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만행
9월 14일
어제가 추석이었다. 오늘과 내일도 추석 연휴지만 원만스님과 나는 다시 만행을 떠난다. 원만스님이 9월 21일에 인도로 출국하기에 만행할 시간이 많지않다. 첫번째 장소로 백장암에서 비교적 가까운 구혜 묘운스님의 꾸띠에 들리기로 하다. 구례에 도착하니 천은사 간판을 보다. 천은사는 아담하고 아늑한 절이어서 나그네의 마음을 절로 쉬게 한다. 특히 대웅전 뒤편의 방장선원은 아아늑하고 고요해서 정진하기에 그만이다. 선방의 마루에 앉아 있으니 시원한 계곡물 소리가 번뇌를 씻겨간다. 이곳에 선원을 지은 선배님들의 뜻이 분명 있었을 거다. 그런데 방장선원은 어제부터인가 템플스테이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공부하는 스님들이 선원에 모이지 않아서 그랬나? 아니면 템플스테이하는 수입이 더 나아서 그런가? 전통선원이 폐쇄되고 템플스테이 장소가 된 이곳이 현재 한국불교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절은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 돈을 받고 휴식하고 잠을 자고 식사하는 곳, 여관, 식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돈을 내지 않는 객스님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간다. 누구를 위해 사찰에서는 돈을 받는가? 이제 객은 하룻밤 묵어가기 위하여 템플스테이를 신청해야 하는 때가 되다.
구례 묘운스님꾸띠에 들리다. 작년에 총무원앞에서 설조스님이 단식할 때 묘운스님을 만났다. 설조스님의 단식이후에 나는 인도로 갔는데 묘운스님은 설조스님을 끝까지 모셨다. 그런데 재가자들과 여러 가지 갈등이 있어서 묘운스님도 그곳을 떠나왔다. 하도 복잡한 이야기들이라 기억하고 듣는 것 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한때 고락을 함께 했기에 스님을 찾은 것이다. 묘운스님은 상담심리를 오렛동안 하여온 분이다. 원만스님이 묘운스님이 보여준 카드에서 어머니를 닮은 동물과 자신을 닮은 동물을 고르면 묘운스님은 그 동물간의 관계를 비유하여 원만스님과 어머니 관계를 분석하고 설명해준다. 내가 엄마 아빠등 가족을 상징하는 인형을 골라서 책상앞에 놓으면 인형들이 놓여진 거리 방향등을 보고 서로의 관계를 설명한다. 심리상담이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놀이다. 묘운스님의 설명이 대충 맞는 것도 같다. 재가자를 상대하는 주지스님들이 배워서 사용하면 유익 하리라. 마지막으로 연극하듯이 어떤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상황극, 감성이 풍부한 원만스님은 빙의된 듯 상황극을 리얼하게 해냈다. 상황극에서 원만스님은 종상스님의 역을 맡았고 나는 자승스님의 역을 맡았다. 역지사지, 소꿉놀이 같은 것, 설계도 없이도 우리는 다양한 꿈을 꾸듯이 상황극에서 생각지 못한 말들이 튀어 나왔다. 우리가 일으키는 의도, 연기, 맹세, 축원, 기도, 관상, 염불등 모두가 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의 힘, 생각의 영향으로 우리의 인생이 변화한다. 부처님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중에서 의업이 가장 힘이 쎄다고 했지. 수행 아닌 것이 없다.
지리산을 빠져나와 충청도로 향하다. 전라도 경상남도는 지난번에 대충 훓었기에 이번에는 충청도와 경북으로 간다. 미리 문경 봉암사에 정진하시는 명진스님과 약속을 잡았다. 봉암사 가는 길에 우연히 눈에 띈 장수 팔성사에 들리다. 정갈한 노비구니스님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법당을 참배하고 나오며 나는 “불사 하시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겠습니다.”하고 도전적인 농을 건넸다. 비구니스님은 “저는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라고 답한다. 노스님의 대답에 할 말이 없다. 알고보니 그 스님은 원만스님과 같은 해에 출가한 노장스님이다. 열댓명의 상좌들과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노비구니 스님이 건네주는 고염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다. 대장부의 기상이 풍기는 스님의 이름은 법륜, 그렇게 쉼없이 법륜을 굴려오면서 평생도안 예불에 빠진적이 한번 밖에 없다한다. 게으름까지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나에겐 충격이다. 한참 화제가 되고 있는 조국법무부장관과 비구니회정선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다. 다행스럽게 나그네와 주인의 견해는 대동소이하다. 노비구니스님이 진보적이다. 다만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이해의 차이가 있다. 지나가는 객이기에 차이를 들추어 낼 것까지는 없을 듯 하여 얌전히 머물다 나오다. 스님은 맑은 미소로 마당에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해 주시다. 우연한 만남, 불꽃튀는 대화, 이것이 만행이 주는 묘미(妙味) 아닐까?
원만스님의 도반이 주지인 찬태산 영국사에 들리다. 영동 영국사에는 저녁 늦어서 도착했다. 다행히 원만스님을 반겨주는 주지스님덕분에 비어있는 템플스테이 방에서 하룻밤 묵다. “이런 오지가 다 있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영국사는 산속 깊숙한 곳에 있다. 영국사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천년묵은 은행나무, 가까이서 보니 나무둘레가 대단하다. 합장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행복하여지이다”라고 빌다. “일체중생이 행복하여지이다”는 너무 체감적이지 않기에 이렇게 마음을 내다. 영국사의 은행나무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일 것이라 은행나무덕에 포교하기가 쉽겠다. 발전가능성이 무궁한 곳이지만 지금은 살림이 어려운 듯하다. 과일 쪼가리라도 얻어 먹으려고 공양간을 찾았는데 비닐하우스가 공양간이다. 공양주보살님이 챙겨주는 배와 바나나를 먹다. 공양주보살님은 법당보살, 사무장등의 역활까지 감당하고 있다. 자비로운 보살님의 이야기를 나눌수록 애처로움이 묻어 나왔는데 이것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차이가 분명하기에 그랬을 것이다. 소통이 원활한 것이 행복이다. 원만스님은 인도에 가져갈 누룽지를 3봉지나 챙겼다. 나중에라도 보살님이 백장암에 들리면 좋겠다.
9월 15일
원만스님이 40년전에 들렸다는 황간 반야사에 오다. 재가자그룹이 미얀마스님을 모시고 위빠사나 수행 중이다. 공양시간을 기다릴겸해서 계곡을 산책하다가 산꼭대기 문수암까지 가다. 풍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자리에 문수암이 있다. 계곡물과 산이 태극모양을 이루며 흐르고 있어 풍수를 모르는 사람도 이곳이 비범한 곳이라는 것을 알것이다. “세상에나!”라는 감탄사가 되풀이 된다. 법당에서는 비구니스님이 홀로 절을 하고 있었는데 멋진 풍광과 고요한 절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원만스님과 내가 경치와 풍수를 논하느라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 비구니스님이 법당에서 나와서 문을 닫았다. 우리때문에 그런가하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공양하러 큰 절로 내려가기에 문을 잠그는 거란다. 우리는 법당 마루에 앉아 계곡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때 우리 눈앞에 보살님이 부처님께 올릴 송편을 들고 나타났다. 추석날 송편을 못 얻어먹은 나는 송편이 먹고 싶다고 말하다. 신심깊은 보살님은 부처님께 올려놓은 송편을 내려드시라고 말했다. 산꼭대기 문수암에서 송편을 먹게된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한 생각 일으킨 것에 대한 감응이라고 원만스님이 설명했다. 백장암에서 송편을 못먹었다는 사실을 나는 원만스님께 몇 번 말했다. 그 송편이 떡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점심공양시간에도 벌어졌다. 반야사에 들어 올 때 나는 불쑥 생선이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원만스님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절간에서 눈치가 빠르면 새우젓을 먹는다"는 속담을 꺼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점심상에 고등어 조림이 올라와 있지 않은가? 원만스님은 존경의 눈초리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고 나는 “나의 능력은 어디까지 인가?”라는 생각을 하게되다. 주지스님의 설명은 남방스님이 오셔서 명상지도를 하고 있기에 그스님을 위해서 생선을 밥상에 올리게 되었다 한다.
반야사에서 봉암사를 향해 가다가 상주를 지나가게 되다. 문득 상주에서 판넬집을 짓고 혼자사는 도반선우스님이 생각났다. 두꺼비처럼 한곳에 정착하면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도반을 어렵게 설득해서 함께 봉암사로 가다. 셋이서 만행을 하게 되니 흥겹다. 봉암사에 도착하기 전에 정토수련원이라는 표지판을 보다. 정토수련원 사무실에 근무하는 보덕심보살님이 무작정 찾은 나그네를 안내한다. 나는 88년도에 봉암사선원에서 공부할 때 와보고 오늘 두번째 온 것이다. 그때는 조그만 암자였는데 지금은 명산의 대찰이 되었다. 100일 출가 행자들이 20여명 들어와 있다고한다. 여러 가지 형태의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차 있어 방문객은 안내를 받아야 할 정도이니 법륜스님의 원력은 대단하다.
나는 봉암사에서 서암스님을 모시고 2철을 살았고 원만스님도 태고선원에 머문적이 있다한다. 총무원장 직선제 토론회도 이곳에서 열렸고 작년에 '승려결의대회'에도 봉암사 스님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도량 여기저기에서 건물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산철임에도 공부하러 들어와 있는 명진스님과 차를 마시다. 명진스님 방에서 차담을 하고 있을때 지나시던 적명스님도 들어오셨다. 객실을 안내 받고 차담을 하고 있는데 명진스님이 오셔서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
9월 16일
아침에 봉암사의 어른, 적명스님과 차담을 나누다. 적명스님의 침착한 법문을 오래 기억하려고 부분적으로 녹음하다. 마지막 당부가 인상적이다. 수행자가 두가지를 버려야 하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욕망이고 둘째는 깨닫겠다는 욕망이다. 공부가 안되어서 고민이 많았는데 깨닫겠다는 욕망을 버리니 그때부터 공부가 되더란다. 요긴한 말씀이다. 백장암 공양게송 중에 ‘깨닫고자 받습니다.’라는 게송이 문제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되다. 청정도론 어느 구절에 대한 스님의 설명은 동의하기 어렵다. 적명스님이 오늘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신 부분 "과의 증득이란 무엇인가? 성스러운 과가 소멸에 안지함(安止)이 과의 증득이다." 라는 대목이다. 빠알리로는 "Tattha kā phalasamāpattīti yā ariyaphalassa nirodhe appanā"
처소격인 nirodhe를 소멸이라고만 보지말고 열반이라고 보면 문제가 없을 듯하다.(所謂「什麼是果定」,是指以滅(涅槃)〔為所緣之〕聖果的安止) 나중에 자료를 찾아서 편지를 드리던지 다시 방문하든지 해야겠다. 주지 원광스님과는 도로명주소 변경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새로 이주한 귀농자들이 봉암사에서 하는 일에 비협조적이라한다. 그래서 절에서 주도하기 보다는 마을 이장님이 주도하여 서명을 받고 있다고한다. 봉암사에 주소지를 둔 대중이 70명이나 된다고 하니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괴산 각연사 연꽃 도량에 도착하다. 법당에서 앉아있으니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사시예불을 하기 위해 나오는 주지스님을 마당에서 마주쳤다. 주지스님은 기록에 의하면 각연사가 보리연사였는데 각연사로 바꼈다고한다. 옛이름을 되찾는 것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셨다. 점심공양시간을 기다리기위해 차실에서 웅엉차를 마시다. 햇살이 내리비추는 도량을 바라보다. 마음이 절로 한가해진다. 마당에는 보리수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가을이 깊어가는 산사(山寺)다. 공양주보살님이 해주신 맛있는 된장찌개와 부침개 그리고 호박잎을 맛나게 먹다. 주지스님은 은사스님의 책을 주신다.
서암스님이 머무시던 원적사로 향하다. 서암스님이 계셨던 절이기도 하고 하안거를 같이 지낸 덕유스님이 8년이나 주지소임을 살았던 곳이다. 원적사에 오르는 비탈길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가파르다는 생각이 들다. 천장암 길의 가파름은 아무것도 아니다. 원만스님과 선우스님과 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을 오르며 몇 번을 쉬었다. 길이 하도 가파르니 차량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열쇠를 채워놨다. 힘들게 오른 원적사는 3동의 건물이 일자로 놓여져 있다. 절을 지을 터가 나올 수 없는 곳인데 축대를 높이 쌓아서 절을 지어 요새처럼 느껴진다. 도량에 스님은 보이지 않고 개 한마리가 계속 짖어댄다. 서암스님의 사진이 걸려있는 다실에서 차를 마시다.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는데 선우스님이 자신의 꾸띠에 돌아가길 원한다. 원만스님은 상주병원에 감기예방주사 맞기를 원한다. 그래서 상주 병원에 들리고 선우스님이 사주는 저녁을 먹다. 오후불식이라 거부하고 싶었지만 선우스님 혼자서 저녁을 먹어야 하기에 억지로 먹다. 선우스님 꾸띠로 돌아와서 1박하다. 객실은 종무소와 식당으로 사용하는 판넬 건물이다.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선우스님의 말문이 터져서 즉설주왈하는 시간이 길었다. 이야기를 듣는 원만스님의 난감한 표정이 가히 혼자보기 아까워서 사진을 찍다.
9월 17일
좀더 머물다가라는 선우스님의 부탁을 물리치고 탄구스님이 사는 구미 소월암에오다. 탄구스님은 포교를 위해서 요가교실을 시작했다. 마침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는데 아주머니 4분이 요가교실에 등록하기위해 방문했다. 학해스님이 합류하여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구미저수지로 가서 산책 하다. 산책하기 좋게 환경을 조성해 놓아 산책하는 시민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산책을 하다가 찻집에 앉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탄구스님은 지타일시성불도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탄구스님을 반박하는 원만스님의 비유가 성공하지 못하다. 나는 탄구스님의 의견에 동의하며 학해스님의 의견을 반박하다. 학해스님은 피곤하다며 먼저 자리를 뜬다. 탄구스님은 '전법륜경'과 '사문과경'의 차이를 거론하며 수행법의 차이를 말한다. 나는 각각의 경을 설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며 동등하게 비교해서는 곤란하다 말하다. 경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탄구스님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구나라고 느끼다.
탄구스님과 헤어지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칠곡 보덕사로 가다. 내가 보덕사스님의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것을 보고 원만스님이 만나 뵙고 싶어했다.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 알이 좋은 자두1박스를 사들고 노스님을 찾았다. 노스님은 이번에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지난번 우리가 다녀간 소감을 들려주셨다. 매일 일기를 쓰기에 그날 일도 일기에도 썼다고 한다. 우선 내가 맨발로 찾아온 것에 대해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그날 나는 스님방에 도착해서야 내가 맨발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급히 “맨발로 찾아뵈서 죄송합니다”라고 변명을 했다. 그런데 지금 그 맨발을 다시 거론하시는 걸보니 그때 나의 사과는 효과가 없었나보다. 게다가 나는 보덕사 불자들을 보고 스님을 보고 인사를 안한다고 한마디 했는데 그것 또한 전해 들었다고 하신다. 신도님들이 인사를 안한 것은 맨발로 법당에 들어와서 그랬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스님 앞에서 ‘맨발의 청춘’은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되었다. 원만스님이 인도에서는 맨발로 산다고 거들었지만 로마에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대답으로 가볍게 제압당했다. 인도를 4번가고 미얀마를 9번 다녀오셨다는 스님은 미얀마 많이간 것은 미얀마불자들의 신심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이야기 끝에 스님은 당신이 포교하는 방법을 들려주신다. 스님은 매일 1시간 이상 신도님들을 위해 법당에서 기도를 드린다. 연등은 5만원이상 받는데 얼마를 내든 등 크기는 같다. 연등을 어느 위치에 달았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신도들도 나의 등이 어디에 달렸는지 묻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에게 믿음이 있기때문이다. 스님은 어느절에 가거나 먼저 등을 달고 신도들에게도 권한다. 신도집에 엽서를 보낼 때는 스님이 찍으신 사진을 하나하나 붙이는 정성을 들인다. 봉축법회때 관욕단 앞에 보시함을 두지 않는다. 관욕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신도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이다. 정초에는 각자가 속마음을 담은 편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써오게 한다. 함께 기도한 후에 편지를 태운다. 결코 누구도 뜯어보지 않는 편지, 그래서 솔직하게 자기의 마음을 드러내는 편지를 쓰게해서 스스로 치유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객스님들이 오면 누구든지 웃으며 1만원식 주는데 1년에 약 3백만원 정도가 객비로 나간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객들에게 주는 객비보다 훨씬 많이 주셨다. 객비 받은 것도 좋지만 선배님께 좋은 말씀을 들은 것이 더 소중하다. 이러한 선배스님을 만난 것이 만행의 보람일 것이다.
보덕사에서 나오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어디에서 하룻밤을 묵을 것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객이 할 수 있는 즐거운 생각이자 고민이다. 은해사로 가기 위해 출발했는데 송림사라는 간판을 보고 들렸다. 법당앞에는 벽돌로 만든 전탑이 웅장하다.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데 안내문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보물이라한다. 미얀마에서 받아온 사리도 친견할 수 있었다. 잔디밭으로 둘러쌓인 어스름한 도량이 도량이 이뻐서 마루에 한동안 앉아있다. 원만스님이 호기있게 객실을 물어 보았으나 확답을 얻지 못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오래 기다릴수가 없어 가까운 동화사 선원으로 향하다.
동화사가는 길에 파계사 간판을 보고 파계사에 당도하다. 애초에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라는 것이 무의미하고 목적지라는 것이 부질없기 때문이다. 젊은 스님에게 객실을 물으니 다행스럽게 안내를 해준다. 객실이 있는 절을 오랜만이다. 내일이면 이제 만행을 정리해야한다. 오늘이 마지막 밤인 것이다. 따듯한 방에서 잘 자고 주지스님을 찾아뵈려 했으나 못 뵙고 산내암자인 성전암에 오르다. “아직도 이렇게 걸어 올라가는 절이 있다니...”라고 생각하며 절에 도착하다. 스님들이 방에서 우르르 걸어 나왔다. 마당에서 주지스님과 원순스님과 대화를 하다가 선원장스님인 벽담스님과 차를 마시다. 잣이 곁들여진 커피가 도특하다. 성전암에서 산철결제하는 이야기 신도들과 공부하는 이야기를 듣다. 성전암에서는 원각경, 승만경, 무량수경을 공부하는데 죽음을 대비하여 내생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 마음이 청정하면 그곳이 현실의 극락이므로 극락에서 살기위함이요, 법장비구의 원력을 배우기 위해서 무량수경을 읽는다고 한다. 승만경은 여성불자들이 성불할수 있다는 희망과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선객의 입장에서 대승경전을 이해하는 신선한 입장이다. 바나나를 챙겨주시려는 것을 사양하고 하산하다. 만행하는 중에 만난 풍경(山)과 사찰(寺)과 사람(人) 중에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다시 깨닫다. 산세가 아무리 좋고 사찰이 크고 화려해도 수행자다은 사람이 없거나 바르게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곳을 좋은 도량, 수행처라고 말하기 힘들다.
성전암을 나와서 은해사로 향하다. 은해사의 산내암자중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묘봉암에 오르다. 묘봉암을 오르는 길이 하도 아름다워 감탄하다. 햇살과 나무그늘이 그려내는 길위에 아롱거리는 움직이는 그림은 나그네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 길은 어쩌면 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우리가 사라져갈 길이고, 애인을 만나게될 길이고, 꿈에서 보일 길이고, 여우가 나타날 길이다. 나의 감탄에 원만스님은 예술적인 감각이 늘어간다고 평하다. 아름다움에 놀라는 가슴이 없이 어찌 만행이 가능할까? 크하
묘봉암은 기대했던 상상속의 묘봉암이 아니다. 암자의 위치나 법당의 생김새는 탁월하나 도량을 가꾸는 안목은 낙제점이다. 프라스틱 지붕으로 설치해놓은 용왕단은 없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눈썰미가 둔한 원만스님도 이 문제 만큼은 동의했다. 이곳의 주지는 선사의 기질을 좋아하는 듯했고 일요법회를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무도 없는 암자에서나그네들이 나무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중암암에들리다. 묘봉암보다는 도량정리가 잘 되어 있고 기도객도 많다. 바위를 이용해서 도량을 가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티벳전통인 마니차도 있고 법당의 장판도 깨끗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공양주보살이 우리를 보고 아무말 없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기서 공양을 얻어먹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다. 운부암으로 공양을 얻어먹기 위해 길을 재촉하다.
도량 곳곳에 참선하는 곳이니 출입을 삼가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대웅전으로 들어서니 도량의 고요함이 짙게 베어나왔다. 우리는 그 고요함을 즐기기 위해서 잠시 누각마루에 앉다. “갑자기 맞닿뜨린 고요함” 법당을 참배하고 나오는 길에 저쪽에 바짝마른 노비구니스님이 보였다. 운부암에 웬 비구니스님? 하는 궁금증으로 다가가는데 이곳은 운부암이 아니라 비구니선원인 백흥암이고 그 스님은 선원장 영운스님이란다. 아 어쩐지, 절간이 풍기는 고요함과 정갈함이 비구스님 절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하다라고 생각했는데...여기가 백흥암이구나! 비구니절이니 점심공양을 얻어먹기가 힘들어졌다. 마침 오늘은 비구니회장을 선출하는 선거일이라 대중이 모두 서울로 올라가서 남아있는 사람들은 각자가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단다. 라면이라도 끓여드릴까요?라고 공양주보살이 묻는데 원만스님은 라면을 싫어한다. 배고픔을 느끼며 차를 타려는데 공양주보살이 담장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친다. 남은 밥이라도 차려드릴 테에니 드시고 가라고. 절을 찾아온 객을 그냥 떠나보내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나보다. 우리는 다시 차에서 내려 공양방으로 향했다. 보살님이 챙겨주는 밥과 정갈한 반찬을 먹고 과일까지 먹으니 포만감이 든다. 이렇게 백흥암에서 어렵게 점심을 먹는 행운으로 우리의 만행은 끝나는 구나. 다큐영화 ‘길 위에서’를 찍은 곳이 이곳이다. 밥을 차려준 보살님은 당신도 영화에 한토막 나온다고 했다. 영화에 출연한 스님들은 다른 곳으로 다 떠났다고. 백흥암의 고요와 공양을 끝으로 만행이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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