할까 하는 이
런 생각들이다.
불교와 교단의 갈등이나 혼란은 역사적인 전통의 부담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이념
의 혼재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조계종은 선을 종지宗旨로 하고 있다. 그러
나 정토적인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다. 지금은 티베트의 밀교적인 요소나 남방 상좌부계통
의 요소들까지 들어와 있다. 다양성은 인정하더라도 종파적인 요소들이 갖는 위치나 영역
구분 정도는 필요할 것 같다.
현대는 통일적인 세계관이나 이념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유한
성 때문일까 아니면 이성의 한계일까. 아마도 존재 자체의 구조가 그럴지도 모른다. 다양
성을 담을 그릇이 없다는 것이다. 나머지가 남고 빈구석이 생긴다는 것이다.
형상은 자연이 만들고 의미부여는 인간이 한다. 그런데 형상은 차치하고라도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다. 다양한 의미부여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의미의 장을 하
나로 포개면 표준형이 나올까. 인간의 유한성이나 이성적인 한계의 문제라면 초월적인 어
떤 것에 근거를 구해야 할까.
세 개의 점들은 공의 다른 이름들이다. 공적인 것들의 다른 영역, 존재, 자아 그리고 대상
들에 찍힌 점들이다. 공집합, 대각선 그리고 소실점이다.
불교의 존재론은 유심일까 유식일까. 아니면 공일까. 연기적인 입장이라면 이것과 저것
이 무엇인가라기 보다는 어떻게라는 관계 변화에 중점을 둔다. 현상학적이고 경험론적이
다. 부파불교에서는 다양한 법들의 범주 개념규정을 하고 있으나, 법들의 근거, 기체로서
의 근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 정도일까. 공적인 존재라
면 어떤 것일까. 비었다 없다 아니다 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다. 무적인
것, 비적인 것에 이다를 붙이면 될까. 없는 것으로 있는 것, 아닌 것으로서 있는 것, 비존
재라는 존재는 어떤 것일까. 말이나 되는 걸까.
불교는 음적인 요소가 많다. 양적인 실체로서의 존재 같은 것은 처음부터 부정되었다. 음
적인 존재론도 가능할까. 음적인 빼기, 모든 것들을 제한 빈 것 아니면 나머지 부분이 있
을까. 내용을 빼버리면 형식은 남을까. 존재를 담는 그릇 정도일까. 아무튼 아닌 것으로
남은 것 없는 것으로 이름 정도일 것 같다.
공적인 존재로서의 공집합, 나를 세울 수 있는 빈자리로서의 대각선, 그리고 지향점으로
서 소실점이다.
세 개의 점은 이 세계에 대한 구성적인 사고나 태도도 아니고 신비나 초월적인 세계도 아
니다. 세 점은 존재자체와 자아 그리고 대상들의 영역들로 구분된 것이다.
나는 21세기 한국불교의 중이다. 나의 위치, 불교의 위치를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세계를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한국불교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불교의 탄생으로부터 시간
상 2500여년 공간상 수만리의 이동이 있었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형을 찾자는 것은 아니다. 원형을 찾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찾는다고 해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위치를 규정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불교는 근본불교와 대승불교가 함께 유입되었다.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태도의
차이는 지금도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다. 다음은 도교와의 관계, 유교와의 관계설정이 중
심과제였다.
지금의 문제는 더 복잡하게 얽혀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부딪힌 문제는 과학적 사고나 유
신론적인 태도가 아닌가 한다. 불교를 유물과 유심으로 나눈다면 유심론적인 입장이고,
유신과 무신으로 나눈다면 무신론적인 입장이다. 불교는 무신론적인 입장이지만 신적인
요소에 많은 빚을 지고 있고, 유심론적인 입장이지만 유물론에 등을 대고 있다.
마음만 정화되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조건들이 있다. 철학적인 사고
에 기대해도 될까. 철학적인 개념이나 이념 가지고는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이념
적인 개념의 성립이나 궁극적인 실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은 끝났다고 한다. 다만 개념들
의 위치는 잡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신이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신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한번쯤은 보여주고 싶었다. 그
렇다고 사물의 추구나 집착이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런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기는 있는 걸까. 신적인 초월의 세계도 아니고 대
상화되는 사물들의 세계도 아닌. 공적이라면 그림이 나올까. 아마도 그림자 정도는 나타
날 것 같다.
존재에는 전체나 완성이라는 것이 없고 항상 빈구석이 남는다. 나를 빈자리에 둔다면 사
물이나 세계가 있는 그대로 보일까. 모방해야 할 원형도 없고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없
다면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사막의 여행을 좋아한다. 사막에는 눈에 걸거치는 것이 없다. 그리고 길이 없다. 길
이 없다는 것에 왜 편안함을 느낄까. 어쩌다 나타나는 오아시스의 푸른빛은 너무나 선명
하다.
공집합, 대각선, 소실점이라는 세 개의 점이 점이 아닌 점이 될 수 있을까. 하나하나에 대
한 이해나 관계설정은 앞으로 계속될 것 같다.
소실점 消失点
종림 /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공에 세 개의 점을 찍었다. 공집합, 대각선, 소실점이다. 소실점은 사라지는 점이다. 그러
나 모든 것들을 위치 지운다. 소실점에 위치 지워진 사물들은 우리들이 지각하는 인상이
나 느낌들과는 다르다.
소실점은 주관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다. 소실점에서 그어진 선들은 객관적이지
만 소실점을 어디다 찍느냐하는 것은 주관적이다. 소실점이 점이 될 수 있을까? 점이 아
닌 점. 소실점이 지향점이 될 수 있을까? 소실점을 지향적으로 삼았던 것은 이념이나 사물
들 간의 모순이나 갈등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실점은 사물의 밖에 있다.
소실점은 본드리야드의 아메리카 여행기다. 풍물의 여행기가 아니라 관념의 여행기다. 사
막과 도로로 상징되는 미국의 문화는 실현된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쓰레기다.
사막에는 소실점이 없다. 사막의 지평선은 하늘과 경계를 이룬다. 소실축이다. 길에는 소
실점이 있다. 아득히 먼 저쪽에 사막은 사라짐이다. 사막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침입
자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의 힘이 작용하는 한에서 존속한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으면 사
막으로 돌아간다.
속도는 사물들을 사라지게 한다. 미국의 도로는 남과 북, 동과 서로 뻗어있다. 그러나 구
대륙의 도로는 도시와 도시가 연결되어 있다. 유럽이 혁명의 열병에 역사 전통의 무게에
눌러 허덕일 때 신대륙 미국은 유럽의 꿈 이상이나 개념들을 모사 물로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 모사 물들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것이다. 원형이 없는 세계 모사된 사물이 지배
하는 세계. 사막과 속도의 이미지 속에 유럽의 꿈들이 사라지는 것을 하나의 소실점으로
보는 것 같다.
소실점은 상징의 형식들 중의 하나다. 원근법으로서 소실점이 회화에 나타난 것은 15세
기 르네상스 시기라고 한다. 신화에는 소실점이 없다. 시선의 끝은 사물의 너머에 있다.
소실점은 인간과 사물의 사이에 있다. 아마도 세계를 보는 눈이나 공간을 구성하는 방법
의 차이인 것 같다.
소실점은 인간의 시각과 보여지는 대상 사이의 어딘가에 있게 된다. 문제는 인간의 시각
인상과 실제의 사물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물을 바로 보려면 시각이 고정되고 한 눈
이어야 하는데 인간은 두 눈을 가지고 있고 눈동자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게다가 눈은 둥
글고 상은 안쪽의 오목한 곳에 맺힌다. 멀리 있는 것이 작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야
각이 커질수록 크게 보인다. 이것을 가장자리 왜곡이라고 한다.
사진에서 중앙초점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사물이 크게 나타난다. 인간의 눈은 초점거리
가 가까우면 볼록하게 보이고 멀면 오목한 원호로 보인다. 직선은 굽어보이고 곡선은 바
르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유성은 직선으로 흐르지만 휘어지게 보이고 곧은 기둥은 굽어
보이기 때문에 곧게 보이기 위해서는 배흘림을 한다고 한다. 시각과 사물이 만나서 선이
형성된다. 상은 객관적인 사물들의 보여진 부분들이고 시각구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다.
무한을 인지하지 못하고 공간도 공백으로 밖에는 인지하지 못한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각
인상에 의미를 주고 재편집을 한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이 의도를 가지고 필름을 재편집하
듯이
결국은 우리들의 의미부여의 문제다. 소실점은 최소한 사물의 위치 공간의 통일성을 부여
한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한다. 천의 눈에는 천의 세계가 있듯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쾌락주의자들도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지쳐 고행주의자가 된
다.
의미부여는 어떻게 주어지는 걸까? 세계는 나와 너 그리고 너와 내가 상응하게 그것을 형
성한다. 물자체는 불가지의 것이다. 우리는 보여지는 것만 본다. 사물의 체계와 의미는 체
계는 다른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사물이나 자연은 가치중립적이다.
의미는 안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밖에서 주어지는가? 안도 밖도 아닌 중간 매개 물들이 많
이 있다. 그것을 보통 상징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마음을 자아, 무의식, 초자아
로 구분한다. 무의식이 숨은 욕망이라면 초자아는 욕망을 강제하는 금지의 성격이 있다.
아버지의 상이다. 라캉은 현실계, 상상계, 상징계로 구분한다. 상상계는 거울단계의 이미
지의 상이다.
내가 아닌 것을 보고 “저것은 내가 아니야” 나를 한정 지운다. 대타자의 등장이다. 상징계
는 언어의 세계다. 의미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로서 작용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
다. 말이 지배권을 행사한다.
신화에서는 나와 사물과 신적인 것의 구별이 없다. 어린 아이들은 울면 모든 것이 충족된
다. 그런데 자라면서 안돼 하는 것이 나타난다. 왜 안돼 이유가 없다. 안돼 왜 안돼. 안되
니까 안 되는거야. 더 크게 울어! 우는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그래도 한계가 있다.
어떻게 하지?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나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힘을 길러야 한다. 힘을
쓰는 데는 규칙이 필요하다. 그런데 규칙은 의미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나를 어디까지
확대 할 수 있을까? 규칙만 따른다면 우주대로 확대될까? 영역의 확보는 생존의 조건들
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선택된다.
주술이 신화적인 세계라면 기술은 사물들의 세계다. 주술이 징조를 본다면 기술은 결과
를 기대한다. 신화적인 사고가 천지창조라는 근원에서 사물들을 바라본다면 과학적인 사
고는 현상에서 원인을 확정한다. 과학의 진리는 지각의 너머에 있다.
의미는 신적인 어떤 것과 사물들과의 사이 어디에선가 주어지는 것 같다. 인간의 욕망, 충
동, 의지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 대척점에 신의 뜻 자연의 법칙이 있다. 신화에서는
세계를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둘로 나눈다. 성서러운 것은 신적인 어떤 것과 관계
지어진 것이다. 신성함은 영적인 어떤 힘이 깃든 것이다. 함부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탈
이 난다. 잘 다스려야 한다. 숭배와 금지의 조항들이 생겨난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의 좌표위에 주어진다. 기하학적인 공간에는 동서남북이 없다. 위치
만 주어질 뿐이다. 그러나 나라는 점이 찍히고 난 다음에는 앞과 뒤, 좌와 우가 구별된다.
공간이 동서남북으로 구분되고 그 작용이나 기능에 따라 일상적인 존재의 영역과 신성한
영역으로 나뉜다. 시간에는 선이 없다. 그러나 생성과 소멸이라는 변화의 계기가 개입함
으로서 생주이멸의 선이 주어진다.
수가 신성시되는 것은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사물들을 일렬로 배열 순서를 정해주기 때문
이다. 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혼돈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적 작용이 있다. 형
상과 언어는 의미의 매개체들이다.
빛에는 형상이 없다. 빛의 강도에 따라 그림자들이 형성될 뿐이다. 그러나 이 모사물들이
원형을 대신하기 시작한다. 모사물들이 자립하여 실체화되는 것이다. 이것을 존재의 세계
에서 의미의 세계로의 이행이라고 한다.
형상들의 실체화가 상징이라면 언어 관념의 집결체가 이념적인 요소들이다. 아마도 상징
이나 이념들이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닌가 한다. 상징의 해석 이념의 틀 안
에서 우리는 의미를 구성한다. 그러나 지금은 상징도 이념도 없는 과학의 시대 기술의 시
대에 살고 있다.
하고 싶은 것 실현이 가능한 것, 화폐로 교환이 가능한 것들만이 종착지는 모르고 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이제 상이 아닌 상, 말이 아닌 말에서 시
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오디퍼스 콤플렉스, 왕의 살해, 신의 육화에 기대해야 할까? 선가에 조사를 만나면 조사
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한다. 의미의 제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
만 제거되면 실재가 보일까?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보일까? 의미는 대상과 관념의 소산
들이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타날까?
성인은 꿈이 없다고 한다. 미래의 꿈에 초점을 맞추면 현재를 소홀하게 되고 꿈의 인력에
따라 현실이 휘어져 보이게 된다. 현재의 삶을 유예하게 된다. 지금을 바로 비추는 꿈 빛
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꿈이라면 꾸어볼만 하다.
논리학에 모순율이라는 것이 있다. 논리에서는 모와 순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에서는 모와 순이 함께 작동한다. 여기에 따른 것이 배중율이다. 하나가 선택되면 하나는
제외되어야 한다. 나와 너의 경계의 선을 그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을 만들 여지가 없어진
다. 그림에는 주제가 되는 상이 있다. 그러나 상만 보지 말고 배경과 함께 봐야 한다. 같
은 상이라도 배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동양화에서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여백은 사물이 없는 빈 공백이 아니다. 공백
은 상이 상일 수 있게끔 작용을 하는 장이다. 조연이 없는 주역은 없다. 이념을 확실시하
는 것은 좋다. 그러나 소외된 영역, 가장자리의 희미한 상들에 눈을 두어야 한다. 그런 의
미에서 본다면 자본주의는 이념의 체계가 아니다.
소실점은 사라지는 점이다. 공백의 점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들을 위치 지운다. 소실점은
무한에의 통과점이 아닐까? 우리는 유한에서 유한을 본다. 그러나 소실점이라는 점을 지
난다면 무한의 빛에 비춰진 사물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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