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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스님과 돈

스님과 돈

 

얼마 전에 분신하신 정원스님은 분신하기 1달전 쯤 전재산이 7천원뿐이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스님을 잘 아는 사람이 sns에 스님이 도움을 청하였고 몇몇분이 스님을 도와주었다는 소식을 공개함으로서 알려졌다. 64세의 나이에 승납 40년의 노스님께서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다. 스님은 금호동 동명여관에서 생활하시며 남부터미날 근처에서 탁발로 생활비를 충당하신 듯하다. 출가자가 먹을 것과 생필품을 세상 사람들에게 얻어서 살아가는 탁발은 부처님의 생활수단이자 지금도 남방불교 스님들의 생활수단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스님들도 탁발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종단에서 탁발을 금하고 있어서 탁발하는 스님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궁금한 것은 정원스님은 왜 금지된 탁발을 하고 절이 아닌 쪽방에서 머물렀냐는 것이다. 스님정도의 염불실력에 40년 법납이면 충분히 절에서 편안하게 사실 수 있었을 텐데. 스님의 탁발바루가 남방불교에서 사용하는 둥근 철 바루인 것으로 보아 스님이 남방불교를 접하시고 부처님 법대로 살기위해 탁발을 결심하신게 아닌가 한다. 스님이 쓰신 유언에도 승려는 스스로 법벌이를 하지 말고 시주물로 살아가되 시주물이 사회 구성원의 눈물과 땀의 결과물로 제공됨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일반인이야 가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때론 치욕이겠지만 수행자의 가난은 부끄러운게 아니다. 수행자의 가난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탁발은 가난과 무소유의 상징이다. 탁발은 겸손과 하심의 상징이다.

 

요즘 한국의 승가는 탁발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른 관람료, 임대료, 주차료등 정기적인 수입도 생긴다. 이러한 승가의 재산이 잘못 관리되어 부익부빈인빈의 이상한 승가가 되었다. 우리종단 스님들은 호화롭게 살아도 부끄럽기는 커녕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술 더 떠서 종단정치는 돈이 없으면 안된다. 종회의원선거나 본사주지 선거도 돈이 있어야 하고 총무원장 선거는 더 큰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종정이 되는 데도 돈 봉투가 돌아다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스님들은 돈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

 

이렇게 돈이 스님들의 권력과 명예의 도구가 되다보니 정작 종단은 돈이 없어서 승가가 해야할 일을 못하고 있다. 승려노후복지가 하세월이고 수행연금 지급계획도 없었던 일로 되었고 간신히 국민연금을 지원해주는 차원에서 의료비가 지급되고 있다. 스님들은 쉴만한 곳이 없다고 너도나도 토굴을 짓고 큰절은 텅텅 비어가고 있다. 주지스님과 목탁노동자들은 회사의 갑을관계로 변했고 스님들은 사사로이 절을 매매하고 수행자는 해제비에 따라 움직인다.

솔직히 절에 와서 돈이 생겼다면 그 돈은 누구 돈이겠는가? 신도님들이 시주한 돈이다. 그렇다면 그 돈을 내 돈이라 여기고 함부로 써서야 되겠는가? 그 돈으로 절을 짓는다면 그 절이 내 개인 소유물인가? 아니다. 그렇치만 우리는 절을 짓고 그 절을 판돈을 개인 돈으로 생각한다. 요즘 종단성역화기금, oo기금이니 하면서 총무원에 가서 몇 천만원 혹은 몇 억원씩 내고 사진 찍는 것이 유행이다. 몇 천만원이라는 금액과 본인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총무원장스님하고 함께 찍는 모습이 불교신문에 자주 실린다. 그 돈은 어디서 난 돈인가? 출가하기 전에 자기가 피땀흘려 번 돈이 아니라면 분명 신도님들의 돈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도회 이름이나 사찰이름으로 보시를 하면 될 터인데 왜 스님 본인의 이름으로 보시를 하는지 알 수 없다. 7000원밖에 없었던 정원스님에게 이들의 모습은 어떻게 보였을까? “나는 지금 이 돈으로 뭔가를 부탁하는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보지 않았을까?

 

이 문제 하나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개인 소유물에 대해서 너그러운지, 돈으로 정치하는 것이 얼마나 일상화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보이는 돈이 저 정도니 안 보이는 곳에서 오고가는 돈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남부터미날 앞에서 탁발하며 살아가는 정원스님 같은 분들하고 어울릴 수 있겠는가? 법담을 나눌 수 있겠는가? 도반이 될 수 있겠는가?

 

목격자 부부의 증언에 따르면 정원스님이 광화문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불이 활활 타오를 때도 가부좌 상태에서 염불 같은 것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자신의 몸이 타고 있는 상태에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염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그의 수행력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준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국민이 행복하고 불교가 제 역활을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그는 길거리에서 탁발하며 최고로 가난하게 살았다. 소유의 차이는 스님들간에 서로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게 만든다. 마치 고급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경비원을 세워놓고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과 교류를 꺼리듯이 승가도 소유에 따라 관계가 형성된다. 한마디로 머리는 다같이 머리는 깍았어도 노는 물이 다르게 만든다.

 

부처님은 꼬삼비경에서 6가지 화합의 원리를 말씀하시고는 그중에서 견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같은 승가의 일원으로 화합하며 살려면 제일 먼저 견해가 같아야 한다고 보셨다. 아마 그때는 승려들은 탁발에 의지해 빌어먹으며 무소유로 살았고 서로 다른 종교지도자들이 많았기에 견해의 문제가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승가의 상황을 관찰해 보건데 화합의 제일 조건은 소유의 문제이다. 소유가 차이가 나면 서로 만나려고 하지 않고, 만날 기회도 없는데 어떻게 화합이 되겠는가? 의식주 해결이 승려개인의 문제로 떠넘겨져 있으니 스님들은 알게 모르게 소유에 관심을 갖게되고 경쟁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처음 출가했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자신이 와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종단이 승려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은 군대가 군인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것처럼 당연한 의무이며 책임이다. 스님들은 이것을 자신 개인의 문제로 여기지 말고 당당하게 승단이 승려 외호의 역할을 다하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자살율이 세계 최고이고 실업자가 점점 늘어나는 각박한 경쟁사회에서 풍요롭고 화합하는 승가공동체는 우리사회의 오아시스가 되어 줄 것이다. 승가가 이러한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할 때 따로 출가자감소 걱정, 불자감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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