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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영화 ‘생일’을 보고나서

영화 생일을 보고나서

 

충남서산 천장사 주지소임을 볼 때 였다. 저녁늦게 혹은 이른 아침에 감자나 땅콩 고추등을 절에 보시하고 가는 부부가 있었다. 거사님은 이웃 마을에 이장 소임을 보는 분이었고 보살님도 부녀회장등 마을의 대소사를 맡아보는 부부였다. 두분의 사리가 너무 좋아서 논밭에서 일할 때나 산으로 나물 뜯으러 다닐 때 항상 같이 다녔다. 나는 그분들이 농산물을 보시도 할겸 따듯한 공양을 대접하고 싶다고 해서 그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신들이 직접 농사짓고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 반찬으로 진수성찬을 대접받았다. 공양후 그들은 왜 당신들이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하는 지를 설명했다. 5년전에 그들의 하나뿐인 아들이 오토바이사고를 당했다. 아들이 친구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길을 달리던중 트럭과 부딪쳐서 아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친구는 뇌를 다쳐 불구자가 되었다. 절에서 마을을 지나 시자에갈 때 길가에 나와서 하늘을 보거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뇌이는 청년이 그때 사고를 당한 친구라는 것이다. 보살님은 보채는 아들에게 오토바이를 사준 것을 후회하고 후회하며 울었다. 슬픔에 겨워 아무 일도 하지 못하자 그들은 밤낮으로 일을 하는 것으로 슬픔을 잊어보려고 했다. 남의 논 3만평을 빌려서 밤낮으로 일하며 스스로를 벌했다. 그렇게 몸을 학대시키고 나면 그제서야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았기에 절에 보시물을 가여올때도 밤중이거나 새벽에 놓고갔던 것이다. 그 부부는 아들이 쓰던 방을 가르켰다, 방안에는 5년전에 아들이 사용하던 야구모자며 공책이며 책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영화 생일에도 세월호 참사로 떠나간 수호의 방이 나왔다. 그 방도 살아생전에 수호가 사용하던 그상태로 남아있었다. 나는 그방을 보자마자 그 부부의 아들방이 생각나 눈물이 흘렀다. 수호의 방을 보자 참사후 부모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팽목항을 한번도 가본적이 없기에 내 눈물은 그런 미안함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후로 영화에서 평쳐지는 잔잔한 화면이 모두 슬픔으로 다가왔다.  하나의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보긴 처음이다.

    



 

며칠후 나는 그 부부가 아들을 위해 부탁하는 천도재를 지냈다. 5년전의 아들이 천도되리라는 기대 보다는 그들에게 그만 아들을 떠나보내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 의식이 그들에게 위안을 주길 바랬다. 이제 천도재를 지냈으니 아들방을 치우라고 충고했는데 그들이 아들방을 치웠는지는 모르겠다. 문득 생일을 보니 그 부부가 사는 집에 들려야 겠다는 생각이들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아들 방을 치우지 않았더라도 그들을 나무라지는 못할 것 같다. 영화가 끝났지만 너무 울어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주인공 가족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게 그렇게 되겠는가? 오늘 아침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보니 세월호에 있었던 VCR이 바꿔치기 당하는등 아직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선제대로 조사된 것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짐승같은 세월을 살아야 하는 우리라면 세월호  6주년이 되어도 우리는 또 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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