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자교육.불교입문 교재
포교사시험 인명.지명
빠알리와 산스끄리뜨로 바뀌고
문화재명칭 표기 기준도
8월1일자로 변경됐는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콩글리쉬 영어발음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경전의 한글 번역은
불교를 쉽고 현대화하는 첫 걸음
시대에 맞으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한글 번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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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스님은 경전의 한글 번역은 불교를 쉽고 현대화하는 첫 걸음이라는 측면에서 진언도 부처님 원음에 가까운 산스끄리뜨의 발음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법회 사진으로 필자의 주장과 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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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11일 조계종은 한글 반야심경의 번역이 ‘건지느니라’에서 ‘건너느니라’로 바뀌었다고 공포하였다. 나는 시종일관 ‘건너느니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으로서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은 산스끄리뜨 원문에는 없고 번역자가 만들어낸 문장이기에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건너느니라’라고 번역해야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은 “~ 때문에 ~하다”라는 조건과 결과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았기” 때문에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결과가 있게 된다.
둘째 그동안 반야심경을 번역한 많은 스님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반야(般若)스님과 지혜륜(智慧輪)스님은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을 떠났다(照見五蘊皆空 離諸苦厄)”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일반 불자들이나 비불자를 위하여 반야경에서는 ‘건진다’는 타력의 모습이 강조되기 보다는 ‘건넌다’는 자력의 모습이 강조되어야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사람들이 불교에 대한 선입견에 관련된다. 관세음보살의 원력에 의해서 누구나 관세음보살을 간절히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를 구원해 준다”라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나도 관세음보살 같은 원력을 세우고 관음보살 같은 자비의 실천자가 되자”라는 원력과 실천이 반야심경에서는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의상대사의 ‘백화도량 발원문’에서도 관세음보살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성품이 관세음보살과 다름이 없음을 관하고, 관세음보살님의 교화를 돕겠다(助揭眞化)는 적극적인 신행의 모습이 나타난다.
‘건지느니라’ 말고도 한글 반야심경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다. 그 중에 하나만을 지적한다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산스끄리뜨의 발음으로 바꾸지 않은 것이다. 필자가 2012년에 의례위원으로 있을 때 분명히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산스끄리뜨 발음으로 표현하자고 결의했는데도 불구하고 반야심경의 “아제아제”가 바뀌지 않은 것은 놀랍다. 초기불교의 빠알리 경전과 대승의 산스끄리트 경전이 직접 번역되면서 이제 빠알리와 산스끄리뜨 발음은 일상화가 되었다. 조계종의 행자교육과 교양대학의 필수교재인 ‘부처님의 생애’는 모든 지명과 인명이 빠알리와 산스끄리뜨로 되어 있고, 포교사 시험문제에서도 인명과 지명 그리고 불교용어가 빠알리나 산스끄리뜨 발음으로 출제되고 있다. 국가에서도 2013년 8월1일부터 시행하는 ‘문화재명칭 영문표기 기준 규칙’을 만들어 불보살님과 경전의 이름을 산스끄리뜨로 표기하고 있다. 예) Maitreya Bodhisattva(미륵보살), Bhaisajyaguru Buddha’(약사여래), Saddharmapundarika Sutra(묘법연화경), Avatamsaka Sutra(화엄경)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무시하고 “아제아제”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고 세계무대에서 한국불교를 가두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진언 번역은 한문 음사를 따른다’는 번역 지침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산스끄리뜨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쮄ragate p쮄rasam.gate bodhi sv쮄h쮄)를 그동안 많은 스님들이 다양하게 번역하였다. 우리가 선호하는 구마라즙 번역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로 읽고 있지만 한문 발음은 “갈제갈제 파라갈제 파라승갈제 보제승사가”이다. 현장이 번역은 “게제게제 반라게제 반라승게제 보제승사가”이고 법월(法月)의 번역은 “게체게체 파라게체 파라승게체 보제사파가”이며 법성(法成)의 번역은 “아제아제 파라아제 파라승아제 보제사가”로 발음된다.
이렇게 각기 시대마다 사람마다 다르게 번역되고 다르게 발음되는 번역 중에 하나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한국불교는 왜 끝까지 고집하는 것인가? 이것은 미국이나 영국에 가서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발음을 무시하고, 혼자서 독학한 콩글리쉬 영어발음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경전의 한글 번역은 불교를 쉽고 현대화하는 첫 걸음이다. 시대에 맞으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한글 번역을 기대한다.
[불교신문2937호/2013년8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