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 염화시중, 삼처전심에 대한 의문hemosa 2004.09.14 14:44 |
답변 3 조회 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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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 염화시중, 삼처전심에 대한 의문
1.
부처님의 마음을 세차례 가섭존자에게만 전했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은
a. 영산회상염화미소(靈山會上拈花微笑) b.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c. 쌍림열반곽시쌍부(雙林涅槃槨示雙趺)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중에 영산회상염화미소는 염화미소가 실린 경전에 선종(善種)의 4대교의라고 일컬어지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중의 2개가 처음으로 실려있어 더욱 중요한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爾時大梵天王白佛言 世尊出世四十餘年 種種說法 云何有未曾有法也 云何有及言語法也 願爲世間一切人天 能示已自 言 了金色千葉大婆羅華 持以上佛 而退捨身 以爲上座 鎭誡念願 爾時世尊著坐其座 廓然拈華示衆 會中 百萬人天及諸比丘 悉皆默然 時於會中 唯有尊者摩訶迦葉 卽見其示 破顔微笑 從座而起 合掌正立 有氣無言 爾時佛告摩訶迦葉言 吾有正法眼藏涅槃妙心實相無相微妙法 不立文字 敎外別傳 有智無智 得因緣證 今日付囑摩訶迦葉 摩訶迦葉未來世中 奉事諸佛 當得成佛 今日亦堪爲世間事"
{大梵天王問佛決疑經}, (卍續藏87, pp.326-327)
이 이야기는 선종을 이야기 할때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선종의 종지를 설명하거나 드러내보일때 삼처전심의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종지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는 것 같다. 뿐만아니라 그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이 순간부터 선의 역사가 시작되며 최초로 화두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평가들도 많이 들을 수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실은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편찬된, 위경(僞經)이란 설이 너무 많습니다. (질문의 마지막에 붙임)
2.
선종의 대표적인 종지의 출발점이 되는 경전이 위경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제가 보건데 몇가지의 반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주장의 예를들면
“여기서 삼처전심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므로 그만 두기로 한다.”
또는 “부처님께 서 그 당시의 소승선, 대승선, 범부선, 외도선 등 여러 가지 모든 방법으로 수행을 하셨지만 확철대오를 못 하셨습니다. 화두의 역사는 부처님이 확철대오하신 순간부터 시작된것이다”
또는 “삼처전심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삼처전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고 자 한 것인가 그것이 중요하지요.”
라는 주장들이 있다.
3.
불교의 초보자로서 이같은 자료들을 접하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나무라시는 분들이 많겠지만,또는 “삼처전심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삼처전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고 자 한 것인가 그것이 중요하지요.”라는 가르침을 새기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내가 가고자하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정법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질문을 드리고 싶다. 이 질문은 영산회상염화미소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찬술, 편찬, 기록된 위경에 실린 이야기라는 전제를 가지고 질문을 드린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죄업은 내가 받을것이며 또한 그것은 부처님의 정법에 다가가는 의미있는 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4. 질문
영산회상의 염화시중이 위경의 기술자에 의해서 기록 혹은 창작된것이라면, 그것을 부처님의 이야기라고 전해도 되는 것인가?
영산회상 염회시중의 이야기는 다른 두개의 이야기와 다르게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吾有正法 -- 今日付囑摩訶迦葉. 즉 부처님의 정법을 마하가섭에게 부촉, 전한다는 것입니다.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일의 제자라고 일컬어지던 사리불이 부처님의 열반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하며 먼저 스스로 죽은 후, 남은 제자들중에서 부처님의 열반후 부처님의 법을 결집하고 승단을 돌봤다는 것으로만 보아도 마하가섭존자의 위치는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숭고함마저 느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영산회상 염화시중의 이야기는 이러한 법통보다는 중국적인 교종의 폐해에 맞서기 위해 투쟁하였던 중국의 선사들이 부처님의 법통이 중국적인 교종이 아니라 선종이며, 자신들의 법통을 부처님열반후 법의 계승자인 마하가섭에게서 바로 전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찬술된 것은 아닌지 의심됩니다. 즉 염회시중이야기를 담은 경전을 기술한 분은 今日付囑摩訶迦葉이란 8글자를 말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부처님의 정법을 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라고 “불교적”으로 이해할수도 있습니다만 난폭하게 말한다면 조상을 바꾸는 수법, 양반첩을 사서 양반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를 속이는 것입니다.
거룩한 부처님을 속이는 일이며
거룩한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따르는 가엾은 중생들을 속이는 일이며
또한 자신의 깨달음과 방편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치장한 그분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거룩한 부처님이 도대체 왜 어떠한 거짓말이라도 지어내는 “모범”으로 추앙을 받는것인지 심히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5.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 위경이라는 주장들
http://www.budcanon.org/text/c.hwp
현재에도 일부에서는 말하기를 ≪능엄경.원각경≫ 은 대만 영인본 ≪卍속장경≫ 제87책에 수록된 ≪대범천왕문불결의경≫ 처럼 달마선종의 원리를 천명하려는 목적으로 중국에서 결집한 경이라고도 한다.
http://www.hope848.com/4daegyukeon.htm
첫째는 선종이 주장하는『대범천왕문불의경』에 설하는 석존에게서 마하가섭에게로『교외별전(敎外別傳)』이 전혀 불설에 의거로 하지 않은 것.
http://myhome.hitel.net/%7Ehiman123/sageakyouckeon.htm
靈山會上(영산회상)에서 석존이 말없이 꽃을 비틀어 대중에게 제시했을때, 모두가 그 암시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迦葉(가섭)만이 그 의미를 깨닫고 破顔微笑(파안미소)했습니다. 그리고 大梵天王問佛決疑經(대범천왕문불결의경, 이것은 僞經(위경)이다)에 있는「正法眼藏(정법안장)ㆍ涅槃(열반)의 妙心(묘심)ㆍ實相無相(실상무상)ㆍ微妙(미묘)한 法門(법문)이 있으며
http://www.daesan.org/wepzine/2004spring/%B4%EB%C0%DB%BF%A1%BC%BC%C0%CC.htm
석가모니가, 영산회 때, 다른 법설은 없이, 꽃 한 송이를 꺾어 들어, 회중에게 보이자, 회중은 영문을 몰라 묵연해 있기만 한데, 가섭이가 파안미소(破顔微笑)를 했다는 일화가, 『無門關 (ZEN AND ZEN CLASSICS. Vol. 4. MUMONKAN. R.H.Blyth 편역 Hokuseido Press.)』 제육공안(第六公案)에 있다. 그러나 보주(補註)에는, 잔존하는 어느 경전 중에도, 이 일화는 찾아지지 않으며, 삼사세기경에 나타난, 「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라는 ‘위경(僞經)’ 속에만 있다고 하고 있어, 선(禪)의 역사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http://www.amita.net/buddhism/bud2_10_04.php
그런데 대중들은 금바라화 꽃이 보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상대적인 금색광명이나 또는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중생의 때묻은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緣起)를 말한 경은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현재는 위경(僞經)이라 함)으로서 대범천왕이 부처님께 금색바라화를 바치고 법문을 청하자 부처님께서 그 꽃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꽃은 사람이 드린 것이 아니라 범천왕이 드린 천상의 꽃인 것입니다.
http://www.manbulshinmun.com/upload_html/200402/200402170005.ASP?gb=&no
=200402170005
위경(僞經)으로 알려진 《대범왕문불결의경》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어느 때 대범천왕이 일체 중생들이 커다란 이익을 얻게 하기 위해 영취산에서 한줄기 금색의 파라꽃을 부처님께 헌납하면서 설법을 청하게 된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법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의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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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여유롭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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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인사 예전에 손오공 불법을 구하기 위해 사막을 건넜지. 요즘 손오공 인터넷으로 삼천대천세계를 누비더군. 그래봤자 부처님 손가락 끝일뿐이지만.... drlsnijesh님 제가 원하는 답변은 아니지만 제게 가장 큰 고민을 주
좀 더 여유롭고 넓게 보실 필요가 있지않을까요?
님께서 가지는 주된 관심사는 경전(경전이라고 하는 책^^)의 말씀이 진실한 부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 하는것- 위경이나 아니냐?-인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하는 소리는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을 훼손하는 것이며 참불교를 망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바탕에 가지고 진짜진짜 참 부처님말씀만이 진짜 불교의 가르침아니냐 하시는것 같습니다.^^
어쨌던 위경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몇가지 점을 염두에 둬야할거 같습니다.
1. 초기 경전 성립에 대한 이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들이 곧바로 문자화된것은 아니자나요. 부처님 사후 한참이 지나서야 문자화 되었는데 그렇다면 초기경전이라 알려진 아함경이나 니까야 경전들은 부처님 말씀그대로 한글자한글자 빼먹지 않고 그대로 기록되었을까요? 암송되어 전승되었을 경전의 내용이 부처님 말씀내용 그대로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초기경전의 말씀들도 부처님의 진짜말씀이라 하기가 어렵다 할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말씀은 어디에서 찾을수가 잇나요? 님처럼 곧이곧대로 보신다면 부처님 말씀은 찾을수가 없을겁니다. 온갖 문헌학적 고고학적 연구를 혼자서 다하셔야 할것입니다. 경전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신 학자들의 글이나 고승대덕의 글들을 하나하나 직접 살펴서 자신만의 입장(부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에 대한)을 가지셔야 하는데 너무 힘든일이 아닐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무엇에 대한 내용을 구하고자 하시는 노력이 이상한 학문으로 변질될수 있을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학문적인 노력도 달성하기 어려운 힘든 공부가 될터이구요.
또하나 초기경전에 대해서 말씀드릴수 잇는것은, 지금 남아있는 초기경전들이 어느정도 석가모니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했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아있다는것입니다. 즉, 북방에 전해지는 아함경이나 팔리의 니까야의 내용은 많은부분 일치하는부분도 있지만 서로에게 없는 내용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하면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일부는 빠진것이 있을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석가모니의 말씀이 더 있었는데 역사적으로 소멸된 것이 있다면 부처님의 참 말씀이 빠져서 전해진것이 되는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빠진 글속에서 어떻게 부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알수가 있겠습니까?
바다물을 다 먹어야 짠맛을 아는것은 아니자나요. 한방울만 찍어먹어도 짜운것을 알수 있자나요. 설혹 빠진것이 있고 조금 왜곡된것이 있다하더라도 맛을 보시면 알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초기 부파불교에 대하여
초기 경전들에 대한 위와같은 입장은 부파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파불교라고 일컬어지는 불교에서는 경전에 대한 상당한 다양한 해석?을 하게되자나요. 이들 부파불교에 들어서서 진정한 의미의 삼장(경.율.론)이 성립하게 되는데 부처님 말씀에 대한 각각의 논자들이 각각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논서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부처님 말씀이라고 전해지는 경전의 구절이 송(운율을 가진 시?)으로 보여지고 이에 대한 여러 입장을 밝히거나 해석하는 형태입니다. 이들 논서는 각 논사들의 입장이 들어있어서 논서간에 이견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논서는 불교의 가르침이 아닐까요? 불교의가르침이 아니라면 어찌 삼장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너무 고지지식한 근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겁니다.
3. 대승경전에 대해서
대승경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대승경전은 모두 위경이라는 논쟁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여시아문... 으로 시작하는경전이 모두 부처님 말씀이라면 부처님 열반하신후 한참도 한참이나 지난 시기에 성립한 대승경전들이 여시아문이라고 하는것은 모조리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초기 경전에 등장하지 않는 모든 불보살은 모두 거짓말에 의해 창작된 것 아닌가요?
그렇지만 이들 경전을 보고 위경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그럴까요? 오랜기간동안 성립된 방대한 반야경 중에서 일부인 금강경을 왜 위경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다물의 짠맛을 본 수많은 고승대덕에 의해 바다물임을 알수 있기때문입니다. 전 어떤 맛이 바닷물의 맛인지 모르지만 그러한 경전이 바다물의 짬을 알려주는 방향은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인거 아니겠습니까?
4. 번역 경전이어서...
현재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경전의 형태는 대부분 한문본입니다. 물론 니까야도 있고 티베트어도 있고 몽골어로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쉽게 접하는것은 한문본이지요. 이들 한문본이 제대로 원본을 제대로 번역했는지도 의문이 들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님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의문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번역도 올바로 되었는지 원문을살펴보고 검토해야 할것입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이런 작업을 하고게신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이런 작업을- 저는 이런작업을 학문적 연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너무 따지는 것일겝니다.
5. 물론 진지한 자세이고 정확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님께서 가지시는 의문은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공부하시는 기본적인 자세라고생각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점에만 묻힌다면 본래 공부하시고자 하는 부분을 놓치시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님께서도 그런점은 충분히 알고계시는것 같습니다. 질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러한 것 같습니다.
더더구나 자신의 단편적인 깨달음이나 방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일들이 많을수 있는 오늘날에 불교를 공부해가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해야할 기본태도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다만 좀더 여유롭고 넓게 보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6. 개인적으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불교는 선적인풍토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점이 달갑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조계종-조계종이 선종이라는 말은 아닙니다만-이 지금 우리나라 불교의 큰 흐름이다 보니 그런것 같습니다만 선적인 풍토가 불교를 공허하고 허황스럽고 신비스럽게 생각하는 방향으로 몰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스님들의 공부가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말하는 것 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공부가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자상하지 못한 불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공부를 안내해줄 수 있는 공간이 각 사찰 또는 불교대학 같은데서 마련되고있다는 점은 반가운 일지지요. 많이 활성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던 제가 선불교를 잘 모르다보니 정확히는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지만 마하가섭의 부처님의 법을 부촉 했는지 안했는지는 몰라도 석가모니 사후 승가집단에서 아난을 제치고 리더쉽을 발휘한것은 사실인거 같습니다. 사리자나 목련존자가 잇었다면 어찌되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어쨌던 아난의 세력은 가섭의 세력에 비해 약했을 것 같습니다. 부파불교중에 아난을 중요시하는 부파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파불교에 대해서는 이부종륜론을 참조하시면 약간은 도움이되리라 생각합니다.
전 석가모니에서 달마에 이르는 부법계보는 선종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태나 화엄에서 경전에 대한 교상판석을 한것처럼 선종의 입장에서 부법의 계보를 밝힘으로써 선적인 정통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이 전혀 선불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천태나 화엄역시 마찬가지이고요. 부파불교의 가르침을 소승이라고 폄하하면서 등장한 대승불교 역시 기존불교를 폄하하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에서 그 가치가 낮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파불교, 대승에서 소승불교라고 말해지는 불교도 역시 못나고 나쁜?불교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불교의 순수성 경전의 순수성을 따진다면 불교속에는 많은 힌두적인 요소도 있고 중국적인 요소도 있고 한국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것 모두를 배척할수는 없는것 아닐까요? 그것을 모두 불교라고 하는 큰 바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닐까요?
전 어릴때부터 기복적이고 맹목적인 종교를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것이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 어리석어 보였거든요. 지금도 물론 어리석은 신앙 행위라는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만 좀 달라진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들도 우리 인간들이 하는 행위라는 점이 인정되더라는 말입니다. 제가 비교해서 어리석다고 생각이 되어지는 그러한 행동들이 뭐 특별하게 올바르지도 않을뿐 아니라 비록 상대적으로 바른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의미가 있을뿐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저지르는 수많은 어리석음이 제눈에는 잘 안보이는 것이겠지요. 그런점에서 기복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을 보더라도 그러한 신앙을 하는 사람자체는 인정이 되더라구요.
어쨌던 이런 기복적인 불교도 불교인것은 사실이니까 다양한 공부하시다보면 저절로 님께서 해결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님께서 다아시고 하시는 말씀이라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이런저런 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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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각자(覺者)를 일컫는 말입니다.
마음을 깨달아 모든 고(苦)와 생사번뇌를 해탈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 미래의 모든 스승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위 진경(眞經)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則見如來)
무릇 모양이 있는 존재는 모두 허망하니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보느니라
제상비상(諸相非相)을 깨달음으로써 부처를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즉 부처가 되는 것은 제상비상(諸相非相)을 깨닫는 것에 의해 성취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이러한 깨달음에 의한 성불(成佛)의 길을 열어 놓으신 이후로 많은 선지식과 역대 조사들께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깨달아 성불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과 역대 조사나 선지식의 가르침을 별개의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둘이 될 수 없듯이, 깨달음도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깊고 얕음을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불교에 입문하는 초심자의 입장에서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됩니다. 역대 조사님과 선지식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佛法)에 어긋난 것이거나 부족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거룩한 것은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이지, 불교라는 종교의 창시자(?)이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진리의 길이니, 진리는 석가모니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미륵부처님 이후에도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다른 측면에서 거룩하게 믿는 것은 부처님의 참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예불문에 나오듯이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인 부처님’을 특정한 대상으로 한정하는 것은 불자(佛子)로서 매우 조심해야할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부처님 자신의 가르침조차도 뗏목과 같아서 강을 건넌 이후에는 뗏목을 내려놓듯이 내려놓고 가야하는 것이니 경전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부처님의 뜻을 어떻게 이어받아 깨달음의 지혜광명을 성취할 것인지를 참구해 나가는 것이 우리 불자(佛子)들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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