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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여행|인도에서 만난 팔상록 7(설산수도상)

명상여행|인도에서 만난 팔상록 7(설산수도상)
‘소설가 정찬주와 떠나는 <인도에서 본 팔상록>’을 연재합니다. 인도를 찾아 붓다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요약한 팔상록(八相綠)의 현장을 직접 순례하며 쓰게 될 이번 연재는 단순한 기행문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여행,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



붓다는 설산에서 수도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나는 히말라야를 보기 위해 네팔에 간 적이 있다. 『팔상록』을 보면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고행했다는 설산수도상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시골의 시외버스 정류장처럼 생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공항에서 곧장 흰 눈이 푸르게 빛나는 안나푸르나 산봉우리 부근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페와 호숫가 민가에서 하루를 보내며 안나푸르나의 만년설(萬年雪)을 눈에 담으면서 붓다의 영혼에 빛깔이 있다면 바로 저런 서늘한 눈빛이 아닐까 하고 감격해 했다.
그러나 그 후 붓다의 유적지를 다시 순례하면서 『팔상록』에 나오는 설산수도상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카필라 성을 나온 싯다르타가 히말라야에서 고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싯다르타는 강가강을 넘나들며 남쪽으로 갔다 다시 마가다국을 향해 서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렇다고 설산수도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의 모진 고행을 강조하기 위해 설산수도란 말을 은유로 갖다 붙였던 것은 아닐까 싶다. 
싯다르타는 아라다 카라마와 헤어진 뒤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로 갔다. 라자그리하 부근의 산에도 존경할 만한 선인이 수행하고 있었다. 라자그리하 주위에는 영취산 등 다섯 개의 큰 산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다섯 개의 산중에서 판다바산으로 들어가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후, 싯다르타는 판다바산에서 나와 소문으로 들었던 라자그리하의 선인을 찾아갔다. 그 선인의 이름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였고, 그의 제자는 700여 명이나 되었다.
싯다르타는 우드라카가 어떤 스승의 법을 받았기에 모든 수행자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지 궁금했다.
“선인이시여, 스승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우드라카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스승이 없소. 나 스스로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었소.”
“선인이시여, 나는 그대가 깨달은 경지를 알고 싶습니다.”
우드라카는 싯다르타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알려 주었고, 싯다르타는 판다바산의 동굴로 돌아와 우드라카가 알려 준 방법대로 정진했다. 싯다르타는 곧 그 경지에 도달했고, 다시 우드라카에게 가서 말했다.
“당신이 말한 경지는 이런 것이 아닙니까?”
“맞소. 이제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알려 주겠소.”
비상비비상처란 당시 수행자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정삼매를 말했다. 우드라카 역시 아라다 카라마처럼 자신의 교단을 함께 이끌어 가자고 싯다르타에게 제의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가 가르쳐 준 비상비비상처도 생사윤회를 끊는 경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시 길을 떠났다. 싯다르타는 라자그리하를 떠나 서남쪽으로 향했다. 싯다르타는 수행자들 사이에 고행촌(苦行村)이라고 불리는 우루벨라로 갔다.



라즈기르 거리에서 빔비사라왕을 떠올리다

라즈기르. 한자로는 왕사성(王舍城)이고, 마가다국일 때는 라자그리하로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해 많은 인도인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라즈기르에는 죽림정사와, 영축산과 가섭존자의 주도 아래 붓다의 말씀을 모아 경전을 만든 칠엽굴이라는 불교 성지가 있다.
죽림정사 안을 서성이는 동안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빔비사라왕이다. 빔비사라왕이 붓다를 위해 지어 준 절이 죽림정사(竹林精舍)이기 때문이다. 죽림정사는 불교 역사상 최초의 절인 셈이다.
그러나 최근에 시멘트로 복원한 절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지어 바친 절이라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경내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숲이다. 대나무 숲 속에 지어진 절이라 해서 죽림정사라고 했던 것이다.
빔비사라왕이 왜 붓다를 위해 절을 지었을까. 아무리 불교 신자라 하더라도 어떤 동기가 있었을 법하다. 그렇다. 빔비사라왕이 붓다를 흠모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다. 싯다르타가 선인을 찾아 바이샬리에서 라자그리하로 왔을 때 빔비사라왕이 높은 누각에서 싯다르타를 보았던 것이다.
그때 싯다르타는 바리때를 손에 들고 탁발 중이었다. 거리로 탁발 나온 수행자들이 많았지만 싯다르타의 모습은 그들과 달랐다. 눈은 지그시 반개하고 있었고, 걸음걸이는 사자와 같이 당당했다. 그의 몸에서는 해와  같은 빛이 나는 듯했다. 사람들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싯다르타 뒤를 무리지어 따랐다. 누각에서 싯다르타를 바라보던 빔비사라왕도 놀랐다.
“사람들에게 나보다 더 존경받는 사문이 있다니. 저 사문도 왕족 출신일지 모른다.”
젊은 빔비사라왕은 질투심이 났다. 그래서 그를 시종하고 있는 신하에게 말했다.
“저 사문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오라.”
즉시 한 신하가 탁발을 마친 싯다르타의 뒤를 쫓아갔다. 싯다르타는 판다바산 동굴로 들어가 신하의 인기척에도 상관하지 않고 선정에 들었다.
싯다르타는 빔비사라왕이 판다바산에 도착해서야 선정에서 깨어났다. 빔비사라왕은 마차에서 내려 산 위로 걸어오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대는 누구십니까?”
“나는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이오.”
그제야 싯다르타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합장을 했다.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는 것을 보니 당신은 훌륭한 왕족 출신 같소. 그런데도 출가하여 탁발하며 수행하다니 슬픈 일이오. 나는 당신이 우리 마가다국에 머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소.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시오?”
“나는 카필라성 슛도다나왕의 아들 싯다르타입니다.”
“왕이 되지 않고 어찌하여 사문이 되었소?”
“나는 삶과 죽음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출가를 했습니다. 그러니 부처와 같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수행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약속을 하나 해 줄 수 있겠소?”
“무슨 약속입니까?”
“부처가 된 후 마가다국을 다시 찾아와 내게 가르침을 줄 수 있겠소?”
싯다르타는 미소로 대답했다. 실제로 싯다르타는 붓다가 된 후 라자그리하로 돌아와 다섯 살 아래인 빔비사라왕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그에게서 죽림정사를 기증받는다.



네란자라강 모래밭을 걸으며

강가강의 지류인 네란자라강은 물이 말라 모래밭이 더 넓어졌다. 나는 차에서 내려 일부러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을 걷고 있다. 가끔 바람이 불어 먼지 같은 미세한 모래가 날아와 눈을 뜨지 못하게 한다.
나는 모래밭에서 가부좌를 튼다. 힌두교 수행자인 듯한 청년이 오두막에서 나와 나를 바라보지만 나는 의식하지 않고 네란자라강을 응시한다.
2500년 전, 라자그리하를 떠난 싯다르타도 이 모래밭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때 싯다르타는 가부좌를 튼 채 이렇게 자신과 약속한다.
‘아라다 카라마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도 내게 생사윤회를 끊는 가르침을 주지는 못했다. 선정삼매에 드는 것만으로는 생사윤회하는 중생의 고통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수행자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두 선인에게서도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 이제는 내가 스스로 깨닫는 방법밖에는 없다.’
자신과 약속한 싯다르타의 모습은 비장했다.
‘위없는 깨달음은 남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위없는 깨달음은 내 스스로 얻을 수밖에 없으리라.’

싯다르타는 고행촌인 우루벨라로 가기 위해 네란자라강가 모래밭을 걸었다.
‘두 선인에게 배운 선정삼매는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깨달음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무념무상의 경지로 안내할 뿐 생사윤회를 끊게 하지는 못한다. 부처와 같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제 내 스스로 고행하여 깨닫는 수밖에 없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수행할 장소를 찾아 네란자라강가의 산길을 걸었다. 그때 한 무리의 수행자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고행을 한 뒤 네란자라강에서 목욕하고 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이곳 우루벨라는 수행하기에 어떻습니까?”
“수행하기에 더없이 즐거운 곳입니다. 강이 있어 목욕하기에 좋고, 농가가 가까워 탁발하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카필라성에서 온 싯다르타입니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생사윤회의 고통을 끊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행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깨달음입니다. 우리와 같이 이곳에서 수행하지 않겠습니까?”
비로소 싯다르타는 네란자라강가의 전정각산(前正覺山)에서 수행할 자리를 찾아 풀을 깔았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섯 명의 낯익은 수행자가 다가왔다. 그들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 제자들로 싯다르타를 흠모하여 라자그리하에서부터 뒤따라온 수행자들이었다. 그들은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기대하고 온 수행자들이었다.
‘저 싯다르타는 짧은 기간에 우드라카의 경지에 오른 수행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드라카 선인 곁을 떠난 분이 아닌가. 우리는 우드라카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들었지만 스승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저 싯다르타는 우리와 다르다.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고야 말 수행자임에 틀림없다.’

싯다르타는 고행촌의 수행자들이 하는 고행을 보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이라기보다는 타성에 젖은 행동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수행자들 중에 몸과 마음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고행하는 이가 있다. 이는 마치 불을 얻고자 하면서 젖은 나무를 물속에서 마주 비비는 것과 같다. 이러면서 어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수행자들 중에 비록 몸으로는 탐욕을 끊었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 애착을 버리지 못한 이가 있다. 이 역시 불을 얻고자 하면서 젖은 나무를 물속에서 마주 비비는 것과 같다. 이러면서 어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수행자 중에 바르게 닦아 몸과 마음의 탐욕을 버리고 조용한 곳에서 고행하는 이가 있다. 이는 불을 얻기 위해 잘 마른 나무를 마른 땅에서 마주 비비는 것과 같아 비로소 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심신이 맑고 고요한 상태에서 고행을 해야만 위없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맑고 고요한 상태에 이르도록 편안하게 수행한 다음 고행을 시작했다. 고행촌에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극한의 혹독한 고행이었다.
결가부좌를 한 상태에서 먼저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자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몸 안에 가득 찼다.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더니 이마에서도 땀이 비 오듯 했다. 호흡을 막으니 양쪽 귀에서 커다란 공명이 생겨나 풀무질하는 것처럼 소리가 났다. 그래도 귀와 코와 입으로 모든 호흡을 막아 버리니 몸 안의 열기가 정수리로 올라가 충돌하면서 예리한 칼로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호흡을 계속 멈추니 몸 안의 바람이 양 겨드랑이 사이에 불어 닥치며 당장 몸이 풍비박산이 날 것만 같았다. 몸 안이 불길에 휩싸이는 듯했다.
호흡을 멈추는 고행을 하면서 단식도 병행했다. 식사량을 줄여 하루에 보리 한 알만 먹기를 계속하자, 몸은 여윌 대로 여위어 배와 등뼈가 달라붙었다. 다시 보리 한 알에서 삼씨 한 알로 줄이자 피부 빛깔이 잿빛으로 변해 시체와 같아져 버렸다.
싯다르타는 이와 같은 고행을 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이를 지켜보던 우드라카의 제자 다섯 명은 싯다르타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훗날 마명 보살은 자신이 지은 『불소행찬(佛所行讚)』에 싯다르타의 고행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실로 고행자 중에 최상의 고행자였다. 남들이 바치는 음식도 받지 않았으며 풀과 떨어진 과일만 주워 먹었다. 나는 무덤 사이에서 시체와 해골과 함께 지냈다. 그때 목동들은 내게 와서 침을 뱉고 오줌을 누기도 했으며 귀에 나무꼬챙이를 쑤셔 넣기도 했다. 내 목에는 여러 해 동안 때가 끼어 저절로 살가죽을 이루었으며 머리는 길어 새들이 찾아들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더한 고독한 수행자였다. 나는 숲에서 숲으로, 밀림에서 밀림으로, 낮은 땅에서 낮은 땅으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홀로 지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모든 생명을 가엾게 여기는 고행자였다.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조심하여 한 방울의 물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그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일지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를 대추 한 알로도 보냈으며 멥쌀 한 알을 먹고도 지냈으며 하루에 한 끼, 사흘에 한 끼, 이윽고 이레에 한 끼를 먹고 보름에 한 끼를 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무척 여위었다. 내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았고, 내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무너진 서까래 같았다.
내 뱃가죽은 등뼈에 들러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부터 곤두박질했다. 살갗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뽑혀 나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 싯다르타는 이미 목숨을 마쳤구나. 이제 목숨을 다할 것이다.”
우루벨라에서 이 『불소행찬』 구절을 떠올리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아상(我相)과 집착을 버리겠다는 내게 문득 발심(發心)의 불을 댕겨 주기도 했다. 지금도 내 책상머리에는 너무도 자비롭고 비장하여 장엄한 『불소행찬』의 이 구절이 내 삶을 반조하는 거울인 듯 죽비인 듯 붙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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