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현장본 반야심경을 독송해온 까닭에 그것이 조계종의 전통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공포된 <종단 표준본 한글 반야심경>도 현장본 반야심경을 한글화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현장본 반야심경에 집착하다보니 아이러니 하게도 그보다 앞선 부처님의 원음을 외면한 꼴이 되었다. 과연 이 시대에 경전을 한글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한문경전의 한글화를 넘어서서 다양하게 전승되어온 경전들을 연구하여 ‘가르침을 분명하게 알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제까지 산스끄리뜨본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반야심경이 7개나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적어도 이 시대에 반야심경을 한글화 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표준본’이란 이름을 붙이려면 7개의 한문본과 산스끄리뜨 원본을 참고해서 한글화 작업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현장스님 번역본 문장을 다른 본들과 비교하여 한글 반야심경의 내용을 보완을 시도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1. 照見五蘊皆空
현장스님이 照見五蘊皆空으로 번역한 것을 法月(738), 智慧輪(~859), 法成, 施護(982~)같은 분들은 照見五蘊自性皆空이나 照見五蘊體性悉皆是空으로 번역하였다. 산스끄리뜨 원문에 나타나는 svabhāva를 自性이나 體性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본은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라고 해석되는데, 다른 것들은 ‘오온에 실체(자성)가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라고 번역된다. 현장본에서는 공한 대상이 五蘊이 되는데 다른 분들의 번역에서는 공한 대상이自性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의 대상이 분명한 표현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초기경전의 표현법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반야심경이 초기경전과 같은 내용과 표현법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度一切苦厄
산스끄리뜨 원본에는 없고 번역자들이 첨가한 문장이다. 그런데 이것을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라고 한글 번역한 것은 문맥상 맞지않다. 般若(790)스님이 번역한 반야심경 大本에 의하면 이 문장은 관자재 보살이 照見五蘊皆空하여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진 문장이기 때문이다.
3. 舍利子 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
산스끄리뜨 원본 에는 ‘사리자여!’ 라고 부르기 전에 iha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iha는 부사로서 ‘여기에서’라는 의미이다. 즉, iha는 앞의 문장을 받아서 ‘오온에 실체가 없는 여기에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色不異空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장은 ‘사리자여!’앞에 나오는 ‘iha’를 해석하지 않아서 색=공성(śūnyatā)이 되는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4.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 문장에서도 ‘사리자여!’앞에 iha가 생략 되었다. ‘오온에 실체가 없는 여기에서’ 바라보면 ‘空性의 특징(śūnyatā lakṣaṇā)’은 不生不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모든 법들이 부정되는 원리로 제시되었다.
5.是故 空中 無色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앞에서 설명한 ‘공성의 원리’에 의해서 無色無受想行識 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다. 초기경전에서는 ‘空性의 특징’을 불생불멸이라고 설명하거나 오온,12처,4성제등을 부정하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데 반야심경에는 왜 이런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을까? 이러한 표현들은 반야심경이 편집되었던 시기의 시대상황을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표현은 불멸후 약 500년이 흐른 뒤에 나타났던 법에 집착한 무리들을 치유하기 위해 나타난 새로운 표현법인 것이다. 즉, 五蘊自性皆空이 我空의 표현법이라면 是諸法空相부터는 法空의 표현법이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모르는 사람은 모든 법들을 부정하는 표현을 正法이 아닌 것으로 오해하거나, 반대로 法執을 파하는 것을 보고 반야심경 공사상이 초기불교의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오해를 갖게 되기도 한다.
6.以無所得故 菩提薩唾 依般若波羅蜜多故...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앞에서 사성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고 我執法執을 깨부수었다. 여기서는 그렇게 깨부수는 지혜를 다시 ‘반야바라밀다’라고 새롭게 이름 붙이고 있다. 반야심경은 관세음보살이 사리불에게 설법하는 형식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두 사람의 역사적인 만남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하는 이들의 상징이 사리불이며 그 잘못을 깨우치는 역할이 관세음보살인 것이다. 반야심경에 나타나는 ‘반야바라밀다’의 지혜가 이러할진데 지금 반야심경을 한글화 하면서 다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현장본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7.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訶
반야심경의 주문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아제 아제’ 보다는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스와하’라고 산스끄리뜨 원음을 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한글 반야심경’을 보면서 경전을 한글화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싶다. 경전을 한글화 하는 것은 한문경전이나 산스끄리뜨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경전의 한글화 목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한다.
경전을 한글화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후대에 편집된 반야심경 대신에 照見五蘊自性皆空을 너무나 잘 표현해 내고 있는 초기경전인 ‘무아의 특징 경(S22:59)’을 독송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