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철 만행1
생각해보니 미얀마에서 돌아온지 20일이 지났다. 귀국하자마자 세미나에 참석하고 환영회를 겸한 바자회, 종회의원선거를 치루어 낙선하고 강연회와 직선제 공청회를 마쳤다. 이틀전에 끝난 직선제 공청회는 재가자들보다 스님들이 더 많이 참석하였다. ‘스님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힘을 실어 드릴려고 왔다’는 후배스님의 말에 울컥하기도 했다. 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일이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해서 하는 일이기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였건만, 공청회에 참석해준 스님들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공존하다. 공청회를 치루고 개선해야 할 점들을 정리하였다. 수줍은 스님들의 마음을 열도록, 열정적인 토론이 되도록, 스님들에게 발언권을 많이 주고 스님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공청회를 끝내고 다음날 지방으로 내려가려는데 비가 내린다. 비를 피한다는 게 만화방이다. 그동안 열심히 굴린 뇌를 식혀주기 위한 이끌림, 혹은 휴식이 필요한 몸의 반응이 아니었을까. 만화를 보며 짜빠게티를 먹고 꽈배기를 우거적거리는 나는 대통령이 부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손에 걸린 만화는 ‘아버지’라는 일본만화,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혹은 무엇이라도 부탁해 지금은 무조건 긍정해 주겠어,라는 마음이 들게하는 책이었다. 그때 나의 부드러운 마음에 무송스님의 봉암사 가자는 제안이 떴다. 일찌감치 직선제가 종단의 희망임을 밝히신 적명스님을 만나러 같이가자는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다음날 가천대역에서 무송스님의 이백만원짜리 똥차를 타고 만행을 시작하다. 무송스님과 인연은 겨우 며칠전에 시작되었다. 10월 7일 밤 10시 30분쯤 광화문 구석 소나무 아래서 소신공양을 하신 정원스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차에 불자님들에게 정원스님 6재를 지내달라는 부탁을 받고 즉각 응했다. 광화문에 일찌감치 도착하니 가끔 인터넷으로 보았던 무송스님이 와있었다. 그 스님은 콧물을 자주 흘렸다. 정원스님 생전에 함께 사회운동을 하였다한다. 정원스님에 대한 궁금증을 몇마디 질문으로 풀고 그 스님과 나는 6재 염불을 시작했다. 나의 염불이 통통 튀는 시냇물 같다면 그 스님의 염불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 같다. 그는 정원스님의 분신에 부채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한때 사회운동의 끝에서 정원스님과 같은 분신을 심각하게 고려해보기도 했었고 정원스님으로부터 같이 분신하자는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말이 염불처럼 느렸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점점 목소리가 줄어들어 재차 묻기를 반복하며 대화를 나누다. 무송스님의 이야기를 선일스님에게 들은 적이 있다.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같이 한 적이 있다고, 행자만행을 많이 했다고, 보통사람과 다른 분위기를 가진 스님이라고...
그런 무송스님의 자가용 옆자리에 앉아 세종시를 향해 달린다. 차의 엔진소리가 천식에 걸린 듯하고 파도를 만난 배를 탄것처럼 출렁거린다. 얻어타고 가는 자의 미덕은 불평을 하지 않는 것. 봉암사에 가기전에 경원사 효림스님을 만났다. 94년도 개혁의 주역인 효림스님은 벌써부터 만나고 싶은 스님이었다.
가는길에 스님과 나는 행자생활이야기, 사형사제 이야기, 선방다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원사에 가까이 오자 동막골길이라는 이정표를 보였는데 아마 효림스님이 이 동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이곳에 절을 마련한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다. 효림스님은 무송스님과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허름한 복색에 약간 굽은 허리의 스님은 털털한 웃음으로 첫만남의 서먹함을 일시에 녹여 버렸다. 손을 다친 공양주보살님과 효림스님의 상좌스님과 사무장등이 정성껏 만들어준 카레를 먹으며 스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직선제를 하려면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언론과 자금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조언은 역시 일을 해본 사람의 조언. 직선제를 반대하는 논리 즉, ‘문중이 많은 곳에서 늘 유리하다.’ ‘비구니가 종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 ‘돈 선거가 심해진다’는 등의 문제제기에 ‘민주주의 사회에서 숫자가 많은 곳이 유리한건 당연한 거다.’ 그런 문제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것처럼 후보의 자질을 키워서 해결해야할 문제라고 일축했다. 구족계이상이면 누구에게나 투표권을 주어야 하고 공약 우편물 발송, 방송토론을 하고 대신 선거운동을 일체 못하게 하면 부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94년 개혁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시며 변화란 것은 준비된 자들의 것이며 운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경원사를 뒤로하고 문경으로 달렸다. 봉암사에 도착하니 저녁공양시간, 봉암사 저녁은 정갈하고 맛났다. 곧장 여기에 짐을 풀고 싶을 만큼... 맛의 위력에 매번 굴복당하는 나는 얼마나 애식(愛食)의 사람인가. 고국의 음식을 잊지 못해 다시 이 곳에 환생할 것이라는 나의 오래된 예감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가운데 공양을 마치고 도반 정과스님과 희봉스님을 만나 산책을 하였다. 늘 한발 앞서왔듯이 직선제 문제에서도 반발 앞서 있는 정과스님의 식견에 위로를 받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적명스님을 찾아뵈었다. 각자 소개를 하다가 정원스님의 분신이야기가 나오고 정원스님 인연으로 무송스님과 내가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참을성 없이 직선제 이야기를 꺼냈는데 익히 직선제를 지지하시는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직선제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말씀하시며 직선제를 하지 않는 것은 챙피한 일이라고 하셨다. 대화를 나누는 스님의 얼굴에 틈틈이 번지는 미소와 생기있는 표정에서 이 분이 곧 팔순을 바라보는 노스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다. 당신이 만나신 종단 지도부 스님들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직선제를 응원해 주시는데 여기에 찾아오길 잘했다며 서로를 침묵으로 응원하다. 희망을 너무 쉽게 말하지 말 것이며 절망에 너무 쉽게 빠지지 말라. 인생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극적이고, 변화무쌍하게 더 지켜볼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 하루였다. “지혜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라는 스님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다. ()
산철 만행2
아침 공양하러가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더 잤다. 무송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돌아와서 명진스님 방에가자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조금만더 하다가 명진스님방에 갔다. 명진스님은 갑자기 찾아온 우리를 보고 놀라며 반갑게 맞절을 하신다.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있는데 입승정과스님과 청중스님이 들어왔다. 봉암사에서는 산철안거가 본철 안거와 마찬가지로 매년 계속 되오고 있는 것이다. 수좌스님의 낭만적인 직선제 긍정에 대해서 명진스님은 냉철한 현실을 거론하며 종단의 변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직선제 운동은 의미 있는 것이라고 격려하셨다. 그동안 촛불집회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는데 이렇게 결제에 들어와서 미안하다면서도 모든 걸 내려놓고 정기적으로 선방에 들어오는 것이 당신의 생활 원칙이라고 했다. 이사(理事)를 이렇게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님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라’는 놀이처럼 때때로 멈추는 것, 멈출 때 보이는 것들, 안거가 선물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복용하는 스님의 삶이 여유있다. 청중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봉암사를 떠났다. 청중스님이 차담시간에 가끔 내쪽을 보며 눈을 깜박깜박해서 이상하게 생각되어 떠나는 마당에 법명을 물어봤다. 법명을 듣고서야 몇 달전에 해외에서 우연히 만난스님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기억력이 없으니 나를 보고 한눈을 찡그리며 인사하는 의미를 몰랐던 것. 미안시러라.
봉암사를 나오면서 김천직지사로 차를 달렸다. 무송스님은 수좌스님의 고매한 인품에 감명을 받은 듯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세상을 향해 열려진 수좌스님의 안목을 칭찬했다. 나도 수좌스님께 첫인사를 드리면서부터 저녁공양후에 할 일이 있으니 저녁예불후에 찾아오라며 양해를 구하시는 것, 친절하게 맞아주시며 상대방과의 대화를 미소속에서 이어가시는 모습이 급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산중에 계셔도 종단에 대한 애정이 깊으시고 직선제가 상식임을,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이 상식임을 거듭 말씀하시며 언제든지 집접 전화를 하라는 적극적인 제의가 어제의 일임에도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내편이라 좋은 분이다라는 생각을 넘어선 느낌이다. 세종시에서 문경, 문경에서 김천으로 내려오는 우리의 행보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다. 직지사에 도착해서 종무소에 들리니 주지스님은 손님을 맞고 계시다하여 교무스님이 우리에게 차대접을 하였다. 교무스님의 가슴에 혜창이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는데 이것도 중생들에게 서비스를 하려는 정신이라 생각되었다. 점심공양후 주지스님의 안내로 차담을 하였다. 주지스님 가슴에도 웅산이라는 명찰이 달려있다. 우리가 찾아온 이유를 물으시길레 직선제 발기인이 되주십사하고 부탁을 드리니 손을 저으시며 사양하신다. 제도보다 의식이 문제라는 스님의 비판에 제도가 개선되면 의식이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81%의 대중의 뜻이 모아졌는데도 의식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허락을 못 얻고 나와 전 주지 흥선스님의 방으로 갔다. 흥선스님은 방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개인 토굴도 없어서 갈 곳이 아직도 마땋치 않다고 하셨다. 말사주지를 끝낸 나도 갈 곳이 없지만, 본사주지를 끝낸 스님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은 매우 신선했다. 개인적인 부를 쌓치 않는 것이 출가자의 바른 자세인데 이렇게 돈을 모으지 않고 살면 머물 수 있는 방한칸 없다는 것을 보며 다시 직선제의 필요성을 절감하다. 스님은 직선제의 당위성에 공감하시며 도움이 된다면 이름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다. 직지사에서 나오며 공주 학림사로 향했다. 무송스님이 내일 촛불집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해서 서울쪽으로 주행하면서 들리기에 적당한 곳이 학림사였다. 생각해보니 법등스님은 선학원문제로 일을 할때도 서운한점이 있었고 이번에도 동참하지 않은 것도 서운했지만 이번에는 나의 요구가 무리한 것임을 알았다. 법등스님은 직선제를 주장하다가 염화미소법을 주장하였는데 다시 직선제를 지지해 달라고 했으니 갈지자 행보를 하기가 어려워 직선제을 지지하고 싶어도 지지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깨달은 것이다. 나의 지혜가 짧아 스님을 뇌고롭게 해드렸다.
무송스님과 학림사조실 대원스님과는 각별히 친한 사이처럼 보였다. 대원스님께 큰절인사를 드리니 무송스님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무송스님이 전화로 직선제이야기를 꺼냈을 때 절집 망하는 짓이라고 혼나는 것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직선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거침없는 무송스님 직선제를 툭 던졌다. 직선제를 하면 세속화된다는 이야기, 율장에 나오는 투표이야기를 하시며 직선제를 반대하시는데 나는 소임자를 뽑는 것은 비쟁사갈마이며 후보자가 2인이상이면 투표를 해서 뽑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소리높이고 다시 간선제의 폐단을 거론하며 그러면 이대로 두고 보잔 말이냐고 물었다. 스님은 선원, 율원등의 각 대표 8인정도가 나와서 마땅한 인물을 추천하는 추천제가 대안이라고 하셨다. 그때 비구니 스님들이 인사를 드리겠다고 들어와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서 직선제방법을 말씀드리면 직선제를 지지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기회를 보기로 하고 절을 떠났다. 서산에서 저녁을 먹고 무송스님과도 헤어졌다. 이틀동안 무송스님과 다녀서 어른 스님들을 만나 직선제 이야기를 나눈 것은 무송스님의 적극성 때문이었다. 스스로 운전을 해 주겠다고 제안을 하고 동행을 해준 것이 고마웠다. 투철한 기자정신을 가진 사람처럼 누구를 대하든지 주늑들지 않고 거침없이 말거는 모습은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장점이다. 공심을 가지고 승가를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귀하다.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수행이 본업이다. 주지소임을 보기에 나설수 없다등등 다양한 이유로 스님들은 소극적인 삶을 살며 나서지 않고 있다. 그런면에서 무송스님의 실천력은 특별하다. 내일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그에게 축복을 보낸다. ()
산철만행3
부산역 ktx를 타고 가면서 나는 왜 부산을 가고 있나?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 무송스님을 만나러 부산 범어사로 가고 있고, 어른 스님을 찾아 뵙고 직선제 지지를 받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이렇게 묻고 답하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이다. 지쳐 있음이다. 공양시간보다 늦게 범어사 공양간에 도착하자 그때까지 무송스님이 의리있게 기다리고 있다. 행자님이 상을 치우려고 하였는데 객스님이 올거라고 밥상을 못 치우게 했다고 한다. 이틀만에 만났다. 이제 실실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공양을 하다. 정한 강사스님 방에서 차를 마시다가 범어사 선원장 스님을 찾아뵈다. 범어사 선방에서 안거를 지낸지 16년만에 선방에 들려 감회가 새롭다.건강해 보이는 선원장스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선원장스님은 직선제에 대한 여러 가지 걱정을 하시면서도 직선제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하셨다. 스님의 진지한 결론에 한껏 고무되어 무비스님방에 들르다. 병색이 있는 스님은 우리의 요구를 정치에 관여하는 행위라고 보고 당신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셨다. 무송스님에게 ‘공부 열심히 하는줄 알았더니...’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겸연쩍게 웃는 무송스님을 보고 밖으로 나와서 내가 스님 그때 ‘공부가 뭐냐고 묻지 그랬어요?’ 라고 묻자, ‘에이 환자인데...’하면서 대답했다. 몸이 아프신 분에게 직선제가 무슨 소용이랴는 생각을 하면서도 공부가 무엇인지 묻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방장스님을 찾아뵈려 안양암을 찾았으나 감기기운이 있으셔서 며칠후에 찾아뵈면 좋겠다는 시자스님의 충고를 받아들여 강주스님 방을 찾았다. 조직사회에 있으므로 개인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어렵다는 답을 듣다. 오늘은 1달에 1번있는 무비스님의 화엄경 강의 날, 무송스님의 권유로 문수선원에서 무비스님의 강의를 듣다. 강사와 학인들간에 오고가는 질문이 전혀없는 수업방식에 1시간만에 자리를 뜨다. 3년 개근이라는 무송스님은 질문이 없는 수업방식에 별 불만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천장사 일요법회때부터 ‘듣는 불교에서 말하는 불교로’ 변화를 꾀하던 내게는 듣기만 하는 강의는 매력이 없었다. 강의장을 빠져나와 천장사 선원에 세철을 사셨던 무주스님께 연락을 했다. 무주스님은 반갑게 건강약국까지 마중을 나오셔서 저녁을 사주셨다. 우리가 저녁을 다 먹으니 그제야 무송스님이 우리와 합류 하였다. 무주스님은 우리를 당신의 신도님집으로 안내했다. 차를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스님께서 수선화보살님께 스님들에게 보시하라고 명하셨다. 보살님은 비상금이라며 우리에게 봉투를 내미셨다. 무주스님이 별도로 차비를 주셨음에도 다시 보살님에게 차비를 주게하니 송구스럽다. 스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수선화보살님이 너무 자연스러워 다시 냉큼 보시를 받다. 2평쯤 되는 스님의 방은 각종 그림 글씨와 전각들로 꽉 채워져 있다. 혼자 누우면 꽉차는 공간에 셋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 천장사에 살때부터 스님의 처소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와보니 보물이 가득한 다락방에 호기심을 가득 부려놓다. 부탄을 사용하는 가스렌지에 차를 끓여 목련차를 대접하고 다시 무슨차를 대접하고 담배까지 내민다. 다른 때 같으면 거절했을 테지만 지금은 어쩐지 거절해선 안될 풍경이다. 셋이서 담배를 빠는데 갑자기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느낌, 연기 때문에 미닫이문을 열다. 춥다. 한쪽 구석에는 무주스님의 부모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분들도 이곳에서 사셨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배웅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가난하지만 가난을 즐기는 듯한 스님을 보면서...‘나그네 설음’을 함께 부르며 부르다. 오늘도 걷는 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산철만행4
무주스님이 어제 차에 배낭을 두고 갔다며 아침에 숙소에 들렸다. 아침일찍 찾아갈 데가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자신보다 더 가난한 스님들과 객비를 얻으러 간 것이다. 살아오면서 많은 스님을 보아왔지만 무주스님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스님도 없다. 제2의 중광이라 할만치 격식 갖추는 것을 싫어하고 옷을 갈아 입지 않는다. 조촐하고 담백한 한없이 편안해지는 선화를 잘 그리며 유화도 그리고 서각도 잘하신다. 게다가 골초라고 할만치 담배를 좋아하시고 청초한 이슬방울 소주를 사랑하신다. 말끝마다 입술아래로 떨어지는 욕도 기발하다. 요즘도 틈틈이 전국을 다니며 차비를 탁발하는 객승의 삶을 사는데 얼굴을 익히 아는 주지스님들로부터 ‘아직도 안죽었느냐’는 인사를 받는단다. 사람들의 멸시와 없신여김을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도 무주스님의 내공이다. 무주스님을 오래동안 지켜본 부산의 수산화보살님을 비롯한 몇몇 보살님들에게는 무주스님이야 말로 진짜스님이라는 찬탄을 받는다. 하지만 선방스님들과 주지스님들에게는 괴각, 짜증나는 객승, 알콜중독자라는 비난을 듣는 그는 어제 내게 주신 이십만원 차비를 주셨다. 이 추운 날씨에 몇 군데 사찰을 다녀야 나에게 준 차비를 벌어오실까?
무주스님이 준 차비로 우리는 숙소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다. 해장할 일도 없는데 해장을 하고 풀 것 없는 마음을 풀어놓다.
양산에 위치한 홍법사를 향해 달리다. 멀리서도 보이는 좌불상에 감탄을 하면서 절에 들어섰으나 마침 주지스님은 신도님들과 순례를 떠났다. 법당에 참회문을 낭독하는 신도님들의 틈에 앉아 있으니 사무실 보살님이 다가와 찾아온 이유를 물으신다. 뭔가 체계가 잘 잡힌 느낌. 역시나 오늘도 매달 순례를 가는데 오늘 순례에는 팔백여명의 신도님들이 동참한다고 한다. 10여년전에 건립된 절의 구조를 살펴보니 주지스님의 아이디어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여기는 되겠어!라는 생각이 절로들다. 포교원장을 지내신 감로사 혜총스님을 찾아뵙다. 천불전에서 사시마지를 올리고 계셨다. 포교원장직을 수행하느라 불사도 신도교육도 손을 놓았었다고 하시며 썰렁한 절 분위기를 설명하신다. 점심공양후 외출하시려는 스님과 차담을 나누다. 종단성역화불사 상임대표 소임을 맡으셔서 화주를 하기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절에 머무시는 때가 별로 없다고. 직선제는 적극 찬성하셨다. 차담을 나누며 자운스님을 모시던 이야기, 수행하신 이야기, 삼성 이건희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권하셨다는 이야기등등...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300만이 떠나간 불교임에도 불교는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동의하기 어려웠다. 오전에 약속된 하림스님과의 약속을 지키려 서둘러 미타선원으로 향했다. 하림스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의기투합하지는 못하다. 주지 종호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통도사로 출발. 하림스님과 종호스님이 서로 힘을 합쳐서 미타선원을 운영하려는 모습에 흐뭇함을 머금다.
하림스님은 먼저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은 뒤따르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무송스님이 책임지라는 말에는 책임지겠다고 말해야 하는거라고 나를 찔렀다. 생각해보니 그 말도 옳았다. 책임진다는 말을 못하게 하는 나의 내면은 정직함을 가장 한 비겁함이 아니었을까? 말하기 연습을 해야한다는 무송스님의 충고에 말하기를 가르치는 학원을 알아보라고 답하다. 양산에서 쟁반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늦게 무용스님의 토굴에 도착하다. 보이차를 많이 가지고 있는 무용스님과 늦게까지 차를 마시다. 무송스님은 곧 잠에 떨어지고 나와 무용스님은 직선제의 당위성, 설득방법, 수좌들의 태도등등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 무용스님이 종단문제에 이렇게 관심을 갖고 있는 줄은 예전에는 몰랐다. 선방에 다니다 돌연히 동국대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무용스님의 행적을 떠올리면 종단문제에 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않다. 요즘 몸이 좋지 않아 활동을 거의 안한다고 한다. 몸이 냉병이 들어 도와주지 못함을 미안해 했다. 필요한때에 도와주지 않는 선일스님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내보이니 ‘그놈은 원래 그런놈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다.
산철만행5
아침 5시에 일어나 극락암으로 아침공양을 하러갔다. 극락암에는 대여섯명의 스님들이 공양을 하고 계셨는데 오랜만에 정묵스님 일연스님, 지암스님, 방원스님의 얼굴을 보았다. 공양후 지대방에서 차를 마셨다. 직선제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했으나 사람이 모이지 않아 다시 토굴로 돌아오다. 차를 마시다가 오랜 투명중이신 명정스님을 찾다. 붓글씨를 쓰시던 명정스님은 지친 얼굴로 우리를 맞다. 일주일에 두 번 투석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는데 얼굴만 핏기가 없을뿐 목소리에는 힘이 느껴졌다. 스님 특유의 진한 녹차를 대접해 주셨는데 다기가 아닌 수구에 녹차봉지 삼분의 이를 쏱으셨다. 수구에 물을 부어 찰랑찰랑 거릴 때 작은 잔에 차를 따르셨다. 으.. 짜... 우리는 명정스님께 얻어마시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한 짜디짠 차를 마셨다. 스님의 연세를 물으니 앞도 육육이요 뒤도 육육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총무원장 직선제를 물으니 총무원이 뭐여~라고 되 물으셨다. 무송스님은 스님이 차를 따르고 말하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는데 스님은 상관치 않으셨다. 방바닥에 스님이 써놓은 글씨 1장씩 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운 거리에서 동영상을 찍는 사람이나 찍히는 사람이나 지켜보는 사람이 보기엔 범상치 않다. 직선제 동의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이 기분 뭐지. ‘스님 건강하세요’라고 속으로 인사를 드렸다. 오후에는 통도사 주지스님과 유나스님을 찾아뵙다. 영배스님은 며칠후 산중총회가 있기에 지금 의사를 표현하기는 이르다고 답했고 영일스님은 다른 스님들에게 권유하여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영일스님의 적극적인 동참에 기운을 얻고 선방 지대방에가서 스님들과 차를 마시다. 해중석스님, 현도스님등 익히 얼굴을 아는 분들이 대여섯분 계셔서 이야기하기 편했다. 스님들이 궁금해 하시는 직선제의 부정적인 부분에 대한 보충설명을 열심히 설명해드렸는데 모든 선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시는 스님에게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해드리지는 못한 것 같다.
군위에 사시는 비구니회 회장스님을 만나기 위해 대구로 올라와서 경북대북문 근처에서 포교당을 하시는 도반스님을 찾았다. 사주를 봐주면서도 위빠사나를 가르치는 도반스님의 시도는 특별하다. 우궁스님은 학림의 도반인데 논리적인 토론능력을 가진 스님이다. 근처 칠곡 금곡사에 사시는 학해스님을 초청해서 저녁 먹을 때까지 여섯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직선제 문제가 결국은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라는 것, 타인을 위하는 삶이 나를 위하는 일이라는 이야기 등등 예전의 학림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전통사찰에서는 볼수 없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주와 위빠사나를 통합하여 가르치는 곳이라니...우궁스님의 포교당이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우궁스님의 시도가 어떠한 효과를 낼는지 궁금해진다. 격려하는 뜻에서 기쁘게 보시하고 학해스님 절로 향하다.
산철만행6
‘일체유심조’를 ‘누구라도 할 일이면 내가하자’, ‘언제라도 할 일이면 지금하자’라고 받아들인 내가 직선제가 불교개혁의 시발점임을 역설하고 다니는 것은 이상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런 확신과 자부심으로 오늘의 산철의 만행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 이 일을 포기 할 수 있는 길은 발견되지 않고 물러날 여지라고는 한 뼘도 없건만 때때로 떠오르는 의문에 걸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라도 쓰면 어쩔 수 없는 것이 되기에 그렇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나그네 설움, 동숙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학해스님은 평소에 말이 없다. 스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나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나는 궁금한게 많다. 특히 말이 없는 사람에게는. 늦잠을 자고 있는 나에게 아침을 차려 놨으니 공양하라고 부른다. 평소에 아침공양을 안하지만 정성이 괘씸해서 밥상 앞에 앉다. 차란 것이 별로 없다는 학해스님의 말은 정확하다. 젓가락이 허공에 머물다 낙하처를 찾지 못하다가 불시착하는 비행기처럼 밥상을 치고 내려앉는다. 얼른 밥을 먹고 갈길을 재촉하는 나그네에게, 오늘 스님들끼리 하는 공부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학해스님이 말한다. 예전에 스님들끼리 하는 공부모임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학해스님의 말을 어깨너머로 넘겨버리지 못했다. 근처 불교교양대학에 강의를 끝내고 늦게라도 공부모임에는 참석할거란다. 내가 거기 먼저 가있으면.
대구공부모임은 2시에 시작해서 9시에 끝난다. 그리고 다시 2부, 3부로 종단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흘러가다보면 자정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오늘은 나를 포함한 세분의 스님이 처음으로 참석하여 총 13분의 스님이 모였다. 이 공부모임은 5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빠알리어로 시작되는 삼귀의와 포살의식을 따라하다보면 왜 이 공부모임을 초기불교공부모임이라고 하는지 알게된다. 의식이 끝나고 2시 30분이 되어서 영일스님의 발제로 ‘부처님의 출가부터 정각직후의 이야기까지’ 설명이 시작되다. 영일스님의 촘촘한 강의에 원담스님, 명고스님, 경진스님, 지우스님, 혜진스님, 도현스님, 혜문스님, 만민스님등이 토론을 펼친다. 어떤 질문에는 강사의 얼굴이 상기되기도 하고 자신감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집이라기 보다는 신념 혹은 확신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발제를 맡은 스님은 가장 젊은 스님이면서도 가장 주장이 정확하다. 전화번호를 알아두었다가 나중에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다.
치열한 토론속에 3시간이 후딱 지나 저녁공양시간이다. 1층 공양간에 내려가 피자 두 조각을 먹으면서도 토론은 이어진다. 토론불교는 한국불교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딸기주스로 입가심을 하고나서 다시 발제자의 설명이 이어진다.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마무리되다. 오늘은 제1선에서 나타나는 마음상태에 대한 토론이 길어졌다. 발제자스님은 오늘도 약속한 시간에 발제를 끝내지 못하여 다음 달에 다시 이어가기로 하다. 갈길이 먼 몇몇스님은 작별을 고하고 나머지는 다실에 모였다. 내가 직선제 운동 한다는 걸 알고 총무원장직선제 이야기를 물어온다. 나는 직선제에 관심을 두게된 인연, 지금 직선제가 실시되어야 하는 당위성, 필요성, 기대효과를 설명했다. 직선제에 대해서 염려와 걱정이 많았다. 질문이 오가고 나서 한분 한분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직선제에 대한 소감을 들려주셨다.여러 스님들에게 직선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고맙고 위안을 받다.
불교를 토론으로 배우고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해주는 도반들이니까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직선제임에도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종단에 미련을 버리고 뜻에 맞는 사람들끼리 새로운 승가를 만들어 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나 혼자 잘 살자고 종단을 포기하기할 용기가 아직없다. 종단에서 고통받는 스님들과 의식주를 걱정하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 할 수 없다. 체념의 길을 가기보다 남아서 정화작업을 하려는 노력이 직선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어쩌면 이 공부모임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 직선제를 이루는 가장 빠른 길 일 수 있다. 직선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이상적인 승가의 모습은 여러분처럼 도반들과 법을 토론하는 공부모임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직선제 이야기가 끝을 보이자 최근의 핫 이슈인 박근혜 대통령탄핵결정과 국가정세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세계경제 상황과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우리의 외교방법, 사드배치 문제, 환경문제등 바람을 타고 기어오르는 방패연처럼 기세등등하게 이야기 주제가 이어졌다. 비록 들리는 이야기 주제들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밤이 늦었었음에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11시가 넘어서야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독한 사람들!이 펼치는 독한 공부모임이 끝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