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개심사를 입체적으로 소개하려는 시도입니다. 개심사 입구에는 개심사를 입체덕으로 정감있게 소개하는 종합안내판이 필요합니다. 글을 완성하는 데는 몇년이 걸릴 것입니다.)
마음을 여는 절, 마음을 열리게 하는 절
개심사(開心寺)는 개심사는 가야산(667.6m) 줄기의 상왕산(307.2m) 기슭의 운산면 신창리 1번지에 있는 사찰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개원사(開元寺)라 하였다가 당나라 현종(712-756)의 연호와 같다는 이유로 개심사로 개칭되었다.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처능대사가 중건하였다. 조선 성종 6년 (1475) 충청남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을 하다가 산불을 내어 불탔고 9년이 지난 성종15년(1484)에 중창되었다. 개심사를 찾는 이들은 제일 먼저 사각형 연못을 지나치게된다. 이 연못은 코끼리가 목욕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이때 코끼리는 상왕산(象王山)의 지명에서 유래한다. 열반경에 의하면 토끼와 말과 코끼리(象王)가 강을 건너가는 비유를 말하는데 토끼와 말은 이승(二乘)을 의미하고 코끼리는 불승(佛乘)을 상징한다. 초기경전에는 싯타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한 후 코끼리 머리 산(象頭山)에서 천명의 제자들에게 설한 '불의 설법'을 하였다고한다. 이처럼 상왕(象王)은 부처님이나 부처님이 설법하였던 산에서 유래한다. 상왕산(象王山)은 가야산(伽倻山)과 같은 의미다. 연못을 가로 지르는 외나무다리는 '단도직입'으로 마음을 열라(開心)는 의미이거나 대웅전에 모셔진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가는 하나의 길을 상징한다. 2023년 에 개축된 석축계단을 오르면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안양루가 나온다. 해강 김규진이 예서체로 큼직 큼직하게 쓴 현판 ‘象王山開心寺'는 보는 이의 마음까지 뻥 뚫리게 한다. 석축공사때 왼쪽에 있었던 종각이 오른 쪽으로 이전되었다.
서산의 자랑인 '마애여래삼존불'의 푸근한 미소처럼 백제문화를 자랑하는 개심사도 도량곳곳에서 외갓집에 온듯한 소박하고 친근한 분위가를 자아낸다. 심검당의 배불뚝이 기둥과 종각의 구부러진 목재들은 그 자유분방함으로 방문객을 무장 해제시킨다. 삐뚤어진 기둥과 세월을 견딘 기와장과 도량 곳곳에 피어나는 꽃잎은 저절로 마음을 열리게 한다. 울퉁불퉁한 빛바랜 기둥들을 보고 있으면 고향에 온듯이 편안하다. 예전부터 마음을 열리게(開心)하는 개심사는 여전히 시인묵객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하고 붓을 들게했다. 수 많은 사찰중에서도 유독 개심사를 노래하는 시인들이 많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개심사를 찾는 이들은 돌담 아래 꽃나무, 돌맹이 하나까지 마음에 담아간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개심사를 "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사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 자는 듯한 절"이라하였다. 대웅전 앞 마당에 놓여 있는 길다란 의자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노라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흔히 개심사를 '마음을 여는 절'이라고 풀이하는데, 개심사에 오랫동안 사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열리는 절'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심사 당우들은 친절하게도 방문객들의 눈 높이를 존중해준다. 이를테면 개심사 대웅전은 양쪽 모서리 기둥들이 안쪽의 기둥보다 높아서(귀솟음기법) 쳐져 보이지 않고, 모서리 기둥이 안으로 살짝 기울어져(안쏠림기법)있다. 이런 장치들은 대웅전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착시현상을 주어 대웅전이 더욱 반듯하게 보이게 한다. 무량수각의 처마끝이 요사체의 처마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요사체는 대웅전과 일직선으로 짓지 않고 조금 어긋나도록 지어졌다. 개심사를 만든 이들의 안목과 마음씀이가 어떠 한지 알 수 있다. 개심사의 근래 역사는 1955년 비구니 지명스님이 이곳에서 선방을 열어 40여분이 참선공부를 하였고 그후 비구니 강원으로도 유명하였다. 개심사 범종은 이때 비구니스님들에 의해서 조성되었는데 일제시대에 범종을 약탈해간 일본군인들의 만행을 사죄하는 뜻으로 마음씨 좋은 일본인이 시주하여 조성하였다. 근래에는 선광스님(1983~2008)로 주지로 부임하여 25년동안 머물면서 영구암터인 보현선원을 복원하는등 지역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사세를 일으켰다. 지금은 3명의 비구스님들이 머물고 있고 보현선원에는 안거때마다 10여명의 스님들이 모여서 참선을 하고 있다.
보물의 보고 개심사
서산 개심사는 유구한 역사와 걸맞게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사찰이다. 1963년 대웅보전이 보물로 지정된 이래 1997년 영산회상괘불탱, 2009년 아미타목조여래좌상, 2012년 오방오제위도와 사직사자도, 2016년 달마관심론,혈맥론등 목판, 2017년 묘법연화경, 계초심학인문,모자리흑론,몽산화상법어, 오대진언목판등 14종의 보물이 있다.
오방오제위도등은 1676년에 화승 일호(一浩)가 단독으로 그린 것으로, 사찰에서 의식을 행할 때 도량장엄용으로 조성한 불화인데 현존하는 도량장엄용 불화 가운데에서 조성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작품으로 가치가 높다.(아래도표 '개심사 소장 보물 14 종류' 참조) 보물 목판 9종류중에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몽산화상육도보설은 개심사에서 판각되었고 나머지는 보원사와 가야사에서 판각되었다.
'도가논변모자리혹론 목판(道家論辨牟子理惑論)은 3세기에 제작된 최초의 논서(論書)이다. 지은이 모자(牟子)는 한(漢)나라 헌제(獻帝) 때 사람으로 이름은 '모융'이며 공자나 노자의 논점을 인용하여 불교를 옹호하고 있다. 37편의 문답을 읽어보면 1700년전(3세기) 불교를 비판하는 논리와 방어하는 논리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이 목판은 1580년(선조13) 가야산 보원사(普願寺)에서 제작된 것으로, 총5판 중에서 현재 4판이 개심사에 전해지고 있다. 본래 공자와 노자를 공부했던 모융이 불교에 심취하자 사람들은 그를 유가를 배반한 이단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모융은 이혹론(理惑論) 37篇을 지어 불교가 진리임을 논증하였다. 개심사 장경각에는 20종의 목판이 보존되고 있었는데 최근에 11종의 목판을 보원사에 돌려 주어서 남아있는 9종류만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9종류의 목판은 현재 개심사 대웅전 한켠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개심사에는 14종의 보물 이외에 인조 24년(1646)에 건립된 명부전(冥府殿), 심검당(尋劍堂)등도 지방문화재가 있고 고려후기에 만들어진 석탑과 무량수각, 팔상전, 산신각, 보장각, 경허당등의 건물이 있다.
천하의 명당 개심사
왜 개심사에는 보물이 많은 것일까? 풍수지리적으로 개심사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으로 각종 자연재해를 입지않았기 때문이다.(아래 항공 사진 참조) 내포 가야산에 산재해 있던 상가리 가야사, 용현리 보원사등 가야산 주변의 사찰이 화재등으로 전소되는등 백여개의 사찰이 폐사지가 되었지만 개심사는 유구한 역사속에서 보물 14종을 간직하며 살아남았다. 개심사 아미타목조여래좌상은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보수되었다는 기록으로보아 제작된 시기는 천년 전일 것으로 추측된다. 2022년 아미타불을 개금하였는데 손목에 두개의 팔찌를 차고 있는 것이 발견 되었다. 출가자의 신분인 부처님 손목에 팔찌가 발견된 사례는 없기에 매우 희귀한 불상임이 판명되었다. 조선시대에 개심사에 화재가 난적이 있었다. 조선 성종 6년 (1475) 충청남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사냥을 하다가 산불을 내어서 대웅전이 불탔다. 다행스럽게 아미타목조여래좌상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성종15년(1484)에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종은 책임을 물어 절도사 김서형을 파직시켰다.
개심사에서 제일 명당은 대웅전이다. 개심사 대웅전에 들어가 천년동안 전해내려온 아미타불 앞에 잠시동안 만이라도 앉아 있어보라. 개심사를 방문한 의미가 더할 것이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번거롭다면 안양루앞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있어도 된다. 의자에 앉아서 대웅전 지붕위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거나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느껴보라. 혹 사람들이 빠져나간 저녁나절에 앉아있으면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범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청벗꽃 쌍벗꽃
4월 중순이 되면 도량에 만개하는 청벗꽃과 왕벗꽃으로도 개심사는 몸살을 앓는다. 해탈문을 가려버릴 정도로 축 늘어져 피는 왕벗꽃과 기와를 배경으로 꽃다발처럼 푸짐하게 피어나는 벗꽃을 보노라면 여기가 극락이요 해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화가난 사람이나 슬픔에 젖은 사람일지라도 일단 왕벗꽃 앞에서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지장전 앞에서 피는 청벗꽃은 꽃심이 청포도 같은 연한 녹색이어서 꽃이 푸르스름해 보여 신비감을 자아낸다. 청벗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개심사에만 있다. 서산시에서는 청벗꽃의 어린 묘목을 길러내어 더 많은 곳에 청벗꽃을 심으려고 하고있다. 해마다 봄이면 개심사 벗꽃을 구경하려는 방문객의 차량이 몰려서 신창저수지에서 개심사 대웅전까지 도착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리기도한다. 서산 제 4경인 개심사의 주차 문제는 서산시에서 속히 해결하여 방문객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신창 저수지 반대쪽(도로의 반대쪽)을 저수지를 따라서 걷는 길로 만들어서 저수지에서부터 사람들이 걸어오게 하면 교통난도 해소되고 시민들의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안전한 자전거 도로로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개심사를 찾는 사람들은 신창 저수지 주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목장 풍경에 감탄한다. 사월에 벗꽃이 있다면 한 여름 칠팔월에는 붉게 피어나고 있는 백일홍이있다. 어느시인이 "가라, 가서 실컷 울어라. 개심사 백일홍나무 아래서"라고 읊었듯이 삶이 시들어가면 저녁나절 백일홍 꽃 그늘에 앉아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잠재울 일이다. 백일홍 그늘에 앉아 멀리 울려퍼지는 종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개심사를 통과하여 상왕산으로 이어진 아라메길, 서파랑길, 내포숲 길은 산길을 따라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애정하는 서산의 숲 길이다.
개심사의 당우들
1753년에 개심사 일대를 여행한 이철환은 그의 여행기 ‘상산삼매(象山三昧)’에서 "개심사는 웅장하고 우람하기로는 내포의 여러 고을 가운데 으뜸이다. 불당으로는 대웅전, 원통전, 삼라전이 있고 스님들이 상주하는 곳으로는 선당, 승당, 동상실(東上室), 서상실(西上室), 동별실(東別室), 판전(板股), 월명당(月明堂)등이 있다. 암자로는 백련암(百興港), 동전(東殿), 부도전(浮麗殿), 양수암(雨水腌), 남전(南 殿), 중암(中麗), 은선대(隱仙臺)등 일곱 개가 있다."고 적고있다. 그당시 판전(板股)에 지금 보물로 지정된 탠화와 목판이 보존되고 있었을 것이다. 1950년대에는 비구니스님들이 살던 '묘련암'이 지금의 '보현선원' 아랫쪽에 있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지금은 자취가 없다. 예전의 암자터에 현재 스님들이 참선하는 '보현선원'이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고 해마다 십여명의 스님들이 방부를 들여 참선을 하고있다. 현재 남아있는 당우들을 살펴보자.
대웅전
서산 개심사 대웅전(보물 제143호)은 맞배지붕으로 앞면 3칸·옆면 3칸의 다포양식이다. 맞배지붕은 주로 주심포양식이 많은데 이 건물은 맞배지붕이면서 다포양식이라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잇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보물로 지어될 당시에는 건물의 진가가 살아있었지만 2005년 보수한 이후에는 평범한 건물이 되었다.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19호)은 고려 충렬왕 6년(1280)에 보수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조성시기가 1280년보다 앞선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상의 형상이 단정하면서도 중후하며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각기법도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어 고려후기 목조불상 가운데 최고(最古)의 작품일 가능성을 보여 준다. 개심사 아미타목조여래좌상은 국보로 승격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대웅(大雄)이라는 용어는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도 애용한 용어인데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모시면 대웅전이라하고, 부처님과 제자들 혹은 부처님과 협시 보살을 모시면 대웅보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개심사 대웅보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있다. 현판의 이름과 주불이 다르게 모셔진 것은 개심사의 미스터리중에 하나이다. 대웅전 앞에 서있는 5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이지만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다.
심검당(尋劍堂)
불교에서 지혜는 어둠을 몰아내는 광명이나 번뇌를 자르는 칼로 상징된다. 그래서 예전부터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을 지혜의 칼(劍)을 찾는(尋) 집(堂)이라 불러왔다. 심검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건물인데 왼쪽에 앞면 3칸 옆면 5칸 규모의 덧집이 붙어 있다. 이 덧집은 울퉁불퉁한 목재를 사용하여 개심사의 상징이 되었다. 1960년대에 개심사에 심검당은 비구니스님들의 강당으로 사용되었고 선방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은 매주 주말에 일반인들을 위한 참선방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차를 마시는 다실(茶室)로 사용되고 있다. 개심사를 방문하는 이들이 개심사 심검당 다실에서 차 한잔 마시는 시간을 갖어 보시라. 서산 시민이라면 "스님! 차 한잔 주셔요" 라고 용기를 내어 말해보자.
안양루(安養樓)
안양루(安養樓)의 안양(安養)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대웅보전에 모셔진 아미타불상이 내려다 보고 있으므로 누각의 이름을 안양루라고 지었다. 현재 안양루에는 불전사물(佛殿四物) 중에서 법고, 목어, 운판이 모셔져있다. 안양루에는 여러가지 벽화가 그려져있는데 상왕산 개심사 현판 오른쪽에서 부터 16아라한의 모습이 보인다. 바깥쪽에 6분이 있고 내부에 10분이 그려져있다. 나한전을 만들지 않고 그림으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16나한은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나서 미륵부처님이 오시기까지 이 세상의 중생의 교화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분들인데 그 이름은 다음과같다. ① 삔돌라바라드와자, ② 까나까밧차, ③ 까나까바드라와자, ④ 수빈다, ⑤ 나꿀라, ⑥ 바드라, ⑦ 깔리까, ⑧ 바즈라뿟따, ⑨ 지바카, ⑩ 빤타까, ⑪ 라훌라, ⑫ 나가세나, ⑬ 앙가쟈, ⑭ 바나와신, ⑮ 아지따, ⑯ 쭐라빤타까.
이분들 중에서 부처님당시에 살았던 몇 분만을 소개한다. 먼저 삔돌라 바라드와자는 꼬삼비 우데나왕의 사제의 아들이었다. 식탐이 많았지만 부처님을 만나 아라한이 되었고 신통력이 뛰어나 허공에 날아올라 전단나무 발우를 가져오다가 부처님께 꾸중을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독성님, 나반존자님으로 잘 알려져있다. 빤타까와 쭐라빤타까는 형제인데 동생이 머리가 둔해서 게송 한개도 외우지 못했다. 환속하려는 동생에게 부처님은 수건을 하나 주면서 “더러운 것을 닦자(라조 하라낭)"라고 말하면서 청소하는 법을 일러 주었다. 그는 “라조 하라낭"이라는 문장을 되뇌이며 날마다 청소를 하였고 곧 아라한이 되었다. 아라한이 되자 명료하게 설법하는실력을 갖추게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라훌라는 부처님의 아들로서 8살에 출가하여 20살에 아라한이 되었다. 남들 모르게 수행을 열심히 하였다고 하여 밀행제일이라는 칭호를 얻었다.이 16아라한들은 부처님이 입멸하고 미륵부처님이 오시기전까지 무불(無佛)시대에 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을 제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흔히 16아라한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 응진전, 영산전이라고 부른다.
안양루 벽화
안양루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은 다양한 시대와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그림을 그린 규칙은 없는것 같다. 안양루를 마주보며 왼쪽에는 흙장난을 하다가 흙을 부처님께 바치는 아소까왕의 전생담, 부처님이 전생의 부모인 뼈무더기를 보고 절하는 모습, 개심사를 창건하기 위하여 산을 둘러보는 스님,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는 원효스님, 피부병에 걸린 세조의 등을 밀어주는 문수동자, 제행무상 시생멸법이라는 게송 반쪽을 듣고 나찰에게 몸을 바치는 동자, 방아를 찧는 혜능에게 질문하는 홍인대사, 개심사 전경, 안수정등 이야기, 비둘기를 살려주는 부처님 전생담,달마대사에게 믿음을 보이기 위해 팔을 잘라 바치는 혜가대사, 지옥문전에 지장보살등 그림 하나하나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있다.
무량수각
무량수각은 무량수불로도 불리는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전각이다.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추사가 전라도로 귀양가던 중 개심사에 들려 현판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아미타불이 모셔진 무량수전을 무량수각이라고 현판을 달았는지 명확히 알려져 있지않다. 개심사 대웅보전에 서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진 것이 미스테리하면 무량수각에는 2개의 미스테리가 있다. 하나는 무량수전이라고 불러야 할 건물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량수각안에 아미타부처님이 아닌 관세음보살을 안치되어 있는 것이다. 무량수각옆에 있는 부엌에서 나무를 때면 지금도 무량수각 안방의 구들이 따뜻해진다. 옛날 부엌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 개심사의 또 다른 매력이다. 현재 무량수각은 개심사신도들이 사랑방 역활을 하는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명부전
개심사가 영험한 기도처로 각광을 받는 것은 이 명부전 때문이다. 불자들이 개심사를 찾는 이유는 개심사에서 기도하여 소원성취를 하였다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명부전과 산신각에서 기도하면 적어도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곳에서 기도 하여 소원성취한 불자들의 이야기는 셀수 없이 많다. 그렇게 영험한 까닭은 개심사명부전의 영험보다는 지장보살의 원력이 크기 때문이다. 지장경에 나타나는 지장보살의 원력을 살펴보자.
"미래 현재의 모든 중생들이 임종할 때에 한 부처님 명호나 한 보살님 명호나 한 벽지불의 명호만 들어도 죄가 있고 없고를 물을 것 없이 다 해탈하게 된다."(長者, 未來現在諸衆生等 臨命終時 得聞一佛名 一菩薩名 一僻支弗名 不問有罪無罪 悉得解脫)
"만약 미래세에 어떤 사람들이 의복과 음식이 부족하여 구하여도 원대로 안 되며, 혹은 질병이 많고, 혹은 흉하고 쇠한 것이 많아서 집안이 불안하고 권속이 흩어지며 혹은 빗나가는 일들이 많이 닥쳐서 몸을 괴롭히고 잠결에도 놀래는 일이 많거든, 이러한 사람들이 지장보살의 명호를 듣거나 지장의 형상을 보고 지극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염하여 만 번을 채우면, 이 모든 여의찮은 일이 점점 소멸되고 안락하게 되며 의식도 풍족하여지고 꿈에도 모두가 편안하리라."(若未來世 有諸人等 衣食不足 求者乖願 或多疾病 或多凶衰 家宅 不安 眷屬 分散 或諸橫事多來忤身 睡夢之間 多有驚怖, 如是人等 聞地藏名 見地藏形 至心恭敬 念滿萬遍, 是諸不如意事 漸漸消滅 卽得安樂衣食 豊溢 乃至睡夢中 皆悉安樂)
지장경에 나타난 이러한 지장보살의 원력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장보살을 찾고 있다.
경허당
경허(鏡虛, 1849년 ~ 1912년)선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이다. 9세 때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고 동학사 강주를 할고 있을때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라는 말을 전해듣고 깨달았다. 880년 어머니와 속가 형님인 스님이 주지로 있던 연암산 천장암으로 거처를 옮겨 천장암의 작은 방에서 1년 반동안 보림을 하던중 확철대오하게 되고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이 없구나"라고 시작하는 오도송을 짓는다. 천장암에서는 경허의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1937), 수월(水月, 1855~1928)·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 출가한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경허스님은 천장암에서 지내다가 개심사 부석사 간월암등지에 머물렀는데 경허스님이 개심사 머무실때 솔가지를 잡고 선채로 열반에 드셨다는 혜월스님이 이곳에서 인가를 받았다.
팔상전
부처님의 일대기 중에서 8장면을 그려놓은 탱화가 보관되어있다. 8장의 그림만 보면 부처님의 일생을 이해할수 있도록 만든 시청각 교재라고 할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생애를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유성출가상(喩城出家相)·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녹원전법상(鹿苑傳法相)·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설명한다.
①도솔래의상은 전생의 부처가 도솔천에서 하얀 코끼리를 타고 이 세상에 와서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 입태한 일을 말한다. 광명을 내뿜으며 대지가 진동하고 악마들이 모습을 감추며 일월성신도 빛을 잃고 천룡들도 두려워하는 다섯 가지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②비람강생상은 4월8일에 부처가 룸비니에서 탄생한 일이다.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자마자 7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③사문유관상은 출가하기 이전에 궁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인생의 고통과 무상을 관찰한 일이다. 마지막 북문(北門)에서 사문 수행자를 만났고 이를 통해 출가를 결의하였다고 한다.
④유성출가상은 출가를 결심힌 태자가 부친 정반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지만 궁을 몰래 빠져나와 출가한 일이다.
⑤설산수도상은 출가한 부처가 초기에 선정을 닦다가 방향을 바꾸어 고행을 6년간 실천한 일이다.
⑥수하항마상은 부처가 35세였던 12월 8일에 보리수 밑에서 모든 악마를 굴복시키고 성도(聖道)한 일이다.
⑦녹원전법상은 성도한 부처가 범천의 권청을 받아들여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을 시작한 일이다. 이후 평생을 유행(遊行)하면서 전법하였다.
⑧쌍림열반상은 80세에 부처가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밑에서 최후의 설법을 마치고 열반한 일이다. 그 때가 2월 15일이었다.
범종각
범종각은 1970년에 지어진 것이지만 개심사의 심검당이등이 가진 자연스런 건축양식을 계승하여 상처입고 굽은 나무를 사용하여 지었다. 종각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범종은 지옥중생의 고통을 위로하고자 치는 불구(佛具)인데 새벽 3시와 저녁 6시에 친다. 저녁나절 배롱나무 아래 앉아 범종소리를 듣는다면 온갖 근심이 사라질것이다. 현재 종각은 오른쪽으로 이전 되었고 굽은 소나무 대신에 느티나무 기둥이 바치고있다.
문종성 번뇌단 지혜장 보리생 聞鐘聲 煩惱斷 智慧長 菩提生
이 종소리 듣고 번뇌를 끊으시고 지혜 늘어 깨달음 얻으시고
이지옥 출삼계 원성불 도중생 離地獄 出三界 願成佛 道衆生
지옥을 떠나고 삼계를 벗어나고 바라건데 부처되어 중생을 구하시기를!
파지옥진언 옴 가라지야 사바하 옴 가라지야 사바하 옴 가라지야 사바하.
산신각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다.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畫)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차 나타나기 시작한 산신각은 하근기(下根機)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산신은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산속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外護神)으로서도 받들어지고 있다. 산신각은 전(殿)이라 하지 않고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하위에 있는존재임을 나타낸다.개심사 산신각은 대웅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한적하여 혼자서 사색하거나 기도하기에 적합하다. 산신각 앞을 통과하는 산길은 상왕산 정상으로 통하는 길이고 보원사지나 일락사로 산행을 할 수있다.
부도탑
보현선원에 올라가는 중간에 부도탑이 있다. 개심사 머무셨던 선사스님들의 부도탑인데 25년 주지를 엮임한 선광스님 이 만든 자신과 은사스님의 부도탑(가묘)이 자리하고 있다. 2007년 입적한 선광스님이 자신과 자신의 은사스님의 부도탑을 미리 준비해둔 것은 선견지명일런가. 부도탑 주위에는 또다른 3기의 부도탑이 있고 스님이 수행하는 흙집도 있다.
해우소
해우소(解憂所)는 '근심을 풀어주는 곳'이란 뜻인데, 사찰에서 화장실 대신 쓰는 용어이다. 대소변을 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개심사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옛날방식의 해우소와 수세식 화장실이 나란히 세워져있다. 옛날방식의 해우소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생소한데 무섭고 냄새나고 불편해 하지만 어르신들에게는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곳이기도하다. 한다. 용변을 보고나면 톱밥이나 나뭇잎을 덮어서 냄새를 제거하고 거름이 되도록 한다. 그러나 사찰이 아니면 어디서 이러한 엣날 방식의 화장실을 사용하는 기회를 갖겠는가? 재래식 용변을 보고나면 톱밥이나 나뭇잎을 덮어서 냄새를 제거하고 거름이 되도록 한다. 사찰이 아니면 어디서 이러한 엣날 방식의 화장실을 사용하는 기회를 갖겠는가?
개심사 역대주지
운산면지에 소개되고 있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 개심사 주지를 엮임했던 스님들이다. 개심사신도들은 2007년 12월 10일 입적한 선광스님을 가장 많이 추억하고 있으며 선광스님은 지금의 보현선원을 1995년에 복원했다. 현재는 혜산스님이 2020년 초부터 개심사 주지소임을 맡고있다. 운산면지에는 "1955년 견성암에서 김지명비구니스님이 파견되어 개금불사를 하고 승방을 보수하고 가야선원을 개원하여 40여명의 스님이 정진하였다"고 전한다.
보현선원
영구암 터를 복원한 보현 선원은 해마다 십여명의 스님들이 참선을 하고 있다. 서해안이 바라보이는 전망이 좋다.
경허스님의 선시를 하나 소개한다.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세속과 청산 중 어떤 것이 옳으냐?
春城無處不開花(춘성무처불개화) 봄이 되면 꽃이 피지 않는 곳이 없네
傍人若問惺牛事(방인약문성우사) 만일 누군가 내게(경허) 묻는 다면
石女心中劫外歌(석녀심중겁외가) 석녀(石女)가 겁 밖(劫外)의 노래(歌)를 부른다고 하리라.
개심사 소장 보물 14 종류
1 | 보물 | 서산 개심사 대웅전 (瑞山 開心寺 大雄殿) |
1963년지정 | 충남 서산시 | 개심사 |
2 | 보물 | 개심사 영산회 괘불탱 (開心寺 靈山會 掛佛幀) |
1997년 | 충남 서산시 | 개심사 |
3 | 보물 |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瑞山 開心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
2009년 | 충남 서산시 | 개심사 |
4 | 보물 | 서산 개심사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 (瑞山 開心寺 五方五帝位圖 및 四直使者圖) |
2012년 | 충남 서산시 | 개심사 |
5 | 보물 | 서산 개심사 제석·범천도 및 팔금강·사위보살도 (瑞山 開心寺 帝釋·梵天圖 및 八金剛·四位菩薩圖) |
2012년 | 충남 서산시 | 개심사 |
6 | 보물 | 달마대사관심론 목판 (達磨大師觀心論 木板) |
2016년 | 충남 서산시 | 개심사 |
7 | 보물 | 달마대사혈맥론 목판 (達磨大師血脈論 木板) |
2016년 | 충남 서산시 | 개심사 |
8 | 보물 | 묘법연화경 목판 (妙法蓮華經 木板) |
2017년 지정 | 충남 서산시 | 대한불교조계종 개심사 |
9 | 보물 | 계초심학인문 목판 (誡初心學人文 木板) |
2017년 지정 | 충남 서산시 | 대한불교조계종 개심사 |
10 | 보물 | 도가논변모자리혹론 목판 (道家論辨牟子理惑論 木板) |
2017년 지정 | 충남 서산시 | 대한불교조계종 개심사 |
11 | 보물 | 몽산화상육도보설 목판 (蒙山和尙六道普說 木板) |
2017년 지정 | 충남 서산시 | 대한불교조계종 개심사 |
12 | 보물 |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 목판 (豫修十王生七齋儀纂要 木板) |
2017년 지정 | 충남 서산시 | 대한불교조계종 개심사 |
13 | 보물 |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목판 (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 木板) |
2017년 지정 | 충남 서산시 | 대한불교조계종 개심사 |
14 | 보물 | 오대진언 목판 (五大眞言 木板) |
2017년 지정 | 충남 서산시 | 대한불교조계종 개심사 |
개심사를 사랑한 시인들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런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개심사(開心寺)
- 마종기
구름 가까이에 선 골짜기 돌아
스님 한 분 안 보이는 절간 마당,
작은 불상 하나 마음 문 열어놓고
춥거든 내 몸 안에까지 들어오라네.
세상에서 제일 크고 넓은 색깔이
양지와 음지로 나뉘어 절을 보듬고
무거운 지붕 짊어진 허리 휜 기둥들,
비틀리고 찢어진 늙은 나무 기둥들이
몸을 언제나 단단하게 지니라고 하네.
절 주위의 나무뿌리들은 땅을 헤집고 나와
여기저기 산길에 드러누워 큰 숨을 쉬고
어린 대나무들 파랗게 언 맨손으로
널려진 자비 하나라도 배워보라 손짓하네.
개심사(開心寺)
-나태주
풀섶길 쪼보장한 비탈길
이마에 솟는 소금물도
가끔씩 훔쳐내며 찾아갔더니
산은 제 어여쁜 가슴 복판을 수줍게 열어
절 한 채를 불러 앉히고
절집 앞 연못도 하나 만들어놓고
그 앞에 배롱나무 실하게 키워
커다란 꽃등을 밝혀 하늘을
받들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배롱나무 꽃등을 우러르는 순간
갑자기 나는 오줌이 마려웠고
부처님 만나 뵐 요량도 없이
칙간을 찾다가 찾다가
솔바람 소리 먹물로 흘러 넘친
숲 속으로 숨어들어 가 허리띠를
풀어야 했다
그건 또 어디서 날아온 모기였을까?
조그만 살점의 살 냄새를 맡고 한사코
보시(布施)를 애걸하며 달라붙는 미물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오줌 줄기를
이리로 뻗쳤다 저리로 뻗쳤다
그래야만 했으니 부처님
보시기에 그건 또 얼마나
두루 민망한 일이었을까 보냐.
개심사 거울 못
-손정순
단풍으로 겉옷 걸친 백제 코끼리 한 마리 쓸쓸히 웅크린 발치 아래 개심사 경지(鏡池),
여우비 오듯 낙엽들 수수거린다 마음 주렴으로 걸러내면
잎 다 떨군 굴참 몇 그루도 알몸으로, 거울에 제 모습 비추고 섰다
조각 연잎들 하늘 향해 퍼런 손바닥 펼치자 흰 구름 그 위에 내려앉고
푸르게 걸친 정방형의 연못 속으로 우듬지 끝끝까지 아롱대며 감나무 한 그루
하늘의 환한 저 연등들 쳐다본다
나 그 등불 받쳐 들고 절반으로 허리 자른 아주 옛날의 나무다리 건너
상왕산(象王山) 임금 코끼리 등허리에 올라타 하늘 문 두드리고 싶다.
개심사 백일홍
-오영미
가라, 가서 실컷 울어라
개심사 백일홍나무 아래서 통곡을 해라
빨간 꽃 뚝뚝 떨어지는 백일홍 나무 밑
네모난 연못 외나무다리 건너
상왕산 마루에 대고
북북 소리쳐 보라
흘리고 쏟아내 후련해지거든
바람 물결 눕는 직사각 연못을 보라
진흙 속 뿌옇게 물 흐리는 개구리를 보라
연잎에 앉아 허파로 숨 쉬는 청개구리 보라
올챙이가 개구리 되는 변태의 물결
천년 백일홍 꽃피고 지고
떨어져 물 위에 떠 있는 빨간 저 꽃
비바람 천둥 번개 날벼락의 고비 다 넘기더라
붉은 속 활짝 드러내 목 떨구면
연못 위 수련과 더불어 둥둥 친구 되더라
여름의 뜨거운 이별 바람 안고
개심사 앞마당 백일홍 그늘
나무 의자에 앉아 가쁜 숨 햇빛에 뉘라
쓸모없는 희망
-전윤호
개심사로 갔으면 해
배롱나무 연못에서
통나무 다리 건너다
떨어지는 꽃잎을 봤으면 해
기침이 만든 겨울
머리맡이 온통 젖었으니
마음 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 갔으면 해
독경도 없이 꽃잎만 지는 상왕산에서
심검당 한 바퀴 돌고
연못을 지나 서산 바닷속으로
이무기처럼 사라졌으면 해
개심사 애기똥풀
-황인산
개심사 들머리 애기똥풀은 모두 옷을 벗고 산다.
솔밭에서 내려온 멧돼지 일가 헤집는 바람에 설사병이 났다.
개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얼굴 마주보며 괴춤만 내리고 쉬를 하고도 있지만
무리무리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부끄러움도 모른 채 물찌똥을 누고 있다.
사천왕문 추녀 밑에서도 노스님 쉬어 가던 너른 바위 옆에서도
산길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엇이 노란 똥물을 갈기고 있다.
부글부글 끓는 배를 옷 속에 감추고 산물을 두드린다.
이 문만 들어서면 아침까지 찌들었던 마음도 애기똥풀 되어 모두 해소될 것 같다.
산 아래서부터 산불을 놓아 젊은 비구니 얼굴을 붉게 물들인 지가 언제인데
절집 위 옹달샘 풀숲까지 노란 산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
개심사 종각 앞에서
-최영철
무거우면 무겁다고 진즉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제 그만 이 짐 내려달라 하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이만큼 이고 왔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좀 나누어 지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쉬엄쉬엄 한숨도 쉬고 곁눈도 팔고
주절주절 신세타령도 하며 오시지 그러셨어요
등골 휘도록 사지 뒤틀리도록 져다 나른 종소리
지금 한눈팔지 않고 저 먼 천리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틀린 사지로 저리 바쁘게 달려가는 당신 앞에서
어찌 이승의 삶을 무겁다 하겠습니까
고작 반백년 지고 온 이 육신의 짐을
어찌 이제 그만 내려달라 하겠습니까
고요의 입구
-신현락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느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를 뵙다 (0) | 2021.09.17 |
---|---|
너의 능력을 보여줘 (0) | 2021.09.17 |
코로나시대의 불교의 역활 (0) | 2020.10.18 |
어머니와 여행 (0) | 2020.10.04 |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 / 동욱스님(칠곡 보덕사 주지) (0) | 2020.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