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종교가 뭐니? 꼬마야!
기독교인을 만나면 불편하다. 아니 그들이 불편해 한다.
나는 머리를 깎고 회색 승복을 입고 있으므로 신분이 노출되어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때 그들의 얼굴에 표정이 나타나는데 그가 기독교인 일 경우에는 경계하는 표정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그들이 기독교인 이라는 것을 수 있다.
이렇게 이해 관계가 없는 자연스러운 만남이나 우연한 만남에도 그들과 나 사이에는 이미 어떤 막이 형성된다. 종교가 다르다는 것만으로 이미 그들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강물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종교가 인간에게 주는 비극이다.
나는 나름대로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의 그러한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고, 그 신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그들의 교리가 일차적인 원인일 것이다.
더욱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가르침은 그들이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타심은 그들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계속 강조되고 주입 된다. 자신의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공격적인 자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믿음이 강할수록 배타적이 되어 다른 종교와 종교인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악마와 같이 싸워야할 적으로 여기거나 우리 편으로 끌어 들여야 할 길 잃은 양으로만 여긴다.
최근에 서울 감남의 어느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만을 통해 구원이 이뤄지니까 공자나 석가나 맹자나 점쟁이나 뭐 그런데는 구원이 없다"
"절간에도 우리가 성경보내기 운동을 해야 되겠다."
"불경에는 성령의 감동이 없고 귀신들만 있어"
"성경 읽으면 귀신들이 다 도망가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9568
이렇게 목사라는 사람이 불교를 부정하고 왜곡하고 없애버려야 할 삿된 종교, 무너트러야 할 적으로 여기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이러한 목사들의 설교에 따라 많은 크리스찬들은 불교를 혐오스럽게 생각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부산에서 기독교 청년들이 부산에 있는 사찰이 무너지도록 기도를 하는 동영상이 소개된 적도 있다.
이러한 교리와 설교에 쇄뇌 된 기독교인들은 길가에서 우연히 만나는 스님들에게 고운 눈빛을 보낼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불편함도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라고 본다.
그들은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은 끝난다. 오직 믿는 것에 희망이 있고 구원이 있다.
그들의 구원은 오직 믿음 하나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점점 모든 가치위에 앞서게 된다. 이러한 교리안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이미 그들은 이미 '오직 이것 만이 진리다' 라고 믿어버렸고 결정해 버렸다.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 ‘삿된 것이다’라고 믿어버렸고 결정해 버렸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것은 무례한 표현이 아니라 상식이다.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오히려 믿음을 의심받는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다른 종교들을 배려할 수가 없고 설사 배려를 한다고 하더라도 두 얼굴을 가진 관용일 수 밖에 없게 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SBS 밴쿠버 동계올림픽 중계방송 중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미터 경기 중계에서 "(금메달을)우리 주님께서 허락 하셨어요"라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중계 해설자의 발언에 대해 해당 방송사에 대해 보낸 공문을 통해 "공정방송을 추구해야 하는 지상파 방송매체의 본분에 어긋나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발언"이라며 관련자에 대한 강력한 징계와 시청자에 대한 사과조치를 요청하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도 이 사안에 대한 심의, 처리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보는 기독교인의 시각은 어떨까?
한국교회언론회(대표회장 김승동 목사)가 이 문제에 대해 ‘종교간 갈등을 부추기는 공영방송’ 이라는 제목으로 논평문을 내놓았다.
..... 24일 이승훈 선수가 스케이팅의 마라톤이라고 할 수 있는 1만m에서 금메달을 추가하여 다시 한 번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장한 일이다. 그런데 방송에서 이 경기 중계를 하던 모 방송 해설위원이 기쁘고 감격한 나머지 ‘주님께서 금메달을 허락하셨다’고 말하였다.
..정작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종교가 국민과 국가 전체, 그리고 타종교에 대하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종교적 이익을 위하여 시시비비를 끝까지 가리고야 말겠다는 강박증에 가까운 모습을 보면서 두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기에다 방송사간 중계방송 문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공영방송 KBS는 24일 저녁 9시 뉴스에 이러한 불교계의 움직임에 대하여 친절하게(?) 보도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는 언론이 종교간, 국민 간 갈등을 조장하려는 의도로까지 비춰져 더욱 유감스럽다.
KBS는 지난 1월 30일과 2월 7일, 9시 저녁 뉴스에서 특정 서원(書院)을 소개하는 뉴스를 내 보낸바 있다. 서원은 특정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불교계의 정부 지원에 의한, 사찰체험인 템플스테이와 같은 종교 행사를 수없이 보도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에서는 이를 ‘종교편향’이라고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금번 중계방송의 에피소드는 방송인 개인의 신앙적 표현으로 어떠한 종교적 갈등을 야기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없고, 문제를 제기하는 측에게 해악을 미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붉히며 나서는 것은 종교의 정도가 아니라고 본다.
국가의 명예를 걸고 세계인들의 축제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젊은이들은 국민들에게 한껏 기쁨과 희망을 주고 있는데, 우리 사회 한쪽에서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시비를 다투는 모습은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사회 통합과 인류의 희망을 표방하고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계가 문제를 확산시키고 갈등을 부추기는 일은 국민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5194&thread=23r03
이렇게 같은 사건을 두고 불교인과 기독교인들이 보는 시각의 차이가 크다.
공영방송에서 ‘주님께서 금메달을 허락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상식적인 이야기에 그들은 ‘타종교에 대하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종교적 이익을 위하여 시시비비를 끝까지 가리고야 말겠다는 강박증에 가까운 모습을 보면서 두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의 신앙적 표현’을 가지고 얼굴을 붉히며 나서며 ‘종교적 갈등’으로 몰아가지 말라‘고 한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구를 나무래야 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들은 서원(書院)을 소개하는 뉴스나 템플스테이 소식을 수없이 보도해도 기독교계에서는 이를 ‘종교편향’이라고 문제 삼지 않았다고 말한다. 요즘 서원(書院)이나 템플스테이가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면 외국인을 위한 관광자원이라는 명목으로 뉴스에 내보 낼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데 사찰과 서원 같은 기존의 문화유산과 전통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이 같은 문화정책을 ‘종교편향’이라고 공격한다면 국민들은 당연히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종교편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이 아량이 넓어서 그런 것처럼 말하고 ‘주님께서 금메달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지적하는 불교인들은 오히려 '종교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한다.
'주님게서 허락'의 발언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자 그 방송인은 사퇴를 했다고 한다.
그것이 ‘주님께서 금메달을 허락하셨다’는 발언을 잘못 된 것이었다고 인정한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개인의 신앙적 표현'을 가지고 ‘종교적 갈등’으로 몰아가는 불교인들이 참 경박스럽게 그들의 기억에 남을지도 모른다.
불교는 처음부터 절대 신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이 땅위에 나타났다.
붓다가 깨달음 연기의 법칙에는 '오직 이것이 처음이다'. '오직 이것이 절대존재다' 라는 견해가 존재할 수가 없다.
연기는 원인의 다양한 조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을 말할 적에 '태초'라든가 '처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태초'라는 말은 태초이전을 설명해야 하고 '태초의 이전'은 다시 그 이전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시간관은 무시무종,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붓다는 깨달았으므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가진 자(삼마삼붓다,삽반누)라고 불리 우지만 14가지의 질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붓다는 이 질문들은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열반의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 다고 ‘독화살의 비유’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창조자의 자리에 서지 않는다.
붓다라는 사람들(과거 7불)은 다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인 조건의 법칙(상의상관)을 파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붓다라는 사람들은 다만 길을 가르키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의 자각을 강조하고 수행을 강조한다.
그래서 8정도의 실천과 위빠사나 수행으로 모든 수행이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스스로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별히 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면 불교는 어렵고 복잡하고 따분하고 실 생활에 도움이 되지않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죽은 아들을 데려와 붓다 앞에 보여주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는 어미에게 마을에 내려가서 이제가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 7개를 얻어 오라고 명령한다.
이 여인은 끝내 겨자씨를 한 톨도 얻을 수 없었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더 이상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불교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 눈뜸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렇게 어느상황에서나 내가 이해해야 하는 불교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인도불교사를 보면 이러한 이성적인 초기불교는 500년이 지났을 때 기독교처럼 믿음을 강조하는 교리를 내세운 대승불교가 나타나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이름을 지극정성으로 부르면 언제 어디서나 그 사람을 구원해 주고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한다.
이러한 대승의 교리는 폭팔적인 대중의 호응을 받게되고 불교의 대세로 자리잡게 된다.
언젠가 포교를 하는 스님이 "포교당을 차려서 매일 기도를 하면 보시도 많이 들어오고 사람들도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교리를 가르치면 알음알이만 많아져서 보시도 안하고 사람들도 많이 오지 않는다" 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아직도 대승불교권에 있는 대한민국은 불자들은 스스로 이해하고 깨닫는 초기불교의 수행보다는 나보다 큰 존재나 힘에 의지하는 것이 친숙하다. 사유하고 고민하기 보다는 믿고 기도하는 것을 불교라고 여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성향은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지 1600년 만에 다시 초기불교라 할 수 있는 니까야가 번역되어 소개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법도 점차 대중화되고 있다. 이제 다시 한국불교도 부처님이 처음에 가르쳤던 이성적인 태도를 배우려는 노력들이 여기저기에서 이루어 지고있다. 이제 기독교인이건 불교인 이건 자아 반성이 필요하다.
왜 종교 생활을 하는가? 종교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종교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좀더 심사숙고 해보아야 한다.
종교인들은 종교를 갖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종교를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러한 종교를 선택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가르침이 여기에 있다.
[자유탐사헌장]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깔라마경'은 인류가 귀 귀울여야 하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깔라마경(A3:65)
2."세존이시여, 어떤 사문, 바라문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세존이시여, 다른 사문, 바라문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존경하는 사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들에 대해서 저희들은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습니다,
3.“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은 당연히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러울 것이다. 깔라마인들이여,
1.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2.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3.‘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4.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5.논리적이라고 해서,
6.추론에 의해서,
7.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8.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9.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10.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 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4."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탐욕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손해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깔라마들이여, 심한 탐욕을 가진 사람은 탐욕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얼이 빠져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갖고, 남의 아내에게 접근하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유도한다. 그러면 이것은 오랜 세월을 그에게 손해와 괴로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5."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성냄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손해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앞의 내용과 중복되므로 중략
6."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어리석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손해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깔라마들이여, 멍청한 사람은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얼이빠져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갖고.........그러면 이것은 오랜 세월을 그에게 손해와 괴로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7.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한 법들은 유익한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비난받아 마땅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비난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지자에 의해 비난받을 일인가, 칭찬받을 일인가?"
"비난받을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손해가 있고 괴롭게 되는가, 아닌가? 그대들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세존이시여,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손해가 되고 괴롭게 됩니다. 저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8. "깔라마들이여,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은 당연히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러울 것이다. 깔라마인들이여,
1.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2.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3.‘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4.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5.논리적이라고 해서,
6.추론에 의해서,
7.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8.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9.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10.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는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해로운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손해와 괴로움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라고. 이렇게 말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말한 것이다."
<앙굿다라니까야, 제1권 ,초기불전연구원 중에서>
성경의 말씀, 불경의 말씀, 온갖 교리의 주장들을 무조건적으로 ,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사고하여 경험하여 보아서 스스로 물어야 한다. 종교생활을 할 수록 나의 내면에 탐욕이 더 일어나거나, 화가 더 일어나거나 , 어리석음이 더하게 되면
'아차! 이것은 뭐가 잘못된 것이로구나!'하고 알아차려서 자신의 종교생활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
왜 종교생활을 할 수록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왜 종교생활을 할 수록 이웃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고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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