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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온 글

오온(五縕)이 모두 공(空)한 것을 통찰하심으로--한형조_



한형조_서울대 철학과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졸업했다(철학박사).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한국학부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에 『왜 동양철학인가』,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화엄의 사상』, 『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 등이 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주문’ 같은 총지(摠持) 안에, 위대한(摩訶) 불교의 진리 ‘반야(般若)’를, 그야말로 ‘핵심(心)’만 갈무리한, 경전(經) 중의 경전이다. 늘 마주치면서도,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좀 멀어 보이는 이 경전 속으로 투어를 떠나볼까 한다.


일대사(一大事)를 졸업하자면 ‘오온개공(五蘊皆空)’의 도리를 깨쳐야 한다

첫머리는 장엄하게 이렇게 울려 퍼진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께서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를 행하실제, 오온(五縕)이 모두 공(空)한 것을 통찰하심으로, 일체의 재난(苦厄)을 벗어나셨다.” 눈물을 쏙 빼놓지 않은가. 일체의 고통과 환난으로부터 해방되시다니… 보디사바하, 세상을 정복한 이여, 해탈(解脫)을 이루신 이여. 인류가 이전과 이후를 통해 영원히 꿈꾸던 것을 이루셨도다.  
그분은 무엇으로 이 인생 최대의 복락을 성취하신 것일까. 일류 대학의 학벌이 있는 것도 아니시고, 강남에 여러 채 빌딩을 가지신 것도 아니시며, 연봉이 괜찮은 직업이라거나 관료나 정치가로 권력을 행사하지도 않는 것 같고, 그 뭐냐, 학문을 닦은 대학교수처럼 지식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분의 위대한 축복의 비결은 단 하나, ‘통찰력’에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로 단방에 모든 일을 끝내셨다! 불교는 일대사(一大事)를 마치는 데 있어 사회적 지위나 조건을 묻지 않는다. 돈도 한 푼 들지 않는다. 차별을 걱정 안 해도 되니 그게 또한 불교의 매력이다. 
대체 무슨 ‘통찰력’인데, 이리 호들갑이며, 그것은 대체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가 궁금하겠다. 관건은 거기 ‘오온개공(五蘊皆空)!’ 한 구절에 있다. 관자재보살께서는 다만 “다섯(五) 장작더미(蘊)가 실은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조견(照見)하셨을 뿐이다. 그것이 있어야 할 모든 것이다.



번역의 험난한 여정

『반야심경』은 오온 하나하나를 일일이 짚어준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그렇다. 색(色)도 공(空)이고, 수(受)도 공이고, 상(想)도 공이고, 행(行)도 공이며, 그리고 아찔하게, 식(識)도 또한 공이다. 무슨 말인가.
이 중에 한마디도 익숙한 글자는 없다. 물론 한문을 공부하신 분들은 쉬운 글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자신은 금물이다. 고전 한문은 중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의 산물인 데 비해, 지금 『반야심경』은, 비록 한자를 통해 표현되어 있긴 하나, 인도 문화적 배경에서 형성된 불교, 그것도 나중에 발전된 대승 중관(中觀)의 사유를 담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둘은 전문적으로 말하면,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위에 서 있다. 쉽게 말하면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하재도, 따로 지면이 필요하다. 초기 번역사들, 정말 고통스럽게, 힘들게 이 갈라진 틈새를 메우고, 심연을 건너뛸 수 있는 교량을 만들어주었다. 그들의 노력을 길이 기린다. 번역은 반역이다. 그것은 원전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만큼 희생시키며, 때로 청중을 이해시키기보다 오해에 더 노출시킨다. 어쩌겠는가, 반역의 운명인 것을……. 초기 번역의 영웅인 구마라습은 이 작업을 “엄마가 갓난아이를 위해 밥을 씹어 넣어주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다. ‘소화’를 위해 ‘풍미’는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격의(格義)가 있게 되었다. 인도의 낯선 사유는 중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친숙한 개념과 어법으로 번역되어 제공되었다. 그 시간이 꽤 오래 갔다. 그?鳴?아이가 자라고 음식에 익숙해지며, 위장이 감당할 때쯤, ‘날것’이 제공되었다. 불교가 격의(格義)에만 의존하지 않고 ‘원어’를 제공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소통하는 정도를 늘려갔다. 특히나 주요 개념어들은 ‘의역’보다 소리 그대로의 ‘음사’가 더 선호되었다. 가령, 그래서 ‘무위(無爲)’ 대신에 ‘열반(涅槃 니르바나)’이, ‘지혜(智慧)보다는 반야(般若 프라즈나)’가 세월을 살아남았다.



해석학적 순환, 혹은 딜레마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읽기 위해 우리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우선 색(色)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색(色)인가. 중국 한문에 익숙한 사람은 “색즉시공”을 『논어(論語)』의 회사후소(繪事後素)처럼, “색깔(色)이란 원래 빈 바탕 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읽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람들의 표정(色)이란 원래 변화무상한 것이다”로 의역해서 읽을지도 모른다. 아, 더 재빠르게는 최근 유행한 섹스 코미디 영화의 제목처럼, “색정(色)이란 원래 허망한 것이다”라고 파격적으로 읽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전 한문에 익숙한 눈으로는 이 구절을 ‘거의’ 이해할 수 없거나 지금처럼 ‘오해’하기 십상이다. 서역(西域)이라는 이방의 문화적 기반을 고려하고, 거기서 개발된 독특한 사고체계를 ‘미리’ 선이해(先理解)하고 있어야, 이 기이한(?) 한문 조합의 속살에 접근할 수 있다. “모든 의미는 문자 밖에 있다!” 선(禪)이 전형적으로 채택한 이 표어는 기실 모든 ‘번역’의 운명이라는 것을 귀띔해주고 지나간다. 그런데 이른바 선이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된 텍스트와 그 주변을 통해서 얻을 수밖에 없으니, 이게 또 난감한 일이었다. 그 곤혹을 해석학적 순환, 혹은 딜레마라고 부른다. 얼핏 출구가 없을 듯하지만, 그 쳇바퀴를 돌던 어디쯤에서 우리의 불교 이해가 깊어가고 성숙한다.



왜 루파(rupa)의 번역어로 색(色)을 선택했을까

색(色)은 수상행식(受想行識)과 더불어 오온(五蘊)의 하나다. 수상행식의 넷이 인간 정신의 제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면, 색(色)은 세계의 ‘물질’적 측면을 총괄하고 있다. 그런데 왜 옥편 수만 자 가운데 굳이 색(色)을 골랐을까. 나라면 ‘물(物)’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 번역 과정을 들여다본 적이 없지만, 또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이런 추정은 해볼 수 있다. ‘물(物)’은 한문에서 의미의 진폭이 다양하다. 그것은 존재하는 ‘사물’ 전체를 통칭하기도 하고, 혹은 나에 대한 ‘타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物)은 아(我)의 영역을 설정하고 한정하는 필드에 따라 의미의 영역이 상관적으로 신축되는 단점(?)이 있다. 인도어와 유럽어가 명사를 중시하고, 실체를 고집하며, 추상에 능한 데 비해, 중국어가 동사에 기반하고, 관계를 고려하며, 추상까지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라. 그래서 루파(rupa)의 번역어로 물(物)이라는 신축적이고 모호한 언사보다, 가벼운 표면과 표정의 의미가 두드러지는 색(色)을 골랐을 것이다. 물론, 어차피 리스크는 피할 수 없다.




이게 어디 색(色) 한 글자뿐이겠는가. 한역을 통해 불교에 접근하는 것은 ‘미로’를 헤매는 일에 비견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식(唯識)이 더 그렇다. 적어도 유식을 공부할 사람은 ‘한역’을 통해서 갈 생각을 피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보조로는 당연히 참고하고 이용해야 하지만, 중심 텍스트로는 난감하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는 말이다. 7세기 삼장 법사 현장의 고민을 상기해보라. 국법이 금하는 길을, 그 먼 길을, 살아 돌아올 기약도 없는 길을 떠나 수십 년 타국에서 지내다 온 연유가 무엇인가. 한역 번역으로는 ‘유식’을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이 그랬듯이, 그리고 그 지식을 원효가 배우고자 두 번이나 국경을 기웃거렸듯이, 지금도 유식을 익히자면 한역이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를 통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한문 불교를 졸업하고 인도에서 배워 와야 할까

이유는 또 있다. 다시 생각해보자. 오온(五蘊)의 분류 방식은, 서구의 근대적 인식론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그다지 낯설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사물을 인지하고 분류하는 방식은 서구의 것이며, 인도어가 유럽의 언어와 같은 계열임을 고려할 때,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 한국어는 산스크리트어와 가깝다. 적어도 한문보다는 그렇다. 이 말에 동의하실지 모르겠다. 고개를 갸우뚱거리실 분들이 많겠는데, 실례로 색수상행식을 ‘한문’ 옥편식으로 읽기보다, 영어 번역으로 읽는 것이 훨씬 선명하고 오해가 적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한문으로 수(受)라니? ‘받아들인다’는 동사인데, 이게 무슨 말이지? 상(想)은 ‘상상한다, 연상한다, 떠올린다’는 뜻이고… 행(行)은 ‘간다, 행동한다’인데, 이게 어떻게 심리적 용어가 될 수 있지? 옳지 식(識)은 좀 낫군… ‘의식’이겠으니… 넷 가운데 오해가 가장 적네… 이 곤혹 앞에서 옥편을 끌어안고 끙끙대는 대신, 영어책을 들추어보라. 거기 수(受=feeling 느낌), 상(想=perception 지각), 행(行=impulse, emotion 충동 혹은 정동), 식(識=consciousness 의식)이라고 적혀 있다. 시쳇말로 감이 팍팍 오지 않는가. 앞으로는 영어로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얘기가 좀 빗나가는데, 짚고 넘어가자. 사정이 그렇다면, 이제 그만 엉터리(?) ‘한문 불교’를 졸업하는 것이 어떨까. 실제 직접 인도에서 배우고, 동남아를 거쳐 불교를 배워 오는 학인 승려들이 많이 늘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 1) 선(禪)불교 일색인 한국 불교가 성에 차지 않은 듯하다. 화두를 잡고 있기보다 일상의 실천적 지침을 존중하고, 지적 이해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가는 듯하다. 더구나 그것이 변방이 아니고 중심이며, 파생의 물줄기가 아닌 불교의 ‘수원지’라는 점에서 이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당당하다. 교통도 좋아졌으니, 현장 때처럼 목숨 걸고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이 근본 이유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으니, 바로 ‘한문’이라는 불편한 외국어다. 불교는 문화와 관습의 제약이 어느 종교보다 적다. 삶의 근본 문제를 프래그마틱하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 목적에서 보면, 불교에 접근하는 방편(方便)으로서의 언어는 아무래도 좋다. 전 세계의 언어로 불교가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굳이 낡은 한문, 그 어려운 한문, 오해가 많고 미로를 헤매게 할 한문으로 불교를 해야겠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외국어이기는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나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산스크리트어는 지금 우리 현대 한국어에 훨씬(?) 가까운 언어인데 말이다. 제방의 독자들은 이 판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한형조_서울대 철학과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졸업했다(철학박사).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전한국학부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에 『왜 동양철학인가』,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중고생을 위한 고사성어 강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 『화엄의 사상』, 『한글 세대를 위한 불교』 등이 있다.




자아의 점착을 떠난 세계를 말하는 ‘또 다른 언어’

다음 코스로 투어를 떠나보자. ‘오온(五蘊)’은 『반야심경』의 창안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 소승 아비달마가 제안한 것으로, 불교가 세계를 인지하고 분류하는 독특한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게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그전에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개념은 그것이 놓여 있는 전체적 프레임워크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오직 그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그 시스템은 누가 만드는가. 대개는 잘 모른다. ‘언어’는 한 집단이 오랜 역사를 통해 최적화해온 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 의미와 시스템을 자각하고 반성하기 이전에, 이미 ‘부모’로부터, 그리고 ‘학교’와 ‘사회’로부터 무자비한(?) 습득과 운용을 강요당한다. 한 인간은 이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없다. 한 ‘언어’를 쓴다는 것은 그 집단의 의식적·무의식적 ‘가치’와 ‘시선’을 수용하고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집단을 떠나거나, 다른 ‘언어’를 기웃거리거나, 자신만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소설가나 문학가들, 또는 사상가들은 기존 언어의 마이너한 수정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그러나 래디컬하게 ‘전혀 다른’ 언어를 선보인다.   
불교는 알고 있다. 대개의 언어는 평균적 ‘욕망’과 그 ‘실천’을 위해 고안되었고, 그런 점에서 ‘자아’의 지평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불순물을 제거하고 ‘객관성’에 이르기 위해 불교는 충격적 언어를 고안했다. 자아에 물들지 않고 도구적 이성에 왜곡되지 않은,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 이 여여(如如)한 법(法)의 세계(界)를 기술하는 언어를 선보였다. 오온(五蘊)을 축으로 한 ‘다르마들(諸法)의 체계’가 그래서 있게 되었다.


무아(無我), 다양한 불교를 묶는 중심 키워드

현대 포스트모던 여성학자인 루스 이리가리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게 된다면, 같은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놀라운 통찰 아닌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우리는 다른 언어를 듣고, 다른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그 낯선 불교 책을 들여다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새로운 삶의 핵심은 무아다. 세상이 무아(無我)임을 보고, 그 통찰과 체험을 통해 세상사는 법을 배우는 것. 그렇지 않은가. 초기 불교의 교훈에서 소승 철학의 발전, 이어 대승의 대중 구원 운동, 이윽고 불교의 근본 관심을 환기시키고 그것을 중국적으로 표현한 선(禪)에 이르기까지, 불교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 교리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아(無我)다.


메난드로스 왕이여, 없는 수레를 어떻게 타고 오셨는가

기원전 100년경 승려 나가세나는 합리주의자 그리스 왕 메난드로스에게 불교를 설득하는 책무를 졌다. 『메난드로스 왕의 질문(彌蘭陀王問經)』 또는 『승려 나가세나의 경전(那先比丘經)』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실려 있다. (Rhys Davis, The Question of King Milinda, 1890, I. B. Horner, Milinda’s Questions, 1963)

“수레를 타고 오셨다니, 대왕이시여, 그런데 ‘수레’는 어디 있습니까. ‘굴대’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시여.”
“그럼, ‘바퀴축’이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시여.”
“그럼 바퀴가, 아니면 바퀴살이, 깃대, 빗장, 멍에 등등이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시여.”
“대왕이시여, 여러 질문을 했지만, 저는 ‘수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수레’는 단순한 소리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럼 무엇이 진짜 수레입니까. 대왕께서는 제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진정 수레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들어보시오. 여러분, 500의 그리스인과 8만의 승려들이여. 지금 이 메난드로스 왕께서는 분명 자신이 수레를 타고 여기 오셨다고 말씀하셨소. 그렇지만 수레가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하자, 그 존재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500의 그리스인들이 나가세나를 찬탄하며 메난드로스 왕에게 주문했다. “대왕께서는 이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나는, 나가세나여,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굴대와 축, 바퀴와 바퀴살, 깃대와 빗장, 멍에 등속에 의존해서, 여기 ‘수레’라는 명칭이, 관념이, 습관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름뿐인 ‘수레’가….”
“대왕께서는 수레에 대해서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저 나가세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서른두 부분과 물질, 감정, 지각, 의지, 의식의 오온(五蘊)에 의지해서 ‘나가세나’라는 명칭이, 관념이, 습관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 견지에서, 이 ‘사람’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대왕이시여, 바지라라는 비구니가 붓다 앞에서 이런 시를 노래했습니다.

마치 부분이 바로 모일 때,
‘수레’라는 이름이 생겨나듯이
다섯 가지 요소(五蘊)가 존재하는 곳에
‘어떤 것’이라 부르는 관습이 있네.


아비달마와 논리적 원자론

굴대와 바퀴축이 ‘수레’가 아니듯이, ‘나’라고 부르는 것은, ‘자아’니 ‘퍼스널리티’니 ‘주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실체가 아니라 다만 ‘이름’일 뿐이다. 있는 것은 다만 순간적으로 바다 위의 파도처럼, 인연따라 부침하는 개별적 표상과 의식의 파편 또는 흐름들뿐, 거기 ‘나’는 없다!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는 그래서 부정확한 ‘문장’부터 고치는 데 착수했다(이 기획은 현대 언어분석철학,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osm)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들은 철학적 난제들이 대답할 수 없는 물음들을 안고 끙끙대고 있으며, 이것은 불명료한 언어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언어를 ‘분석’해나간다. *자세한 것이 궁금한 사람은 크리스 거드문센, 『비트겐슈타인과 불교』를 보라).
아비달마의 분석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 책을 누가 훔쳐 갔다”는 문장이 있다 치자. 이 서술은 매우 부정확하고 혼란스럽다. 올바른 문장은 이렇다. (1) “色: 방에 책이 하나 있었다.” 2) “受: 모종의 서운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3) “想: 책의 이동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4) “行: 책을 도로 옮겨 오고 싶은 갈망이나 충동이 있다.” (5) “識: 이 과정을 의식하는 흐름이 있다.” 독자들은 이 분석에 코웃음을 칠 줄 모른다. 뭐가 달라졌나? 여기 ‘나’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원래 없었다. ‘나’는 인연법이 흘러가는 세상의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한 자아의 흔적일 뿐이다. 즉 공(空)하다. 공(空)은 거듭거듭 말씀드리건대, 세상은 본시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 자아를 부당하게 개입시키지 말라는 권고다. 공(空)이 불교사를 통해 무아(無我)와 동의어였다는 것을 간곡히 상기시키고자 한다. 색즉시공에 어떤 신비적 언사도 덧붙이지 마시고, 또 난감하여 현대 과학의 성과나 아원자 세계를 끌어들여서 이 공(空)을 풀어보겠다고 용을 쓰지 마시기 바란다. 큰일 난다.


개인적 경험을 객관적 문장으로 기술하기

‘내 경험’ 하나를 위의 오온의 객관적이고 ‘비인격적(impersonal)’인 문장으로 분석하는데, 몇 번이나 자동으로 끼어드는 ‘나’를 타이프쳤다가 아차 싶어 지우곤 했다. 자아는 얼마나 끈질기게 개입하는가. 독자는 물을지 모른다. 이 분석을 통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고, 다만 말장난일 뿐이라고…. 그러나 그러나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제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훈련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기초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자. 잠깐 숨을 돌리면, 우리는 사태에 자동적으로 개입하는 ‘나’를 멈추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문득 내게 일어나는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 거기가 불도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아비달마가 ‘지혜’라고 했을 때, 이 말은 막연한 언사가 아니라 테크니컬하게, 바로 이 ‘분석’과 ‘방법적 명상’을 의미했다는 것도 아울러 기억해두시기 바란다. 이 방법은 선(禪)의 전통이 권하는 바기도 하다. “뜰 앞의 잣나무”가 바로 거기다. 다른 말로, “나귀가 우물을 엿보지 않고, 우물이 나귀를 엿보는 자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할 일. 이별의 아픔, 실연의 숨넘어가는 고통도 세월이 흐르면, 잊히고 아문다. 그리고 시간이 인간의 모든 고민을 끝낼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순간, 이 훈련을 한다면 보다 성숙한 삶을, 집착에서 오는 고통을 경감시키고, 다른 건전한 정서가 애연히 자신의 가슴을 채우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아비달마는 지금도 유효하다.


『반야심경』의 새로운 지혜

이야기가 길어졌다. 『반야심경』은 이 아비달마의 ‘지혜’ 위에서 모종의 새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반야 중관을 “새 지혜 학파(New Wisdom School)”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아비달마는 아공법유(我空法有)라, 즉 “나는 없더라도 법(法)은 존재한다”라고 설한다.
여기서 법(法)은 일반적 ‘진리’나 ‘가르침’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테크니컬하게 위에서 제시한 오온의 분석처럼, “비인격적(impersonal)으로, 원자적(atomoic) 명제로 ‘분석’된 객관적 세계, 즉 오온(五蘊) 등”을 가리킨다. 요컨대 책의 형태를 한 어떤 사물, 허전하게 느끼는 모종의 느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의식하는 흐름 등은 ‘나에 오염되지 않은 진전된, 궁극적 사태’로서 분명히 실재한다는 것이다. 이 진전된, 궁극적 사태를 법(法)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럿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법(諸法)이라 한다. 그러고보니 문득 삼법인(三法印)의 하나가 떠오르는데,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의미가 매우 테크니컬하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아비달마를 설일체유부, 즉 “모든 것(一切)이 존재한다(有)고 설(說)하는 학파(部)”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대승은 특히 반야중관은, 그 새 지혜를 대표하는 『반야심경』은 달리 말한다. 여기 “법(法)조차 없다.” 즉 오온(五蘊)조차 공(空)이다. 이 통찰로 반야중관은 소승의 옛 지혜(Old Wisdom)을 넘어 대승의 새 지혜를 세웠고, 모든 고통을 넘어 영원의 평화를 얻었다. 그런데 대체 둘의 실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http://buddhistculture.co.kr/Vol/New_view.htm?topic=D&origin_id=30&num=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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