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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이제는 법어대신 인터뷰를 하자

 

 

불교 신문에 실린 방장,조실스님들의 해제 법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미국으로 계룡산 무상상 조실스님인  대봉스님의 기사가 종정 방장 스님들의 해제법문과 나란히 실려있는 것이다. 드디어 한국에서도 외국인 조실스님의 해제법문을 듣게 된것이다.

그래서  종정스님과 보성스님과 설정스님과 대봉스님의 법문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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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행]조계총림 방장 보성스님 동안거 해제...
  • [수행]영축총림 방장 원명스님 동안거 해제...
  • [수행]덕숭총림 방장 설정스님 동안거 해제...
  • [수행]고무신도 흰색이고 운동화도 흰색이다-대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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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후에도 ‘자가보장’을 제대로 챙겨라”

    법전 종정예하 동안거 해제법어

     

     

     

    군왕의 보물을 누가 흥정 하는가

    흥화존장(興化存獎) 선사에게 후당(後唐)의 장종(莊宗)황제가 물었습니다,
    “짐이 중원을 평정하고 보물을 한 개 얻었는데, 아무도 값을 매기지 못합니다.”
    “폐하의 보물을 잠깐 보여 주소서.”
    황제가 두 손으로 복두건(幞頭巾)의 끈을 들어 보였더니 선사가 말했습니다.
    “군왕의 보물을 누가 감히 흥정하겠습니까?”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를 찾아간 것은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염관(鹽官)선사와 선종(宣宗)임금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은 함께 안목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해와 달이 때를 맞추어 뜨고 진다면 광채가 있는 곳의 따스한 바람결은 꽃과 나무를 서로 감화시킵니다. 이처럼 인왕(人王)과 법왕(法王)이 서로 만날 때엔 서로의 위치에서 걸 맞는 문답이 있어야 제격인 법입니다. 어쨌거나 전륜성왕의 상투 속에 있는 구슬을 경솔하게 남에게 함부로 보여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숭산혜안(崇山慧安)선사는‘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를 묻는 납자들에게 “자신의 서래의(西來意)는 묻지 않고 왜 남의 서래의(西來意)만 묻고 있느냐?”고 도리어 힐난했던 것입니다. 마조선사 역시 “자기 집에 있는 보물창고는 돌아보지도 않고서 더욱이 그 집마저 버리고서 밖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으니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일갈했던 것입니다.

    보물을 보여 달라는 흥화선사의 질문에 장종황제는 두 손으로 복두건(幞頭巾)의 끈을 들어보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선사는 ‘어느 누구도 군왕의 보물을 흥정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법문에서 흥화선사는 황제의 공부경지를 긍정한 것입니까? 긍정하지 않은 것입니까?
    만일 인정했다면 흥화의 안목이 제대로 된 것입니까?
    만약 인정하지 않았다면 흥화의 허물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해제 이후에도 만행하면서 동안거 한 철 동안 챙겼던 ‘자가보장(自家寶藏)’을 제대로 챙기기만 한다면 그 해답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불엄위(眞不揜僞)하고
    곡불장직(曲不藏直)이라
    참은 거짓을 가리지 않고
    굽음은 곧음을 감추지 못한다.

    2553(2009)년 동안거 해제일에

    2010-02-26 오전 9:49:53 / 송고
     
     
     
     

    조계총림 방장 보성스님 동안거 해제법어

    “간단없는 화두로 끊임없이 공부하라”

     
                                                  
     
    2553년 동안거 해제 법어 
     
    지난 결제(結制) 구십일(九十日) 동안 정진(精進) 대중(大衆)은 나름대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했다고 산승(山僧)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치는 것이 빠르고 더딘 것은 사람마다 인연(因緣) 시절(時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영운선사(靈運禪師)는 三十年(삼십년)을 공부(工夫)해서 깨치고 고봉선사(高峰禪師)는 칠일(七日)만에 깨쳤습니다. 영운선사(靈運禪師)의 오도송(悟道頌)을 소개(紹介)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십년래심검객(三十年來尋劒客)이여 기도락엽기추지(幾度落葉幾抽枝)요  
    자종일견도화후(自從一見桃花後)로 직지여금갱무의(直至如今更無疑)로다.  
    삼십년(三十年)동안 애써 정진(精進)하는 동안 새싹이 돋는 봄과 낙엽(落葉)이 지는 가을을 몇 번이나 겪었던고...
     
    복숭아꽃이 활짝 핀 것을 한 번 보고 나서  
    이렇게 모든 의심이 한꺼번에 없어졌네 하였다.
    봄은 공부가 잘 될 때요 가을은 공부가 안 될 때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공부(工夫)하는 사람은 화두(話頭)만 열심(熱心)히 할 뿐 빨리 깨치겠다는 욕심(欲心)은 업어야 된다. 속효심(速效心)을 가지고 공부(工夫)하는 병(病)만 생기고 사견(邪見)도 일어나서 바로 깨치기 어렵고 깨친다 하더라도 정력(定力) 없는 건혜(乾慧)일 뿐이니 건혜(乾慧)로써 어찌 생사를 해탈(解脫)하겠는가?

    부설거사송(浮雪居士頌)에   
    가사설법여운우(假使說法如雲雨)하야 감득천화석점두(感得天花石點頭)라도  
    건혜미능면생사(乾慧未能免生死)하니 사량야시처부부(思量也是處浮浮)로다하였다.  
    설사 법문을 구름 피듯 비 내리듯 잘 해서  
    하늘이 감동해서 꽃비가 내리고 돌이 고개를 끄덕인 다해도  
    간혜로운 생사(生死)를 면할 수 없으니  
    생가해 보면 허무하고 부질없는 짓이로다 하였다.  
    금일(今日) 대중(大衆)은 남이 알아 주기도 바라지 말고 깨치기도 바라지 말고 결제(結制) 해제(解制) 상관없이 간단(間斷) 없는 화두(話頭)로 끊임 없이 공부(工夫)하면 자연(自然)히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하여 얼음 눈 녹듯 의심(疑心)이 사라지고 공안(公案)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송풍한(松風寒)하니 사면(四面) 청산(靑山)이요  
    추월명(秋月明)하니 일천여수(一天如水)로다  
    솔바람이 차니 사면이 모두 푸른 산이요  
    가을달이 밝으니 온 하늘이 물처럼 맑도다.
    주장자(拄杖子)를 세 번 구르고 하좌(下座)하다.  
    2010-02-25 오후 6:02:05 / 송고

     

     

    덕숭총림 방장 설정스님 동안거 해제 법어

    “진로에 살더라도 정법수행하면 불제자”

     

     
    己丑年 冬安居 解制法語
     
     
    오늘은 경인년 정월 십오일 동안거 해제일입니다.
     결제(結制)에 결제(結制)가 없고 해제(解制)에 해제(解制)가 없어야 진정한 결제요 해제라 했는데, 금일 대중은 어떤 해제를 하였습니까?
     해제(解制)란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생사영단(生死永斷)하는 대사(大事)를 마쳐야 하는데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못 마쳤다하면 진정한 해제가 아닙니다. 해제란 견성(見性)하여 자가(自家)의 무진장보(無盡藏寶)를 찾아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사용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을 향(向)해 감로법우(甘露法雨)를 뿌려 영원(永遠)이 안락(安樂)케하고 영원(永遠)이 해탈(解脫)케하는 공덕(功德)을 가지(加持)하는 것입니다. 군생(群生)들의 삶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법(淨法)이요, 하나는 염법(染法)입니다 정법(淨法)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길이요 염법(染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길입니다. 
    정법(淨法)의 길은 밝고 깨끗하고 편탄하여 쉽고 아름다운 해탈의 길이요, 염법(染法)의 길은 어둡고 탁하여 험난하기 말할 수 없는 생사(生死)의 길이요 구속(拘束)의 길인데, 어리석은 중생들이 대부분 정법(淨法)의 길을 가지 아니하고 염법(染法)의 길을 가는 것은 광겁(曠劫)에 익힌 탐업(貪業) 때문입니다. 견성법(見性法)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가장 편하고 좋은 길인데 탁업(濁業)이 많은 까닭에 마음으로 생사고(生死苦)를 싫어하면서도 도리어 생사업(生死業)을 짓고 있으니 참으로 업력(業力)의 무서움이 이토록 심할 수 있을까? 이래서 삼독(三毒)에 중독된 중생이라 했나봅니다. 
    정법(淨法)을 멀리하고 염법(染法)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마치 구더기가 똥통에 처박혀 그것이 제일인줄 알고 삶을 즐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무리 불법(佛法)을 만나 중이 되었더라도 정법(淨法)을 익히지 않으면 그대로 속물(俗物)이요, 누구든지 진로(塵勞)에 살더라도 정법(淨法)을 수행(修行)하면 불제자(佛弟子)라 할 것입니다. 자가(自家)의 진보(珍寶)라... 
    자가의 참된 보배는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중간에도 있지 않는데 
    그러면... 자가진보... 어디에 있는고? 
    주장일타후(柱杖一打後) 운(云)
     
    원래일점무심처(元來一點無尋處) 
    응물분명당현전(應物分明當現前) 
    영명고금상독영(靈明古今常獨映) 
    주야청광겁겁한(晝夜淸光劫劫寒) 
    원래 한 물건도 찾을 수가 없는데 
    사물에 응하면 분명 그 자리에 있도다 
    밝고 신령스러움이 고금을 비쳐서 
    맑은 빛이 주야로 겹겹이 시리더라 
    2010-02-22 오후 4:36:25 / 송고
     
     
      

    고무신도 흰색이고 운동화도 흰색이다

    계룡산 무상사 동안거 해제 현장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왼쪽)과 주지 대진스님.

     

     

     대봉스님은 1977년, 대진스님은 1979년에 숭산스님을 만났다. “미쳤다는 것은 무엇이며,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당신이 무언가에 많이 집착하면 많이 미친 것이요, 조금 집착하면 조금 미친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미치지 않은 것이다.”대봉스님은 “이 한 마디로 수년간 심리학을 공부하고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풀었다”고 말했다. 숭산스님의 교지(敎旨)는 ‘오직 모를 뿐’으로 집약된다. ‘생각은 고통을 만들어낸다. 잡다한 생각 따윈 쓰레기통에 던져버려라.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떨쳐낸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라.’ 오직 모르니 ‘오직 할 뿐’이다. ‘어떻게 지금 이 순간 중생의 잠을 깨워 이 세상을 도울 것인가에 몰입하라.’

      결제와 해제의 의미에 대해 묻자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대봉스님의 대답. 아무리 별미라도 자꾸 먹으면 질린다. 귀가 닳도록 들어 식상할 만도 싶은 선어(禪語)에 달달한 ‘팁’이 얹힌다.

     “그리고, 배고픈 자에겐 먹을 것을 주고, 고통 받는 자에겐 실질적인 보탬을 준다.”

    스님은 1992년 스승에게서 전법게를 받았다. 깨달았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인가의 배경과 내막에 관한 ‘정치적인’ 질문은 한칼에 쳐냈다.  “고무신도 흰색이고 운동화도 흰색이다.” 1997년 역시 지도법사의 자격을 얻은 대진스님이 해석을 거들었다. “고무신이든 운동화든 얼마나 발을 잘 보호하느냐는 기능과 역할에 의미가 있는 거지,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 본질(本質)은 실존(實存)에 의해 드러난다는 결론이다. 깨달아야 잘 사는 게 아니다. 잘 살아야 깨닫는다.

    계룡=장영섭 기자     

    2010-02-25 오후 3:28:49 / 송고
     
     
     
     
    [감상]
     
    간단하게 각 스님들의 법문의 핵심을 빨간 색 으로 강조해 보았다.
    종정스님의 법문은 "깨달으면 그때 다 알게 된다"는 말로 깨달음을 강조한다.
    보성스님은 "간단없이 정진하라"고 꾸준함을 강조한다.
    설정스님의 법문은 "출가했으니 제대로 수행(간화선)하자"며 노력을 강조한다.
    대봉스님은 "일상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 따로 수행과 일상을 구분하지 말라고 한다.
    나름대로 각각의 법문이 특색이 있지만 대봉스님의 인터뷰가 가장 끌린다.
    대봉스님이 외국인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의 법문은 형싲적으로 내려지는 법어가 아니라 인터뷰라서 그렇다. 인터뷰는 짧은 문답이어서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부터 결제때나 해제 때 종정, 방장,조실 스님들이 법어 대신에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
    사실 한문게송을 읊고 그 게송에 대하여 한마디 평하는 결제 해제 법어들은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이러한 법어들은 일반인들에게 형식면이나 내용면에서 신선감을 주지 못한다.
    일반인 들은 현장감이 살아있는 인터뷰를 더 좋아 한다.
    인터뷰를 하게 되면 한자 투성이의 게송이 적게 사용될 것이고 누가 대필해 주었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고 즉흥적이고 살아있는 문답을 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1년에 동안거 하안거 4번의 결제 해제 법문을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 듣게 된다면
    국민들은 불교와 스님들을 더욱 친근하게 느낄 것이다.
    이렇게 국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이 진정한 자비이고 
    불교 중흥의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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