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여행│인도에서 만난 팔상록(八相綠) |
‘소설가 정찬주와 떠나는 <인도에서 본 팔상록>’을 연재합니다. 인도를 찾아 붓다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요약한 팔상록(八相綠)의 현장을 직접 순례하며 쓰게 될 이번 연재는 단순한 기행문에 그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명상여행,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 카필라 성의 아침 햇살 나는 지금 인도의 삐푸라하와 지역에 있는 고대 도시 카필라 성으로 가고 있다. 물론 일부 고고학자들이 카필라 성이라고 확신하는 네팔의 틸라우라코트 지역에도 가 볼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카필라 성의 위치를 놓고 오랫 동안 설전을 벌이고 있지만 그들의 어떤 주장도 나를 흥미롭게 하지는 못한다. 두 곳을 모두 답사하며 붓다의 체온과 숨결을 더 많이 경험하고 싶을 뿐이다.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난 아기 붓다가 돌아와서 부왕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곳이 바로 카필라 성이다. 붓다는 출가하기 전까지 카필라 성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사춘기에는 새에게 먹힌 벌레 한 마리를 보고 연민과 사색에 휩싸이기도 했고, 단련된 몸으로 전장의 장수처럼 말을 타고 활의 시위를 당겨 보기도 했고, 미모의 야수다라와 결혼하여 천진난만한 아들 라훌라를 낳아 세속의 정을 느껴 보기도 했다. 드넓은 들판에는 명주실 같은 아침 햇살이 축복처럼 쏟아지고 있다. 뜨거워지는 대지 위에서 농부들은 흰 소를 앞세우고 써레질하기에 바쁘고, 수줍게 드러난 흙의 속살에서는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2천5백 년 전 어린 붓다가 카필라 성에 계실 때에도 성 밖의 농부들은 늙고 지친 저런 고달픈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했으리라. 흔들리는 버스 차창에 기대어 나는 또 상념에 잠긴다. 문득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가 떠오른다. 헤세가 붓다를 바라보는 방식이란 다분히 귀납적이다.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알고, 그리하여 고행의 길을 선택하여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른바 성장소설의 틀에서 붓다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기독교 문명에 익숙한 헤세의 관점은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한 인간이 신(神)의 구원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으로 ‘깨달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은 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헤세와 같은 서양의 지식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터이다. 나도 붓다를 깊이 알기 전까지의 관점은 그랬다. 스물아홉에 출가하여 서른다섯에 정각을 이루는, 즉 붓다가 되어 가는 성불에 눈길을 주고 감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러한 관점을 폐기하기로 했다. 붓다가 지구별에 내려온 까닭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지상에서의 붓다의 일생은 ‘방편의 삶’이다. 지금 내가 붓다를 바라보는 방식은 연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생의 공간에서는 붓다로 살았는데, 금생이라는 공간에서는 잠시 방황하는 한 인간의 배역을 맡다가 다시 붓다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탄생게」에서 이미 붓다가 선언한 바 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엄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나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전생에 붓다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은 선언을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모두 없애 주겠다고 원력을 세운 이의 존재가 어찌 하늘 위, 아래서 존엄하지 않을까. 그것을 오만과 교만이라고 평하거나, 설화 속으로 생각을 옮기며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우주의 모든 고통을 없애겠다는 원력을 가진 자만이 비로소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엄해진다는 붓다의 자비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진리의 비를 내리시는 부처님 버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착한 곳은 카필라 성의 동문 앞. 나는 버스에서 내려 붓다스투파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희열이 목젖을 타고 넘어온다. 마치 붓다의 그림자가 어린 땅에 입을 맞추는 기분이다. 발을 딛는 땅에서 연꽃 향기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붓다가 열반하시자, 진신사리를 공평하게 8등분하여 8기의 사리탑에 모셨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카필라 성의 이 붓다스 투파도 8기의 사리탑 중에 하나이다. 실제로 이곳의 붓다스투파에서 진신사리가 담긴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사리함에는 “이것은 석가족 붓다 세존의 사리함으로서, 그의 형제자매 처자들이 모신 것이다”라는 명문이 씌어져 있다. 또한 붓다스투파 앞쪽의 승원 터에서는 “옴 데바푸트라 승원, 카필라 성 비구상가”라는 테라코타의 인장 자국이 발견되어 이곳이 카필라 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현재 델리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는 6년 전에 그곳을 찾아가 붓다의 진신사리를 친견한 적이 있다. 그때의 메모를 보니 이렇게 적혀 있다. “‘사리’ 하면 오색영롱한 구슬을 떠올리는데 붓다의 진신사리는 말 그대로 붓다의 뼛조각으로 약간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붓다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나버린 초인이거나 신비한 각자(覺者)가 아니라 ‘그도 역시 사람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늙은 고행자 아시타의 슬픔 그 옛날, 히말라야 산에서 수도하던 늙은 아시타도 붓다가 탄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축복하기 위해 카필라 성을 찾아오게 된다. 카필라 성의 모든 사람들은 아기를 태자 싯다르타라고 불렀지만 늙은 고행자 아시타는 천안(天眼)으로 한눈에 아기 태자가 붓다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아시타가 붓다를 알아본 것은 결코 신비한 일도 아니고 불가사의한 일도 아니었다. 아시타는 히말라야 산에서 오랫동안 고행하여 우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경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아시타는 제자를 데리고 카필라 성의 궁문 앞에서 슛도다나 왕을 기다렸다. 왕은 반갑고 정중하게 늙은 고행자를 맞이했다. 와타나베 쇼코가 쓴, 내가 보기에는 최고의 부처님 일대기인 『불타 석가모니』를 읽어 보면 이 광경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왕은 기뻐하면서 선인을 맞이했다. 찾아온 사연을 듣고 나서, 지금은 태자가 잠들어 있으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시타 선인은 이렇게 말한다. “태자 같은 분이 그렇게 오래 잠드실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 보니, 태자는 벌써 깨어 있었다. 왕은 몸소 태자를 안고 와서 선인의 품에 넘겨 준다. 선인이 갓난아기를 안고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신들보다도 훨씬 거룩하고 태양보다도 빛났다. “마침내 대장부가 세상에 출현하셨구나!” 이렇게 감탄하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 광경을 보고 왕을 비롯해 양어머니와 일족들이 모두 함께 운다. 이윽고 왕은 아시타 선인을 보고 청한다.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점치는 사람들을 불러서 보였더니, 다들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큰 선인이 슬피 우는 걸 보니 우리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길흉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아시타 선인은 눈물을 거두고 이와 같이 말한다. “대왕이시여,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제가 지금 슬퍼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보시다시피 저는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러니 바른 법도 듣지 못하고 부처님이 세상을 편안케 하시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한없는 중생이 번뇌의 불길에 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진리의 비를 내려 이를 소멸해 주실 것입니다. 우담발화가 피는 일이 보기 드물듯이, 부처님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는 일도 지극히 드뭅니다. 대왕이시여, 부처님이 보리좌에 앉아 악마를 항복시키고 법륜을 굴리는 것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과보를 받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불은을 입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리고 아시타 선인은 태자가 전륜성왕이 아니라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선인과 그 제자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베풀고 값진 의복을 선물한다. 선인은 제자를 데리고 돌아가며,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머지않아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할 것이니, 너는 출가해 그분의 제자가 되어라.” 이때의 그 어린 제자가 나라카인데, 훗날 부처님이 성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라나시로 가서 제자가 된다. 아시타 선인이나 그의 제자 나라카 사문을 역사적 실존으로 본다면 이 부분의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에 두고 재구성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늙은 아시타가 눈물을 비치자 슛도다나 왕이나 그의 일족이 눈물바다를 이루는 장면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눈물을 흘리는 슛도다나 왕에게서 한 자락의 권위도 찾아볼 수 없다.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다. 물론 아시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붓다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음을 슬퍼했던 것이고, 슛도다나 왕의 일족이 울었던 이유는 불길한 생각과 공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눈물을 흘릴 때는 어쩔 수 없이 더욱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붓다스투파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연못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예전에는 없었는데 남문 터와 서문 터 사이에 단아하게 조성해 놓은 것이다. 가까이 가 보니 연꽃 봉오리가 막 부풀고 있다. 햇살과 바람이 조금 더 애무해 주면 비명을 터뜨리듯 곧 만개할 것이다. 활짝 만개한 연꽃보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는 듯한 연꽃 봉오리를 더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나도 절정 직전의 꽃봉오리를 더 좋아한다. 카필라 성에서 보는 연꽃 봉오리에는 왠지 어린 붓다의 혼이 숨어 있는 듯하다. 12세쯤의 어린 붓다. 슛도다나 왕에게는 어린 붓다가 아니라 태자 싯다르타일 뿐이다. 왕이 태자의 이름을 싯다르타라고 지어 준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비롯하였다. 싯다르타는 ‘성취’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바, 슛도다나 왕은 태자 싯다르타가 칼과 활을 들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키어 천하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을 터이다. 그러나 태자 싯다르타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 그러니까 벌레 한 마리까지도 행복을 누리는 세상이 되는 불국토가 싯다르타의 마음이자 궁극의 성취였다. 훗날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붓다의 이 말은 숨을 쉬는 유정물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다 행복하라고 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라는 방식으로 서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가 불행하고서는 다른 하나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다. 슛도다나 왕은 때때로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자 싯다르타에게서 붓다의 싹을 보곤 했기 때문이었다. 카필라 성 밖의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는 농경제(農耕祭) 행사 때에도 그랬다. 슛도다나 왕은 태자 싯다르타에게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으나 어린 붓다의 눈길을 끈 것은 왕이 백성들 앞에서 몸소 끄는 쟁기질보다는 그 쟁기질로 인하여 흙 속에서 드러난 벌레 한 마리였다. 쟁기로 파헤친 흙 속에서 굼벵이 같은 벌레 한 마리가 눈이 부신 듯 몸을 뒤척이며 꼬무락거리자 하늘을 날던 새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뾰쪽한 부리로 그 벌레를 쪼아 먹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사소했지만 어린 붓다에게는 참혹한 현장이었다. 어린 붓다는 뾰쪽한 새의 부리에 자신의 살갗이 뜯기는 듯한 아픔을 경험했다. ‘왜 저 새는 자신이 살기 위해 저 벌레를 죽여만 하는가. 왜 저 새는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저 벌레를 불행하게 만드는가. 살기 위해 서로 먹히고 먹히는 저 벌레와 새의 삶이란 고통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린 붓다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처음에는 새에게 먹힌 벌레에게 연민을 느꼈지만 나중에는 벌레를 먹을 수밖에 없는 새에게도 연민을 느꼈다. 살아 있는 미물을 해치는 새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붓다는 농경제에 모인 인파를 피해 숲 속으로 들어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왕이 백성들 앞에서 쟁기질을 하고 씨앗을 뿌리며 행사가 끝난 뒤에는 산더미처럼 음식을 쌓아 놓고 즐기는 날인데도 어린 붓다는 오히려 우울해진 마음으로 큰 나무 그늘로 들어가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해가 기울자 나무그늘도 자리를 옮겨갔으나 어린 붓다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 본 슛도다나 왕은 태자의 거룩한 얼굴을 보고는 머리를 숙였다. 태자의 얼굴에 반사하는 석양빛이 눈부셨다. 왕은 그 빛에 압도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찬 바람이 스산하게 이는 듯하였다. 가슴이 떨리고 두렵기조차 하였다. 왕은 문득 늙은 고행자 아시타를 만나던 날 일족이 울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들아, 너는 화려한 성 안보다 성 밖의 염부수 그늘이 더 어울리는 것 같구나. 그것이 두렵고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 저 연꽃에도 아름다움과 슬픔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피어남과 시듦이 빛과 그림자처럼 짝이 되어 따르고 있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사랑하는 연인이듯 함께 엉켜 있다. 그러고 보니 저 한 송이 연꽃도 윤회의 고통 속에서 진저리치고 있는 것 같다. 피어남은 시듦을 전제하고 시듦은 피어남을 예정하고 명멸하는 것이니까. 그런데도 연꽃은 어찌하여 이 세상에 미망의 향기를 퍼뜨리려 하는 것일까.<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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