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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아라한과 벽지불은 두려움을 갖습니다 -승만경-

승만경()

 

불교의 대승경전 가운데 여래장(如來藏) 사상을 천명하는 대표적인 경전으로《유마경》과 함께 대승불교의 재가득도(在家得道)의 신앙을 표방하는 경전으로서도 중요하다.

산스크리트의 경명은 Srimaladevi-simhanada-sutra(승만부인이 사자후한 경전)이며,  역본(漢譯本)은 3가지가 있다. 초역은 일찍이 산실되어 남아 있지 않고, 제2역과 제3역이 아 있는데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역은 제2역인 유송(劉宋)의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번역한 《승만사자후 일승대방편방광경(便)》이다.

경의 구성은 사위국(舍衛國)의 파사익(波斯匿) 왕의 딸로서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우칭(友
稱)왕과 결혼한 승만부인이 부처 앞에서 설주(說主)가 되어 설법을 펴고, 부처 승만의 설법
내용이 옳다고 인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승만부인은 몸으로써 체험하려는 10가지 서원
을 세우고(十大受), 이 10대수를 요약해서 3대원으로 강조하며, 이 3대원은 다시 섭수정법
(攝受正法)이라는 일대원(一大願)에 수납된다고 강조한다.

정법을 수지한다는 것은 대승(大乘), 즉 일승(一乘)을 수지하는 것으로서 일체 중생이 부처
의 경계에 도달하게 하기 위하여 설한 법은 일승이며, 불설(佛說)에는 이승(二乘)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중생이 번뇌에 싸여 있지만 본성으로는 여래(如來)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성품
(佛性:如來藏)을 갖추고 있다고 하며, 그 여래장에 대해 여래장설이 포함하고 있는 문제를
거의 모두 종합하여 설명하고 있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하는 일승사상을 계승하고 또한 여래장 사상을 천명함으로써 여
래장 사상을 대승의 정계(正系)로서 자리잡게 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경전이다. 한편 승만
이라는 재가여성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여 부처의 설법의 지위와 같은 위치에 올려놓음으
로써 대승불교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증명하는 경전이기도 하다.


승만경은 재가의 여성 불자인 승만 부인이 설법하고 수기를 받는다는 내용으로 <승만사자
후일승대방편방광경>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경전으로서 후대에 큰 영
향을 미친 경전입니다.

함께 읽으면서 재가 불자도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를 위한 수행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승만경(勝?經) 』

B.C 3~4세기경 대승사상가들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추정되는 대표적인 대승경전인 <승만경
>의 본래 제목은 《승만사자후 일승대방편방광경(便)》입니다.

<승만경> 은 사위국의 왕 파세나디와 말리카부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몹시 기뻐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딸인 아유사국의 왕비 승만에게 불법에의 귀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
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친정부모의 간절한 권유로 부처님께 귀의한 승만부인은, 부처
님께 장차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게 됩니다. <승만경>은 모두 15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승만부인이 자신의 깨달음을 부처님께 여쭙고, 그에 대해
부처님께서 인가를 하시는 장면과 승만 부인이 스스로 다짐하고 맹세라는 열 가지의 서원입
니다. 승만부인이 이 서원을 통해 '몸과 생명과 재산을 던져 바른 진리를 거두어 들여야 한
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부처님과 승만부인의 마지막 대화는 '올바른 진리를 수호하고, 나
쁜 법에 빠진 사람들을 항복받아야 한다'는 적극적인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진리를 수호하
고, 올바른 가르침을 널리 펴는 일, 나아가 삿된 견해를 쳐부수는 일이야말로 대승의 드넓은
길을 나아가고자 하는 보살의 정신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 승만부인은 열 가지 서원을 통해, 재가수행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지켜야 할
믿음의 지표를 보여 줍니다. 특히 '부처님께 의지하여 출가하고, 대승의 위의(威儀)인 계율
을 지키는 것이 바로 출가' 라는 말씀은, 출가의 의미가 결코 형식적인 데 있지 않다는 점
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진정한 출가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세속적인 욕망과 번뇌를 여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가르침이 <승만경>에선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재가(在家) 중심의 수행이 의미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승만경>은 다른 경과는 달
리 여성의 서원과 깨달음을 통해 진리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도 더욱 주목의 가치
가 있는 경전입니다.

 

 

승만경


제1. 여래의 진실한 공덕 [如來眞實義功德章]


부모님의 편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머무르고 계셨다. 그때
파사익(波斯匿,Prasenajit)왕과 말리(末利)부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
으나, 서로 함께 말하였다.
"승만은 우리 딸이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근본이 뛰어나서 금방 쉽게 깨달을 것입니다.
부처님을 뵈옵기만 한다면, 반드시 가르침을 잘 이해하여 마음에 의심이 없는 경지를 얻을
것입니다. 마땅한 때에 편지를 보내서 그녀의 보리심[道意]을 발하게 합시다."
부인이 사뢰어 말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왕과 부인은 승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래의 한량없는 공덕을 간단히 찬탄하였다. 그리고
는 곧 궁녀를 보냈는데 그 이름이 전제라(Chandra)였다. 그 사자(使者)는 편지를 받잡고 아
유사국에 이르러서 그 궁전 안에 들어가 삼가 승만에게 드렸다.

승만 부인의 귀의

승만 부인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정수리까지 올리며 읽고 외우며 받아 지녀서 희유한 마
음을 내고서, 전제라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였다.

내가 듣건대, '부처님의 음성은
세상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하니
그 말씀이 참으로 진실하다면
마땅히 공양을 닦아야 하리.

우러러 생각건대, 부처님 세존께서
널리 세상 위해 출현하셨다면
또 마땅히 불쌍히 여기셔서
나로 하여금 뵈올 수 있게 하시리.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부처님께서 공중에서 널리 청정한 광명을 비추시면서 비할 데 없는
몸을 나타내 보이셨다. 승만 부인 및 그녀의 권속(眷屬)들이 그들의 얼굴과 머리를 부처님
발에 대면서 예배하고, 모두가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였다.

승만 부인의 찬탄

여래의 묘한 모습은
세상에서 더불어 같이할 이 없으며
비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으니
이제 공경하며 예배합니다.

여래의 모습이 다함없고
지혜 역시 또 그와 같으며
모든 진리는 영원하므로
저희가 귀의합니다.

마음의 허물과
몸으로 짓는 네 가지 악을 항복 받았으며
그들이 항복시킬 수 없는 지위에 도달하신
진리의 왕[法王]에게 예배하나이다.

모든 알아야 할 것은 다 아시고
지혜의 몸이 자재하여
모든 진리를 받아 지니셨으므로
이제 예경하나이다.

헤아림을 넘어서 계신 님께 예경하옵고
비유할 데가 없으신 님께 예경하오며
가이없는 진리에 예경하옵고
생각하기 어려운 님께 예경하나이다.


불쌍히 여기셔서 저희를 가호 하시고
진리의 종자[法種]가 자라게 하소서
이 세상부터 다음 세상까지
부처님께서 언제나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그대를 편안케 한 지 이미 오래이니
전생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제 다시 그대를 또 거두어 주노니
미래의 생에서도 역시 그러하리라.

다시 승만 부인이 사뢰었다.

제가 이미 공덕을 지었으며
현재 및 다른 세상에서도
이러한 모든 선의 근본을 심겠사오니
오직 저를 거두어 주시는 모습을 뵙고자 하나이다.

부처님의 예언

그대 승만 부인 및 그녀의 모든 권속들이 얼굴과 머리를 부처님 발에 대면서 예불하자, 부
처님은 대중들 가운데서 곧 예언[受記]하셨다.
"그대는 여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였다. 이러한 선근으로 말미암아서 마땅히 한량없는
아승지겁을 지낸 뒤 신들이나 사람 중에서 자재한 왕이 될 것이다. 모든 태어나는 곳마다
언제나 나를 보고 직접[現前] 찬탄하는 것이 지금과 같아서 다름이 없을 것이다. 마땅히 다
시 한량없는 아승지의 부처님을 공양하기를 2만 아승지겁을 지나서 부처가 될 것이니, 이름
을 보광(普光) 여래, 응공, 정변지라고 할 것이다. 그 부처님 국토에는 모든 나쁜 갈래[惡趣]
와 늙음, 병, 쇠퇴, 뜻에 맞지 않는 괴로움이 없으며, 또한 선하지 못한 악업의 이름도 없을
것이다. 그 나라의 중생들은 모습, 힘, 수명, 다섯 가지 욕망, 모든 소유물들에 있어서 쾌락
하기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다. 그 나라의 모든 중생은 한결같이
대승에 머무를 것이며, 선근을 닦는 모든 중생들이 그 나라에 모일 것이다."
승만 부인이 수기를 얻을 때, 그 곳에 있던 한량없는 중생과 모든 신과 사람들이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였으므로 세존께서 모두에게 예언하셨다.
"전부 마땅히 왕생할 것이다."


제2. 열 가지 큰 서원[十大受章]


승만 부인의 열 가지 큰 서원

그 때 승만 부인이 수기를 들은 뒤에, 합장하여 열 가지 큰 서원[大受]를 세웠다.
"첫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받아 지닌 계율에 대하여 범하고
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둘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모든 어른들에 대하여 오만한 마음
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셋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모든 중생에 대하여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넷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다른 사람의 신체 및 소유물에 대
하여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다섯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지
않으며 전부 가난한 중생들을 성숙시키는 데 쓰겠습니다.
일곱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위해서 사섭법(四攝法)을
행하지 않겠사오니, 모든 중생을 위해서입니다. 애착하지 않는 마음, 싫어하거나 만족하지
않는 마음, 걸림 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거두어들이겠습니다.
여덟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부모가 안 계신 아이, 자식이 없
는 노인, 죄를 짓고 갇힌 사람, 병든 사람 등 갖가지 고난으로 괴로움에 처한 중생을 보면
마침내 잠시도 외면하지 않으며 반드시 안온케 하겠습니다. 재물로써 이익케하여 모든 고통
을 벗어나게 한 뒤에야 외면하겠습니다.
아홉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동물을 잡아 기르는 등의 갖가지
올바르지 못한 생활 방편[惡律儀] 및 계를 깨뜨리는 것을 보게 되면 절대로 외면하지 않겠
습니다. 제가 힘을 얻게 될 때는 어느 곳에서든지 마땅히 잘못을 항복 받아야[折伏] 할 사람
에게는 항복 받으며 마땅히 용서해 줄 사람은 용서하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때로는 항복
하고 벌함으로써 때로는 용서함으로써 가르침을 오래도록 머물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오래도록 머물게 되면, 신들과 다시 사람들의 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늘어나고
나쁜 갈래[惡趣]에 가는 사람은 감소하게 될 것입니다. 능히 여래께서 굴리시는 바 법륜(法
輪)에 따라서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익을 보기 때문에 구하여 거두어들임을 잠시도
멈추지 않겠습니다.
열째,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마침
내 잊지 않겠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가르침을 잊는다는 것은 곧 대승을 잊는 것이 되며,
대승을 잊는다는 것은 곧 바라밀을 잊는 것이 되며, 바라밀을 잊는 것은 대승을 욕구 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살이 대승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곧 능히 올바른 가르침
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며,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서 들어가고자 하나 영원히 범부의 경지
를 뛰어넘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이 한량없는 큰 잘못을 보며, 또한 미래에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일 보살마하살들의 한량없는 복덕을 보기 때문에 이러한 큰 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증명

"진리의 주인[法王]이신 세존이시여, 저를 위해서 증명하옵소서. 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지금
여기서 증명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중생들은 선근이 약하고 엷어서 어떤 중생은 '열 가지
큰 서원을 실천하기는 지극히 어렵다'라는 의심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중생들은
오랫동안 올바른 뜻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고 안락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중생들을 안락케 하기 위하여 이제 부처님 앞에서 진실한 서원을 말
씀드린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열 가지 큰 서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열 가지
큰 서원을 지닐 수 있으며, 말씀드린 것처럼 행할 수 있다면, 이러한 서원으로 말미암아서
대중들 가운데 마땅히 하늘꽃[天花]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하늘의 미묘한 소리가 나게 하
소서."
승만 부인이 이렇게 말했을 때, 허공 중에서 수많은 하늘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으며 미
묘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그렇다! 그대가 설한 바 그대로이니 진실하여 틀림이 없다."
하늘 꽃을 보고 미묘한 음성을 듣고 나서는, 모든 대중들의 의혹이 모두 제거되었으며, 기뻐
함이 한량없어서 원을 발하여 말하였다.
"언제나 승만 부인과 함께 하며, 언제나 함께 법회에 동참하며, 그분이 행하시는 바를 같이
하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모든 대중에게 예언하셨다.
"그대들이 원하는 바와 같이 되리라."


제3. 세 가지 큰 원[三大願章]

그때 승만 부인이 다시 부처님 앞에서 세 가지 큰 원을 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진실한 원으로써 한량없으며 가이없는 중생을 안온케 하며, 이러한 선근으로 모든
생(生)에 올바른 가르침의 지혜를 얻겠습니다. 이를 첫 번째 큰 원이라 이름합니다.
제가 올바른 가르침의 지혜를 얻은 뒤에는 싫어하지 않는 마음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하겠습
니다. 이를 두 번째 큰 원이라 이름합니다.
제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뒤에는 몸, 목숨, 재물을 버리고 올바른 가르침을 보호해 지
니겠습니다. 이를 세 번째 큰 원이라 이름합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곧 증명하셨다.
"승만 부인의 세 가지 큰 서원은, 마치 모든 형체 있는 것이 허공 속에 다 포함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보살들이 세운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모든 원 역시 전부 이 세 가
지 큰 원 속에 포함된다. 이 세 가지 큰 원은 진실하며 광대한 것이다."



제4.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攝受正法章]


하나의 큰 원

그때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저는 이제 다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을 이어받아 조복(調伏)하는 큰 원이 진실하여 틀
림이 없음을 설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승만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설하는 바를 듣겠노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보살이 세운 바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원은 모두 이 하나의 큰 원 속에 포함되는
것이니, 이른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
이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큰 원입니다."
부처님께서 승만 부인을 찬탄하셨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지혜와 방편이 매우 깊고 미묘하니, 그대는 이미 오랫동안 모든 선의
근본을 심었기 때문이다. 내세의 중생 중에도 오래 선근을 심는 자는 능히 그대가 설한 바
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설하는 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미 설하였으니 장차 설할 것이며 이제 설하고 있는 바이며, 나
역시 이제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서 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을 항상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을 설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은 가
이없으니, 왜냐하면 이렇게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큰 공덕이 있으며 큰 이익
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광대한 뜻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서 다시금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광대
한 뜻을 연설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설하도록 하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광대한 뜻은 곧 한량이 없으니, 모든 불법을 얻는 것이
며 팔만 사천 법문(八萬四千法門)을 거두어들이는 일입니다. 비유하면 겁(劫)이 처음 이루어
질 때 널리 큰 구름이 일어나고 온갖 색깔의 비와 갖가지 보배가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 역시 한량없는 복의 과보와 한량없는 선근의 비를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큰 수원(水源)의 비유

"세존이시여, 또한 겁이 처음으로 이루어질 때 큰 수원(水源, 大水聚)이 있어서 삼천대천세
계의 모든 보배[三千大千世界藏]와 사백억이나 되는 갖가지 세계를 낳은 것과 같습니다. 이
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 역시 대승의 한량없는 세계[無量世藏], 모든 보살
의 신통한 힘, 모든 세간의 안온한 쾌락, 모든 세간의 자유자재 및 출세간의 안락을 낳게 하
는 것입니다. 겁(劫)이 이루어진 일 등은 신이나 인간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니, 모
두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또 대지(大地)가 네 가지 무거운 짐, 즉 대해(大海), 모든 산, 초목, 중생을 짊어지고 있는 것
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善男子)와 선여인(善女人)도 대지
를 건립하여 네 가지 무거운 책임을 능히 짊어지려고 합니다. 저 대지는 비유입니다. 어떤
것이 넷인가 하면, 선지식을 떠난 중생, 가르침을 듣지 않는 중생, 법의 그릇이 아닌 중생들
은 인천(人天)의 선근(人天乘)으로서 성숙시키고, 성문을 구하는 자는 성문의 가르침[聲覺乘]
을 주고, 연각을 구하는 자는 연각의 가르침[緣覺乘]을 주고, 대승을 구하는 자는 대승의 가
르침[大乘]을 줍니다. 이를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은 대지를 건립하여 네 가지 무거운 책
임을 능히 짊어짐으로써, 널리 중생을 위하여 청하지 않은 벗[不請之友]이 되고 중생을 편안
하게 위로하며 불쌍히 여겨서 세상에서 진리의 어머니[法母]가 됩니다.
또한 대지가 네 가지 보배[寶藏], 즉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 값비싼 보배, 중간 정도 값
의 보배, 값싼 보배를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
자와 선여인은 대지를 건립하여 중생의 최상의 큰 보배 네 가지를 얻습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보배냐 하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은 가르침을 듣지 않는 중생,
법의 그릇이 아닌 중생들에게 인천(人天)의 공덕과 선근을 주고, 성문을 구하는 자에게는 성
문의 가르침을 주고, 연각을 구하는 자에게는 연각의 가르침을 주고, 대승을 구하는 자에게
는 대승의 가르침을 줍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으로 말미
암아 큰 보배를 얻은 중생은 기특(奇特)하고도 희유한 공덕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
여, 큰 보배라는 것은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바라밀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올바른 가르침 그 자
체와 다르지 않으며, 올바른 가르침 그 자체도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
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이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
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바라밀과 다르지 않으며, 바라밀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
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바라밀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은 마땅히 보시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보시로써 성숙케 하는 것이니, 몸의 일부를 버려서라도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케 합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보시[檀]
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계율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六根]을 수호하며 몸, 말, 뜻으로 짓는 업을 깨끗이 하는 것이니, 네 가지 위의(威儀)를
올바르게 하여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케 합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지계[尸] 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인욕으로서 성숙시
킬 중생은, 만약 저 중생들이 비난, 욕설, 비방, 공포를 퍼붓는다 하더라도 화내지 않는 마
음, 이익케 하려는 마음, 가장 뛰어난 인욕으로써 대하는 것이니,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그
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케 합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인욕 바라밀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정진으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그
중생들에게 게을러지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큰 욕심을 내며 가장 훌륭하게 정진하는 것이
니, 네 가지 위의 가운데서도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며 성숙시킵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
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정진[毘梨耶] 바라밀이라 이름합니다. 마땅히 선정으로서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그 중생들에게 어지럽지 않은 마음, 밖으로 향하지 않는 마음,
가장 훌륭한 정념(正念)으로써 하여 오래 전에 행한 바와 오래 전에 설한 바를 마침내 잊지
않으며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면서 성숙시킵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선정 바라밀이라 이름합니다. 마땅히 지혜로써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서는, 그
러한 모든 중생들이 일체의 뜻을 물어 온다면,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논서, 모든 학
문[工巧], 구경의 지혜, 갖가지 교묘한 일로써 연설하면서 그들의 보리심을 보호하여 성숙시
킵니다. 그렇게 성숙된 중생이 올바른 가르침에 안주하는 것을 반야 바라밀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라밀과 다르지 않으며 바라밀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바라밀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 사람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서 다시 크나큰 뜻을 말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설해 보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사뢰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올바른 일을 받아들이는 일과 다르지 않으며,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올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이 곧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약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선남자와 선여인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내버려야 하
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몸, 목숨, 재물이 그것입니다.
선남자와 선여인이 몸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막과 같아질 것이며, 늙음, 병,
죽음을 떠나며, 부서지지 않으며, 항상 머무르며, 변화가 없으며,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공덕
을 갖춘 여래의 법신(法身)을 얻을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
막과 같아질 것이며, 마침내는 죽음을 떠나서 가이없고, 항상 머무르며, 가히 생각할 수 없
는 공덕을 얻어서 모든 깊고 깊은 부처님 법을 통달하게 될 것입니다. 재물을 버릴 수 있다
면 생사, 윤회의 맨 마지막과 같아질 것이며, 모든 중생과 함께 하지 않으며, 다함없으며, 줄
어들지 않으며, 마침내 항상 머무르며, 가히 생각할 수 없이 구족(具足)한 공덕을 얻으며, 모
든 중생의 뛰어난 공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세 가지를 버리는 선남자와 선여인은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언제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예언을 받게 되며, 모든 중생으로부터 우러름을 받게 될 것입
니다.
세존이시여, 또 선남자와 선여인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
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붕당(朋黨)을 지어서 서로 다투어 송사 하여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고 이산하여 가르침이 장차 멸하고자 할 때 굽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거짓되지 않음
으로써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진리의 길벗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벗 가
운데 든 자는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예언을 받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올바른 가르침
을 받아들이는 일에 이와 같은 큰 힘이 있음을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한 눈, 진실한 지
혜이시며, 가르침의 근본이시며, 진리에 통달하시며, 올바른 가르침의 의지처이시며, 역시 모
두 다 보고 아시는 분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

그때 세존께서는 승만 부인이 설한 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큰 정진력(精進力)
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마음[隨喜心]을 일으키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승만이여! 그대가 설하는 바와 같다.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의 큰 정진력
은 큰 힘을 가진 역사(力士)가 조금이라도 몸에 닿으면 큰 고통을 낳는 것과 같다. 그렇다.
승만이여! 조금만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도 악마를 크게 괴롭히는 것이니, 다른 어떤 선
법(善法)도 악마를 그렇게 크게 괴롭히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또한, 소 중의 왕[牛王]은 모습이 비할 바 없어서 모든 소보다 더 뛰어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대승을 믿는 자는 조금이라도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모든 이승(二乘)의 선근보
다도 더 뛰어난 것이니, 이는 광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수미산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모든 산보다 뛰어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대승을
믿는 자로서 몸, 목숨, 재물을 버리는 자는,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
임으로써 몸, 목숨, 재물을 버리지 않고서 처음으로 대승의 모든 선근에 머무는 자보다 더
뛰어나다. 그런데 하물며 이승이겠는가. 이 또한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만이여, 마땅히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중생을 열어 주고 보여 주며,
중생을 교화하며, 중생을 건립(建立)할지니라.
승만이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이와 같은 큰 이익이 있으며 이와 같은 큰복이
있으며 이와 같은 큰 과보가 있는 것이다. 승만이여, 나는 아승지아승지겁에 올바른 가르침
을 받아들이는 일의 공덕과 이익을 설한다고 하여도 가이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가
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한량없으며 가이없는 공덕이 있는 것이다."



제5. 하나의 길[一乘章]


대승, 모든 법의 근원

부처님께서 승만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이제 다시 모든 부처님께서 설한 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설하
여라."
승만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부처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곧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였다.
"세존이시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곧 대승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대승이라는
것은 모든 성문, 연각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善法)을 낳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대
지에서 여덟 개의 큰 강의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대승은 모든 성문, 연각과 세
간, 출세간의 선법을 낳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모든 씨앗이 대지(大地)에 의거하여 자라는 것과 같이 모든 성문, 연각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도 대승에 의지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대승에 머
무르며 대승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이승(二乘)에 머물러서 이승의 세간, 출세간의 선법을 받
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여섯 가지 요점

"마치 세존께서 설하시는 여섯 가지 요점[六處]과 같습니다. 여섯 가지 요점이란, 올바른 가
르침의 유지[正法住],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正法滅], 계본[波羅提木叉], 교단의 규범[毘尼],
출가하는 것, 구족계를 받는 것입니다. 대승을 위하기 때문에 이러한 여섯 가지 요점을 설하
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올바른 가르침의 유지는 대승을 위하기 때문이니, 대승의 유지
가 곧 올바른 가르침의 유지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은 대승을 위하기
때문이니, 대승의 소멸이 곧 올바른 가르침의 소멸이라고 설하는 것입니다. 계본과 교단의
규범, 이 두 가지는 뜻은 하나인데 이름만 다른 것입니다. 교단의 규범은 곧 대승의 배움입
니다. 그것은 부처님에 의지하여 출가하여서 구족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승의 계
[大乘威儀戒]가 교단의 규범이며,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는 것이라 설하는 것입니다. 즉 아라
한의 길에는 출가도 구족계를 받음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라한 스스로도 여래
에게 의지하여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의 귀의

"아라한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아라한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어진 것
[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칼을 갖고 자기를 해치러 오는 어
떤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완전한 즐거움이 없습니다. 세존이시
여, 의지처는 다시 의지할 대상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의지처가 없는 중생은 그러
한 두려움이 있으며, 그러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곧 귀의처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라
한의 경우에도 두려움이 있으며,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여래에게 의지합니다."

여래만이 얻는 열반의 세계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두려움을 갖습니다.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에게는 업의 잔재
가 남아 있습니다[有餘], 윤회, 재생으로 이어지는 성질[生法]이 다하지 않았으므로 태어남이
있으며 업의 잔재가 있습니다. 청정한 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순수하지 않으며, 일이
완전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지어야 할 바가 있습니다. 피안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끊
어야 할 바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직 여래, 응공, 정등각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모든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모든 공덕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
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합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한량이 있는 공덕을 성취할 뿐입니다. '열
반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각할 수 있는 공덕만
을 성취할 뿐입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으며, 마땅히 끊어야 할 모든 허물을 모두 끊으며 가장 훌륭한 청정을 성
취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허물을 남겨 가장 훌륭한 청정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방편일 뿐이니, 오직 여래만이 완전한 열반을 얻어서
모든 중생이 존중하는 바 되며 아라한, 벽지불, 보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라한과 벽지불은 열반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이 해탈의 네 가
지 지혜를 관찰하며 마침내 번뇌가 쉬는 경지[蘇息處]를 얻는다'는 것 역시 여래의 방편이
니, 업의 잔재를 남기는 것이고 궁극적인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한 가르침[不了議設]일 뿐입니
다."


두 가지 죽음

"왜냐하면, 두 가지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죽음이란 이른바 육체적 죽음[分段死]
과 부사의한 변화로서의 죽음[不思議變易死]입니다. 육체적 죽음은 거짓된 중생의 죽음을 말
하는 것이며, 부사의한 변화로서의 죽음은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의 의생신(意生身)
이며 궁극적으로 위없는 깨달음입니다.
두 가지 죽음 가운데 육체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 - '나의 생은 이미
다했다'[我生已盡] -를 설하게 됩니다. 업의 잔재가 남게 되는 과보를 얻기 때문에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했다'[梵行已立]고 설하게 됩니다. 범부와 인천(人天)의 과보를 얻을 중생은
능히 판단하지 못하고, 아라한이 되기 전 일곱 단계의 성자들은 그 이전에는 끊지 못하였던
허망한 번뇌를 끊었으므로 '지어야 할 바는 모두 마쳤다'[所作已辨]고 설하게 됩니다. 아라
한과 벽지불이 끊은 바 번뇌는 다시 미래의 윤회하는 삶[後有]을 받지 않으므로 '미래의 윤
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고 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번뇌를 다 없
앤 것도 아니며 또한 다시는 모든 생을 받는 것을 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시는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 그 계보

"이와 같이 아라한과 벽지불이 능히 끊지 못한 번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잠재적 번뇌[住
持煩惱]와 현재적 번뇌[起煩惱]가 그것입니다. 다시 잠재적 번뇌에는 한 곳만을 보는 편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見一處住持煩惱],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欲愛住持
煩惱], 육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色愛住持煩惱],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
어 있는 번뇌[有愛住持煩惱]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잠재적 번뇌가 모든 현재적
번뇌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현재적 번뇌는 찰나의 일이니 찰나의 마음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언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무명
의 잠재적 번뇌[無始無明住持煩惱]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네 가지 잠재적 번뇌의 힘은
모두 부수적 번뇌[上煩惱]의 의지할 종자가 되는 것이지만,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큰 힘에
비교하면 산수(算數)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무명의 잠재적 번뇌는 욕망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나 네
가지 잠재적 번뇌보다 힘이 있습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힘이 가장 큰 것입니다. 마치
악마 파순(波旬)이 타화자재천보다도 모습, 힘, 수명, 도구, 자재가 뛰어난 것과 같습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의 힘이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나 네 가지 잠재적
번뇌보다도 그 힘이 가장 뛰어난 것이니,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부수적 번뇌의
의지하는 바 되며, 역시 네 가지 잠재적 번뇌를 오래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과 벽
지불의 지혜로도 능히 끊지 못하며 오직 여래의 깨달음의 지혜가 능히 끊을 바입니다.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가장 힘이 센 것입니다."


부처님만이 끊을 수 있는 번뇌

"세존이시여, 또한 집착[取]이 유루(有漏)의 업인(業因)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존재[三有]를
낳는 것과 같이, 이러한 무명의 잠재적 번뇌 역시 무루업(無漏業)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아라
한, 벽지불, 대력(大力)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의 세 가지 의생
신(意生身)을 낳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지위와 그러한 세 가지 의생신의 생 및 무루업
의 생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에 의지한 것이므로 연이 있는 것이지 연이 없는 것이 아닙니
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의생신 및 무루업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존이
시여, 이와 같이 윤회 생존의 집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의 업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
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는 네 가지 잠재적 번뇌를 떠나는 것과 달라서, 불지(佛地)에서 끊는
바이며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로써 끊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아라한과 벽지불도 네 가지
잠재적 번뇌는 끊을 수 있지만 무루업은 다 끊지 못해서 자재력을 얻지 못하며 역시 깨달음
을 얻지 못합니다. 무루업을 다 끊지 못하는 것은 곧 무명의 잠재적 번뇌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열반

"세존이시여, 아라한, 벽지불, 최후신(最後身)의 보살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에 덮여 있기 때
문에 저러한 모든 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끊어야 할 바를 끊지 못하며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합니다. 끊지 못하기 때문에 나머지 허
물이 남아 있는 해탈[有餘過解脫]이라 이름하며, 모든 허물을 떠나 있는 해탈이 아니기 때문
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有餘解脫]이라 이름합니다. 모든 청정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有餘功德]을 성취할 뿐이라 이름합니다.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해탈,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청정,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공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苦]을 알며, 업의 잔
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으며,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
하며[滅], 업의 잔재가 남아 있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닦는 것이니, 이를 불완
전한 열반을 얻을 뿐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열반을 얻는다 함은 열반의 세계
를 향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열반의 맛

"누구라도 모든 괴로움을 알고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집착을 끊으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
을 증득하고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는다면, 무상하게 부서지는 세간, 무상하
게 병든 세간에서 항상 머무르는 열반을 얻을 것이며, 보호해 주는 이 없는 세간, 의지할 이
없는 세간에서 보호해 주는 이가 되고 의지할 이가 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법에는 뛰
어남과 열등함이 없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지혜가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해탈
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으며, 청정이 평등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열
반은 하나의 맛[一味]이고 같은 맛[等味]이니, 이른바 해탈의 맛[解脫味]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못하고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은 하나의 맛, 같
은 맛 -이른바 지혜의 맛, 해탈의 맛 -을 얻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무명의 잠재적 번
뇌를 끊지 못하고 다 마치지 못한 사람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을 다 끊지 못했으며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법을 마땅히 얻어야 하는데도
얻지 못하고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쌓여서 모든 수도(修道)를 통해서 끊어야 할 번뇌와 부수적 번뇌를 낳으며, 그것은
마음을 장애 하는 번뇌, 지(止)를 장애 하는 번뇌, 관찰[觀]을 장애 하는 번뇌, 선정을 장애
하는 번뇌, 삼매[正受]를 장애 하는 번뇌, 방편을 장애 하는 번뇌, 지혜를 장애 하는 번뇌,
과보를 장애 하는 번뇌, 얻음을 장애 하는 번뇌, 힘[力]을 장애 하는 번뇌, 두려움 없음을 장
애 하는 부수적 번뇌 등을 낳습니다. 이와 같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부수적
번뇌는 여래의 보리, 지혜가 끊어야 할 바이니,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지
은 바입니다. 모든 부수적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원인으로 하고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조건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어야

"세존이시여, 여기서 현재적 번뇌는 찰나의 마음을 찰나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
존이시여, 마음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이 언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無始無明住持煩惱]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보리, 지혜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갠
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더라도, 그 모든 것은 모두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지니는 바
되고 건립하는 바 됩니다. 비유하면, 마치 모든 씨앗이 모두 땅에 의지하여 나고 건립하고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땅이 무너지면 그 씨앗도 무너지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여
래의 보리, 지혜가 마땅히 끊어야 할 법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더라도 모두 따라
서 끊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번뇌와 부수적 번뇌를 끊고, 여래가 얻을 바 모든
법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에 통달하며 모든 지견에 걸림 없이 되고 모든 과
악(過惡)을 떠나며 모든 공덕을 얻은 법왕, 법의 주재자로서 자재를 얻으며 모든 법의 자재
로운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래, 응공, 등정각께서는 "나의 생은 이미 다했으며,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했으며, 지어야 할 바는 이미 마쳤으며, 미래의 윤회하는 삶은 받지
않는다"라고 사자후(獅子吼)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궁극적인 가르침에 의지하여 총
체적 설명[一向記]를 설하셨습니다."

두 가지 지혜

"세존이시여,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는' 지혜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른바 여래는
-위없는 조어(調御)로서 네 가지 마[四魔]를 항복 받고, 모든 세간을 벗어나서 모든 중생의
존경을 받는- 불가사의한 법신을 얻으며 모든 알아야 할 대상 경계에 대하여 걸림 없는 법
의 자재를 얻습니다. 이 위에 다시 지어야 할 바도 없으며 얻어야 할 바도 없는 경지에서
십력(十力)이 용맹해지고 제일이며 위없는 무외(無畏)의 경지에 올라갑니다. 모든 알아야 할
대상 경계를 걸림 없는 지혜로 관찰하는 데는 다른 것에 말미암지 아니하므로 '미래에 윤회
하는 삶을 받지 않는 지혜'라고 사자후하는 겁입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사의 두려움을 건너서 차례로 해탈의 기쁨을 얻어서 즐거
이, '나는 생사의 공포를 떠났으니 생사의 괴로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아라한과 벽지불이 관찰할 때는 '미래의 윤회하는 삶을 받지 않게 되
고', 가장 뛰어난 안식처[蘇息處]인 열반의 경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들
이 앞에서 얻은 바 열반의 경지는 법에 어리석지 않아서,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스
스로 불완전한[有餘] 지위를 얻었지만, 반드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으리라'고 아는 것입
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문승과 연각승은 모두 대승에 들기 때문입니다. 대승은 곧 부처님
의 길[佛乘]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길은 곧 하나의 길이며 하나의 길을 얻는 자는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위없이 바른 깨달음은 열반의 세계입니다. 열반의 세계는 곧
여래의 법신입니다. 궁극적인 법신을 얻음은 곧 궁극적인 하나의 길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법신은 여래와 다르지 않고, 여래는 법신과 다르지 않으니, 여래가 곧 법신입니다.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궁극적인 하나의 길을 얻는 것입니다. 궁극적이라는 것은 가이없으며
끊어짐이 없는 것입니다."


여래에의 귀의

"세존이시여, 여래는 한량없는 시간 동안 머뭅니다. 여래, 응공, 등정각은 미래의 끝[後際]과
나란히 머무릅니다. 여래는 한량없으며, 크게 자비로우심[大悲] 또한 한량없고, 세간을 편안
케 하는 데 이러한 설을 짓는 것은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여래가 만약 다시 '다함
없는 법, 상주하는 법은 모든 세간의 귀의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역시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아직 제도하지 못한 세간, 의지하지 못하는 세간에 있
어서 미래의 끝과 같아져서 다함없는 귀의, 상주하는 귀의를 짓는다고 한다면, 이른바 여래,
응공, 등정각입니다. 법은 하나의 길[一乘]이고 승(僧)은 세 가지 길(三乘)의 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귀의는 궁극적인 귀의는 아니며 불완전한 귀의라고 이름하는 것입니
다. 왜냐하면, 하나의 길을 설하는 것은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 것이며, 이 위에 다시 하나의
길의 법신을 설함이 없는 것입니다. 세 가지 길의 무리들은 공포가 있어서 여래에게 귀의하
여 벗어남을 구하며 수학(修學)하는 것이니,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두 가지 귀의는 궁극적인 귀의가 아니며 한계가 있는 귀의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여래에게 조복하여 귀의하면 법의 은혜를 얻게 되고 믿고 즐기는 마음을
내게 될 것입니다. 법과 승의 두 가지 귀의는 단순히 두 가지 귀의가 아니라 여래에게 귀의
하는 것입니다. 제일의(第一義)에 귀의하는 것은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
지 귀의와 제일의는 궁극적으로 여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두 가지 귀의
는 여래와 다르지 않고, 여래는 두 가지 귀의와 다르지 않으므로, 여래는 곧 삼귀의(三歸依)
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의 길을 설하는 것은 여래가 네 가지 무외를 성취하
여 사자후를 설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하고자 하는 바의 방편으로 설하는 것이 곧 대승입니
다. 세 가지 길이 없으며, 세 가지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
나의 길이라는 것은 곧 제일의의 길입니다."







제6. 다함없는 진리[無邊聖諦章]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이 처음으로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할 때에 하나의 지혜로써 모든
잠재적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지혜로써 네 가지 지혜의 모든 공덕을 끊는 것도
아니고, 또한 법으로서 능히 이러한 네 가지 법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네 가지 법의 뜻을 잘 압니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벗어나는 최고의 지혜에는 점진적
으로 이르게 되는 네 가지 지혜[四智]도 없으며,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네 가지 대상[四
緣]도 없습니다.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법이 없는 것이 세간을 벗어나는 최고의 지혜입니
다.
세존이시여, 금강석과 같다[金剛喩]고 하는 것은 곧 제일의(第一義]의 지혜입니다. 세존이시
여, 성문과 연각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않았으므로 처음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
혜가 제일의의 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두 가지 진리를 아는 지혜로써 여
러 가지 잠재적 번뇌를 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 응공, 등정각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경지가 아니고 부사의한 공의 지혜이니, 모든 번뇌의 더미를 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
든 번뇌의 더미가 무너진다면 구경의 지혜가 곧 제일의의 지혜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처음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혜는 궁극적인 지혜가 아니며 다만 위없이 바른 깨달음의 지혜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성스러운 뜻이라는 것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에 대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성
문과 연각은 유한한 공덕을 성취할 뿐이며, 성문과 연각은 불완전한 공덕을 성취할 뿐이므
로, 이름해서 '성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성문이나 연각의 진리가
아니며, 또한 성문과 연각의 공덕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진리는 여래, 응공, 등정
각이 처음으로 비로소 깨달아 아는 것이지만, 그 뒤에도 무명의 껍질에 싸여 있는 세간을
위해서 출현하여 연설하므로 성스러운 진리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제7. 여래장[如來藏章]


"성스러운 진리란 매우 깊은 뜻을 설하는 것이며, 미세하므로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이 능
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매우 깊은 여래의 씨앗[如來藏]을 설하기 때문
입니다. 여래장이라는 것은, 곧 여래의 경계이며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알 바는 아닙니다.
여래장의 차원에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의 차원이 매우 깊기 때
문에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 역시 매우 깊고 미세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은 능
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제8. 법신[法身章]


"만약 한량없는 번뇌의 더미에 싸여 있는 여래장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한량없는 번
뇌의 더미에서 벗어난 법신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래장, 여래의 법신, 부사
의한 부처님의 경계 및 방편을 설함에 대하여 마음으로 확신할 수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곧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함을 신해(信解)할 것입니다. 이렇게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른바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뜻이냐 하면, 이른바 지음이 있는[有作] 성스러운 진리
의 뜻을 설하는 것과 지음이 없는[無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지음이 있
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은 곧 유한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입니
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능히 모든 괴로움을 알수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끊을 수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얻을 수는 있으나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을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함이 있는 생사와 함이 없
는 생사가 있으며, 열반도 역시 이와 같아서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
반[無餘涅槃]이 있습니다.
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한다는 것은 무한한 네 가지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
니다. 왜냐하면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괴로움을 받을 줄 알고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끊을 줄 알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습니
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곧 여래가 설한 네 가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은 오직 여래, 응공, 등정각의 궁극적인 일이며
아라한, 벽지불의 궁극적인 일이 아니니, 왜냐하면 하(下), 중(中), 상(上)의 법으로써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여래, 응공, 등정각은 지음이 없는 네 가지 진리의
뜻에 대하여 궁극적인 경계를 얻는 것인데, 모든 여래, 응공, 등정각으로서 모든 미래의 괴
로움을 알고 모든 번뇌와 부수적 번뇌가 거두어들이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알며, 모든 의
생신(意生身)을 멸하며 모든 괴로움을 멸하여 깨달음을 짓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존재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름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
이라고 하는 것은, 비롯함이 없고, 지음이 없으며, 일으킴이 없고, 다함이 없으며, 다함을 떠
나 있으며, 상주하며, 자성이 청정하며, 모든 번뇌의 더미를 떠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으며,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으며, 다르지 않으며, 헤아
릴 수 없는 불법을 성취하여 여래의 법신을 설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여래의
법신은 번뇌의 더미를 떠나지 않으므로 여래장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제9. 공의 두 가지 진실한 모습[空義隱覆眞實章]


"세존이시여, 여래장의 지혜는 여래의 공(空)한 지혜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모든 아라
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이 본래 보지 못하는 바이며 본래 얻지 못하는 바입니다.
세존이시여, 두 가지 여래장의 공한 지혜가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공한 여래장(空如來藏)은
모든 번뇌의 더미에서 혹은 떠나 있으며, 혹은 벗어나 있으며, 혹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
다. 세존이시여, 공하지 않은 여래장[不空如來藏]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부사
의한 불법을 혹은 떠나지 않으며, 혹은 벗어나지도 않으며, 혹은 그것과 다르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두 가지 공한 지혜는 모든 위대한 성문들도 능히 여래를 믿음으로 말미
암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공한 지혜는 네 가지 전도된 경지를
반연으로 해서 작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라한, 벽지불은 본래 보지 못하는 바이고
본래 얻지 못하는 바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소멸은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아 얻는 것이며, 모
든 번뇌의 더미를 부수며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제10. 하나의 진리[一諦章]


"세존이시여,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셋은 무상하고 하나는 영원한 것입니다. 왜
냐하면, 세 가지 진리는 함이 있는 현실[有爲相] 속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이 있
는 현실 속에 포함된다는 것은 곧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곧 허망한 존재입니다. 허
망한 존재라는 것은 진리도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며 의지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
로 괴로움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
등은 모두 제일의의 진리가 아닌 것이며, 영원한 것도 아니며, 의지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제11. 하나의 의지처[一依章]


"오직 하나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만이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는 것입니다.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는 것은 곧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허망한 존재가 아닙니다. 허망한 존재
가 아니라는 것은 진리이며 영원한 것이며 의지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소멸
이라는 진리만이 제일의의 진리입니다."



제12. 전도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顚倒眞實章]


두 가지 전도된 견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입니다. 모든 중생의 심식(心識)으
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을 넘어서 있는 것이며, 또한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비유하면,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은 갖가지 형상을 보
지 못하는 것과 같고, 이제 태어난 지 7일되는 아기가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 역시 이와 같아서 모든 범부의 심식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경계도 아닙니다. 범부의 심식이라는 것은
극단적인 견해[二見]로 뒤바뀐 것이며,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는 곧 청정합니다.
치우친 견해[邊見]라는 것은, 범부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五受陰]에 대하여 아
견, 망상, 집착으로 두 가지 소견을 일으키는 것을 치우친 견해라 이름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입니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열반은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상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모두 망
상으로 인해서 이러한 견해를 짓는 것입니다. 신체와 여러 가지 감각 기관에 대하여 분별하
고 사유하되 현재의 존재가 부서짐을 보면서도 윤회 생존의 계속함[有相續]을 보지 못하여
단견을 일으키는 것은 망상으로 인해서입니다. 마음의 상속에 대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찰나 사이의 의식 작용에 대하여 상견을 일으키는 것도 망상으로
인해서입니다.
이같은 망상의 견해가 그같은 뜻에 대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라서 다르다는 분별[異相分別]을
짓거나, 끊어졌다고 하거나 영원하다고 생각하여서 전도된 중생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에 대하여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괴로움인데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하
고, 무아를 아(我)라고 생각하고,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아라한, 벽지불
의 청정한 지혜라는 것은 모든 앎의 경계 및 여래의 법신에 대하여는 본래 보지 못한 바입
니다. 어떤 중생이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
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전도된 견해가 아니며 올바른 견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견해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곧 완전한 상주[常波羅蜜], 완전한 기쁨[樂波羅蜜], 완전한 아[我波
羅蜜], 완전한 청정[淨波羅蜜]이니, 부처님의 법신에 대하여 이러한 견해를 갖는 것을 올바
른 견해라고 이름합니다. 올바르게 보는 자는 곧 부처님의 참된 아들이니 부처님의 입으로
부터 태어나며, 올바른 가르침을 좇아서 태어나며, 올바른 가르침의 교화를 좇아서 태어나
며, 가르침의 재산을 상속하는 사람입니다.
세존이시여, 청정한 지혜라는 것은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 바라밀입니다. 그런데 이렇
게 청정한 지혜는 비록 청정한 지혜라고는 하지만 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에 있어서도
작용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네 가지 의지의 지혜[四依智]에 작용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세 가
지 길[三乘]에 속하는 초심자도 가르침과 그 뜻에 어리석지 않으며, 마땅히 깨닫고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세존께서는 네 가지 의지할 바를 설하시는 것입니다. 세
존이시여, 이 네 가지 의지할 바는 곧 세간의 법입니다. 세존이시여, 하나의 의지할 바[一依]
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의지할 바이며, 세간을 벗어나는 제일의(第一義)의 의지할 바이니,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입니다."



제13. 자성의 청정[自性淸淨章]


생사의 뿌리, 여래장

"세존이시여,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이기 때문에 언
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本際]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생사를 설
하는 것은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합니다. 세존이시여, 생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감각 기관이
사라지고 이어서 일어나지 않았던 감각 기관이 일어나는 것을 생사라고 이름합니다. 세존이
시여, 죽음과 태어남의 이 두 법은 여래장입니다. 세간의 언어로 설하기에 죽음이 있고 태어
남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감각 기관이 부서지는 것이며, 태어남은 새로 감각 기관이 일어
나는 것입니다.
여래장은 태어남이 있으며 죽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래장은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 있
습니다. 여래장은 상주하여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의지하는 바가 되며, 지니
는 바가 되며, 건립하는 바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법에 떠남도
없으며 끊어짐도 없고, 벗어남도 없고 다름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끊어지고, 벗어나며, 달
라지고, 외화(外化)되는 함이 있는 법이 의지하고 건립하는 것은 여래장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여래장이 없다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
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섯 가지 의식[六識]과 의식 작용 그 자체로서의 마음[心法] -이 일곱
가지- 은 찰나적인 존재여서 머무르지 않으며, 갖가지 괴로움을 심지 못하며, 괴로움을 싫
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아(娥)도 아
니며, 중생도 아니며, 생명도 아니며,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 여래장은 몸이 있다고 보는 견
해에 떨어진 중생, 전도된 중생, 공으로 말미암아 혼돈에 빠진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
이 아닙니다."


여래장과 번뇌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곧 법계장(法界藏), 법신장(法身藏), 출세간상상장(出世間上上藏), 자
성청정장(自性淸淨章)입니다. 이 성품은 청정한 여래장인데 객진 번뇌(客塵煩惱)와 부수적
번뇌의 오염되는 바로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여래의 경계입니다. 왜냐하면 찰나의 착
한 마음은 번뇌에 물들지 않고 찰나의 착하지 않은 마음 역시 번뇌에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
다. 번뇌도 마음에 접촉하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접촉하지 않으니, 사물[法]에 접촉하지 않
는데 어떻게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그러나 번뇌가 있으며 번뇌에 물드는 마음도 있습니다.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
[自性淸淸心]이면서 물드는 것이 있음은 가히 잘 알기 어렵습니다. 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진
실한 눈, 진실한 지혜로써 법의 근본이 되고, 법을 통달함이 되고, 정법의 의지처가 되어서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승만 부인이 이와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설하면서 부처님께 물었을 때, 부처님은
곧 수희(隨喜)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면서 물듬이 있다는 것은 가히 완전히 알기에는 어려
운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알기 어렵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알기 어렵고,
그렇게 청정한 마음이 번뇌에 물든다고 하는 것도 완전히 알기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는
그대와 위대한 가르침을 성취한 보살마하살이 이에 능히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 다
른 성문들은 오직 부처님 말씀을 믿기만 할뿐이다."


제14. 참된 아들[眞子章]


"만약 나의 제자로서, 믿음에 따라서 증상(增上)하는 자는 밝은 믿음에 의지한 뒤에 진리의
지혜에 수순(隨順)하여 구경을 얻는다. 진리의 지혜에 수순한다는 것은 시설(施設)된 감각
기관과 뜻의 활동 영역을 관찰하며, 업의 과보를 관찰하며, 아라한의 번뇌[隨眠]를 관찰하며,
마음의 자재로운 즐거움과 선정으로 얻는 즐거움을 관찰하며,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의
성스럽고 자재로운 신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선교 방편의 관찰을 성취하
고, 내가 입멸(入滅)한 뒤 미래세 중에서라도 나의 제자가 믿음에 따라서 증상하는 데 밝은
믿음과 진리의 지혜를 의지한다면,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 번뇌의 오염을 입을지라도 구경을
얻을 것이다. 구경이라는 것은, 대승의 길에 들어가는 원인이다. 여래를 믿는 자는 이러한
큰 이익이 있으므로 깊은 뜻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다시 그 밖에도 큰 이익이 있사오니, 저는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서 이 뜻을 설하
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설하도록 하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 부류의 선남자, 선여인은 매우 깊고 깊은 뜻을 스스로 훼손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고 큰
공덕을 낳아서 대승의 길에 들어갑니다. 어떤 것이 세 부류인가 하면, 이른바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스스로 깊고 깊은 진리의 지혜를 성취합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진리의 지혜
를 수순함을 성취합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모든 깊고 깊은 법을 스스로 완전히 알지
못하고 부처님을 우러르면서 '이는 나의 경계가 아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바'라
고 합니다. 이들을 선남자, 선여인이라 이름하는 것은 오직 부처님만을 우러르기 때문입니
다. 이러한 선남자, 선여인을 제외하고"



제15. 승만 부인[勝?場]


"나머지 모든 중생들 -매우 깊은 가르침에 집착하여 망령되게 말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위배
하고 여러 가지 외도(外道)를 익혀서 부처님의 종자를 썩게 하는 자들- 은 마땅히 왕의 힘
이나 하늘, 용, 귀신의 힘으로 조복해야 합니다."
그때 승만 부인과 모든 권속들이 부처님의 발에 정수리를 대면서 예배하자, 부처님께서 말
씀하셨다.
"착하다, 착하다, 승만이여! 매우 깊은 가르침을 방편으로 수호하며 올바르지 못한 가르침을
항복하고 그 마땅한 바를 잘 얻으니, 그대는 이미 백천억의 부처님을 모셨으므로 이러한 뜻
을 능히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뛰어난 광명을 놓으셔서 널리 대중을 비추시고, 몸이 허공으로 7다라수(多
羅樹)만큼 올라가셔서 발로 허공을 밟고 사위국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승만 부인과 모든 권
속들이 합장하여 부처님을 향하고 바라보는데 싫어하거나 만족해함이 없었으며 눈을 잠시도
쉬지 않았으며,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기뻐하여 뛰면서 저마다 여래의 공덕이 갖추
어진 것을 찬탄하였다. 부처님을 염하면서 다시 성(城)으로 돌아와서는 우칭왕(友稱王)을 향
하여 대승을 찬탄하고 성(城) 중의 일곱 살 이상 여인들을 모두 대승으로 교화하였다. 우칭
왕 역시 일곱 살 이상의 모든 남자들을 대승으로 교화하여서, 온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모
두 대승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기타태자의 숲으로 들어가셔서 장로 아난에게 일러주었으며, 또한 천제석
(天帝釋)을 염하셨다. 그때에 제석과 모든 권속들이 홀연히 와서 부처님 앞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천제석과 장로 아난을 향하여 널리 이 경전을 설하시고 나서 제석에게 말
씀하셨다.
"그대는 마땅히 이 경을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라. 교시카여,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겁 동안 깨달음의 행을 닦으며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더라도, 만약
다시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읽고 외우며 내지 잘 보호한다면 복이 저
공덕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하물며 널리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하는 것이랴! 그러므로 교
시카여, 마땅히 이 경을 읽고 외우며 삼십 삼천을 위해서 분별하고 널리 설하라."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 역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사부 대중을 위하여 널리 설하라."
그때 천제석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어떻게 이름 하오며, 어떻게 받들어 지니리까?"
부처님께서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한량없으며 가이없는 공덕을 성취하리니 모든 성문, 연각은 능히 이르지 못할 것
이며 관찰하여 알 수 없을 것이다. 교시카여,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매우 깊고 미묘한 큰
공덕의 덩어리이니,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해서 그 이름을 간략히 설하리라. 잘 듣고, 잘 들
어서, 잘 생각해 잊지 않도록 하라."
그때 천제석과 장로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가르침을 잘 받아 지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은 '여래의 진실하고도 제일의(第一義)인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서원'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모든 원을 거두어들이는 대원(大願)'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올바른 가르침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다
함없는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여래장'을 설하는 것이
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법신'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공의 두
가지 진실한 모습'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하나의 진리'를 설하는 것이
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상주하며 안온한 하나의 의지처'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전도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
자성의 청정한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여래의 진
실한 아들'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승만 부인의 사자후'를 설하는 것이
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다시 교시카여, 이 경에서 설하는 바는 모든 의심을 끊고 궁극적인 뜻에 안주하며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다. 교시카여, 이렇게 승만 부인이 사자후한 경을 그대에게 부촉하나니,
이 법에 머무르며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분별하여 설하라."
제석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높으신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그때 천제석, 장로 아난 및 여러 모임의 천(天), 인(人), 아수라, 건달바 등이 모두 부처님께
서 설하신 바를 듣고, 환희하며 힘써 행하였다. - 終 -










승만경(勝鬘經) 해설

-<승만경>의 사상적 위상-

출판사-민족사

譯-김호성

 

1. 머리말

 

<승만경(勝鬘經)>의 설법형식과 그 내용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형식적 측면에서 재가의 여성불자인 승만부인이 설법하고 수기를 받는다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내용적 측면에서 <승만경>에서 설해지고 있는 주된 교설은 무엇이며, 어떤 사상사적 위상을 점하고 있는지르 살펴보는 것이다.

 

 

2. 승만부인 설법의 두 가지 의미

 

1) 재가불자가 설한 경전

 

출가는 인도사회의 전통이었다.

바라문계급은 그들이 평생 걸어야 할 길을 이미 타고난다.

어려서는 스승을 찾아가 공부를 하고, 나이 들어서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가정생활을 영위한다.

이러한 과정은 오늘 우리들도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와 다른 점은, 그들은 출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고 가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준 뒤에 출가하여 숲 속으로 간다.

숲 속에서 명상을 행하며, 여기저기 유행(流行)한다.

그렇게 구도자로서 삶을 마치는 것이다.

불교 역시 인도에서 형성된 종교이기 때문에 이러한 출가의 전통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불교에 이르러 출가의 전통은 더욱 강조되었다.

싯다르타의 출가는 위에서 말한 바라문교의 출가를 개혁한 것이었다.

가정생활을 마치고 노년이 되어 비로소 행하던 출가를 거부하고, 가정생활의 포기를 통한 출가를 이룩한 것이었다.

싯다르타 태자 역시 가정생활을 완수한 뒤 출가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한다.

그는 우리 인간의 실존이 너무나 무상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짧은, 무상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출가의 종교로 출발하였다.

불교 교단은 출가 교단이었다.

수많은 우바새, 우바이의 신앙과 외호(外護)를 우리는 알고 있지만, 여전히 불교는 출가 중심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 한 증거로서 경전을 살펴보자.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많은 법문 중 거의 대부분은 출가한 비구, 비구니를 청법(聽法)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재가불자를 청법의 대상으로 삼았던 경우는 <선생경>, <옥야경> 등 윤리적인 차원의 경전들이 다소 있을 뿐이다.

초기불교의 이러한 측면은 부파불교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부파불교시대는 자기 부파의 이론적 정당성을 저마다 소리 높여 주장하던 때였다.

그러한 시대에는 전문적 학승들의 지위가 격상되고, 이론탐구에 경도된 당연한 결과로 사회현실을 살아가는 대중들과의 교섭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부파불교는 재가불자를 위한 불교도 아니었고, 재가불자에 의한 불교도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재가불자들의 올바른 위상이 확보되기 위해서는 대승불교의 흥기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대승불교의 흥기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파를 중심으로 한 재가불자들의 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오늘의 연구 성과는 전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파를 중심으로 모여든 재가불자들은 찬불(讚佛)의 불전문학(佛傳文學)을 형성하는 등, 대승경전의 편집에 관여했을 것이다.

이제 재가불자들의 목소리는 경전의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마경>이다.

주지하다시피 <유마경>은 유마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십대 제자를 비롯한 성문, 문수보살을 비롯한 대승보살들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특히 소승의 십대 제자들을 꾸짖는 장면에서 출가에 대한 재가의 우위를 과시하고 있다.

<승만경> 역시 이러한 <유마경>의 재가주의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승만경>은 소승의 십대 제자들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그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 역시 행하지 않는다.

애시 당초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이미 <유마경>에서 그러한 작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유마경>은 초기 대승경전으로서 대승과 소승이 대립했던 저간의 사정[대, 소 대립의 입장]을 잘 반영한 것임에 반하여, <승만경>은 소승보다 대승 - 그것도 여래만이 길인 佛乘, 一乘 - 을 강조하면서도 소승까지도 섭수(攝受)하고 회통하려는 입장[대, 소 회통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내용면에서 특별히 재가주의적 입장을 설하고 있는 <유마경>과는 달리, <승만경>은 재가의 우바이인 승만 부인이 설법하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까지 받고 있다는 점에서 재가주의의 경전으로서 고양된 재가불자의 위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 사상적 배경에는 <승만경>의 중심내용 중 하나인 여래장사상이 놓여 있다.

 

2) 여성주의

 

종교는 사회를 선도하기도 하지만, 때로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사회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다. - 이러한 명제는 아직도 여전히 현실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언적 의미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사회 속에서 남녀의 벽은 높고 성차별은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서양의 경우에도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최근세의 일이라 하지 않는가.

동 서를 막론하고 여자에 대한 불평등의 역사는 뿌리 깊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교 역시 시대적 한계를 안고 출발한다.

앞에서 우리는 불교가 출가의 종교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출가 자체는 여자와의 관계를 배제하는 행위다.

여자와의 사랑과 결혼을 떠나는 것이 출가다.

그런 뒤 수행자들은 그들만의 출가공동체, 즉 승가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승가는 여자에 대해서 특별히 경계하여 수행자들이 욕망의 늪 속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여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경전의 여러 가지 언급들은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한 예로, <소부경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단 하나의 형태로 여자보다 더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른 어떤 소리도 아니며, 다른 어떤 냄새도 아니며, 다른 어떤 풍미도 다른 어떤 축감도 아니다......”(<불교의 여성론>, p.29)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 그것은 수도를 방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모 마하파제파티가 여성의 출가를 청원했을 때, 부처님이 거절했던 것도 여성의 출가로 말미암아 생길지도 모르는 남성 출가교단의 타락을 염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도출된 불교의 여성관이 하나의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은 역시 대승불교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씨앗으로서 여래장을 갖고 있다는 사상이 보편화되자, 여성의 성불이 하나의 문제로 제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종래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는 입장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같은 정리된 입장을 <법화경>에서 사리불 존자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여인오장설(女人五藏設)이다.

 

“그대가 오래지 않은 동안에 위없는 도를 얻는다 함은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여신(女神)은 때묻고 더러워서 법기(法器)가 아니니, 어떻게 능히 위없는 도를 얻겠는가. 불도(佛道)는 멀어서 무량겁을 지내도록 부지런히 고행을 쌓고 모든 바라밀을 구족하게 닦은 후에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여인의 몸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니 첫째, 범천왕이 되지 못한다. 둘째, 제석이 되지 못한다. 셋째, 마왕이 도지 못한다. 넷째, 전륜성왕이 되지 못한다. 다섯째, 불신(佛身)이 되지 못한다. 어떻게 여신으로 성불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종래의 입장에 대해서 <법화경>은 진일보한 성불론을 제시한다.

즉 변성성불론(變成成佛論)이다.

일단 남자의 몸으로 되었다가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례로서 용녀(龍女)가 그렇게 성불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여성의 성불이라 말하기 어렵다.

성불한 주체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가?

여성의 몸 그대로 성불할 수는 없는가?

<승만경>은 간접적인 방법이나마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그러니까 불교사에 있어서 남녀평등의 이념적 정립은 초기 대승경전인 <법화경>의 시대보다 더 내려와서 중기 대승경전인 <승만경>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승만경>은 한 여성 불자인 승만 부인이 설법을 하며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성불하여 보광(普光)여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굳이 남자로 변하지 않더라도 여성의 몸 그대로 성불한다는 것이다.

여성즉신성불설(女性卽身成佛說)이다.

뿐만 아니라 <승만경>은 부처님에게만 사용하는 ‘사자후’라는 말을 여성의 설법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승만경>이 페미니즘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3. 특징적 사상과 그 의미

 

1) 섭수정법, 일승, 여래장

 

구나발타라 번역의 <승만경>은 전체가 15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리류지 번역의 <대보적경> 승만 부인회는 분장(分章)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저본인 구나발타라 역을 중심으로 <승만경> 전체를 살펴본다.

Alex Waymann은 종래 <승만경>을 주석한 고승들 - 혜원, 규기, 길장, 성덕태자 - 의 과분(科分)을 소개하고 있다.(pp. 120~123).

이 중에서 혜원의 이해에 보다 공감을 느낀다.

혜원의 과분을 토대로 필자는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나누는 새로운 과분을 다음과 같이 마련해 보았다.

(예컨대, 숫자 1은 제1장 <여래진실의 공덕장>을 가리킨다.)

 

 

 

 

<승만경>의 정식 이름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승만경>은 일승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人天)의 무리 앞에는 인천의 선근이 놓여 있고, 성문, 연각, 대승보살 앞에는 각기 성문, 연각, 대승보살의 가르침이 놓여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가르침은 사실은 일승의 가르침을 갖가지로 설하고 있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주된 교설을 좀더 자세히 언급해 본다.

승만 부인은 열 가지 원 → 세 가지 원 → 하나의 원을 각기 세운다.

그러면서 보살이 세운 모든 원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원 속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그 하나의 원이 바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믿고 행하는 선남자 선여인은 모두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떤 일이겠는가?

이에 대한 <승만경> 자체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행위와 올바른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

둘째,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과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

셋째,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대승이다.

넷째,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라밀이다.

이렇게 <승만경>은 올바른 가르침을 대승이며, 또 대승의 바라밀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승만경>은 일승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대승과 일승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삼승과 일승의 관계를 설명하는 견해에 두 가지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삼승의 대승 밖에 따로이 일승을 내세우는 입장과 삼승의 대승이 곧 일승이라는 입장이다.

이 중 전자를 사거가(四車家)라 하며, 후자를 삼거가(三車家)라고 한다.

<승만경>은 이 두 가지 견해 중에서 바로 후자, 즉 삼거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승만 부인은 말한다.

 

“대승은 곧 부처님의 길[佛乘]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길은 곧 하나의 길이므로, 하나의 길을 얻는 자는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위없이 바른 깨달음은 열반의 세계입니다. 열반의 세계는 곧 여래의 법신입니다.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곧 궁극적인 하나의 길을 얻는 것입니다. 법신은 여래와 다르지 않고, 여래는 법신과 다르지 않으니, 여래가 곧 법신입니다. 궁극적인 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궁극적인 하나의 길을 얻는 것입니다.”

 

위의 인용문은 ‘대승 = 불승 =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열반 = 구경법신 = 여래’로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인천이나 성문, 연각 등은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리라.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무슨 근거로 ‘세 가지 길이 없으며, 세 가지 길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라 말하는 것인가?

<여래장경>에서 설하는 바와 같이 모든 중생은 여래장이기 때문이다.

같은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의 구조를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여래장은 청정한 여러 가지 덕성과 알 수 없는 예부터 함께 있으며, 또 그것과 본질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여래장은 번뇌에 덮여 있는 청정하지 않은 여러 가지 덕성과 알 수 없는 예부터 함께 있으며, 또 그것과 본질적으로 결합하고 있지 않다.

셋째, 여래장은 영겁토록 견고 불변한 본성이 있다.

이러한 여래장의 세 가지 구조는 <승만경>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위에서 말한 첫째는 여래장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말하는 속에서, 둘째는 객진번뇌염(客塵煩惱染)을 말하는 속에서 각기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상주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교설 속에 반복되어 있는 것이다.

영원히 존재하여 불변한다는 여래장은 법신과 동의어로서, <열반경>에서 설하는 상, 낙, 아, 정의 네 가지 덕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래장이 법신과 동의어이면서 한편으로 생사의 뿌리가 된다는 점에 있다.

“생사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점도 사실인 것이다.

이렇게 여래장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성청정한 여래장이 어떻게 해서 객진의 번뇌에 오염되는가?

이 점에 대해서 <승만경>은 분명한 언급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이면서 물드는 것은 가히 잘 알기 어렵다.”고 말할 뿐이다.

<기신론>의 유전연기문(流轉緣起門)의 설명을 기댜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승만경> 역시 번뇌론을 설하고 있다.

간략히 살펴보면, 무명의 잠재적 번뇌가 네 가지 잠재적 번뇌를 낳는 것이며, 다시 그에 따른는 부수적 번뇌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들 모든 번뇌의 뿌리는 무명의 잠재적 번뇌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네 가지 잠재적 번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성청정심이 객진번뇌에 오염되는 것은 바로 이 무명의 잠재적 번뇌 때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로서 이 무명의 잠재적 번뇌만 제거하게 되면, 모든 법의 자재로운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부처님처럼.

 

“나의 생은 이미 다했으며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했으며

지어야 할 바는 이미 마쳤으며

미래의 윤회하는 삶은 받지 않으리.”

 

2) 여래장사상사 내의 위치

 

중기 대승경전인 <승만경>은 여래장사사상에서 볼 때,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高崎直道는 다음과 같은 <여래장경전 계통도>를 그리고 있다.(<여래장계경전>, p.425)

 

 

 

 

이 중 <여래장경>, <부증불감경>, <승만경>을 ‘여래장삼부경(三部經)’이라 말한다.

<여래장경>은 여래장의 정의를 아홉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는 경전으로서, <승만경>에의 직접적인 영향을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여래장사상을 설하는 것이므로 <여래장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승만경>의 존재는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다음, <부증불감경>과 <승만경>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이들의 선후관계에 대해서 高崎直道는 <부증불감경>이 <승만경>에 앞선다고 하였는데, 근래 정호영 교수는 그의 저 <여래장사상>(p.58)에서 <승만경>이 <부증불감경>보다 선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자는 그같은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할 만큼 연구가 충분하지 못하므로, 여기서는 <부증불감경>과 <승만경>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만 언급하기로 한다.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이, 여래장은 여러 가지 덕성과 불가분의 것이며, 청정한 진여이며, 법계로서 불가사의한 자성청정심이라는 점 등은 <부증불감경>에서도 설해지고 있는데, 이는 양자가 동일한 사상적 입장이다.

<승만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여래장사상 계통의 경전으로 <능가경>이 있다.

<능가경>은 <승만경>을 이으면서도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동일시하는 특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능가경>은 선사상을 내포하는 등 보다 복잡하고 종합적인 교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능가경>을 소의경전으로 한 <대승기신론>은 <승만경>의 여래장사상을 이으면서도 유식사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승만경> 역시 무명의 잠재적 번뇌 등을 말하고 있지만, <기신론>은 보다 세밀하게 객진번뇌로부터 오염 당하는 과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승만경>을 보다 발전시킨 논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중요한 논서로 <보성론>이 있다.

<보성론>은 직접 <승만경>으로부터 26회나 인용하고 있다.

‘섭수정법장’ 3회, ‘일승장’ 11회, ‘법신장’ 6회, ‘전도진실장’ 3회, ‘자성청정장’ 3회 등이다.

그런만큼 <보성론>은 <승만경>을 소의로 해서 지어진 논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승만경>은 여래장 사상을 설하는 경전으로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모든 중생은 여래장의 존재라고 하는 새로운 인식에서부터 재가불자나 여성도 성불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립된 것이다.

그러한 입장이 형식적으로 표현된 것이 ‘승만 부인의 설법과 수기’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승만경>이 우리 역사에 처음 전해진 것은 진흥왕 37년(576)에 안홍(安弘)에 의해서다.

안홍은 유학갔던 수나라로부터 귀국하면서 <승만경>과 <능가경>을 가져다 조정에 전했던 것이다.

이후 원효는 직접 <승만경소> 2권(혹은 3권)을 썼는데, 아쉽게도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 응연(凝然)의 <승만경소상현기> 속에 인용되는 구절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를 김상현 교수가 집일(輯逸)하여서, 우리의 참고를 가능케 해주었다.

신라 중대의 불교계에는 이렇게 여래장사상이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토양위에서 신라 하대의 선이 전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자년(1996년) 설 다음날 새벽

김 호 성 합장




P. 1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CBETA 電子版 版本記錄: 1.2 完成日期: 2002/11/04 發行單位: 中華電子佛典協會 (CBETA) cbeta@ccbs.ntu.edu.tw 資料底本: 大正新脩大正藏經 Vol. 12, No. 353 原始資料: 蕭鎮國大德提供,維習安大德提供之高麗藏 CD 經文,北美某大德提 供 No. 353 [No. 310(48)]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 宋中印度三藏求那跋陀羅譯 如來真實義功德章第一   




如是我聞。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時波斯匿王及末利夫人。信法未久共 相謂言。勝鬘夫人是我之女。聰慧利根通敏易悟。若見佛者必速解法心得無疑。宜時 遣信發其道意。夫人白言。今正是時。王及夫人與勝鬘書略讚如來。無量功德。即遣 內人名旃提羅。使人奉書至阿踰闍國入其宮內敬授勝鬘。勝鬘得書歡喜頂受。讀誦受 持生希有心。向旃提羅而說偈言  我聞佛音聲  世所未曾有   所言真實者  應當修供養   仰惟佛世尊  普為世間出   亦應垂哀愍  必令我得見   即生此念時  佛於空中現   普放淨光明  顯示無比身   勝鬘及眷屬  頭面接足禮   咸以清淨心  歎佛實功德   如來妙色身  世間無與等   無比不思議  是故今敬禮   如來色無盡  智慧亦復然   一切法常住  是故我歸依   降伏心過惡  及與身四種   已到難伏地  是故禮法王   知一切爾焰  智慧身自在   攝持一切法  是故今敬禮   敬禮過稱量  敬禮無譬類   敬禮無邊法  敬禮難思議   哀愍覆護我  令法種增長  P. 2  此世及後生  願佛常攝受   我久安立汝  前世已開覺   今復攝受汝  未來生亦然   我已作功德  現在及餘世   如是眾善本  唯願見攝受    爾時勝鬘及諸眷屬。頭面禮佛。佛於眾中即為受記。汝歎如來真實功德。以此善 根當於無量阿僧祇劫。天人之中為自在王一切生處常得見。我現前讚歎如今無異。當 復供養無量阿僧祇佛過二萬阿僧祇劫。當得作佛。號普光如來應正遍知。彼佛國土。 無諸惡趣老病衰惱不適意苦亦無不善惡業道名。彼國眾生色力壽命五欲眾具皆悉快樂 勝於他化自在諸天。彼諸眾生純一大乘諸有修習善根眾生皆集於彼。勝鬘夫人得受記 時。無量眾生諸天及人願生彼國。世尊悉記皆當往生 十受章第二   爾時勝鬘聞受記已。恭敬而立受十大受。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於所受戒不 起犯心。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於諸尊長不起慢心。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於 諸眾生不起恚心。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於他身色及外眾具不起疾心。世尊。我 從今日乃至菩提。於內外法不起慳心。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不自為己受畜財物 。凡有所受悉為成熟貧苦眾生。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不自為己行四攝法。為一 切眾生故。以不愛染心無厭足心無罣礙心攝受眾生。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若見 孤獨幽繫疾病種種厄難困苦眾生。終不暫捨。必欲安隱。以義饒益令脫眾苦。然後乃 捨。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若見捕養眾惡律儀及諸犯戒終不棄捨。我得力時。於 彼彼處見此眾生。應折伏者而折伏之。應攝受者而攝受之。何以故。以折伏攝受故令 法久住。法久住者。天人充滿惡道減少。能於如來所轉法輪。而得隨轉。見是利故救 攝不捨。世尊。我從今日乃至菩提。攝受正法終不忘失。何以故。忘失法者則忘大乘 。忘大乘者則忘波羅蜜。忘波羅蜜者則不欲大乘。若菩薩不決定大乘者。則不能得攝 受正法欲。隨所樂入。永不堪任越凡夫地。我見如是無量大過。又見未來攝受正法。 菩薩摩訶薩無量福利故受此大受。法主世尊現為我證。唯佛世尊現前證知。而諸眾生 善根微薄。或起疑網以十大受極難度故。彼或長夜非義饒益不得安樂。為安彼故。今 於佛前說誠實誓。我受此十大受如說行者。以此誓故於大眾中當雨天花出天妙音。說 是語時於虛空中。雨眾天花出妙聲言。如是如是如汝所說。真實無異。彼見妙花及聞 音聲一切眾會疑惑悉除。喜踊無量而發願言。恒與勝鬘常共俱會同其所行。世尊悉記 一切大眾如其所願 三願章第三   爾時勝鬘。復於佛前發三大願而作是言。以此實願安隱無量無邊眾生。以此善根 於一切生得正法智。是名第一大願。我得正法智已。以無厭心為眾生說。是名第二大 願。我於攝受正法捨身命財護持正法。是名第三大願。爾時世尊即記勝鬘。三大誓願 P. 3 如一切色悉入空界。如是菩薩恒沙諸願。皆悉入此三大願中。此三願者真實廣大 攝受章第四   爾時勝鬘白佛言。我今當復承佛威神說調伏大願真實無異。佛告勝鬘。恣聽汝說 。勝鬘白佛。菩薩所有恒沙諸願。一切皆入一大願中。所謂攝受正法。攝受正法真為 大願。佛讚勝鬘。善哉善哉。智慧方便甚深微妙。汝已長夜殖諸善本。來世眾生久種 善根者。乃能解汝所說。汝之所說攝受正法。皆是過去未來現在諸佛已說今說當說。 我今得無上菩提。亦常說此攝受正法。如是我說攝受正法所有功德不得邊際。如來智 慧辯才亦無邊際。何以故。是攝受正法有大功德有大利益   勝鬘白佛。我當承佛神力更復演說攝受正法廣大之義。佛言。便說。勝鬘白佛。 攝受正法廣大義者。則是無量。得一切佛法攝八萬四千法門。譬如劫初成時普興大雲 雨眾色雨及種種寶。如是攝受正法雨無量福報及無量善根之雨。世尊。又如劫初成時 有大水聚。出生三千大千界藏及四百億種種類洲。如是攝受正法。出生大乘無量界藏 。一切菩薩神通之力。一切世間安隱快樂。一切世間如意自在。及出世間安樂。劫成 乃至天人本所未得皆於中出。又如大地持四重擔。何等為四。一者大海。二者諸山。 三者草木。四者眾生。如是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堪能荷負四種重任。喻 彼大地。何等為四。謂離善知識無聞非法眾生。以人天善根而成熟之。求聲聞者授聲 聞乘。求緣覺者授緣覺乘。求大乘者授以大乘。是名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 堪能荷負四種重任。世尊。如是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堪能荷負四種重任 。普為眾生作不請之友。大悲安慰哀愍眾生。為世法母。又如大地有四種寶藏。何等 為四。一者無價。二者上價。三者中價。四者下價。是名大地四種寶藏。如是攝受正 法善男子善女人。建立大地得眾生四種最上大寶。何等為四。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 。無聞非法眾生以人天功德善根而授與之。求聲聞者授聲聞乘。求緣覺者授緣覺乘。 求大乘者授以大乘。如是得大寶眾生。皆由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得此奇特希有功德 。世尊。大寶藏者。即是攝受正法。世尊。攝受正法。攝受正法者。無異正法。無異 攝受正法。正法即是攝受正法。世尊。無異波羅蜜。無異攝受正法。攝受正法即是波 羅蜜。何以故。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應以施成熟者。以施成熟。乃至捨身支節。 將護彼意而成熟之。彼所成熟眾生建立正法。是名檀波羅蜜。應以戒成熟者。以守護 六根淨身口意業。乃至正四威儀。將護彼意而成熟之。彼所成熟眾生建立正法。是名 尸波羅蜜。應以忍成熟者。若彼眾生罵詈毀辱誹謗恐怖。以無恚心饒益心第一忍力乃 至顏色無變。將護彼意而成熟之。彼所成熟眾生建立正法。是名羼提波羅蜜。應以精 進成熟者。於彼眾生不起懈心生大欲心第一精進。乃至若四威儀。將護彼意而成熟之 。彼所成熟眾生建立正法。是名毘梨耶波羅蜜。應以禪成熟者。於彼眾生以不亂心不 外向心第一正念乃至久時所作久時所說終不忘失。將護彼意而成熟之。彼所成熟眾生 建立正法。是名禪波羅蜜。應以智慧成熟者。彼諸眾生問一切義以無畏心而為演說一 切論一切工巧究竟明處乃至種種工巧諸事。將護彼意而成熟之。彼所成熟眾生建立正 P. 4 法。是名般若波羅蜜。是故世尊。無異波羅蜜。無異攝受正法。攝受正法即是波羅蜜   世尊。我今承佛威神更說大義。佛言。便說。勝鬘白佛。攝受正法。攝受正法者 。無異攝受正法。無異攝受正法者。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即是攝受正法。何以故 。若攝受正法善男子善女人。為攝受正法捨三種分。何等為三。謂身命財。善男子善 女人捨身者。生死後際等離老病死。得不壞常住無有變易不可思議功德如來法身。捨 命者。生死後際等畢竟離死。得無邊常住不可思議功德。通達一切甚深佛法。捨財者 。生死後際等得不共一切眾生無盡無減畢竟常住不可思議具足功德。得一切眾生殊勝 供養。世尊。如是捨三分善男子善女人。攝受正法。常為一切諸佛所記一切眾生之所 瞻仰   世尊。又善男子善女人攝受正法者。法欲滅時。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朋黨 諍訟破壞離散。以不諂曲不欺誑不幻偽。愛樂正法。攝受正法。入法朋中。入法朋者 。必為諸佛之所授記。世尊。我見攝受正法如是大力。佛為實眼實智。為法根本。為 通達法。為正法依。亦悉知見   爾時世尊。於勝鬘所說攝受正法大精進力。起隨喜心。如是勝鬘。如汝所說。攝 受正法大精進力。如大力士少觸身分生大苦痛。如是勝鬘。少攝受正法令魔苦惱。我 不見餘一善法令魔憂苦如少攝受正法。又如牛王形色無比勝一切牛。如是大乘少攝受 正法。勝於一切二乘善根。以廣大故。又如須彌山王端嚴殊特勝於眾山。如是大乘捨 身命財以攝取心攝受正法。勝不捨身命財初住大乘一切善根。何況二乘。以廣大故。 是故勝鬘。當以攝受正法。開示眾生教化眾生建立眾生。如是勝鬘。攝受正法。如是 大利如是大福。如是大果。勝鬘。我於阿僧祇阿僧祇劫說攝受正法功德義利不得邊際 。是故攝受正法。有無量無邊功德 一乘章第五   佛告勝鬘。汝今更說一切諸佛所說攝受正法。勝鬘白佛。善哉世尊。唯然受教。 即白佛言。世尊。攝受正法者是摩訶衍。何以故。摩訶衍者。出生一切聲聞緣覺世間 出世間善法。世尊。如阿耨大池出八大河。如是摩訶衍。出生一切聲聞緣覺世間出世 間善法。世尊。又如一切種子皆依於地而得生長。如是一切聲聞緣覺世間出世間善法 。依於大乘而得增長。是故世尊。住於大乘攝受大乘。即是住於二乘攝受二乘一切世 間出世間善法。如世尊說六處。何等為六謂正法住。正法滅。波羅提木叉。比尼。出 家。受具足。為大乘故說此六處。何以故。正法住者。為大乘故說。大乘住者。即正 法住。正法滅者。為大乘故說。大乘滅者。即正法滅。波羅提木叉。比尼。此二法者 。義一名異。比尼者即大乘學。何以故。以依佛出家而受具足。是故說大乘威儀戒是 比尼是出家是受具足。是故阿羅漢。無出家受具足。何以故。阿羅漢依如來出家受具 足故。阿羅漢歸依於佛。阿羅漢有恐怖。何以故。阿羅漢於一切無行怖畏想住。如入 執劍欲來害己。是故阿羅漢無究竟樂。何以故。世尊。依不求依如眾生無依彼彼恐怖 。以恐怖故則求歸依。如阿羅漢有怖畏。以怖畏故。依於如來。世尊。阿羅漢辟支佛 P. 5 有怖畏。是故阿羅漢辟支佛。有餘生法不盡故。有生有餘梵行不成故。不純事不究竟 故。當有所作。不度彼故。當有所斷。以不斷故。去涅槃界遠。何以故。唯有如來應 正等覺得般涅槃。成就一切功德故。阿羅漢辟支佛。不成就一切功德。言得涅槃者。 是佛方便。唯有如來得般涅槃。成就無量功德故。阿羅漢辟支佛。成就有量功德。言 得涅槃者。是佛方便。唯有如來得般涅槃。成就不可思議功德故。阿羅漢辟支佛。成 就思議功德。言得涅槃者。是佛方便。唯有如來得般涅槃。一切所應斷過皆悉斷滅。 成就第一清淨。阿羅漢辟支佛有餘過。非第一清淨。言得涅槃者。是佛方便。唯有如 來得般涅槃。為一切眾生之所瞻仰。出過阿羅漢辟支佛菩薩境界。是故阿羅漢辟支佛 。去涅槃界遠。言阿羅漢辟支佛觀察解脫四智究竟得蘇息處者。亦是如來方便。有餘 不了義說。何以故。有二種死。何等為二。謂分段死。不思議變易死。分段死者。謂 虛偽眾生。不思議變易死者。謂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意生身乃至究竟無上菩提。二 種死中。以分段死故。說阿羅漢辟支佛智我生已盡。得有餘果證故。說梵行已立。凡 夫人天所不能辦。七種學人先所未作。虛偽煩惱斷故。說所作已辦。阿羅漢辟支佛所 斷煩惱更不能受後有故。說不受後有。非盡一切煩惱。亦非盡一切受生故說不受後有 。何以故有煩惱。是阿羅漢辟支佛所不能斷煩惱有二種。何等為二。謂住地煩惱。及 起煩惱。住地有四種。何等為四。謂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 此四種住地。生一切起煩惱。起者剎那心剎那相應。世尊。心不相應無始無明住地。 世尊。此四住地力。一切上煩惱依種。比無明住地。算數譬喻所不能及   世尊。如是無明住地力。於有愛數四住地。無明住地其力最大。譬如惡魔波旬於 他化自在天色力壽命眷屬眾具自在殊勝。如是無明住地力。於有愛數四住地。其力最 勝。恒沙等數上煩惱依。亦令四種煩惱久住。阿羅漢辟支佛智所不能斷。唯如來菩提 智之所能斷。如是世尊。無明住地最為大力。世尊。又如取緣有漏業因而生三有。如 是無明住地緣無漏業因。生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三種意生身。此三地彼三種意生身 生。及無漏業生。依無明住地。有緣非無緣。是故三種意生及無漏業緣無明住地。世 尊如是有愛住地數四住地。不與無明住地業同。無明住地異離四住地。佛地所斷。佛 菩提智所斷。何以故。阿羅漢辟支佛。斷四種住地。無漏不盡不得自在力。亦不作證 。無漏不盡者。即是無明住地。世尊。阿羅漢辟支佛最後身菩薩。為無明住地之所覆 障故。於彼彼法不知不覺。以不知見故。所應斷者不斷不究竟。以不斷故。名有餘過 解脫。非離一切過解脫。名有餘清淨。非一切清淨。名成就有餘功德。非一切功德。 以成就有餘解脫有餘清淨有餘功德故。知有餘苦。斷有餘集。證有餘滅。修有餘道。 是名得少分涅槃。得少分涅槃者。名向涅槃界。若知一切苦。斷一切集。證一切滅。 修一切道。於無常壞世間。無常病世間。得常住涅槃。於無覆護世間無依世間。為護 為依。何以故。法無優劣故得涅槃。智慧等故得涅槃。解脫等故得涅槃。清淨等故得 涅槃。是故涅槃一味等味。謂解脫味。世尊。若無明住地。不斷不究竟者。不得一味 等味謂明解脫味。何以故。無明住地不斷不究竟者。過恒沙等所應斷法。不斷不究竟 P. 6 。過恒沙等所應斷法不斷故。過恒沙等法應得不得應證不證。是故無明住地積聚生一 切修道斷煩惱上煩惱。彼生心上煩惱。止上煩惱。觀上煩惱。禪上煩惱。正受上煩惱 。方便上煩惱。智上煩惱。果上煩惱。得上煩惱。力上煩惱。無畏上煩惱。如是過恒 沙等上煩惱。如來菩提智所斷。一切皆依無明住地之所建立。一切上煩惱起。皆因無 明住地緣無明住地。世尊。於此起煩惱剎那心剎那相應。世尊。心不相應無始無明住 地。世尊。若復過於恒沙如來菩提智所應斷法。一切皆是無明住地所持所建立。譬如 一切種子皆依地生建立增長若地壞者彼亦隨壞。如是過恒沙等如來菩提智所應斷法。 一切皆依無明住地生建立增長。若無明住地斷者。過恒沙等如來菩提智所應斷法。皆 亦隨斷。如是一切煩惱上煩惱斷。過恒沙等如來所得一切諸法通達無礙一切智見。離 一切過惡。得一切功德法王法主。而得自在。登一切法自在之地。如來應等正覺正師 子吼。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辦不受後有。是故世尊。以師子吼依於了義。一向記 說   世尊。不受後有智有二種。謂如來以無上調御。降伏四魔出一切世間。為一切眾 生之所瞻仰。得不思議法身。於一切爾焰地得無礙法自在。於上更無所作無所得地。 十力勇猛昇於第一無上無畏之地。一切爾炎無礙智觀不由於他。不受後有智師子吼。 世尊。阿羅漢辟支佛。度生死畏次第得解脫樂。作是念。我離生死恐怖不受生死苦。 世尊。阿羅漢辟支佛觀察時。得不受後有觀第一蘇息處涅槃地。世尊。彼先所得地。 不愚於法不由於他。亦自知得有餘地。必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聲聞緣 覺乘皆入大乘。大乘者即是佛乘。是故三乘即是一乘。得一乘者。得阿耨多羅三藐三 菩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即是涅槃界。涅槃界者即是如來法身。得究竟法身者 。則究竟一乘。無異如來無異法身。如來即法身。得究竟法身者。則究竟一乘。究竟 者即是無邊不斷   世尊。如來無有限齊時。住如來應等正覺後際等住。如來無限齊。大悲亦無限齊 。安慰世間。無限大悲無限安慰世間。作是說者。是名善說如來。若復說言無盡法常 住法一切世間之所歸依者。亦名善說如來。是故於未度世間無依世間。與後際等作無 盡歸依常住歸依者。謂如來應等正覺也。法者即是說一乘道。僧者是三乘眾。此二歸 依非究竟歸依。名少分歸依。何以故。說一乘道法。得究竟法身。於上更無說一乘法 身。三乘眾者有恐怖歸依如來。求出修學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故二依非究竟依 。是有限依。若有眾生如來調伏。歸依如來得法津澤。生信樂心歸依法僧。是二歸依 非此二歸依。是歸依如來。歸依第一義者。是歸依如來。此二歸依第一義。是究竟歸 依如來。何以故。無異如來。無異二歸依。如來即三歸依。何以故。說一乘道。如來 四無畏成就師子吼說。若如來隨彼所欲而方便說。即是大乘無有三乘。三乘者入於一 乘。一乘者即第一義乘 P. 7 無邊聖諦章第六   世尊。聲聞緣覺初觀聖諦以一智斷諸住地。以一智四斷知功德作證亦善知此四法 義。世尊。無有出世間上上智。四智漸至及四緣漸至。無漸至法是出世間上上智。世 尊。金剛喻者是第一義智。世尊。非聲聞緣覺不斷無明住地初聖諦智是第一義智。世 尊。以無二聖諦智。斷諸住地。世尊。如來應等正覺。非一切聲聞緣覺境界不思議空 智。斷一切煩惱藏。世尊。若壞一切煩惱藏究竟智。是名第一義智。初聖諦智。非究 竟智。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智   世尊。聖義者。非一切聲聞緣覺。聲聞緣覺成就有量功德。聲聞緣覺成就少分功 德。故名之為聖。聖諦者。非聲聞緣覺諦。亦非聲聞緣覺功德。世尊。此諦如來應等 正覺初始覺知。然後為無明 藏世間開現演說。是故名聖諦 如來藏章第七   聖諦者說甚深義。微細難知。非思量境界。是智者所知。一切世間所不能信。何 以故。此說甚深如來之藏。如來藏者。是如來境界。非一切聲聞緣覺所知。如來藏處 。說聖諦義。如來藏處甚深故。說聖諦亦甚深。微細難知。非思量境界。是智者所知 。一切世間所不能信 法身章第八   若於無量煩惱藏所纏如來藏不疑惑者。於出無量煩惱藏法身亦無疑惑。於說如來 藏。如來法身不思議佛境界及方便說。心得決定者此則信解說二聖諦。如是難知難解 者。謂說二聖諦義。何等為說二聖諦義。謂說作聖諦義。說無作聖諦義。說作聖諦義 者。是說有量四聖諦。何以故。非因他能知一切苦斷一切集證一切滅修一切道。是故 世尊。有有為生死無為生死。涅槃亦如是。有餘及無餘。說無作聖諦義者。說無量四 聖諦義。何以故。能以自力知一切受苦斷一切受集證一切受滅修一切受滅道。如是八 聖諦。如來說四聖諦。如是四無作聖諦義。唯如來應等正覺事究竟。非阿羅漢辟支佛 事究竟。何以故。非下中上法得涅槃。何以故。如來應等正覺。於無作四聖諦義事究 竟。以一切如來應等正覺。知一切未來苦斷一切煩惱上煩惱所攝受一切集滅一切意生 身除。一切苦滅作證。世尊。非壞法故。名為苦滅。所言苦滅者。名無始無作無起無 盡離。盡常住自性清淨離一切煩惱藏。世尊。過於恒沙不離不脫不異不思議佛法成就 說如來法身。世尊。如是如來法身不離煩惱藏名如來藏 空義隱覆真實章第九   世尊。如來藏智。是如來空智。世尊如來藏者。一切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本 所不見本所不得   世尊。有二種如來藏空智。世尊。空如來藏。若離若脫若異。一切煩惱藏。世尊 。不空如來藏。過於恒沙不離不脫不異不思議佛法。世尊。此二空智。諸大聲聞。能 信如來。一切阿羅漢辟支佛。空智於四不顛倒境界轉。是故一切阿羅漢辟支佛。本所 P. 8 不見。本所不得。一切苦滅。唯佛得證。壞一切煩惱藏。修一切滅苦道 一諦章第十   世尊。此四聖諦。三是無常一是常。何以故。三諦入有為相。入有為相者。是無 常。無常者是虛妄法。虛妄法者。非諦非常非依。是故苦諦集諦道諦。非第一義諦。 非常非依 一依章第十一   一苦滅諦。離有為相。離有為相者是常。常者非虛妄法。非虛妄法者。是諦是常 是依。是故滅諦。是第一義 顛倒真實章第十二   不思議是滅諦。過一切眾生心識所緣。亦非一切阿羅漢辟支佛智慧境界。譬如生 盲不見眾色七日嬰兒不見日輪。苦滅諦者。亦復如是。非一切凡夫心識所緣。亦非二 乘智慧境界。凡夫識者二見顛倒。一切阿羅漢辟支佛智者。則是清淨。邊見者。凡夫 於五受陰我見妄想計著生二見。是名邊見。所謂常見斷見。見諸行無常。是斷見非正 見。見涅槃常。是常見非正見。妄想見故作如是見。於身諸根分別思惟現法見壞。於 有相續不見起於斷見。妄想見故。於心相續愚闇不解不知。剎那間意識境界起於常見 。妄想見故。此妄想見於彼義。若過若不及作異想分別。若斷若常。顛倒眾生於五受 陰。無常常想苦有樂想。無我我想。不淨淨想。一切阿羅漢辟支佛淨智者。於一切智 境界及如來法身本所不見。或有眾生。信佛語故。起常想樂想我想淨想。非顛倒見。 是名正見。何以故。如來法身是常波羅蜜樂波羅蜜。我波羅蜜。淨波羅蜜。於佛法身 。作是見者是名正見。正見者。是佛真子。從佛口生。從正法生。從法化生。得法餘 財。世尊淨智者。一切阿羅漢辟支佛。智波羅蜜。此淨智者。雖曰淨智。於彼滅諦。 尚非境界。況四依智。何以故。三乘初業。不愚於法。於彼義當覺當得。為彼故世尊 說四依。世尊此四依者。是世間法。世尊。一依者。一切依止。出世間上上第一義依 。所謂滅諦 自性清淨章第十三   世尊。生死者依如來藏。以如來藏故。說本際不可知。世尊。有如來藏故說生死 。是名善說。世尊。生死。生死者。諸受根沒。次第不受根起。是名生死。世尊。死 生者此二法是如來藏。世間言說故。有死有生。死者謂根壞。生者新諸根起。非如來 藏有生有死。如來藏者離有為相。如來藏常住不變。是故如來藏。是依是持是建立。 世尊。不離不斷不脫不異不思議佛法。世尊。斷脫異外有為法依持建立者。是如來藏 。世尊。若無如來藏者。不得厭苦樂求涅槃。何以故。於此六識及心法智。此七法剎 那不住。不種眾苦。不得厭苦樂求涅槃。世尊。如來藏者。無前際不起不滅法。種諸 苦得厭苦樂求涅槃。世尊。如來藏者。非我非眾生非命非人。如來藏者。墮身見眾生 顛倒眾生空亂意眾生。非其境界 P. 9   世尊。如來藏者。是法界藏。法身藏。出世間上上藏。自性清淨藏。此性清淨。 如來藏而客塵煩惱上煩惱所染。不思議如來境界。何以故。剎那善心非煩惱所染。剎 那不善心亦非煩惱所染。煩惱不觸心。心不觸煩惱。云何不觸法。而能得染心。世尊 。然有煩惱有煩惱染心。自性清淨心而有染者。難可了知。唯佛世尊。實眼實智。為 法根本。為通達法。為正法依。如實知見   勝鬘夫人說是難解之法問於佛時。佛即隨喜。如是如是。自性清淨心而有染污難 可了知。有二法難可了知。謂自性清淨心。難可了知。彼心為煩惱所染亦難了知。如 此二法。汝及成就大法菩薩摩訶薩乃能聽受。諸餘聲聞唯信佛語 真子章第十四   若我弟子隨信增上者。依明信已隨順法智。而得究竟。隨順法智者觀察施設根意 解境界。觀察業報。觀察阿羅漢眼。觀察心自在樂禪樂。觀察阿羅漢辟支佛大力菩薩 聖自在通。此五種巧便觀成就。於我滅後未來世中。我弟子隨信增上依於明信隨順法 智。自性清淨心。彼為煩惱染污而得究竟。是究竟者入大乘道因。信如來者。有是大 利益。不謗深義   爾時勝鬘白佛言。更有餘大利益。我當承佛威神復說斯義。佛言。更說。勝鬘白 佛言。三種善男子善女人。於甚深義離自毀傷。生大功德入大乘道。何等為三。謂若 善男子善女人。自成就甚深法智。若善男子善女人。成就隨順法智。若善男子善女人 。於諸深法不自了知。仰惟世尊。非我境界。唯佛所知。是名善男子善女人仰惟如來 。除此諸善男子善女人已 勝鬘章第十五   諸餘眾生。於諸甚深法堅著妄說違背正法習諸外道腐敗種子者。當以王力及天龍 鬼神力而調伏之。爾時勝鬘與諸眷屬頂禮佛足。佛言。善哉善哉。勝鬘。於甚深法方 便守護。降伏非法善得其宜。汝已親近百千億佛能說此義   爾時世尊。放勝光明普照大眾。身昇虛空高七多羅樹。足步虛空還舍衛國。時勝 鬘夫人與諸眷屬。合掌向佛觀無厭足。目不暫捨。過眼境已踊躍歡喜。各各稱歎如來 功德。具足念佛還入城中。向友稱王稱歎大乘。城中女人七歲已上。化以大乘。友稱 大王。亦以大乘化諸男子七歲已上。舉國人民皆向大乘   爾時世尊入祇桓林。告長老阿難。及念天帝釋。應時帝釋與諸眷屬。忽然而至住 於佛前。爾時世尊向天帝釋及長老阿難。廣說此經。說已告帝釋言。汝當受持讀誦此 經。憍尸迦。善男子善女人。於恒沙劫修菩提行。行六波羅蜜。若復善男子善女人。 聽受讀誦乃至執持經卷。福多於彼。何況廣為人說。是故憍尸迦。當讀誦此經為三十 三天分別廣說。復告阿難。汝亦受持讀誦。為四眾廣說。時天帝釋白佛言。世尊。當 何名斯經。云何奉持。佛告帝釋。此經成就無量無邊功德。一切聲聞緣覺。不能究竟 觀察知見。憍尸迦。當知此經甚深微妙大功德聚。今當為汝略說其名。諦聽諦聽善思 念之。時天帝釋及長老阿難白佛言。善哉世尊。唯然受教。佛言。此經歎如來真實第 P. 10 一義功德。如是受持。不思議大受。如是受持。一切願攝大願。如是受持。說不思議 攝受正法。如是受持。說入一乘。如是受持。說無邊聖諦。如是受持。說如來藏。如 是受持。說法身。如是受持。說空義隱覆真實。如是受持。說一諦。如是受持。說常 住安隱一依。如是受持。說顛倒真實。如是受持。說自性清淨心隱覆。如是受持。說 如來真子。如是受持。說勝鬘夫人師子吼。如是受持。復次憍尸迦。此經所說斷一切 疑。決定了義入一乘道。憍尸迦。今以此說勝鬘夫人師子吼經。付囑於汝。乃至法住 受持讀誦。廣分別說。帝釋白佛言。善哉世尊。頂受尊教。時天帝釋長老阿難及諸大 會天人阿修羅乾闥婆等。聞佛所說。歡喜奉行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   (茨田宿禰安麻呂七世父母現在父母六親眷屬一切無邊法界眾生誓願仕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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