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dessen 2009.02.26 01:05 |
답변 5 조회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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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갖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는데 무아에 대한 해석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영원한 자아(아트만)를 부정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없는데 누구보고 깨달으라는 말인지요? 깨달음의 주체는 누구라는 말씀입니까?
중생은 모두 부처의 성품을 가졌다고 합니다.
중생이 가지고 있는 부처의성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아가 아닌가요?
무상, 고,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무아)라는 말은
오온을 들여다보아 하는 말씀이 아닌가요?
즉 무아는 오온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어 무아라고 하는 것이란 말씀 아닌가요?
자아를 부정하는 말로 해석해야하나요?
성철스님의 책속에서
"근본자성을 바로 보았다는 것을 견성이라 한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르는 근본자성이 영원한 자아를 이르는 말씀은 아닌지요?
무아윤회론과 영원한 자아를 부정한다는 뜻으로 무아를 해석하는 글들을 보면서
초보자의 생각이 뒤죽박죽 된듯 합니다. 선배님들의 지도편달 기다리겠습니다.
의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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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무아에 대한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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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한다면
온 몸이
온 세상과 함께
모든 정을 섞어서 펄펄 끓게 한
자발하는 수행이라 불리는 용광로에서
목욕하는 거에 닮아 있는 거이지요.
끝나면
살도 뼈도 한 터럭도 찾을 수 없거니와
나라는 거, 무아라는 거,
견성이라는 거도 쓰레기일 뿐이니
그토록 뜨거웠던 지옥불조차도
그대로 맑디 맑아 시원한 거에요.
생각을 하는 거는
이렇게 이해하고 보아서
온 몸과 온 마음을 펄펄 끓게 하여
용광통에 스스로 뛰어들게 하기 위한 거일 뿐이라서
누구라도
생각으로 부처를 찾고자 한다거나
생각으로 견성을 하고자 한다면
그거는 언덕에 좌부동이나 깔고 앉아서
썩은 동아줄로 고래를 낚고자 하는 거에 닮았어요.
의견 1
re: 무아와 윤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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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먼저 경전을 인용하고 설명을 하겠습니다.
2) 깨달은 이는 특별한 말을 사용할까 일상용어를 사용할까?
상윳따니까야 중에서.....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띠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티까 승원에 계셨다.
2. 그때 천신들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와나를 두루 밝히며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예배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3. 한쪽으로 물러서서 한 하늘사람이 세존의 앞에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하늘사람]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마지막 몸의 아라한이
'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말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세존]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마지막 몸의 아라한이
오로지 '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5. [하늘사람]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마지막 몸의 아라한이
참으로 자만에 사로잡혀 '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6. [세존] "자만을 버린 자에게는 속박이 없으니 자만의 모든 속박은 남김없이 부서졌네.
개념지어진 것을 넘어서는 현자는 '나'는 말한다'라거나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하여도,그것은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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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이 경전은 붓다의 언어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법문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언어를 싫어하거나 멸시하거나 혼동하지 않고 언어를 수행에 도움이 되게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힌트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님의 글처럼 붓다는 [무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무아라면 윤회를 인정하는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 해보면 이러한 생각은 [무아]와 [윤회]라는 언어가 어떻게 다른 관점에서 사용되는 말인지 모를 때 생겨 나는 의문입니다.
붓다가 나는 말한다라고 말할 때
나는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이것은 세상사람들이 약속한 관례를 따르는 이름입니다.
그들은 오온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무아를 모르는 사람들)은 계속 윤회를 하게됩니다.
오온을 나라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혜가 있는 사람은
오온을 바로 관찰해서 오온에는 온온만 있지 그것을 나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을 무아를 안 것입니다.
무아라고 해서 오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무아는 그런 무아가 아닙니다.
반야심경에서 五蘊皆空도 오온이 공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온에 自性이 없다(五蘊自性皆空)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을 해석할 때 五蘊=空으로 해석하여 분자론, 원자론까지 나아가지 말고 五蘊에 自性이 空이라고 해석한다면 그 뜻이 분명할 것입니다.
무아란 지혜로 발견한 사실로서 오온을 나라고 집착하든 집착,어리석음이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이런 사람은 이제 다시 윤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철의 "근본자성을 바로 보았다는 것을 견성이라 한다"라는 말에서
근본자성은 오온에 自性이 없다는 것을 아는것, 즉 무아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은 사람도 무아를 아는 사람도 [나] [너]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들은 다만 세상의 관례에 따라 불려지는 이름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중생도 [나] [너]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중생은 그것이 관례에 따라 불려지는 이름임을 알지 못하고
나고 죽는 것이 나라고 생각하며 윤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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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3
re: 무아에 대한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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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갖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는데 무아에 대한 해석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영원한 자아(아트만)를 부정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자아가 없는데 누구보고 깨달으라는 말인지요? 깨달음의 주체는 누구라는 말씀입니까?
지금 님은 '무아'에 대해서 도저히 일반적(상식적) 개념으로는 이해하기가 곤란한 상태인듯하므로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막연히 '나가 없다'는 생각에 메여서 헤메시지 말고,
'(나를) 모른다'라는 개념적 접근을 시도해보세요.
즉, '안다'는 의식적(의도,행) 존재개념이 곧 '있다'는 인식이며,
이에 반해 '모른다'는 의식적(의도,행) 존재개념을 곧 '없다'라는 인식으로 변환해보시지요.
이 말을 다시 더 들어가보면,
우리의 모든 의식적 행위(의도)등은 결국 하나의 대표적(보편적) '인식'으로 규정되는 구조임을 알 수 있으며,
역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인식적 규정등은 그 고유의 속성인 '의식적 행위(의도)'를 표현하는
하나의 개념들임을 알 수 있는것입니다.
또 한 '있다' '없다'는 보편적 인식(관념)은
'안다' '모른다'라는 의식적 표현들의 총체적 규정이라고 정의 할 수 있는것입니다.
위의 논의가 정당하다면,
'무아'의 의미(속성)가 단지 어떤 보편적 개념의 궁극인 '없음'의 절대성을 통해서
그러한 고유의 속성인 '모른다'라는 의도(의식적 행위,표현)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것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관념(있다,없다)을 추구하거나, 이해 하려 할 때
정작 그 관념의 실재적 고유한 속성에 대해서는 망각하기 쉬운 구조적 한계에 노출되어 있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어떤 고유적 속성들의 집합체에 대해 '무엇'이라고 정의(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러한 '속성'들인, 실재에 대해서는 동시에 망각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인식을 가지게 되는것입니다.
그러한 고유적 속성을 살피는 각성이나 본질적 이해를 갖추지 못한채,
보편적 관점(규정,관념)에 의해 드러난 '무아'를 이해하고자 할 때,
당연히 그 고유한 실재(주체)와의 괴리를 극복할 수단이 없어서
늘 '관념'적 굴레에서 헤메이게도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것입니다.
상기한 논의에 어느정도 동의하신다는 전제로 '무아'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정리해보면,
그 의식적(의도)이며 실재적 정의인 (안다)모른다를 '(있다)없다'의 보편적 관념의 고유성이라고 보며,
동시에 이러한 고유적 속성이야말로 실제적 '주체'라 할 만 하므로, 역으로
우리가 어떤 수행적 존재에 대해서, 그 주체가 '있다' 또는 '없다'라고 하는것은
'안다' 거나 '모른다'라는 상태등의 총체에 대해
'있다'거나 '없다'라는등의 보편적 인식으로 '관념화'한 것이라는것을 이해하는것이 가능해지는것입니다.
질문하신것처럼 '무엇이(주체-고유성,속성) 없다'라는 일반적 인식에는
'무엇'으로 표현되는 그 고유적 속성에 대해서는 망각(무지)한 채,
'없다'라는 관념적 인식만으로 그 모두를 다 이해하려하는데서 오는 혼란이 발생하고 있는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혼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해도
무엇으로 그러한 고유적 속성을 다시 이해하야 할 지에 대해 더욱 우리의 본격적인 주의가 요망된다 하겠습니다.
불교는 그러한 고유적 상태를 일러 '오온' 이라고 정의하며,
그러한 '오온'에 대해서 다시 그 고유적 속성을 일러 '고'라고 정의하고(가르치고) 있는것이며,
이러한 '오온'과 '고'의 상태를 고유의 속성으로 하는 보편적 인식이 바로 '있다'와 '없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다'라거나 '없다'라는 허망한 인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지금 여기의 '이제'에 대한 모든 '인식'행위(수행을 포함한 모든 의도적 노력과 표현)가 불가능하게 되는
현실적 한계가 바로 우리의 '미치고도 싶은(미친, 뒤 바뀐)' 현실인 것이지요...
이러한 뒤 바뀐 현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것이 진정한 겸손이며, 진정한 수행의 출발이라 여겨보면서...()
의견 1
re: 무아에 대한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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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를 하면서 드는 의문 또는 회의적인 의심이 들때
좋은 방법중의 하나가 석가모니부처님을 반조하여 보는 것입니다.
일어난 의문을 가지고 부처님의 일생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지요.
무아를 철저히 알고 가르치신 분은 석가모니 부처님인데
석가모니부처님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살았는가 아닌가?
이렇게 살펴보면 무아를 철저히 안 다는 것이
참으로 걸림없고 괴로움이 소멸한 열반의 삶이란 것을 잘 알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지식인의 한 분이 무아에 대한 두려움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 부처님의 법문을 올려준 것이 있는데
제가 그 부분만 올려드리겠습니다.
전문을 보시려면 링크를 참조하여 보시면
부처님이 설하신 무아에 대한 진리와
그에 따른 해탈열반의 참의미에 대하여
바르게 아실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불교이론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하신 아함경과 니까야와
후대에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창작불보살을 앞세우고 저마다의 이론을 내세웠던
대승논사들에 의해서 부처님의 원음이 한 번 꼬이고
또 뒤의 선불교의 일각에서 일어난
진아 참나 이론때문에
부처님원음이 한 번 더 꼬여
불제자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원음과 불법을
바르게 아는 것이 참으로 험난하고
복잡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창작불보살이전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원음을
바르게 살펴보아야 헷갈리지 않고
위없는 정등각자가 설한 참다운 설법들을
바르게 알고 배우고 받아가질수 있을것입니다.
m22.뱀에 대한 비유의 경
[Alagaddūpamasutta]384)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맛지마니까야 제1권 전재성역주 p437~p465
............................
19.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은 여섯가지 견해의 관점이 있다.
여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여, 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룩한 분을 존경하지 않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아서,
참사람을 존경하지 않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아서,
물질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394)’라고 여기고,
느낌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394)’라고 여기고,
지각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394)’라고 여기고,
형성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394)’라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보고 듣고 감지하고 분별하고 획득하고 추구하고 정신적으로 성찰한 것도395)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이와같은 견해의 관점, 즉 ‘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 나는 죽은 뒤에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396)’라는 관념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20.
수행승들여, 이 세상에 많이 배운 고귀한 제자는
거룩한 분을 존경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서,
참사람을 존경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서,
물질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 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기고,
느낌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 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기고,
지각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 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기고,
형성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 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또한 그는 보고 듣고 추측하고 분별하고 획득하고 추구하고 정신적으로 성찰한 것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 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이와같은 견해의 관점, 즉 ‘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 나는 죽은 뒤에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관념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 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그는 이와같이 여기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되지 않는다.397)
21. 이와같이 말씀하시자 어떤 수행승이 세존께 여쭈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밖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될 수 있습니까?”
[세존]“수행승들이여, 그러할 수 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아! 나는 가졌었는데, 아! 나는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아! 내가 가졌으면! 아! 나는 갖지 못했다.’라고 생각하면, 그는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곤혹스러워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밖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될 수 있다.”
*) 오온 밖에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소아가 대아와 계합된다고 하거나, 우주아에 계합된다고 하거나 같은 사량분별을 말하지요.
22.[수행승] “세존이시여, 밖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세존]“수행승들이여, 그러할 수 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아! 나는 가졌었는데, 아! 나는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아! 내가 가졌으면! 아! 나는 갖지 못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는 슬퍼하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고 비탄해하지 않으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않고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밖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되지 않을 수 있다.”
23. [수행승] “세존이시여,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될 수 있습니까?”
[세존]“수행승들이여, 그러할 수 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 나는 죽은 뒤에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여래 또는 여래의 제자로부터
모든 견해의 관점, 선입견, 편견, 집착, 경향을 뿌리뽑고
모든 형성을 중지하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갈애를 부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열반하기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들었다면,
그는 ‘나는 단멸할 것이다. 나는 파멸할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곤혹스러워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될 수있다.”
*) 오온이 자아라든가, 오온안에 자아가 있다는가, 자아가 오온을 소유하고 있다든가 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안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인데... 부처님이 무아라고 하니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무아설법을 들은 저부터 포함해서 많은 불제자들이 처음에 가지는 의혹이기도 합니다.
24. [수행승] “세존이시여,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세존]“수행승들이여, 그러할 수 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 나는 죽은 뒤에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여래 또는 여래의 제자로부터
모든 견해의 관점, 선입견, 편견, 집착, 경향을 뿌리뽑고
모든 형성을 중지하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갈애를 부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열반하기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듣더라도,
그는 ‘나는 단멸할 것이다. 나는 파멸할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슬퍼하지않고 우울해하지않고 비탄해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않고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되지 않을 수있다.”
25.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처럼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그러한 소유가 있다면 그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398)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처럼 영원히 존재하는 소유를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수행승]“세존이시여, 본 적이 없습니다.”
[세존]“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나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처럼 영원히 존재하는 그러한 소유물을 본 적이 없다.”
*) 부처님이 오온이 무아임을 알아 해탈열반에 이르렀지만, 열반도 자아라고 할수 없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후대에 일어난 창작불보살경전들은 열반이 아(我)라고 하고, 깨달으면 진아, 참나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부처님은 열반에 이르렀지만 열반조차도 자아라고 할 것이 없음을 알아 진정한 해탈열반에 이르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6.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그 자아이론을 취하는 사람에게는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생겨날것같지 않은, 그러한 자아이론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399) 그러나 그대들은 자아이론을 취하는 사람에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 그러한 자아이론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수행승]“세존이시여, 본 적이 없습니다.”
[세존]“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나도 또한 자아이론을 취할 때에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 그러한 자아이론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
27. 수행승들이여, 그 견해를 지지하는 자에게는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생겨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러한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400) 그러나 그대들은 견해에 대한 집착에 의지할 때에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 그런 견해를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수행승]“세존이시여, 본 적이 없습니다.”
[세존]“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나도 또한 그 견해를 지지하는 자에게는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을 생겨나게 하지 않는 그런 견해를 보지 못했다.”
28. 수행승들이여, 자아가 있는 곳에 나의 자아에 속하는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한가?401)
[수행승]“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세존]“수행승들이여, 자아에 속한 것이 있는 곳에 나의 자아가 있는 것이 당연한가?”
[수행승]“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세존]“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자아도, 자아에 속한 것도 진실로, 실제로 얻을 수 없을 때에, ‘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 나는 죽은 뒤에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견해의 관점은,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수행승]“세존이시여, 왜 참으로 완전히 어리석은 것입니까?”
*) 부처님이 무아에 대하여 설하시면서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자아가 있다면 자아에 속하는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열반에도 그러한 것은 없습니다. 즉 열반이 참나이고 진아이라면 부처님 말씀대로 참나에 속하고 진아에 속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은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를 가지지 않는 열반입니다. 그러므로 참나가 있다면 참나의 것이 있어야 하니 참나란 사량분별임을 알수 있습니다.
............
52.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잘 설한 가르침은 분명하고, 열려있고, 확실하고, 위선이 없다.413)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분명하고, 열려있고, 확실하고, 위선이 없는 나의 가르침 가운데, 만약 수행승들이 거룩한 이로서 번뇌를 부수고 수행이 원만하고 해야 할 일을 해 마치고 짐을 내려놓고 이상을 실현하고 존재의 결박을 끊고 올바른 지혜를 얻어 해탈하면 그들에게 윤회는 시설되지 않는다.414)
.............
56.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잘 설한 가르침은 분명하고, 열려있고, 확실하고, 위선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같이 분명하고, 열려있고, 확실하고, 위선이 없는 나의 가르침 가운데, 만약 수행승들이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고, 믿음을 따라 실천한다면 그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415)
[출처] 맛지마니까야22, 뱀에 대한 비유의 경|작성자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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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쓰기
re: 무아에 대한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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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경에서 붓다는 다섯 비구에게
[비구들이여! 물질, 느낌, 생각, 행위, 아는마음은 애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내가 아님' 곧 무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바로 '다섯 끄달림 무더기' 다른 말로 하면 五取蘊을 말합니다.
우리 불교도들은 흔히 오온과 오취온을 같이 쓰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아는 것입니다.
오온과 오취온은 다릅니다.
오온은 본래의 물질과 마음(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오취온은 마음의 때(낄레사. 번뇌. 중생심)가 일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의 본디 성품을 잃어버리고
마음의 때가 이끄는대로 행위를 짓습니다.
곧 결과로 이어지는 행위(업)를 짓는 것인데 이것들은 끊임없이 돌고 돌며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곧, 마음의 때(낄레사). 행위(깜마. 업). 결과(위빠까.과보)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되풀이 하며 괴로움속에서 허우적 거리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취온(중생)의나는 내가 아니며(무아), 오온은 망가진 상태(무상)가 되지요.
본디 모습에서 어그러진 상태란, 오온에 마음의 때가 끼고 잘못된 짓을 거듭하면서
본디 사람모습을 잃습니다. 그 상태는 어그러진, 망가진 상태(무상)이며
그러 까닭에 괴로움(고)인 것이지요. 괴로움 상태는 내가 아닙니다.(무아)
수행이란, 자신에게서 이 세 가지 특성을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빨리어로 [아낟따랙카나경.무아경]이라고 하는 경전은
[법의 바퀴를 처음 굴림 경(초전법륜경)]을 설하고 난 뒤 그 다섯 수행자(오비구)에게
수행해야 할 대상과 수행에 대해서 설하신 경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닙바나에 다다른 이],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을 뜻합니다.
무아경에서 붓다는,
[훌류하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는 물질, 느낌, 생각, 행위,
아는 마음인 끄달림(집착) 무더기들이 드러날 때에 어떤 마음가짐을 두어야 하는가?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은 내몸이다. 라는 마음가짐을 두어야 하는가?
이러한 마음가짐은 알맞은가?] 라는 붓다의 물음에 다섯 비구는
[알맞지 않습니다. 부처님! 지난간 때(과거), 앞으로 올 때(미래), 지금 이 때,
안과 바깥,멀고 가까움. 거칠고 부드러움. 낮고 높음이라는 때와 곳, 형편(상황)에
상관 없이 일어나는 물질이든 느낌이든 생각 따위들이 [내가 아니다.] [내 것이 아니다] [내 몸이 아니다]라고 알고 정말 있는 그대로 알도록 공부하겠습니다.]
라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다섯 비구들은 이와 같이 공부하여(수행) 마음의 때와 그 때에 절여짐(아사와)의 흐름에서
벗어난, 마음의 때 흐름을 끊고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늘 편안한 날 지으세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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