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셔온 글

휴암 스님 인터뷰 - 누가 감히 불교를 사랑하나





스님께서 1980년대 펴내신 『한국 불교의 새 얼굴』이나 1990년 초 펴내신 『장군죽비』 전편에서 말씀하신 개혁정신과 방법론에서 또 다른 면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내 『장군죽비』가 진정한 장군죽비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나는 진정한 장군죽비가 있다면 한국 불교 승려들은 정말 장군죽비를 맞아야 한다고 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봤어? 자기 문중이 마음속에 아른거리는 그런 상태로 과연 큰스님 자격 있다고 할 수 있겠어?
태양이 비추면 그 아래 어떤 불빛도 모든 빛이 죽어야 돼. 그때는 가진 것이 없어야 돼. 없는 자리에 서야 돼. 그건 쉬운 일이야. 어려운 일 아니야. 그래야 그분 말 한마디가 바로 이웃에서 바로 내 옆에서 말하는 소리처럼 들릴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 어떻게 큰스님이라 할 수 있어.
내 절을 구워 먹든지 삶아 먹든지 나 죽고 나면 내가 이걸 안고 갈 거냐 지고 갈 거냐, 내 혼이 여기 와서 지킬 거냐. 내 죽고 나면 끝이야. 그렇다면 내 몇 년 더 죽은 셈치고 이 절을 내버리자, 그래야 돼. 그래서 부처님처럼, 그야말로 부처님께선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말인즉슨 부처님처럼 길거리에 나앉아야 돼. 아무것도 가진 바 없이. 그분의 말씀이야말로 바로 우리 종단의 법이 되고, 그때 정말로 뜻이 있는 사람들이 그 밑에 안 모일 수가 없어. 꼭 가서 모이는 것만 모이는 게 아니야. (그때 비로소) 멀리 있어도 그 스님의 말은 많은 힘을 얻게 돼. 그런 진실이 아니고 뭐가 되겠어? 거기에 개혁이란 말이 붙을 수 있겠어?
바르게 사는 거야. 끊임없는 참회와 끊임없는 반성이 있을 뿐이야. 어떤 형태의 인간적인 사사로운 동기의 끄나풀이 거기에 있을 수 있어? 문중, 가까운 친한 사람, 단체, 회, 패거리…. 일체의 인간적인 끄나풀이 다 끊어진 자리에 서서 진실로서, 부처님의 법으로서 문중을 삼고 진실과 뜻으로서 동지애를 삼는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는 그 진실이 개혁이라면 개혁이야.



개혁하는 분들이 지녀야 할 마음 자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개혁을 한다는 기치 앞에 나서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 개혁을 한다고 나서는 사람은 그날부터, 평소 때는 그가 혹시 곡차도 뭐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비싼 대가를 치르고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는, 적어도 그 기간만큼은, 우리에겐 결제 기간 해제 기간이 있어. 해제 기간은 조금 행동이 자유스러워도 좀 용납될 수 있어. 그러나 결제 기간에 결제에 들어서면 모든 행동이 규범에 따라 움직여야 돼. 그와 마찬가지로 개혁은 초비상 결제 기간이야. 그럴 때는 정말로 잃어버렸던 계행, 소홀히 했던 계행을, 방치했던 계행을 다시 추스르고 기도하는 자세, 정진하는 자세로 아무 데 가서나 음식 먹지 말고, 택시 함부로 타지 말고 가능하면 걸으면서, 택시를 타도 그런 마음으로 타고 자가용을 타도 그런 마음으로 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간다면 안 될 일이 뭐가 있겠어?
군자는 그 서투름은 용서할지언정 그 졸렬함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리한다면 비록 행적이 서툴러도 그는 용서해줄 수 있고 이뻐해줄 수 있고 이해해줄 수 있고, 그건 감싸줄 수 있어. 그런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간다면 그 행보가 그대로 개혁이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개혁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는 거야. 진실하게, 감히 개혁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거야. 나는 조금 내가 이 종단에 참여한 기간에 한두 가지라도, 조금 내가 개선하고 나간다면 그것으로 다행이겠습니다, 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수행자의 가장 기본 자세야.
수행자가 구호나 외치고 깃발이나 세우고…, 그건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수행자는 감히 할 수 없어. 감히 자신이 없는 거야. “나는 근기가 부족해 업이 두터워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데 내가 이것으로서 이 사회에 이익은 못 줄 망정 해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조심껏 한 걸음 한 걸음 나가야 돼. 그러니까 우리가 진실과 신뢰, 믿음을 상실한 거야. 우리 종단이 나갈 길이란 다른 게 아니야. 별게 아니야.



부처님은 진실로써 큰일을 삼는다


개혁하시는 분들 나름대로 애쓰시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그분들께 격려해드릴 말씀이 없겠습니까?

어제 동화사에서 기초선원 하면서도 그런 말했어. 우리, 내 자신 속에 진실로 한 걸음 한 걸음, 진실, 그걸 간직하고 걸어야 한다, 수행자는 많은 일을 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큰일을 하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진실한 참된 일을 하려고 생각해야 돼. 그래서 어딜 가다, 길거리 가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길손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스님, 인생이 뭡니까, 어떻게 사는 겁니까?” 하고 물었을 때, “아, 글쎄. 나 인생이라는 게 뭔지, 어떻게 사는 건지 잘 몰라. 내 어떻게 감히 그런 걸 할 수 있겠어. 그렇지만 자네가 묻는데 내가 조그만 느낌을 말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조금 참된 데 가까워지고 인간답게 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는, 그에게 진실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 그랬어. 부처님은 양으로써 큰일을 삼는 분이 아니거든, 진실로써 큰일을 삼는 분이라니까. 진실과 참된 것이 아니고서 어떻게 이 우주를 내 가슴에 품을 수 있겠어. 그건 참된 것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 삼계를 칠보로 단장해도 허깨비라는 말은 절실한 진실이야. 그것은 진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진실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이냐, 그리고 문제는 진실, 참되고 깨끗한 마음, 그게 있는 것이라는 중요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거든. 그것은 틀림없는 말인 거야. 내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깨비거든.
따라서 수행자는 홀로 서야 돼. 뭐 문중이 해준다든지 단체 패거리와 내 주변에 한 사람이라도 더 생긴다든지 하는 만큼, 나는 그만큼 가려지는 거야. 내 패가 한 사람 생기면 한 사람만큼 나는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거야. 한 사람도 없는 자리에 서서 일체 사람이 내 사람이 아닌 사람이 없는 자리에 서야 그게 진실이 되는 거야.
때문에 수행자는 홀로 서는 데 능해야 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돼. 해서 문중이 내 마음속에 어른거린다든지, 뭔가 패거리가 있어야 한다든지 상좌가 있어야 한다든지 그런 마음이 일 때는 매우 부끄럽게 생각해야 돼. 수행자로서 긍지의 손상, 자존심 문제라 생각할 정도가 돼야지. 내 그래, 젊은 애들에게 그런 말했어. 나는 솔직히 개혁이란 말 좋아하지 않고 또 종단이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그 길도 잘 몰라. 다만 그때 그 순간에 진실한 자기 마음을 탁 돌이켜보았을 때 이건 옳지 않지 않느냐, 그래도 이게 좀 낫지 않겠느냐 하는, 그 진실한 빈 마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신자세가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의 행보는 곧 개혁의 행보라고 생각돼.
사람이 프로그램, 청사진을 부처님 혜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한 걸음 나가면 그것이 곧 개혁이라고 봐. 그리고 보다 좋은 사람 있으면 찾아가서 묻고 그런 사람이 질책을 하면 비록 점잖은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하는 사람은 천하의 질책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어야 해. 내가 주지를 한다면 어린 행자부터 전 종도의 불만을 들을 수 있는 자세가 돼야 해. 꼭 지체가 높은 사람의 지적과 명령만이 내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고 천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돼.
중노릇 하루 한 사람이나 행자나 모든 사람의 말을 ‘저 속에 부처님의 말씀이 있지 않겠느냐’라는 자세로 귀를 기울이는 그런 마음의 자세가 돼야 해. 그래서 들은 말은 즉시즉시 반영을 해야 돼. 믿음으로, 수행자는 수행의 법으로 해야 돼. 수행자는 세속 법으로, 제도로, 절차로 하면 안 돼.



수행자는 어떻게 현실 참여를 해야 하는가


근본적으론 내면의 개혁으로 가야 되지만 종단 개혁은 어차피 제도 개혁에 초점을 맞춘 것 아닙니까? 지난번 개혁은 일단 불합리를 용인하는 제도들을 개혁하고 그다음 내면의 개혁으로 점진(漸進)하겠다는 걸로 이해됩니다만….
그래도 ‘제도 개혁’이라면 나도 아주 간단하게 봐. 그래도 잘하든 못하든 일단 중이 됐다며 이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기간을 가져야 돼. 세속의 학문하는 사람도 그 기간엔 학문에만 몰두해서 과정을 밟듯, 사회에 취직을 해도 수습기간을 충분히 거쳐 자리에 배치가 되듯….
더구나 중은 말할 것도 없지. 생사무상을 느끼고 출가한 마당에. 세상을 허망하게 본 거 아냐? 세상을 허망하게 본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일이야. 그날부터 세상이 궂은 것도 허망하고 좋은 것도 허망하고 다 허망해야 하는 거야. 어느 부분이 좋고 어느 부분이 허망한 건 허망한 게 아니야. 일체가 다 허망한 거야. 일체 가치가 다 몰가치로 변하는 그런 시각이 곧 허망이야. 그래 가지고 출가를 한다는 거야. 출가 입지가 그래. 그러니 얼마나 어려워. 좋은 것도 궂은 것도, 옳고 그른 것도…,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옳다고 하는 것 자체가 허망한 거야. 그러니까 중은 출가를 했다 하면 최소한도 10년 정도는 이 세상으로부터 단절돼야 돼. 세상일을 할 생각을 해선 안 돼. 평생 세상일을 해서도 안 돼.
이 세상의 가치가 꿈이라 하고 허깨비라 했으니까 그 허깨비, 부상, 허망한 세계를 극복하는 세계의 가치 정신, 그것을 가지고 이 현실에 관여를 하려면 그런 말, 그런 긴장된 정신 속에서 사는 것이 수행이야. 그래서 승려의 길은 어려워. 때문에 어설프게 하려면 그건 출가가 아니야. 환속이지. 그건 어설프게 그냥 하면 수행자로서 현실 참여 하는 게 아니라. 일반 세속 사람으로 현실 참여 하는 거야. 수행자에게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고가 일어나야 하고 끊임없이 자기 부정이 일어나야 해. 그것이 기도고 수행인 거야. 그런 자세로 현실 참여하고 수행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서 겸허한 마음이 돼야지. 그래야 그야말로 “천하의 배고픈 사람을 배불리 먹였다 하더라도 한 중생도 내가 배불린 바 없느니라” 하는 『금강경』의 가장 원초적인 그 마음이 일어나면서 겸허하게 돼. 그렇게 돼야 일치가 돼. 그때 비로소 서로 공경하게 되고 격려하게 되고 어여쁘게 보게 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야.
세상은 허망한 거야. 욕망을 버리고 진실하게 사는 것만 못해. 그러니 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줘버려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힘이 있겠어? 그런 진실한 힘이 있겠어? 없는기라. 그래 가지고 무슨 활동을 해서 이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겠어?



흔들리는 마음으로 어떻게 사회를 이끌 수 있나


그러니까 수행자의 입지는 무소(無所)의 연기라. 영원한 자기 부정, 일체 천하를 칠보로 단장해서 천하 중생에게 칠보로 단장된 집을 마련해주었어도 그것이 허깨비라는 마음의 가치관의 세계에다, 긴장관계 연결 고리를 갖지 않고는 수행자의 행보가 될 수 없어. 이 세상을 진심으로 밝힐 수 없어. 참된 언어가 나올 수 없어. 언어는 평범한 거야. 진실, 정직 그것이 정말 절실하게 부처님 앞에서 나올 때 절실한 거야.
그런 마음이 될 때 첫째 자기 자신도 구제되고 중생도 구제 돼. 그러니까 수행자는 이 세상의 빛이 돼야 돼. 길잡이가 돼야 돼. 그게 행복이야. 신도 많이 따르고…. 한국 불교의 복사상, 이게 한국 불교의 가장 저질적, 세속적 속화된 사상이야. 시은(施恩)이 많고 상좌 많아야 복이 많다? 한국 불교가 얼마나 사상 자체가, 언어 자체가 타락돼 있는지 몰라. 진실하고 참된 복이 뭔지 몰라. 진실하고 참된 한마음, 한순간의 마음이 정말로 복이라는 거 그것을 우리가 상실한 거야. 그 진정한 복사상을 우리가 상실한 거야.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정전백수자(庭前栢樹者)니라”, 그렇게 할 만한 힘이 없는 게 분명한데 정전백수자니라 하거든. 그러니까 한국 불교는 위선 투성이라. 그건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봐. 내가 이 선방에도 보면 방함록이 있거든. 결제 때 되면 각 선방에서 조실 스님 결제 법어가 있어. 그걸 싣는데, 방함록이 본래 소식지로 출발했고. 그래 법어를 싣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왔는데, 앞으로 그걸 싣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자기 수준에 맞는 말을 하라 이거야.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정전백수자니라. 이런 말들을 하고 있거든. 자기가 깨달았어? 그런 말이 아니라도 할 말이 많거든. 그런 말을 내가 할 능력이 없다면 자기 수준에 맞는 말을 하라 이거라.
이 세상의 바른 메시지, 진실한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어야 해. 그런데 모두 공식화 도식화돼서 회색빛 바랜 힘없는 언어들만 난무하고 있다고. 이래 가지고 한국 불교가 어떻게 수행집단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세상을 제도할 수 있겠어요? 한국 사회를 정말로 정신적으로 이끌 수 있겠어요? 한국 승가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통렬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봐, 지금. 그래야 그래도 내일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묵묵히 정진하고 계시는 걸 알고, 그분들 때문에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낙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스님께서 한국 불교를 너무 부정적으로, 절망적으로 보시는 거 아닙니까?

과연 한국 불교가, 한국 승가가 한국의 국민정신을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했을 때 승려 개개인을 보자 이거라. 그대 자신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하라 이거야. 과연 내가, 과연 한국 사회의, 우리 국민정신을 이끌고 지도할 수 있는 소양과 능력이 있는가 했을 때 나 자신이 부끄러운 거라. 나 자신의 일생도 제대로 못 이끌어 절절 매.
조그마한 물질적인 가치관에 흔들리고, 조그만 음식 맛있는 거, 조그만 이익 더 되는 거, 조그만 명예 더 되는 거, 조금 이름 더 나는 거, 그거 연연해버리지 못하는 이 지저분한 마음, 이걸로 어떻게 내가 이 사회를 이끌 수 있겠느냐 하는 통절한 회한의 참회를 할 수 있는 한국 불교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이건 조금도 내 입바른 소리가 아니야. 틀림없는 말이야.
그래야 우리가 신뢰가 일어나지. 선근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야. 모든 중생은 그대로 선근종자가 다 갖추어져 있어. 과거의 업에 의해서 금생에 수행을 못하는 게 아니야. 살아 있는 모든 초목은 같이 다 하늘에서 비가 오면 비에 반응해서 맞고 다 푸름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얻어. 모두 다 평등한 힘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거야. 우리가 다만 비를 만나지 못해서 배틀어지고 시들어져 있는 상태야. 평등한 씨를 만들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생각해. 우리 승려들이 개혁이나 구호나 간판을 내걸지 않고 정말로 흔적 없이 상을 내지 않고 진실하게 항상 해도 한 바 없이 공경하고 양보하고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받들어 보다 중요한 직에 앉히고 말야. 해서 우리 승려가 다 한 문중이 돼야 할 거 아니야? 어디 가서든지 중이 있는 곳은 거기서 머물 수 있고, 중이 있는 곳은 자기가 쉴 수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중은 길에서 죽어야 돼”


내 문중 아닌 곳, 내 도반이 없는 곳은 가기 힘들고…. 그러니까 천하에 절이 있어도 천하에 설 곳이 없는 거야. 노후대책이 무슨 필요 있어 중이. 죽는 날까지 정진하다 쓰러져 죽어야지. 왜 중이 침대 위에서, 자기 안방에서 죽어야 그게 잘 죽는 거야? 중은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야, 길 가다 횡사를 해야 그게 잘 죽는 거야! 속된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개혁한다고 말야. 그러니 다 헛된 구호놀음이지. 구호 팔아먹고 사는 거야. 그러니 우리가 박복한 거지. 박복한 건 말할 수가 없어. “복을 지어야 된다”, 이건 말이 안 돼. 서로 진실하지 못하고 참되지 못함으로써 우리가 박복한 거야. 우리의 복은 오직 진실이고, 참된 것이고, 버리는 게 복이야. 그럼으로써 천하가 내 집안이야. 그러면 노후대책은 저절로 되는 거야.
  젊을 때는 한 십 년 동안 딱 틀어박혀 있어야 하고, 그래서 나간다 하더라도 어른 밑에서 진정한 봉사와 이름 없는, 대가 없는 그런 봉사, 그런 현실 참여, 그런 보살행을 해야 돼. 그래야 자기들도 나이 들면 주지라는 명칭으로 또 그렇게 되는 거야. 문중도 상좌도 필요가 없어. 인격만 훌륭하면 어디서든 다 설자리가 있고, 우리가 그런 걸 못하게 된 것이 뭣 때문이겠어? 전생에 복을 덜 지어서 그래?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가 마음을 그렇게 쓰면 즉시 그렇게 될 수 있고, 우리가 마음이 어둡고 마음이 삿되지면 즉시 박복의 구렁텅이로 전락하고 마는 거야.



편리한 길보다 어려운 길을 택하라


스님의 그런 고민을 종단에 제시해본 일이 있으십니까? 대안이 있다는 건 곧 실행을 검토해볼 의미가 있다는 것 아닌가요?

종정 스님이나 어른이, 총무원장이나 실무자들이 각자 선 자리에서, 나는 여기서 그렇게 하면 되지. 그게 아니고는 나는 길이 없다고 봐. 나는 그렇게 봐.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떤 희망이 보입니까? 아니면 한국 불교 역사에서 그런 희망의 증거를 찾을 수는 없을까요?

지금은 어두워. 한국 불교가 힘이 어디서 나오나? 우리 힘이 어디서 나오나. 힘, 힘은 숫자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집안이 큰 데서 나오는 것도 아니야. 내 한 개인이 정신이 바로 서 있으면 나를 감히 누가 무너뜨릴 수 있어? 자기 전 생애를 걸려도 내가 무너지기 어렵고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무너뜨리기 어려워. 그러니까 집단이 큰 게 힘이 아니야. 일치가 힘이야. 그리고 만일 힘이 없거든, 우리가 만일 힘이 약하다고 생각되거든 일치가 결여돼 있다고 생각해야 돼. 제도가 어떻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그건 영원한 진리야.
우리 불교가 그런 일치의 작업에 소홀해왔어. 도둑도 자기가 도둑질 한다는 걸 알고 있거든. 우리 불교도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묵인하는 것이 오래가면 서로가 불신하지. 처음에는 그게 편리할지 몰라. 그러니까 편리한 것을 찾지 말라 이거야. 편리한 것이 나중에는 불편한 걸로 돌아오거든. 그러니까 처음부터 조금 어렵더라도 어려운 길을 밟아라 이거야. 우리가 이왕 부처님 제자로서 참 생각이 있다면 우리 불교의 진실을 찾아야 돼. 그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상이 부처님의 진실로부터 멀어진 것을 방편이라는 미명하에 적당히 호도하면서, 비불법적인 것도 불법인 것처럼 하면서 사상을 혼탁하게 하기 때문에 현실이 혼탁해지는 거지.
우리는 쉽게 말하면 어떤 종교보다도 진리 운영이 열등해. 먼저 우리 진리에 상응하는 운영의 자세와 진리관을 갖추는 것이 중요해. 그래서 우리 말이 일치가 되어야 돼. 그것을 우리가 소흘히 하고 있어. 그건 왜냐. 우리 출가가 잘못된 게 있겠지. 그건 우리 출가자들의 출가라는 출발 때부터 기존 승단 전부에 책임이 있다고 봐야 돼. 말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고 봐. 그러니까 우리 큰스님들부터 부끄럽다 이거야, 내가 보기엔 우리 개기언구는 치우자 이거야. 알지도 못하는 거. 우리가 중생으로서 이성과 지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이 불법의 진실을 우리가 정리를 한번 해보자 이거야. 그래서 그대로 살아야 돼.
우리 불교에는 큰 어른들부터 진정으로 불교가 뭔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쉬운 데서 불교를 정리를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일상 지도를 하는 것도 지저분하지 않게, 미신적이지 않게, 이거 하나라도 고치자 이거라. 그 일치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정립이 안 되면 우리에게 진실과 신뢰와 사랑이 승가 내에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는 기라.
어느 절에서는 정초기도를 한다고 법당 안에 플래카드를 턱 걸어놨는데 ‘정초 삼재 기도법회’라 그래 놓고, 괄호해놓고는 삼재, 용띠, 소띠, 말띠 해놓고, 그렇게 현수막을 걸어놓고… 여기저기서 그렇게 운영을 한다면…, 그래서 우리 종단이나 불교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개혁을 부르짖으면 개혁이 될까요?
나는 안 된다고 봐. 그러니까 그건 위선 아니야? 단꿀에 취하지 말라 이거야.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살 길이 있다 이거야. 길은 개척을 하면 여러 가지가 있어. 그런데 당장 단꿀에 취하고 젖어가지고, 승려들이 정신이 다 죽었어. 승려의, 수행자의 적이 뭐냐? 물질주의, 여기에 물드는 것이 수행자의 최고의 적이고 독소야. 타 종교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니까. 우리 스스로가 무기력해졌어. 돈과 이익과 명예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어.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성에 대한 확신, 우주적인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고서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보여지는데요. 지난 종단 개혁도 그런 신뢰 회복의 절심함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 우리가 행복의 기준을 새롭게 찾아야 돼. 남에게 신뢰받는 거, 그런데서 행복을 찾는 자세를 기른다든지, 마음이 허해가지고 자꾸 다른 것을 찾는 거야. 물질을 소유하려는 상당한 부분은 우리가 그게 필요해서 찾고 소유하려는 게 아니라 허기를 메우려는 맹목적으로 소유하려는 경향이 있어.
출가할 때 그런 목적을 가지고 출가한 사람도 승가에 들어와서 타락을 하지, 물들어서. 일반 사회 사람들보다도 못해. 깨달음에 대한 목적이 희석되어 버렸어. 지금은 속화가 합리화돼버렸어. 그걸 알아야 돼. 그런 걸 주장하니까 나를 불구대천지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어.
지금은 합리화, 정당화돼버렸어. 이제 불교는 먹고사는 집단, 사업 집단이지. 그래 한국 승가에서 국민정신을 읽을 수 있는 정신은 상당한 기간 동안 요원해. 그건 틀림없어. 불교의 사업은 발전할지 모르지만 한국 불교, 한국 승가에서 국민정신을 이끄는 이런 정신이 나오기는 요원해. 오히려 의현 스님 시절에는 그럼에도 진실에 대한 갈망이나 있었지. 지금 그런 것도 없어. 모든 것이 정당화돼버렸어. 그래서 내가 개혁하는 사람들을 원망한다면 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 그 사람들이 개혁에 대한 마지막 관념을 완전히 망가뜨렸어. 의현 스님 당시만 해도 설득력이 있었어. 그래 나는 지난번 개혁은 권력과 재정의 재배치라 봐. 그거에 지나지 않아.
승가대학에서 잘못된 거라.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 정신상태부터가 그런 점이 있고, 젊은 사람들이 판을 쳤잖아. 그러니까 승가대학 사람들이 논공행상 차원에서 꼼짝 못하는 거야. 그때 그 사람에게는 발언권이 없어야 하는 거야. 어른들이 하는데 그것을 지지해 행동대원은 될지언정. 그러니까 그게 잘못된 거야. 당시 개혁할 때 주도세력 몇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들이 나한테 무릎 꿇는 게 아니야. 큰 그 원망(怨望), 그 앞에 무릎 꿇고 ‘스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는 그 모습이 진실한 모습으로 와 닿아야 된단 말야.



엄동설한의 얼음은 진실이 뭉치면 녹는 법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 종단을 잘할 수 있다고 봐. 그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신도들은 신심이 막 날 것 아닙니까? 신심이 재산이지. 꼭 기도를 많이 해야 종단이 부유해집니까? 나는 진실이 복이라고 봐. 사람이 진실과 벗어날수록 박복하다고 봐. 그런 진정한 어른들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어. 나는 어른을 많이, 아니 거의 다 모셔봤어. 그러나 그러한 입지에서 사상과 정신을 정제하고 하는 어른을 나는 보지 못했어. 너무나 통념적인 복사상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을 나는 못 봤다 이거라. 큰스님들 다 그랬어. 그러니까 한국 불교는 잘못 걸어온 기라. 무속화됐어. 투쟁이 뭐야. 우리의 그릇된 사상과 사고방식, 이것을 어떻게 하면 극복하고 전환시킬 수 있느냐, 그것만이 본질적이고 유일한 투쟁이야. 그런 면에서 그런 스님을 나는 보지 못했어.
지금 우리의 과거에서 그런 좋은 빛이 있다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지. 바로 나에게도 힘이 될 수 있어. 나 홀로는 안 돼. 현실에 그런 분이 없다면 역사에라도 의지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 불교는 너무 존재론적인 방면에 치우쳐왔어, 압도적으로. 그래서 윤리적이고 가치적인 부분을 챙기는데 소홀해왔어. 그 부분을 꼭 이분법적으로 흑백논리적으로 극복하라는 게 아니야. 불교적인 원대하고 큰 품으로서 그것을 녹이는 방법으로 극복해야 돼. 그걸 놓쳤기 때문에 오늘날 회복하기 어려워 이런 상황에 처했어.



“계율을 지키다 죽는 역사를 남겨야 돼…
지식인 재가불자들에 실망이 커”


나는 술 안 먹고 고기 안 먹는 게 계율이라고 보지 않고 진실한 양심 이 부분을 키워오고 쌓아가는 걸 계율이라고 봐. 우리 계율은 잘못돼왔어. 방편이라는 것이 모든 가치를 망가뜨려왔어. 방편설을 새롭게 개념 정립을 해야 돼. 방편설은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화엄도리, 말로 설할 수 없는 그 세계에 대한 그 설법을 할 때만 방편이라는 말이 가능해. 일상생활에서 방편이라는 말이 붙으면 안 돼.
그래서 부처님만이 방편을 쓸 수 있다고 해석을 해도 되는 거야. 우리가 감히 방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기만이라. 분명히 자기 유리하게 행동하면서 방편이라 한단 말야. 그러니 양심이 여기서 다 죽어버리는 거야. 그러니 계율의 계단 설법할 때부터 잘못된 거야. 큰 계율을 위해서는 작은 계율이 희생될 수 있다 하거든. 분명히 그런 설법이 있거든.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런 계율이 있거든. 그런 것을 가볍게 너무 안이하게 써왔다 이거라.
노루가 암자에 왔어. 스님이, 수행자가 있는데 포수가 지나가다가 “스님, 노루 못 봤소? 노루 어디로 갔소?” 하니까, 동쪽으로 갔는데 서쪽으로 갔다 그랬단 말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작은 계율을 어길 수 있다 그러거든. 거기서부터 잘못됐어.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거기서 남겨야 돼 역사적으로.
말 못하겠다 그래야지 최소한도. 그렇지 않으면, 왜 묻느냐 그래야지, 그런 큰 수행자라면. 그래 죽어야 되는 기라. 우리는 죽으면 사는 도리가 있지 않냐 말야. 그것이 진정한 삶이 아닙니까? 우리는 육체적인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이런 작은 계율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단 말야. 양심을 죽이는 것은 큰 죽임이 아니냐 말야. 그러니까 작은 수행자라면 나 말 못하겠다 그래야지. 큰 수행자라면 거기서 그놈의 살생심을 항복받아야 돼. 이놈아 왜 물어. 이렇게 나와야지. 그래 바로 그 사람의 살생심을 바로 항복받아버리는 모습을 보이든지, 그래서 거짓말을 안 해야지. 그러다가 영 업이 두터운 완고한 놈을 만나 그 스님에게 총을 쏴 죽였다면 그런 역사를 남겨야 되는 거야,



불교의 자유란 부르짖음이 아닌 ‘절정’


오늘날 한국 불교의 사상 체계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현실 세계에서의 불교적 사상 정립이 탄탄했을 때 실천적 생명력이 발현되고 또 현실에 맞게 재창출된다고 봅니다. 진정한 역사의식도 그런 데서 오는 것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한국 불교는 가치의 좌표가 아주 어두운, 회복하기 어려운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고 나는 보는 거지. 나는 소위 지성인급 불자들에게 실망해. 승려는 이미 그렇다 치고, 지성인급 불자라면 그런 측면에, 좀 전에 말한 노루에 관한 문제라든지, 그런 것에 문제 제기도 하고 해야 된다 이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어.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고.
  사상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한 그런 신뢰를 할 줄 아느냐 했을 때 우리 불교는 타 집단에 대해 너무 부정적이야. 사상이라는 것이 정말로 힘이 있는 것이라는, 거기에 대한 소양이 없는 거야. 거기서 배우지 못한 거야. 신도들도 그렇게 돼버렸어. 우리의 갈 길을 챙기고 우리 사상, 우리 정신을 어떻게 연마하고 세련되게 해 현실 속에 정말로, 불교라는 근원적인 주체라는 이 하나의 명제가 언어로써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이 근원적인 이 명제가 어떻게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원리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이 불교의 명제라.
그것을 갈고 닦아야 해. 그렇게 하려면 승려들이 정말로 정진을 뼈저리게 해야 하고 깊은 사색을 해야 돼. 산중에서 토굴에서 정진을 뼈저리게 하고 뼈저리게 하면서도 그 문제의식을 잃지 않아야 돼. 도피라는 게 뭐냐 이거야. 도회지서 산중으로 옮기는 게 도피가 아니야. 산중에서 도회지로 가서 사는 게 참여가 아니라니까. 문제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게 도피고,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 게 도피야. 문제를 직시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본질적인 참여자야. 그런 기본적인 바탕이 있다면 우리가 토굴에서  부지런히 정진을 잘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이 문제, 어떻게 근원적인 주체를 현실 속에서 접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2의 화두로 삼아야 해.
그러면서 해제 때라든지, 일상생활에서 신문을 보더라도 그 사색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사람이어야지. 그런 자세로 노력하면서 불교의 이 근원적인 주체 이것을 현실 생활의 좌표이자 원리로서 우리의 걸어갈 사상의 의지처로서 하려면 부지런히 갈고 닦아 정련화해야 돼. 사상을 정제, 제련해야 되는 거야. 그래서 신도들에게 삶의 원리를 제시해줘야 돼. 나아가선 기도 안 하고서 살 수 있는 길을, 능히 살 수 있는 길을 중학교 정도 졸업한 사람이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써 살길을 열어줘야 된다 이거야. 그래서 이 주체들을 강건하게, 인간을 참으로 서양적인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불교적인 진정한 자유로 인도해야 하는 거지. 자유란 절정이라. 불교의 자유는 부르짖고 저항하는 게 아니라 절정이야.
그런 삶의 자세 방법 肩?것을 우리가 끊임없이 여러 가지 정련화된 경구들을 개발해내 신도들에게 가르쳐주고 제공하고 암송시켜 하나하나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고, 그럴 때만이 한국 불교가 해볼 만한 불교가 된다고 생각해. 다른 것은 해볼 가치가 없어. 정치운동은 사회 사람에게 맡기면 돼. 불자들이 하든지. 불교인으로서 국민으로서의 불교인이 해야 되지.
승가인이 그렇게, 불교인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 거야. 불교인으로서의 국민이 할 일이지. 그거는 국민이 할 일이야. 그런 의미에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돼야 돼. 그러나 그 가치관은 그대로 현실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거 아냐? 우리가 그런 정진을 해야 돼. 그래야 우리가 불교 하는 보람이 있어. 수 틀리면 기도나 하고, 입시기도, 돈벌이 기도나 하고 말야. 정말로 불교적인 근원적인 주체라는 가치를 현실 속에 심으려는 그런 사람만이 기독교를 비판할 자격이 있어.
지금 우리나라 조계종의 관세음보살님은 다 기독교의 하나님이야. 다 기독교인이야. 기독교를 비판할 자격이 있어? 정말 기독교를 들먹거릴 자격이 있으려면 내가 지금 말하는 그것을 근본 목표로, 실현해야 될 목표로 삼는 노력이 있어야 돼. 그런 사람은 기독교 비판할 자격이 있어. 그러나 그런 사람은 비판을 자주하지 않아. 중요할 때 한마디 하면 그 힘이 크고 그것은 적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는 그런 사상의 힘이 될 수 있어. 햇빛이 다 비치면 어둠은 싹 물러가잖아.



“내가 마조나 황벽 정도 된다면”


거기엔 모든 작은 사상들이 힘을 잃게 돼. 때문에 소수자가 무서운 것이지. 숫자가 무서운 게 아니야. 어른들이 이런 것을 가르쳐야지, 틈나는 대로. 결제 중에라도 해제 중에라도 차(茶)를 마시다가도 학생들이나 스님들이 공부하러 오면, 틈나면 그런 말이 나와야 하는 거야. 기독교인들 자나 깨나 하느님 아니야. 우리가 자나 깨나 부르짖고 싶은 게 뭐야. 근원적인 주체야. 보다 구체적인 사상을 끊임없이 부르짖고, 거기에서 배치되는 것은 즉각 반발이 일어나야 돼. 그 전혀 반대되는 것을….
그런 불교를 믿으려면 나는 기독교를 믿었어. 나는 그런 불교를 보고 오지 않았어. 정말로 주체, 부처님이 너 자신을 의지하라, 너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그 말에 가슴에 충격을 받고 학생시절을 살았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해외 유학 가는 것도 다 포기하였지. 나는 출가를 한 게 아니라 산에 유학을 왔어. 와 보니까 이건 형편없어. 그렇다고 내가 갈 수는 없고, 그러니까 신경질을 극복하고…. 나는 솔직히 도반도 없어. 같이 어쩌다 곡차를 한잔 하곤 하지만 나는 그분들에게 마음 깊은 도반이라는 느낌이 없어.
내가 마조나 황벽 정도 된다면 부르짖을 수 있어. 그러고 이 세상에 그런 걸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자면 나는 마조나 황벽 정도의 수행을 해야 돼. 우리가, 은둔하기 위해, 신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는 거 아니야. 한국 불교에는 이성적인 부분이 아주 약하고 신비주의적인 부분이 많아. 솔직히 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해봤자 내 개인의 긍지만 손상되고, 두 번째는 괜히 내 집안 신도들만 방황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기 싫어. 다행히 내가 복이 있고, 조금이라도 복이 있을 수 있다면 내가 좀 더 공부가 돼 마조 정도가 된다면, 경허 정도만 돼도 나는 법을 그렇게 사용하지는 않을 거야. 좋은 재물이 많이 있는데 지혜롭게 사용하면 좋은 거 아니야? 내가 경허 스님 정도 되면 경허 스님처럼은 쓰지 않아…. 하고 보니 쓸데없는 소리를 했지만 내가 조그만 힘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1997년 4월 3일

 

http://buddhistculture.co.kr/Vol/New_view.htm?topic=C&origin_id=30&num=1210

 

728x90