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여행|인도에서 본 팔상록(八相綠) 2 |
붓다의 사모곡 흐르는 기원정사 붓다는 태어나기 전부터 도솔천의 한 별에서 고(苦)의 힘겨운 짐을 지고 사는 중생을 어떤 천인들보다도 더 그리워했지만 자신을 낳아 준 마야 부인도 결코 잊지 못했다. 룸비니 동산의 한 보리수 그늘 아래서 자신을 낳은 지 7일 만에 돌아가신 가여운 어머니를 결코 잊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 7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어디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붓다는 출가 전 호사스러운 왕자 시절에도, 깨달음을 이루고 난 후 가섭과 아난, 사리불과 목련, 라훌라 등의 제자들과 함께 만행하면서 어디를 가도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탁발을 나가 맛있는 공양을 받거나 새 옷이 생기거나 새 발우가 들어오면 먼저 어머니와 승가의 대중을 생각하곤 했다.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찌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세상의 중생을, 광대무변한 저 우주의 별들을 사랑할 수 있으랴. 분명, 붓다는 그리움의 화신인 것이다.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은 이가 어찌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세상의 중생을, 광대무변한 저 우주의 별들을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 선정에 든 붓다는 홀연히 어머니 마야 부인이 어디에 계신지 관(觀)하여 알아냈다. 어머니는 수미산 위 도리천(小刀利天)의 한 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마야 부인은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만나지 못해 아직은 보살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붓다의 가족은 모두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믿고 있는데, 어머니만은 일찍 돌아가신 탓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출가 전 부인이었던 야수다라, 아들이었던 라훌라, 양모이자 이모였던 마하파자파티, 사촌동생 아난과 아니룻다, 심지어 궁중이발사였던 우팔리까지도 이미 붓다에게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붓다는 어머니를 위해 지상에서 도리천으로 올라가 설법해야 하는 그리움과 간절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위성 밖에 기원정사가 세워지자, 붓다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은 절정에 달했다. 붓다가 머무는 곳은 기원정사 안 건물들 중에서도 황금과 붉은 벽돌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 코살라국 수도 사위성(사밧티)에서 으뜸으로 빛나는 집이 바로 붓다가 머무는 승원이 되었던 것이다. 변하고 사라진다는 것은 쓸쓸한 일 붓다가 열반한 지 2500년이 지난 지금 누구를 만나기 위해 기원정사 남문 터 앞에 서 있는지 나는 나를 돌아본다. 기원정사 안은 한 치 앞도 들여다볼 수 없다. 밤이 토해 낸 안개가 기원정사를 뒤덮고 있다.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분간이 잘 안 될 만큼 안개는 완고하고 수구적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비타협적인 안개 때문에 위로를 받는다. 예전에 왔을 때도 그랬지만 벽돌 무더기만 남은 기원정사 터의 황량함이란 제행무상이란 진리를 음미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붓다는 이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라고 말했다.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과 상처 없이 작별할 수 있다. 그러나 변하고 사라진다는 것은 또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나에게 안개는 황량함이 뼈에 사무쳐 생기는 슬픔과 우울을 치유해 주는 약이다. 낮이 저 안개를 곧 거둬 갈 것을 알기에 나는 『금강경』을 독송하며 서둘러 기원정사 남문 터를 그림자처럼 들어선다. 붓다는 기원정사를 지어 보시한 수닷타의 조카인 수보리(수부티)가 법을 청하자 『금강경』을 설했다. 『금강경』 중에 언제 들어도 절절한 구절들이 기원정사에서는 해일처럼 가슴을 친다. “보살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이는 보살이 아니니라.”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형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이며,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에 머물지 않은 보시여야 하느니라.” “무릇 있는 바 상(相)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일체의 유위법(有爲法: 현상계)은 꿈과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붓다가 19안거를 보낸 기원정사 기원정사는 어떻게 세워졌던 것일까. 붓다가 35세에 깨달음을 이룬 지 3년째였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대왕이 붓다에게 절을 지어 보시한 것이 죽림정사인데, 그보다 먼저 임시 거처 60채를 지어 보시한 재가불자가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왕사성의 비살라 장자였다. 비살라 장자의 부인은 수닷타(어른이 되어 거부가 된 후 가난한 이들에게 밥을 주었으므로 아나타핀타카 장자로 불림) 장자의 누이였고, 또한 수닷타 장자의 부인은 비살라 장자의 누이였다. 그러니 서로 처남이 되기도 한 겹사돈이었다. 비살라와 수닷타는 처남 매부 관계를 떠나 친구처럼 각별하게 지내는 사이였는데, 하루는 수닷타가 비살라 집을 찾아갔는데도 비살라가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하인들에게 음식 만드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수닷타가 다가가 “친구여, 무슨 일인가?” 하고 묻자 그는 “내일 부처님과 스님들을 공양에 초대했다네” 하고 말했다. 수닷타는 ‘부처님’이란 말에 이끌렸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세 번이나 깬 끝에 이른 새벽에 붓다를 뵈러 비살라가 얘기해 준 장소로 갔다. 죽림정사 가까이 갔을 때 붓다는 먼동이 터 오는 하늘을 보면서 산책하고 있었다. 수닷타는 붓다에게 다가가 붓다의 두 발에 자신의 머리를 대고 예배 드렸다. 그러고 나서 붓다와 그 제자들과 함께 비살라 집으로 와 하인들이 마련한 음식공양을 받았다. 수닷타는 공양이 끝나고 나서 붓다에게 사위성에 와 안거하시도록 청했다. 그러자 붓다는 “장자여, 붓다는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즐거워한다”고 안거할 장소를 가르쳐 줌으로써 수닷타의 청을 받아들였다.
수닷타는 코살라국으로 돌아와 사위성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조용한 곳을 물색했다. 마침 사위성 서남쪽에 우물과 연못이 딸린 동산이 하나 있었다. 수닷타는 곧 땅 주인인 제다 태자를 찾아가 붓다에게 보시하려 하니 팔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교만한 제다 태자는 외도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동산에 금화를 빈틈없이 깔아 주어도 팔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수닷타의 입을 막으려고 한 제다 태자의 말은 수닷타에게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코살라국의 국법으로는 주인이 어떤 물건에 값을 정하기만 하면 사고파는 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수닷타는 바로 법정에 호소하였고, 재판장은 제다 태자가 동산의 값을 얘기한 사실을 확인했다. 수닷타 장자는 즉시 자신의 창고에서 꺼낸 금화를 수레에 싣고 가 깔기 시작했다. 반신반의하던 제다 태자는 동산이 금화로 거의 덮일 무렵 “장자여, 그만하십시오. 저도 선업을 지을 수 있도록 동산을 조금 주십시오” 하고 만류했다. 수닷타가 허락하자 제다 태자는 금화가 깔리지 않은 그곳에 큰 대문을 세웠다. 결국 기원정사 안에는 가장 큰 건물이자 수닷타 장자가 지은 간다쿠티, 그리고 코살라국 프라세나짓 대왕이 지은 살라라가라, 카래리쿠티, 코삼바쿠티 등이 지어졌고, 붓다는 45년의 중생제도 여정 중에서 가장 긴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보내게 됐던 것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안개 속에서 어느새 쉬바라스티(과거에는 사밧티) 아이들이 나타나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세수할 겨를도 없었는지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손등은 까마귀 날개처럼 검다. 그래도 어느 나라를 가든 아이들은 순수하고 귀엽다. 아이들이 “아난다 보리수, 아난다 보리수!” 하고 안개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가리킨다. 저 보리수 아래서 붓다께서도 밤이 깊도록 보내신 일이 있다. 아난의 정성에 감동하여 그랬던 것이다. 붓다는 우기(雨期)가 지나면 제자들과 함께 이 기원정사를 떠나 멀리 만행하곤 했다. 수닷타 장자를 비롯하여 사위성 재가불자들은 꽃과 공양물을 들고 이 기원정사를 찾아오지만 붓다와 그 제자들이 없는 기원정사는 공양 올린 꽃들이 시들어 뒹군 채 썰물이 빠져나간 바다처럼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수닷타는 아난에게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부처님처럼 참배할 대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아난이 붓다에게 여쭈었던 바 붓다는 세 가지를 제시했다. “아난다여, 사리탑(Dhatu ceti), 여래가 사용하던 물건(Paribhoga ceti: 붓다의 발우, 가사, 정각을 이룬 장소의 보리수 등등), 등상불(等像佛, Uddisa ceti)이 있다. 그러나 사리탑은 여래가 열반에 든 후에 생길 것이고, 등상불은 지금 만들어진 것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없는 동안 굳이 참배할 대상이 필요하다면 보리수가 합당할 것이다.” 이리하여 아난의 주관으로 보리수 씨앗을 심는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목련 존자가 보드가야로 가서 붓다가 정각을 이룬 자리에 있는 보리수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가사로 받아왔으며, 수닷타 장자는 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땅을 팠다. 그리고 프라세나짓 대왕도 왕족들과 함께 기원정사를 찾아와 의식에 참여했다. 황금 항아리에 흙을 넣고 향을 뿌린 뒤 수닷타 장자가 보리수 씨앗을 묻었다. 싹이 트고 보리수가 자라자 붓다도 우물물을 부어 주고는 하루 저녁 내내 선정에 들었던 것이다. 지금 저 아난다 보리수는 붓다가 계실 때 심은 보리수와 비교한다면 손자의 몇십 대 손자인 현손(玄孫)이겠지만 붓다가 보리수도 예배의 대상이라고 했으니 거룩하지 않은가. 보리수 아래 서 보니 나뭇가지 하나가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도 같다. 붓다의 따뜻한 손이 허공에서 내려와 나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는 것도 같다. - 눈을 떠라, 빛이 보이리라. 어머니 그리는 마음 기원정사 부근의 아이들이 붓다가 주무시고 좌선했던 간다쿠티 앞에서 모두 합장한다. 간다쿠티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향전(香殿), 혹은 응향각(應香閣)이 될 것이다. 사위성 사람들이 붓다를 찾아와 꽃을 바쳤던 건물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비구스님들이 황색 가사를 걸치고 안개 속에서 삼삼오오 오고 있다. 촛불을 켜고 함께 기도를 올리자는 것이다. 붓다가 마시던 우물 옆에는 비구니 스님이 펌프질을 하고 있다. 『금강경』에 나오는 1,250명의 비구 스님들도 저 우물물로 목을 축였으리라. 아직도 마르지 않고 우물물이 샘솟는 것을 보니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더 발하는 불법의 감로수가 틀림없다. 나는 간다쿠티 앞에서 문득 붓다와 마야 부인을 생각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구슬프게 불러보았던 노래 한 곡을 중얼거린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붓다는 어머니가 저 간다쿠티를 보았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고 상념에 잠겼을 것 같다. 외도(外道)가 번성한 코살라국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붓다를 인정하고 존경하게 된 시점이었다. 제자들이 붓다에게 “외도들에게 현혹되고 있는 사위성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신통력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으므로 이른바 “천불화현(千佛化現)”의 기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붓다가 군중 앞에서 망고를 잡수시고 그 씨를 땅에 심어 순식간에 싹을 틔워 거목으로 자라게 한 후, 다시 천 분의 부처님으로 나타나시게 하였던 것이다. 이후 많은 외도들과 자이나교도였던 프라세나짓 대왕도 붓다에게 귀의하여 일시에 코살라국의 사위성이 불국토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대왕은 붓다가 도리천에 오른 뒤, 간다쿠티에 전단향나무로 붓다의 등상불을 조성했다. 천불화현의 신통력을 보인 붓다는 제자들이 안거하는 우기를 피하고 건기(乾期)를 택하여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서 도리천에 올랐던 것이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내가 중얼거린 노랫말 속 아이의 천진(天眞)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보았다. 거룩한 빛에 가리어 보이지 않던 붓다의 천진한 마음을, 애잔한 그림자를! 상카시아에는 붓다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붓다는 신통력이 있으면서도 왜 자신의 종족인 석가족의 카필라성이 멸망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지켜만 보았던 것일까. 실제로 제자들이 카필라성을 철책으로 에워싸는 신통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통보다는 지혜와 이성을 사랑한 붓다는 그 부탁을 거절한다. 붓다는 교만한 석가족의 업이 두텁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은 코살라국의 군대를 막았지만 세 번째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하여 석가족 중에서 남은 생존자는 카필라성을 떠나게 된다. 한 무리는 설산 쪽으로, 또 한 무리는 상카시아 쪽으로 대이동한다. 붓다는 도리천에 올라 어머니 마야 부인과 천인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3개월 동안 설법했다. 사성제와 연기와 중도, 팔정도가 그것이었다. 그러고 나자 자식과 어머니라는 인연의 울타리를 홀가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붓다는 아니룻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였다. 땅에서 올라간 물이 빗방울이 되어 다시 땅으로 내려오듯 붓다도 예전과 같이 제자들을 만나야 했다. 붓다는 어느 곳으로 내려가야 할지 선정에 들어 관했다. 그때 눈에 띈 곳이 바로 상카시아였다. 석가족이 카필라성을 버리고 대이동하여 무리를 이루며 살고 있는 상카시아였다. 망국의 난민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삶은 가난하고 비참했다. 붓다는 그들에게 삶의 희망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자비였다. 그러고 보면 희망은 절망을 견디고 이기게 하는 백신이다. 붓다는 기원정사에서 바로 도리천으로 올라가신 뒤, 이곳 상카시아로 내려왔지만 나 같은 중생은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머나먼 길을 지나쳐 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겨 주는 것은 코끼리가 조각된 아쇼카 석주뿐이다. 머리 부분만 남은 석주를 보니 이교도의 파괴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짐작이 간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쇼카 대왕 이후에 3도(道) 보계(寶階)를 재현한 언덕이 있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꼭대기에는 작?힌두사원이 하나 남아 있다. 언덕에 오르자 힌두사원의 늙은 사두가 몽당빗자루로 재빨리 흙바닥을 쓴다. 예전 가난했던 시절에 반가운 손님이 오면 얼른 방을 쓸고 훔치던 기억이 나 왠지 가슴이 찡하다. 3도 보계란 보석으로 장식한 세 개의 계단을 말하는데, 가운데 계단으로 내려오시는 붓다를 왼쪽 계단에서는 제석천(인드라)이 칠보의 일산을 받쳐 들고, 또 오른쪽 계단에서는 범천(브라흐만)이 흰 불자(拂子)를 들고 호위했다고 한다. 상카시아에는 석가족의 후예들이 ‘붓다’라는 성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매년 음력 9월에는 불교 축제를 열고 격월로 불교 잡지도 발간하고 있다니 다음에 또 순례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들과 만나 담소하고 싶다. 그들의 언어 속에는 2,500년을 견뎌 낸 석가족의 언어가 살아 있을 것이기에. <계속>
[느낌]
붓다가 설했다는 금강경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역사적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관점에 따라 불교를 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난다여, 사리탑(Dhatu ceti), 여래가 사용하던 물건(Paribhoga ceti: 붓다의 발우, 가사, 정각을 이룬 장소의 보리수 등등), 등상불(等像佛, Uddisa ceti)이있다. 그러나 사리탑은 여래가 열반에든 후에 생길 것이고, 등상불은 지금 만들어진 것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없는 동안 굳이 참배할 대상이 필요하다면 보리수가 합당할 것이다“라는 말이 과연 붓다의 입에서 나왔겠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런 말을 설한 출처라도 밝혀주었으면 좋았으련만.... |
728x90
'모셔온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상여행│인도에서 만난 팔상록(八相綠) 4 (0) | 2008.08.25 |
---|---|
명상여행|인도에서 본 팔상록(八相綠) 3 (0) | 2008.08.25 |
명상여행|인도에서 본 팔상록(八相綠) 1 (0) | 2008.08.24 |
오온(五縕)이 모두 공(空)한 것을 통찰하심으로--한형조_ (0) | 2008.08.23 |
휴암 스님 인터뷰 - 누가 감히 불교를 사랑하나 (0) | 2008.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