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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 / 동욱스님(칠곡 보덕사 주지)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 / 동욱스님(칠곡 보덕사 주지)

 

요즘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노래합니다. 또 언론매체에서 행복을 주제로 삼아 다양한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행복.행복’을 외치고 있으니 ‘행복’이 모습을 나타낼 때도 된 듯 한데, 과연 행복은 언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바라던 것을 다 이루고 나야 비로소 행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한 그 어떤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는 행복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 목표를 위해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니 행복한 자리에 이르기 위해 어떠한 난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미래를 기약하며 허겁지겁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이루고자 하던 목표가 달성되고 나면 정말 행복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목표를 이루었는데도 허탈해 하는 이들도 많고, 더한 어려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는 이들도 많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난 이후라야 행복이 보장된다거나, 어떤 목표를 성취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실로 조건의 충족, 목표의 달성을 통한 행복이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성취감일 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가?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수 있어야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그날 살아가는 속에서 자기의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목표를 이루며 살아가는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차례 곰곰히 생각을 해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언제 행복함을 느끼고 ‘행복하다’는 말을 하는지를? 잠깐 나의 경험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나는 한여름이면 연꽃 사진을 찍으러 다닙니다. 이렇게 사진을 찍은 지가 작년으로 만 30년이 되었습니다. 연꽃을 찍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칠곡에서 예산. 아산. 부여 등지로 가는데, 새벽 5시에 출발하여 보통 6시간 정도 운전을 하고, 5~6시간 정도 촬영을 하다가 돌아옵니다. 돌아오면 물론 피곤합니다. 그런데 내가 좋은 사진을 얻었을 때만 행복하다고 느끼면, 힘이 들어서 사진 작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는 그 자체가 즐겁고, 꽃을 보는 그 자체가 즐겁고, 사진을 찍는 그 자체가 즐거워야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설정해놓고 ‘이런 사진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 강박관념 때문에 행복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내 자신이 그 강박관념 때문에 부담을 느껴 사진을 자연스럽게 찍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하루 정말 좋은 사진을 못 찍어도 좋다. 즐겁게 사진을 찍겠다.’는 자세로 임하면 그냥 행복해 집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자체가 즐거워야지, 열매만 보고 행복하다고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사과나 배처럼 봄에 꽃을 피워 가을까지 기다려야 얻을 수 있는 열매를 며칠 만에 열리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월급날만 생각하고 지낸다면 어떻게 됩니까? 월급봉투를 받는 순간 행복을커녕 오히려 비참해질 수 있습니다. ‘일하는 즐거움’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꼭 무슨 결과가 좋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요즘 말로 스트레스 받아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내가 있는 보덕사에는 관음재일에 관음예참문을 외우며 139배를 합니다. 그때 다른 생각이 붙어 있으면 절을 하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듭니다. ‘ 언제 이 절이 끝날까’를 생각하며 절을 하면 힘이 들어서 하기 어렵습니다. 한 배 한 배 하는 그 과정에 신심을 바치며 즐겁게 해야 절을 잘 끝낼 수 있고 힘도 들지 않습니다. 나와 사진찍기를 같이 시작한 사람 중에는 작가협회에 등단을 하기 위해 남의 사진을 빌려다가 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남들은 그가 어느 수준까지 올라갔다고 여기고, 여기서도 ‘사진 한 장 실어주세요’, 저기서도 ‘사진 한 장 실어주세요’하며 부탁을 해오게 되는데, 막상 줄 만한 자기 사진은 없습니다. 이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 자랑하기 위한 행복은 오히려 불행일 뿐입니다. 법사스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말 자기가 어느 경지에까지 올라가 있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여기 와서 법문해 주십시오.’ ‘저기와서 법문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결코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묵묵히 지내는 편이 행복합니다. 예전에 내가 처음 출가를 했을 당시에는 젊고 패기가 넘쳤습니다. ‘나도 무엇이든 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자만심 속에 빠져 살 때여서인지, 뒷방에서 가만히 사는 노스님들이 내 눈에는 불쌍하고 처량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그 스님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생각이 바뀌었는가? 행복은 제3자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남들이 보는 어느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노스님들은 누가 찾아와 ‘법문을 청합니다.’, ‘참으로 거룩하십니다.’라는 말 한마디 해주는 이가 없을지라도, 아침이면 마당쓸고 밥시간 되면 공양 드시며 묵묵히 하루하루 당신의 할 일을 다 하고 계신 분들이었습다. 정녕 그분들은 행복하셨을까요? 알고 싶다면 오직 그분들한테 행복한지 아닌지 물어봐야 합니다.

 

어떤 분이 스님들에 대해 쓴 글을 읽은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름은 알려지지 않아도 이 한밤중에 번뇌없이 포근히 잠을 자는 분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고 세상에서 떠받들고 있어도 번뇌에 뒤척이며 잠을 못 자는 분이 있을 것이다. 과연 어느 분이 더 위대한 사람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경제적으로 어느 수준에 도달하여야 행복한 삶이 시작된다고 보는 경향이 짙습니다. 곧 어느정도 돈이 있고 잘 사는 선진국들의 경우를 기준으로 삼아 행복의 척도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서 참으로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선진국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분명 아니지 않습니까? 소득 수준이 낮은 나라의 사람들이 돈 많은 나라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내 돈은 요것뿐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생각하면 진정한 행복은 결코 찾아들지 않습니다. 행복이란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리 많든 적든 그것은 행복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 스스로가 얼마만큼 만족하며 사느냐? 만족하지 못하며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지 않으면 진정한 행복은 있을수가 없습니다. 월급날에 즐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울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달 일하고 똑같이 받는 돈인데, 어떤 사람은 ‘한달 동안 뼈 빠지게 일하고 기껏 이걸 받는단 말인가? 내가 애쓴 한달의 삶이 이 봉투 안에 쏙 들어가 버린단 말인가?’하며 우울하게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참으로 고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받은 월급으로 내 삶을 윤택하게 할 수도 있으니...’하며 감사하게 여깁니다. 억대를 받는 사람도 있는데, 단 백만원을 받으면서도 즐거워 하는 사람이 잇습니다. 왜 이 사람은 박탈감을 느끼지 않고 행복해하는 것일까요? 바로 절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자기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스님들도 어떤 큰 스님을 비교대상으로 두고, 그 수준까지 못 갔다고 생각하면 항상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상대방의 수준과비교하여 우울해 집니까? 선방에서 정진하는 수행자는 그날 하루 화두가 잘 들리면 깨닫지 않아도 싱글벙글할 수 있습니다. 또 화두만 잘 들면 비교하고 경쟁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음을 이루어 큰 스님이 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돈. 출세. 명예. 권력등의 사회적인 목표점을 설정해두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별짓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을 쪼아부치고 희생하다 보면 언제 행복한 날이 오게 됩니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친구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국수 한 그릇도 못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것을 달성할 때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깁니까? 나는 결코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일생에 있어 행복한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까지 나는 행복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기 평가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대와 비교하거나 어느 목표만을 염두에 둔다면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절대적인 자기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소욕지족의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욕심 많이 부리지 않고 만족하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꼭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소욕지족은 무소유와 다릅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에게는 거주공안인 기원정사도 있었고, 입을 옷인 가사도 있었고, 공양을 담을 바루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무소유를 부르짓은 사람들은 불교도가 아니라 자이나교도입니다. 그들은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 옷을 모두 벗고 나체로 생활합니다. 큰 욕심없이 그날 그날 열심히 살고 즐겁게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일생을 행복하게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봐서 인정해줄 만한 목표를 하나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치고 행복해하는 이는 참으로 드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만 행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옆의 사람들까지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끔 방해합니다. 자기 욕심만 차리려니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도 서로가 양보하고 남을 배려할 때 회사 전체가 행복해집니다. 자기의 욕심을 다 챙기면 남을 배려할 수 없습니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나의 욕심을 줄였을 때 가능합니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무언가를 해주었을 때 나는 즐거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 소욕지족이 기본이 되면 차츰 행복을 담을수 있는 그릇이 갖추어 집니다. 나의 행자 시절에 은사이신 도원 스님께서는 귀감이될 만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는데, 통도사 뒷방 노장님들에 대한 이야기도 그때 해주셨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통도사에서는 한 사람에게 등잔 하나만 켤 수 있는 기름을 공급했습니다. 그런데 밤에 경전 등의 책을 보고자 하면 등잔 하나만으로는 어두워서 책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아래 위로 등잔 두 개를 켜야 했고, 하는 수 없이 다른 하나의 등잔에 드는 기름은 개인의 돈으로 구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상하 두개의 등잔접시에 기름을 붓다 보면 기름이 밑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떨어지는 몇 방울의 기름 때문에 밑의 접시에는 반드시 절에서 사준 기름을 넣고, 위의 접시에는 자기 돈으로 마련한 기름을 부어 썼습니다. 왜냐하면 윗 등잔에 기름을 붓다가 아랫 등잔으로 떨어지는 것은 내것이 공공의 것에 도움이 되어 괜찮지만, 등잔의 위치가 반대가 되어 공공의 것이 내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공의 돈으로 마련한 재물이 사적인 것으로 돌려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옛 어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공공의 것을 자기 것처럼 쓰면 이미 수행자의 본분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작은 기름 한 방울이라고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것이며, 이러한 마음이 행복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이나 개인 회사의 직원들 중에는 종종 공공의 것을 자기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별 것 아닌 듯한 작은 일로부터 시작된 착각이 점점 눈덩이처럼 커져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무엇때문에 공공의 돈이나 물건에 손을 댑니까? 욕심 때문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흔히들 생각하기에는, ‘소욕지족의 마음을 가지면 오히려 퇴보하여 목표 달성을 하기 어렵지 않을까?’의심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살면 행복한 마음자리에 안착하게 되고, 허욕을 부리며 살면 나날이 불안해지고 점점 더 불안해 집니다. 잠시 여행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나는 미얀마를 아홉번 갔다 왔습니다. 미얀마가 불교국가이고 국민들의 신앙심이 높다는 점도 자꾸 가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지만, 무엇보다도 거기 사는 사람들이 좋아서 자꾸 가게 됩니다. 미얀마의 아이들은 관광객을 따라 다니며 물건을 팝니다. 그런데 인도와 다른 점은, 아이들이 물건을 팔아달라는 것이지, 그냥 공짜로 돈을 달라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돈 한 푼을 주면 그 아이도 나에게 꼭 뭔가를 하나 줍니다. 미얀마에는 부처님의 사상이 일상생활 속에 깔려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라도 공짜로 꿀꺽 삼키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늘 웃으며 우리를 따라다니고, 손을 대면 안 되는 곳이 있으면 얼른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도 훨씬 눈이 맑고, 억지웃음이 아니라 따듯한 웃음이 있는 사람들 입니다. 그 사람들은 상대와 나를 비교해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게을리 살아서 우리보다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아주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막노동을 하거나 장사르 하고도, 저녁 시간이 되면 그날 번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금을 사서 부처님 몸에 붙이고 부처님전에 꿇어앉아 기도합니다. 우리들처럼 ‘이 돈 가지면 콩나물이 얼마만큼이다’라고 생각한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배부른 것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버리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신도님들께 물었습니다. “이 중에 저 사람들보다 내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행복은 제3자가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그날그날을 즐겁게 살아야 행복 합니다. 즐거운 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하루 하루 작은 것에 감사하고 즐거워할 줄 아는 삶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어느 자리까지 올라 가야하고, 얼마만큼 돈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때가서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에게 잘해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때 가서 큰 것 해주겠다는 생각만 합니까? 지금 사랑하는 이에게 예쁜 손수건이라도 하나 사주는 것이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중요무형문화재 불화장이신 석정노스님을 모시고 1년에 꼭 한차례씩 연밭을 보러 갑니다. 내가 “스님, 지금쯤 연꽃이 한창입니다.”하고 연락드리면, 스님께서는 날짜 정하여 제자들과 함께 옵니다. 그때 나는 하루 종일 연밭에 있지만 촬영은 하지 않습니다. 그날은 아예 카메라를 잊어버리고, 석정스님께서 연꽃 구경을 하시듯이 나도 꽃구경만 합니다. 그날 만약 ‘좋은 사진 찍어야 하는데’하는 생각에 얽매이게 되면 스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시간이 아까워서 미치고, 좋은 것이 있으면 찍고 싶어서 미치게 됩니다. 그럼 그 어른과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른도 짜증스럽고, 나는 못 찍어서 짜증스럽고... 두 사람이 다 즐겁지 않고 일행이 모두 힘들어 집니다. 하지만 내가 사진에 대한 생각을 몽땅 놓아버리고, ‘다음에 나 혼자 한번 더 와서 찍자’고 하면서 석정스님을 잘 모시는데 열중하게 되면, 노스님으로부터 좋은 말씀도 만히 듣는 등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는지 모릅니다. 또 나 혼자 사진을 찍으러 갈 때도, 아무것도 못 찍는 날은 꽃구경한 걸로 만족하고, 좋은 사진을 찍은 날은 그것대로 좋은 날로 삼고 있습니다. ‘요번에는 국전에 내야 되겠다’는 등의 어떤 목표를 정해놓지 않고 과정을 즐기면서 살다 보니, 원래의 평화로운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고, 매일 매일이 행복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짜증스럽고 힘이 듭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공부도 안되고 일도 안되면 그저 짜증이 나고 불행한 생각만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때 일이 되고, 공부도 즐겁 할때 공부가 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다면, 행복은 저절로 따라 옵니다. 나중에 목표를 달성하고 난 뒤에 얻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행복도 저절로 따라옵니다. 부디 기억하십시오. 행복이란 목표달성 후의 어느시점에 가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 순간 하루하루 작은 것에 만족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지낼때라야 행복할 수 있고, 그 마음이 유지되어야만 행복도 그대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잘못 이해하지는 마십시오. 이 시점을 불행하게 보내면 나중에는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지. 목표 달성 후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디 소욕지족의 마음으로, 목표달성의 그 과정 하나하나를 즐거운 마음으로 행하여, 날마다 행복한 날들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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